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기: 지극히 주관적인 노동법

‘꼼꼼한 사람이 따로 있지. 계획 엄청 촘촘히 세우고 그대로 안되면 짜증내고 그런 사람.”

언젠가 이 말을 듣고 돌아오면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방만한 문돌이’로서 나를 아는 사람은 믿기 힘들겠지만 대학원 과정 중 e-Learning 관련 프로젝트에서 3년, IT 현업에서 7년을 일했다. 구체적으로는 콘텐츠 개발자, 테크니컬 라이터, e-Learning 전략기획 등의 업무였다. 공부를 하러 떠나기 직전 4년 정도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업으로 삼았다.

매니저가 업일 때 능력에 맞지 않게 꽤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 경영진, 영업 및 마케팅 부서, 콘텐츠 개발부서, 기획, 디자인, 개발, 운영부서까지 100여 명이 되는 사람들과 몇 년을 함께 보냈다. 하루에 미팅 서너 개는 기본이었고 많을 때는 일곱, 여덟 개까지 소화하곤 했었다. (이놈의 회의주의란.)

당시 나의 일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점검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시간과 돈, 인력을 ‘관리’하면서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말이 ‘프로젝트 매니저’이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갈등을 조정하는 게 업무의 중심이었다. 관련 서적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돌아보면 프로젝트 코디네이션을 관통하는 업무는 관계 및 감정관리였다. 짧은 프로젝트 매니저 경력에서 얻은 교훈은 ‘인지적인 움직임 밑에는 정서적, 사회적 관계가 있으며, 그것이 소위 ‘관리’의 핵심이라는 것, 관리자의 핵심역량은 개개인의 감정과 동기를 팀과 조직의 목표와 매끄럽게 정렬(align)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계획을 거의 세우지 않는다. 학사일정이야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1분기에는 뭘 할까’, ‘금년에는 뭘 할까’ 같은 계획은 없다. 꼭 이뤄야 할 과업 자체가 없다. 백 명이 넘는 인력의 하루하루를 체크하던 인간이 자기 시간 하나 잘 관리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래도 괜찮다는 걸 깨달은 지 좀 되었기 때문이다.

계획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니 대충 이런 시나리오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우선 자료를 찾아보고, 이리저리 읽고, 끄적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감잡는 단계를 거쳐 흔히 말하는 ‘잡문’, 혹은 ‘쪽글’을 쌓는다. 관심이 가는 주제면 이게 계속 축적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몇 개의 쪽글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글은 생각의 덩어리가 된다. 먼지도 서로를 당겨 뭉텅이가 되듯, 아이디어가 모여 계획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가닥을 잡기 시작하면 친한 사람들에게 ‘뭔가 할 생각이 생겼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이디어의 실행가능성이 조금씩 드러난다. 보완하거나 덜어내야 할 점도 보이기 시작한다. 대화를 통해 막연한 생각이 구체적인 실행 아이디어가 되는 것이다. 이후 숙성의 단계에서 좀더 해상도 높은 쪽글을 써낸다. 단상은 강의노트나 초고가 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나도 모른다.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기약도 없고, 계약도 없다. ‘납기’가 없는 글은 이런저런 삶의 풍파에 한정없이 미뤄진다. 하지만 관심이 지속되는 한 계속 읽고 써내게 되니 오랜 생각은 덩치가 커지고 부족하지만 공유할만한 모양이 된다. 여기까지 진행되면 책이나 논문의 원고로 변신할만한 꺼리가 확보된다.

그래서 결론은 “꼼꼼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거다. 살아가는 데 필요하면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세월아네월아 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은 없지만,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은 대부분 갖고 있다. 앞으로도 상황이 바뀌어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긴 계획 없이 살아간다. 시간에 맞추어 행동을 조직하기 보다는 생각의 흐름에 삶을 맞춘다. 그래도 괜찮고, 그래서 재밌다.

덧.

느지막이 낮잠에서 깬 오후. 이불속은 집안의 블랙홀인가. 일어나려 발버둥쳐 봐도 도저히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 아, 왜 이렇게 점점 게을러지지?
짝: 무슨.
나: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격려’를 감지한다.)
짝: 원래부터 게을렀잖아.
나: … … … (털썩)

원래부터 게으른 삶.
앞으로도 이 스타일 쭉 유지해야겠다.

#짝과나 #무계획의삶 #쭉게으르게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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