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말의 역설

Posted by on Mar 29,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사실 난 ‘글쓰기 선생’치고 꾸밈말을 자주 쓴다. 쪽글을 쓸 때면 ‘엄청난’ 같은 비격식체 강의어(intensifier)도 종종 동원한다. 하지만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꾸밈말을 조심하라는 데는 언어적, 개념적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위대한 사랑”과 “사랑” 중 ‘사랑’을 강하게 만드는 표현은 무엇인가? 언뜻 보면 “위대한 사랑” 쪽이다. “위대한”과 “사랑”이 결합하여 더욱 강건한 사랑의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냥 사랑’보다는 ‘위대한 사랑’이 더욱 강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그저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이 세계의 모든 사랑이 이 단어 안에 쏙 하고 들어온다. 위대한 사랑, 못난 사랑, 철없는 사랑, 때늦은 사랑, 일방적 사랑, 지극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등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의 개념 안에 포섭된다.

하지만 “위대한 사랑”은 오로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사랑만을 담는다. “위대한”이라는 말이 사랑의 힘을 강하게 한다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이 쪼그라든다. ‘위대한 사랑’이 되는 순간 ‘사랑’이 담았던 우주의 모든 사랑들은 ‘축출된다’. 개념적인 범위가 심히 축소되는 것이다.

이 점을 저자와 독자의 관계에서 풀어보자. 저자의 꾸밈말 사용은 표현하려는 의미를 세밀하게 만들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이 해석하고 개입할 범위를 좁히는 효과 또한 갖는다. 때로 저자에게 ‘정확한’ 묘사가 독자에게는 ‘갑갑한’ 설명이 될 수 있고, 저자의 ‘엄밀성’이 독자에게는 ‘숨막힘’이 될 수 있다. 해석의 창을 하나 열면 다른 모든 창문이 닫힌다. 이제 해당 꾸밈말의 창을 통해서만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나는 형용사와 부사 같은 꾸밈말을 무조건 배격하는 글쓰기 교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건 수사적 선언이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수식어의 엄연한 존재는 자신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꾸밈말이 저자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해하고 신중하게 동원할 필요가 있다. 수식어를 안쓰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 쓰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덧.
사랑이 오염된 시대, ‘진정한 사랑’이 사랑을 대신한다. 용서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참된 용서’가 자주 소환된다. 그저 ‘사랑과 용서’면 충분한 세계라면 사랑이 진정하지 않을 리 없고, 거짓된 용서가 존재할 리 없다. 언어를 꾸미려는 충동은 오염된 세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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