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3: 사회언어학 공부의 목표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은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연구합니다. 촘스키의 접근이 인간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능력으로서의 언어능력을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면 사회언어학은 사회와 언어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인간이 생물-문화적 존재(biocultural being)임을 생각한다면 언어연구의 축이 이렇게 분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사회언어학은 1960년대 말 뉴욕의 사회계층과 언어특징에 대한 Labov의 기념비적인 연구 이후로 출신지역, 인종, 계급, 교육수준, 성별 등이 개인 및 집단의 언어사용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죠. Labovian sociolinguistics와는 다르게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의사소통을 강조하고 인류학적 방법론을 취한 접근이 생겨났습니다. 대표적으로 70년대를 거치면서 Dell Hymes의 영향을 받은 ‘의사소통의 민족지학(Ethnography of communication)’이 정립되었고, 이는 언어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의사소통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 개념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90년대 이후에는 점차 인종, 성별과 같은 전통적 사회학적 변수가 언어사용에 미치는 영향이나 언어의 특징이 사회적 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를 보여주는 정도를 통계적/변량적으로 보는 연구보다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개개인의 아이덴티티, 포지셔닝, 권력관계 등이 언어사용과 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밝히려는 연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응용언어학과 가까운 사회언어학 연구에서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죠. 이와 함께 모든 언어행위에 수반되는 권력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는 비판적 사회언어학(critical sociolinguistics), 비판적 담화분석(critical discourse analysis), 비판적 담화연구(critical discourse studies) 등의 흐름도 사회언어학의 주요 분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번 학기 전반부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언어교육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사회와 언어의 관계를 공부해서 뭘 하려는 걸까요? 저는 사회언어학을 공부에 두 가지 상반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언어를 통해 사회를 파악하고, 언어와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누군가가 특정한 발음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index)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겠죠. 버니 샌더스가 자신의 이름에서 /r/ 발음을 탈락시킬 때 그것이 그의 연령과 출신지역(뉴욕)을 지시함을 알아채는 것, 그가 사용하는 억양이 유태인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글을 통해 그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하고 구획짓는 데 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상반되는, 어떤 면에서는 더욱 근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종, 계급, 출신지역, 성별을 다 벗어버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여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출신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원어민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어 혹은 방언 구사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그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한 인간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기술적 힘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매 순간 우리를 누르고 있는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 편견없이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고 싶으니까요. 첫 번째가 분석하고 읽어내는 작업이었다면 두 번째는 차별하지 않고 연결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네 압니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수많은 시간 체화한 언어적이고 사회적인 관습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서울 사람이 아닌 척, 남성이 아닌 척, 선생이 아닌 척하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자칫 조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요. 저를 둘러싼 수많은 권력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요. 아무 편견 없이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하지만 누구와 만나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한 의사소통(appropriate/relevant communication)을 하려는 노력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특징을 차별의 포인트로 삼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성과 이야기할 때는 여성의 스타일에, 노인과 이야기할 때는 노인의 언어패턴에, 특정 지방 출신의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의 언어적 특성에 맞추어 대화를 나누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춰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지요. 우리가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벗어던질 순 없겠지만 서로의 세계에 조응하며 대화를 지어가는 협력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늘 불가능한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와 지역과 성별과 교육수준과 정치적 성향으로 짜여지는 권력관계를 하늘 아래 평등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회복시키고 싶은 꿈이야 말로 터무니없이 우둔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꿈을 꿀 때에 우리의 말글이, 몸짓이, 눈빛이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실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발음 좋은 학생’에게 칭찬을 합니다. “와 너 발음 좋다. 이거 한번 읽어볼래?” 이렇게 말입니다. 물론 사회적 기준에서 해당 학생의 발음은 좋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좋은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 다른 학생들은 ‘나쁜 발음’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어떤 발음이 사회적으로 권위(prestige)를 갖는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사회언어학의 첫 번째 목표에 해당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의 힘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에 대응합니다. 교실에는 ‘좋은 발음’과 ‘덜 좋은 발음’을 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야기합니다. 자기만의 삶을 궤적을 지닌 유일한 인격체로 말합니다. 그 주체들 사이에 위아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편견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늘 기억하고 자문합니다. ‘내가 더 높게 평가하고 있는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들의 사회문화적, 계급적, 역사적 연원을 안다면 이들을 차등적으로 대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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