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강의 단상

실시간 대면수업보다 녹화영상을 선호하는 학생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여겨졌으리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교수와의 직접 대면, 다른 수강생들과의 소통을 피하면서 수강할 수 있다는 점이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어필했다는 뜻이다. 가끔 자문한다. “나의 수업은 마이크로 판옵티콘인가?”

강의를 맡고 계신 한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런 경향은 점차 심화될 것 같다. ‘번잡한’ 소통없이 ‘편안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부담을 덜어준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오는 것을 넘어, ‘수업참여’보다는 ‘콘텐츠 소비’를 지향하는 일을 마냥 반길 수는 없지만 이해가 간다. (그 틈을 타서 엉망진창으로 수업을 방치하는 교수는 응당의 책임을 져야 한다.)

오랜 시간 우리사회는 사회적 접촉에서 일어나는 마찰에 대해 ‘참고 견디라’고 말해왔다. 아빠가 말하면 들어라, 선배가 말하는데 어딜 꼴아보냐, 사장님 화난 거 안보이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한 놈 졸았으니 반 전체 열 대씩 맞아라, 목사님 말 안들으면 사탄의 꾀에 빠지는 거다, 팀장 말에는 무조건 예스로 답해라, 군대에선 까라면 까는 거다… 그리고 우리는 목구멍에 처참한 기스를 내면서 그 모든 껄끄러움을 삼켜왔다.

여전히 구조는 여기저기서 굴욕을 강요한다. 어쩌면 바로 그 점때문에 사람들이 ‘접촉없는’ 사회를 선호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업이 꼭 고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게 영혼의 평안에 도움이 된다. 대학생들은 팀프로젝트에서 꼰대, 미꾸라지, 무임승차자를 만난 경험을 최악의 경험으로 꼽는다. 상호신뢰가 턱없이 부족한 사회에서 혼자 공부하고 혼자 노는 게 최고다. 접촉이 없으면 마찰도 없다. 평소 감당해야 하는 마찰만도 벅차단 말이다.

‘접촉없는’ 학습이 당연시될 때 함께 모이는 일은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학교가 막연히 ‘사회성을 키운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온라인 소통이 아니라 온라인 콘텐츠로서의 교육이 이전과 같은 교육이 수 있을까?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정서적, 사회적 발달이 필수적인 낮은 연령의 학생들은 모르겠지만 대학교육이 그래선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주체할 수 없는 반가움을 표시하는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뭉클하다.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가 생활화되고 한 학기를 통째로 온라인에서 보내게 된 요즘, 그런 순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2D 캐릭터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로직에 의해 화면에 배치된다. 모두 같은 스피커를 통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나는 종종 누가 말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비디오와 오디오 콘트롤로 ‘존재한다는 정보’ 외에는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다. 바이러스는 시공간을 바꾸고, 지각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고, 습속을 바꾼다. 결국 각자의 몸이, ‘우리’의 존재 양태가, 사회의 작동방식이 변해간다. 대책없는 노스탤지어로 그 모든 걸 부정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변화를 직시하려는 노력은 분명 가치가 있다.우리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어떤 ‘우리’로 존재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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