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소환되는 촛불에 대한 단상

Posted by on Apr 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6-17년의 촛불이 ‘단일한 대오’였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우매하고 위험한 게 있을까?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지만 그들의 요구는 이미/언제나 퇴진 이후를 향하고 있었다. 수많은 스펙트럼의 정치사회적 목소리가 잠시 모아졌다고 해서 그들의 열망을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환원하거나 참여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호명하는 것은 철저한 기만과 오분석에 근거한 행위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모인 이유는 시민사회, 노동운동, 여성운동, 장애인운동, 청소년운동, 문화운동, 세월호 진실규명 투쟁 등이 더 나은 사회로 가려는 길을 박근혜 정권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들이 갖고 있는 전망의 차이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양성의 분출을 막고 있던 힘이 제거되었다면 다양한 세력의 요구를 받아 안을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해야 했고, 그것은 이전의 억압적 조치의 원상복구(e.g. 전교조 법외노조화 취소)나 차별없는 세상으로의 전진(e.g.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모습을 취했어야 했다.

이 점을 뼈아프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총선의 결과에 관계없이 촛불의 의미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촛불은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이 거대한 어둠을 걷어내야만 우리 각자가 가진 빛을 밝힐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지금 촛불을 소환하려 한다면 광화문과 전국의 도시를 가득 채운 촛불의 거대한 물결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들렸던 촛불을, 그 촛불에 밝혀졌던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촛불은 하나인 적이 없고, 하나여서도 안된다. 국정교과서를 발행하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동원해서 우리를 하나로 만들려 했던 자들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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