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몰랐던 세계를 알고 싶다면

(이 말이 딱히 마음에 들진 않지만) 소위 ‘사회적 약자’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자신들이 힘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강자’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약자를 ‘위한’ 정치도 중요하지만 약자’의’ 정치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소수자를 위한’ 정치도 좋지만 ‘소수자의’ 정치가 없다면 그저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결국 모두를 ‘위한’ 정치도 중요하지만 모두’의’ 정치가 우선입니다.

저의 속좁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우선순위를 한번도 바꾸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도덕적 우위에 선 듯이 ‘당신이 현실을 몰라서 그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너는 모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알고 누가 모르는 게 아니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를 비롯해 그런 논쟁을 벌이는 이들 대부분은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논쟁을 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이 사회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는 안다/모른다의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진짜 잘 알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방법론에 대한 고민 없이 네가 더 아느니 내가 더 아느니 백날 논쟁해 봐야 제대로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틀린 방법으로 온전한 세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잘 알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민주주의의 원리를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잘 사는 사회로 가까와지려면 모두의 생각이 평등하게 모여져야 한다는 관점 말입니다. 즉, 모두가 존엄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세상을 그리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게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골고루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때껏 강자들은 세상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자원을 독점하고, 연구인력을 독점하고, 사회의 지식 인프라를 독점하고, 무엇보다 정치와 자본을 독점해 왔습니다. 자본만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 기획이, 희망이, 실천이, 조직이 독점되어 온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비전을 제시하더라도 강함이 더욱 강하게 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는 이 세계가 좋아질 방법을 우리 모두가 알 방도가 없습니다. 힘을 쓸 수록 상상력은 고갈되고 배제는 강해지고 소외는 깊어집니다. 더불어 ‘안다는 환상’은 점점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소위 ‘약자’와 ‘소수자’의 삶과 지식, 경험과 관점입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어 이때껏 이 사회가 온전히 가져보지 못한 관점과 지혜, 제도를 획득해야 합니다. ‘나는 안다/너는 모른다’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르는 것이 있다’로 대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회가 복원되고 공동체가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서로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이 원칙을 지켜가면 좋겠습니다. ‘~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의 정치’가 꽃피우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한 번도 몰랐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세계를 짓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알고 싶습니다. 새로운 앎과 관점이, 이제껏 없었던 권력이 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말입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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