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

Posted by on Apr 1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코로나 19가 준비할 틈도 없이 미래교육을 앞당기고 있다”는 MBC 뉴스의 한 꼭지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교육이 ‘미래교육’이라고? 정말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구나 싶다. 교사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이 미래의 교육일 수는 없다.

2. 선거가 끝나고 ‘자유 민주주의’는 가고 ‘평등 민주주의’가 오기를, 하고 중얼거렸다. 단지 정치세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종종 아쉬우나 우리의 불평등은 내내 잔혹하다.

3. 학생들에게 절대 내 책을 읽히지 않는 이유

나: 대학 때 자기가 쓴 책 읽히는 교수님들 있었어?
짝: 어어 두어 명 있었던 거 같아.
나: 어떤 기분이 들었어?
짝: 장사꾼 같았어.
나: (깨달음)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수업에서 나의 책을 읽으란 말을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대학원 수업 시간 나의 책을 읽었다는 학생이 무려 둘이나!

말하지도 않았는데 읽는 것은 말리지 않는다. 그저 감사할 뿐. ^^

4. 바이러스와 인간, 공간과 시간, 개인과 사회, 신뢰와 공포, 내부와 외부, 국가와 국가, 정치와 의료, 디지털과 아날로그, 손과 얼굴,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처절하게 배운다. 최대한의 거리확보를 위해 각자의 방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시절, 모든 것이 거대한 하나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를 세상에 중심에 놓았던 어리석었던 날들을 돌아보길 빈다. 인간은 그저 변방의 한 노드(node)일 뿐이니까.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지만, 만물과의 전쟁에서는 대패하기를. 이제껏 그래왔듯 득의양양 오만한 승자처럼 나대는 행태는 사라지길 간절히 빈다.

5. ‘생각해 보면’이나 ‘돌아보면’ 같은 단어를 자주 써왔다. 어쩌면 스스로가 성찰의 시늉을 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일기를 쓰고, 쪽글을 쓰고, 수업에 대한 메모를 하고, 대화를 기록하고, 이들에 대해 곱씹고… 그것들을 ‘성찰’이라는 두루뭉술한 이름으로 묶어 온갖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기충족적인 성찰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는 나의 비판과 성찰은 글 밖에서 무엇이란 말인가.

6. 다음 영어교육과정 수업 주제가 비판적 교육학(critical pedagogy)이다. 간만에 프레이리를 다시 읽는다. 점점 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끌린다. ‘희망’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빛을 잃어가는 시대라서일까. 온몸으로 세상에 부딪치는 사랑과 희망이 된 이들에게 감사한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대화도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창조와 재창조의 행위는 사랑과 융합되지 않는다면 가능할 수 없다. 사랑은 대화의 주춧돌인 동시에 대화 자체이다. 따라서 사랑은 책임있는 주체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지배관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지배관계에서는 사랑의 병리적 현상이 나타난다. 지배자에게서는 사디즘, 피지배자에게서는 마조히즘이 엿보인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사랑의 행위가 그들의 대의, 즉 해방을 바라는 욕구에 더해져야 한다. 사랑이 깃든 이런 헌신은 대화라는 형태를 띤다. 사랑하려면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사랑은 감상적 사랑일 수 없다. 자유의 행위로써 사랑이 조작의 구실거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또 다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행위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조건이 더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억압적 상황을 없애야만 비로소 억압적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던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파울로 프레이리. – 피터 맥라렌 저. 강주헌 옮김. <체 게바라, 파울로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 (아침이슬, 2008) 266-267.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짝과나 #일상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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