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배지 언박싱’에 관하여

말이나 행위를 가져오는 것은 그저 ‘선택의 자유’일까

1. ‘언박싱’ 담론이 의례의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품의 영역, 자신의 구매를 보여주는 영역, 때로 누군가의 제품을 홍보하는 영역이다. 언박싱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상품,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라는 네트워크에서 작동한다. 언박싱 영상의 생산자와 시청자는 재화를 통해 매개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다.

2. ‘국회의원 금배지’가 점하는 담론의 영역이 있다. 기본적으로 배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지만, 자주 ‘국민을 내려다보는’ 태도를 함의한다. ‘금배지 좀 달았다고’와 같이 정치인에 대한 못마땅함을 표현할 때도 종종 사용된다. 그렇게 금배지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민주정치의 표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금배지는 공적영역의 담론 안에 위치하여 대표자로서의 정치인을 상징한다.

3.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들이 교섭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말은 섞이고 의례는 ‘선을 넘는다’. 교회 내에서 랩뮤직의 사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에서 ‘신박한 예배 형식’이 되었다. 도덕적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 합쳐져 ‘착한 가격’을 낳았고, 이는 또 다른 영역과 만나 ‘착한 임대인 정책’을 만들어 냈다.

4. 담론간의 선을 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모든 가로지르기를 긍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교육의 일주체인 학습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 여길 수 없으며, 비상시의 온라인수업을 ‘미래교육’이라 표현하는 것에 손뼉칠 이유도 없다. 담론이 섞이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지만, 그 가능성은 희망일 수도, 타락일 수도 있는 것이다.

5. 그런 면에서 정치의 영역에 있는 ‘금배지’를 ‘언박싱’하는 행위는 위태롭다. (물론 이걸 ‘재미있다’고 표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라면 공공의 영역을 상징하는 금배지를 개인과 상품 담론의 최전선에 있는 언박싱이라는 의례에 얹어놓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구시대의 끝자락에 머무는 일일 수 있지만 말이다.

담론을 섞는 일은 창조적인 행위일 수도 상식의 파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점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위치에서 어떤 가로지르기가 용납되고 요청되느냐를 판단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가로지르기의 예술’에 능통해야 한다. 거침없이 가로지르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덧. 이 글을 쓰고 나니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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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키워드는 ‘윤리’입니다. 보통 윤리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 윤리적 측면이 개입하죠. 얼마 전 온라인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작명이 있었어요. 바로 ‘버닝쑨대국밥집’과 ‘버닝선대인’인데, 국밥집과 프로그램 이름을 저렇게 지은 거예요. 여기에서 타인의 말을 자기 말이나 글로 가져올 때의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아마도 저 이름을 택한 사람들은 주목받는 말장난을 원했겠죠.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켜 한 번 더 쳐다보게 하는 효과를 노리면서요.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말만 달랑 떼어오려 했다는 점이에요. ‘버닝썬’이라는 말이 태어난 자리의 착취와 잔혹함, 분노와 고통은 아랑곳없이 말의 힘만을 가져오려 한 거죠.

저는 이런 행위가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말은 사전 위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 상태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관계 속에 뿌리박고 또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말 주위로 권력과 욕망, 아픔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말을 가져오고 이름을 정하는 데 필요한 윤리는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는 윤리이고, 말이 자라난 사회정치적 토양에 대한 살핌의 윤리이며, 무엇보다도 그 말로 엮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죠. 삶과 세계를, 거기 살고 있는 감정과 모순을 지워버리고 말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시키는 행위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이건 단순히 말실수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망각, 맥락에 대한 몰이해, 나아가 자기중심성으로의 한없는 함몰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에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러시아의 문학평론가이자 이론가인 바흐친이 간파했듯이 우리의 말은 원래 누군가의 말이었고 우리의 조어는 결코 완벽한 창조가 아니라는 점, 말이 우리 곁에 올 때 세계가, 사건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이 함께 따라온다는 사실이에요. 말을 쓰는 것은 늘 삶에 잇대는 행위이고,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습득은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성장과 떼어놓을 수 없어요.” (265-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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