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 성실하게 흔들리다

Posted by on Jun 16, 2020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가끔 눈 앞에 닥친 과제들이 제 능력에 비해 너무 벅차게 느껴질 때마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교수님께서 대학원 생활에 대해 언급해주셨던 내용을 떠올리면서 현재에 집중할 힘을 얻게되는 것 같습니다. 늘 대학원생의 마음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 대학원생의 메일을 받고 오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음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기쁜 건 기쁜 거니까.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성숙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이들이 있어 기쁘고 감사하다.

2. 보통 독서가 쌓일 수록 책읽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하던데 나는 왜 반대인가. 가면 갈수록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무게가 버거워 속도를 내기 힘들다. 원래 느린 속도에다가 더 느려지니 집중해서 읽어도 슬로리딩이 절로되는 장점(?)이 있구나.

3. 자신의 행위에 과한 가치나 무게를 두는 것은 어리석다. 하지만 역사라는 장강은 그 어떤 행위도 모두 담고 흐른다. 심지어는 지금 내가 올리는 하잘것 없는 포스트 하나조차 그렇다. 우주의 먼지만큼도 안되는 무게의 글이지만, ‘먼지만큼도 안되는’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4. Gunther Kress는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사회적 상호작용은 늘 변화를 가져온다고(transformative) 말했다. 우리가 감지하든 못하든 말하고 답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동안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세밀하게 변하고 그것이 쌓여 가시적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내 말이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 삶의 영역에서 내가 점하는 영역, 내가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 내가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를 고려했을 때, 더도 덜도 않고 딱 ‘나만큼의’ 무게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을 또 나와 긴밀히 연결된 상대의 삶을 티끌만큼 바꿀만한 힘이 있다.

5. 그 힘을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역량. 그것이 현사회의 리터러시 교육의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말을 과도하게 신뢰하고 휘두르지만 누군가는 열패감으로 그 어떤 말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사회 공동체의 실패다. 그런 면에서 자기성찰의 실패는 민주주의의 실패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6. 최근 본 말장난 중에 와닿았던 것. ‘‘weapons of mass distraction’ (Weapons of mass destruction(대량살상무기)에서 온 말장난)

e.g. Facebook is one of the most powerful weapons of mass distraction.

알면서도 늘 당한다. 오늘도 참 열심히 했구나.

7. 과연 다음 학기 오프라인 수업이 가능할까. 지금 추이로 봐선 다음학기도 내내 온라인 수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슬프고 또 한편으로는 담담하다.

얼마 전에 마스크 끼고 연속 2시간 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힘들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보고 싶다. 마스크 쓰고 손 잘 씻고 조금 멀리서 보면 될 것 같기도 한데.

8. 그러고 보니 코로나 상황이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래도 여름되면 좀 괜찮아지지 않겠어?”

왠걸. 여름에 2차 유행이 오게 생겼다.

9. 인간이 침묵한다 해서 세상이 침묵하는 건 아니다. 인간이 말한다고 해서 우주가 듣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침묵을 혹은 대화를 과대평가한다.

나 또한 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영어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향한 한 학자의 일갈이 떠오른다.

“영어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건, 영어교육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

정말 그러하다.

‘내가 뭔데’라는 생각과 ‘나라도 뭘 좀’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마음.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흔들린다.

10. 인생 쉬운 게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쉽게 살려 하지 말자.

#일상스케치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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