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들 (답없는)

Posted by on May 22,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1. 언론보도는 ‘팩트’와 ‘입장’을 넘어 ‘대화’를 지향할 수 없는가?

2. 진실이 개인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이’에, 사이의 지층에 존재한다면, 그 ‘사이’는 어떻게 보도되어야 하는가?

3. 언론의 자기성찰성(self-reflexivity)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단지 구호의 차원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4. ‘당사자주의’라는 말에 붙은 ‘~주의’는 어떤 의미인가? ‘~주의’라는 말은 복잡다단한 주체와 사건, 대상과 관계들을 칼로 물베듯 잘라내어 세계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단순화하지는 않는가?

5. ‘A는 A고 B는 B다’라는 말은 얼마나 손쉬우며 때로 기만적인가. 뿌리는 뿌리고, 줄기는 줄기고, 가지는 가지고, 잎은 잎이라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 나무는 무엇이란 말인가.

중재당하는 언론은 많지만 중재하는 언론은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쓰린 요즘. 우매한 나는 ‘언론’의 정의를 곱씹어 본다.

언론 [言論]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하여 뉴스나 사실을 알리거나 의견과 논의를 전개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 (다음사전)

‘어중간한 재능’ 단평

Posted by on May 20, 2020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 No Comments

트위터의 “어중간한 재능” 논쟁(?)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게도 ‘타고난 능력은 넘사벽’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뼛속까지 체화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비판하는 다양한 의견을 보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재능 VS 노력 VS 좀더 노력’ 구도의 전형적인 능력주의 담론의 압승인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모두 각자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사회도 좋지만, ‘타고난 재능’이라는 담론이 창궐하지 않는 사회가 더 낫다.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재능이 아닌 사회의 역량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각자의 재능이 발휘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수동태 뒤의 전치사에 관하여

a. He was relieved by what he saw.
b. He was relieved about what he saw.

이 둘 중에 뭐가 맞나요? 저는 relieved 다음에 by와 about이 다 된다고 배웠는데 말이죠. 네이티브 두 명에게 물어보니 by가 맞다고 하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고요. 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about과 by의 의미차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주신 두 표현 (relieved about / by) 중에 뭐가 맞느냐는 건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By”는 그 뒤에 동작주(agent)나 원인(cause)을 나타내는 표현이 주로 옵니다. 따라서 주신 문장이 “그는 그걸 보고 안심이 되었다”는 의미라면 He was relieved BY what he saw.가 되어야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에 비해 about은 말 그대로 ‘~에 대해’, ‘~에 관하여’라는 의미입니다. 뒤에 나오는 것이 relieve를 하게 한 agent나 cause라기 보다는 대상(object)인 것이죠. 따라서 “After hearing the news, he was relieved ABOUT the situation in New York.”라고 말하는 것이 좀더 적절하겠죠. 뉴스를 들은 게 원인이 된 것이고, 뒤에 나오는 ‘the situation in New York”은 안심의 대상이 되니까요. (그래서 ‘소식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의 적절한 번역은 “She was relieved BY the news.”입니다. By 대신 about을 쓰면 상당히 어색하죠.)

그렇다면 다시 He was relieved about what he saw.에 대해 ‘by’를 써야 한다고 말한 원어민의 직관으로 돌아가 보면, 사실 이건 표현에 대한 개인적인 직관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대한 사회적인 직관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맥락 없이 저 문장이 주어졌을 때 by냐 about이냐 하는 것은 ‘what he saw’와 ‘He was relieved’ 사이의 관계와 밀접하게 엮여 있는 것이죠. 보통 뭔가를 걱정하고 있다가 어떤 상황을 목격했을 때 안심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저만치 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가서 살펴보니 상처도 없고 특별히 다친 곳도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 경우 말입니다. 이 경우에는 ‘what he saw’에 의해서(by) ‘was relieved’되었다고 보는 게 적절하겠죠.

다른 상황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뭔가를 목격했어요. 예를 들어 아이들이 공룡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걸 본 거죠. 그런데 점심을 함께 하고 있는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어이, 김성우 선생. 그 뉴스 봤어? 요즘 나오는 공룡 장난감에 유해물질이 장난이 아니라는데?” 저는 갑자기 아까 봤던 장면이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애들한테 무슨 해가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뉴스를 찾아봅니다. 검색해 보니 모든 공룡 장난감이 그런 건 아니고, 특정 브랜드만 그렇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그제서야 저는 아까 봤던 장면에 대해(about) 안심이 됩니다. 뉴스에서 지적한 브랜드가 아니니까요. 이때는 “He was relieved ABOUT what he saw.”가 좀더 적절할 것입니다.

우리가 원어민에게 A/B 중에 뭐가 맞느냐고 물을 때 종종 놓치는 것은 A와 B를 “Either A or B”의 관계로 놓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글이나 코퍼스 툴을 찾아보면 둘 다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명한 출판물에 올라가 있는 경우도 많거든요. 여기에서 빈도(frequency) 뿐 아니라 그 두 표현이 갖고 있는 의미적/개념적 차이에 주목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By와 about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고요.

이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맥락이고 두 번째는 해당 표현의 기초적인 의미입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안심이 된다’와 ‘무언가를 목격하다’ 사이에 성립하는 가장 일반적인 관계는 ‘뭔가를 보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안심이 되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이라면 ‘목격한 것에 관하여’가 될 수도 있죠. 또한 by와 about이 가지는 어휘적 개념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고려해야겠죠.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이 두 표현이 칼로 무 자르듯 딱 갈리진 않을 겁니다. 그 경우에는 비원어민 뿐 아니라 원어민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수 있고요.

덧.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시고 “relieved about the situation.”과 “relieved by the situation.”을 exact match로 구글에서 검색해 보시면 about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수동태 #전치사

비마이너

Posted by on May 14,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오늘 받은 재난지원금을 <비마이너>에 보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들 하지만 오늘은 과감히 다른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어찌 보면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많은 분들에게 <비마이너>가 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글을 씁니다.

저의 비마이너에 대한 짧은 생각을 아래 옮겨놓습니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언론 지형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한경한(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을 보는 것으로 시각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이 사회에 대해 가장 많은 통찰력을 주는 것은 〈비마이너〉같은 매체가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비장애인으로서 보는 세계에 대해 머리를 쾅 치는 기사들이 종종 올라와요. 그럴 때 가슴이 떨리고, 제 좁았던 시야를 돌아보게 되죠. 장애인과 장애학의 관점에서 본 세계는 내가 지금까지 봤던 세계와 완전히 다르구나, 내가 뭘 몰랐구나 하는 걸 드러내줘요. 리터러시의 발달에서 기존의 지식을 충실하게 잘 섭렵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비마이너〉와 같이 그동안의 리터러시의 주류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관점에 끊임없이 열려 있도록 만드는 매체도 반드시 필요하죠. 그런 면에서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의 시각,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의 이해, 이와 관련된 실천이 리터러시 교육이 나아가야 할 주요한 방향 중 하나라고 봅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중에서)

제가 너무나 좁은 시야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잘 압니다. 교육을 한다 말하고 문해와 리터러시에 대해 떠들지만 실상은 먹고사니즘의 핑계 속에서 이제껏 쌓은 관계 안에 안주하며 세상을 볼 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세상’일 지는 모르지만 온전한 세계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어리석고 좁은 세상을 깨뜨려 주는 분들이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분들로 인해 제 어둔 마음이 밝아지고 세계는 변화합니다. 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흔들리더라도 함께 걸어갑니다.

아래 <비마이너>의 주소를 남깁니다. 비마이너를 읽고, 느끼고, 궁리하고, 알려주세요. 때로는 분노하고 연대해 주세요. “C메이저”로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세상을 보게 해주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얼굴을 오롯이 마주하게 하는 “B마이너”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장애인의 주홍글씨, 비마이너
https://beminor.com/

Listen to Me

1.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는 오로지 텍스트에만 천착하는 이해를 경계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계와 맥락을 함께 봐야 하는데 우리는 텍스트만을 바라보기 일쑤죠. 그것도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관계도 맥락도 망각하고 상대의 텍스트를 소화하기 보다 자신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읽기와 듣기가 적잖습니다.

2. 처음 “Listen to me.”라는 표현을 배울 때 ‘Listen이 자동사이니 to가 붙어야 한다. 그래서 ‘내 말을 들어봐’는 ‘Listen to me.’가 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말에서는 보통 ‘내 말’인데 영어에서는 ‘me’라는 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한국어의 목적어는 ‘말’인데 영어의 목적어는 인칭대명사더라고요.

3. 여전히 사람들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듣는 저를 발견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듣지 못하고 듣고 싶은 내용만을 듣는 것이죠. “Listen to you.”해야 하는데 “네 말만 듣게’ 되고,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Listen to myself.’하게 된달까요.

4. 단지 상대의 말이 아니라 상대를 들을 수 있다면, 그런 리터러시 교육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험은 늘 “다음을 듣고 질문에 답하시오”이지만, 삶에서는 “상대의 삶을 보듬고 질문을 던지시오”가 되길 바랍니다.

5. 이것은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쉽지 않네요. 하지만 다시 새기면서 어지러운 마음을 비워냅니다.

이것은 언어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입니다. ^^;;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4: 언어와 정체성, 그리고 적절성(appropriateness)의 애매함

한국인 간호사가 있었다. 최근 미국으로 건너가 자격을 취득해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간호사B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의사는 상황을 파악하고 간호사B에게 “그건 이리저리 해서 그녀에게(to her) 건네주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her’는 한국인 간호사였다.

간호사B와의 대화를 마친 의사가 다시 한국인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의사가 살짝 당황한 듯 이렇게 말했다.

“Oh, I’m sorry. Do you go by ‘her’?” (앗 미안합니다. ‘her’로 불리시나요?)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있던 간호사는 3-4초가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임을 알았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 ‘당연히 여성으로 안보이나?’ ‘여기에서는 이런 식으로 대놓고 물어보기도 하나?’ ‘나 같으면 모른척 her라고 말할 거 같은데…’ 등등.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라면 그런 질문을 받을 일이 없다. 우선 상대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묻는 걸 꺼리며, 그런 것을 물어보는 일이 엄청난 결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어에서는 him/her와 같이 성별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대명사를 쓰지 않아도 되기에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마도 ‘저분’이나 ‘저 간호사’ 정도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들어 미국에서도 her/him과 같은 대명사를 쓰기보다는 them과 같이 성별을 나타내지 않는 인칭대명사(gender-neutral personal pronoun)를 쓰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일화 속 의사가 그냥 ‘them’을 썼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수 있었을 것 같지만, 또 이런 ‘them’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them’이 누구누구인지 되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면 언어와 문화에 맞는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사회언어학강의노트

삶을 위한 리터러시, 강의 궁리중

<영어로 논문쓰기>를 완성도 있게 다듬고 대중적인 강의로 안착시키는 데 두 해 정도가 걸렸습니다.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문서화된 내용이 꽤 있으니 한 해 정도면 쓸만한 강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북토크 등의 기회를 통해 여러 분들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구체화시켜 볼까 합니다.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와 ‘유튜브 세대’ 자신의 이야기, 교사 등 그들과 자주 소통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배울 것도 많네요. 감사한 일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10여 년 만에 두 번째로 제가 원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가 좋을지 고민중인데요. 사범대 영어교육과 대학원생이라면:

(1) 인지언어학과 영어교육이지
(2) 비고츠키 사회문화이론과 영어교육이지
(3) 멀티리터러시/멀티모댈리티와 영어교육이지
(4) 뭘 하든지 재밌고 학점 잘 주는 과목이지.

5년 남짓 만에 겨우 한 번 오는 기회인지라 이게 참 정하기 힘드네요. 여러분의 선택은 과연? 

음모론의 발달 단계 – 한 가지 예

Posted by on May 6,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2. 열받는다. 가까운 이들에게 열받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3. 다같이 열받는다.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성토한다. 4. 여기엔 분명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 왜냐고? 이렇게 여러 사람이 열받았잖아!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는 사람들까지 음모론에 넘어가는 걸 보면 (1)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2) 부족주의적 사고가 지식과 경험 따위는 우습게 박살내거나 (3) 튀고 싶은 욕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욕망을 채운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팬덤에 합류한 이들은 비판자들을 ‘불만충’ 취급한다. 자기가 믿었던 것과 반대의 진실이 드러나도 자기는 훌쩍 ‘커’ 있다. 이 정도면 수지맞는 장사 아닌가?

사실이 의견보다 중요함을 넘어 사실이 욕망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겨야 할 시대 아닌가 싶다.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 만큼 부족을 규합해 우월함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져도 괜찮다’, ‘소수여도 괜찮다’, ‘나 자신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감각 아닐까. 논리와 과학이 필요한 만큼 무너지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성역없는 수사’ 등 단상

Posted by on May 5, 2020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성역없는 수사를 약속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이 사회에 여전히 성역이 존재함을 말해준다. “수사하겠다”가 “성역없이 수사하겠다”와 같은 뜻이 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그러고 보면 과한 결심이 필요치 않은 담백한 사회가 좀더 잘 굴러가는 사회일지 모르겠다.

2. “성역”은 성스러운 곳이기에 수사기관의 영향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수사의 관점에서 보면 ‘성역’은 성스러움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냥 범죄자들의 활동영역이다. “성역”이 남아있다면 성스러운 곳이 남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묵인한다는 뜻이 된다.

3. 이제 국민의 세금은 왠만하면 “혈세”라고 표현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 힘들게 노동하는 유리지갑들이 내는 세금과 부동산과 임대수익을 주수입원으로 하는 이들이 내는 세금이 똑같은 혈세인가. 잘 모르겠다.

4. 얼마간 ‘확찐자’ 말장난이 유행했다. 아무런 악의 없는 농담이었고 그 말을 쓰는 분들에 대해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확진자로서 그런 글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면 마음이 개운하진 않았다.

5.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 언론을 통해 사과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사과드린다”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진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이때는 ‘고개숙여 사과한다’라는 말이 진심을 담은 말이 아니라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6. 새로운 책을 <유튭책집>이나 <유책집>으로 부르는 독자들을 여럿 보았다. 경제적인 명칭이긴 하나 입에 붙지는 않는다. 특히 후자의 줄임말은 왠지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7. ‘번번히 발목을 잡는다’, ‘발목이 잡혔다’는 표현을 볼 때마다 실제로 발목 잡혀본 경험이 있는 인구 비율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진다. 코미디에서 이걸 실사로 구현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먼산)

8. ‘넌 이제 아웃(out)이야’라고 말하며 점퍼를 옷장 안(in)에 던져넣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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