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일 논의 유감

Posted by on Apr 5,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오늘 ‘꽃놀이 인파’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4월 15일 총선을 예정대로 실시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의 필요가 급박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정부에서 추진하는 거리두기는 앞으로 2주. 여기에는 총선일이 포함된다.)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았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개학은 감염의 위험이 커서 안되니 온라인으로 해야 하고, 종교집회 등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막는 상황에서 선거는 예정대로 치뤄야 한다는 논리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받아들여지는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일부 재외국민은 기본권 중에서도 기본인 참정권을 순식간에 잃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라고 말하기에는 실로 중대한 사안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완벽히 다른 선택을 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선거일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어 안된다는 말보다는 법을 바꾸어서라도 다른 날로 미루는 게 적절한 선택 아닐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투표장에서 감염된 노인이나 기저질환자 중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사례가 나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능을 포함한 사회의 수많은 타임라인이 미뤄지는 상황에서 총선만은 그대로 가야 한다는 건 어쩐지 억지같다.

덧. 법 개정에 관해서 언급했는데, 내가 법을 잘 몰라서 안되는 걸 된다고 우기는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비상사태’ 속에서 선거가 치뤄질 수 없을 때, 해당 선거는 없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또한 상식적이진 않은 것 같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출간!

책이 나왔습니다!!!

1년 여 전부터 #삶을위한리터러시 태그로 적지 않은 글을 올렸습니다. 한국사회의 문해력 혹은 리터러시라는 주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쪽글을 꾸준히 공유했죠. 언젠가 본격적으로 정리를 해보자는 생각은 있었지만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 하염없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문화연구자 엄기호 선생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공부공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의 책을 읽고 선생님의 관점과 글쓰기에서 큰 도움을 받았는데 함께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 깊이를 더하고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는 주제를 좀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기획과 준비단계를 거쳐 작년 여름 네 번의 긴 대담을 가졌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지도교수와 오랜 시간 토론한 적은 있지만, 동료 연구자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대담 과정에서 배움의 기쁨이 컸습니다. 말 그대로 대화를 통해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경험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밀도있는 대화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탐색하고 싶어졌습니다.

대담은 모두 전사되었고, 편집장님께서 책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후 말을 다듬고 글을 보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대화를 책으로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도서출판 따비의 신수진 편집장님께서 잘 이끌어 주셔서 이렇게 오늘 세상에 나오게 되었네요. 작지만 뜻깊은 삶의 매듭이 지어진 것 같아 기쁩니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 밝혔듯 이 책은 하나의 초대입니다. 미디어의 지형이 숨가쁘게 변화하는 시대, 읽고 쓰는 일의 본질을 놓치지 말고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함께 만들어 가자는 제안입니다.

“정성을 다해 읽고, 쓰고, 보고, 만들며 일상을 엮어가는 독자들을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찾아가는 여정에 초대한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읽기와 쓰기 관행의 변화를 주시하는 분들, 동영상의 시대 책과 문자매체의 운명이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분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자녀의 리터러시 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들, 문자와 영상을 엮어 리터러시 교육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분들, 일선에서 학생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리터러시 교육을 만들어가고 있는 교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미지를, 영상을 탐험하는 분들과 함께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꿈꾸고자 한다. 이 대담이 서로를 읽어내고 새로운 삶을 써내려가는 길에 작은 디딤돌이 되길 소망한다.”

그간 #삶을위한리터러시 포스트에 반응해 주시고 같이 고민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책이 우리사회 리터러시에 대한 더 풍성한 논의와 궁리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읽어주시고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판사 소개:
힘의 과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한 다리로,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으로, 읽기와 쓰기뿐 아니라 듣기와 보기의 가능성까지!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응용언어학자 김성우가 함께 나눈 좋은 삶을 가꾸는 리터러시.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지식검색을 하는 것도 아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며 유튜브 채팅 기능으로 소통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리터러시의 정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서로에게 ‘난독증이냐’며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단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꼰대’가 ‘가르치려 든다’고 경계한다. 리터러시가 혐오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아니라 성찰의 도구가 될 수는 없을까?

젊은 세대의 읽기 능력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최근 몇 년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읽기 영역에서 한국 학생들의 순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거나 ‘문해가 매우 취약한 수준’의 비율(38%)이 OECD 국가 중 하위권(2018년 조사)이라는 수치가 제시된다. “우리 아이가 책은 안 읽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학생들이 교과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학부모와 교사들의 경험도 근거가 된다. 과연 젊은 세대의 문해력 수준이 떨어진 것일까? 이것을 문해력의 위기라 할 수 있을까?

삶이 말에 스며드는 방식에 천착해온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말이 삶을 빚어내는 모습을 탐색해온 응용언어학자 김성우가 문해력/리터러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리터러시의 상황을 ‘위기’로 부르는 평가가 정당한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몸과 사고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리터러시를 경쟁의 도구가 아닌 공공의 인프라로 만들어갈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폭넓게 논의한 기록이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에 담겼다.

===

오프라인 서점은 4월 8일 수요일 이후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주요 온라인 서점 링크입니다. 감사합니다.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7010366

YES24: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869723?Acode=101

교보문고: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8439798&orderClick=LEa&Kc=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4

1. 녹음기술은 미디어로서 개인을 확장시켰다. 나의 목소리가 나를 떠나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녹음된 음성은 어디든 결합할 수 있다. 나의 목소리가 타인의 입에 올려질 수도 있고, 더빙의 재료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처럼 미디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로부터 탈각된(disembodied) 목소리를 활용하여 ‘자연스런’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미디어, 특히 애니메이션을 통해 갖게 되는 특정한 인종, 계급, 성별, 연령, 직종 등에 대한 이미지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을 시각적으로 추상화하고 청각적으로 매개하여 구성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복사’한 것이 아니라, 탈신체(disembodiment)와 추상화, 재조립(reassemblage)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2. 좀 우습기도, 멋적기도 한 이야기지만 중고등학교 때 영어 발음을 네이티브랑 똑같이 하려고 애쓰는 애들 보면 왠지 멀리하고 싶었다. 영어는 좋아하는 과목이었고 나름 잘하기도 했는데 발음에 대해서만큼은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괜한 고집을 피운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던 것 같다. 그땐 멀리 보지 못해서 내가 응용언어학을 하게 될 줄 몰랐던 것.

나의 이 멍청한 (하지만 나름 귀엽다고 우기고 싶은)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발음은 개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 말을 열심히 발음하고 있으면 뭔가 뇌가 꼬이는 듯하고 내 안에서 다른 내가 나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나의 목소리와 발음은 나의 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3. 사실 우리는 외국어 뿐 아니라 모국어를 사용할 때도 발음에 따라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차별한다. 발성이 좋고 발음이 정확한 — 흔히 말하는 아나운서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발음이 명확치 않은, 즉 “말을 꾸역꾸역 먹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발음이 좋으면 목소리마저 청아하게 들린다. 목소리와 발음은 해당 개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발음은 사회문화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지표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과거 대부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백인 성우가 더빙을 맡았다. 당연히 악역은 히스패닉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발음이 주였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의식중에 인종차별적 마인드를 키워갔다. 실로 무서운, 여전히 진행중인 현상이다.

4. 위의 1에서 서술한 바를 적용하자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특정한 집단의 신체를 추상화하여 비주얼로 만들고, 여기에 특정한 계층을 은밀히 가리키는(index) 목소리를 입힌다. 이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캐릭터를 특정한 목소리 자질과 연관시키고, 이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특징과 또다시 연관된다.

물론 이러한 결합이 즉흥적이거나 기계적인 것만은 아니며 상당한 사회문화적 고증을 거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을 쏟아붓더라도 애니메이션이 재현하는 인물(비주얼+사운드+캐릭터적 특성 등)이 일정한 본질화(essentalization: 사람의 특징 한두 가지로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일. ‘백인은 이렇다’든가, ‘이주노동자들은 이렇다’, 나아가 ‘시츄는 다 …하지’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남.)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3: 사회언어학 공부의 목표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은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연구합니다. 촘스키의 접근이 인간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능력으로서의 언어능력을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면 사회언어학은 사회와 언어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인간이 생물-문화적 존재(biocultural being)임을 생각한다면 언어연구의 축이 이렇게 분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사회언어학은 1960년대 말 뉴욕의 사회계층과 언어특징에 대한 Labov의 기념비적인 연구 이후로 출신지역, 인종, 계급, 교육수준, 성별 등이 개인 및 집단의 언어사용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죠. Labovian sociolinguistics와는 다르게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의사소통을 강조하고 인류학적 방법론을 취한 접근이 생겨났습니다. 대표적으로 70년대를 거치면서 Dell Hymes의 영향을 받은 ‘의사소통의 민족지학(Ethnography of communication)’이 정립되었고, 이는 언어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의사소통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 개념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90년대 이후에는 점차 인종, 성별과 같은 전통적 사회학적 변수가 언어사용에 미치는 영향이나 언어의 특징이 사회적 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를 보여주는 정도를 통계적/변량적으로 보는 연구보다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개개인의 아이덴티티, 포지셔닝, 권력관계 등이 언어사용과 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밝히려는 연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응용언어학과 가까운 사회언어학 연구에서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죠. 이와 함께 모든 언어행위에 수반되는 권력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는 비판적 사회언어학(critical sociolinguistics), 비판적 담화분석(critical discourse analysis), 비판적 담화연구(critical discourse studies) 등의 흐름도 사회언어학의 주요 분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번 학기 전반부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언어교육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사회와 언어의 관계를 공부해서 뭘 하려는 걸까요? 저는 사회언어학을 공부에 두 가지 상반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언어를 통해 사회를 파악하고, 언어와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누군가가 특정한 발음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index)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겠죠. 버니 샌더스가 자신의 이름에서 /r/ 발음을 탈락시킬 때 그것이 그의 연령과 출신지역(뉴욕)을 지시함을 알아채는 것, 그가 사용하는 억양이 유태인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글을 통해 그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하고 구획짓는 데 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상반되는, 어떤 면에서는 더욱 근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종, 계급, 출신지역, 성별을 다 벗어버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여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출신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원어민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어 혹은 방언 구사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그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한 인간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기술적 힘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매 순간 우리를 누르고 있는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 편견없이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고 싶으니까요. 첫 번째가 분석하고 읽어내는 작업이었다면 두 번째는 차별하지 않고 연결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네 압니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수많은 시간 체화한 언어적이고 사회적인 관습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서울 사람이 아닌 척, 남성이 아닌 척, 선생이 아닌 척하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자칫 조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요. 저를 둘러싼 수많은 권력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요. 아무 편견 없이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하지만 누구와 만나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한 의사소통(appropriate/relevant communication)을 하려는 노력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특징을 차별의 포인트로 삼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성과 이야기할 때는 여성의 스타일에, 노인과 이야기할 때는 노인의 언어패턴에, 특정 지방 출신의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의 언어적 특성에 맞추어 대화를 나누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춰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지요. 우리가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벗어던질 순 없겠지만 서로의 세계에 조응하며 대화를 지어가는 협력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늘 불가능한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와 지역과 성별과 교육수준과 정치적 성향으로 짜여지는 권력관계를 하늘 아래 평등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회복시키고 싶은 꿈이야 말로 터무니없이 우둔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꿈을 꿀 때에 우리의 말글이, 몸짓이, 눈빛이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실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발음 좋은 학생’에게 칭찬을 합니다. “와 너 발음 좋다. 이거 한번 읽어볼래?” 이렇게 말입니다. 물론 사회적 기준에서 해당 학생의 발음은 좋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좋은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 다른 학생들은 ‘나쁜 발음’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어떤 발음이 사회적으로 권위(prestige)를 갖는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사회언어학의 첫 번째 목표에 해당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의 힘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에 대응합니다. 교실에는 ‘좋은 발음’과 ‘덜 좋은 발음’을 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야기합니다. 자기만의 삶을 궤적을 지닌 유일한 인격체로 말합니다. 그 주체들 사이에 위아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편견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늘 기억하고 자문합니다. ‘내가 더 높게 평가하고 있는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들의 사회문화적, 계급적, 역사적 연원을 안다면 이들을 차등적으로 대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메타포, 그리고 언어의 윤리

(아래 글은 <복음과 상황> 2020년 4월호 커버스토리 기고문 초안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WHO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 극심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재난의 여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감지된다. 취약계층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깊고, 경제적 여파로 인한 불안도 커져만 간다. 바이러스의 감염보다 빠른 것은 공포의 확산이다.

시민들의 상황은 한 마디로 ‘재난의 일상화’라고 할 만하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평소에 보지 않던 뉴스를 찾고, 듣지 않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별것 아닌 경고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어떻게든 공포를 완화시키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렇기에 위기상황의 말들은 더욱 강한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효과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 말들의 풍경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영감과 응원의 원천이 되며,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재난 상황에서 말글의 무게를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전쟁중인가

“감염병과의 전쟁” / “바이러스와의 전면전” / “최전선의 의료진” / “지역 봉쇄” / “전시상황” / “시한폭탄”

최근 언론에서 접한 비유표현이다.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전쟁으로 그린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진 않았지만 ‘전면전’, ‘최전선’, ‘봉쇄’, ‘전시’, ‘시한폭탄’ 등은 현재의 상황이 전쟁과 닮았음을 함의한다. 이는 스포츠에서의 전쟁 은유와 유사하다. “격파”, “대첩”, “용병술”, “명장”, “전략전술” 등의 단어는 스포츠 관련 보도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이는 스포츠 경기를 일종의 전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지금의 사태를 전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한국사회에서 전쟁 메타포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일례로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내부총질”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은 특정 정당이나 정파 내부의 분열과 갈등 상황에서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세력을 이르기 위해 사용된다. 누군가는 ‘총질을 총질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느냐’고 묻겠지만 상대의 행위를 ‘총질’에 빗대는 게 어떤 의미와 효과를 지니는지 생각해 보면 섬뜩한 의미가 드러난다. 우선 “내부총질”이 있다면, 여러 세력들이 서로 총을 쏴대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총격전에서는 으레 중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한다. 아울러 “내부총질”이 문제라면 “외부총질”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내부로부터의 격렬한 비판은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고, 조직의 구성원들을 적군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총질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벌어져야만 한다.

한 외국인과 우리사회의 전쟁 비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전쟁용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면서, 수업에 책을 안 가져온 학생에게 “전쟁터에 총을 놓고 나간다”고 하거나, 금전적 여유를 “총알”에 비유하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태도가 좋지 않거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군기가) 빠져있다”는 말을 쓰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전쟁과 관련된 메타포가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언어와 역사를 기반으로 나름의 메타포를 만들어 낸다. 수업을 전쟁터에, 교과서를 총에 비하는 일은 영미권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대만의 연구자에게 비슷한 표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아는 한 없다고 답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책을 안 가져오느니) 차라리 머리를 놓고 오지.”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수많은 침략을 경험하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수십 년 군사문화가 배어든 한국사회에 다양한 군대 관련 표현이 존재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없이 무의식적으로 군대 메타포를 사용하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면 학생들은 계속 ‘총’을 가지고 ‘전투’에 참가하는 ‘군인’일 수밖에 없다.

은유는 말의 장식이 아닌 사고의 패턴이다

서양에서 비유어(figurative language), 그 중에서도 은유(metaphor)에 관한 논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시학>에서 명사의 종류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누고 그 중의 하나로 은유를 들었다. 어원상 ‘넘어서(beyond/over)’라는 뜻의 ‘meta-‘와 ‘가져오다, 갖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pherein’이 결합한 라틴어 metaphora는 ‘옮겨간다, 전이된다, 넘어간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메타포는 한 대상의 이름이 다른 대상의 이름으로 넘어가는 것, 즉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시학, 124쪽)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오랜 세월 서구사회가 메타포를 이해하는 데 기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1980년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그들의 저작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견해에 반론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메타포는 단지 하나의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수사적 기법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며 사고패턴(thinking patterns)이라는 것이다. 약간의 학술용어를 동원하자면 메타포는 수사적 장치(rhetorical device)가 아니라, 인지 메커니즘(cognitive mechanism)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 표현들을 보자.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다.”
“세월이 날아간다.”
“Summer is just around the corner. (이제 곧 여름이다.)”

세 문장의 주어로 나온 ‘크리스마스’, ‘세월’, ‘Summer’는 모두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들이다. 하지만 시간은 물리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개념이다. 시간은 분명 존재하지만 만질 수 있는 코나 날아가는 새, 저만치 보이는 길모퉁이와는 다른 영역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코앞’, ‘날아간다’, ‘길모퉁이 돌아서 바로’라는 표현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의 세 표현 모두 시간 개념을 공간과 관련된 개념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추상적인 영역을 구체화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메타포의 역할이며, 이것은 단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공간(코, the corner)이나 운동(날아간다)과 같은 구체적이며 물리적인 개념으로 비유하는 사고패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추상과 구체를 엮어 사고를 풍부하게 만들고 확장시키는 능력은 인간의 인지적 역량 중 가장 주목할만한 능력으로 손색이 없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인생을 말하면서 “나는 그냥 엑스트라일 뿐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신과 단역배우를 연결시켜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한 사람이 엑스트라라면 누군가는 주연이고 또 누군가는 조연일 것이다. 누군가는 악역을, 다른 누군가는 선한 역할을 맡는다. 감독이나 각본이 궁금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집중조명(highlight)을 받고, 누군가는 컴컴한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즉 누군가가 ‘엑스트라’가 되는 순간, 세계는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이 되는 것이며, 개개인은 그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엑스트라’라는 말은 ‘세계는 영화(혹은 연극)’이라는 사고의 틀을 가정할 때 성립할 수 있는 메타포다.

‘메타포가 세계를 상정한다’는 관점을 사회문제에 연결시켜 보자.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을 때 종종 사용되는 은유 중에 ‘인질 메타포’가 있다. 예를 들어 “시민을 인질로 삼는다”는 헤드라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출퇴근 시민이 인질이 되고 공항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공항 이용객들이 인질이 된다. 대학 시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경우라면 학생이 인질이 된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파업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실행됨에도 불구하고 ‘인질’을 메타포로 쓸 때 범죄와 관련된 사고의 틀(frame)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인질”이라는 은유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질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질극을 구성하는 일련의 요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인질범은 인질을 대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인질’이라는 은유를 도입할 때 노동자들은 ‘인질범’이 되고, 파업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는 사람은 ‘인질’이 되며,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인질범이 요구하는 ‘몸값’이 된다는 것이다. 영특하게도 ‘인질’ 메타포를 쓰는 언론은 인질극의 빠른 종결을 기원하는 ‘선량한 세력’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몸값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노조는 노동법이 허용하는 수단을 동원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지만 대개의 노동조합은 사실상 약자에 가깝다. 오히려 사측이 강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파업은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적법한 노동권의 행사로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질 메타포’ 뒤에는 일체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그들의 행위를 극도로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는 생각의 틀이 들어 있다. 인질 프레임이 비틀고 있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뚫렸다”는 메타포의 아슬아슬함

지난 메르스 유행 사태와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메타포 중에 ‘OO가/OO도 뚫렸다’가 있다. 메타포에 관심을 가진 시민으로서 “뚫렸다”는 은유는 참으로 아슬아슬하다. 어딘가가 “뚫렸다”면, 거길 지키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있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사람은 거길 ‘뚫었으며’,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질 위험이 있다. 바이러스에 ‘뚫린’ 지역사회는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뚫고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하며 단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바이러스의 숙주로 기능한 이들은 방역망을, 지역을, 안전이라는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가? 우리는 ‘뚫은’ 주체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으로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감염자는 가해자요, 지역 주민은 피해자라는 구도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뚫다/뚫리다’로 표현되는 공격과 방어 혹은 침투와 보안의 메타포가 우리의 생각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재난 상황에서의 말글의 윤리

감염이 되는 순간 사람(person)은 보균자이자 매개체(carrier)가 된다. 적어도 공공영역에 있어서 해당 감염자의 정보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호스트(숙주)의 실제적/잠재적 위험에 대한 통계’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감염병 유행 사태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비극이다. 사람들에게 번호가 매겨지고, 접촉자(contact)의 수가 공개되고, 동선이 소상히 까발려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방역당국은 인격체(character)가 아니라 감염과 관련된 요인(factor)으로서 개인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량이 두 영역에 걸쳐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는 감염병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한 역학적 역량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도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는 차원이다. 전자가 ‘기술’로서의 역량이라면, 후자는 ‘돌봄’으로서의 역량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다.

지금 우리는 한 순간 확진자가 되어 ‘추적당하고 격리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한 공포는 바이러스보다 넓게 퍼져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가 나를 감염원이자 정보쪼가리로 처리하며 낙인찍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 당연히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병에 걸리는 것이 인격을 송두리째 침해당하는 경험이 되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격리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사례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자들을, 접촉자들을, 특정 지역을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가족으로, 동료 시민으로, 우리들의 또 다른 고향으로,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으로 대해야 한다. 감염이 인격과 관계, 지역사회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마음과 관계와 인격을 무력화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과학기술의 지혜를 모아 시스템을 보완함과 동시에 사려깊은 언행으로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감염예방 수칙을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보건 및 역학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막연한 공포를 확산시키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의 말글을 돌아보아야 한다. 장애인 시설을 ‘시한폭탄’이라 부르고, 특정 집단의 사람을 ‘색출’해서 ‘박멸’해야 한다고 외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동료 시민들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대상화함과 동시에 혐오와 공포의 세계를 팽창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어서 이 재난이 진정되고, 맑고 밝은 표정으로 거리에 활기가 돌기를 바란다.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아줄 수 있고 동료가 잠재적 위협이 되지 않는 일상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를 통해 서로에게 굳건한 신뢰와 따스한 응원이 될 수 있는 삶을 위한 말글을 배울 수 있기를 빈다.

꾸밈말의 역설

Posted by on Mar 29,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사실 난 ‘글쓰기 선생’치고 꾸밈말을 자주 쓴다. 쪽글을 쓸 때면 ‘엄청난’ 같은 비격식체 강의어(intensifier)도 종종 동원한다. 하지만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꾸밈말을 조심하라는 데는 언어적, 개념적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위대한 사랑”과 “사랑” 중 ‘사랑’을 강하게 만드는 표현은 무엇인가? 언뜻 보면 “위대한 사랑” 쪽이다. “위대한”과 “사랑”이 결합하여 더욱 강건한 사랑의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냥 사랑’보다는 ‘위대한 사랑’이 더욱 강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그저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이 세계의 모든 사랑이 이 단어 안에 쏙 하고 들어온다. 위대한 사랑, 못난 사랑, 철없는 사랑, 때늦은 사랑, 일방적 사랑, 지극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등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의 개념 안에 포섭된다.

하지만 “위대한 사랑”은 오로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사랑만을 담는다. “위대한”이라는 말이 사랑의 힘을 강하게 한다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이 쪼그라든다. ‘위대한 사랑’이 되는 순간 ‘사랑’이 담았던 우주의 모든 사랑들은 ‘축출된다’. 개념적인 범위가 심히 축소되는 것이다.

이 점을 저자와 독자의 관계에서 풀어보자. 저자의 꾸밈말 사용은 표현하려는 의미를 세밀하게 만들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이 해석하고 개입할 범위를 좁히는 효과 또한 갖는다. 때로 저자에게 ‘정확한’ 묘사가 독자에게는 ‘갑갑한’ 설명이 될 수 있고, 저자의 ‘엄밀성’이 독자에게는 ‘숨막힘’이 될 수 있다. 해석의 창을 하나 열면 다른 모든 창문이 닫힌다. 이제 해당 꾸밈말의 창을 통해서만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나는 형용사와 부사 같은 꾸밈말을 무조건 배격하는 글쓰기 교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건 수사적 선언이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수식어의 엄연한 존재는 자신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꾸밈말이 저자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해하고 신중하게 동원할 필요가 있다. 수식어를 안쓰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 쓰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덧.
사랑이 오염된 시대, ‘진정한 사랑’이 사랑을 대신한다. 용서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참된 용서’가 자주 소환된다. 그저 ‘사랑과 용서’면 충분한 세계라면 사랑이 진정하지 않을 리 없고, 거짓된 용서가 존재할 리 없다. 언어를 꾸미려는 충동은 오염된 세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연구란 무엇인가

Posted by on Mar 2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반년 넘게 응용언어학 분야의 연구자 두 분과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두 주에 한 번 온라인으로 만나 그간 각자의 삶을 나누면서 일상, 연구, 수업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주어진 포맷은 없고 각자 성찰적 내러티브를 쓰고 자유롭게 나누는 방식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임한다. 함께하는 두 분께 많이 배우고, 나의 지금을 만들었던 시절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나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지난 모임에서는 ‘연구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이 나왔다. 학문 분야에 따라 연구가 포괄하는 영역을 다르게 인식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응용언어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논문을 쓰는 일에 국한시켜 연구를 개념화하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다. 짐작컨대 ‘논문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연구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고 계실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비롯한 많은 응용언어학/TESOL 연구자들은 ‘연구는 못하고 딴일/딴짓 하느라 바쁘다’는 말을 종종 한다.

한편으로 ‘연구란 무엇인가’를 논의하며 논문보다는 대중적인 작업에 집중한 지난 몇 년이 떠올랐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수년 간 기록하여 에세이를 쓰고, 석사과정 이후 영어교육에 대해 고민해온 바를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내고, 비판적 리터러시 관련 도서의 번역에 참여하고, ‘삶을 위한 리터러시’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정리한 대담집을 내려 하고, 영어로 논문쓰기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만나고.

그러고 보니 시쳇말로 ‘취업과 승진에 도움 1도 안되는’ 일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연구인가, 아닌가? 누군가에겐 연구처럼 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연구가 아닌 딴짓으로 보일 것이다. 울트라 꼰대가 있다면 철없는 이의 ‘헛짓거리’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결론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연구냐 아니냐 선을 긋는 건 짓고 배우고 살아가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치렁치렁 나를 합리화하는 논리인 것 같지만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걸 바꿀 이유는 없다는 것.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Posted by on Mar 24, 2020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뮤지션들과 운동선수들의 ‘코로나-19 극복 영상’을 보고 있노라니 타지에서 유학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논문을 쓰던 시절, 하우스메이트와 약간의 대화를 주고 받는 것 외에는 내내 홀로 지내던 시간이 있었다. 외롭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가끔 쓸쓸하고 불현듯 그립고 문득 이야기 건넬 사람이 절실했다. 나를 살린 건 8할이 산책과 음악이었다. 날 좋은 오후면 근린공원으로 나가 두어 시간을 걸으며 햇살 아래 오디오북을 들었고, 밤에는 책을 읽다가 건반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쩌다가 만난 트위터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믹싱하여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고 (덕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 새벽시간 어눌한 피아노로 ‘랜선 콘서트’를 열어 김광석과 유재하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때의 연주 음원은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몇몇이 남아 아직도 어린아이같은 노스탤지어 곁을 지키고 있다. 아프고 두려운 시절, 자꾸만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2012년 여름 연주)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1

Posted by on Mar 18, 2020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1. 학생들로부터 쪽글을 자주 받는다. 읽기자료를 꼼꼼히 읽고 간단히 요약한 다음 자신이 이해한 바, 흥미로운 부분,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 경험과의 연계, 교육현장에의 적용 등을 논의해 보라는 과제다. 내 수업의 절반은 쪽글에 대한 피드백과 이를 기반으로 한 토론이다.

2. 재미있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읽기자료가 제시되었을 때 ‘어떻게든 이해한 척’하려는 학생과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학생’이 갈린다는 것. 쪽글을 읽다가 보면 전자의 학생이 생각보다 많은데 (나도 대학원생 때 종종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후자의 학생이 훨씬 반갑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해소하려는 모습이 ‘나 읽었고 이해했거든?’ 같은 제스처보다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3. 응용언어학과 영어교육의 특성상 순수히 이론에 그치는 논의는 반쪽의 느낌을 준다. 결국 이론과 현실이 만날 때 강력한 ‘프랙시스(praxis)’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론을 이해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현실과 결합시키려는 모습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이 설익은 지식을 용감하게 적용하려 들지 않도록 적절한 가이드를 주는 게 나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

4. 아무튼 이번에도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을 맡게 되었다. 첫 시간은 Dell Hymes의 1972년 글과 2015년 강현석 선생의 글을 통해 사회언어학의 초기 방향성과 최신 연구동향을 비교하며 진행한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사회언어학의 진화는 진행형이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한 학기가 되길 빈다.

재난의 시대,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r 17,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2 Comments

1. 아리조나 투산에 있는 한 친구는 “고립되거나 혼자 계신 분을 알고 있다면, 그들이 뭔가 필요하다면 알려줘. 살 수 있는 거면 얼마든지 사다가 그분들 집 앞에 놓아줄 수 있으니까.”라는 포스트를 올렸다. 울컥한 나는 하트를 날렸다. 그냥 많이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쿠팡맨’ 노동자가 떠올랐다.

2. 한국사회는 국민성의 성숙으로 사재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물류와 배송시스템, 배달노동자들의 혹독한 노동으로 사재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우리는 종종 피땀과 노동, 시스템과 ‘착취’를 자랑스런 문화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나, 반성한다.

3. 무지와 혐오의 높은 상관관계처럼 조금도 이해하려 들지 않음과 비웃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대담을 나누었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최근 한 교회의 ‘분무기 사건’을 무시하듯 웃어 넘겼던 일을 돌아본다. 그리고 내가 몇주 전 어떤 ‘가짜뉴스’에서 뜨거운 물을 자주 먹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그냥 믿어버렸던 일을 떠올린다. 돌아볼수록 나의 어리석음은 크고도 깊은데 누군가의 ‘어리석음’을 쉽게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숨을 고르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4. 몇 주만에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평소 지하철 안팎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무료급식소는 한 달간 문을 닫았고, ‘판을 깔고’ 야채나 헌옷가지를 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바이러스에겐 국경도 인간도 없다지만, 인간이 만든 세계는 고통을 차별적으로 분배한다.

5. 세계 각지에서 계엄령에 준하는 조치들이 내려지고 있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이 있으나 국가 보건방역시스템의 방만함과 무능함을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식으로 해결하려는 측면은 없는지 살피게 된다. 질병 재난 시대의 사회가 새로운 온라인 교육을 요구하는 만큼 새로운 온라인 시위와 정치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시기는 아닐지.

6. Extreme disasters require radical solidarity. Our time and space have changed forever and social distancing prevails: Love needs to weave us together tight and sound. The ‘new normal’ of this pandemic era should be trust and care on an institutional and social level. Rampant capitalism needs to be quarantined and revolutionary regimes imagined. We cannot go back.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