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과 공정성

Posted by on Dec 12,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의 평가에 요구하고 있는 ‘투명성’을 모든 기업에 요구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대부분 기업의 인사평가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 학교와 기업에 대해 다른 잣대를 적용하게 만들까? 기업의 인사팀은 신뢰할 수 있고 학교 선생님들은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 말이다. 혹 이 사회가 기업과 학교와 맺는 권력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2. 많은 사람들이 입시 등에 요구하고 있는 ‘공정성’의 잣대를 비정규직과 정규직 모두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의에서 보듯 ‘한 차례의 시험’이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게 되는 건 어떤 기제에 근거할까?

3. 소위 임팩트 팩터(IF)가 모든 것을 말하는 세상에서 교육에 힘쓰는 강사들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직업안정성은 고사하고 30여 년을 일해도 방학의 생존 자체가 불안한, 자연증가분 이외의 연봉인상이 없는 상황을 감수해야 할까?

4.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대입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대학교수와 시간강사를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는 사회는 불행하다. 아니 미개하다.

5. 미개한 사회일수록 일부는 계속 잘 살아갈 수 있다.

취약성과 법

Posted by on Dec 9,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연약한 동물적 육체를 항상적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가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은 진실일 것이다. 언제든 죽기 마련인 인생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사실상 우리 손을 벗어나 있는–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일정한 자기기만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자기기만적 허구가 법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이며, 최소한 우리의 공통된 삶을 형성하는 제도를 만들 때 우리 모두는 아이와 같으며, 많은 면에서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다.

나는 이것이 자유주의 사회가 나아가야 할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사회는 모든 개인의 평등한 존엄과 공통의 인간성에 내재된 취약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있는 사회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회를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것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봐야 하고, 우리의 법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사회의 법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43쪽

리터러시의 위기, 기쁨의 위기

Posted by on Dec 7, 2018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리터러시의 위기라고 한다. 문해력은 형편없고 쓰기교육은 사실상 받아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바꾸고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고들 한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없을까?

나는 리터러시교육의 방법론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읽고 쓰기가 삶을 나누는 행위로 자리잡지 못하고 서열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상품성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라 여긴다.

읽기는 다른 삶에 가 닿는 일이다. 쓰기는 내 삶을 다른 삶에 던지는 행위다. 이같은 리터러시의 본질을 외면한다면 교과개편과 투자증대는 별 소용이 없을 수밖에 없다.

스펙과 평가가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행위의 기쁨에서 나온다. 즐겁지 않은 읽기 쓰기가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는 기쁨의 위기다. ‘나’없는 텍스트를 입력하고 내뱉는 일은 공허하다. 받아들이고 만들어내려 할수록 삶은 내팽개쳐진다. 의미없는 문자를 소비하고 생산하는 고통을 멈추어야 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뷰터러시

Posted by on Dec 4,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뷰터러시 (viewteracy)’

오늘 독서모임에서 돌아오다가 생각난 말 “Viewteracy”. 활자중심의 읽기쓰기 능력을 나타내는 리터러시를 차용하여 ‘비주얼 리터러시’라고 쓰기 보다는, 비주얼 매체와 관련된 비판적, 창의적 능력을 통칭해 독립된 용어인 “뷰터러시”라고 써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뷰터러시’가 좀 없어보이긴 하는데요. 원래 처음에는 다 없어보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먼산)

#뷰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헤드라인이 감추는 것

Posted by on Dec 1, 2018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최고대학’에 ‘들어왔지만’ 절반이 우울증세”가 아니고, “‘최고대학’ ‘들어가느라고’ 절반이 우울증세” 아닌가? ‘최고’라는 서열이, ‘너는 최고야’라는 호명이 우울함을 키우는 것 아닌가?

이른바 ‘수퍼맨/수퍼우먼 신드롬’이나 ‘완벽주의자 신드롬’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기꾼 신드롬(the imposter syndrome)에 시달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수퍼휴먼도 아니고 완벽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그걸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구조화되고 일상화된 우울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서울대 등의 학교를 ‘별 것 아닌 곳’으로 만들고, 거기 다니는 학생들 또한 ‘별 것 아닌 학교 학생’이 될때 우울증세는 줄어들 것이다.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집단은 바닥을 모르는 어두움을 배태하기 마련이다.

https://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750994

한국은 한국영어교육의 중심

한국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어교육의 변방이 아니다. 한국은 한국영어교육의 중심이며 시작과 끝이다. 오히려 영미가 한국영어교육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종종 ‘영어’와 ‘영어교육’이 나의 일을 대표하는 단어라는 사실이 슬프다. 이 단어들이 지고 있는 어두운 힘과 세월 위에서 나를 짓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저들을 ‘삶’에 복속시키고 싶다. #삶을위한영어공부

The ultimate ruler

Posted by on Nov 27, 2018 in 단상, 영어,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궁극의 지배자는 어떤 자(측정의 기준)를 쓸지 결정한다. 표준화는 능력주의와 공모하여 ‘공정한’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The ultimate ruler decides which ruler to use. Standardization, in collusion with meritocracy, forms the very foundation of the ‘fair’ capitalism. In this sense the fight against the system necessarily accompanies fights against diverse measurement schemes, disguised in scientific objectivity and fairness for all. So we may want to ask ourselves, “which ruler am I serving?” whenever we take up a specific measurement/testing scheme.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Capitalist suffering

Posted by on Nov 27, 2018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집필 | No Comments

Capitalism glorifies independence and “being on one’s own.” However, it is a fundamentally interdependent system. Independence has been overrated; interdependence underexplored. Capitalism rarely reflects upon its own nature. We people can. This makes one of the rich sources for human suffering.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학기말 단상 (2018.11.)

Posted by on Nov 25,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강사법의 여파인지 이번 학기말은 유난히 고요하다. 여느 때처럼 강의는 막바지로 가고 나는 방학 동안의 생존을 계획한다.

밥먹고 산다는 핑계로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은 조금 희미해졌다. 물론 게으름과 능력부족이 더 큰 원인이지만, 그냥 ‘밥먹고 산다고’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그게 무난하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지도 않으니까.

연구자로서의 삶을 크게 동경해 본 적은 없다. 대학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 부러웠던 적도 없었다. 다만 학기마다 돌아오는 조금 귀찮은/구차한 일들이 힘겹긴 하다. 6년 여의 반복도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진 못한다. 익숙해지지 않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건 좋다. 대학에 여전히 발을 담그고 있을 수 있는 건 나를 믿어준 선생님들 덕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함께하는 학생들 덕분이다. 구원은 늘 교실에 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초초안을 완성했다. 조금 고치면 초안이 되고, 조금 더 다듬으면 세상에 내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부터 두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전공과 관련된 모임 하나, 순수한 책수다 모임 하나. 책을 읽고 떠드는 모임은 언제나 좋지만, 이 두 모임은 정말 좋다. 성과 따위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이야기에, 사람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왜 더 일찍 시작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다.

학기가 끝나면 구원은 휘리릭 사라진다. 세상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방학엔 쉼과 탈-구원이 오묘히 공존한다.

예전처럼 쉬지 않고 일할 수는 없게 되었다. ‘저질체력’ 때문만은 아니다. 삶의 완급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 해 내내 질주하는 삶을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질주하지 않는다고 주저앉은 건 아니다.

짝에게 물었다. “혹시 다음 학기에 강의가 안들어오면.” 그가 웃으며 말했다. “집안 일 열심히 해.” 둘이 한참을 웃었다. 먹고 사는 걱정은 미친듯이 웃은 다음에 해도 된다.

학생들과 <Bowling for Columbine>과 <Elephant> 토론을 진행했다. 눈물나게 재미있었다. 말 그대로다.

부조리한 세상과 못난 내가 씨줄과 날줄로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을 만든다. 학생들의 눈빛이, 친구들과의 소소한 수다가, 무엇보다 유머가 그 벽에 균열을 낸다. 새어 들어오는 빛으로 다시 세상을 분간한다. 자리를 찾아간다.

삶을 사랑할 순 없을지라도 순간순간을 사랑할 순 있다.
그걸로 족하고 그래서 족하다.

이전과 다른 영어공부: ‘슬로 러닝(slow learning)’을 꿈꾸며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슬로 푸드’는 “패스트 푸드(fast food)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지역의 전통적인 식생활 문화나 식재료를 다시 검토하는 운동 또는 그 식품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슬로 리딩은 속독에 대응되는 말로 정보를 취하기 위해 책을 빠르게 읽어내는 속독이 아니라 책의 구절을 음미하며 다각도로 해석하는 독서법을 의미하죠. 속도와 마감에 쫓기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먹는 행위, 읽는 행위를 바꾸어나가려는 슬로 푸드, 슬로 리딩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표현들에 상응하는 의미로서의 “슬로 러닝”은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여전히 학습의 만트라는 ‘빠른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많은 것을’이지요. 학습을 다루는 일부 심리학 분과에서 slow learning이라는 용어가 발견되지만 위의 ‘슬로 푸드’나 ‘슬로 리딩’에서 ‘슬로’가 갖는 함의를 지니진 않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느린 공부’를 지향합니다. 시험을 위한 영어, 스펙을 위한 영어를 넘어 읽고, 말하고, 곱씹고, 성찰하고, 소통하고, 반성하는 영어를 꿈꿉니다. 영어학습에서의 ‘슬로 러닝’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활동으로 나아갑니다.

첫째, 발음공부 즉 ‘소리내기’ 활동에 더해 ‘소리 느끼기’ 활동을 실시합니다. 안면의 근육과 혀의 움직임, 목의 떨림에 민감해져 봅니다. 소리와 이미지, 느낌을 연결시킵니다. 자음 모음을 구별하는 일을 넘어 소리의 자질 자체에 집중하는 듣기를 실시합니다. 코가 간질간질해지는 소리 내보기도 하고 목젖이 떨리는 소리를 골라보기도 합니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언제나 소리에 감응하는 일임을 기억합니다.

둘째, 한 주에 수백 개의 단어를 외우게 하는 ‘단기 속성’ 학습 방식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단어와 나, 단어와 세계의 관계를 곰곰히 생각하며 사고의 지반을 다지는 ‘장기 숙성’ 단어공부를 지향합니다. 단어의 외연적 의미를 넘어 함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한국문화와 타문화를 넘나들며 두 언어간의 어휘 네트워크 비교해 보기도 합니다. “의미있는 단어는 의식의 소우주”라는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의 말처럼, 말 속에서 세계를, 우주를 발견하는 힘을 기릅니다.

셋째, 의미의 단위로서의 문법을 배웁니다. 다양한 세계에 대응하는 조동사(modals), 세계를 감추는 수동태, 우주의 시간과 언어의 시간 등에 대해 생각하면서 문법과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합니다. 텅 빈 구조가 아니라 의미를 생산해 내는 잠재력으로서의 문법을 익혀갑니다.

넷째, 유창성(Fluency)은 그 자체로 지상 과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또박또박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천천히 말하기를 실천합니다. 빠른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과 함께 ‘답답할 정도로 느린’ 이야기를 경청하는 능력을 키워갑니다. 술술 말하지 못해도 마음을 전달할 수 있고, 조금 서툰 말 속에서도 감동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빠름에 대한 동경만큼 느림에 대한 인내를 키워갑니다. 능숙함에 경탄하는 만큼 조곤조곤한 대화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갑니다.

다섯째, 언어능력의 성장을 갈망하듯 자신이 변화하는 모습을 고대합니다. 새로운 말들이 내 안에 쌓임과 동시에 나 자신이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학습을 모니터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을 응시하고 세계와 대면합니다. 말의 풍경이 바꾸는 세계의 풍경에 기뻐합니다.

이렇게 천천히, 조금씩, 오래, 함께 걸어갑니다. 전력질주가 아닌 돌아봄과 성찰로 나아갑니다. 농담과 유머, 상처와 희망을 나누며 오랜 벗과의 산책같은 시간으로 공부를 채워갑니다. 언어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삶의 속도로 언어를 제어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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