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문장에 대한 착각

글을 쓰다 보면 가끔 “머릿속에서는 할 말이 분명한데 이걸 문장으로 풀어놓으면 엉망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는 생각과 쓰기의 존재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생각은 문장만이 아니라 온갖 재료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기억과 경험의 총체 중 일부로, 뉴런들의 다차원적이며 비선형적(non-linear) 연결패턴으로 존재한다. 이에 비해 문장은 하나의 선을 따라 진행하는(linear) 자모와 단어의 연결패턴으로 존재한다. 머릿속 생각과 쓰여진 문장은 분명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전혀 다른 양태로 존재한다. 생각은 외화(externalize)되면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생각이 분명하다’는 착각이다. 분명한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저 할말이 있다는 것, 할 말의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한 생각’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한 생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나, ‘확실히 할 말이 있다’는 확신이나, ‘나에게도 생각이라는 게 있어’라는 자존심을 ‘분명한 생각’과 등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삶을위한리터러시

단어들은 자체의 삶을 갖는다

“나의 기억 속에는 단어들이 있다. 그것들은 표출해야 할 가상성을 빨아들이고, 그것에 타자기로 칠 수 있는 형태를 부여하기 위한 도구에 불가한 것이 아니다. 단어들은 진동하는 단위들이고 자체의 삶을 갖는다. 그것들은 자체의 리듬과 하나의 멜로디를 갖는다. 그것들은 그 뿌리 속에 전체 역사의 아주 오랜 지혜를 감추고 있고, 나는 그 역사의 유산이다. 그것들은 내포된 의미의 매개변수 전체를 반영한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단어들 중에서 표출하려는 가상성에 ‘들어맞는’ 것을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 나는 우선 그것을 들어봐야 한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35쪽) #삶을위한리터러시 #언어의말들

존재론, 의무론, 방법론의 관계

Posted by on Jan 9,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세계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가설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존재론은 세계가 어떠한지를, 의무론은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방법론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다룬다. 이 문제들은 서로 맞물려 있다.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없고,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 수 없다. 또 세계가 변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음도 알 수 없고,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변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의무론과 방법론이 없는 존재론은 없고, 존재론과 방법론이 없는 의무론은 없고, 존재론과 의무론이 없는 방법론은 없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19쪽)

‘맞는’ 쓰기보다 ‘할말을 하는’ 쓰기

오후에 몇몇 분들과 쓰기교육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는 정확성에 대한 집착이 쓰기교육의 발목을 잡는 현상에 대한 개탄으로 수렴되었다.

자전거를 배운다. 비디오를 찍는다. ‘완벽한’ 사이클리스트와 비교하여 자세, 시선, 각도, 속도 등 모든 것을 비교하여 동영상 컷 별로 ‘틀린’ 것을 하나하나 지적한다.

물론 자전거를 이렇게 배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쓰기를 가르치다 보면 선생이 어휘, 문법, 흐름, 논리 등의 측면에서 글을 빈틈없이 분해하고 각각에 대해 피드백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습자 보다는 학부모들이 특히 그렇다.

영작문이나 자전거타기나 일종의 기술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기술을 익힐 때에는 조금씩 발전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동기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다. 자전거 30미터 타고 온갖 피드백을 받지 않는다. 짧은 글마다 온갖 피드백을 받는 게 좋을 리 없다. 게다가 피드백은 대개 빨간색이잖아…

결국 ‘맞는’ 쓰기보다 ‘할말을 하는’ 쓰기가 중요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린 정확성과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교육에서 ‘조금 틀린 채로 계속 달리는’ 쓰기교육은 힘들다는 데 동의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기간에 객관적으로 판단 가능한 변화를 원한다. 물론 그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현재의 영어교육의 구조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 뿐.

#삶을위한리터러시

동영상의 정보밀도

Posted by on Jan 7,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 글과 동영상, 그리고 정보밀도

동영상 강의 컨텐츠를 종종 접하면서 글과 동영상의 가장 큰 차이는 정보의 밀도와 ‘딴짓’의 유뮤라는 생각을 한다.

주지하듯 글보다 동영상의 정보밀도가 훨씬 낮다. 아울러 글의 경우 한 가지 주제를 일관성있게 집중하여 다루는 것이 미덕임에 반해 동영상의 경우엔 집중과 이완을 적절히 배합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섞거나 적절한 유머를 넣는 ‘딴짓’일이 필요한 것이다.

양념이 적절히 배합된 미디어라는 동영상 강의의 특징은 미디어를 대하는 대중의 태도와 변증적으로 엮여 있다. ‘이런 게 동영상 강의지’라는 생각이 동영상의 정보밀도나 딴 이야기의 비율에 영향을 주고, 반대로 이미 나와 있는 영상강의의 특징이 대중이 영상을 평가하는 기준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2. 정보밀도는 제작단가다

이것이 반드시 지켜야 할 절대법칙은 아니다. 동영상의 정보 밀도를 텍스트 수준으로 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교육 컨텐츠 중 하나인 <Crash Course>가 그렇다. 강의를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음성으로 전달되는 설명의 수준이나 밀도가 교과서 못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동영상의 밀도를 상당히 높여도 괜찮을 정도로 원고를 다듬고, 내용구조를 최적화하고, 멀티미디어 자료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원이 투입되어야 하고 이것은 단가의 상승을 이끈다. 결국 정보밀도를 높이는 게 제작단가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3. 정보밀도는 타겟팅이다.

다른 측면에서 정보밀도는 구독자에 대한 타겟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전에 소개했던 과학 커뮤니케이터 VSauce는 왠만한 과학잡지 수준의 글을 별다른 자료 없이 혼자 전달하는 식으로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말도 결코 느리지 않고, 딴소리를 섞는 경우도 적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과학을 사랑하고 그의 전달력에 매료된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빠른 프리젠테이션을 소화할만한 과학 및 정보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이었다. 결국 컨텐츠의 정보밀도가 타겟팅의 역할을 했고, 모일 사람들이 모였다.

이 글을 동영상으로 만들면 몇 분 정도가 적당하려나.
#삶을위한리터러시

전문성의 탈각

Posted by on Jan 5,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응용언어학이나 심리언어학 등을 공부한 이들이 영어교육에 기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다소 실용적인 영어관련 과목을 가르치느라 오랜 훈련으로 쌓아온 학문적 전문성이 탈각되는 현상에는 큰 아쉬움이 있다. 이런 사례 다수를 알고 있고 느리지만 나 또한 그중 하나가 되어간다. 아쉬워 해봤자 뾰족한 해결책은 없다는 걸 알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것. 떠내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는데 점점 몸이 말을 안듣는다.

영어교육과 빈곤

Posted by on Jan 5, 2019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집필 | No Comments

한국사회 영어교육의 문제는 ‘어떤 영어인가’, ‘어떤 교육인가’, 나아가 ‘한국사회가 어떻게 영어를 다루는가’의 문제다. 그런데 결론은 늘 ‘니가 안해서 문제다’로 수렴한다. 빈곤에 관한 담론과 참 닮았구나 싶다. #삶을위한영어공부

너는 할 수 있어!

Posted by on Jan 5,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말은 때로 “이 사회는 도와줄 수 없어!”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다.

우리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손쉬운 응원으로 도망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있어보이는 것과 중요한 것

Posted by on Jan 4, 2019 in 단상, 영어 | No Comments

올해를 시작하면서 마음에 담은 두 구절. ‘있어보이는 것’과 ‘중요한 것’을 구별할 것. 어디를 보고 있느냐에 앞서 내 몸의 위치를 확인할 것. 언제나 서 있는 곳을 살피며 진실로 소중한 일을 도모할 것.

“사람들은 인상적인 것과 중요한 것을 혼동합니다.” You confuse what’s important with what’s impressive. – E. M. Foster

“당신이 기차를 잘못 탔다면 차량의 복도를 따라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If you board the wrong train, it is no use running along the corridor in the opposite direction. – Dietrich Bonhoeffer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위해 넘어야 할 세 가지 장벽

(전략)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위상과 권력을 생각해 볼 때, 영어학습의 역사를 돌아보는 글이 성공과 실패, 투자대비 성과, 원하는 수준에의 도달 혹은 미달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흥미와 재미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점차 성적과 시험을 위한 영어공부가 되는 현실에서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는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누구나 다 하는’ 영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는 쓰라림 또한 떨쳐내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세상은 ‘왜 여태껏 그 실력밖에 안되느냐’고 계속 말하고 있지요.

“삶이 영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영어에 끌려가는 삶.
한국사회의 영어공부는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삶을 위한 영어공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기 보다는 힘겹게 올라야 할 사다리가 되어버린 영어,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하기 보다는 불안하고 팍팍하게 만들고 있는 영어에 대해 고민하면서 붙들게 된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영어공부의 주인이 되기 보다는 끊임없이 사회와 제도가 요구하는 영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화두이지요.

오랜 시간 영어교육과 응용언어학을 연구하면서 한국사회의 영어공부를 관통하는 주요 현상으로 주목한 것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경험보다 입력(input)을 우선시하는 영어공부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하나인 비트겐슈타인이 간파했듯이 언어의 한계는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행위는 단지 새로운 발음과 문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세계의 경계를 깨뜨려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행위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영어교육은 영어를 통한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를 추구하기 보다는 ‘영어정복’을 위한 끊없는 전투를 강요합니다. 최대한 짧은 기간 안에 최대한 많은 언어입력을 받아 고지에 도달해야 하는 미션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단어에 숨겨진 문화와 느낌을 탐구하기 보다는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아이템을 암기해야 하고,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기 보다는 다양한 문제 포맷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어떻게든 빨리 영어공부를 시작해 아이들의 영어 노출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팽배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면 할수록 이 세계의 질서에 더더욱 순응하게 됩니다. 또다른 세계로의 탐험이라는 이상을 철저히 배반하는 아이러니를 낳는 것입니다.

이제 영어공부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합니다. 얼마나 일찍, 얼마나 자주 영어에 노출되느냐가 아니라 영어를 공부하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따져물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이 영어를 공부하느냐가 아니라 공부한 바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하느냐를 고민해야 합니다. 익혀야 할 단어와 문장의 수에 앞서 외국어 공부를 통해 얻게 될 경험의 풍부함에 대해 숙고해야 합니다.

돌아보면 영어를 더 오래 공부하지 못한 게 후회되진 않습니다. 영어를 더 재미있게 공부하지 못한 건 여전히 아픕니다. 더 재미있게 했다면 훨씬 잘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공부의 양이 아니라 경험의 깊이가 말을 알게 합니다.

두 번째는, 학습자가 공부의 주체가 아니라 타인과의 비교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공부는 지식을 쌓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세워가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독서의 목표가 책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학교교육이 목표하는 바를 학교 안에서 이룰 수 없듯이 공부를 통해 이루려는 바는 언제나 삶의 실천에 있습니다. 영어공부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영어공부는 삶의 실천을 주도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안는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많은 이들의 머리 속에는 정형화된 교육과정이 존재합니다. 5세 쯤 되면 파닉스를 해야 하고, 이후에는 코스북으로 말하기를 배웁니다. 이후에는 단계별 읽기자료를 공략하고, 다독 프로그램에 입문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면 문법을 좀 해줘야 하고, 중학교에 가면 내신대비 수업을 듣습니다. 중학교를 마칠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수능 대비 문제풀이에 임합니다. 물론 영재고나 특성화고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이 모든 것에 더해 고교입시에 특화된 학원을 다녀야 합니다. 대학에 가면 취업을 위한 영어공부에 매진해야 하고, 이후에는 승진과 고과를 위한 의무를 채워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점수를 따고 석차를 부여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공부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때로 과감히 다른 길을 선택하는 자율적 주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링컨의 게티스버스 연설의 한 토막을 빌리자면 “우리 자신의, 우리 자신에 의한, 우리 자신을 위한” 영어공부를 추구하기 보다는, ‘영어는 기본’이며, ‘세계화 시대, 누구나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사회의 압력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타인과 자신을 지속적으로 비교하게 되고, 때로 떨쳐내기 힘든 불안과 좌절감으로 이어집니다. 영어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서의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영어 때문에 받는 다양한 스트레스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것은 ‘네이티브’ 즉 영어 원어민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도 저만치에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네이티브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서 있습니다. 자신이 이룬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순간, 어김없이 영어에 대한 열등감이 고개를 듭니다. ‘네이티브처럼 영어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조금만 생각해 봐도 합리적이지 못한 반응입니다. “왜 저 외국인은 나처럼 한국어를 못할까”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는 끊임없이 “왜 당신은 네이티브처럼 못합니까”라고 속삭입니다. 우리 또한 이런 그릇된 사고의 희생자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학습의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네이티브’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또 다른 나’가 되어야 합니다. 완벽한 연주에 집착하기 보다는 매일 조금씩 다른 변주를 시도하는 것. 그것이 새롭고도 건강한 말을 가능케 합니다.

세 번째는, 공부의 기쁨을 쌓아 조금씩 성장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욕망입니다.

자전거나 수영이 그렇듯 영어 배우기도 기능(skill)을 익히는 일입니다. 뇌에 새로운 문법과 어휘지식을 쌓아야 하고, 안면 근육, 구강, 혀, 호흡기관 등을 통해 발화하는 법을 익혀야 하죠. 읽기와 쓰기 등 리터러시를 익히는 일도 만만찮습니다. 그렇기에 외국어를 배우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런 당연한 사실을 망각합니다. 오랜 시간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는 점을 애써 외면하기도 하죠. 각종 광고는 이런 ‘허약한 마음’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영어회화 O주 완성”이나 “스피킹 O주만 하면 네이티브처럼 된다”는 문구로 어떻게든 쉽게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얄팍한 마음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최소 투자에 최대 수익이라는 투자 슬로건이 영어공부의 금과옥조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하지만 영어를 단기간에 정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친구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와의 사귐 속에서 다양한 경험, 재미, 깨달음, 새로운 문화적 체험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영어와 함께 놀고, 떠들고, 감동받고, 박장대소하고, 농담을 주고받는 데서 삶의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체화한 언어학습자로 ‘빨간머리 앤’이 떠오릅니다. 누구보다 깊이 세상과 호흡하는 그는 낱말 하나에 가슴뛰어 잠못들고 자신만의 말들로 이야기에 날개를 답니다. 반짝이는 단어들을 수집하고 길가 나무에 이름 하나도 허투루 붙이지 않지요.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건 그의 말에서 끝도 없이 솟아나는 상상의 세계입니다. 그의 말공부에는 세계에 대한 경탄이 녹아 있습니다. 삶과 언어가 혼연일체가 된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같은 ‘상상의 복원’이야말로 영어라는 친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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