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어떤 개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cat. It is very cute.”

여기에서 ‘a cat’은 고양이 한 마리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양이 중 하나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is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과 2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이런 면에서 “a(n)”의 의미는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관사공부중

A second thought

Let me give it a second thought.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보태어 봅니다.

“The only”도 그랬지만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와 같은 표현들도 깨져서는 안되는 법칙으로 배웠습니다. 이는 “서수 앞에는 the를 붙여라!”는 구호(?)로 정리되었죠. 하지만 이 공식에는 헛점이 있습니다.

제가 첫 문장에서 쓴 “a second thought”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는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다” 정도의 뜻으로 “a second thought”와 같이 부정관사를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차이 또한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에서 “second”는 ‘다시 한 번’ 한번 더’ 정도의 의미입니다. 서수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것이죠. “take a second look(다시 보다)”과 같은 용법도 비슷합니다. 만약 우주선을 만드는 팀의 디렉터가 “Nobody deserves a second chance here.”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두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도가 되겠죠. 우주선이 폭파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니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학술논문에서 생각나는 예는 “a second limitation”과 같은 표현있습니다. 연구의 한계를 논의하며 “두 번째 한계로는…”과 같이 이야기할 때 쓸 수 있는 어구죠. 이 경우에는 한계점이 몇 있는지 언급하지 않고 “첫 번째 한계는…이다. 두 번째 한계는…이다.”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특정 대상의 수가 N으로 한정되어 있고, 이에 대해서 “첫째, 둘째, 셋째… N번째”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면 서수 앞에 모두 the를 붙이는 것이 맞습니다. “There are three problems with this method.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언어는 꽤나 말랑말랑합니다. ‘법칙과 예외로 구분되는 세계’라기 보다는 ‘개념화와 맥락으로 창조되는 세계’에 가깝습니다.

#관사공부중

the only child vs. an only child

 

오래 전 ‘the only child’를 ‘외동’으로 배웠습니다. 형제가 없는 경우 반드시 ‘the only child’로 써야 한다는 것이죠. 이 설명에 따르면 ‘an only child’는 틀린 표현이었고요.

그런데 “He is an only child.”라는 문장을 꽤 자주 만나게 됩니다. 구글은 578만 건의 “an only child” 검색 결과를 보여주는데요. 결코 적지 않은 수죠. (“the only child”는 약 800만 건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른 것은 저에게 ‘the only child’만이 옳다고 말씀해 주신 분의 설명이었죠!)

위에서 나온 “He is an only child”는 “그는 외동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an only child”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동들 중 하나’라는 개념을 갖고 있죠. 부정관사 “a(n)”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다수 중 하나’라는 뜻이 됩니다. 한국사회에서 외동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니 저런 문장을 쓸 일도 많아질 듯합니다.

이에 비해 “the only child”는 “단 한 명의 자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너 형제나 자매가 있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하면 “나는 외동이야.”라는 뜻이 됩니다. 형제나 자매가 없다는 뜻이죠.

이 외에 상황에 따라 “Jane was the only child in this class.” (Jane은 이 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일한 아동이야.) 라는 식의 활용도 가능합니다.

위의 두 예문에서 “the only”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the only child in my family”에서는 가족 내에서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고, “the only child in this classroom”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를 ‘다수 중의 하나’라는 개념을 지닌 “an only child”와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the only child in my family”가 일반적으로 ‘외동’임을 의미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두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화제작인 A를 보지 못하고 B를 관람했다고 합시다. 왜 그랬을까요? 형 누나는 성인이어서 어떤 영화나 볼 수 있지만 자기는 미성년이어서 A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등 다른 가족은 모두 성인(adult)인데, 자기만 유일하게 성인이 아닌 아동(child)인 상황이죠.

덧.
어제 SteemIt 가입 승인을 받았는데, 뭘 써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새롭게 뭔가 써낸다는 건 현재 역량으로 불가능할 것 같고요. 기존에 썼던 관사 공부 포스트를 잘 엮어서 연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연재할만큼 원고가 정리되면 차곡차곡 올려보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SteemIt이 살아남아 있다면 말이죠. ^^

 

#관사공부중

영어로 논문쓰기 2018 겨울 강좌 마감

Posted by on Mar 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8주간의 여정을 수강생들에게 메일을 쓰는 의식으로 맺는다. 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새학기가 시작된 기분. 그래도 무사히 끝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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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영어로 논문쓰기 강좌를 진행했던 김성우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오늘로 마지막 수업이 끝났네요.

한달 간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기뻤고,
열심히 참여해 주시고 여러 모로 격려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공부하는 삶이라고 더 특별할 것 없고
사는 건 언제나 모순과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깊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써낸 것을 다듬는 일상 속에서
반짝거리는 기쁨을 얻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누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다면 언제든 메일 주세요.

몇 차례 언급했던 지도교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오래 전 끄적임, 어찌보면 참 나이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도 마음이 느슨해질 때면 꺼내보곤 하는 글입니다.

토요일 오후, 오랜 추위 끝에 찾아온 햇살같이
따스한 한 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Peace,
김성우 드림

20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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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밥벌이하며 살아간다는 것>

지금은 새벽 두 시 이십 칠 분. 어제 지도교수와 한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터라 졸업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어제도 졸업 후 미국에 남아있게 될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 쪽으로 진로를 결정할 것인지 등등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선 저는 대학에 남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대학에 남는 것이 학자로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에게 가장 좋은 학자는 세계를 깊이 성찰하고, 성찰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런 성찰과 소통을 연대로 이어내는 사람입니다. 특히나 교육과 언어학, 심리학과 인류학 등이 ‘짬뽕된” 응용언어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있기에, 삶에 대한 이해와 개입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밥벌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관심이 많다 함은, 밥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밥벌이라는 표현은 저에게 비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 삶을 지탱하고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찌 보면 ‘내 앞가림은 꼭 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사실 (절대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나름 힘들었던 시절을 겪은 후로 빈곤이 저 자신과 관계에 대해 미칠 수 있는 파괴력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저와 지도교수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저는 지도교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경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분야를 개척한 “대가”(이 단어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라 빌려 씁니다)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무엇보다도 정말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지도교수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언제 졸업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졸업과 관계 없이 지도교수가 제 삶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 같습니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도교수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연구를 하는 학자로 남고 싶냐고. 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연구중심 대학으로 가려고 생각해 보면 지금 출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슬슬 걱정도 된다고. (지금 저는 졸업만 해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꼭 연구중심 대학에 가려는 생각도 없고요.)

지도교수가 말했습니다.

“정말 연구자로 살아가고 싶다면 어떤 기관이든 들어가서 계속 연구를 해라. 요즘 학생들은 연구중심 대학에 바로 가려고 하는 생각이 많은 거 같다. 너무 고른다. 하지만 평생 연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교육 중심 대학(teaching school)으로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거기서 시작하는 거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길을 만들면 된다. 물론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면 거기에서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이 학교에 오기까지 5번 학교를 옮겼다. 처음에 간 학교는 아주 작은 지방의 학교였다. 나는 가족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누구든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연구중심 대학에 가야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연구자로 살고 싶다면 어디든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그런데 너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느 쪽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디든 월급 주는 데로 가야죠. (“I’ll go wherever they pay me.)”

지도교수가 웃더군요. 그리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좋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가에 너무 가치를 두는 건 좋지 않다. 그리고 만약 네가 진정한 연구자로 살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건 하루의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할애하는 일이다. 학교 사정이나 집안 사정, 혹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반드시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써야 한다. 물론 이게 쉽지는 않다.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학자로 살아가려 한다면 삶의 고난이 와도 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일 때문에 다른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아서 이걸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시간에 “파티션을 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참고로 지도교수는 리버럴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실천과 이론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을 꾸준히 확보하지 않으면 학계에서 네가 원하는 일을 해내긴 힘들다.”

이제 새벽 세 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사실 많은 세월 동안 사회 정치적 이슈와 씨름하면서 살아왔고, 이를 후회하진 않습니다. 앞으로도 삶의 본질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러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그 삶 속의 많은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제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세상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튼튼하고 쓸모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제가 하고 있는 일 (공부라고 불리는!)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핵심을 위해 매진해야 하고, 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지도교수의 말 속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삶의 일정 부분을 늘 읽고 쓰는 데 쓰는 것. 그리고 마음 아픈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이 공부의 시간을 양보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 공부의 시간을 통해 지위를 얻거나 ‘좋은 연구 중심 대학’에 가기 위해 쓰지 않는 것.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의 파티션”을 치는 것.

가끔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꼭 졸업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가끔은 이왕 4년 한 거 마치고 오라는 말씀도 ㅠㅠ) 교사 자격증이 있으니 임용 시험을 보거나 사립학교에 지원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맞장구를 칩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면 그거 하고 살면 된다고.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된다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속한 공동체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일과 공부하는 것이 꼭 다른 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해서 남주냐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남주려고 공부하는 삶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에 파묻히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세계로 덮어버리는 공부도 가능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 일상의 행복을 접는 게 아니라, 공부를 통해 일상에서 더 깊은 행복을 맛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처럼, 제가 사랑하는 말과 사람의 세계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미투논쟁 단상

Posted by on Feb 26,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단상 (대부분 저를 위한 리마인더입니다.)

하나. 말의 무게를 모르는 언론, 삶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하는 정치. 그들은 ‘소통’하고 ‘상생’합니다.

둘. 삶이 아무리 무거워도 말을 정성스레 고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타인의 삶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 속에서 체화했기 때문입니다.

셋. 가끔은 “정말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가 가장 적절한 말입니다. 슬픔과 고통에 반응하기 위해 강력한 수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곁에 서는 것으로 족하지요.

넷. 진영권력을 전복하려는 결단을 다시 진영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여야 합니다. 진영을 해체하여 모두의 일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다섯. 여전히 타임라인의 ‘논쟁’에는 남성의 목소리가 압도적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여섯. 누군가의 의견을 ‘몇 살 짜리의 능력’으로 폄하하는 것은 자신의 미숙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세상을 훌륭하게 읽어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은 많습니다.

일곱. 수천 년 스케일의 싸움과 수십 년 스케일의 싸움이 겹쳐 보입니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의 틀 안에 수천 년을 가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 ‘잘 읽어낸다’는 건 무슨 의미일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Good+bye vs. Fare+well: 유의어는 유의어가 아니다

Goodbye와 Farewell은 유의어다. 물론 평소에 “Farewell!”로 친구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없으니 Goodbye의 쓰임이 훨씬 광범위하고 구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의 의미차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우주여행을 떠나는 배우자에게 하는 인사라면 어떨까? 아래 방송의 문맥에서 Goodbye와 Farewell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PETTIT: And I assured Don that I believed in what he was doing and I would be OK. And we held each other and you know, it was kind of like, this could be a goodbye.
PETTIT: Goodbye but not farewell.
 
“Farewell”은 Fare+well의 결합이다. Fare에는 ‘여행하다’, ‘여정을 떠나다’라는 뜻이 있고, well은 ‘잘’이라는 의미다. 여정에 어려움이 없길 바란다는 뜻이 담긴다.
 
이에 비해 (위 문맥에서) “Goodbye”는 말 그대로 작별인사다. 더 이상 서로를 볼 수 없는 상황, 영원한 이별 말이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비슷한 말의 거리가 벌어질 수 있다. 맥락에 따라 사전에 등재된 반의어(antonym)들의 거리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

[잡생각] “시간이 흐른다”를 대치할 메타포에는 무엇이 있을까?

1.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끊기지 않는 흐름임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2. 흐르는 것의 대표로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강이 아닐까?

3. 시간에 대한 표현을 생각하니 ‘Time flies.’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외에도 시간은 come, go, pass, approach, leave, run, elapse, remain, walk, crawl 등을 할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많겠지만.)

4. Time을 주어로 생각하면 시간이 흘러가고, 날아가고, 오고 가며, 지나고, 다가오고, 떠나고, 달려가고, 지나가고, 남아있고, 걸어가고, 기어가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를 듯하다.

5. 개인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간이 가는 일은 인생의 수많은 요소들이 다시 구획되고(rearticulated), 재영토화되며(reterritorialized), 재개념화되는(reconceptualized) 일이다.

6. 다양한 재구획화, 재영토화, 재개념화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과 정확히 맞물리지 않는다.

7. 먼 과거가 미래가 되기도 하고, 현재의 시간이 철저히 과거로 느껴지기도 한다. 물리적, 심리적, 개념적 시간들이 중첩되고 간섭하면서 인간의 시간을 엮어간다.

8. 실타래처럼 엮인 개인의 시간들이 일정한 질서를 형성할 때 역사적 시간을 빚어낸다. 하지만 역사의 공간성은 또다른 시간을 빚어낸다.

9. 산책 길에 만난 스팸 선물 박스. 나는 스팸문자와 메일을 떠올렸다. 잠시 후 또다른 스팸 포장지가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후자의 스팸 포장지는 처음 발견한 스팸 박스와 겹쳐졌다. 아니 처음 것이 후자에 겹쳐진 걸까.

10. 물리적 시간은 우주와 함께 흘러가지만 경험의 시간은 뇌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엮인다.

11. 우리는 우리 몸 안팎의 네트워크의 연결/위상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감지한다.

12. 오늘이라는 시간은 내/네 인생과 어떻게 엮였을까? 해가 기울어지는데 오늘이 외톨이 노드로 남을/잊혀질/버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론: 오늘이라는 시간이 영원히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을 엮어보자.

유사공정(類似公正, pseudo-fairness)

Posted by on Feb 12,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공정’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많다. 공정을 따옴표 안에 넣은 것은 단어를 인용한다는 뜻과 함께 공정이 아닌 것이 공정이라 불린다는 뜻도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정’이 가장 언급되는 경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의에서인 듯하다. 비정규직 공무원, 인천공항 노동자, 비정규직 교사 등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이다.

(최근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글이 다루려는 주제는 아니다. 언급한 ‘공정’의 대표적 용례는 아래 기사 참조.)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려다 취준생 기회 박탈… 이게 공정한 나라냐” (한국경제)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21118271

난 이 기사의 제목이 우리사회의 ‘유사공정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다소 이상적이라고 불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공정’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개념이다. 노동자 전체, 나아가 모든 시민을 포괄하는 공정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의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는 공정은 필연적으로 ‘강요하는 자’와 ‘강요받는 자’라는 불공정한 위계구조를 생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논의는 공정의 적용 대상을 취준생과 비정규직으로 손쉽게 규정한다.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려다 취준생 기회 박탈… 이게 공정한 나라냐”에서 공정의 잣대 아래 놓이는 집단은 취업준비생과 비정규직 뿐이다. 정규직은 어디 있는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이들은 어디 있는가?

특정한 집단–위의 경우에는 노동(가능)계층에서 약자 집단–만을 문제삼는 ‘공정성’ 논의는 공정의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정규직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공정함이 과연 ‘공정함’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정규직이 공정 논의에서 열외일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정규직 공채(시험) 통과 여부’이다. 이 외엔 그 어떤 기준도 없다. 과거에는 소위 ‘좋은 대학’에 가서 한 평생 덕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젠 ‘시험에 통과했으니’ 공정함의 기준을 모두 만족시켰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가 이들과 같이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다수가 ‘공정 열외 패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공정은 유사공정(類似公正, pseudo-fairness)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묻고 싶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공정함은 얼마나 공정한가?
그것을 ‘공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언어 정보의 잉여도(redundancy)와 스포츠 중계

얼마 전 밥을 먹으며 올림픽 중계를 흘려 듣는데 해설자의 다음 말이 엄청 크게 들리더군요.

“이 기술은 마스터하면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음……..

특정 기술을 마스터(master)한다 함은 그것을 수행할 때 신체의 모든 영역이 특별한 어려움 없이 완벽한 협응(coordination)을 이룬다는 의미이니 당연히 쉽겠죠. 비슷한 표현으로 “완치되면 안아픕니다.” “다 쓰면 세제가 없을 거예요.” 같은 게 있으려나요.

스포츠 경기 해설에서 유독 이런 문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뻔한 이야기 말이죠.

“이 기술은 마스터하면 쉽습니다” 같은 문장에는 새로운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언어신호의 양에 비해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겁니다.*

이게 스포츠 해설만의 문제는 아니고, 언어체계의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대충 이야기하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같아도 이를 전달하는 언어는 구정보(old information)와 신정보(new information)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정보로만 된 언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수식으로만 되어 있는 이론물리학 페이퍼를 읽는 상황은 거의

신정보만 접하는 예입니다. 신정보의 바다에 빠지면 ‘한 개도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죠.

때로는 동일한 정보를 살짝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이해를 돕기도 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위 별표(*)한 문단의 두 문장은 이 방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신호량에 비해서 새로운 정보의 양이 적을 때 잉여도(剩餘度, redundancy)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언어 외에 ‘남아도는’ 언어신호가 많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잉여도가 높으면 나쁜 걸까요? ‘용건만 간단히’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통용되는 금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보의 정확한 전달이 중요한 경우 잉여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항공관제탑과 파일럿 간의 소통입니다. 주요 정보를 몇 번이고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지요. ‘잉여’ 언어신호가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집중력, 정보 저장 능력, 인출 능력 등에 한계가 있기에 잉여 정보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정보의 입장에서 보면 잉여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주도면밀함’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스포츠의 경우로 다시 돌아오면 언어의 정보량이 떨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 반드시 성공해야 역전이 가능하죠.”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데 지고 있으니 당연합니다.) 같은 해설이 적지 않다는 겁니다. (이 문단 전체가 잉여…)

하지만 스포츠 해설에 있어서 전달되는 정보의 상당 부분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에서 골이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골을 넣는 장면과 거의 동시에) 골이예요. 골! 골! 골! 골~~~~~ 아 아 골~~~ 골! 골! 드디어 첫 번째 골이 들어갔습니다!!!”

시청자들은 소리와 화면으로 골이 들어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골이라는 것도 모르기 힘들고요. 이 상황에서 저 말의 정보량은 제로에 가깝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해설자의 흥분과 기쁨, 놀라움을 전달합니다.억양이나 고저, 장단과 같은 자질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요. (예: 골!이 아니라 고~~~~~~~~~~~~ㄹ)

이는 ‘경기 해설’이라고 불리지만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서적 반응만으로 훌륭한 ‘해설’이 되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골이 들어가는 순간 해설자는 해설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 같네요. ^^

이번에는 간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성우: “어, 철수야. 오랜만이네. 왠일루?”

철수: “그냥.”

여기에서 “그냥”이 자체로 담고 있는 인지적 정보는 작습니다. 하지만 간만에 전화를 한 상황에서 ‘그냥’은 상당히 높은 정서적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냥 전화해 주는 친구가 최고라고 느껴질 때도 있죠.

결국 언어는 구정보와 신정보를 적절히 담고 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상황에 따라서 구정보가 의도적으로 반복되기도, 정서적 정보가 증폭되어 전달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구정보와 신정보, 인지적인 정보와 정서적인 정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입니다.

이 상황에는 매체적 특성도 포함되는데, 글과 면대면 강의, 동영상 강의 등에서 단위 시간당 효율적 정보량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쓰다 보니 글의 잉여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만 쓰고 잉여의 삶으로 재진입해야 하겠습니다. 모두 조금은 잉여스러운 오후 시간 되시길 빕니다. :)

 

영어로 논문쓰기, 한 해를 되돌아보다

한해 동안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영어로 논문쓰기> 대중강의가 시작된지 만 1년이 지났습니다. 10주간의 커리큘럼을 4주(12시간) 분량의 강의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완료되었고, 네 번째 기수의 수업이 진행중입니다. 요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게 됩니다. 크게 세 가지 일을 구상/진행중입니다.

(1) 강의록을 보강하여 책으로 발간

(2) 압축버전을 동영상 강의로 제작

(3) 인문사회분야라는 다소 넓은 영역에서 개별 학문 영역으로 세분화 (e.g. 응용언어학, 영어교육, 보건학, 경영학 등)

학술리터러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들과 만나면서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여러 대학원생들과의 이야기 가운데 연구자들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이 충분히 가치있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하나하나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지만, 생각을 놓지 않는다면 함께할 인연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리 대단할 것도 없지만 업신여겨서도 안되는, 따로 또 같이, 부드럽고 또 날카롭게, 세상을, 관점을, 마음을, 진실을, 비참과 희망을 담아내는 글. 딱 삶만큼 무겁고 그만큼 시시한 글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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