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터러시 교육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

1. 리터러시를 가르치는 게 어려운 이유는 여러 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글자 읽기, 글읽기, 쓰기, 독서교육, 가족 내 리터러시 활동, 학습습관 발달, 새로운 미디어 활용하기, 사회적 인프라 확보 등등 다양한 영역에서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2. 하지만 리터러시를 사회적 소통의 인프라스트럭처로 봤을 때 리터러시 교육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3.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은 단지 글자와 단어를 나열하는 행위가 아니다. 독자와 저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엮어 글을 이해하고 써내기 때문이다. 리터러시는 문자해독이나 생산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를 직조하고 공유하는 행위다.

4. 3과 조금 결이 다르지만 읽기와 쓰기는 흔히 상향식 정보처리(bottom-up processing)와 하향식 정보처리(top-down processing)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적 정보처리(interactive processing)으로 이해된다.

5. 내 눈 앞에 텍스트는 분명한 실체가 있고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컨텍스트는 다르다. Teun A. van Dijk이 이야기하듯 컨텍스트는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 사건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컨텍스트는 특정한 시공간이나 사건 등에 대한 심성모델(mental model)이다. 그리고 이 심성모델은 단지 글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 하나, 발음 하나 하나에 적용된다. (나의 ‘공정’과 당신의 ‘공정’이 판이하게 다르다면 ‘공정한’이라는 말은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6. 심성 모델은 순식간에 바뀌지 않으며 즉석해서 생성될 수도 없다. 오랜 기간의 경험과 지식, 독서경험 등이 쌓여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정신적 모델이 형성된다.

7.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심성모델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고 싶어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모델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있으면 쉬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돼?”

사실 소셜미디어에서 우리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관련기사:
타인도 내 의견에 동조한다는 ‘착각’에 숨은 물리학 법칙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584&aid=0000005529

8. 여기서 사회적 소통의 인프라로서의 리터러시 교육이 어려운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나와 다른 심성모델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생각이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로버트 퍼트넘이 <우리 아이들>에서 지적했듯 사회적 섞임(social mixing)이 사라진 시대에 사회는 점점 양분화되고 또 하위 집단 사이의 단절은 강화된다.

관련기사:
“갈산초로 통학구역 변경해달라” 소송 낸 목동 학부모들 패소
https://news.v.daum.net/v/20190818175216194

9.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삶을 위한 리터러시”의 초반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이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글을 읽고 쓰고 비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좋은데 결국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커뮤니티를 축조하고 그 안에서 동일한 담론을 반복 확대하는데 활용된다면 비극 아닌가.

10. 물론 교육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실 그래서 더 심란하다.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교육은 뭘 할 수 있는가? 계속 뭔가 하겠지만 낮게 깔린 우울과 패배의식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다.

11. 결국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의 기조가, 발달의 전 과정이 새로와져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이상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리나마나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우리 모두가 필요한 작업이다.

We’re all in this together.

12. 결론적으로 계급과 이념의 문제를 제외하고 리터러시를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핵심은 언제나 문자가 아니라 사회에 있었다. 텍스트의 문제는 컨텍스트의 문제이다.

컨텍스트를 지배하는 자가 텍스트를 지배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비판적 리터러시의 기본: 텍스트 꼼꼼히 읽어내기

“비판적 리터러시”는 다양한 층위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계관과 철학, 배경지식과 텍스트의 연결, 타인의 텍스트와 해당 텍스트의 비교, 저자의 이전 글과 해당 텍스트의 비교 등 실로 다양한 방면에서 접근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텍스트 자체를 꼼꼼히 읽어내는 것입니다. 내용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언어적 장치들을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아래에서는 힐러리 쟁크스 저 <리터러시와 권력> 4장 “텍스트 비판적으로 읽기”에서 논의된 텍스트 분석을 위한 글의 특징들(textual features)을 알아보겠습니다. (책에 소개된 목록의 일부이며, 각 항목에 제 나름의 설명을 달았다는 것을 밝힙니다.)

1. 어휘화: 해당 텍스트에 사용된 어휘는? –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는지 검토한다. 해당 어휘의 선정은 적절한가? 대안은 없었는가? 특정 어휘의 선택이 특정 사회계층이나 소수자에게 차별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은 없는가?

2. 과어휘화: 같은 현상이 여러 어휘로 표현되고 있는가? 한 가지 현상이 다른 단어로 반복되어 표현될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 하나의 개념이 여러 어휘로 변주되어 표현되면서 어떤 개념적, 수사적 힘이 발휘되는가?

3. 어휘적 응집성: 한 어휘의 동의어, 반의어, 연관어 등이 어떻게 배치되고 연관을 맺는가? 텍스트에 제시된 어휘간의 관계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가?

4. 비유: 텍스트 내에 어떤 비유가 사용되었는가? 그들은 어떤 효과를 갖는가? A라는 세계와 B라는 세계가 비유로 연결될 때 그들 사이의 사상(mapping)은 적절한가?

5. 완곡어구: 특정 현상을 돌려 말하는 부분이 있는가? 좀더 직접적인 표현이 사용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어구를 선택했다고 판단되는가? 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6. 타동성: 이것은 시스템-기능 언어학의 개념으로 주로 동사로 표현되는 텍스트 내의 과정(processes)들 중 물질적 과정, 존재와 소유, 사고, 감각 및 인지, 말하기, 행위하기 등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덧. 이에 대해서는 몇 마디로 요약하기 힘드네요. 관심있는 분들께서는 아래 아티클을 참고하세요.

https://staff-old.najah.edu/…/Functional%20grammar%20proces…

7. 태: 능동태와 수동태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수동태의 경우 가려지는 것은 무엇인가? 특정 요소의 생략과 함께 인과나 권력관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힘들어지지는 않는가? 문장 단위에서 책임소재는 어떻게 특정되는가?

8. 명사화: 어떤 명사화(nominalization)가 사용되었는가? 주체와 대상을 수반하는 동사적 과정이 명사로 바뀔 때 무엇이 탈각되는가?

9. 간접/직접 인용: 누구의 말이 왜, 어떻게 인용되는가? 그 인용은 적절한가? 인용시 어떤 동사가 사용되는가? 추정하다? 주장하다? 가정하다? 예상하다?

10. 말의 차례: 텍스트에서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한다면 그들은 어떤 순서로 말하는가? 말의 분량이나 순서에 있어서 불평등은 없는가?

11. 긍정과 부정: 어떤 문장이 긍정문으로 제시되고 어떤 문장이 부정문으로 제시되는가? 왜 그렇게 제시되는가?

12. 법성: 어떤 명제는 사실로 진술되고 어떤 명제는 가능성으로 제시되는가? 개연성과 사회적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들이 존재하는가? 문장의 인식론적, 윤리학적 위상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13. 대명사: 상대를 포함하는 we와 그렇지 않은 we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 ‘우리’라는 말에는 누가 포함되고 누가 포함되지 않는가? 화자의 ‘we’가 당신이 생각하는 ‘we’와 같은가?

14. 정보의 배열: 정보는 어떤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가? 그러한 배열의 효과는 무엇인가? 어떤 대안이 있는가? 혹 정보배열에 따라 특정 인과관계가 암시되는가?

15. 논리적 연결사 및 접속사: 문장들간의 논리적 관계는 어떤 언어적 장치로 표현되는가? 특정 진술에서 다음 진술로의 전환은 자연스러운가?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을 검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을 적용해 보면서 텍스트가 하나의 단일한 메시지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인상을 깨고 여러 가지의 목소리와 정보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직조물(texture)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은 텍스트로 촘촘하게 짜여져 우리에게 전달되며 이는 몇 개의 아이디어로 독자의 뇌 속에 표상됩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의 형성을 역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으로 분석하면 이들 아이디어가 가지는 한계와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리터러시는 바로 이 작업에서 시작됩니다.

출처: 힐러리 쟁크스 저, 장은영, 이지영, 이정아, 장인철, 안성호, 김혜경, 양선훈, 허선민, 서영미, 김은영 옮김, 김성우 감수 <리터러시와 권력> (사회평론 아카데미) 133-136

우리의/그들의 문장은 어떤 세계를 담는가? – 문법을 보는 새로운 가능성과 리터러시 교육에 대하여

1. 문법은 문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규칙이기 이전에 세계의 중단없는 사태를 분절적 텍스트로 변환하는 도구이다.

2. <단단한 영어공부>에서도 논의했듯 우리는 문법을 ‘형법’으로 배워왔다. 조항을 외워서 틀리고 맞고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법의 본질은 우리의 물리적, 심리적 세계를 텍스트화하는 도구라는 사실에 있다. 그런 면에서 문법책은 ‘형법서’가 아닌 ‘마법상자’가 되어야 한다.

3. 세계는 문법을 거쳐 어휘의 옷을 입고 텍스트가 된다. 내가 바라보는 우주는 소포로 싸서 배송할 수 없지만 텍스트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과 생각은 나의 뇌와 몸에 ‘갇혀’ 있지만 문법의 도움으로 텍스트화되어 누구에게든 가 닿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최초의 가상현실(VR)은 최근의 IT 기술이 아니라 텍스트의 발전에서 이미 구현된 것이다!

4.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문법을 좀더 크게 이해할 수 있다. 단지 텍스트 뿐 아니라 세계와 의식이 특정 매체(텍스트, 영화, 만화, 그림, 웹툰 등)로 변환되는 방식을 총칭하는 메타용어(meta-terminology)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가 영상으로 변환되는 일련의 규칙들을 영화의 문법이라 할 수 있고, 일상이 웹툰으로 전환되는 데 동원되는 기법들을 웹툰의 문법이라 할 수 있다. 매체마다 다른 문법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세계가 변환되는 데 개입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위상을 지닌다.

5. 다시 언어로 돌아와 보자. 시스템-기능 언어학(SFL: Systemic Functional Linguistics)에 따르면 문법은 물리적, 심리적 세계에서 특정 참여자(participants)를 ‘캐스팅’하고, 이들과 관련된 과정(processes)을 설정하고, 참여자들과 과정이 어떤 환경(circumstances)의 영향을 받는지 설명한다. 예를 들면 누가, 무엇을, 언제/어디서 했는지를 텍스트화하는 것이 문법의 역할이다.

6. 여기에서 비판적 읽기의 가능성이 도출된다. 텍스트는 세계를 특정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에 따라 참여자와 과정, 환경을 제시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도구로 동원되는 것이 문법이다. 따라서 비판적 읽기는 ‘누가 캐스팅되었는가’, ‘왜 이 과정이 부각되었는가’, ‘제시된 환경은 가장 중요한 환경인가’를 따져물을 수 있다.

7. 안타깝게도 한국 영어교육에서 문법은 ‘문장의 규칙’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문법의 이런 기능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총체에서 어떤 참여자들을 불러내고 어떤 관계들을 설정하고, 어떤 환경 하에 놓여있다고 진술할 것인가이다. 우주가 텍스트가 되어 책에 담기는 일련의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8. 이 점에서 문법은 비판적 리터러시 교육과 만난다. ‘이 문장이 문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넘어 ‘이 문장의 캐스팅은 적절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문장에서 3인칭 단수가 s가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왜 이 문장은 3인칭으로 진술되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이건 부사구이니 5형식을 판단하는 데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왜 수많은 환경 중에서 이 내용이 부사구로 선정되었을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9. 나아가 그들의 대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이 텍스트는 이렇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가?’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이 이런 텍스트를 만들어 내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핵심이다.

10. <단단한 영어공부>에는 영어의 수동태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한 독자는 이 부분을 보고 ‘너무 오버한다’고 평가를 하기도 했지만, 문장의 문법적 특징이 담론의 질서를 은밀히 코드화한다는 지적은 이의를 달기 힘든 공리와도 같은 주장이다.

11. James P. Gee의 지적과 같이 문법은 선택의 시스템(a system of choices)이며, 선택에는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는 그 선택을 좀더 면밀하게 따져들고 다른 누군가는 아무 생각없이 내지를 뿐이다.

12. 그런 맥락에서 문법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선택의 무게’에 대한 인식을 키우는 것이며, 이는 리터러시 교육의 핵심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

텍스트의 세계는 선택된 세계이다.
우리의 선택에는 윤리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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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태의 정치학

이번에는 수동태를 살펴볼까요. 수동태를 공부할 때는 수동태의 형태(be + 과거분사+by~)보다는 수동태가 묘사하는 여러 사건들에서 수동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그것이 어떻게 언어로 표현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Many immigrants are deprived of their rights.
(많은 이민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한다.)
(2) The current immigration laws deprive many
immigrants of their rights. (현재의 이민법은 많은 이민자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한다.)

두 문장은 하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동태 문장 (1)에서는 ‘박탈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민자들의 현재 상태만 그려 냅니다. 하지만 능동태 문장 (2)에서는 이민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주체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현재의 이민법을 입안하고 가결한 사람들이 존재하겠지요. 이 같은 분석을 통해 수동태라는 언어적 장치에서 인간이 경험적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능동태나 수동태를 선택하는 일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 즉 ‘수동태의 정치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단단한 영어공부> 중에서

영화 Arrival 수업 메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Arrival>은 언어와 소통, 시간과 경험, 기억과 운명 등에 대한 풍부한 메타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가 언어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인 언어와 사고의 관계인지라 제가 담당하는 <언어와 사고> 과목에서 보기에 안성맞춤이었죠. 지난 학기 영화를 보고 수업을 진행했는데요. 당시 메모했던 내용들을 소개합니다. (참고로 저는 이 영화가 지금 작업중인 #삶을위한리터러시 의 주제의식과 잘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1. 이 영화는 외계인과 인간의 조우를 기본 스토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지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영화를 꼼꼼히 보고 나서 이 구도를 우리 삶의 어떤 영역에 대한 메타포로 볼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2. 영화의 제목은 <Arrival>이지만 한국에서는 <컨택트>로 개봉되었습니다. 이 두 제목에서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영화를 본 후에는 이 두 제목의 차이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3. 언어학자 Louise Banks와 물리학자 Ian Donnelly의 첫 만남에서 Ian은 Louise가 쓴 책의 한 구절을 읽어줍니다. “Language is the foundation of civilization. It is the glue that holds a people together. It is the first weapon drawn in a conflict.”라는 부분이었죠. 이 부분이 영화의 처음에 배치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언어학에 관한 책을 쓴다면 언어를 어떻게 멋지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4. 왜 영화의 주인공이 하필 언어학자와 물리학자일까요? 사실 학자 둘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무척 드물죠.

5. “그들이 반응을 보여도 뜻을 모르죠”라는 대사를 만나게 될 겁니다. ‘반응(response)’과 ‘뜻(meaning)’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어떤 경우에 반응을 보여도 뜻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반응의 뜻을 상관하지 않고 그저 반응하진 않나요?

6. “So what happens now?” “They’ll arrive.” – 헵타포드와의 첫 만남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들이 올 겁니다.’라고 답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영화의 제목인 ‘Arrival’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냐는 질문에 ‘올 거야’가 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7. 우주선이 세계 도처에 나타났을 때 뉴스에서 기독교계의 해석이 스쳐 지나갑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 UFO가 출몰한다면 기독교계를 비롯한 여러 종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8. Louise가 가르치는 첫 단어는 “Human”입니다. 이건 적절한 접근법일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혹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9. 8번의 질문과 연결해서 미지의 존재를 만났을 때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려 하는 것은 적절한 일일까요?

10. 언어를 가르침에 있어서 질문을 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질문이 무엇인지 이해시켜야 한다’는 장면이 나오죠. 인간의 언어에는 어떤 가정들이 담겨 있나요? 평서문, 의문문, 감탄문, 부정문, 가정 등의 범주는 우리에게 어떻게 학습되나요?

11. Louise는 “They need to see me.”라고 하면서 우주복을 벗습니다. 이것은 일련의 방역체계를 무력화시키는 일입니다. 이 장면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12. 헵타포드 둘에게 “애봇”과 “카스트로”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 같은 labeling은 반드시 필요한가요? 우리에게 이름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부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13. 영화를 관통하는 학설은 사피어-워프 가설입니다. 워프 가설의 내용을 살펴본 바 있는데요. 이 내용은 영화 속에 잘 녹아들어 있나요?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그렇지 않은가요?

14. 각국간의 교신이 끊기고 소통이 단절되는 순간 전쟁은 가까워 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아래 대사를 실마리로 이에 대한 생각을 전개해 봅시다.

“We need to sit on this information till we know what it means, so we aren’t sharing it with our enemies. We must consider the idea that our visitors are prodding us to fight among ourselves until only one faction prevails.”

15. Louise의 딸 Hannah는 앞뒤로 읽었을 때 동일한 팰린드롬(palindrome) 즉 회문입니다. 영화의 구성 또한 그렇게 되어 있죠. 헵타포드의 언어도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련의 장치들이 노리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서 이런 ‘회문적’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고도 단선적 사고에 갇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16. 애봇과 카스트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이 맞을 운명을 이미 알고 지구에 왔습니다. Louise도 영화의 말미에 ‘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서 삶의 방향을 바꿀 것인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죠. 지구상에 온 외계 생명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17. 아래는 제가 ‘시간과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Arrival의 원작인 <Story of your life>에 대해 써본 쪽글입니다. 본격적으로 과제를 작성하시기 전에 한두 가지 테마를 가지고 영화에 관한 글을 써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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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이라는 주제로 본 Arrival>

1. Arrival의 원작인 <Story of Your Life>는 나레이션 형식으로 진행된다. “I remember”가 자주 등장해서 세보니 약 12번 정도이다.

2. 우리가 보통 remember를 쓰는 것은 다음 두 상황이다.
(1) 현재 말하는 시점보다 앞서 일어난 일. 즉 과거의 일.
(2) 현재 말하는 시점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 즉, 미래의 일.
따라서 영어를 기준으로 remember 다음에는 I remember that I did that. 이나 I remember that I will have to do it. 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물론 remember 다음에 조금 다른 내용이 올 수도 있다. Remember you are a teacher.는 “너의 교사로서의 지위를 잊지 말아라”는 뜻이 될 것이다.

3. Arrival의 나레이션 중 다수는 “나는 네가 …할 것이라는 걸 기억한다”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희한하다. 분명 기억하고(remember) 있는데, “~했던 것”도 아니고, “(일어나지 않았지만) ~할 것”도 아니다. 인간의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 형식인 “(이미 일어난 일인데) ~할 것이라는 걸 기억한다”이다.

4. <과거-현재-미래>가 방향이 있는 직선이 아닌 하나의 평면에 들어올 때 Remember는 Know와 동의어가 된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과 아는 것의 구분이 없어진 세계. 예측도 없고 회상도 없는, 모든 것이 ‘지금’인 세계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

5. 그렇다면 필자가 쓴 “이미”, “과거”, “미래” 등의 단어는 쓸모가 없어지는 세계 아닌가.

6.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런 세계를 경험하고 체화한 것은 주인공 루이스일 뿐, 다른 이들은 이 세계를 이처럼 인식하지 않는다. 수십 억의 인구 중 오로지 한 사람만이 이 세계를 실제로 경험한다.

7.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Remember = Know”인 사람과, 이 두 가지가 구분되는 사람 사이의 소통은 가능한가?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인가? 사고체계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언어’로 소통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8. 언젠가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뇌가 생성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초고해상도로 스캔하고 이를 집적된 정보시스템으로 만들면, 이 시스템은 일종의 ‘헵타포드적’ 인지를 할 수 있을까? 우리 삶의 모든 정보가 집적된다면, 그 모든 기억을 어떤 랙(latency)도 없이 끄집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을 직선이 아닌 전체로 인지할 수 있을까?

9. 한편 언어 자체가 헵타포드적 성격을 띄고 있지 않나? 수많은 시간을 고스란히 흔적으로 담고 있는 시스템. 하나의 노드가 전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토폴로지. 공시성과 통시성이 엇갈리는 하나의 점. 지금 내가 쓰는 ‘시간’이나 ‘기억’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가 약속한 기호이자 내 삶이 채워 넣은 의미장이니 말이다.

10. 가정해 보자. 꿈 속에서 다음 날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나를 만나고, 그것을 일기로 기로했다. 다음 날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계속해서 데자뷔를 느낀다. 이를 다시 기록으로 남긴다. 이 모든 기록을 읽은 누군가가 나의 프리젠테이션을 기억한다. 얼마 후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는다. 몇 년 후 그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렇게 기억은 시간을 거스르고 인간의 뇌를 ‘숙주삼아’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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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헵타포드의 ‘문자’에 대한 쪽글입니다.

영화는 인간과 헵타포드가 문자를 통해 소통하는 설정을 택합니다. 그런데 헵타포드의 ‘문자’가 인간의 문자 체계에 딱 들어맞는 체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시각채널(visual channel)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문자체계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헵타포드의 ‘문자’는 인간의 문자체계와 유사하면서도 제스처의 특성을 갖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구어/문어 이분법이 딱 들어맞지 않는 체계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말/글 체계가 헵타포드의 언어에 그대로 들어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글자’를 쓰는 방식이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무언가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주로 손과 팔의 움직임을 통해 특정 메시지를 만들어 내듯이, 그들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밖으로 내뿜어서 특정한 패턴을 만들어 냅니다. 신체 외부의 매개를 이용하는 인간의 문자체계와는 사뭇 다르죠.

또 하나는 그런 문자가 잠시 있다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문자 시스템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쓴 글자야 파도가 와서 쓸려가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잠깐 옆으로 새자면 이런 면에서 ‘혈서’는 일반적 기록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점하게 되는 쓰기방식입니다. 인간의 내부에서 무언가를 끄집어 내서 기록을 하거든요. 게다가 색깔도 엄청나죠.) 위의 두 의미에서 헵타포드의 ‘문자’는 인간의 제스처와 문자의 특성을 묘하게 통합하고 있는 시스템으로 보입니다. 반반 섞어 놨다는 뜻은 아니고, 오묘하게 통합된 시스템이죠.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헵타포드의 음성언어: 헵타포드의 문자 = 인간의 음성언어: 인간의 문자 라는 등식은 조금 위험해 보입니다.
(2) 인간의 언어가 구어/문어라는 이분법을 명확히 보이는 데 반해 헵타포드의 언어는 구어와 문어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3) 그들의 문자체계는 인간이 구사하는 구어의 주요한 부분인 제스처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Engadget의 흥미로운 아티클을 소개합니다.

<Arrival>을 보며 헵타포드의 언어가 치밀하게 그려졌다 생각했는데 이런 뒷얘기가 있군요. 제품 디자이너인 Patrice Vermette과 울프람 알파의 Stephen Wolfram이 합작해서 실제 언어에 해당하는 구조를 디자인하고, 이를 토대로 100여 개의 로고그램으로 만들었다는 것.

“Bringing the language to the screen was a joint effort between designer Patrice Vermette, science consultant Stephen Wolfram — of Wolfram Alpha fame — and his son Christopher Wolfram. All told, some 100 “unique logograms with embedded words and phrases, with mutable components” were crafted for the film.”

https://www.engadget.com/…/dissecting-the-alien-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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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Arrival>에서 나타난 타자화(othering)에 대한 간략한 쪽글입니다.

Preemptive Othering and <Arrival>

<Arrival> is relevant to the present time not because we are approaching the era of space travel or technological singularity, but because we are going through the era of intolerance, reversing pluralist, multi-cultural worldviews and threatening the very existence of intersubjective spaces. The tyranny of preemptive othering emerges when the art of thick description and deep interpretation dies. We need more time to understand each other. We also need to note that their time might be different from our time. Ultimately, understanding others is the only way to understand ourselves. (I don’t know whether someone has used the term ‘preemptive othering’; yet, the expression dawned upon me whiling watching th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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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Arrival>의 주제의식과 관련된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입니다.

Probably i am going to use <Arrival> as a major theme for my <Language and Thought> class this semester. Here are some random ideas about what to discuss in the class. By the way, the movie is so breathtakingly beautiful and also full of language-related allusions and intriguing symbolism. Highly recommended for my linguists and applied linguists friends!
Whorfian view of language and thought / Neo in Matrix vs. Louise in Arrival / Free will vs. Destiny / Palindrome and how we(they) experience time / C.S. Lewis’s notion of ‘God’s time’ vs. human time / linear time and circular(or spiral) time / time travel / prerequisites for communication / Barriers and empathy / Symbolism in the movie / Why physicist & linguist? / How to define others and us / Words as a weapon vs. words as a gift / Why analyze and teach written language, not spoken? / Concepts, language, and (Un)translatability / So what is time?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New Literacy Studies 관련

– 리터러시를 문자미디어 자체에 가두는 것 반대
– 리터러시와 문화, 권력구조를 연결해서 파악
– 다양한 맥락에 대한 민감성 강조
– 리터러시를 단일한 개념으로 ‘말끔하게’ 파악하는 것 비판
– 리터러시의 역사성을 강조
– ‘리터러시는 이것이다’라는 선험적 정의를 경계하며,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리터러시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협상의 결과로 드러나는 리터러시 강조

–> 현재 하고 있는 작업에 많은 영감을 주는 관점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 관점이 어떻게 유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 보아야 할 듯합니다.

“In contrast, Street recommended what he called the “ideological model,” which “view[s] literacy practices as inextricably linked to cultural and power structures in society, and recognize[s] the variety of cultural practices associated with reading and writing in different contexts” (Street, 1993: 7). This ethnographically informed perspective, which many have come to call New Literacy Studies (NLS), problematizes singular definitions of “literacy,” emphasizing the historicity (Freebody, 2005) and multiplicity of literacies and of literacy practices, or “the socially regulated, recurrent, and patterned things that people do with literacy as well as the cultural significance they ascribe to those doings” (Brandt and Clinton, 2002: 342); such practices vary by language, script, domain, role, network, participants, context, and other factors (Barton and Hamilton, 2000; Baynham, 1995; Cope and Kalantzis, 2000; New London Group, 1996). From this analytical perspective, literacy cannot and should not be defined a priori, as it is by most conventional measures of literacy; instead, what counts as literacy results from complex sociocultural negotiations (Hamilton and Barton, 2000).”

출처: A Companion to the Anthropology of Education

 

#삶을위한리터러시

텍스트와 영상의 추상성

텍스트의 추상성과 영상의 추상성은 그 정도가 사뭇 다르다. 텍스트는 ‘자유’, ‘과정’, ‘상황’, ‘패러다임’, ‘이론’ 등의 언어들로 ‘개념놀이’를 할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영상에서는 이들을 가지고 개념놀이를 하긴 힘들다. 대부분의 영상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전개되기에 시간성과 특수성이 거세된 개념들을 가지고 전개하기는 힘들다.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텍스트가 가진 일반화, 추상화에 대한 경향이 영상에 비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랑’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바를 영상이 그대로 나타낼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는 주어나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와 사건 모두를 순식간에 포획한다. 영상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영화에서의 사랑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한 캐릭터들이 맺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수학은 또다른 위상을 갖지만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라 (사실은 필자가 제대로 몰라서) 따로 논의하지 않는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질적연구자, 단상

질적연구와 관련된 강의를 들으며
연구자로서의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끈끈한 거리로 발을 딛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얄팍함’이었다.

이번 학기 강의를 걱정하고
불만 없는 성적처리를 고민하고
다음 학기 밥벌이를 위해
주판알을 튕기는 일상의 연속.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달려온 세월.

얄팍하다.
아무리 열심히 뛰었다 해도
얄팍한 건 얄팍한 것이다.

조금 다르게 사는 척하지만
결국 똑같이 살고 있구나.
나 자신에서 시작해서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말들을 짓고 있구나.
수없이 내뱉은 말들이
나의 경계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자는 논문이라는 성과로 말해야 한다’는 말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학자는 연구와 글쓰기의 과정에서
세계를 얼마나 바꿔냈느냐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은 논문의 인덱스가 아니라
내가 발딛은 삶과
연구 참여자가 발딛은 삶의
부대낌에서 느껴져야 하는 것 아닐까.

대학이 몰락하는 이유는
삶을 응시하고
세계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이목에 집착하고
제도가 인정하는 성과에 목매기 때문은 아닐까.

현장 선생님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던졌지만
다시 돌아와 보면 나의 현장은 뻥 뚫려 있는
어정쩡한 삶을 새삼 깨닫는 오늘.

‘삶을 위한’이라는 꾸밈말이
그저 꾸밈말에 그치지 않게.
함께 궁리하고 바꿔갈 수 있게.

삶을 텍스트 안에 가두지 않고,
텍스트로 삶을 확장할 수 있기를.
삶을 짓는 텍스트를 짜내려 갈 수 있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는 연구자이기를.

말하기, 쓰기, 그리고 인쇄

말하기와 쓰기는 분명 다른 소통방식이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잊는 것은 쓰기와 인쇄 또한 엄연히 다른 모드의 소통이라는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은 ‘상징적 도플갱어(symbolic Doppelgänger)’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쓰기가 누군가에게 나를 보내는 행위라면 인쇄는 나를 복제하여 유통하는 행위다. (쓰기는 내 몸의 연장이고 인쇄는 내 몸에서 분리된 언어의 복제다.) 전자는 한 사람에게 전달되는 의미를 상정한다면 후자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독자들에 의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는 의미를 상정한다. 전자의 경우 ‘나’는 상대와 마주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존재인 반면 후자의 경우 ‘나’는 완성된 메시지를 찍어내는 제조공에 가깝다. #삶을위한리터러시

그림책 잘(못) 읽는 법 (feat. 짝)

짝: (문해력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그런데 그림책을 잘못 읽는 경우가 많은 거 같더라.
나: 그림책을 잘못 읽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짝: 영어 그림책의 경우가 더 심한 거 같은데… 그냥 텍스트만 읽고 그림은 슥 보고 넘어가는 거지.
나: 아…
짝: 그림책은 텍스트랑 그림이 함께 있는 건데.
나: 그렇지. 둘다 중요하지.
짝: 근데 내용 이해된다고 텍스트 위주로 넘겨버리는 거지.
나: 나도 그렇게 읽은 적 많은 거 같은데…
짝: 일러스트레이터도 독립된 예술가잖아. 단지 주문한 걸 그린 게 아니라 텍스트에 기반해서 어떤 장면 혹은 맥락을 해석해 낸 거거든.
나: 그렇겠네.
짝: 특히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그냥 텍스트만 읽어주고 넘어가기 보다는 왜 그런 그림이 거기 들어가 있는지 질문을 하는 게 좋아.
나: 왜 그림그린 사람이 그렇게 해석했는지 말이지?
짝: 그렇지.
나: 자기는 책 만들 때 텍스트가 먼저 나오나? (<– 짝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예요.)
짝: 응. 나같은 경우는 학습에 초점을 맞추니까 텍스트가 먼저 나오고 그걸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나: 그렇겠네. 난이도나 내용을 조절해야 하니까.
짝: 응. 그렇다고 하더라도 텍스트와 삽화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관계가 있어. 텍스트를 그냥 묘사하는 게 아니라 해석해서 그리는 거지.
나: 삽화가의 의도와 관점이 개입되겠네.
짝: 그렇지. 그게 핵심이야.
나: 결국 읽기지도를 하거나 소리내어 읽어줄 때도 왜 그런 그림이 나왔을지,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어디인지, 자신이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지,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때 새로운 그림을 넣고 싶지는 않은지 등등을 다뤄주면 좋겠구나.
짝: 응. 텍스트와 그림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거.
나: 그림책 읽어줄 일은 없지만 기억하겠소. 그림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ㅎㅎㅎ
짝: 응. 그렇게 해. ㅎㅎㅎ

요약: 그림책에서 그림은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핵심 요소중 하나입니다. 텍스트와 그림간의 긴장과 교섭, 갈등과 협업에 주목하여 읽어보세요. 그림책이 달리 보일 거예요.

#삶을위한리터러시
#다아시는이야기를이렇게길게해서죄송합니다.

‘유튜브의 시대’와 학교의 권력

전통적으로 학교교육의 내용은 ‘텍스트 중심 문해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조금씩 보급되고 있지만 현재의 교육이 텍스트 중심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필자가 처음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한 게 1995년이다. 이후 월드와이드웹이 급부상하고 전산망이 빠르게 보급됨과 동시에 대중 개개인이 운용할 수 있는 컴퓨팅 자원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 등은 웹의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잡았고 모바일을 통한 정보습득과 공유가 일상이 되었다. 최근 영상매체의 증가로 인해 적어도 10대 전후의 세대에 있어서는 문자 기반 읽기자원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담론과 교육 이론가들이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1996년 J. P. Gee와 N. Fairclough 등의 학자들은 ‘New London Group’이라는 연구집단의 이름으로 하버드 교육 리뷰에 <A pedagogy of multiliteracies: Designing social futures>라는 기념비적 논문을 발표한다. 이들은 기존의 리터러시 교육이 곧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 주장하면서 수백 년간 근대교육을 지배해온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 교육에 일대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게 무려 23년 전 일이다. 그들의 주장이 묻힌 것도 아니다. 위 논문은 2천 여 회 인용되었고, 이후 그들의 주장을 엮은 책 <Multiliteracies: Literacy Learning and the Design of Social Futures>이 라우틀리지에서 출판된다. 교육 관련 서적으로는 드물게 피인용 회수가 4천 회에 육박한다. (구글 스칼라 기준) 한 가지 주장을 담은 이야기가 6천 회 이상 인용되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적어도 학계에서는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럼에도 텍스트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일부 수행평가의 예외는 있으나 내신과 수능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지필평가의 포맷을 고수하고 있다. 정보의 바다 유튜브의 시대, 학생들은 여전히 단일 국가기관이 발행한 EBS 수능특강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기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크게 세 가지 원인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기존 제도의 관성이다. 한국교육의 실질적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평가체제의 변화가 필수다. 그런데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다. 평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교육내용을 바꾸어야 하고 교육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당연히 교육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지식을 익혀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변화인 것이다.

둘째는 근본적인 이유다. 여전히 텍스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기반이 되는 학문체계는 텍스트 위에 올려져 있다. 과학과 기술, 지식생산은 압도적으로 문자에 의존한다. 학술 및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은 문서로 이루어진다. 흔히 말하는 ‘고급지식’의 생산, 축적, 공유, 재가공 등 제반 활동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영상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의 변화를 받아들여 교육을 본격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어떤 유익을 가져다줄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는 좀더 솔직한 이유다.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른다. 알고 있는데 안한다기 보다는 몰라서 못하는 측면이 큰 것이다. 이리저리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난무하지만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만큼의 지식과 노하우, 이론적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친구가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를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시대다. 그간 인류는 다음 몇 십년의 변화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교육의 판을 짰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기성세대가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장 감을 잡기 힘든 시대일지도 모른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이지만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학교교육은 여전히 강력하다. 위의 이슈들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 구조는 쉽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하지 않는 학교를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자명하다. 그들이 힘을 갖게 될 때에도 이 관성이 유지될까? 그 시기를 준비하는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지금 이 모습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참고: A pedagogy of multiliteracies designing social futures
http://newarcproject.pbworks.com/f/Pedagogy+of+Multiliteracies_New+London+Group.pdf

#삶을위한리터러시
#디지털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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