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출간!

책이 나왔습니다!!!

1년 여 전부터 #삶을위한리터러시 태그로 적지 않은 글을 올렸습니다. 한국사회의 문해력 혹은 리터러시라는 주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쪽글을 꾸준히 공유했죠. 언젠가 본격적으로 정리를 해보자는 생각은 있었지만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 하염없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문화연구자 엄기호 선생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공부공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의 책을 읽고 선생님의 관점과 글쓰기에서 큰 도움을 받았는데 함께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 깊이를 더하고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는 주제를 좀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기획과 준비단계를 거쳐 작년 여름 네 번의 긴 대담을 가졌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지도교수와 오랜 시간 토론한 적은 있지만, 동료 연구자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대담 과정에서 배움의 기쁨이 컸습니다. 말 그대로 대화를 통해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경험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밀도있는 대화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탐색하고 싶어졌습니다.

대담은 모두 전사되었고, 편집장님께서 책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후 말을 다듬고 글을 보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대화를 책으로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도서출판 따비의 신수진 편집장님께서 잘 이끌어 주셔서 이렇게 오늘 세상에 나오게 되었네요. 작지만 뜻깊은 삶의 매듭이 지어진 것 같아 기쁩니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 밝혔듯 이 책은 하나의 초대입니다. 미디어의 지형이 숨가쁘게 변화하는 시대, 읽고 쓰는 일의 본질을 놓치지 말고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함께 만들어 가자는 제안입니다.

“정성을 다해 읽고, 쓰고, 보고, 만들며 일상을 엮어가는 독자들을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찾아가는 여정에 초대한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읽기와 쓰기 관행의 변화를 주시하는 분들, 동영상의 시대 책과 문자매체의 운명이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분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자녀의 리터러시 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들, 문자와 영상을 엮어 리터러시 교육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분들, 일선에서 학생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리터러시 교육을 만들어가고 있는 교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미지를, 영상을 탐험하는 분들과 함께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꿈꾸고자 한다. 이 대담이 서로를 읽어내고 새로운 삶을 써내려가는 길에 작은 디딤돌이 되길 소망한다.”

그간 #삶을위한리터러시 포스트에 반응해 주시고 같이 고민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책이 우리사회 리터러시에 대한 더 풍성한 논의와 궁리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읽어주시고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판사 소개:
힘의 과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한 다리로,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으로, 읽기와 쓰기뿐 아니라 듣기와 보기의 가능성까지!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응용언어학자 김성우가 함께 나눈 좋은 삶을 가꾸는 리터러시.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지식검색을 하는 것도 아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며 유튜브 채팅 기능으로 소통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리터러시의 정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서로에게 ‘난독증이냐’며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단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꼰대’가 ‘가르치려 든다’고 경계한다. 리터러시가 혐오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아니라 성찰의 도구가 될 수는 없을까?

젊은 세대의 읽기 능력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최근 몇 년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읽기 영역에서 한국 학생들의 순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거나 ‘문해가 매우 취약한 수준’의 비율(38%)이 OECD 국가 중 하위권(2018년 조사)이라는 수치가 제시된다. “우리 아이가 책은 안 읽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학생들이 교과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학부모와 교사들의 경험도 근거가 된다. 과연 젊은 세대의 문해력 수준이 떨어진 것일까? 이것을 문해력의 위기라 할 수 있을까?

삶이 말에 스며드는 방식에 천착해온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말이 삶을 빚어내는 모습을 탐색해온 응용언어학자 김성우가 문해력/리터러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리터러시의 상황을 ‘위기’로 부르는 평가가 정당한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몸과 사고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리터러시를 경쟁의 도구가 아닌 공공의 인프라로 만들어갈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폭넓게 논의한 기록이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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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서점은 4월 8일 수요일 이후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주요 온라인 서점 링크입니다. 감사합니다.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7010366

YES24: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869723?Acode=101

교보문고: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8439798&orderClick=LEa&Kc=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4

1. 녹음기술은 미디어로서 개인을 확장시켰다. 나의 목소리가 나를 떠나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녹음된 음성은 어디든 결합할 수 있다. 나의 목소리가 타인의 입에 올려질 수도 있고, 더빙의 재료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처럼 미디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로부터 탈각된(disembodied) 목소리를 활용하여 ‘자연스런’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미디어, 특히 애니메이션을 통해 갖게 되는 특정한 인종, 계급, 성별, 연령, 직종 등에 대한 이미지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을 시각적으로 추상화하고 청각적으로 매개하여 구성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복사’한 것이 아니라, 탈신체(disembodiment)와 추상화, 재조립(reassemblage)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2. 좀 우습기도, 멋적기도 한 이야기지만 중고등학교 때 영어 발음을 네이티브랑 똑같이 하려고 애쓰는 애들 보면 왠지 멀리하고 싶었다. 영어는 좋아하는 과목이었고 나름 잘하기도 했는데 발음에 대해서만큼은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괜한 고집을 피운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던 것 같다. 그땐 멀리 보지 못해서 내가 응용언어학을 하게 될 줄 몰랐던 것.

나의 이 멍청한 (하지만 나름 귀엽다고 우기고 싶은)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발음은 개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 말을 열심히 발음하고 있으면 뭔가 뇌가 꼬이는 듯하고 내 안에서 다른 내가 나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나의 목소리와 발음은 나의 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3. 사실 우리는 외국어 뿐 아니라 모국어를 사용할 때도 발음에 따라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차별한다. 발성이 좋고 발음이 정확한 — 흔히 말하는 아나운서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발음이 명확치 않은, 즉 “말을 꾸역꾸역 먹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발음이 좋으면 목소리마저 청아하게 들린다. 목소리와 발음은 해당 개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발음은 사회문화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지표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과거 대부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백인 성우가 더빙을 맡았다. 당연히 악역은 히스패닉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발음이 주였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의식중에 인종차별적 마인드를 키워갔다. 실로 무서운, 여전히 진행중인 현상이다.

4. 위의 1에서 서술한 바를 적용하자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특정한 집단의 신체를 추상화하여 비주얼로 만들고, 여기에 특정한 계층을 은밀히 가리키는(index) 목소리를 입힌다. 이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캐릭터를 특정한 목소리 자질과 연관시키고, 이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특징과 또다시 연관된다.

물론 이러한 결합이 즉흥적이거나 기계적인 것만은 아니며 상당한 사회문화적 고증을 거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을 쏟아붓더라도 애니메이션이 재현하는 인물(비주얼+사운드+캐릭터적 특성 등)이 일정한 본질화(essentalization: 사람의 특징 한두 가지로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일. ‘백인은 이렇다’든가, ‘이주노동자들은 이렇다’, 나아가 ‘시츄는 다 …하지’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남.)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1

Posted by on Mar 18, 2020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1. 학생들로부터 쪽글을 자주 받는다. 읽기자료를 꼼꼼히 읽고 간단히 요약한 다음 자신이 이해한 바, 흥미로운 부분,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 경험과의 연계, 교육현장에의 적용 등을 논의해 보라는 과제다. 내 수업의 절반은 쪽글에 대한 피드백과 이를 기반으로 한 토론이다.

2. 재미있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읽기자료가 제시되었을 때 ‘어떻게든 이해한 척’하려는 학생과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학생’이 갈린다는 것. 쪽글을 읽다가 보면 전자의 학생이 생각보다 많은데 (나도 대학원생 때 종종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후자의 학생이 훨씬 반갑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해소하려는 모습이 ‘나 읽었고 이해했거든?’ 같은 제스처보다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3. 응용언어학과 영어교육의 특성상 순수히 이론에 그치는 논의는 반쪽의 느낌을 준다. 결국 이론과 현실이 만날 때 강력한 ‘프랙시스(praxis)’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론을 이해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현실과 결합시키려는 모습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이 설익은 지식을 용감하게 적용하려 들지 않도록 적절한 가이드를 주는 게 나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

4. 아무튼 이번에도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을 맡게 되었다. 첫 시간은 Dell Hymes의 1972년 글과 2015년 강현석 선생의 글을 통해 사회언어학의 초기 방향성과 최신 연구동향을 비교하며 진행한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사회언어학의 진화는 진행형이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한 학기가 되길 빈다.

‘사석’과 공적 담화

일부 사람들이 굉장히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석에서 한 말은 기록되어도 ‘사석’에 머문다는 것이다. 세상 제일 편한 사람들과 한 이야기라도 활자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순간 공적담화의 영역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법적, 윤리적, 문화적 구분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물.리.적.사.실.이다. 이걸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잘 하는 말로는 “그냥 말일 뿐인데 뭐” (당신에겐 말일 뿐인데 듣는 사람한테는 무기라고), “농담으로 한 건데 뭘 그렇게까지” (당신 마음 속에서는 농담인데 나에게는 모욕이라고) 등이 있다. 할 말을 다 퍼붓고 “그냥 내 마음 속 생각이었어”하면 아무 일이 없어진다고 믿는 것만큼 한심한 것은 없는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Intelligence 그리고 사이(inter-)

Posted by on Mar 9, 2020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개념적인 측면에서 “intelligence(지능)”을 “In”+”telligence”로 오분석하는 경우가 있다. 지능을 개인의 내부(in)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intelligence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사이, 상호적’이라는 의미의 inter- 와 ‘선택하다, 읽어내다’라는 의미의 legere 을 만나게 된다. 이에 따르면 지능은 단일 주체가 지닌 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 사이를 읽어내는 능력에 가깝다.

물론 어원을 가지고 당위적 주장을 펼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intelligence가 파편화된 개인의 자질로, 순전히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세태 속에서 그 어원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일이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지능은 언제나 관계적이며 사회적이라는 것, 다양한 존재 사이에(in-between)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맥락적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함께 공부하기의 어려움

Posted by on Mar 4,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나처럼 의지력이 200프로 부족한 사람들은 종종 ‘함께 공부하기’를 꿈꾼다. 엉망진창 집중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모아보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맞지는 않더라도 필요와 지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읽고 토론하는 그림을 그려본다.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대충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뭔가 해보자고 생각하고 텍스트를 고른다. 멤버들을, 그들의 성향이나 강약을 떠올린다. 각자 재미있어 할만한 부분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걸로 글쓸 일이 있을 것 같지만 상대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선생’ 역할을 해야만 할 것 같다. 함께 공부하자고 하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초기 모임을 꾸리고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섭외하고 세미나를 이끌어나가는 일 또한 쉽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다. 결국 진정한 공부는 외로움을 이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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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새로 올라온 거 뭐 없나.

#같이공부하실래요

책 읽다가 몇 가지

1. 그나마 잘 번역된 텍스트라 해서 읽고 있는데 군데군데 계속해서 막힌다. 영어로 읽기 시작하니 이해는 훨씬 나은데 속도가 안습이다. 번역가의 피땀은 많은 이들의 노고를 줄여주고 더 많은 세계를 여행할 시간을 선사한다. 문제는 학술서의 경우 정말 유능한 번역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 (대개의 연구자와 교수들은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2. 특정한 이론체계를 차용해 논문을 쓸 때면 대표적인 구절이나 뼈대만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이론의 핵심을 간파하고 그것을 분석에 녹여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의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거대한 체계를 열 개 쯤 다루는 개론 수업이란 또 얼마나 얄팍한가.

3. 아직 검토중이라고 하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혼자 녹화해서 올리는 게 쉽지 않겠으나 30명 정도의 수업을 실시간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것 보다야 나을 것 같다. 짧지 않은 동영상 강의를 촬영해 본 경험에서 보자면 혼자 잘 떠들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일반 면대면 수업 준비의 2-3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귀차니즘이 발동하는데, 마감이 어찌저찌 해결해 주겠지.

4. 대화에서 상대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말’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황, 혹은 담화의 유형 자체를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말은 언제나 그것보다 훨씬 큰 사회적, 제도적, 정치적 맥락을 환기하며, 말이 펼쳐지면서 말이 처하는 맥락 또한 요동친다.

단어 하나만 바꾸어도 진담이 농담이 되고, 논평이 풍자가 된다. 말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을 때, 살짝 찡그렸을 때, 목소리가 커졌을 때, 유행어를 섞었을 때, 상대가 익숙하지 않은 메타포를 사용했을 때 등등 지극히 작은 말은 순식간에 맥락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바뀐 맥락에서 대화자들의 관계는 달라진다.

5. 우리는 말을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이 실시간으로 지어지는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말은 상대의 귀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상대를 초대한다. 그렇기에 말하는 법은 세계를 창조하고 초대하는 법이다. 우리가 암기에 골몰했던 ‘어휘와 문법’은 그런 세계를 짓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독자의 시간을 헤아리는 논문쓰기: 경험으로서의 텍스트

전형적인 연구논문이라면 제목, 초록, 서론, 문헌연구, 방법론과 결과, 논의, 결론, 나아가 참고문헌과 부록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출판된 논문이라면 대개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논문은 하나의 완결된/닫힌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논문은 하나의 완성품입니다. “논문”이라는 명사로 표현되고요. 명사의 세계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자동차’나 ‘지우개’에 시간이 들어있지 않듯 말입니다.

하지만 논문을 독자가 읽기 시작하면 시간 위에서 흘러갑니다. 읽는 행위는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텍스트를 스캔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아니라면 우리는 1분에 기껏 몇백 단어를 순차적으로 읽어내어 내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읽기라는 행위가 시간의 축 위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쓰기는 단지 완결된 텍스트의 생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쓰기는 독자가 경험할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고, 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만 하는 경험을 조직하는 활동입니다. 이런 면에서 쓰기는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지식을 독자의 경험으로 번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가 강의를 하고 있는 건물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외관이 바뀌거나 방 사이의 칸막이가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죠. 계단이 춤을 추거나 창문이 자리를 바꾸지도 않습니다. 공사가 끝난 건물은 변화하지 않는 정적 구조물입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명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건축물이 누군가에 의해 경험될 때, 건축물은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예술이 됩니다. 건축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시간의 축 위에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건축물은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방문자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경험의 총체입니다.

미술관을 설계하는 건축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단지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방문객들이 건축물과 만났을 때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지요. 미술관에 진입하는 길에서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할지, 미술관 벽면의 소재가 어떤 느낌을 줄지, 정문을 어떤 방식으로 통과하게 할지, 들어왔을 때 채광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어떤 느낌일지, 천장의 높이와 조명에서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낼지, 방문자의 동선을 어떻게 유도할지 등을 세심하게 살핍니다. 이를 통해 변하지 않는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살아 움직이는 건축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독자의 시간을 헤아리는 글쓰기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맞는 문장, 멋있는 표현을 동원하는 글쓰기도 중요하지만, 글을 읽어내려가는 독자의 호흡을, 이해의 속도를, 정서적 임팩트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풀어내는 행위이면서 독자의 시간을 먼저 살아보는 행위입니다.

유능한 작가는 유능한 독자입니다. 쓰면서 동시에 읽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좋은 작가는 쓰면서 읽고, 읽으면서 씁니다. 텍스트를 읽을 땐 읽기+쓰기를, 쓸 때는 쓰기+읽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자에 대한 감은 어디에서 올까요? 독자를 직접 만나볼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전공영화’와 ‘수 구조(move structure)’라는 개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로논문쓰기

‘뚫렸다’는 은유에 대하여

‘뚫렸다’

감염병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지만 메타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뚫렸다”는 은유의 아슬아슬함을 생각한다. 어딘가가 “뚫렸다”면, 거길 지키는 사람/시스템이 있고, 바이러스와 숙주가 된 사람이 거길 ‘뚫었으며’,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질 위험이 있다. 바이러스에 ‘뚫린’ 지역사회는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뚫고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하며 단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바이러스의 숙주로 기능한 이들은 방역망을, 지역을, 안전이라는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가? 우리는 ‘뚫은’ 주체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으로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가해자/피해자라는 구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뚫다/뚫리다’로 표현되는 공수 혹은 침투 메타포가 우리의 생각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촛불집회 논문 출판

Posted by on Feb 21, 2020 in 강의노트, 링크, 영어로 글쓰기, 집필 | No Comments

작지만 뜻깊은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2016-2017년 박근혜 퇴진운동의 거의 모든 집회에 참여하면서 틈틈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와 함께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에 관한 다양한 문헌을 읽기 시작했고, 언어교육과 관련된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여름이었던가요. 장인철(Inchull Jang) 선생님과 함께 현실정치에 관심을 둔 사회언어학/응용언어학자로서 함께 글을 써보자는 의견을 나누었고 자료조사와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방향 전환, 검토와 수정을 거쳐 오늘 <사회기호학 (Social Semiotics)> 저널에 “시위에서 매개도구의 궤적: 대한민국 촛불 집회에서의 손피켓의 사례를 중심으로(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라는 제목의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논의는 시위도구로 쓰여진 손팻말(hand placard)에 집중합니다. 최근 한국의 시위현장에서 보이는 손피켓은 개개인이 손수 만든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대량으로 제작되어 뿌려지는 것이죠. 이는 그 자체로 특이한 현상이면서 여러 가지 언어적, 심리적, 상징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논문은 이 점에 주목하여 손피켓이라는 매개도구(mediational means)를 중심으로 촛불집회를 조망합니다. 시위 현장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의례적으로 또 창조적으로 사용하는지 추적합니다. 나아가 그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합니다.

논문을 읽어보실 분들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논문을 쓰면서 가장 깊게 고민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These impressions made the first author ask the following fundamental questions regarding the politics of protest in a democratic society: “How can we marshal solidarity across a wide range of sociopolitical spectrums while not forfeiting the small yet critical voices of each participant and stakeholder, and how can we achieve democracy ‘within’ protests beyond the protests ‘for’ democracy?” (Fieldnote, 4 December 2016).”

논문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 사진들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신 박여라 선생님, 홍승희 선생님,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이병한 편집국장님과 이정민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원고를 보고 꼼꼼히 피드백을 주신 이정아 선생님과 Mike Chesnut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힘있게 논문을 마무리해 주신 저자 장인철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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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논문의 초록입니다. 혹시 읽어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아래 답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메일로 논문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

While positioning this research within the growing body of scholarship related to linguistic landscape of protest, we illustrate a distinctive form of analysis. Rather than giving a generalized, extensive, or quantitative description, we focus on a qualitative and in-depth analysis of a single protest tool in relation to protest actions and space-making. Drawing on the concept of “mediational means” from mediated discourse analysis, we analyze the linguistic and semiotic functions and effects of sonp’aenmal (hand placard), a protest tool uniformly and widely employed during South Korea’s 2016–2017 Candlelight Protests. Based on a corpus of protest images and our autoethnographic accounts of direct participation, we examine why this sign emerged as an important tool in the protest space, how it was utilized ritually and creatively, and the effects of its use on protesters’ experiences, sensitivity, and identity. Competing discursive effects caused by its uniform design and widespread use are discussed further.

KEYWORDS: South Korea, Candlelight Protests, linguistic landscape, mediational means, hand placard, protest tool

 

논문 링크: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10350330.2020.173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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