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않고 잘 살기?

어제 한 선생님과 비판적 리터러시의 중요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비판 리터러시를 키우는 건 사실 엘리트 교육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교육의 ‘변방’에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핵심’이라는 이야기였다.

비판적 리터러시는 잘 듣고 잘 읽고 행간을 읽는 데서 시작해서 전제를 살피고, 증거의 빈곤함을 지적하고, 논리의 일관성을 점검함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하지만 리터러시 교육에서 비판영역이 전면에 배치되는 경우는 여전히 적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대를 ‘넘어서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지식의 수준을 높이고 그 지평을 넓히는 행위라는 점이다. 내가 쌓은 벽돌 위에 또다른 벽돌이 올라간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딛고 올라서 주었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적 역량은 서로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어간다.

모두 비판자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쟁이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두의 비판으로 서로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비판의 태도와 기술이지 비판하지 않고 함께 잘 사는 법이 아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글쓰기

파업, 그리고 ‘인질’ 메타포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

모 신문은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서울대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에 대해 “파업 인질”을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는 서울대 도서관 경비 중 한 명의 발언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헤드라인으로 올린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바로 ‘학생=인질’이라는 메타포를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에 대해 “인질” 메타포를 쓰는 관행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이 인질이 되고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환자가 인질이 된다. 급기야 학교 난방을 담당하는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은 학생을 인질로 잡는 일이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인질”은 부정확하고 비열한 메타포다. 왜 그런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질”이라는 단어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학생이 인질’이라는 정보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인생은 무대”라는 메타포가 주연배우, 조연배우, 악역, 엑스트라 등등을 순식간에 소환하는 것처럼 “인질”의 구성에도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또한 인질범은 인질을 댓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질’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고틀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를 프레임(fram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인질’ 프레임에서 파업을 둘러싼 주체들이 맡은 역할을 살펴보자. ‘학생이 인질이냐’는 질문을 던졌으니 당연히 학생은 인질의 위치에 놓였다. 파업중인 노조는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인질범이 된다. 자연히 노조와 대치하고 있는 대학본부는 인질이 구출되길 바라는 편이 되겠다.

우선 이 프레임은 극도로 부정확하다.

인질범은 인질극 프레임에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 노조는 자신들이 응당 받아야 할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임금인상도 아니다. 무기계약직 전환시 빼앗긴 교통비, 급식비 등 다양한 복지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생명을 조건으로 거는 몸값과는 거리가 멀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다. 하지만 서울대 기계전기분회 노조는 사실상 약자이다. 파업은 몸뚱아리 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이는 매우 적법한 권리행사의 수단으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아가 ‘인질’ 프레임은 비열하다.

학생을 인질로, 노조를 인질범으로 상정함으로써 학생과 노조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는다. 아울러 대학본부를 ‘착한 편’으로 자리매김한다. 학생들이 노동자와 연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질이 인질범과 어떻게 연대를 한단 말인가? 이 프레임에서는 ‘노조와 연대하는 학생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인질이 된 학생들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인질극에서 인질은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극히 수동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파업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노조에 연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인질극에서의 인질과는 달리 학내 파업 상황에서 학생은 당당한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는 사라져야 한다. 걸핏하면 나오는 ‘인질’ 프레임에 마음이 동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인질’로 묘사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질 프레임이 뒤집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한다. 파업에 임하는 노조는 누구도 인질로 잡지 않았다.

영어로 논문쓰기: 네 가지 기둥

영어로 논문쓰기를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 4가지. (말장난 아닙니다. ^^;;)

1. 영어에 대한 이해 (도구언어에 대한 이해)
2. 논문에 대한 이해 (장르로서의 논문에 대한 이해)
3. 쓰기에 대한 이해 (쓰기행위에 대한 실천적, 메타인지적 이해)
4. 영어로 논문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이해 (프로젝트로서의 논문쓰기 수행에 수반되는 다양한 지적, 정서적, 정보적 요인에 대한 이해)

#영어로논문쓰기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 그리고 상상력

적어도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은 어학연수와 같은 해외 체류를 영어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꼽았다. 해외에서의 생활이 영어공부의 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인풋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라고 간단한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흔히들 말하는 몰입(immersion)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인풋의 양보다 더욱 핵심적인 요인들이 나타난다. 나는 이것을 두 가지로 본다.

먼저 “쓸모에 대한 감각”이다. 내가 배우고 있는 말이 세상에서 진짜 쓰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쓸모”에 대한 감각은 쉬이 생기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 본 경험이 있다면 입시와 내신이라는 목표 외에 학생들에게 영어의 쓸모를 설명해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아니 이것은 설명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안다. 연애나 배신같이 체험되지 않고는 전달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처럼 말이다.

다음으로는 “만남의 경험”이다. 이것은 쓸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 다르다. 나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다른 언어가 되어 돌아오는 경험.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경험. 이것을 목격하고 느끼는 것이 “만남”이다. 말을 건네기 전의 설렘과 말이 오가는 과정의 떨림과 말이 끝나고 난 다음의 여운을 겪는 것이다.

만남은 언어의 도구성을 넘는 경험이다. 언어가 사람을 울고 웃게 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도구성을 뛰어 넘어 존재를 감화시키는 언어를 진짜로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에 가지 않고도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을 키워줄 수 있을까? 외국어로서 영어(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백’하는 언어학습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물론 해외에서의 경험을 복제할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변화를 꽤하려면 언어학습에서 급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영어교육은 여전히 인풋이라는 ‘특급 키워드’에 머물러 있다. 얼마나 많은 언어자료가 투입되어야 하는가. 이 자료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이 패러다임 말이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에 더 많은 인풋을 부르짖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호칭의 사회학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호칭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소셜미디어 상에서 서로를 부르는 방식입니다.

우선 ‘~님’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게 가장 무난할 듯합니다. 소셜미디어의 특성상 특정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위계적 관계를 함의하지 않으면서 예의를 갖춰 부를 일이 많으니 ‘~님”만큼 적절한 호칭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 “O박사님”, “O교수님”, “O원장님”, “O변호사님”, “O대표님” 등의 호칭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 호칭은 심심찮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이렇게 불러야 할 때도 있고, 평소에도 이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뿐이죠.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호칭의 경우 대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회사원들, 아이들과 학생들은 대개 이름을 기반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칭의 사회학에는 분명 비대칭적 측면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룬 업적에 기반한 호칭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욕망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이름보다 직책이나 자격으로 불리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그리 건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하여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호출해 봅니다.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예의를 꽉꽉 채운 이 말, 어딘가 불편합니다. 길 묻는 사람은 최대한 예의를 지켜서 말을 건 것일 테니, 불만은 없습니다. 다만, 종종 들려오는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소화가 되질 않네요. 저는 사장은 아니고, 사장님은 더욱 아니며. 행여 사장이라고 해도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죠.

그냥 “실례지만 길을 좀 여쭈어도 될까요?”는 어떨까요? “사장님, 길 좀 여쭐게요”와는 달리 상대를 부르는 단어는 없습니다만 길을 묻는 기능은 충분히 수행하니까요. “아저씨”나 “학생” 혹은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상대가 ‘고통받을’ 이유도 없구요. (경험상 이 ‘고통’은 미혼 여성들이 “아줌마”로 불렸을 때 극대화되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한국사회에서 심심찮게 쓰이는 현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짧은 친절의 순간에도 “사장님”이 끼어드는 일은 좀 안타깝네요.

#삶을위한리터러시

인터뷰 소론: ‘정보’가 아닌 ‘사건’으로서의 인터뷰에 관하여

사회학과 인류학, 심리학, 응용/사회언어학을 포함한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 인터뷰는 가장 중요한 조사 방법론 중 하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특성, 혹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굳이 “인터뷰”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늘상 하게 되는 활동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응용언어학을 비롯한 인접 학문 분야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등) 에서는 기존의 인터뷰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 나아가 인터뷰 자체를 바라보는 인식론적 관점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례로 응용언어학 Applied Linguistics 34권 1호(2011년 발행)는 조사방법론으로서의 인터뷰를 심도있게 다루는 특집으로 꾸며져 있다. 구체적으로, 인식론적 측면에서 인터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터뷰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인터뷰 결과를 보고함에 있어 어떤 측면들을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가, 인터뷰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맥락들을 어느 정도까지 기술해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에 대한 다각도의 논의를 제공한다. 여기에서는 필자가 기존에 인터뷰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과 Steve Mann (2011) 의 논문을 엮어 인터뷰를 바라보는 관점 및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 간략히 논의한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람들과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과 인터뷰 사이의 차이점이다. 이상적으로 볼 때 인터뷰는 “의도하지 않게 서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된 수다의 경험”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수다는 기본적으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사람) 사이의 구분이 없다. 동호회에서 친한 친구와 음악 이야기를 나눌 때, 어머니와 밥상 머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여행을 떠나는 차 안에서 자녀와 대화를 시도할 때 우리는 대화의 주제와 구조, 질문 등을 미리 계획하진 않는다. 설령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특정한 내용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진행된 대화 전체를 특정한 포맷에 따라 보고하려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진 않는다. 수다를 떨다 화제가 바뀌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수다는 단절과 변화, 새로운 주제에 열려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적 대화 혹은 수다와 인터뷰 사이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일상적 대화에 비해 인터뷰는 특정한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이끌어 내고, 이를 체계적으로 보고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한다면, 그 인터뷰를 통해 인터뷰이의 특정한 경험이나 특성에 대해 단시간에 많은 것들을 깊이 이해하게 되길 기대하며, 이 기대에 맞게 인터뷰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터뷰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인터뷰를 통해 소기의 성과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인터뷰 또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대화 상황이기에 인터뷰이를 특정한 주제로 “몰아가는” 식이 되면 자연스럽고도 깊이있는 논의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터뷰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있지만, 그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강에 배를 띄우고 풍광을 바라보며 차 한 잔 나누다 보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 상황은 선계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인터뷰 과정이 지향하는 자연스러움은 인터뷰어나 인터뷰이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갖출 수 있는 미덕이 아니다. 인터뷰어가 아무리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해도, 인터뷰이가 자연스럽게 받아 주느냐의 문제가 생긴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게 되면, 인터뷰어가 원했던 대화의 흐름은 금새 깨지게 된다. 즉,자연스러움, 물 흐르듯 흘러가는 대화의 리듬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순간순간 함께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의 관계가 중요함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에 더해, 인터뷰가 일어나는 물리적 상황 (녹음을 하는지, 비디오를 찍는지, 노트 필기를 하는지 등에서 얼마나 큰 마이크나 카메라를 사용하고 어떤 장소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지 등등), 인터뷰 시간, 인터뷰어의 개입 정도, 인터뷰 자료와 분석 결과의 공유 여부 등등도 인터뷰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터뷰 자체에서 사용되는 단어 하나(예를 들어 형식을 갖춘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굉장히 일상적인 언어로 풀 것인가), 질문을 구성하는 방식 (열린 질문을 던질 것인가, 몇 가지 가능성을 암시하는 질문을 할 것인가, 예를 들어줄 것인가, 타인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질문을 던질 것인가 등), 언제 침묵을 길게 유지할 것인가 (때로 긴 침묵을 통해 새로운 답변을 유도할 수 있는데, 이것은 후속 질문을 던지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어떤 식으로 동의 혹은 놀람을 표현할 것인가 (제스처나 “예”, “네?” “응,” “음”, “아” 등의 사용), 언어 이외의 비디오나 그림, 제스처 등 다른 미디어를 사용할 것인가 등의 이슈도 매우 중요하다. 이 모든 요소들이 순간에 집중되어 인터뷰의 밀도를 구성한다.
 
문제는 적지 않은 인터뷰들이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에 대한 설명과 보고를 쏙 빼고 인터뷰이가 말한 내용(content)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인터뷰어가 정확히 무슨 질문을 했는지 보고하지 않고 인터뷰이가 한 대답만으로 특정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체 인터뷰의 내용은 전혀 보고하지 않고 특정 주제에 대한 인터뷰이의 답변을 짜깁기하여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꽤나 잘 알려진 학술지의 논문마저도 인터뷰가 일어난 사회문화적, 물리적 맥락,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 인터뷰 전개 과정 등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이 인터뷰 내용의 극히 일부만 보고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것이다.
 
최근 이런 관행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인터뷰를 일종의 자료 수집 테크닉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특수한 소통 방식 중 하나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전자가 인터뷰이를 “정보의 보고”로 보고, “어떻게 정보를 캐낼 것인가”라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면, 후자는 인터뷰를 참여자들이 힘을 합쳐 옷감을 짜고 옷을 짓는 활동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전자의 입장에서는 “캐낸 보석을 잘 보여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따라오고, 후자의 입장에서는 같이 옷을 짓는 만큼 ‘옷감을 어떻게 짜고, 어떻게 재단하며, 옷에 대한 청사진을 얼마나 또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나아가 ‘옷을 짓는 과정에서 역할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 새로운 디자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대한 고려가 필수가 된다. 후자의 견해가 당연하게 보이지만, 많은 학자들이 인터뷰를 “정보 캐내기 테크닉”으로 생각해 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연구 참여자들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인류학에서 조차 인터뷰의 실행과 보고에 있어서 미진한 점들이 많이 발견되어 왔으니 말이다.
 
인터뷰를 ‘자료 수집 테크닉’으로 보는 관점에서 ‘특정 맥락에서의 담화 행위’으로 보는 관점으로 전환한다면, “좋은 인터뷰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또한 “좋은 인터뷰에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는 어떤 관계여야 하고,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로 바꾸어 던질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폭력과 권위가 작동되는 맥락을 제외했을 때) 인간이 하는 모든 소통이 사회적 협력을 통해 구성 construct 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좋은 인터뷰어”는 개인의 차원에서 정의되기 힘들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즉, 좋은 인터뷰어라는 개념은 개인의 내재적 자질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며, 언제나 인터뷰이와의 관계, 인터뷰의 성격, 인터뷰가 일어나는 사회문화적, 정치적, 물리적 맥락 안에서만 기술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전의 인터뷰 핸드북에서 종종 소개되는 “인터뷰 준비 체크리스트”는 나름 유용하지만 그 한계가 뚜렷하다. 체크리스트가 인터뷰 준비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인터뷰의 동적인 역학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인터뷰어가 갖추어야 할 특성들을 나열해 놓은 교과서들은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 인터뷰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이 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서 “많이 해보면 알게 된다. 남들의 경험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고, 인터뷰 준비와 경험을 통해 좋은 인터뷰어가 되는 방법을 체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버린다면 그간 인문사회과학에서 쌓여온 인터뷰에 대한 노하우를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Mann (2011) 이 제시한 인터뷰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인터뷰의 복잡다단한 측면들을 포괄하진 못하지만, 인터뷰의 실행과 보고에 있어 주목해야 할 점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1. 정해진 안건 고수 vs. 대화체
 
이것은 인터뷰어가 정해진 안건을 하나 하나 ‘처리할’ 것인가, 혹은 일상적인 대화의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낼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된다. 일천한 인터뷰 경험에서 느꼈던 점은 인터뷰어가 질문 목록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야기가 나오다가 마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 고수’는 안건을 하나 하나 클리어하기 보다는 순간순간 물길을 낸다.
 
2. 자연스런 발화 vs. 유도된 목소리
 
이것은 첫 번째 항목과 많은 부분 겹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추후 데이터를 보고할 때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어떤 어조로 담을 것인가이다. 예를 들어 제주 강정마을의 미군 기지 반대 운동을 조사할 경우, 주민들과의 인터뷰를 어떤 톤으로 진행할 것인가가 이후 보고 포맷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물론, 이 포맷 자체에 얽매어 인터뷰의 과정과 내용이 왜곡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3. 직접적인 질문 vs. 간접적인 질문
 
인터뷰이에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나오는 반응을 보고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알아보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교육에 관한 인터뷰를 할 때, “핀란드에서는 학교에 가기 전에 미리 학교 진도를 공부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요…”로 운을 띄우며 시작한다면? 핀란드에 대한 명제는 사실이지만,그것이 인터뷰 내용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듯 인터뷰이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인터뷰이가 가진 지식과 경험과 다른 지식과 경험을 어떻게 병치 juxtapose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4. 공감 vs. 좀더 적극적으로 ‘맞서기’
 
인류학자들이 특정 부족의 풍습을 이해하기 위해 참여 관찰을 하고 인터뷰를 하는 것과, 김제동이 “김제동이 만난 사람”과 같은 포맷으로 사회 명사들을 만나는 경우, 정혜신이 치열한 운동의 경험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상황을 비교해 보라. 시사 이슈에 강한 인터뷰어가 상당히 적극적인이며 때로는 공세적이기까지 한 자세로 정치사회 관련 인사들을 인터뷰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각각의 경우에 상대방에 대해 공감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상대방의 답변에 대해 얼마나 날카롭게 추가적으로 질문을 던질 것인가 등의 문제가 있다.
 
5. 공감 vs. 드러냄
 
이 항목은 인터뷰이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려고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것들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인터뷰를 이끌어 갈 것인가와 연관되어 있다. 만약 철저하게 인터뷰이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를 알아보기 원한다면 인터뷰어는 새로운 사실을 ‘캐내려는’ 충동을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 물론 인터뷰 자체가 인터뷰어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사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이지만, 새로운 정보 자체를 캐내기 위한 노력을 최대한 줄이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덧. 이 항목과 관련해서 오랜 시간 인류학에서 논의되어온 emic / etic 이슈를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결과 보고에 있어서의 유의 사항
 
인터뷰가 특정한 맥락에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협력으로 구성되는 사회문화적 사건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숨소리, 질문을 던질 때 억양과 같이 지극히 작은 요소들도 인터뷰이의 답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이것은 또다시 인터뷰어의 질문 내용 및 방식에 대한 영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결과를 보고할 때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7. 래포, 과도한 래포 / 래포 부족
 
이것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의 거리에 관한 문제다. 또한 인터뷰 진행에 있어서 얼마나 친밀한 분위기를 형성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회의실에서 하는 인터뷰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하는 인터뷰, 다과를 먹으면서 하는 인터뷰의 느낌은 참 다르다. 또한 인터뷰어가 어떤 복장을 하는가, 어떤 장비를 동원하는가도 래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래포를 너무 강조하고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인터뷰가 초점없이 흘러가게 될 위험이 있다.
 
8. 과정 vs. 결과
 
인터뷰가 하나의 사회문화적 사건이라면, 인터뷰가 있기까지의 과정이 인터뷰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인터뷰 결과를 보고함에 있어 인터뷰 자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또 어떤 내용이나 의견이 나왔는지에 대한 논의와 인터뷰가 이루어지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설명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의 대다수 연구들은 인터뷰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은 거의 기술하지 않았으며, 혹시 기술한다고 하더라도 매우 개략적인 배경 설명에 그쳤던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인터뷰의 배경이 실제 인터뷰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심도있게 논의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9. 자기성찰적 요소
 
인터뷰 결과를 보고함에 있어 연구자가 어떤 성찰 reflection 과정을 거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언제나 “예상했던 범위”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나온다. 또 인터뷰 준비 과정에 대해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녹음된 인터뷰 자료를 검토하다 보면 질문의 구조나 인터뷰 당시의 어조,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 부족한 면이 많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점들을 체계화하여 결과 보고에 통합시키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상에서 인터뷰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사실 인터뷰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 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법.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 경험을 쌓다 보면 조금씩 나은 인터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Mann (2011) A Critical Review of Qualitative Interviews in Applied Linguistics http://applij.oxfordjournals.org/content/32/1/6.sh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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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에서 무지로 나아가는 책읽기

독서, 무지에서 무지로 나아가는 일

“좋은 독서는 질문에서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독서는 읽었다는 사실만 남는다.”

돌아오면서 이 말을 내내 곱씹었다.

억지로 독서일기를 쓰게 하기 보다는 책이 자신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질문을 적고, 이 질문의 끈을 이어나가기 위해 다음 번에는 어떤 책을 읽어낼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보다는 “무엇에 대한 무지를 깨달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

뭔가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더 알고 싶다는 질문으로 책을 덮는 건 어떨까?

그러고 보면 좋은 독서는 무지에서 시작해서 더 큰 무지로 나아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넓은 공간으로 인도하며 지구가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해주는 영상은 이러한 독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알 수록 더 모르게 되고, 모르는 것이 많아질 수록 더욱 자유로와진다. 하지만 이때의 자유는 이전의 자유와 같을 수 없으리라.’

#삶을위한리터러시

체화된 인지와 재현성 위기

기본적으로 체화된 인지 embodied cognition 의 이론적 지향에 동의하지만 “유행”에 편승한 과도한 주장들을 걸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기사는 이 점을 최근의 재현성 위기 replication crisis 와 관련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단, 여러 번 언급되고 있듯이 이건 EC만의 문제는 아니고 심리학 전반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https://qz.com/1525854/psychologys-replication-crisis-is-debunking-embodied-cognition-theory/?utm_source=qzfb&fbclid=IwAR3PbBEILzsffYWM-MB-wHp8B-ZlgeT9ykc05SUBs-bHpfVOGrGcmoey7yE

넓게 vs. 깊게

전문분야를 포함한 공부의 영역에서 넓게 파야 하느냐 깊게 파야 하느냐 하는 질문을 종종 접합니다. 어려운 문제인데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혹자는 그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기도 하고, 혹자는 넓게 파야 깊게 팔 수 있다고도 하니 말이죠.

제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와 실패(?)의 경험에 근거해서/국한해서 보면 궁극적으로 넓게 파는 것을 추구하되 한 가지만은 정말 깊게 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실용적인 이유입니다. 한 가지를 깊이있게 아는 경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오로지 자기만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다고 믿지만) 자신의 전문영역을 구축할 때 자기 일에 대한 자긍심과 삶의 안정감이 아주 조금은 확보되지요.

두 번째는 좀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한 가지 영역을 깊게 파본 사람은 그 경험을 기초로 다른 영역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걸 외삽이라 부르건 유비라 부르건 혹은 ‘감’이라고 부르건간에 끝까지 뭔가를 밀어부쳐본 사람이 갖게 되는 다양한 경험치와 지식의 지층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에서 저는 ‘넓게 파려고 하되 한 가지만은 깊게 파는 경험을 해보자’는 쪽입니다. 그러고 보니 ‘넓게 파야 깊게 팔 수 있다’가 아니라 ‘깊게 파 보아야 넓게 팔 수 있는 힘과 안목이 생긴다’ 정도로 요약 가능하겠네요.

덧. 예전에 저의 직업정 정체성에 대해 만들어 본 포스터입니다. 이런 놀이가 꽤 유행했었는데 나름 괜찮은 반응을 얻었었죠. :)

#삶을위한리터러시

작가정신의 실체

“작가정신”은 작품의 완결성에 대한 고집으로 보이지만 이를 지탱하는 것은 돈과 생산성의 압박에 대한 저항일지 모른다. 단어 하나 하나에 서려 있는 인내와 고통, 생활고와 고독의 흔적일지 모른다. 때로 완성된 글보다 굴하지 않고 써내려갔을 시간이, 그 과정을 이겨낸 작가와 이를 응원해준 주변 사람들이, 본문보다 감사의 글이 더 뭉클한 이유다.

그런 면에서 ‘OO일 안에 책 한권 쓰기”와 같은 강좌는 양날의 검이다. 긴 글을 기획하고 완성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는 취지야 뭐라 할 수 없겠으나, 일정을 못박고 완성으로 달려가는 출판 프로젝트에서 ‘책’만 남고 ‘쓰기’가 탈각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쓰기를 ‘커리어 쌓기에 있어 최적의 전략’으로 광고하는 걸 본 적도 있으니 이런 생각이 단지 ‘꼰대 마인드’만은 아닐 것 같다.

쓰기가 수단이 되고 기능이 되고 스펙이 되는 걸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수단, 기능, 스펙’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쓰기공부는 의심스럽다. 리터러시의 세계는 상품의 시장보다는 자연생태계였으면 한다. 생태계 안에서 시장은 흥망성쇠를 거치지만 시장은 생태계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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