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영어공부: 에필로그

“This is an apple.”은
그렇게 열심히 따라하면서
“This is me.”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습니다.

“Work hard, and you will succeed.”는
숱하게 만났지만
“United, and you will get what you deserve.”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가정법을 배우며
“If I were a bird”를 반복했지만
“If I were an immigrant worker in South Korea”를
발화할 생각은 못했고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English”라고 말하며
영어라는 산 앞에서 좌절했었지만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anything.”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롤플레이를 하면서
해당 역할을 앵무새처럼 따라했었지
새로운 역할을 꿈꾸고
새로운 대본을 써볼 생각은 못했던 나날들이 있었죠.

생각하는 말,
살아 숨쉬며 펄떡이는 말,
웃고 울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손잡아 주는 말을
가르치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이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문을 바꾸고
활동을 바꿉니다.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나아갑니다.

배우고 표현하며
성찰하고 소통하며 연대하는 말로,
그리고 그 말이 울려퍼질
세상으로.

당신의 가슴이
세계를 껴안는
변방으로,
경계로,

사람들 속으로.

#삶을위한영어공부 #단단한영어공부 #알라딘인문학스터디

It is … that 강조구문

It is … that 강조구문, 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각각의 요소에 동일한 조명이 비춰집니다. 그런데 때로 특정한 요소를 강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해당 요소에 스포트라이트(spotlight)가 가고 다른 요소들은 조금 어두운 조명이 비춰집니다.

예를 들어 John bought a gift for her mother at the restaurant yesterday. 라는 문장에서 “John”에 조명을 세개 ‘때리고’ 나머지는 조금 약한 조명으로 갈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영어에서 이 ‘조명’의 역할을 하는 것이 “It is … that” 강조구문입니다. 그래서 저 “…”에 들어가는 요소가 강한 빛을 받게 되지요. 여기에는 John도, a gift도, for her mother도, at the restaurant도, yesterday도 들어갈 수 있고요.

조명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It is … who”는 인물 전담 조명이고요. “It is … where”는 장소를 전담하죠. “It is … when”은 시간을 전담합니다. 이에 비해 “It is … that”은 만능이라 두루두루 쓸 수 있답니다. 좋죠?

아 한 가지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사실 “It is … that”이 만능은 아니랍니다. 왜냐구요? “bought”를 강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주는 많은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거죠.

동사를 강조하는 방식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동사 앞에 “do” 동사를 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저 문장을 강조하면 “John did buy a gift for her mother at the restaurant yesterday.”와 같이 쓰면 됩니다. 과거형이라 did를 썼고요. 조동사 뒤의 동사는 원형, 그래서 buy가 되었죠.

자 이제 무대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 중 원하는 대상을 골라 “조명을 때려주는” 작업을 할 수 있겠지요? 조명을 적절한 요소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으니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적용해 보세요. ^^

새로운 문해 접근법 new literacy studies

“리플렉트는 여기에 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새로운 문해(New Literacy Studies)’ 담론을 참조한다. ‘새로운 문해’ 담론은 전통적인 문해를 기능적이고 보편화된 틀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을 비판하면서, 문해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문해, 비문해에 대한 구분, 문해수준과 역량에 대한 평가, 문해 교재와 쓰임새 모두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문해 담론은 문해 사건(literacy events)과 문해 실천(literacy practices)을 상황분석과 교육을 위한 중요한 내용으로 삼는다. 즉 단수의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문해(literacy)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수의 문해 실천들(literacies)이 있다는 것이다. 문해교육이 이미 정리된 내용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해’가 학습자에게 의미를 가지며, 어떤 방법과 과정이 학습자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만들 수 이는지에 대한 것들 역시 학습자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일종의 문해에 대한 민속지적 연구(ethnographic research)로, 학습자들이 문해로부터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동체 내에서 다른 문해와 수와 관련한 다른 실천에 참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학습자들이 워크숍을 통해 문해와 관련된 자신의 문제를 탐색하고 질문을 통해 문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중요시한다.”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139-140쪽

프레이리 – MOVA의 문해교육

MOVA는 20-30명 단위로 문해 그룹을 조직했고, 그 그룹이 이끌고 지원할 슈퍼바이저를 선출했다. 그리고 직접 수업을 진행할 문해 활동가(리터러시 워커)와 트레이너, 모니터 요원들을 두었다. 그리고 프레이리의 ‘생성어와 생성 주제’에 영향을 받아 생성적 조사(generative investigation)를 진행하고, 의미 있는 상황에 대한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대화로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지식을 집합적으로 재생성했다(collective regeneration). 실제 수업은 토론-쓰기-읽기-쓰기-토론의 순환구조로 이루어졌다. 학습자들의 삶에서 의미 있는 주제에 대해 그룹 토론을 하고, 토론에서 여러 어휘들을 끄집어 내고, 이를 글로 써 보고 난 뒤 그것을 읽고, 다른 학생들의 단어와 문장들을 써 본다. 그러고 나서 또 새로운 주제를 논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문법 구조나 음운 조합은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이 과정을 통해 빈민 지역의 현실, 인종주의, 미디어 등의 주제들을 토론하면서 학습자들의 상식을 변화시켜 나갔다. MOVA는 시 정부와 사회운동을, 그리고 교육, 문화와 정치를 연결하는, 과거 MCP와 PNA의 전통을 다시 부활시킨 문해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22-23쪽.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 논문쓰기: 읽기와 쓰기 통합전략을 중심으로 5] 저자-되기 경험으로서의 논문작성

논문작성은 연구실적을 쌓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저자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저작에 대해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 저자는 작품에 자신만의 목소리(authorial voice)를 불어넣는 사람이다. 나아가 저작의 과정은 해당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논문작성을 이해함에 있어 ‘졸업 요건의 충족’이나 ‘실적 달성’에서 ‘저자-되기’, ‘전문가-되기’라는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논문을 써야 졸업한다”가 아니라 “논문을 써야 진짜 저자가 된다”로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다.

물론 이 길이 평탄하지는 않다. 자신의 글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 리도 없거니와 자신의 기준을 어느 정도 중족하는 글마저 타인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기 일쑤다. 자신이 신뢰하는 동료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인 지도교수, 저널의 리뷰어들의 평가로부터 타격을 입지 않을 재간 또한 없다.

이럴 때일 수록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써내는 사람은 없으며, 완벽한 글을 써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글의 발전 또한 멈춘다는 사실이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맷집’을 키우는 일이 학술적 글쓰기 훈련과정에 핵심적인 요소임을 깨닫는 것이다. 글쓰기의 발달은 결코 부드럽고 매끈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은 꽤 오랜 분투와 적지 않은 분루를 필요로 한다. 그런 면에서 ‘많이 써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줄기차게 써내는 일’이 더 중요한 시점이 온다. 이에 관하여는 아래 한참 전에 써놓은 메모를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다.

Up to a point, writing a lot matters. It really is important for building one’s writing muscle. When it comes to getting a project done, however, writing persistently is far more important than writing a lot. I call this ‘writing defiantly,’ where one rows strenuously against the current of highly stressful everyday events. This is a valuable lesson I learned from hitting the cul-de-sac in several of my writing projects, where I definitely poured out a lot of text but the manuscripts had nowhere to go other than in a dark, lachrymose corner of my hard disk drive. Some writers may be able to achieve what they want by producing lots of words in a flash, but writing on a regular basis, shine or rain, tormented or commended, matters much more to ordinary writers like me. So writing a lot is good; writing persistently is better. All the best for my friends grappling with those unruly yet lovely manuscripts.

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48: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2)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이란 단어의 생김새와 뜻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합니다. 필자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반드시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 ㅎ혹은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합니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87K”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의 자의성이란 언어의 형태(form)와 의미(meaning)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의자/라는 소리가 의자라는 개념에 대응하는 것은 사회적인 약속이기 때문이지, 둘이 필연적으로 묶여있기 때문이 아닌 것이죠.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합니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 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냅니다. 물리적 세계는 하나이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상징적 세계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가끔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습니다.

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합니다. 이 표현은 SF의 한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의 영문 제목에서 가져온 것으로, ‘껍질 안에 들어 있는 혼’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shell은 언어에 대응합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의자’, ‘chair’, ‘Stuhl’ 등에 해당하는 소리 혹은 철자들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입니다. 그런데 이 껍데기 안에 개념이 담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를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물리적 실체(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과도 같습니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혼(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삼라만상과 그 운행, 나아가 그것에 대한 지식을 코드화하여 작디작은 뇌 속에서 ‘돌려볼 수’ 있게 만든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analogy)는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편에 등장합니다. 모피어스(Morpheus)가 네오(Neo)에게 소개하는 컨스트럭트(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입니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loading)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옷, 장비, 무기, 훈련 프로그램 등이 언급되지만 아름다운 계곡을 불러올 수도 있고 맛있는 음식을 순식간에 생성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오래 전 추억도 소환할 수도 있죠. 그야말로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컨스트럭트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입니다. 물리적 세계와는 다르지만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구조체인 것이죠.

문법과 대화, ‘컨스트럭트’의 로딩규칙 그리고 개입, 변형, 확장

문법은 ‘컨스트럭트’의 로딩규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컨스트럭트에 개념을 불러들일 때 어떤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를 정하는 가이드라인인 셈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어떤 위계와 순서로 로딩되어야 하는지를 정합니다. 영어라면 ‘주어+동사+목적어’ 순서를 근간으로 다양한 요소들을 로딩할 수 있습니다. 품사는 특정 요소가 어떤 위치에서 로딩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각각 형용사와 명사인 ‘good’과 ‘people’이 함께 올 때에는 ‘good people’의 순서로 로딩되어야 하고, 관사와 명사인 ‘the’와 ‘people’이 함께 올 때는 ‘the people’ 순으로 로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화를 통한 소통은 ‘여러 컨스트럭트의 교섭과 변형 그리고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컨스트럭트에 특정한 개념체계를 로딩하여 음성언어를 매개로 상대의 컨스트럭트에 보냅니다. 이를 받은 상대는 자신의 컨스트럭트 내에 대응하는 언어를 호출하여 반응합니다. ‘로딩’과 ‘전달’, 그리고 또 다른 ‘로딩’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주고받음이 반복되는 교섭 과정에서 두 사람의 컨스트럭트가 변형되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변화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컨스트럭트는 대화를 주고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컨스트럭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고 있습니까? 어떤 정령(ghost)들을 초대합니까? 어떤 컨스트럭트와 상호작용합니까? 어떤 컨스트럭트와 충돌합니까?

이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실재입니까? 그것은 당신 자신이 결정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가 주인공 네오(Neo)의 운명을 결정하지만, 사실 어떤 약을 고르느냐는 일생일대의 결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정입니다.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언어를 고를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지,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어떤 생각을 버려야 할지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비판하지 않고 잘 살기?

어제 한 선생님과 비판적 리터러시의 중요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비판 리터러시를 키우는 건 사실 엘리트 교육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교육의 ‘변방’에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핵심’이라는 이야기였다.

비판적 리터러시는 잘 듣고 잘 읽고 행간을 읽는 데서 시작해서 전제를 살피고, 증거의 빈곤함을 지적하고, 논리의 일관성을 점검함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하지만 리터러시 교육에서 비판영역이 전면에 배치되는 경우는 여전히 적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대를 ‘넘어서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지식의 수준을 높이고 그 지평을 넓히는 행위라는 점이다. 내가 쌓은 벽돌 위에 또다른 벽돌이 올라간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딛고 올라서 주었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적 역량은 서로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어간다.

모두 비판자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쟁이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두의 비판으로 서로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비판의 태도와 기술이지 비판하지 않고 함께 잘 사는 법이 아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글쓰기

파업, 그리고 ‘인질’ 메타포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

모 신문은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서울대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에 대해 “파업 인질”을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는 서울대 도서관 경비 중 한 명의 발언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헤드라인으로 올린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바로 ‘학생=인질’이라는 메타포를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에 대해 “인질” 메타포를 쓰는 관행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이 인질이 되고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환자가 인질이 된다. 급기야 학교 난방을 담당하는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은 학생을 인질로 잡는 일이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인질”은 부정확하고 비열한 메타포다. 왜 그런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질”이라는 단어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학생이 인질’이라는 정보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인생은 무대”라는 메타포가 주연배우, 조연배우, 악역, 엑스트라 등등을 순식간에 소환하는 것처럼 “인질”의 구성에도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또한 인질범은 인질을 댓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질’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고틀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를 프레임(fram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인질’ 프레임에서 파업을 둘러싼 주체들이 맡은 역할을 살펴보자. ‘학생이 인질이냐’는 질문을 던졌으니 당연히 학생은 인질의 위치에 놓였다. 파업중인 노조는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인질범이 된다. 자연히 노조와 대치하고 있는 대학본부는 인질이 구출되길 바라는 편이 되겠다.

우선 이 프레임은 극도로 부정확하다.

인질범은 인질극 프레임에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 노조는 자신들이 응당 받아야 할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임금인상도 아니다. 무기계약직 전환시 빼앗긴 교통비, 급식비 등 다양한 복지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생명을 조건으로 거는 몸값과는 거리가 멀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다. 하지만 서울대 기계전기분회 노조는 사실상 약자이다. 파업은 몸뚱아리 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이는 매우 적법한 권리행사의 수단으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아가 ‘인질’ 프레임은 비열하다.

학생을 인질로, 노조를 인질범으로 상정함으로써 학생과 노조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는다. 아울러 대학본부를 ‘착한 편’으로 자리매김한다. 학생들이 노동자와 연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질이 인질범과 어떻게 연대를 한단 말인가? 이 프레임에서는 ‘노조와 연대하는 학생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인질이 된 학생들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인질극에서 인질은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극히 수동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파업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노조에 연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인질극에서의 인질과는 달리 학내 파업 상황에서 학생은 당당한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는 사라져야 한다. 걸핏하면 나오는 ‘인질’ 프레임에 마음이 동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인질’로 묘사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질 프레임이 뒤집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한다. 파업에 임하는 노조는 누구도 인질로 잡지 않았다.

영어로 논문쓰기: 네 가지 기둥

영어로 논문쓰기를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 4가지. (말장난 아닙니다. ^^;;)

1. 영어에 대한 이해 (도구언어에 대한 이해)
2. 논문에 대한 이해 (장르로서의 논문에 대한 이해)
3. 쓰기에 대한 이해 (쓰기행위에 대한 실천적, 메타인지적 이해)
4. 영어로 논문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이해 (프로젝트로서의 논문쓰기 수행에 수반되는 다양한 지적, 정서적, 정보적 요인에 대한 이해)

#영어로논문쓰기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 그리고 상상력

적어도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은 어학연수와 같은 해외 체류를 영어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꼽았다. 해외에서의 생활이 영어공부의 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인풋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라고 간단한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흔히들 말하는 몰입(immersion)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인풋의 양보다 더욱 핵심적인 요인들이 나타난다. 나는 이것을 두 가지로 본다.

먼저 “쓸모에 대한 감각”이다. 내가 배우고 있는 말이 세상에서 진짜 쓰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쓸모”에 대한 감각은 쉬이 생기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 본 경험이 있다면 입시와 내신이라는 목표 외에 학생들에게 영어의 쓸모를 설명해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아니 이것은 설명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안다. 연애나 배신같이 체험되지 않고는 전달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처럼 말이다.

다음으로는 “만남의 경험”이다. 이것은 쓸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 다르다. 나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다른 언어가 되어 돌아오는 경험.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경험. 이것을 목격하고 느끼는 것이 “만남”이다. 말을 건네기 전의 설렘과 말이 오가는 과정의 떨림과 말이 끝나고 난 다음의 여운을 겪는 것이다.

만남은 언어의 도구성을 넘는 경험이다. 언어가 사람을 울고 웃게 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도구성을 뛰어 넘어 존재를 감화시키는 언어를 진짜로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에 가지 않고도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을 키워줄 수 있을까? 외국어로서 영어(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백’하는 언어학습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물론 해외에서의 경험을 복제할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변화를 꽤하려면 언어학습에서 급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영어교육은 여전히 인풋이라는 ‘특급 키워드’에 머물러 있다. 얼마나 많은 언어자료가 투입되어야 하는가. 이 자료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이 패러다임 말이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에 더 많은 인풋을 부르짖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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