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a man vs There is some man

There is a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 vs. There is some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

위의 두 문장 모두 “서점 앞에 사람이 하나 있다”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러 교과서에서 말하듯 특정되지 않은(indefinite) 개체는 a나 some 모두로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완벽히 같은 문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이 둘 모두가 맞는 표현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There is a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를 봅시다. “서점 앞에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상황인데요. 이 경우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인데 일부러 ‘a’를 써서 표현할 수 있지요. 즉 발화자는 서점 앞의 사람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청자는 모른다는 가정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There is some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라는 문장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가정이 담겨 있습니다. 적어도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발화자는 청자 또한 서점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문장은 “서점 앞에 왠 사람이 하나 있다”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There is 다음에 나오는 a와 some의 미묘한 차이를 간략히 논의해 보았습니다. 전에 이런 용법의 예문을 두고 “a=some”이라고 설명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이런 차이를 간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관사공부중

The moon과 a moon

the sun vs. a sun
the moon vs. a moon
the universe vs. a universe

유일한 대상, 특히 해, 달과 같은 천체와 우주를 가리킬 경우 the sun, the moon, the universe로 쓰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은 공식적으로 하나이니 특정되는 개체이고 the moon이 맞습니다. 태양계에서 태양은 하나이니 the sun이고요. 우주 전체는 단일한 개체로 개념화되므로 the universe가 적절하죠.

하지만 이것 또한 개념화 방식에 따라, 맥락에 따라 쓰임이 달라집니다. The sun은 태양계 내에서 맞는 표현이지만 공상과학 소설에서 태양이 두 개인 행성을 그린다면 a sun, two suns 등의 표현이 충분히 가능하지요.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에 대한 이론 중 평행우주 이론이 있지요.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셨다면 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있으실 텐데요. 이 경우 ‘평행우주’는 다수의 우주를 상정하므로 parallel universes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The가 붙지 않는 복수형이지요.

마지막으로 목성 등과 같은 행성은 달이 하나가 아닙니다. 따라서 목성의 달을 지칭할 때는 a moon, two moons 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현재 목성의 공식 위성 수는 16개이니 16 moons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결론적으로 ‘(지구의) 달’은 the moon으로 반드시 the와 함께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moon 앞에는 the가 온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그른 설명입니다. Universe와 sun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이 적용되고요. 관사의 종류가 특정 명사의 성격이 아니라 맥락과 개념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같은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Forbes
https://www.forbes.com/sites/quora/2018/02/02/could-an-earth-like-planet-exist-around-two-suns/#b5b9e37cb281

#관사공부중

One of the 최상급+복수명사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최상급은 의미상 뒤에 나오는 명사를 특정(to specify)하므로 그 앞에 the를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 “the tallest girl in her class”라고 하면 “그녀의 반에서 제일 키가 큰 소녀”가 되므로 이 어구가 가리키는 건 딱 한 사람이 된다. 최상급이 나타내는 대상이 단일 개체로 특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경우 그런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one of the most wonderful things in the world” 혹은 “one of the best things in my life”과 같은 “one of the 최상급 복수명사” 구문이다. 이 경우에는 “the 최상급” 뒤에 복수가 나온다. 왜 그럴까?

이는 인간의 인지가 과학적 계산과는 다름을 보여준다. “one of the tallest buildings”라는 말을 보자. 적절한 수학적, 물리학적 기준이 주어진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은 하나 뿐이다. 하지만 위 경우에는 복수형(buildings)이 쓰였다.

물론 꼭 최상급이 아니라도 tallest buildings라고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래 위키피디아 페이지의 제목과 헤딩이 그런 경우다.

List of tallest buildings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tallest_buildings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인간은 ‘가장 큰 빌딩’이라는 단일한 개체를 최상급으로 특정할 수도 있지만, 세계의 수많은 건물들을 줄세워 놓고 그 중에서 일정한 기준을 통과하는 것을 묶어서 “tallest buildings”라고 특정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최상급이 특정하는 대상은 보통 단일 개체이지만,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집합(group)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기반하여 우리는 “the heaviest metals”를 생각해 볼 수도 있고,

What are the heaviest metals?
https://www.quora.com/What-are-the-heaviest-metals

the funniest jokes 라고 표할 수도 있다.

10+ Of The Funniest Two-Line Jokes Ever

10+ Of The Funniest Two-Line Jokes Ever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최상급 다음에 단수가 나와야 하는가 복수가 나와야 하는가는 ‘최상’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데서 기인한 부적절한 질문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개념화 능력은 생각보다 유연하다!

결론적으로 한 반 25명 중 가장 큰 학생을 이야기할 때는 단일한 사람으로 특정될 가능성이 높기에 ‘the tallest girl”이 적절할 때가 대부분일 것이고, 이보다 훨씬 넓은 모집단(population)에서 최상을 이야기할 때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을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기억하면 되겠다.

아래 예문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Using articles properly is one of the most difficult things in learning English grammar.”

#관사공부중

You have the (a*) wrong number

You have the wrong number. vs. You have a wrong number.*

“전화 잘못 거셨네요.”에 해당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You have the wrong number.”이다. 이 경우 예외없이 정관사 the가 사용된다. 왜 “a”가 아니고 “the”일까?

“The”의 주요 기능이 특정(to specify)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 문장에서의 정관사 the도 특정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 그런데 상대가 잘못 알고 건 번호를 ‘특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특정되는 것이 세상의 수많은 번호 중 잘못 건 번호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자, 받은 사람 입장에서 전화건 사람이 누른 번호는 딱 두 가지다.

the right number
the wrong number

이 점을 고려한다면 저 상황에서 “wrong number” 앞에 항상 the가 붙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경우 번호의 종류는 딱 두 가지 즉 “올바른 번호”와 “틀린 번호” 밖에 없는 것이다.

인지언어학의 용어를 쓰자면 화자가 말할 때 상정하는 개념적 공간(conceptual space)에는 두 가지 종류의 전화번호밖에 없는 것이며, 이중 틀린 영역을 “the wrong number”라는 언어표현으로 특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최상급 앞에 the가 붙는 이유와 “wrong number” 앞에 the가 붙는 이유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대상을 특정한다. 다만 최상급 앞 the의 경우 많은 개체들 중 극단에 위치하는 대상을 특정하고, wrong number 앞의 the는 맞는 번호들의 집합과 틀린 번호들의 집합 중에 틀린 쪽을 특정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란 이야기다.

덧. 제목의 별표 *는 문장이 문법적이지 않다는 뜻.

이는 물론 특정 컨텍스트를 전제로 한다. 즉, “A wrong number”가 무조건 안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열 개의 숫자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에 틀린 숫자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면 “There is a wrong number in the list.”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wrong number” 앞에는 “the”라는 설명은 wrong이다!!

#관사공부중

네이티브 이데올로기, 그리고 네이티브의 윤리

 

1. 은밀한 것과의 싸움은 늘 어렵습니다.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악당이야 잡으면 그만이지만, 오랜 시간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상식적 믿음’에 저항하기는 힘들죠. 영어교육 및 외국어교육 전반에서 가장 강력한 신념은 아마도 ‘네이티브가 언어의 기준’이며, 언어사용의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것은 원어민 집단이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를 좀더 철학적으로 풀자면 한국어의 소유권은 한국인에게 있고, 불어의 주인은 프랑스인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나머지는 그 주인들이 지정한 룰을 충실하게 따라야만 해당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어는 누가 소유하고 있을까요? 사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소유권 주장이 가진 논리는 스스로 무너지는 듯합니다.

한국어에서 서울말 중심주의, 외국어 특히 영어교육에서의 네이티브 중심주의는 은밀한 차별의 근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같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네이티브처럼 말 못하는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느끼는 일입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상황이죠.

‘Ugly pronunciation’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보면 제 말이 단순한 억측은 아닐 듯합니다.이와 관련하여 언젠가 직접 겪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외양은 한국인이지만 미국영어 원어민 발음을 가진 젊은이가 옆 자리의 친구와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A: “Are you talking about those Chinese people?.” (그 중국 사람들 이야기하는 거야?)

B: “Yeah, their pronunciation is, just, so, ugly.” (어. 발음이 그냥 너무 구려.)

모르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마음 속으로 쏘아붙였죠.

“왜 그리 못났냐. 니들 마음이 진짜 어글리하다.”

거의 모든 영어학습자가 네이티브처럼 될 수 없는 사회문화적, 경제적, 생물학적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이티브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요. 아니 한국어 원어민 화자로 살아가면서 타언어의 원어민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영어실력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새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네이티브에 대한 선망과 선동은 비교육적일 뿐 아니라 반과학적입니다.

누군가 소위 ‘네이티브의 발음과 언어능력”을 갖게 되었다면 그건 그들의 운이고 사회경제적 자본의 힘입니다. 그 능력 가지고 좋은 일 하시면서 즐겁게 사시면 됩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그런 능력에 대해 충분한 물질적, 문화적 보상을 해주지 않던가요.

2. 네이티브 이데올로기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소통의 부담을 오로지 학습자에게 전가하는 태도와 관행입니다. 네이티브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학습자의 책임이라는 믿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죠.

물론 상대가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라면 원활한 소통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의사소통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누구나 동의하구요.

그런데 영어의 경우에는 비원어민에 대한 기대가 유난히 높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죠. 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영어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생각은 커뮤니케이션 개론 첫 장에 나오는 소통의 근본 성격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소통은 언제나 쌍방향(two-way)이다.”

같은 모어를 쓰는 사람들간의 소통이건, 원어민과 비원어민간의 소통이건, 소통은 언제나 주고 받음입니다. 일방향 소통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소통이란 여러 사람들 간에 생각을 교환하는 행위니까요.

그렇다면 소통의 성공은 공동의 책임입니다. 한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어떤 상황이건 소통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양육자는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합니다. 외국어 교사는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특정한 부분을 길게 발음하기도 하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네이티브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학습자/비원어민으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네이티브로서의 책임’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한국어가 서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종종 ‘심판자’의 역할을 맡습니다. ‘이거 틀렸군’ ‘저건 웃기네’ ‘저런 표현을 도대체 누가 쓰나?’ ‘어휴 2년 넘게 살았다면서 뭐 이따위야?’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외부 자극에 대해 순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말벌이 날아오면 피하고, 우스꽝스런 발음을 들으면 ‘풋’하고 웃게 되지요. 저 또한 최근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낭독한 오디오북을 들은 적이 있는데 매력적으로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거기에서 끝난다면 우린 기계적 자극-반응의 노예가 되는 것 아닐까 합니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지만 언제나 그 한계에 저항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1) 우습고 어이없는 발음과 문법을 만날 때 심판자의 역할을 맡고 싶은 유혹을 제어하는 것, (2) 상대의 ‘부족한’ 실력을 원어민의 지식과 경험으로 보완하는 것, (3) ‘원어민 대 비원어민’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 대 인간’으로 평등하게 소통하려 노력하는 일.

비원어민은 죄인이 아닙니다. 네이티브는 벼슬이 아니고요. 그저 우리가 처한 삶의 다양한 양태일 뿐이죠. 괜히 쪼그라들 필요가 없습니다.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우면 되고요. 계속 배우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원어민 혹은 비원어민이 아니라, 더 깊은 소통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말을 배워가며 사는 거 아닙니까.

#삶을위한영어공부

연구방법으로서의 글쓰기

“연구방법으로서의 쓰기(writing as method)”라는 말이 있다. 있어 보이려는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글쓰기를 통해 생각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는 과정이 연구의 핵심 방법론을 이룬다는 실질적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만 줄창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 또한 글쓰기를 주요 일과로 삼는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글쓰기를 피해갈 도리가 없다. 나처럼 연구를 띄엄띄엄 하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이런 ‘방법으로서의 글쓰기’를 배우는 시기가 너무 늦다는 데 있다. 나 또한 글쓰기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학술적인 글쓰기는 언제나 과제와 연결된, 그래서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해치우게 되는’ 일이었다. 석사과정 후반까지 학문적인 글쓰기를 숙제와 등치시키는 우를 범했다. 결국 학위논문을 작성하면서 방법으로서의 글쓰기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하찮은 쪽글이라도 꾸준히 써내고 있다. 이제 글쓰기는 과제가 아니라 가장 선호하는 사고방식, 혹은 연구 모드(mode)가 되었다.

적어도 함께하는 학생들은 내가 범한 우를 다시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구자에게 글쓰기는 과제가 아니라 생각의 방식이고 주요한 연구 방법론이다. 이거 참 전형적인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해라’ 식의 조언이지만, 공부를 업으로 할 사람이라면 깊이 생각해 볼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김기란 선생의 지적처럼 논문은 학문적 사고의 구조를 텍스트화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텍스트화’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학문적 사고의 구조를 익힐 방도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순수학문과 교육의 공통점

Posted by on Jun 25,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연구가 인류에게 새로운 지식을 선사하는 일이라면 교육은 자신 앞에 있는 한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일이다. 지식의 새로움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연구가 교육을 단연 앞서겠지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그 한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른다는 점에서 교육의 임팩트가 작다고 할 수 없다.
 
흔히 생각하는 바와 반대로 소위 ‘순수학문’과 교육은 많이 닮았다. 당장 눈앞에 쥘 수 있는 건 없을지 모르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열매로 우리에게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교육을 수월성의 논리로만 파악하는 일은 위험천만하며 근시안적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세금을 때리다’

최근 들어서야 “관세를 매긴다”라는 뜻의 비격식 표현으로 “slap tariffs on ~”이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궁금한 것은 ‘관세를 때리다’가 이 표현의 번역일까 하는 점이다. 두 언어에 비슷한 개념화가 일어나고 있는게 흥미롭다. (참고로 slap은 ‘철썩 때리다, 때려 붙이다, 쾅 놓다’등을 뜻하고, ‘김치 싸대기’는 ‘Kimchi slap’으로 번역될 수 있다.)

https://forum.wordreference.com/threads/to-slap-tariffs.3345811/

TED 공식 Speaking Guide

TED의 책임 디렉터 Chris Anderson이 쓴 TED강연 공식 가이드입니다. 사실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Presentation Literacy”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대중강연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본사항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평이한 영어로 되어 있어 읽기 어렵지 않구요. 책에 나오는 강연들이 플레이리스트로 정리되어 있어 강의하기에도 좋습니다.

한 해 동안 이 교재에 살을 붙여 강의를 해보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청소년들과 함께 강독을 진행하면서 각자의 관심분야에 관한 강연을 만들어 보는 수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강연 재생목록
https://www.ted.com/playlists/324/the_official_ted_talk_guide_pl

도서 공식 페이지
https://www.ted.com/read/ted-talks-the-official-ted-guide-to-public-speaking

나침반으로서의 초고

한해 평균 여덟 번 전국영어교사모임 회보인 <함께하는 영어교육>에 글을 싣고 있는데, 이제 마흔 개 남짓의 원고가 쌓였다. 6년 째 쓰고 있는 <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얘기다.

영어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익숙한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컬럼인데, 인지언어학의 세계관, 언어관을 지지하고 공부해 온 사람의 입장에서 교사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학술논문이 아닌 대중적인 글 두세 쪽 분량으로 언어학 논의와 언어교육을 함께 다루는 일이 쉽진 않지만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쓴다.

요 며칠 초창기에 쓴 글을 흝어보는데 아쉬운 점이 적잖다. ‘왜 이렇게 밖에 설명하지 못했을까?’, ‘여기에서는 왜 그 학자를 언급하지 않았을까?’같은 자책에서부터, 예시나 예문이 별로라는 생각까지 하다 보면 이걸 다듬어 출판할 수 있을지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편 이런 반성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전 프로젝트 매니저 시절의 제품개발 경험에서 얻은 교훈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폰을 만든 사람들이 기술과 디자인을 꼭꼭 숨겨놨다가 올해 아이폰 첫 번째 모델을 내놓았다면 아이폰 X의 기능과 디자인, 사용성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제품이든 세상에 내놓아야 다음 방향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듯이, 그 어떤 글도 처음부터 온전할 수는 없다.

글의 완성(perfection)은 없다. 완료(completion)가 있을 뿐. 허나 완료된 원고는 완성으로 향하는 나침반이 된다. 방향이 잡히면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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