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평가 결과 확인

Posted by on Jul 14,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강의평가를 확인할 때면 가슴이 쿵쾅거리며 숨이 가빠오는 느낌입니다. 대부분의 강의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아왔고 나름 자부심을 갖는 수업도 몇 있습니다. 그런데 몇년 전 한 강의평가에서 ‘테러’에 가까운 평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부 가혹하리만큼 공격적인 학생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제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의 평은 나쁘지 않았는데 유독 (누구인지 알 것 같은) 한 학생의 코멘트가 트라우마에 가까운 충격을 준 것입니다. 이후 두어 해 강의평가를 확인하지 못했었지요. 머리로는 그 학생이 특이한 케이스라는 생각을 했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강의평가 코멘트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극복했지만 여전히 평가를 확인하는 게 버겁네요.

암튼, 이번 학기 대학원 과정에서 개설한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수업의 강의평가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실 며칠 어지러운 마음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여러 선생님들의 포스팅 덕분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요 몇 주 우리사회의 큰 사건들이 준 혼란은 여전하지만 학생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습니다. 결국 또 이렇게 학생들에게 기대게 되네요. 가장 흐뭇한 대목은 “모든 학생들을 존중해주신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습니다.”입니다. 갈수록 내용을 충실히 이해하는 법 만큼이나 진실하게 언어와 사회를 대하는 태도를 나누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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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에서 좋았던 점을 적어 주십시오.>

다양한 관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께서 얘기해주시는 사회언어학의 사례들이 흥미로웠습니다.

관련분야에서 중요한 논의거리들을 두루 훑으면서 중요한 개념들은 교수님께서 자세히 설명도 해주시고 예도 많이 들어주셔서 좋았습니다. 특히, 수업 이후에도 수업과 관련하여 저희의 지식이나 경험을 확장시킬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알려주시고, 언제나 학생들 입장을 공감 많이 해주시면서 편안하게 잘 이끌어 주셔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을 존중해주신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습니다.

매주 다양한 주제를 접할 수 있었을 뿐만이니라 교수님께서 오픈 카톡방을 통해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새로 접하는 다양한 사회언어학 이슈를 살펴볼 수 있어서 참 유익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살펴본 읽기자료들이 각 주제를 공부하는데 아주 유용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매우 열심히 수업을 준비해주셨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셨습니다.

매주 다양한 주제를 소개하는 사회언어학 세부 분야의 논문을 읽으며 사회언어학과 영어 교육의 연관성과 교육적 함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한학기 동안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사회언어학을 실생활과 연결하여 수업을 진행한 부분이 좋았습니다. 처음 사회언어학을 접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있었는데, 강의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실생활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언어학을 폭넓게 접해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 분야를 새롭게 배워보는 입장에서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학문 주제를 다룰 수 있어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강의에서 개선할 점이 있다면 적어 주십시오.>

없음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수업을 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없음

없습니다.

영문 학술 프리젠테이션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제가 프리젠테이션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 점이/이 연구가 정말 중요하다”라는 점을 청중들에게 알리는 방식입니다. 프리젠테이션이 그냥 이력서에 한 줄 올라가는 발표가 아니라 자기 삶에서, 학계에서 나아가 인류에게 정말 중요한 이슈라는 것을 설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에피소드를 공유하고 교육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발표를 시작하곤 합니다. 인상적인 인용구와 해당 분야의 기념비적 연구를 가지고 시작하는 전략도 나쁘지 않은 것 같구요.

두 번째는 데이터입니다. 자기 연구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외쳐봐도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프리젠테이션은 재미도 힘도 없습니다. 처음에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는 데이터가 없어서 고생했는데, 논문을 거의 완성할 때쯤 되니 보여줄 것들 중에서 고르는 것이 힘이 들었습니다. 저는 “강한 인상/확신을 줄 수 있는 데이터 두세 가지를 보여주는 간결한 비주얼”로 발표를 채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데이터를 보여주려다 보면 발표가 아닌 논문이 되어버리고 청중의 집중력도 급속히 떨어지게 되니까요.

즉 두 가지가 갖춰진 프리젠테이션은 기본은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문헌들을 잘 정리해서 표와 차트로 보여준다거나, 발표 후 자신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도입했다면 이를 통해 다룰 수 있는 다른 영역 혹은 데이터를 강조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이게 나에게, 학계에, 우리 사회에 중요하거든요?” 아울러 “왜 중요한지 이 데이터를 보면 확실히 아시겠죠?”라는 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이제 (그닥 좋아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프리젠테이션을 조직하는 ‘스킬’의 측면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발표자료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있고, 관련 용어를 숙지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영어로 발표를 이끌어 나갈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생각해 본 전략은 최근 쉽게 구할 수 있는 다양한 동영상 강의를 일종의 모델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TED.com에 올라와 있는 중 Pamela Meyer의 “거짓말장이 잡아내는 법”이라는 강연을 예제로 사용하겠습니다.

1. 시작에 임팩트있는 진술과 유머를 섞어라.

“Okay, now I don’t want to alarm anybody in this room, but it’s just come to my attention that the person to your right is a liar. (Laughter) Also, the person to your left is a liar. Also the person sitting in your very seats is a liar. We’re all liars. What I’m going to do today is I’m going to show you what the research says about why we’re all liars, how you can become a liespotter and why you might want to go the extra mile and go from liespotting to truth seeking, and ultimately to trust building.”

먼저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금 딱 보니까 너 오른쪽에 있는 사람 거짓말장이네?” 라는 말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 모인 청중들, 나아가 모든 인간에 적용하죠. 처음 웃고 시작하는 건 프리젠테이션에서 정말 효과적입니다. 자연스런 웃음으로 순식간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시작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거죠. 하지만 단순한 웃음을 유도하는 게 아니라 발표의 주제가 우리 각자 또 사회 전체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Today I’m going to … 라는 구문을 통해서 오늘 할 이야기를 단도직입적으로 전합니다. 이 문장은 전체 프리젠테이션의 주제를 담고 있는 문장이면서 자신의 일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ultimately to trust building) 문장이기도 하죠.

2. 아래에 내려가면 여러 가지 연구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On a given day, studies show that you may be lied to anywhere from 10 to 200 times. Now granted, many of those are white lies. But in another study, it showed that strangers lied three times within the first 10 minutes of meeting each other. (Laughter)”

이 부분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발표자가 소개하려는 연구를 매우 간결한 문장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 연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순간 프리젠테이션은 지루해집니다. 자기가 하려는 이야기와 관련된 내용만 최대한 간결하게 추려서 소개해야 하고, 그것이 하나의 스토리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프리젠테이션은 데이터 주석 data commentary 이 아니고 이야기하기 storytelling 이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데이터와 결과는 스토리텔링의 주요요소로 기능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번에는 특정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부분을 봅시다.

“Now this brings us to our next pattern, which is body language. With body language, here’s what you’ve got to do.”

앞서 발표자는 프로이드의 말을 통해 우리의 말 speech 과 그에 숨겨진 심리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위의 문장을 사용하여 제스처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죠.

이 부분에서 프리젠테이션을 보시다가 부분 부분을 엮어주는 표현들에 주목하는 습관을 들이자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Now we can move on to … 나 Given this situation/data 같은 식의 표현을 쓰실 수도 있고, On the contrary, on the other hand 등 역접을 나타내는 어구를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This is just a part of the story, though. 라면서 좀더 넓은 논의로 나아가실 수도 있고, Is this really a universal pattern?과 같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의 표현을 쓰든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 뚝뚝 끊기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프리젠테이션을 만드는 것은 영화에서 좋은 편집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입니다.

4. 다음으로 질문을 통해 청중과의 소통을 이끌어내는 부분을 봅시다.

“Now we’re going to look at the hot spots. Can you tell what’s happening in a conversation? Can you start to find the hot spots to see the discrepancies between someone’s words and someone’s actions? Now I know it seems really obvious, but when you’re having a conversation with someone you suspect of deception, attitude is by far the most overlooked but telling of indicators.”

우선 질문을 던지는 전략은 효과적이지만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건 프리젠테이션을 어색하게 만듭니다. (청중 반응: 뭐 어쩌라구? 그거 계산하려면 수퍼컴퓨터 써야 되겠네.) 너무 안이한 질문은 ‘뭐 저런 질문을 던지고 있냐. 다 아는 거잖아.’와 같은 반응으로 이어질 수 있죠. 따라서 발표하시는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발표 내용을 이해하면 충분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거나, 상상과 추측이 적극적으로 발동되는 질문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5. 다음으로 초반에 제시한 아웃라인을 언급하는 부분을 봅시다.

Now we’ve talked a little bit about how to talk to someone who’s lying and how to spot a lie. And as I promised, we’re now going to look at what the truth looks like.

이건 위에서 설명드린 3번과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초반에 언급했던 전체 강연의 내용 및 구조를 언급하면서 넘어가고 있지요. 청중들에게 지금 발표가 어디 있는지(where we are)를 알려주면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면 전체 흐름을 놓치지 않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발표자는 청중들을 새로운 여행지로 이끄는 가이드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6. 마지막 단락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져야 합니다.

자 마지막 문단을 한 번 볼까요?

When you combine the science of recognizing deception with the art of looking, listening, you exempt yourself from collaborating in a lie. You start up that path of being just a little bit more explicit, because you signal to everyone around you, you say, “Hey, my world, our world, it’s going to be an honest one. My world is going to be one where truth is strengthened and falsehood is recognized and marginalized.” And when you do that, the ground around you starts to shift just a little bit.

And that’s the truth. Thank you.

“사람들이 거짓을 인지하는 과학을 보고, 듣는 기술과 결합할 때, 그들은 자신을 거짓말에 동조하는 것에서 제외시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아주 조금만 더 확실히 표현하는 길을 시작하세요 “이봐, 내가 사는 세상, 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직한 세상이 될거야 내 세상은 진실이 강해지고, 거짓은 밝혀지고 무시되는 세상으로 바뀔거야 그리고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아주 살짝 바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실입니다 감사합니다.”

TED의 한글 번역이 완전히 매끄럽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훌륭한 메시지입니다. 저는 좋은 발표는 정보와 함께 영감을 주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단락에서 깊은 울림을 이끌어 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프리젠테이션 막판까지 자잘한 데이터를 제시하느라 마지막에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시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상으로 TED talk 한 꼭지를 가지고 학술 프리젠테이션에 대한 저의 짧은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TED 를 시청하시거나 기타 강의를 보실 때는 발표자가 주제의 중요성을 어떻게 개괄하는지, 관련 분야의 지식과 연구를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어 전달하는지, 토픽과 토픽 사이의 전환에서 사용하는 전략은 무엇인지, 프리젠테이션의 개별 꼭지들을 전체 이야기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하는지, 결론에서 청중들을 감동시키는 전략이 무엇인지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강의의 내용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각각의 요소에 해당하는 언어 요소들을 주의깊게 보셔야 하겠죠.

참고영상
https://www.ted.com/talks/pamela_meyer_how_to_spot_a_liar

#학술프리젠테이션 #영어로논문쓰기

“be (a)”, “have”, 그리고 범주체계

1. 인간은 세계를 다양한 범주(category)로 구획한다. 인간발달의 가장 중요한 축으로 범주화 능력의 확장을 꼽을 수 있다. 언어는 인간의 범주체계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2. 범주들은 일련의 체계를 이룬다. 해당 체계를 구별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종의 ~이다”의 의미를 지닌 ‘kind of-relations’와 “~의 부분이다”라는 뜻을 지닌 “part of-relations”이다.

3. 모두 알다시피 be와 have에는 다양한 뜻이 있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범주의 관계를 나타내는 용법을 들 수 있다. 범주 분류표(taxonomies) 상의 다양한 개체들이 갖는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4. 우선 be 동사는 부정관사 a(n)과 결합하여 ‘kind of-relations’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A train is a means of transport.”라고 말함으로써 기차가 교통수단의 한 종류임을 뜻할 수 있다.

5. 이에 비해 have는 ‘part of-relations’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동사다. 예를 들어 “A car has four wheels.”라고 말함으로써 네 개의 바퀴가 차에 일부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6. 이처럼 영어에서 have와 be는 범주의 체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라고 할 수 있다.

7. 재미있는 것은 범주의 위계(hierarchy) 상에서 기본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뭘 타고 왔느냐?”고 할 때 “차 타고 왔지.” “버스타고 왔지.” “오토바이 타고 왔지.” “비행기 타고 왔지.”등으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상황이나 화자의 성향에 따라서 “4륜구동 세단을 타고 왔지.”라든가, “배기량 300CC의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왔지”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질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정보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8. 여기에서 ‘차’, ‘버스’, ‘오토바이’, ‘비행기’등을 보통 ‘기본 범주(basic-level categories)’라고 부른다. 기본 범주에 해당하는 어휘는 보통 (1) 자주 쓰이고, (2) 간결하게 표현되며, (3) 다양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고, (4) 이른 시기에 습득된다.

9. 정리하면, 언어는 개념의 체계를 부호화(encode)하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로 ‘종류’와 ‘부분’을 들 수 있다. 영어에서 전자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방식으로는 ‘be a’ 구문의 사용, 후자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방식으로는 ‘have’ 구문을 들 수 있다. 개념체계 중 가장 기본적인 레벨에 해당하는 용어를 기본범주 어휘라고 한다.

이상은 Günter Radden & René Dirven. 2007.<Cognitive English Grammar>. John Benjamins Publishing Company. Chapter 1. Categories in thought and language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지언어학이야기 #be #have #기본범주

언어의 경계, 혁신, 그리고 진화

1. A가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상대는 미국에서 오래 거주한 한국인 2세 미국 시민권자 선배다. 평상시 영어를 쓰는 사람이고, 인사를 한 A와도 늘상 영어로 대화했다. 하지만 순간 장난기가 동한 A는 ‘한국 핏줄’의 동질성을 발동시키면서 유머스런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안녕하세요’와 고개숙이기, 손흔들기를 동시에 시전했다. 이것은 한국어인가 영어인가?

2. A가 B를 만났다. 둘은 경상도 출신 친구인데 우연히도 서울의 모 영어학원의 영어회화 수업을 동시에 수강하게 되었다. 첫 번째 수업시간, A가 B에게 “How have you been?”이라고 말을 건넸다. B는 장난스레 “I have been so miserable.”이라고 답했다. 문제는 B의 발화가 전형적인 경상도 억양을 띄고 있었다는 것이다. 순간 빵 터진 둘은 한참을 웃었다. 이 경우 B가 발화한 것은 영어인가 한국어(경상도 방언)인가? 둘의 ‘빵터짐’은 영어 문장의 내용에 대응하는가, 경상도 억양에 대응하는가, 아니면 이 둘의 절묘한 조합에 대응하는가?

3. A와 B는 중국인이다. 미국의 한 ESL 시간, 계속해서 A가 형용사 끝에 장난처럼 “的(de)”를 붙인다. 이에 질세라 B는 즉석해서 완료형을 나타내는 과거분사 뒤에 ‘了(le)’를 붙여 응수한다. 둘은 재미있어하며 히죽히죽 웃는다. 이들이 발화한 형용사와 과거분사는 영어인가 중국어인가?

4. ‘Untact’라는 ‘콩글리시’가 유행이다. 한국인들 다수가 이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다. 한 사람이 이 말을 영어로 생각하고 영미권의 원어민과 대화하면서 사용했다. 단어를 처음 들은 외국인은 속으로 ‘무슨 소리지?’했으나, 두 번째 ‘untact’를 듣고 이것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리고 재치있게 자신도 ‘untact’라는 말을 차용하여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후 원어민은 한국인을 만날 때 웃으며 ‘untact’를 자연스럽게 섞어 쓴다. 이 영어 원어민이 차용한 ‘untact’라는 단어는 한국어인가 영어인가?

우리는 언어의 경계를 명확히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어 내에도 수많은 외래어가 들어와 있고, 영어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그 어떤 언어도 ‘순수하게’ ‘섞이지 않고’ 쓰이거나 발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맥락과 상대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는 수많은 언어자원을 동원해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조립된 산출물 중에서는 전형적인 것도 있고, 약간의 혁신을 가미한 것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언어도 있다. 다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만난다면 조합의 혁신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통번역기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개인의 머릿속에 있는 언어자원에 더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타 언어자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주얼과 제스처 등이 결합되는 방식도 점점 다양해진다. 순간순간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단단한영어공부 #translanguaging

7년만의 대화

“오늘 연락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좋은 기회로 저연차 교사의 고민과 노력을 담은 책을 집필 중인데요. “아이들의 삶에 스며드는 수업은 따로있다”라는 제목을 지닌 파트가 있습니다. 이 파트에 제가 실제로 크게 감명 받았던 교수님의 글을 인용하고 싶어서, 혹시 괜찮을지 여쭙고자 연락드립니다. 실제로 제 수업에 큰 영향을 주었던 글이라.. 허락해주시면 너무나도 감사할 것 같습니다. 제가 싣고자 하는 글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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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n apple”은
그렇게 열심히 따라 하면서
“This is me(이게 나예요)”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습니다.

“Work hard, and you will succeed”는
숱하게 만났지만
“Unite, and you will get what you deserve”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가정법을 배우며
“If I were a bird”를 반복했지만
“If I were an immigrant worker in South Korea”를
발화할 생각은 못 했고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English”라고 말하며
영어라는 산 앞에서 좌절했었지만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anything”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롤 플레이를 하면서
해당 역할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었지
새로운 역할을 꿈꾸고
새로운 대본을 써볼 생각은 못했던 나날들이 있었죠.

생각하는 말,
살아 숨 쉬며 펄떡이는 말,
웃고 울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손잡아 주는 말을
가르치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이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문을 바꾸고
활동을 바꿉니다.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나아갑니다.

배우고 표현하며
성찰하고 소통하며 연대하는 말로,
그리고 그 말이 울려 퍼질
세상으로.

당신의 가슴이
세계를 껴안는
변방으로,
경계로,

사람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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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제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되어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 일하고 있다고요. 위에서 이야기했듯 자신이 몇몇 선생님과 함께 마무리하고 있는 책에 저의 글을 인용하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영광스런 일이니까요.

기뻤습니다. 7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젠 선생님과 선생님으로 만날 수 있어서 뭉쿨했습니다. 텅빈 7년 여의 시간이 순식간에 커다란 섭리로 채워지는 듯했습니다. 써놓고 보니 조금 호들갑스럽기도 하군요.

많은 분들이 가르치는 일을 콩나무 시루에 물 붓는 일에 비유하곤 합니다. 물을 부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통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라난다고요. 그렇기에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계속 물을 부어야 한다고요.

얼마 되지 않는 경력을 되돌아 보면 제가 물주는 일이나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십년 쯤 지나면 그래도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점점 더 자신이 없습니다. 어떤 게 좋은 수업일까요? 학생들이 콩나물이고 제가 물을 준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 오만한 생각 아닐까요? 그냥 함께 배우고 성장하면 되는데 제가 뭘 한다고 설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종종 이렇게 먼저 손 내밀어 주는 이들이 있어서 제가 하는 일이 아주 조금이나마 세상에 도움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무쓸모의 두려움으로부터 저를 해방시켜주는 구원의 빛 같달까요.

책이 나오면 7년 만에 학생을, 아니 선생님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하네요. ‘코로나가 잦아들면’이라고 또 바보같은 기약을 했지만 잊지 않고 기다려 보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지만 만남의 설렘을 간직하고 걷다 보면 이 긴 여정의 끝에 다다라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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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원고 교정 후 마무리 단계라.. 책을 6월 안으로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책 나오면 교수님 한번 찾아뵈도 될까요?? 😃”

“그럼요. 물론입니다. 코로나가 극성이지만 좀 잦아들면 뵈어요. 멋진 선생님으로 성장하고 계신 것 같아 참으로 감사하고 기쁩니다. 책 마무리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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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해진 마음에 여름 밤바람이 스밉니다.

수동태 뒤의 전치사에 관하여

a. He was relieved by what he saw.
b. He was relieved about what he saw.

이 둘 중에 뭐가 맞나요? 저는 relieved 다음에 by와 about이 다 된다고 배웠는데 말이죠. 네이티브 두 명에게 물어보니 by가 맞다고 하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고요. 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about과 by의 의미차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주신 두 표현 (relieved about / by) 중에 뭐가 맞느냐는 건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By”는 그 뒤에 동작주(agent)나 원인(cause)을 나타내는 표현이 주로 옵니다. 따라서 주신 문장이 “그는 그걸 보고 안심이 되었다”는 의미라면 He was relieved BY what he saw.가 되어야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에 비해 about은 말 그대로 ‘~에 대해’, ‘~에 관하여’라는 의미입니다. 뒤에 나오는 것이 relieve를 하게 한 agent나 cause라기 보다는 대상(object)인 것이죠. 따라서 “After hearing the news, he was relieved ABOUT the situation in New York.”라고 말하는 것이 좀더 적절하겠죠. 뉴스를 들은 게 원인이 된 것이고, 뒤에 나오는 ‘the situation in New York”은 안심의 대상이 되니까요. (그래서 ‘소식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의 적절한 번역은 “She was relieved BY the news.”입니다. By 대신 about을 쓰면 상당히 어색하죠.)

그렇다면 다시 He was relieved about what he saw.에 대해 ‘by’를 써야 한다고 말한 원어민의 직관으로 돌아가 보면, 사실 이건 표현에 대한 개인적인 직관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대한 사회적인 직관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맥락 없이 저 문장이 주어졌을 때 by냐 about이냐 하는 것은 ‘what he saw’와 ‘He was relieved’ 사이의 관계와 밀접하게 엮여 있는 것이죠. 보통 뭔가를 걱정하고 있다가 어떤 상황을 목격했을 때 안심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저만치 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가서 살펴보니 상처도 없고 특별히 다친 곳도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 경우 말입니다. 이 경우에는 ‘what he saw’에 의해서(by) ‘was relieved’되었다고 보는 게 적절하겠죠.

다른 상황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뭔가를 목격했어요. 예를 들어 아이들이 공룡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걸 본 거죠. 그런데 점심을 함께 하고 있는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어이, 김성우 선생. 그 뉴스 봤어? 요즘 나오는 공룡 장난감에 유해물질이 장난이 아니라는데?” 저는 갑자기 아까 봤던 장면이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애들한테 무슨 해가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뉴스를 찾아봅니다. 검색해 보니 모든 공룡 장난감이 그런 건 아니고, 특정 브랜드만 그렇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그제서야 저는 아까 봤던 장면에 대해(about) 안심이 됩니다. 뉴스에서 지적한 브랜드가 아니니까요. 이때는 “He was relieved ABOUT what he saw.”가 좀더 적절할 것입니다.

우리가 원어민에게 A/B 중에 뭐가 맞느냐고 물을 때 종종 놓치는 것은 A와 B를 “Either A or B”의 관계로 놓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글이나 코퍼스 툴을 찾아보면 둘 다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명한 출판물에 올라가 있는 경우도 많거든요. 여기에서 빈도(frequency) 뿐 아니라 그 두 표현이 갖고 있는 의미적/개념적 차이에 주목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By와 about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고요.

이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맥락이고 두 번째는 해당 표현의 기초적인 의미입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안심이 된다’와 ‘무언가를 목격하다’ 사이에 성립하는 가장 일반적인 관계는 ‘뭔가를 보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안심이 되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이라면 ‘목격한 것에 관하여’가 될 수도 있죠. 또한 by와 about이 가지는 어휘적 개념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고려해야겠죠.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이 두 표현이 칼로 무 자르듯 딱 갈리진 않을 겁니다. 그 경우에는 비원어민 뿐 아니라 원어민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수 있고요.

덧.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시고 “relieved about the situation.”과 “relieved by the situation.”을 exact match로 구글에서 검색해 보시면 about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수동태 #전치사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4: 언어와 정체성, 그리고 적절성(appropriateness)의 애매함

한국인 간호사가 있었다. 최근 미국으로 건너가 자격을 취득해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간호사B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의사는 상황을 파악하고 간호사B에게 “그건 이리저리 해서 그녀에게(to her) 건네주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her’는 한국인 간호사였다.

간호사B와의 대화를 마친 의사가 다시 한국인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의사가 살짝 당황한 듯 이렇게 말했다.

“Oh, I’m sorry. Do you go by ‘her’?” (앗 미안합니다. ‘her’로 불리시나요?)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있던 간호사는 3-4초가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임을 알았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 ‘당연히 여성으로 안보이나?’ ‘여기에서는 이런 식으로 대놓고 물어보기도 하나?’ ‘나 같으면 모른척 her라고 말할 거 같은데…’ 등등.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라면 그런 질문을 받을 일이 없다. 우선 상대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묻는 걸 꺼리며, 그런 것을 물어보는 일이 엄청난 결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어에서는 him/her와 같이 성별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대명사를 쓰지 않아도 되기에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마도 ‘저분’이나 ‘저 간호사’ 정도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들어 미국에서도 her/him과 같은 대명사를 쓰기보다는 them과 같이 성별을 나타내지 않는 인칭대명사(gender-neutral personal pronoun)를 쓰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일화 속 의사가 그냥 ‘them’을 썼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수 있었을 것 같지만, 또 이런 ‘them’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them’이 누구누구인지 되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면 언어와 문화에 맞는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사회언어학강의노트

삶을 위한 리터러시, 강의 궁리중

<영어로 논문쓰기>를 완성도 있게 다듬고 대중적인 강의로 안착시키는 데 두 해 정도가 걸렸습니다.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문서화된 내용이 꽤 있으니 한 해 정도면 쓸만한 강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북토크 등의 기회를 통해 여러 분들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구체화시켜 볼까 합니다.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와 ‘유튜브 세대’ 자신의 이야기, 교사 등 그들과 자주 소통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배울 것도 많네요. 감사한 일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10여 년 만에 두 번째로 제가 원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가 좋을지 고민중인데요. 사범대 영어교육과 대학원생이라면:

(1) 인지언어학과 영어교육이지
(2) 비고츠키 사회문화이론과 영어교육이지
(3) 멀티리터러시/멀티모댈리티와 영어교육이지
(4) 뭘 하든지 재밌고 학점 잘 주는 과목이지.

5년 남짓 만에 겨우 한 번 오는 기회인지라 이게 참 정하기 힘드네요. 여러분의 선택은 과연? 

배움의 시공간, 두서없는 단상들

온라인 개학 시기, 교수학습의 시공간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1. 온라인 개학이 거둔 일정한 성공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온라인 교육’이 가지는 내재적 균열은 ‘몸과 공간의 변화’라는 급진적 변수를 무시하고 ‘내용과 시간’을 잡아두려는 데 있지 않았을까. 배움에 있어 시공간은 분리 가능한가? 우리 교육은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2. 왜 적잖은 사람들이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가 안된다고 말하는가? 그저 의지의 부족인가? 배움의 공간이 달라지고 그 안에 놓여지는 몸이 달라지는데 ‘O교시’로 대표되는 시간의 구획이, 그 안에서 다뤄지는 내용이 그대로인 것은 자연스러운가?

3.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건만 여전히 교육에서 시공간이 따로 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옳은 일일까? 학교에서의 시간은 집에서의 시간과 같이 흐르는가? 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과 화면 속 사람들을 보거나 콘텐츠를 시청하는 시간은 동일한 밀도와 점성을 가지고 있는가?

4. 우리의 지각, 주의, 집중, 지속, 정서, 태도, 흥미, 몸짓 등은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어떻게 엮이는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의 몸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으로 매개되고(socially mediated), 공동체에 의해 규율잡힌(community-regulated) 학습은 컴퓨터에 의해 매개되는 학습과 어떻게 다른가?

5.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학교의 “O교시” 체제는 그 자체로 개인의 차이를 무시한다. 개인별로 이해와 배움, 집중과 지속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고의로 망각’한다. 공교육체제의 특성상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양과 수준 이상의 지식을 전수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필요악’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6. 추후 온라인 학습이 또 다시 ‘디폴트’가 되는 시기가 온다면 우리는 여전히 O교시 체제를 고집해야 하는가? 혹 ‘급진적 개인화’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공간의 변화, 함께 존재함(co-presence)의 상실은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변화를 수반한다. 그렇게 변화한 시공간에 맞는 새로운 배움을 상상해야 할 시기일지 모른다.

7. 몇 주 만에 온라인 개학을 위한 IT 시스템을 안정화시켰다는 소식, 그에 대한 일부 언론의 상찬을 보며 우리사회가 여전히 기술중심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IT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그것은 ‘온라인 개학’의 기술적 선결과제일 뿐 완성은 아니다.

8. 중요한 것은 ‘온라인/디지털’이라는 플랫폼에서 ‘개학’을 했다는 것이다. 학교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IT시스템의 완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교사들의 노고, 나아가 학부모와 학습자들의 협력이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조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온.라.인. 개학’이 아니라 ‘온라인 개.학.’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

9.교실에서 행해지던 짝활동 및 모둠활동이 힘들어진다는 것은 상호작용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부 온라인 수업이 택하고 있는 ‘시청완료=학습완료’의 공식은 바람직한가? 시청의 완료가 그 시간 동안의 인지적 정서적 몰입(engagement)을 담보하는가?

10. 오프라인 개학이 다가오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전의 세계’에 적응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 시간의 고군분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잊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새로운 실천의 싹이 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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