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대 구조?

수업 중에 ‘개인과 구조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많은 학생들의 눈빛은 “왜 그걸 따로따로 생각해”라고 말하고 있더라. 공부라는 것이 스스로 쌓아올린 선입견을 또 다른 공부로 극복해야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는 일이 없는지 더더욱 경계할 일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0: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4)

Posted by on May 22, 2019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지난 시간 우리는 관사를 “인식론적 지위를 트래킹하는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화자가 청자로 하여금 특정 명사를 어떻게 인식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따라 a를 사용하느냐 the를 사용하느냐 관사를 사용하지 않느냐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원리에 따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배웠던 여러 규칙의 허점이 드러납니다. 아래에서 관계대명사 사용에 따른 관사 사용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 앞에는 the?

정관사와 부정관사에 대해 배우면서 ‘명사 뒤에서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면 the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 보니 엉터리 규칙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처음 나오는 명사 앞에는 반드시 a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처럼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명사에 정관사가 붙느냐 부정관사가 붙느냐와 관계대명사의 수식 여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라 하더라도 특정되지 않을(not specified) 수도 특정(specified)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a(n)+명사’를, 후자의 경우에는 ‘the+명사’를 써야 합니다. 다음의 예를 살펴봅시다.

a. We are hiring a data scientist who specializes in data visualization.

b. The man who stole the wallet was his uncle.

a는 “우리는 데이터 시각화를 전문으로 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구인하고 있다”, b는 “지갑을 훔친 사람은 그의 삼촌이었다”라는 뜻입니다. 두 문장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살피면 a의 “data scientist”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는 특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관사 ‘a’를 붙여 ‘a data scientist’로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에 비해 b의 경우 “지갑을 훔친”이라는 관계사절은 특정인을 묘사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콕 짚어 가리킬 수 있는’ 특정한 절도범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따라서 ‘a’가 아니라 “the’를 붙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관계대명사가 꾸민다 하더라도 수식을 받는 명사는 수많은 대상 중 하나로 개념화될 수도, 특정한 대상으로 개념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따라서 관사의 선택은 달라져야 하겠지요. 결론적으로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는 정관사 the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은 옳지 않습니다.

the very man / the tallest girl

정관사의 가장 큰 임무는 어떤 명사를 특정하는 일(to specify)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특정하는 의미를 지닌 일부 형용사의 경우 정관사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형용사의 특성상 화자가 ‘여러 개의 개체 중 하나’로 명사를 개념화할 수 없어 특정한 대상을 가리킬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세 가지 대표적인 예를 살펴봅시다. 먼저 ‘the very man’입니다. 주지하듯 ‘very’는 보통 부사로 쓰이지만 형용사로 쓰이면 ‘바로 그’, ‘다름 아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바로 그 남자’를 나타내는 표현은 정관사를 수반한 ‘the very man’이 됩니다. 형용사 very의 개념 자체에 특정의 요소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물론 very가 부사로 쓰일 때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A very clever man’이라는 표현을 보면 ‘very가 아니라 ‘clever’가 man을 수식합니다. 따라서 “매우 영특한 사람 중 하나”라는 의미가 되므로 부정관사 “a”가 쓰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 the very clever man이 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경우에도 very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man의 의미 때문에 정관사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용사의 의미상 자연스럽게 특정 대상을 가리키게 되는 두 번째 예는 최상급으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최상급은 개념상 “가장 ~한”의 뜻을 갖습니다. 세상에 다양한 개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극단에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의미상 뒤에 나오는 명사는 하나로 특정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장 키가 큰 학생’은 한 명이고, ‘가장 큰 산’도 하나입니다. 따라서 정관사 the가 붙어서 ‘the tallest student’와 ‘the tallest mountain’으로 표현해야 함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First, second, third… 반드시 the와 함께?

세 번째로 수사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 경우엔 수사 앞의 정관사 즉,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와 같은 표현들을 예외 없는 법칙으로 배웠습니다. 수업시간에 “서수 앞에는 the를 붙여라!”는 구호를 외쳤었죠. 이런 법칙이 대개 들어맞지만 이 공식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a second chance“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give someone a second chance“와 같은 형식으로 빈번하게 쓰이지요. ”a second thought”와 같은 표현도 널리 쓰입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는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다” 정도의 뜻으로 “a second thought”와 같이 부정관사를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서수 앞의 관사 선택 또한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에서 “second”는 ‘다시 한 번’ 한번 더’ 정도의 의미입니다. 서수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것이죠. “take a second look(다시 보다)”과 같은 용법도 비슷합니다. 만약 우주선을 만드는 팀의 디렉터가 “Nobody deserves a second chance here.”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두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도가 되겠죠. 우주선이 폭파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니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이와 관련하여 학술논문에서 종종 등장하는 “a second limitation”과 같은 표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구의 한계를 논의하며 “두 번째 한계로는…”과 같이 이야기할 때 쓸 수 있는 어구인데, 한계점이 모두 몇 가지인지 언급하지 않고 “첫 번째 한계는…이다. 두 번째 한계는…이다.”와 같이 말할 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경우 은밀하게 ‘first’와 ‘second’가 단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럿 중의 하나”라는 부정관사의 개념적 의미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이에 대해서 “첫째, 둘째, 셋째… N번째”와 같이 이야기한다면 서수 앞에 모두 the를 붙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There are three problems with this method.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같이 “the very 명사”나 “the 최상급 명사” 등을 막무가내로 외우게 하기 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미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인지적이고 개념적인 기반을 깔아주고 다양한 언어 표현을 지어 올리는 것과 별다른 설명 없이 표현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주도학습 잡감

Posted by on May 16,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을 이야기한다. 학습자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점검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에서 학습하는 주체의 실질적 권력, 학습의 목표와 대상을 정의하는 주체와 이를 받아안는 주체 사이의 관계, 자기주도의 범위 등이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습을 위한 과업은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그 안에서 ‘자기주도’를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야간자율학습’은 자율이 아니며, ‘자기주도적으로 하루에 단어를 100개씩 외우라’는 주문은 타인의 욕망에 학습자를 종속시킬 뿐이다.

결국 자기주도의 핵심은 학습자가 주체로 나설 수 있는 맥락과 과업의 창조에 있지, 주어진 맥락과 과업 하에 맞는 주체성의 생성에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어설픈 자기주도학습 담론은 주어진 구조의 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순응능력을 요구할 뿐 주체로서의 학습자가 지닌 욕망과 탈주, 창조적 열망을 받아안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자기주도학습 담론의 핵심에는 학습전략 훈련이 아니라 학습을 둘러싼 권력배분의 문제가 놓여 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말가져옴의 윤리

‘버닝쑨대국집’과
‘버닝선대인’ 작명에서
말가져옴의 윤리를 생각한다.

저 말을 쓴 사람들은
주목받는 말장난을 원했을 거다.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를 일으켜
한번 더 쳐다보게 하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에서
말만 떼어 가져오려 했다.
말이 태어난 자리의
착취와 잔혹함
분노와 고통은 아랑곳 않고
말의 힘만을 가져오려 한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말은 사전 위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 상태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관계 속에
뿌리박고 있다. 투쟁하고 있다.
권력과 욕망과 아픔과 교차하고 있다.

그리하여
말 가져옴의 윤리는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는 윤리이며
말이 자라난 사회정치적 토양에 대한 살핌의 윤리이며
무엇보다도
그 말로 엮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이다.

삶과 세계를
인간을 거세하고
말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시키는 행위는
결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된다.

단지 말실수가 아니다.

삶에 대한 모욕이며
인간에 대한 망각이며
컨텍스트에 대한 몰이해이며
자기중심성으로의 한없는 함몰이다.

우리의 말은
원래 누군가의 말이었고
우리의 조어는
결코 완벽한 창조가 아니다.

말이 우리 곁에 올 때
세계가 온다.
사건이 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이 온다.

우리 모두
그렇게 말을 쓰면서
그렇게 삶에 잇대면서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길 빈다.

On nativespeakerism

Native-speakerism is a powerful ideology machine that mass-produces unfairness, contempt, inferiority, and frustration. It ruthlessly divides native and nonnative speakers, veils the hard fact that we are all legitimate users of a certain language, and naturalizes sociocultural, economic biases against additional language learners.

Through this seldom-challenged mechanism, it effectively molds discrimination out of differences, mimics racism in placing the categorical value on an innate capacity, and colludes with the ‘sacred’ meritocracy by establishing native speaker-favored standards, qualifications, and market environments. Where native-speakerism prevails, foreign language learning functions as a viable tool for the old ruling strategy: divide and conquer.

So I remind myself that I do not need to say, “I perfectly understand what you mean by that. However, it is wrong: native speakers would not speak like that.” No, they’re not wrong. They are communicating in a fully legitimate way. Ultimately, the right to judging right and wrong lies in the interlocutors in situ, not in an idealized group of native speakers. However the myth of the all-mighty native speaker persists, mainly due to its role in perpetuating the sense of deficiency and illegitimacy on the part of language learners and ever invigorating the market value of native speakers.

#영어로쓰면거의안읽힘
#여기까지읽어주신분께감사를

Translanguaging, Composition, 그리고 영어교육

1. 내가 가장 즐기는 두 활동인 글쓰기와 음악 모두 composi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실 이 두 영역 뿐 아니라 미술 및 사진을 비롯한 예술 영역에서 composition이라는 말이 두루 쓰인다.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보다 복잡한 구조체를 만드는 활동을 통틀어 composi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2. 단어건 음표건 컷이건 공간이건  요소들이 함께 배치되는 데서 패턴이 생겨나고 패턴이 반복되고 중첩, 변주되면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추상적인 수준에서 글쓰기를 비롯한 예술창작 전반을 관통하는 단어가 composition 아닌가 싶다. (이 의미에 상응하는 우리말이 있을까? ‘구성’이라고 번역되긴 하지만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3. 일상에서 작문이라고 하면 대개 한국어 작문을 가리킨다. 영어로 쓸 경우는 영작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용례들의 특징은 작문행위가 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서는 하나의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4. 하지만 ‘구성composition’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글이 하나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협소하기 짝이 없다. 당장 시내의 간판들과 광고들만 봐도 다양한 언어가 어울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은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들이 일상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다. 도시의 언어경관은 분명 여러 언어로 구성된다.

5. 인간을 ‘한국어를 쓰는 존재’, ‘영어를 쓰는 존재’ 등의 틀에 가두지 않고 ‘의미를 만드는 존재’로 바라본다면 여러 언어를 섞어 쓰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전혀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겠으나, 특정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구절에 대해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도적인 구성의 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6. 예를 들어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글에 ‘아랫목’과 ‘고구마’, 그리고 ‘할머니’를 한국어로 쓸 수 있다. 필요하다면 각주를 통해 이 세 단어의 의미를 밝히겠지만, 본문에서 이들 단어를 계속해서 고집할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7. 응용언어학 분야에서 다언어를 활용한 담화 구성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 translanguaging 이 부상하고 있다. 언어 사이를 넘나들며 발화나 작문을 구성하는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10여 년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도 뿐 아니라 교육적 활용도 활발히 논의되는 중이다.

8. 한국 영어교육 상황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는 것은 금기다. 가급적 ‘영어로만 사고’해야 하고, 영어로만 말하고 써야 한다. 그래야 영어가 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존재는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섞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으며 수사적 효과 또한 노릴 수 있다. 조금 더 급진적인 시도를 한다면 기계번역의 힘을 빌어 수십개 언어로 시를 쓰거나 ‘팝아트적’ 글쓰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9. 그런 면에서 우리말을 벼려 더욱 견실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혼종성(hybridity)을 실험하려는 시도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10. 생각해 보면 영어야 말로 엄청난 짬뽕언어 아닌가!

#삶을위한리터러시 #translanguaging

서울대 보건대학원 강의

4월의 마지막 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황승식 선생님의 초대로 삶을 위한 단단한 영어공부를 주제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대학원생 연구자들과는 보통 영어로 논문쓰기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 날은 네이티브 중심주의와 인풋만능주의의 폐해에 대해 주로 논의한 후 쓰기와 어휘공부 전략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어쩌면 ‘실용성’이 떨어지는 논의일 수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집중해서 들어 주셨습니다. 어쩌면 제가 ‘실용성’을 너무 좁게 정의하고 강의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더군요. 앞으로는 영어교육의 사회문화적, 제도적, 정치적 측면에 대해서 좀더 자신있게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연구자를 비롯하여 세계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이중고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주류’의 리터러시 관행을 충실히 익히는 것.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존 구조 안에서 새로운 관계와 질서의 리터러시를 실천하는 것.

학술리터러시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의 관행 즉 논문을 써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선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학술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갖는 모순들을 직시하고 이를 가로지르는 실천들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후자의 측면에서 보건학이나 응용언어학이 할 일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둘다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분야니까요.)

강연 때마다 느끼지만 제가 신나서 떠드는 것보다 청중들과 소통하는 게 더 즐겁습니다. 영어공부에 대해서도 한 차례 짧은 모임을 넘어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하루였습니다.

‘영어로만’의 한계

학생들,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 오로지 영어만을 쓰기를 강요하는 수업은 아웃풋의 양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점수를 얻을지 모르지만 교수학습의 근본원리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감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과목이든 교수학습은 상호소통과 이해의 과정을 요구한다. 이 과정 없이 배움과 가르침이 원활하게 일어날 리가 없다.

영어로만 말해야 하는 학생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없다. 오로지 영어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의미를 표현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교사는 오로지 학습자의 제한된 발화만으로 학습자의 상태, 지식, 의문, 선행지식 등을 파악해야 한다. 한계는 뚜렷하다.

영어교수학습에서 모국어가 방해요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측면을 철저히 간과한다. 학생들은 단지 영어로 말해야 하는 학습자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교수학습의 장에 참여하는 의미-창조자(meaning maker)라는 사실 말이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삶을위한리터러시 #단단한영어공부

more important than anything

오늘 구글검색을 기준으로 “more important than anything”을 검색하면 6,340,000개의 결과가 나온다. 이에 비해 “more trivial than anything”의 결과는 1,890개에 불과하다.

참고로 Corpus of Contemporary English를 기준으로 “more 형용사 than anything” 중에서 가장 많은 빈도수를 나타내는 게 important이다. 2위는 “more powerful than anything”. 사람들은 ‘중요함’이나 ‘강함’라는 의미에 최상이라는 개념을 덧붙이길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주 쓰이는 표현들을 뒤집는 데서 새로운 표현 혹은 덜 진부한 표현이 만들어질 수 있다. “more trivial than anything”이나 “more invisible than anything”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물론 문맥에 따라 이들 표현의 적절성은 달라진다. 하지만 ‘다들 쓰는 표현’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생각을 말로 옮기려는 시도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는 데 필수적이다.

그 어떤 것보다 사소한
그 어떤 말보다 연약한
그 어떤 날보다 오롯한

#데이터와영어교육 #삶을위한리터러시 #삶을위한영어공부

삶을 위한 영어공부: 에필로그

“This is an apple.”은
그렇게 열심히 따라하면서
“This is me.”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습니다.

“Work hard, and you will succeed.”는
숱하게 만났지만
“United, and you will get what you deserve.”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가정법을 배우며
“If I were a bird”를 반복했지만
“If I were an immigrant worker in South Korea”를
발화할 생각은 못했고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English”라고 말하며
영어라는 산 앞에서 좌절했었지만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anything.”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롤플레이를 하면서
해당 역할을 앵무새처럼 따라했었지
새로운 역할을 꿈꾸고
새로운 대본을 써볼 생각은 못했던 나날들이 있었죠.

생각하는 말,
살아 숨쉬며 펄떡이는 말,
웃고 울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손잡아 주는 말을
가르치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이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문을 바꾸고
활동을 바꿉니다.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나아갑니다.

배우고 표현하며
성찰하고 소통하며 연대하는 말로,
그리고 그 말이 울려퍼질
세상으로.

당신의 가슴이
세계를 껴안는
변방으로,
경계로,

사람들 속으로.

#삶을위한영어공부 #단단한영어공부 #알라딘인문학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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