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사로 끝나는 문장 금지 혹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문장을 전치사로 끝내지 말라”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영문법 규칙이죠. 사실 전치사로 끝나는 문장은 흔하게 발견됩니다. “I need a pen to write with.”와 같은 예문은 부정사 파트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처방문법 (prescriptive grammar) 하에서 이 규칙은 상당 기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영문법을 처음 배웠던 시절에도 간간히 접할 수 있었구요. 검색해 보니 무려 2011년에 옥스포드 사전 공식 블로그에도 관련 질문이 올라왔더군요.

Can you end a sentence with a preposition?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라틴어는 유럽 식자층의 필수 외국어였죠. 이 영향으로 17세기 이후 많은 학자들은 영문법을 라틴어 문법의 기초 위에서 기술하려 노력합니다. 현재 많은 문법서가 채택하고 있는 8품사 체계도 라틴어 문법의 영향 하에 만들어졌죠.

그런데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던 라틴어의 경우 전치사 뒤에 따라나오는 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언가의 앞에(pre-) 위치하는(position) 말이었던 겁니다.

이에 따르면 “Where are you at?”나 “I need a pencil to write with.”와 같은 말은 바람직한 규칙을 깨뜨립니다. ‘at’과 ‘with’의 품사는 전치사(preposition)인데, 이 뒤에 나오는 말이 없으니 전치사의 정의가 파괴된다는 거죠. ‘뒤에 따라나오는 말이 없는 전치사’는 모순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이 이상화된 규범을 먼저 상정하고 여기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문법 규칙은 도처에 있습니다.

갑자기 “사랑은 그 어떤 이념 떄문에 현실을 경멸하지 않는다.” 라는 본회퍼의 말이 떠오릅니다. 언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네요. :)

예시의 적절성

Posted by on Apr 29, 2017 in 강의노트, 일상 | No Comments

“The org bore” -자기가 속한 조직(organization)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청자/청중을 지루하게(bore) 만드는 일. 대중 연설에서 반드시 피해야 한다.

시험문제로 “the org bore”를 간단히 설명하고 예시를 들라고 했다. 한 학생이 정의를 내리고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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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여자들 앞에서 군대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

참으로 적절하지만 ‘군대 가산점’은 없다는. :)

말장난과 팩트 사이에 과학의 발전이 있다

Posted by on Apr 18,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I am so poor I can’t even pay attention.”이라는 유머가 있다. Poor와 pay라는 단어를 병치시키면서 돈이 전혀 필요없는 attention을 목적어로 삼은 말장난(pun)으로, 주의를 지불(집중)하지도(pay attention) 못할 만큼 가난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인지과학은 이 유머가 사실이 될 수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빈곤이 뇌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하고도 심각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때로 속담이나 말장난이 과학의 발전을 통해 사실이 되기도 한다. 더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http://www.newsweek.com/2016/09/02/how-poverty-affects-brains-493239.html

쉽게 써내려간 글

Posted by on Apr 14, 2017 in 강의노트,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작가가 술술 써내려간 글을 읽기 위해 독자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반대로 작가가 오르막에서 흘린 땀만큼 독자의 이해는 깊어진다. 쓰기가 쉬워지는 순간 읽기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글쓰기를 뇌에 담긴 생각을 외부로-밀어내는(ex-press) 행위로 보느냐, 원석(초고)을 깎고 다듬어 조각으로 탄생시키는 행위로 보느냐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가져온다. (11시59분에 오탈자 가득한 글(원석)을 내는 분들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분들 원석 깎는 게 제 일인데요 뭐.)

행복한 사전

요즘 Merriam-Webster 사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Kory Stamper의 책 <Word by Word: The Secret Life of Dictionaries>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가 마이너스가 되는 직종이래나 뭐라나. Oxford 영어사전 이야기를 다룬 <교수와 광인>, <The meaning of everything>이나 Roget 유의어 사전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The Man Who Made Lists> 같은 책을 가지고 사전학 수업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덤으로 영화 <행복한 사전>도 함께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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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짝과 함께 <행복한 사전>을 보았다. 여러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받았는데, 가장 먼저 보자고 한 건 짝이었다. 그냥 저 동네에서 일어나는 꽤나 감동적인 픽션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 건 직업 때문이었을까? (짝은 책을 만들고 나는 언어학을 공부한다.)

‘사전’하면 단어와 뜻풀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종이사전을 열면 단어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고, 단어마다 n개의 의미가 정리되어 나온다. 하지만 이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요 유구한 세월 끝에 달린 찰나다. 영화가 잘 보여주듯 사전을 만드는 것은 복잡다단한 일이다.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단어와 의미를 일일히 기록해야 한다면 그 수고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책으로서의 사전은 시쳇말로 ‘역대급 노가다’가 만들어 낸 거대 구조물의 표면일 뿐이다.

하지만 사전작업은 철학이 반드시 필요한 노가다다. 사전의 방향을 정하고 표제어를 고르는 일이 시대의 윤곽을 그려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한가? (직업적으로 선입견에 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새로운 사전 편찬의 첫걸음은 원칙에 따라 더할 단어들과 뺄 단어, 그리고 남겨둘 단어들을 고르는 일이다. 먼저 떠나야 할 단어와 남겨둘 단어, 그리고 새로 맞이해야 할 단어들로 새로운 사전이 채워지면서 지난 사전들의 시대와 새로운 사전이 열어젖힐 시대 사이의 세계가 윤곽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표제어의 선정 자체만으로도 역사와 시대를 구획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표제어 선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후 더 큰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분류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를 하나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 두 개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부터 엄청난 골칫거리다. 유의어와 반의어를 정의하고, 용례를 설명하는 데까지 이르면 해야 할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이뿐이 아니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장기간의 작업에서 특정 단어의 의미 분류에 적용한 원칙을 모든 단어에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각각의 단어에 알맞는 예문을 확보하고 분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사전 작업은 그야말로 산너머 산이다.

사전을 만드는 사전 편찬자는 바보가 될 운명이다. 사전이 출판되는 순간 많은 단어들의 의미와 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A라고 정의했던 단어는 B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고, C라는 단어는 유행에서 사라지고 없다. D라는 단어은 그 뉘앙스가 180도 바뀌어 있고, E라는 단어에는 정치색이 너무 많이 들어가 버렸다. F를 사용하면 꼰대스럽고, G를 사용하면 왠지 잘난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단어를 모으고 정의와 예시를 써내려갈 때는 안그랬는데 말이다. ㅠㅠ

그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사전을 만든다고 해도 표제어 중 상당수가 화석화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세월을 막을 수 없기에 단어들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간다. 사전은 이렇게 삶과 죽음, 성장과 퇴화, 변심과 배반의 모습이 모두 들어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사전을 만드는 것은 인생과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사전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데 <나>라는 사전을 채울 단어와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내가 아닌 세계와 타인에게서 온다. 세상과 사람들에서 배운 것들로 <나>라는 사전을 채워가고, 의미를 써내려간다. 사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소통이다.

하지만 늘 베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 멋대로 단어를 만들 수는 없지만 <나>라는 사전에 등재할 표제어를 고를 권한은 나에게 있다. 그 표제어에 가장 알맞는 예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직접 예문을 써내려 갈수도 있다!

사전이 언제나 미완성이듯 나도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지금 내 안에는 새로운 생각과 죽어가는 생각, 오랜 시간 나의 일부로 살아온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 지지리 못났지만 내가 살아온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는 사전이 바로 <나>다.

우리 각자가 사전이라면, 당신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조금 다를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들어있는 단어 중에서 내 마음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으리라. 당신이라는 사전에서는 ‘돈’이 스무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 밝은 단어이지만, 나라는 사전에서는 두어 가지 뜻을 지닌 어두운 단어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는 사전에 등재된 수많은 단어들이 내 사전에서는 단 하나의 추상어로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우린 참 많이 다른 사전이지만 몇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나라는 사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이라는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서로를 정의하고 서로에 의해 정의당하는 일이며, 그 와중에 이해와 오해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기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때로는 잘 정의된 단어로 나 자신을 빼곡히 채우는 것보다 빈 페이지들을 넉넉히 남겨두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2014.4.10.

‘극과 극은 통한다’

Posted by on Apr 4,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는데 정치의 영역에서는 (극)좌파 인사가 우파, 그 중에서도 극우 정치인으로 변신했을 때 종종 등장한다. 이 말의 매력은 (1) 직관적이며 (‘극’이랑 ‘극’ – 결국 같은 ‘극’이잖아?) (2) 명확한 예시를 찾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전에 골수 운동권 OOO, 지금은 XX당 최고위원이잖아?).

하지만 과연 ‘극과 극은 통한다’는 명제가 통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답은 모르겠다. 포괄적 정치인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이들의 정치성향 좌표를 시대별로 추적한 자료를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직관으로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은 과학적 데이터라기 보다는 인상/인물비평에 가깝다. 많은 정치인들의 성향은 조금씩 바뀌지만 극에서 극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은 확증편향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저 진술에 맞는 데이터가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달까. 강력한 힘을 지닌 예시 몇 개가 모집단에 대한 판단을 결정하는 상황 말이다.

지난 미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두 후보를 같은 급으로 매도했던 기사들이 떠오른다. 이 둘은 같은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고, 이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이 효력을 갖는 이유는 극좌와 극우가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열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인물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경우 ‘극과 극이 통한다’는 사상적 좌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관련된다. 즉, 상이한 정치세력 사이의 관계가 아닌 개개인의 품성에 대한 진술에 가깝다.

주류와 비주류

Posted by on Apr 2, 2017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철저히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주류의식을 가진 주류보다 주류의식을 가진 비주류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주류마저 인정하는 비주류라면 진짜 멋지겠지만 좀처럼 실현되기 힘들죠. 비주류 의식을 가진 비주류요? 부둥켜 안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요? (눈물)

물론 다들 밥은 먹고 다닌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습니다.

휴일을 확보하는 창의적인(?) 방법?

Posted by on Apr 2, 2017 in 강의노트, 일상 | No Comments

나: 4월까진 휴일 없죠? 그래도 중간고사 끝나면 좀 낫겠네요.
희: (학사일정 프린트를 꺼내어 5월 첫째 주를 가리키며) 5월에 휴일 많아요.
나: 그렇죠? 직장인들은 중간 중간에 쉬려고 벼르고 있던데… 거기다가 5월 9일에 대선이라 또 쉬잖아요.
학생들: 아싸~~
나: 노니까 좋죠?
학생들: 당연하죠. ㅎㅎㅎ
희: 선거 자주 했으면 좋겠다.
나: 아… 이번에는 탄핵 때문에 쉬는 거잖아요. ㅠㅠ
희: 그래도요.
나: 또 이러면 안되죠.
희: 후보들 다 거기서 거긴 거 같은데 탄핵하고 돌아가면서…
나: 아… 진짜 쉬고 싶은가 보다.
희: 놀면 좋죠.
수: 아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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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탄핵에 의한 휴일 확보 열망”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설교를 늘어놓진 않았다. 다만 중학생들이 ‘쉬고 싶다’는 말을 연발하는 사회가 좋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가르치는 게 좋아 교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Posted by on Mar 30,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모둠활동과 또래교수(peer teaching)를 자주 경험하는 학생들에게서 “가르치는 게 재미있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방학이나 정년 보장 등의 외적 요인이 아니라 “실제로 친구들을 가르쳐보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게 즐거우면 교사를 하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사회는 불행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어디에나 일어난다. 망하지 않는 사회의 기본 조건이 시간과 장소에 관계 없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가르침/배움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교사”나 “학생”으로 불리지 않더라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사회라야 희망이 있다.

학교 담장 안에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으로서, 공교육체제 하에서의 선생과 학생의 중요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교육의 문제를 교육계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회는 기만적이며, 교육을 위해 오로지 교육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편협하다.

진짜 가르치는 게 재미있나? 그렇다면 배움도 재미있을 공산이 크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재미있나?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을 해도 잘 해낼 잠재력을 가진 것이다. ‘성공할 것’이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선생의 길 말고도 수많은 가르침의 길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편재[遍在]한다. 결코 교육계라는 곳에 편재[偏在]하지 않는다. 교사가 되어 가르치는 일은 멋지다. 하지만 교사보다 더 멋진 ‘교육자’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간단한 독서지도 팁

읽기 활동에서 널리 사용되는 <연결하기(making connections)> 전략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텍스트와 자기 연결하기: 텍스트에 나와 있는 요소들과 자신(친구, 가족, 학교)을 연결한다. (Text & Me)

텍스트의 인물, 소재, 단어, 내용, 삽화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의 수준에 따라 “뭐가 떠오르니?”라고 추상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고, 그래픽 오거나이저를 통해 특정 텍스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대조 하도록 할 수도 있다. 텍스트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다양한 시도는 텍스트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텍스트와 텍스트 연결하기: 텍스트 내/외의 요소간에 연결점 찾기 (Text & Text)

(1) 텍스트 내의 요소들을 연결하기: 텍스트 내의 어떤 요소들이건 연결해 본다. 단어와 단어, 단어와 그림, 글과 제목 등등을 연결할 수 있다. 문법적 요소를 가지고 대명사나 관사 등을 앞의 명사와 연결시키는 활동을 할 수도 있다. 특정 등장인물의 대사만을 모아서 볼 수도 있다. 인물간의 관계도를 그리거나, 인물들간의 관계를 페이스북 ‘좋아요/싫어요/화나요’로 표현할 수도 있다.

(2)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연결하기: 특정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들을 비교, 대조, 연결하는 작업이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여러 개 읽었다면 두세 작품을 놓고 ‘비교/대조형 독후감’을 쓰게 한다. 비슷한 소재의 글을 읽은 바가 있다면 두 글을 종합할 수도 있다. 자신이 썼던 일기 여러 개를 재료로 하여 자주 사용하는 단어, 기분을 나타내는 표현, 의성어와 의태어 등을 찾아보라고 할 수도 있다.

3. 텍스트와 세계 연결하기 (Text and the World)

(1) 세계에 비추어 텍스트 이해하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와 텍스트 내에서 그려진 세계를 비교해 본다. 특정 캐릭터나 사건의 개연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텍스트 내의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반응이나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다.

(2) 세계에 비추어 텍스트 비판하기: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텍스트를 비판해 본다. 텍스트가 왜곡하거나 숨기는 것은 없는가? 우리나라라면 어떨까? 우리 동네라면?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라면 비슷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이와 같이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 사회, 그리고 다른 텍스트들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나아가 이를 쓰기로 연결하는 활동을 고안해 보자.

#3년전오늘 #재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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