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정보의 잉여도(redundancy)와 스포츠 중계

얼마 전 밥을 먹으며 올림픽 중계를 흘려 듣는데 해설자의 다음 말이 엄청 크게 들리더군요.

“이 기술은 마스터하면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음……..

특정 기술을 마스터(master)한다 함은 그것을 수행할 때 신체의 모든 영역이 특별한 어려움 없이 완벽한 협응(coordination)을 이룬다는 의미이니 당연히 쉽겠죠. 비슷한 표현으로 “완치되면 안아픕니다.” “다 쓰면 세제가 없을 거예요.” 같은 게 있으려나요.

스포츠 경기 해설에서 유독 이런 문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뻔한 이야기 말이죠.

“이 기술은 마스터하면 쉽습니다” 같은 문장에는 새로운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언어신호의 양에 비해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겁니다.*

이게 스포츠 해설만의 문제는 아니고, 언어체계의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대충 이야기하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같아도 이를 전달하는 언어는 구정보(old information)와 신정보(new information)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정보로만 된 언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수식으로만 되어 있는 이론물리학 페이퍼를 읽는 상황은 거의

신정보만 접하는 예입니다. 신정보의 바다에 빠지면 ‘한 개도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죠.

때로는 동일한 정보를 살짝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이해를 돕기도 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위 별표(*)한 문단의 두 문장은 이 방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신호량에 비해서 새로운 정보의 양이 적을 때 잉여도(剩餘度, redundancy)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언어 외에 ‘남아도는’ 언어신호가 많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잉여도가 높으면 나쁜 걸까요? ‘용건만 간단히’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통용되는 금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보의 정확한 전달이 중요한 경우 잉여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항공관제탑과 파일럿 간의 소통입니다. 주요 정보를 몇 번이고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지요. ‘잉여’ 언어신호가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집중력, 정보 저장 능력, 인출 능력 등에 한계가 있기에 잉여 정보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정보의 입장에서 보면 잉여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주도면밀함’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스포츠의 경우로 다시 돌아오면 언어의 정보량이 떨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 반드시 성공해야 역전이 가능하죠.”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데 지고 있으니 당연합니다.) 같은 해설이 적지 않다는 겁니다. (이 문단 전체가 잉여…)

하지만 스포츠 해설에 있어서 전달되는 정보의 상당 부분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에서 골이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골을 넣는 장면과 거의 동시에) 골이예요. 골! 골! 골! 골~~~~~ 아 아 골~~~ 골! 골! 드디어 첫 번째 골이 들어갔습니다!!!”

시청자들은 소리와 화면으로 골이 들어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골이라는 것도 모르기 힘들고요. 이 상황에서 저 말의 정보량은 제로에 가깝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해설자의 흥분과 기쁨, 놀라움을 전달합니다.억양이나 고저, 장단과 같은 자질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요. (예: 골!이 아니라 고~~~~~~~~~~~~ㄹ)

이는 ‘경기 해설’이라고 불리지만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서적 반응만으로 훌륭한 ‘해설’이 되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골이 들어가는 순간 해설자는 해설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 같네요. ^^

이번에는 간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성우: “어, 철수야. 오랜만이네. 왠일루?”

철수: “그냥.”

여기에서 “그냥”이 자체로 담고 있는 인지적 정보는 작습니다. 하지만 간만에 전화를 한 상황에서 ‘그냥’은 상당히 높은 정서적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냥 전화해 주는 친구가 최고라고 느껴질 때도 있죠.

결국 언어는 구정보와 신정보를 적절히 담고 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상황에 따라서 구정보가 의도적으로 반복되기도, 정서적 정보가 증폭되어 전달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구정보와 신정보, 인지적인 정보와 정서적인 정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입니다.

이 상황에는 매체적 특성도 포함되는데, 글과 면대면 강의, 동영상 강의 등에서 단위 시간당 효율적 정보량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쓰다 보니 글의 잉여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만 쓰고 잉여의 삶으로 재진입해야 하겠습니다. 모두 조금은 잉여스러운 오후 시간 되시길 빕니다. :)

 

영어, 쉽게 쓰면 장땡인가?

쓸데없이 어려운 수능지문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영어는 간단히 말하면 장땡’이라는 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뭐 간단하게 말하며 장땡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다음 표현 중에서 맨 위의 것들만 골라서 쓰시면 되겠지요.
 
Shut (the xxxx) up!
 
Be qutet.
 
Can you be qutet?
 
Please be quiet.
 
Could you please be quiet?
 
Your quietness/silence is requested.
 
We would like to request your silence.
 
Your silence is cordially requested.
 
We would appreciate it if you could temporarily keep your urge to talk.
 
I am not sure whether you would agree with me. But as far as I know it is usually the case that people keep quiet while the speaker gives their speech.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같지는 않죠. 아니 꽤나 다릅니다.
 
저 또한 되도록 적은 단어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확함(accuracy)’이라는 게 의미의 뼈대만 전달하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면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어 신호의 전달자(message deliverer)이기도 하지만 관계와 맥락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니까요.
덧.
 
특정한 표현이 반드시 특정수준의 공손함에 대응하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Quiet please”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으므로 대인관계에서 피하는 것이 안전하지만 테니스 구장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적 인식의 변화(테니스장에서 좀 떠들면 어때?)가 수반되면서 그 쓰임의 적절성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아래 기사는 이 점을 보여준다.
 
http://www.espn.com/tennis/story/_/id/17479201/us-open-quiet-please-silence-becoming-thing-in-tennis

공부, 앎, 무지, 그리고 감(感)

Posted by on Feb 6,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공부를 할수록 앎은 커진다. 이것은 지식의 양, 개별 지식간의 관계, 지식과 세계의 사태와의 조응 등의 영역에 적용된다.

앎은 채운다. 마음이 차오른다.

2. 하지만 동시에 무지 또한 커진다. 앎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은 무지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커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밤하늘의 별, 그 너머를 보는 자신은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3. 역설적이게도 무지에 대한 자각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앎은 자유를 배반한다.

4. 알 수 없는 것들은 많아지지만, ‘아닐 것 같은 것’들에 감각은 자라난다.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미심쩍은 것들, 그럴듯해 보이지만 치렁치렁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것들을 감지하는 능력 말이다.

5. 아는 것은 산술적으로, 모르는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갖는 능(能)은 조금씩 성장한다.

6. 의심의 틈이 생긴다는 건 빛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부터는 그 빛이 우리를 이끈다.

7. 이 과정에는 근본적 역설이 있다. 빛을 보고 틈이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틈을 감지할 때 빛이 들어온다는 것.

논문지도(?) 업체 단상

몇주 간 논문쓰기 강의 이야기를 해댔더니 타임라인에 논문지도(?)나 논문컨설팅(?) 업체 광고가 여럿, 그것도 꽤 자주 뜹니다. 페북 알고리즘 지능의 한계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이죠. :)

이전에 들어본 업체는 ‘OO펜’ 하나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시장인가 봅니다. 그런데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제가 하는 건 특정 논문에 대한 지도도 컨설팅도 아닙니다. 제가 (응용언어학의 일부 분야 외에) 그런 걸 할 수 있을리가요. 논문지도나 컨설팅은 지도교수 및 심사위원들께 받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오묘한 메타포의 세계

1. 국물도 없는 집은 진짜 국물도 없다. 다신 안가.

2. ‘넌 이제 아웃(out)이야’라고 말하며 점퍼를 옷장 안(in)에 던져넣었다.

3. 처음부터 답이 다 정해져 있는 사람은 정말 답이 없지.

4. 완전 차갑게 얼린 맥주가 요즘 핫해요.

#오묘한메타포의세계
#오늘의두포스트종합

승패사회

Posted by on Jan 19,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인지언어학, 일상 | No Comments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1980년 그들의 기념비적 저서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서 인간 언어가 기본적으로 메타포적이라 말한다. 메타포가 언어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사고 자체가 메타포적이고 이것이 언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예는 아마도 “ARGUMENT IS WAR(논쟁은 전쟁이다)”일 것이다.

참고로 영단어 argument에는 전쟁을 직접 가리키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으나 한자어 ‘논쟁(論爭)’에는 ‘다툴 쟁(爭)’이 들어가 있으므로 학술적으로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argument의 뜻을 나타내는 데에는 가장 적합한 단어이기에 그대로 둔다.

다음 예들을 생각해 보자. 논쟁에 있어 strong/weak point가 존재하고, 이걸 attack하거나 defense한다.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strategy(전략)를 잘 세워야 하고, 때로는 상대방의 주장을 완전히 뭉개(demolish) 버리기도 한다. 상대의 논지를 하나 하나 깨뜨리는 행위는 shoot down으로 종종 표현되며, 적확하고도 효과적인 비판을 묘사하기 위해 ‘right on targe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알아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위의 표현 모두는 전쟁 상황에 그대로 쓰일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표현이 argument와 war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즉 논쟁을 묘사하는 표현 중 압도적 다수는 전쟁을 묘사할 때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argument는 춤(dance)이나 정원 가꾸기(gardening) 혹은 건물 짓기(building)가 아니라 전쟁에 가깝다. 개념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레이코프와 존슨의 논리는 간명하다. 전쟁을 나타내는 표현과 논쟁을 나타내는 표현을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라면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으로서의 은유> 전반부는 다양한 예시들을 동원하여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다.

어제 가상화폐 관련 논쟁을 1분 쯤 보다가 껐다. 이후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글을 보니 2/3 이상이 ‘~가 이겼다’, ‘압승’, ‘제압’ 등의 단어를 내세운다. 내가 보기엔 별 의미 없는 평가이지만 실제 투자를 하고 있거나 관련 이슈들을 따라가는 분들은 나름 무게를 두는 듯하다.

토론이 전쟁이라면 승패가 전부일지 모른다. 하지만 토론이 무지를 밝히는 작업이라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가끔 모든 걸 승패로 환원하려는 세계가 두렵다.

글쓰기 고수

만약 “글쓰기 고수”라는 게 있다면 최고의 비법은 아마도 서두르지 않는 힘일 것이다. 글은 표현(ex-pression)이지만 표현의 힘은 오랜 시간 자신의 내부를 압박(in-pression)하는 데서 나온다. 차오를 때까지 응시하는 일. 내보내기 위해 쓰지만, 내보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한 글쓰기 하수다. 온전한 글로도 모자랄 이야기를 몇 줄에 담아 내보내려 하고 있으니.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 vs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Posted by on Jan 10,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술리터러시 발달과 관련된 논문을 썼지만 주 관심사는 메타포였다. 처음에는 인지메타포 이론을 깊이 가르치지 못해 아쉬웠다. 최근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에겐 중요할지 모르지만 학계에서 읽기쓰기를 배워야 하는 이들에게 메타포는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시험에 안나온다. 나에겐 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사소한 것이다.

개념을 이야기하는 글과 소소한 표현 정리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고 모두에게 가 닿는 것은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왜 그리 섭섭하던지.

교육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를 중심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구축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집착이었을까? 혹시 오만함은 아니었을까?

소소한 영어공부, 천천히 읽기, 뒤집어 보기, 삶을 녹여낸 이야기 만들기… 이런 것들을 고민하게 된다. 힘껏 가르치고 나서도 가슴이 뻥 뚫린 듯 허한 수업은 점차 줄여가련다. 그래도 먹고 살 수 있다면 말이다.

방학하고 나서 뭘 그리 계속하느냐고, 제발 좀 놀라고 했는데. (주어 없음) 오늘 도대체 쪽글을 몇 개나 쓴 거냐.

2018년 영어논문쓰기 1강을 마치고

1. 언젠가 영어논문쓰기 강좌 수강생들께 질문을 했다. 논문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분이 있는지. 대부분 대학원생이었고, 전공은 다양했다. 예상대로(!) 단 한 사람도 논문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분명 이 샘플링에는 큰 문제가 있다. 영어논문쓰기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니 안배운 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이 대답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1) 한국어 논문쓰기도 배워본 적이 없고,
(2) 논문쓰기 강의를 안들었다기 보다는 그런 수업이 없어 못들었다는 취지였기 때문이었다.

2.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리터러시 연구자/교육자들이 종종 던지는데 사실 내겐 참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다. 가르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 데까지 가르치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각자의 길을 가도록 하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모든 면에서 존경스러운 지도교수와 함께 공부했음에도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었다. 텍스트에 대한 피드백은 종종 받았지만 연구, 논문, 학계, 논쟁, 소통 등에 대한 큰 그림을 배우진 못했다.

4. ‘아니 그런 걸 누가 가르쳐 주느냐,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답답해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썼고, 직접 강의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별것 아닌 강의이지만 ‘대학원생 모두가 들어야 하는 강의’라는 찬사도 적잖이 들었다. 이런 응원의 목소리 덕에 지금도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5. 3년 째 영어논문쓰기를 가르치면서 대략 200여 명의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을 만났다. 그중 한 사람도 대학원생으로서 논문읽기와 쓰기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 담장 밖 논문 관련 사교육의 발흥은 참으로 개탄할만한 일이지만 리터러시교육이라는 대학교육의 핵심목표를 대학 스스로 외면한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6. 법률가는 법률가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행정가는 행정가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연구자는 연구자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결국 다양한 영역에서의 전문성은 그 분야의 지식을 소화하여 말하고 쓸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한다.

7. 지금의 대학이 학생들이 지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꼭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8. 이런 단상을 남긴 게 여러 번이다. 적어도 지난 5년 여 대학의 학술리터러시 관련 강의와 정책에서 이렇다할 변화를 목격하지 못했다. 매학기 강의에 깊이를 더하는 일부 교수자들의 개인적 시도 외에는 말이다. 그저 내가 과문한 탓에, 활동영역이 좁디 좁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브런치

2018년 한해, 영어교육에 관한 그간의 고민과 강의자료를 정리하여 컬럼 형식으로 써낼 예정입니다. 여러 분들께서 추천해 주신 브런치를 택했고, 발행시마다 페이스북에 소개드리려 합니다. (페이스북이 여러 분들을 뵙기에는 좋은데 글을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닌 것 같아서요. ^^)

제 브런치 주소는
https://brunch.co.kr/@literacy 이고,
(브런치를 하시는 분들은 그곳에서 또 뵙겠네요. ^^)

아래는 여는 글입니다.
https://brunch.co.kr/@literacy/1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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