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틀 클리셰, 그리고 관료제

문장을 이루는 다양한 구성요소를 설명할 때 단어, 구, 문장 외에 “문장틀(sentence frame)”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It is true that…. but”이나 “If ….. would/could” 등과 같이 몇몇 어구의 조합이 문장의 통사적/의미적 틀거리를 이루는 경우를 가리킨다.

갑자기 이게 왜 생각났느냐 하면, “…하면서도 스스로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라는 어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언어교육 교과서에서 문장틀이 언급되면 학생들에게 정치인들의 사과문이나 변명을 위한 기자회견, 혹은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라고 해야겠다. 덤으로 비정상적으로 높은 빈도의 클리셰 또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장틀과 클리셰, 관료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

따분하다, 참.

영어 표현 메모 몇 개

1. read와 read into

read가 보통 ‘읽다’의 의미라면 read A into B는 “B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느낌 등을 ‘읽어내다'”라는 뜻으로 종종 쓰인다. 특히 “read too much into something”의 형태로 자주 쓰인다.

“The boy is reading too much into her words.” (소년은 그녀의 말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읽어내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reading은 ‘read into’의 요소를 갖고 있다. 하지만 너무 심하면 ‘지멋대로 독해’가 되어버린다. 그런 경우를 ‘read too much into something’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 meet과 meet with

meet은 ‘만나다’라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이에 비해서 ‘meet with’는 조금 더 형식을 갖춘 느낌으로 일과 관련해서 더 자주 쓰이는 편이다. 일반화하긴 힘들지만 영국영어보다는 미국영어에서 meet with가 자주 발견되는 듯하다.

(중학교 때 meet을 철저히 타동사로만 배웠던 기억이 나서 meet with를 매일같이 쓰는 동료들을 보며 살짝 배신감이 들었다.)

3. on one occasion

한국어의 ‘한번은’에 잘 대응하는 표현이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임을 슬쩍 보여준달까.

4. onto

onto의 의미는 ‘into’와 ‘on’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것으로 보면 된다. 어떤 위치로 ‘진입’하는 것과, 진입된 위치가 뒤에 나오는 명사와 접촉하고 있음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onto the stage”는 (1) 무대 밖에서 안으로의 진입(into)과 (2) 진입한 위치가 무대에 닿아 있음(on)을 동시에 나타낸다.

5. in the nick of time / just in time

Just in time과 in the nick of time은 거의 비슷한 의미다. ‘사고가 터지거나 당황스런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정도의 뜻으로 보면 된다. 다만 이 둘이 쓰이는 맥락이 조금 다른데 just in time은 두루 두루 쓰이는 데 반해 in the nick of time은 스토리텔링에서 주로 사용된다.

6. Dead on time

영국 영어에서 “dead on time”은 ‘딱 맞추어서”의 의미다. “Dead”가 ‘죽은’의 의미가 아니라 ‘바로(right)’의 뜻으로 쓰인 것. 그래서 사람들이 장난스럽게 이런 문장을 해석해 보라 하기도 한다.

“The man arrived dead on time.”

물론 문맥에 따라 죽어서 도착한 것일 수도 있지만, 딱 맞춰서 도착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언어학습 이론과 인공지능

언어학습 및 습득 상황을 구분하는 데 있어 학습(learning)과 사용(use)의 관계는 중요하다.

1. 모국어습득 상황에서 학습과 사용은 분리되지 않는다. 즉 쓰면서 배운다.

2. 외국어로서의 영어학습에서 학습은 종종 사용과 분리된다. 배우긴 하는데 써먹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쓰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지만 쓸 일이 없다.

3. 통번역기술의 발달은 학습(learning)과 사용(use)의 분리를 가속화한다. 배우지 않고 사용하는 시대의 도래. 이것은 의사소통에서 기술의 역할을 증대시킬 것이다.

4. 언어학습을 우회(bypass)하고 사용은 기계의 지능에 맡기는 시대. 언어학습 및 습득이론 또한 AI를 기본으로 장착하게 될 것이다.

5. “인공지능이 영어교육에 타격을 입힐 것이다”라는 예측.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만 지금은 영어교육이 그동안 누려온 과도한 특권이 정상화되는 시기로 봐야 하지 않을까.

‘다름이 아니라’와 글쓰기 교육

“다름이 아니오라”는 메일에서 피해야 할 어구로 종종 지적된다. “다른 게 아니고” 같은 표현들은 가급적 피하라는 것. 생각없이 나오는 군더더기 표현으로 정보가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저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다름이 아니오라”는 메일의 내용이 아니라 문화적 사고패턴에 대한 정보를 담기 때문이다. 내용상 필요없을 지 모르지만 문화적으로는 통용되는 메시지 전달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메시지가 아닌 메타-메시지의 영역이다.

유난히 ‘있잖아’, ‘그거 알아?’ 등의 표현을 자주 쓰는 친구가 있다. (그런 친구 하나쯤은 다 있지 않나.) 이들은 그 자체로 특정 내용을 담고 있진 않다. 그래서 이런 말장난을 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실행에는 옮기지 않는다. (대신 써본다.)

“있잖아.”
“응 있지. 분명 있어.”

“그거 알아?”
“그거? 이건 아는데.”

“있잖아”가 전달하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화자가 “있잖아”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청자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있잖아’라는 말을 짜증스러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특정 문화 속 대화를 통해 사고구조를 형성해온 사람들은 “있잖아”를 듣는 순간 뭐가 있는지 순간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다름이 아니오라”는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기 전 짧은 준비를 할 여지를 준다. 뒤에 나오는 내용이 상대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거나, 업무를 요청하거나, 불쑥 질문을 던지거나 하는 일일 수 있다는 신호(signal)다.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일은 무례하게 비춰질 위험을 무릅쓰는 꼴이다. “다름이 아니오라”는 진부하고 정보성도 떨어지지만 이런 위험을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하는 전략으로 유효하다. 겨우 두 단어지만 말이다.

“다름이 아니오라”를 쓰지 말라고 할 때 “안좋으니 쓰지 마세요”라고 말하기 보다는 이 구절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는 문화적, 인지적 이유를 설명하면 어떨까? 안좋으니 쓰지 말라고 하기보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눠보면 어떨까?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핀잔만 듣게 될까?

하지만 때로는 ‘어쩌라는 것’ 보다는 ‘그렇다는 것’이 더 나은 글쓰기 교육일지 모른다. ‘~하라’ / ‘~하지 말라’만 난무하는 글쓰기 교육은 테크닉을 주고 생각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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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대잔치

Posted by on Jul 21,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Literally는 ‘말 그대로’이지만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가 더 많은 듯하다.

예: “It literally killed me.” (<-안죽고 살아서 신나게 말하고 있음.)

2. ‘아무말 대잔치’를 제목으로 한 글들은 대개 읽을만하다. 아무말 대잔치는 진지하게 쓴 글 중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3. 유명인의 아무말 대잔치는 아무댓글 대축제로 급속히 발전한다.

4. “진실로”를 반복 사용한 수사 중에 예수의 말씀 빼고 쓸만한 얘기가 별로 없는 거 같다.

5. “It is true but…”, “I’m sorry but…” 등의 어구에서 “but”이 나오는 순간 앞의 ‘true’와 ‘sorry’의 가치는 땅에 곤두박질친다.

But은 진실이나 미안함보다 힘이 세다.

6. 내일 지방 강의가 있다. 진짜로 진짜로 자러 가야겠다.

손편지와 전자우편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우편, 편지’를 의미하는 영단어 mail은 고대 프랑스어 male에서 온 것으로 초기에는 여행 가방을 의미했다. 이후 우편제도의 발달에 따라 ‘우편물’ 혹은 ‘편지를 부치다’등의 뜻으로 진화했다. 20세기 후반에 대중화된 e-mail은 ‘전자우편’이라는 뜻의 electronic mail의 준말이다.

편지가 이메일이 된 것은 전달의 매개 즉 미디엄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우편배달에 있어 궁극의 퀵서비스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전달방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전자우편 기술의 반쪽만을 보는 결과를 낳는다.

이메일은 메시지의 전달방식(delivery method) 뿐 아니라 정보의 저장방식(archiving method)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편지는 정보를 담은 물체가 공간이동을 하지만, 이메일은 정보를 복제하여 상대와 공유한다. 편지는 내 손을 떠나 보내는 것이 맞지만 이메일은 실상 나에게도 너에게도 보내는 것, 즉 ‘카피 앤 페이스트’하는 것이다. ‘이메일을 보내시겠습니까?’라는 말은 ‘이메일을 복사에서 홍길동의 메일 서버에 붙이겠습니까?’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디지털 정보를 두 사람이 갖게 되는 사태는 물성을 지닌 편지가 받는 사람의 소유가 되는 사태와 사뭇 다르다. 편지라는 미디어는 정보 및 그 담지자(carrier)의 비대칭성을 특징이지만 이메일은 정보의 대칭적 소유가 특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SEND” 버튼은 “GIVE & TAKE” 아니, “TAKE & GIVE” 버튼이다. ‘보내기’ = ‘나 한부 갖고 너 한 부 갖자.’

편지를 보내는 순간 나에게서 떠난다. 사라지는 편지라야 진짜 편지라는 말이다. 이메일은 보내는 순간 나에게도 남겨진다. ‘보낼 편지함(미래)’에서 ‘보낸 편지함(과거)’로 이동하지만 여전히 내가 쥐고 있는 상황은 지속된다. 동일한 메시지를 담는다 하더라도 편지는 ‘사라짐의 미디어’이고 이메일은 ‘남겨짐의 미디어’랄까.

손편지를 쓰다가 뭐 이렇게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노트 필기였다면 이렇게 장황하진 않았을 거다.

숙제를 할 시간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일전에 언급했듯이 맘고생을 좀 심하게 한 수업이 있었다. 바보같은 두려움이 수업을 잡아먹었고, 몇몇 학생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연신 돌아보는 걸 보면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진 않았나 보다.

처음부터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응용언어학 전공자로서는 드물게) 해당 분야에서 실무자로 일했고, 프로그램 기획, 구축, 실행, 평가의 사이클도 여러 번 돈 경험이 있었다. 해될 것이 없는 자산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한 것은 몇몇 학생들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분명 강사로서 수업상황에서의 권력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매번 면접관들 앞에 선 기분이었달까. 몇몇의 항의성 이메일과 거침없는 코멘트 속에서 느껴지는 태도를 요약하면 이거였다.

‘그래 너 얼마나 잘 하나 보자.’

가르치는 일을 하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의 찌질한 트라우마를 차분히 들은 친구가 입을 열었다.

“요즘 친구들이 그런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 얘네들이 어렸을 때부터 인강을 듣고 자랐잖아? 그러니까 유명한 강사라도 좀 보다가 ‘아니네’ 하면 다른 강사, 또 ‘아니네’하면 다른 강사. 이렇게 선생을 골라가면서 공부한 세대거든. 그리고 고등학교 때나 학원 같은 데서도 무기명으로 평가를 해. 그때 마음에 안드는 게 있으면 자기 감정을 여과없이 다 쏟아놓기도 하지. 그러니까 선생을 고르고 평가하고 여차하면 ‘버리는’ 데 익숙해지는 거야. 그냥 어렸을 때부터 죽 해왔던 일이라 너무 자연스러운 거지. 너 개인에 대한 태도라기 보다는 그렇게 자라온 걸 거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게 다는 아니겠으나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맡고 그들과 마주하면 구조탓을 할 수는 없다.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일.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숙제를 해야 할 시간이다.

모두를 위한 영어교육학 강의 (1) – 언어학습? 언어습득? 언어구축?

Posted by on Jul 15, 2017 in 강의노트, 삶을위한영어공부 | No Comments

외국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과정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동사는 아마도 ‘학습하다’와 ‘습득하다’일 것이다. (외국어를 학습/습득하다; learn/acquire a foreign language) 실생활에서는 구별 없이 쓰기도 하지만 개념적으로 보았을 때 약간 다른 함의를 가지고 있다.

학습(learn)은 무난한 표현으로 가장 널리 쓰인다. 이에 비해 ‘습득’은 미묘한 함의를 담고 있어 언어학습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ecological approach)을 추구하는 소수 학자들에게는 피해야 할 동사로 인식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습득(acquisition)은 (1) 외부에 있는 것들이 내부로 들어와서 (2)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함의를 지닌다. 경영학에서의 인수합병(M&A(Mergers & acquisitions)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직역은 ‘합병인수’인가? ^^)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보가 개인의 소유가 된다는 관점은 서식처(habitat)와 어포던스(affordances)를 강조하는 생태적 접근과 충돌하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며 제시된 대안적 개념으로는 참여(participation)가 있다. 여기에서는 언어를 소유물로 보고 이를 습득하는 것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특정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즉,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코드들을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문화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이다. ‘합창의 기술을 습득한다’와 ‘합창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다’라는 두 명제를 비교하면 ‘습득 vs 참여’라는 관점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인지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어를 창조 혹은 구축한다’라는 개념이다. 이는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영장류 연구를 이끌며 용법기반 언어습득을 연구하는 마이클 토마셀로의 역작 <Constructing a Language>의 제목이기도 하다. 학부생 한 명과 나누었던 대화 한 토막을 살펴봄으로써 “언어의 구축”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

나: “그러니까 문자를 아직 안배운 아이들을 생각해 봐요. 주변 소리를 모방해서 “가(go)”, “감(persimmon)” 같은 것을 발음하면서 두 단어 모두 ‘가’를 포함하고 있고, 다른 단어들에도 /ㄱ/, /ㅏ/, /가/ 소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것, 나아가 /가/가 자음 ‘ㄱ’과 모음 ‘ㅏ’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수 있죠. 이런 점들을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발음을 해낼 수 있어요.”

학생: “발음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죠?”

나: “특정한 발음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발음이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거든요. 성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해가 안될 수 있지만,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분절음의 체계적인 조합으로 단어가 이루어진다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문법적인 규칙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고요.”

학생: (연신 갸우뚱대며)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요?”

………..

언어학습 이론을 공부하면서 흔히 나타나는 오류를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다. 아이들이 ‘성인의 언어, 나아가 ‘성인이 이론적으로 체계화해놓은 언어”를 배운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이는 아동의 언어습득과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우리는 대개 아이들이 언어를 습득한다(acquire a language)고 표현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른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커뮤니티에 참여(participation)하면서 언어를 구축(build/construct a language)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성인에게서 아이들에게로 전달(transfer)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다양한 의사소통적 상황을 경험하면서 창발(emerge)한다.

이미 언어습득을 마친 성인의 입장에서 보면 성인언어가 언어학습의 최종 목적지인 듯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어습득을 위한 최소한의 생물학적 기제(architecture)만을 장착하고 있을 뿐어떠한 설계도도 갖고 있지 않다.

아동의 언어발달은 주어진 최종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는 일이라기 보다는, 설계와 시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성인이 보는 언어체계의 광대한 지도를 아동들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래도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다.

다른 용무 때문에 내주를 기약했으니, 다음 수업이 끝나고도 학생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이걸 이해 못시킬 수가 있을까요?”

==

언어학습은 단지 습득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언어는 (실제적/상상적)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일이고,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두를위한영어교육학강의

화용론 단상

Posted by on Jul 9,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화용론(話用論, pragmatics)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문맥에 따라 말(話)을 어떻게 사용(用)하는가를 설명해내는 언어학의 하위 분야입니다. ‘적절성(appropriateness)’은 화용론의 뼈대가 되는 개념 중 하나구요.

모국어를 공유하고 동일한 사회 내에서 성장하며 일정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화용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언어학 교과서의 암묵적인 가정입니다. 비슷비슷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같은 말을 쓰며 자랐으니 언제 ‘미안합니다’라고 해야 하는지, 언제 ‘와 쩌네요’라고 해야 할지 모르기는 힘들다는 것이죠.

이런 가정이 순진한 것임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온라인에서의 포스팅과 댓글을 보면 할말 못할 말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한답시고 혐오의 언어를 내뱉는 사람들도 많구요. 때로 말을 고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말할 타이밍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구별해야 할 순간들은 수시로 찾아오죠.

각종 사건의 가해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제대로 사과하는 법을 배우는 일만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논란이 될만한 신문기사의 답글을 보면 처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맥도 적절성도 사라진 자리에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꼴이랄까요.

언젠가 길을 잃고 빙빙 돌아 무려 3천 원 정도를 더 받아간 택시 운전 기사는 결제를 마치고 제 카드를 돌려주면서 당당하게 말하더군요.

“먼길 돌아오셨습니다.”

말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문맥은 사회문화적,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영역이 아닌 자신의 두개골 영역에 한정되어 있죠. ‘말은 소통의 수단이다’와 ‘문맥은 내가 정한다’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

저 또한 이런 실수를 종종 합니다. 모르고 지날 때도 있고, 오해를 사서 억울할 때도 있고, 바보같은 말에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실수를 알아채고도 사과할 타이밍을 놓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쩍 넘기기도 하고요. 언어학을 공부했다는 게 때로는 별무소용이라는 걸 깨닫기도 합니다.

그간 제 의미없는/바보같은/느닷없는/설명충같은/짜증나게 하는 답글에 마음 상했던 분들께 죄송합니다. 순전히 제 부족이요 잘못입니다. 앞으로는 좀더 적절한 언어사용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나의 영어공부 이야기 (2) – 고등학교 (전편)

I.
외고에 진학하면서 나의 영어공부 ‘성공기’는 자기기만이었음을 깨달았다. (성문시리즈의 진도와 독파 횟수로 대표되는) 친구들의 ‘실력’을 보며 중학교때의 노력이 하찮아 보였다고나 할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쫄 일도 아니었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듯하다.

일단 보는 책부터가 달랐다. 나는 기본영어를 후반부를 처음 공부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이미 기본영어를 3-4번 마치고 종합영어를 보고 있었다.

‘종합’이라는 제목이 주는 압도적 포쓰. 기본영어 두께를 비웃는 볼륨감. 귀퉁이 빼곡한 깨알 글씨. 너덜너덜해진 책 귀퉁이.

우쒸. 이 인간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공부를 한 거야!!

당시 해외 거주 경험을 지닌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두세 반에 한 명 정도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친구들이 있었다. 걔네들 영어 발음은 천상의 것이었다. 지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야만 하는 발음이었다고나 할까.

사실 나는 그런 발음에 익숙치 않았고 반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한국 애들이면 한국 애들답게 발음을 해야지. (말투 전환) 지가 뭔 미국인이냐? 미국인이야? 지금 와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당시엔 그리 느꼈다.

일 주일에 두 번 영어회화 시간이 있었다. 이게 나의 영어실력에 미친 영향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등학교 때 회화를 했어? 엄청 좋았겠네.” 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영어회화 한 시간 수업(고등학교이므로 45분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내가 발화는 인사말과 Yes/No 정도. 어쩌다가 말을 할라 치면 턱턱 막혀 스스로에게 실망. 이 과정의 반복.

결국 몇 번 시도하다가 침묵의 단계로 들어섰다. (겉으로는 ‘회화시간에는 과묵한 아이’로 포지셔닝.) 그래서 고등학교 3년간 회화시간에 이야기한 문장이 몇백 개 안될 것이다. 돌아보면 회화수업비를 따로 내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게 한스럽다.

II.
고등학교 들어가서 첫 해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애들이 왜 이렇게 다 괴물같은 건가. (나중에 알고 보니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혼자 끙끙 싸매고 고민하다가 부모님께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모건 프리먼 급의 중저음으로 딱 두 마디를 하셨다.

“전학갈래?”
“자퇴할래?”

그래서 난 이야기했다.

“자퇴하기 전에 그래도 한 번 해볼게요.”

일단 충격 받고 그대로 물러나는 게 싫었다. 어떻게든 그 밀림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영어의 고군분투는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 비장할 필요도 없었는데. 어리다는 건 멋지고도 웃긴 것이다.)

III.
내 또래들이 대부분 그랬겠지만 고등학교 때 영어공부는 한마디로 ‘입시공부’ 였다. 학력고사 시절이어서 발음 문제가 출제되고, 문법 문제의 난이도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주기적으로 보는 모의고사 점수가 진로의 모든 것을 말해주던 때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영어에 매달렸다. 1-2학년 때 꽤나 많은 시간을 영어에 투자한 게 모의고사에는 유효했다. 졸업할 때까지 영어과목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계속되었다. 외고에 다니면서도 말한마디 못하는 신세라니.

IV.
그나마 고등학교 영어 공부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풍부한 어휘 습득이다. 고등학생 치고는 상당히 많은 어휘를 외웠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어휘를 외우는 데 가장 기여한 요인은 ‘사전’이었다.

한 마디로 ‘사전을 끼고 살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었고, 전자사전도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나는 혼비 영영한사전과 함께 3년 내내 동고동락했다.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다만 주요 어휘라고 불리는 (주로 뜻이 엄청 많은) 놈들은 5번 이하의 뜻까지 외우려고 노력했다. 어떤 것은 15번 이상의 뜻까지 정리하고 예문을 적기도 했다. 주로 동사군들을 중심으로. 그렇게 정리한 두꺼운 단어장이 십수 권이었다. (이후 이 단어장들은 비극적 사건으로 사라지게 되고… ㅠㅠ)

말하기 꽝, 듣기 꽝의 영어실력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어휘실력을 길렀던 고등학교 시절.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그 때 쌓아 놓은 어휘 실력으로 대학교 4학년을 보냈으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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