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정신의 실체

“작가정신”은 작품의 완결성에 대한 고집으로 보이지만 이를 지탱하는 것은 돈과 생산성의 압박에 대한 저항일지 모른다. 단어 하나 하나에 서려 있는 인내와 고통, 생활고와 고독의 흔적일지 모른다. 때로 완성된 글보다 굴하지 않고 써내려갔을 시간이, 그 과정을 이겨낸 작가와 이를 응원해준 주변 사람들이, 본문보다 감사의 글이 더 뭉클한 이유다.

그런 면에서 ‘OO일 안에 책 한권 쓰기”와 같은 강좌는 양날의 검이다. 긴 글을 기획하고 완성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는 취지야 뭐라 할 수 없겠으나, 일정을 못박고 완성으로 달려가는 출판 프로젝트에서 ‘책’만 남고 ‘쓰기’가 탈각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쓰기를 ‘커리어 쌓기에 있어 최적의 전략’으로 광고하는 걸 본 적도 있으니 이런 생각이 단지 ‘꼰대 마인드’만은 아닐 것 같다.

쓰기가 수단이 되고 기능이 되고 스펙이 되는 걸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수단, 기능, 스펙’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쓰기공부는 의심스럽다. 리터러시의 세계는 상품의 시장보다는 자연생태계였으면 한다. 생태계 안에서 시장은 흥망성쇠를 거치지만 시장은 생태계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유학가기 전 해야 할 일

예전엔 유학가려는 학생들에게 영어공부를 좀 하라고 했던 듯하다. 지금은  우리말 책을 최대한 읽으라고 한다. ‘완벽하지 않은’ 글에 힘과 의미를 불어넣는 것은 조금 더 나은 영어라기 보다는 깊이있는 내용과 관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문해력 타령 유감

리터러시 주변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공통의 지반(common ground)이 무너지고 있는데 문해력 타령하는 사람들이 보여 갑갑하다. 해解는 각자가 할지 모르지만 문文은 사회가 생산한다. 그리고 차력사가 아니라면 력力 자랑은 삼가는 것이 좋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낭독과 묵독, 매체의 변신

A: “책을 읽으면 되었지 왜 낭독을 해?”
B: “악보를 눈으로 읽고 마음속으로 들으면 되지 왜 노래를 해?”
A: 그게 어떻게 같냐?
B: 같다고는 안했어. 그런데 같은 분명 같은 면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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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독은 정보를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 정보는 (어린이와 같이 아직 묵독의 기술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문자정보이다. 텍스트의 정보가 눈을 통해 뇌로 들어와 이것이 의미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문자정보에 매치되는 청각정보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시각정보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낭독은 다르다. 낭독을 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받아들인 뒤 이를 나의 발성기관을 통해 세계로 내보내야 한다. 수반되는 정보는 단지 시각적이지 않다. 머릿속에서 발음과 관련된 정보처리가 일어나고, 필요한 근육운동이 동원된다. 이는 나의 몸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생산된 음성을 내가 다시 듣는다. 낭독모임을 하는 경우라면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된다. 높낮이와 떨림, 크기와 어조 등 목소리와 관련된 모든 특징들이 공유된다.

낭독은 정보가 몸을 거쳐 소리로 물화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는 텍스트의 글자를 주로 시각을 통해 머리 속에서 처리하는 과정과는 엄연히 다르다. 결국 책을 조용히 읽는 행위와 낭독하는 행위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책은 낭독을 통해 새로운 미디어로 변신하며, 이는 사람과 책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결론: 나는 낭독하는 모임이 좋다. (아니 이게 왠 삼천포?)

#삶을위한리터러시

단어들은 자체의 삶을 갖는다

“나의 기억 속에는 단어들이 있다. 그것들은 표출해야 할 가상성을 빨아들이고, 그것에 타자기로 칠 수 있는 형태를 부여하기 위한 도구에 불가한 것이 아니다. 단어들은 진동하는 단위들이고 자체의 삶을 갖는다. 그것들은 자체의 리듬과 하나의 멜로디를 갖는다. 그것들은 그 뿌리 속에 전체 역사의 아주 오랜 지혜를 감추고 있고, 나는 그 역사의 유산이다. 그것들은 내포된 의미의 매개변수 전체를 반영한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단어들 중에서 표출하려는 가상성에 ‘들어맞는’ 것을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 나는 우선 그것을 들어봐야 한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35쪽) #삶을위한리터러시 #언어의말들

존재론, 의무론, 방법론의 관계

Posted by on Jan 9,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세계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가설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존재론은 세계가 어떠한지를, 의무론은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방법론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다룬다. 이 문제들은 서로 맞물려 있다.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없고,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 수 없다. 또 세계가 변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음도 알 수 없고,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변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의무론과 방법론이 없는 존재론은 없고, 존재론과 방법론이 없는 의무론은 없고, 존재론과 의무론이 없는 방법론은 없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19쪽)

문법공부란 무엇인가

문법이 맥락과 결합하면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Practice makes per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연습하다가 보면 완벽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논란이 좀 있긴 하지만 자주 인용되는 “1만시간의 법칙”(어떤 분야이든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슬로건으로 나올 법한 표현입니다. 이 문장을 분석해 보면 매우 간단한 구조가 나옵니다. 바로 “A makes B”죠.

“A makes B”라는 구문은 매우 단순합니다. 하지만 Makes를 다른 동사로 살짝 바꾸거나 적절한 맥락과 결합시키면 풍부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이 초간단 문형을 가지고 만들어 본 문장들입니다.

1. Make-up makes money.

만약 어떤 사람이 메이크업 하는 법을 유튜브에 올려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해봅시다. 이때 “Make-up makes money.”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여기에서 “make-up”은 화장 자체라기 보다는 ‘화장하는 법을 연구해서 만든 영상”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겠죠. 돈되는 일은 무엇이라도 make-up 자리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메이크업을 하면서 삶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면 “Make-up makes joy.”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2. No-dress brings popularity.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누드시위를 했다고 합시다. 이때 많은 언론들이 그에 대해 주목하고 순식간에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이 상황을 “No-dress brings popularity.”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옷을 입고 다녀서 유명해질 수도 있지만 나체가 되어 유명해질 수도 있는 것이죠. 물론 그렇게 얻은 유명세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3. Consistency makes jokes.

어떤 사람이 조크를 구사합니다. 처음에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코 굴하지 않고 계속 합니다. 끝까지 밀어부치니까 이제 사람들이 어떤 패턴을 접하면 “아 이거 OO식 유머네”라고 알아보게 됩니다. 나름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기고요. 이런 상황이라면 “꾸준히 하다 보니 유머가 되네”라고 말할 수 있을 거고, “Consistency makes jokes.”라는 표현이 가능할 겁니다.

4. Expediency creates illusion.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무명 작가가 있습니다. 원고를 보내고 답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뭐라도 대꾸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원고를 보낸 지 24시간도 안되어 “원고를 잘 읽어보겠다”는 답장을 받습니다. 이렇게 빨리 답장이 오다니! 뭔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이 경우 빠른 처리(expediency) 덕에 잘될 것 같다는 환상(illusion)이 생길 수 있죠. 사실 이번 출판사의 편집자는 이메일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결벽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A makes B>라는 간단한 구문을 이용해서 몇 가지 예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결합하면 그에 맞는 메시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A makes/creates B>라는 문형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어떤 문법 구조이건 적절한 어휘와 맥락을 만나면 굉장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정한 맥락을 만나면 거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문법구조를 떠올려 봅니다. 특정한 문법구조를 만나면 이와 잘 어울리는 문맥을 생각해 봅니다. 이 과정 속에서 암기의 대상이 되는 문법이 아니라 삶을 포착하고 표현해 내는 문법을 익힙니다.

이처럼 언어의 구조와 삶의 맥락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 문법 공부입니다. 앞으로 문법을 공부할 때마다 이점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영어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증보판)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의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을 기반으로 한 논의는 수학과 과학과의 오개념(misconception; 잘못된 개념) 연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영어과 교수학습의 경우 과목의 특성상 ‘오개념’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영어는 개념의 체계를 중시하는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과목과 다르게 ‘도구과목’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오개념을 생각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말로 배우면 되지 거기에서 무슨 개념을 따져야 하느냐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죠.

하지만, 도구적 성격이 강하다고 해서 오개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살펴보면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잘못된 개념, 영어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적지 않습니다. 영어에 대한 잘못된 상식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영어에는 존대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상식입니다. 존대가 없다기 보다는 한국어와 같은 존대법이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한국어에는 높임말을 위한 여러 장치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어휘의 구별(밥/진지, 나이/연세, 자다/주무시다)과 선어말어미 ‘-시’(하다/하-시-다, 가다/가-시-다)입니다. 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나 청자와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어휘와 어미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에는 이러한 어휘구분이 없습니다. 밥은 누가 먹어도 ‘rice’이고, 수면은 누가 취해도 ‘sleep’입니다. 언어의 특성상 한국어 ‘-시’에 해당하는 어미도 없습니다. 한국어와 같은 존대 시스템 (systems of honorific speech; 넓은 영역의 존대를 구현하는 형태소 및 문법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에서도 예절을 갖추고 존대를 표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가족의 사망시 합장을 위해 이미 있던 묘지에서 시신을 꺼내는 일은 ‘exhume’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dig up’이나 ‘dig out’이라고 쓰면 의미는 통하지만 상황에 따라 굉장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는 동사 ‘dig’보다는 ‘exhume’을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나아가 한 가지 의미도 여러 가지 문장으로 구체화될 수 있고, 이들은 각각 다른 수준의 격식과 공손함을 표현합니다. 다음 예들을 보시죠.

Shut up! (닥쳐!)
Be quiet. (조용히 해.)
Please be quiet. (조용히 좀 해주세요.)
Can you be quiet? (조용해 주실 수 있나요?)
Could you please be quiet? (혹시 조용히 해주실 수 있을까요?)
Your quietness is requested. (조용히 해주시길 부탁합니다.)
We would like to request your silence. (조용히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Your silence is cordially requested. (조용히 해주시길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이들 문장은 기본적으로 조용히 해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느낌은 천양지차입니다. 따라서 상황과 청자에 따라 세심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Could you be quiet please?” 할 상황에서 “Shut up.”하거나, ‘Be quiet.’로 충분한 상황에서 ‘Your silence is cordially requested.’라고 쓰면 당황스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영어에 한국어와 동일한 존대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다양한 문법구조와 조동사 등을 사용하여 예의와 존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번째, 영어는 미국의 공식언어라는 ‘상식’입니다.
미국의 공식어(official language)는 당연히 영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미국 연방수준에서의 공식어는 없습니다. 국가가 영어를 쓰라 마라 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만 주정부 수준에서 영어만을 공식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English-only’라고 불리는 정책입니다.

현재 50개 중 절반이 조금 넘는 주가 영어만을 공식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와이가 영어와 하와이어 모두를 공식어로 인정하는 것과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주정부의 의지, 영어와 관련된 법원 판례, 해당 정책 조문 해석의 문제, 개별 교육기관의 대응 등에 따라 ‘English-only’ 정책은 사뭇 다른 파급력과 강제력을 지닙니다. 이민자가 세운 나라에서 하나의 언어만을 강제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도 논리적이지도 않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입니다.

세 번째는 네이티브 스피커는 문법적으로나 어휘적으로 완벽하다는 생각입니다.

“주변에 네이티브 없어? 물어보면 되잖아.”

알쏭달쏭한 문법이나 어휘에 대해 고민할 때 흔히 듣게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네이티브라고 해서 영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You’re’와 ‘Your’를, ‘it’s’와 ‘its’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유머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절대 한국어 문법과 어휘 안틀린다”처럼 황당한 말은 없습니다. 한글 띄어쓰기를 완벽하게 해내는 한국인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국어를 평생 써온 사람들도 한국어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영어 원어민 화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 네이티브의 완벽함’이라는 생각은 한국인 모두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생각만큼이나 허황된 것입니다.

네 번째는 영어 읽기를 늘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영어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영어 읽기에도 배경지식(background knowledge)이 동원됩니다. 한국어 독서로 폭넓은 배경지식을 갖추었다면, 영어 읽기에 도움이 되지요. 예를 들어 미국 정치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미 대선 기사를 영어로 읽는다고 바로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현대 미국정치를 전공했다면 영어로 미국의 대선 기사를 읽을 때 훨씬 수월할 겁니다. 읽기과정에는 단지 언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지식, 해당 지문의 내용에 대한 지식이 동원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무조건 영어와의 접촉을 것이 가장 효율적인 영어학습 방법이라는 생각입니다.

입력을 늘린다고 무조건 영어가 느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어로 방송을 열심히 본다고 한국어달인이 되진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례로 쓰기 공부를 위해서는 읽기와 쓰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무작정 읽는다고 쓰기가 자동으로 늘진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듣기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하루 종일 영어를 듣는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듣기 영역과 수준을 정하고 이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조건’ ‘많이’ 하다 보면 ‘티끌’이 ‘태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티끌모아 태산” 전략은 티끌을 시간이 무한정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유효합니다. “영어, 무조건 하면 된다”는 말도 옳을 수 있습니다. 영어를 공부할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고, 의미없는 일조차 끝없이 반복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만 말입니다. ‘무조건’이나 ‘무작정’이라는 말을 ‘열심히’라는 뜻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곤란한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흑인영어는 ‘표준영어’에 비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고정관념입니다.

한국에서 교육의 표준이 되는 영어와 흑인영어는 발음, 어휘, 문법 등 여러 측면에서 다릅니다. 그렇기에 흑인들의 영어를 들으면 어색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상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름이 틀림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흑인들의 영어는 자체적인 논리와 표준이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흑인영어는 이중부정(double negative) 구조가 있습니다. “I ain’t have no problem. (난 아무 문제가 없다)”나 “You don’t know nothing.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같은 경우인데, 교실에서는 ‘틀리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흑인영어는 이중부정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틀리다’기 보다는 부정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특정한 의미를 이중으로 표현하는 것은 소위 ‘표준영어’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I’m doing my homework now.”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서 현재진행(be+ing)은 ‘지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now’를 또 쓸까요? 현재를 이중으로 표현하기에 틀렸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체계가 존재할 뿐이죠.

사실 이중부정은 포르투갈어나 스페인어 등 세계의 여러 언어에서 발견됩니다. 미국 내에서도 흑인영어 뿐 아니라 미국의 남부방언에서 종종 사용되죠. 놀랍게도 영문학의 최고봉이라 칭송받는 셰익스피어도 이중부정을 사용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이중부정이 널리 사용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쓰기학습을 위한 원칙 (3): 가로쓰기X세로쓰기X좁게쓰기

스마트폰의 텍스트 추천 기능을 써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한 단어를 쓰면 그 다음 단어를 추천하고, 또 다시 단어를 입력하면 그 다음 단어를 추천합니다. 쓰는 이의 의도에 딱 맞을 때도 있지만 우스운 단어를 추천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이 기능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글이든 단어 하나 하나가 모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결국 단어를 고르고 다음 단어를 고르는 일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글을 ‘써내려’ 갑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경우 왼 편에서 시작해서 오른 편으로 단어를 늘어놓게 됩니다. 물론 줄넘김을 하면 다시 왼쪽에서 시작되지만 기본적으로 글은 가로축을 따라 진행됩니다. 저는 이것을 ‘가로쓰기’라고 부릅니다.

흔히 자유쓰기(free writing)를 할 때 우리는 가로쓰기에 집중합니다. 논리적 흐름이나 문법, 어휘를 곰곰히 따지지 않고 빠르게 써내려가는 자유쓰기를 통해 우리는 안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끄집어 냅니다. 이 과정에서 편집과 수정은 최대한 자제됩니다. 어떤 사람은 효율적인 자유쓰기를 위해 아예 스크린을 꺼버린다고 하더군요.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최대한 빨리 쏟아놓기 위해서는 키보드 하나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자유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과도한 긴장이나 우려를 줄이고 많은 아이디어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어로서 영어를 공부하고 영작문을 공부함에 있어서 자유쓰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로쓰기’와 ‘좁게쓰기’가 별도로 필요한 것입니다. 각각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째, ‘세로쓰기’ 능력의 배양이 필요합니다. 모국어와 외국어의 ‘세로쓰기’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제시한 휴대폰 텍스트 자동완성 기능을 생각해 봅시다. 한국어로 쓸 때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기에 자동완성 기능은 대부분 ‘빠른 타이핑’을 돕는 역할에 그칩니다. 하지만 영어로 글쓰기에서는 사정이 좀 복잡해집니다. 무슨 단어를 쓸지 정확히 알고 있을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해당 자리에 어떤 단어가 가장 적합한지 고민하고 때로는 검색을 통해 최적의 단어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의 자리에 어떤 단어들이 나올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세로쓰기 능력’이라고 부릅니다. 실제 글쓰기는 언제나 가로쓰기지만, 이 가로쓰기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세로쓰기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Argument(주장)라는 단어 앞에 긍정적인 의미의 형용사를 넣고자 합니다. 그런데 머리 속에 생각나는 것이 달랑 ‘good argument’나 ‘bad argument’라면 계속 이 표현만을 가지고 버티게 됩니다. 하지만 good 혹은 bad 자리에 persuasive나 convincing, 혹은 compelling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최적의 형용사를 골라서 쓸 수 있게 됩니다.

세 단어의 의미는 상당히 비슷합니다. 어떤 주장이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음을 준다는 것이죠. 하지만 강도는 조금 다릅니다. Persuasive는 말 그대로 ‘설득력이 있다’의 의미, 즉 persuade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convincing은 ‘확신하게 하는’이란 뜻이죠. 원동사persuade와 convince의 의미를 따져 보면 설득하는 것보다 확신시키는 게 더 강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compel은 ‘압도하다’,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설명을 들었는데 도무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믿게 되는 상황이라면 “compelling”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셋은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만 의미의 스펙트럼을 따지자면 persuasive 보다는 convincing이, convincing 보다는 compelling이 강한 표현입니다.

원어민 화자는 이렇게 ‘골라 쓸’ 꺼리가 풍부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언어경험을 통해 쌓아온 ‘세로쓰기 레퍼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원어민은 이 레퍼토리를 의도적으로 늘려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짝궁단어’의 학습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휘학습의 원칙 편 첫 뻔째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좁게쓰기’ 전략입니다. 영어쓰기를 공부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 중 하나는 막연히 ‘영어로 글을 많이 써보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로 쓰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일기쓰기, 서평쓰기, 기사쓰기, 설명문 쓰기, 매뉴얼 쓰기 등이 존재할 뿐이죠. 물론 이들 종류의 글 또한 다양한 포맷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어쓰기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쓰고자 하는 글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글을 최대한 ‘좁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종류의 글을 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이 조건에 최대한 맞는 글을 찾아봅니다. 그들 중 괜찮다고 생각하는 글을 몇 편 골라 자세히 읽고 아래와 같은 기준으로 분석을 해봅니다.

1. 글을 이루고 있는 정보
2. 정보들이 나열되는 전형적인 순서
3. 몇 편의 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어와 동사 패턴
4. 유용한 어휘 및 짝궁단어
5. 유용한 문법 패턴
6. 기타 눈에 띄는 수사적 특징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책 소개’를 써야 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여러 책 소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학술서 리뷰라면 관련 학술지를 검색하셔야 할 것이고, 대중적인 책 소개라면 신문이나 잡지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형식을 갖추지 않는 책 소개라면 아마존과 같은 사이트를 방문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샘플을 몇 개 모아서 위와 같은 기준으로 분석을 합니다.

이 과정이 조금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꼼꼼히 분석하며 텍스트를 읽다 보면 ‘책 소개’라는 글의 종류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아 이런 정보를 넣으면 되겠구나’, ‘이런 표현 신선하네’, ‘어? 이 메타포 괜찮은걸?’, ‘이 구문 조금 변형해서 쓰면 되겠다’, ‘시작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끝날 때는 이런 기법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쓰기에 대한 감 또한 잡게 됩니다.

이제 책에 대한 아이디어와 감상을 영어로 풀 수 있는 레퍼토리가 생겼습니다. 여전히 글쓰기가 쉽진 않지만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겠지요. 문제는 이런 기본적인 읽기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쓰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어 글쓰기를 공부할 때는 자유롭게 써내려가는 ‘가로쓰기’와, 특정 자리에 올 수 있는 단어를 꾸준히 살피며 레퍼토리를 늘려가는 ‘세로쓰기’, 글의 종류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정하고 텍스트 분석을 통해 글의 길을 잡아가는 ‘좁게쓰기’가 필요합니다.

가로쓰기X세로쓰기X좁게쓰기. 이 공식을 기억하세요.

듣기공부의 원칙: 영어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외국어 학습에서 외국어 인풋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되지만, 한국어 배경지식이 갖는 중요성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듯합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가 읽거나 들을 때 외국어 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지식의 기반 위에서 돌아갑니다. 따라서 외국어로 된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지식과 함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어떤 언어를 공부하든 다양한 지식의 습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면 지식 대부분이 한국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생 한국어로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외국어 학습에서 한국어를 방치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한국어로 된 지식 키워가며 이를 외국어능력과 통합하려는 자세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나는 양자역학 강의를 영어로 들어야 하니까 모든 개념을 처음부터 영어로만 공부하겠어’라든가 ‘인공지능 관련 보고서를 써야 하니 인공지능 기초부터 영어로 파볼까’라며 고집을 피우는 것은 그야말로 똥고집일 뿐입니다.

한국인의 경험은 한국어로 표현되고 공유되며 체계화됩니다. 우리말은 우리의 경험 곳곳에 스며있지요. 영어공부의 과정에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한국어 자막의 효용일 것입니다. 그냥은 잘 들리지 않던 영어 뉴스 혹은 영어 드라마도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면 좀더 잘 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말로 익힌 내용을 영어로 들으면 단어를 조금 놓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상호작용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영어 인풋을 이해하는 데 있어 모국어로 된 배경지식이 도움이 된다는 점 또한 시사합니다.

신경언어학의 연구는 사춘기 이후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경우 모국어와 외국어가 사뭇 다른 뇌 회로와 활성화 패턴을 통해 처리됨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지식과 자막이 외국어 이해에 실시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다수의 경험은 모국어와 외국어가 엄청난 속도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언어 능숙도와 자막의 효용

다만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자막을 켜고 영상을 볼 때 ‘들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실질적 이해이고 어디까지가 ‘이해했다는 착각’ 혹은 사후적 합리화인지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예를 들어 저와 같이 영어가 어느 정도 능숙한 학습자가 영미권 드라마를 볼 때엔 다음을 가정할 수 있겠습니다.

(1) 영어 구어체에서 사용되는 어휘적, 문법적 패턴에 익숙하다. 즉 해당 언어의 일상어 전반에 대한 지식이 있다.

(2) 드라마 전개상 해당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대략적인 파악한 상태다. 기존 스토리라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추측(inference)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3) 드라마의 소재가 특이하지 않다면 해당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대략적인 어휘 집합(lexical sets)에 대해 배경지식이 있다. 이는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된 어휘지식에 해당한다.

(4) 드라마 시즌의 후반부를 보고 있다면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주요 인물의 발음과 대화 패턴을 암묵적으로 익힌 상태다. 이는 각각의 인물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자막을 켜고 볼 때 저의 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언어 능숙도에 따라 뇌의 여러 부위는, 특히 모국어와 외국어를 담당하는 부위는 어떤 활성화 패턴을 보이게 될까요? 전문적인 내용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영어 자막의 효용은 어디까지일까요? 이런 주제로 깊이 있는 연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들 연구 결과를 근거로 ‘자막 절대 금지’나 ‘무조건 자막 끄고 5번 이상 보세요’보다는 훨씬 더 과학적인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영어로 말하기 쓰기 또한 영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2018년 호주오픈 테니스대회에서 선전한 정현 선수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한 신문은 “영국 신문 ‘가디언’은 8강전 직후 “로저 페더러와 토마시 베르디흐 중 4강전 상대로 누굴 원하냐”는 질문에 “반반”이라고 한 정현의 위트를 놓고 “외교관급 화술”이라고 칭찬했다.”라고 보도합니다. (중앙일보 2018년 1월 28일자 기사)

정현 선수의 절묘한 유머가 담긴 인터뷰는 분명 영어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인터뷰의 성공이 그저 ‘영어’공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소통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서 나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기사에도 나오지만 특정 문화에 대한 관심, 주도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연습 등이 쌓여 멋진 인터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영어를 표현의 암기가 아닌 문화적인 산물로, 의사표현의 매개로 배운 덕분이었습니다.

흔히들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유머감각을 꼽습니다. 감각은 단기간에 암기하거나 체화할 수 없습니다. 오랜 기간의 경험과 고민, 깊이 있는 학습으로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적절한 유머의 구사는 복잡한 인지적, 정서적 요인에 대한 고려와 순간적인 판단을 요하는 고도의 언어능력입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을 비루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즐거움과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를 즉석에서 구사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유머감각을 키우는 일은 ‘영어’공부를 넘어 ‘커뮤니케이션 공부’, 나아가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요구합니다. 한국어 원어민 화자라면 이러한 커뮤니케이션과 삶의 기저에 한국어가 자리잡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이쯤에서 이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막은 어쩌라는 겁니까?’

자막 사용 여부를 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집중력의 한계, 동기 수준, 가용 학습시간 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막만 끄면 잠이 오거나, 조금만 이해가 안되어도 듣기 공부를 지속하기 힘들다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자막 활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겠습니다.

시나리오 1: 학습의 목표가 소리에 익숙해지는 데 있다면 자막을 끄고 반복해서 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나리오 2: 하지만 영어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자막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입니다.

첫 번째 시나리오가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상향식(bottom-up) 정보처리에 중점을 둔 공부라면 후자는 하향식(top-down)에 방점을 찍는 방식입니다. 소리를 하나 하나 쌓아 더 큰 의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자료의 소리와 단어, 문장을 이해하는 데 듣기 각종 배경지식과 경험을 동원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은 언어 이해에서 동적으로 상호작용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막을 무조건 끄고 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매달리다가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가 급속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막을 끄다가 동기도 ‘꺼지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이걸 자막도 없이 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시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영어공부에서 이 두 가지 모드를 적절히 섞어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나아가 듣기를 단지 듣기로만 접근하기 보다는 다른 모드, 특히 읽기와 함께 공부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무조건 소리와 씨름하기 보다는 관련된 지식을 다룬 텍스트를 공부과정에 적절히 통합하는 것입니다. 최근 드라마나 유튜브 영상의 자막을 구하기 어렵지 않고, 검색엔진에 키워드 몇 개만 넣으면 관련된 글이 쏟아집니다.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 자료를 수집해서 영상을 입체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자막을 꺼야 인풋이 많아지고, 인풋이 많아져야 영어를 더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조언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영상으로 영어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자막 끄고 봐야 돼? 켜고 봐야 돼?’라는 질문으로 골치 아파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들릴 때까지 듣는다’는 고집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풋’에는 소리도 있지만 그 소리에 대응하는 모국어도 있고, 관련된 기사도 있으며, 드라마의 대본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무자막 모드’, ‘자막 모드’, 관련기사 읽기 모드, 대사 직접 확인하기 모드 등을 적절히 믹스 앤 매치(mix & match)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갈 때 좀더 효율적인 듣기공부가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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