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전회(Critical Turns)

Posted by on Apr 26,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한 연구모임에서 내 삶의 궤적과 비판적 응용언어학자로 살게 된 계기들(critical turns)에 대해 이야기했다. 밋밋한 인생이지만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솔하게 말씀드렸고, 공부의 과정에서 무지와 안이함의 껍질을 깬 경험들을 나누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삶 자체를 주제로 한 발표는 처음이었기에 준비하면서, 또 마치고 나서 여러 생각이 스쳤다.

수년 간 모든 역량을 가르치는 일에 쏟아부으면서 논문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다. 관념이나 지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양태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지금의 나는 응용언어’학자’라기보다는 응용언어학/영어교육 커뮤니케이터에 가깝다.

선생님과 학생들, 여러 학부모를 만나 ‘삶을 위한 영어교육/리터러시’ 이야기를 나눈다. 학부와 대학원 수업을 중심으로 고민을 이어가고 다양한 사회현상을 엮어 논문과 대중서의 중간 쯤 되는 글을 써낸다. 이런 일을 늘상 한다.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사교육이 자본의 논리로 영어교육을 이끌고, 대다수 국민이 영어교육 전문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소위 ‘삶을 위한 영어교육’에 매진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닐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기 보다는 힘에 부친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읊조린다. ‘생활을 이끄는 것은 전망이 아니라 의지다.’

허나 의지는 미약하고 게으름은 달콤하고 분노는 쉬이 사그라든다. 현실은 강고하고 욕망은 집요하건만 나의 말은 이상적이며 나이브하기까지 하다. 다만 돈을 위해 이론을 알아볼 수 없는 괴물로 만들어 버리거나, 이론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잊지/잃지 않기를 바란다. 대단한 연구자는 아니어도 쓸만한 이야기꾼이 되길 소망한다.

갈수록 대학 안이냐 바깥이냐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써내고 나누느냐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게 보니 할 수 있는 일들이 적지 않다. 몸을 좀더 바삐 움직여야 한다. 무른 생각을 다져야 한다. 그래야만 한 선생님의 말처럼 누군가의 ‘곁’을 지킬 수 있다.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묻어두었던 고민들과 재회한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쓰는 사람으로서, 지식을 만들고 나누는 사람으로서, 배우는 사람으로서, 언제까지나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일상을 꾸려가야 할 것인가. 언제 혼자여야 하고, 언제 뜻을 모을 것인가. 왜 이 질문은 수십 년 반복되는가.

덧. 오늘 발표는 bell hooks의 책 <Teaching to Transgress> 11장 “Language”를 다루었다. 부제는 “Teaching New Worlds/New Words”. 조만간 나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 보고 싶다.

필요 없는 책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대한 독자반응에 대해 편집장님과 말씀을 나누었다. 유튜브와 텍스트 문화에 대한 성찰과 논의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로서의 책의 역할과 엇갈리는 반응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에 대한 편집장님의 답이 마음에 남아 기록해 둔다.

“만인을 위로하고 안심하게 하는 책은 나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인상깊었던 모리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을 때가 많은 사람이면 됩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유튜브는책을집어삼킬것인가

한 번도 몰랐던 세계를 알고 싶다면

(이 말이 딱히 마음에 들진 않지만) 소위 ‘사회적 약자’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자신들이 힘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강자’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약자를 ‘위한’ 정치도 중요하지만 약자’의’ 정치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소수자를 위한’ 정치도 좋지만 ‘소수자의’ 정치가 없다면 그저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결국 모두를 ‘위한’ 정치도 중요하지만 모두’의’ 정치가 우선입니다.

저의 속좁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우선순위를 한번도 바꾸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도덕적 우위에 선 듯이 ‘당신이 현실을 몰라서 그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너는 모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알고 누가 모르는 게 아니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를 비롯해 그런 논쟁을 벌이는 이들 대부분은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논쟁을 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이 사회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는 안다/모른다의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진짜 잘 알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방법론에 대한 고민 없이 네가 더 아느니 내가 더 아느니 백날 논쟁해 봐야 제대로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틀린 방법으로 온전한 세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잘 알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민주주의의 원리를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잘 사는 사회로 가까와지려면 모두의 생각이 평등하게 모여져야 한다는 관점 말입니다. 즉, 모두가 존엄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세상을 그리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게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골고루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때껏 강자들은 세상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자원을 독점하고, 연구인력을 독점하고, 사회의 지식 인프라를 독점하고, 무엇보다 정치와 자본을 독점해 왔습니다. 자본만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 기획이, 희망이, 실천이, 조직이 독점되어 온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비전을 제시하더라도 강함이 더욱 강하게 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는 이 세계가 좋아질 방법을 우리 모두가 알 방도가 없습니다. 힘을 쓸 수록 상상력은 고갈되고 배제는 강해지고 소외는 깊어집니다. 더불어 ‘안다는 환상’은 점점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소위 ‘약자’와 ‘소수자’의 삶과 지식, 경험과 관점입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어 이때껏 이 사회가 온전히 가져보지 못한 관점과 지혜, 제도를 획득해야 합니다. ‘나는 안다/너는 모른다’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르는 것이 있다’로 대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회가 복원되고 공동체가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서로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이 원칙을 지켜가면 좋겠습니다. ‘~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의 정치’가 꽃피우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한 번도 몰랐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세계를 짓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알고 싶습니다. 새로운 앎과 관점이, 이제껏 없었던 권력이 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말입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온라인 강의 단상

실시간 대면수업보다 녹화영상을 선호하는 학생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여겨졌으리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교수와의 직접 대면, 다른 수강생들과의 소통을 피하면서 수강할 수 있다는 점이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어필했다는 뜻이다. 가끔 자문한다. “나의 수업은 마이크로 판옵티콘인가?”

강의를 맡고 계신 한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런 경향은 점차 심화될 것 같다. ‘번잡한’ 소통없이 ‘편안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부담을 덜어준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오는 것을 넘어, ‘수업참여’보다는 ‘콘텐츠 소비’를 지향하는 일을 마냥 반길 수는 없지만 이해가 간다. (그 틈을 타서 엉망진창으로 수업을 방치하는 교수는 응당의 책임을 져야 한다.)

오랜 시간 우리사회는 사회적 접촉에서 일어나는 마찰에 대해 ‘참고 견디라’고 말해왔다. 아빠가 말하면 들어라, 선배가 말하는데 어딜 꼴아보냐, 사장님 화난 거 안보이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한 놈 졸았으니 반 전체 열 대씩 맞아라, 목사님 말 안들으면 사탄의 꾀에 빠지는 거다, 팀장 말에는 무조건 예스로 답해라, 군대에선 까라면 까는 거다… 그리고 우리는 목구멍에 처참한 기스를 내면서 그 모든 껄끄러움을 삼켜왔다.

여전히 구조는 여기저기서 굴욕을 강요한다. 어쩌면 바로 그 점때문에 사람들이 ‘접촉없는’ 사회를 선호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업이 꼭 고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게 영혼의 평안에 도움이 된다. 대학생들은 팀프로젝트에서 꼰대, 미꾸라지, 무임승차자를 만난 경험을 최악의 경험으로 꼽는다. 상호신뢰가 턱없이 부족한 사회에서 혼자 공부하고 혼자 노는 게 최고다. 접촉이 없으면 마찰도 없다. 평소 감당해야 하는 마찰만도 벅차단 말이다.

‘접촉없는’ 학습이 당연시될 때 함께 모이는 일은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학교가 막연히 ‘사회성을 키운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온라인 소통이 아니라 온라인 콘텐츠로서의 교육이 이전과 같은 교육이 수 있을까?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정서적, 사회적 발달이 필수적인 낮은 연령의 학생들은 모르겠지만 대학교육이 그래선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주체할 수 없는 반가움을 표시하는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뭉클하다.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가 생활화되고 한 학기를 통째로 온라인에서 보내게 된 요즘, 그런 순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2D 캐릭터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로직에 의해 화면에 배치된다. 모두 같은 스피커를 통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나는 종종 누가 말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비디오와 오디오 콘트롤로 ‘존재한다는 정보’ 외에는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다. 바이러스는 시공간을 바꾸고, 지각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고, 습속을 바꾼다. 결국 각자의 몸이, ‘우리’의 존재 양태가, 사회의 작동방식이 변해간다. 대책없는 노스탤지어로 그 모든 걸 부정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변화를 직시하려는 노력은 분명 가치가 있다.우리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어떤 ‘우리’로 존재하게 될까?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출간!

책이 나왔습니다!!!

1년 여 전부터 #삶을위한리터러시 태그로 적지 않은 글을 올렸습니다. 한국사회의 문해력 혹은 리터러시라는 주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쪽글을 꾸준히 공유했죠. 언젠가 본격적으로 정리를 해보자는 생각은 있었지만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 하염없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문화연구자 엄기호 선생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공부공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의 책을 읽고 선생님의 관점과 글쓰기에서 큰 도움을 받았는데 함께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 깊이를 더하고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는 주제를 좀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기획과 준비단계를 거쳐 작년 여름 네 번의 긴 대담을 가졌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지도교수와 오랜 시간 토론한 적은 있지만, 동료 연구자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대담 과정에서 배움의 기쁨이 컸습니다. 말 그대로 대화를 통해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경험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밀도있는 대화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탐색하고 싶어졌습니다.

대담은 모두 전사되었고, 편집장님께서 책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후 말을 다듬고 글을 보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대화를 책으로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도서출판 따비의 신수진 편집장님께서 잘 이끌어 주셔서 이렇게 오늘 세상에 나오게 되었네요. 작지만 뜻깊은 삶의 매듭이 지어진 것 같아 기쁩니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 밝혔듯 이 책은 하나의 초대입니다. 미디어의 지형이 숨가쁘게 변화하는 시대, 읽고 쓰는 일의 본질을 놓치지 말고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함께 만들어 가자는 제안입니다.

“정성을 다해 읽고, 쓰고, 보고, 만들며 일상을 엮어가는 독자들을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찾아가는 여정에 초대한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읽기와 쓰기 관행의 변화를 주시하는 분들, 동영상의 시대 책과 문자매체의 운명이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분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자녀의 리터러시 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들, 문자와 영상을 엮어 리터러시 교육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분들, 일선에서 학생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리터러시 교육을 만들어가고 있는 교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미지를, 영상을 탐험하는 분들과 함께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꿈꾸고자 한다. 이 대담이 서로를 읽어내고 새로운 삶을 써내려가는 길에 작은 디딤돌이 되길 소망한다.”

그간 #삶을위한리터러시 포스트에 반응해 주시고 같이 고민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책이 우리사회 리터러시에 대한 더 풍성한 논의와 궁리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읽어주시고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판사 소개:
힘의 과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한 다리로,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으로, 읽기와 쓰기뿐 아니라 듣기와 보기의 가능성까지!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응용언어학자 김성우가 함께 나눈 좋은 삶을 가꾸는 리터러시.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지식검색을 하는 것도 아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며 유튜브 채팅 기능으로 소통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리터러시의 정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서로에게 ‘난독증이냐’며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단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꼰대’가 ‘가르치려 든다’고 경계한다. 리터러시가 혐오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아니라 성찰의 도구가 될 수는 없을까?

젊은 세대의 읽기 능력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최근 몇 년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읽기 영역에서 한국 학생들의 순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거나 ‘문해가 매우 취약한 수준’의 비율(38%)이 OECD 국가 중 하위권(2018년 조사)이라는 수치가 제시된다. “우리 아이가 책은 안 읽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학생들이 교과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학부모와 교사들의 경험도 근거가 된다. 과연 젊은 세대의 문해력 수준이 떨어진 것일까? 이것을 문해력의 위기라 할 수 있을까?

삶이 말에 스며드는 방식에 천착해온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말이 삶을 빚어내는 모습을 탐색해온 응용언어학자 김성우가 문해력/리터러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리터러시의 상황을 ‘위기’로 부르는 평가가 정당한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몸과 사고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리터러시를 경쟁의 도구가 아닌 공공의 인프라로 만들어갈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폭넓게 논의한 기록이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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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서점은 4월 8일 수요일 이후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주요 온라인 서점 링크입니다. 감사합니다.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7010366

YES24: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869723?Acode=101

교보문고: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8439798&orderClick=LEa&Kc=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4

1. 녹음기술은 미디어로서 개인을 확장시켰다. 나의 목소리가 나를 떠나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녹음된 음성은 어디든 결합할 수 있다. 나의 목소리가 타인의 입에 올려질 수도 있고, 더빙의 재료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처럼 미디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로부터 탈각된(disembodied) 목소리를 활용하여 ‘자연스런’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미디어, 특히 애니메이션을 통해 갖게 되는 특정한 인종, 계급, 성별, 연령, 직종 등에 대한 이미지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을 시각적으로 추상화하고 청각적으로 매개하여 구성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복사’한 것이 아니라, 탈신체(disembodiment)와 추상화, 재조립(reassemblage)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2. 좀 우습기도, 멋적기도 한 이야기지만 중고등학교 때 영어 발음을 네이티브랑 똑같이 하려고 애쓰는 애들 보면 왠지 멀리하고 싶었다. 영어는 좋아하는 과목이었고 나름 잘하기도 했는데 발음에 대해서만큼은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괜한 고집을 피운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던 것 같다. 그땐 멀리 보지 못해서 내가 응용언어학을 하게 될 줄 몰랐던 것.

나의 이 멍청한 (하지만 나름 귀엽다고 우기고 싶은)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발음은 개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 말을 열심히 발음하고 있으면 뭔가 뇌가 꼬이는 듯하고 내 안에서 다른 내가 나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나의 목소리와 발음은 나의 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3. 사실 우리는 외국어 뿐 아니라 모국어를 사용할 때도 발음에 따라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차별한다. 발성이 좋고 발음이 정확한 — 흔히 말하는 아나운서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발음이 명확치 않은, 즉 “말을 꾸역꾸역 먹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발음이 좋으면 목소리마저 청아하게 들린다. 목소리와 발음은 해당 개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발음은 사회문화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지표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과거 대부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백인 성우가 더빙을 맡았다. 당연히 악역은 히스패닉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발음이 주였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의식중에 인종차별적 마인드를 키워갔다. 실로 무서운, 여전히 진행중인 현상이다.

4. 위의 1에서 서술한 바를 적용하자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특정한 집단의 신체를 추상화하여 비주얼로 만들고, 여기에 특정한 계층을 은밀히 가리키는(index) 목소리를 입힌다. 이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캐릭터를 특정한 목소리 자질과 연관시키고, 이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특징과 또다시 연관된다.

물론 이러한 결합이 즉흥적이거나 기계적인 것만은 아니며 상당한 사회문화적 고증을 거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을 쏟아붓더라도 애니메이션이 재현하는 인물(비주얼+사운드+캐릭터적 특성 등)이 일정한 본질화(essentalization: 사람의 특징 한두 가지로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일. ‘백인은 이렇다’든가, ‘이주노동자들은 이렇다’, 나아가 ‘시츄는 다 …하지’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남.)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1

Posted by on Mar 18, 2020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1. 학생들로부터 쪽글을 자주 받는다. 읽기자료를 꼼꼼히 읽고 간단히 요약한 다음 자신이 이해한 바, 흥미로운 부분,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 경험과의 연계, 교육현장에의 적용 등을 논의해 보라는 과제다. 내 수업의 절반은 쪽글에 대한 피드백과 이를 기반으로 한 토론이다.

2. 재미있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읽기자료가 제시되었을 때 ‘어떻게든 이해한 척’하려는 학생과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학생’이 갈린다는 것. 쪽글을 읽다가 보면 전자의 학생이 생각보다 많은데 (나도 대학원생 때 종종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후자의 학생이 훨씬 반갑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해소하려는 모습이 ‘나 읽었고 이해했거든?’ 같은 제스처보다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3. 응용언어학과 영어교육의 특성상 순수히 이론에 그치는 논의는 반쪽의 느낌을 준다. 결국 이론과 현실이 만날 때 강력한 ‘프랙시스(praxis)’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론을 이해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현실과 결합시키려는 모습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이 설익은 지식을 용감하게 적용하려 들지 않도록 적절한 가이드를 주는 게 나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

4. 아무튼 이번에도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을 맡게 되었다. 첫 시간은 Dell Hymes의 1972년 글과 2015년 강현석 선생의 글을 통해 사회언어학의 초기 방향성과 최신 연구동향을 비교하며 진행한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사회언어학의 진화는 진행형이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한 학기가 되길 빈다.

‘사석’과 공적 담화

일부 사람들이 굉장히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석에서 한 말은 기록되어도 ‘사석’에 머문다는 것이다. 세상 제일 편한 사람들과 한 이야기라도 활자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순간 공적담화의 영역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법적, 윤리적, 문화적 구분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물.리.적.사.실.이다. 이걸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잘 하는 말로는 “그냥 말일 뿐인데 뭐” (당신에겐 말일 뿐인데 듣는 사람한테는 무기라고), “농담으로 한 건데 뭘 그렇게까지” (당신 마음 속에서는 농담인데 나에게는 모욕이라고) 등이 있다. 할 말을 다 퍼붓고 “그냥 내 마음 속 생각이었어”하면 아무 일이 없어진다고 믿는 것만큼 한심한 것은 없는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Intelligence 그리고 사이(inter-)

Posted by on Mar 9, 2020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개념적인 측면에서 “intelligence(지능)”을 “In”+”telligence”로 오분석하는 경우가 있다. 지능을 개인의 내부(in)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intelligence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사이, 상호적’이라는 의미의 inter- 와 ‘선택하다, 읽어내다’라는 의미의 legere 을 만나게 된다. 이에 따르면 지능은 단일 주체가 지닌 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 사이를 읽어내는 능력에 가깝다.

물론 어원을 가지고 당위적 주장을 펼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intelligence가 파편화된 개인의 자질로, 순전히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세태 속에서 그 어원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일이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지능은 언제나 관계적이며 사회적이라는 것, 다양한 존재 사이에(in-between)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맥락적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함께 공부하기의 어려움

Posted by on Mar 4,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나처럼 의지력이 200프로 부족한 사람들은 종종 ‘함께 공부하기’를 꿈꾼다. 엉망진창 집중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모아보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맞지는 않더라도 필요와 지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읽고 토론하는 그림을 그려본다.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대충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뭔가 해보자고 생각하고 텍스트를 고른다. 멤버들을, 그들의 성향이나 강약을 떠올린다. 각자 재미있어 할만한 부분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걸로 글쓸 일이 있을 것 같지만 상대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선생’ 역할을 해야만 할 것 같다. 함께 공부하자고 하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초기 모임을 꾸리고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섭외하고 세미나를 이끌어나가는 일 또한 쉽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다. 결국 진정한 공부는 외로움을 이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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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새로 올라온 거 뭐 없나.

#같이공부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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