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Posted by on May 1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강의 10년차, 이제 ‘초짜’라고 부를 수는 없게 되었건만, 처음보다 더 나은 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시간강사를 “(명사) 아는 척 하느라 엄청 바쁘고, 바쁜 척 하다가 좀 알게 되는데, 그땐 또 잘 모르는 걸 가르쳐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의 근원에는 이런 상황이 있다. 돌파하자고 결심을 하지만 매번 다시 쳇바퀴 도는 삶으로 던져진다. (이 상황의 근원에 나약함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괄호 안에 넣어두기로 한다. 이게 본문이 되면 삶이 너무나도 괴로울 터이니.)

한편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해도 ‘클리셰’로 느껴지곤 한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일텐데도, 내 머리 속에서는 진부한 것 투성이다. 전에 했던 이야기,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지 않은 지식, 더이상 영감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가르침 따위 말이다.

지식이 전달(deliver)될 수 없고 구성(construct)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인식론적 지위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 누군가에게 체화되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구성주의는 관계를 맺는 데 요구되는 시간에 대한 담론이다.

교사는 배움의 시간과 조응하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응시를 통해 성장한다. 가르침은 특정한 세계에 천착하며 긴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커 파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We teach who we are.)”라고 말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의 말을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풀면 이렇다.

“우리는 특정한 주제에 관해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 주제와 함께 살아온 시간을 학생들 앞에서 풀어내는 것이지요. 꼬여있는 시간을, 툭툭 끊어진 시간을 풀어낼 순 없어요.”

단단한 실타래가 되지 못한 지식으로, 자신을 감화시키지 못하는 지식으로 상대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는 시도는 얼마나 얄팍한가. 나는 얼마나 얄팍한가. 이런 생각이 자주 찾아오는 요즘이다.

저녁 수업 준비를 해야겠다.

생활의 지혜: Reaction Paper 편

Posted by on Mar 25, 2018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 No Comments

Reaction paper를 낼 때 유의할 점:

1. 논문을 안읽고도 쓸 수 있는 글을 내지 않습니다. (Re-action은 무엇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냥 혼자 action을 취하지 말아 주세요.)
2. 단순 요약문을 내지 않습니다. (초록보다 나을 게 없는 글을 왜 굳이 내려고 하시나요?)
3. “흥미로왔습니다”, “좋았습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별로였습니다” 따위의 반응은 마움 속에 고이 간직합니다. (“할 말이 없을 때 ‘That’s interesting.’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죠.)

저도 오래 전에 이럴 때가 있었겠지만…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줄탁동시

Posted by on Mar 24, 2018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교육에서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와 협업에 기반한 배움을 이를 때 종종 쓰이는 사자성어다. 하지만 나는 문구를 볼 때마다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는 변증적 세계관을 떠올린다. “세상이 바뀌려면 내가 변해야 하는가? 사회야 변해야 하는가?” 정답은 “동시에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아닐까? 나의 몸과 마음은 철저히 사회적이고, 사회는 수많은 몸과 마음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영어-학습-자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 영어학습자를 대함에 있어서 ‘영어’에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영어’ 보다는 ‘학습’ 전반이, ‘학습’ 보다는 ‘자者’ 즉 사람의 문제가 더욱 근본적이다. 이런 면에서 영어교육전문가의 전문성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면 사람보다 공부를, 공부보다는 영어를 중심에 놓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수포자’, ‘영포자’, ‘과포자’ 등의 명명은 현상의 근원에 닿지 못하고 개별 과목 중심의 사고를 강화한다.

총체적 관점을 이야기하면 개별 교과의 문제도 풀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별 교과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총체적 관점 즉, ‘인간으로서의 발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with 철

미디어 활용 교육

미디어 활용이 리터러시 교육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기술을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 활용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특별한 이견은 없다.

하지만 종종 ‘활용’에만 골몰하는 교육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교육은 미디어를 활용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류 메신저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메신저를 활용한 소통도 중요하지만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중요하다.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술 바깥의 삶에 대해 상상해 보는 일 또한 소중하다.

언젠가 ‘~할 수 있다’는 진술로 구성된 교육목표(Can-do statements)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교육의 목표가 일련의 ”Can-do statements’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진술들 행간에 존재하는 ‘Can’t-do statements’를 이해하는 것이라 믿는다. 할 수 없음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목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 글을 쓰고 나니 갑자기 고정희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별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내 맘 속에서는 분명 통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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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어떤 개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cat. It is very cute.”

여기에서 ‘a cat’은 고양이 한 마리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양이 중 하나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is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과 2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이런 면에서 “a(n)”의 의미는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관사공부중

A second thought

Let me give it a second thought.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보태어 봅니다.

“The only”도 그랬지만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와 같은 표현들도 깨져서는 안되는 법칙으로 배웠습니다. 이는 “서수 앞에는 the를 붙여라!”는 구호(?)로 정리되었죠. 하지만 이 공식에는 헛점이 있습니다.

제가 첫 문장에서 쓴 “a second thought”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는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다” 정도의 뜻으로 “a second thought”와 같이 부정관사를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차이 또한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에서 “second”는 ‘다시 한 번’ 한번 더’ 정도의 의미입니다. 서수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것이죠. “take a second look(다시 보다)”과 같은 용법도 비슷합니다. 만약 우주선을 만드는 팀의 디렉터가 “Nobody deserves a second chance here.”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두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도가 되겠죠. 우주선이 폭파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니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학술논문에서 생각나는 예는 “a second limitation”과 같은 표현있습니다. 연구의 한계를 논의하며 “두 번째 한계로는…”과 같이 이야기할 때 쓸 수 있는 어구죠. 이 경우에는 한계점이 몇 있는지 언급하지 않고 “첫 번째 한계는…이다. 두 번째 한계는…이다.”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특정 대상의 수가 N으로 한정되어 있고, 이에 대해서 “첫째, 둘째, 셋째… N번째”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면 서수 앞에 모두 the를 붙이는 것이 맞습니다. “There are three problems with this method.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언어는 꽤나 말랑말랑합니다. ‘법칙과 예외로 구분되는 세계’라기 보다는 ‘개념화와 맥락으로 창조되는 세계’에 가깝습니다.

#관사공부중

the only child vs. an only child

 

오래 전 ‘the only child’를 ‘외동’으로 배웠습니다. 형제가 없는 경우 반드시 ‘the only child’로 써야 한다는 것이죠. 이 설명에 따르면 ‘an only child’는 틀린 표현이었고요.

그런데 “He is an only child.”라는 문장을 꽤 자주 만나게 됩니다. 구글은 578만 건의 “an only child” 검색 결과를 보여주는데요. 결코 적지 않은 수죠. (“the only child”는 약 800만 건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른 것은 저에게 ‘the only child’만이 옳다고 말씀해 주신 분의 설명이었죠!)

위에서 나온 “He is an only child”는 “그는 외동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an only child”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동들 중 하나’라는 개념을 갖고 있죠. 부정관사 “a(n)”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다수 중 하나’라는 뜻이 됩니다. 한국사회에서 외동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니 저런 문장을 쓸 일도 많아질 듯합니다.

이에 비해 “the only child”는 “단 한 명의 자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너 형제나 자매가 있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하면 “나는 외동이야.”라는 뜻이 됩니다. 형제나 자매가 없다는 뜻이죠.

이 외에 상황에 따라 “Jane was the only child in this class.” (Jane은 이 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일한 아동이야.) 라는 식의 활용도 가능합니다.

위의 두 예문에서 “the only”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the only child in my family”에서는 가족 내에서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고, “the only child in this classroom”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를 ‘다수 중의 하나’라는 개념을 지닌 “an only child”와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the only child in my family”가 일반적으로 ‘외동’임을 의미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두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화제작인 A를 보지 못하고 B를 관람했다고 합시다. 왜 그랬을까요? 형 누나는 성인이어서 어떤 영화나 볼 수 있지만 자기는 미성년이어서 A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등 다른 가족은 모두 성인(adult)인데, 자기만 유일하게 성인이 아닌 아동(child)인 상황이죠.

덧.
어제 SteemIt 가입 승인을 받았는데, 뭘 써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새롭게 뭔가 써낸다는 건 현재 역량으로 불가능할 것 같고요. 기존에 썼던 관사 공부 포스트를 잘 엮어서 연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연재할만큼 원고가 정리되면 차곡차곡 올려보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SteemIt이 살아남아 있다면 말이죠. ^^

 

#관사공부중

영어로 논문쓰기 2018 겨울 강좌 마감

Posted by on Mar 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8주간의 여정을 수강생들에게 메일을 쓰는 의식으로 맺는다. 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새학기가 시작된 기분. 그래도 무사히 끝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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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영어로 논문쓰기 강좌를 진행했던 김성우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오늘로 마지막 수업이 끝났네요.

한달 간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기뻤고,
열심히 참여해 주시고 여러 모로 격려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공부하는 삶이라고 더 특별할 것 없고
사는 건 언제나 모순과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깊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써낸 것을 다듬는 일상 속에서
반짝거리는 기쁨을 얻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누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다면 언제든 메일 주세요.

몇 차례 언급했던 지도교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오래 전 끄적임, 어찌보면 참 나이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도 마음이 느슨해질 때면 꺼내보곤 하는 글입니다.

토요일 오후, 오랜 추위 끝에 찾아온 햇살같이
따스한 한 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Peace,
김성우 드림

20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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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밥벌이하며 살아간다는 것>

지금은 새벽 두 시 이십 칠 분. 어제 지도교수와 한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터라 졸업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어제도 졸업 후 미국에 남아있게 될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 쪽으로 진로를 결정할 것인지 등등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선 저는 대학에 남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대학에 남는 것이 학자로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에게 가장 좋은 학자는 세계를 깊이 성찰하고, 성찰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런 성찰과 소통을 연대로 이어내는 사람입니다. 특히나 교육과 언어학, 심리학과 인류학 등이 ‘짬뽕된” 응용언어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있기에, 삶에 대한 이해와 개입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밥벌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관심이 많다 함은, 밥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밥벌이라는 표현은 저에게 비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 삶을 지탱하고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찌 보면 ‘내 앞가림은 꼭 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사실 (절대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나름 힘들었던 시절을 겪은 후로 빈곤이 저 자신과 관계에 대해 미칠 수 있는 파괴력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저와 지도교수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저는 지도교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경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분야를 개척한 “대가”(이 단어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라 빌려 씁니다)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무엇보다도 정말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지도교수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언제 졸업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졸업과 관계 없이 지도교수가 제 삶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 같습니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도교수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연구를 하는 학자로 남고 싶냐고. 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연구중심 대학으로 가려고 생각해 보면 지금 출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슬슬 걱정도 된다고. (지금 저는 졸업만 해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꼭 연구중심 대학에 가려는 생각도 없고요.)

지도교수가 말했습니다.

“정말 연구자로 살아가고 싶다면 어떤 기관이든 들어가서 계속 연구를 해라. 요즘 학생들은 연구중심 대학에 바로 가려고 하는 생각이 많은 거 같다. 너무 고른다. 하지만 평생 연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교육 중심 대학(teaching school)으로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거기서 시작하는 거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길을 만들면 된다. 물론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면 거기에서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이 학교에 오기까지 5번 학교를 옮겼다. 처음에 간 학교는 아주 작은 지방의 학교였다. 나는 가족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누구든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연구중심 대학에 가야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연구자로 살고 싶다면 어디든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그런데 너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느 쪽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디든 월급 주는 데로 가야죠. (“I’ll go wherever they pay me.)”

지도교수가 웃더군요. 그리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좋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가에 너무 가치를 두는 건 좋지 않다. 그리고 만약 네가 진정한 연구자로 살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건 하루의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할애하는 일이다. 학교 사정이나 집안 사정, 혹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반드시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써야 한다. 물론 이게 쉽지는 않다.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학자로 살아가려 한다면 삶의 고난이 와도 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일 때문에 다른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아서 이걸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시간에 “파티션을 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참고로 지도교수는 리버럴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실천과 이론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을 꾸준히 확보하지 않으면 학계에서 네가 원하는 일을 해내긴 힘들다.”

이제 새벽 세 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사실 많은 세월 동안 사회 정치적 이슈와 씨름하면서 살아왔고, 이를 후회하진 않습니다. 앞으로도 삶의 본질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러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그 삶 속의 많은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제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세상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튼튼하고 쓸모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제가 하고 있는 일 (공부라고 불리는!)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핵심을 위해 매진해야 하고, 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지도교수의 말 속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삶의 일정 부분을 늘 읽고 쓰는 데 쓰는 것. 그리고 마음 아픈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이 공부의 시간을 양보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 공부의 시간을 통해 지위를 얻거나 ‘좋은 연구 중심 대학’에 가기 위해 쓰지 않는 것.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의 파티션”을 치는 것.

가끔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꼭 졸업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가끔은 이왕 4년 한 거 마치고 오라는 말씀도 ㅠㅠ) 교사 자격증이 있으니 임용 시험을 보거나 사립학교에 지원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맞장구를 칩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면 그거 하고 살면 된다고.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된다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속한 공동체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일과 공부하는 것이 꼭 다른 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해서 남주냐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남주려고 공부하는 삶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에 파묻히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세계로 덮어버리는 공부도 가능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 일상의 행복을 접는 게 아니라, 공부를 통해 일상에서 더 깊은 행복을 맛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처럼, 제가 사랑하는 말과 사람의 세계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Good+bye vs. Fare+well: 유의어는 유의어가 아니다

Goodbye와 Farewell은 유의어다. 물론 평소에 “Farewell!”로 친구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없으니 Goodbye의 쓰임이 훨씬 광범위하고 구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의 의미차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우주여행을 떠나는 배우자에게 하는 인사라면 어떨까? 아래 방송의 문맥에서 Goodbye와 Farewell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PETTIT: And I assured Don that I believed in what he was doing and I would be OK. And we held each other and you know, it was kind of like, this could be a goodbye.
PETTIT: Goodbye but not farewell.
 
“Farewell”은 Fare+well의 결합이다. Fare에는 ‘여행하다’, ‘여정을 떠나다’라는 뜻이 있고, well은 ‘잘’이라는 의미다. 여정에 어려움이 없길 바란다는 뜻이 담긴다.
 
이에 비해 (위 문맥에서) “Goodbye”는 말 그대로 작별인사다. 더 이상 서로를 볼 수 없는 상황, 영원한 이별 말이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비슷한 말의 거리가 벌어질 수 있다. 맥락에 따라 사전에 등재된 반의어(antonym)들의 거리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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