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가 몇 가지

1. 그나마 잘 번역된 텍스트라 해서 읽고 있는데 군데군데 계속해서 막힌다. 영어로 읽기 시작하니 이해는 훨씬 나은데 속도가 안습이다. 번역가의 피땀은 많은 이들의 노고를 줄여주고 더 많은 세계를 여행할 시간을 선사한다. 문제는 학술서의 경우 정말 유능한 번역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 (대개의 연구자와 교수들은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2. 특정한 이론체계를 차용해 논문을 쓸 때면 대표적인 구절이나 뼈대만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이론의 핵심을 간파하고 그것을 분석에 녹여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의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거대한 체계를 열 개 쯤 다루는 개론 수업이란 또 얼마나 얄팍한가.

3. 아직 검토중이라고 하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혼자 녹화해서 올리는 게 쉽지 않겠으나 30명 정도의 수업을 실시간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것 보다야 나을 것 같다. 짧지 않은 동영상 강의를 촬영해 본 경험에서 보자면 혼자 잘 떠들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일반 면대면 수업 준비의 2-3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귀차니즘이 발동하는데, 마감이 어찌저찌 해결해 주겠지.

4. 대화에서 상대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말’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황, 혹은 담화의 유형 자체를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말은 언제나 그것보다 훨씬 큰 사회적, 제도적, 정치적 맥락을 환기하며, 말이 펼쳐지면서 말이 처하는 맥락 또한 요동친다.

단어 하나만 바꾸어도 진담이 농담이 되고, 논평이 풍자가 된다. 말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을 때, 살짝 찡그렸을 때, 목소리가 커졌을 때, 유행어를 섞었을 때, 상대가 익숙하지 않은 메타포를 사용했을 때 등등 지극히 작은 말은 순식간에 맥락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바뀐 맥락에서 대화자들의 관계는 달라진다.

5. 우리는 말을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이 실시간으로 지어지는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말은 상대의 귀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상대를 초대한다. 그렇기에 말하는 법은 세계를 창조하고 초대하는 법이다. 우리가 암기에 골몰했던 ‘어휘와 문법’은 그런 세계를 짓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독자의 시간을 헤아리는 논문쓰기: 경험으로서의 텍스트

전형적인 연구논문이라면 제목, 초록, 서론, 문헌연구, 방법론과 결과, 논의, 결론, 나아가 참고문헌과 부록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출판된 논문이라면 대개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논문은 하나의 완결된/닫힌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논문은 하나의 완성품입니다. “논문”이라는 명사로 표현되고요. 명사의 세계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자동차’나 ‘지우개’에 시간이 들어있지 않듯 말입니다.

하지만 논문을 독자가 읽기 시작하면 시간 위에서 흘러갑니다. 읽는 행위는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텍스트를 스캔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아니라면 우리는 1분에 기껏 몇백 단어를 순차적으로 읽어내어 내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읽기라는 행위가 시간의 축 위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쓰기는 단지 완결된 텍스트의 생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쓰기는 독자가 경험할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고, 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만 하는 경험을 조직하는 활동입니다. 이런 면에서 쓰기는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지식을 독자의 경험으로 번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가 강의를 하고 있는 건물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외관이 바뀌거나 방 사이의 칸막이가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죠. 계단이 춤을 추거나 창문이 자리를 바꾸지도 않습니다. 공사가 끝난 건물은 변화하지 않는 정적 구조물입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명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건축물이 누군가에 의해 경험될 때, 건축물은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예술이 됩니다. 건축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시간의 축 위에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건축물은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방문자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경험의 총체입니다.

미술관을 설계하는 건축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단지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방문객들이 건축물과 만났을 때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지요. 미술관에 진입하는 길에서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할지, 미술관 벽면의 소재가 어떤 느낌을 줄지, 정문을 어떤 방식으로 통과하게 할지, 들어왔을 때 채광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어떤 느낌일지, 천장의 높이와 조명에서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낼지, 방문자의 동선을 어떻게 유도할지 등을 세심하게 살핍니다. 이를 통해 변하지 않는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살아 움직이는 건축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독자의 시간을 헤아리는 글쓰기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맞는 문장, 멋있는 표현을 동원하는 글쓰기도 중요하지만, 글을 읽어내려가는 독자의 호흡을, 이해의 속도를, 정서적 임팩트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풀어내는 행위이면서 독자의 시간을 먼저 살아보는 행위입니다.

유능한 작가는 유능한 독자입니다. 쓰면서 동시에 읽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좋은 작가는 쓰면서 읽고, 읽으면서 씁니다. 텍스트를 읽을 땐 읽기+쓰기를, 쓸 때는 쓰기+읽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자에 대한 감은 어디에서 올까요? 독자를 직접 만나볼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전공영화’와 ‘수 구조(move structure)’라는 개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로논문쓰기

‘뚫렸다’는 은유에 대하여

‘뚫렸다’

감염병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지만 메타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뚫렸다”는 은유의 아슬아슬함을 생각한다. 어딘가가 “뚫렸다”면, 거길 지키는 사람/시스템이 있고, 바이러스와 숙주가 된 사람이 거길 ‘뚫었으며’,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질 위험이 있다. 바이러스에 ‘뚫린’ 지역사회는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뚫고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하며 단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바이러스의 숙주로 기능한 이들은 방역망을, 지역을, 안전이라는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가? 우리는 ‘뚫은’ 주체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으로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가해자/피해자라는 구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뚫다/뚫리다’로 표현되는 공수 혹은 침투 메타포가 우리의 생각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촛불집회 논문 출판

Posted by on Feb 21, 2020 in 강의노트, 링크, 영어로 글쓰기, 집필 | No Comments

작지만 뜻깊은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2016-2017년 박근혜 퇴진운동의 거의 모든 집회에 참여하면서 틈틈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와 함께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에 관한 다양한 문헌을 읽기 시작했고, 언어교육과 관련된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여름이었던가요. 장인철(Inchull Jang) 선생님과 함께 현실정치에 관심을 둔 사회언어학/응용언어학자로서 함께 글을 써보자는 의견을 나누었고 자료조사와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방향 전환, 검토와 수정을 거쳐 오늘 <사회기호학 (Social Semiotics)> 저널에 “시위에서 매개도구의 궤적: 대한민국 촛불 집회에서의 손피켓의 사례를 중심으로(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라는 제목의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논의는 시위도구로 쓰여진 손팻말(hand placard)에 집중합니다. 최근 한국의 시위현장에서 보이는 손피켓은 개개인이 손수 만든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대량으로 제작되어 뿌려지는 것이죠. 이는 그 자체로 특이한 현상이면서 여러 가지 언어적, 심리적, 상징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논문은 이 점에 주목하여 손피켓이라는 매개도구(mediational means)를 중심으로 촛불집회를 조망합니다. 시위 현장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의례적으로 또 창조적으로 사용하는지 추적합니다. 나아가 그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합니다.

논문을 읽어보실 분들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논문을 쓰면서 가장 깊게 고민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These impressions made the first author ask the following fundamental questions regarding the politics of protest in a democratic society: “How can we marshal solidarity across a wide range of sociopolitical spectrums while not forfeiting the small yet critical voices of each participant and stakeholder, and how can we achieve democracy ‘within’ protests beyond the protests ‘for’ democracy?” (Fieldnote, 4 December 2016).”

논문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 사진들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신 박여라 선생님, 홍승희 선생님,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이병한 편집국장님과 이정민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원고를 보고 꼼꼼히 피드백을 주신 이정아 선생님과 Mike Chesnut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힘있게 논문을 마무리해 주신 저자 장인철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아래는 논문의 초록입니다. 혹시 읽어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아래 답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메일로 논문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

While positioning this research within the growing body of scholarship related to linguistic landscape of protest, we illustrate a distinctive form of analysis. Rather than giving a generalized, extensive, or quantitative description, we focus on a qualitative and in-depth analysis of a single protest tool in relation to protest actions and space-making. Drawing on the concept of “mediational means” from mediated discourse analysis, we analyze the linguistic and semiotic functions and effects of sonp’aenmal (hand placard), a protest tool uniformly and widely employed during South Korea’s 2016–2017 Candlelight Protests. Based on a corpus of protest images and our autoethnographic accounts of direct participation, we examine why this sign emerged as an important tool in the protest space, how it was utilized ritually and creatively, and the effects of its use on protesters’ experiences, sensitivity, and identity. Competing discursive effects caused by its uniform design and widespread use are discussed further.

KEYWORDS: South Korea, Candlelight Protests, linguistic landscape, mediational means, hand placard, protest tool

 

논문 링크: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10350330.2020.1730555

진심, 진실, 그리고 권력

권력이 있다는 것은 단지 권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이 있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할지 말지, 또 어떻게 행사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와 맥락에 따라 권력의 강도와 범위를 그때그때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권력이 없다는 것은 단지 의도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은 상대의 권력행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특정한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조절’로 봐야 할지를 계속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권력없음’의 이중고가 드러난다. 권력이 없기에 실력을 행사할 수 없는데다가, 상대의 의도를 지속적으로 모니터해야 하는 입장에서 설명되지 않는 공포심, 심리적인 피로감이 쌓여간다. 힘이 없기에 신경을 계속 써야 하고, 두려움과 싸워야 하고, 이것이 또 다른 무력감을 발생시킨다.

모든 면에서 상대적인 우위에 선 사람이 ‘나도 힘들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진심일지 모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을 서슴없이 진실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대 소셜미디어 지형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진심을 진실이라 단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1) 없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진심을 ‘과도하게’ 느끼고 (2) 그것을 유려하게 표현해내면서 (3) 추호의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현실에 있지 않을까 싶다.

모두에게 진심이 있지만 모두가 진실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끈질기게 응시하고 기억하고 사유하는 자들에게도 무척이나 드물게 허락된다. 모두가 그저 진실한 세상에서 나는 자주 어지럽다. 누군가는 나 때문에 그렇게 어지러움을 느끼겠지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 논문쓰기 – 5차 강의 단상

Posted by on Feb 18,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두 해의 대학 강의와 5회의 방학 특강 등을 통해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를 다듬어 왔습니다. 그 결과 이번 강의에 이르러서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자료로 내용을 전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전공과 수준의 수강생 분들이 필요로 하시는 바를 완벽히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유익한 내용을 전달해 드리려고 합니다.

저보다 잘 가르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연구자로서의 역량이 뛰어난 분은 더더욱 많고요. 그래도 수년 간 조금씩 업그레이드 된 강의 자료를 보고 있으니 조금은 뿌듯해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말 아침 휴식을 포기하고 멀리까지 오시는 분들의 시간을 소중히 대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영어로논문쓰기

수사의문문 물음표?

구두점의 역사, 그 중에서도 세미콜론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아래는 그 중에서 놀라운 대목이다. 초기의 구두점 사용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들은 구두점을 악보에서의 쉼표와 같이 생각했단다. 쉼표의 길이는 기계적으로 정해진다기 보다는 연주자에 의해서 해석되는 법. 하지만 지금은 구두점 사용이 딱딱한 법칙처럼 되어버렸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만의 구두점을 만들어내는 일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사의문문(rhetorical question)을 표시하는 물음표였다고. 즉, 일반의문문과 수사의문문을 구별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 부호를 찾아볼 수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호응이 없었던 것 같다. 다음 작문수업에서는 ‘자신만의 구두점 만들기’와 ‘왜 그런 구두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써보기’를 활동으로 추가해 볼까 한다.

“Still, a few bad-tempered complainants notwithstanding, most humanists believed that each writer should work out his punctuation for himself, rather than employing a predetermined set of rules. A writer or an annotating reader was to exercise his own taste and judgment. This idea of punctuation as a matter of individual taste and style outlived the humanists: it stretched beyond the Latin texts that Manutius printed, crossing borders and oceans, and it survived as a way of thinking about the practice of punctuation well into the eighteenth century. When the topic of punctuation usage came up, a reader was likely to be advised that he should consider the punctuation marks analogous to rests in music, and deploy them according to the musical effect he wanted to achieve. How on earth did this idea of the writer as a musician, which held on for hundreds of years, transform into our comparatively new expectation that writers must submit to rigid rules?”

<Semicolon> by Cecelia Watson 중에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기: 지극히 주관적인 노동법

‘꼼꼼한 사람이 따로 있지. 계획 엄청 촘촘히 세우고 그대로 안되면 짜증내고 그런 사람.”

언젠가 이 말을 듣고 돌아오면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방만한 문돌이’로서 나를 아는 사람은 믿기 힘들겠지만 대학원 과정 중 e-Learning 관련 프로젝트에서 3년, IT 현업에서 7년을 일했다. 구체적으로는 콘텐츠 개발자, 테크니컬 라이터, e-Learning 전략기획 등의 업무였다. 공부를 하러 떠나기 직전 4년 정도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업으로 삼았다.

매니저가 업일 때 능력에 맞지 않게 꽤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 경영진, 영업 및 마케팅 부서, 콘텐츠 개발부서, 기획, 디자인, 개발, 운영부서까지 100여 명이 되는 사람들과 몇 년을 함께 보냈다. 하루에 미팅 서너 개는 기본이었고 많을 때는 일곱, 여덟 개까지 소화하곤 했었다. (이놈의 회의주의란.)

당시 나의 일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점검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시간과 돈, 인력을 ‘관리’하면서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말이 ‘프로젝트 매니저’이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갈등을 조정하는 게 업무의 중심이었다. 관련 서적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돌아보면 프로젝트 코디네이션을 관통하는 업무는 관계 및 감정관리였다. 짧은 프로젝트 매니저 경력에서 얻은 교훈은 ‘인지적인 움직임 밑에는 정서적, 사회적 관계가 있으며, 그것이 소위 ‘관리’의 핵심이라는 것, 관리자의 핵심역량은 개개인의 감정과 동기를 팀과 조직의 목표와 매끄럽게 정렬(align)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계획을 거의 세우지 않는다. 학사일정이야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1분기에는 뭘 할까’, ‘금년에는 뭘 할까’ 같은 계획은 없다. 꼭 이뤄야 할 과업 자체가 없다. 백 명이 넘는 인력의 하루하루를 체크하던 인간이 자기 시간 하나 잘 관리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래도 괜찮다는 걸 깨달은 지 좀 되었기 때문이다.

계획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니 대충 이런 시나리오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우선 자료를 찾아보고, 이리저리 읽고, 끄적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감잡는 단계를 거쳐 흔히 말하는 ‘잡문’, 혹은 ‘쪽글’을 쌓는다. 관심이 가는 주제면 이게 계속 축적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몇 개의 쪽글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글은 생각의 덩어리가 된다. 먼지도 서로를 당겨 뭉텅이가 되듯, 아이디어가 모여 계획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가닥을 잡기 시작하면 친한 사람들에게 ‘뭔가 할 생각이 생겼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이디어의 실행가능성이 조금씩 드러난다. 보완하거나 덜어내야 할 점도 보이기 시작한다. 대화를 통해 막연한 생각이 구체적인 실행 아이디어가 되는 것이다. 이후 숙성의 단계에서 좀더 해상도 높은 쪽글을 써낸다. 단상은 강의노트나 초고가 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나도 모른다.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기약도 없고, 계약도 없다. ‘납기’가 없는 글은 이런저런 삶의 풍파에 한정없이 미뤄진다. 하지만 관심이 지속되는 한 계속 읽고 써내게 되니 오랜 생각은 덩치가 커지고 부족하지만 공유할만한 모양이 된다. 여기까지 진행되면 책이나 논문의 원고로 변신할만한 꺼리가 확보된다.

그래서 결론은 “꼼꼼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거다. 살아가는 데 필요하면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세월아네월아 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은 없지만,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은 대부분 갖고 있다. 앞으로도 상황이 바뀌어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긴 계획 없이 살아간다. 시간에 맞추어 행동을 조직하기 보다는 생각의 흐름에 삶을 맞춘다. 그래도 괜찮고, 그래서 재밌다.

덧.

느지막이 낮잠에서 깬 오후. 이불속은 집안의 블랙홀인가. 일어나려 발버둥쳐 봐도 도저히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 아, 왜 이렇게 점점 게을러지지?
짝: 무슨.
나: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격려’를 감지한다.)
짝: 원래부터 게을렀잖아.
나: … … … (털썩)

원래부터 게으른 삶.
앞으로도 이 스타일 쭉 유지해야겠다.

#짝과나 #무계획의삶 #쭉게으르게살자

공부, 앎, 무지, 그리고 감(感)

Posted by on Feb 6,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집필 | No Comments

공부를 할수록 앎은 커집니다. 이것은 지식의 양, 개별 지식간의 관계, 지식과 세계의 사태와의 조응 등의 영역에 적용됩니다. 배움은 채웁니다. 앎의 뿌듯함으로 마음이 차오릅니다. 나는 성장합니다.

동시에 무지 또한 커집니다. 앎의 영역이 확장된다는 것은 무지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앎을 통해 세상과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절대적 확신은 사라집니다. 이해의 가능성과 함께 오해의 가능성 또한 커져갑니다. 나는 무지합니다.

무지에 대한 자각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앎은 선입견과 폭력으로 쉽게 전화합니다. 신영복 선생의 말씀처럼 방향을 가리킴에 있어 떨림이 없는 나침반은 고장난 나침반입니다. 나는 언제나 떨려야 합니다.

그 와중에 다행스런 것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들은 많아지지만, ‘아닐 것 같은 것’들에 감각은 자라난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미심쩍은 것들, 그럴듯해 보이지만 치렁치렁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것들을 감지하는 능력 말입니다.

아는 것은 산술적으로, 모르는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그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갖는 능(能)은 조금씩 성장합니다. 영영 모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진리를 더듬을 능력은 분명 자라난다는 것. 계속 회의하면서도 무지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 아주 가끔이지만 의심의 틈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빛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배움의 기쁨이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 그 너머를 보는 나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밤 하늘의 별을 담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히 비참하고 또 영광스럽습니다.

#영어로논문쓰기

개론수업의 어려움

Posted by on Feb 6,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갈수록 개론수업의 어려움을 느낀다. 예전 같았으면 교재를 챕터별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방식에 만족했을텐데, 쥐뿔이나마 조금 더 알게 되면서 개론서의 설명에 숭숭 뚫린 이론적, 개념적 구멍이 보인다. 문제는 일부 학부생들이 대학교재를 일종의 ‘전범’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앞에 서 있는 강사는 그 전범의 전달자 역할을 할 뿐이고, 교재는 ‘대가’들의 ‘총정리’ 버전 쯤 된달까. 게다가 개론이 다루는 주제의 하위영역이 수십 개는 족히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교재를 다면적이고 비판적으로 소화하면서 현실과 연결시켜 가르치는 게 만만치 않다. 써놓고 나니 결국 내 능력의 문제로 귀결되는구나. 개론이 지향하는 한 분야에 대한 조망과 선택과 집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때인 것 같다.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