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학습 함부로 차지 마라

Posted by on Jun 16,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인공지능과 또 다른 인공지능을 ‘가르치고’, ‘자발적으로’ 새로운 소통 체계를 창조해 내는 시대. 많은 이들은 “AI의 승리”를 선언한다. 기계의 승리, 좌절하는 인간, 암울한 미래, 아니 이미 와버린 파국.

교육노동자로서 나는 사뭇 다른 문제의식을 갖는다. 특정 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앞설 것이라는, 아니 그저 ‘앞설 것’는 표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의 우월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기계가 학습하는 방식이다.

데이터를 거부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이전 예시와 비슷하다고 해서 토해내지 않는, ‘자기보다 못한’ 상대라고 해서 얕보지 않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학습. 혹은 머신 러닝.

기계학습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알고리즘이었느냐.

어쩌면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지점은 ‘연산능력’이 아니라 ‘포용력’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거대한 세계에 얼마나 열려 있는가.

* 고린도전서 13장

‘인간의 자유의지’ 논의에 대한 질문 몇 가지

Posted by on May 14,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1) ‘자유의지’ 논의에서 ‘인간’은 늘 개인이다. 왜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 촌각을 다투는 게임의 팀플레이에서, 밴드의 합주에서, 랩 배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 창발하는 질서는 ‘자유의지’와 연관지어 논의될 수 없는가?

(2) ‘자유의지’ 논의에서 ‘인간’은 왜 늘 ‘인지’하는 인간으로 정의되는가? 그렇다. 이 지적은 자유의지 관련 논의에서 늘상 등장하는 ‘개인이 결정을 의식하기 한참 전, 뇌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실험 결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뇌의 패턴이 드러내는 인식’과 ‘자신의 결정을 인지하는 자아의 인식’을 분리시킨 후,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을 담지하는 몸의 존재에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식과 무의식의 갭은 ‘자유의지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숨어있는 공간’ 아닌가?

(3) ‘자유의지’ 논의에서 자유는 왜 늘 ‘맨몸’의 결정인가?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와 상호작용하며 사고와 감정을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베이트슨(Bateson)이나 바살로우(Barsalou) 및 비고츠키의 후세 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이 아닌 “인간+도구+환경”을 주체 혹은 자유의지의 분석단위(unit of analysis)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4) 근본적으로 ‘자유의지’를 논의함에 있어 상호작용의 지위는 무엇인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개인과 도구, 개인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자유’와 ‘의지’를 정의하는 데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개임해야 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개개인의 독립적 행위 보다는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상호작용에 자신을 던지는 용기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는가? 계획하고 실행하고 모니터하는 존재가 아닌 만나고 섞이고 놓아버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유의지’ 논의에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자유의지’ 자체가 규명 가능한 개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자유’와 ‘의지’를 개인의 뇌 안에 가두어 놓으려는 경향을 띄는 데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나의 자유의지’나 ‘너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존재가 세월을 업고 공간을 가로질러 얽히는 세상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일까?

An interesting take on flow

Posted by on May 9, 2017 in 과학, 링크 | No Comments

The same argument applies to many other areas including teaching and writing, the performance of which requires an extended amount of time, I believe. Although some moments might flow smoothly and almost effortlessly, the overall performance is under constant monitoring, recalibrating, retrying, and restarting. For professionals, of course, the state of ‘flow’ appears more often and lasts longer. However it does not characterize the entire process. It is all about achieving ‘a shorter struggle and a quicker rebound, and a more effective orchestration of competing factors,’ rather than ‘sliding into the state of flow and staying there.’

“In other words, the idea that expert actions are in a placid state of flow – a state in which things seem to fall into place on their own – is a myth.”

https://aeon.co/essays/the-true-expert-does-not-perform-in-a-state-of-effortless-flow

수수께끼 하나

수수께끼 하나 풀어보시죠. A woman gave birth to two sons who were born in the same hour of the same day of the same year. But they were not twins. How could this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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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twins가 아니고 triplet이었어’라고 합니다. 허무한가요? ^^

영어 모국어 화자와 한국어 모국어 화자가 풀 때 정답률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로 보입니다. 영어에서는 twins, triplet, quadruplet 이 각기 다른 단어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들은 쌍둥이, 세쌍둥이, 네쌍둥이죠.

한국어 화자들은 ‘Twins’라는 말에 보통 ‘쌍둥이’를 떠올리고, 이 문제의 맥락에서는 ‘쌍둥이가 아니라구?’라고 묻게 됩니다. 한국어에서 ‘쌍둥이’라는 개념이 세쌍둥이, 네쌍둥이 등을 포함하고 있어 문제를 맞추기가 더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PISA 등의 국제적인 평가에서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 국가들의 수학성적이 높은 여러 요인 중 하나가 숫자의 일관성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1-20의 수를 한국어와 영어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면 차이가 큽니다. 어렸을 때 영어로 11,12,13 외우다가 짜증났던 기억도 있습니다. 한국어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의 구조와 직접 대응되는데 영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지요.

숫자 발음의 일관성은 작업기억(working memory)의 효율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하네요. 아주 작은 차이지만 머리 속에서 계산을 할 때는 적지 도움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저와 같은 한국어 모국어 화자라면 “십일 더하기 십이”랑 “Eleven plus twelve”를 비교해 보시면 감이 확 오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중국어와 일본어 또한 한국어와 같은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11 eleven 열+하나
12 twelve 열+둘
13 thirteen 열+셋
14 fourteen 열+넷
15 fifteen 열+다섯
16 sixteen 열+여섯
17 seventeen 열+일곱
18 eighteen 열+여덟
19 nineteen 열+아홉
20 twenty 열
21 twenty-one 스물+하나

 

http://www.npr.org/sections/krulwich/2011/07/01/137527742/china-s-unnatural-math-advantage-their-words

말장난과 팩트 사이에 과학의 발전이 있다

Posted by on Apr 18,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I am so poor I can’t even pay attention.”이라는 유머가 있다. Poor와 pay라는 단어를 병치시키면서 돈이 전혀 필요없는 attention을 목적어로 삼은 말장난(pun)으로, 주의를 지불(집중)하지도(pay attention) 못할 만큼 가난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인지과학은 이 유머가 사실이 될 수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빈곤이 뇌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하고도 심각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때로 속담이나 말장난이 과학의 발전을 통해 사실이 되기도 한다. 더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http://www.newsweek.com/2016/09/02/how-poverty-affects-brains-493239.html

반성(reflection)을 통한 발달

Posted by on Feb 9, 2017 in 강의노트, 과학, 수업자료 | No Comments

예술 및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공은 타직군에서 일하는 것보다 오랜 기간 강도 높은 훈련을 요구한다. 재능의 비중도 더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천재들의 신화,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탄생한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거다.

하지만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들이 갖는 ‘무기’는 명확하다. 바로 자신의 수행(performance)을 끊임없이 모니터해야만 하며, 이러한 돌아봄(reflection)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동작을 살피지 않는 무용가, 연기를 복기하지 않는 배우, 자세를 교정하지 않는 역도 선수, 연주를 녹음해 보지 않은 피아니스트가 높은 수준에 이르긴 불가능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반성을 한다는 사실이라기 보다는 반성의 구체적인 방식이다. 잠자리에 들며 천장을 보고 중얼거리거나 꾸준히 일기를 쓰는 일과 같이 주관성이 높은 도구가 아니라, 자세, 동작, 표정, 움직임 및 소리를 정확히 재현하는 도구들이 동원된다는 점 말이다.

일기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감정을 추스리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실제 퍼포먼스를 되살리는 데 역부족이다. 오디오로 따지면 초저충실도(super low fidelity)라고 해야 할까. 이 점에서 현재로서는 비디오가 가장 좋은 미디어라 할 수 있다. 특정 각도에서 촬영한 비디오의 한계가 있지만, 실제 일어났던 일을 가장 풍부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기록방식을 압도하는 충실도를 보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전문가의 식견이다. 같은 비디오라 해서 모두에게 같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경험과 지식의 깊이만큼 더 풍부한 정보와 함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무용가가 보는 무용 비디오와 필자가 보는 무용 비디오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다. ‘이거 내 목소리 아닌 거 같아’라면서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필자도 가끔 강의를 녹음해서 듣곤 하는데 솔직히 들어주기 힘들다. 더 잘하기 위해서는 강의 전체를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디로 숨고 싶은 마음을 몇 시간 동안 견뎌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벌써 목요일이고 모레면 2강 수업이다. 준비를 하다 보면 온갖 잡생각이 떠오른다. 이 글도 참으로 두서없구나.

읽기와 안구운동: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

Posted by on Jan 2, 2017 in 강의노트, 과학, 영어,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읽기와 안구운동에 대해 공부하면서 흥미로웠던 사실 몇 가지 (알파벳 기반 텍스트 기준)

1. 인간의 눈은 미끄러지듯 철자 하나 하나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점프와 착지를 반복하면서 텍스트를 읽어낸다. 여기에서 ‘점프’는 불어의 대응어인 ‘saccade’로, ‘착지’는 영단어 ‘fixation’으로 부른다.

2. 눈이 점프를 하는 동안은 텍스트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착지하여 머무르는 짧은 정지의 시간 동안만 텍스트로부터 정보를 가져올 수 있다.

3. 그런데 이런 ‘착지’시에도 왼쪽 눈과 오른 쪽 눈이 같은 철자를 바라보지 않을 때가 있고, 심지어 왼쪽 눈이 오른 쪽 눈보다 텍스트의 오른 쪽 철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다.

4. 평균적으로 점프 열 번 중 네다섯 번은 왼쪽과 오른쪽 눈의 타겟이 되는 철자가 다르다. 하지만 이 ‘어긋남’이 텍스트 이해에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5. 눈이 착지할 시점을 정확히 잡는 것 같지만 점프의 10-15 퍼센트는 정확히 원하는 지점에 가 닿지 못한다. 눈이 우에서 좌로 ‘빽’을 하는 경우는 단순히 잘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눈의 계산 미숙에 의한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독서시 안구운동은 ‘디폴트로’ 다양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오류가 독서를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글로 배운 문법의 한계

아래 이야기를 좀더 해보면 이렇습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자원이 있고, 그중 전형적인 문법교육이 의지하는 것은 개념적(conceptual) 자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대부분 그러셨겠지만) 저는 문법을 글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3인칭 단수를 배울 때 “주어가 3인칭 단수면 동사의 현재형에 -s 를 붙인다”라는 설명을 외웠죠. 그리고 문제를 열심히 풀었습니다. “아 Tom은 나도 너도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1명이니까 -s를 붙여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동사에 s를 붙이고 흐뭇해했죠. 이 예에서 저는 오직 개념적 설명에 의지해 문제를 풀었습니다. 지필평가에서는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외국어 학습에서 개념적 지식은 다양한 지식의 양태(mode)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외에 어떤 양태가 있을까요?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각(perception)입니다. 발화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청각일텐데요. 다음 두 예시를 봅시다.

A building is …
The buildings are …

첫 번째 표현에서는 “A”가 나옵니다. 발음은 /ə/죠. 그리고 나서 “is”가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 즉, <단수를 나타내는 부정관사 a/ə/+명사>에 광범위하게 노출되면 /ə/라는 소리와 단수 동사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우리 뇌가 기억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두 번째 표현은 “BuildingS are …”와 같이 복수를 나타내는 “s” 즉 /z/ 발음이 나오고 뒤에 복수 동사인 are가 나옵니다. 이렇게 명사 끝에 /z/ 발음이 나오고 are가 나오는 예에 광범위하게 노출되면 /z/와 / άːr/가 결합되는 소리(한국어로 대충 쓰면 즈아 ^^)가 귀에 익어서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서 A building is … 나 The buildings are … 와 같은 표현들을 반복적으로 발음하면 /zάːr/와 같은 발음에 익숙해집니다. 흔히 ‘입에 붙는다’고 하죠. 이때 형성되는 것은 운동기능(motor skill)을 기반으로 하는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 입니다. 이건 “3인칭 단수에 s를 붙여라”라고 하는 개념적 지식과는 매우 다른 양태를 띄고 있어서, 뇌와 구강, 혀의 움직임 등이 실시간으로 협응(coordination)되어야만 제대로 작동합니다.

여기에서 ‘글로 배운 문법’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글로 배운 문법은 개념적 지식에만 의존할 뿐 소리를 인지하고 구별해 내는 지각(perceptual) 자원도, ‘몸이 기억하는’ 세밀한 운동기능도 활용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글로 배운 문법은 글쓸 때는 어느 정도 유용하지만 실제 발화에서는 매우 제한적인 역할만을 합니다. 문법교육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글로 배운 문법’을 넘어서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과학 리터러시 단상

Posted by on Sep 21,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더 쉽게 쓰라”는 압력에 대해 불만을 떠뜨린다. 학계의 평가가 논문 생산량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현실, 개별 학문 분과의 고유성, 과학자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과학 이외의 업무 부담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일리가 있는 항변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쉽게 써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보다 더 무겁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가치있는 지식이 전체 사회구성원들과 효율적으로 공유되고 있는가”, 나아가 “혹시 그렇지 않다면 공유의 지평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과학적 지식의 공유는 과학자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소통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과학 리터러시가 적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 자본, 과학의 어그러진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더 직접적으로 과학 담론을 왜곡하는 원인은 과학저널리즘의 부재와, ‘비과학-미신짬뽕저널리즘’의 과재(夥在)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빈약한 과학-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 언론과 교육이 손잡고 비과학적 소통을 조장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과학 리터러시를 떠받치는 기둥은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판단능력이다. 이는 비판적 사고의 핵심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필요할 때 쉽고 빠르게 믿을만한 정보원에 접근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 정보를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개개인이 합리적인 절차를 걸쳐 논리적으로 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전자는 지식 생산 및 유통 시스템의 수준, 후자는 개인의 지식 향유 행태와 관련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둘이 유기적 관계에 있지만, 사뭇 다른 무게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양질의 과학지식이 유통되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를 향유하게 되면, 점차 ‘쓰레기’ 기사들은 발붙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단편적이고 선정적인 지식이 ‘클릭 낚시’를 위해 분별없이 유통된다. 전자의 경우 과학지식의 유통과 소비가 선순환적 관계를 맺지만, 후자의 상황에서는 개개인이 정보의 신뢰를 판단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동원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혹은 당연하게도!) 몇몇 소수를 제외한다면 정보의 신뢰등급을 판단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유통되는 과학지식의 양과 질이 개개인의 지식 소비 행태, 나아가 정보 분별을 위한 노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 리터러시는 개인의 역량(competency)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인프라에 가깝다. 엉터리 지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지식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요구하는 것은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빠르고 안전한 운전 역량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위험한 도로에서도 매끈한 운전솜씨를 발휘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언제나 예외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AI, 그리고 빈껍데기 지식민주주의

Posted by on Sep 7,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과문한 탓인지 AI의 발전과 ‘지식 민주주의(knowledge democracy)’의 관계를 깊이있게 다룬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AI가 진화하면 수많은 지식 관련 업무가 자동화될 것이라는 예상이나 고도의 지식노동을 포함한 대부분의 직업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넘쳐나지만, 진보된 AI가 현존하는 지식수준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의 관심은 “지식 단계에 따라 썰을 풀 수 있는 인공지능의 발전”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 어머니는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당연히 양자역학에 대해서도 모르신다. 양자역학에 대한 지식을 1000단계로 나눈다면 0에 수렴하실 가능성이 높다. (사실 나도 그닥 다르지 않…)

내가 바라는 건 대충 이런 거다. AI가 충분히 발달했을 때 양자역학의 특정 개념을 1000가지 단계로 나누어 학습자의 수준과 흥미에 따라 ‘썰을 풀어내는’ 기능을 가졌으면 좋겠다. 클락의 이야기처럼 충분히 진보된 AI라면 ‘마법처럼’ 수많은 개념을 엮어 재미나게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돈을 따라가는 법. 지식과 리터러시가 모두의 것이 되는 방향으로 기술이 개발되고 이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식의 공유는 가속화되겠지만 지식의 소유는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지닌 사람들의 특혜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것을 빈 껍데기 지식민주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줄 장밋빛 미래사회, 살기는 조금 편해지고 지식은 온 세상에 넘쳐나 모두의 손에 닿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이해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질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앎의 환상’에 빠져 ‘환상의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힘”임을 너무나도 잘 아는 자들이 앎을 쉽게 내줄 리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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