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과 본능

Posted by on Sep 7, 2018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집필 | No Comments

“본능적으로 느끼”거나 “직관적으로 안다”고들 하지만 이는 대개 수많은 경험과 학습의 축적이 빚어낸 판단의 속도를 가늠하지 못하거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분명 결과물로서의 WHAT은 있는데 과정(HOW)과 이유(WHY)는 가늠할 수 없는 상황. 그런 면에서 본능 혹은 직관이라는 명명은 학습과 경험에 대한 망각을 가리는 그럴듯한 도구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학교교육의 실패: 학습자와 인간 사이에서

1.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교육의 수많은 문제는 학생들을 ‘학습자’라는 범주 안에 가두는 데서 발생한다. 그들이 학습자인 건 맞지만, 학습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이전에 생각하고 느끼고 배고프고 인정받고 싶고 졸립고 화나고 짜증나고 연애하고 싶고 드러눕고 싶은 인간이다.

2.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은 학습자가 예외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는 쉽고 견지하기는 어렵게 만든다. 학생들이 학교에 오는 것은 오로지 교과지식의 습득 때문이라고 전제하는 순간 교육은 어그러져 버리는 것이다.

3. 세상을 알아간다는 건 범주화 능력의 발달을 의미한다. 나와 너, 산 것과 죽은 것, 액체와 고체와 기체, 성별, 국가, 정상과 비정상, 선행과 악행, 개인과 사회 등등을 구분하고 개념화하는 능력 말이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인지와 언어의 발달, 과학개념의 습득이다.

4. 반대로 윤리적, 도덕적 발달은 대개 많은 범주를 가로지르고 파괴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구체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남과 여 그리고 트랜스젠더, 대한민국 국민과 외국인, 정치인과 일반 시민, 노동자와 정치가 등의 상위에 있는 하나의 개념, 즉 ‘인간’으로 이 모든 범주를 무력화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물론 ‘인간’을 넘어서는 개념화도 가능하다. 인간과 동물을 묶고, 인간과 동식물을 묶고, 생물과 미생물을 묶는 식으로의 확장 말이다.

5. 윤리적 힘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과과정은 지식과 인식(awareness)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너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뭔지 아니?’ ‘너는 영단어를 얼마나 외웠니?’ ‘너는 환경의식이 있니?’ ‘너는 인권의식이 있니?’ 지식과 인식은 행동의 출발점이라는 가치를 지니지만, ‘출발점’일 뿐이라는 한계 또한 노정한다.

6. 학습자들을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 혹은 인식으로 초대하는 것만큼 특정지식을 넘어서는 윤리적, 도덕적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책무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 (1) 특정 분야를 더 깊이 알아가는것과 (2) 세계를 더 넓게 바라보는 것이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니 나아가 이 둘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음이 학교교육의 가장 중대한 실패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쓰기의 본령

Posted by on Jan 27, 2018 in 과학, 단상,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모두 다 연결되어 있지만)’논문쓰기’ 보다는 ‘지식생산’이, ‘지식생산’ 보다는 ‘저자되기’가 좀더 쓰기의 본령에 가까운 개념이다. 써내는 것 보다 만들어 내는 것,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되어가는 것. 논문을 ‘찍어내는’ ‘공장’ 이야기에서 쓰되 만들지 못하는 모습을, 자녀를 공저자로 올리는 약삭빠름 속에서 만들되 되지 못한 사람들을 본다.

자아의 경계

Posted by on Dec 23, 2017 in 강의노트, 과학,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비유가 아닌 물리적 실체일 때, ‘자아’란 무엇일까? 몸에 대한 지각이 자아개념의 형성과 발달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두 몸’을 지각하고 살아가는 ‘각각의’ 두뇌에 자아는 어떻게 자리잡는 것일까? 하나의 뇌에 하나의 신체를 갖고 있는 이들이 거의 비슷한 신체적 경험을 하고 있을 때 자아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완벽한 댄스 듀오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첼로 연주자와 첼로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Bateson이 지적했듯 지팡이를 가지고 걷는 시각장애인의 자아(self)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지팡이의 끝인가, 중간 어디쯤인가, 아니면 손잡이 부분인가?

https://thewalrus.ca/how-conjoined-twins-are-making-scientists-question-the-concept-of-self

언어와 사고의 관계 – 몇 가지 단상

Posted by on Nov 13,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링크,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1. 사하라 이남 지역의 청각장애인들은 평생 수어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간단한 제스처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래 영상의 패트릭도 1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수어 수업을 듣게 된다.

2. 한편 이 영상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갖고 있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워프가설에서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기본적으로 언어와 사고를 독립적인 변수로 취급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가?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는가?”라고 묻는 방식이다.

3. 하지만 패트릭의 예에서 보듯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단지 사고를 밖으로 표출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사고의 변화과정과 유기적이고 동적으로 맞물린다. 즉 언어가 발달하면서 삶이 변화한다. 패트릭과 그의 급우들은 이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4. 언어를 기술(technology)로 생각하면 필자가 언어와 사고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갖고 있는 의구심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해보자.

“소셜 네트워크는 사고를 형성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가 먼저 있고 소셜네트워크가 그에 따라 구현되는가?”

이 질문의 조악함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유독 언어와 사고의 논쟁에 대해서만은 ‘사고가 먼저다’, ‘언어가 영향을 미친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5. ‘사고’를 말 그대로 사고 전반으로 정의해 보자. 패트릭이 수어를 다 배우고 나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 그의 생각의 세계는 이전과 같을 수 있을까?

6.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는 20세기 초반의 비고츠키의 견해가 21세기의 그 어떤 인지과학자보다도 옳다고 생각한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인간의 발달 초기, 언어와 사고는 서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고 이를 소통과 사고에 있어 제1의 중재방식(mediation means)으로 계속 사용하면 언어와 사고는 사실상 구분이 어려워진다. 성인으로 갈수록, 리터러시가 발달할 수록 언어를 사고에서 떼어내기란 쉽지 않다. 변증적 관계(dialectic relationship)를 이루는 것이다.

7.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로 언어권에 따른 색상 구분 능력 실험이 있다. A언어에 색상을 구별하는 어휘가 풍부하고 B언어에는 한정된 어휘만 있다면 A언어 화자가 색상을 더 잘 구분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제기다. 이에 대해서는 ‘색상 지각 및 구별은 무슨 언어를 사용하든 비슷하게 하지만, 세밀한 차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정도가 현재까지의 인지과학이 내린 결론이다. (이 ‘세밀한 차이’를 차이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쩝.)

8. 이같은 연구는 언어와 비교적 독립적인 시지각 능력을 다룬다. 그런데 이것을 ‘사고’의 대표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그런 의미에서 관련 분야에서 논쟁이 되는 연구들은 ‘언어와 사고’를 다룬다기 보다는 ‘언어와 (언어와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지각’을 다루거나 ‘사고기능 중 극히 일부분’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 옳다.

9. 결론: 언어와 사고는 각각을 독립변수로 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사고의 패턴과 사고능력을 각각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언어와 사고가 배태되고 성장하고 교섭하고 통합되고 변증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개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개인의 뇌에서 사고를 위한 신경세포들과 언어를 위한 신경세포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언어일반과 사고 일반을 독립적인 시스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적 논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련된 연구 패러다임을 ‘언어와 사고의 관계’라고 애매하게 부르기 보다는 좀더 엄밀한 정의를 동원한 논의가 필요하다.

 

 

네이티브에게 외국어 배우기

그러나 외국어 교육에 전문성이 없는 (맥락 이해를 위해 역자 삽입) 원어민(native speaker)에게만 배우는 것은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데 산 꼭대기에서 태어나 밑을 향해 소리치며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에게 안내를 받는 일과 같습니다. 발음은 정확할 지 몰라도 당장 흔들거리는 보울더(비바람에 깎여 둥근 모양이 된 바위)에서나 위험천만한 빙하의 균열 지점에서 확고한 발판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진 못합니다. 여러분들께 필요한 것은 말하자면 언어학습을 돕는 셰르파입니다.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해당 언어의 고지에 오른 비원어민 화자(nonnative speaker) 말입니다.

“But learning from a native speaker alone is like being guided up Mt. Everest by someone who was born at the top of the mountain and is shouting directions down from above. The sounds may be pronounced correctly, but that won’t help you find firm footing among the loose boulders and treacherous crevasses. What you need is a language Sherpa, if you will: a nonnative speaker who struggled with the language and who conquered it.” (p. 89)

Richard M. Roberts and Roger J. Kreuz. (2015). Becoming Fluent: How Cognitive Science Can Help Adults Learn a Foreign Language.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창조과학 단상

Posted by on Aug 27, 2017 in 과학,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인류가 수천 년 발전시켜온 과학으로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우주의 기원을 몇몇 사람들이 30여 년 대충 뚝딱 만들어 낸 이야기들로 설명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지성’을 모독하는 일 아닐까요. 그들이야말로 신을 섬긴다 외치며 도리어 왜곡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오래 고민하고 공부해 왔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나직이 말하는 일이야말로 신실한 신앙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애를 다바쳐 한 우물을 판 노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넘어서 진리에 한발 더 다가가는 이론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깊은 영적 울림이 솟아나지요.

짧은 글 안에서
신앙과 과학의 관계를 논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 있어
신앙을 갖는 일과 과학을 하는 일은
구도자로서의 삶으로 수렴됩니다.
끊임없이 옳은 길을 찾는 여정 말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해서 부끄러울 뿐이지요.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모르는 것을 안다 할 수는 없습니다.

다 알지 못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다 알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듯 말입니다.

연구 re-search

Posted by on Aug 19, 2017 in 과학,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re-search n. 다시-찾음. 내가 알고 있는 바, 상식, 혹은 기존 가설이 옳다는 가정을 넘어 새로운 목적지를 설정하고 이를 찾아가는 일. 목적지에 도달하면 지나온 길을 뒤로 하고 또 다른 탐험에 나서기. 계속 찾는 과정. 언제까지나 ‘re-‘에 천착하는 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언어학습 이론과 인공지능

언어학습 및 습득 상황을 구분하는 데 있어 학습(learning)과 사용(use)의 관계는 중요하다.

1. 모국어습득 상황에서 학습과 사용은 분리되지 않는다. 즉 쓰면서 배운다.

2. 외국어로서의 영어학습에서 학습은 종종 사용과 분리된다. 배우긴 하는데 써먹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쓰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지만 쓸 일이 없다.

3. 통번역기술의 발달은 학습(learning)과 사용(use)의 분리를 가속화한다. 배우지 않고 사용하는 시대의 도래. 이것은 의사소통에서 기술의 역할을 증대시킬 것이다.

4. 언어학습을 우회(bypass)하고 사용은 기계의 지능에 맡기는 시대. 언어학습 및 습득이론 또한 AI를 기본으로 장착하게 될 것이다.

5. “인공지능이 영어교육에 타격을 입힐 것이다”라는 예측.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만 지금은 영어교육이 그동안 누려온 과도한 특권이 정상화되는 시기로 봐야 하지 않을까.

미디어와 기억

Posted by on Jun 29,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기억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간다’는 말이 있다. 더이상 주마등을 보긴 힘들지만 종종 접하게 되는 표현이다.

영상매체의 발달로 이 표현은 곧 수명을 다하지 싶다. ‘옛 기억들의 몽타주’나 ‘그 여름의 기억이 롱테이크로 남아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누군가는 웹툰같은 기억을 ‘스크롤 다운’하다가 씰룩이는 엄지손가락을 만날 지도 모른다.

영화 이전 세대와 영화를 좀 보면서 자란 세대, 태어나서부터 영상매체와 함께 살아온 세대가 추억을 떠올리는 방식은 꽤나 다르지 않을까? 예를 들어 할아버지와 손녀가 놀이공원에 갔다면 할아버지가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과 손녀가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편집이 영화를 만든다. 똑같은 원본 필름에서 완벽히 다른 영화가 탄생한다. 연령별로 ‘주마등 같은 기억들’의 사용빈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이는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modality)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요즘 자기 전에 머릿속으로 롱테이크를 찍곤 한다. 어디까지가 정확한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지금의 내가 채워넣은 장면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 자신의 뒷모습을 따라 학교에 가는 기억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에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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