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성화 영역

아래 세 문장을 보자.

a. “컴퓨터 좀 쳐봐.”
b. “컴퓨터에 꼽을 데가 없네.”
c. “컴퓨터 램을 갈아끼웠어.”

세 문장에는 공통으로 ‘컴퓨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의 표면을 말한다. 뭔가 잘 구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쳐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표면의 단자를 말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SB 등 외부기기와의 연결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

세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내부의 마더보드를 의미한다. 램을 갈아 끼우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열고 메인보드의 슬롯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 좀 쳐봐”라는 말에 컴퓨터 뚜껑을 열고 컴퓨터를 치는 사람은 없다. “램을 갈아 끼웠어”라는 말을 듣고서 USB 단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맥에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를 ‘active zone(활성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어가 하나 같지만 실제로 그중 일부만이 두드러진 의미로 동원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활성화 영역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c를 쓸 때 분명 우리는 다른 영역의 의미를 활성화시키지만 ‘컴퓨터’라는 동일한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단어가 여러 가지 하위 요소를 갖고 있을 수록, 사용되는 상황이 다양할수록 활성화 영역의 역동성 또한 증가한다.

* ‘active zone’이 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어를 갖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은 단어와 뜻 즉, form과 meaning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한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나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하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D%@47″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언어의 형태와 의미 사이에 필연적 관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이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한다. Shell은 언어이다. ‘의자’, ‘chair’, ‘Stuhl’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다. 그 안에는 개념이 담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가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몸(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이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영(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는 매트릭스 1편에 등장한다. “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이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할 수 있다. 뭐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이다.

당신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는가? 어떤 정령들을 초대하는가? 그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 실재냐고? 그건 당신 자신이 결정한다. 사실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는 일생일대의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단이다.

체화된 인지와 재현성 위기

기본적으로 체화된 인지 embodied cognition 의 이론적 지향에 동의하지만 “유행”에 편승한 과도한 주장들을 걸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기사는 이 점을 최근의 재현성 위기 replication crisis 와 관련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단, 여러 번 언급되고 있듯이 이건 EC만의 문제는 아니고 심리학 전반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https://qz.com/1525854/psychologys-replication-crisis-is-debunking-embodied-cognition-theory/?utm_source=qzfb&fbclid=IwAR3PbBEILzsffYWM-MB-wHp8B-ZlgeT9ykc05SUBs-bHpfVOGrGcmoey7yE

생각과 문장에 대한 착각

글을 쓰다 보면 가끔 “머릿속에서는 할 말이 분명한데 이걸 문장으로 풀어놓으면 엉망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는 생각과 쓰기의 존재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생각은 문장만이 아니라 온갖 재료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기억과 경험의 총체 중 일부로, 뉴런들의 다차원적이며 비선형적(non-linear) 연결패턴으로 존재한다. 이에 비해 문장은 하나의 선을 따라 진행하는(linear) 자모와 단어의 연결패턴으로 존재한다. 머릿속 생각과 쓰여진 문장은 분명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전혀 다른 양태로 존재한다. 생각은 외화(externalize)되면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생각이 분명하다’는 착각이다. 분명한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저 할말이 있다는 것, 할 말의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한 생각’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한 생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나, ‘확실히 할 말이 있다’는 확신이나, ‘나에게도 생각이라는 게 있어’라는 자존심을 ‘분명한 생각’과 등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교육, 한국어로 학문하기

한 주 내내 영어교육에 관한 원고를 몰아서 쓰고 고쳤다. 언제 이렇게 집중적으로 대중적인 글을 써봤나 싶을 정도다. 논문보다 진도가 좀 빠르게 나간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대중적인 글이어서가 아니라 (1) 한국어 글쓰기이고 (2) 20여 년 고민해 온 주제여서 그랬던 거였다.

한편 우리말로 학문하고 소통하는 풍토가 절실하다. 영어교육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영어 대화야 당연히 영어로 하지만, 한국에서의 영어교육에 대해 영어로 궁리하고 논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적지 않은 저널의 영어 전용은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와 인용가능성(citability) 강화라는 미명 하에 논쟁의 무풍지대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직관과 본능

Posted by on Sep 7, 2018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집필 | No Comments

“본능적으로 느끼”거나 “직관적으로 안다”고들 하지만 이는 대개 수많은 경험과 학습의 축적이 빚어낸 판단의 속도를 가늠하지 못하거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분명 결과물로서의 WHAT은 있는데 과정(HOW)과 이유(WHY)는 가늠할 수 없는 상황. 그런 면에서 본능 혹은 직관이라는 명명은 학습과 경험에 대한 망각을 가리는 그럴듯한 도구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학교교육의 실패: 학습자와 인간 사이에서

1.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교육의 수많은 문제는 학생들을 ‘학습자’라는 범주 안에 가두는 데서 발생한다. 그들이 학습자인 건 맞지만, 학습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이전에 생각하고 느끼고 배고프고 인정받고 싶고 졸립고 화나고 짜증나고 연애하고 싶고 드러눕고 싶은 인간이다.

2.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은 학습자가 예외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는 쉽고 견지하기는 어렵게 만든다. 학생들이 학교에 오는 것은 오로지 교과지식의 습득 때문이라고 전제하는 순간 교육은 어그러져 버리는 것이다.

3. 세상을 알아간다는 건 범주화 능력의 발달을 의미한다. 나와 너, 산 것과 죽은 것, 액체와 고체와 기체, 성별, 국가, 정상과 비정상, 선행과 악행, 개인과 사회 등등을 구분하고 개념화하는 능력 말이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인지와 언어의 발달, 과학개념의 습득이다.

4. 반대로 윤리적, 도덕적 발달은 대개 많은 범주를 가로지르고 파괴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구체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남과 여 그리고 트랜스젠더, 대한민국 국민과 외국인, 정치인과 일반 시민, 노동자와 정치가 등의 상위에 있는 하나의 개념, 즉 ‘인간’으로 이 모든 범주를 무력화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물론 ‘인간’을 넘어서는 개념화도 가능하다. 인간과 동물을 묶고, 인간과 동식물을 묶고, 생물과 미생물을 묶는 식으로의 확장 말이다.

5. 윤리적 힘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과과정은 지식과 인식(awareness)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너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뭔지 아니?’ ‘너는 영단어를 얼마나 외웠니?’ ‘너는 환경의식이 있니?’ ‘너는 인권의식이 있니?’ 지식과 인식은 행동의 출발점이라는 가치를 지니지만, ‘출발점’일 뿐이라는 한계 또한 노정한다.

6. 학습자들을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 혹은 인식으로 초대하는 것만큼 특정지식을 넘어서는 윤리적, 도덕적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책무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 (1) 특정 분야를 더 깊이 알아가는것과 (2) 세계를 더 넓게 바라보는 것이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니 나아가 이 둘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음이 학교교육의 가장 중대한 실패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쓰기의 본령

Posted by on Jan 27, 2018 in 과학, 단상,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모두 다 연결되어 있지만)’논문쓰기’ 보다는 ‘지식생산’이, ‘지식생산’ 보다는 ‘저자되기’가 좀더 쓰기의 본령에 가까운 개념이다. 써내는 것 보다 만들어 내는 것,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되어가는 것. 논문을 ‘찍어내는’ ‘공장’ 이야기에서 쓰되 만들지 못하는 모습을, 자녀를 공저자로 올리는 약삭빠름 속에서 만들되 되지 못한 사람들을 본다.

자아의 경계

Posted by on Dec 23, 2017 in 강의노트, 과학,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비유가 아닌 물리적 실체일 때, ‘자아’란 무엇일까? 몸에 대한 지각이 자아개념의 형성과 발달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두 몸’을 지각하고 살아가는 ‘각각의’ 두뇌에 자아는 어떻게 자리잡는 것일까? 하나의 뇌에 하나의 신체를 갖고 있는 이들이 거의 비슷한 신체적 경험을 하고 있을 때 자아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완벽한 댄스 듀오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첼로 연주자와 첼로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Bateson이 지적했듯 지팡이를 가지고 걷는 시각장애인의 자아(self)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지팡이의 끝인가, 중간 어디쯤인가, 아니면 손잡이 부분인가?

https://thewalrus.ca/how-conjoined-twins-are-making-scientists-question-the-concept-of-self

언어와 사고의 관계 – 몇 가지 단상

Posted by on Nov 13,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링크,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1. 사하라 이남 지역의 청각장애인들은 평생 수어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간단한 제스처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래 영상의 패트릭도 1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수어 수업을 듣게 된다.

2. 한편 이 영상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갖고 있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워프가설에서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기본적으로 언어와 사고를 독립적인 변수로 취급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가?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는가?”라고 묻는 방식이다.

3. 하지만 패트릭의 예에서 보듯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단지 사고를 밖으로 표출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사고의 변화과정과 유기적이고 동적으로 맞물린다. 즉 언어가 발달하면서 삶이 변화한다. 패트릭과 그의 급우들은 이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4. 언어를 기술(technology)로 생각하면 필자가 언어와 사고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갖고 있는 의구심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해보자.

“소셜 네트워크는 사고를 형성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가 먼저 있고 소셜네트워크가 그에 따라 구현되는가?”

이 질문의 조악함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유독 언어와 사고의 논쟁에 대해서만은 ‘사고가 먼저다’, ‘언어가 영향을 미친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5. ‘사고’를 말 그대로 사고 전반으로 정의해 보자. 패트릭이 수어를 다 배우고 나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 그의 생각의 세계는 이전과 같을 수 있을까?

6.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는 20세기 초반의 비고츠키의 견해가 21세기의 그 어떤 인지과학자보다도 옳다고 생각한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인간의 발달 초기, 언어와 사고는 서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고 이를 소통과 사고에 있어 제1의 중재방식(mediation means)으로 계속 사용하면 언어와 사고는 사실상 구분이 어려워진다. 성인으로 갈수록, 리터러시가 발달할 수록 언어를 사고에서 떼어내기란 쉽지 않다. 변증적 관계(dialectic relationship)를 이루는 것이다.

7.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로 언어권에 따른 색상 구분 능력 실험이 있다. A언어에 색상을 구별하는 어휘가 풍부하고 B언어에는 한정된 어휘만 있다면 A언어 화자가 색상을 더 잘 구분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제기다. 이에 대해서는 ‘색상 지각 및 구별은 무슨 언어를 사용하든 비슷하게 하지만, 세밀한 차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정도가 현재까지의 인지과학이 내린 결론이다. (이 ‘세밀한 차이’를 차이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쩝.)

8. 이같은 연구는 언어와 비교적 독립적인 시지각 능력을 다룬다. 그런데 이것을 ‘사고’의 대표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그런 의미에서 관련 분야에서 논쟁이 되는 연구들은 ‘언어와 사고’를 다룬다기 보다는 ‘언어와 (언어와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지각’을 다루거나 ‘사고기능 중 극히 일부분’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 옳다.

9. 결론: 언어와 사고는 각각을 독립변수로 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사고의 패턴과 사고능력을 각각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언어와 사고가 배태되고 성장하고 교섭하고 통합되고 변증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개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개인의 뇌에서 사고를 위한 신경세포들과 언어를 위한 신경세포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언어일반과 사고 일반을 독립적인 시스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적 논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련된 연구 패러다임을 ‘언어와 사고의 관계’라고 애매하게 부르기 보다는 좀더 엄밀한 정의를 동원한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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