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티브에게 외국어 배우기

그러나 외국어 교육에 전문성이 없는 (맥락 이해를 위해 역자 삽입) 원어민(native speaker)에게만 배우는 것은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데 산 꼭대기에서 태어나 밑을 향해 소리치며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에게 안내를 받는 일과 같습니다. 발음은 정확할 지 몰라도 당장 흔들거리는 보울더(비바람에 깎여 둥근 모양이 된 바위)에서나 위험천만한 빙하의 균열 지점에서 확고한 발판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진 못합니다. 여러분들께 필요한 것은 말하자면 언어학습을 돕는 셰르파입니다.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해당 언어의 고지에 오른 비원어민 화자(nonnative speaker) 말입니다.

“But learning from a native speaker alone is like being guided up Mt. Everest by someone who was born at the top of the mountain and is shouting directions down from above. The sounds may be pronounced correctly, but that won’t help you find firm footing among the loose boulders and treacherous crevasses. What you need is a language Sherpa, if you will: a nonnative speaker who struggled with the language and who conquered it.” (p. 89)

Richard M. Roberts and Roger J. Kreuz. (2015). Becoming Fluent: How Cognitive Science Can Help Adults Learn a Foreign Language.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창조과학 단상

Posted by on Aug 27, 2017 in 과학,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인류가 수천 년 발전시켜온 과학으로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우주의 기원을 몇몇 사람들이 30여 년 대충 뚝딱 만들어 낸 이야기들로 설명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지성’을 모독하는 일 아닐까요. 그들이야말로 신을 섬긴다 외치며 도리어 왜곡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오래 고민하고 공부해 왔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나직이 말하는 일이야말로 신실한 신앙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애를 다바쳐 한 우물을 판 노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넘어서 진리에 한발 더 다가가는 이론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깊은 영적 울림이 솟아나지요.

짧은 글 안에서
신앙과 과학의 관계를 논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 있어
신앙을 갖는 일과 과학을 하는 일은
구도자로서의 삶으로 수렴됩니다.
끊임없이 옳은 길을 찾는 여정 말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해서 부끄러울 뿐이지요.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모르는 것을 안다 할 수는 없습니다.

다 알지 못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다 알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듯 말입니다.

연구 re-search

Posted by on Aug 19, 2017 in 과학,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re-search n. 다시-찾음. 내가 알고 있는 바, 상식, 혹은 기존 가설이 옳다는 가정을 넘어 새로운 목적지를 설정하고 이를 찾아가는 일. 목적지에 도달하면 지나온 길을 뒤로 하고 또 다른 탐험에 나서기. 계속 찾는 과정. 언제까지나 ‘re-‘에 천착하는 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언어학습 이론과 인공지능

언어학습 및 습득 상황을 구분하는 데 있어 학습(learning)과 사용(use)의 관계는 중요하다.

1. 모국어습득 상황에서 학습과 사용은 분리되지 않는다. 즉 쓰면서 배운다.

2. 외국어로서의 영어학습에서 학습은 종종 사용과 분리된다. 배우긴 하는데 써먹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쓰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지만 쓸 일이 없다.

3. 통번역기술의 발달은 학습(learning)과 사용(use)의 분리를 가속화한다. 배우지 않고 사용하는 시대의 도래. 이것은 의사소통에서 기술의 역할을 증대시킬 것이다.

4. 언어학습을 우회(bypass)하고 사용은 기계의 지능에 맡기는 시대. 언어학습 및 습득이론 또한 AI를 기본으로 장착하게 될 것이다.

5. “인공지능이 영어교육에 타격을 입힐 것이다”라는 예측.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만 지금은 영어교육이 그동안 누려온 과도한 특권이 정상화되는 시기로 봐야 하지 않을까.

미디어와 기억

Posted by on Jun 29,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기억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간다’는 말이 있다. 더이상 주마등을 보긴 힘들지만 종종 접하게 되는 표현이다.

영상매체의 발달로 이 표현은 곧 수명을 다하지 싶다. ‘옛 기억들의 몽타주’나 ‘그 여름의 기억이 롱테이크로 남아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누군가는 웹툰같은 기억을 ‘스크롤 다운’하다가 씰룩이는 엄지손가락을 만날 지도 모른다.

영화 이전 세대와 영화를 좀 보면서 자란 세대, 태어나서부터 영상매체와 함께 살아온 세대가 추억을 떠올리는 방식은 꽤나 다르지 않을까? 예를 들어 할아버지와 손녀가 놀이공원에 갔다면 할아버지가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과 손녀가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편집이 영화를 만든다. 똑같은 원본 필름에서 완벽히 다른 영화가 탄생한다. 연령별로 ‘주마등 같은 기억들’의 사용빈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이는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modality)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요즘 자기 전에 머릿속으로 롱테이크를 찍곤 한다. 어디까지가 정확한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지금의 내가 채워넣은 장면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 자신의 뒷모습을 따라 학교에 가는 기억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에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계학습 함부로 차지 마라

Posted by on Jun 16,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인공지능과 또 다른 인공지능을 ‘가르치고’, ‘자발적으로’ 새로운 소통 체계를 창조해 내는 시대. 많은 이들은 “AI의 승리”를 선언한다. 기계의 승리, 좌절하는 인간, 암울한 미래, 아니 이미 와버린 파국.

교육노동자로서 나는 사뭇 다른 문제의식을 갖는다. 특정 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앞설 것이라는, 아니 그저 ‘앞설 것’는 표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의 우월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기계가 학습하는 방식이다.

데이터를 거부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이전 예시와 비슷하다고 해서 토해내지 않는, ‘자기보다 못한’ 상대라고 해서 얕보지 않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학습. 혹은 머신 러닝.

기계학습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알고리즘이었느냐.

어쩌면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지점은 ‘연산능력’이 아니라 ‘포용력’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거대한 세계에 얼마나 열려 있는가.

* 고린도전서 13장

‘인간의 자유의지’ 논의에 대한 질문 몇 가지

Posted by on May 14,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1) ‘자유의지’ 논의에서 ‘인간’은 늘 개인이다. 왜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 촌각을 다투는 게임의 팀플레이에서, 밴드의 합주에서, 랩 배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 창발하는 질서는 ‘자유의지’와 연관지어 논의될 수 없는가?

(2) ‘자유의지’ 논의에서 ‘인간’은 왜 늘 ‘인지’하는 인간으로 정의되는가? 그렇다. 이 지적은 자유의지 관련 논의에서 늘상 등장하는 ‘개인이 결정을 의식하기 한참 전, 뇌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실험 결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뇌의 패턴이 드러내는 인식’과 ‘자신의 결정을 인지하는 자아의 인식’을 분리시킨 후,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을 담지하는 몸의 존재에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식과 무의식의 갭은 ‘자유의지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숨어있는 공간’ 아닌가?

(3) ‘자유의지’ 논의에서 자유는 왜 늘 ‘맨몸’의 결정인가?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와 상호작용하며 사고와 감정을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베이트슨(Bateson)이나 바살로우(Barsalou) 및 비고츠키의 후세 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이 아닌 “인간+도구+환경”을 주체 혹은 자유의지의 분석단위(unit of analysis)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4) 근본적으로 ‘자유의지’를 논의함에 있어 상호작용의 지위는 무엇인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개인과 도구, 개인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자유’와 ‘의지’를 정의하는 데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개임해야 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개개인의 독립적 행위 보다는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상호작용에 자신을 던지는 용기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는가? 계획하고 실행하고 모니터하는 존재가 아닌 만나고 섞이고 놓아버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유의지’ 논의에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자유의지’ 자체가 규명 가능한 개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자유’와 ‘의지’를 개인의 뇌 안에 가두어 놓으려는 경향을 띄는 데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나의 자유의지’나 ‘너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존재가 세월을 업고 공간을 가로질러 얽히는 세상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일까?

An interesting take on flow

Posted by on May 9, 2017 in 과학, 링크 | No Comments

The same argument applies to many other areas including teaching and writing, the performance of which requires an extended amount of time, I believe. Although some moments might flow smoothly and almost effortlessly, the overall performance is under constant monitoring, recalibrating, retrying, and restarting. For professionals, of course, the state of ‘flow’ appears more often and lasts longer. However it does not characterize the entire process. It is all about achieving ‘a shorter struggle and a quicker rebound, and a more effective orchestration of competing factors,’ rather than ‘sliding into the state of flow and staying there.’

“In other words, the idea that expert actions are in a placid state of flow – a state in which things seem to fall into place on their own – is a myth.”

https://aeon.co/essays/the-true-expert-does-not-perform-in-a-state-of-effortless-flow

수수께끼 하나

수수께끼 하나 풀어보시죠. A woman gave birth to two sons who were born in the same hour of the same day of the same year. But they were not twins. How could this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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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twins가 아니고 triplet이었어’라고 합니다. 허무한가요? ^^

영어 모국어 화자와 한국어 모국어 화자가 풀 때 정답률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로 보입니다. 영어에서는 twins, triplet, quadruplet 이 각기 다른 단어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들은 쌍둥이, 세쌍둥이, 네쌍둥이죠.

한국어 화자들은 ‘Twins’라는 말에 보통 ‘쌍둥이’를 떠올리고, 이 문제의 맥락에서는 ‘쌍둥이가 아니라구?’라고 묻게 됩니다. 한국어에서 ‘쌍둥이’라는 개념이 세쌍둥이, 네쌍둥이 등을 포함하고 있어 문제를 맞추기가 더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PISA 등의 국제적인 평가에서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 국가들의 수학성적이 높은 여러 요인 중 하나가 숫자의 일관성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1-20의 수를 한국어와 영어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면 차이가 큽니다. 어렸을 때 영어로 11,12,13 외우다가 짜증났던 기억도 있습니다. 한국어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의 구조와 직접 대응되는데 영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지요.

숫자 발음의 일관성은 작업기억(working memory)의 효율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하네요. 아주 작은 차이지만 머리 속에서 계산을 할 때는 적지 도움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저와 같은 한국어 모국어 화자라면 “십일 더하기 십이”랑 “Eleven plus twelve”를 비교해 보시면 감이 확 오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중국어와 일본어 또한 한국어와 같은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11 eleven 열+하나
12 twelve 열+둘
13 thirteen 열+셋
14 fourteen 열+넷
15 fifteen 열+다섯
16 sixteen 열+여섯
17 seventeen 열+일곱
18 eighteen 열+여덟
19 nineteen 열+아홉
20 twenty 열
21 twenty-one 스물+하나

 

http://www.npr.org/sections/krulwich/2011/07/01/137527742/china-s-unnatural-math-advantage-their-words

말장난과 팩트 사이에 과학의 발전이 있다

Posted by on Apr 18,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I am so poor I can’t even pay attention.”이라는 유머가 있다. Poor와 pay라는 단어를 병치시키면서 돈이 전혀 필요없는 attention을 목적어로 삼은 말장난(pun)으로, 주의를 지불(집중)하지도(pay attention) 못할 만큼 가난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인지과학은 이 유머가 사실이 될 수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빈곤이 뇌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하고도 심각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때로 속담이나 말장난이 과학의 발전을 통해 사실이 되기도 한다. 더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http://www.newsweek.com/2016/09/02/how-poverty-affects-brains-4932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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