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성, 비시간성, 역사, 그리고 메타-역사

텍스트와 인식론(Text and Epistemology) – William Frawley의 논의를 기반으로 (4) – 텍스트성, 비시간성, 역사, 그리고 메타-역사(textuality, atemporality, history, and meta-history)

텍스트 없이 역사가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 텍스트와 관계없이 역사는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인류가 개념화한 “기술된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Frawley는 Goody의 견해를 빌려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구술문화의 역사를 비시간성 atemporality 이라는 키워드로 특징짓는다. 이유는 자명하다. 텍스트가 없던 시절에는 개개인이 과거를 물화 reify 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텍스트는 과거를 대상 object 으로 만들지만 구술문화에서는 언제나 과거에 대한 감각이 현재화된다. 어떤 과거이든 과거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누군가에 입에 의해 발화되기 때문이다.

이는 구술문화에서의 시간과 역사는 현재 우리가 인지하고 느끼는 시간과 역사와 매우 다른 차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가 누군가의 구술을 통해 늘/계속해서 현재에 침투해 들어오는 상황(구술문화)과, 기록으로 물화되어 켜켜이 쌓여 있는 상황(문자문화)에서 인간의 과거에 대한 인식/인지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위에서 언급한 구술문화의 과거-현재의 비분절성을 애니미즘 및 토템신앙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은 만물에 영혼이 침투해 있다는 믿음인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것을 믿는 주체와 대상들 사이에 거리가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애니미즘은 개인과 대상화된 물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하에서 가능한 것이다. 토템 신앙도 같은 맥락에서 동물과 인간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라는 믿음에 기초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구술문화에서는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이 발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이 유비를 이용하여 에머슨이 플라토닉한 현존을 강조하여 모든 사물들에 자연 Nature 을 불어넣으려 했던 시도가 자기 자신과 텍스트 사이의 거리를 없애고, 사물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제거하려는 시도라는 해석을 내린다.

과거와 현재의 거리가 없는 구술문화는 텍스트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텍스트의 축적에 따라 과거가 대상화된다. 텍스트의 광범위한 사용과 더불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가 등장한다. 과거는 텍스트의 모음과 이음이 됨과 동시에, 구술문화에서 존재했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와 화자 그리고 현재라는 맥락 사이의 끈끈한 연결 고리가 사라진다. 필자는 이러한 텍스트 문화의 특성으로 구술문화에서는 없었던 복원성 recoverability 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구술문화 자체는 과거와 현재가 고스란히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에 어떤 대상을 복원할 필요도 없었고 복원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텍스트로 많은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면서 ‘텍스트적 역사’가 생겨나고, 이것은 복원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정밀한 고증의 가능성이 탄생하고 이를 바람직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이 복원성의 개념은 푸코와 바르트가 이야기한 연루 filiation 개념과 유사하다.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문자 문화에서 개인들은 그들의 과거를 고스란히 담지하고 있는 텍스트의 세계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어한다. 왜 그런가? 텍스트가 등장하면서 과거가 대상화되는 반면 “얇아진” 현재는 늘 휘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존재의 안정을 찾기 위해 텍스트에 의존하게 된다. 현재는 개인에게 안식처를 줄만큼 견실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Frawley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다양한 논의에서 발견되는 ‘휘발하는 현재’라는 개념은 근대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재를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매우 짧은 순간과 연관지어 개념화하는 경향은 텍스트를 매개로 한 지식사회의 등장과 과학기술적 엄밀성, 수치와 통계 중심의 세계 등의 영향 하에서 더욱 강해졌으리라 추측된다.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성에 대한 논의가 보여준 역사와 복원성 그리고 연루라는 개념들을 넘어선다. 거의 모든 정보가 텍스트로 존재할 때 ‘육성으로 듣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과 얼굴 표정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역사는 사라지고, “역사적 쓰기”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역사가 사라진 자리에 “메타-역사”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지금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텍스트들을 기반으로 역사를 기술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역사적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과의 교감을 통해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해 쓴 텍스트를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역사 (극히 일부 현대사를 제외하고) 는 거의 순수한 텍스트의 세계에서 추출/재조합/재해석 된 ‘메타-역사’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메타-역사’의 세계에서는 복원성이 사라진다. 1차 사료가 없이 텍스트들의 세계로부터 구성된 역사는 재연 혹은 재현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복원성이라는 개념은 적절성을 잃는다. 역사는 텍스트의 재구성이며, 메타 수준에서 기술된 역사는 그 성격상 실제 발생했떤 사건들과 멀디 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Frawley #텍스트성과역사

문해력의 두 축 (1): 브루너의 두 가지 사고모드

Posted by on Aug 1, 2019 in 과학,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인지심리학자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1915–2016)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 바 있다. 세계와 경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뭇 다른 두 가지 모드(mode)의 생각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그 둘은 다음과 같다.

(1) 패러다임적 사고

패러다임적 사고는 논리적이며 과학적 사고를 말한다. 세계를 범주로 나누고 이들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이는 형식적, 수학적 체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흔히 ‘과학적 개념체계’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2) 내러티브적 사고

말 그대로 이야기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련의 인물 혹은 요인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긴장과 갈등, 협력 속에서 관계를 변화시켜 나간다. 과거를 반추하거나 인생의 여정을 돌아볼 때,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내러티브 모드로 사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소설, 영화 등은 내러티브적 사고를 보여주는 대표적 장르들이다.

이 둘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모드는 특유의 형식과 구조를 지니며 어느 정도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한다.

브루너가 제시한 사고의 두 가지 모드는 문해력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활용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문자의 세계를 탐험함에 있어 이 두 가지 모드를 오갈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수학의 세계, 이야기와 상상의 세계를 함께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개념들간의 관계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이야기의 주제와 요소들을 개념화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모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유기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문해력 발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브루너 #두가지사고모드

텍스트와 인식론(Text and Epistemology) – William Frawley의 논의를 기반으로 (2) 

2) Predoxa-Doxa-Paradoxa

두 번째로는 텍스트성이 지식 체계에 있어서의 교전 doctrine/doxa 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의를 보자. 비텍스트성 non-textuality 을 근간으로 하는 구술문화에서는 지식 체계에서의 교전 혹은 정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지식에서 교전을 갖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텍스트의 존재를 상정하기 때문인데, 구술 문화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규모 커뮤니티 단위에서 권위를 가진 몇몇 사람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지식에 기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가지는 권위와 텍스트로 존재하는 기준이나 원칙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텍스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전과 법전일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개인의 의견/행동/말의 일관성은 텍스트적 일관성과는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텍스트 자체는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텍스트성이 중요해지는 문화에서는 텍스트간의 관계, 그 위계의 중요성이 커진다. 다시 말해, 텍스트성은 아이디어 상호간의 위계질서를 필요로 하며, 지식은 많은 경험들의 수평적 연결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묶는 논리 logic 에 기반한다. 이것은 여러 지식 체계를 관통하는 교전 doxa 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다. 지식생산의 성공 여부는 이러한 논리 logic 에 근거하여 기존의 지식을 얼마나 잘 조직하느냐에 달려 있다.

위의 분석과 관련하여 Frawley는 월터 옹의 고대 텍스트 분석의 예를 제시한다, 옹에 의하면 구술문화는 정보의 전달을 등위 접속사에 의존한다. (옹은 이를 ‘등위접속사의 승리’라고 부른다.) 즉, 구술문화에서는 정보의 전달에 있어서 그리고/그러나/그렇지만/그런데 등의 역할이 매우 크다. 하지만 텍스트가 축적된 문자문화에 들어서면 종속접속사 (영어에서 while / before / until 등) 등이 더욱 자주 나타나게 된다. “텍스트에 기대어 이야기하기”가 매우 중요한 소통의 모드가 되면서 이런 경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술이 일련의 사건을 등위접속사 위주로 전개한다면 텍스트 특히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텍스트는 문장간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논리적 힘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호텍스트적 하이퍼리터러시의 시대에는 해석의 기준이 되는 ‘하나의 원칙’이 사라진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궁극의 레퍼런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특정 지식은 더이상 교전 doxa 이 될 수 없으며, 여러 텍스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거대담론은 사라지고 특정 컨텍스트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의 기능/권력만이 존재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개개인의 숫자, 아니 그 개개인의 상황과 기분과 관점의 수만큼이 많아진다.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가 상정하는 담론의 세계가 바로 이런 모습일 수 있을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간 대 기계? 인간과 기계!

Posted by on Jun 18, 2019 in 과학, 단상, 집필 | No Comments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인간만의…”,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의 생존법”과 같은 수사는 인간과 인간을 비교하고 서로 경쟁하는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타인과 함께 잘먹고 잘사는 꿈을 꾸며 실천하는 인류였다면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공존과 시너지를 꿈꾸지 않았을까? <인간VS기계>가 아니라 <인간&기계>가 더 중요한 화두가 되지 않았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비고츠키의 마음관

“시계의 발명 이래 우리는 정신을 일종의 기계에 비유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리고 현재의 심리학에서는 컴퓨터와 같은 구조를 갖추고 움직이는 정신을 ‘실재시’한다. 심리학에서 채용하는 컴퓨터의 메타포는 ‘내부’를 반드시 상정한다. 정신은 피부 혹은 두개골 등을 경계로 상자 속에 갇혀 있는 어떤 실체로 상정되고 그 뚜껑을 열었을 때 시계 혹은 컴퓨터의 본질이 보인다는 메타포다.

이러한 유비는 ‘무엇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상자’같은 것으로 마음을 영상화, 공간화시키는 태도다. 이것은 심리학자들뿐만 아니라 일상인들이 마음에 대해 갖는 기초적인 상상력을 지배한다. 그러나 김영민(1998)이 지적하고 있듯이 마음을 상자같이 꽉 막혀진 어떤 것(something)으로 보는 소위 ‘명사적 사고(Nounal mode of thinking)’*는 실험과 검증을 거쳐 밝혀 낸 생리학적 탐구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유비 관계가 빚은 시각적 오류에 가깝다.

비고츠키 또한 어떤 닫혀 있는 상자로서 ‘마음’을 그리지 않는다. 비고츠키의 도구를 포함하는 마음(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도구를 상정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비고츠키의 마음관이다)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외부 혹은 표면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피부를 경계로 닫힌 공간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실재의 도구에 의한 자기 자신의 제어라는행위의 성질을 빗댄 것이다. 도구는 자연으로 향한 ‘외적 활동의 수단’이다. 이에 비해 심리적 도구, 즉 ‘기호’는 ‘인간 자신의 제어를 위한 필수적 수단’이다(Vygotsky, 1987:130)”

*’Nounal’ 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언어학에서는 ‘nominal’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박동섭, <레프 비고츠키>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6). 50-51쪽.

#비고츠키 #사회문화이론

개인 대 구조?

수업 중에 ‘개인과 구조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많은 학생들의 눈빛은 “왜 그걸 따로따로 생각해”라고 말하고 있더라. 공부라는 것이 스스로 쌓아올린 선입견을 또 다른 공부로 극복해야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는 일이 없는지 더더욱 경계할 일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색깔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으면 보지 못한다?

Posted by on May 14, 2019 in 과학,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색상을 가리키는 언어가 없다면 그 색상을 볼 수 없다는 취지의 컬럼이 공유되고 있는데… 컬럼의 내용상 기 도이처의 저작인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를 그대로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즐겁게 읽은 책이네요.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가 없으면 인지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워프 가설에 대응하는 주장입니다. 흔히 언어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이라고 불리지요. 하지만 이런 강한 언어결정론은 학계에서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다만 언어의 사용이 인지과정을 세밀하게 조정하거나 특정 대상의 개념화에 다소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의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또한 논쟁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요.

학계의 논의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름 모를 색깔들을 꽤 많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립스틱을 놓고 색깔을 대보라 하면 어버버 하겠지만 서로 다른 색상의 립스틱을 구별하는 일이 아주 어렵진 않겠지요.

컬럼에서는 마치 언어학계의 중론인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이름을 모른다고 색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 근거가 희박한 주장입니다. 다만 특정한 이름을 붙여 색상들의 스펙트럼을 특정한 범주로 분류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관련 색상을 잘 구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Blue”라고 통칭되는 색상이 러시아어에서는 goluboy와 siniy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미국인들과 러시아인들에게 goluboy와 siniy 경계의 색상을 보여주고 이를 구별하라고 하면 러시아인들이 미국인들에 비해 구별하는 속도가 미세하게 빠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이 저 아래 중간 사각형 두 개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지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동물들은 색상을 가리키는 말이 없어도 자신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색상을 구별합니다.

덧. 컬럼에서 언급되었듯 기 도이처 또한 색상용어가 등장하는 순서가 일정하다는 것을 말하긴 했지만 이 분야를 개척한 사람은 Brent Berlin과 Paul Kay입니다. 1969년 기념비적 저서인 <Basic Color Terms: Their Universality and Evolution>을 내서 색상과 인지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이 저서에 대한 설명은 아래 위키 페이지를 참고하십시오.

https://en.wikipedia.org/…/Basic_Color_Terms:_Their_Univers…

덧2. 일반인 수준에서 색상용어에 관한 학계의 논의를 정리한 영상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Vox 미디어에서 제작한 <The surprising pattern behind color names around the world> 입니다.

덧3. 아래 색상 이미지는 Lera Boroditsky의 테드 강연 <How language shapes the way we think>에서 가져왔습니다.

교과, 범위를 넘어 깊이를 고민할 때

1. 여러 교과과정의 범위를 둘러싼 논쟁을 접하다 보면 너비만큼 중요한 깊이, ‘무엇’만큼 중요한 ‘어떻게’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타교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영어교과에 국한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오로지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탓인지 영어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이 뿌듯했던 적은 별로 없다. 중고교 시절 누구보다 영어지문을 많이 읽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최선이 아니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2. 적정한 범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범위를 지켜내는 일이 공부의 기쁨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문법을 가르칠 것이냐 말 것이냐, 어디까지 가르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문법이냐가 더욱 중요하다.

3. 흔히 ‘기본개념’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가르치다 보면 여러 개념들을 빠르게 숙지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은 필연적으로 갈린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잘 못해도 좋아하는 학생’이 어쩌다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천문학을 잘 모른다. 기본개념도 그리 잘 아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밤하늘을 보고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좋아하고, 은하의 크기를 나타내는 광년을 들으면서 머리 속에서 유랑하는 빛줄기를 그려보는 것을 좋아하고, 인간의 머리로 상상할 수 없는 ‘심원한 시간(deep time)’을 상상해 보고자 하는 무모함을 사랑한다. 천문학의 개념들을 통해 먼지만도 못하지만 무한에 잇대어 있는 삶을 귀히 여기게 된 것이다.

5. 다시, 범위는 중요하다. ‘무엇’의 문제는 논쟁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학습자들을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는 것 만큼 느낄 수 있고, 느끼는 것 만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교과를 궁리해야 한다.

6. 이 시대의 영어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들 사이를 여행하며 깊은 소통을 갈구하도록 만들고 있는가? 말을 통해 삶을 사랑할 힘을 키워주고 있는가?

다른 교과들은 어떠한가?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영어공부

활성화 영역

아래 세 문장을 보자.

a. “컴퓨터 좀 쳐봐.”
b. “컴퓨터에 꼽을 데가 없네.”
c. “컴퓨터 램을 갈아끼웠어.”

세 문장에는 공통으로 ‘컴퓨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의 표면을 말한다. 뭔가 잘 구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쳐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표면의 단자를 말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SB 등 외부기기와의 연결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

세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내부의 마더보드를 의미한다. 램을 갈아 끼우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열고 메인보드의 슬롯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 좀 쳐봐”라는 말에 컴퓨터 뚜껑을 열고 컴퓨터를 치는 사람은 없다. “램을 갈아 끼웠어”라는 말을 듣고서 USB 단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맥에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를 ‘active zone(활성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어가 하나 같지만 실제로 그중 일부만이 두드러진 의미로 동원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활성화 영역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c를 쓸 때 분명 우리는 다른 영역의 의미를 활성화시키지만 ‘컴퓨터’라는 동일한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단어가 여러 가지 하위 요소를 갖고 있을 수록, 사용되는 상황이 다양할수록 활성화 영역의 역동성 또한 증가한다.

* ‘active zone’이 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어를 갖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은 단어와 뜻 즉, form과 meaning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한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나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하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D%@47″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언어의 형태와 의미 사이에 필연적 관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이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한다. Shell은 언어이다. ‘의자’, ‘chair’, ‘Stuhl’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다. 그 안에는 개념이 담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가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몸(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이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영(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는 매트릭스 1편에 등장한다. “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이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할 수 있다. 뭐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이다.

당신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는가? 어떤 정령들을 초대하는가? 그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 실재냐고? 그건 당신 자신이 결정한다. 사실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는 일생일대의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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