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TO

Posted by on Jun 27, 2017 in 단상 | No Comments

시간강사에겐 YOLO가 아니라 YOTO다. You Only Teach Once. 필요 없는 것 잔뜩 끼워넣지 말고 내 맘대로 가르쳐야지.

기계학습 함부로 차지 마라

Posted by on Jun 16,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인공지능과 또 다른 인공지능을 ‘가르치고’, ‘자발적으로’ 새로운 소통 체계를 창조해 내는 시대. 많은 이들은 “AI의 승리”를 선언한다. 기계의 승리, 좌절하는 인간, 암울한 미래, 아니 이미 와버린 파국.

교육노동자로서 나는 사뭇 다른 문제의식을 갖는다. 특정 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앞설 것이라는, 아니 그저 ‘앞설 것’는 표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의 우월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기계가 학습하는 방식이다.

데이터를 거부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이전 예시와 비슷하다고 해서 토해내지 않는, ‘자기보다 못한’ 상대라고 해서 얕보지 않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학습. 혹은 머신 러닝.

기계학습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알고리즘이었느냐.

어쩌면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지점은 ‘연산능력’이 아니라 ‘포용력’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거대한 세계에 얼마나 열려 있는가.

* 고린도전서 13장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Jun 12,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한국교육의 혁명적 변화”

당장 교육이 뒤집어지진 않겠죠. 하지만 이번 정부 하에서 근본적 변화를 위한 사회적 대토론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혁명을 이야기하는 데서 혁명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2. “영어교육은 어떻게 되나요?”
– “뭐 미래가 불투명하죠.”

영어. 한 번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지 못하고 미궁에 빠져버릴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드는 요즘입니다.

3. ‘영어’가 아니라 ‘다양한 리터러시들이 어울리는 생태계’의 관점에서 고민해야만 하는 시점입니다.

4. “이런 표현 몰랐지? 너 무려 십수 년이나 공부했으면서 이런 표현도 몰라?”라는 광고를 보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알아서 퍽이나 좋겠구려.”

5. 오늘 한 친구가 대략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진짜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려면 다른 일로 돈을 벌면서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진짜 좋아하는 일’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일’을 통해 더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동력을 얻어야 한다는 데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6.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즐겁고 함께하는 공부에서 기쁨을 얻지만, 정처없이 흘러가도 차오르는 대화를 해본 지 참 오래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책무가 아니라 서로를 응시하는 시간에 대한 목마름.

7. 보름 후면 돌아올 오랜 벗, 그와 함께할 공부를 기대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Posted by on Jun 10, 2017 in 단상 | No Comments

내 안에는 좀처럼 뒤돌아보지 않는 습성과 계획없이 사는 일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과거를 구획하지 않고 미래를 후회하지 않는달까. 숙명론이나 낙관론을 들이댈 수도, 무대책이나 무신경이라 손가락질할 수도 없는 무덤덤한 태도. 과거와 현재를 반듯하게 잇는 선보다는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점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어설픈 바람. 그래서였을까. 프로젝트 매니저로 살면서 많은 걸 배웠지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관리해야 하는 내가 낯설었던 게.

아직 한참 남은 기말 단상

Posted by on Jun 8,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1. 언젠가 서울비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말 시험지를 걷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성적과 강의평가를 교환하며 학기를 마감하는 건 참 별로다.

2. 기말고사 일자를 바꿔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한 학생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 와중에 작은 위로는 나의 말에 따라 책장을 넘긴다는 것. 어떤 관계는 접힌 채 책 속에 갇힌 페이지처럼 회복의 기약이 없다.

3. 몇 차례 동영상 강의로 보강을 실시했다. 스크립트 없는 강의 녹화는 건 엄청난 내공을 요한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될 일인 듯.

4. <언어와 사고>라는 과목에서 인지언어학 개론 쯤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어렵지만 열심히 해주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 자체로 흥미로운 내용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5. 한 학생은 읽기 자료 이해가 더딘 것을 두고 “배움이 느려 슬픈 짐승인가 봅니다”라는 메일을 보냈다. 나도 기말 때마다 ‘채점이 느려 슬픈 짐승’이 된다. 그런 학생의 늦은 과제 제출 + 나같은 선생의 딴짓 = 별로 하는 일 없이 성적입력 마감일까지 바쁨 바쁨.

6.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과목, 이번 해에도 즐거웠다. 학부에 사회언어학 과목이 없어 학부와 대학원의 중간쯤 되는 성격으로 진행했는데, 그럭저럭 선방한 듯하다. 2년 전 이 과목을 두 번째 가르쳤을 때 강의내용을 책으로 묶어보려다 포기했다. 진로를 바꾸면(?) 시도해 볼까 한다.

7. 영어교육론/교수법 분야의 얕고 넓은 전공지식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여태껏 가르친 과목이 얼마나 많은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

민족주의적 신념이라기 보다는 비과학적 오해들

Posted by on Jun 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한국어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이 자주 보인다. 한국어가 모든 언어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느니, 철자와 소리 대응이 1:1로 투명하기에 어떤 낱말이든 명확히 발음할 수 있다느니 하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결합된 형태로 유포되는데, 실상 민족주의적 신념이라기 보다는 비과학적 무지의 소산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다. 전지적 작가의 관점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하나의 몸뚱아리로 보고 듣고 느끼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문에 공부가 필요하다. 자기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 원리는 ‘우리’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한 일체의 탐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소중하다고 해서 우리만이 옳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를 직시해야만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의 끝에서 ‘우리’라 믿어왔던 것을 송두리째 버려야 할 수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비극을 받아들일 수 개인은 ‘우리’보다 훨씬 크고 장엄하다.

영어교육 투 트랙 전공과정

돌아보면 영어교육 전공과목을 들으며 강독을 해본 적이 없다. 다양한 이론이 응축되어 탄생한 교재를 다시 요약하여 공부하다 보니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느낌만 남았달까. 이에 비해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음미해야만 했던 몇몇 문학과목에서는 갑갑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사범대학의 교과교육과목은 “현장”에 대한 관심을 전면에 놓는 추세다. 발표와 토론 등의 방식 또한 종종 활용된다. 이는 양날의 검이다. 교육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만 이론적 엄밀성과 학문적 깊이를 희생시키는 결과 또한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범대 영어교육과의 교과교육과정을 두 트랙으로 재편하였으면 한다. (사범대학 내 타전공 또한 비슷한 처지일 터이나 필자가 알고 있는 언어교육영역에 한정하여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는 개념적 토대를 닦는 트랙으로, 언어학, 심리학, 인지과학, 사회학, 인류학 등의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 통해 ‘언어교육학’이라는 응용분야의 뿌리를 이해한다.

둘째는 한국사회와 영어교육 트랙이다.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의 현 교육환경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교과교육방법을 연구한다. 해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수정하고 재맥락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연구’라는 표현을 썼다.

나아가 대학원 수준에서는 이론강독 수업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특히 방법론 관련 강좌의 강화가 시급해 보인다. 필자 또한 주요 논문들을 꼼꼼히 읽어내려가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이론강독이 가능한 학교에서 얼마나 더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문장

Posted by on Jun 5,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밤새 얕은 잠 속에서 뭔가를 계속 썼다. 쓴 것을 모두 다 버리고 딱 한 문장을 남겼다. 그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시 아침. 애를 써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남은 것은 지독한 아쉬움, 휴식 후의 피로감. 그리고 뭔가 나쁘지 않은 걸 쓰긴 했다는, 몇 분 되지 않아 화석이 되어버린 기억.

꿈은 때로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아니 현실은 종종 무서울 정도로 꿈같다 해야 할까.

재귀대명사의 탈출

Posted by on May 30,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언어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잡생각) 일반적으로 myself, herself, himself 등 영어의 재귀대명사는 짝을 이룰 때만 허용된다. 문장에 재귀대명사와 연결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재귀대명사 홀로 쓰이는 예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an effort from John, Stephanie, and myself.” 같은 식의 용례 말이다.

이들은 ‘재귀(reflexive, 자신을 반영함, 자기로 돌아감)’라는 정의에서 탈출하고 있는 중이다. 자유롭지만 돌아갈 자신(self)이 없는 자신들은 본질과 현상의 구별이 사라진 시대를 닮았다. 기준점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물론 ‘진정한 나’ 따위는 없지만 가끔 대면할 ‘나’를 갖는다는 게 나쁘진 않을 것이다.

난 아직 모르잖아요~

Posted by on May 29,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변변찮은 연주를 마음으로 품어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작은 음악회를 두 번이나 했었죠. 제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관객 요청 리사이틀’이었습니다.

처음 모였던 곳은 합정동의 작은 연습실.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10명 남짓 다닥 다닥 붙어 앉을 정도의 아담한 공간이었습니다. 이전 집과 지금 집 딱 중간에 그 연습실이 있었다는 걸 최근에야 알고 놀랐습니다. 연습실은 사라졌지만 그 즈음 녹음한 곡들은 아직 남아 있네요. 그마저 언제 흩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참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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