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능력에 대해 모순된 존재

Posted by on May 2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모순적인, 너무나 모순적인.

인간은 비할 수 없이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해내는 기계에 대해서는 “우리만의 창의성을 개발하자”고 말하면서,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자신들에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믿게 만든다. 소위 ‘4차산업혁명’의 핵심은 더 우수한 기계의 발명 자체가 아니라,그를 통하여 인간의 능력을, 나아가 인간 존재를 재정의하는 데 있을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이어폰과 인생

Posted by on May 22,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어쩌다 짬이 난다. 음악을 고른다. 이어폰을 꺼낸다. 풀 수 없을 만큼 엉켜 있다. 낑낑대며 푸는데 반격이 만만찮다. 그렇게 쉽개 풀리면 내가 이어폰이 아니지, 하는 것만 같다. 줄은 유연한 무생물이지만 이어폰은 굽힐 줄 모르는 짐승이다. 허나 시간은 나의 편이지. 후훗. 마지막 매듭이 풀린다. 아뿔싸 또 다른 일이 터진다. 이어폰은 다시 주머니 속 깊고 어두운 곳으로 유배된다. 일에 열중한다. 이어폰은 다시 광속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일이 끝나고 다시 이어폰을 꺼낼 때 쯤이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문제를 푸는 동안 줄은 꼬인다. 줄을 푸는 동안 문제는 다가온다. 음악은 결코 전화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삶의 작동방식일지도 모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생각만 할 수 있는 능력

Posted by on May 19,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생각만 한다”는 실행력 부족을 나무라는 말이지만, 한편으로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을 담고 있기도 하다. 뭐든 다 직접 해보지 않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고 지금 여기 눈 앞의 공간과 지각할 수 없는 공간을 연결한다. 생각만 하는 능력이야말로 현실을 뛰어넘는 능력인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인공지능 시대의 능력주의

Posted by on May 15, 2018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이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주장에는 “이미/언제나 있었던 인간의 시대, AI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빠져있다.AI의 고도화에 따라 ‘능력주의 (meritocracy)’는 또다른 옷을 입고 인간을 옥죄게 될 것이다. “AI 대 인간”의 구도는 언제나 “인간 대 인간”의 구도로 바꾸어 이해해야만 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클리셰

Posted by on May 1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강의 10년차, 이제 ‘초짜’라고 부를 수는 없게 되었건만, 처음보다 더 나은 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시간강사를 “(명사) 아는 척 하느라 엄청 바쁘고, 바쁜 척 하다가 좀 알게 되는데, 그땐 또 잘 모르는 걸 가르쳐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의 근원에는 이런 상황이 있다. 돌파하자고 결심을 하지만 매번 다시 쳇바퀴 도는 삶으로 던져진다. (이 상황의 근원에 나약함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괄호 안에 넣어두기로 한다. 이게 본문이 되면 삶이 너무나도 괴로울 터이니.)

한편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해도 ‘클리셰’로 느껴지곤 한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일텐데도, 내 머리 속에서는 진부한 것 투성이다. 전에 했던 이야기,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지 않은 지식, 더이상 영감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가르침 따위 말이다.

지식이 전달(deliver)될 수 없고 구성(construct)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인식론적 지위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 누군가에게 체화되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구성주의는 관계를 맺는 데 요구되는 시간에 대한 담론이다.

교사는 배움의 시간과 조응하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응시를 통해 성장한다. 가르침은 특정한 세계에 천착하며 긴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커 파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We teach who we are.)”라고 말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의 말을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풀면 이렇다.

“우리는 특정한 주제에 관해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 주제와 함께 살아온 시간을 학생들 앞에서 풀어내는 것이지요. 꼬여있는 시간을, 툭툭 끊어진 시간을 풀어낼 순 없어요.”

단단한 실타래가 되지 못한 지식으로, 자신을 감화시키지 못하는 지식으로 상대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는 시도는 얼마나 얄팍한가. 나는 얼마나 얄팍한가. 이런 생각이 자주 찾아오는 요즘이다.

저녁 수업 준비를 해야겠다.

On native-speakerism

Native-speakerism is a powerful ideology machine that mass-produces unfairness, contempt, inferiority, and frustration. It ruthlessly divides native and nonnative speakers, veils the hard fact that we are all legitimate users of a certain language, and naturalizes sociocultural, economic biases against second and foreign language learners. Through this seldom-challenged mechanism, it effectively molds discrimination out of differences, It mimics racism in placing the categorical value on a birth-based capacity, and colludes with the ‘sacred’ meritocracy by establishing native speaker-favored standards, qualifications, and market environments. Where native-speakerism prevails, foreign language learning functions as a viable tool for the old ruling strategy: divide and conquer. So I remind myself that I do not need to say, “I perfect understand what you mean by that. However, it is wrong: native speakers would not speak like that.” No, they’re not wrong. I am wrong. There utterances communicate: my judgement blocks.

함께 기억하기, 우리의 말을 만들어가기

Posted by on May 12,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금요일 오후, 1년 만에 한 학생을 만났다. 여름 졸업 예정으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그는 수업이 없는데도 나를 만나러 학교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읽으시면 많이 웃으실 거예요. 그리고 제가 두 페이지나 썼어요!”라며 편지를 건넸다. 나는 편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내내 웃고 있었다.

돌아와 책상에 앉아 편지를 읽어내려가다가, 한해 전 <언어와 사고> 수업에서 내가 했다는 이야기와 마주쳤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듯이, 자기 인생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안다고 뽐내지 말고 나그네처럼 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저도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려고요!!”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 아마도 앎과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꺼낸 이야기이리라. 그의 글을 통해 돌아온 말은 이제 ‘나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말’로 기억될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으로 수업을 경청하던 그가 진학에 성공해 멋진 교사로 성장하기를, 나그네 된 선생들로 만나 또 다른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

변화의 메커니즘

Posted by on Apr 23,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자신이 쓰는 말 하나하나가 국어를 바꾼다는 생각을 못하지만, 이 메커니즘을 제외하고 언어 변화를 설명할 길은 없다. 자신의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을 못하지만, 이 메커니즘을 제외하고 역사와 사회의 변혁을 설명할 길은 없다.

큰 일을 이룰 방법은 작은 일밖에 없다. #다시쓰기

동어반복[同語反覆]

Posted by on Apr 18,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슬픔이 슬픔에 그치는 슬픔 없기를.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게 있을까.

어울리지 않는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동어’를 ‘반복’한다고 하지만,
다시 말하는 순간 ‘동어’가 아닌 듯합니다.
같은 길이와 높이의 음도 두 번을 치면,
첫 번째 음과 두 번째 음이 생기듯 말이죠.

영어-학습-자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 영어학습자를 대함에 있어서 ‘영어’에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영어’ 보다는 ‘학습’ 전반이, ‘학습’ 보다는 ‘자者’ 즉 사람의 문제가 더욱 근본적이다. 이런 면에서 영어교육전문가의 전문성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면 사람보다 공부를, 공부보다는 영어를 중심에 놓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수포자’, ‘영포자’, ‘과포자’ 등의 명명은 현상의 근원에 닿지 못하고 개별 과목 중심의 사고를 강화한다.

총체적 관점을 이야기하면 개별 교과의 문제도 풀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별 교과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총체적 관점 즉, ‘인간으로서의 발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with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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