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일 논의 유감

Posted by on Apr 5,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오늘 ‘꽃놀이 인파’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4월 15일 총선을 예정대로 실시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의 필요가 급박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정부에서 추진하는 거리두기는 앞으로 2주. 여기에는 총선일이 포함된다.)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았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개학은 감염의 위험이 커서 안되니 온라인으로 해야 하고, 종교집회 등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막는 상황에서 선거는 예정대로 치뤄야 한다는 논리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받아들여지는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일부 재외국민은 기본권 중에서도 기본인 참정권을 순식간에 잃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라고 말하기에는 실로 중대한 사안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완벽히 다른 선택을 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선거일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어 안된다는 말보다는 법을 바꾸어서라도 다른 날로 미루는 게 적절한 선택 아닐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투표장에서 감염된 노인이나 기저질환자 중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사례가 나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능을 포함한 사회의 수많은 타임라인이 미뤄지는 상황에서 총선만은 그대로 가야 한다는 건 어쩐지 억지같다.

덧. 법 개정에 관해서 언급했는데, 내가 법을 잘 몰라서 안되는 걸 된다고 우기는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비상사태’ 속에서 선거가 치뤄질 수 없을 때, 해당 선거는 없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또한 상식적이진 않은 것 같다.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3: 사회언어학 공부의 목표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은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연구합니다. 촘스키의 접근이 인간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능력으로서의 언어능력을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면 사회언어학은 사회와 언어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인간이 생물-문화적 존재(biocultural being)임을 생각한다면 언어연구의 축이 이렇게 분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사회언어학은 1960년대 말 뉴욕의 사회계층과 언어특징에 대한 Labov의 기념비적인 연구 이후로 출신지역, 인종, 계급, 교육수준, 성별 등이 개인 및 집단의 언어사용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죠. Labovian sociolinguistics와는 다르게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의사소통을 강조하고 인류학적 방법론을 취한 접근이 생겨났습니다. 대표적으로 70년대를 거치면서 Dell Hymes의 영향을 받은 ‘의사소통의 민족지학(Ethnography of communication)’이 정립되었고, 이는 언어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의사소통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 개념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90년대 이후에는 점차 인종, 성별과 같은 전통적 사회학적 변수가 언어사용에 미치는 영향이나 언어의 특징이 사회적 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를 보여주는 정도를 통계적/변량적으로 보는 연구보다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개개인의 아이덴티티, 포지셔닝, 권력관계 등이 언어사용과 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밝히려는 연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응용언어학과 가까운 사회언어학 연구에서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죠. 이와 함께 모든 언어행위에 수반되는 권력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는 비판적 사회언어학(critical sociolinguistics), 비판적 담화분석(critical discourse analysis), 비판적 담화연구(critical discourse studies) 등의 흐름도 사회언어학의 주요 분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번 학기 전반부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언어교육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사회와 언어의 관계를 공부해서 뭘 하려는 걸까요? 저는 사회언어학을 공부에 두 가지 상반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언어를 통해 사회를 파악하고, 언어와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누군가가 특정한 발음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index)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겠죠. 버니 샌더스가 자신의 이름에서 /r/ 발음을 탈락시킬 때 그것이 그의 연령과 출신지역(뉴욕)을 지시함을 알아채는 것, 그가 사용하는 억양이 유태인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글을 통해 그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하고 구획짓는 데 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상반되는, 어떤 면에서는 더욱 근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종, 계급, 출신지역, 성별을 다 벗어버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여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출신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원어민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어 혹은 방언 구사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그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한 인간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기술적 힘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매 순간 우리를 누르고 있는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 편견없이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고 싶으니까요. 첫 번째가 분석하고 읽어내는 작업이었다면 두 번째는 차별하지 않고 연결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네 압니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수많은 시간 체화한 언어적이고 사회적인 관습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서울 사람이 아닌 척, 남성이 아닌 척, 선생이 아닌 척하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자칫 조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요. 저를 둘러싼 수많은 권력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요. 아무 편견 없이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하지만 누구와 만나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한 의사소통(appropriate/relevant communication)을 하려는 노력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특징을 차별의 포인트로 삼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성과 이야기할 때는 여성의 스타일에, 노인과 이야기할 때는 노인의 언어패턴에, 특정 지방 출신의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의 언어적 특성에 맞추어 대화를 나누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춰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지요. 우리가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벗어던질 순 없겠지만 서로의 세계에 조응하며 대화를 지어가는 협력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늘 불가능한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와 지역과 성별과 교육수준과 정치적 성향으로 짜여지는 권력관계를 하늘 아래 평등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회복시키고 싶은 꿈이야 말로 터무니없이 우둔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꿈을 꿀 때에 우리의 말글이, 몸짓이, 눈빛이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실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발음 좋은 학생’에게 칭찬을 합니다. “와 너 발음 좋다. 이거 한번 읽어볼래?” 이렇게 말입니다. 물론 사회적 기준에서 해당 학생의 발음은 좋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좋은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 다른 학생들은 ‘나쁜 발음’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어떤 발음이 사회적으로 권위(prestige)를 갖는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사회언어학의 첫 번째 목표에 해당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의 힘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에 대응합니다. 교실에는 ‘좋은 발음’과 ‘덜 좋은 발음’을 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야기합니다. 자기만의 삶을 궤적을 지닌 유일한 인격체로 말합니다. 그 주체들 사이에 위아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편견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늘 기억하고 자문합니다. ‘내가 더 높게 평가하고 있는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들의 사회문화적, 계급적, 역사적 연원을 안다면 이들을 차등적으로 대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꾸밈말의 역설

Posted by on Mar 29,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사실 난 ‘글쓰기 선생’치고 꾸밈말을 자주 쓴다. 쪽글을 쓸 때면 ‘엄청난’ 같은 비격식체 강의어(intensifier)도 종종 동원한다. 하지만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꾸밈말을 조심하라는 데는 언어적, 개념적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위대한 사랑”과 “사랑” 중 ‘사랑’을 강하게 만드는 표현은 무엇인가? 언뜻 보면 “위대한 사랑” 쪽이다. “위대한”과 “사랑”이 결합하여 더욱 강건한 사랑의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냥 사랑’보다는 ‘위대한 사랑’이 더욱 강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그저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이 세계의 모든 사랑이 이 단어 안에 쏙 하고 들어온다. 위대한 사랑, 못난 사랑, 철없는 사랑, 때늦은 사랑, 일방적 사랑, 지극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등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의 개념 안에 포섭된다.

하지만 “위대한 사랑”은 오로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사랑만을 담는다. “위대한”이라는 말이 사랑의 힘을 강하게 한다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이 쪼그라든다. ‘위대한 사랑’이 되는 순간 ‘사랑’이 담았던 우주의 모든 사랑들은 ‘축출된다’. 개념적인 범위가 심히 축소되는 것이다.

이 점을 저자와 독자의 관계에서 풀어보자. 저자의 꾸밈말 사용은 표현하려는 의미를 세밀하게 만들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이 해석하고 개입할 범위를 좁히는 효과 또한 갖는다. 때로 저자에게 ‘정확한’ 묘사가 독자에게는 ‘갑갑한’ 설명이 될 수 있고, 저자의 ‘엄밀성’이 독자에게는 ‘숨막힘’이 될 수 있다. 해석의 창을 하나 열면 다른 모든 창문이 닫힌다. 이제 해당 꾸밈말의 창을 통해서만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나는 형용사와 부사 같은 꾸밈말을 무조건 배격하는 글쓰기 교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건 수사적 선언이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수식어의 엄연한 존재는 자신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꾸밈말이 저자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해하고 신중하게 동원할 필요가 있다. 수식어를 안쓰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 쓰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덧.
사랑이 오염된 시대, ‘진정한 사랑’이 사랑을 대신한다. 용서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참된 용서’가 자주 소환된다. 그저 ‘사랑과 용서’면 충분한 세계라면 사랑이 진정하지 않을 리 없고, 거짓된 용서가 존재할 리 없다. 언어를 꾸미려는 충동은 오염된 세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연구란 무엇인가

Posted by on Mar 2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반년 넘게 응용언어학 분야의 연구자 두 분과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두 주에 한 번 온라인으로 만나 그간 각자의 삶을 나누면서 일상, 연구, 수업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주어진 포맷은 없고 각자 성찰적 내러티브를 쓰고 자유롭게 나누는 방식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임한다. 함께하는 두 분께 많이 배우고, 나의 지금을 만들었던 시절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나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지난 모임에서는 ‘연구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이 나왔다. 학문 분야에 따라 연구가 포괄하는 영역을 다르게 인식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응용언어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논문을 쓰는 일에 국한시켜 연구를 개념화하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다. 짐작컨대 ‘논문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연구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고 계실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비롯한 많은 응용언어학/TESOL 연구자들은 ‘연구는 못하고 딴일/딴짓 하느라 바쁘다’는 말을 종종 한다.

한편으로 ‘연구란 무엇인가’를 논의하며 논문보다는 대중적인 작업에 집중한 지난 몇 년이 떠올랐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수년 간 기록하여 에세이를 쓰고, 석사과정 이후 영어교육에 대해 고민해온 바를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내고, 비판적 리터러시 관련 도서의 번역에 참여하고, ‘삶을 위한 리터러시’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정리한 대담집을 내려 하고, 영어로 논문쓰기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만나고.

그러고 보니 시쳇말로 ‘취업과 승진에 도움 1도 안되는’ 일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연구인가, 아닌가? 누군가에겐 연구처럼 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연구가 아닌 딴짓으로 보일 것이다. 울트라 꼰대가 있다면 철없는 이의 ‘헛짓거리’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결론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연구냐 아니냐 선을 긋는 건 짓고 배우고 살아가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치렁치렁 나를 합리화하는 논리인 것 같지만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걸 바꿀 이유는 없다는 것.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Posted by on Mar 24, 2020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뮤지션들과 운동선수들의 ‘코로나-19 극복 영상’을 보고 있노라니 타지에서 유학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논문을 쓰던 시절, 하우스메이트와 약간의 대화를 주고 받는 것 외에는 내내 홀로 지내던 시간이 있었다. 외롭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가끔 쓸쓸하고 불현듯 그립고 문득 이야기 건넬 사람이 절실했다. 나를 살린 건 8할이 산책과 음악이었다. 날 좋은 오후면 근린공원으로 나가 두어 시간을 걸으며 햇살 아래 오디오북을 들었고, 밤에는 책을 읽다가 건반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쩌다가 만난 트위터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믹싱하여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고 (덕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 새벽시간 어눌한 피아노로 ‘랜선 콘서트’를 열어 김광석과 유재하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때의 연주 음원은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몇몇이 남아 아직도 어린아이같은 노스탤지어 곁을 지키고 있다. 아프고 두려운 시절, 자꾸만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2012년 여름 연주)

 

재난의 시대,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r 17,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2 Comments

1. 아리조나 투산에 있는 한 친구는 “고립되거나 혼자 계신 분을 알고 있다면, 그들이 뭔가 필요하다면 알려줘. 살 수 있는 거면 얼마든지 사다가 그분들 집 앞에 놓아줄 수 있으니까.”라는 포스트를 올렸다. 울컥한 나는 하트를 날렸다. 그냥 많이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쿠팡맨’ 노동자가 떠올랐다.

2. 한국사회는 국민성의 성숙으로 사재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물류와 배송시스템, 배달노동자들의 혹독한 노동으로 사재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우리는 종종 피땀과 노동, 시스템과 ‘착취’를 자랑스런 문화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나, 반성한다.

3. 무지와 혐오의 높은 상관관계처럼 조금도 이해하려 들지 않음과 비웃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대담을 나누었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최근 한 교회의 ‘분무기 사건’을 무시하듯 웃어 넘겼던 일을 돌아본다. 그리고 내가 몇주 전 어떤 ‘가짜뉴스’에서 뜨거운 물을 자주 먹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그냥 믿어버렸던 일을 떠올린다. 돌아볼수록 나의 어리석음은 크고도 깊은데 누군가의 ‘어리석음’을 쉽게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숨을 고르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4. 몇 주만에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평소 지하철 안팎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무료급식소는 한 달간 문을 닫았고, ‘판을 깔고’ 야채나 헌옷가지를 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바이러스에겐 국경도 인간도 없다지만, 인간이 만든 세계는 고통을 차별적으로 분배한다.

5. 세계 각지에서 계엄령에 준하는 조치들이 내려지고 있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이 있으나 국가 보건방역시스템의 방만함과 무능함을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식으로 해결하려는 측면은 없는지 살피게 된다. 질병 재난 시대의 사회가 새로운 온라인 교육을 요구하는 만큼 새로운 온라인 시위와 정치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시기는 아닐지.

6. Extreme disasters require radical solidarity. Our time and space have changed forever and social distancing prevails: Love needs to weave us together tight and sound. The ‘new normal’ of this pandemic era should be trust and care on an institutional and social level. Rampant capitalism needs to be quarantined and revolutionary regimes imagined. We cannot go back.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태도가 뭐 그리 중요한가

“태도가 중요한가? 내용이 중요하지!”가 가정하는 것들

1. 태도는 내용이 아니다.
2. 태도가 어떻더라도 내용은 읽힌다.
3. 회사 미팅에서 브리핑을 할 때 누워서 껌씹으며 잠옷차림으로 하더라도 정확한 정보만 전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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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차가 확연한 대화 상황에서 강자가 약자의 태도를 문제삼는다면 그것으로 매우 정치적이며 억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대등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태도가 뭐가 중요한가’라고 말한다면 적절치 않다. (1) 상대가 태도와 내용을 완전히 분리해서 처리한다는 보장이 없고, (2) 부적절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내용을 읽기 전에 상대를 읽으며, 그렇게 읽은 상대의 태도와 매너가 내용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3번을 실천하면서 그런 주장을 한다면 진심은 어느 정도 받아들여줄 수 있겠다.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r 11,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얼마 전 낸 촛불집회 관련 논문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우리에게 충분한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아카이빙(archiving)’의 부재는 정부, 언론, 시민단체, 정당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였다. 탄핵정국을 관통한 집회는 건국 이래 가장 큰 거리시위로 불리지만 체계적이며 풍부한 자료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번 사태는 어떨까. 백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실행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부디 관련자들이 이번 사건을 꼼꼼히 기록하고 면밀히 분석하고 교훈을 이끌어내고 쓸 수 있는 자원으로 배포하는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빈다. 무엇보다 ‘복기’에 돈을 쓰는 게 제대로 돈을 쓰는 일임을 정부와 지자체, 유관 기관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2. 오래 전 한 후보의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대선후보”와 “돼지 흥분제”가 한 텍스트 내에 동시에 오른 적이 있다. 역겨운 내용이었다. 이로써 그는 단지 한국정치 뿐 아니라 텍스트의 역사를 오염시켰다. 오늘 아침에는 모 당이 한 기업 총수를 소환하며 기부를 종용(?)하는 포스터를 보았다. 그것 또한 기이한 언어들의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말도 안되는 말을 가능하게 하는 말같지 않은 행동들은 깊은 탄식을 부른다.

3. 2006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영문 제목은 <The Host>이다. 일부 언론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host)를 마치 괴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어떤 확진자도 숙주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세계에서는 host가 괴물일지 몰라도 이 세계에서는 인간이라는 것. 어떤 측면에서 ‘숙주’로 여겨질 수밖에 없지만 온전한 인격체로서 대해야 한다는 것. 이 둘을 적절히 조화할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4. <삶을 위한 리터러시> 속편으로 <재난 시대의 리터러시>를 고민해 본다.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듣고 연결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재난’ 덕에 첫 책도 나오기 너무 힘들다는 건 안비밀. 작업이 길어지니 조금은 기운이 빠진다. 자연의 봄만큼 마음의 봄도 어서 왔으면 좋겠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더 많은 연결, 더 많은 분열

Posted by on Mar 10,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아마도 우리는 역사상 타인의 삶을 가장 많이 읽어내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책을 덜 읽는다고 하지만 뉴스와 블로그, 소셜미디어와 채팅방의 텍스트로 순간순간을 채운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연대로 나아갔는가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더 많이 읽고 더 안다고 생각할수록 넘지 말아야 할 선,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금,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할 경계만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연결이 많아질수록 오해는 증가하고 상처는 깊어가고 곱씹는 밤은 늘어간다. 진실로 슬퍼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기를. 아파하는 자에게 함께 아파할 벗이 있기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원인과 결과, 그리고 리터러시

Posted by on Mar 9,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 한국사회의 가장 아픈 면 중에 하나는 특정한 현상의 원인을 찾는 데는 분주하면서도 그 원인이 더 큰 사회경제적, 제도적 맥락과 닿아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묻어둔다는 데 있다. 원인은 넘쳐나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는 일에는 게으르달까.

2. A는 B를 탓하고, B는 C를 탓하고, C는 D를 탓한다. 그렇게 탓하기의 향연은 사회를 좀먹고 합의를 지연시키고 진실을 감춘다. 이해와 분석, 성찰과 제도화는 계속 미뤄지고 탓하기와 편들기는 습속이 된다. 원인을 찾는 데 골몰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형성에 대해 함구하는 사회는 게으르고 얄팍하다.

3. 무엇이든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역사와 맥락, 사람이 있다. 영어로 말하면 “A cause is only skin deep (우리가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그저 한 꺼풀에 불과하다).”이라고 해야 할까. 원인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요인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원인 또한 결과인 것이다.

4. “A때문에 이 사단이 났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에 대해 응당 해야 할 응답은 “그럴 수 있겠네. 그런데 A는 어떻게 해서 생긴 거야?”일 것이다.

5. 즉, 그 말에 대해 “맞아맞아”라며 그냥 넘어갈 것인지, 얼굴을 찡그리며 속으로 ‘이런 공감능력 떨어지는 인간’을 외칠 것인지, 아니면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하네. 왜 그렇게 되었을까?”라고 함께 알아보자고 제안할 것인지에 따라 한 사회의 리터러시 역량이 좌우된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는 상대와 나의 관계를 넘어 맥락과 역사를 사고하는 힘이다.

6. <삶을 위한 리터러시(가제)>에서는 대담자 선생님의 제안으로 ‘공감능력’ 대신 ‘사유역량’이라는 용어를 택했다. 상대의 입장을 그저 긍정하고 다독이는 것(‘공감’)이 아니라 그것을 보듬으면서 생각을 확장해 가는 일(‘사유’)로서의 리터러시를 상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공감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당신과 나 사이에서 무한루프를 도는 폐쇄적인 과정이라면 결국 당파주의와 뒷담화의 번성에 복무할 뿐이다.

7. 아래 첫 답글의 링크는 위의 생각에 단초를 제공한 글이다. 대구 한마음아파트의 상황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분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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