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소유가 아닌 가로지르기

1.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한국어-영어 바이링궐/바이컬처럴’로 키우길 바라는 나라에서 ‘다문화-‘는 차별과 배제의 접두사다. ‘글로벌 시티즌’이 될 것을 주문하는 사회임에도 ‘다문화교육은 다문화가족 구성원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이같은 자기분열적 인식은 외국어 문화자본과 계급간의 일그러진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대다수 국민에게 ‘외국어’에 속하는 언어는 영어를 비롯해 몇 개 되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2. 장면 1. 한 카페.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각자 노트북을 놓고 여행 계획을 짜고 있다. 책상에는 유럽 여행 책자 몇 권이 널브러져 있다.

“사진 볼래? 지난 번에 갔다 오면서 찍은 거.”
– “어어 보자.”
“이건 OOO고… 이건 OO…”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저 장애인은 누구냐?”
“누구긴 누구냐 나지. 새X야.”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장면 2. 하교시간, 교복 입은 남자 고등학생 두 명.

“야 음료수 사줘.”
– “내가 왜 사. 이 ㅆㅂㄴ아.”
“지난 번에 샀잖아. ㅆㅂㄴ 기억도 못하냐?”
– “웃기고 있네.”

두 남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여성을 극도로 비하하는 욕설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유쾌한 우정의 과시’였을까? 남자를 비하하는 상황에 왜 여성에 대한 비속어를 쓰고 있는 것일까.

어제 오늘 겪은 두 장면은 일상어에 스며든 장애인, 여성 차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마 ‘장애인을 비하하지도 않았고, 여성혐오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구체적 대상을 향해 표출되는 차별과 혐오는 내면에 스며든 차별과 혐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3. 테이블에 둘러 앉아 한 학생의 교과서 필기를 열심히 베끼는 사람들. 공부 잘한다는 학생의 필기이니 믿을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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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어머니들이었다.
자식의 글을 대신 써주고 자식의 삶을 대신 사는 이들. 그리고 이를 강제하는 구조.

친구의 이야기에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4. 어떤 책을 읽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어떻게 읽느냐, 나아가 어떻게 사느냐다.

이와 관련하여 J. Rufus Fears 교수는 한 강연에서 Dietrich Bonhoeffer와 Otto Thorbeck의 악연에 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 모두 성경과 일리아드, 소포클레스의 저서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다양한 고전을 접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Bonhoeffer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Thorbeck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다른 자리에 앉게 했을까?

5. 나에게 읽기는 문자 조합의 해독(decoding)이 아니라, 삶의 연장(extension)에 가깝다. 물론 텍스트의 의미를 충실히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읽어낸 텍스트는 어디로 향하는가? 어디에 녹아드는가? 그 방향이, 자리가 중요하다. 결국, 어떻게 읽는가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한국 영어교육을 생각할 때 가장 갑갑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해독에 발이 묶여 해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행위로의 도약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

6. 이런 의미에서 행간읽기(reading between the lines)는 행간쓰기(writing between the lines)로, 이는 다시 선을 넘어서 살기(living beyond the lines)로 확장되어야 한다. 행간은 읽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쓰는 것이고 이를 통해 다른 삶을 사는 행위인 것이다.

저자의 말이 만들어 낸 행간은 해석의 공간이 되고 나아가 삶의 자리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의 궤적으로 우리 삶의 자리를 구획한다. 놀라운 것은 구획의 목표가 가로지르기에 있다는 것이다.

7. 소유所有가 아닌 월경越境의 독서를 꿈꾼다.

#삶을위한리터러시

기억감퇴 4단계

Posted by on Jun 18,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기억감퇴 1단계: 영화 제목을 보고 “이거 왠지 익숙한데”하면서 줄거리를 흝어본다. “아, 이거 봤던거네”라며 다른 영화를 고른다.

기억감퇴 2단계: 예전에 봤던 영화인지 모르고 다시 보다가 결정적 순간에 이르면 “이럴수가, 예전에 봤던 거네”라고 탄식한다. 이미 본 영화임을 기억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기억감퇴 3단계: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친구를 만난다. “야, 너 혹시 데자뷔 Déjà vu (旣視感) 라는 말 아니? 내가 어제 영화를 보는데 말야, 진짜 끔찍한 데자뷔를 경험했어.

기억감퇴 완성단계: 예전에 봤던 영화를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이 다시 본다. 한 5분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음 앞에 내용이 뭐였더라?’

단단한 영어공부 3쇄

Posted by on Jun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일상 | No Comments

<단단한 영어공부>가 3쇄를 찍게 되었습니다. 출간 100여 일 만이네요.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공감해 주시고 알려주신 덕분입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로 향하는 길에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래 유유출판사의 공지글을 옮깁니다. 책 표지의 ‘비밀’이 담겨 있답니다. ^^)

#단단한영어공부 #중판출래

이 책은 영어공부 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어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학습법을 알려 준다거나 영어를 원어민처럼 술술 하게 되는 법을 안내하는 책이 아니에요. 이 책은 영어공부 책입니다.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영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언어 중 하나인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지요.

책 표지에 ‘영어공부’라고 쓰여 있는데, 영어공부 책이 아니라고 했다고 영어공부 책이라고 하니 좀 헷갈리시죠? 이 표지 시안을 처음 봤을 때,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this is not a pipe’가 떠올랐습니다.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텍스트를 본 이들은 자꾸만 질문을 던지게 되죠.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이건 파이프 그림이지 진짜 파이프는 아니지 않은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은 파이프라고 할 수 없는가? ……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도록 만든 작품이지요.

『단단한 영어공부』도 자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초중고교에서 장장 12년간 배운 영어는 나를 성장시켰나? 영어공부 생각만 하면 답답하고 두려운데 언어 공부란 이런 걸까? 영어를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응용언어학자인 저자는 말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우리가 이 익숙하지만 낯선 영어공부의 세계로, 외국어의 세계로, 언어의 세계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위해 내 삶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자고 말하지요. 찬찬히 꾸준하게 영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오늘 중쇄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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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영어공부 #중판출래 이 책은 영어공부 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어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학습법을 알려 준다거나 영어를 원어민처럼 술술 하게 되는 법을 안내하는 책이 아니에요. 이 책은 영어공부 책입니다.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영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언어 중 하나인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지요. . . . 책 표지에 '영어공부'라고 쓰여 있는데, 영어공부 책이 아니라고 했다고 영어공부 책이라고 하니 좀 헷갈리시죠? 이 표지 시안을 처음 봤을 때,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this is not a pipe'가 떠올랐습니다.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텍스트를 본 이들은 자꾸만 질문을 던지게 되죠.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이건 파이프 그림이지 진짜 파이프는 아니지 않은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은 파이프라고 할 수 없는가? ……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도록 만든 작품이지요. . . 『단단한 영어공부』도 자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초중고교에서 장장 12년간 배운 영어는 나를 성장시켰나? 영어공부 생각만 하면 답답하고 두려운데 언어 공부란 이런 걸까? 영어를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응용언어학자인 저자는 말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우리가 이 익숙하지만 낯선 영어공부의 세계로, 외국어의 세계로, 언어의 세계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위해 내 삶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자고 말하지요. 찬찬히 꾸준하게 영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오늘 중쇄 찍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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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스케치

Posted by on Jun 16,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강사 지원용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영어로만 문서를 작성하다가 보니 한국어로 쓰는 소개는 처음이다. 학부 졸업반의 마음이 소환되면서 마음이 간질거린다. 퇴임을 미리미리 계획할 때가 되어간다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에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기말, 채점, 헤어짐, 지원, 방학 계획, 새로운 보금자리를 알아보는 일까지, 많은 것들이 교차하는 6월이다. 이 또한 지나가고 기억되고 잊혀질 것이다.

관계에 대한 유치하고 투박하기 짝이 없는 생각 한 조각

Posted by on Jun 10,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쌓여
물흐르듯 관계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고 (인간–>관계)

관계를 쌓고자 하는 욕심에서 시작하여
하나하나의 인간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다. (관계–>인간)

갈수록 후자의 모습이 위험하고 혐오스러워 보인다.

관계가 목표인 관계는
‘관계를 리드하는’ 자신으로 한없이 빠져들기에
천박함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목표라고 해서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람을 우선한다 해서
만족스런 관계를 형성한다는 보장은 없다.
더 아프고 더 슬프고 더 억울할 수도 있다.

단 한 가지,
사람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지킬 뿐이다.
그저 터질듯한 심장의 박동을 느낄 뿐이다.

자기계발서의 행복한 결말은 없다.

그런 결말 따위
서늘한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사람들이 좋다.

구원자들보다
상처입은 영혼이
훨씬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리터러시 연구의 자기성찰

1. 독서를 할 때 텍스트 자체의 독해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재독을 할 때에는 전자에 할당되는 인지적 자원이 줄면서 경험의 허락되는 자원이 확연히 커진다. 그런면에서 재차 읽는 행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정을 약속한다.

2. 그런 면에서 여행이건 영화감상이건 독서건 ‘다시’는 질적으로 다른 반복이다.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 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다시 읽지 않았다면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읽기의 이런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3. 월터 옹의 <구술문자와 문자문화>는 두 문화의 차이를 언어시스템의 차이가 아닌 정신성(mentality)의 차이로 설명한다. (문예출판사의 번역본은 ‘정신구조’라는 용어 사용) 두 문화의 차이에 대한 논의도 놀랍지만 책의 모두에 강조하는 바는 리터러시 연구자들에게 강력한 ‘메타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구술문자와 문자문화에 대한 차이는 언제나 문자문화에 익숙한 이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는 ‘둘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사실 한쪽의 멘탈리티를 장착하고 둘을 볼 수밖에 없다. 공평무사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연구자의 시선만이 있다. 세계는 단숨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한땀한땀 직조된다. 과학사회학이 과학에 대해 던지는 경고를 월터 옹은 리터러시 연구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셈이다.

4.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그의 자전적 회고 <문맹>에서 자신의 고향 헝가라를 떠나 스위스로 이주한 자신이 처했던 언어적 상황을 그린다. 새로운 땅에서 프랑스어에 대해 ‘문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 아름다운 나라가 “‘통합’이나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함”을 말한다. (91쪽)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험과 같이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언어 앞에서 ‘문맹’이 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경계 안에서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한 리터러시를 상정한다. 한국어 리터러시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5.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이 옳지 않은 견해임을 알 수 있다. 리터러시는 언어라는 기준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경험과 지식이라는 기준으로 구획되기도 한다. 특정 직업군마다, ‘덕질’의 영역마다 리터러시의 너비와 깊이가 달라진다. 성장배경이나 정치적인 견해차가 뚜렷한 경우에도 리터러시의 색깔이 달라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리터러시의 복수성과 소통(불)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나의 리터러시가 아니라면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소통의 지평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공론장에서 ‘문해력’ 타령은 타당한 일인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문해력 때문’이라는 말은 폐기 대상이 아닌가? 어떤 세계에 다다를 때 이전의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문맹’이 될 수밖에 없다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말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6. 이 사회의 공론장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사막 메타포를 적용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 사막이 있다. 그 사막에 가기 싫다.’

덧. ‘문맹’이라는 용어를 쓸 때마다 다른 용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고유명사를 차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그대로 썼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Jun 9,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학기가 저물고 있다. 이번 학기 학생들의 반응을 도통 알 수 없어 힘들었던 과목이 코퍼스 언어학 개론이었는데 기말에 한 학생이 코퍼스로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해주어서 마음이 조금 풀렸다.

2. 방학에 뭐할지 마음을 먹었다. 늘 그렇듯 휴식과 읽기쓰기, 그리고 강의다. 별일이 없으면 7월 말에 진주문고에서 독자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주변에 계신 분들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3. 다음 학기 대학 안에서 뭐하게 될지 정해진 게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살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이제껏 걸어온 길이 사라진다 해도 계속 걸을 수 있고 걸어야만 한다.

4.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주제로 몇몇 교원학습 공동체 선생님들과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도 선생님들과 많이 만나 궁리하며 고통과 희망을 나누고 싶다. 호흡이 긴 공부모임도 괜찮을 것 같고.

5. <단단한 영어공부>의 판매가 추락(?)하고 있는 가운데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어머니와 나> 때도 그랬지만 출판된 책이 잊히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내 책보다 훨씬 더 공을 들인 책들도 빛의 속도로 기억에서 사라지는 걸 보면 오래 살아남고 있는 걸까.

6. 돌아보니 수년 간 나의 현장은 강의실 안에 머물렀다. 좀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좀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 좋아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뇌피셜’이 늘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 아닌가 싶다.

7. 공들여 쓴 글은 거절당하고 휘리릭 써내려간 글은 게재가 되는 걸 보면 역시 세상은 운이다. (먼산)

8. 리터러시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복잡한 문제다. 리터러시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정연하게 풀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텍스트 중심 리터러시 비판

1. 리터러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존재하지만 그 기본이 잘 읽고 잘 쓰는 데 있다는 점을 부인하긴 힘들다. 문해력의 중심에는 텍스트 즉, 문文이 있는 것이다.

2. 텍스트가 리터러시를 정의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리터러시는 필연적으로 텍스트 밖의 세계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잘 읽고 잘 쓰는 것은 텍스트와 관련된 능력이지만 “a literate person”은 종종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3. 이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안읽은 것까지 읽은 척하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그럴듯하게 써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텍스트를 얼기설기 덧대곤 하는 것이다.

4.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 이해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리터러시는 개인에 내재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행위(social practice)이기 때문이다. 리터러시가 골방에서 조금씩 자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힘과 의미는 언제나 사회문화적, 역사적, 관계적 맥락 하에서 실현된다.

5. 따라서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는 두 가지 면을 고려해 재정의되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다.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은 모름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며, 모르는 것보다 아는척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다. 두번째는 사회문화적 컨텍스트와 대화상대에 대한 민감성이다.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은 안다고 다 말하지 않는다. 도구는 휘두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6.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아는 것을 모른척 하는 것. 무지의 인정과 지의 억제. 이 두 가지는 텍스트에 대한 지식을 넘어 삶의 양태에 관한 문제다.

7.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컨텍스트에 대해 겸손해지는 사람들이 있고, 텍스트를 읽을 수록 자신이 커지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텍스트를 먹고 자란 자신을 바라보지만 전자는 텍스트를 통해 커진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수많은 이들이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안 읽고도 읽은 척 할 수 있는’이라는 표현은 징후적이다.

8. 해즐리트의 다음 말은 리터러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정직한 사람은 모욕을 주는 결과가 되더라도 진실을 말하며, 잘난 체하는 사람은 모욕을 주기 위해서 진실을 말한다.” — W. 해즐리트

역경이 눈에 보여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진실을 알지만 누군가를 위해 침묵할 수 있는 지혜.

9. 리터러시의 발달은 자기성찰과 컨텍스트에 대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텍스트만 비대해진 사람은 맥락 없이 말을 휘두른다. 기사의 내용에 관계 없이 언제나 같은 댓글을 다는 사람들처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무지의 신

“대한민국에 영어교육 전문가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답글을 우연히 보았다. “내 주변에 전문가가 없다”를 습관적으로 ‘대한민국에 전문가가 없다”로 바꿔쓰는 분들이 있다. 전문가 자리에 오만가지를 넣어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지닌 분들이다.

언젠가 소위 ‘글로벌 대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만트라처럼 여기는 생각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인재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 담장 바깥에 더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HR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무림고수’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지평 너머에는 반드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 세계는 당장 볼 수 없기에 일종의 ‘신비’로 존재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좁디좁은 나의 세계를 우주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일이자 자신을 신의 자리에 앉히는 행위다. 그렇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무지의 신’이 탄생한다.

나 자신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새겨야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명징한 직조

평론가의 용어에 대해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개인적인 의견을 표할 수도 있겠으나 두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1) 기사 중에서 CTRL+C와 CTRL+V로 뭉툭하게 급조해낸 신랄할 것도 처연할 것도 없는 소셜미디어 중계는 좀 줄었으면 좋겠고, (2) 모르면 무조건 욕하기 보다 단어를 찾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대개의 단어는 찾는 즉시 꽤 명징하게 직조된 정의가 튀어나오니 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9/06/382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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