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세계, 그리고 실천

Posted by on Sep 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책읽기는 세계만큼이나 커다란 리허설 무대를 선사한다. (Reading gives us a rehearsal stage as big as the world.)”

예전에 봤던 “Why reading matters” (BBC) 의 한 구절이다 뜻을 새겨 풀어 써보면 이렇다.

1. 리허설은 실제 공연과 아주 많이 닮았다. 몰입해서 하면 실제 공연과 다를 바 없다.

2. 하지만 실제 공연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관객들과 함께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삶에 가 닿지는 않는다. 책읽기의 순간만큼은 개인적 경험이 지배한다.

3. 그렇다고 리허설 없이 실제 공연을 하려 드는 것도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다.

4. 그렇기에 제대로 된 무대에서 리허설을 해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모든 게 갖춰진 리허설 장소 싸게 대여해 드려요!” 라는 호객꾼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는 사기를 조심해야 한다. (각자의 경험에서 이런 호객꾼이 누굴 가리키는지 떠올려 보시기를.)

셰익스피어가 말한 세계라는 공연장에 나가기 위한 리허설 장소로서의 독서.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지만 삶과 실천의 준비 단계로서의 책읽기. 생각해 볼만한 메타포다.

이 시대의 책읽기는 어떤 세계로, 어떤 실천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가?

#삶을위한리터러시

합정-망원시대 막을 내리다

Posted by on Sep 2,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개강일,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 이사 준비를 끝냈다. 거실에는 책과 박스들이 즐비하다. 이사하고 짐풀고 정리하고 자리를 잡는 데까지 또 몇 주가 걸리겠지만 어쨌건 고비는 넘긴 듯하다. 지금 이 자리에 내일은 다른 이가 앉아 있겠지. 휙 하고 떠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세계는 평온하다.

돌아와 계획에 없던 결혼을 했고 합정동과 망원동에서 5년 여를 보냈다. 꽤 많은 시간강의를 했고, 5년 여 어머니의 말을 경청하고 기록했으며, 수년간의 영어교육/응용언어학 공부를 풀어낸 작은 책을 냈다. 논문쓰기 강의도 이 동네에서 기획되고 실행되었다. 종종 친구들과 학생들이 찾아와 주었고 길고양이들과 꽤나 가깝게 지냈다. 아쉬움은 남지만 내겐 과분한 시절이었다.

동네는 조금 번잡해졌고 상가가 주택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골목이 살아 있고 이것저것 볼 것도 많지만 소음은 언제나 큰 고민이었다. 세입자 신세, 선택할 여지는 적었지만 떠나기로 결정한 가장 큰 요인은 집값과 소음이었다. 그래도 떠날 때가 되니 시장의 단골 떡볶이집과 얼마 전부터 정을 붙인 구석 식당과 가끔 술떡을 사다 먹던 동네 떡집이 그리워질 것 같다. 가끔 들르던 주전부리 가게와 야쿠르트 아줌마도 보고 싶겠지. 그러고 보니 다 먹는 거구나.

가끔 옥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한 시간 넘게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지는 해는 가장 찬란한 순간을 포착하고 밤에 자리를 내준다. 이내 망각의 어둠으로 사라질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밤.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안녕, 망원동.
그간 고맙고 따뜻했어.
새로운 사람들도 잘 부탁해.

벨 훅스, 그리고 이론

Posted by on Aug 31,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이런 방식으로 이론을 이야기해 준 이는 없었다. 이론은 세계관이고 분석의 도구이며 변화의 방향이라고 말해주는 이는 있었지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고통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삶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그리하여 아픔을 떠나보내기 위해 이론을 찾아갔다는 말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이젠 그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론은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개념과 명제의 집합이지만 누군가에겐 고통을 줄이고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갈 힘을 주는 친구이기도 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하여 나와 세계는 어떻게 만나 변화하고 있는지.

“I came to theory because I was hurting—the pain within me was so intense that I could not go on living. I came to theory desperate, wanting to comprehend—to grasp what was happening around and within me. Most importantly, I wanted to make the hurt go away. I saw in theory then a location for healing.” – bell hooks

 

논문 나눔 잡감

어제 밤 논문을 공유하고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솔직히 두어 분 정도 관심이 있으면 많겠다 생각했거든요. 응용언어학에도 봄/붐이 오나요? ㅎㅎㅎ

잠깐 자의식 과잉을 과감히 발휘하자면, 흔히 정량적으로 평가되는 기준에서 저는 C급 연구자 쯤 될겁니다. 그간 논문 생산에 그렇게 열을 내지도 않았고(못했고), 학계에서 쏟아지는 논문들이 모두 가치있다고 생각되지도 않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꾸준히 뭔가 쓰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건 저뿐 아니라 모든 연구자들이 그렇겠죠.) 이런 상황에서 대중서를 제외한 글을 공유하는 일은 계속 미뤄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어로 쓴 글을 내보이는 것 또한 꽤나 멋적은 일이었습니다. 강의에서는 ‘비원어민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글을 쓰고 나누는 데 있어서는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관습’을 따랐던 것이죠. (‘뭐 영어로 쓴 걸 읽어보려고 그래?’)

그런데 어느 순간 제 자신이 쓴 글을 내가 업신여기면 누가 읽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좌절과 고독 가운데 태어나 리뷰어의 눈에 스쳤다가 사라지는 논문의 일생이 좀 짠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앞으로는 부족한 글이라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대단할 것 없는 글이지만 거기에서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는 분이 계실 것이라 믿고요. 아주 작은 지식과 깨달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그걸로 큰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 밤에 글을 나누었는데 한 친구가 벌써 다 읽고 답장을 보내주었네요. 말미에 써놓은 이 한 문장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Your writing and thinking are gifts–thank you for sharing them.”

누군가는 A/B/C 등급으로 저를 평가할지 모르지만 또 누군가는 저의 글에 온마음으로 반응해 줍니다. 그리고 그 반응에는 어떤 등급도 매길 수가 없지요.

저도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동료 연구자들에게 작은 용기와 희망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어쩌면 ‘A급’이 되기 위해서는 등급없는 응원과 위로가 필요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영어로논문쓰기
#삶을위한리터러시

응용언어학, 어디로 가야 할까

1. 철학이나 정치경제 세미나들이 많이 보인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물 중심의 강독이 두드러진다.

2. 가끔 이런 세미나의 ‘아우라’에 압도당하곤 한다. 철학사를 섭렵하고, 푸코와 들뢰즈를 읽고, 아감벤과 바디우를 읽어내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런 세미나에 가면 분명 나의 부족함만 확인하고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다.

3. 이런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요즘은 나와 동료들의 학술작업에 대한 성찰에 무게를 두게 된다. 왜 응용언어학자들은 이런 세미나를 기획하고 실행해오지 못했던가? 왜 스스로를 ‘교수법 전문가’로만 자리매김했을까? 왜 이론적 깊이와 풍성함을 그토록 쉽게 포기(당)해 온걸까?

4. 예를 들어 보자. Stephen Krashen 비판적으로 돌아보기, James Lantolf 깊이 읽기, New London Group과 Douglas Fir Group의 논의로 본 한국의 언어교육, Claire Kramsch 저작 톺아보기, Merill Swain의 여정 따라가기, Dell Hymes의 저작으로 보는 Communicative Language Teaching, Bonny Norton의 관점에서 본 정체성 담론, Social Turn과 Emotional Turn으로 본 응용언어학 논쟁사, Top papers in the history of applied linguistics 등의 세미나를 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5. 이런 아이디어들이 빛을 보지 못한 건 크게 세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째, 한국의 대학 체제에서 응용언어학 전공자들은 (영어, 독어, 불어 등의) 외국어교육과에서 강의를 맡게 된다. 사범대학에 속해 있는 이들 과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교사양성이다. 따라서 교과과정에서 위와 같은 식의 강의를 개설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둘째, 전공자들의 탈숙련화다. 개별 외국어교육이나 교사양성을 기본으로 하는 교과과정에 투입된 전공자들은 얕고 넓은 지식을 소화하여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게 된다. 이에 따라서 박사과정 동안 연구했던 주제를 더 깊게 발전시킬 기회를 잃게 된다. 쉽게 말해 먹고 사느라 배운 걸 까먹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응용언어학 전공자들이 모델로 삼을만한 학문적 기반 자체가 매우 취약하다. 함께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 낸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6. 이런 시도가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공부하고 실천하는 게 있어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평을 넓히고 지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라도 기초이론에 대한 관심은 필수다.

7. 불만만 늘어놓았지 당장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게 다 곧 개강인 탓이다. 탓할수록 다가오는 개강의 검은 손…

#응용언어학
#학술문화

한국어 글쓰기, 영어 글쓰기

1. 한국어 글쓰기는 어떻게 가르치는 걸까. 가끔 궁금하다. 영어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과 폭과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확실한데 어떻게 가르치는 게 좋을지는 공부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2.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데 영어 글쓰기를 가르쳐 왔다. 이게 참 많은 고민과 생각을 자아내는 상황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의 영어학습과정을 따라왔으니 여느 네이티브에 비해 한국인의 고충을 잘 안다. 그렇기에 교수자로서 강점이 있다. 하지만 ‘글 잘쓰는 사람’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놓고 보면 나의 글의 부족함은 확연하다. 쓰면 쓸수록 글이란 게 참. (말잇못)

3. 제일 좋은 시나리오는 이런 거다. 한국어와 영어 글쓰기에 모두 능숙하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어교육을 전공한 사람이 영어글쓰기를 가르치는 것. 하지만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정말 정말 드물다.

4. 그 와중에 합리화를 하고 살아왔다. ‘이쪽 저쪽 다 애매하지만 또 애매하게나마 써낼 수 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니냐’는 식이다. 일종의 자기기만일지도 모르겠다. 만족스럽지 않지만 벗어날 수 없는 덫과 같은 상황. 언젠가부터 이걸 받아들였으나 결코 평안하지는 않다. 체념은 하지만 달관은 못하는 꼴이다.

5. 요즘 부쩍 ‘완벽한 언어가 아니어도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말은 소통의 도구이지만 소통의 주체는 사람이다. 이해하려 드는 사람들이 만나면 조금 못난 글도 마음을 밝히고 영혼을 치유한다.

6. 완벽한 글을 쓰려하기 보다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어떤 언어로 쓰고 나누어도 좋겠다. 지금 계획하고 있는 선생님들과의 모임에서 제안해 볼까 싶다.

7. 그러고 보니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고 난 다음 가장 많은 만남과 대화가 기다리고 있는 학기다. 고마운 이들이 참 많다. 너무 속썩이진 말아야지, 다짐한다.

우리 아닌 ‘우리’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있고
내가 그곳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갈 수 없고
당신은 이곳에 올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불리는 우리는
결코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질문의 답은 질문이다

1.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하지만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이 전문가의 몫이다. (함께 작업하시는 분의 말씀에 동의하며 빌려 쓴 문장. 나는 2012년에 “전문가의 사회적 책임 중 하나는 어려운 것은 어렵다, 복잡한 것은 복잡하다, 안되는 것은 별 수를 써도 안된다 말해주는 일이다.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법 제시 능력과 “쉽다, 간단하다, 하면 된다”는 주장을 합리화하는 능력을 혼동하는 데서 수많은 문제가 생겨난다.”라고 썼다.)

2. 다시 말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단순한 것을 더욱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전문가의 몫이 아니다.

3. ‘시원하게 내지르는’ 전문가는 전문가가 아니거나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윤리를 저버리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4. 사이다처럼 시원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면 ‘전문가 맞나’라고 질문하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반대로 ‘전문가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단순, 명쾌하게 말하는 거야? 정말 이 사태/사건/개념이 그렇게 간단해? 세상이 그렇게 우스워?’라고 물어야 한다.

5. 모든 것에 답할 전문가는 없다. 사회문화적, 교육적 이슈라면 더더욱 그렇다. 최종적인 판단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몫이다. 공부법도, 교수법도 마찬가지다.

6.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침범할 수 없는 의사결정의 영역이 있다. 거기는 깊고 어둡고 외롭다. 그래서 때로는 숭고하고 호젓하며 따스하다.

7. 판단을 모조리 외주화하는 방식으로 ‘멘토산업’이 부흥한다. 앞장서 갈 사람을 찾기 보다는 함께 걷는 사람을 찾는 것이 낫다. 함께 걷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해 보는 편이 좋다.

8. ‘영어,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라는 질문의 대답은 놀랍게도 ‘나는 어떤 주체로 성장해야 하나’라는 질문이다. 질문의 답은 질문이고, 그것도 엉뚱한 질문이다.

9. 질문에 답이 있다는 전제를 버리고, 질문에 질문으로 응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끝없이 배우는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삶을위한영어공부

존경스러운 짝의 망각력

꽤 큰 팀의 팀장으로 오래 일한 짝은 신입사원 특히 자기가 맡고 있는 팀원 선발과정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곤 했다. 서류 검토에서 인터뷰어 역할까지 일할 사람을 뽑는 데 직접 관여해온 것이다.

재작년이었나, 학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코 짝에게 “그래서 지난 번에 뽑은 사람은 학교랑 전공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모른다”였다. 나는 대뜸 “자기가 뽑았잖아요. 몇달 되지도 않았는데.”라고 받았고, 짝은 다시 태연스럽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짝은 자신이 뽑은 사람들의 출신학교와 전공을 거의 다 모른다고 했다. 면접 볼 때 잠깐 살펴보는 것 이외에 다시 볼 일도 없고 업무에도 중요하지 않은데 그런 것들을 왜 기억하고 있느냐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정보를 머리속에 담아두는 걸 당연시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학벌사회의 위계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나의 뇌 하나도 잘 통제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한 것 자체부터 글러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되어서는 안되는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구조는 강력하다.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우리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구조의 마음대로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 어렵지만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아주 미약하게나마 더욱 자유로울 수 있다. 때로는 망각이 그러한 자유로 가는 길이다.

사람들을 범주로 묶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하지만 갈수록 깨닫는 것은 누군가를 범주에 묶을 때 자신 또한 그 범주에 갇혀버린다는 사실이다. 두 인간이 아니라 특정 집합의 원소로 만날 때 이 세계는 더욱 파편화, 위계화된다. 뜬금없지만 어쩌면 사랑은 모든 범주를 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한참 멀었다.

해일 속에서 성장하기

“Thinking is difficult, that’s why most people judge” (생각은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판단을 한다.)

칼 융이 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 그가 한 말은 조금 달랐다고 한다. (실제로 한 말은 ‘Thinking is difficult. Therefore, let the herd pronounce judgement.’라고.) 여기에서는 인용구의 정확성 여부를 따지려는 건 아니고 위의 말 자체에 대한 생각을 남겨두려 한다.

얼마 전 “리터러시 교육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라는 글을 썼다. 여기에서 본 논의에 핵심이 되는 구절만 다시 한번 반복해 본다.

“여기서 사회적 소통의 인프라로서의 리터러시 교육이 어려운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나와 다른 심성모델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생각이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로버트 퍼트넘이 <우리 아이들>에서 지적했듯 사회적 섞임(social mixing)이 사라진 시대에 사회는 점점 양분화되고 또 하위 집단 사이의 단절은 강화된다.”

계층적, 이념적 단절, 세대간의 갈등이 현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류사에서 이런 종류의 단절은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가 고도화되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시대에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단절이 가능하게 되었다. 바로 “내가 원하는 것들만 볼 수 있는” 권한이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원하는 컨텍스트만을 골라 자신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친구가 자신의 ‘소셜 미디어 실험’의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에게는 본 계정이 있었는데, 자신이 업무상 알게 된 지인의 페이스북 인연을 따라 부계정을 운영해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두 세계는 접점이 없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철저히 단절된 두 세계를 보며 새삼 놀랐다고 했다.

이렇게 분리된 두 세계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서로 다른 뉴스를 공유하고, 때로 정반대의 논조로 글을 쓴다. ‘저쪽 사람들’을 비웃는 포스트에 좋아요가 쇄도한다. 자신이 가진 견해의 정당성은 논리와 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기 보다는 ‘좋아요’ 숫자에 의해 ‘증명’된다.

물론 세상 사람들을 단 두 개의 세계에 반듯하게 구분해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파나 계층을 불문하고 널리 사람을 사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오래 생각하고, 증거를 모으고, 더 깊이 파고들고 나서야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고, 그들의 사려깊음에 감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상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데 급급하다. 텍스트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무기가 된다. “텍스트는 어떻게 타자의 삶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는가?”라는 질문에 앞서 “이 텍스트를 어떻게 활용하면 내 싸움에 유리한가?”라는 질문이 공론장을 지배한다.

함께 작업하는 선생님의 언어를 빌리자면 많은 경우 자신의 텍스트는 방어(defend)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 말을 확장하면 타인의 텍스트는 공격(attack)의 대상이 된다. Defense/attack이 공론장의 텍스트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활동이 되어버린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텍스트는 해석(interpret)과 이해(understand)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타인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며 이는 다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이것을 무너뜨릴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전에 “여기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정보/지식/지혜는 무엇인가?”나 “이 글은 나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한가하게 조개 줍는 소리나 하고 있느냐’고 질책하실 분들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가진 가장 큰 허점은 우리 삶이 언제나 해일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해일을 핑계로 일상을 내던지면 우리는 계속 생각하지 않고 판단만 해대게 될 것이다. 텍스트는 자아와 피아, 우리편과 적을 가르는 도구로 남을 것이다. ‘판단의 전쟁’은 점점 속도를 높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삼켜버릴 것이다.

계속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해일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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