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들 (답없는)

Posted by on May 22,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1. 언론보도는 ‘팩트’와 ‘입장’을 넘어 ‘대화’를 지향할 수 없는가?

2. 진실이 개인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이’에, 사이의 지층에 존재한다면, 그 ‘사이’는 어떻게 보도되어야 하는가?

3. 언론의 자기성찰성(self-reflexivity)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단지 구호의 차원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4. ‘당사자주의’라는 말에 붙은 ‘~주의’는 어떤 의미인가? ‘~주의’라는 말은 복잡다단한 주체와 사건, 대상과 관계들을 칼로 물베듯 잘라내어 세계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단순화하지는 않는가?

5. ‘A는 A고 B는 B다’라는 말은 얼마나 손쉬우며 때로 기만적인가. 뿌리는 뿌리고, 줄기는 줄기고, 가지는 가지고, 잎은 잎이라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 나무는 무엇이란 말인가.

중재당하는 언론은 많지만 중재하는 언론은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쓰린 요즘. 우매한 나는 ‘언론’의 정의를 곱씹어 본다.

언론 [言論]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하여 뉴스나 사실을 알리거나 의견과 논의를 전개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 (다음사전)

‘어중간한 재능’ 단평

Posted by on May 20, 2020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 No Comments

트위터의 “어중간한 재능” 논쟁(?)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게도 ‘타고난 능력은 넘사벽’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뼛속까지 체화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비판하는 다양한 의견을 보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재능 VS 노력 VS 좀더 노력’ 구도의 전형적인 능력주의 담론의 압승인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모두 각자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사회도 좋지만, ‘타고난 재능’이라는 담론이 창궐하지 않는 사회가 더 낫다.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재능이 아닌 사회의 역량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각자의 재능이 발휘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비마이너

Posted by on May 14,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오늘 받은 재난지원금을 <비마이너>에 보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들 하지만 오늘은 과감히 다른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어찌 보면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많은 분들에게 <비마이너>가 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글을 씁니다.

저의 비마이너에 대한 짧은 생각을 아래 옮겨놓습니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언론 지형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한경한(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을 보는 것으로 시각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이 사회에 대해 가장 많은 통찰력을 주는 것은 〈비마이너〉같은 매체가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비장애인으로서 보는 세계에 대해 머리를 쾅 치는 기사들이 종종 올라와요. 그럴 때 가슴이 떨리고, 제 좁았던 시야를 돌아보게 되죠. 장애인과 장애학의 관점에서 본 세계는 내가 지금까지 봤던 세계와 완전히 다르구나, 내가 뭘 몰랐구나 하는 걸 드러내줘요. 리터러시의 발달에서 기존의 지식을 충실하게 잘 섭렵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비마이너〉와 같이 그동안의 리터러시의 주류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관점에 끊임없이 열려 있도록 만드는 매체도 반드시 필요하죠. 그런 면에서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의 시각,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의 이해, 이와 관련된 실천이 리터러시 교육이 나아가야 할 주요한 방향 중 하나라고 봅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중에서)

제가 너무나 좁은 시야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잘 압니다. 교육을 한다 말하고 문해와 리터러시에 대해 떠들지만 실상은 먹고사니즘의 핑계 속에서 이제껏 쌓은 관계 안에 안주하며 세상을 볼 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세상’일 지는 모르지만 온전한 세계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어리석고 좁은 세상을 깨뜨려 주는 분들이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분들로 인해 제 어둔 마음이 밝아지고 세계는 변화합니다. 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흔들리더라도 함께 걸어갑니다.

아래 <비마이너>의 주소를 남깁니다. 비마이너를 읽고, 느끼고, 궁리하고, 알려주세요. 때로는 분노하고 연대해 주세요. “C메이저”로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세상을 보게 해주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얼굴을 오롯이 마주하게 하는 “B마이너”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장애인의 주홍글씨, 비마이너
https://beminor.com/

Listen to Me

1.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는 오로지 텍스트에만 천착하는 이해를 경계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계와 맥락을 함께 봐야 하는데 우리는 텍스트만을 바라보기 일쑤죠. 그것도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관계도 맥락도 망각하고 상대의 텍스트를 소화하기 보다 자신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읽기와 듣기가 적잖습니다.

2. 처음 “Listen to me.”라는 표현을 배울 때 ‘Listen이 자동사이니 to가 붙어야 한다. 그래서 ‘내 말을 들어봐’는 ‘Listen to me.’가 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말에서는 보통 ‘내 말’인데 영어에서는 ‘me’라는 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한국어의 목적어는 ‘말’인데 영어의 목적어는 인칭대명사더라고요.

3. 여전히 사람들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듣는 저를 발견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듣지 못하고 듣고 싶은 내용만을 듣는 것이죠. “Listen to you.”해야 하는데 “네 말만 듣게’ 되고,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Listen to myself.’하게 된달까요.

4. 단지 상대의 말이 아니라 상대를 들을 수 있다면, 그런 리터러시 교육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험은 늘 “다음을 듣고 질문에 답하시오”이지만, 삶에서는 “상대의 삶을 보듬고 질문을 던지시오”가 되길 바랍니다.

5. 이것은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쉽지 않네요. 하지만 다시 새기면서 어지러운 마음을 비워냅니다.

이것은 언어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입니다. ^^;;

음모론의 발달 단계 – 한 가지 예

Posted by on May 6,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2. 열받는다. 가까운 이들에게 열받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3. 다같이 열받는다.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성토한다. 4. 여기엔 분명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 왜냐고? 이렇게 여러 사람이 열받았잖아!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는 사람들까지 음모론에 넘어가는 걸 보면 (1)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2) 부족주의적 사고가 지식과 경험 따위는 우습게 박살내거나 (3) 튀고 싶은 욕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욕망을 채운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팬덤에 합류한 이들은 비판자들을 ‘불만충’ 취급한다. 자기가 믿었던 것과 반대의 진실이 드러나도 자기는 훌쩍 ‘커’ 있다. 이 정도면 수지맞는 장사 아닌가?

사실이 의견보다 중요함을 넘어 사실이 욕망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겨야 할 시대 아닌가 싶다.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 만큼 부족을 규합해 우월함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져도 괜찮다’, ‘소수여도 괜찮다’, ‘나 자신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감각 아닐까. 논리와 과학이 필요한 만큼 무너지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성역없는 수사’ 등 단상

Posted by on May 5, 2020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성역없는 수사를 약속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이 사회에 여전히 성역이 존재함을 말해준다. “수사하겠다”가 “성역없이 수사하겠다”와 같은 뜻이 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그러고 보면 과한 결심이 필요치 않은 담백한 사회가 좀더 잘 굴러가는 사회일지 모르겠다.

2. “성역”은 성스러운 곳이기에 수사기관의 영향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수사의 관점에서 보면 ‘성역’은 성스러움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냥 범죄자들의 활동영역이다. “성역”이 남아있다면 성스러운 곳이 남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묵인한다는 뜻이 된다.

3. 이제 국민의 세금은 왠만하면 “혈세”라고 표현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 힘들게 노동하는 유리지갑들이 내는 세금과 부동산과 임대수익을 주수입원으로 하는 이들이 내는 세금이 똑같은 혈세인가. 잘 모르겠다.

4. 얼마간 ‘확찐자’ 말장난이 유행했다. 아무런 악의 없는 농담이었고 그 말을 쓰는 분들에 대해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확진자로서 그런 글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면 마음이 개운하진 않았다.

5.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 언론을 통해 사과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사과드린다”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진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이때는 ‘고개숙여 사과한다’라는 말이 진심을 담은 말이 아니라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6. 새로운 책을 <유튭책집>이나 <유책집>으로 부르는 독자들을 여럿 보았다. 경제적인 명칭이긴 하나 입에 붙지는 않는다. 특히 후자의 줄임말은 왠지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7. ‘번번히 발목을 잡는다’, ‘발목이 잡혔다’는 표현을 볼 때마다 실제로 발목 잡혀본 경험이 있는 인구 비율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진다. 코미디에서 이걸 실사로 구현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먼산)

8. ‘넌 이제 아웃(out)이야’라고 말하며 점퍼를 옷장 안(in)에 던져넣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배움의 시공간, 두서없는 단상들

온라인 개학 시기, 교수학습의 시공간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1. 온라인 개학이 거둔 일정한 성공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온라인 교육’이 가지는 내재적 균열은 ‘몸과 공간의 변화’라는 급진적 변수를 무시하고 ‘내용과 시간’을 잡아두려는 데 있지 않았을까. 배움에 있어 시공간은 분리 가능한가? 우리 교육은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2. 왜 적잖은 사람들이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가 안된다고 말하는가? 그저 의지의 부족인가? 배움의 공간이 달라지고 그 안에 놓여지는 몸이 달라지는데 ‘O교시’로 대표되는 시간의 구획이, 그 안에서 다뤄지는 내용이 그대로인 것은 자연스러운가?

3.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건만 여전히 교육에서 시공간이 따로 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옳은 일일까? 학교에서의 시간은 집에서의 시간과 같이 흐르는가? 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과 화면 속 사람들을 보거나 콘텐츠를 시청하는 시간은 동일한 밀도와 점성을 가지고 있는가?

4. 우리의 지각, 주의, 집중, 지속, 정서, 태도, 흥미, 몸짓 등은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어떻게 엮이는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의 몸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으로 매개되고(socially mediated), 공동체에 의해 규율잡힌(community-regulated) 학습은 컴퓨터에 의해 매개되는 학습과 어떻게 다른가?

5.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학교의 “O교시” 체제는 그 자체로 개인의 차이를 무시한다. 개인별로 이해와 배움, 집중과 지속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고의로 망각’한다. 공교육체제의 특성상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양과 수준 이상의 지식을 전수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필요악’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6. 추후 온라인 학습이 또 다시 ‘디폴트’가 되는 시기가 온다면 우리는 여전히 O교시 체제를 고집해야 하는가? 혹 ‘급진적 개인화’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공간의 변화, 함께 존재함(co-presence)의 상실은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변화를 수반한다. 그렇게 변화한 시공간에 맞는 새로운 배움을 상상해야 할 시기일지 모른다.

7. 몇 주 만에 온라인 개학을 위한 IT 시스템을 안정화시켰다는 소식, 그에 대한 일부 언론의 상찬을 보며 우리사회가 여전히 기술중심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IT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그것은 ‘온라인 개학’의 기술적 선결과제일 뿐 완성은 아니다.

8. 중요한 것은 ‘온라인/디지털’이라는 플랫폼에서 ‘개학’을 했다는 것이다. 학교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IT시스템의 완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교사들의 노고, 나아가 학부모와 학습자들의 협력이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조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온.라.인. 개학’이 아니라 ‘온라인 개.학.’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

9.교실에서 행해지던 짝활동 및 모둠활동이 힘들어진다는 것은 상호작용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부 온라인 수업이 택하고 있는 ‘시청완료=학습완료’의 공식은 바람직한가? 시청의 완료가 그 시간 동안의 인지적 정서적 몰입(engagement)을 담보하는가?

10. 오프라인 개학이 다가오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전의 세계’에 적응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 시간의 고군분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잊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새로운 실천의 싹이 트지 않을까?

‘힘내요’ 버튼 단상

Posted by on May 1,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코로나-19 사태에서 마스크가 오프라인의 초강력 재화로 떠올랐다면, 적어도 오늘 페북 최고의 재화는 ‘힘내요’ 버튼이군요. 힘내요를 지닌 이는 힘이 나고 그렇지 못한 이는 박탈감을 느끼는 모순. ‘힘내요’ 버튼이 없으면 상대에게 힘내라 말할 수도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비극. 부익부빈익빈은 오프 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렇게 반응이 뜨거운 걸 보니 페북이 ‘커스텀 버튼’ 장사를 한다면 큰 돈을 벌지도 모르겠어요. ‘아재개그가 싫어요’, ‘휴, 이걸 진짜 다 읽었어요’, ‘한번 더 이러면 블락이예요’, ‘평소 글은 진짜 별로인데 이 글은 좋네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우쭈쭈’, ‘투쟁투쟁투쟁’ 버튼 같은 버튼을 디자인해서 파는 거예요. 근데 아무리 돈이 된다고 해도 한 사람이 좋아요 백 개 올려주고 하는 식으로는 안했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생태계’에서 최소한의 평등은 남아있을 수 있도록 말이죠. 여러분 힘내세요. 저도 힘낼게요. 힘내라 버튼 따위. 버튼은 그저 버튼일 뿐이예요. (미괄식)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금배지 언박싱’에 관하여

말이나 행위를 가져오는 것은 그저 ‘선택의 자유’일까

1. ‘언박싱’ 담론이 의례의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품의 영역, 자신의 구매를 보여주는 영역, 때로 누군가의 제품을 홍보하는 영역이다. 언박싱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상품,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라는 네트워크에서 작동한다. 언박싱 영상의 생산자와 시청자는 재화를 통해 매개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다.

2. ‘국회의원 금배지’가 점하는 담론의 영역이 있다. 기본적으로 배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지만, 자주 ‘국민을 내려다보는’ 태도를 함의한다. ‘금배지 좀 달았다고’와 같이 정치인에 대한 못마땅함을 표현할 때도 종종 사용된다. 그렇게 금배지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민주정치의 표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금배지는 공적영역의 담론 안에 위치하여 대표자로서의 정치인을 상징한다.

3.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들이 교섭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말은 섞이고 의례는 ‘선을 넘는다’. 교회 내에서 랩뮤직의 사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에서 ‘신박한 예배 형식’이 되었다. 도덕적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 합쳐져 ‘착한 가격’을 낳았고, 이는 또 다른 영역과 만나 ‘착한 임대인 정책’을 만들어 냈다.

4. 담론간의 선을 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모든 가로지르기를 긍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교육의 일주체인 학습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 여길 수 없으며, 비상시의 온라인수업을 ‘미래교육’이라 표현하는 것에 손뼉칠 이유도 없다. 담론이 섞이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지만, 그 가능성은 희망일 수도, 타락일 수도 있는 것이다.

5. 그런 면에서 정치의 영역에 있는 ‘금배지’를 ‘언박싱’하는 행위는 위태롭다. (물론 이걸 ‘재미있다’고 표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라면 공공의 영역을 상징하는 금배지를 개인과 상품 담론의 최전선에 있는 언박싱이라는 의례에 얹어놓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구시대의 끝자락에 머무는 일일 수 있지만 말이다.

담론을 섞는 일은 창조적인 행위일 수도 상식의 파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점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위치에서 어떤 가로지르기가 용납되고 요청되느냐를 판단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가로지르기의 예술’에 능통해야 한다. 거침없이 가로지르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덧. 이 글을 쓰고 나니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

“다섯 번째 키워드는 ‘윤리’입니다. 보통 윤리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 윤리적 측면이 개입하죠. 얼마 전 온라인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작명이 있었어요. 바로 ‘버닝쑨대국밥집’과 ‘버닝선대인’인데, 국밥집과 프로그램 이름을 저렇게 지은 거예요. 여기에서 타인의 말을 자기 말이나 글로 가져올 때의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아마도 저 이름을 택한 사람들은 주목받는 말장난을 원했겠죠.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켜 한 번 더 쳐다보게 하는 효과를 노리면서요.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말만 달랑 떼어오려 했다는 점이에요. ‘버닝썬’이라는 말이 태어난 자리의 착취와 잔혹함, 분노와 고통은 아랑곳없이 말의 힘만을 가져오려 한 거죠.

저는 이런 행위가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말은 사전 위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 상태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관계 속에 뿌리박고 또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말 주위로 권력과 욕망, 아픔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말을 가져오고 이름을 정하는 데 필요한 윤리는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는 윤리이고, 말이 자라난 사회정치적 토양에 대한 살핌의 윤리이며, 무엇보다도 그 말로 엮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죠. 삶과 세계를, 거기 살고 있는 감정과 모순을 지워버리고 말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시키는 행위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이건 단순히 말실수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망각, 맥락에 대한 몰이해, 나아가 자기중심성으로의 한없는 함몰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에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러시아의 문학평론가이자 이론가인 바흐친이 간파했듯이 우리의 말은 원래 누군가의 말이었고 우리의 조어는 결코 완벽한 창조가 아니라는 점, 말이 우리 곁에 올 때 세계가, 사건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이 함께 따라온다는 사실이에요. 말을 쓰는 것은 늘 삶에 잇대는 행위이고,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습득은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성장과 떼어놓을 수 없어요.” (265-266쪽)

비판적 전회(Critical Turns)

Posted by on Apr 26,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한 연구모임에서 내 삶의 궤적과 비판적 응용언어학자로 살게 된 계기들(critical turns)에 대해 이야기했다. 밋밋한 인생이지만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솔하게 말씀드렸고, 공부의 과정에서 무지와 안이함의 껍질을 깬 경험들을 나누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삶 자체를 주제로 한 발표는 처음이었기에 준비하면서, 또 마치고 나서 여러 생각이 스쳤다.

수년 간 모든 역량을 가르치는 일에 쏟아부으면서 논문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다. 관념이나 지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양태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지금의 나는 응용언어’학자’라기보다는 응용언어학/영어교육 커뮤니케이터에 가깝다.

선생님과 학생들, 여러 학부모를 만나 ‘삶을 위한 영어교육/리터러시’ 이야기를 나눈다. 학부와 대학원 수업을 중심으로 고민을 이어가고 다양한 사회현상을 엮어 논문과 대중서의 중간 쯤 되는 글을 써낸다. 이런 일을 늘상 한다.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사교육이 자본의 논리로 영어교육을 이끌고, 대다수 국민이 영어교육 전문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소위 ‘삶을 위한 영어교육’에 매진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닐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기 보다는 힘에 부친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읊조린다. ‘생활을 이끄는 것은 전망이 아니라 의지다.’

허나 의지는 미약하고 게으름은 달콤하고 분노는 쉬이 사그라든다. 현실은 강고하고 욕망은 집요하건만 나의 말은 이상적이며 나이브하기까지 하다. 다만 돈을 위해 이론을 알아볼 수 없는 괴물로 만들어 버리거나, 이론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잊지/잃지 않기를 바란다. 대단한 연구자는 아니어도 쓸만한 이야기꾼이 되길 소망한다.

갈수록 대학 안이냐 바깥이냐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써내고 나누느냐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게 보니 할 수 있는 일들이 적지 않다. 몸을 좀더 바삐 움직여야 한다. 무른 생각을 다져야 한다. 그래야만 한 선생님의 말처럼 누군가의 ‘곁’을 지킬 수 있다.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묻어두었던 고민들과 재회한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쓰는 사람으로서, 지식을 만들고 나누는 사람으로서, 배우는 사람으로서, 언제까지나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일상을 꾸려가야 할 것인가. 언제 혼자여야 하고, 언제 뜻을 모을 것인가. 왜 이 질문은 수십 년 반복되는가.

덧. 오늘 발표는 bell hooks의 책 <Teaching to Transgress> 11장 “Language”를 다루었다. 부제는 “Teaching New Worlds/New Words”. 조만간 나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 보고 싶다.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