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여기에서

부끄러운 고백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몇 년 동안 북미 학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떨쳐내지 못했다. 계절마다 돌아오는 학회에서 만나 안부를 전하고 교류하는 친구, 선후배들이 부러웠다. 함께 논문을 출판하는 연구자들에 끼고 싶었다. 수년 간의 읽기모임과 논문 작성을 위한 토론모임이 그리웠다. 무엇보다도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던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돌아와서 거의 6년을 그저 가르치는 일로 채웠다. 누구보다 많은 수업을 소화했다. 한 해에 열 개가 넘는 새로운 과목을 가르치는 일도 있었다. 주말도 방학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구자에게 생명과도 같은 현장과 멀어졌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쟁하는 친구들도 ‘사라졌다’. 먹고사니즘 핑계는 늘어갔다. ‘얕고 넓은 지식’은 이내 말라버렸다. 도망의 기술은 늘었고 합리화는 체념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를 키워준 공동체는 저 멀리 있을지 모르지만 내 삶을 지탱하는 터전은 바로 이곳임을. 여기에서 소통하고 연대하고 성찰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쉽지 않았던 선택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임을. 과거의 인연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연구의 기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지어가야 한다는 것을. 이곳은 학문의 변방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며 고통의 진원지임을. 일상 밖에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음을.

조금씩 균형을 잡아간다. 여전히 위태위태하다. 하지만 막연히 과거를 그리는 일은 사라졌다. 특히 이번 대담 작업을 통해 함께 이야기를 지어가는 기쁨을 회복했다. 그러고 보니 턱없이 부족한 실력으로 여기까지 오는 데는 늘 속깊은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쓰자고 다짐했던 이들은 멀어졌지만 삶을 나누는 이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협업이 만들어졌다.

나태함에 기꺼이 굴복하던 나를 글쓰기에 초대해 주었던 C, 아직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논문을 책임감있게 이끌어 준 J에게 고맙다. 이번 대담에 함께해 주신 선생님과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해주신 편집자께도 큰 신세를 졌다. 장기간의 연구자 대화 프로젝트를 제안해 준 M샘, 삶의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어 주시는 E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나의 글은 언제나 ‘자립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빚짐의 흔적(a trace of indebtedness)’였던 것 같다. 갚아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만큼 감사도 깊어간다.

#영어로논문쓰기

작은 꿈

제2언어 리터러시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학술적 글쓰기, 특히 논문쓰기에 관심을 갖고 강의를 열고 있습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대학에서마저 체계적으로 글쓰기를 배울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몇해 전 한 교수님의 도움으로 경영학과 대학원에서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시적으로 열리는 강의여서 2년 만에 폐강이 되었죠. 반응은 나쁘지 않았으나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속할 힘을 잃었던 것입니다.

사실 대학원에서 영어논문쓰기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저와 같은 리터러시 연구자와 해당 분야의 내용전문가가 협업하여 커리큘럼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제가 영어논문쓰기에 대한 개념적 틀을 제공하고 다양한 전략을 나누긴 하지만 개별 학문분야에 속한 학술지나 논문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해당 분야를 꿰뚫고 있는 연구자와의 협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이같은 협업의 토대가 제공되긴 커녕 학술적 글쓰기 수업도 개설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물론 개별 수업에서 글쓰기가 핵심활동으로 자리잡는다면 영어글쓰기를 따로 가르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부, 대학원 과정은 내용의 전달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쓰기를 통해 지식을 심화하고 재조직하는 일은 뒷전입니다. 영어논문쓰기도 엄청나게 강조는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주질 않죠. ‘읽고쓰기 각자도생’이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현실입니다.

몇해 전부터 내용 전문가와의 협업을 통해 탄탄한 글쓰기 수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새로운 강의 개설은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커리큘럼 개발을 위한 시간과 돈이 필요하고 강의개설 및 운영권이 필요합니다. 이들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책임자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없어 대학 외부에서 강의를 열 수밖에 없더군요. 이것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대학의 리터러시 교육 개혁이라는 대의를 생각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느낌입니다.

꼭 영어로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학술장은 과도하게 ‘국제화’ 담론을 퍼뜨려 왔고 영어논문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많은 분야에서 KCI 등재지는 ‘2류 저널’ 취급을 받죠. 자기 존재를 비하하는 현실.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저 또한 제 학술활동의 많은 부분을 한국어로 진행합니다. 대중과의 소통에서는 한국어 글쓰기가 중심이고요. 학문이 사회에 뿌리박고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모국어 리터러시가 탄탄해야 합니다. (한국어 잘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영어 글쓰기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에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우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학교육의 본분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알아서 여기까지 왔으니 너도 혼자 해봐’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의미있는 일들을 해낼 시간과 에너지를 박탈하는 일입니다. 도구를 주고 집을 짓게 해야지, 도구까지 만들어가며 집을 지으라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어제는 한 대학 단과대학 랩의 초청으로 두 시간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 디렉터이신 교수님이 오셔서 마음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오늘 말씀하신 걸 25년 전에 알았으면 제가 공부하고 논문쓰는 게 정말 달라졌을텐데요. 제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너무 잘 정리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일 뿐입니다. 대단한 비법이 담겨있지도 않죠. 하지만 간혹 연구자로서의 삶에 진입하는 단계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또 다른 협업을 통해 더 나은 글쓰기 강의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꿈꾸다 보면 언젠간 되겠죠. :)

#영어로논문쓰기 #삶을위한리터러시

내면의 삶에 대한 권리로서의 책읽기

1. 읽기는 내면의 삶(the inner life)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주를 팽창시킨다. 물리적 세계와는 별도로 상상과 기억의 공간을 생성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쓰기를 매개로 공동의 기억(collective memory)이 된다. 심리적 공간이 사회문화적, 담론적 공간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2. 읽기쓰기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는 ‘문자중심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 것이다. 문자는 문자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춤은 춤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세계를 생성하고 연결한다.

3.그럼에도 구텐베르그 은하계 이후 인류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은 압도적으로 문자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내면의 삶과 공동의 기억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어온 일 말이다. 근현대 문명을 모두 긍정할 수는 없으나, 문명의 성장에 있어 문자의 비중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4. 독서교육을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 짓기’라는 관점으로 보는 게 적절하리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지식과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엄청난 양을 습득하지 않아도 내면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갈 수 있다는 말, 넉넉한 영혼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5. 먹고사니즘은 시간을 강탈한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일에 몸은 지쳐간다. 내면의 삶을 가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시대는 크고작은 혁명의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독서가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책을 집어들고 내면의 삶을 키워가는 일을 연례행사로 만드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리는 없다.

내면의 삶에 대한 권리로서의 책읽기를 고민할 때가 아닐까 싶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유튜브 댓글: 재미있는 현상들

Posted by on Jan 10,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 영상에서 기~일게 한 이야기를 정리해서 번호를 매겨 답글을 단다. 여기에 좋아요가 몰린다.

솔직히 몇몇 영상들은 너무 뜸을 들인다. 그래서 이런 댓글이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것 같다. 블로그 글 중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 두어 페이지 하고 본론은 끝에 한 문단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영상의 경우에는 미괄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속도의 문제가 크다.

2. 예전의 영상에 ‘이거 OOOO년에도 듣고 있는 분?’이라는 답글이 달리고 여기에 엄청난 좋아요가 붙는다.

유튜브 영상 주요 카테고리 중 하나는 ‘리액션’이다. 특히 음악에 대한 반응을 찍어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영상은 원래 영상 못지 않게 큰 호응을 얻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사람들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만큼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소비’한다. 이게 다 외로워서 그런 걸까? (먼산)

3. 긴 영상에 타임 스탬프를 찍어 해당 지점으로 안내하는 답글이 인기를 끈다.

음악 컴필레이션 영상에 이런 댓글이 상당히 많고, 강연 영상의 시작점이나 내용영역을 표시하는 경우도 많다. 텍스트는 휘리릭 보는 스캐닝(scanning)이나 문자검색이 가능하나 영상은 아직까지 이런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타임스탬프 댓글의 인기가 높은 것 아닐까 싶다. 이와 조금은 다르게 자신이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의 타임스탬프를 올리는 경우도 많다. 전자가 ‘공익’에 복무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감상포인트’를 강조하는 것에 가깝다.

#유튜브 #삶을위한리터러시

리터러시의 위기, ‘배운 놈들이 더한다’

리터러시의 위기를 그저 개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안이하고도 위험하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묻히는 상황에 터한다. 한 사회가 자신의 이슈를 발굴해 내고 이를 사회문화적인 공론장으로, 나아가 제도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가가 리터러시의 척도인 것이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말해야 할 것에 침묵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말할 수 있는 자’에게서 온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해력을 갖춘’ 이들, ‘말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이들의 것이다. 빈곤이 가지지 못한 자의 책임이 아니듯 비문해는 문해력 습득에 실패한 자의 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배운 놈들이 더한다’는 리터러시를 철저히 사유화한 이들에 대한 이 사회의 경고일지 모른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두 교황’을 보다

Posted by on Dec 28, 2019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박사과정 첫 학기를 마치고서였다. 기말 과제를 하느라 쪽잠으로 버틴 지 며칠. 지치고 힘든 마음을 가볍게 만들 영화를 찾다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골랐다. 황정민, 임수정 주연의 <행복>. 결과는 처참했다. 행복해지긴 커녕 새벽에 보고 센치와 비참 수치가 100이 되어서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그따위로 제목을 지었는지.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선택(?)이었다.

오늘 학기를 마쳤다. 가르치는 이들은 수업을 애정하지만 방학을 사랑한다. 학생들이 최고로 치는 명강의도 휴강을 이기지 못하듯 말이다. 그래서 고른 영화가 <두 교황>. 진짜 두 교황에 대한 이야기이고, 실제 사건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교황이 아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해성사를 뛰어넘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위인’의 업적이 아닌 변화와 타협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영성의 씨줄에 인간성의 날줄을 엮어 삶과 신앙의 경계를 없앤다.

다시 볼 거라고 확신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이 영화는 꼭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나단 프라이스와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에 감탄했고, 두 캐릭터의 상반된 성격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구성에 뭉클했다. 초반에 터진 눈물이 끝까지 멈추질 않아서 조금 힘들긴 했지만 <행복>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졌다.

신앙이 있건 없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인풋의 양이 아니다. 경험의 깊이다.

영어학습의 초특급 키워드 ‘인풋’. <단단한 영어공부>에서도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무조건 많은 인풋’이 능사는 아니다. 최근에 학부모들을 만나면서 반복하는 메시지는 ‘인풋의 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영어를 좋아할 수 있는 계기, 언어의 숲으로 ‘빨려들어가게’ 하는 실마리를 찾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계기가 영어의 발음일 수 있다. 단어의 발음이 예뻐서, 누군가의 억양이 매력적이어서 영어가 좋아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영화의 배역(e.g. 해리포터)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좋아하는 유튜버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노래나 챈트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림책의 내용일 수 있다. 미국 미드웨스트 지역의 백인 중산층 영어가 아니라 맨체스터의 노동자들의 ‘투박한’ 발음에 끌릴 수도 있다. 심지어 속어와 욕설이 영어로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간의 영어학습 담론에서는 ‘양(quantity)’이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내용과 방법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노출되느냐였다. 이렇게 ‘무조건 많이’로 대표되는 인풋 담론은 개개인의 영어에 대한 욕망(desire)를 간과했다. 인지적인 측면들을 과하게 강조하면서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면, 지각에 관련된(perceptual) 특성들을 무시한 것이다.

우리는 외국어를 배우면서 그 언어의 정보를 처리(process)하지만, 그와 함께 특정한 소리나 단어에 애착을 갖고, 누군가의 발음에 매료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변화시킨다. 언어학습은 지식암기가 아닌 전인적 발달과 변화과정이다.

물론 현장의 영어교수 또한 변하고 있다. 학습자들의 감정과 정체성을 고려하는 시도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문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차가운 머리를 갖고 언어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과 소통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켜 간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학습에서 정서와 지각, 정체성과 욕망의 문제는 주변이 아닌 중심에 놓여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풋의 양이 아니라 경험의 깊이인 것이다.

영상 vs 텍스트: 지식생산의 관점에서

영상은 영상대로,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강점과 약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수준을 염두에 두었을 때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함에 있어 텍스트가 여전히 우위를 점하는 대표적 영역 세 가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추상성
‘부재와 존재’를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 표현했다고 하자. 텍스트가 지닌 추상성을 영상이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추상적 개념을 층층이 쌓아올린 구조를 영상으로 구축할 수 있을까?

2. 경제성/생산단가
화장실에 앉아서 텍스트를 통해 생산할 수 있는 세계를 영상으로 생산해낼 수 있을까? 웹소설의 생산속도를 영상이나 웹툰이 따라올 수 있을까?

3. 검색과 인용
텍스트 검색 및 인용의 유연함을 영상이 따라올 수 있을까? 다양한 소스를 엮어 하나의 논리적 구조로 만드는 일에 있어 (1) 단어의 연쇄라는 동일 포맷을 유지할 수 있는 텍스트와 (2) 장르, 해상도, 구성, 색감, 음악, 나레이션 등의 요소들이 울퉁불퉁하게 엮일 수밖에 없는 영상이 같은 수준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삶을위한리터러시 에서. :)

#프리뷰모드

공감의 한계에 관하여

Posted by on Dec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공감을 강조하는 담론에 대해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공감이 갖는 본래적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2.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진정한 공감’은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경험이라는 것이 특정한 몸이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특정한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해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3. 이를 하나하나 풀면 이렇다.

(1)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2) 특정 경험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얻는다고 해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3) 특정 사건과 상황을 깊이 이해한다고 해서 당사자가 평생 쌓아온 이해와 해석의 방식을 체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 즉, 우리는 ‘누군가의 처지와 경험’을 상상(imagine)하는 것이지 경험(experience)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언어(상황을 상상해서 나오는 진술)와 상황 내에서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과 경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5. 문법용어를 빌리자면 공감은 기본적으로 가정법(subjunctive mood)이고, 경험은 과거시제이자 현재완료(진행형)이다. 공감하는 이는 If 절을 피할 수 없고, 동사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If I were you, I would … 에서 I는 you가 아니며 ‘were’는 ‘am’이 아니고, ‘would’는 철저히 생각의 세계에 속한다. If절이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다고 해도 가정과 추측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올 수 없는 것이다.

6. 그렇다고 해서 공감을 무조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한계를 온전히 넘어설 수는 없지만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당 개인의 경험을 ‘그 사람 고유의 경험’으로 봄과 동시에 구조적 요인들의 분출로 보는 것이다.

7. 다시 말해 해당 경험을 순수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요인들이 개인을 통해 세상에 뛰쳐나온 것으로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고유한 경험은 보편적 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고, 보편성에 대한 고민에 기반한 실천을 통해 해당 경험과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온전히 공감할 수 없을지라도 그 경험의 기반을 변화시킬 실천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8. 공감의 언어는 과대평가되었다. 더욱 가치있는 일은 연대의 손길이다. 매끄럽고 완벽한 말보다는 말없이 함께 떠날 수 있는 꾸준하고 투박한 발걸음이 소중하다.

9. 결국 공감의 중요성은 응당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히 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와 닮았다.

10. 알 수 없어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 있다. 다 알 수 없다고 해도 함께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함께 궁리하는 가운데 우리 ‘사이’를, 우리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이해하는 척에서 끝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닫힌 이해가 아닌 열린 실천, 이것이 공감이 지향해야 할 바 아닐까.

기말의 ‘폭력’

Posted by on Dec 11,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점을 채워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기말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학교가 신체적/심리적 폭력에 가까운 부담을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수 개개인의 가혹함이나 학생 하나하나의 욕심에서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평가를 위한 시험과 과제의 구조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숨가쁘게 휘몰아치는 일정을 이악물고 헤쳐나가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대학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집요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 이 모습이 정말 최선일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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