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력 2

때로 밋밋함과 무거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글인 줄 알면서도 세상에 툭 던져놓곤 한다. 용기라기 보다는 게으름이고, 게으름이라기 보다는 무심함이다. 나 따위가 쓰는 글이 뭐, 이런 심정이랄까.

솔직히 내 글이 재미는 없다. 그래도 10명 중 1-2 명은 내 글의 ‘객관적 무재미’를 너른 마음으로 품어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것 같기도 하다. 팍팍한 세상이지만 은혜와 기적은 도처에 있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아니 그냥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다. 페이스북 친구만 해도 이리 많은데 세상엔 얼마나 많은 무림고수가 있을지. 원래 무림고수는 은둔자여야 하건만 요즘은 그냥 여기저기서 막 튀어나온다. 아 무서워. 긴장도 막 되고 그렇다. 이기려고 쓰는 글은 아니지만 너무 못쓰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종종 드는 이유다.

사실 ‘필력’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글쟁이들은 쓸 때마다 괴로운 게 글이라고 털어놓지만 ‘필력’은 정의되지도 않은 힘力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줄세운다. “글 얼마나 잘 쓰세요?” “저요? 만렙이예요.” “오 대단하시네요. 저는 이제 겨우 천렙인데.” “만렙 되시려면 고생 좀 하셔야 될 거예요.” 뭐 이런 대화가 떠오른달까.

글쓰기에는 일종의 역설이 존재한다. 쉬운 글은 없고, 쉬운 글이 없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좋은 글이라고 무조건 많이 읽히지도 않는다. 1000만 관객 영화가 좋은 영화가 아니듯 말이다. 가끔 쭉쭉 써내려가는 대단한 필력의 소유자보다 조금씩 다부지게 작은 이야기들을 품어내는 사람들에 끌린다. 뻗어나가는 것보다 스러지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쁘지 않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필력 1

Posted by on Feb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돌아보면 유치하고 허술한 글을 참 많이도 썼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하지만 글은 유치함의 축적 없는 진중함이나 허술함의 뭉침 없는 단단함을 추구하도록 놔두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나같은 범인에겐 말이다. 쌓이고 허물어지고 다시 쌓고 또다시 무너지지만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그것이 소위 ‘필력’ 아닐까. (물론 조금만 방심해도 ‘똥글’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비판하지 않고 잘 살기?

어제 한 선생님과 비판적 리터러시의 중요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비판 리터러시를 키우는 건 사실 엘리트 교육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교육의 ‘변방’에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핵심’이라는 이야기였다.

비판적 리터러시는 잘 듣고 잘 읽고 행간을 읽는 데서 시작해서 전제를 살피고, 증거의 빈곤함을 지적하고, 논리의 일관성을 점검함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하지만 리터러시 교육에서 비판영역이 전면에 배치되는 경우는 여전히 적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대를 ‘넘어서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지식의 수준을 높이고 그 지평을 넓히는 행위라는 점이다. 내가 쌓은 벽돌 위에 또다른 벽돌이 올라간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딛고 올라서 주었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적 역량은 서로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어간다.

모두 비판자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쟁이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두의 비판으로 서로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비판의 태도와 기술이지 비판하지 않고 함께 잘 사는 법이 아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글쓰기

PC의 문제

Political Correctness의 근본적인 문제는 Politics의 문제를 Correctness로 치환해 버리는 데 있다. 물론 현실에서 PC는 동원되는 맥락에 따라 다른 효과를 발휘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용어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권력이 어떤 양식으로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잡다단한 힘과 관계가 관여하는 고차원 방정식을 ‘이 용어를 써도 되는가 안되는가?’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화할 때 얄팍하고 우둔한 논쟁만이 남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사건은 생성적인 것

Posted by on Feb 15,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일련의 사건들은 말 그대로 생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구성될 수 없는 것이고 그 사건이 일단 발생하고 나면 돌아봄으로 완벽히 포섭할 수 없는 것이다.” “Series of events is truly genetic, which cannot be constructed before it has happened, and which cannot be exhausted backwards, after it has happened.” – Baldwin (1906)

“사건은 말 그대로 생성적인 것.” 지혜는 사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생성을 지켜보는 데 있는 것이다. 완벽하게 예측될 수도 없고 온전히 재구성될 수도 없는 순간들에 대한 경외감.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여기 있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표준화의 환상

Posted by on Feb 11,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시간의 표준화로 모두의 시간이 동일한 속도와 밀도를 지닌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지능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지능을 벨커브(정규분포곡선)로 줄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시험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성취를 한줄로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노동이 공평하고도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화폐로 변환되고 있다는 믿음, 어떤 몸이든 동일한 ‘ROI'(투자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 공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환상은 이러한 표준화-복합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서로 다른 몸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관계와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간의 평등과 지능 및 시험의 공정함, 경제체제의 합리성은 지독한 환상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은 철판이나 콘크리트에게는 옳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아니다. 체구가 크면 더 먹어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발이 크면 신발이 커야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모두가 같은 속도로 배우고 익히고 시험을 쳐야 한다고 믿는가? 인간에게는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을 돌려주어야 할 싸움이 필요할 뿐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문장의 개념적 중핵

인지문법을 배우며 처음으로 문장을 개념적으로 분석하는 법을 접했을 때 의아했던 것은 “동사”가 개념적 중핵(conceptual core)로 분류되고 전통적으로 명사구에 해당하는 것들이 이 개념적 틀의 참여자(participant)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The gentleman bought a notebook.”이라는 문장이 있다면 “buy(bought)”가 문장의 개념적 중핵으로, the gentleman과 a notebook이 이 개념의 참여자로 분류된다. (이전 문법의 틀에서는 주로 동사(verb)와 논항(argument)에 관한 논의를 떠올리시면 된다.)

“누가”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주체 중심의 사고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문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먼저 존재해야 하고 이 주체가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주체”가 탄생하는 방식은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체”는 언제나 특정한 행위틀 안에서만 이해된다. 이러한 활동/행위들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조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말해 주체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말하고, 듣고, 공부하고, 싸우고, 쓰고, 주장하고, 사고, 팔고, 빌리고 등의 활동들 속에 들어감으로서 비로소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주체”보다 “행위”를 개념적 중핵으로 놓고, 이에 관여하는 참여자들을 분석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영어로 논문쓰기: 네 가지 기둥

영어로 논문쓰기를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 4가지. (말장난 아닙니다. ^^;;)

1. 영어에 대한 이해 (도구언어에 대한 이해)
2. 논문에 대한 이해 (장르로서의 논문에 대한 이해)
3. 쓰기에 대한 이해 (쓰기행위에 대한 실천적, 메타인지적 이해)
4. 영어로 논문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이해 (프로젝트로서의 논문쓰기 수행에 수반되는 다양한 지적, 정서적, 정보적 요인에 대한 이해)

#영어로논문쓰기

활성화 영역

아래 세 문장을 보자.

a. “컴퓨터 좀 쳐봐.”
b. “컴퓨터에 꼽을 데가 없네.”
c. “컴퓨터 램을 갈아끼웠어.”

세 문장에는 공통으로 ‘컴퓨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의 표면을 말한다. 뭔가 잘 구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쳐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표면의 단자를 말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SB 등 외부기기와의 연결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

세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내부의 마더보드를 의미한다. 램을 갈아 끼우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열고 메인보드의 슬롯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 좀 쳐봐”라는 말에 컴퓨터 뚜껑을 열고 컴퓨터를 치는 사람은 없다. “램을 갈아 끼웠어”라는 말을 듣고서 USB 단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맥에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를 ‘active zone(활성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어가 하나 같지만 실제로 그중 일부만이 두드러진 의미로 동원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활성화 영역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c를 쓸 때 분명 우리는 다른 영역의 의미를 활성화시키지만 ‘컴퓨터’라는 동일한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단어가 여러 가지 하위 요소를 갖고 있을 수록, 사용되는 상황이 다양할수록 활성화 영역의 역동성 또한 증가한다.

* ‘active zone’이 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어를 갖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인지언어학이야기

똥고집

Posted by on Feb 6, 2019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사실 이과생들이 들어도 꽤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수강생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도 이과생들로부터 문의를 받을 때마다 “개념적 뼈대는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예시는 인문사회계 논문 텍스트를 사용합니다.”라고 원칙적인 답변을 한다. 뭐랄까. 조금의 ‘거짓’도 없이 수강생을 모으고 싶은 똥고집이라고 해야 하나.

첫 강의가 토요일로 다가왔다. 경험상 준비과정은 ‘충격과 공포’에, 강의과정은 ‘설렘과 기쁨’에 가까왔다. 무려 여덟 번을 한 강의인데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그래도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공부할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영어로논문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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