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교육개혁의 시작

Posted by on May 29, 2017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학생들이 학교에서 가장 살아있는 때는 언제입니까? 역설적이게도 쉬는시간과 점심시간, 학교를 나설 때입니다. 교사들이 살맛나는 건 언제인가요? 쑥쑥 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번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때 아닐까 합니다. ‘4차산업혁명’ 같은 외부/미래가 아니라 ‘학생과 선생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라는 내부/현재에서 출발하는 교육개혁만이 살아남습니다. 학교를 그 무엇에 대비하는 도구로 파악하는 순간 개혁은 좌초하게 되죠. 주체를 배제한 채 내용을 손보는 우매함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간강사의 시간

Posted by on May 27,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소득세를 신고할 때마다 살짝 우울해집니다. 작년 한 해 총소득이 사회생활 첫해 연봉과 비슷하더군요. 20년 가까이 월급이 안 오른 셈이죠. 저는 시간강사 중에서 형편이 좋은 편입니다.

시간강사에게는 임노동의 단위시간만 있을 뿐, 경험과 전문성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기말, 또다시 시지푸스의 절망이 기다리고 있지요. 끝없는 시간의 리셋 속에서 삶의 도도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우리를 응원합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요.

노 룩 패스 (No look pass)

Posted by on May 26,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어떤 인간이 ‘노룩패스’로 짐을 다른 인간에게 넘겼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는 당당했고,
바퀴는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러웠고,
넘겨받은 이는 “평소 자상한 편”이라는 말을 남겼다.

처음엔 웃었다.
재치 넘치는 패러디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의원’이나 ‘수행원’,
지위나 호칭 따위는 걷어치우고
상대의 얼굴을 봄(to look)이
사람 대접의 기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많이
슬펐다.

화가 났다.

우리 사회는 성소수자의 고통과 좌절, 아픔과 분노, 무엇보다 존재와 대면하며 정책을 집행하고 있나? 학생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살피며 교실을, 교육과정을, 평가와 입시를 만들어가고 있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수십 일 곡기를 끊어야 하는 노동자들, 그저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위해 수년을 싸워야 하는 장애인들은 여전히 얼굴없는 존재 아닌가?

“노룩패스”는 그저 개념없는 정치인의 우스꽝스런 모습일까? 상대의 얼굴에 관심이 없는 행위들을 응축한 캐리커처는 아니었을까?

이 사회는 거대한 노룩패스의 경연장 아닌가 말이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는 순간
자신의 얼굴도 사라진다.

외국인 유학생들의 고충

Posted by on May 22,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이리 저리 강의를 다니다 보니 외국인 학생의 증가세가 확연히 느껴진다. 중국 학생들이 가장 많고 몽골이나 동남아 국가들에서 온 학생들도 꽤 된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엔 무리가 없으나 전문지식에 대한 논의를 따라오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다 보니 시험도 과제도 최하위를 면치 못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말하기 수준이 어느 정도 된다 해도 글쓰기에 익숙한 편은 못된다. 하지만 전문지식을 한국어와 영어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나같은 교수자는 과제와 시험의 언어로 한국어/영어 옵션 외에는 줄 수가 없다. 다른 교수자들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대학평가에서 국제화 지표의 중요성, 유학생 유치를 통한 대학재원 마련 등의 요인이 외국인 학생의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이런 동인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언어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학생들을 무더기로 받는 것은 대학의 책임 방기로 밖에 볼 수 없다. 외국인 유학생들이 겪고 있는 언어적, 사회문화적 고충에 관한 조사, 이에 기반한 실질적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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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아래 Kisang Kim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우리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유학가면 당연히 그 나라 언어부터 익히고 시작하쟎아요? 근데 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해외 유학생들이 한국어를 못 하는 거에 대한 고민을 더 먼저 할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에 오는 유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기준에 전혀 못미친다는 점은 두고 두고 문제가 될 듯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슈가 있습니다. (1) 선발 과정에서 요구하는 한국어 능력 기준 그리고 (2) 입학 후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제공.

현재 상황에서 (1)의 한국어 능력 기준을 상향조정하고, (2)를 좀더 체계적으로 정비해야 합니다. 북미지역의 종합대학 다수가 ESL 프로그램을 체계화한 것처럼 말이죠. 물론 저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주장이니 좀더 체계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오직 서로의 상처에 입맞추느니”

Posted by on May 21,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개개인은 고유한 존재입니다. 서로 비슷해 보여도 또 많이 다르죠. 그래서 ‘우리’라는 표현은 늘 양날의 검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남 이상의 남’이지요.

오프라인도 그렇지만 소셜미디어에서의 관계를 미화하지도 폄하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다만 최근의 격렬한 논쟁 중 일부에는 아래와 같은 관계가 자리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논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의 비판은 모든 시민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패거리’를 전제로, 깎아내리기를 과정으로, 피아식별을 목표로 하는 논쟁에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말을 거는 줄 알았는데 암구호를 묻는 ‘논쟁’은 그저 패싸움일 뿐이니까요.

일관된 논리와 객관적인 데이터를 확보하는 능력,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함께 발딛고 있는 일상과 닮은 꼴의 가치관, 무엇보다 추스리지 못한 상처, 상처들을 볼 수 있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학기가 끝나면 그간 공수표를 던진 분들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

갑작스런 이별

Posted by on May 19,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전화가 왔다. 짧은 통화. 3년 3개월 째 이어져 온 관계는 그렇게 툭 끊겼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지역 어린이 도서관의 문을 두드린 것은 2014년 3월이었다. 세 명으로 운영되던 초등 5학년 영어교실은 새로운 선생님을 찾고 있었다.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지역에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고, 좋은 기회라 생각해 큰 고민 없이 지원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학생들을 만났다.

초기에 한 명의 학생이 떠났다. 오늘 남은 두 명의 어머니들에게 전화를 받았다.

첫 통화. 3년 2개월 여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다.

“선생님, 너무 감사한데 저희 OO이가 이제 그만 가고 싶다네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학교 끝나고 바로 집으로 오고 싶대요.”

“아… 네… 뭐 특별히 힘들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 건 전혀 없구요. 선생님도 재미있게 잘 가르쳐 주셨다고 하는데 이제 영어는 그냥 좀 안하고 싶다고 하네요.”

“네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갑자기 말씀드리게 되어서 죄송해요.”

“아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럴 수 있죠.”

“네네. 워낙 귀찮은 게 많은 아이라.”

“예… 잘 알겠습니다. 담에 언제 다시 볼 날이 있겠죠.”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네. 안녕히 계십시오.”

잠시 후 다른 학생의 어머니와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다. 두 분이 몇 년만에 연락을 하셨다고, 자신의 아이도 이제 수업을 그만 했으면 한다 했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통보. 조금 어지러운 마음. 3년 여의 만남을 기록한 대화 몇을 들추어 본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하지만 헤어짐은 대개 ‘안녕’을 알지 못한다.

‘나 그래도 꽤 괜찮은 선생인데.’

뒤끝 작렬이다.
뭐 하루 정도는 그래도 되는 거 아닌가.

좋아하는 이별 노래 하나를 꺼내어 듣는다.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y 14,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수업 시간. 언어와 세계에 관한 설명을 하다가 SLR 이야기가 나왔다.

나: 여러분들. 세상이 하나지만 사진기를 여러 모드로 놓고 찍으면 다르게 나오잖아요. 언어도 사실 그런 장치라고 볼 수 있거든요? 사진기 모드… 셀카모드 같은 거 말고 SLR 카메라에서 말하는 모드 아시는 분?
학생 2명: DSLR!
나: 네?
학생 1: SLR 아니고 DSLR이요. SLR이라고 말씀하셔서요.
나: 원래 SLR이 있고 그걸 디지털로 만든 게 DSLR이거든요. 그래서 D가 붙는 거죠. 디지털.
학생 1: 아…

디지털을 통해 아날로그를 보는 학생들. 단순히 카메라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2. 연휴같지 않았던 연휴. 할 일은 줄지 않아 스트레스는 쌓여가는데 실망스런 일까지 발생. 투덜투덜. 쫑알쫑알. 그 가운데에서도 명랑하게 나의 짜증을 받아준 짝에게 아부 모드로 멘트를 날리는데…

나: 자기 원래 그렇게 성격이 좋았어?
짝: 응. (지체없이) 자긴 원래 그렇게 성격이 나빴어?
나: ………….

아부 안통함. 역풍까지 맞음. 안좋던 성격 더 안좋아짐.

3. ‘내용이 제일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도 무시할 수 없다’ vs. ‘내용과 형식은 씨줄과 날줄처럼 텍스트를 만들어간다’

온라인에서의 논쟁이 나름 괜찮은 결과로 이어지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면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듯하다. .

4. 인천공항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정책이 발표된 다음 날.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천공항 뉴스 봤다. 우한테는 좋은 소식 없을까?”
“없을 거 같은데요.”
“그렇구나.”

아마 없을 것이다.

5. 방학과 다음 학기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한다. 형편이 나름 좋은(=강의가 꽤 들어오는) 강사임에도 몇 주 후 어찌 될지 모른다.

그 와중에 감사+씁쓸하게도 학생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가장 실망했던 과목을 다시 맡게 되었다. 트라우마를 넘어설 수 있을까. 별것 아닌 일들이 왜 몸에 딱 붙어 떨어지질 않는가.

6. 학기가 5주 남았다. 끝나고 안아팠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일상스케치>라는 제목 참 오랜만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논의에 대한 질문 몇 가지

Posted by on May 14,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1) ‘자유의지’ 논의에서 ‘인간’은 늘 개인이다. 왜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 촌각을 다투는 게임의 팀플레이에서, 밴드의 합주에서, 랩 배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 창발하는 질서는 ‘자유의지’와 연관지어 논의될 수 없는가?

(2) ‘자유의지’ 논의에서 ‘인간’은 왜 늘 ‘인지’하는 인간으로 정의되는가? 그렇다. 이 지적은 자유의지 관련 논의에서 늘상 등장하는 ‘개인이 결정을 의식하기 한참 전, 뇌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실험 결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뇌의 패턴이 드러내는 인식’과 ‘자신의 결정을 인지하는 자아의 인식’을 분리시킨 후,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을 담지하는 몸의 존재에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식과 무의식의 갭은 ‘자유의지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숨어있는 공간’ 아닌가?

(3) ‘자유의지’ 논의에서 자유는 왜 늘 ‘맨몸’의 결정인가?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와 상호작용하며 사고와 감정을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베이트슨(Bateson)이나 바살로우(Barsalou) 및 비고츠키의 후세 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이 아닌 “인간+도구+환경”을 주체 혹은 자유의지의 분석단위(unit of analysis)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4) 근본적으로 ‘자유의지’를 논의함에 있어 상호작용의 지위는 무엇인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개인과 도구, 개인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자유’와 ‘의지’를 정의하는 데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개임해야 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개개인의 독립적 행위 보다는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상호작용에 자신을 던지는 용기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는가? 계획하고 실행하고 모니터하는 존재가 아닌 만나고 섞이고 놓아버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유의지’ 논의에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자유의지’ 자체가 규명 가능한 개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자유’와 ‘의지’를 개인의 뇌 안에 가두어 놓으려는 경향을 띄는 데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나의 자유의지’나 ‘너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존재가 세월을 업고 공간을 가로질러 얽히는 세상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맞아 아니면 내가 맞아?

Posted by on May 8,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영어 | No Comments

1. 영어 클리셰(닳고 닳은 표현) 중에 “Am I right or am I right?”이 있다. 결국 “I am right.”이라는 뜻이다. 보통 ‘내가 맞아 니가 맞아?’라고 해야 할텐데 ‘내가 맞아 아니면 내가 맞아?’라고 묻는 것이다. 선거 막판 이런 글과 종종 조우한다. 나도 가끔 이런 글을 쓰지 않는지 반성한다.

2. 언제였던가. 우리 나라에도 ‘빅텐트론’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먼산) 영어에도 같은 표현(Big tent: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선거캠프/조직 하에 모임)이 있는데, 정치권이 이를 차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캠핑문화의 확산 정도에 비추어 보면 ‘빅텐트론’은 미국 문화에 좀더 밀착된 느낌이다. (빅텐트론 주장하셨던 분들 중에 제대로 캠핑 해보신 분 몇 안될 듯.)

3. 영어에서 analyze는 본래 생물체나 무생물을 쪼개어 보는 일을 의미했다. 생물이나 물체에 대한 해부/분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analyze는 대개 추상적인 영역(지식, 정보, 개념 등)에서 쓰인다. 이 시대 analysis의 과제는 이러한 추상성을 넘어 몸과 물성의 영역을 회복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빈곤에 대한 담론적 통계적 분석과 빈곤한 하루를 사는 몸(들)의 고통에 대한 기술의 결합 말이다.

Manchester by the Sea (2016)

Posted by on May 6,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어떤 삶은 교훈이나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저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렇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교훈’이나 ‘감동’ 같은 말로는 어떤 진실도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할 뿐. 너무 많은 존재들을 말에 가두어 온 내 가련한 인생.

바다를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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