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ormation Cascade와 학습자

Posted by on Aug 3,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아랍 혁명의 파도 속에서 통치자들이 가장 신경썼던 것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의견과 정보, 사건 동영상 등이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소위 “Information Cascade”(정확한 번역어를 모르는데 ‘자신의 생각이나 인지와 상충되는 면이 있더라도 특정 정보에서 관찰되는 행동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독재에 대항하는 정치혁명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한국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초중고생들을 의사결정자로 보자.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다양한 결정을 내린다. 연령이 낮을수록 부모가 제공하는 정보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후 친구들과 학교 선생님들, 또 학원 선생님들이 전달하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접하며 여러 가지 판단을 한다.

학생들은 어떤 정보에 노출되는가? 정보를 필터링하고 배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지역별, 사회경제적 지위별로 정보의 양과 질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정부와 기업 등이 갖고 있는 정보, 교육과정에 들어가는 정보, 각급 학교 및 개별 교사들이 갖고 있는 정보와 학생들의 정보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른가?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MOOC 등의 교육 플랫폼이 학습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기존 입시제도와 공교육, 사교육은 어떤 정보 플랫폼 위에서 돌아가는가?

정보라는 관점에서 학습자를 바라보자. 올바른 정보에 의한 합리적 결정(informed decision)이 가능한 구조인가? 교사와 학부모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현 상황의 정보 위계에서 가장 ‘바닥’에 위치하고 있는 건 학습자 아닐까? ‘학습자의 주체성’ 타령을 하기 전에 그들이 발딛고 설 수 있는 튼튼한 정보 플랫폼을 구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간단히 말하면, 교육 시스템을 정보의 선별, 통제, 공유 등의 관점에서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늘 그렇듯 답은 없지만 계속 안고 가야 할 질문.

대화

Posted by on Aug 2,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대화 [對話]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대화의 기술’은 대개 말하기(話) 만을 다룬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대함(對)일 지도 모른다. 마주봄 없이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말은 거처를 잃고 허공에 흩어진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인간을 정의한다면?

Posted by on Aug 1,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인간에 대한 정의: “가장 광범위한 맥락 하에 놓이는 존재”

“인간은 OO적 동물이다”라는 간명하지만 별 의미 없는 정의들이 있다. 사실 정의라기 보다는 강조하고 싶은 면을 부각시키는(‘수사학’이라기 보다는 ‘말장난’에 가까운 의미의) 레토릭에 가깝다. (호모 루덴스라고 하는데 놀 시간이 없어. 호모 파베르? 뭐 고장나면 눈물을 머금고 바로 수리기사님을 부르지.)

인간이 특별히 잘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굳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해 봤다. 딱부러진 답은 나오질 않았지만, 쓴 시간이 아까워 조금 억지스럽게 짜낸 답은 이렇다.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 복잡한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두뇌용량의 증가 및 문명의 발전 등으로 인해 다양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세계를 창조하고, 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 복잡하게, 다양한 세계와 조우하며 살아간다. (<비밀의 숲>의 여운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으나, 세상에서 고작 몇 명 읽을 논문을 붙잡고 늘어진 1인. 오늘은 강력한 더위의 충격으로 말 그대로 몸이 늘어난 듯하다. 세기말에는 데카당스에, 세기초에는 새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에 고뇌한다. 정말 참 내 별 걱정 다하고 산다.)

나의 사고와 행동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 역사에 기반한다. 한국사회의 특유한 역사에서, 서울이라는 시공간이, 부모형제를 비롯 인생길에서 만난 적지 않은 이들이 나의 뇌를 만들어 왔다. 나아가 읽고 본 책과 영화 등에서, 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에서, 미디어를 통해 접한 역사적 사건에서, 다양한 신화와 이야기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영향받고 있다.

즉, 우리 모두는 각자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에 따라 수많은 요인들의 영향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받고 있다. 우리의 두뇌-몸에 새겨진 기억은 인지, 감정, 판단, 행동, 의지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광범위한 맥락 하에 놓인 존재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시간축, 동시대 다른 존재들과의 교류, 밤하늘을 바라보고 그 너머를 응시하는 우주적 상상력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결국 굳이 인간을 ‘정의’해보라 한다면 “누구보다 많은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 존재” 즉, “가장 광범위한 맥락 하에 놓이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무언가 할 수 있음을 특성으로 갖는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시공간 하에 놓여지는 존재 말이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정의 아니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부각시키는 얄팍한 말장난이라고요.)

 

꼭 뵙고 싶습니다!

Posted by on Jul 27,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꼭 뵙고 싶습니다.”

이렇게 설레는 멘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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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신청 정원 초과시 학생들의 메일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강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거의 모든 메일에 부사 ‘꼭’이 등장한다. 위의 문장도 어느 학생의 메일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내가 수업을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학기 말이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가끔 ‘꼭 다시 연락하겠다’는 친구들도 있지만 인연을 이어가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연락하고 만나고 지내는 학생들은 큰 인연이지 싶다.

이렇게 2학기가 성큼 다가왔다. 학생들을 보고 싶지만 방학을 보내고 싶진 않다. 딜레마는 언제나 시간이 해결해 준다.

현재란 무엇인가?

Posted by on Jul 25,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현재’는 흔히 생각하듯 ‘물리적 순간’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서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100% 확실하게 예측 가능한 사건들의 집합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새학기 준비

Posted by on Jul 20,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흥미나 관심, 수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16주 수업의 개요와 읽기자료, 과제 및 평가방법까지 모두 정해야 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 두어 명의 중학생 친구들과 3년 여를 만나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그날 그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 물론 학생수가 적었다는 게 컸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상호 신뢰의 관계를 쌓을만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대학에서의 만남은 대개 강의계획서와 함께 시작됩니다. 첫 시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은 배움의 내용과 방향이 아니라 과제와 시험, 평가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에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 빈틈없이 짜여진 강의요목과 완벽한 변주로 흘러가기 – 이 둘 사이 어딘가에서 중심을 잡아야만 하겠습니다.
 
. 아직도 서툰 것은 이런 접근법을 ‘객관적’이어야만 하는 상대평가 구조에 통합하는 일입니다.
 
. 이번 학기에도 새로운 강의가 많습니다. 얕디 얕은 응용언어학/영어교육학 지식의 팽창은 계속되겠네요.
 
.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닌데 고민이 됩니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게 많습니다.

숭고함

Posted by on Jul 18,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반듯이 구별되진 않지만 약자가 자기 편인 사람이 있고, 자기 편이 ‘약자’인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둘다 약자를 위한다 믿고 살아가지만, 약자로서 약자를 섬기는 이들과 강자의 위치에서 강자를 키우려는 이들의 차이는 작지 않다. 영원히 약자로 남을 수 있는 강인함은 고통과 단련을 요구하지만 ‘숭고함’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단 하나의 성품 아닐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성평등 인권교육

Posted by on Jul 17,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해마다 돌아오는 교직원 대상 성평등 인권교육. 예전에는 뻔하고 지루해서 힘들더니 이젠 날것 그대로의 묘사가 사뭇 고통스럽다. 운좋게 폭력을 비껴 살아온 나도 이렇거늘 폭력을 경험했거나 위험에 상시 노출된 이들은 어떨까? 성’평등’ 교육이니 모든 이들이 동일한 내용의 교육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겨야 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끔찍한 상처를 헤집어야만 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손편지와 전자우편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우편, 편지’를 의미하는 영단어 mail은 고대 프랑스어 male에서 온 것으로 초기에는 여행 가방을 의미했다. 이후 우편제도의 발달에 따라 ‘우편물’ 혹은 ‘편지를 부치다’등의 뜻으로 진화했다. 20세기 후반에 대중화된 e-mail은 ‘전자우편’이라는 뜻의 electronic mail의 준말이다.

편지가 이메일이 된 것은 전달의 매개 즉 미디엄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우편배달에 있어 궁극의 퀵서비스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전달방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전자우편 기술의 반쪽만을 보는 결과를 낳는다.

이메일은 메시지의 전달방식(delivery method) 뿐 아니라 정보의 저장방식(archiving method)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편지는 정보를 담은 물체가 공간이동을 하지만, 이메일은 정보를 복제하여 상대와 공유한다. 편지는 내 손을 떠나 보내는 것이 맞지만 이메일은 실상 나에게도 너에게도 보내는 것, 즉 ‘카피 앤 페이스트’하는 것이다. ‘이메일을 보내시겠습니까?’라는 말은 ‘이메일을 복사에서 홍길동의 메일 서버에 붙이겠습니까?’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디지털 정보를 두 사람이 갖게 되는 사태는 물성을 지닌 편지가 받는 사람의 소유가 되는 사태와 사뭇 다르다. 편지라는 미디어는 정보 및 그 담지자(carrier)의 비대칭성을 특징이지만 이메일은 정보의 대칭적 소유가 특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SEND” 버튼은 “GIVE & TAKE” 아니, “TAKE & GIVE” 버튼이다. ‘보내기’ = ‘나 한부 갖고 너 한 부 갖자.’

편지를 보내는 순간 나에게서 떠난다. 사라지는 편지라야 진짜 편지라는 말이다. 이메일은 보내는 순간 나에게도 남겨진다. ‘보낼 편지함(미래)’에서 ‘보낸 편지함(과거)’로 이동하지만 여전히 내가 쥐고 있는 상황은 지속된다. 동일한 메시지를 담는다 하더라도 편지는 ‘사라짐의 미디어’이고 이메일은 ‘남겨짐의 미디어’랄까.

손편지를 쓰다가 뭐 이렇게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노트 필기였다면 이렇게 장황하진 않았을 거다.

숙제를 할 시간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일전에 언급했듯이 맘고생을 좀 심하게 한 수업이 있었다. 바보같은 두려움이 수업을 잡아먹었고, 몇몇 학생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연신 돌아보는 걸 보면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진 않았나 보다.

처음부터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응용언어학 전공자로서는 드물게) 해당 분야에서 실무자로 일했고, 프로그램 기획, 구축, 실행, 평가의 사이클도 여러 번 돈 경험이 있었다. 해될 것이 없는 자산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한 것은 몇몇 학생들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분명 강사로서 수업상황에서의 권력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매번 면접관들 앞에 선 기분이었달까. 몇몇의 항의성 이메일과 거침없는 코멘트 속에서 느껴지는 태도를 요약하면 이거였다.

‘그래 너 얼마나 잘 하나 보자.’

가르치는 일을 하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의 찌질한 트라우마를 차분히 들은 친구가 입을 열었다.

“요즘 친구들이 그런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 얘네들이 어렸을 때부터 인강을 듣고 자랐잖아? 그러니까 유명한 강사라도 좀 보다가 ‘아니네’ 하면 다른 강사, 또 ‘아니네’하면 다른 강사. 이렇게 선생을 골라가면서 공부한 세대거든. 그리고 고등학교 때나 학원 같은 데서도 무기명으로 평가를 해. 그때 마음에 안드는 게 있으면 자기 감정을 여과없이 다 쏟아놓기도 하지. 그러니까 선생을 고르고 평가하고 여차하면 ‘버리는’ 데 익숙해지는 거야. 그냥 어렸을 때부터 죽 해왔던 일이라 너무 자연스러운 거지. 너 개인에 대한 태도라기 보다는 그렇게 자라온 걸 거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게 다는 아니겠으나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맡고 그들과 마주하면 구조탓을 할 수는 없다.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일.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숙제를 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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