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바꾸고 싶은 것들

Posted by on Oct 18, 2018 in 단상, 수업자료,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일상에서 바꾸고 싶은 것들”이라는 주제의 쪽글 과제에서 한국사회가, 대학생 세대의 아픔이 보인다. 이런 내용들이다.

1. 하루하루 과제와 알바로 쉴 틈이 없어 어서 빨리 졸업하고 싶다
2. 스트레스로 자꾸 술을 마시게 된다
3. 긴 통학으로 피곤하고 집 주변에 별다른 시설이 없어 불편하다
4. 취업 준비로 인해 인생짐이 너무 무겁다
5.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
6. 연애가 무상하다
7.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다
8. 친구들과 경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9. 세상에 대한 걱정을 좀 덜하고 싶다
10. 새로운 물건을 사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다
11. 덜 먹어야되는데 자꾸만 먹게 된다.
12. 어둡고 부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다.

학생들의 고민을 읽으며 기성 세대가, 또 내가 참 무력하구나 싶다. 한 학기 충실한 수업을 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민상담성’ 문단을 쓴 친구들에게 답장을 보내며 나를 돌아본다. 내 안에도 바꿔야 할 것들이 참 많구나.

몇몇 절절한 글을 읽고 만나는 학생들의 얼굴은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와 나

Posted by on Oct 18,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방금 “나의 삶에서 바꾸고 싶은 것”을 주제로 한 영작 과제를 읽었다.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라면을 함께 끓여 먹던 추억을 회상하는 뭉클한 글이었다. 학생은 “아직 아버지와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있는 힘껏 사랑하세요.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세요. 왜냐면 우리가 함께할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까요.”라는 문장으로 글을 마쳤다.

오늘은 나의 아버지가 가신지 스물 여섯 해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나>에도 실었던 아버지와의 작은 추억을 꺼내어 본다.

===

여느 때처럼 어머니와 함께 한 점심. 지독했던 더위와 기적같은 가을 바람에 대해 이야기했고, 추석 때 어디에서 모일지 상의했다. 난 새로운 학기에 대한 우려와 기대를 말씀드렸고, 어머니는 사드THAAD 논란에서 누구 말이 맞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돌아오는 길 메신저 알림이 떴다.

“우야, 힘내라! 어제 꿈에 아빠가 나타났어. 잔잔한 미소로.”
“네, 어머니도 힘내세요. 근데 너무 힘들게 살진 마세요. 저도 아버지 보고 싶네요. 누런 서류봉투에 우유 싸 가지고 오시던 모습.”
“이제는 기도할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원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착각이죠.”
“맞아. 너희들이 아빠를 닮았어.”
“안 닮기 힘들죠. 하하.”
“파인애플 깡통 따던 아빠 모습. 너희들이 뺑 둘러앉아서. 기억나지?”
“그럼요!”

아버지가 파인애플 캔을 사 오신 날이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과일 통조림이지만 어릴 적 파인애플 깡통은 한 해에 두어 번 볼까말까한 그야말로 귀한 물건이었다. 저녁을 먹고 캔을 개봉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삼형제의 눈이 똘망똘망해졌다. 저녁상이 나가자마자 몸을 비비 꼬기 시작한다. 언제 따지, 언제 따지, 언제 따지? 맛있겠다, 추릅.

“아빠, 지금 먹으면 안돼요? 네? 네?”
“그러자, 뭐. 얼마 되지도 않는데.”
“와와와!!!!!”

환희의 순간도 잠시. 아뿔싸! 캔따개가 없단다. 안방, 마루, 건넌방, 부엌까지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단다. 이런 청천벽력이 있나. 삼형제는 울상이 되었다. 아니, 진짜로 운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칼과 망치를 가지고 나타나신 아버지. 두둥! 칼끝을 뚜껑에 대고 캔을 돌려 가면서 망치질을 하니 철옹성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조마조마. 그 와중에도 형제들은 파인애플 국물이 튈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아 보였다. 이제 겨우 반쯤 땄어? 세계 최장의 원둘레가 파인애플의 노예가 된 아이들의 인내력을 시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인고의 시간은 파인애플의 달콤함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아부지 최고! 파인애플 최고!”
“어? 국물까지 다 먹었네… ….”

어머니가 건네 주신 파인애플을 바라본다. 하얀 러닝셔츠 바람으로 위험한 연장까지 동원해 캔을 따 주시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두 분, 참 다르지만 또 참 많이 닮았구나 싶다

가짜뉴스, 소셜미디어, 그리고 몸

소셜미디어의 급속한 팽창은 패거리사고와 확증편향을 위한 최적의 정보생태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울러 소위 ‘가짜뉴스’도 창궐하고 있다. 미디어리터러시 교육으로 이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심히 회의적이다. 미디어가 몸의 확장이라면 그 몸이 점하고 있는 시공간, 그 몸이 처한 정치경제적 상황, 몸에 가해지는 다양한 물리적/신체적/심리적 힘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확장’만을 건드리는 것은 큰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가짜라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짜뉴스가 필요한 사람들이, 조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 필요는 ‘진짜’이며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언어경관 잡감

Posted by on Oct 1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영어 | No Comments

1. Drug-free zone

아래 표지를 보고 어떤 학생이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왜 여기에서는 (마)약이 공짜예요?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

2. “나무를 사랑합시다 (Keep off)”

한국어를 꽤 아는 한 미국인은 이 표지판을 보고 굉장히 재미있어 했다고. 일반적으로 표지에 두 언어가 있을 때 기본 가정은 두 표현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처참하게 깨는 표지판. (나무를 사랑합시다 vs. 가까이 오지 마)

– 원어민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표지들이 언어학습자/외국인 입장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됨.

3. 좀 오래된 일이지만 미국 뉴욕의 Flushing에 한국어로만 된 간판이 너무 많아져서 시에서 규제를 할까 검토하려 한 적이 있었다고 함. 아래는 관련 뉴욕타임즈 기사.

Ethnic Friction Over Signs That Lack Translations

4. 한국의 교통표지, 행정 관련 안내 등을 보면 한국어, 영어 표기가 가장 많고 이 외에 중국어와 일본어 표기가 종종 발견됨. 하지만 현재 한국에 체류중인 외국인 국적 통계에 따르면 중국이 1위, 미국이 2위이고, 근소한 차이로 베트남이 3위. 이후 일본이 4위 태국이 5위라고 함. 언어경관에서 우세한 언어와 실제 표지판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음.

5. 한국은 보통 외국어로서의 영어(English as a Foreign Language)를 쓴다고 함.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쓸 일은 없기 때문. 하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간판, 광고, 교통표지, 안내, 상품 설명 등에서 영어의 존재는 엄청남.

언어의 풍경을 잘 들여다 보면 단순한 정보의 다양화가 아닌 사회문화적 권력이 발견됨.

#언어경관

학기 6주차 단상

Posted by on Oct 17, 2018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어쩌면 강사의 마음은 단 한 번도 함께 연주한 적이 없는 연주자들을 데리고 15주간 서로 다른 레퍼토리로 공연을 해내야 하는 지휘자의 심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같은 말은 없다.

Posted by on Oct 16,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주어요”에서 “줘요”로의 변화는 아무런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문법서의 설명은 이 둘을 등호로 연결한다. 하지만 쓰임과 의미의 영역에서 이 둘은 사뭇 다르다. 비주얼 디자인의 영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등호로 연결된 수많은 언어들은 사실 같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엄청난 차이를 수반할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를 뿐 아니라 “줘요”다르고 “주어요” 다른 것이며, “혼코노” 다르고 “혼자 코인 노래방” 다른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의미와 말의 관계

Posted by on Oct 16,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서너 개의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사고의 지형에서는 철저한 단일언어구사자인 사람이 있고,

하나의 언어만을 구사하지만

자유로운 다중언어구사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의미와 말은 반듯한 일대 일 관계에 있지 않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 위한 영어공부 – 집필방향

Posted by on Oct 15, 2018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집필 | No Comments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다음 세 가지 영역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1. 한국사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어교육 담론으로 자리잡은 Krashen의 언어학습이론을 비판적으로 읽어내기

영어교육의 수많은 당사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인풋이 중요하다”라는 말의 뿌리가 되는 학습이론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영어학습에 적용하기.

2. 원어민 중심주의(Native speakerism)의 비판적 해체

한국사회에서 가장 은밀하고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원어민 중심주의의 해체. “원어민처럼 완벽하게”, “네이티브 되기”, “아무리 해도 안되는”과 같은 말 속에 숨어있는 원어민 우월주의 및 중심주의를 들여다보고 무너뜨리기.

3. 사교육과 공교육의 압도적인 담론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어공부의 길 찾기

‘그들의 영어교육’에서 ‘내 삶의 영어공부’로의 전환. 삶을 가꾸고 성찰과 소통을 키워가는 재미있는 영어공부로의 초대.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집필중

Dr. Hall in Seoul

Posted by on Oct 14, 2018 in 단상, 영어, 일상 | No Comments

Dr. Hall visited Seoul, South Korea and gave a plenary talk on the transdisciplinary framework for SLA in a multilingual world at the ALAK (Applied Linguistics Association of Korea) conference. Although I read the article by the Douglas Fir Group, the talk, with her articulate and persuasive voice and relevant examples, further challenged me to think deeper, act concrete, and become an agent of change as a teacher, however small it may be. It reminded me of those ‘good old days’: I fell instantly nostalgic for the vibrant, inspiring academic conversations on campus with so many bright minds.

A PSU reunion followed her talk. Our conversation flowed a long way, covering our then-to-now lives, international relations, US and Korean politics, her years as president of AAAL, the joy and sorrow of scholarly writing, and, of course, our dear memories in State College and beloved APLNG friends. Even though I took her language socialization class ten years ago, it felt like a blink of an eye. Time flies, we stay apart, but the karma is always there, interweaving us in a mysteriously wonderful way.

I got her autograph on her recent book, “Essentials of SLA for L2 Teachers.” I rarely ask authors to sign their books, but I felt I had to do this this time. It has already been ten years; I do not know when I can see her in person again. So I wished to cherish the shining moment for a long time.

Now it’s time to wrap up this week and prepare for this week’s classes. It was a great weekend. I feel a little bit more hopeful, even in the turmoils of this unfathomable world. Thank you Dr. Hall, and I hope you have a safe trip back.

아프고 슬프고 화나고 살짝 짜증나는 유기견 도림이 이야기

Posted by on Oct 10,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동물을 사랑하는 친구분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오후 세 시 반 경. 따스한 가을볕을 받으러 신대방역으로 갔다. 갈대가 흔들리는 도림천 변. 조금 더운 날씨였지만 쏟아지는 햇살에 참 기분이 좋다. 10분 쯤 걸었을까. 아저씨 아주머니 네 분이 뭔가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다가가 보니 시츄 한 마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게 아닌가. (도림천에서 만난 이 강아지 친구를 도림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한 눈에 봐도 도림이는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안좋아 보였다. 그래도 네 분이나 둘러서 살펴보고 계시기에 아픈 마음을 접고 산책을 계속했다.

이십 여 분을 걷고 돌아오는 길. 도림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 홀로 도림이를 지켜보고 계신다. 다가가 “누가 신고라도 하셨나요?”라고 묻는다. “아니요. 그냥 얘가 너무 불쌍해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네요.” “아 그렇군요. 정말… 많이 아픈 거 같은데…”

바로 전화를 꺼냈다. 순간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할 지를 모르겠기에 114로 전화를 걸었다.

“힘내세요, 고객님! 어디로 안내해 드릴까요?”
“정확히 어디로 전화를 걸지 몰라서 여쭙습니다. 유기견을 발견했는데요. 어디로 연락을 하면 될까요?”
“아 네. 어디이신가요?”
“네? 어디라뇨?”
“아 계신 지역이 어디이신가에 따라서 안내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아, 네. 동작구 2호선 신대방역 부근입니다.”
“네네. 그럼 동물구조관리협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거기가 동물구조를 담당하는 기관인가요?”
“네네.”
“문의하신 번호는 OOO-OOO-OOOO 입니다. 자동으로 연결하시려면 1번을 누르세요.”
(1번을 바로 누른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기를 든 채로 도림이를 다시 내려다 본다. 여전히 심하게 떨리는 몸. 눈이 완전히 풀려 있다. 세상 모든 게 다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아… 전화 좀 받아요, 빨리. 얘 잘못하면 죽는다구요.’ 수십 번의 신호에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를 끊고 “동물구조관리협회”를 검색해 전화번호를 다시 알아낸다. 여전히 답이 없다. 결국 구조협회는 포기한다. 웹사이트에 사단법인으로 나와 있는 걸 보니 휴일에는 쉬는 것 같다.

다시 114로 전화. 서울의 경우 개별 구청에 유기견과 관련된 부서가 있다고 알려준다. 신대방역이라 하니 관악구청 당직실로 연결. 신고를 친절하게 받아주시는 건 좋은데 긴급출동이 아니라 30여 분이 걸린다는 말씀을 하신다.

‘아 한시가 급한데. 정말 미치겠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매뉴얼을 보니 동물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을 경우에는 119에서 출동을 하신다고 하네요. 그쪽으로 연락해 보시죠. 그래도 안되면 다시 연락 주시고요.” “아 정말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딸각)

119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설명하고 끊었다. 이제 10분 안으로 구조요원들이 온다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응급치료를 해도 주인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운명이지만, 당장 생명은 구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잠시 후 119 구조대원에게 연락이 왔다.

“거기가 어디죠?”
“여기가 신대방 1동 경로당 쪽인데요.” (참고로 신대방동은 동작구에 속한다.)
“아 그래요? 근데 저희가 동작구 쪽으로는 못 건너 가거든요. 이쪽 반대편에 구로전화국 가는 쪽에 나와서 기다려 주실래요?”
“네? 거긴 길 바로 건너편인데.”
“그래도 이쪽에 와서 기다려 주세요. 저희가 거긴 못가거든요”
“네네 알겠습니다.”

아, 행정구역 편의주의를 드디어 경험하는구나. 휴일에 근무하는 119 대원들이 고맙긴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은데. 요 앞에 차대면 금방인데 건너편으로 오라니, 라면서 건너편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몇 분이 지나 구급대원을 실은 빨간차가 왔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쪽입니다.” 대원 세 명과 나는 잰걸음으로 도림이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삼분의 이쯤 왔을까. 100여 미터 앞에 도림이가 보인다. ‘조금만 기다려 도림아. 곧 간다. 아저씨들이 너 금방 데려가 주실 거야.’

그런데 그 때 울리는 한 구급요원의 전화.

“아, 화재라구요? 어디죠? 네네. 네네. (반말로) 야 화재다, 긴급. 화재. 화재출동! 화재출동!”

앞장서 가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림이를 만나기 전 100미터. 구급대원들은 발걸음을 돌려 빨간차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뭔 황당 시츄에이션? 나는 급기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 저기 바로 저긴데! 저기 보이는데! 강아지 데리고 가시죠!”
(대원들은 대답도 없이 성큼 성큼 멀어진다.)
“저기 강아지가 보이잖아요!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데려가시면 안돼요?”

아아 사랑하는 나의 구조대원들은 갔습니다.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허탈했다. 신고에서 119 대원들을 만나기 까지 한 시간 여. 눈앞에 도림이를 두고 화재 출동 신고를 받은 구조대원들이 사라졌다. 짜증이 났다. 화가 났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긴급 화재 출동이라는데.

터벅터벅 돌아와 아까부터 같이 계시던 할아버지, 이후 합류한 아저씨 한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저 보셨죠? 거의 다 왔는데…”
“그러게, 왜 돌아간대요?”
“화재가 났대요. 그게 우선인가 봐요.”
“그렇긴 하겠지. 사람이 먼저일테니까. 근데 다와서 그냥 가나.”
“네 그러게 말이예요. 우선순위가 있겠지만 황당하고 짜증도 나네요.”

오기가 생겼다. 도림이를 이렇게 두고 갈 수는 없다.

관악구청 당직실에 다시 전화를 했다. 구청과 연계된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다. 다만 시간이 30분 정도 걸릴 거라 했다. 괜찮다고 말했다. 잠시 후 위치 확인 전화가 왔다. 신대방역에서 도림천으로 내려와서 구로디지털 단지역 쪽으로 오다 보면 기둥에 P31이라고 써 있는 곳이라 말해주었다. 네비를 찍고 오면 신대방1동 경로당이라고.

그렇게 30여 분의 기다림이 시작되었고, 짧은 시간 나와 아저씨 그리고 할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림이의 상태로 보아 그냥 놓아준 게 아니라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던진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 다리를 저렇게 동시에 못쓸 일이 있을까. 물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았다. 털은 지저분했고 눈은 풀려 있으며 다리 뒤쪽은 속살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벗겨져 있었다. 다리를 제대로 못쓰니 일어나지 못했고, 한 자리에서 온몸을 계속 떨고 있었다. 어떤 분이 물을 가져다 주었는데 물을 마실 힘도 없어 보였다.

“저거 진짜 도로에서 천으로 던진 거면 진짜 천벌을 받을 놈이여.”
“정말 던진 거 같네요. 인간같지도 않네요.”
“이거 신고해도 응급처치하고, 주인 안나타나면 시한 되면 안락사 시킬 걸요?”
“아까 그 분들 출동해가지고 눈앞에서 너무하네요.”
“개고기 먹는 거 금지해야 돼요.”
“고기는 아예 못먹게 해야돼.”
“동물을 사랑할 자신이 없으면 첨부터 키우질 말아야지.”
“책임도 못질 거 왜 키우기 시작했디야.”

지나가던 한 여자분이 강아지용 통조림을 가지고 도림이 앞에 섰다. 캔을 따서 도림이 입에 대자 엄청난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먹을 힘이 있다는 건, 그리고 저렇게 열심히 먹는다는 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제 구청을 통해 연락한 단체에서 사람이 오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다.

아,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이게 왠일인가. 아까 화재 현장으로 출동한 대원들이 다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당했다. 30여 분 만에 화재 현장이 정리된 건가. 화재같지도 않은 화재였나.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 아까 화재 출동하신 거 아니었나요?”
“아, 그게 다 정리가 되어서 바로 왔죠.”
“아 네, 다행이네요. 근데 다른 데 신고를 했는데 그건 취소를 해야겠군요.”
“네? 어디에다 하셨는데요?”
“아 구청에 연락했더니 유기견 관련 업무 담당하는 업체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네. 그래도 저희가 먼저 왔으니 강아지는 데려갈게요.”
“네네. 누가 데려가시든 잘 보호해 주시면 되죠.”

도림이는 구조대원의 손에 이끌려 휴대용 개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원이 도림이를 일으키는 데 짧은 경련. 거의 경기에 가까운 떨림이다. 다리가 온전치 않으니 다리를 펴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통인 듯했다.

“그래도 와주셔서 다행이네요.”
“네네. 화재가 빨리 끝나서요.”

도림이 구출작전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제 다시 구청에 연락을 해서 구조요청을 취소해야 하는 타이밍. 그런데 바로 그 때 핸드폰이 울린다.

“유기견 신고하셨죠?”
“네네. 신고드렸는데, 지금 방금 119 구조대에서 와서 데려가고 계세요.”
“네, 뭐라고요? (당황+약간의 짜증) 여기에 신고하신 거 아니예요?”
“아 그건 맞는데요. 제가 119 신고했는데 화재 현장 가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못오신다고. 그런데 화재가 빨리 정리되어서 방금 오셨어요. 아, 제가 바꾸어 드릴게요.”

119 구조대원과 동물 구조단체 담당자가 통화를 한다.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119 구조대원이 동물구조 하시는 분께 도림이를 넘길 것 같은 분위기. 다시 전화를 돌려 받는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인사를 주고 받는다. 아깐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최대한 빨리 돌아와 주었으니 천만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저녁 미팅이 있었는데 도림이, 아니 휴일의 애매한 신고체계+예상치 못한 화재 때문에 한 시간 여를 미뤘다.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낸다. 그래도 괜찮다. 도림이가 구조되는 걸 보고 가게 되어서.

자자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구청과 제휴한 동물보호 요원이 다시 전화를 하셨다. (나중에 알아보니 구청에서는 보통 동물병원 같은 곳에 구조를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처음에 강아지를 어디에서 발견하신 거죠?”
“아 신대방 역 밑에 도림천 부근요.”
“그런데 그게 신대방동 쪽이었나요? 동작구 쪽.”
“네 처음 발견한 건 그쪽이었죠.”
“근데 왜 동작구청으로 연락을 안하시고.”
(이 어이 없는 질문에 살짝 화가 났지만 나름 차분하게) “아 그게, 신대방역이라고 말하고 114에 물어봤더니 관악구청 전화번호를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야 어디서 오든 상관이 없으니 연락을 그쪽으로 한거죠.”
“아 네네. 알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이렇게 파란만장한 오후가 갔다.
도림이와 함께한 두 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도림아, 제발 꿋꿋하게 버텨줘. 그리고 건강해져서 다시 누군가의 품에 안길 수 있길 바라. 삼촌이 간절히 기도할게.’

아 눈물난다.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