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교육학 수업을 준비하다가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1. “갈등이 없으면 삶의 존엄성이 손상됩니다. 투쟁과 갈등이 없는 삶 또는 인간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갈등을 부정하는 것은 생생하고 사회적인 경험의 현실적인 측면을 대부분 무시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2.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읽어가며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학생들은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불만도 많다. 거의 모든 학생이 현실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흥미로운 것은 변화의 당위에 대한 긍정과 갈등과 투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동시에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변화가 필요하지만 갈등이 심해지는 건 피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다.

3. 첫 인용구에 드러나듯이 프레이리는 갈등을 대면하는 행위를 삶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본다. 양심의 동반자라 칭한다. 세상을 경험하고 의식화가 진행되고 나면 갈등을 알게 된다기 보다는 갈등을 직시하는 가운데 존엄과 양심이 회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갈등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윤리적 삶의 지표다.

4. 프레이리가 말하는 ‘의식화’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며 거기에 존재하는 갈등과 희망을 받아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습량과 비례하지 않는다. 헨리 지루는 “해방적인 지식을 거부하는 이들은 오히려 지식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알면 알수록 껄끄러운 일들을 멀리하고, 지식을 해방의 도구보다는 축적의 수단으로 쓰는 이들이 많아진다. 프레이리와 지루의 말을 더하면 알면 알수록 존엄은 스러지고 양심은 잊혀진다.

5. 비판교육학에서의 ‘갈등’이 주변 사람들과의 불화와 같지는 않다. 물론 정당과 노조활동가, 사회운동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은 직접적인 갈등상황을 피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학생들과 비판교육학을 논의할 때 나는 ‘주어진 내러티브’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곤 한다. 다시 지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이른바 자기가 생산한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담론은 교사와 학생이 구현하고 생산하는 복잡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형식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많은 쟁점들은 이 관심사를 중심으로 비판교육학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교사는 지성인이다>, 211쪽)

6. 지루의 말 중에서 핵심은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미를 만들고 공유하고 때로는 강요하며 살아간다. 사회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장 잘 하는 일이 의미생산인 것이다. 그런데 갈등없는 삶에서 이 의미는 그저 부여된다. 앎이든 삶이든 저항없이 순항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삶은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바람을 맞고 무르팍이 깨지기 전에는 몸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암묵적으로 만들어낸 의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상황이 계속된다.

7. 학교 현장에서의 비판교육학은 지배적 서사에 대한 온갖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식을 쌓음과 동시에 그에 대해 의심하는 습속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 누가 규율을 제정하는가? 누가 상식을 정의하는가? 누가 나의 생각을, 나아가 우리의 생각을 만드는가? 김성우는 왜 나에게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는가?

8. 비판교육학 수업을 앞두고 갈등에 대해 끄적여 보았다. 갈등에 취약한 사람으로서 갈등을 끌어안는 사상에 대해 논의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갈등이 삶의 필연적 조건임을 깨닫고 그 복판에 뛰어들었음에도 희망과 사랑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제나 마음이 차오른다. 비록 한 주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학생들이 삶의 서사의 작동방식을, 생각의 연원을, 갈등과 저항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제 수업 준비를 마무리해야겠다.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Apr 1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코로나 19가 준비할 틈도 없이 미래교육을 앞당기고 있다”는 MBC 뉴스의 한 꼭지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교육이 ‘미래교육’이라고? 정말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구나 싶다. 교사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이 미래의 교육일 수는 없다.

2. 선거가 끝나고 ‘자유 민주주의’는 가고 ‘평등 민주주의’가 오기를, 하고 중얼거렸다. 단지 정치세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종종 아쉬우나 우리의 불평등은 내내 잔혹하다.

3. 학생들에게 절대 내 책을 읽히지 않는 이유

나: 대학 때 자기가 쓴 책 읽히는 교수님들 있었어?
짝: 어어 두어 명 있었던 거 같아.
나: 어떤 기분이 들었어?
짝: 장사꾼 같았어.
나: (깨달음)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수업에서 나의 책을 읽으란 말을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대학원 수업 시간 나의 책을 읽었다는 학생이 무려 둘이나!

말하지도 않았는데 읽는 것은 말리지 않는다. 그저 감사할 뿐. ^^

4. 바이러스와 인간, 공간과 시간, 개인과 사회, 신뢰와 공포, 내부와 외부, 국가와 국가, 정치와 의료, 디지털과 아날로그, 손과 얼굴,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처절하게 배운다. 최대한의 거리확보를 위해 각자의 방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시절, 모든 것이 거대한 하나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를 세상에 중심에 놓았던 어리석었던 날들을 돌아보길 빈다. 인간은 그저 변방의 한 노드(node)일 뿐이니까.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지만, 만물과의 전쟁에서는 대패하기를. 이제껏 그래왔듯 득의양양 오만한 승자처럼 나대는 행태는 사라지길 간절히 빈다.

5. ‘생각해 보면’이나 ‘돌아보면’ 같은 단어를 자주 써왔다. 어쩌면 스스로가 성찰의 시늉을 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일기를 쓰고, 쪽글을 쓰고, 수업에 대한 메모를 하고, 대화를 기록하고, 이들에 대해 곱씹고… 그것들을 ‘성찰’이라는 두루뭉술한 이름으로 묶어 온갖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기충족적인 성찰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는 나의 비판과 성찰은 글 밖에서 무엇이란 말인가.

6. 다음 영어교육과정 수업 주제가 비판적 교육학(critical pedagogy)이다. 간만에 프레이리를 다시 읽는다. 점점 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끌린다. ‘희망’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빛을 잃어가는 시대라서일까. 온몸으로 세상에 부딪치는 사랑과 희망이 된 이들에게 감사한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대화도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창조와 재창조의 행위는 사랑과 융합되지 않는다면 가능할 수 없다. 사랑은 대화의 주춧돌인 동시에 대화 자체이다. 따라서 사랑은 책임있는 주체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지배관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지배관계에서는 사랑의 병리적 현상이 나타난다. 지배자에게서는 사디즘, 피지배자에게서는 마조히즘이 엿보인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사랑의 행위가 그들의 대의, 즉 해방을 바라는 욕구에 더해져야 한다. 사랑이 깃든 이런 헌신은 대화라는 형태를 띤다. 사랑하려면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사랑은 감상적 사랑일 수 없다. 자유의 행위로써 사랑이 조작의 구실거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또 다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행위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조건이 더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억압적 상황을 없애야만 비로소 억압적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던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파울로 프레이리. – 피터 맥라렌 저. 강주헌 옮김. <체 게바라, 파울로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 (아침이슬, 2008) 266-267.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짝과나 #일상스케치

실력이 없어 떨어진 걸 누굴 탓해

Posted by on Apr 18, 2020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가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곤 하는데 이런 거다. 모든 정당에 대한 언론보도의 양과 질이 균등해진다면 국민은 어떤 세력을 선택할 것인가? 신문과 방송, 각종 포털이 민주당과 녹색당, 미래통합당과 정의당, 노동당, 여성의 당을 같은 비중으로, 어느 정도 공정성을 유지하면서 다룬다면 누가 ‘손해’를 보고 누가 ‘이득’을 얻을 것인가? 지극히 비현실적인 가정임을 알지만 사고실험을 해보자는 거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표의 결과를 균등하게 배분하려는 노력이라면 투표의 사회문화적, 정보적, 제도적 조건을 좀더 균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물론 현실은 연동형 비례대표의 취지마저 무색해지고 다수당은 꼼수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다수당 지지자 다수가 소수정당에 ‘실력이 없어서 떨어진 걸 누굴 탓하냐’고 말할 때 놓치고 있는 것은 선거의 조건이다. ‘다수 프리미엄’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과연 지금의 정당과 선거제도는 이같은 ‘메타인지’를 촉진하는가? 아닌 것 같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교육의 온라인화를 넘어 급진적 상상력으로

‘교육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했다’는 패러다임으로는 지금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적확하고 풍부하게 이 사태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고, 이 상황에서 삶과 교육이 접속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다’는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 좀더 적절하다. 그저 교육이 오프에서 온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삶의 양태와 교육이 접속하는 방식이 되돌릴 수 없을만큼 변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전에는 삶이 교육과 접속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는 ‘등하교’였다. 등하교를 중심으로 일련의 사건들이 조직되고 실행된다. 등하교가 적절히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을 적절히 조직해야 한다. 아침 등교를 위해 일정시간 취침을 취해야 한다. 등하교 시간을 염두에 두고 하루가 계획되어야 한다. 저연령 학습자들의 경우라면 그 시간에 맞추어 보호자들의 시간 또한 조정되어야 한다.

즉 성공적인 등하교를 위해서는 가족이, 학생 본인이, 대중교통 운행주체가, 교사가, 학교가 책임져야 할 영역들이 존재한다. 작업계획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협업이 기막히게 맞물려 돌아가야만 ‘등하교’라는 의례가 성공적으로 수행된다. 그런데 이것은 학교생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수업의 시작과 끝, 교과서를 펴고 읽는 행위, 준비물을 가져오는 일, 학교에서의 점심식사, 학교행사, 도서관 등 학교시설 이용 등 모든 것이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근거하고 있다. 실로 엄청난 ‘사회계약’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몸(body)의 문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은 교수학습방식의 변화를 낳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몸의 변화를 가져온다. “어 생각보다 콘텐츠가 괜찮네”라고 말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이 콘텐츠를 하루 종일 시청해야 할 몸”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고려가 없는 온라인 교육은 결국 ‘훈육에 적합한 몸’만을 겨냥한 교육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실로 교육의 몰락, 아니 타락이다.

근본적으로 학교는 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공간이다. 그 안이 시끄럽고 삐걱거릴지라도 결국 한 공간 안에 여러 사람이 함께 존재(copresence)함으로 발생하는 사회문화적, 제도적, ‘분위기적’ 힘이 존재한다. 물리적 공간에서 문화와 규율을 공유하는 개인들은 결코 ‘개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온라인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탈각된다. 화면 안에 수십 명이 들어왔을 때 작동하는 사회성은 한 교실 안에 수십 명의 몸이 공존할 때 작동하는 사회성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육이 수반하는 다양한 의례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책임과 역할, 온라인 교육에서의 몸의 변화, 공존의 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콘텐츠를 잘 만들 것인가’나 ‘어떻게 인프라를 확충할 것인가’의 고민으로 해결될 수 없다. 교사들의 노력은 소중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교육을 만들어 내려는 궁리는 존경스럽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육부가 소위 ‘뉴노멀’이 될지 모르는 온라인 교육의 미래를 고민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온라인 교육으로 기존의 교육을 커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삶의 질서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온라인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질문은 ‘어떤 콘텐츠를 만들고 나누어줄 것인가’를 넘어 변화하는 삶의 지형 속에서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야 한다. ‘온라인 교수학습’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재구조화 속에서 교육의 본질을 재구조화하는 작업’이 절실한 것이다.

완벽하게 밍기적거리기

Posted by on Apr 14,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나: 수정할 글이 있는데 하루 종일 밍기적거리기만 하고 하나도 한 게 없네.
짝: (호통인가) 하루 종일 한 게 없긴 무슨!
나: ……???
짝: 하루 종일 밍기적거렸잖아. 밍기적밍기적. 뭔가 열심히 했네.
나: 뭔가… 열심히… 한건가? (설득된다.)
짝: 그럼! 그것도 종일.

언젠가 스스로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완벽히 해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완벽히 빈둥거리는 건 가능하다.”

방향을 바꾸어 완벽해지기로 한다.
COVID-19 시대의 자아실현법.

#밍기적makesperfect #짝과나

페이스북, 관계의 딜레마

Posted by on Apr 14,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페이스북의 친구신청. 누군가에게는 ‘최소한의 상호성’을 수반하는 관계맺기라면, 누군가에게는 ‘구독 승인 절차’에 불과하다. 이같은 태도의 차이를 잘 알고 있지만 ‘친구’가 생길 때마다 가끔이나마 소통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데 점점 쉽지 않다. 나 또한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기에 최근에는 소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분들께는 일절 친구신청을 하지 않는다. 얼마 전 타임라인에 뜨지 않는 친구분의 타임라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최근의 글이 여럿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보고싶은 포스트를 감추는 시스템이라니.

최근 몇년 간의 페이스북 생활에서 느낀 바일 뿐 특정한 분들을 염두에 둔 이야기는 아니다. ‘친구를 정리한다’는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시는 분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는 요즘이다.어떤 ‘임계점’이 다가오는 느낌. 질기디 질긴 우유부단함. 참 재미없는 인간과 오래도록 함께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 그런 것들이 범벅된 밤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고 지켜본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글

Posted by on Apr 9, 2020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쟁에서 사퇴했다. 역사의 한 챕터가 끝난 느낌이다. 그에 대한 호불호야 갈릴 수 있겠으나, 그가 미국 정치를 좀더 왼쪽으로 끌고 왔다는 점에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그의 운동(movement) 전의 민주당 정강과 이후의 정강은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슈퍼팩’(Super PAC)’의 지원을 받지 않고 풀뿌리 운동 중심으로 정치혁명을 이끌었다. 한계도 실수도 많았지만 나는 그 점에서 그가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퇴가 아쉽지만 그에게서 영감을 얻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등의 정치인이 운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력은 줄어들고 동력은 약해지겠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는 후대가 짊어질 몫이다. 그를 응원했던 지난 대선을 돌아보며 그간의 쪽글 몇 개를 모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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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18.

“환경이 은행이라면 벌써 살렸을 것.” – 버니 샌더스
(금융) 자본주의의 두 얼굴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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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15.

2014년 오늘, 버니 샌더스에 대한 기사를 소개했다. 당시만해도 샌더스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었기에 관심을 가진 페친 또한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라고 해야 하나. 현재 버니 샌더스는 뉴 햄프셔와 아이오와 여론 조사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앞서고 있고, 지지율의 상승세 또한 꺾이지 않고 있다.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로서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진보정치의 신념을 지켜온 샌더스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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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2.

UFC 세계 챔피언이자 배우인 Ronda Rousey가 버니 샌더스 지지하기로 했다는 기사. 그녀가 샌더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던진 말이 인상적이다.

“나는 버니 샌더스에게 투표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업들로부터 돈을 받질 않거든요. 나는 정치인들이 외부 이익집단으로부터 선거 자금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I’m voting for Bernie Sanders, because he doesn’t take any corporate money,” Rousey told Maxim. “I don’t think politicians should be allowed to take money for their campaigns from outside inter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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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31.

예상대로 뉴욕타임즈는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NYT의 독자로서 아쉬움이 크지만 단순히 ‘보수언론의 한계’라 부르고 싶진 않다. 막판 지지 선언은 NYT의 한계라기 보다는 그간 쌓아온 권력의 행사니까. 그게 샌더스가 돌파해야 할 비정한 현실이니까. 재미있는 것은 학자이면서 NYT의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은 ‘비현실적 정책’을 이유로 버니 샌더스에 맹공을 퍼부었음에 반해, 학자 출신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샌더스의 비전과 정책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결과에 관계없이 샌더스 지지자들의 운동이 이어지길 빈다. 아래로부터의 권력만이 진정한 정치혁명을 가능케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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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4.

샌더스의 주장은 여느 정치운동과 마찬가지로 대략 세 층위에서 파악할 수 있다.

1. 현재 미국은 엄청난 불평등 사회다. (하위 주장: 엄청 잘살 수 있는데 엄청 불평등하다. 충분한 돈을 가진 나라인데 의료보장과 사회안전망이 엉망이다.)

2. 불평등은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불평등은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 재생산된다. (하위 주장: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행태, 대자본의 선거 매수 등이 그 뼈대를 이룬다.)

3. 이 구조는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아래로부터의 정치혁명 뿐이다. (하위 주장: 나는 대기업의 돈을 원하지 않고, 그들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이를 다음과 같은 기술로 바꿔볼 수 있다.

1.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인식: 많은 이들은 기이할 정도의 불평등에 대해 무지하다.

2. 해결 가능성과 방법에 대한 인식: 불평등을 인지하더라도 정치운동에 의한 사회구조 혁신보다는 개개인의 노력, 각개전투로 해결하려 한다.

3. 운동 참여: 많은 이들은 ‘불평등의 구조가 있지만 어쩌랴, 사회가 그렇게 굴러먹은 걸’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내가 뭐 좀 한다고 바뀔게 뭐있나?’라는 생각에 그친다.

변화의 관점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1. 불평등에 눈뜨게 하는 가장 강력한 데이터는 무엇인가.

2. 각종 데이터를 관통하는 구조적 요인들은 무엇인가?

3. 인식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플랫폼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이런 주제들과 관련하여 선거 기간 버니 샌더스의 전략에 대해 짧게 썼던 글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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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쟁에 나선 Bernie Sanders의 선거전은 그야말로 원칙에 충실한 모습이다. 자신이 누구를 위해 나왔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를 단박에 알려준다고나 할까. 두어 달 지켜본 그의 모습에서 몇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1. 경제 이슈에 집중한다. – 미국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빈부격차와 소득격차에 집중한다. 미국 자본주의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계속해서 부각한다. 이때 자주 쓰는 표현은 “지긋지긋하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Enough is enough)!!”이다.

2. 핵심 이슈를 반복 또 반복한다. – 어떤 방송에 나오든 첫 대목에서 미국의 현상황과 자신의 핵심공약을 빠르게 되짚어 준다. (나같은 경우 매일 보는 것도 아닌데 거의 암기가 될 정도가 되었다.)

3. 기억하기 쉽고 ‘충격적인’ 통계치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장 돈 많은 월마트 소유주 Walton가의 재산은 미국민 하위 42퍼센트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같다는 통계다.

4. 네거티브 광고를 하지 않는다. – 그는 정치 인생에서 네거티브 광고를 찍은 적이 없다고 한다. 언론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싸움을 붙이려고’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그때마다 “힐러리를 동료로서 존중하고 좋아하지만, OOO와 같은 핵심 이슈에서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힐러리는 걸프전에 찬성표를 던졌고, 나는 반대했다.” 같은 식으로 대응한다.

5. 거대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시민참여운동으로 선거를 조직한다. 소셜 미디어에서도 (투표권도 없는 나를 비롯한) 많은 ‘운동원’들이 자발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

6. “사회주의자”라는 공격에 당당히 맞선다. 북유럽의 사회보장제도가 사회주의라면, 자신은 그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북유럽이 하고 있다면 미국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대응한다. (공립) 대학까지 무상교육 실시, 의료보장제도의 획기적 확대 등이 주요 공약에 포함되어 있다.

7. 계급적 지지기반을 확실히 밝힌다. 자신은 철저히 서민과 중산층을 대표한다는 점을 하며, 이른바 ‘수퍼리치’와 확실히 선을 긋는다. 관련하여 최저임금 15달러 안이 핵심 공약 중 하나라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진심으로 버니 샌더스의 선거 혁명이 성공하길 빈다. 사진은 버몬트의 버링턴 시장이었던 81년도의 모습. 내가 생각하는 그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사진인 듯하여 가져와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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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10.

[버니 샌더스-선거공학을 넘어선 ‘정치혁명’을 주장하다] 버니 샌더스가 후보가 되면 결국 공화당이 승리하고 국제 정세가 불안해지고 삶이 더욱 나빠질 것이라는 예측을 본다. 자본과 정치가 의리로 똘똘 뭉쳐 있는 현재 시점에서 이런 예측은 분명 어느 정도의 근거와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 ‘합리적 예측가’들이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버니 샌더스가 자주 언급하듯 이번 선거의 이슈는 ‘이번 선거에서 누굴 뽑느냐’를 넘어 기존의 정치세력(political establishment)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샌더스는 ‘정치과정(political process)’과 ‘정치혁명(political revolution)’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표를 구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자는 요청이다. 관련하여 다음 일화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언젠가 샌더스가 오바마의 가장 큰 실수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있다. (기억에 의한 것이므로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오바마의 선거의 열기는 엄청났다. 젊은이들의 참여도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당선되자 마자 “자 이제 여러분들의 일은 끝났습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이제 저에게 맡기세요.”라고 말했다. 이게 오바마의 가장 큰 실수다.”

그는 외교나 인권 등 한두 영역을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진정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지자들을 스스로 해산시킨 오바마를 비판했다. 선거의 동력을 풀뿌리 민주주의, 아래로부터의 변화의 동력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지적이었다. 선거시기 이후의 정치역학, 민주적 참여의 지속성 등과 관련하여 생각할 게 많은 대목이다.

예측은 필요하다. 하지만 예측은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운동의 본질은 현재에 기반한 예측을 바꾸는 데 있다. 샌더스의 아이오와에서의 선전, 뉴햄프셔에서의 승리는 이를 방증하지 않는가? 역사는 현실의 예측대로 걸어간 이들이 아니라 현실 밖의 가능성을 본 이들에 의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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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17.

피케티는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느냐의 여부와 관계 없이 ‘새로운 샌더스’의 출현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나아가 샌더스의 선전을 1980년 레이건의 선거 승리 이후 확립된 정치-이데올로기 체제의 종말과 연결시켜 논의한다. Thomas Piketty: “Because he is facing the Clinton machine, as well as the conservatism of mainstream media, Sanders might not win the race. But it has now been demonstrated that another Sanders – possibly younger and less white – could one day soon win the US presidential elections and change the face of the country. In many respects, we are witnessing the end of the politico-ideological cycle opened by the victory of Ronald Reagan at the 1980 e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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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29.

수잔 새런든, 스파이크 리 등의 영화인들에 이어 희극인 새러 실버먼이 버니 샌더스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지지선언 동영상을 올린 지 18시간 만에 1천만 뷰, 1만 5천 댓글, 21만이 넘는 공유가 이루어지는 걸 보며 예술인의 정치참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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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29.

난 진정 박쥐인가 보다. (지지하던 샌더스의 ‘패배’가 확정된 마당에) 여성이 대통령 후보가 된 게 큰 의미를 갖는다 생각하고 있고, 힐러리 클린턴이 다음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의 분노나, 그녀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십분 이해된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힐러리 클린턴의 강성매파적 외교관이다. 편파적이다 싶을 정도로 클린턴을 지지했던 뉴욕타임즈 마저도 그의 호전적 외교정책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표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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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28.

대의의 정치와 신의의 정치

여전히 나의 타임라인에는 힐러리 클린턴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관, 친월가 성향, 공화당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외교정책 노선에 대해 성토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를 근거로 그들은 버니 샌더스의 힐러리 클린턴 지지와 이후의 행보를 맹비난한다. 민주당 경선에서 제시된 샌더스의 정책 노선과 대척점에 있는 힐러리 클린턴은 절대 지지할 수 없는 인물이며, 그에 대한 선거운동은 자가당착이고 배신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샌더스는 클린턴 당선을 위해, 즉 트럼프의 낙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뛸 것임을 천명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도 여전히 힐러리 클린턴의 강성매파적 외교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한다. 외교, 군사정책과 관련하여 ‘그래도 트럼프보단 낫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클린턴이 천안함 사건 때 항공 모함을 동해도 아닌 황해로 보내자는 주장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나의 우려가 터무니없지 않다는 점을 방증한다. 게다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외교 전략가는 무려 헨리 키신저!

아울러 많은 공화당원들이 그를 지지하고 나선 건 트럼프가 역대급 개차반이어서이기도 하지만 클린턴의 정치가 공화당의 이념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클린턴 비판자들의 주장이 단지 그에 대한 오해와 중상모략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이 점을 애써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샌더스의 클린턴 지지 행보가 제도권 정치의 정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샌더스는 민주당 플랫폼에서 대선 후보가 되려다 실패했고, 경선의 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샌더스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대선에서 녹색당의 Jill Stein 등 제3후보에 투표할 것이다. 그들의 샌더스 지지가 정치세력으로서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기에 누구에게 투표하건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 민주당 플랫폼에 자신을 던졌던 샌더스에게 민주당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는 자연스런 선택이다 ‘아깝게 졌으니까 나가서 출마할거야’라고 했다면 팬덤에 기반한 반짝쇼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신뢰의 정치인 샌더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는 말이다.

몇몇 사람들은 대의(cause)가 모든 것을 변호해준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현실 정치인에게 신의와 대의는 분리할 수 없는 가치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 낙선에 힘을 쏟으면서도 <Our Revolution> 등의 단체를 만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는 샌더스의 행보를 응원한다. 나아가 클린턴(대통령)의 편파적 견해에 균형을 잡아주면서 그가 밝힌 민주사회주의적 비전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로 힘써주기를 바란다. 대의를 위해 신의를 버리지 않고, 신의에 갇혀 대의를 소홀히 하지 않는 지혜로운 정치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덧댐: ‘그래봐야 세계 초강대국의 오만함이 얼마나 바뀌겠는가’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눈꼽만큼의 변화라도 누군가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또한 사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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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20.

버니 샌더스의 민주당 경선 출마 소식에 짝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 신기한 게, 소셜미디어 반응을 보니까 생각보다 좋아요랑 하트가 많더라. 화나요가 진짜 많을 줄 알았는데.
짝: 자기는 어떻게 했어?
나: 아무 생각 없이 ‘좋아요’ 누른 듯.
짝: 뭐야. 출마 안했으면 좋겠다면서.
나: 응. 사실 이번에는 안나오기를 바랐는데.
짝: 참나. 좋아하는 인물 기사 뜨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좋아요를 누른 거잖아.
나: 그… 그렇게 되었네.
짝: 거기 좋아요 누른 사람들 중에 자기같은 사람이 엄청 많을 거야.
나: 그렇구나. 갑자기 뭔가 다 설명이 되는 듯…
짝: 제대로 좀 해.
나: ……

오늘의 교훈: ‘바보야. 너 자신부터 돌아보고 소셜미디어 반응에 대해 해석을 하든 말든 하라구!’

버니 샌더스가 미국 정치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나오기 보다는 다른 후보를 지지하고 당선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아젠다를 실현하길 바랐다.

그럼에도 출마가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이 Joe Biden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지를 이끌어 낼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대권도전의 유혹을 뿌리치긴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난 번 경선처럼 열심히 뉴스를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좋아요도 조심해서 눌러야지. ㅋ

관련 뉴욕타임즈 기사. 트럼프와 샌더스가 얼마나 격하게 서로를 공격하는지 보여주는 영상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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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어이없음 주의>

나: 요즘 버니 샌더스 소식 거의 안봤는데 오늘 트위터 하다가 보니 제이슨 므라즈가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샌더스 선거운동을 하고 있네.
짝: 오오 그래?
나: 응.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인 듯.
짝: (갑자기 희극적 말투로) 몇해 전에 ㅇㅊㅅ님이 전국 방방곡곡 백팩 메고 걸어서 돌아다니며 사람들 만나고 다닐 때 관심 하나도 없지 않았습니까? 둘다 유명한 사람인데 왜 한 사람은 무시하고 한 사람한테는 지대한 관심을 줍니까?
나: 아… 그 둘을… 비교하면… 비교할 사람을 비교해야…
짝: (더욱 드라마틱한 어조로 말을 끊으며) 왜 안됩니까? 둘다 유명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자기도 웃긴 듯)
나: … … …
짝: 근데 므라즈가 선거운동 한다고 문 두들기면 기분이 어떨까? 혹시 노래라도 불러주려나?
나: (희곡적인 말투를 흉내내며) 그럼 ㅇㅊㅅ님은 뭐 V3라도 깔아줍니까?
짝: 어, 그거 나쁘지 않네.
나: (단호) 사람들 다 V3 싫어해.

덧.
제이슨 므라즈가 집집을 돌며 한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켐페인을 펼치고 있다. 한국의 선거풍토를 생각하면 므라즈 정도의 연예인이 호별방문을 하며 선거운동에 나서는 게 꽤 낯선 풍경으로 느껴진다. 그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남긴 트윗 전문은 “Elect an activist.”이다.

여전히 소환되는 촛불에 대한 단상

Posted by on Apr 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6-17년의 촛불이 ‘단일한 대오’였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우매하고 위험한 게 있을까?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지만 그들의 요구는 이미/언제나 퇴진 이후를 향하고 있었다. 수많은 스펙트럼의 정치사회적 목소리가 잠시 모아졌다고 해서 그들의 열망을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환원하거나 참여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호명하는 것은 철저한 기만과 오분석에 근거한 행위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모인 이유는 시민사회, 노동운동, 여성운동, 장애인운동, 청소년운동, 문화운동, 세월호 진실규명 투쟁 등이 더 나은 사회로 가려는 길을 박근혜 정권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들이 갖고 있는 전망의 차이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양성의 분출을 막고 있던 힘이 제거되었다면 다양한 세력의 요구를 받아 안을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해야 했고, 그것은 이전의 억압적 조치의 원상복구(e.g. 전교조 법외노조화 취소)나 차별없는 세상으로의 전진(e.g.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모습을 취했어야 했다.

이 점을 뼈아프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총선의 결과에 관계없이 촛불의 의미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촛불은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이 거대한 어둠을 걷어내야만 우리 각자가 가진 빛을 밝힐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지금 촛불을 소환하려 한다면 광화문과 전국의 도시를 가득 채운 촛불의 거대한 물결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들렸던 촛불을, 그 촛불에 밝혀졌던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촛불은 하나인 적이 없고, 하나여서도 안된다. 국정교과서를 발행하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동원해서 우리를 하나로 만들려 했던 자들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온라인 강의 단상

실시간 대면수업보다 녹화영상을 선호하는 학생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여겨졌으리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교수와의 직접 대면, 다른 수강생들과의 소통을 피하면서 수강할 수 있다는 점이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어필했다는 뜻이다. 가끔 자문한다. “나의 수업은 마이크로 판옵티콘인가?”

강의를 맡고 계신 한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런 경향은 점차 심화될 것 같다. ‘번잡한’ 소통없이 ‘편안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부담을 덜어준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오는 것을 넘어, ‘수업참여’보다는 ‘콘텐츠 소비’를 지향하는 일을 마냥 반길 수는 없지만 이해가 간다. (그 틈을 타서 엉망진창으로 수업을 방치하는 교수는 응당의 책임을 져야 한다.)

오랜 시간 우리사회는 사회적 접촉에서 일어나는 마찰에 대해 ‘참고 견디라’고 말해왔다. 아빠가 말하면 들어라, 선배가 말하는데 어딜 꼴아보냐, 사장님 화난 거 안보이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한 놈 졸았으니 반 전체 열 대씩 맞아라, 목사님 말 안들으면 사탄의 꾀에 빠지는 거다, 팀장 말에는 무조건 예스로 답해라, 군대에선 까라면 까는 거다… 그리고 우리는 목구멍에 처참한 기스를 내면서 그 모든 껄끄러움을 삼켜왔다.

여전히 구조는 여기저기서 굴욕을 강요한다. 어쩌면 바로 그 점때문에 사람들이 ‘접촉없는’ 사회를 선호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업이 꼭 고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게 영혼의 평안에 도움이 된다. 대학생들은 팀프로젝트에서 꼰대, 미꾸라지, 무임승차자를 만난 경험을 최악의 경험으로 꼽는다. 상호신뢰가 턱없이 부족한 사회에서 혼자 공부하고 혼자 노는 게 최고다. 접촉이 없으면 마찰도 없다. 평소 감당해야 하는 마찰만도 벅차단 말이다.

‘접촉없는’ 학습이 당연시될 때 함께 모이는 일은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학교가 막연히 ‘사회성을 키운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온라인 소통이 아니라 온라인 콘텐츠로서의 교육이 이전과 같은 교육이 수 있을까?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정서적, 사회적 발달이 필수적인 낮은 연령의 학생들은 모르겠지만 대학교육이 그래선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주체할 수 없는 반가움을 표시하는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뭉클하다.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가 생활화되고 한 학기를 통째로 온라인에서 보내게 된 요즘, 그런 순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2D 캐릭터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로직에 의해 화면에 배치된다. 모두 같은 스피커를 통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나는 종종 누가 말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비디오와 오디오 콘트롤로 ‘존재한다는 정보’ 외에는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다. 바이러스는 시공간을 바꾸고, 지각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고, 습속을 바꾼다. 결국 각자의 몸이, ‘우리’의 존재 양태가, 사회의 작동방식이 변해간다. 대책없는 노스탤지어로 그 모든 걸 부정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변화를 직시하려는 노력은 분명 가치가 있다.우리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어떤 ‘우리’로 존재하게 될까?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Apr 6,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한 외국인 친구가 우리말 표현 “월급을 타다”를 보고 “너희 문화에서는 salary를 ride하냐?”고 물어봐서 한참 웃었다. 우리 말에선 나이를 먹는다고 했더니 “너흰 age를 eat하는구나” 하던 친구도 생각난다. 모국어 화자에게는 아무 느낌없는 표현이 외국어학습자에겐 ‘신기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2. 적지 않은 나라들이 팬데믹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라는 말은 너무나도 멀리 있어서 지금 여기의 삶, 제도, 문화를 건드리지 못했다. ‘언젠가 밥 한 번 먹자’는 실현되지 않지만, ‘언젠가 올 팬데믹’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 개인에게 먼 ‘언젠가’를 준비하는 사회가 절실하다. ‘언젠가’를 지금으로 여기는 제도와 구조만이 개개인의 일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3. 수업이 끝나자 마자 한 학생에게 메일이 왔다. 두세 명의 학생이 계속 오디오와 비디오를 끈 상태로 수업에 ‘참여’했는데, 그렇게 되니 수업 참여 여부를 알 수가 없다고, 다음부터는 비디오/오디오 참가를 의무로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나도 수업 중에 그걸 보고 바로 켜라고 하려다가 관두었는데,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게 좀 걸렸나 보다.모두들 얼굴이 나오는데 두세 명이 계속 검게 나오니 좋아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4. 탭을 닫으려다가 ‘좀 있다 다시 보자’며 남겨둠->새 탭을 열고 뭘 좀 하다가 어제 닫아둔 탭이 눈에 들어와 클릭->’이건 그리 급한 거 아닌데’하며 이메일 탭 열기->광고메일에 한숨 푹 내쉬고 소셜미디어 탭 열기->흐름이 끊긴 작업, 진도가 안나감->넷플릭스 입장->중간중간 트위터 확인X무한반복->오늘 끝! 내일도 끝! 모두다 끝! (그래도 오늘은 세 시간 수업을 했으니 나름 선방했군요.)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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