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은 단어와 뜻 즉, form과 meaning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한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나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하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D%@47″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언어의 형태와 의미 사이에 필연적 관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이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한다. Shell은 언어이다. ‘의자’, ‘chair’, ‘Stuhl’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다. 그 안에는 개념이 담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가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몸(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이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영(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는 매트릭스 1편에 등장한다. “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이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할 수 있다. 뭐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이다.

당신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는가? 어떤 정령들을 초대하는가? 그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 실재냐고? 그건 당신 자신이 결정한다. 사실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는 일생일대의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단이다.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Posted by on Jan 22, 2019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끝까지 곁을 지키는 일. 세상에서 제일 아프지만 가장 아름다운 연대 아닐까.

박창진:나는 서비스업이 잘 맞았다. 후배들에게도 “네 손길로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건 성직자 다음으로 좋은 일”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이 일이 좋았기 때문에 평가도 좋게 받았다. 전체 객실 승무원 7000명 중 0.1%만이라도 저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지금도 게시판에 ‘박창진’ 이름을 치면 험담이 수없이 나온다. 안에서 가치를 발현할 수 없다는 인간적 실망감이 있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신입 승무원, 외국인 승무원, 청소 용역 직원들 이런 분들이 힘이 됐다. 청소 용역 직원들께 편지를 많이 받았다. 신입 승무원들로부터 나로 인해 회사가 변하지 않을까 희망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짜 뉴스와 음해가 많았지만 오랫동안 끈기를 가지고 해오다 보니 지부도 생기고(그는 300여 명 규모의 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 지부장이기도 하다). 생명력이 지속되는 계기가 됐다.

엄기호:인권운동을 하면서 무대의 불이 다 꺼지고 피해자 혼자 남는 경우를 자주 봤다. 그들과 같이 걷다 보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이게 끝날까요?”다. 결국 마지막에는 외로움과 싸우는 것 같다. 아무리 사회적 의미가 있더라도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러면 솔직히 나도 할 말이 없다. 안 끝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박창진: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가 내게 끝이 있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해결책을 말해주는 건 사기꾼이었다(웃음). 끝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내 일이고 누구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처음엔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돌팔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 삶의 주체를 나로 가져오는 좋은 변수였다. 서지현 검사와도 얘기해보니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더라. 안 좋은 일로 유명해졌지만 그걸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다.

 

https://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3779

 

Words on the Threshold

언어발달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다. 하지만 ‘언어가 죽어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의 모양은 어떠할까? 181명의 사람들이 죽기 전에 남긴 말들을 모아 분석한 <Words on the Threshold> (2017)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Smartt also wondered whether her notes had any scientific value, and eventually she wrote a book, Words on the Threshold, published in early 2017, about the linguistic patterns in 2,000 utterances from 181 dying people, including her father.”

“To assess people’s “mental condition just before death,” MacDonald mined last-word anthologies, the only linguistic corpus then available, dividing people into 10 occupational categories (statesmen, philosophers, poets, etc.) and coding their last words as sarcastic, jocose, contented, and so forth. MacDonald found that military men had the “relatively highest number of requests, directions, or admonitions,” while philosophers (who included mathematicians and educators) had the most “questions, answers, and exclamations.” The religious and royalty used the most words to express contentment or discontentment, while the artists and scientists used the fewest.”

https://www.theatlantic.com/family/archive/2019/01/how-do-people-communicate-before-death/580303

학생인권과 교권

과학자들은 가장 심각한 오류의 예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는 경우를 들곤 한다. 특정 문법구조는 이러한 오류를 은밀히 조장한다. 예를 들어 한 기사의 다음 문장을 보자.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으로 학생 인권은 강조되는 사이 교권은 추락하고 있다.”

이 문장은 “A하는 사이 B하고 있다”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단지 이 둘을 동시간대에 발생하는 사건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다. A가 B를 일으켰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까마귀가 날아간 것 때문에 배가 떨어졌다고 단정하듯 말이다.

게다가 이 기사의 제목은 “인권 강조하니 학생지도 엄두도 못내…”교권 강화 절실””이다. 이쯤 되면 A와 B의 인과관계를 세뇌하려는 시도같기도 하다. 반복의 힘은 세다. 귀에 못이 박히게 오비이락 소리를 들으면 배가 떨어질 때마다 까마귀를 범인으로 몰게 된다.

학생인권이 강조되면 교권이 추락하는 것인가?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학생의 인권이 더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방향이고, 과정상 부족한 점들은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야 한다. 교사의 권리도 마찬가지다. 이 둘이 충돌하지 않도록 만드는 지혜를 구해야 할 일이지 “학생들 인권 챙겨주다 보니 교사들이 일을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교사들이 위축되고 자신들의 권리가 실추되었다고 느끼는 데는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 것이다. 그중 일부는 학생인권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을 조망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의 기사를 써야 한다. 학생인권을 ‘범인’으로 모는 기사 말고.

#삶을위한리터러시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18&aid=0004295414&sid1=001

이미지와 정치, 그리고 시늉사회

Posted by on Jan 13,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빌렘 플루서는 정치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애초에 사진은 정치를 기록(documentation)하기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20세기 초와 2차대전을 지나면서, 정치는 ‘이미지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정치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정치는 이미지로 향한다는 걸. 이미지화 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는 걸.

나는 플루서가 말한 ‘이미지로 진입하기 위한’,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한’ 일들이 만연한 사회를 ‘시늉사회’라고 부른다. 시늉이 일을 하는 시대. 시늉만이 효과인 시대. 시늉에 익숙해지는 것이 현명한 것으로 칭송받는 시대.

시늉에 진심이 없을까? 진심을 다해 시늉하는 사람들이 정말 없을까? 그런 ‘열정적 시늉’에 대해 이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미지로 걸어들어가는’ 정치를, 구조를, 자선을, 운동을 걷어치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더이상 이미지화 되지 않는 정치는 불가능한 걸까.

http://www.hani.co.kr/arti/animalpeople/human_animal/878179.html

헤드라인이 감추는 것

Posted by on Dec 1, 2018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최고대학’에 ‘들어왔지만’ 절반이 우울증세”가 아니고, “‘최고대학’ ‘들어가느라고’ 절반이 우울증세” 아닌가? ‘최고’라는 서열이, ‘너는 최고야’라는 호명이 우울함을 키우는 것 아닌가?

이른바 ‘수퍼맨/수퍼우먼 신드롬’이나 ‘완벽주의자 신드롬’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기꾼 신드롬(the imposter syndrome)에 시달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수퍼휴먼도 아니고 완벽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그걸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구조화되고 일상화된 우울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서울대 등의 학교를 ‘별 것 아닌 곳’으로 만들고, 거기 다니는 학생들 또한 ‘별 것 아닌 학교 학생’이 될때 우울증세는 줄어들 것이다.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집단은 바닥을 모르는 어두움을 배태하기 마련이다.

https://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750994

Situated Cognition

“The theory of situated cognition, as I present it here, claims that every human thought and action is adapted to the environment, that is, situated, because what people perceive, how they conceive of their activity, and what they physically do develop together. From this perspective, thinking is a physical skill like riding a bike. In bicycling, every twist and tum of the steering wheel and every shift in posture are controlled not by manipulation of the physics equations learned in school, but by a recoordination of previous postures, ways of seeing, and motion sequences. Similarly, in reasoning, as we create names for things, shuffle around sentences in a paragraph, and interpret what our statements mean, every step is controlled not by rotely applying grammar descriptions and previously stored plans, but by adaptively recoordinating previous ways of seeing, talking, and moving. All human action is at least partially improvisatory by direct coupling of perceiving, conceiving, and moving – a coordination mechanism unmediated by descriptions of associations, laws, or procedures. This mechanism complements the inferential processes of deliberation and planning that form the backbone of theories of cognition based on manipulation of descriptions. Direct coupling of perceptual, conceptual, and motor processes in the brain involves a kind of “self-organization with a memory” that we have not yet replicated in computer programs, or indeed in any machine.” (pp. 1-2)
 
https://www.amazon.com/Situated-Cognition-Representations-Computational-Perspectives/dp/0521448719/ref=sr_1_3?ie=UTF8&qid=1537796300&sr=8-3&keywords=situated+cognition&dpID=5186Q2W%252BPPL&preST=_SY344_BO1,204,203,200_QL70_&dpSrc=srch

내 인생의 노래, 그 노래의 이야기

다음 시간 in-class writing의 주제는 “내 인생의 노래, 그 노래의 이야기” 학생들은 ‘사연있는’ 노래 하나를 골라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적습니다.

bryanfurywins 2 years ago

2004, in my first year of college, I met a girl. I was completely head over heals for her; And her for me. My heart used to be “on fire” every time she’d text me… And at the time, Switchfoot – ‘The Beautiful Letdown’ was our favorite album and more so, this very song. Before moving to second year, she had to go back to Australia. Needless to say I was completely heart broken when she told me. I remember literally not being able to breath… I’m 35 years old now, married and with 3 kids. Seated at work listening to this song just made all the memories of her come flooding back.

유일한 상수는 다름(variability)이다

Posted by on Sep 7, 2018 in 강의노트, 링크, 수업자료, 집필 | No Comments

Universal Design for Learning에 관한 책을 살피다가 아래 챕터 제목에 새삼 눈이 확 뜨인다.

“The only constant is variability” (유일한 상수는 다름이다.)

어찌 보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모든 건 변한다는 사실 외에는’과 비슷한 말이겠다. 교육에서도 모든 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수로 놓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할텐데 그게 잘 안된다. 평생 받아온 일제식 교육의 아비투스는 쉽게 떨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 정도는 준비해야 하고
모두가 이 정도는 해내야 하고
모두가 이 기준에는 도달해야 하고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활동을 해야 하고
모두가 같은 과제를 제출해야 하고
모두가 같은 분량의 글을 써내야 하고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 와야만 하고
모두가 동일한 문제를 동일한 시간에 풀어야 하고
모두가 벨 커브 위에서 점수를 받아야 한다.

교육체제의 상수는 ‘모두’이지만
현실의 상수는 ‘다름’이다.

영어교육의 문제를 나열해 보라고 하면 학생 교사 구분 없이 가장 많이 드는 것이 “학습자가 너무 다르다”이다.

현재의 평가 시스템에서 학습자가 너무 다르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그러나 한편 학습자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은 주어진 현실이며 모든 배움의 전제일 수밖에 없다. 제도를 훌쩍 뛰어넘는 인간의 존재방식인 것이다.

우리는 ‘현제도’와 ‘문제’에만 천착하여 현실에, 본질에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런 사고방식에 깊게 물들어 있는 듯하다.

https://www.amazon.com/Culturally-Responsive-Design-English-Learners-ebook/dp/B0753397LL/ref=sr_1_1?s=digital-text&ie=UTF8&qid=1536287281&sr=1-1&keywords=Culturally+Responsive+Design+for+English+Learners%3A+The+UDL+Approach&dpID=51a9TbgMvfL&preST=_SY445_QL70_&dpSrc=srch

#영어교육공학
#유일한상수는다름이다

시간강사 제도 개선에 대하여

Posted by on Sep 4, 2018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여러 생각이 왈칵 몰려든다.

우선 기사 제목의 두 키워드 즉 “교원 자격”과 “방학때도 월급”이라는 말이 서글프다.

수년간 일을 해왔지만 정규 교원의 자격도, 방학 동안의 어떠한 급여도 없었기에 저 두 가지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마음이 먹먹하고 쓸쓸하다.

교원이 될 수 있다는 것,
방학 때 임금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수많은 이들에 대한 ‘헤드라인’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무시할 수 없는 인원이 구직난에 시달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았던 운을 믿어보자면 앞으로도 일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설령 내가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것은 아니다.

2010년 “제가 당신의 종입니까?”라는 항변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 고 서정민 박사, 1998년 이후 강사 생활을 하다가 먼저 먼 곳으로 가신 여덟 분의 강사들을 기억하며 짧은 묵념을 드린다.

아울러 그간 강사제도 혁신을 위해 싸워온 모든 이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저 주변에 하찮은 불평을 늘어놓는 것 외에는 한 일이 없어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이들의 헌신과 투쟁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더이상 고통받는 이들이 없기를, 누군가의 당연한 권리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구조가 사라지길 빈다.

https://news.v.daum.net/v/20180903110033055?rcmd=rn&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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