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6월의 추천도서로 선정!

Posted by on Jun 13, 2020 in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 No Comments

싱그러운 초여름, 6월의 독서산책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 2020.06.10

[사회과학]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김성우·엄기호, 따비

​“반면 유튜브는 요거만 봐야지 하고 보기 시작하지만 보다 보면 저것도 재밌겠네 하면서 계속 보게 되는 거죠.”

​때로는 신기하고, 때로는 유용한 동영상 플랫폼으로만 여겨졌던 유튜브로 인해 지식과 정보를 얻고, 소통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변화는 문자로 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으로 공인돼 별다른 의문이 없었던 오늘날 리터러시의 의미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그간의 리터러시에 맞춰진 체제와 이에 능숙한 사람들은 새로운 움직임을 흥미롭게 여길지언정 그 평가와 인정은 대체로 박한 편이다. 라틴어나 한문을 통한 리터러시에 익숙해야만 교양인으로 여겨지던 시대로 거슬러 가보면,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변화를 맞아 기존에 문화적 소양을 인증받은 기득권이 자신의 위상을 재확인하고자 의도한 차별과 닮은 양상이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게 될 때, 리터러시는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울타리가 될 뿐이다. 이 책은 대담집이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리터러시의 미래라는 묵직한 주제를 어렵지 않게 다뤘다. 책은 리터러시가 좋은 삶을 위한 목적 아래서 그 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_이준호, 호서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http://www.korea.kr/news/visualNewsView.do?newsId=148873199

가문비 나무 아래

Posted by on Jun 13, 2020 in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천안시 블로그의 시민리포터 이지현 님께서 <가문비나무 아래>에서의 북토크를 전해주셨습니다. 참 포근하고 예쁜 책방이었는데요. 무엇보다 사람과 책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천안 부근에 계신 분은 한번 방문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가문비나무 아래 책방
충남 천안시 서북구 불당34길 3-20 Sol Plaza 301, 302호

http://blog.naver.com/fastcheonan/221997214074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고 지켜본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글

Posted by on Apr 9, 2020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쟁에서 사퇴했다. 역사의 한 챕터가 끝난 느낌이다. 그에 대한 호불호야 갈릴 수 있겠으나, 그가 미국 정치를 좀더 왼쪽으로 끌고 왔다는 점에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그의 운동(movement) 전의 민주당 정강과 이후의 정강은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슈퍼팩’(Super PAC)’의 지원을 받지 않고 풀뿌리 운동 중심으로 정치혁명을 이끌었다. 한계도 실수도 많았지만 나는 그 점에서 그가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퇴가 아쉽지만 그에게서 영감을 얻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등의 정치인이 운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력은 줄어들고 동력은 약해지겠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는 후대가 짊어질 몫이다. 그를 응원했던 지난 대선을 돌아보며 그간의 쪽글 몇 개를 모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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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18.

“환경이 은행이라면 벌써 살렸을 것.” – 버니 샌더스
(금융) 자본주의의 두 얼굴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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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15.

2014년 오늘, 버니 샌더스에 대한 기사를 소개했다. 당시만해도 샌더스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었기에 관심을 가진 페친 또한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라고 해야 하나. 현재 버니 샌더스는 뉴 햄프셔와 아이오와 여론 조사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앞서고 있고, 지지율의 상승세 또한 꺾이지 않고 있다.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로서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진보정치의 신념을 지켜온 샌더스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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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2.

UFC 세계 챔피언이자 배우인 Ronda Rousey가 버니 샌더스 지지하기로 했다는 기사. 그녀가 샌더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던진 말이 인상적이다.

“나는 버니 샌더스에게 투표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업들로부터 돈을 받질 않거든요. 나는 정치인들이 외부 이익집단으로부터 선거 자금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I’m voting for Bernie Sanders, because he doesn’t take any corporate money,” Rousey told Maxim. “I don’t think politicians should be allowed to take money for their campaigns from outside inter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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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31.

예상대로 뉴욕타임즈는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NYT의 독자로서 아쉬움이 크지만 단순히 ‘보수언론의 한계’라 부르고 싶진 않다. 막판 지지 선언은 NYT의 한계라기 보다는 그간 쌓아온 권력의 행사니까. 그게 샌더스가 돌파해야 할 비정한 현실이니까. 재미있는 것은 학자이면서 NYT의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은 ‘비현실적 정책’을 이유로 버니 샌더스에 맹공을 퍼부었음에 반해, 학자 출신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샌더스의 비전과 정책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결과에 관계없이 샌더스 지지자들의 운동이 이어지길 빈다. 아래로부터의 권력만이 진정한 정치혁명을 가능케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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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4.

샌더스의 주장은 여느 정치운동과 마찬가지로 대략 세 층위에서 파악할 수 있다.

1. 현재 미국은 엄청난 불평등 사회다. (하위 주장: 엄청 잘살 수 있는데 엄청 불평등하다. 충분한 돈을 가진 나라인데 의료보장과 사회안전망이 엉망이다.)

2. 불평등은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불평등은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 재생산된다. (하위 주장: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행태, 대자본의 선거 매수 등이 그 뼈대를 이룬다.)

3. 이 구조는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아래로부터의 정치혁명 뿐이다. (하위 주장: 나는 대기업의 돈을 원하지 않고, 그들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이를 다음과 같은 기술로 바꿔볼 수 있다.

1.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인식: 많은 이들은 기이할 정도의 불평등에 대해 무지하다.

2. 해결 가능성과 방법에 대한 인식: 불평등을 인지하더라도 정치운동에 의한 사회구조 혁신보다는 개개인의 노력, 각개전투로 해결하려 한다.

3. 운동 참여: 많은 이들은 ‘불평등의 구조가 있지만 어쩌랴, 사회가 그렇게 굴러먹은 걸’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내가 뭐 좀 한다고 바뀔게 뭐있나?’라는 생각에 그친다.

변화의 관점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1. 불평등에 눈뜨게 하는 가장 강력한 데이터는 무엇인가.

2. 각종 데이터를 관통하는 구조적 요인들은 무엇인가?

3. 인식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플랫폼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이런 주제들과 관련하여 선거 기간 버니 샌더스의 전략에 대해 짧게 썼던 글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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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쟁에 나선 Bernie Sanders의 선거전은 그야말로 원칙에 충실한 모습이다. 자신이 누구를 위해 나왔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를 단박에 알려준다고나 할까. 두어 달 지켜본 그의 모습에서 몇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1. 경제 이슈에 집중한다. – 미국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빈부격차와 소득격차에 집중한다. 미국 자본주의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계속해서 부각한다. 이때 자주 쓰는 표현은 “지긋지긋하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Enough is enough)!!”이다.

2. 핵심 이슈를 반복 또 반복한다. – 어떤 방송에 나오든 첫 대목에서 미국의 현상황과 자신의 핵심공약을 빠르게 되짚어 준다. (나같은 경우 매일 보는 것도 아닌데 거의 암기가 될 정도가 되었다.)

3. 기억하기 쉽고 ‘충격적인’ 통계치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장 돈 많은 월마트 소유주 Walton가의 재산은 미국민 하위 42퍼센트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같다는 통계다.

4. 네거티브 광고를 하지 않는다. – 그는 정치 인생에서 네거티브 광고를 찍은 적이 없다고 한다. 언론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싸움을 붙이려고’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그때마다 “힐러리를 동료로서 존중하고 좋아하지만, OOO와 같은 핵심 이슈에서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힐러리는 걸프전에 찬성표를 던졌고, 나는 반대했다.” 같은 식으로 대응한다.

5. 거대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시민참여운동으로 선거를 조직한다. 소셜 미디어에서도 (투표권도 없는 나를 비롯한) 많은 ‘운동원’들이 자발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

6. “사회주의자”라는 공격에 당당히 맞선다. 북유럽의 사회보장제도가 사회주의라면, 자신은 그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북유럽이 하고 있다면 미국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대응한다. (공립) 대학까지 무상교육 실시, 의료보장제도의 획기적 확대 등이 주요 공약에 포함되어 있다.

7. 계급적 지지기반을 확실히 밝힌다. 자신은 철저히 서민과 중산층을 대표한다는 점을 하며, 이른바 ‘수퍼리치’와 확실히 선을 긋는다. 관련하여 최저임금 15달러 안이 핵심 공약 중 하나라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진심으로 버니 샌더스의 선거 혁명이 성공하길 빈다. 사진은 버몬트의 버링턴 시장이었던 81년도의 모습. 내가 생각하는 그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사진인 듯하여 가져와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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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10.

[버니 샌더스-선거공학을 넘어선 ‘정치혁명’을 주장하다] 버니 샌더스가 후보가 되면 결국 공화당이 승리하고 국제 정세가 불안해지고 삶이 더욱 나빠질 것이라는 예측을 본다. 자본과 정치가 의리로 똘똘 뭉쳐 있는 현재 시점에서 이런 예측은 분명 어느 정도의 근거와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 ‘합리적 예측가’들이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버니 샌더스가 자주 언급하듯 이번 선거의 이슈는 ‘이번 선거에서 누굴 뽑느냐’를 넘어 기존의 정치세력(political establishment)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샌더스는 ‘정치과정(political process)’과 ‘정치혁명(political revolution)’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표를 구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자는 요청이다. 관련하여 다음 일화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언젠가 샌더스가 오바마의 가장 큰 실수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있다. (기억에 의한 것이므로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오바마의 선거의 열기는 엄청났다. 젊은이들의 참여도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당선되자 마자 “자 이제 여러분들의 일은 끝났습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이제 저에게 맡기세요.”라고 말했다. 이게 오바마의 가장 큰 실수다.”

그는 외교나 인권 등 한두 영역을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진정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지자들을 스스로 해산시킨 오바마를 비판했다. 선거의 동력을 풀뿌리 민주주의, 아래로부터의 변화의 동력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지적이었다. 선거시기 이후의 정치역학, 민주적 참여의 지속성 등과 관련하여 생각할 게 많은 대목이다.

예측은 필요하다. 하지만 예측은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운동의 본질은 현재에 기반한 예측을 바꾸는 데 있다. 샌더스의 아이오와에서의 선전, 뉴햄프셔에서의 승리는 이를 방증하지 않는가? 역사는 현실의 예측대로 걸어간 이들이 아니라 현실 밖의 가능성을 본 이들에 의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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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17.

피케티는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느냐의 여부와 관계 없이 ‘새로운 샌더스’의 출현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나아가 샌더스의 선전을 1980년 레이건의 선거 승리 이후 확립된 정치-이데올로기 체제의 종말과 연결시켜 논의한다. Thomas Piketty: “Because he is facing the Clinton machine, as well as the conservatism of mainstream media, Sanders might not win the race. But it has now been demonstrated that another Sanders – possibly younger and less white – could one day soon win the US presidential elections and change the face of the country. In many respects, we are witnessing the end of the politico-ideological cycle opened by the victory of Ronald Reagan at the 1980 e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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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29.

수잔 새런든, 스파이크 리 등의 영화인들에 이어 희극인 새러 실버먼이 버니 샌더스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지지선언 동영상을 올린 지 18시간 만에 1천만 뷰, 1만 5천 댓글, 21만이 넘는 공유가 이루어지는 걸 보며 예술인의 정치참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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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29.

난 진정 박쥐인가 보다. (지지하던 샌더스의 ‘패배’가 확정된 마당에) 여성이 대통령 후보가 된 게 큰 의미를 갖는다 생각하고 있고, 힐러리 클린턴이 다음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의 분노나, 그녀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십분 이해된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힐러리 클린턴의 강성매파적 외교관이다. 편파적이다 싶을 정도로 클린턴을 지지했던 뉴욕타임즈 마저도 그의 호전적 외교정책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표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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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28.

대의의 정치와 신의의 정치

여전히 나의 타임라인에는 힐러리 클린턴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관, 친월가 성향, 공화당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외교정책 노선에 대해 성토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를 근거로 그들은 버니 샌더스의 힐러리 클린턴 지지와 이후의 행보를 맹비난한다. 민주당 경선에서 제시된 샌더스의 정책 노선과 대척점에 있는 힐러리 클린턴은 절대 지지할 수 없는 인물이며, 그에 대한 선거운동은 자가당착이고 배신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샌더스는 클린턴 당선을 위해, 즉 트럼프의 낙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뛸 것임을 천명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도 여전히 힐러리 클린턴의 강성매파적 외교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한다. 외교, 군사정책과 관련하여 ‘그래도 트럼프보단 낫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클린턴이 천안함 사건 때 항공 모함을 동해도 아닌 황해로 보내자는 주장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나의 우려가 터무니없지 않다는 점을 방증한다. 게다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외교 전략가는 무려 헨리 키신저!

아울러 많은 공화당원들이 그를 지지하고 나선 건 트럼프가 역대급 개차반이어서이기도 하지만 클린턴의 정치가 공화당의 이념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클린턴 비판자들의 주장이 단지 그에 대한 오해와 중상모략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이 점을 애써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샌더스의 클린턴 지지 행보가 제도권 정치의 정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샌더스는 민주당 플랫폼에서 대선 후보가 되려다 실패했고, 경선의 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샌더스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대선에서 녹색당의 Jill Stein 등 제3후보에 투표할 것이다. 그들의 샌더스 지지가 정치세력으로서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기에 누구에게 투표하건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 민주당 플랫폼에 자신을 던졌던 샌더스에게 민주당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는 자연스런 선택이다 ‘아깝게 졌으니까 나가서 출마할거야’라고 했다면 팬덤에 기반한 반짝쇼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신뢰의 정치인 샌더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는 말이다.

몇몇 사람들은 대의(cause)가 모든 것을 변호해준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현실 정치인에게 신의와 대의는 분리할 수 없는 가치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 낙선에 힘을 쏟으면서도 <Our Revolution> 등의 단체를 만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는 샌더스의 행보를 응원한다. 나아가 클린턴(대통령)의 편파적 견해에 균형을 잡아주면서 그가 밝힌 민주사회주의적 비전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로 힘써주기를 바란다. 대의를 위해 신의를 버리지 않고, 신의에 갇혀 대의를 소홀히 하지 않는 지혜로운 정치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덧댐: ‘그래봐야 세계 초강대국의 오만함이 얼마나 바뀌겠는가’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눈꼽만큼의 변화라도 누군가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또한 사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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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20.

버니 샌더스의 민주당 경선 출마 소식에 짝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 신기한 게, 소셜미디어 반응을 보니까 생각보다 좋아요랑 하트가 많더라. 화나요가 진짜 많을 줄 알았는데.
짝: 자기는 어떻게 했어?
나: 아무 생각 없이 ‘좋아요’ 누른 듯.
짝: 뭐야. 출마 안했으면 좋겠다면서.
나: 응. 사실 이번에는 안나오기를 바랐는데.
짝: 참나. 좋아하는 인물 기사 뜨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좋아요를 누른 거잖아.
나: 그… 그렇게 되었네.
짝: 거기 좋아요 누른 사람들 중에 자기같은 사람이 엄청 많을 거야.
나: 그렇구나. 갑자기 뭔가 다 설명이 되는 듯…
짝: 제대로 좀 해.
나: ……

오늘의 교훈: ‘바보야. 너 자신부터 돌아보고 소셜미디어 반응에 대해 해석을 하든 말든 하라구!’

버니 샌더스가 미국 정치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나오기 보다는 다른 후보를 지지하고 당선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아젠다를 실현하길 바랐다.

그럼에도 출마가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이 Joe Biden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지를 이끌어 낼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대권도전의 유혹을 뿌리치긴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난 번 경선처럼 열심히 뉴스를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좋아요도 조심해서 눌러야지. ㅋ

관련 뉴욕타임즈 기사. 트럼프와 샌더스가 얼마나 격하게 서로를 공격하는지 보여주는 영상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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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어이없음 주의>

나: 요즘 버니 샌더스 소식 거의 안봤는데 오늘 트위터 하다가 보니 제이슨 므라즈가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샌더스 선거운동을 하고 있네.
짝: 오오 그래?
나: 응.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인 듯.
짝: (갑자기 희극적 말투로) 몇해 전에 ㅇㅊㅅ님이 전국 방방곡곡 백팩 메고 걸어서 돌아다니며 사람들 만나고 다닐 때 관심 하나도 없지 않았습니까? 둘다 유명한 사람인데 왜 한 사람은 무시하고 한 사람한테는 지대한 관심을 줍니까?
나: 아… 그 둘을… 비교하면… 비교할 사람을 비교해야…
짝: (더욱 드라마틱한 어조로 말을 끊으며) 왜 안됩니까? 둘다 유명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자기도 웃긴 듯)
나: … … …
짝: 근데 므라즈가 선거운동 한다고 문 두들기면 기분이 어떨까? 혹시 노래라도 불러주려나?
나: (희곡적인 말투를 흉내내며) 그럼 ㅇㅊㅅ님은 뭐 V3라도 깔아줍니까?
짝: 어, 그거 나쁘지 않네.
나: (단호) 사람들 다 V3 싫어해.

덧.
제이슨 므라즈가 집집을 돌며 한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켐페인을 펼치고 있다. 한국의 선거풍토를 생각하면 므라즈 정도의 연예인이 호별방문을 하며 선거운동에 나서는 게 꽤 낯선 풍경으로 느껴진다. 그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남긴 트윗 전문은 “Elect an activist.”이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Posted by on Mar 24, 2020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뮤지션들과 운동선수들의 ‘코로나-19 극복 영상’을 보고 있노라니 타지에서 유학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논문을 쓰던 시절, 하우스메이트와 약간의 대화를 주고 받는 것 외에는 내내 홀로 지내던 시간이 있었다. 외롭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가끔 쓸쓸하고 불현듯 그립고 문득 이야기 건넬 사람이 절실했다. 나를 살린 건 8할이 산책과 음악이었다. 날 좋은 오후면 근린공원으로 나가 두어 시간을 걸으며 햇살 아래 오디오북을 들었고, 밤에는 책을 읽다가 건반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쩌다가 만난 트위터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믹싱하여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고 (덕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 새벽시간 어눌한 피아노로 ‘랜선 콘서트’를 열어 김광석과 유재하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때의 연주 음원은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몇몇이 남아 아직도 어린아이같은 노스탤지어 곁을 지키고 있다. 아프고 두려운 시절, 자꾸만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2012년 여름 연주)

 

의학 메타포 단상 (기사발췌+약간의 해설)

Posted by on Mar 10, 2020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1. 환자는 질병과 싸우는가? 그는 파이터(fighter)인가? 그렇다면 질병이 심각해지거나 그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충분히 열심히 싸우지 않아서 병에 굴복한 것인가? 질병은 적이고 나는 파이터이며 호전이나 악화는 승리 혹은 패배인가?

환자를 파이터로 개념화하는 것은 어떤 장점과 한계를 갖는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환자를 ‘싸우는 존재’로 생각해야 하는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전투에 임하듯 병과 부딪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2. 우리는 종종 물리적 현상과 메타포를 혼동한다. 잘 알려진 Lawrence Williams와 John Baugh의 연구는 사람들이 따뜻한 음료를 들고 면접에 임할 때 피면접자의 성격을 ‘warm’하다고 판단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보고한다. 차가운 음료를 들고 있었던 참가자들은 반대의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우연인가?

3. 또 다른 연구(Chen-Bo Zhong & Katie Liljenquist, 2006)는 소위 ‘멕베스 효과(Macbeth effect)’를 보고한다. 자신의 죄과에 대해 생각해 보길 권유당한 참여자들은 연구 참여 선물로 세정제를 택할 확률이 높았다. 윤리적인 측면의 ‘더러움’을 신체적으로 청결하지 못한 것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단어 ‘dirty’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윤리적 영역과 신체적 영역 모두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의학에서의 군사 메타포는 파스퇴르가 1860년대에 세균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기 이전부터 사용되어왔다. 시인 존 던은 질병을 “siege…a rebellious heat, [that] will blow up the heart, like a Myne”이나 “Canon [that] batters all, overthrowes all, demolishes all…destroyes us in an instant.”와 같이 표현한다. 병을 포위공격과 포탄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5. 17세기에 가장 저명한 의사였던 Thomas Sydenham은 의학에 군사 메타포를 들여온 사람으로 기억될 만하다. 그는 질병의 절멸(annihilation)을 의학의 목표로 삼았다. 자연스레 “내부의 적을 하제와 해열제로 공격(attack)한다”는 표현을 썼다. 질병의 치료가 싸움이라면 당연히 전략전술이 필요할 것이다.

6. 우리는 의학 메타포를 내면화해 왔다. 이제는 그런 표현들이 메타포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의학용어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그것의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영향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전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https://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4/08/the-trouble-with-medicines-metaphors/374982/

차별과 혐오의 스펙타클을 넘어서

Posted by on Mar 1, 2020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인간은 자신의 안전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 vs 적” 혹은 “Us vs. Them”의 구도를 강화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퍼뜨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터한다.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끝없이 경계하며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피아식별’과 ‘적대적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Us”의 범위를 인류 전체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위 아 더 월드”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교육과 미디어, 문화 전체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다.

이렇게 ‘우리’의 범위를 인류 전체로 확장하는 일은 때로 지루하고 지난하다. 무엇보다 현재의 사회경제체제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 언론 또한 편을 가르고 욕할 대상을 만들어 내야만 ‘기사가 팔린다’. 음모론은 드러나지 않은 적을 만들어 내고, 혐오담론은 ‘선량한 우리’를 해치는 ‘사악한 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며 사람들에게 파고든다. 사람들간의 섞임을 ‘불순물의 침투’와 ‘순수함의 타락’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어떻게 이 난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가르고 혐오하고 저주하는 스펙터클을 막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 필요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다만 요즘 들어 부쩍 그런 분열과 혐오의 행태들이 지독하게 멋없는 거라는 걸 계속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시하고 차별하고 가르고 욕하는 일이 얼마나 스타일 빠지는 일인지,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없어보이는지 말이다.

그에 비해 연대하고 손내미는 사람들의 멋짐을 더 널리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랑하고 차별하지 않는 사람들의 ‘있어 보임’에 대해 더 크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도 가끔은 그런 멋진 행동을 따라하면서 아주 쪼금은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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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이 길이 광주가 가야할 길”이라는 저 말, 정말 멋짐 터지지 않나? “나눔과 연대의 광주정신으로 대구 경증 확진자들을 광주에서 격리치료하겠다”는 저 선언, ‘우리편 vs 너네편’ 가르는 사람들에 대해 시원하게 한방 먹이지 않나? 위기의 상황 속, 사랑과 연대는 한줄기 빛처럼 찬란하지 않은가?

기사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59092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관련 영어표현

코로나19바이러스로 전세계가 떠들석합니다. 관련 핵심표현만을 모은 페이지에서 주요 표현을 가져와 해설을 달아보았습니다.

1. contract a virus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할 때에는 contract라는 동사를 주로 씁니다.

2. extremely infectious / highly contagious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는 표현들입니다. Extremely/highly로 강도를 표현합니다.

3. pass it to others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고 할 때 pass를 주로 씁니다.

4. carriers 그렇게 바이러스를 (본의 아니게) 옮기게 되는 사람을 carrier라고 합니다.

5. super-spreaders 우리말로 ‘수퍼전파자’는 super-spreader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쓸 경우에는 spreader라는 표현을 기억해야겠네요.)

6. patient zero 최초 감염자는 patient zero입니다. One이 아니라 zero로 개념화되는 게 흥미롭네요.

7. show/display symptoms 증상을 보인다고 할 때에는 show/display symptoms라고 합니다.

8. fever 열 cough 기침 respiratory difficulty 호흡곤란 등이 있겠죠.

9. 잠복기는 the incubation period 라고 표현하지요.

10. (감염)사례는 cases라고 표현합니다.

11. 확진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call someone confirmed or diagnosed cases”라고 표현합니다.

12. 사람들이 감염이 된 것으로 테스트 결과가 나오는 경우 “They test positive for it”이라고 합니다.

13. 유난히 감염자가 많은 경우를 spike로 표현해서 “a spike in cases”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치솟는 모양을 표현한 단어죠.

14. 치명률은 “the mortality rate of a disease”로 표현합니다. 사망자수는 death toll이 되겠습니다.

15. 질병의 발생은 outbreak로 표현하죠. 이 제목의 영화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6. 전 세계로 퍼지는 감염병을 판데믹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pandemic으로 씁니다. Pan-이 붙으면 ‘전체의, 전세계의’의 의미가 되죠.

17. 바이러스를 통제하고 확산을 막는다고 할 때는 control/contain the spread of the virus 라고 합니다.

18. 특정 지역을 봉쇄한다고 말할 때에는 “Towns and cities may be put/placed on/in lockdown”으로 표현합니다.

19. 격리조치는 quarantine이라고 하며 사람을 주어로 할 경우 “be put/placed in quarantine”를 쓰면 됩니다. 자가격리는 self-quarantine이라고 표현하면 되지요.

20. 마스크는 그냥 mask 라고도 하지만 face masks라는 표현도 자주 쓰입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백신개발’은 ‘develop a vaccine’이라고 표현하면 되겠습니다.

어지러운 나날이지만 모두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표현 출처:

https://dictionaryblog.cambridge.org/2020/02/26/quarantine-carriers-and-face-masks-the-language-of-the-coronavirus

오래된 가수, 조규찬

Posted by on Feb 25, 2020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조규찬의 노래를 들으며
그가 이젠 정말 나이든 가수가 되었구나 싶다.
‘오래된 가수’
그의 표현으로는 그렇다.

<그날의 온기>는 아예 대놓고
옛날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노스탤지어에 버무려 내더니
이번 곡 <오래된 가수>는
그렇게 지난 날을 반추하는
‘생활인이 된’ 일상을
체념했으나 방기하지 않을 눈빛으로
찬찬히 응시한다.

어쩌면 ‘추억팔이’라고 불릴만한
이 두 곡을 관통하는 정서는
찌질함을 감싸는 따스함이다.
어쩔 수 없음을 받아안는 너른 품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음악에 꽤 긴 시간을 쏟아부은 아마추어로서
객기섞인 평을 해보자면
조규찬은 작사, 작곡, 프로듀싱, 노래까지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는 아티스트 중 하나다.
무엇보다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걸 충실히 해내는 가수다.

그런 그가
<해 지는 바닷가에서 스털링과 나는>에서
아빠로서 느끼는 사랑과 애틋함을 노래하고
<중년>에서는 나이듦의 쓸쓸함과 호젓함을 읖조리며,
<Someday We will be Together>에선
이별과 만남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있음을 말한다.
나이듦의 아름다움과 상념,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엄연한 힘을 담은 음악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오래된 가수’로서
멋지게 성숙해 가는 것 같다.
‘기호품일 뿐인’ 음악을 만든다고
한숨을 내쉬는 것 같지만
결국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일상을 보둠어 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자칫 클리셰가 될 수 있는
‘고마워요’라는 말을
참 멋지게 해내는 그를
본받고 싶다.

내 인생 작은 소망은
영혼을 담아
‘고맙습니다’를 말하는 것.
막던지는 Thank you가 아니라
나를 만들어 온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담은 인사를
빚어가고 싶다.

내 곁에 와 주어서
살아있어 주어서
먼저 떠나가 주어서
언젠가 함께해 줄 거여서
고마운 사람들.

요즘은 그냥
시도때도 없이 고맙다.

===

이제는 꿈의 시효도 끝난
이제는 현실에 맹종하는
잊혀짐에 익숙한
생활인이 된 나는 오래된 가수

한 때는 새 노래를 내놓으면
한 때는 인터뷰 제의도 들어오곤 했던 나였지
그 땐 그게 당연한 일이라 여겼어
이젠 모두 다 지난 일 이제는

어쩌다 고작 별 네 개짜리의 가수가 됐느냐는
동정어린 댓글을 받는


지워져 사라져 가
내 새 노랜 품평 받는 흔하디 흔한
기호품일 뿐이라는 그 엄연한 현실에
고갤 떨구는 일만이
어렵사리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일임을 꾹 삼키는 일

요새 난 자주 고민에 빠져
이제 그만 멈출 때가 된 것 아니냐고 자문하곤 해
가수 생명은 이제 끝나지 않았냐고
더 버티면 버틸수록
더 초라할 뿐

사랑받기엔 너무 말라버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꽃잎도 잎사귀도 없는


지워져 사라져 가
내 새 노랜 품평 받는 흔하디 흔한
기호품일 뿐이라는 그 엄연한 현실에
고갤 떨구는 일만이

어렵사리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일임을 꾹 삼키는 일

그럼에도
이런 내 노래를 들어주는 그대여
고마워요
고마워요

 

촛불집회 논문 출판

Posted by on Feb 21, 2020 in 강의노트, 링크, 영어로 글쓰기, 집필 | No Comments

작지만 뜻깊은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2016-2017년 박근혜 퇴진운동의 거의 모든 집회에 참여하면서 틈틈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와 함께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에 관한 다양한 문헌을 읽기 시작했고, 언어교육과 관련된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여름이었던가요. 장인철(Inchull Jang) 선생님과 함께 현실정치에 관심을 둔 사회언어학/응용언어학자로서 함께 글을 써보자는 의견을 나누었고 자료조사와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방향 전환, 검토와 수정을 거쳐 오늘 <사회기호학 (Social Semiotics)> 저널에 “시위에서 매개도구의 궤적: 대한민국 촛불 집회에서의 손피켓의 사례를 중심으로(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라는 제목의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논의는 시위도구로 쓰여진 손팻말(hand placard)에 집중합니다. 최근 한국의 시위현장에서 보이는 손피켓은 개개인이 손수 만든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대량으로 제작되어 뿌려지는 것이죠. 이는 그 자체로 특이한 현상이면서 여러 가지 언어적, 심리적, 상징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논문은 이 점에 주목하여 손피켓이라는 매개도구(mediational means)를 중심으로 촛불집회를 조망합니다. 시위 현장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의례적으로 또 창조적으로 사용하는지 추적합니다. 나아가 그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합니다.

논문을 읽어보실 분들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논문을 쓰면서 가장 깊게 고민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These impressions made the first author ask the following fundamental questions regarding the politics of protest in a democratic society: “How can we marshal solidarity across a wide range of sociopolitical spectrums while not forfeiting the small yet critical voices of each participant and stakeholder, and how can we achieve democracy ‘within’ protests beyond the protests ‘for’ democracy?” (Fieldnote, 4 December 2016).”

논문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 사진들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신 박여라 선생님, 홍승희 선생님,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이병한 편집국장님과 이정민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원고를 보고 꼼꼼히 피드백을 주신 이정아 선생님과 Mike Chesnut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힘있게 논문을 마무리해 주신 저자 장인철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아래는 논문의 초록입니다. 혹시 읽어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아래 답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메일로 논문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

While positioning this research within the growing body of scholarship related to linguistic landscape of protest, we illustrate a distinctive form of analysis. Rather than giving a generalized, extensive, or quantitative description, we focus on a qualitative and in-depth analysis of a single protest tool in relation to protest actions and space-making. Drawing on the concept of “mediational means” from mediated discourse analysis, we analyze the linguistic and semiotic functions and effects of sonp’aenmal (hand placard), a protest tool uniformly and widely employed during South Korea’s 2016–2017 Candlelight Protests. Based on a corpus of protest images and our autoethnographic accounts of direct participation, we examine why this sign emerged as an important tool in the protest space, how it was utilized ritually and creatively, and the effects of its use on protesters’ experiences, sensitivity, and identity. Competing discursive effects caused by its uniform design and widespread use are discussed further.

KEYWORDS: South Korea, Candlelight Protests, linguistic landscape, mediational means, hand placard, protest tool

 

논문 링크: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10350330.2020.1730555

‘두 교황’을 보다

Posted by on Dec 28, 2019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박사과정 첫 학기를 마치고서였다. 기말 과제를 하느라 쪽잠으로 버틴 지 며칠. 지치고 힘든 마음을 가볍게 만들 영화를 찾다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골랐다. 황정민, 임수정 주연의 <행복>. 결과는 처참했다. 행복해지긴 커녕 새벽에 보고 센치와 비참 수치가 100이 되어서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그따위로 제목을 지었는지.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선택(?)이었다.

오늘 학기를 마쳤다. 가르치는 이들은 수업을 애정하지만 방학을 사랑한다. 학생들이 최고로 치는 명강의도 휴강을 이기지 못하듯 말이다. 그래서 고른 영화가 <두 교황>. 진짜 두 교황에 대한 이야기이고, 실제 사건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교황이 아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해성사를 뛰어넘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위인’의 업적이 아닌 변화와 타협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영성의 씨줄에 인간성의 날줄을 엮어 삶과 신앙의 경계를 없앤다.

다시 볼 거라고 확신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이 영화는 꼭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나단 프라이스와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에 감탄했고, 두 캐릭터의 상반된 성격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구성에 뭉클했다. 초반에 터진 눈물이 끝까지 멈추질 않아서 조금 힘들긴 했지만 <행복>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졌다.

신앙이 있건 없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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