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사고의 관계 – 몇 가지 단상

Posted by on Nov 13,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링크,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1. 사하라 이남 지역의 청각장애인들은 평생 수어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간단한 제스처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래 영상의 패트릭도 1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수어 수업을 듣게 된다.

2. 한편 이 영상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갖고 있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워프가설에서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기본적으로 언어와 사고를 독립적인 변수로 취급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가?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는가?”라고 묻는 방식이다.

3. 하지만 패트릭의 예에서 보듯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단지 사고를 밖으로 표출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사고의 변화과정과 유기적이고 동적으로 맞물린다. 즉 언어가 발달하면서 삶이 변화한다. 패트릭과 그의 급우들은 이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4. 언어를 기술(technology)로 생각하면 필자가 언어와 사고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갖고 있는 의구심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해보자.

“소셜 네트워크는 사고를 형성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가 먼저 있고 소셜네트워크가 그에 따라 구현되는가?”

이 질문의 조악함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유독 언어와 사고의 논쟁에 대해서만은 ‘사고가 먼저다’, ‘언어가 영향을 미친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5. ‘사고’를 말 그대로 사고 전반으로 정의해 보자. 패트릭이 수어를 다 배우고 나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 그의 생각의 세계는 이전과 같을 수 있을까?

6.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는 20세기 초반의 비고츠키의 견해가 21세기의 그 어떤 인지과학자보다도 옳다고 생각한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인간의 발달 초기, 언어와 사고는 서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고 이를 소통과 사고에 있어 제1의 중재방식(mediation means)으로 계속 사용하면 언어와 사고는 사실상 구분이 어려워진다. 성인으로 갈수록, 리터러시가 발달할 수록 언어를 사고에서 떼어내기란 쉽지 않다. 변증적 관계(dialectic relationship)를 이루는 것이다.

7.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로 언어권에 따른 색상 구분 능력 실험이 있다. A언어에 색상을 구별하는 어휘가 풍부하고 B언어에는 한정된 어휘만 있다면 A언어 화자가 색상을 더 잘 구분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제기다. 이에 대해서는 ‘색상 지각 및 구별은 무슨 언어를 사용하든 비슷하게 하지만, 세밀한 차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정도가 현재까지의 인지과학이 내린 결론이다. (이 ‘세밀한 차이’를 차이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쩝.)

8. 이같은 연구는 언어와 비교적 독립적인 시지각 능력을 다룬다. 그런데 이것을 ‘사고’의 대표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그런 의미에서 관련 분야에서 논쟁이 되는 연구들은 ‘언어와 사고’를 다룬다기 보다는 ‘언어와 (언어와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지각’을 다루거나 ‘사고기능 중 극히 일부분’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 옳다.

9. 결론: 언어와 사고는 각각을 독립변수로 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사고의 패턴과 사고능력을 각각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언어와 사고가 배태되고 성장하고 교섭하고 통합되고 변증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개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개인의 뇌에서 사고를 위한 신경세포들과 언어를 위한 신경세포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언어일반과 사고 일반을 독립적인 시스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적 논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련된 연구 패러다임을 ‘언어와 사고의 관계’라고 애매하게 부르기 보다는 좀더 엄밀한 정의를 동원한 논의가 필요하다.

 

 

국가에 대한 예의

Posted by on Nov 12, 2017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죽인 사람들 편을 들죠?”

강기훈씨의 <카바티나>를 배경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말이 흐른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다 자신을 던진 이들의 얼굴들과 만난다. 그의 연주는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몸부림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제스처도 아니다. 바흐의 음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한 청년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아름다움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증거일 뿐.

그의 삶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기타는 고요히 운다. 관객들도 따라서 숨죽여 운다. 이해할 수 없어, 가 닿을 길 없어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는 삶이, 죽음이 있다.

강기훈씨의 연주가 뒤로 숨는 동안 사라진 이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살아남은 이들과 만난다. 권력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은 앞으로 나서려 다른 목숨을 짓밟았다. 대법원 무죄판결 이후에도 여전히 강기훈의 유죄를 확신한다는 이들은 시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높이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삶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강기훈씨가 말하는 ‘시시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알 턱 없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고, 권력을 잡는다.

사운드트랙을 들을 수 없어 대신 Kindgren을 찾는다. 강기훈씨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예의>는 서울 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 부분에 출품되었으며, 자세한 사항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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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한 예의 | 감독 권경원 | 2017 | Documentary | Color+B&W | DCP | 90min 54sec

시놉시스
1991년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던 11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모든 죽음의 책임을 스물일곱의 강기훈에게 전가했다.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을 방조했다는 사법사상 유일무이한 혐의였다. 최종 무죄가 선고된 것은 24년이 흘러서였다. 진범은 국가였음이 밝혀지던 순간 그는 간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스무 해를 넘도록 되풀이해야 했던 말들을 멈추고, 기타를 들었다. 그리고 1991..

출연 강기훈, 강은옥, 고상만, 권혜진, 김구일, 김선택, 김진숙, 박홍순, 송상교, 송소연, 염규홍, 이보은, 이부영, 이석태, 이옥자, 정현아, 채수진, 최은희, 최재인

영화 홈페이지: http://www.siff.or.kr/siff/program/mov_view.php?mov_idx=1859&fes_idx=36&cate_idx=34087&gubun_idx=&sec_idx=&sch_word=&size=10&page=3

자동 요약 및 바꿔쓰기 기술

Posted by on Sep 23, 2017 in 강의노트,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자연어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의 하위 분야로 난이도가 높은 표현을 좀더 쉬운 표현으로 변환하거나 특정 텍스트를 요약하는 기술이 있다. 완벽한 바꿔쓰기(paraphrase)나 적절한 요약과는 거리가 있지만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영어 텍스트 처리가 가장 앞서나가는 듯하다.

관련하여 Rewordify, Simplish 두 서비스가 눈에 띈다. 아래 링크에서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다. 참고로 Simplish는 2천5백 단어 이내의 텍스트 요약이 무료이고, Rewordify에는 단어수 제약이 없다.

http://rewordify.com/index.php
https://simplish.org/

911 수업자료 하나

[911 관련 중고교 수업 자료] 오늘이 911이군요. 세월이 참 빠릅니다. 놀란 동생이 TV를 보라고 소리쳤는데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에 순간 영화 아닌가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테러공격으로 인해 수많은 비행기들이 항로를 돌려 캐나다의 Gander라는 도시에 착륙했습니다. 총 인구 9천명의 작은 도시였는데 하루 아침에 7천 명 정도의 승객이 밀려들었죠. 갑자기 사람이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Gander 주민들은 귀찮다 여기지 않고 성심성의껏 도왔습니다. 아무런 댓가 없이, 상대가 누구냐에 관계 없이 자신들의 시간과 정성을, 삶의 터전를 나누어 준 것입니다. 종교도, 국적도, 피부색도, 성적 지향도, 그 어떤 것도 Gander 주민들의 환대를 막진 못했죠. 이를 USA Today가 보도한 영상입니다. 자막이 있어서 틀어주기 좋을 듯하네요.

 

At the end of the summer break

Posted by on Aug 23, 2017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The end of the break breaks my heart. My students would feel the same. These brokenhearted creatures miraculously meet and heal each other imperceptibly through the semester. The end of the semester will break some hearts again. Winter will mend them with a surreptitious mix of taken-for-granted oblivion and willfully hectic nights and days. When spring comes all this starts over. Resilience does not apply since every encounter, each parting, and each suffering is helplessly unique. I sometimes summon those old days,humbled by the passage of time, soon to be disturbed by a part of me panting against the high tides of productivity and competitiveness. All these thoughts are so ridiculous, like those immature days.

동영상의 밀도

Posted by on Aug 11, 2017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 No Comments

트렌드에 관심도 없고 따라갈 능력도 안되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감은 잡아야 할 듯하여 가끔 ‘영어 학습법’ 동영상을 찾아본다. 대개 정보의 밀도가 낮고 주변적인 이야기가 많다. 아는 내용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나 한두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를 5분 10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미디어에 대한 나의 오해일 수 있다. 동영상의 정보밀도는 낮추고, 신변잡기+경험+유머+슬쩍호통치기를 적당히 갈아넣어 매력적인 진행자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이 최고의 성공전략일지도 모르니까.

얼마 전에는 동영상 강의를 보는데 추천 영상 중 하나가 <미국 교포 vs 영국 교포, 누가 더 영어를 잘할까?>라는 제목을 달고 있더라. 이런 제목에 끌리는 사람과 행여나 손이 미끄러져 클릭하게 될까 조마조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한국에서 웹이 시작되던 시기부터 웹상의 교육에 대해 고민해 왔지만 미디어에 대한 태도와 미감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듯하다. 영상을 정보습득의 제1매체로 쓰는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상이라는 ‘외국어’에 좀더 깊이 빠져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덧: 물론 모든 영상이 ‘듬성듬성’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애정해 마지 않는 Vsauce 같은 채널을 보라. 문자매체 못지 않은 정보밀도를 자랑한다. 스크립트가 웬만한 책 원고보다 낫다.

https://www.youtube.com/user/Vsauce

손편지와 전자우편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우편, 편지’를 의미하는 영단어 mail은 고대 프랑스어 male에서 온 것으로 초기에는 여행 가방을 의미했다. 이후 우편제도의 발달에 따라 ‘우편물’ 혹은 ‘편지를 부치다’등의 뜻으로 진화했다. 20세기 후반에 대중화된 e-mail은 ‘전자우편’이라는 뜻의 electronic mail의 준말이다.

편지가 이메일이 된 것은 전달의 매개 즉 미디엄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우편배달에 있어 궁극의 퀵서비스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전달방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전자우편 기술의 반쪽만을 보는 결과를 낳는다.

이메일은 메시지의 전달방식(delivery method) 뿐 아니라 정보의 저장방식(archiving method)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편지는 정보를 담은 물체가 공간이동을 하지만, 이메일은 정보를 복제하여 상대와 공유한다. 편지는 내 손을 떠나 보내는 것이 맞지만 이메일은 실상 나에게도 너에게도 보내는 것, 즉 ‘카피 앤 페이스트’하는 것이다. ‘이메일을 보내시겠습니까?’라는 말은 ‘이메일을 복사에서 홍길동의 메일 서버에 붙이겠습니까?’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디지털 정보를 두 사람이 갖게 되는 사태는 물성을 지닌 편지가 받는 사람의 소유가 되는 사태와 사뭇 다르다. 편지라는 미디어는 정보 및 그 담지자(carrier)의 비대칭성을 특징이지만 이메일은 정보의 대칭적 소유가 특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SEND” 버튼은 “GIVE & TAKE” 아니, “TAKE & GIVE” 버튼이다. ‘보내기’ = ‘나 한부 갖고 너 한 부 갖자.’

편지를 보내는 순간 나에게서 떠난다. 사라지는 편지라야 진짜 편지라는 말이다. 이메일은 보내는 순간 나에게도 남겨진다. ‘보낼 편지함(미래)’에서 ‘보낸 편지함(과거)’로 이동하지만 여전히 내가 쥐고 있는 상황은 지속된다. 동일한 메시지를 담는다 하더라도 편지는 ‘사라짐의 미디어’이고 이메일은 ‘남겨짐의 미디어’랄까.

손편지를 쓰다가 뭐 이렇게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노트 필기였다면 이렇게 장황하진 않았을 거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지!

Posted by on Jul 15,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뭐야? 정말 하고 싶은 걸 찾아야지.”

세월의 밑바닥에 켜켜이 쌓인 회한이 또다시 이루지 못할 꿈의 탄생을 재촉한다. 듣는 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고 해도 꿈을 찾으라는 충고 때문은 아닐 것이다.

OECD 성별 격차 지수 Gender Gap Index

Posted by on Jul 9, 2017 in 링크 | No Comments

OECD가 발간한 2016년 World Gender Gap Report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간 격차(Gender Gap)는 세계 116위입니다. (참고로 2013년에는 111위였네요.) 지수 산출 기준은 경제부문의 참여도와 기회, 교육성취, 보건 및 생존, 정치적 권한 등입니다. 아이슬란드와 핀란드, 노르웨이가 1-3위를 차지했군요.

Rankings

구동사(phrasal verb)와 구명사(phrasal noun)

한 페친께서 “run-down”이라는 구명사(phrasal noun)을 언급하셔서 관련 링크를 하나 공유합니다.

영어 학습 단계에 있어 상위 학습자와 원어민을 가르는 몇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구동사(phrasal verb)의 자유로운 사용이죠. 영어를 꽤 잘하는 분들도 put off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자리에 postpone이나 procrastinate를 쓰거나, set something off 라고 쓰면 적당할 상황에서 cause something to begin과 같이 쓰는 걸 볼 수 있으니까요.

사실 저도 이러는 경우가 많아서 미국인 동료 하나가 ‘너는 왜 말하는 걸 글쓰듯 하냐?’라고 물은 적도 있습니다. 저는 당당히 ‘영어를 글로 배워서 그래.’라고 대답했죠. ^^

구동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구명사(phrasal noun) 입니다. Report가 동사와 명사 모두로 사용되듯 run down 또한 동사로도 명사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띄어쓰기 없이 한 단어로 쓰거나 중간에 하이픈을 넣어주어야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구명사(phrasal noun)의 다양한 예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phrasal verbs vs. no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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