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당’한 세대의 아픔

 

나는 ‘포기자 담론’에서 포기의 주체를 학생들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면밀한 조사를 통해 교과교육의 실태를 파악하고 학생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 소위 ‘포기자’를 줄이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의 포기’ 이면에는 국가와 교육당국, 일부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포기가 있고, 이러한 포기의 핵심에는 교육에 대한 이 사회의 포기가 자리잡고 있다.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 대한 보살핌을 포기하고, 교육체제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고, 국가는 새로운 시민을 키워내기를 포기했다. 이렇게 보면 분명 학생들은 포기’당’한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내팽개쳐진 세대가 배움의 일정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이상한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전통적인 교육의 요소는 <교사-교육내용-학생>의 세 축으로 설명된다. (이 모델의 정합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논의를 위해 잠시 차용한다면) 핵심적인 문제가 ‘교육내용’에 있는가?

나는 도리어 교사와 학생의 문제, 관계의 문제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교사나 학생 개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제도적 역학이다. 교육과정의 양과 내용에 대한 토론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것이 핵심이 될 수는 없다. 개별 주체들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노력의 범위와 깊이를 정하는 것은 구조적 요인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 정확히 3년 전 오늘 쓴 글을 하필 오늘같은 날 읽게 된다. 교육정책은 늘 ‘표류중’이었으나 이젠 더욱 거센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문제는 언제나 존재했으나 그나마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문제로 느리게 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로 큰 흐름이 단절되었다. 지난한 싸움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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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3&aid=0008760294&sid1=001

티-글 모아 태산

저자로서의 목소리(authorial voice)는 거대한 관점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초성과 단어의 선택에서, 어미의 변주에서, 격식의 조절에서, 어구의 호흡에서, 반복의 간격에서, 문장과 문단의 길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함의되고 생략된 요소에서 드러난다. 리터러시는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 정보처리의 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글쓰기의 과정은 언제나 소리 하나,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의 연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글짓기는 언제나 단어-짓기(word-building)이며, 단어-짓기 없는 세계-짓기(world-building)는 존재할 수 없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당파성을 드러내는 ‘객관성

Posted by on Aug 15,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나는 평소에는 온갖 사건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곁들여가며 의견을 내놓다가 특정한 사건에 대해서는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라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시전하는 선택적 객관이야말로 특정인의 편향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개별 행위가 아니라 여러 행위의 연속이, 여러 행위의 연속이 아니라 특정 행위의 공백이 누군가의 당파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말처럼 종국에 가서 우리가 기억하게 될 것은 적들의 말이 아니라 동지의 침묵일지 모른다. (In the end, we will remember not the words of our enemies but the silence of our friends. – Martin Luther King Jr.)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왜(WHY)의 힘

Posted by on Aug 14, 2018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1. 영어를 모국어로 습득하는 아이들에게서 보통 “what”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where’와 ‘who’가 그 뒤를 잇는다고 한다.

‘무엇을’, ‘누가’, ‘어디서’는 보통 눈에 보이는 요소다. 하지만 ‘why’는 보이지 않는 요소, 즉 동기(motive)와 의도(intention)에 관한 것이다. Why의 등장과 올바른 사용은 마음이론(theory of mind)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듯하다.

2. ‘why’는 보통 만 2세 직전쯤 나타나서 어른들을 괴롭게 한다고 하는데, 이건 한국어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왜, 왜, 왜” 세례를 받고 짜증 안내본 부모들은 별로 없으리라.)

3. 의문사 중에서 대개 가장 늦게 등장하는 건 ‘when’과 ‘how’인데, 언어학자들은 빈도 외에도 인지적으로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럴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는다.

시간이라는 게 성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개념이지만 아가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사건의 연쇄나 양태를 말하는 ‘어떻게’도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분명 what이나 where 혹은 who와 다른 층위의 인지적 복잡성이 있는 것이다.

4. MIT의 Deb Roy 등의 연구가 좀더 진행되면 개별 의문사들의 사용빈도 및 맥락 등을 고려한 체계적 설명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5. 언어습득의 맥락을 떠나 ‘왜’가 가지는 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왜”는 대개 강력한 반응을 이끌어 낸다. 아이들이 ‘왜’라고 질문할 때, 설명하기 귀찮아하기도 하지만, 때로 자기도 답을 모르거나 숨기고 싶은 걸 들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왜”라는 질문을 몇 번 던지다 보면 내 동기의 밑바닥을, 평소에는 생각조차 가지 않는 복잡다단한 감정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왜”를 몇 번 던지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된다.

“왜”는 힘이 참 센 녀석이다.

(의문사의 등장 단계에 대해서는 Patsy M. Lightbown and Nina Spada. (2013). How Languages are Learned (4th edition). Oxford Handbooks for Language Teachers. Oxford. 10쪽을 참고하였습니다.)

들숨과 날숨, 침묵과 경청

Posted by on Aug 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말하지 않을 땐 날숨과 들숨의 길이가 비슷하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으나 보통 2초 정도 들이마시고 2초 정도 내쉰다. 이에 비해 말을 할 때에는 들숨이 빨라지고, 날숨의 길어지는데, 1초 정도 들이쉬면 4초 정도 내쉰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소리를 내려면 대개 숨을 내쉬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이야기하긴 꽤 힘들다.)

침묵할 때라야 들숨과 날숨이 균형을 이루건만 할 말 많은 이들은 들숨의 시간이 아깝다. 나도 그래왔던 건 아닌지 돌아보는 요즘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글쓰기 훈련에서 배운 것

돌아보면 힘들었던 건 타지생활이 아니었다. 먹을 게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나날이었고, 밤낮도 주말도 없는 직장생활의 여유없음을 핑계로 방치했던 동네라는 공간을 다시 발견한 시기였고, 자주 홀로 걸으며 길과 하늘을 사진으로, 마음으로 담을 수 있었던 벅찬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사과정 내내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나를 괴롭혔던 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었다. 제2언어 리터러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쓰기에 대한 강의를 하고 학술논문 쓰기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도 자신의 글쓰기에 늘 신경이 쓰였다. 내가 가진 생각을 좀더 깊은 울림으로, 명확하고 생생하게, 아름답도록 아리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지만 여전히 영어는 “그들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배운 건 심오한 지식의 세계라기 보다는 글쓰는 사람으로 살아내야 할 일상, 글쓰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가다듬는 방법, 생각을 머금은 긴 산책으로 글길을 내는 일이었다.

조금 늦었지만 가파른 이론의 산을 오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있어보이는 암벽을 고르는 게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사고와 글쓰기의 통합”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쓰는 건 사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담긴 뜻을,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하루 하루 조금씩 엮어갈 수밖에 없다는 조언의 참뜻을 이제야  알 거 같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쓰기라는 베틀을 통해 생각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고, 엉킬 대로 엉킨 생각의 타래를 글줄로 뽑아내는 희열을 사모하게 되었다. 잘 다듬어진 글결이 보여주는 생각의 나이테에 감탄하게 되었고, 생각의 여정에서 남겨진 쪽글의 순진함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을 함께 써가는 사람들을 만나 아픔을 나눌 수 있었다. 글쓰기와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지만 계속 “차이는” 사람들, 그 쓰라림에 의연하지 못한 이들. 그래서 쓰기와 애증의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나같은, 가련한, 아름다운, 별것 없지만 또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 기쁘고 또 슬펐던 나날이었다. (2012. 8.)

오늘 밤에도 못쓴 글이 폭염에 스치운다.

‘글은 못쓰지 않아요.
당신이 못써요.’

철학학교 짓:다 7월 특강 <말과 생각> 후기

Posted by on Aug 1, 2018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7월 30일 7시 30분 얼마 전 뵌 철학학교 짓:다의 김성민 대표님과의 연으로 처음 대중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대중강연’이라 함은 서로 다른 배경과 지식수준을 지닌 불특정 다수의 청중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야 하는 상황을 뜻했는데요. 할 말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다고 해도 전체 강의의 너비와 깊이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계속 고민이 되더군요.

오신 분들의 배경을 다 알 수는 없으나 대충만 봐도 학부생, 교사, 대학원생, 일반인, 페이스북 지인, 응용언어학 전공자, 대학교원 등 매우 다양했습니다. (쓰고 보니 ‘페이스북 지인’은 저 분류에 왜 들어가 있는 것인지 ㅎㅎ 사실 수학자이십니다.) 관심분야 또한 언어학, 영어교육, 심리학, 최면술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고요. ^^

강연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건 무엇인가?”
“언어와 사고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메타포는 언어의 장신구일 뿐일까?”

이는 각각 언어와 맥락의 역동적 관계, 워프 가설의 현대적 재조명, 개념메타포 이론으로 본 언어와 사고와의 유기적 관계라는 내용에 대응합니다. 하나 하나만 가지고도 몇 시간은 해야 하는 주제인데 언어와 사고를 이해하는 주요한 테마들인지라 욕심을 좀 냈습니다.

한 분 한 분이 어떻게 느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제 밤과 오늘 아침 스무 분 정도의 참석자 중에서 무려 네 분께 짧지 않은 글을 받았습니다. 강의에 대한 소회에서 인지언어학 관련 궁금증 및 추가 공부를 위한 자료 요청까지 내용도 다양했지요. 할 일은 좀더 생겼지만 뿌듯한 일이 아닐 수가 없네요.

이렇게 또 한 페이지를 넘기고 본격적으로 다음 학기 준비에 돌입합니다. 방학이 긴 것 같지만 사실 뭔가 쉬지 않고 계속 하게 되네요. 강의계획서 준비하라는 메일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 진행을 맡아주시고 사진 찍어주신 김성민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철학적 사유와 글쓰기를 매개로 한 깊이있는 공부에 관심 있는 분들은 짓:다 철학학교에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덧. 혹 이 주제로 강연을 요청하고 싶으시다면 메신저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조금 부족하지만 오랜 시간 발전시켜온 강연이라 많은 분들께 정성껏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또한 담겨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로 본 언어의 한계

Posted by on Jul 31,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언어의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효과와 인상입니다. 오늘은 성경구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글로 써 놓아도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가 동시에 포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진리’ 다음에 ‘자유’가 오는 언어 구조가 저 말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생각해 볼 지점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네게 진리가 있어?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모른다고?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언어표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점진적 과정은 조금씩 자유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와 ‘자유’라는 명사가 개별적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언제나 언어와 삶을 엮어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우리 이야기잖아,” 혹은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말’

Posted by on Jul 29,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몇주 전 월간 <좋은생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작은 원고를 싣고 싶은데 기억에 남는 어머니의 말씀을 소재로 써달라는 초대의 말씀을 전해 주셨죠. 흔쾌히 그러겠다 승낙을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짧지 않은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모아 <어머니와 나>를 내고 지금도 종종 기록하고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좋은생각>의 방향에 맞는 어머니의 말씀이 무얼까 계속 생각하게 되더군요. 저 혹은 어머니에게만 좋은 생각이 아닌 잡지의 모든 독자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그런 좋은 생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책 속에 다 담아내지 못한 문제의식과 다시 만났습니다. 바로 문해력과 글, 그리고 삶의 관계였지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독서 패턴도 점점 말랑말랑한 자기위안이나 가벼운 일상을 다루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분석도 있고요. 표면적으로 볼 때 한국인의 읽기 능력은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파보면 정작 길고 깊은 글을 읽어내는 능력은 상당히 부족한 실정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 문제를 짧은 원고에 오롯이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욕심인 줄 알지만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습니다. 마지막에 출판사 쇤하이트의 대표이신 Kyungsoo Sohn님께서 소중한 피드백을 주셔서 아래 글이 나왔네요. 역시 짧은 글이 더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더 많은 ‘우리 이야기’가 세상을 감싸안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에서 함께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저의 일상을 포근히 안아 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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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야기: 잊지 못할 어머니의 말

봄을 선언하듯 벚꽃이 도시를 뒤덮기 시작하던 날, 한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을 안겨 드렸다. 표지를 쓰다듬으시며 언제 이럴 시간이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당신의 얼굴이 수줍게 빛났다. 기쁨에 달뜬 어머니를 보며 내 가슴도 함께 뛰었다. 세상도 마음도 제대로 봄날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과 나눈 이야기를 복기하곤 했었다. 열차가 도착하고 승객이 쏟아져 나오길 몇 차례 반복하면 일상의 기억은 글이 되어 있었다. 때로는 눈보라가 치고 무더위가 심술을 부렸지만 기록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다섯 해를 훌쩍 지나 소소하고 따뜻했던 추억은 책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네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우야, 책 다 읽었다.”
“아니, 벌써요?”
“응, 승강장에 앉아서 단숨에 읽었지.”
“집에도 안 가시고요? 어찌 그렇게 빨리 읽으셨대요?”
“엄마가 한 말이 그대로 들어 있으니 술술 읽히더라. 다 우리가 한 이야기잖아.”
“아… 그렇죠. 우리 이야기.”

읽기는 단어와의 만남을 넘어선다. 글쓴이의 말을 통해 삶을, 나아가 세상사의 이치를 엮어 내는 일이다. 이같은 능력을 ‘문해력’이라 한다. 독서가 힘겨운 까닭은 문해력을 갖추지 못해서다. 언어뿐 아니라 문화와 사회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만 한 권의 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의 말’을 ‘그대로’ 담은 ‘우리의 이야기’였기에 책을 한달음에 읽을 수 있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이런 나의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간 책을 쉬이 읽지 못하셨던 건 그저 문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삶과 언어를 담은 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책이 많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개개인의 지혜가 되지는 못한다. 살던 대로 살겠다는 아집이, 독서를 성적의 도구로 삼는 교육이, 잠깐의 여유마저 허락지 않는 무한경쟁이 책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다. 어머니의 말씀은 여기에 한 가지 숙제를 더한다. 삶을 오롯이 담아낼, 누군가의 가슴을 단숨에 적실 언어를 어떻게 빚을 수 있을까?

단 한 명의 독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좋은생각> 2018년 8월호. 60쪽

언어가 사라질 때 새로운 소통이 시작된다

Posted by on Jul 2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사람들은 같아 보이지만 다른 언어를 쓴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다르고, 그의 ‘편두통’과 너의 ‘편두통’이 다르다. 하지만 미묘한 감정이나 뉘앙스를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별탈없이 소통을 하고 협업하며 살아간다. 모순과 헛점 투성이 언어이지만 사람들을 느슨하게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그럭저럭 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코드로서의 언어가 없으면 관계의 끈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친하게 지내려 노력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길냥이들에 대한 애정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언어 소통의 부재가 한몫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언어가 아닌 만남이 소통의 주요한 매개가 된다. 내가 고양이들과 특정한 언어로 소통을 했다면 그들의 마음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 걸음걸이에, 발짓에, 앉고 일어서는 자세에, 혀놀림에, 움직이는 속도에, 꼬리의 움직임에, 울음소리에, 경계태세에, 몸의 떨림에, 그리고 순식간에 변하는 눈빛에 지금처럼 몸과 마음을 기울이진 않았을 것 같다.

코드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역설적이게도 코드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몸짓들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서로 얼마나 알아들었느냐, 즉 언어 교환의 효율성(efficiency)이 아니라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함(co-presence)이 더욱 중요하고 또 절실할 수밖에 없다. 언어코드의 힘이 줄어드는 지점에서 현상학적 실존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언어 코드의 부재는 길냥이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가 아니라 탐구를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냥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질문을 할 수 없으니 과학적으로 검증된 지식, 큰 고양이 관련 커뮤니티에서 ‘사실’로 통용되는 상식을 찾아보게 되는데, 이를 통해 고양이의 종적 특징에 대해 좀더 이해함과 동시에, 그런 특성이 일반화될 수 없음 또한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통의 모순이 있다. 소통할 수 있음은 소통의 힘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수반한다. 경청은 소통에 필수이지만 경청이 소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하다. 소통가능성은 소통불가능성을 포함한다.

이렇게 보면 언어의 교환은 소통의 아주 작은 부분인지도 모른다. 때론 말 몇 마디를 주워 담고는 ‘이 사람을 이해했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사람의 사고, 기호, 성향, 인생사 등에 대한 진지한 공부없이 글 한두 편으로 그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교훈들. 누군가를 만났다면 몸도 마음도 함께 있을 것, 이해하고 싶다면 깊은 관심을 갖고 오래 지켜볼 것, 몇 마디 말에 그 사람의 모든 걸 담아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냐옹냐옹냐냐옹.

덧.
시인들은 언어라는 매개로 언어를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하지만 그렇기에 시인들에 의해 언어의 외연은 확장되고 심연은 더욱 깊어진다. 그리하여 나에게 시는 ‘언어 바깥의 언어를 꿈꾸는 언어’에 다름 아니다.

#강의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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