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습,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기 (1)

새로운 언어를 통해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기. 외국어를 공부하는 여러 이유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배우고 감동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이 바뀌듯, 새로운 언어가 열어주는 세상을 통해 내 안의 지식, 경험, 의견, 욕망, 아픔 등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영어교육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을 획일화하는 경향을 지닙니다. 특정한 프로그램을 선택한 사람들은 엇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제, 같은 관점, 같은 공부 순서, 같은 학습법을 ‘강요당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는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데에서 오는 한계입니다.

언어학습을 위한 내용구성에 있어 원칙은 분명 존재합니다. 문법과 같이 그 내용이 잘 정의된 요소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출판사들과 영어학습 프로그램 개발자들은 이런 순서를 S&S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합니다. “Scope and Sequence”의 약자로서 어떤 범위의 내용을(scope) 어떤 순서대로(sequence) 가르칠 것인가를 정하는 가이드라인을 S&S 라고 하지요.

하지만 특정 S&S가 학습자의 성향이나 정체성과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흥미없는 소재를 늘어놓은 학습교재를 자신이 즐길 수 없는 방식으로 학습해야 한다면 영어공부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런 경향은 평가의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언젠가 한 토익 수험서를 훑어보다가 스피킹 섹션에서 다음 질문을 발견했습니다.

“최근에 옷을 언제 샀나요?”
“일년에 라이브 공연에 몇 번이나 가나요?”

수험서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전략적 대비를 강조하며 ‘모범 답안’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여름 인턴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정장과 셔츠를 샀다.” “라이브는 서너 번 가는데 주로 락이나 힙합 공연이다.” 등의 문장들이 한국어와 영어로 정리해 주는 것입니다.

수험생들은 으레 모범답안을 외웁니다. 외우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아니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문장들을 자신의 상황에 맞게 고쳐 외우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암기하는 경우가 꽤 되지요. 그러다 보니 있지도 않은 인턴, 사지도 않은 정장, 가지도 않은 여행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갑자기 없던 여동생이나 드론이 생기기도 합니다. 관심도 없던 주제에 ‘확고한 자기 의견’이 생겨버리기도 합니다. 본의 아니게 ‘사소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말로 피해 볼 사람이 없기에 별 문제는 아니라고 넘길 수 있습니다. 채점기관이 사설 탐정을 고용해서 답안을 쓴 수험자에게 정말 여동생이 있는가, 그집 옷장 안에 최근 구입한 정장이 진짜 있는가를 추적하지도 않겠죠.

하지만 이것은 효율성의 극대화가 지상최대의 과제가 된 사회의 사소한 비극입니다. 영어, 아니 영어점수를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인양 하는 풍경은 결코 멋지지 않습니다.

시험공부를 위해 문장을 암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의 의미가 우리 삶과 어긋나는 거라면 어떨까요? 영어 일기를 쓰기 위해서는 영어표현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일상과 관련 없는 영어일기용 문장을 줄줄 외우고, 이를 엮어서 일기를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요? 누구도 이로 인해 큰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걸까요?

어쩌면 이런 ‘사소한 비극’이 차곡 차곡 쌓여 공부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도 평범한 우리의 삶을 더더욱 진부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영어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세계를 획일화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계속)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집필중

정확은 부정확의 축적입니다

외국어를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말을 아끼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여 정확성에 나름 자신이 생길 때까지 문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부정확하게 말하기’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정확에서 정확으로의 변화는 온 오프 스위치처럼 작동하지 않습니다. ‘부정확(不正確)에서 ‘부(不)’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정확성의 발달은 부정확함에 대한 용인, 부정확하게 느껴지더라도 말하는 용기, 나아가 부족한 자신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부정확함에 야유와 조롱를 보냅니다. ‘발음이 왜 저 모양이냐’는 눈빛이 도처에서 감지됩니다. 이는 우리 가 각자의 불완전함을 수용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는 목소리가 들려야 할 곳에 침묵을 가져오고, ‘부정확’에 대해 과도하게 마음을 쓰도록 만듭니다. 때로는 자괴감까지 따라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옹알이를 하고 서툰 발음으로 말소리를 내었으며 ‘엄마’를 정확히 부르는 데만도 수십 개월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모국어 체계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상황이라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죠.

“그 사람 발음 정말 이상한데 말은 다 통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발음이 안좋아도 통하는 영어는 없습니다. 통하는 영어라면 발음이 좋은 것이죠.

‘네이티브와 같은 정확성’이라는 족쇄를 풀고 소통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좀더 정확해질 수 있습니다. 소통하는 사람만이 좀더 정확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처음부터 정확할 수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억하세요. 한걸음 더 나아가는 용기와 함께 말은 자라납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작성중

가짜뉴스, 소셜미디어, 그리고 몸

소셜미디어의 급속한 팽창은 패거리사고와 확증편향을 위한 최적의 정보생태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울러 소위 ‘가짜뉴스’도 창궐하고 있다. 미디어리터러시 교육으로 이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심히 회의적이다. 미디어가 몸의 확장이라면 그 몸이 점하고 있는 시공간, 그 몸이 처한 정치경제적 상황, 몸에 가해지는 다양한 물리적/신체적/심리적 힘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확장’만을 건드리는 것은 큰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가짜라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짜뉴스가 필요한 사람들이, 조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 필요는 ‘진짜’이며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언어경관 잡감

Posted by on Oct 1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영어 | No Comments

1. Drug-free zone

아래 표지를 보고 어떤 학생이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왜 여기에서는 (마)약이 공짜예요?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

2. “나무를 사랑합시다 (Keep off)”

한국어를 꽤 아는 한 미국인은 이 표지판을 보고 굉장히 재미있어 했다고. 일반적으로 표지에 두 언어가 있을 때 기본 가정은 두 표현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처참하게 깨는 표지판. (나무를 사랑합시다 vs. 가까이 오지 마)

– 원어민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표지들이 언어학습자/외국인 입장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됨.

3. 좀 오래된 일이지만 미국 뉴욕의 Flushing에 한국어로만 된 간판이 너무 많아져서 시에서 규제를 할까 검토하려 한 적이 있었다고 함. 아래는 관련 뉴욕타임즈 기사.

Ethnic Friction Over Signs That Lack Translations

4. 한국의 교통표지, 행정 관련 안내 등을 보면 한국어, 영어 표기가 가장 많고 이 외에 중국어와 일본어 표기가 종종 발견됨. 하지만 현재 한국에 체류중인 외국인 국적 통계에 따르면 중국이 1위, 미국이 2위이고, 근소한 차이로 베트남이 3위. 이후 일본이 4위 태국이 5위라고 함. 언어경관에서 우세한 언어와 실제 표지판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음.

5. 한국은 보통 외국어로서의 영어(English as a Foreign Language)를 쓴다고 함.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쓸 일은 없기 때문. 하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간판, 광고, 교통표지, 안내, 상품 설명 등에서 영어의 존재는 엄청남.

언어의 풍경을 잘 들여다 보면 단순한 정보의 다양화가 아닌 사회문화적 권력이 발견됨.

#언어경관

같은 말은 없다.

Posted by on Oct 16,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주어요”에서 “줘요”로의 변화는 아무런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문법서의 설명은 이 둘을 등호로 연결한다. 하지만 쓰임과 의미의 영역에서 이 둘은 사뭇 다르다. 비주얼 디자인의 영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등호로 연결된 수많은 언어들은 사실 같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엄청난 차이를 수반할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를 뿐 아니라 “줘요”다르고 “주어요” 다른 것이며, “혼코노” 다르고 “혼자 코인 노래방” 다른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의미와 말의 관계

Posted by on Oct 16,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서너 개의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사고의 지형에서는 철저한 단일언어구사자인 사람이 있고,

하나의 언어만을 구사하지만

자유로운 다중언어구사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의미와 말은 반듯한 일대 일 관계에 있지 않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 위한 영어예문

삶으로 펄떡이는 말을 돌려줘.

그따위 판에 박힌,

어디에서 베껴온 듯한,

옛 문법서에서 태어나

줄세우기 시험지에서 죽어갈 예문 말고.

 

세계로 가득한 지문을 보여줘.

벅찬 가슴으로 맞을 대화를 들려줘.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세상에서 절대 부딪칠 일 없는 지문들 말고.

 

내가 어리다고 해서

영어가 부족하다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지도 마.

 

외국어라고 해서

내신 시험이라고 해서

일부러 죽은 것들을 가르칠 필요는 없잖아.

 

삶을 읽고 듣게 해줘.

마음껏 소리치게 해줘.

기뻐하고 분노하게 해줘.

웃고 떠들고 눈물 흘릴 수 있게 해줘.

 

말이란 게 애초부터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

영어로도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살게 해줘.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함께 스러질 수 있게

 

감옥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자가 아니라 친구를,

껍데기가 아니라 진짜를

만나고 싶어. 노래하고 싶어.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집필중

#랩가사써보고싶다

 

리터러시 발달과 영상편집

성인의 리터러시 발달은 여러 글간의 통로를 지나 글 내부의 문단 사이로 향한다. 행간 읽기 능력의 발달은 문장 사이의 공간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와 거리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읽기쓰기와 세상살이의 경험이 쌓일수록 낱말 하나, 토시 하나의 차이에도 ‘취약해진다.’ 이는 결국 개별 단어가 끌어당기거나 밀쳐내는 세계에 대한 성찰로 향한다. 비고츠키가 말하듯 의미를 담은 낱말 하나에서 의식의 소우주를 만나는 것이다.

플래시백이나 슬로우모션, 롱테이크, 교차편집 등의 기법이 영화에서의 시간을 재발견, 재구조화한 것과 리터러시의 발달이 단어와 단어, 말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재창조하는 일은 참 많이 닮았다. 특정 장르의 글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에게 사건은 내러티브 수준이 아니라 단어 수준에서 정의되며, 한 단어 한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리터러시 발달로 본 개체발생은 영화편집의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영어로글쓰기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언어교육을 공부하는 이유: 에필로그를 대신하며

언어교육을 공부하는 이유: 에필로그를 대신하며

짧지 않은 시간 영어교육과 응용언어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 대단할 것은 없지만 제 삶의 큰 부분을 이룬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언어학습의 메커니즘을 밝혀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외국어를 배우고 즐길 수 있게 하는 일. 언어와 사고, 나아가 사회의 관계를 정확히 그려내는 일. 인지언어학, 심리언어학,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언어교육 등의 여러 응용 분야들을 꿰어 가치있는 지식을 만들어 내는 작업. 이들 하나하나가 큰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영어의 힘이 막강한 한국사회에서 영어교육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또 다른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저는 영어교육 관련 연구를 비롯한 언어교육학의 목표 중 하나가 언어와 소통에 대한 새로운 미학의 창조라고 믿습니다. “새로운 미학의 창조”라 함은 ‘멋진 발음’, ‘네이티브 영어’, ‘유창한 언어’ 등에 관해 의심을 품고 우리가 아름답다 여기는 언어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외국어를 통한 소통을 이해함에 있어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미학”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솔직히 알아듣기 쉽게 영어를 구사하면 좋습니다. ‘표준어’를 시원시원하게 하는 사람이 편합니다. 싱가포르 영어보다는 이른바 ‘본토영어’에 집중이 더 잘 됩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소위 ‘표준’ 한국어 발음을 통해 모국어를 습득했고, 미국영어를 기준으로 영어를 공부해 왔기에 자연스럽게 ‘표준어’와 ‘표준영어’의 억양과 발음이 스며들었습니다. 제 몸에 새겨진 언어습득과 학습의 역사를 하루 아침에 제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몸이, 혀와 귀가 이미 거기에 깊이 길들여져 그런 언어들을 ‘덜 피곤하다’고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누구도 ‘비표준’의 ‘이상한’ 발음을 일부러 구사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불리할 게 뻔한 비원어민 문법을 고집하진 않습니다. 인간의 발음이나 문법능력 자체에 우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을 한 줄로 세울 수 없듯 말입니다. 다만 그 언어를 우상화하거나 멸시하거나 소외시키는 우리의 마음에 이 시대의 명암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할 때 ‘김치 발음’이 나는 것은 뼛속까지 한국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틀린 발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의 역사와 정체성이 영어발음이라는 매개로 표현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제 영어 발음이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지요. 그것은 저의 한계이지만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갖고 있는 발음은 배우는 주체로서 저 자신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발음으로 저를 판단하시려 하는 분은 제 생애사 전체를 판단하고 계신 겁니다.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돌아보면 제 발음이 막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종종 마음에 들지 않았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의 혀를 통해 사람들과, 또 세계와 소통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 억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게 쉽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께 이 우주상에 하나밖에 없는 발음으로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제 발음이 몇몇 분들께는 ‘외국의/낯선 발음’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합니다. 그렇습니다. 제 발음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영어발음과 문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영어를 배워온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나를 키워낸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습득하게 된 내 모국어의 체계와, 그 모국어 발음에 최적화된 제 혀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사정없이 폄하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말과 함께 살아온 제 삶의 총체를 부정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발음이 ‘이상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고, ‘절대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악센트에도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몸부림이 숨어 있습니다. 유창한 발음으로 텅빈 과장의 말을 하기도 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뻔뻔함과 무례함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언어의 겉과 속이 불일치하는 경우를 너무 자주 봅니다.

이런 생각에 터해 외국어를 통한 소통에서 새로운 미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발음이 안좋아서 영어를 못알아 들을 때 ‘얘 발음이 왜이래’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텐데, 대화가 길어질 것 같긴 하지만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며 차근 차근 대화를 이끌어가려는 노력이 아름답습니다.

특정 외국어를 하나도 몰라서 손짓 발짓을 통해 의사소통하려는 사람 앞에서, ‘아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서 전달하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어떻게 하면 상대의 의미가 좀더 명확해질까?’라고 궁리하는 태도가 아름답습니다.

‘빠다발음’과 백인 앵커 목소리에 쉽사리 아름다움을 부여하지 않고, 의미를 창조하고 전달하는 지난한 과정에 감동하는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사투리를, 싱가포르와 아일랜드와 동남아와 한국의 영어를 ‘비표준’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다양성과 개성을 전달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으로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외국어를 쉽게 폄하하거나 이상하다고 판단하지 않으며, 날로 성장하는 타인의 언어를 응원하며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아름답습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권의 부여과 구별짓기의 도구로서의 영어를 넘어 삶을 풍성케 하는 가능성의 언어로서의 영어를 키워가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쉬이 줄세워 사회적 자본을 불균등하게 분배하는 영어의 힘에 저항하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영어를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성찰과 소통, 연대를 위한 우리 삶의 언어”로 바꾸어 나갔으면 합니다.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감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일상에 뿌리박은 단단하고도 재미난 영어학습의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다른 삶과 세계를 상상하는 힘이 되는 영어가, 우리 모두를 성장시키는 영어교육의 문화가 숨쉬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동네에서, 도서관에서, 스터디 모임에서, 그리고 어둔 밤 홀로 공부하는 여러분들의 컴퓨터와 노트 속에서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실천하는 재미난 실험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 또한 계속 공부하고 궁리하며 나누겠습니다.

삶을위한 영어공부,
이제 시작입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작성중

‘따옴’ 없는 작은 따옴표

Posted by on Oct 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인용’이 아니라 ‘강조’ 혹은 ‘주관성’을 표현하는 ‘작은’ 따옴표의 용법이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름은 ‘따옴’표지만 ‘따옴’과는 관련 없는 ‘자기 나름’의 ‘강조 전략’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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