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ear you”

‘듣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hear’에는 ‘이해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듣는 일(지각)과 상대의 마음/의견/상황/생각 등을 이해하는 일(인지)이 한 단어 안에 쏙 들어가 있다.

그래서 “I hear you.”라는 말을 좋아한다.

돌아보면 상대의 말을 다 들어보지 않고도 공감한다 생각한 적이 많았고, 상대방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 하에 상대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적도 있었다.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해하기. 다 듣지 않고 알 수 있다 믿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않기. 지각과 인지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기.

“I hear you.”가 내게 전해주는 교훈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지언어학이야기

보통명사, 고유명사, 그리고 김춘수의 <꽃>

1. 보통명사는 개념에, 고유명사는 개체에 대응된다.

a chair는 세계의 그 어떤 의자에라도 대응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대응하는 것이 특정한 의자가 아니라 의자성(chairness)이기 때문이다. a chair에 대응하는 것은 물리적 의자가 아니라 ‘의자’라는 개념이다.

하지만 개똥이는 오로지 개똥이에 대응된다.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개똥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똥이/라는 발음은 생물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유일한 개체인 개똥이를 가리킨다.

2. 우린 보통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배우지만 이 명제가 보통명사와 고유명사에 적용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보통명사는 개념의 세계에 대응한 뒤 개별 대상으로 나아가지만, 고유명사는 구체적인 대상에 바로 대응된다.

3. 김춘수의 ‘꽃’은 이 차이를 시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법설명보다 응축적이다.

다만, 그의 시어들은 위의 문법 설명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본 문법설명에 따르자면 아래와 같은 싯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보통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고유명사가 되었다.”

4. 김춘수의 ‘꽃’이 그린 세계와 달리 어쩌면 지금 이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꽃’이라는 보통명사에서 ‘몸짓’을 읽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명명의 세계를 현상학의 세계로 바꿔내는 일 말이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천착하는 자의 비극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개념에 천착하는 이들의 비극은 자신이 개념의 지층으로 파고드는 동안 대중은 여전히 지상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진실에 근접할수록 소통은 어려워지고, 깨달음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오해를 감내해야만 한다. 적지 않은 논쟁은 비슷한 지식의 양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매트릭스에 만족하고 있는 이들과 매트릭스에 균열을 내려는 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담론의 지형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와 오롯이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질문-답변의 양면

Posted by on Feb 17,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이 담고 있는 진술에 대한 답일 수도 있지만 질문당하는 행위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즉 질문에 대한 답은 “모면하기”나 “회피하기”, “넘어가기”나 “은폐하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가 도출된다. (1) 무턱대고 답변을 상대의 지적 상태를 보여주는 데이터로 삼지 말야아 한다. (2) 질문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여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수준 만큼이나 상호 신뢰가 중요하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필력 2

때로 밋밋함과 무거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글인 줄 알면서도 세상에 툭 던져놓곤 한다. 용기라기 보다는 게으름이고, 게으름이라기 보다는 무심함이다. 나 따위가 쓰는 글이 뭐, 이런 심정이랄까.

솔직히 내 글이 재미는 없다. 그래도 10명 중 1-2 명은 내 글의 ‘객관적 무재미’를 너른 마음으로 품어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것 같기도 하다. 팍팍한 세상이지만 은혜와 기적은 도처에 있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아니 그냥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다. 페이스북 친구만 해도 이리 많은데 세상엔 얼마나 많은 무림고수가 있을지. 원래 무림고수는 은둔자여야 하건만 요즘은 그냥 여기저기서 막 튀어나온다. 아 무서워. 긴장도 막 되고 그렇다. 이기려고 쓰는 글은 아니지만 너무 못쓰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종종 드는 이유다.

사실 ‘필력’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글쟁이들은 쓸 때마다 괴로운 게 글이라고 털어놓지만 ‘필력’은 정의되지도 않은 힘力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줄세운다. “글 얼마나 잘 쓰세요?” “저요? 만렙이예요.” “오 대단하시네요. 저는 이제 겨우 천렙인데.” “만렙 되시려면 고생 좀 하셔야 될 거예요.” 뭐 이런 대화가 떠오른달까.

글쓰기에는 일종의 역설이 존재한다. 쉬운 글은 없고, 쉬운 글이 없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좋은 글이라고 무조건 많이 읽히지도 않는다. 1000만 관객 영화가 좋은 영화가 아니듯 말이다. 가끔 쭉쭉 써내려가는 대단한 필력의 소유자보다 조금씩 다부지게 작은 이야기들을 품어내는 사람들에 끌린다. 뻗어나가는 것보다 스러지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쁘지 않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PC의 문제

Political Correctness의 근본적인 문제는 Politics의 문제를 Correctness로 치환해 버리는 데 있다. 물론 현실에서 PC는 동원되는 맥락에 따라 다른 효과를 발휘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용어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권력이 어떤 양식으로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잡다단한 힘과 관계가 관여하는 고차원 방정식을 ‘이 용어를 써도 되는가 안되는가?’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화할 때 얄팍하고 우둔한 논쟁만이 남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사건은 생성적인 것

Posted by on Feb 15,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일련의 사건들은 말 그대로 생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구성될 수 없는 것이고 그 사건이 일단 발생하고 나면 돌아봄으로 완벽히 포섭할 수 없는 것이다.” “Series of events is truly genetic, which cannot be constructed before it has happened, and which cannot be exhausted backwards, after it has happened.” – Baldwin (1906)

“사건은 말 그대로 생성적인 것.” 지혜는 사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생성을 지켜보는 데 있는 것이다. 완벽하게 예측될 수도 없고 온전히 재구성될 수도 없는 순간들에 대한 경외감.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여기 있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문장의 개념적 중핵

인지문법을 배우며 처음으로 문장을 개념적으로 분석하는 법을 접했을 때 의아했던 것은 “동사”가 개념적 중핵(conceptual core)로 분류되고 전통적으로 명사구에 해당하는 것들이 이 개념적 틀의 참여자(participant)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The gentleman bought a notebook.”이라는 문장이 있다면 “buy(bought)”가 문장의 개념적 중핵으로, the gentleman과 a notebook이 이 개념의 참여자로 분류된다. (이전 문법의 틀에서는 주로 동사(verb)와 논항(argument)에 관한 논의를 떠올리시면 된다.)

“누가”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주체 중심의 사고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문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먼저 존재해야 하고 이 주체가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주체”가 탄생하는 방식은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체”는 언제나 특정한 행위틀 안에서만 이해된다. 이러한 활동/행위들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조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말해 주체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말하고, 듣고, 공부하고, 싸우고, 쓰고, 주장하고, 사고, 팔고, 빌리고 등의 활동들 속에 들어감으로서 비로소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주체”보다 “행위”를 개념적 중핵으로 놓고, 이에 관여하는 참여자들을 분석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인지언어학이야기

파업, 그리고 ‘인질’ 메타포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

모 신문은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서울대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에 대해 “파업 인질”을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는 서울대 도서관 경비 중 한 명의 발언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헤드라인으로 올린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바로 ‘학생=인질’이라는 메타포를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에 대해 “인질” 메타포를 쓰는 관행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이 인질이 되고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환자가 인질이 된다. 급기야 학교 난방을 담당하는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은 학생을 인질로 잡는 일이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인질”은 부정확하고 비열한 메타포다. 왜 그런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질”이라는 단어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학생이 인질’이라는 정보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인생은 무대”라는 메타포가 주연배우, 조연배우, 악역, 엑스트라 등등을 순식간에 소환하는 것처럼 “인질”의 구성에도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또한 인질범은 인질을 댓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질’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고틀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를 프레임(fram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인질’ 프레임에서 파업을 둘러싼 주체들이 맡은 역할을 살펴보자. ‘학생이 인질이냐’는 질문을 던졌으니 당연히 학생은 인질의 위치에 놓였다. 파업중인 노조는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인질범이 된다. 자연히 노조와 대치하고 있는 대학본부는 인질이 구출되길 바라는 편이 되겠다.

우선 이 프레임은 극도로 부정확하다.

인질범은 인질극 프레임에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 노조는 자신들이 응당 받아야 할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임금인상도 아니다. 무기계약직 전환시 빼앗긴 교통비, 급식비 등 다양한 복지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생명을 조건으로 거는 몸값과는 거리가 멀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다. 하지만 서울대 기계전기분회 노조는 사실상 약자이다. 파업은 몸뚱아리 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이는 매우 적법한 권리행사의 수단으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아가 ‘인질’ 프레임은 비열하다.

학생을 인질로, 노조를 인질범으로 상정함으로써 학생과 노조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는다. 아울러 대학본부를 ‘착한 편’으로 자리매김한다. 학생들이 노동자와 연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질이 인질범과 어떻게 연대를 한단 말인가? 이 프레임에서는 ‘노조와 연대하는 학생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인질이 된 학생들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인질극에서 인질은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극히 수동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파업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노조에 연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인질극에서의 인질과는 달리 학내 파업 상황에서 학생은 당당한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는 사라져야 한다. 걸핏하면 나오는 ‘인질’ 프레임에 마음이 동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인질’로 묘사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질 프레임이 뒤집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한다. 파업에 임하는 노조는 누구도 인질로 잡지 않았다.

활성화 영역

아래 세 문장을 보자.

a. “컴퓨터 좀 쳐봐.”
b. “컴퓨터에 꼽을 데가 없네.”
c. “컴퓨터 램을 갈아끼웠어.”

세 문장에는 공통으로 ‘컴퓨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의 표면을 말한다. 뭔가 잘 구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쳐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표면의 단자를 말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SB 등 외부기기와의 연결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

세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내부의 마더보드를 의미한다. 램을 갈아 끼우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열고 메인보드의 슬롯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 좀 쳐봐”라는 말에 컴퓨터 뚜껑을 열고 컴퓨터를 치는 사람은 없다. “램을 갈아 끼웠어”라는 말을 듣고서 USB 단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맥에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를 ‘active zone(활성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어가 하나 같지만 실제로 그중 일부만이 두드러진 의미로 동원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활성화 영역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c를 쓸 때 분명 우리는 다른 영역의 의미를 활성화시키지만 ‘컴퓨터’라는 동일한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단어가 여러 가지 하위 요소를 갖고 있을 수록, 사용되는 상황이 다양할수록 활성화 영역의 역동성 또한 증가한다.

* ‘active zone’이 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어를 갖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인지언어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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