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에 대하여

Posted by on Apr 18,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한다.

최근 잇단 정치인들의 망언을 보며 생각난 말이다.

부끄러움이 없으니
부끄러워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과
부끄러움이 없길 바라는 마음은 다르다.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빌었지만

이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는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 부끄러움을 감당하는 방법은 필연적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자라야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부끄러운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부끄러움과 메타-부끄러움은
이렇게 서로 엮어 있고
그런 부끄러움의 고리를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
그런 길은 없다.

오직
괴로움과
사랑만이 있을 뿐.

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5년 전 오늘을 기억하며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합니다.

1. 먼저 어떤 개체 하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sister. She is very smart.”

여기에서 ‘a sister’는 한 명의 여자형제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sister들 중 한 사람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will be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동물을 대표하는 표현이지요.

1과 2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야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좋은 이야기는 하나의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A(n)”의 의미는 이렇게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저는 관사의 이런 변증적 성격을 통해 한 사람과 인류 전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헤 보곤 합니다. “a person”은 “한 사람”임과 동시에 “모든 사람”일 수 있다고 말이죠.

5년 전 오늘 수많은 생명들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 곁을 떠난 한분한분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릅니다. 인류 전체였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이 아니며,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임과 동시에 대양의 일부”라고, 그리하여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고 노래한 존 던의 시처럼 말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한분한분 안에 담겨 있던
온 우주를 기억하겠습니다.

못난 저를 보니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부탁하고 또 기원합니다.

거친 세상 속
망각으로 빠져들어가는
서로를 굳건히 붙잡아 주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문화기술지, 균열, 그리고 연결

Ethnography(문화기술지)를 말 그대로 풀면 “ethno+graphy” 즉, 사람과 사회, 문화를 써내려가는 일(the writing of people, of society, of culture)이다.

나는 문화기술지를 “ethno”와 “graphy”의 유기적 결합 및 해체로 파악한다. 말(graphy; text)과 주체-들(ethno; people) 사이를 오가며 이 둘을 결합하고 때로는 분리시키는 일 말이다. 텍스트를 다루다 보면 자칫 사람을 이해했다고 오해하기 쉽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텍스트가 없어도 세상이 온전히 이해되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다. (오랜 기간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려있던 문구와는 조금 다른 결에서) 텍스트는 사람을, 사람은 텍스트를 만든다. 이 둘은 통합되어 있지만 또 균열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균열의 지점을 자세히 살필 때 사람도 말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뇌의 이상이 뇌의 기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처럼, 말과 삶의 균열이 말과 삶의 연결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나이듦의 의미

Posted by on Apr 5,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생물학적 나이는 하나다. 하지만 인간은 다양한 현상 앞에서 서로 다른 나이를 지닐 수 있다. 어떤 문제 앞에서는 수천 년 지혜를 구해 대응하고, 어떤 일에는 지금의 나이로 맞서며, 또 어떤 현상 앞에서는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한다. 그때그때 단일한 나이 속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세월이 흐를수록 수많은 나이를 획득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나이든다는 건 어쩌면 수많은 나이를 자신 안에 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co(s)mic

Posted by on Mar 30,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책을 읽다가 이 단어에 한참 머물렀다. 제법 영리한 말장난이라 느꼈다. 이 거대한 우주, 그만큼 거대한 우스꽝스러움. 때로는 온 우주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코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cosmic과 comics는 전철어구(anagram, 철자 순서만 바꾼 어구) 관계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낭독의 기쁨

낭독은 저자와 독자의 만남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상의 만남과는 다른 차원이 개입한다. 글을 소리내어 읽는 순간 말이 된다. 이때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말의 내용은 저자로부터 왔으되 말의 모양은 낭독자로부터 말미암는다. 말의 ‘혼’은 저자의 것이되 ‘몸’은 독자의 것이다. 연원을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 열망과 아픔이 나의 몸을 통하여 다시 세상으로 향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말은 다시 귀를 통해 내 정신과 만난다. 아마도 낭독의 기쁨은 이 과정에서 말미암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낭독의 순간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인간과 대면하게 된다. 저자의 정신과 낭독자의 몸을 가진 인간 말이다.

짧아지는 인류의 기억 그리고 ‘대리사회’

얼마 전에 소셜미디어의 프로필에 “독서는 OOO”이라고 써 놓은 분을 보았다. 저 OOO에는 유튜브 채널의 이름이 들어간다. 프로필의 주인은 해당 채널의 운영자가 아니다. 자신의 독서 정체성을 유튜브 채널로 표현한 것이다.

종종 해외 사이트의 ‘도서 요약 정리 서비스’를 접한다. 한국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있다. 주로 경영경제 분야의 책을 다이제스트로 제공하는 형식이다. 이게 돈벌이가 되는 것 같다.

책을 대신 읽어주는 사회다. 영화도 리뷰 유튜버가 넘쳐난다. 독서보다는 강연에 이끌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잘 정리된’ 자료를 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가끔 궁금하다. 강연이 끝나면 연단 앞으로 와서 ‘파워포인트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시는 분들 중에 해당 자료를 곱씹고 공부하는 분이 얼마나 될까? 그냥 강연자와 몇 마디 의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더 나은 선택 아니었을까?

김민섭 작가께서 생생하게 그린 ‘대리사회’와는 다른 측면에서 대리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아니 이미 널리 퍼져 있는 것도 같다. 점차 콘텐츠의 원본이 아니라 그 요약본, 많은 경우에는 조악한 ‘시뮬라크르’가 대중의 곁에 선다. 그것은 힘들이지 않고 소화될 수 있다. ‘공부’는 딱딱하다. ‘컨텐츠’는 부드럽다.

구글북스 N그램 프로젝트의 전반을 다룬 <Uncharted>(한국어 번역서는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에 따르면 인류가 특정한 발명품이나 현상에 대해 기억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한다.

특정한 발명품이나 개념이 등장하고 각종 책에서 인용되는 빈도가 정점이 될 때까지 시간이 짧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용 횟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시간 또한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빠르게 유행하고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은 포털의 ‘인기검색어 순위’일 것이다. 아침에 1위하던 것이 오후면 한참 밀려나고 다음 날에는 순위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는 현상 말이다. 대중의 주의를 자원으로 하는 경제(attention economy)는 속도의 경제이기도 하다. 마음에 들건 안들건 속도는 망각과 짝을 이룬다.

정보가 많아지면서 더 많은 정보를 소화해야 할 필요가 생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정보가 필요할까? 혹시 뒤쳐지지 않으려는 욕심, 낙오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허세’ 때문에 과식을 해대면서도 정작 필요한 자양분은 공급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던바의 수’에 따르면 사람이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깊은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150명 정도라고 한다. 페북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과 ‘친구’를 맺지만 진짜 친구가 되는 경우는 상당히 작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관계가 팽창해도 인간의 사회성을 담당하는 뇌는 순식간에 ‘업그레이드’ 될 수 없다.

지식과 정보는 어떨까? 대신 봐주고 대신 읽어주고 대신 감상해주고 대신 비평해주는 ‘대리사회’는 어떤 득과 어떤 독을 가져다 주고 있을까? ‘읽고 치우는’ 독서가 아니라 ‘치우고 읽는’ 독서가 필요한 때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리터러시의 외연과 기능을 확장하는 것만큼 정보와 지식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새로운 리터러시를 무조건 거부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모드의 리터러시, 광범위한 지식과 정보의 유통,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에서의 비판적 관점 등을 아우를 수 있는 틀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더 빨리 소비하고 더 빨리 망각하는 삶을 긍정하기엔 정성을 다새 생산하고 더 끈질기게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멀티리터러시

복합관계부사?

문법용어를 사용할까 말까를 일률적으로 정할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이 개념이 복잡해지는 경우에는 특히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한 가설이다.

고등학생 쯤 되면 ‘다들 알겠지’하는 게 영어의 8품사다. 그런데 품사에 대한 지식에도 적잖은 편차가 있다. 예를 들어 동사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알고 있다. 명사도 꽤 많은 학생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부사는 어떨까? 과연 모든 학생들이 부사를 동사나 명사와 같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대명사와 관계대명사에 대한 이해에도 차이가 있다. 대명사를 아는 학생들은 꽤 많지만 관계대명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은 그보다 적다. 대명사는 명사와의 관계에서 쉽게 설명되고 빈도도 높지만, 관계대명사는 ‘선행사’와 ‘생략’, ‘문장의 연결’ 등의 개념들과 엮여 복합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관계대명사와 관계부사는 어떨까? 경험상 전자에 대해 알고 있는 학생이 후자를 아는 학생들보다 훨씬 많다. 빈도 또한 전자가 훨씬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합관계사’라는 말은 어떤가?

복합관계사는 복합관계대명사와 복합관계부사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복합관계대명사를 알기 위해서는 관계대명사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복합관계부사를 알기 위해서는 관계부사를 알아야 한다. 관계부사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부사에 대한 기본 이해가 필수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일부 선생님들은 ‘복합관계사의 이해’를 수업목표로 두고, ‘복합관계사’라는 말을 사용해서 수업을 진행한다. 영어를 꽤 잘하는 학생, 사교육으로 다져진 학생들이야 이 개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상당수의 학생들은 ‘복합관계사’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급기야 “복합관계사는 복합관계대명사와 복합관계부사로 분류할 수 있다”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안드로메다로 혼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문법용어의 사용 여부는 오랜 기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보통 영어학습의 수준과 연령에 따라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가면 ‘용어 자체의 복잡성’을 고려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이 ‘복합관계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일부는 수업 안으로 들어오길 거부하기 때문이다.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수업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삶을위한영어공부 #단단한영어공부

네이티브 중심주의에 대한 작은 깨달음

책을 쓰면서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원어민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생물학적인 ‘한계’, 사회문화적인 ‘한계’, 교육환경의 ‘한계’라는 용어로 묘사하고 있었다. 우리가 처한 한계 때문에 네이티브가 될 수 없다는 식의 서술이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네이티브가 되지 ‘못한다’거나 ‘한계’라는 표현 자체가 원어민 중심주의의 산물임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한계’ 때문에 원어민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 원어민으로 영어 원어민들과는 다른 삶의 조건을 갖고 있는 것 뿐이었다. “미국인들은 생물학적,사회문화적, 교육환경적 한계로 한국어 원어민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 그 반대의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 자체가 영어를 우위에 놓고 있는 사고라는 게 확연해진 것이다.

한계를 논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 한계를 망각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영어 원어민이 되지 못하는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 원어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조건에 처한 것이다. 한국의 호랑이는 미국의 호랑이가 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저 한국의 호랑이일 뿐. #단단한영어공부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48: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2)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이란 단어의 생김새와 뜻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합니다. 필자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반드시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 ㅎ혹은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합니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87K”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의 자의성이란 언어의 형태(form)와 의미(meaning)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의자/라는 소리가 의자라는 개념에 대응하는 것은 사회적인 약속이기 때문이지, 둘이 필연적으로 묶여있기 때문이 아닌 것이죠.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합니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 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냅니다. 물리적 세계는 하나이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상징적 세계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가끔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습니다.

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합니다. 이 표현은 SF의 한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의 영문 제목에서 가져온 것으로, ‘껍질 안에 들어 있는 혼’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shell은 언어에 대응합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의자’, ‘chair’, ‘Stuhl’ 등에 해당하는 소리 혹은 철자들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입니다. 그런데 이 껍데기 안에 개념이 담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를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물리적 실체(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과도 같습니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혼(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삼라만상과 그 운행, 나아가 그것에 대한 지식을 코드화하여 작디작은 뇌 속에서 ‘돌려볼 수’ 있게 만든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analogy)는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편에 등장합니다. 모피어스(Morpheus)가 네오(Neo)에게 소개하는 컨스트럭트(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입니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loading)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옷, 장비, 무기, 훈련 프로그램 등이 언급되지만 아름다운 계곡을 불러올 수도 있고 맛있는 음식을 순식간에 생성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오래 전 추억도 소환할 수도 있죠. 그야말로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컨스트럭트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입니다. 물리적 세계와는 다르지만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구조체인 것이죠.

문법과 대화, ‘컨스트럭트’의 로딩규칙 그리고 개입, 변형, 확장

문법은 ‘컨스트럭트’의 로딩규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컨스트럭트에 개념을 불러들일 때 어떤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를 정하는 가이드라인인 셈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어떤 위계와 순서로 로딩되어야 하는지를 정합니다. 영어라면 ‘주어+동사+목적어’ 순서를 근간으로 다양한 요소들을 로딩할 수 있습니다. 품사는 특정 요소가 어떤 위치에서 로딩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각각 형용사와 명사인 ‘good’과 ‘people’이 함께 올 때에는 ‘good people’의 순서로 로딩되어야 하고, 관사와 명사인 ‘the’와 ‘people’이 함께 올 때는 ‘the people’ 순으로 로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화를 통한 소통은 ‘여러 컨스트럭트의 교섭과 변형 그리고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컨스트럭트에 특정한 개념체계를 로딩하여 음성언어를 매개로 상대의 컨스트럭트에 보냅니다. 이를 받은 상대는 자신의 컨스트럭트 내에 대응하는 언어를 호출하여 반응합니다. ‘로딩’과 ‘전달’, 그리고 또 다른 ‘로딩’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주고받음이 반복되는 교섭 과정에서 두 사람의 컨스트럭트가 변형되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변화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컨스트럭트는 대화를 주고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컨스트럭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고 있습니까? 어떤 정령(ghost)들을 초대합니까? 어떤 컨스트럭트와 상호작용합니까? 어떤 컨스트럭트와 충돌합니까?

이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실재입니까? 그것은 당신 자신이 결정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가 주인공 네오(Neo)의 운명을 결정하지만, 사실 어떤 약을 고르느냐는 일생일대의 결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정입니다.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언어를 고를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지,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어떤 생각을 버려야 할지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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