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되는 글

갈수록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예를 들어 500 단어의 글을 쓰는 일은 단어 하나 하나를 써서 500 단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500개의 단어 연쇄(500-gram) 중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기 위해 1부터 500까지의 빈칸에 단어들을 하나 하나 대입해보는 작업이다. 늘어선 500개의 단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린 오래 전부터 여기 함께 있었어요’라고 외치는 순간 글은 완성, 아니 발견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이 자신의 글을 고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도 이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내가 발견한 글은 이게 아닌데, 왜 이걸 발견했다고 하는 거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내가발견하려던글은아니지만

인풋 패러다임과 모국어 지식

한국 영어교육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단연 ‘인풋(input)’이다. 영어는 영어로 배워야 하고, 영어에 많이 노출(exposure)될 수록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요지다.

외국어 학습에서 언어입력(input)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타를 직접 경험하지 않고 기타를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외국어 이해에 있어 한국어 배경지식이 갖는 중요성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 것 같다. 외국어를 읽고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어에 대한 지식과 세계에 대한 지식 모두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한국어 자막의 효용일 것이다. 특정 외국어에 익숙한 학습자들의 경우에 잘 들리지 않던 뉴스 혹은 드라마도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면 들리는 경우가 많다. (진짜 들리는지 확인하려면 랜덤 샘플링을 통해 받아쓰기를 해보면 될 터이다.) 이는 외국어의 단어나 소리 자체가 청자에게 전달된다기 보다는 (한국어로 된) 배경지식과 상호작용하며 뇌에서 처리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종종 털어놓는 걸 보면 필자만의 경험은 아닌 듯하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상호작용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짐을 시사한다. 신경언어학의 연구는 사춘기 이후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경우 모국어(L1)와 외국어(L2)가 사뭇 다른 ‘회로’와 활성화 패턴을 통해 처리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자막이 외국어 이해에 실시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다수의 경험은 L1과 L2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자막을 켜고 영상을 볼 때 ‘들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실질적 이해이고 어디까지가 ‘이해했다는 착각’혹은 사후적 합리화인지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능숙한 학습자가 영미권 드라마를 볼 때엔 다음과 같은 점을 가정할 수 있다.

1. 영어 구어체에서 사용되는 어휘적, 문법적 패턴에 익숙한 편이다. (해당 언어의 일상어(colloquial language) 전반에 대한 지식)

2. 드라마의 전개상 해당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대략적인 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스토리라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추측(inference) 메커니즘 작동중)

3. 드라마의 소재가 특이하지 않다면 해당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대략적인 어휘셋(lexical sets)에 대해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된 어휘지식)

4. 드라마의 시즌이 6-7 정도 된다면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주요 인물들을 대화 패턴을 암묵적으로 익혔다고 볼 수 있다. (개별 인물에 대한 암묵적 지식)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자막을 켜고 볼 때 나의 뇌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언어 능숙도에 따라 어떤 변화 패턴을 보이는가?

이런 주제로 깊이있는 연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용적인 면에서도 “자막은 금기입니다”나 “무조건 자막 끄고 10번 이상 보세요”보다 나은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순화 시도에 대한 단상

소위 ‘언어순화’ 시도가 별 의미가 없지 않나 하는 주장에 대해 달았던 답글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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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보면 말씀하신 의견이 일리가 있습니다. “창녀” 혹은 “성노동자”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말이죠.

하지만 세 가지 점에서 이와 같은 의견이 어느 정도 조정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각각의 단어들이 어떤 담론장에서 사용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위에서 다른 분이 말씀하셨듯이 ‘근로자’와 ‘노동자’는 같은 대상을 가리킬지는 모르나, 둘 중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는 단순히 단어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담론장의 권력을 언어에 주류로 편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근로자’대신 ‘노동자’를 쓸 경우 이는 단어 대 단어의 관계가 아니라 담론장과 담론장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신경언어학적 고려입니다. 과연 사람들은 ‘창녀’와 ‘성노동자’를 들었을 대 똑같은 생리적 반응을 보일까요? 욕설이나 금기어의 존재를 보면 분명 특정한 단어들은 다른 단어들에 비해 격한 정서적/생리적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이런 면에서 특정한 단어가 다수의 언중에게서 보다 격한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이것이 사회변화의 걸림돌이 된다면 다른 단어의 활용을 검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기표의 교체가 갖는 중재(mediation)의 효과입니다. 최근에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하여 ‘편견 최소화 채용’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이 둘이 가리키는 것은 동일합니다만, 채용과정의 어떤 면을 프레이밍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나아가 이런 프레이밍은 정책결정자들이나 실무담당자들이 채용과정을 재설계할 때 일종의 중재적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보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줄이는 게 중심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즉, 언어의 변화는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른 심리적 요인들을 추동하는 매개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거에서 말씀하신 바를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무의미한 노력이 될 때도 있지만,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단초가 될 수도 있죠.

그렇기에 ‘언어순화’ 자체로 효용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고, 그에 수반되는 사회문화적, 제도적, 정치적 변화를 면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신 원리를 적용하려 하기 보다는 담론장과 권력의 문제를 심도있게 고려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 답글 —

말씀하신 대로 언어의 의미장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수반해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창녀’ vs ‘성노동자’의 경우 어떤 호칭이 긍정적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데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이안님께서는 계속해서 ‘창녀’를 쓰면서 다른 활동을 전개하는 것 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고, 저는 ‘성노동자’라는 말을 쓰면서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논쟁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런 명칭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많은 상황에서 사회변화의 가장 큰 동력은 그 명칭으로 호명되는 이들이었습니다.

참고
http://pjos.org/index.php/pjos/article/download/15179/13734

 

[의사소통행위의 언어학 a linguistics of communicative activity (LCA)] 어떤 글은 곱씹을수록 진가가 나온다. 별것 아닌 선언인 것 같지만 언어를 자기충족적이고 완결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활동으로 보게 된 것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고전적인 경제이론이 나름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인지와 정서라는 요인을 간과해 왔듯이 구조주의 언어학은 형식적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오용하고 배반하고 변화시키는 언어사용자의 사고와 감정 나아가 언어가 정체성과 권력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간파하지 못했다.

새벽에 간만에 온라인에서 이런 저런 논의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찾아본 챕터. 논문이 실린 책의 제목은 <Disinventing and Reconstituting Languages>이다.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37201231_Thorne_S_L_Lantolf_J_2007_A_Linguistics_of_Communicative_Activity_In_S_Makoni_A_Pennycook_eds_Disinventing_and_Reconstituting_Languages_pp_170-195_Clevedon_Multilingual_Matters

블라인드 채용 vs. 편견 최소화 채용

Posted by on Nov 25, 2017 in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블라인드 채용’ 말고 ‘편견 최소화 채용’으로 쓰면 어떨까? 말은 말뿐이라고 하지만 일단 말부터 바꾸고, ‘편견 최소화 채용’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 제안에 누군가는 ‘묻지마 채용’ 아니냐고 답하겠지만, 채용과정상의 편견을 최소화하고 보다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자는 대의에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미약하게나마 ‘블라인드’에 남아있는 차별의 흔적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운칠기삼(運七技三)’ 단상

Posted by on Nov 24,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운과 기를 나누는 것이 마치 본성과 양육을 나누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네가 지금 쓰는 글은 너의 유전자 45, 사회문화적 요인 55로 설명 가능해’라고 하면 그저 우습지 않겠는가? 하지만 운과 기의 비율을 굳이 나누어 보라 한다면 ‘운9999에 기1 정도 아닐까’,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룬 이들의 노고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운의 작용이 아무리 크다 해도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인 1을 이루기 위해 쏟는 피땀은 소중하고 본질적이며 당사자에겐 그 무엇보다 거대하고 뜨겁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약하고 미약할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일만 분의 일에 불과하다 하여 가벼이 여기지 않고 싶다.

나아가 나에게 허락된 9999의 좋은 운들을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되길, 누군가에게 허락된 9999의 운이 나에게도 허락될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9999에 대한 불만과 좌절, 걱정과 비난으로 삶을 소진하지 않고,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만 충실히 갈고 닦아도 살만한 사회가 되기를 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구글 번역 관련 수업 단상

1. AI의 시대 ‘영어교육이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리터러시 교육에 있어 모국어, 외국어, 정보기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유효하다.

2.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AI’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어교육만 위기는 아니다. 가르칠 영역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채널과 효율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3. 따라서 ‘영어교육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의사소통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온라인 커뮤니케이션과 소셜 네트워크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었듯이 통번역 기술의 발달은 문화간 소통의 지형을 빠르게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

4. 통번역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데이터 과학의 성과를 모두에게 손쉽게 제공하는 인터페이스의 고도화가 더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스와힐리어 문헌을 해독하고 아프리카 문화권의 정보를 손쉽게 가공할 수 있다면?

5. 그런 의미에서 중장기적인 통번역 기술의 발달을 영어교육 전공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문화간 소통의 획기적 증가라는 전지구적 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 – 몇 가지 단상

Posted by on Nov 13,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링크,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1. 사하라 이남 지역의 청각장애인들은 평생 수어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간단한 제스처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래 영상의 패트릭도 1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수어 수업을 듣게 된다.

2. 한편 이 영상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갖고 있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워프가설에서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기본적으로 언어와 사고를 독립적인 변수로 취급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가?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는가?”라고 묻는 방식이다.

3. 하지만 패트릭의 예에서 보듯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단지 사고를 밖으로 표출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사고의 변화과정과 유기적이고 동적으로 맞물린다. 즉 언어가 발달하면서 삶이 변화한다. 패트릭과 그의 급우들은 이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4. 언어를 기술(technology)로 생각하면 필자가 언어와 사고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갖고 있는 의구심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해보자.

“소셜 네트워크는 사고를 형성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가 먼저 있고 소셜네트워크가 그에 따라 구현되는가?”

이 질문의 조악함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유독 언어와 사고의 논쟁에 대해서만은 ‘사고가 먼저다’, ‘언어가 영향을 미친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5. ‘사고’를 말 그대로 사고 전반으로 정의해 보자. 패트릭이 수어를 다 배우고 나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 그의 생각의 세계는 이전과 같을 수 있을까?

6.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는 20세기 초반의 비고츠키의 견해가 21세기의 그 어떤 인지과학자보다도 옳다고 생각한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인간의 발달 초기, 언어와 사고는 서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고 이를 소통과 사고에 있어 제1의 중재방식(mediation means)으로 계속 사용하면 언어와 사고는 사실상 구분이 어려워진다. 성인으로 갈수록, 리터러시가 발달할 수록 언어를 사고에서 떼어내기란 쉽지 않다. 변증적 관계(dialectic relationship)를 이루는 것이다.

7.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로 언어권에 따른 색상 구분 능력 실험이 있다. A언어에 색상을 구별하는 어휘가 풍부하고 B언어에는 한정된 어휘만 있다면 A언어 화자가 색상을 더 잘 구분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제기다. 이에 대해서는 ‘색상 지각 및 구별은 무슨 언어를 사용하든 비슷하게 하지만, 세밀한 차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정도가 현재까지의 인지과학이 내린 결론이다. (이 ‘세밀한 차이’를 차이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쩝.)

8. 이같은 연구는 언어와 비교적 독립적인 시지각 능력을 다룬다. 그런데 이것을 ‘사고’의 대표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그런 의미에서 관련 분야에서 논쟁이 되는 연구들은 ‘언어와 사고’를 다룬다기 보다는 ‘언어와 (언어와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지각’을 다루거나 ‘사고기능 중 극히 일부분’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 옳다.

9. 결론: 언어와 사고는 각각을 독립변수로 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사고의 패턴과 사고능력을 각각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언어와 사고가 배태되고 성장하고 교섭하고 통합되고 변증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개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개인의 뇌에서 사고를 위한 신경세포들과 언어를 위한 신경세포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언어일반과 사고 일반을 독립적인 시스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적 논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련된 연구 패러다임을 ‘언어와 사고의 관계’라고 애매하게 부르기 보다는 좀더 엄밀한 정의를 동원한 논의가 필요하다.

 

 

어휘의 주관성 – ‘맵다’의 경우

Posted by on Nov 11,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연애 시절,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양파와 고추 몇 개가 찬으로 나왔다. 매운 걸 잘 못먹는 나는 짝에게 물었다.

“이거 매울까요? 겉으로 봐선 잘 모르겠네요. 드셔 보시고 괜찮은지 말씀해 주세요.”
“네네. (잠시 후) 아주 살짝 맵네요. 아주 맵진 않고요.”
“아 그 정도면 저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삭 소리와 함께 매운 맛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입안에 불이 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쌀밥과 물로는 해결이 안되어서 결국 식당을 나와 우유까지 사 마셨다.

언어가 주관적 경험의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함을 보여주었던 에피소드. “자유”나 “사랑”과 같은 추상적 어휘 뿐 아니라 “맵다”나 “짜다” 등의 감각 어휘도 개인차가 지대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 (나중에 보니 짝은 청양고추를 치토스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르르…) 그러고 보면 색상을 표현하는 어휘보다 맛을 묘사하는 어휘에 있어서 개인간 차이가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암튼, 매운 것 잘 드시는 분들. 청양고추 추가해서 드시는 분들. 여러분들은 세계의 표준이 아닙니다. (먼산)

덧: 참고로 생애 최강의 청양고추맛을 능가했던 건 라일락 이파리를 씹었을 때의 충격과 공포다. 궁금해도 참으시기를.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라일락 이파리를 대차게 씹었다가 실제로 죽는 거 아닌가 싶었던 1인.)

신비와 분석

Posted by on Nov 9,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의식意識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그런데 ‘의식은 신비한 것’이라 뭉뚱그려 말해버리면 신비함이 모두 사라진다. 어디 의식 뿐이겠는가. 긴 관찰과 엄밀한 분석이야말로 신비의 친구이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기어코 말하겠다는 욕망이야말로 신비의 적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사회문화적 계급적 표지로서의 영어

영어가 일종의 사회문화적, 계급적 표지로 작용한다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도 있다. 그냥 각자 열심히 해서 얻은 실력인데 그게 뭐 그렇게 ‘거창한’ 역할을 하느냐는 거다.

그런데 말입니다. (김상중 빙의)

우리는 누군가의 역사지식이나 100미터 달리기 기록으로 그의 배경을 순식간에 판단하지 않는다. 심지어 국어 실력도 그다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별 관심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영어발음을 듣는 순간 그에 대해 꽤나 많은 것을 ‘알아버린다’.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보자. “걔 국어 정말 잘해”와 “걔 영어 정말 잘해” 중 어느 표현을 더 자주 접할 것 같은가?

영어에 대한 태도가 외부로만 향하지 않는다. 우리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어실력으로 자신의 많은 부분을 판단해 버린다.

그런 면에서 영어의 힘은 사회적이며 심리적이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이해가 안되신다는 분이 있다면 나랑은 세계관이 다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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