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메타포, 그리고 언어의 윤리

(아래 글은 <복음과 상황> 2020년 4월호 커버스토리 기고문 초안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WHO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 극심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재난의 여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감지된다. 취약계층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깊고, 경제적 여파로 인한 불안도 커져만 간다. 바이러스의 감염보다 빠른 것은 공포의 확산이다.

시민들의 상황은 한 마디로 ‘재난의 일상화’라고 할 만하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평소에 보지 않던 뉴스를 찾고, 듣지 않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별것 아닌 경고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어떻게든 공포를 완화시키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렇기에 위기상황의 말들은 더욱 강한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효과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 말들의 풍경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영감과 응원의 원천이 되며,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재난 상황에서 말글의 무게를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전쟁중인가

“감염병과의 전쟁” / “바이러스와의 전면전” / “최전선의 의료진” / “지역 봉쇄” / “전시상황” / “시한폭탄”

최근 언론에서 접한 비유표현이다.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전쟁으로 그린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진 않았지만 ‘전면전’, ‘최전선’, ‘봉쇄’, ‘전시’, ‘시한폭탄’ 등은 현재의 상황이 전쟁과 닮았음을 함의한다. 이는 스포츠에서의 전쟁 은유와 유사하다. “격파”, “대첩”, “용병술”, “명장”, “전략전술” 등의 단어는 스포츠 관련 보도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이는 스포츠 경기를 일종의 전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지금의 사태를 전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한국사회에서 전쟁 메타포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일례로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내부총질”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은 특정 정당이나 정파 내부의 분열과 갈등 상황에서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세력을 이르기 위해 사용된다. 누군가는 ‘총질을 총질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느냐’고 묻겠지만 상대의 행위를 ‘총질’에 빗대는 게 어떤 의미와 효과를 지니는지 생각해 보면 섬뜩한 의미가 드러난다. 우선 “내부총질”이 있다면, 여러 세력들이 서로 총을 쏴대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총격전에서는 으레 중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한다. 아울러 “내부총질”이 문제라면 “외부총질”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내부로부터의 격렬한 비판은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고, 조직의 구성원들을 적군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총질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벌어져야만 한다.

한 외국인과 우리사회의 전쟁 비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전쟁용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면서, 수업에 책을 안 가져온 학생에게 “전쟁터에 총을 놓고 나간다”고 하거나, 금전적 여유를 “총알”에 비유하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태도가 좋지 않거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군기가) 빠져있다”는 말을 쓰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전쟁과 관련된 메타포가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언어와 역사를 기반으로 나름의 메타포를 만들어 낸다. 수업을 전쟁터에, 교과서를 총에 비하는 일은 영미권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대만의 연구자에게 비슷한 표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아는 한 없다고 답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책을 안 가져오느니) 차라리 머리를 놓고 오지.”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수많은 침략을 경험하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수십 년 군사문화가 배어든 한국사회에 다양한 군대 관련 표현이 존재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없이 무의식적으로 군대 메타포를 사용하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면 학생들은 계속 ‘총’을 가지고 ‘전투’에 참가하는 ‘군인’일 수밖에 없다.

은유는 말의 장식이 아닌 사고의 패턴이다

서양에서 비유어(figurative language), 그 중에서도 은유(metaphor)에 관한 논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시학>에서 명사의 종류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누고 그 중의 하나로 은유를 들었다. 어원상 ‘넘어서(beyond/over)’라는 뜻의 ‘meta-‘와 ‘가져오다, 갖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pherein’이 결합한 라틴어 metaphora는 ‘옮겨간다, 전이된다, 넘어간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메타포는 한 대상의 이름이 다른 대상의 이름으로 넘어가는 것, 즉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시학, 124쪽)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오랜 세월 서구사회가 메타포를 이해하는 데 기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1980년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그들의 저작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견해에 반론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메타포는 단지 하나의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수사적 기법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며 사고패턴(thinking patterns)이라는 것이다. 약간의 학술용어를 동원하자면 메타포는 수사적 장치(rhetorical device)가 아니라, 인지 메커니즘(cognitive mechanism)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 표현들을 보자.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다.”
“세월이 날아간다.”
“Summer is just around the corner. (이제 곧 여름이다.)”

세 문장의 주어로 나온 ‘크리스마스’, ‘세월’, ‘Summer’는 모두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들이다. 하지만 시간은 물리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개념이다. 시간은 분명 존재하지만 만질 수 있는 코나 날아가는 새, 저만치 보이는 길모퉁이와는 다른 영역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코앞’, ‘날아간다’, ‘길모퉁이 돌아서 바로’라는 표현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의 세 표현 모두 시간 개념을 공간과 관련된 개념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추상적인 영역을 구체화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메타포의 역할이며, 이것은 단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공간(코, the corner)이나 운동(날아간다)과 같은 구체적이며 물리적인 개념으로 비유하는 사고패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추상과 구체를 엮어 사고를 풍부하게 만들고 확장시키는 능력은 인간의 인지적 역량 중 가장 주목할만한 능력으로 손색이 없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인생을 말하면서 “나는 그냥 엑스트라일 뿐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신과 단역배우를 연결시켜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한 사람이 엑스트라라면 누군가는 주연이고 또 누군가는 조연일 것이다. 누군가는 악역을, 다른 누군가는 선한 역할을 맡는다. 감독이나 각본이 궁금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집중조명(highlight)을 받고, 누군가는 컴컴한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즉 누군가가 ‘엑스트라’가 되는 순간, 세계는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이 되는 것이며, 개개인은 그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엑스트라’라는 말은 ‘세계는 영화(혹은 연극)’이라는 사고의 틀을 가정할 때 성립할 수 있는 메타포다.

‘메타포가 세계를 상정한다’는 관점을 사회문제에 연결시켜 보자.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을 때 종종 사용되는 은유 중에 ‘인질 메타포’가 있다. 예를 들어 “시민을 인질로 삼는다”는 헤드라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출퇴근 시민이 인질이 되고 공항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공항 이용객들이 인질이 된다. 대학 시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경우라면 학생이 인질이 된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파업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실행됨에도 불구하고 ‘인질’을 메타포로 쓸 때 범죄와 관련된 사고의 틀(frame)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인질”이라는 은유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질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질극을 구성하는 일련의 요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인질범은 인질을 대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인질’이라는 은유를 도입할 때 노동자들은 ‘인질범’이 되고, 파업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는 사람은 ‘인질’이 되며,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인질범이 요구하는 ‘몸값’이 된다는 것이다. 영특하게도 ‘인질’ 메타포를 쓰는 언론은 인질극의 빠른 종결을 기원하는 ‘선량한 세력’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몸값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노조는 노동법이 허용하는 수단을 동원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지만 대개의 노동조합은 사실상 약자에 가깝다. 오히려 사측이 강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파업은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적법한 노동권의 행사로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질 메타포’ 뒤에는 일체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그들의 행위를 극도로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는 생각의 틀이 들어 있다. 인질 프레임이 비틀고 있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뚫렸다”는 메타포의 아슬아슬함

지난 메르스 유행 사태와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메타포 중에 ‘OO가/OO도 뚫렸다’가 있다. 메타포에 관심을 가진 시민으로서 “뚫렸다”는 은유는 참으로 아슬아슬하다. 어딘가가 “뚫렸다”면, 거길 지키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있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사람은 거길 ‘뚫었으며’,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질 위험이 있다. 바이러스에 ‘뚫린’ 지역사회는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뚫고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하며 단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바이러스의 숙주로 기능한 이들은 방역망을, 지역을, 안전이라는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가? 우리는 ‘뚫은’ 주체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으로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감염자는 가해자요, 지역 주민은 피해자라는 구도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뚫다/뚫리다’로 표현되는 공격과 방어 혹은 침투와 보안의 메타포가 우리의 생각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재난 상황에서의 말글의 윤리

감염이 되는 순간 사람(person)은 보균자이자 매개체(carrier)가 된다. 적어도 공공영역에 있어서 해당 감염자의 정보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호스트(숙주)의 실제적/잠재적 위험에 대한 통계’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감염병 유행 사태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비극이다. 사람들에게 번호가 매겨지고, 접촉자(contact)의 수가 공개되고, 동선이 소상히 까발려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방역당국은 인격체(character)가 아니라 감염과 관련된 요인(factor)으로서 개인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량이 두 영역에 걸쳐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는 감염병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한 역학적 역량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도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는 차원이다. 전자가 ‘기술’로서의 역량이라면, 후자는 ‘돌봄’으로서의 역량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다.

지금 우리는 한 순간 확진자가 되어 ‘추적당하고 격리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한 공포는 바이러스보다 넓게 퍼져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가 나를 감염원이자 정보쪼가리로 처리하며 낙인찍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 당연히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병에 걸리는 것이 인격을 송두리째 침해당하는 경험이 되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격리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사례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자들을, 접촉자들을, 특정 지역을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가족으로, 동료 시민으로, 우리들의 또 다른 고향으로,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으로 대해야 한다. 감염이 인격과 관계, 지역사회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마음과 관계와 인격을 무력화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과학기술의 지혜를 모아 시스템을 보완함과 동시에 사려깊은 언행으로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감염예방 수칙을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보건 및 역학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막연한 공포를 확산시키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의 말글을 돌아보아야 한다. 장애인 시설을 ‘시한폭탄’이라 부르고, 특정 집단의 사람을 ‘색출’해서 ‘박멸’해야 한다고 외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동료 시민들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대상화함과 동시에 혐오와 공포의 세계를 팽창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어서 이 재난이 진정되고, 맑고 밝은 표정으로 거리에 활기가 돌기를 바란다.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아줄 수 있고 동료가 잠재적 위협이 되지 않는 일상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를 통해 서로에게 굳건한 신뢰와 따스한 응원이 될 수 있는 삶을 위한 말글을 배울 수 있기를 빈다.

태도가 뭐 그리 중요한가

“태도가 중요한가? 내용이 중요하지!”가 가정하는 것들

1. 태도는 내용이 아니다.
2. 태도가 어떻더라도 내용은 읽힌다.
3. 회사 미팅에서 브리핑을 할 때 누워서 껌씹으며 잠옷차림으로 하더라도 정확한 정보만 전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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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차가 확연한 대화 상황에서 강자가 약자의 태도를 문제삼는다면 그것으로 매우 정치적이며 억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대등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태도가 뭐가 중요한가’라고 말한다면 적절치 않다. (1) 상대가 태도와 내용을 완전히 분리해서 처리한다는 보장이 없고, (2) 부적절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내용을 읽기 전에 상대를 읽으며, 그렇게 읽은 상대의 태도와 매너가 내용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3번을 실천하면서 그런 주장을 한다면 진심은 어느 정도 받아들여줄 수 있겠다.

‘사석’과 공적 담화

일부 사람들이 굉장히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석에서 한 말은 기록되어도 ‘사석’에 머문다는 것이다. 세상 제일 편한 사람들과 한 이야기라도 활자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순간 공적담화의 영역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법적, 윤리적, 문화적 구분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물.리.적.사.실.이다. 이걸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잘 하는 말로는 “그냥 말일 뿐인데 뭐” (당신에겐 말일 뿐인데 듣는 사람한테는 무기라고), “농담으로 한 건데 뭘 그렇게까지” (당신 마음 속에서는 농담인데 나에게는 모욕이라고) 등이 있다. 할 말을 다 퍼붓고 “그냥 내 마음 속 생각이었어”하면 아무 일이 없어진다고 믿는 것만큼 한심한 것은 없는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의학 메타포 단상 (기사발췌+약간의 해설)

Posted by on Mar 10, 2020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1. 환자는 질병과 싸우는가? 그는 파이터(fighter)인가? 그렇다면 질병이 심각해지거나 그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충분히 열심히 싸우지 않아서 병에 굴복한 것인가? 질병은 적이고 나는 파이터이며 호전이나 악화는 승리 혹은 패배인가?

환자를 파이터로 개념화하는 것은 어떤 장점과 한계를 갖는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환자를 ‘싸우는 존재’로 생각해야 하는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전투에 임하듯 병과 부딪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2. 우리는 종종 물리적 현상과 메타포를 혼동한다. 잘 알려진 Lawrence Williams와 John Baugh의 연구는 사람들이 따뜻한 음료를 들고 면접에 임할 때 피면접자의 성격을 ‘warm’하다고 판단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보고한다. 차가운 음료를 들고 있었던 참가자들은 반대의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우연인가?

3. 또 다른 연구(Chen-Bo Zhong & Katie Liljenquist, 2006)는 소위 ‘멕베스 효과(Macbeth effect)’를 보고한다. 자신의 죄과에 대해 생각해 보길 권유당한 참여자들은 연구 참여 선물로 세정제를 택할 확률이 높았다. 윤리적인 측면의 ‘더러움’을 신체적으로 청결하지 못한 것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단어 ‘dirty’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윤리적 영역과 신체적 영역 모두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의학에서의 군사 메타포는 파스퇴르가 1860년대에 세균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기 이전부터 사용되어왔다. 시인 존 던은 질병을 “siege…a rebellious heat, [that] will blow up the heart, like a Myne”이나 “Canon [that] batters all, overthrowes all, demolishes all…destroyes us in an instant.”와 같이 표현한다. 병을 포위공격과 포탄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5. 17세기에 가장 저명한 의사였던 Thomas Sydenham은 의학에 군사 메타포를 들여온 사람으로 기억될 만하다. 그는 질병의 절멸(annihilation)을 의학의 목표로 삼았다. 자연스레 “내부의 적을 하제와 해열제로 공격(attack)한다”는 표현을 썼다. 질병의 치료가 싸움이라면 당연히 전략전술이 필요할 것이다.

6. 우리는 의학 메타포를 내면화해 왔다. 이제는 그런 표현들이 메타포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의학용어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그것의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영향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전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https://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4/08/the-trouble-with-medicines-metaphors/374982/

Intelligence 그리고 사이(inter-)

Posted by on Mar 9, 2020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개념적인 측면에서 “intelligence(지능)”을 “In”+”telligence”로 오분석하는 경우가 있다. 지능을 개인의 내부(in)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intelligence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사이, 상호적’이라는 의미의 inter- 와 ‘선택하다, 읽어내다’라는 의미의 legere 을 만나게 된다. 이에 따르면 지능은 단일 주체가 지닌 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 사이를 읽어내는 능력에 가깝다.

물론 어원을 가지고 당위적 주장을 펼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intelligence가 파편화된 개인의 자질로, 순전히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세태 속에서 그 어원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일이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지능은 언제나 관계적이며 사회적이라는 것, 다양한 존재 사이에(in-between)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맥락적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일상스케치

1. 아무리 봐도 인스타에서 내 글이 제일 재미없다. (페이스북 글을 거의 재탕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재미없을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듯.) 그런데도 소수의 친구분들은 꼬박꼬박 하트를 날려 주시고 급기야는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태그를 팔로우하는 분들까지 생겼다. 낯선 곳에서의 환대란 이런 느낌일까.

2. 일용직 노동자, 자영업자, 프리랜서, 강사 등의 생계가 실질적 위험에 처한 가운데 여러 작가님들의 공동 메일링서비스를 접했다. 한분 한분 좋은 글을 쓰시는 분들이니 많은 독자들이 호응해 주겠지 싶었다. 나는 뭘 메일링할 수 있을까 싶은데… 없다. 진짜 없다. 이메일 답장이나 잘하자. 그것도 나름 메일링.

3. 한 페친께서 집안에 칠판을 들여놓고 강의를 촬영하시는 걸 보고 급 부러워졌다. 나름 손글씨에 애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칠판에 필기하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만 집안에 중대형 칠판을 들여놓는 게 마냥 달갑진 않다. 이 사태가 잦아들면 어딘가에서 필기를 하며 멋진 동영상 강의를 찍어 보리라. (보시는 분들을 위해 마스크는 대형으로 껴야겠다. 그땐 살 수 있겠지?)

4. 아무리 안나가도 식료품을 사러 종종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엘리베이터에 마스크 착용을 촉구하는 안내가 붙었다. 공포는 말을 타고 사람들에게 침투한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을 경우 엘리베이터 내에서 감염의 위험이 있으니’라는 말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톤으로 공포/정보를 전달한다. 얼마 전까지 별 생각 없이 동네 한바퀴를 돌고 왔는데 이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도 마스크를 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다음은 이쑤시개로 층수 누르기일까?

5. 모 기업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 서로 다른 마스크를 지급했다는 기사를 읽는다. (누가 성능이 더 좋은 마스크를 받았는지는 설명드리지 않아도 될 듯하다.) 회사측에서 해명한답시고 한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차등 지급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차별의 잔혹함이가 몸을 규제하는 것을 넘어 얼굴의 지형까지 바꾸고 있다. 계급을 얼굴에 새기려는 것만큼 잔혹하고 뻔뻔한 것이 있을까?

6.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우 기저질환을 가졌는지 여부가 증상과 회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 사회에서는 계급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상과 자유와 존엄을 규정한다.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거의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는 정치경제적 바이러스’인지도 모르겠다. 치료제라고 내어놓는 것들은 열정, 태도, 노오력, 자기계발 따위인데 그것으로 ‘치료’ 될 리가 없다. 치료로 인정한다 해도 일종의 ‘연명치료’인데, 거기에 들어가는 방대한 비용은 각자가 부담해야만 한다.

7. 지레 절망할 필요도 없지만 그다지 신나는 일도 없다. 그래서 미신적이지만 7번을 굳이 넣어 보았다. 감사한 것은 이렇게나마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들이 있어 버티고 또 계속 걸을 수 있다는 것. 해가 지는구나. 저녁으로는 깻잎을 넣은 비빔국수를 해먹어야겠다.

“become a thing”, 언어적 창의성, 그리고 시인-되기

심심찮게 들리는 표현 중에 “become a thing”이 있다. 직역하면 ‘물건/사물이 되다’는 말인데, 특정한 대상이 인기를 끌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경우, 때로 걱정거리가 되는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인지언어학의 언어로 풀어본다면 위의 숙어에서 “a thing”은 물리적 개체라기 보다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개념적 공간을 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When did celebrating birthdays become a thing?(언제 생일을 축하하는 게 널리 퍼졌나?)” 이 문장에서 가정되는 것은 ‘생일을 축하하는 일’이 관례가 아니었다가 관례화 되고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모르지만 아마도 캘린더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재미난 것은 ‘become a thing’을 일종의 명사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명사의 기능이 여럿이지만 기본적으로 ‘thing’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즉 사물을 가리키는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thing이 된다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 즉 명사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이 각기 이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무는 줄기, 잎, 뿌리, 가지 등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식물학자가 아닌 나같은 일반인에게) 새로 난 뿌리와 새로 난 잎새를 묶어서 통칭하는 명사는 없다. 아침과 점심, 저녁과 밤, 새벽 등의 시간 구분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해질녘과 잠들기 직전 시간만을 묶어 부를 수 있는 명사는 없다. 우리는 세계를 구분하고 묶고 개념화하고 이름을 붙이지만 거기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 제약을 훌쩍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호로서의 언어관습, 나아가 사회적 관행과 관념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언어적 창의성(linguistic creativity)를 키우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사람들이 이름붙이지 않는 것에 나만의 이름을 붙여보는 것이다. 즉 사람들에 의해 ‘become a thing’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자신이 ‘make something a thing’해 보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름붙이지 않은 현상과 사물에 나만의 이름을 붙여보고 그것을 마음 속으로 간직하고 키워가는 것. 여기에서 창의성이 자라난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하나의 이름(a thing)으로 부르는 것을 여럿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밤’이라고 부르는 시간을 어떻게 더 쪼개고 구획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밤을 통째로 보내지만 누군가는 밤의 탄생과 성장과 성숙과 노화와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위에서 든 예와 같이 사람들이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들을 연결시켜 이름을 붙여보는 것이다. 새로운 잎사귀와 뿌리를 합쳐 ‘나무의 새살’로 명명해 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남들이 A라 부르는 것을 나는 B라 부른다. 왜냐면 …이기 때문이다’식의 공식을 적용하면 보다 많은 것들이 나에게 ‘become a thing’이 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become a different thing’이라고 할까.

결국 ‘become a thing’에서 얻을 수 있는 창의성의 비결은 사물의 개념과 이름의 영역을 횡단하면서 새로운 개념과 이름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가장 공들여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시인일 것이다. 그들은 이름을 붙임으로서 개념을 끌어내고, 개념을 쪼개고 분리하고 모음으로서 새로운 개념을 빚어내며, 새로운 이름을 붙임으로서 당연시되는 본질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작업을 배우는 기회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책 읽다가 몇 가지

1. 그나마 잘 번역된 텍스트라 해서 읽고 있는데 군데군데 계속해서 막힌다. 영어로 읽기 시작하니 이해는 훨씬 나은데 속도가 안습이다. 번역가의 피땀은 많은 이들의 노고를 줄여주고 더 많은 세계를 여행할 시간을 선사한다. 문제는 학술서의 경우 정말 유능한 번역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 (대개의 연구자와 교수들은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2. 특정한 이론체계를 차용해 논문을 쓸 때면 대표적인 구절이나 뼈대만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이론의 핵심을 간파하고 그것을 분석에 녹여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의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거대한 체계를 열 개 쯤 다루는 개론 수업이란 또 얼마나 얄팍한가.

3. 아직 검토중이라고 하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혼자 녹화해서 올리는 게 쉽지 않겠으나 30명 정도의 수업을 실시간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것 보다야 나을 것 같다. 짧지 않은 동영상 강의를 촬영해 본 경험에서 보자면 혼자 잘 떠들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일반 면대면 수업 준비의 2-3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귀차니즘이 발동하는데, 마감이 어찌저찌 해결해 주겠지.

4. 대화에서 상대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말’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황, 혹은 담화의 유형 자체를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말은 언제나 그것보다 훨씬 큰 사회적, 제도적, 정치적 맥락을 환기하며, 말이 펼쳐지면서 말이 처하는 맥락 또한 요동친다.

단어 하나만 바꾸어도 진담이 농담이 되고, 논평이 풍자가 된다. 말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을 때, 살짝 찡그렸을 때, 목소리가 커졌을 때, 유행어를 섞었을 때, 상대가 익숙하지 않은 메타포를 사용했을 때 등등 지극히 작은 말은 순식간에 맥락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바뀐 맥락에서 대화자들의 관계는 달라진다.

5. 우리는 말을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이 실시간으로 지어지는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말은 상대의 귀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상대를 초대한다. 그렇기에 말하는 법은 세계를 창조하고 초대하는 법이다. 우리가 암기에 골몰했던 ‘어휘와 문법’은 그런 세계를 짓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차별과 혐오의 스펙타클을 넘어서

Posted by on Mar 1, 2020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인간은 자신의 안전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 vs 적” 혹은 “Us vs. Them”의 구도를 강화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퍼뜨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터한다.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끝없이 경계하며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피아식별’과 ‘적대적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Us”의 범위를 인류 전체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위 아 더 월드”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교육과 미디어, 문화 전체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다.

이렇게 ‘우리’의 범위를 인류 전체로 확장하는 일은 때로 지루하고 지난하다. 무엇보다 현재의 사회경제체제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 언론 또한 편을 가르고 욕할 대상을 만들어 내야만 ‘기사가 팔린다’. 음모론은 드러나지 않은 적을 만들어 내고, 혐오담론은 ‘선량한 우리’를 해치는 ‘사악한 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며 사람들에게 파고든다. 사람들간의 섞임을 ‘불순물의 침투’와 ‘순수함의 타락’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어떻게 이 난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가르고 혐오하고 저주하는 스펙터클을 막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 필요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다만 요즘 들어 부쩍 그런 분열과 혐오의 행태들이 지독하게 멋없는 거라는 걸 계속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시하고 차별하고 가르고 욕하는 일이 얼마나 스타일 빠지는 일인지,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없어보이는지 말이다.

그에 비해 연대하고 손내미는 사람들의 멋짐을 더 널리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랑하고 차별하지 않는 사람들의 ‘있어 보임’에 대해 더 크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도 가끔은 그런 멋진 행동을 따라하면서 아주 쪼금은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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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이 길이 광주가 가야할 길”이라는 저 말, 정말 멋짐 터지지 않나? “나눔과 연대의 광주정신으로 대구 경증 확진자들을 광주에서 격리치료하겠다”는 저 선언, ‘우리편 vs 너네편’ 가르는 사람들에 대해 시원하게 한방 먹이지 않나? 위기의 상황 속, 사랑과 연대는 한줄기 빛처럼 찬란하지 않은가?

기사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59092

 

한계는 가벼움이 아니다

언어의 해상도는 사고의 해상도를 넘지 못한다.
사고의 해상도는 경험의 해상도를 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은 동시대 인류 경험의 일부일 뿐이다.
현시대 인류의 경험은 인류가 경험한 역사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무엇보다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에서 먼지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매일 목도하는
쉼없는 언어들의 부딪침은
의미없는가?
이토록 ‘해상도 떨어지는’ 말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은
헛된 몽상일 뿐인가?

나는 이 질문의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때로 언어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기에,
때로 언어는 우리를 드러내는 유일한 정체성이기에,
때로 언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이기에,

언어를 매개로
예술이, 철학이, 과학이,
그 무엇보다
우리의 관계가 변화하기에,

언어는 더 정교해져야 하고,
더 넓어져야 하고,
더 깊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몇 개의 카드로
세상을 다 이해한 듯 소란떨지 않고,
몇 마디 경구로
삶에 달관한 듯 읊조리지 않고,
몇 권의 책으로
다 알았다는 듯 써갈기지 않는 것.

긴 글로도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삶의 진실이 있기에
긴 글을 쓰고 읽어가는 일의 고됨을
기꺼이 받아안는 일.

요약본에
자신의 생각을
송두리째 맡기지 않는 일.

이들이 소중하다 믿는다.

그 어떤 노력을 경주한다 해도
말이 삶을 오롯이 담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아니
‘거대한’이라는 말을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우주라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언어가
한없이 뭉툭하다는 걸 깨달을 때,
고로 나의 언어는 그저
‘한계의 한계’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 설 때
말의 무게를 깨닫게 된다.

한계는 가벼움이 아니다.
한계는 하찮음이 아니다.

언어의 한계는 그 내부를 성찰해야 할
조건이자 명령이다.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에 넣으려다가 넣지 못한 단상을 다시 더듬어/다듬어 남겨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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