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rt의 의미

Signature > sign / ball point pen > ball pen 등 소위 ‘콩글리시’에서 단어가 축약되는 경향에 대해 읽다가 옛 일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나: “They lived apart.” 이게 무슨 뜻이죠?
학생: 음… “그들은 아파트에 살았다?”
나: 아… 여기에서 “apart”는 부사예요. 부사.
학생: (자신있게) 그쵸. 그러니까 아파트’에’ 아닌가요?
나: &%#$#^&!@

이 학생에 의하면 명사 ‘apartment’는 부사 ‘apart’가 되어 ‘아파트에’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구동사(phrasal verb)와 구명사(phrasal noun)

한 페친께서 “run-down”이라는 구명사(phrasal noun)을 언급하셔서 관련 링크를 하나 공유합니다.

영어 학습 단계에 있어 상위 학습자와 원어민을 가르는 몇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구동사(phrasal verb)의 자유로운 사용이죠. 영어를 꽤 잘하는 분들도 put off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자리에 postpone이나 procrastinate를 쓰거나, set something off 라고 쓰면 적당할 상황에서 cause something to begin과 같이 쓰는 걸 볼 수 있으니까요.

사실 저도 이러는 경우가 많아서 미국인 동료 하나가 ‘너는 왜 말하는 걸 글쓰듯 하냐?’라고 물은 적도 있습니다. 저는 당당히 ‘영어를 글로 배워서 그래.’라고 대답했죠. ^^

구동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구명사(phrasal noun) 입니다. Report가 동사와 명사 모두로 사용되듯 run down 또한 동사로도 명사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띄어쓰기 없이 한 단어로 쓰거나 중간에 하이픈을 넣어주어야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구명사(phrasal noun)의 다양한 예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phrasal verbs vs. nouns

애플 WWDC 언어 맛보기

Posted by on Jun 6,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영어 | No Comments

1. 그냥 excited 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really excited 해야 한다. 그냥 glad 해서는 반가운 게 아니다. So glad 해야만 한다. 감정의 오버도 용인되는 자리다.

2. A new level 따위는 없다. 새로운 레벨은 모두 ‘a whole new level’ 이어야 한다. 새로운 것은 whole new 하거나 brand new 해야만 한다. 앱도 마찬가지다. New apps가 아니라 All new apps여야 한다.

3. 행사는 largest, biggest, fastest, best 등 최상급의 향연이다. 물론 ever로 꾸미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비교급도 ever랑 결합하면 강력하다. Than ever before 같이 말이다. 마치 인류의 역사가 WWDC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듯하다.

4. 많은 이들이 싫어하는 클리셰지만 여전히 자주 들리는 말: “Game changer.” 이제 게임은 좀 그만 바꾸었으면 좋겠다.

5. Incredible, incredibly, unbelievably… 라면서 다 믿으란다. 믿을 수 없으니 더더욱 믿으라는 말은 일종의 유비같이 느껴진다.

6. 엄청나케 큰 화면에 보여주면서 꼭 sneak peek 이라고 한다.

7. WWDC 때마다 keep pushing forward (the limits), raising the bar 하느라 수고가 많다.

기술혁신, 그래픽, 시연 등이 모여 신제품/기술 발표 이벤트가 완성된다. 연사들의 언어는 이를 실시간으로 엮어준다. 그 특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그리 다르지 않다.

 

재귀대명사의 탈출

Posted by on May 30,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언어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잡생각) 일반적으로 myself, herself, himself 등 영어의 재귀대명사는 짝을 이룰 때만 허용된다. 문장에 재귀대명사와 연결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재귀대명사 홀로 쓰이는 예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an effort from John, Stephanie, and myself.” 같은 식의 용례 말이다.

이들은 ‘재귀(reflexive, 자신을 반영함, 자기로 돌아감)’라는 정의에서 탈출하고 있는 중이다. 자유롭지만 돌아갈 자신(self)이 없는 자신들은 본질과 현상의 구별이 사라진 시대를 닮았다. 기준점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물론 ‘진정한 나’ 따위는 없지만 가끔 대면할 ‘나’를 갖는다는 게 나쁘진 않을 것이다.

노 룩 패스 (No look pass)

Posted by on May 26,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어떤 인간이 ‘노룩패스’로 짐을 다른 인간에게 넘겼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는 당당했고,
바퀴는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러웠고,
넘겨받은 이는 “평소 자상한 편”이라는 말을 남겼다.

처음엔 웃었다.
재치 넘치는 패러디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의원’이나 ‘수행원’,
지위나 호칭 따위는 걷어치우고
상대의 얼굴을 봄(to look)이
사람 대접의 기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많이
슬펐다.

화가 났다.

우리 사회는 성소수자의 고통과 좌절, 아픔과 분노, 무엇보다 존재와 대면하며 정책을 집행하고 있나? 학생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살피며 교실을, 교육과정을, 평가와 입시를 만들어가고 있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수십 일 곡기를 끊어야 하는 노동자들, 그저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위해 수년을 싸워야 하는 장애인들은 여전히 얼굴없는 존재 아닌가?

“노룩패스”는 그저 개념없는 정치인의 우스꽝스런 모습일까? 상대의 얼굴에 관심이 없는 행위들을 응축한 캐리커처는 아니었을까?

이 사회는 거대한 노룩패스의 경연장 아닌가 말이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는 순간
자신의 얼굴도 사라진다.

대화의 성립조건

Posted by on May 23,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말은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다. 따라서 말은 화자에게서 청자에게로 향한다. 여기에서 “화자—말—>청자” 도식이 나온다. 여기까지가 커뮤니케이션 개론에서 들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의 말은 언제나 양방향으로 달린다. 생각이 언어를 통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양날의 검이 된다. 단어 하나 하나는 단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를 규정한다. 단순히 정보의 매개가 아니라 정체성과 정치성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말을 다듬고 또 다듬는 사람들은 안다. 말은 짜냄(expression)이면서 누름(suppression)이고, 전달(delivery)이면서 성찰(reflection)이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던지는 말은 언제나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때로는 더 빠르고 강하고 날카롭게.

대화자는 말하는 동시에 듣는 주체여야 한다. 따라서 두 사람간의 대화에서 청자는 늘 둘이어야 한다. 이것이 대화의 성립조건이다.

외국인 유학생들의 고충

Posted by on May 22,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이리 저리 강의를 다니다 보니 외국인 학생의 증가세가 확연히 느껴진다. 중국 학생들이 가장 많고 몽골이나 동남아 국가들에서 온 학생들도 꽤 된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엔 무리가 없으나 전문지식에 대한 논의를 따라오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다 보니 시험도 과제도 최하위를 면치 못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말하기 수준이 어느 정도 된다 해도 글쓰기에 익숙한 편은 못된다. 하지만 전문지식을 한국어와 영어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나같은 교수자는 과제와 시험의 언어로 한국어/영어 옵션 외에는 줄 수가 없다. 다른 교수자들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대학평가에서 국제화 지표의 중요성, 유학생 유치를 통한 대학재원 마련 등의 요인이 외국인 학생의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이런 동인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언어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학생들을 무더기로 받는 것은 대학의 책임 방기로 밖에 볼 수 없다. 외국인 유학생들이 겪고 있는 언어적, 사회문화적 고충에 관한 조사, 이에 기반한 실질적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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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아래 Kisang Kim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우리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유학가면 당연히 그 나라 언어부터 익히고 시작하쟎아요? 근데 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해외 유학생들이 한국어를 못 하는 거에 대한 고민을 더 먼저 할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에 오는 유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기준에 전혀 못미친다는 점은 두고 두고 문제가 될 듯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슈가 있습니다. (1) 선발 과정에서 요구하는 한국어 능력 기준 그리고 (2) 입학 후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제공.

현재 상황에서 (1)의 한국어 능력 기준을 상향조정하고, (2)를 좀더 체계적으로 정비해야 합니다. 북미지역의 종합대학 다수가 ESL 프로그램을 체계화한 것처럼 말이죠. 물론 저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주장이니 좀더 체계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오직 서로의 상처에 입맞추느니”

Posted by on May 21,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개개인은 고유한 존재입니다. 서로 비슷해 보여도 또 많이 다르죠. 그래서 ‘우리’라는 표현은 늘 양날의 검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남 이상의 남’이지요.

오프라인도 그렇지만 소셜미디어에서의 관계를 미화하지도 폄하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다만 최근의 격렬한 논쟁 중 일부에는 아래와 같은 관계가 자리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논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의 비판은 모든 시민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패거리’를 전제로, 깎아내리기를 과정으로, 피아식별을 목표로 하는 논쟁에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말을 거는 줄 알았는데 암구호를 묻는 ‘논쟁’은 그저 패싸움일 뿐이니까요.

일관된 논리와 객관적인 데이터를 확보하는 능력,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함께 발딛고 있는 일상과 닮은 꼴의 가치관, 무엇보다 추스리지 못한 상처, 상처들을 볼 수 있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학기가 끝나면 그간 공수표를 던진 분들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

인종차별 체험기

카투사로 한 군생활 말년이었으니 아마도 97년이었던 것 같다. 외근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 부대에서 제공하는 버스에 올랐다. 먼저 도착한 부대원들은 저만치 뒤에 겉멋든 고딩들마냥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군바리의 특성상 합류는 이미 정해진 일.

통로를 지나려는데 아기를 앞으로 안은 백인 여성 하나가 보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조심조심 지나간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등과 나의 등이 스친다. 한국의 대중교통 상황에 대입해 보면 정말 대수롭지 않은 마찰이다. 그런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Fxxx”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려 그 여자를 쳐다본다.

“What did you say?”
“You should have said ‘Excuse me’ when you passed by. You almost killed my baby.”
(“killed”라는 말이 몹시 거슬렸으나 꾹참고) “Okay, I’m sorry for not saying ‘Excuse me.’ But you should not use that kind of language to me. Watch your tongue.”

설교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피차 득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을 가라앚히고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이 뒤통수를 가격했다.

“Don’t yellow people know how to say, “excuse me”?”

“Yellow people”소리를 듣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다시 일어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격양된 목소리로 방금 한 말을 다시 해보라 다그쳤다. 내 격양된 어조때문이었을까. 그녀는 “‘Excuse me’라는 말을 썼으면 더 좋았을걸…”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태도가 역겨웠다. 사과를 받아내야 했다. 이 자리에서 정중하게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고성이 오가기를 수 차례.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사과해라. 늦지 않았다.”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녀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다. 사과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본 친구 중 하나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입술을 깨물며 괜찮다 했다. 같이 일하던 상병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사과를 해달라 정중히 말했다. 그녀는 사과할 것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부대로 돌아와서도 아까 상황에 대한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고민 고민 끝에 다음날 업무를 마치고 부대장(여자 대위)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주변에서 보고 들은 목격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 했다. 부대장은 “그점에 대해 유감이고, 네가 원하면 정식 절차를 밟아 군대 내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몇 번의 조사과정이 있을 것이고 조서를 작성해야 하며, 꽤나 성가신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넌지시 ‘그냥 참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 번거롭기도 하고, 그 여자와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정식 제재 요청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이를 악물고 제소를 했어야 했나 할 때가 있다. 나 편하자고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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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심각한 글을 써버렸구나.
(우습게도!) 이 사건을 끄집어낸 건 아래 동영상이었다.

내가 맞아 아니면 내가 맞아?

Posted by on May 8,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영어 | No Comments

1. 영어 클리셰(닳고 닳은 표현) 중에 “Am I right or am I right?”이 있다. 결국 “I am right.”이라는 뜻이다. 보통 ‘내가 맞아 니가 맞아?’라고 해야 할텐데 ‘내가 맞아 아니면 내가 맞아?’라고 묻는 것이다. 선거 막판 이런 글과 종종 조우한다. 나도 가끔 이런 글을 쓰지 않는지 반성한다.

2. 언제였던가. 우리 나라에도 ‘빅텐트론’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먼산) 영어에도 같은 표현(Big tent: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선거캠프/조직 하에 모임)이 있는데, 정치권이 이를 차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캠핑문화의 확산 정도에 비추어 보면 ‘빅텐트론’은 미국 문화에 좀더 밀착된 느낌이다. (빅텐트론 주장하셨던 분들 중에 제대로 캠핑 해보신 분 몇 안될 듯.)

3. 영어에서 analyze는 본래 생물체나 무생물을 쪼개어 보는 일을 의미했다. 생물이나 물체에 대한 해부/분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analyze는 대개 추상적인 영역(지식, 정보, 개념 등)에서 쓰인다. 이 시대 analysis의 과제는 이러한 추상성을 넘어 몸과 물성의 영역을 회복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빈곤에 대한 담론적 통계적 분석과 빈곤한 하루를 사는 몸(들)의 고통에 대한 기술의 결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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