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 속에 OUR 있다.

Posted by on Oct 11,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영어에서 “YOUR”와 “OUR”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이 둘의 간극은 무시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이 둘은 참 많이 닮았다. “OUR”에 “Y”만 붙이면 “YOUR”가 되는데, 이때 고려해야 할 것은 “why(Y)”이다. 왜 우리는 ‘우리들’과 ‘당신들’을 가르고 있는가. 왜 우리는 ‘당신들’이 ‘우리들’과 다르다고 고집하는가. 왜 우리는 ‘당신들의(your)’ 속에서 ‘우리들의(our)’를 보지 못하는가? 혹 우리는 ‘왜(why)’ 없이 우리의/당신들의 이분법을 습관적으로 생성하고 있지는 않은가. YOUR 속에 OUR 있다. WHY를 기억하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사회의 역량, 그리고 공정

Posted by on Oct 11,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한 사회의 역량은 체제의 부침浮沈에 대한 개개인의 적응력이 아니라 개개인의 고유성과 잠재력을 존중하는 체제의 유연성에 달려 있다. 공정은 모두를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대하는 데서 발현된다. 그럴 때에만 개개인은 ‘공평하게’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대우받기 때문이다. 규격화, 표준화, 획일화돠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공산품 취급하는 것을 평등이라 여기는 것은 명백한 범주의 오류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미움과 사랑

Posted by on Oct 6,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나는 “미움받는 일에 진작 익숙해졌더라면 더 깊이 사랑받을 수 있었을텐데.”라고 말했다. 너는 “미움이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야?”라고 답했다. 쑥스러워 물끄러미 손바닥을 쳐다보던 나는 깨달았다. 네 말은 미웠지만 충분히 사랑스럽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대신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을 수 있음이 행운이라는 것을.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지극히짧은단편집

English Posts

1. Writing in English is a sure way to drop readership. Many of my original FB friends, who communicate mainly in English, seem to have unfollowed me, who writes heavily in Korean. Most of my Korean friends prefer Korean posts since they can instantly judge whether it is worth reading them or not. This minimizes their emotional and cognitive burden in the myriad of stressful, often politically charged messages. In some sense, English posts function as a safe haven where only people who truly care about me would harbor. (Of course, it is possible that I have some ‘grammar Nazi’ fiends. Please curb your instinct to make the world a more correct place, at least for now.)

2. Between the bitter sense that most of my old friends have forgotten me and the assuring truth that all of us are forgotten, without exception, in the long run emerges the realization that I am one of those people who forget too easily about dear people and memories. Time flies, memories abandoned, trust and care decay, and we live ‘with or without you.’ It is sad but natural.

3. So the bottom line is that I deeply thank those who have read all through this bottom. You have spent a whole lot more energy reading this trivial post. Nothing compares to your valuable time.

4. I had planned to write a longer prose, only to find that I am too hungry to do that. Physiology before psychology; Calories before symbols. Have a restful morning/afternoon/evening/night. (Choose an appropriate word depending on your time zone.) Miss you!

문제와 함께 살아가기

Posted by on Sep 30,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내게 성숙은 문제해결능력의 발달이 아니라 문제와 같이 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문제해결능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의지와 체념은 상극의 개념이지만, 문제와 벗되어 살아가기로 한 삶에서는 체념과 의지가 사이좋게 융합된, 슬픔을 엮어가는 데서 나오는 힘 같은 것이 존재한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그렇게 체념과 의지가 변증적으로 통일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더더욱 체념적 의지, 의지적 체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이해(understand)되거나 우회(detour)될 뿐 용해(solve)되지 않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글과 말 중에서

(글과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중하다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언제든 말 잘하는 사람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을 택할 것이다. 물론 말과 글의 영역은 어느 정도 겹친다. 하지만 좀더 긴 세월을 담아 한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보여주는 것은 글 쪽이다. 말에서 글로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며, 글을 고치는 수고는 말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정말 좋은 글을 쓰는 사람에겐 나도 모르게 신뢰를 안겨주게 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나는 유튜브랑 안맞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절망감이.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마침표를 찍다

Posted by on Sep 22,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마침표를 찍는다”는 표현이 있다. 일을 마무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말의 세계에는 ‘마침표’가 없다. 말은 단어의 연쇄로 이루어지며, 더 이상 단어가 발화되지 않을 때 이것을 해당 발화의 종료로 여긴다. 마침표를 찍는 행위는 말을 글로 옮길 때 태어나는 ‘부재의 증거’이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면에서 마침표는 자신의 본질(부재)을 철저히 배반하는 구두점이다.

마침표를 잘 찍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생각도, 행동도 이어가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마침표가 된다. 침묵 속에서 스러져가는 모든 존재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에겐 ‘마침’이 있지만 마침’표’는 없는 것이다.

마침표 없는 공백을 사랑하기란,
선언하지 않고 살아내기란 얼마나 힘든가,
가끔 생각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인지언어학 이야기 52: 인지문법의 세계 (관사 마지막 이야기)

 

“What’s this?”
“Cat”

관사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뼈아프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음과 같이 단어를 외웠다는 사실입니다.

고양이 – cat
손목시계 – watch
양 – sheep
책상 – desk
물 – water
사과 – apple

이쯤 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눈치채셨을 겁니다. 이런 식의 짝짓기에서는 명사 앞에 관사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냥 단어와 한국어 짝이 나열되는 식이죠. 그 결과 셀 수 있는 명사와 셀 수 없는 명사의 구분이 없이 머릿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명사를 처음 배울 때 불가산과 가산의 개념이 자리잡을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양이 그림을 두고 “What is this?” 혹은 “What is that?”와 같이 물어볼 때에는 “(It’s) a cat.”과 같이 <관사+명사>의 짝이 보다 적절한 답변입니다. “What’s this?라고 했는데 그냥 “Cat”이라고 한다면 틀렸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어색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관사와 명사가 어떻게 짝을 이루는지 살피면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수단의 개념화, 그리고 관사

교통수단을 표현할 때 <by + 무관사 명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by bus, by train, by car, by plane, by bicycle” 등의 표현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동사와 같이 쓸 때는 조금 복잡합니다. 대표적으로 take와 같이 쓰이는 bus/subway/taxi 를 생각해 보시죠.

a. I take a bus to work.
b. I take the bus to work.

특별한 문맥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위의 두 문장은 특별한 문제없이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나 버스 타고 일하러 간다.”의 의미로 말이죠.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bus 앞에 정관사 the를 쓴 b의 경우가 ‘다른 교통수단이 아니고 버스임’ 혹은 ‘내가 늘 타고 다니던 그 버스’를 조금 강조한다는 정도인데요. 이것이 두 문장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진 못합니다. (참고로 두 원어민 화자에게 물어봤더니 한 친구는 a를, 다른 친구는 b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데이터로서 두 명은 너무 작은 숫자이니 무시할 만하지만, 원어민들의 직관이 반대라는 점이 흥미로왔습니다.)

이에 비해 subway의 경우는 확연히 다릅니다. 부정관사는 적절하지 않고 정관사만 가능하죠.

c. I take a subway to work. *
d. I take the subway to work.

별표는 문법적으로 옳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버스의 경우에는 “여러 교통수단 중 하나로서의/특정한 노선을 지나는 버스(the bus)” 혹은 “여러 버스 중 하나(a bus)”를 상정할 수 있지만, 지하철의 경우에는 “시스템화 된 교통수단으로서의 지하철(the subway)”으로만 개념화됩니다. 여러 개 중 셀 수 있는 개체로 개념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당연히 a subway, two subways 등은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subway의 경우 아무 것도 안붙이고 무관사로 쓰는 경우도 종종 발견됩니다. 다만 a subway라고 쓰는 경우는 좀처럼 없습니다.)

Bus, subway, taxi에 대한 개념화의 차이

Taxi는 조금 애매한 듯합니다. Bus의 경우 the bus/a bus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고, subway의 경우에는 정관사가 동반되거나 아예 생략되기도 하는데요. Taxi는 예외적인 상황이나 특정 문맥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부정관사 a가 필요합니다. 일부가 “the taxi”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T/F 문법 문제라면 take a taxi만이 정답으로 인정되겠지요.

이같은 관찰을 종합하여 교통수단에 대한 관사사용을 개념화(conceptualization)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봅시다. 우선 사람들은 택시를 셀 수 있는 개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택시들이 있고 그 중 하나를 잡아탄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비해 지하철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하철 열차를 여러 지하철 열차 중 하나로 개념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버스는 그 중간 어디쯤엔가 위치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복잡하지만 아예 패턴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관사공부의 패러독스

몇 차례의 연재를 통해 인지언어학의 관점에서 관사의 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교사들이 보기에도 쉽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 관사에 대해 강의를 할 때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종종 혼동도 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부하기 전보다는 정확성이 분명히 좋아졌습니다. 그거면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관사 학습에는 일종의 패러독스가 존재합니다. 영어에서 가장 빈번히 나오는 품사 중 하나가 관사이고,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말뭉치(corpus)를 살피면 the가 늘 빈도수 1위를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A/an의 빈도도 상당히 높습니다. 이렇게 보면 관사의 바다 속에서 관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등잔 밑이 어두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하면서도 관사가 가장 어렵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빈도수가 높다고 개념적으로 쉬운 것은 아닙니다. 관사는 생긴 것도 단순하고 종류도 3가지(정관사, 부정관사, 무관사) 밖에 되지 않지만 개념적으로 명쾌히 이해하기엔 영문법에서 가장 복잡한 항목 중 하나입니다. ‘개념화의 차이에 따라 관사의 활용이 달라진다’는 인지언어학의 기본 개념을 떠올리면서 다양한 맥락 속에서 관사를 살피는 공부를 꾸준히 해 나갈 때 이런 한계를 조금씩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매일 사람들을 접하지만 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관계를 두루두루 살피고 깊이 성찰하지 않는 한 관계에 대한 지혜는 자라지 않을 듯합니다.

타자화하지 않고 타자를 받아들이기

타자화하지 않고 타자를 받아들일 때 우리 자신도 타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다. 타자들이 섞여있는 세상은 중심이 없는 변방의 세계로 ‘나그네들간의 환대’를 가능케 한다. 어쩌면 리터러시교육의 핵심 과제는 ‘타자로 남을 용기’에 관한 문제일지 모른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언어 지켜보기

가슴 졸이며 보고 있는 말 몇 가지

1. 국뽕

“국뽕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국뽕이 차오른다” 등

‘국뽕’이 부정적 뉘앙스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사용되는 경우들이 꽤 많음.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한 사람에게서도 종종 발견됨.

2. 지키다

“OOO을 지킵시다”
“우리가 지킵시다” 등.

정치인을 ‘지킨다’는 표현이 자주 보임.
이 ‘지킨다’라는 말은 거대한 프레임(frame) 안에 위치하는 듯함.
지키는 주체로 ‘우리’가 호명됨. ‘우리/그들’ 이분법이 함께 작동하는 듯함.

3.입을 털다, 씨부리다

“함부로/되는대로 입을 털어서”
“뭐라고 씨부리노” 등.

상대의 말을 지칭하면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음.
상대의 말이 가진 약점을 비판하려고 할 때 이런 말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효과적일지 모르겠음.

4. 종족

상대를 ‘종족’으로 지칭하는 방식.
언어상에 나타난 인종주의적 편향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
종족문제가 아닌데 종족으로 지칭하는 것 자체가 문제.
나아가 종족이 다르면 마구 타자화하고 일반화해도 좋다는 생각은 더 큰 문제.

가면 갈수록 특정 이슈를 둘러싼 소통은 힘들어지지 않나 싶음. 이슈가 터지는 즉시 ‘피아구분’이 ‘논점’과 ‘대안’과 ‘협상’ 등을 집어삼켜버리는 듯함. 피아구분은 거의 매번 타자화(othering)로 이어짐.

리터러시 책 준비하면서 공저자 선생님과 함께 가장 크게 우려했던 부분은 “타자에 가 닿는 소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나 또한 예외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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