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생각보다 고집이 센 이유

“걔 한 고집 하잖아.”
“한 고집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 다 한 고집 하지.”

이 대화가 익숙한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고집을 피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의견을 고수하면 “그 사람 생각보다 고집이 세네”라는 말이 돌아오곤 한다. 사실 ‘고집을 피운’ 당사자 입장에서는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이를 목격하는 이들은 자기 의견을 고수하는 이의 인격에서 고집의 원인을 찾는다. 상황이 아닌 개인에게 고집의 원인을 귀속시키는 것이다.

사실 누구든 고집을 피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나곤 한다. 당연히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을 끝까지 고수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고집을 피우는 개인’만을 기억한다. 이게 몇 번 쌓이면 ‘고집불통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피치못할 상황은 누구나 겪기에 고집을 피울 수밖에 없건만, 그걸 목도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고집 센 인간”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생각보다 고집 센 인간이 된다.
물론 나도 생각보다 고집이 좀 센 거 같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영어교육, 희망은 있을까

거창하게 희망이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삶을 위한 영어공부’라는 테마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타인과 소통하며
함께 연대해 나가자는 제안을 할 때
많은 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들어주었다.

이제와는 다른 공부를 다짐하며
마음을 담은 서평을 건네주었다

대학에서
도서관에서
독서공동체에서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자칫 지루하고 원칙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어쩌면 순진하고 이상적이라고 치부될 수 있는
한국사회 영어공부에 대한 성찰의 이야기들을
깊은 공감으로 맞아 주었다.

수십 년 영어교육과 응용언어학을 하며
내 생각이 ‘주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이미/항상
삶을 갈아넣어야만 유지되는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구조에서
이 사회는 영어를
숫자로 증명되는 투자대비수익으로 치환하려 든다.
그것을 온전히 벗어날 길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변방’이 있고
아슬아슬한 삶의 경계 위에서
옹기종기 모여 함께 눈빛을 나누는 이들이 있고
덜 휩쓸리고, 덜 경쟁하며, 덜 증오하려는 이들이 있다.

영어로 인해
타인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을 멸시하지 않으며
줄세움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영어를 슬퍼하는,
다른 공부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맑은 눈의 벗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음이 기뻤던 오늘.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소소한 날들.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따스한 눈빛들.

고마운 얼굴들이 스친다.

아재개그

Posted by on Apr 30,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아재개그’의 창궐은 개그력의 증가라기 보다는 자제력의 감소다. 굳이 정의하자면 개그를 치고 싶다는 순간의 유혹에 대한 굴복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함께 굴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꽃이 필 수도 있으니 굴복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결국 아재개그의 성공여부는 함께 굴복해 주는(?) 사람들의 고귀한 희생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아재개그를참고다른거올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외국어로 대화하기

Posted by on Apr 23,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동네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대화하며 지나가는 여중생 다섯. 한국어가 아닌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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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까삐까.”
“삐까삐~까.”
“삐삐까삐~삐까.”
“삐까삐까삐까삐까삐~까.”
“ㅋㅋㅎㅎㅎ%#$#@!ㅌㅌㅋㅋ”

그들은 오로지 “삐까삐까”로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끼고싶었지만참았
#삶을위한피카츄어공부

부끄러움에 대하여

Posted by on Apr 18,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한다.

최근 잇단 정치인들의 망언을 보며 생각난 말이다.

부끄러움이 없으니
부끄러워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과
부끄러움이 없길 바라는 마음은 다르다.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빌었지만

이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는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 부끄러움을 감당하는 방법은 필연적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자라야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부끄러운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못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부끄러움과 메타-부끄러움은
이렇게 서로 엮어 있고
그런 부끄러움의 고리를 벗어날 길은 없다.

그렇다.
그런 길은 없다.

오직
괴로움과
사랑만이 있을 뿐.

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5년 전 오늘을 기억하며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합니다.

1. 먼저 어떤 개체 하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sister. She is very smart.”

여기에서 ‘a sister’는 한 명의 여자형제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sister들 중 한 사람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will be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동물을 대표하는 표현이지요.

1과 2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야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좋은 이야기는 하나의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A(n)”의 의미는 이렇게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저는 관사의 이런 변증적 성격을 통해 한 사람과 인류 전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헤 보곤 합니다. “a person”은 “한 사람”임과 동시에 “모든 사람”일 수 있다고 말이죠.

5년 전 오늘 수많은 생명들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 곁을 떠난 한분한분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릅니다. 인류 전체였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이 아니며,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임과 동시에 대양의 일부”라고, 그리하여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고 노래한 존 던의 시처럼 말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한분한분 안에 담겨 있던
온 우주를 기억하겠습니다.

못난 저를 보니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부탁하고 또 기원합니다.

거친 세상 속
망각으로 빠져들어가는
서로를 굳건히 붙잡아 주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문화기술지, 균열, 그리고 연결

Ethnography(문화기술지)를 말 그대로 풀면 “ethno+graphy” 즉, 사람과 사회, 문화를 써내려가는 일(the writing of people, of society, of culture)이다.

나는 문화기술지를 “ethno”와 “graphy”의 유기적 결합 및 해체로 파악한다. 말(graphy; text)과 주체-들(ethno; people) 사이를 오가며 이 둘을 결합하고 때로는 분리시키는 일 말이다. 텍스트를 다루다 보면 자칫 사람을 이해했다고 오해하기 쉽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텍스트가 없어도 세상이 온전히 이해되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다. (오랜 기간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려있던 문구와는 조금 다른 결에서) 텍스트는 사람을, 사람은 텍스트를 만든다. 이 둘은 통합되어 있지만 또 균열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균열의 지점을 자세히 살필 때 사람도 말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뇌의 이상이 뇌의 기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처럼, 말과 삶의 균열이 말과 삶의 연결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나이듦의 의미

Posted by on Apr 5,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생물학적 나이는 하나다. 하지만 인간은 다양한 현상 앞에서 서로 다른 나이를 지닐 수 있다. 어떤 문제 앞에서는 수천 년 지혜를 구해 대응하고, 어떤 일에는 지금의 나이로 맞서며, 또 어떤 현상 앞에서는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한다. 그때그때 단일한 나이 속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세월이 흐를수록 수많은 나이를 획득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나이든다는 건 어쩌면 수많은 나이를 자신 안에 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co(s)mic

Posted by on Mar 30,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책을 읽다가 이 단어에 한참 머물렀다. 제법 영리한 말장난이라 느꼈다. 이 거대한 우주, 그만큼 거대한 우스꽝스러움. 때로는 온 우주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코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cosmic과 comics는 전철어구(anagram, 철자 순서만 바꾼 어구) 관계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낭독의 기쁨

낭독은 저자와 독자의 만남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상의 만남과는 다른 차원이 개입한다. 글을 소리내어 읽는 순간 말이 된다. 이때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말의 내용은 저자로부터 왔으되 말의 모양은 낭독자로부터 말미암는다. 말의 ‘혼’은 저자의 것이되 ‘몸’은 독자의 것이다. 연원을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 열망과 아픔이 나의 몸을 통하여 다시 세상으로 향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말은 다시 귀를 통해 내 정신과 만난다. 아마도 낭독의 기쁨은 이 과정에서 말미암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낭독의 순간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인간과 대면하게 된다. 저자의 정신과 낭독자의 몸을 가진 인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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