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그리고 ‘인질’ 메타포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

모 신문은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서울대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에 대해 “파업 인질”을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는 서울대 도서관 경비 중 한 명의 발언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헤드라인으로 올린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바로 ‘학생=인질’이라는 메타포를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에 대해 “인질” 메타포를 쓰는 관행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이 인질이 되고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환자가 인질이 된다. 급기야 학교 난방을 담당하는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은 학생을 인질로 잡는 일이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인질”은 부정확하고 비열한 메타포다. 왜 그런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질”이라는 단어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학생이 인질’이라는 정보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인생은 무대”라는 메타포가 주연배우, 조연배우, 악역, 엑스트라 등등을 순식간에 소환하는 것처럼 “인질”의 구성에도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또한 인질범은 인질을 댓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질’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고틀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를 프레임(fram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인질’ 프레임에서 파업을 둘러싼 주체들이 맡은 역할을 살펴보자. ‘학생이 인질이냐’는 질문을 던졌으니 당연히 학생은 인질의 위치에 놓였다. 파업중인 노조는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인질범이 된다. 자연히 노조와 대치하고 있는 대학본부는 인질이 구출되길 바라는 편이 되겠다.

우선 이 프레임은 극도로 부정확하다.

인질범은 인질극 프레임에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 노조는 자신들이 응당 받아야 할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임금인상도 아니다. 무기계약직 전환시 빼앗긴 교통비, 급식비 등 다양한 복지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생명을 조건으로 거는 몸값과는 거리가 멀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다. 하지만 서울대 기계전기분회 노조는 사실상 약자이다. 파업은 몸뚱아리 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이는 매우 적법한 권리행사의 수단으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아가 ‘인질’ 프레임은 비열하다.

학생을 인질로, 노조를 인질범으로 상정함으로써 학생과 노조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는다. 아울러 대학본부를 ‘착한 편’으로 자리매김한다. 학생들이 노동자와 연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질이 인질범과 어떻게 연대를 한단 말인가? 이 프레임에서는 ‘노조와 연대하는 학생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인질이 된 학생들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인질극에서 인질은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극히 수동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파업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노조에 연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인질극에서의 인질과는 달리 학내 파업 상황에서 학생은 당당한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는 사라져야 한다. 걸핏하면 나오는 ‘인질’ 프레임에 마음이 동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인질’로 묘사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질 프레임이 뒤집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한다. 파업에 임하는 노조는 누구도 인질로 잡지 않았다.

활성화 영역

아래 세 문장을 보자.

a. “컴퓨터 좀 쳐봐.”
b. “컴퓨터에 꼽을 데가 없네.”
c. “컴퓨터 램을 갈아끼웠어.”

세 문장에는 공통으로 ‘컴퓨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의 표면을 말한다. 뭔가 잘 구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쳐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표면의 단자를 말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SB 등 외부기기와의 연결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

세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내부의 마더보드를 의미한다. 램을 갈아 끼우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열고 메인보드의 슬롯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 좀 쳐봐”라는 말에 컴퓨터 뚜껑을 열고 컴퓨터를 치는 사람은 없다. “램을 갈아 끼웠어”라는 말을 듣고서 USB 단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맥에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를 ‘active zone(활성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어가 하나 같지만 실제로 그중 일부만이 두드러진 의미로 동원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활성화 영역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c를 쓸 때 분명 우리는 다른 영역의 의미를 활성화시키지만 ‘컴퓨터’라는 동일한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단어가 여러 가지 하위 요소를 갖고 있을 수록, 사용되는 상황이 다양할수록 활성화 영역의 역동성 또한 증가한다.

* ‘active zone’이 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어를 갖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인지언어학이야기

‘나/너’ -> ‘나+너’

‘뇌 신호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brain signals, 내 맘대로 지은 이름)’이 부상한다고 해도 그것은 의미작용의 지층을 두터이 할 뿐 반박 불가능하며 객관적인 의미를 확정하진 못한다. 기호학자들의 분파로 “뉴로-“가 붙은 “neuro-semiotician”의 영향력이 커지겠지만 이 또한 기호학의 제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도리어 삼각검증(triangulation)의 대상이 늘어나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퍼스(Peirce)가 간파했던 세계와 의미의 차이는 지속될 것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은 제시(present)될 수 있지만, 의미는 제시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재현(represent)될 뿐이다. 이러한 가정이 깨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이 물리적으로/생물학적으로 병합(merge)되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방식이 등장해야 한다. 의미작용의 지형이 ‘나/너’에서 ‘나+너’로 변화하는 순간 (언어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포괄하는 의미의) 기호학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맞게 될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서문, 두 가지 관점

서문(序文)은 처음 말이라는 뜻으로 Preface나 Introduction으로 번역된다. 책의 머리에 위치하여 본문으로 이끄는 글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본문과 결론이 존재하고 난 뒤라야 서론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현상적으로는/독자들에게는 ‘서문’이지만 생성적으로는/저자에게는 ‘결문(結文)’이라 하겠다. 독자를 어디로 이끌지 온전히 알게 될 때 어떻게 이끌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가만히 사랑하는 법

Posted by on Feb 3,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홀로 존재하는 법을 아는 것은 사랑의 기술의 핵심이다. 홀로 있을 수 있을 때 타인을 탈출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 벨 훅스 “Knowing how to be solitary is central to the art of loving. When we can be alone, we can be with others without using them as a means of escape.” – Bell Hooks

‘타인을 탈출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 계속 마음에 떠돈다.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겠느냐마는, 다른 이들을 수단삼지 않기 위해 고독을 수련하는 일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질 수 있는 사람만이 가만히 사랑할 수 있다.

센세이셔널의 두 극단

많은 경우 ‘센세이셔널’은 부정적 함의를 가지지만, 세상을 바꾸는 많은 것들이 센세이셔널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는 진중한 학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센세이셔널함이 센세이셔널리즘에서 오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정주의는 선정성을 겨냥하고 선정성을 믿으며 선정성을 갈망한다. 그렇게 선정주의가 성취한 선정성은 가볍고 허약하며 한시적이다. 선정성은 오로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선정성은 원칙에서도 파생될 수 있다. 원칙을 따라가는 일은 근본적이며, 근본적인 것은 과격하다. 과격한 주장은 어느 정도의 선정성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선정성은 근본적인 것들로 인도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두 가지 선정성을 구별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후자의 선정성이 꼭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다. 전자의 ‘얕은’ 선정성을 추구해도 논문을 써낼 수 있고 실적을 올릴 수 있다. 후자의 선정성에 이끌려 이론의 지층에서 헤매다가 세월을 ‘허송’할 수도 있다.

그래도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센세이셔널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과 센세이셔널할 수밖에 없는 급진성을 가진 이들을.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영어, 인정과 오인

부르디외에게 있어 서로 다른 언어에 대해 부여되는 상이한 권력들은 사람들의 인정(recognition)에 근거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 모든 인정은 일종의 오인이다.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 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어는 역사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층층히 쌓인 오인 위에서 작동한다. 가장 ‘사랑받는’ 언어는 실상 가장 ‘오해받는’ 언어인 것이다.

#언어의말들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는 기본

어떤 면에서 영어는 ‘과대평가될 수 없는’ 즉,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은 능력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경향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는 기본’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무언가가 기본이 되면 다른 것들은 기본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삶에는 언제나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너무 쉽게 영어를 ‘기본’의 자리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공부의 자기성찰성

영어공부는 거의 언제나 학습방법(how to)의 문제로 인식된다. 영어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영어공부는 성찰과 비판의 대상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전국민이 영어공부의 전문가라면, 전문가의 자기성찰성 또한 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학습법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대중적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영어공부를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다루는 일이었다. 영어관련서에 대한 대중의 습속(habitus)를 깨면서도 그중 일부를 받아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이 둘은 상반되는 주제이지만 사유되지 않는 공부는 가볍고 위험하며 불안하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재미와 멋이 없다. 솔직히 지금 우리사회의 영어공부 중 적지 않은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다.

공부를 해나가는 것 만큼이나 공부하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영어를 잘하는 것 만큼이나 영어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인식하는 일이 시급하다. 삶에 처참한 균열을 만드는 영어가 아니라 삶과 함께 성장하는 영어가 절실하다.

그냥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하도 떠들어서 페친 중에서는 벌써 피곤하신 분들이 있을 것 같지만.

#삶을위한영어공부 조금만 더 가면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호칭의 사회학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호칭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소셜미디어 상에서 서로를 부르는 방식입니다.

우선 ‘~님’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게 가장 무난할 듯합니다. 소셜미디어의 특성상 특정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위계적 관계를 함의하지 않으면서 예의를 갖춰 부를 일이 많으니 ‘~님”만큼 적절한 호칭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 “O박사님”, “O교수님”, “O원장님”, “O변호사님”, “O대표님” 등의 호칭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 호칭은 심심찮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이렇게 불러야 할 때도 있고, 평소에도 이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뿐이죠.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호칭의 경우 대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회사원들, 아이들과 학생들은 대개 이름을 기반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칭의 사회학에는 분명 비대칭적 측면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룬 업적에 기반한 호칭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욕망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이름보다 직책이나 자격으로 불리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그리 건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하여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호출해 봅니다.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예의를 꽉꽉 채운 이 말, 어딘가 불편합니다. 길 묻는 사람은 최대한 예의를 지켜서 말을 건 것일 테니, 불만은 없습니다. 다만, 종종 들려오는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소화가 되질 않네요. 저는 사장은 아니고, 사장님은 더욱 아니며. 행여 사장이라고 해도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죠.

그냥 “실례지만 길을 좀 여쭈어도 될까요?”는 어떨까요? “사장님, 길 좀 여쭐게요”와는 달리 상대를 부르는 단어는 없습니다만 길을 묻는 기능은 충분히 수행하니까요. “아저씨”나 “학생” 혹은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상대가 ‘고통받을’ 이유도 없구요. (경험상 이 ‘고통’은 미혼 여성들이 “아줌마”로 불렸을 때 극대화되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한국사회에서 심심찮게 쓰이는 현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짧은 친절의 순간에도 “사장님”이 끼어드는 일은 좀 안타깝네요.

#삶을위한리터러시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