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이기 vs. 마주보기

흔히 “명사”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들 하지만, 옳지 않은 설명이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봐도 “나무”는 세상의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나무”라고 불리는 개념(concept)에 조응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명사는 일종의 ‘집합명사’다. “나무”는 내 집앞 화단의 아담한 사과나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를 가리킨다. 참나무, 뽕나무, 자작나무 등에 속하는 모든 개체를 통틀어 ‘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나무’는 세계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체계 속에 개념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언어의 유용함과 위험이 동시에 드러난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는 단지 세상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분류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를 배울 때 ‘나무’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되듯, /자유/를 배울 때 ‘자유’에 속하는 것을 분류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말은 우리의 세계를, 감정을, 의견을, 고통을 갈라친다. 세계의 어떤 부분을 떼어내어 자기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다.

갈수록 개념만 계속 집어삼키는 공부가 두렵다. 더 자세히 분류하고 갈라치는 법을 배우다가 세계와 대면하는 법을 잃어버릴까 무섭다. 구획하는 법을 배운답시고 마주보는 법을 잃어/잊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세계와 대면할 수 없다. 단지 한 인간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을 뿐. 그래서 대면(對面) 아닌가. 명명(命名)이 아닌 마주봄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욱 절실한 시절이다.

말장난과 팩트 사이에 과학의 발전이 있다

Posted by on Apr 18,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I am so poor I can’t even pay attention.”이라는 유머가 있다. Poor와 pay라는 단어를 병치시키면서 돈이 전혀 필요없는 attention을 목적어로 삼은 말장난(pun)으로, 주의를 지불(집중)하지도(pay attention) 못할 만큼 가난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인지과학은 이 유머가 사실이 될 수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빈곤이 뇌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하고도 심각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때로 속담이나 말장난이 과학의 발전을 통해 사실이 되기도 한다. 더이상 웃을 수만은 없는!

http://www.newsweek.com/2016/09/02/how-poverty-affects-brains-493239.html

행복한 사전

요즘 Merriam-Webster 사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Kory Stamper의 책 <Word by Word: The Secret Life of Dictionaries>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가 마이너스가 되는 직종이래나 뭐라나. Oxford 영어사전 이야기를 다룬 <교수와 광인>, <The meaning of everything>이나 Roget 유의어 사전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The Man Who Made Lists> 같은 책을 가지고 사전학 수업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덤으로 영화 <행복한 사전>도 함께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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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짝과 함께 <행복한 사전>을 보았다. 여러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받았는데, 가장 먼저 보자고 한 건 짝이었다. 그냥 저 동네에서 일어나는 꽤나 감동적인 픽션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 건 직업 때문이었을까? (짝은 책을 만들고 나는 언어학을 공부한다.)

‘사전’하면 단어와 뜻풀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종이사전을 열면 단어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고, 단어마다 n개의 의미가 정리되어 나온다. 하지만 이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요 유구한 세월 끝에 달린 찰나다. 영화가 잘 보여주듯 사전을 만드는 것은 복잡다단한 일이다.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단어와 의미를 일일히 기록해야 한다면 그 수고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책으로서의 사전은 시쳇말로 ‘역대급 노가다’가 만들어 낸 거대 구조물의 표면일 뿐이다.

하지만 사전작업은 철학이 반드시 필요한 노가다다. 사전의 방향을 정하고 표제어를 고르는 일이 시대의 윤곽을 그려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한가? (직업적으로 선입견에 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새로운 사전 편찬의 첫걸음은 원칙에 따라 더할 단어들과 뺄 단어, 그리고 남겨둘 단어들을 고르는 일이다. 먼저 떠나야 할 단어와 남겨둘 단어, 그리고 새로 맞이해야 할 단어들로 새로운 사전이 채워지면서 지난 사전들의 시대와 새로운 사전이 열어젖힐 시대 사이의 세계가 윤곽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표제어의 선정 자체만으로도 역사와 시대를 구획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표제어 선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후 더 큰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분류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를 하나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 두 개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부터 엄청난 골칫거리다. 유의어와 반의어를 정의하고, 용례를 설명하는 데까지 이르면 해야 할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이뿐이 아니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장기간의 작업에서 특정 단어의 의미 분류에 적용한 원칙을 모든 단어에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각각의 단어에 알맞는 예문을 확보하고 분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사전 작업은 그야말로 산너머 산이다.

사전을 만드는 사전 편찬자는 바보가 될 운명이다. 사전이 출판되는 순간 많은 단어들의 의미와 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A라고 정의했던 단어는 B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고, C라는 단어는 유행에서 사라지고 없다. D라는 단어은 그 뉘앙스가 180도 바뀌어 있고, E라는 단어에는 정치색이 너무 많이 들어가 버렸다. F를 사용하면 꼰대스럽고, G를 사용하면 왠지 잘난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단어를 모으고 정의와 예시를 써내려갈 때는 안그랬는데 말이다. ㅠㅠ

그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사전을 만든다고 해도 표제어 중 상당수가 화석화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세월을 막을 수 없기에 단어들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간다. 사전은 이렇게 삶과 죽음, 성장과 퇴화, 변심과 배반의 모습이 모두 들어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사전을 만드는 것은 인생과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사전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데 <나>라는 사전을 채울 단어와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내가 아닌 세계와 타인에게서 온다. 세상과 사람들에서 배운 것들로 <나>라는 사전을 채워가고, 의미를 써내려간다. 사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소통이다.

하지만 늘 베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 멋대로 단어를 만들 수는 없지만 <나>라는 사전에 등재할 표제어를 고를 권한은 나에게 있다. 그 표제어에 가장 알맞는 예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직접 예문을 써내려 갈수도 있다!

사전이 언제나 미완성이듯 나도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지금 내 안에는 새로운 생각과 죽어가는 생각, 오랜 시간 나의 일부로 살아온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 지지리 못났지만 내가 살아온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는 사전이 바로 <나>다.

우리 각자가 사전이라면, 당신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조금 다를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들어있는 단어 중에서 내 마음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으리라. 당신이라는 사전에서는 ‘돈’이 스무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 밝은 단어이지만, 나라는 사전에서는 두어 가지 뜻을 지닌 어두운 단어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는 사전에 등재된 수많은 단어들이 내 사전에서는 단 하나의 추상어로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우린 참 많이 다른 사전이지만 몇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나라는 사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이라는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서로를 정의하고 서로에 의해 정의당하는 일이며, 그 와중에 이해와 오해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기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때로는 잘 정의된 단어로 나 자신을 빼곡히 채우는 것보다 빈 페이지들을 넉넉히 남겨두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2014.4.10.

‘극과 극은 통한다’

Posted by on Apr 4,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는데 정치의 영역에서는 (극)좌파 인사가 우파, 그 중에서도 극우 정치인으로 변신했을 때 종종 등장한다. 이 말의 매력은 (1) 직관적이며 (‘극’이랑 ‘극’ – 결국 같은 ‘극’이잖아?) (2) 명확한 예시를 찾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전에 골수 운동권 OOO, 지금은 XX당 최고위원이잖아?).

하지만 과연 ‘극과 극은 통한다’는 명제가 통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답은 모르겠다. 포괄적 정치인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이들의 정치성향 좌표를 시대별로 추적한 자료를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직관으로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은 과학적 데이터라기 보다는 인상/인물비평에 가깝다. 많은 정치인들의 성향은 조금씩 바뀌지만 극에서 극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은 확증편향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저 진술에 맞는 데이터가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달까. 강력한 힘을 지닌 예시 몇 개가 모집단에 대한 판단을 결정하는 상황 말이다.

지난 미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두 후보를 같은 급으로 매도했던 기사들이 떠오른다. 이 둘은 같은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고, 이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이 효력을 갖는 이유는 극좌와 극우가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열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인물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경우 ‘극과 극이 통한다’는 사상적 좌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관련된다. 즉, 상이한 정치세력 사이의 관계가 아닌 개개인의 품성에 대한 진술에 가깝다.

교육개혁의 이유

Posted by on Apr 3,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교육개혁 없이 미래 없다”라는 오랜 격언(?)을 들으면 ‘누군가에게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미래를 걱정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 덕에 그 어떤 선택지도 없이 현재를 통째로 희생해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건 아닌가. 미루기야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사회가 미룬 숙제 덕에 형편없는 정책들이 쏟아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미래세대’, 아니, 여기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금세대’에게 돌아간다. 미래를 위해, 혹은 ‘4차산업혁명’ 때문에 교육개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함께 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감수성의 정치

Posted by on Apr 3,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감수성’을 계급과 젠더, 생태 이슈의 중심에 놓는 일은 위험천만하지만, 감수성의 영역이 제도의 틀을 넘어선 아비투스의 문제이며 일상을 지배하려는 권력들의 전쟁터라는 사실을 놓쳐서도 안된다. 순간 순간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어떤 사진을 찍고 포스팅하는지, 어떤 가사와 몸짓에 열광하는지, 어떤 ‘짤’이 순식간에 퍼지는지, 어떤 이미지에 가슴이 떨리는지, 어떤 용어들이 마음을 어지럽히는지. 결국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혐오하게 되는지는 감수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오감의 작동방식과 정보에 대한 태도를 구획하는 감수성의 권력은 은밀한 만큼 강력하다. 계급, 젠더, 생태 이슈들에 대한 시민의 각성과 성장은 감수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말’ 단상

Posted by on Mar 22,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우리말 진짜 잘하시네요.” vs. 언어의 소유권 (ownership of language)

한 영국인이 언급한 ‘우리’의 ‘기분나쁜’ 용례다. 오랜 한국 생활로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 영국인은 때때로 이 말을 듣는다. “어? 우리말 진짜 잘하시네요.”

저 말을 하는 입장에서 “우리말”은 “한국어”와 같다. 하지만 듣는이의 입장에서 “한국어”와 “우리말”이 같을 리 없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본다. 어쩌다가 영어가 술술 나왔을 때 영국인이 내게 “You speak our language very well.”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영어가 왜 니꺼야?’까지 미치진 않더라도, 썩 기분 좋은 칭찬은 아닐 듯하다.

중요한 건 저 영국인이 한국어의 ‘우리’ 사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말”이란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긴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어의 ‘우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우리”라고 말하는 순간 “너희”가 생기고, “우리말”이라고 하는 순간 “너희말은 아닌 말”이 ‘태어난다’. ‘우리’라는 표현에 대한 반응은 숙고를 거치지 않은 날것이다.

“우리말”이라는 표현에는 언어의 소유권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다. 말은 누구의 것인가? 한국어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의 것인가? 영어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의 국적을 가진 이들의 것인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소유권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셈이 된다. 네이티브 스피커가 그 언어의 주인이라는 관점은 과연 적법한가?

그 영국인은 우리은행에는 안간다고 했다. 이름을 My bank 정도로 고쳐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식 억양의 좋은 점(?)

내 영어에는 한국어 악센트가 짙게 배어 있다. 중학교 입학 직전 영어를 처음 접했고 중고등학교 내내 영어를 글로 배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테이프 속 낯선 외국인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 대해 가졌던 반감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돌아보면 ‘열심히 따라했어도 한국 억양을 없애진 못했을텐데’라는 생각과 ‘내 일 할 만큼 하면 됐지’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소위 ‘국내파’였지만 영어에 상당한 소질을 보였던 학생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어에 재미를 붙여 꾸준히 공부했고, 영어로 된 책을 스스로 찾아가며 읽었다. 주변 사람들 눈에도 빼어난 언어습득 능력이었다. 그의 영어사랑은 부모님마저 감동시켰고, 중학교 어느 여름 방학에 한 미국 ‘명문대’의 영어캠프에 갈 기회까지 얻었다.

수업이 시작된 지 며칠, 한 교수가 영어공부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을 풀어주려 개별 면담을 진행하였다. 교수는 영어공부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을 물었고 학생은 주저없이 ‘한국식 억양이요!’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깜짝 놀라며 “너의 발음을 명료하고 알아듣기 쉬워. 한국어 억양이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미미할 뿐더러 소통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아. 오히려 너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강점으로 생각될 정도인데?”라고 답했다.

아 어떤 게 맞는 길일까. 고민을 풀기 위해 상담을 신청했으나 학생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후 발음에 대한 고민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영어공부의 큰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의사소통의 민족지학 전문가인 사빌-트로이케에 따르면 비원어민 화자는 ‘너무 원어민같은’ 발음을 따라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기도 한다.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할 경우 원어민과 같은 언어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며, 맥락에 따라 적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화용(pragmatics)능력을 비롯하여 해당 언어/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높은 기준의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발음만 좋은’ 혹은 ‘발음은 좋은데’라며 타인의 외국어능력을 평가하는 장면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r/의 원활한(?) 발음을 위해 혀 밑둥을 절개하는 야만적 수술 행태는 사라진 듯하지만 여전히 ‘원어민 발음(native pronunciation)’의 신화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언어학습에서 좋은 발음을 위한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스스로 불가능한 기준을 만들고 괴로워하거나,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깔보거나, ‘좋은 발음’ 이면의 부담을 간과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내 영어에 배어든 한국어 억양은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그저 나라는 존재의 일부일 뿐이다.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 나를 키워낸 이들과 소통하며 미세하게 조정된 안면 근육과 구강 구조, 한국어에 최적화된 뇌구조와 기능 등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Posted by on Mar 13,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말 한 마디에서 많은 것들이 읽힌다.

그는 “‘지금 당장’ 검찰에 가서 진실을 ‘밝히겠다'”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라고 말했다. 법치에 대한 경멸, 행위의 시점에 대한 무감각, 정치적 주체로서의 무책임을 고스란히 드러냄과 동시에, 대놓고 자기편을 향해 불복을 선동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 때문에 탄핵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자신은 결코 파면당할 수 없는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반신반인의 자녀였으므로.

왕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민주주의는 이제 퇴장해야 한다. 비단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회도, 지방의회도 ‘왕족’으로 채워져서는 안된다.

“고스펙 여성 눈 낮춰 결혼”

Posted by on Feb 27,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대책없는 저출산 대책안 中, “고스펙 여성 눈 낮춰 결혼”.

사람을 ‘고/저스펙’으로 나누는 꼬라지도, ‘눈 낮춰’라는 표현도 사라져야 한다. 사실 두 개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등급을 위아래로 나누니 눈도 낮추거나 높일 수 있는 것이니까. 결혼으로 맺어질 단 두 사람의 관계를 위계화할 수 있다면 직업도, 교육도, 학교도, 취미도, 지역도 위계화할 수 있겠지. 그렇게 사회의 모든 영역을 한 줄로 세우는 걸 ‘과학적’이라 착각하겠지.

안타까운 것은 그런 ‘위아래’가 이 사회를 망치고 출산율을 떨어뜨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관련정책을 만든다는 거다. 저출산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결과다. 공략해야 할 원인은 다른 데 있는데 출산율 자체를 문제로 삼는 일 자체가 넌센스란 말이다. 철저하게 시스템적으로 접근해도 모자랄 판에 개개인에게 돌파를 요구하는 정책이야말로 저출산의 근본원인 중 하나다.

정책제안을 한답시고 “Yes you can!”을 외치는 일은 더이상 없었으면 한다. 할 수 없으니 안하는 것이고, 먹고 살기 힘드니까 못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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