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가 몇 가지

1. 그나마 잘 번역된 텍스트라 해서 읽고 있는데 군데군데 계속해서 막힌다. 영어로 읽기 시작하니 이해는 훨씬 나은데 속도가 안습이다. 번역가의 피땀은 많은 이들의 노고를 줄여주고 더 많은 세계를 여행할 시간을 선사한다. 문제는 학술서의 경우 정말 유능한 번역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 (대개의 연구자와 교수들은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2. 특정한 이론체계를 차용해 논문을 쓸 때면 대표적인 구절이나 뼈대만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이론의 핵심을 간파하고 그것을 분석에 녹여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의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거대한 체계를 열 개 쯤 다루는 개론 수업이란 또 얼마나 얄팍한가.

3. 아직 검토중이라고 하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혼자 녹화해서 올리는 게 쉽지 않겠으나 30명 정도의 수업을 실시간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것 보다야 나을 것 같다. 짧지 않은 동영상 강의를 촬영해 본 경험에서 보자면 혼자 잘 떠들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일반 면대면 수업 준비의 2-3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귀차니즘이 발동하는데, 마감이 어찌저찌 해결해 주겠지.

4. 대화에서 상대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말’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황, 혹은 담화의 유형 자체를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말은 언제나 그것보다 훨씬 큰 사회적, 제도적, 정치적 맥락을 환기하며, 말이 펼쳐지면서 말이 처하는 맥락 또한 요동친다.

단어 하나만 바꾸어도 진담이 농담이 되고, 논평이 풍자가 된다. 말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을 때, 살짝 찡그렸을 때, 목소리가 커졌을 때, 유행어를 섞었을 때, 상대가 익숙하지 않은 메타포를 사용했을 때 등등 지극히 작은 말은 순식간에 맥락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바뀐 맥락에서 대화자들의 관계는 달라진다.

5. 우리는 말을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이 실시간으로 지어지는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말은 상대의 귀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상대를 초대한다. 그렇기에 말하는 법은 세계를 창조하고 초대하는 법이다. 우리가 암기에 골몰했던 ‘어휘와 문법’은 그런 세계를 짓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차별과 혐오의 스펙타클을 넘어서

Posted by on Mar 1, 2020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인간은 자신의 안전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 vs 적” 혹은 “Us vs. Them”의 구도를 강화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퍼뜨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터한다.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끝없이 경계하며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피아식별’과 ‘적대적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Us”의 범위를 인류 전체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위 아 더 월드”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교육과 미디어, 문화 전체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다.

이렇게 ‘우리’의 범위를 인류 전체로 확장하는 일은 때로 지루하고 지난하다. 무엇보다 현재의 사회경제체제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 언론 또한 편을 가르고 욕할 대상을 만들어 내야만 ‘기사가 팔린다’. 음모론은 드러나지 않은 적을 만들어 내고, 혐오담론은 ‘선량한 우리’를 해치는 ‘사악한 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며 사람들에게 파고든다. 사람들간의 섞임을 ‘불순물의 침투’와 ‘순수함의 타락’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어떻게 이 난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가르고 혐오하고 저주하는 스펙터클을 막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 필요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다만 요즘 들어 부쩍 그런 분열과 혐오의 행태들이 지독하게 멋없는 거라는 걸 계속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시하고 차별하고 가르고 욕하는 일이 얼마나 스타일 빠지는 일인지,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없어보이는지 말이다.

그에 비해 연대하고 손내미는 사람들의 멋짐을 더 널리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랑하고 차별하지 않는 사람들의 ‘있어 보임’에 대해 더 크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도 가끔은 그런 멋진 행동을 따라하면서 아주 쪼금은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

그런 면에서 “이 길이 광주가 가야할 길”이라는 저 말, 정말 멋짐 터지지 않나? “나눔과 연대의 광주정신으로 대구 경증 확진자들을 광주에서 격리치료하겠다”는 저 선언, ‘우리편 vs 너네편’ 가르는 사람들에 대해 시원하게 한방 먹이지 않나? 위기의 상황 속, 사랑과 연대는 한줄기 빛처럼 찬란하지 않은가?

기사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59092

 

한계는 가벼움이 아니다

언어의 해상도는 사고의 해상도를 넘지 못한다.
사고의 해상도는 경험의 해상도를 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은 동시대 인류 경험의 일부일 뿐이다.
현시대 인류의 경험은 인류가 경험한 역사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무엇보다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에서 먼지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매일 목도하는
쉼없는 언어들의 부딪침은
의미없는가?
이토록 ‘해상도 떨어지는’ 말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은
헛된 몽상일 뿐인가?

나는 이 질문의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때로 언어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기에,
때로 언어는 우리를 드러내는 유일한 정체성이기에,
때로 언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이기에,

언어를 매개로
예술이, 철학이, 과학이,
그 무엇보다
우리의 관계가 변화하기에,

언어는 더 정교해져야 하고,
더 넓어져야 하고,
더 깊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몇 개의 카드로
세상을 다 이해한 듯 소란떨지 않고,
몇 마디 경구로
삶에 달관한 듯 읊조리지 않고,
몇 권의 책으로
다 알았다는 듯 써갈기지 않는 것.

긴 글로도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삶의 진실이 있기에
긴 글을 쓰고 읽어가는 일의 고됨을
기꺼이 받아안는 일.

요약본에
자신의 생각을
송두리째 맡기지 않는 일.

이들이 소중하다 믿는다.

그 어떤 노력을 경주한다 해도
말이 삶을 오롯이 담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아니
‘거대한’이라는 말을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우주라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언어가
한없이 뭉툭하다는 걸 깨달을 때,
고로 나의 언어는 그저
‘한계의 한계’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 설 때
말의 무게를 깨닫게 된다.

한계는 가벼움이 아니다.
한계는 하찮음이 아니다.

언어의 한계는 그 내부를 성찰해야 할
조건이자 명령이다.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에 넣으려다가 넣지 못한 단상을 다시 더듬어/다듬어 남겨놓습니다.

‘국뽕’ 단상

Posted by on Feb 18, 2020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국뽕’이 들어간 표현을 심심찮게 본다. 이 단어가 집어 삼키는 현상의 범위가 넓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예전 같으면 ‘국뽕’을 언급하지 않을 현상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동원되는 것이다.

2. 재미있게 생각하는 연어(collocation; 함께 나올 확률이 높은 단어들)는 ‘국뽕에 취한다’이다. ‘취한다’는 ‘술취하다’와 같은 의미이지만 조금 비틀어 보면 무언가를 소유로 삼는다는 뜻도 있다. 즉, 국뽕은 ‘취하게 하는(intoxicate)’ 것이지만 ‘취하는(take)’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취한다’는 표현으로 장난스럽게 ‘책임을 회피’하지만 그 이면의 의도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3. 돌아보면 언어가 포섭하는 세계가 멋없이 확장될 때 그 언어와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나만 알고 있던 밴드가 인기를 끌면 마음이 멀어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으려나.

4. ‘팬질’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잠깐 아카펠라 그룹인 <Take 6>의 동호회를 만들어 몇 번 음악감상 모임을 갖기도 하고 라이브 공연을 함께 관람한 적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푹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참 재미없게 살았다.

5. 그러고 보니 사진도, 음악도, 글도 온전히 나를 사로잡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성향이 못마땅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떻게 하나 싶은 마음이다. 한편으로는 하나에 홀라당 마음을 빼앗기지 못했기에 이것 저것을 잘 조립해서 가르치는 일을 택한 것 아닐까 싶고.

(이거 봐. 국뽕 이야기하려다가 거기에 빠지지 못하고 딴 소리 하면서 끝나는 거. 글도 엄청 짧은데 말이지.)

작은 꿈

제2언어 리터러시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학술적 글쓰기, 특히 논문쓰기에 관심을 갖고 강의를 열고 있습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대학에서마저 체계적으로 글쓰기를 배울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몇해 전 한 교수님의 도움으로 경영학과 대학원에서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시적으로 열리는 강의여서 2년 만에 폐강이 되었죠. 반응은 나쁘지 않았으나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속할 힘을 잃었던 것입니다.

사실 대학원에서 영어논문쓰기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저와 같은 리터러시 연구자와 해당 분야의 내용전문가가 협업하여 커리큘럼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제가 영어논문쓰기에 대한 개념적 틀을 제공하고 다양한 전략을 나누긴 하지만 개별 학문분야에 속한 학술지나 논문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해당 분야를 꿰뚫고 있는 연구자와의 협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이같은 협업의 토대가 제공되긴 커녕 학술적 글쓰기 수업도 개설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물론 개별 수업에서 글쓰기가 핵심활동으로 자리잡는다면 영어글쓰기를 따로 가르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부, 대학원 과정은 내용의 전달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쓰기를 통해 지식을 심화하고 재조직하는 일은 뒷전입니다. 영어논문쓰기도 엄청나게 강조는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주질 않죠. ‘읽고쓰기 각자도생’이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현실입니다.

몇해 전부터 내용 전문가와의 협업을 통해 탄탄한 글쓰기 수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새로운 강의 개설은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커리큘럼 개발을 위한 시간과 돈이 필요하고 강의개설 및 운영권이 필요합니다. 이들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책임자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없어 대학 외부에서 강의를 열 수밖에 없더군요. 이것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대학의 리터러시 교육 개혁이라는 대의를 생각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느낌입니다.

꼭 영어로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학술장은 과도하게 ‘국제화’ 담론을 퍼뜨려 왔고 영어논문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많은 분야에서 KCI 등재지는 ‘2류 저널’ 취급을 받죠. 자기 존재를 비하하는 현실.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저 또한 제 학술활동의 많은 부분을 한국어로 진행합니다. 대중과의 소통에서는 한국어 글쓰기가 중심이고요. 학문이 사회에 뿌리박고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모국어 리터러시가 탄탄해야 합니다. (한국어 잘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영어 글쓰기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에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우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학교육의 본분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알아서 여기까지 왔으니 너도 혼자 해봐’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의미있는 일들을 해낼 시간과 에너지를 박탈하는 일입니다. 도구를 주고 집을 짓게 해야지, 도구까지 만들어가며 집을 지으라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어제는 한 대학 단과대학 랩의 초청으로 두 시간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 디렉터이신 교수님이 오셔서 마음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오늘 말씀하신 걸 25년 전에 알았으면 제가 공부하고 논문쓰는 게 정말 달라졌을텐데요. 제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너무 잘 정리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일 뿐입니다. 대단한 비법이 담겨있지도 않죠. 하지만 간혹 연구자로서의 삶에 진입하는 단계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또 다른 협업을 통해 더 나은 글쓰기 강의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꿈꾸다 보면 언젠간 되겠죠. :)

#영어로논문쓰기 #삶을위한리터러시

내면의 삶에 대한 권리로서의 책읽기

1. 읽기는 내면의 삶(the inner life)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주를 팽창시킨다. 물리적 세계와는 별도로 상상과 기억의 공간을 생성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쓰기를 매개로 공동의 기억(collective memory)이 된다. 심리적 공간이 사회문화적, 담론적 공간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2. 읽기쓰기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는 ‘문자중심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 것이다. 문자는 문자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춤은 춤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세계를 생성하고 연결한다.

3.그럼에도 구텐베르그 은하계 이후 인류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은 압도적으로 문자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내면의 삶과 공동의 기억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어온 일 말이다. 근현대 문명을 모두 긍정할 수는 없으나, 문명의 성장에 있어 문자의 비중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4. 독서교육을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 짓기’라는 관점으로 보는 게 적절하리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지식과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엄청난 양을 습득하지 않아도 내면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갈 수 있다는 말, 넉넉한 영혼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5. 먹고사니즘은 시간을 강탈한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일에 몸은 지쳐간다. 내면의 삶을 가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시대는 크고작은 혁명의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독서가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책을 집어들고 내면의 삶을 키워가는 일을 연례행사로 만드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리는 없다.

내면의 삶에 대한 권리로서의 책읽기를 고민할 때가 아닐까 싶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학술매체로서의 텍스트 vs. 영상

1. 학술매체로서의 텍스트의 위상이 쉽게 추락할 것 같지는 않다. 영상과 이미지의 시대가 된다고 해도 지식과 과학의 언어가 시각매체로 대체될 시기는 한참 멀었다. (얼마나 멀었는지는 나도 모름) 아래에서 ‘인용’을 키워드로 삼아 위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학술글쓰기를 배울 때 인용(citation)은 ‘양념’처럼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문장쓰기, 문단쓰기, 문법 및 구두점 용례, 내용구조 등을 두루 배우고 나서 마지막에 ‘이것도 알면 좋다’는 식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3. 하지만 인용은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중 핵심이다. 학술글쓰기는 자기 경험에 기반해 논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연구와 주장에 기반해 자기 논지를 ‘조립’하는 작업이다. 내러티브와는 다르게 학문 공동체가 쌓아온 자산이 글의 바탕이 된다. 동료/선배 학자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한짝 올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인용(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텍스트와 영상의 사용패턴은 사뭇 다르다. 학술텍스트는 밑줄그어지고, 요약되고, 재진술(paraphrase)된다. 이것은 차곡차곡 쌓이고 정제되어 나의 글에 새로운 스토리로 자리잡는다. 무엇보다 텍스트는 선형적(linear)이다. 논문 50개를 요약하여 하나의 글로 만든다고 해도 최종 산물은 선형적 텍스트다.

5. 텍스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책을 꼭 끝까지 읽어야 된다거나 완벽하게 읽어야 된다는 고집하지는 않는다. 책의 서문만 볼 수도 있고, 목차 중에서 흥미로운 장만 읽을 수도 있다. 학술서의 색인을 펼쳐서 흥미로운 키워드를 골라서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공부 방향에 따라 특정한 주제, 흐름을 가지고 책을 읽어가면서 지식을 쌓고, 생각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일종의 담론 공간(discursive space)을 만들어낸다.

6. 이런 면에서 텍스트는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에 매우 적합한 매체다.

7. 하지만 영상의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는 여전히 소수 ‘덕후’들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상편집 기술 습득의 문제라기 보다는 영상매체를 대하는 사람들의 아비투스에 기인한다.

8. 내가 바라는 주제를 가지고 수십 개의 영상에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 다시 보는 경우가 있을까? 영상 프로듀서가 아니라면 거의 하지 않을 행동이다. 영상을 영상으로 요약하거나, 영상의 특정 부분을 ‘재진술(paraphrase)’하는 영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9. 이러한 이유로 영상을 재조립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은 부족하다. 넷플릭스에서 ‘감동받았던 장면들에 북마크를 하고, 이를 모아서 30분짜리 영상으로 만들기’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1) 그렇게 영상을 대하는 사람이 없으니 (2)그렇게 할 수 있는 기능을 굳이 제공하지 않는다. (1)과 (2)는 동전의 양면이 되어서 ‘다시 볼 거면 처음부터 보거나, 시간을 조정해서 찾아봐’라는 명령으로 돌아온다.

10. 또한 영상을 모아 새로운 영상을 만들었을 때 그 영상이 부드럽게(seamlessly) 이어지기 매우 힘들다. 그런 이유로 여러 영상 소스를 기막히게 편집한 몇몇 영상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리믹스’는 수백년 간 텍스트로 이루어져 왔던 관행이다.

11. 학술논문의 ‘리믹스’를 보면서 수십 개의 영상 소스를 기막히게 엮어낸 동영상을 볼 때 만큼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가? 사실 학술적 글쓰기가 겨냥해야 할 지점 중 하나는 ‘모으고-엮고-재조립하고-변형하고-재구조화해서-나온-글’에 대한 경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2. 약술한 요인들로 인해 종합, 이론화, 주석, 추상화, 재진술, 재구조화 등을 주요한 과업으로 삼는 학술 커뮤니케이션에서 영상이 텍스트를 쉽게 대체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13. 과학과 학술담론은 권력이다. ‘텍스트의 시대가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권력에 대한 의도적 간과를 낳는다. 영상의 외연이 넓어지고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쉽게 텍스트의 몰락을 예견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초안마무리중

리터러시의 위기, ‘배운 놈들이 더한다’

리터러시의 위기를 그저 개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안이하고도 위험하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묻히는 상황에 터한다. 한 사회가 자신의 이슈를 발굴해 내고 이를 사회문화적인 공론장으로, 나아가 제도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가가 리터러시의 척도인 것이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말해야 할 것에 침묵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말할 수 있는 자’에게서 온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해력을 갖춘’ 이들, ‘말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이들의 것이다. 빈곤이 가지지 못한 자의 책임이 아니듯 비문해는 문해력 습득에 실패한 자의 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배운 놈들이 더한다’는 리터러시를 철저히 사유화한 이들에 대한 이 사회의 경고일지 모른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의미생산의 주체 키우기

약 10년 전.
학술 영작문을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이런 활동을 했다.

“이 디지털 카메라로
이곳을 이렇게 또 저렇게 찍어볼게요.
같은 세계라도
다른 각도, 거리를 확보하니
다른 빛깔, 다른 느낌의 사진이 되죠.
물론 여기에서
카메라 모드를 바꿀 수도 있어요.
자동으로 할 수도 있지만
셔터스피드 우선 모드,
노출 우선 모드,
풀 매뉴얼 모드 등을 사용할 수 있죠.

언어는 어떨까요?
한 가지 사건을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이 사진을 보세요.
여러분을 찍은 건 아니지만
어제 밤 피아노를 치던 자기 자신이라고
상상해 보죠.
이걸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까요?
어떤 어휘와 어떤 문법을 동원해서
의미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사진을 통해 세계를 포착하는 일과
언어를 통해 세상을 표현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를까요?

사진을 찍을 때는
어떤 것들을 조절해서
어떤 효과를 얻어낼까요?
글을 쓴다면
어떤 요소들을 조정해서
어떤 의미를 빚어낼까요?
그건 사람들에게
어떤 감각과 생각을 안겨줄까요?

사진과 언어만은 아니죠.
음악도, 미술도, 건축도, 안무도
다양한 요소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체험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를 만드는 주체로서
어떤 역량을 갖추어야 할까요?

여러분에게는 이미
의미를 만들어 내는 기예가 있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죠.
그것을 더 갈고 닦아서
쓸모있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지요.

글쓰기 수업이지만
이번 주에는 이렇게
‘의미생산자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한 문법과 어휘에 대한 걱정은
조금 접어놓고 말이죠.”

돌아보면
초기의 수업에서
더 과감한 시도들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은
‘리터러시’라고 묶을 수 있는
광의의 문해력을 키우는 데
디딤돌이 되는 활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끔은 나 자신이
‘영어선생’으로 규정되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물론 영어를 중심으로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가르치지만
결국 추구해야 할 것은
다양한 미디어를 소화하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의미-디자이너(the designer of meaning) 나아가,
의미생산 주체(the meaning-making subject)가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니 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풋의 양이 아니다. 경험의 깊이다.

영어학습의 초특급 키워드 ‘인풋’. <단단한 영어공부>에서도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무조건 많은 인풋’이 능사는 아니다. 최근에 학부모들을 만나면서 반복하는 메시지는 ‘인풋의 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영어를 좋아할 수 있는 계기, 언어의 숲으로 ‘빨려들어가게’ 하는 실마리를 찾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계기가 영어의 발음일 수 있다. 단어의 발음이 예뻐서, 누군가의 억양이 매력적이어서 영어가 좋아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영화의 배역(e.g. 해리포터)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좋아하는 유튜버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노래나 챈트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림책의 내용일 수 있다. 미국 미드웨스트 지역의 백인 중산층 영어가 아니라 맨체스터의 노동자들의 ‘투박한’ 발음에 끌릴 수도 있다. 심지어 속어와 욕설이 영어로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간의 영어학습 담론에서는 ‘양(quantity)’이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내용과 방법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노출되느냐였다. 이렇게 ‘무조건 많이’로 대표되는 인풋 담론은 개개인의 영어에 대한 욕망(desire)를 간과했다. 인지적인 측면들을 과하게 강조하면서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면, 지각에 관련된(perceptual) 특성들을 무시한 것이다.

우리는 외국어를 배우면서 그 언어의 정보를 처리(process)하지만, 그와 함께 특정한 소리나 단어에 애착을 갖고, 누군가의 발음에 매료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변화시킨다. 언어학습은 지식암기가 아닌 전인적 발달과 변화과정이다.

물론 현장의 영어교수 또한 변하고 있다. 학습자들의 감정과 정체성을 고려하는 시도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문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차가운 머리를 갖고 언어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과 소통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켜 간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학습에서 정서와 지각, 정체성과 욕망의 문제는 주변이 아닌 중심에 놓여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풋의 양이 아니라 경험의 깊이인 것이다.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