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s of the Mind

Posted by on Jun 7, 2019 in 강의노트, 링크, 사회문화이론, 집필 | No Comments

대표적인 비고츠키 연구자 중 하나인 James Wertsch의 책 <Voices of the Mind>가 박동섭 선생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언급한 인용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 중 일부를 옮겨놓는다.”

“이 책은 인간의 ‘마인드(정신 활동)’가 도구나 타인,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발생해 변화하는지를 밝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흐친의 ‘목소리’와 ‘대화’, ‘발화’ 개념을 핵심 보조선으로 채택해 ‘매개된 행위(mediated action)’라는 ‘새로운 분석단위’를 제시한다. 이 분석단위를 통해 볼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매개하는 ‘도구에 매개된 행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언어에 매개된 행위’가 인간의 정신기능을 밝히는 핵심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조건과 도구에 좌우되지 않고 머리만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주체’가 아니다. 즉, 인간의 행위는 도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고, 외계(조건), 도구와 일체되어 행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실제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도구에 매개된 행위라는 것의 의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 책은 인간의 ‘마인드’를 닫힌 자기완결적 혹은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열려 있고 불완전한, 나아가서 무언가를 항상 지향하는 행위(action)의 산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워치는 ‘행위’와 ‘목소리’, 기호적 매개, 그리고 매개된 행위의 문화적, 제도적, 역사적 상황을 설명해 냄으로써, 비고츠키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미래의 심리학 이론과 실천의 확장을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비고츠키 아이디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바흐친의 대화론을 도입해 언어적 기호 매개의 ‘정치화(精緻化)’를 설명해 낸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55417

#비고츠키 #사회문화이론 #Wertsch

비고츠키의 마음관

“시계의 발명 이래 우리는 정신을 일종의 기계에 비유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리고 현재의 심리학에서는 컴퓨터와 같은 구조를 갖추고 움직이는 정신을 ‘실재시’한다. 심리학에서 채용하는 컴퓨터의 메타포는 ‘내부’를 반드시 상정한다. 정신은 피부 혹은 두개골 등을 경계로 상자 속에 갇혀 있는 어떤 실체로 상정되고 그 뚜껑을 열었을 때 시계 혹은 컴퓨터의 본질이 보인다는 메타포다.

이러한 유비는 ‘무엇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상자’같은 것으로 마음을 영상화, 공간화시키는 태도다. 이것은 심리학자들뿐만 아니라 일상인들이 마음에 대해 갖는 기초적인 상상력을 지배한다. 그러나 김영민(1998)이 지적하고 있듯이 마음을 상자같이 꽉 막혀진 어떤 것(something)으로 보는 소위 ‘명사적 사고(Nounal mode of thinking)’*는 실험과 검증을 거쳐 밝혀 낸 생리학적 탐구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유비 관계가 빚은 시각적 오류에 가깝다.

비고츠키 또한 어떤 닫혀 있는 상자로서 ‘마음’을 그리지 않는다. 비고츠키의 도구를 포함하는 마음(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도구를 상정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비고츠키의 마음관이다)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외부 혹은 표면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피부를 경계로 닫힌 공간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실재의 도구에 의한 자기 자신의 제어라는행위의 성질을 빗댄 것이다. 도구는 자연으로 향한 ‘외적 활동의 수단’이다. 이에 비해 심리적 도구, 즉 ‘기호’는 ‘인간 자신의 제어를 위한 필수적 수단’이다(Vygotsky, 1987:130)”

*’Nounal’ 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언어학에서는 ‘nominal’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박동섭, <레프 비고츠키>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6). 50-51쪽.

#비고츠키 #사회문화이론

비고츠키와 장애

Posted by on Jun 3,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한 세기 전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아래 기사의 제목과 같은 맥락의 주장을 펼쳤다. 그는 장애를 한 개인 안에 있는 결핍으로 보지 않고 개인과 사회문화적 환경의 상호작용의 문제로 보았다. 나아가 장애를 하나의 정적인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발달의 한 단계로 설정하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은 단지 장애인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이며 사회가 인간을 대하는 수준의 문제가 된다. 잘못 설계된 도시는 일부의 사람들만을 환영한다. 그 결과는 철저한 배제와 비용의 전가다.

‘비장애인’은 ‘건강하고 이상이 없기’ 때문에 비장애인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물리적 환경이 그의 몸과 상호작용하기 용이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비장애인’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비장애인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이를 ‘정상’이라고 호명하는 것만큼 비정상적인 것이 있을까.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명을 건설하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황당할 것이냐 말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그런 일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정상’이 ‘정상’을 구축하고 ‘비정상’을 배제하고 축출하며 차별하는 야만은 엄연히 우리 곁에 있다.

http://www.ziksir.com/ziksir/view/8248?fbclid=IwAR3vvGIxQEdWy-BLq_J9vvzqZM7pvKJZkBpresahR6do48OZ4EXrx-UKRm4

댓글분석의 한계?

나도 주로 언어를 보는 일을 하지만, 댓글분석 등의 궁극적인 약점은 사람마다 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쓴다는 가정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질문해 보자. 내가 쓰는 A라는 단어는 당신이 쓰는 A라는 단어와 같은가? 미국 민주당원의 ‘자유’는 공화당원의 ‘자유’와 같은가? 50대가 정치권에 대해 사용하는 욕설 B는 10대가 학교를 향해 내뱉는 욕설 B와 같은가? 자가설문조사가 주체와 말 사이의 정합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처럼 키워드로 특정 집단을 성격짓는 일은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컨텍스트를 거세할 위험을 갖는다. 분명 언어분석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맥락화하는 작업이 없이는 섣부른 결론에 다다르기 십상이다. 언어는 존재의 주요한 부분이지만 부분일 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선생과 학생

선생은 가르치는 법을 배우고
학생은 배우는 법을 배운다.
우린 모두 배운다.

선생은 배우는 법을 가르치고
학생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가르친다.
우린 모두 가르친다.

교육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고
모두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다.

개인 대 구조?

수업 중에 ‘개인과 구조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많은 학생들의 눈빛은 “왜 그걸 따로따로 생각해”라고 말하고 있더라. 공부라는 것이 스스로 쌓아올린 선입견을 또 다른 공부로 극복해야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는 일이 없는지 더더욱 경계할 일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Translanguaging, Composition, 그리고 영어교육

1. 내가 가장 즐기는 두 활동인 글쓰기와 음악 모두 composi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실 이 두 영역 뿐 아니라 미술 및 사진을 비롯한 예술 영역에서 composition이라는 말이 두루 쓰인다.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보다 복잡한 구조체를 만드는 활동을 통틀어 composi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2. 단어건 음표건 컷이건 공간이건  요소들이 함께 배치되는 데서 패턴이 생겨나고 패턴이 반복되고 중첩, 변주되면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추상적인 수준에서 글쓰기를 비롯한 예술창작 전반을 관통하는 단어가 composition 아닌가 싶다. (이 의미에 상응하는 우리말이 있을까? ‘구성’이라고 번역되긴 하지만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3. 일상에서 작문이라고 하면 대개 한국어 작문을 가리킨다. 영어로 쓸 경우는 영작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용례들의 특징은 작문행위가 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서는 하나의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4. 하지만 ‘구성composition’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글이 하나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협소하기 짝이 없다. 당장 시내의 간판들과 광고들만 봐도 다양한 언어가 어울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은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들이 일상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다. 도시의 언어경관은 분명 여러 언어로 구성된다.

5. 인간을 ‘한국어를 쓰는 존재’, ‘영어를 쓰는 존재’ 등의 틀에 가두지 않고 ‘의미를 만드는 존재’로 바라본다면 여러 언어를 섞어 쓰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전혀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겠으나, 특정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구절에 대해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도적인 구성의 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6. 예를 들어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글에 ‘아랫목’과 ‘고구마’, 그리고 ‘할머니’를 한국어로 쓸 수 있다. 필요하다면 각주를 통해 이 세 단어의 의미를 밝히겠지만, 본문에서 이들 단어를 계속해서 고집할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7. 응용언어학 분야에서 다언어를 활용한 담화 구성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 translanguaging 이 부상하고 있다. 언어 사이를 넘나들며 발화나 작문을 구성하는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10여 년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도 뿐 아니라 교육적 활용도 활발히 논의되는 중이다.

8. 한국 영어교육 상황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는 것은 금기다. 가급적 ‘영어로만 사고’해야 하고, 영어로만 말하고 써야 한다. 그래야 영어가 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존재는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섞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으며 수사적 효과 또한 노릴 수 있다. 조금 더 급진적인 시도를 한다면 기계번역의 힘을 빌어 수십개 언어로 시를 쓰거나 ‘팝아트적’ 글쓰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9. 그런 면에서 우리말을 벼려 더욱 견실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혼종성(hybridity)을 실험하려는 시도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10. 생각해 보면 영어야 말로 엄청난 짬뽕언어 아닌가!

#삶을위한리터러시 #translanguaging

지도교수의 퇴임

Posted by on May 2,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Thank you, Jim!

지도교수가 퇴임했다.
한 시대가 저문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그와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유학을 결정하고
사회문화이론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비고츠키의 “Mind in Society”를 읽으면서
지도교수의 글들을 만났다.

SLA Theory Building: “Letting All the Flowers Bloom!”
내가 처음 읽은 그의 글이다.

논문을 읽으며 감탄을 연발했고,
이런 사람과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운좋게 그와 함께 5년을 지냈다.

코넬대에 재직하던 1985년
동료 William Frawley와 함께
“Second language discourse: A Vygotskyan perspective.”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20세기 심리학의 모차르트라 불리는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Lev Vygotsky를
응용언어학계에 소개한 이후
35년 간 사회문화이론을 기반으로
제2언어습득 및 응용언어학 관련 연구를 발표해 왔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응용언어학의 대표 저널인
Applied Linguistics 편집장을 지내고
전미응용언어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최근에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이제 응용언어학에서
비고츠키와 그의 이름을 분리할 수 없게 되었고,
나를 비롯한 많은 후학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전세계 응용언어학/영어교육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도교수로서 또 함께 길을 걷는 동료로서
그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가장 생생한 건 그의 이메일에 담긴 한 마디다.

논문을 반쯤 썼을 때였다.
나머지 반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챕터 하나를 보내며
“마감 안에 끝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돌아보면 지도교수가 안된다 하면
한 학기를 더 다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Sungwoo, we can finish this dissertation together.”

이 짧은 문장이 준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같이 써낼 수 있다”라는 말 한 마디가
엄청난 힘이 되었고,
졸고이지만 논문을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있었다.

“We”라는 대명사 하나가
논문에 허우적거리던 나의 영혼을 구한 것이다!

이후 나는
“I can”의 능력주의를 넘어
“We can”의 세계를 어떻게 열 것인가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퇴임을 한다 해서
많은 이들의 삶에 영감을 주고
하나의 작은 학문을 개척한 그의 자리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교정의 쓸쓸함을
내 마음의 허전함을
막을 길은 없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보냈던
헌사(acknowledgement)를 가져다 놓는다.

시간은 지났지만
이 마음은 그대로이기에.

“I would like to thank Dr. James P. Lantolf for his tireless support for my academic journey. He exquisitely mediated me in climbing the mountain of the dissertation as the most competent sherpa imaginable, formed the strongest foundation for my scholarly thinking, and was the best friend to whom I can come clean of my concerns and inner conflicts throughout the journey. Most of all, he is a truly passionate human being who has cared most about me as a fellow human being. Jim, I feel infinitely blessed that I have been given the opportunity to work with you all these years. I have studied language so many years but cannot find words to express my gratitude to you. Even if I had those words, I know that I would simply not be able to thank you enough. All I can say is that I will walk and work with you throughout my life, remembering your compassionate praxis.”

고마웠어요, 선생님!

더 멋지게 자유롭게
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시길.
앞으로의 생을 힘차게 응원합니다.

무엇보다 건강하세요.

– 서울에서, 못난 제자 성우 드림

비판교육학

Posted by on Mar 25,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문득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하던 시절, 한 후배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공부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사회문화이론과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바로 날아든 한 마디.

“비판교육학이요? 요즘에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별로 친분이 깊지도 않았던 그의 퉁명스런 답은 충격으로 남았다.

딱 맞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느낌이었달까?

“마르크스요? 요즘에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셰익스피어요? 요즘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플라톤이요? 요즘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이후 그도 박사과정에 진학한 걸로 알고 있다. 이제 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프레이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다.
나 또한 여전히 프레이리를 읽는다.
세월이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구식’이라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가 ‘구식’이 되는 건
해당 인물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대와 사상을
온전히 해석하고 받아안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표준화의 환상

Posted by on Feb 11,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시간의 표준화로 모두의 시간이 동일한 속도와 밀도를 지닌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지능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지능을 벨커브(정규분포곡선)로 줄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시험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성취를 한줄로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노동이 공평하고도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화폐로 변환되고 있다는 믿음, 어떤 몸이든 동일한 ‘ROI'(투자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 공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환상은 이러한 표준화-복합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서로 다른 몸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관계와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간의 평등과 지능 및 시험의 공정함, 경제체제의 합리성은 지독한 환상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은 철판이나 콘크리트에게는 옳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아니다. 체구가 크면 더 먹어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발이 크면 신발이 커야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모두가 같은 속도로 배우고 익히고 시험을 쳐야 한다고 믿는가? 인간에게는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을 돌려주어야 할 싸움이 필요할 뿐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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