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화의 환상

Posted by on Feb 11,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시간의 표준화로 모두의 시간이 동일한 속도와 밀도를 지닌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지능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지능을 벨커브(정규분포곡선)로 줄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시험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성취를 한줄로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노동이 공평하고도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화폐로 변환되고 있다는 믿음, 어떤 몸이든 동일한 ‘ROI'(투자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 공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환상은 이러한 표준화-복합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서로 다른 몸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관계와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간의 평등과 지능 및 시험의 공정함, 경제체제의 합리성은 지독한 환상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은 철판이나 콘크리트에게는 옳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아니다. 체구가 크면 더 먹어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발이 크면 신발이 커야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모두가 같은 속도로 배우고 익히고 시험을 쳐야 한다고 믿는가? 인간에게는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을 돌려주어야 할 싸움이 필요할 뿐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뇌파, 언어, 얽힘

뇌파를 언어로 바꾸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직 해상도가 그리 높진 않지만 뇌의 신호만으로 ‘화자’가 의도한 언어를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고 신기한 세상이다.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화자’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말하고 들을 때, 텍스트를 읽거나 쓸 때 우리의 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궁금하다. 지금 짤막한 이 글을 읽은 페친의 뇌는 글을 읽기 전과 후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별 시답지 않은 글이니 별반 차이가 없을까? 누군가의 뇌는 변화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까? 사람마다 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언어 혹은 내용이 존재할까?

‘뭐 이딴 글이 있어’라고 생각하건 ‘진짜 멋진 글이다’라고 생각하건 우리의 뇌는 ‘어쩔 수 없이’ 반응한다. 나의 뇌 속에서 생겨난 움직임이 언어를 통해 누군가의 뇌를 움직이게 하고 그것이 일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신비롭고 괴이하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 그리고 상상력

적어도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은 어학연수와 같은 해외 체류를 영어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꼽았다. 해외에서의 생활이 영어공부의 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인풋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라고 간단한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흔히들 말하는 몰입(immersion)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인풋의 양보다 더욱 핵심적인 요인들이 나타난다. 나는 이것을 두 가지로 본다.

먼저 “쓸모에 대한 감각”이다. 내가 배우고 있는 말이 세상에서 진짜 쓰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쓸모”에 대한 감각은 쉬이 생기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 본 경험이 있다면 입시와 내신이라는 목표 외에 학생들에게 영어의 쓸모를 설명해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아니 이것은 설명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안다. 연애나 배신같이 체험되지 않고는 전달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처럼 말이다.

다음으로는 “만남의 경험”이다. 이것은 쓸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 다르다. 나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다른 언어가 되어 돌아오는 경험.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경험. 이것을 목격하고 느끼는 것이 “만남”이다. 말을 건네기 전의 설렘과 말이 오가는 과정의 떨림과 말이 끝나고 난 다음의 여운을 겪는 것이다.

만남은 언어의 도구성을 넘는 경험이다. 언어가 사람을 울고 웃게 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도구성을 뛰어 넘어 존재를 감화시키는 언어를 진짜로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에 가지 않고도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을 키워줄 수 있을까? 외국어로서 영어(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백’하는 언어학습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물론 해외에서의 경험을 복제할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변화를 꽤하려면 언어학습에서 급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영어교육은 여전히 인풋이라는 ‘특급 키워드’에 머물러 있다. 얼마나 많은 언어자료가 투입되어야 하는가. 이 자료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이 패러다임 말이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에 더 많은 인풋을 부르짖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레프 비고츠키 수업 & 공부 이야기

Posted by on Jan 22,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수업자료, 집필 | No Comments

5년 만에 비고츠키 관련 수업을 맡았다. 영어교사교육의 관점에서 본 비고츠키를 다룬다.

수업준비를 하기 위해 교재를 정했다. 교육대학원 수업이어서 Karen Johnson 선생님 책을 중심으로 진행하려고 한다.

이와 함께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Yuriy V. Karpov의 책 두 권과 Merill Swain 선생님 등이 쓴 개론서를 참고한다. 사실 Lantolf & Poehner 두분이 쓴 책을 다루고 싶은데 비고츠키와 제2언어습득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에겐 조금 무리일 듯하다. 내가 소화한 걸 전달하는 식으로 해볼 참이다.

비고츠키와 언어교육의 관계를 슬라이드 몇 장에 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보통 행동주의, 생득주의, 사회구성주의를 축으로 내세운 것들이다. 두어 장은 피아제와의 비교에 할애된다. 하지만 비고츠키를 보면 볼수록 흔히들 이해하는 사회구성주의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비계(scaffolding)에 대한 기계적이고 단순화된 이해도 문제가 크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비고츠키 자신도 삶에 체화된 이론, 이론에 근거한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프레이리가 프랙시스를 고민한 것처럼 말이다.

아래는 얼마 전 비고츠키 관련 공부모임을 제안하려고 쓴 쪽글인데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저지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먹고 사는 게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핑계는 언제나 먹고사니즘이다.

이번 학기 강의를 하면서 모임에 대한 생각을 좀더 구체화할 계획이다. 언젠가 나의 시각에서 한국의 영어교육과 사회문화이론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다.

덧. Karpov의 책 중 <The Neo-Vygotskian Approach to Child Development>는 <교사와 부모를 위한 비고츠키 교육학>으로 번역되었다. 비고츠키를 처음 시작하시는 분이라면 <21세기 교육혁신의 뿌리 레프 비고츠키>와 <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 그리고 이 책으로 시작하시면 될 것 같다. 물론 <Mind in Society>의 한국어 번역본과 <생각과 말>을 함께 봐도 좋다.

박동섭 선생의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도 좋지만 비고츠키 사상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 이를 기반으로 한 비판적 관점의 수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기본이론에 입문하고 나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1. 오래 전부터 비고츠키와 관련된 내용을 포스팅하곤 했었습니다만 최근 몇몇 분들이 함께 공부해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주셨습니다.
  1. 본의 아니게 모임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된 상황에서 먼저 제 배경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영어교육을 공부하고 이후에 응용언어학이라는 분야를 공부하였습니다. 응용언어학 중에서도 제2언어 리터러시 발달에 관심이 많은데 이걸 연구하려다 보니 ‘발달’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였습니다. 잘 아시듯 비고츠키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주제가 ‘인간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발달하는가?’였죠.
  1. 그래서 만나게 된 게 비고츠키와 사회문화이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추후에 전개된 액티비티 이론입니다. (Vygotsky, Sociocultural Theory, Activity Theory 등으로 구글스칼라를 검색하시면 관련된 저작이 엄청나게 나옵니다.) 액티비티 이론은 좀더 길게 ‘역사문화적 활동이론(CHAT: Cultural-Historical Activity Theory)’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비고츠키의 사상을 기반으로 인간의 행동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이론적 흐름을 가리킵니다.
  1. 세미나가 시작되기도 전에 굳이 ‘약점’을 드러내자면 저는 러시아어를 할 줄도 모르고, 비고츠키의 사상 자체를 넓고 깊게 공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학위 과정 중에 수년 간 제2언어 발달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챙기면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80년대 중반 <외국어 습득 및 발달과 사회문화이론> 분야를 개척하고 몸소 역사를 써오신 지도교수(Dr. James P. Lantolf) 덕에 다른 분들보다는 조금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지요.
  1. 한국에 들어와서 강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이 분야를 더 깊이 파거나 가르칠 일이 없었습니다. 몸에 익힌 개념적 틀과 사고방식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만 비고츠키 사상의 세세한 내용들이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1. 하지만 여전히 만만찮은 일상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세미나를 이끌거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강연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고츠키의 생애와 대표저작을 살피면서 (넓은 의미의) 교육과의 접점을 찾는 공부 모임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기 보다는 비고츠키의 사상을 자신의 실천에 접목하고자 하는 분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모임 말입니다.
  1. 살짝 고백을 하자면 비고츠키를 만난 저는 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좋은 쪽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
  1. 모임을 하게 된다면 비고츠키의 삶을 다룬 저작들을 두어 권 읽고, 이를 기반으로 그의 기초 저작(생각과 말, 사회 속의 정신 등)을 읽은 후, 액티비티 이론, 교육 일반 등과 관련된 각종 논문과 저작들을 읽어나가고 싶습니다. 참여하시는 분들과 추후 논의해 봐야겠지만 영문으로 된 저작들도 함께 읽어보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공부하고 계신 분들의 삶과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비고츠키

#사회문화이론

 

가짜뉴스, 소셜미디어, 그리고 몸

소셜미디어의 급속한 팽창은 패거리사고와 확증편향을 위한 최적의 정보생태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울러 소위 ‘가짜뉴스’도 창궐하고 있다. 미디어리터러시 교육으로 이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심히 회의적이다. 미디어가 몸의 확장이라면 그 몸이 점하고 있는 시공간, 그 몸이 처한 정치경제적 상황, 몸에 가해지는 다양한 물리적/신체적/심리적 힘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확장’만을 건드리는 것은 큰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가짜라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짜뉴스가 필요한 사람들이, 조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 필요는 ‘진짜’이며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학부생을 위한 근거이론 이야기 (3) – 왜 하필 근거이론을?

1. 이 수업은 연구방법론이 아니라 영어교육과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수업입니다. “영어교육의 외부”에서 영어교육을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전반부는 디자인 사고, 미디에이션, 멀티리터러시, 언어경관 등의 관점을, 후반부에는 코퍼스 언어학, 구글북스, 자동번역 등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다루지요.

2. 그런데 하필 이 수업에서 근거이론을 다루는 이유가 뭘까요? 궁금해 하시는 분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수업의 테마 중 하나인 교육공학이 교육현장의 이슈를 발굴하고 이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학문이라는 점입니다. 근거이론의 기초를 배우면서 일상에서 지나치는 언어의 풍경 속에 어떤 이슈들이 숨어 있는지 탐구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면, 말이 품은 세계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3. 두 번째는 좀더 근본적인 고민입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고 상상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니까요. 그에 비해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는 눈길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런 ‘올드한’ 테크놀로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입니다. 저는 언어가 아주 오랜 기간 인간과 함께 진화해 왔기에 ‘테크놀로지’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진보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해 낼 수 없다(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는 클락의 세 번째 법칙(Clarke’s third law)과 같이 언어는 우리 삶의 마법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완벽한 마법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지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가 공기의 존재를 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4. 그래서 우리는 언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새롭지 않다고 느끼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이고요. 이러한 습속(habitus)을 깨기 위해서는 언어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언어와 사고, 삶의 질서가 교차하는 방식을 탐구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5. 한 가지 고백할 것은 저는 근거이론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진 않습니다.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제가 공부하고 자주 활용하는 이론은 사회문화이론과 활동이론입니다. 또한 질적연구 중에서 근거이론과는 결이 많이 다른 문화기술지 연구에 더욱 동조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저는 텍스트와 씨름하는(engage) 방법으로 근거이론만한 도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론과 실습을 함께 해나가면서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학부생을위한근거이론이야기

Situated Cognition

“The theory of situated cognition, as I present it here, claims that every human thought and action is adapted to the environment, that is, situated, because what people perceive, how they conceive of their activity, and what they physically do develop together. From this perspective, thinking is a physical skill like riding a bike. In bicycling, every twist and tum of the steering wheel and every shift in posture are controlled not by manipulation of the physics equations learned in school, but by a recoordination of previous postures, ways of seeing, and motion sequences. Similarly, in reasoning, as we create names for things, shuffle around sentences in a paragraph, and interpret what our statements mean, every step is controlled not by rotely applying grammar descriptions and previously stored plans, but by adaptively recoordinating previous ways of seeing, talking, and moving. All human action is at least partially improvisatory by direct coupling of perceiving, conceiving, and moving – a coordination mechanism unmediated by descriptions of associations, laws, or procedures. This mechanism complements the inferential processes of deliberation and planning that form the backbone of theories of cognition based on manipulation of descriptions. Direct coupling of perceptual, conceptual, and motor processes in the brain involves a kind of “self-organization with a memory” that we have not yet replicated in computer programs, or indeed in any machine.” (pp. 1-2)
 
https://www.amazon.com/Situated-Cognition-Representations-Computational-Perspectives/dp/0521448719/ref=sr_1_3?ie=UTF8&qid=1537796300&sr=8-3&keywords=situated+cognition&dpID=5186Q2W%252BPPL&preST=_SY344_BO1,204,203,200_QL70_&dpSrc=srch

유니버설 디자인, 안티-어포던스, 그리고 영어교육

‘ 제품을 사용하다가 감전당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조심 쓰세요.’

복잡한 디자인 오브젝트라는 관점에서 도시를 보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어포던스(affordances)를 무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포던스는 ‘행동유도성’이라고 종종 번역되는 용어로 디자인 영역에서는 사용자와 제품 혹은 서비스의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의자에 낮아 타이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오브젝트가 모든 이에게 의자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갓난 아기에게 이 오브젝트는 의자가 아니다. 300 Kg의 코끼리에게도 의자가 아니다. 이 오브젝트와 나의 관계는 아기 혹은 코끼리와의 관계와 다르다. 즉 이 오브젝트는 나와 아기, 코끼리에게 서로 다른 affordance로 작용한다.

최근 극도로 심한 허리통증을 느낀 적이 있다. 2-3일은 아예 침대 밖으로 나오기 힘들 정도로 아팠고, 두어 주는 느릿느릿 쉬엄쉬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달리기는 언감생심이었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호흡을 고르며 뾰족대는 통증을 이겨내야만 했다. 지하철에 설치된 손잡이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고 노인들의 발걸음이 지닌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모든 역 주요 지점에 설치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말 그대로 뼈저리게 느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의 시급성과 중대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신체의 내부에 존재하는 개개인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개인과 환경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즉 주변의 환경이 인간의 행동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관련된 문제였다. “특정 장애가 있는 사람은 이동할 수 없다”기 보다는 “도시의 특성상 특정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동할 수 없게 만든다”가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이같은 관점은 특정한 사물/환경이 어떤 사람을 돕느냐(serve),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느냐(afford)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한다. 어포던스의 관점에서 환경과 인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행로 중간이 움푹 파여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은 대다수의 보행자에게는 큰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비장애인에게 움푹 파인 그 곳은 돌아가면 되는 작은 흠결일 뿐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나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처음 제기한 ‘디자인 오브젝트로서의 도시’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100명 중 99명이 아무 문제 없다고 느끼는 그 결점이 1명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도시를 이렇게 방치하는 일은 어떤 디자이너가 가전제품을 출시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제품은 99명이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하지만 1명 정도에게는 감전의 위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지만 쓰시는 분들이 알아서 조심하여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제품을 출시하는 디자이너는 합리적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게 장애인들의 투쟁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 된다.

나는 이 관점에서 우리의 교실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 영어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삼는 것이 바로 ‘수준차’다. 수준이 다르므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재의 평가 시스템에서 이런 고충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 자체가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 교육과정에서 25퍼센트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75퍼센트는 수준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예요.”라고 말하는 교육체제가 어찌 합리적일 수 있겠는가?

이런 이해의 기반 위에서 나는 영어교육을 ‘유니버설 디자인’의 관점에서 다시 세워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유니버설 디자인(영어: universal design, 보편 설계, 보편적 설계)은 제품, 시설,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사람이 성별,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 위키백과)

이 관점에서 영어수업을 보자. 영어교재와 액티비티를 살피자. 영어교육과정을 검토하자.

‘디자인 오브젝트’의 관점에서 현재의 영어교육은 반-유니버설 디자인(anti-universal design)에 가까운 것 아닌가? 온갖 이유 때문에 평등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계급’이나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학교영어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소외되고 패배감에 휩싸이며 심각한 경우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영어교육은 어떻게 다시 디자인(redesign)되어야 할 것인가?

#영어교육과교육공학
#삶을위한영어공부

의식은 상호지식(co-knowledge)이다

 

“인간 내부의 정신활동은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발달한 실천적 활동(practical activity)에서 창발(emerge)하며, 각각의 새로운 세대를 지나는 개개인의 개체발생(ontogenesis) 과정에서 형성된다. 이는 실재가 정신에 반영되는 방식 또한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 다시 말해 실재와 자신의 활동을 반영하는 주체의 기능은 창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무엇인가? 비고츠키가 즐겨 말했듯, ‘의식은 상호-지식(co-knowledge)’이다.” (A. N. Leont’ev, 1981)

여기에서 상호지식이라 함은 (1) 개인의 의식이 (2) 사회적 의식 및 언어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개인의 의식과 사회적 의식, 그리고 그 의식이 반영된 매개 중 가장 강력한 언어가 변증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나의 언어로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개인의 의식은 사회적 의식이 반영된 삶의 다양한 활동들에 언어를 매개로 참여하면서 점진적으로 창발하는 것이다.

Lantolf & Thorne, 2006, p. 216

#비고츠키사회문화이론

문화기술지, 대화분석, 그리고 ‘위력’의 존재

Posted by on Aug 28, 2018 in 말에 관하여,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그저 학문적 논쟁이라 생각했던 지점이 현실 속 갑론을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법의 영역에서.

1. 언어를 주 매개로 한 의사소통분석에 있어 양 극단의 경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인류학에 기반을 둔 문화기술지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학 전통에서 강세를 보이는 대화분석 접근이다. (아래에서는 이 두 거대한 분야를 매우 함축적으로 다루므로 독자들께서는 엄밀한 학문적 논의의 칼날을 적용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린다.)

2. 문화기술지(ethnography)는 특정 사회현상을 둘러싼 맥락적, 역사적 요소들을 강조한다. 현상의 시간적 배후 그리고 상황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다각도의 데이터를 통해 검증한다. 해당 현상이 발생한 커뮤니티의 관습과 태도, 의례, 언어습관, 주요 소통채널 등 다양한 것들이 분석의 주요 자료가 된다. 이런 관점을 잘 드러내는 용어는 아마도 클리포드 기어츠의 ‘두꺼운 기술(thick description)’일 것이다. 현상은 얇아보여도 그것을 배태한 세계는 두껍다. 따라서 우리의 기술 또한 두꺼워야만 한다!

3. 이에 비해 대화분석(conversation analysis)은 대화의 전개, 한 마디 한 마디의 주고받음이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1960년대 하비 색스의 연구에서 발원한 연구 흐름은 사회학과 응용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미시적 접근(micro-analytic approach)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방법론의 관점에서 대화분석의 제1원리는 “데이터가 말해주지 않는 것은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일 것이다. 모든 것은 데이터 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4. 대화 참가자들 사이의 권력관계는 특정 대화 내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 대화를 아무리 돌려보고 분석해도 권력의 지층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해당 대화 상황에서 ‘평등하게’ 대화했다고 할 수 있는가? 트라우마로 수년간 고통받아온 사람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 ‘트라우마를 겪어온 자아’가 드러나지 않았음은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가? 제3자가 그것을 확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인가? 그것들이 엇갈린다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5. 이런 질문에 대하여 문화기술지적 연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생애사적 증거를 최대한 동원하여 설명하려 들 것이다. 물론 무조건 ‘갖다 붙이는’ 설명은 곤란하다. 그래서 그들은 삼각검증(triangulation)이라는 절차를 둔다. 수집된 자료들 사이의 패턴, 일관성, 함께 가리키는 바 등을 차분하고도 엄밀하게 고려하는 것이다.

6. 반면 대화분석 연구자들은 대화상황 자체에 집중하려 들 것이다. 대화가 말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말의 강세가, 침묵이, 길게 늘어뺀 억양이, 어조가, 속도가, 쓰인 단어들이 말해주는 바에 집중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 어떤 결론도 도출될 수 없다면 ‘외부에서’ 다양한 증거들을 가져오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학생과 교사의 대화가 100% 사회가 정해놓은 학생/교사라는 역할 하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대학원 수업 시간 중에 문화기술지적 연구경향과 대화분석 접근법 사이의 세계관 차이가 논쟁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둘 사이의 대립 상황에서 칼로 무 베듯 정답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의 성향에 따라 특정 방법론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어떤 쪽에서 논쟁에 참가했을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타임라인을 읽어오신 분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본다.)

8. 아침에 두 개의 상반된 칼럼을 접했다. 둘이 너무나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어서 같은 우주 안에 있다고 하기 힘들 정도였다. 왜 그런지 직접 읽고 판단하시기를.

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2527

위력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한국일보)
http://hankookilbo.com/v/741e6fbcc3c14b979d8cd1a40fb3aeb6

9. 두 칼럼의 지향은 대화분석과 문화기술지를 닮은 것처럼 보인다. 전자가 ‘드러난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려 한다면 후자는 ‘드러나지 않은 것’을 전면에 내세운다.

아니 정말 그런가?

10. 드러난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책무는 (1) 최대한 많이 드러내는 성실함 그리고 (2) 드러난 바를 철저히 분석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전자의 칼럼에서 그런 성실함이나 노력은 잘 읽히지 않는다.

11. 후자의 칼럼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약자들은 위력의 냄새를 귀신처럼 맡는다”라고 생각한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아니 냄새를 맡아야만 할 상황에 처한 이들의 세계와 그런 냄새를 맡지 않아도, 아니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런 냄새인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12. 다시 대학원 수업시간을 떠올린다.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어떤 자세와 방법론을 견지할 것인가?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총체적 세계를 해석하고 있는가, 조각조각 데이터에 현미경을 갖다대고 있는가. 혹 내가 가진 조각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단번에 무력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