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에 관하여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관계를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는 걸 꺼리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있는 글과 메시지의 총량이 분포되는 흐름에 관해서도 더 이상 글을 쓰는 개인의 책임과 깊이 문제로 혐의를 두기를 그쳐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란 건, 더 이상 가능한 관점이 아니다.” (서울비, 2003, <글쓰기 강좌에 대하여> 중에서)

부가 사회경제적 구조를 통해 분배되듯이 글쓰기 능력이라는 문화자본도 사회적, 계급적으로 분배된다. 경제적 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과 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시작하고, 재미를 붙이고, 괜찮은 글을 써내고, 읽을만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글쓰기를 위한 독서를 하고, 때로 출판 기회를 잡고, 그 결과 얼마간의 금전적인 댓가를 얻고, 이 모든 것이 저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한 사람의 재능과 의지로 설명될 수 없다. 다른 문화자본과 마찬가지로 글쓰는 능력은 필자의 성장환경, 물적 토대, 그가 속한 공동체, 사회경제적 구조, 그리고 다양한 교육기회의 영향으로 형성된다. 글쓰기를 개개인의 ‘노오오오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방어하기 힘든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서울비님이 말하듯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은 지탱될 수 없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필요하듯, 저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회가 ‘동원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글 못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순전한 노력으로 일구어낸 ‘필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글 잘쓰는 사람’에 대한 칭송은 ‘글 못쓰는 사람’에 대한 폄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기계적인 능력주의(meritocracy)를 경계한다면 글쓰기 기예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은 거두어 들이는 것이 옳다. 글은 한 천재의 생산물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의 부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지적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개개인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만약 “창의적인 한 사람”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될성 부른 나무’에 사회적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시쳇말로 “몰빵”을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스티브 잡스도 나오고 빌 게이츠도 나오는 것 아닌가? 노벨상도 막 타고 그러는 것 아닌가?

하지만 “창의적인 한 사람”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발현되는 창의성의 네트워크”라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창의적인 팀, 창의적인 학교, 창의적인 회사, 창의적인 사회를 그릴 수밖에 없다. 개별 노드의 특성이 아닌 링크의 효과로서 창의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몰빵”은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기 보다는, 필요한 자본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사회문화적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리터러시 이론의 흐름 또한 이러한 관점을 반영한다. 글쓰기 과정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Flower와 Hayes는 글쓰기의 과정을 인지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들의 연구는 글쓰기 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적인 툴킷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지만, 글쓰기라는 행위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교육적, 이데올로기적 힘을 간과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이들이 제시한 글쓰기에서의 인지모형은 사회적 영향을 반영하는 쪽으로 수정, 발전된다. Street 등을 위시한 학자들은 ‘신리터러시연구(New Literacy Studies)’의 흐름을 주도하며 리터러시의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맥락(context)에 주목한다. 글쓰기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연구하려는 인지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글쓰기의 상황성(situatedness)에 주목하는 연구를 펼친 것이다. 아울러 1990년대 초 Swales를 중심으로 발전된 장르 이론 또한 글쓰기를 하나의 사회적 관행(social practice)으로 파악하면서 텍스트의 사회적 뿌리를 강조한다.

누가 좋은 글을 쓰는가? 노력하는 개인이 훌륭한 저자가 되고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인가? 결과물만 놓고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출판계까지 갈 것도 없이 페이스북만 봐도 글 잘쓰는 분들이 넘쳐나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빙산의 끝자락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글을 써낼 수 있다’는 구호는 ‘읽고 쓰고는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라고 속삭인다. 이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할 리터러시 발달에 대한 책무를 개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나는 논문에 들어간 감사의 말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여전히 이 말을 믿는다.

I typed the dissertation. But we wrote it. (저는 논문을 타이핑했어요. 하지만 쓴 건 나 혼자가 아닌 우리였죠.)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회의 원심력과 구심력

Posted by on Oct 2,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2016년 촛불집회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있다.

논문의 주제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글을 써오면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화두가 있다. 그것은 시위가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려는 구심력과 ‘새로운 흐름’을 분출하는 원심력을 어떻게 모두 포섭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시위가 끝나고 여기저기에 떠도는 ‘대첩’이라는 메타포를 접했다. 별로 주목하는 이들이 없는 것 같지만 이번 사건을 규정하는 ‘대첩’ 메타포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다. 직업병이다.)

‘엄청난 화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대첩’으로 사태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단합된 힘으로 상대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대첩’을 저항의 핵심으로 본다면 광장은 일사분란한 동원의 공간이 된다.

‘대첩’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누구든 자신만의 메타포를 만들어 낼 자유가 있다.

하지만 광장이 이제껏 들려지지 않은 목소리들을 품을 수 있는 포용의 공간일 수는 없는 걸까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이 모두 ‘대첩’의 멘탈리티로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꽤나 끈질기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오’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던 이들이다.

모인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포용할 수 있는 생각의 수가 중요한 저항들이 조직되길 빈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응원도 없이 홀로 걸어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응시한다.

언어 지켜보기

가슴 졸이며 보고 있는 말 몇 가지

1. 국뽕

“국뽕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국뽕이 차오른다” 등

‘국뽕’이 부정적 뉘앙스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사용되는 경우들이 꽤 많음.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한 사람에게서도 종종 발견됨.

2. 지키다

“OOO을 지킵시다”
“우리가 지킵시다” 등.

정치인을 ‘지킨다’는 표현이 자주 보임.
이 ‘지킨다’라는 말은 거대한 프레임(frame) 안에 위치하는 듯함.
지키는 주체로 ‘우리’가 호명됨. ‘우리/그들’ 이분법이 함께 작동하는 듯함.

3.입을 털다, 씨부리다

“함부로/되는대로 입을 털어서”
“뭐라고 씨부리노” 등.

상대의 말을 지칭하면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음.
상대의 말이 가진 약점을 비판하려고 할 때 이런 말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효과적일지 모르겠음.

4. 종족

상대를 ‘종족’으로 지칭하는 방식.
언어상에 나타난 인종주의적 편향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
종족문제가 아닌데 종족으로 지칭하는 것 자체가 문제.
나아가 종족이 다르면 마구 타자화하고 일반화해도 좋다는 생각은 더 큰 문제.

가면 갈수록 특정 이슈를 둘러싼 소통은 힘들어지지 않나 싶음. 이슈가 터지는 즉시 ‘피아구분’이 ‘논점’과 ‘대안’과 ‘협상’ 등을 집어삼켜버리는 듯함. 피아구분은 거의 매번 타자화(othering)로 이어짐.

리터러시 책 준비하면서 공저자 선생님과 함께 가장 크게 우려했던 부분은 “타자에 가 닿는 소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나 또한 예외는 아님.

부르디외 vs. 촘스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핵심적 특징이 ‘생성적(generative)’이라는 데 있다고 말하면서 촘스키의 심층구조(deep structure)와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심층구조가 다양한 조작을 거쳐 여러 표층구조로 실현될 수 있듯이 아비투스가 사회 구조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자체가 다양한 행위를 생성할 잠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부르디외는 이상적 원어민 화자(idealized native speaker)를 상정하는 촘스키의 언어관을 “언어 공산주의(communisme linguistique)의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완벽하게 평등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건만 촘스키와 같이 모든 화자들이 동일한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을 가진 사회를 상정하는 것은 언어학에서 현실을 탈각하고 이상의 세계에 가두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언어인류학자나 비판사회언어학자들의 촘스키 비판과 맥을 같이한다.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하면서 현실사회의 동학을 다루었던 사회학자 부르디외에게 있어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장(fields)에서 서로 다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을 가진 개개인이 소통하는 상황에 ‘이상화된 원어민 화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몸이 또 다른 몸에게 말하는 동안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보편문법의 소유자’는 백그라운드 인지 프로세스로 상정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구체적인 사회학적 분석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벨 훅스, 그리고 이론

Posted by on Aug 31,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이런 방식으로 이론을 이야기해 준 이는 없었다. 이론은 세계관이고 분석의 도구이며 변화의 방향이라고 말해주는 이는 있었지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고통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삶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그리하여 아픔을 떠나보내기 위해 이론을 찾아갔다는 말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이젠 그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론은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개념과 명제의 집합이지만 누군가에겐 고통을 줄이고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갈 힘을 주는 친구이기도 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하여 나와 세계는 어떻게 만나 변화하고 있는지.

“I came to theory because I was hurting—the pain within me was so intense that I could not go on living. I came to theory desperate, wanting to comprehend—to grasp what was happening around and within me. Most importantly, I wanted to make the hurt go away. I saw in theory then a location for healing.” – bell hooks

 

존경스러운 짝의 망각력

꽤 큰 팀의 팀장으로 오래 일한 짝은 신입사원 특히 자기가 맡고 있는 팀원 선발과정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곤 했다. 서류 검토에서 인터뷰어 역할까지 일할 사람을 뽑는 데 직접 관여해온 것이다.

재작년이었나, 학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코 짝에게 “그래서 지난 번에 뽑은 사람은 학교랑 전공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모른다”였다. 나는 대뜸 “자기가 뽑았잖아요. 몇달 되지도 않았는데.”라고 받았고, 짝은 다시 태연스럽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짝은 자신이 뽑은 사람들의 출신학교와 전공을 거의 다 모른다고 했다. 면접 볼 때 잠깐 살펴보는 것 이외에 다시 볼 일도 없고 업무에도 중요하지 않은데 그런 것들을 왜 기억하고 있느냐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정보를 머리속에 담아두는 걸 당연시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학벌사회의 위계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나의 뇌 하나도 잘 통제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한 것 자체부터 글러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되어서는 안되는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구조는 강력하다.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우리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구조의 마음대로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 어렵지만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아주 미약하게나마 더욱 자유로울 수 있다. 때로는 망각이 그러한 자유로 가는 길이다.

사람들을 범주로 묶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하지만 갈수록 깨닫는 것은 누군가를 범주에 묶을 때 자신 또한 그 범주에 갇혀버린다는 사실이다. 두 인간이 아니라 특정 집합의 원소로 만날 때 이 세계는 더욱 파편화, 위계화된다. 뜬금없지만 어쩌면 사랑은 모든 범주를 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한참 멀었다.

리터러시 교육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

1. 리터러시를 가르치는 게 어려운 이유는 여러 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글자 읽기, 글읽기, 쓰기, 독서교육, 가족 내 리터러시 활동, 학습습관 발달, 새로운 미디어 활용하기, 사회적 인프라 확보 등등 다양한 영역에서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2. 하지만 리터러시를 사회적 소통의 인프라스트럭처로 봤을 때 리터러시 교육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3.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은 단지 글자와 단어를 나열하는 행위가 아니다. 독자와 저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엮어 글을 이해하고 써내기 때문이다. 리터러시는 문자해독이나 생산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를 직조하고 공유하는 행위다.

4. 3과 조금 결이 다르지만 읽기와 쓰기는 흔히 상향식 정보처리(bottom-up processing)와 하향식 정보처리(top-down processing)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적 정보처리(interactive processing)으로 이해된다.

5. 내 눈 앞에 텍스트는 분명한 실체가 있고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컨텍스트는 다르다. Teun A. van Dijk이 이야기하듯 컨텍스트는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 사건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컨텍스트는 특정한 시공간이나 사건 등에 대한 심성모델(mental model)이다. 그리고 이 심성모델은 단지 글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 하나, 발음 하나 하나에 적용된다. (나의 ‘공정’과 당신의 ‘공정’이 판이하게 다르다면 ‘공정한’이라는 말은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6. 심성 모델은 순식간에 바뀌지 않으며 즉석해서 생성될 수도 없다. 오랜 기간의 경험과 지식, 독서경험 등이 쌓여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정신적 모델이 형성된다.

7.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심성모델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고 싶어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모델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있으면 쉬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돼?”

사실 소셜미디어에서 우리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관련기사:
타인도 내 의견에 동조한다는 ‘착각’에 숨은 물리학 법칙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584&aid=0000005529

8. 여기서 사회적 소통의 인프라로서의 리터러시 교육이 어려운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나와 다른 심성모델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생각이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로버트 퍼트넘이 <우리 아이들>에서 지적했듯 사회적 섞임(social mixing)이 사라진 시대에 사회는 점점 양분화되고 또 하위 집단 사이의 단절은 강화된다.

관련기사:
“갈산초로 통학구역 변경해달라” 소송 낸 목동 학부모들 패소
https://news.v.daum.net/v/20190818175216194

9.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삶을 위한 리터러시”의 초반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이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글을 읽고 쓰고 비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좋은데 결국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커뮤니티를 축조하고 그 안에서 동일한 담론을 반복 확대하는데 활용된다면 비극 아닌가.

10. 물론 교육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실 그래서 더 심란하다.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교육은 뭘 할 수 있는가? 계속 뭔가 하겠지만 낮게 깔린 우울과 패배의식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다.

11. 결국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의 기조가, 발달의 전 과정이 새로와져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이상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리나마나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우리 모두가 필요한 작업이다.

We’re all in this together.

12. 결론적으로 계급과 이념의 문제를 제외하고 리터러시를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핵심은 언제나 문자가 아니라 사회에 있었다. 텍스트의 문제는 컨텍스트의 문제이다.

컨텍스트를 지배하는 자가 텍스트를 지배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텍스트와 인식론(Text and Epistemology) – William Frawley의 논의를 기반으로 (1)

문자의 도입과 인쇄술의 발달이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발달을 어떻게 추동했는지 등의 여러 질문에 대해 다룬 대표적인 저작을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Literacy and Orality> 와 마셜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은하계 The Gutenberg Galaxy> 등을 꼽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인쇄술의 영향을 깊이 다룬 Elizabeth Eisenstein의 <Printing press as an agent of change>나 Michael Cole & Sylvia Scribner 의 <Psychology of Literacy> 등도 꽤 흥미롭다. (사실 Eisenstein 책은 너무 두꺼워서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목차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인쇄술 발달이 우리 문화와 사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해 큰 흐름을 살필 수 있다.)

오늘은 저 위의 ‘유명한’ 책들 만큼 회자되지는 않지만, 필자가 흥미롭게 읽은 William Frawley의 <텍스트와 인식론(Text and Epistemology)>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텍스트와 인식론이라니 제목부터 거창한 느낌인데, 사실 내용도 꽤나 거창하다고 할 수 있다. 텍스트의 변화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아는 방식을 철저히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Frawley는 월터 옹의 구술 문화 oral culture 와 문자 문화 literate culture 의 구분을 확장시켜 언어/문자의 역사적 ‘발달’을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번째는 텍스트가 전혀 없는 단계, 즉 비텍스트성을 특징으로 하는 구술 문화 oral culture 이다. (아이콘과 같은 그림을 그려 소통하는 방식은 본격적 의미의 쓰기에서 제외된다.) 두 번째는 텍스트가 실제 경험과의 연관 속에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돕거나 구성하는 리터러시 literacy 단계다. 마지막으로는 사람들이 지식을 획득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해 (직접적 경험보다는) 다른 텍스트에 의존하는 하이퍼리터러시 hyperliteracy 단계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그 전 단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을 어느 정도 간직한 채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즉, 리터러시 단계는 구술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구술적 요소를 품으면서 문자문화의 특성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 또한 단순한 산술적 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을 생각할 때, 순수한 구술문화에서의 내러티브와 문자문화가 삶에 깊이 침투한 사회에서의 내러티브는 질적으로 다른 특징들을 보이기 때문이다.

언급한 세 단계를 특징 짓는 키워드는 각각 구술성 orality – 리터러시 literacy – 하이퍼 리터러시 hyperliteracy 이다. 이것을 텍스트성의 관점에서 다시 이야기하면 (1) non-textuality (텍스트가 없어 텍스트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 – (2) textuality 텍스트성 – (3) intertextuality 상호텍스트성이라 할 수 있다. Frawley는 각 단계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제시한다. 아래는 저자의 주장을 간추리고 약간의 살을 더해 본 것이다.

(1) 항상성 – 성장 – 복수성(Homeostasis – Growth – Plurality)

저자는 먼저 텍스트성이 지식의 양적/질적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살핀다. 구술문화는 지식의 항상성 homeostasis 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용어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마치 구술문화에서 지식이 물에 고여 있어 다른 곳으로 흐르지 않고 정적인 상태로 굳어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뜻은 아니다. 일례로 저자는 구술문화에서도 새로운 지식이 생성됨을 인정하지만, 새로운 지식의 탄생이 다른 지식의 ‘죽음’을 낳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예로서 구술문화에서의 신화가 종종 기존에 ‘오래된 신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신들’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든다. 따라서 구술문화에서는 “지속적으로 쌓이고 저장되는 어떤 것으로서의 지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층층이 쌓인 텍스트들이 방대한 인식 시스템을 구성하는 일은 힘들었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구술문화에 비해 텍스트성 textuality 은 (지식의) 성장 growth 을 가져온다는 특징을 지닌다. 사실 경험을 텍스트화 한다는 것 자체가 지식의 확대를 함의한다. 일례로 저자는 서양에서 많은 경우 개인이 해당 언어의 어휘 중 얼마나 많은 단어들을 알고 있는지를 통해 지능 intelligence 을 측정함을 지적한다. (저자에 의하면 유명 작가 중 세익스피어가 가장 많은 활용 어휘를 자랑하고 있다고 하고, 밀튼 Milton 이 그 뒤를 잇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과학적인 지적인지는 모르겠다.) 단어의 습득을 지능과 연결시키는 것은 텍스트의 축적을 진보와 연결시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저자는 텍스트가 쌓이는 물적 공간의 존재와 심리적/정신적 문자문화의 발달의 연관성을 보여주기 위해 18세기 유럽에서의 공립 도서관의 발흥과 문자문화의 융성이 같이 진행되었음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텍스트의 성장은 지식의 성장을 가능케하는 동력이 되고, 이는 다시 책과 도서관이라는 물성을 지닌 환경으로 텍스트의 성장에 되먹임된다.

이어서 저자는 상호텍스트성이 중심 개념으로 자리잡는 하이퍼리터러시에 대해 살핀다. 여기에서는 푸코가 말하는 “주석 commentary 으로서의 지식”이라는 개념이 핵심이다. 어떤 분야의 지식이 텍스트로 축적되어 있을 경우 그 분야의 ‘새로운’ 지식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텍스트들의 일부를 뒤집는 작업, 혹은 (진중권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인) ‘몽타주적 글쓰기’와 같이 기존의 텍스트들의 부분 부분을 모아서 새로운 텍스쳐를 지닌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경우 새로운 지식은 특정한 담론 공간 discursive space 내에 위치하게 된다. 이것이 위에 말한 텍스트성과 다른 점은 하나의 권위적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위계적이며 잘 정렬된 텍스트들이 아니라, 여러 개의 텍스트들이 복수성 plurality 을 지니고 다소 “평평한” 담론의 공간에 얽히고 섥힌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계속)

참고도서: <Text and Epistemology> by William Frawley

https://www.bookdepository.com/Text-Epistemology-William-Frawley/9780893913977

Voices of the Mind

Posted by on Jun 7, 2019 in 강의노트, 링크, 사회문화이론, 집필 | No Comments

대표적인 비고츠키 연구자 중 하나인 James Wertsch의 책 <Voices of the Mind>가 박동섭 선생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언급한 인용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 중 일부를 옮겨놓는다.”

“이 책은 인간의 ‘마인드(정신 활동)’가 도구나 타인,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발생해 변화하는지를 밝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흐친의 ‘목소리’와 ‘대화’, ‘발화’ 개념을 핵심 보조선으로 채택해 ‘매개된 행위(mediated action)’라는 ‘새로운 분석단위’를 제시한다. 이 분석단위를 통해 볼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매개하는 ‘도구에 매개된 행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언어에 매개된 행위’가 인간의 정신기능을 밝히는 핵심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조건과 도구에 좌우되지 않고 머리만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주체’가 아니다. 즉, 인간의 행위는 도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고, 외계(조건), 도구와 일체되어 행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실제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도구에 매개된 행위라는 것의 의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 책은 인간의 ‘마인드’를 닫힌 자기완결적 혹은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열려 있고 불완전한, 나아가서 무언가를 항상 지향하는 행위(action)의 산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워치는 ‘행위’와 ‘목소리’, 기호적 매개, 그리고 매개된 행위의 문화적, 제도적, 역사적 상황을 설명해 냄으로써, 비고츠키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미래의 심리학 이론과 실천의 확장을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비고츠키 아이디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바흐친의 대화론을 도입해 언어적 기호 매개의 ‘정치화(精緻化)’를 설명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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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츠키의 마음관

“시계의 발명 이래 우리는 정신을 일종의 기계에 비유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리고 현재의 심리학에서는 컴퓨터와 같은 구조를 갖추고 움직이는 정신을 ‘실재시’한다. 심리학에서 채용하는 컴퓨터의 메타포는 ‘내부’를 반드시 상정한다. 정신은 피부 혹은 두개골 등을 경계로 상자 속에 갇혀 있는 어떤 실체로 상정되고 그 뚜껑을 열었을 때 시계 혹은 컴퓨터의 본질이 보인다는 메타포다.

이러한 유비는 ‘무엇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상자’같은 것으로 마음을 영상화, 공간화시키는 태도다. 이것은 심리학자들뿐만 아니라 일상인들이 마음에 대해 갖는 기초적인 상상력을 지배한다. 그러나 김영민(1998)이 지적하고 있듯이 마음을 상자같이 꽉 막혀진 어떤 것(something)으로 보는 소위 ‘명사적 사고(Nounal mode of thinking)’*는 실험과 검증을 거쳐 밝혀 낸 생리학적 탐구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유비 관계가 빚은 시각적 오류에 가깝다.

비고츠키 또한 어떤 닫혀 있는 상자로서 ‘마음’을 그리지 않는다. 비고츠키의 도구를 포함하는 마음(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도구를 상정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비고츠키의 마음관이다)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외부 혹은 표면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피부를 경계로 닫힌 공간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실재의 도구에 의한 자기 자신의 제어라는행위의 성질을 빗댄 것이다. 도구는 자연으로 향한 ‘외적 활동의 수단’이다. 이에 비해 심리적 도구, 즉 ‘기호’는 ‘인간 자신의 제어를 위한 필수적 수단’이다(Vygotsky, 1987:130)”

*’Nounal’ 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언어학에서는 ‘nominal’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박동섭, <레프 비고츠키>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6). 5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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