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languaging, Composition, 그리고 영어교육

1. 내가 가장 즐기는 두 활동인 글쓰기와 음악 모두 composi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실 이 두 영역 뿐 아니라 미술 및 사진을 비롯한 예술 영역에서 composition이라는 말이 두루 쓰인다.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보다 복잡한 구조체를 만드는 활동을 통틀어 composi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2. 단어건 음표건 컷이건 공간이건  요소들이 함께 배치되는 데서 패턴이 생겨나고 패턴이 반복되고 중첩, 변주되면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추상적인 수준에서 글쓰기를 비롯한 예술창작 전반을 관통하는 단어가 composition 아닌가 싶다. (이 의미에 상응하는 우리말이 있을까? ‘구성’이라고 번역되긴 하지만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3. 일상에서 작문이라고 하면 대개 한국어 작문을 가리킨다. 영어로 쓸 경우는 영작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용례들의 특징은 작문행위가 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서는 하나의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4. 하지만 ‘구성composition’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글이 하나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협소하기 짝이 없다. 당장 시내의 간판들과 광고들만 봐도 다양한 언어가 어울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은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들이 일상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다. 도시의 언어경관은 분명 여러 언어로 구성된다.

5. 인간을 ‘한국어를 쓰는 존재’, ‘영어를 쓰는 존재’ 등의 틀에 가두지 않고 ‘의미를 만드는 존재’로 바라본다면 여러 언어를 섞어 쓰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전혀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겠으나, 특정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구절에 대해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도적인 구성의 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6. 예를 들어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글에 ‘아랫목’과 ‘고구마’, 그리고 ‘할머니’를 한국어로 쓸 수 있다. 필요하다면 각주를 통해 이 세 단어의 의미를 밝히겠지만, 본문에서 이들 단어를 계속해서 고집할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7. 응용언어학 분야에서 다언어를 활용한 담화 구성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 translanguaging 이 부상하고 있다. 언어 사이를 넘나들며 발화나 작문을 구성하는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10여 년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도 뿐 아니라 교육적 활용도 활발히 논의되는 중이다.

8. 한국 영어교육 상황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는 것은 금기다. 가급적 ‘영어로만 사고’해야 하고, 영어로만 말하고 써야 한다. 그래야 영어가 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존재는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섞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으며 수사적 효과 또한 노릴 수 있다. 조금 더 급진적인 시도를 한다면 기계번역의 힘을 빌어 수십개 언어로 시를 쓰거나 ‘팝아트적’ 글쓰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9. 그런 면에서 우리말을 벼려 더욱 견실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혼종성(hybridity)을 실험하려는 시도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10. 생각해 보면 영어야 말로 엄청난 짬뽕언어 아닌가!

#삶을위한리터러시 #translanguaging

지도교수의 퇴임

Posted by on May 2,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Thank you, Jim!

지도교수가 퇴임했다.
한 시대가 저문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그와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유학을 결정하고
사회문화이론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비고츠키의 “Mind in Society”를 읽으면서
지도교수의 글들을 만났다.

SLA Theory Building: “Letting All the Flowers Bloom!”
내가 처음 읽은 그의 글이다.

논문을 읽으며 감탄을 연발했고,
이런 사람과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운좋게 그와 함께 5년을 지냈다.

코넬대에 재직하던 1985년
동료 William Frawley와 함께
“Second language discourse: A Vygotskyan perspective.”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20세기 심리학의 모차르트라 불리는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Lev Vygotsky를
응용언어학계에 소개한 이후
35년 간 사회문화이론을 기반으로
제2언어습득 및 응용언어학 관련 연구를 발표해 왔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응용언어학의 대표 저널인
Applied Linguistics 편집장을 지내고
전미응용언어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최근에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이제 응용언어학에서
비고츠키와 그의 이름을 분리할 수 없게 되었고,
나를 비롯한 많은 후학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전세계 응용언어학/영어교육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도교수로서 또 함께 길을 걷는 동료로서
그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가장 생생한 건 그의 이메일에 담긴 한 마디다.

논문을 반쯤 썼을 때였다.
나머지 반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챕터 하나를 보내며
“마감 안에 끝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돌아보면 지도교수가 안된다 하면
한 학기를 더 다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Sungwoo, we can finish this dissertation together.”

이 짧은 문장이 준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같이 써낼 수 있다”라는 말 한 마디가
엄청난 힘이 되었고,
졸고이지만 논문을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있었다.

“We”라는 대명사 하나가
논문에 허우적거리던 나의 영혼을 구한 것이다!

이후 나는
“I can”의 능력주의를 넘어
“We can”의 세계를 어떻게 열 것인가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퇴임을 한다 해서
많은 이들의 삶에 영감을 주고
하나의 작은 학문을 개척한 그의 자리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교정의 쓸쓸함을
내 마음의 허전함을
막을 길은 없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보냈던
헌사(acknowledgement)를 가져다 놓는다.

시간은 지났지만
이 마음은 그대로이기에.

“I would like to thank Dr. James P. Lantolf for his tireless support for my academic journey. He exquisitely mediated me in climbing the mountain of the dissertation as the most competent sherpa imaginable, formed the strongest foundation for my scholarly thinking, and was the best friend to whom I can come clean of my concerns and inner conflicts throughout the journey. Most of all, he is a truly passionate human being who has cared most about me as a fellow human being. Jim, I feel infinitely blessed that I have been given the opportunity to work with you all these years. I have studied language so many years but cannot find words to express my gratitude to you. Even if I had those words, I know that I would simply not be able to thank you enough. All I can say is that I will walk and work with you throughout my life, remembering your compassionate praxis.”

고마웠어요, 선생님!

더 멋지게 자유롭게
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시길.
앞으로의 생을 힘차게 응원합니다.

무엇보다 건강하세요.

– 서울에서, 못난 제자 성우 드림

비판교육학

Posted by on Mar 25,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문득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하던 시절, 한 후배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공부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사회문화이론과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바로 날아든 한 마디.

“비판교육학이요? 요즘에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별로 친분이 깊지도 않았던 그의 퉁명스런 답은 충격으로 남았다.

딱 맞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느낌이었달까?

“마르크스요? 요즘에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셰익스피어요? 요즘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플라톤이요? 요즘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이후 그도 박사과정에 진학한 걸로 알고 있다. 이제 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프레이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다.
나 또한 여전히 프레이리를 읽는다.
세월이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구식’이라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가 ‘구식’이 되는 건
해당 인물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대와 사상을
온전히 해석하고 받아안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표준화의 환상

Posted by on Feb 11,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시간의 표준화로 모두의 시간이 동일한 속도와 밀도를 지닌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지능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지능을 벨커브(정규분포곡선)로 줄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시험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성취를 한줄로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노동이 공평하고도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화폐로 변환되고 있다는 믿음, 어떤 몸이든 동일한 ‘ROI'(투자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 공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환상은 이러한 표준화-복합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서로 다른 몸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관계와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간의 평등과 지능 및 시험의 공정함, 경제체제의 합리성은 지독한 환상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은 철판이나 콘크리트에게는 옳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아니다. 체구가 크면 더 먹어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발이 크면 신발이 커야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모두가 같은 속도로 배우고 익히고 시험을 쳐야 한다고 믿는가? 인간에게는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을 돌려주어야 할 싸움이 필요할 뿐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뇌파, 언어, 얽힘

뇌파를 언어로 바꾸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직 해상도가 그리 높진 않지만 뇌의 신호만으로 ‘화자’가 의도한 언어를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고 신기한 세상이다.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화자’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말하고 들을 때, 텍스트를 읽거나 쓸 때 우리의 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궁금하다. 지금 짤막한 이 글을 읽은 페친의 뇌는 글을 읽기 전과 후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별 시답지 않은 글이니 별반 차이가 없을까? 누군가의 뇌는 변화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까? 사람마다 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언어 혹은 내용이 존재할까?

‘뭐 이딴 글이 있어’라고 생각하건 ‘진짜 멋진 글이다’라고 생각하건 우리의 뇌는 ‘어쩔 수 없이’ 반응한다. 나의 뇌 속에서 생겨난 움직임이 언어를 통해 누군가의 뇌를 움직이게 하고 그것이 일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신비롭고 괴이하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 그리고 상상력

적어도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은 어학연수와 같은 해외 체류를 영어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꼽았다. 해외에서의 생활이 영어공부의 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인풋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라고 간단한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흔히들 말하는 몰입(immersion)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인풋의 양보다 더욱 핵심적인 요인들이 나타난다. 나는 이것을 두 가지로 본다.

먼저 “쓸모에 대한 감각”이다. 내가 배우고 있는 말이 세상에서 진짜 쓰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쓸모”에 대한 감각은 쉬이 생기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 본 경험이 있다면 입시와 내신이라는 목표 외에 학생들에게 영어의 쓸모를 설명해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아니 이것은 설명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안다. 연애나 배신같이 체험되지 않고는 전달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처럼 말이다.

다음으로는 “만남의 경험”이다. 이것은 쓸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 다르다. 나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다른 언어가 되어 돌아오는 경험.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경험. 이것을 목격하고 느끼는 것이 “만남”이다. 말을 건네기 전의 설렘과 말이 오가는 과정의 떨림과 말이 끝나고 난 다음의 여운을 겪는 것이다.

만남은 언어의 도구성을 넘는 경험이다. 언어가 사람을 울고 웃게 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도구성을 뛰어 넘어 존재를 감화시키는 언어를 진짜로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에 가지 않고도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을 키워줄 수 있을까? 외국어로서 영어(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백’하는 언어학습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물론 해외에서의 경험을 복제할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변화를 꽤하려면 언어학습에서 급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영어교육은 여전히 인풋이라는 ‘특급 키워드’에 머물러 있다. 얼마나 많은 언어자료가 투입되어야 하는가. 이 자료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이 패러다임 말이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에 더 많은 인풋을 부르짖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레프 비고츠키 수업 & 공부 이야기

Posted by on Jan 22,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수업자료, 집필 | No Comments

5년 만에 비고츠키 관련 수업을 맡았다. 영어교사교육의 관점에서 본 비고츠키를 다룬다.

수업준비를 하기 위해 교재를 정했다. 교육대학원 수업이어서 Karen Johnson 선생님 책을 중심으로 진행하려고 한다.

이와 함께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Yuriy V. Karpov의 책 두 권과 Merill Swain 선생님 등이 쓴 개론서를 참고한다. 사실 Lantolf & Poehner 두분이 쓴 책을 다루고 싶은데 비고츠키와 제2언어습득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에겐 조금 무리일 듯하다. 내가 소화한 걸 전달하는 식으로 해볼 참이다.

비고츠키와 언어교육의 관계를 슬라이드 몇 장에 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보통 행동주의, 생득주의, 사회구성주의를 축으로 내세운 것들이다. 두어 장은 피아제와의 비교에 할애된다. 하지만 비고츠키를 보면 볼수록 흔히들 이해하는 사회구성주의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비계(scaffolding)에 대한 기계적이고 단순화된 이해도 문제가 크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비고츠키 자신도 삶에 체화된 이론, 이론에 근거한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프레이리가 프랙시스를 고민한 것처럼 말이다.

아래는 얼마 전 비고츠키 관련 공부모임을 제안하려고 쓴 쪽글인데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저지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먹고 사는 게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핑계는 언제나 먹고사니즘이다.

이번 학기 강의를 하면서 모임에 대한 생각을 좀더 구체화할 계획이다. 언젠가 나의 시각에서 한국의 영어교육과 사회문화이론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다.

덧. Karpov의 책 중 <The Neo-Vygotskian Approach to Child Development>는 <교사와 부모를 위한 비고츠키 교육학>으로 번역되었다. 비고츠키를 처음 시작하시는 분이라면 <21세기 교육혁신의 뿌리 레프 비고츠키>와 <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 그리고 이 책으로 시작하시면 될 것 같다. 물론 <Mind in Society>의 한국어 번역본과 <생각과 말>을 함께 봐도 좋다.

박동섭 선생의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도 좋지만 비고츠키 사상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 이를 기반으로 한 비판적 관점의 수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기본이론에 입문하고 나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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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래 전부터 비고츠키와 관련된 내용을 포스팅하곤 했었습니다만 최근 몇몇 분들이 함께 공부해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주셨습니다.
  1. 본의 아니게 모임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된 상황에서 먼저 제 배경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영어교육을 공부하고 이후에 응용언어학이라는 분야를 공부하였습니다. 응용언어학 중에서도 제2언어 리터러시 발달에 관심이 많은데 이걸 연구하려다 보니 ‘발달’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였습니다. 잘 아시듯 비고츠키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주제가 ‘인간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발달하는가?’였죠.
  1. 그래서 만나게 된 게 비고츠키와 사회문화이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추후에 전개된 액티비티 이론입니다. (Vygotsky, Sociocultural Theory, Activity Theory 등으로 구글스칼라를 검색하시면 관련된 저작이 엄청나게 나옵니다.) 액티비티 이론은 좀더 길게 ‘역사문화적 활동이론(CHAT: Cultural-Historical Activity Theory)’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비고츠키의 사상을 기반으로 인간의 행동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이론적 흐름을 가리킵니다.
  1. 세미나가 시작되기도 전에 굳이 ‘약점’을 드러내자면 저는 러시아어를 할 줄도 모르고, 비고츠키의 사상 자체를 넓고 깊게 공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학위 과정 중에 수년 간 제2언어 발달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챙기면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80년대 중반 <외국어 습득 및 발달과 사회문화이론> 분야를 개척하고 몸소 역사를 써오신 지도교수(Dr. James P. Lantolf) 덕에 다른 분들보다는 조금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지요.
  1. 한국에 들어와서 강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이 분야를 더 깊이 파거나 가르칠 일이 없었습니다. 몸에 익힌 개념적 틀과 사고방식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만 비고츠키 사상의 세세한 내용들이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1. 하지만 여전히 만만찮은 일상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세미나를 이끌거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강연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고츠키의 생애와 대표저작을 살피면서 (넓은 의미의) 교육과의 접점을 찾는 공부 모임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기 보다는 비고츠키의 사상을 자신의 실천에 접목하고자 하는 분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모임 말입니다.
  1. 살짝 고백을 하자면 비고츠키를 만난 저는 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좋은 쪽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
  1. 모임을 하게 된다면 비고츠키의 삶을 다룬 저작들을 두어 권 읽고, 이를 기반으로 그의 기초 저작(생각과 말, 사회 속의 정신 등)을 읽은 후, 액티비티 이론, 교육 일반 등과 관련된 각종 논문과 저작들을 읽어나가고 싶습니다. 참여하시는 분들과 추후 논의해 봐야겠지만 영문으로 된 저작들도 함께 읽어보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공부하고 계신 분들의 삶과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비고츠키

#사회문화이론

 

가짜뉴스, 소셜미디어, 그리고 몸

소셜미디어의 급속한 팽창은 패거리사고와 확증편향을 위한 최적의 정보생태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울러 소위 ‘가짜뉴스’도 창궐하고 있다. 미디어리터러시 교육으로 이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심히 회의적이다. 미디어가 몸의 확장이라면 그 몸이 점하고 있는 시공간, 그 몸이 처한 정치경제적 상황, 몸에 가해지는 다양한 물리적/신체적/심리적 힘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확장’만을 건드리는 것은 큰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가짜라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짜뉴스가 필요한 사람들이, 조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 필요는 ‘진짜’이며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학부생을 위한 근거이론 이야기 (3) – 왜 하필 근거이론을?

1. 이 수업은 연구방법론이 아니라 영어교육과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수업입니다. “영어교육의 외부”에서 영어교육을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전반부는 디자인 사고, 미디에이션, 멀티리터러시, 언어경관 등의 관점을, 후반부에는 코퍼스 언어학, 구글북스, 자동번역 등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다루지요.

2. 그런데 하필 이 수업에서 근거이론을 다루는 이유가 뭘까요? 궁금해 하시는 분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수업의 테마 중 하나인 교육공학이 교육현장의 이슈를 발굴하고 이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학문이라는 점입니다. 근거이론의 기초를 배우면서 일상에서 지나치는 언어의 풍경 속에 어떤 이슈들이 숨어 있는지 탐구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면, 말이 품은 세계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3. 두 번째는 좀더 근본적인 고민입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고 상상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니까요. 그에 비해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는 눈길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런 ‘올드한’ 테크놀로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입니다. 저는 언어가 아주 오랜 기간 인간과 함께 진화해 왔기에 ‘테크놀로지’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진보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해 낼 수 없다(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는 클락의 세 번째 법칙(Clarke’s third law)과 같이 언어는 우리 삶의 마법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완벽한 마법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지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가 공기의 존재를 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4. 그래서 우리는 언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새롭지 않다고 느끼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이고요. 이러한 습속(habitus)을 깨기 위해서는 언어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언어와 사고, 삶의 질서가 교차하는 방식을 탐구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5. 한 가지 고백할 것은 저는 근거이론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진 않습니다.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제가 공부하고 자주 활용하는 이론은 사회문화이론과 활동이론입니다. 또한 질적연구 중에서 근거이론과는 결이 많이 다른 문화기술지 연구에 더욱 동조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저는 텍스트와 씨름하는(engage) 방법으로 근거이론만한 도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론과 실습을 함께 해나가면서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학부생을위한근거이론이야기

Situated Cognition

“The theory of situated cognition, as I present it here, claims that every human thought and action is adapted to the environment, that is, situated, because what people perceive, how they conceive of their activity, and what they physically do develop together. From this perspective, thinking is a physical skill like riding a bike. In bicycling, every twist and tum of the steering wheel and every shift in posture are controlled not by manipulation of the physics equations learned in school, but by a recoordination of previous postures, ways of seeing, and motion sequences. Similarly, in reasoning, as we create names for things, shuffle around sentences in a paragraph, and interpret what our statements mean, every step is controlled not by rotely applying grammar descriptions and previously stored plans, but by adaptively recoordinating previous ways of seeing, talking, and moving. All human action is at least partially improvisatory by direct coupling of perceiving, conceiving, and moving – a coordination mechanism unmediated by descriptions of associations, laws, or procedures. This mechanism complements the inferential processes of deliberation and planning that form the backbone of theories of cognition based on manipulation of descriptions. Direct coupling of perceptual, conceptual, and motor processes in the brain involves a kind of “self-organization with a memory” that we have not yet replicated in computer programs, or indeed in any machine.” (pp. 1-2)
 
https://www.amazon.com/Situated-Cognition-Representations-Computational-Perspectives/dp/0521448719/ref=sr_1_3?ie=UTF8&qid=1537796300&sr=8-3&keywords=situated+cognition&dpID=5186Q2W%252BPPL&preST=_SY344_BO1,204,203,200_QL70_&dpSrc=s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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