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지켜보기

가슴 졸이며 보고 있는 말 몇 가지

1. 국뽕

“국뽕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국뽕이 차오른다” 등

‘국뽕’이 부정적 뉘앙스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사용되는 경우들이 꽤 많음.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한 사람에게서도 종종 발견됨.

2. 지키다

“OOO을 지킵시다”
“우리가 지킵시다” 등.

정치인을 ‘지킨다’는 표현이 자주 보임.
이 ‘지킨다’라는 말은 거대한 프레임(frame) 안에 위치하는 듯함.
지키는 주체로 ‘우리’가 호명됨. ‘우리/그들’ 이분법이 함께 작동하는 듯함.

3.입을 털다, 씨부리다

“함부로/되는대로 입을 털어서”
“뭐라고 씨부리노” 등.

상대의 말을 지칭하면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음.
상대의 말이 가진 약점을 비판하려고 할 때 이런 말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효과적일지 모르겠음.

4. 종족

상대를 ‘종족’으로 지칭하는 방식.
언어상에 나타난 인종주의적 편향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
종족문제가 아닌데 종족으로 지칭하는 것 자체가 문제.
나아가 종족이 다르면 마구 타자화하고 일반화해도 좋다는 생각은 더 큰 문제.

가면 갈수록 특정 이슈를 둘러싼 소통은 힘들어지지 않나 싶음. 이슈가 터지는 즉시 ‘피아구분’이 ‘논점’과 ‘대안’과 ‘협상’ 등을 집어삼켜버리는 듯함. 피아구분은 거의 매번 타자화(othering)로 이어짐.

리터러시 책 준비하면서 공저자 선생님과 함께 가장 크게 우려했던 부분은 “타자에 가 닿는 소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나 또한 예외는 아님.

의미생산을 돕는 Guided Writing

대부분의 Guided writing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철저히 문법과 어휘를 기반으로 유도된다는 점이다. 문제는 ‘의미의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Although…. willl…을 활용하여 너의 의지를 기술하라.

Although I cannot change the entire system, I will try to change the atmosphere of each community in which I belong.

Although I cannot forgive his fault, I will try to understand his character without prejudice.

또 다른 예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겠다.

2. If 가정법을 활용하여 당신이 공감하고 싶은 대상에 대하여 기술하오.

3. prefer A to B를 활용하여 오늘 일과 중에서 바꾸고 싶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시오.

4. <동명사 is 동명사> 구문(예 Seeing is believing.)을 활용하여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개의 활동을 기술하시오.

5. not so much A as B 구문을 활용하여 사람들은 A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B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시오.

이와 같은 안내는 단순히 특정 구조와 어휘를 활용한 문장 만들기를 넘어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의미에 집중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바람직한 guided writing은 어휘문법적 활용 뿐 아니라 의미생산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삶을위한영작문 #단단한영어공부

부르디외가 밝히는 학문적 작업의 해심

“핵심은 제 작업의 아이디어가 아이디어(ideas)로 개념화되기 보다는 방법(method)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제 작업의 중핵은 사고의 방법, 일종의 사고방식에 있습니다. 좀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저의 방법은 그저 아이디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자신의 학문적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부르디외의 대답:

Cheleen Mahar: CM What would you consider to be the core ideas around which your work has been written?

Pierre Bourdieu: The main thing is that they are not to be conceptualised so much as ideas, on that level, but as a method. The core of my work lies in the method and a way of thinking. To be more precise, my method is a manner of asking questions rather than just ideas. This, I think is a critical point.

영어논문읽기 강연

<지리학에서 영어논문읽기, 어떻게 할 것인가> (19.9.9.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논문읽기 방법론을 주제로 경희대학교 지리학과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기존에 해오던 “영어로 논문쓰기: 읽기쓰기 통합전략을 중심으로”의 뼈대를 기초로 읽기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영어논문읽기를 ‘영어+논문+읽기’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각각을 설명하되 응용언어학의 장르분석(genre analysis)을 적용해 보았습니다. 열 두 시간 짜리 강의를 한 시간 남짓에 담아내려니 디테일은 좀 떨어진 듯하지만 명민한 학생들이 빈틈을 메워주리라 생각합니다. ^^

#영어로논문쓰기
#영어로논문읽기

동반자로서의 텍스트

Posted by on Sep 13,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부르디외는 이전 학자들의 텍스트를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companion)”로 여겼다고 한다. 돌아보면 공부를 하면서 가장 벅찼던 경험은 텍스트가 ‘자료’나 ‘지식’에서 ‘동료’이자 ‘친구’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공적인 권력 획득으로서의 글읽기가 사적인 관계맺기로 변화할 때 글의 힘은 더욱 깊고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과시를 위해 읽는 사람들은 동전 모으듯 문구를 모아대지만 성장을 위해 읽는 이들은 삶과 글을 엮어 텍스트를 촘촘히 직조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정치인의 사과

“~라면 유감이다.”
“~로 보였다면 유감이다.”
“~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 유감이다.”

정치인이 ‘사과’할 때 주로 쓰는 언어 패턴이다.

이들 구절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라면’이라는 부분이 늘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라면’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라면’은 사실의 영역이 아닌 가정의 영역을 나타낸다.

“~해서”가 아니라,
“~라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에 들어가는 내용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라면’은
자신의 해석과 대중의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쳇말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느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느끼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사실을 가정과 섞고,
팩트의 묵직함을 해석의 차이로 뭉갠다.

무엇보다 이러한 진술은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생산된다.

‘당신은 사실로 생각하지만 나에겐 아니다.’
‘당신은 그렇게 해석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유감표명은
상대의 입장에 서지 않는 언술행위다.

저 말 속에서
정치인과 대중은
‘평행우주’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과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아닌가.

“~이 벌어진 데 대해 깊이 반성한다.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었다.”

“~라고 느끼게 만든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모두 저의 불찰이다.”

이렇게 말하며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모습은
왜 그리 찾아보기 힘든가.

종종 그들은
유감을 표명하되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머리숙여 사죄’한다면서
머리도 숙이지 않고 죄과도 돌아보지 않는 듯하다.

명예에 잔기스 하나,
마음의 작은 상처 하나
감당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큰소리친다.

그런 ‘유감’들이
심히 유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MIT 미디어 랩 – 엡스타인 스캔들

Posted by on Sep 8,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 No Comments

MIT 미디어 랩이 Jeffrey Epstein의 범죄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작지 않은 규모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뉴요커의 보도가 있은지 하루만에 MIT 미디어 랩의 디렉터인 Joi Ito가 교수직을 내놓고 사임했다. 흔히 ‘세계 최고의 미디어 연구기관’이라고 불리는 조직이 구역질나는 범죄를 용인하고 돈을 택했다는 점은 끔찍하게 징후적이다. 자본에 완전히 포섭된 엘리트기관은 과연 엘리트적일 수 있는가? 그 어떤 범죄도 돈으로 덮을 수 있다는 생각에 투항한 대학은 대학일 수 있는가? 아래 뉴요커와 가디언의 기사를 링크한다.

“New documents show that the M.I.T. Media Lab was aware of Epstein’s status as a convicted sex offender, and that Epstein directed contributions to the lab far exceeding the amounts M.I.T. has publicly admitted.

Update: On Saturday, less than a day after the publication of this story, Joi Ito, the director of the M.I.T. Media Lab, resigned from his position. “After giving the matter a great deal of thought over the past several days and weeks, I think that it is best that I resign as director of the media lab and as a professor and employee of the Institute, effective immediately,” Ito wrote in an internal e-mail. In a message to the M.I.T. community, L. Rafael Reif, the president of M.I.T., wrote, “Because the accusations in the story are extremely serious, they demand an immediate, thorough and independent investigation,” and announced that M.I.T.’s general counsel would engage an outside law firm to oversee that investigation.”

https://www.newyorker.com/news/news-desk/how-an-elite-university-research-center-concealed-its-relationship-with-jeffrey-epstein

““Third culture” was a perfect shield for pursuing entrepreneurial activities under the banner of intellectualism. Infinite networking with billionaires but also models and Hollywood stars; instant funding by philanthropists and venture capitalists moving in the same circles; bestselling books tied to skyrocketing speaking fees used as promotional materials for the author’s more substantial commercial activities, often run out of academia.

That someone like Jeffrey Epstein would take advantage of these networks to whitewash his crimes was almost inevitable. In a world where books function as brand extensions and are never actually read, it’s quite easy for a rich and glamorous charlatan of Epstein’s stature to fit in.”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9/sep/07/jeffrey-epstein-mit-funding-tech-intellectuals

학습법에서 학습하는 주체로

<단단한 영어공부>를 쓰고 나서 과분한 평도 듣지만 비판과 불만 또한 종종 접한다. 후자의 대표적인 내용은 “그래서 당장 어떻게 하라는 건지?”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시 실행가능한 학습법을 꼼꼼히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의 손을 떠난 글은 독자에 의해 해석되고 재창조된다. 그런 면에서 몇몇 분들이 실망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로서 전달하려고 했던 내용은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말고 이러저러한 원칙 하에서 스스로 할 일을 만들어 가라”는 것이었다. 학습서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학습서를 써내려가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이를 대화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나: “그간의 학습서는 ‘이렇게 하면 된다’였어요.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원칙은 이렇지만 결국 방향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하루하루 실행하는 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 독자: “그래서 당장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요? 이 책에는 그게 안 나와 있는데요. 실망스럽네요.”

어떤 면에서는 필자의 잘못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독자의 잘못이겠다. 내 책이 모든 이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으며 그럴 자격도 없음을 안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땅에 곤두박질친 이야기들이 안쓰러울 때가 있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어쩌면 <학습법> 카테고리로 <학습하는 주체>에 대한 책을 써낸 업보일지도 모르고.

#단단한영어공부

AI, 그리고 지식민주주의

과문한 탓인지 AI의 발전과 ‘지식 민주주의(knowledge democracy)’의 관계를 깊이있게 다룬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AI가 진화하면 수많은 지식 관련 업무가 자동화될 것이라는 예상이나 고도의 지식노동을 포함한 대부분의 직업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넘쳐나지만, 진보된 AI가 현존하는 지식수준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지식 단계에 따라 썰을 풀 수 있는 인공지능의 발전”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 당연히 양자역학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태반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지식을 1000단계로 나눈다면 0에 수렴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바라는 건 대충 이런 거다. AI가 충분히 발달했을 때 양자역학의 특정 개념을 1000가지 단계로 나누어 학습자의 수준과 흥미에 따라 ‘썰을 풀어내는’ 기능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 클락의 이야기처럼 충분히 진보된 AI라면 ‘마법처럼’ 수많은 개념을 엮어 재미나게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돈을 따라가는 법이다. 지식과 리터러시가 모두의 것이 되는 방향으로 기술이 개발되고 대규모 투자가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식의 공유는 가속화되겠지만 핵심 지식/알고리즘의 소유는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지닌 사람들의 특권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교육을 위한 AI의 발달 또한 기본적으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할 가능성이 높으며, 지식장의 근본적인 평등에 대한 관심은 ‘시늉’으로 남을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이것을 빈 껍데기 지식민주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줄 장밋빛 미래사회, 살기는 조금 편해지고 지식은 온 세상에 넘쳐나 모두의 손에 닿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이해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근본적 이해가 불가능함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냉소로 숨어들고, 적지 않은 이들이 ‘앎의 환상’에 빠져 ‘매트릭스의 삶’을 영위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끔 ‘몰라도 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공동체, 그리고 미디어가 필요하다. 모든 것에 대한 팩트체크를 할 수 없다면 나의 지향과 관점에 대한 방향체크가 필요하다. 하지만 점점 그게 어려워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팩트체크는 당파성이 지배하고 신뢰의 영역은 부족주의에 잠식된다. 계몽은 비웃음을 사고 사랑은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다양성에 대한 포용은 강조되지만 조금만 다른 언어를 써도 철저한 타자로 규정된다. AI가 이 시대를 넘어설 수 있을까? 나는 심히 회의적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책읽기, 세계, 그리고 실천

Posted by on Sep 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책읽기는 세계만큼이나 커다란 리허설 무대를 선사한다. (Reading gives us a rehearsal stage as big as the world.)”

예전에 봤던 “Why reading matters” (BBC) 의 한 구절이다 뜻을 새겨 풀어 써보면 이렇다.

1. 리허설은 실제 공연과 아주 많이 닮았다. 몰입해서 하면 실제 공연과 다를 바 없다.

2. 하지만 실제 공연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관객들과 함께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삶에 가 닿지는 않는다. 책읽기의 순간만큼은 개인적 경험이 지배한다.

3. 그렇다고 리허설 없이 실제 공연을 하려 드는 것도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다.

4. 그렇기에 제대로 된 무대에서 리허설을 해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모든 게 갖춰진 리허설 장소 싸게 대여해 드려요!” 라는 호객꾼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는 사기를 조심해야 한다. (각자의 경험에서 이런 호객꾼이 누굴 가리키는지 떠올려 보시기를.)

셰익스피어가 말한 세계라는 공연장에 나가기 위한 리허설 장소로서의 독서.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지만 삶과 실천의 준비 단계로서의 책읽기. 생각해 볼만한 메타포다.

이 시대의 책읽기는 어떤 세계로, 어떤 실천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가?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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