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붙 그리고 글쓰기

가설

1. 죽음의 지평 앞에 선 사람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두께에 끌린다. 이것은 외경(畏敬, awe)과 비슷한 종류의 감각이다.

2. 글쓰기에 몰입하는 힘은 시간여행의 기쁨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흔히 쓰는 동안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고 하지만 반대다. 겹겹의 시간이 분해되어 화면에 유성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3. 펜끝에서 다양한 시간을 끄집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을 작가라고 부른다. 수많은 시간을 엮어 내 작품의 시간(the time of my work)으로 만드는 사람들.

4. 자기계발서의 시간은 대개 납작하다. 그 납작함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매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외경의 빈자리에는 종종 경멸이 자리잡기도 한다.

5. 글쓰기는 Ctrl+C, Ctrl+V 사이에 저자의 인생이 개입되는 행위다. 카피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긴 하지만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정교한 베끼기다. 각자의 삶이 다른만큼 글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뿐.

#삶을위한리터러시

독서, 소유가 아닌 가로지르기

1.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한국어-영어 바이링궐/바이컬처럴’로 키우길 바라는 나라에서 ‘다문화-‘는 차별과 배제의 접두사다. ‘글로벌 시티즌’이 될 것을 주문하는 사회임에도 ‘다문화교육은 다문화가족 구성원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이같은 자기분열적 인식은 외국어 문화자본과 계급간의 일그러진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대다수 국민에게 ‘외국어’에 속하는 언어는 영어를 비롯해 몇 개 되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2. 장면 1. 한 카페.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각자 노트북을 놓고 여행 계획을 짜고 있다. 책상에는 유럽 여행 책자 몇 권이 널브러져 있다.

“사진 볼래? 지난 번에 갔다 오면서 찍은 거.”
– “어어 보자.”
“이건 OOO고… 이건 OO…”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저 장애인은 누구냐?”
“누구긴 누구냐 나지. 새X야.”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장면 2. 하교시간, 교복 입은 남자 고등학생 두 명.

“야 음료수 사줘.”
– “내가 왜 사. 이 ㅆㅂㄴ아.”
“지난 번에 샀잖아. ㅆㅂㄴ 기억도 못하냐?”
– “웃기고 있네.”

두 남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여성을 극도로 비하하는 욕설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유쾌한 우정의 과시’였을까? 남자를 비하하는 상황에 왜 여성에 대한 비속어를 쓰고 있는 것일까.

어제 오늘 겪은 두 장면은 일상어에 스며든 장애인, 여성 차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마 ‘장애인을 비하하지도 않았고, 여성혐오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구체적 대상을 향해 표출되는 차별과 혐오는 내면에 스며든 차별과 혐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3. 테이블에 둘러 앉아 한 학생의 교과서 필기를 열심히 베끼는 사람들. 공부 잘한다는 학생의 필기이니 믿을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
.
.
.
.
.
.
.
.
.
.
.
.
.
.
.

이들은 모두 어머니들이었다.
자식의 글을 대신 써주고 자식의 삶을 대신 사는 이들. 그리고 이를 강제하는 구조.

친구의 이야기에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4. 어떤 책을 읽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어떻게 읽느냐, 나아가 어떻게 사느냐다.

이와 관련하여 J. Rufus Fears 교수는 한 강연에서 Dietrich Bonhoeffer와 Otto Thorbeck의 악연에 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 모두 성경과 일리아드, 소포클레스의 저서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다양한 고전을 접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Bonhoeffer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Thorbeck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다른 자리에 앉게 했을까?

5. 나에게 읽기는 문자 조합의 해독(decoding)이 아니라, 삶의 연장(extension)에 가깝다. 물론 텍스트의 의미를 충실히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읽어낸 텍스트는 어디로 향하는가? 어디에 녹아드는가? 그 방향이, 자리가 중요하다. 결국, 어떻게 읽는가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한국 영어교육을 생각할 때 가장 갑갑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해독에 발이 묶여 해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행위로의 도약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

6. 이런 의미에서 행간읽기(reading between the lines)는 행간쓰기(writing between the lines)로, 이는 다시 선을 넘어서 살기(living beyond the lines)로 확장되어야 한다. 행간은 읽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쓰는 것이고 이를 통해 다른 삶을 사는 행위인 것이다.

저자의 말이 만들어 낸 행간은 해석의 공간이 되고 나아가 삶의 자리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의 궤적으로 우리 삶의 자리를 구획한다. 놀라운 것은 구획의 목표가 가로지르기에 있다는 것이다.

7. 소유所有가 아닌 월경越境의 독서를 꿈꾼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리터러시 연구의 자기성찰

1. 독서를 할 때 텍스트 자체의 독해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재독을 할 때에는 전자에 할당되는 인지적 자원이 줄면서 경험의 허락되는 자원이 확연히 커진다. 그런면에서 재차 읽는 행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정을 약속한다.

2. 그런 면에서 여행이건 영화감상이건 독서건 ‘다시’는 질적으로 다른 반복이다.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 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다시 읽지 않았다면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읽기의 이런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3. 월터 옹의 <구술문자와 문자문화>는 두 문화의 차이를 언어시스템의 차이가 아닌 정신성(mentality)의 차이로 설명한다. (문예출판사의 번역본은 ‘정신구조’라는 용어 사용) 두 문화의 차이에 대한 논의도 놀랍지만 책의 모두에 강조하는 바는 리터러시 연구자들에게 강력한 ‘메타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구술문자와 문자문화에 대한 차이는 언제나 문자문화에 익숙한 이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는 ‘둘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사실 한쪽의 멘탈리티를 장착하고 둘을 볼 수밖에 없다. 공평무사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연구자의 시선만이 있다. 세계는 단숨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한땀한땀 직조된다. 과학사회학이 과학에 대해 던지는 경고를 월터 옹은 리터러시 연구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셈이다.

4.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그의 자전적 회고 <문맹>에서 자신의 고향 헝가라를 떠나 스위스로 이주한 자신이 처했던 언어적 상황을 그린다. 새로운 땅에서 프랑스어에 대해 ‘문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 아름다운 나라가 “‘통합’이나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함”을 말한다. (91쪽)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험과 같이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언어 앞에서 ‘문맹’이 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경계 안에서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한 리터러시를 상정한다. 한국어 리터러시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5.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이 옳지 않은 견해임을 알 수 있다. 리터러시는 언어라는 기준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경험과 지식이라는 기준으로 구획되기도 한다. 특정 직업군마다, ‘덕질’의 영역마다 리터러시의 너비와 깊이가 달라진다. 성장배경이나 정치적인 견해차가 뚜렷한 경우에도 리터러시의 색깔이 달라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리터러시의 복수성과 소통(불)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나의 리터러시가 아니라면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소통의 지평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공론장에서 ‘문해력’ 타령은 타당한 일인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문해력 때문’이라는 말은 폐기 대상이 아닌가? 어떤 세계에 다다를 때 이전의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문맹’이 될 수밖에 없다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말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6. 이 사회의 공론장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사막 메타포를 적용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 사막이 있다. 그 사막에 가기 싫다.’

덧. ‘문맹’이라는 용어를 쓸 때마다 다른 용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고유명사를 차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그대로 썼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텍스트 중심 리터러시 비판

1. 리터러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존재하지만 그 기본이 잘 읽고 잘 쓰는 데 있다는 점을 부인하긴 힘들다. 문해력의 중심에는 텍스트 즉, 문文이 있는 것이다.

2. 텍스트가 리터러시를 정의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리터러시는 필연적으로 텍스트 밖의 세계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잘 읽고 잘 쓰는 것은 텍스트와 관련된 능력이지만 “a literate person”은 종종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3. 이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안읽은 것까지 읽은 척하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그럴듯하게 써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텍스트를 얼기설기 덧대곤 하는 것이다.

4.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 이해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리터러시는 개인에 내재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행위(social practice)이기 때문이다. 리터러시가 골방에서 조금씩 자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힘과 의미는 언제나 사회문화적, 역사적, 관계적 맥락 하에서 실현된다.

5. 따라서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는 두 가지 면을 고려해 재정의되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다.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은 모름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며, 모르는 것보다 아는척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다. 두번째는 사회문화적 컨텍스트와 대화상대에 대한 민감성이다.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은 안다고 다 말하지 않는다. 도구는 휘두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6.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아는 것을 모른척 하는 것. 무지의 인정과 지의 억제. 이 두 가지는 텍스트에 대한 지식을 넘어 삶의 양태에 관한 문제다.

7.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컨텍스트에 대해 겸손해지는 사람들이 있고, 텍스트를 읽을 수록 자신이 커지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텍스트를 먹고 자란 자신을 바라보지만 전자는 텍스트를 통해 커진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수많은 이들이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안 읽고도 읽은 척 할 수 있는’이라는 표현은 징후적이다.

8. 해즐리트의 다음 말은 리터러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정직한 사람은 모욕을 주는 결과가 되더라도 진실을 말하며, 잘난 체하는 사람은 모욕을 주기 위해서 진실을 말한다.” — W. 해즐리트

역경이 눈에 보여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진실을 알지만 누군가를 위해 침묵할 수 있는 지혜.

9. 리터러시의 발달은 자기성찰과 컨텍스트에 대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텍스트만 비대해진 사람은 맥락 없이 말을 휘두른다. 기사의 내용에 관계 없이 언제나 같은 댓글을 다는 사람들처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무지의 신

“대한민국에 영어교육 전문가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답글을 우연히 보았다. “내 주변에 전문가가 없다”를 습관적으로 ‘대한민국에 전문가가 없다”로 바꿔쓰는 분들이 있다. 전문가 자리에 오만가지를 넣어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지닌 분들이다.

언젠가 소위 ‘글로벌 대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만트라처럼 여기는 생각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인재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 담장 바깥에 더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HR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무림고수’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지평 너머에는 반드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 세계는 당장 볼 수 없기에 일종의 ‘신비’로 존재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좁디좁은 나의 세계를 우주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일이자 자신을 신의 자리에 앉히는 행위다. 그렇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무지의 신’이 탄생한다.

나 자신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새겨야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명징한 직조

평론가의 용어에 대해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개인적인 의견을 표할 수도 있겠으나 두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1) 기사 중에서 CTRL+C와 CTRL+V로 뭉툭하게 급조해낸 신랄할 것도 처연할 것도 없는 소셜미디어 중계는 좀 줄었으면 좋겠고, (2) 모르면 무조건 욕하기 보다 단어를 찾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대개의 단어는 찾는 즉시 꽤 명징하게 직조된 정의가 튀어나오니 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9/06/382992/

언어학 그리고 시간

언어학의 분과를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시간의 스케일이라는 측면에서 살피는 일 또한 흥미롭다. 예를 들어 심리언어학은 기본적으로 밀리세컨드(ms, 1/1000 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언어현상을, 대화분석(conversation analysis)는 보통 0.1초 단위에서 벌어지는 언어현상을, 형식언어학은 대개 문장이 발화되는 수 초간을, 담화분석은 사회문화적 변동을 수반하는 시간 속에서 텍스트를 다룬다. 물론 이들 영역에서 시간이 가지는 지위는 상이하다. 심리언어학은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언어를 다루기에 시간은 주요한 변인이자 설명원리이지만 형식언어학에서는 시간이 거세된 채 문장의 구조와 의미가 기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담화분석의 경우 개념적 토대에서는 시간이 중요하지만 실제 분석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쓰기가 더 어렵다?

쓰기가 읽기에 비해 늦게 발달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것이 쓰기가 반드시 읽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하지만 전후관계를 난이도로 착각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쓰기는 자신의 지식과 마음을 글로 옮기는 일이다. 읽기는 글에서 타인의 지식과 마음을 지어내는 일이다. 따라서 쓰기는 자기 경계 안에서 발생하며 읽기는 타인이라는 영역에서 발생한다.

응당 타인을 염두에 두고 쓰고 자신의 삶을 염두에 두고 읽기를 지향해야 하지만 쓰기와 읽기의 기본적인 영역은 자신과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쓰기의 영역에서는 선별이 가능하다.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통해 생성된다. 하지만 읽기는 그렇지 않다. 전심으로 읽으려는 자는 텍스트의 총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짜깁기를 하는 순간 곡해의 골로 떨어질 수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쓰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나는 점점 잘 읽는 일이 어렵다. 노안 때문만은 아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미움받는 법

지난 주 기말고사 일자를 공지했다. 늘 그렇듯 강의계획서에 나와 있는 학기 마지막 수업일이다.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다가왔다. 오래 전부터 계획한 여행을 가야 하는데 시험 날짜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되려 일정을 바꿀 수 없느냐고 물었고, 그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사뭇 단호한 것이 당장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날짜를 물어봐 줄 수 없겠느냐는 너무나 간곡한 요청에 결국 다음 시간에 학생들에게 날짜 변경 가능여부를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날짜를 옮기는 데 모두가 찬성한다면 일자를 변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수업 시간. 여행을 가려는 학생이 리마인드를 해 주었다. 학급 전체에 물었다. “시험 날짜 당겨도 될까요? 저는 한 주 일찍 봐도 상관이 없습니다.” 교실을 둘러보았다. 그냥 예정된 날 보자는 얼굴들이었다.

다시 “그냥 그날 볼까요?”라고 물었다. 여기 저기에서 그러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예정된 대로 봐야겠네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짐을 챙기는데 여행을 가려는 학생이 앞으로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길래 일정대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학생들에게 물어본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그래도 물어보신 게 아니잖아요.”
“???”
“거수해서 다수결 투표하지 않으셨잖아요.”
“아… 제가 교실을 다 둘러봤어요. 그대로 보자는 학생도 꽤 있었고요. 그러면 그대로 봐야죠.”
“그래도 다수결 투표를…”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가버린 학생. 나는 마지못해 ‘미안하게 됐다’는 말을 했다. 여행을 취소하거나 미뤄야 하는 상황을 맞은 그의 얼굴엔 분한 표정이 가득했다.

사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 ‘다수결 투표’가 답이라고 생각하는지. 몇 명이라도 기존의 계획을 선호한다면 그대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다수결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저 인식은 어디에서 온 건가?

황당하게 미움받는 거, 참 별로다. 그렇다고 피할 방법도 없다. 그래도 하나 배운 게 있으니 이제 시험 날짜 변경 요청을 받으면 단칼에 거절할 것이라는 것. 간곡함에는 단호함으로. 기말은 마지막 날에.

– 수년 전 일기에서

집착의 도약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정우성이 난민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글에 달린 댓글. “난민보다는 북한주민 인권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정적으로 끌리는 문제를 강조할 때 “나는 A가 B에 더 강하게 끌린다”고 말하기 보다는 “A는 B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두 단계의 도약이 있다. 먼저 자신의 주관적 믿음에 불과한 느낌이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생각의 위치로 점프하고, 이후에는 객관성을 갖는 명제의 자리로 점프한다.

의지와 실행의 영역에서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을 뚫고 나가려면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론장에서 특히 ‘베스트 댓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행태를 보면 믿음의 도약이라기 보다는 집착의 도약(leap of obsession)에 가깝다. 자신이 꽂혀 있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이 주장은 반박될 수 없다.

집착의 도약이 ‘베스트 댓글’이 될 때 사람들은 집착에 객관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많은 ‘베스트’ 댓글은 사실 ‘워스트’ 댓글이라는 것을.

이 시대 진리의 비결은 좋아요 숫자일 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