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바의 수, 정보의 양, 그리고 탈진실

Posted by on Nov 21,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은 소통을 증가시켰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서 혐오하고 공격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이제 우리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든 분노하고 상처받을 수 있다. 편재하는 고통과 혐오(ubiquitous suffering and hatred)의 시대. 사람들이 벽을 쌓고 오로지 자기편만을 불러들이는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상처받기 전에 믿음을 진실로 만드는 ‘선제공격’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지금, ‘탈-진실’은 ‘탈-상처’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암울하다.

가끔은 개인이 사회적인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이야기하는 ‘던바의 수’와 같이 심리적인 안녕을 유지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와 양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 뇌를 찔러대기 시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발동하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반 발짝 나아가기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썼던 문장들을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강해졌다.

아니 실제로 그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세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 번째는 물론
내 공부의 부족이다.
먹고산다는 핑계로
깊게 공부하기 보다는
얕은 지식을 꿰어 강연을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게으르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강사와 연구자 사이에서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를 본다.

내 삶의 조건들이 못마땅하기도 하고
괜한 비통함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안다.
결국 공부를 지속하는 것은
오롯이 내 책임이라는 것을.

두 번째는,
현실의 완고함이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해오던
‘삶을 위한 영어공부’나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이루기 위해
현실에서 아직 갈 길이 머니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영어교육과
리터러시 교육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 듯하다.

목요일 성미산 학부모 강의 후 접했던
가장 뼈아픈 반응은 이것이었다.

“말씀하시는 방법이 참 좋은데,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을 찾을 수가 없어요.”

학원이든 과외든
삶을 중심에 두고 가르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는 말씀이셨다.

입시도, 내신성적도
학생에게는 중요한 삶의 일부이고
시장은 그것을 중심으로 자원과 전략을
배치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렇기에 더더욱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이지만
끈질기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 번째는,
경청의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응용언어학/영어교육 연구자에게
지속적으로 소통할 ‘현장’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일 것이다.

학생이건 학부모건 교사건
아니면 일반 학습자이건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누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뭔가 질러보려고 한다.
방학때부터 학부모님들과
삶과 교육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어 보려고
이런 저런 궁리중이다.

나의 경험과 지식이
그들의 삶과 만나
또다른 삶이, 실천이, 깨달음이 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쳇바퀴 돌듯 쫓기는 일상이지만
사유와 실천에 있어서는 반발짝이나마 나아가고 싶다.

내 힘으로는 도무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해 주시겠다는 분들이 있으니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큰 일이 아니면 어떤가.
서로의 삶으로 인해
아주 조금이나마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씨익 웃으며
‘이게 사는 거지’라고
중얼거릴 수 있다면.

세대론 유감

Posted by on Nov 1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여러 세대론이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

(1) 어느 세대나 ‘이상한’ 사람들이 일정비율로 존재한다. 해당 세대 내의 권력과 자본의 배분은 개개인의 성품을 압도하는 경향을 만들어낸다.(구조와 시스템의 힘)

(2) 글을 읽는 사람이 누구이든 주변에 해당 묘사에 맞는 사람들이 꼭 있다. 세대론 설명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이 ‘플레이된다.’ (확증편향)

(3) 세대는 역사의 흐름을 어느정도 인위적으로 잘라낸 단위이다. 인위적으로 잘라내는 행위는 본질화(essentialization)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본질화된 묘사는 ‘깔끔하게 핵심을 짚기에’, 설명력을 갖춘 이론의 아우라를 지니게 된다. (‘론’의 위력)

이에 더해 요즘들어 우려하는 것은 다른 세대를 타자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 않나 하는 점이다. 세대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강력한 설명기제로 삼을 때 세계는 더 깊이 분열된다. 말을 거는 세대론이 아니라 침묵을 요구하는 세대론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영어로 논문쓰기 초청강연 후기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초청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무사히 마쳤다. 30-40명 정도의 인원을 예상했는데 거의 150명이 왔다. 대학원생들에게 영어논문쓰기가 꽤나 큰 관심사임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한 대학에서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열었을 때 대학원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적지 않은 분들이 논문에 대한 이해를 대학원 필수과정으로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다. 하지만 강의의 수명은 2년을 넘지 못했다. 강의를 열어주신 교수님 개인의견을 넘어 단과대학 차원의 정규과목 조정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비정규직 교수로서 오래 일을 하는 것이 학교로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논문쓰기를 도제식으로 배운 선생님들은 ‘많이 읽고 많이 쓰면 된다’, ‘피드백을 잘 따라오라’ 정도의 수준에서 논문지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도 충분히 논문을 써내고 학계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성공’의 예가 해당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논문을 읽고 쓰는 훈련의 기회가 체계적으로 주어질 때 대학원생들의 잠재력이 더욱 빠르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학술정보원 팀장님은 강의평가에서 후속강의를 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지만 다시 강의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꼭 내 강의가 아니더라도 대학원의 학술리터러시 교육이 좀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길, 대학이 진짜 돈을 써야 할 곳에 쓰기를 바란다.

#영어로논문쓰기 #학술리터러시

뭉크의 ‘절규’가 말하는 것

Posted by on Nov 10,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기사의 내용은 현시대를 꽤나 흥미롭게 보여주는 유비다. 우리는 <절규>의 인물이 비명을 지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비명소리를 듣고 공포와 근심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 정작 소리를 질러대는 건 우리이고, 절규하는 이는 온갖 비명에 겁먹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I was walking along the road with two friends – the sun was setting – suddenly the sky turned blood red – I paused, feeling exhausted, and leaned on the fence – there was blood and tongues of fire above the blue-black fjord and the city – my friends walked on, and I stood there trembling with anxiety – and I sensed an infinite scream passing through nature.”

https://qz.com/1577796/the-figure-in-edvard-munchs-the-scream-isnt-actually-screaming/

리터러시, 망각에 대항하다

1. 긴 글을 읽고 쓴다는 것, 특히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긴 호흡의 대화를 꾀하는 일은 인간의 ‘단기기억’에 대한 사회문화적 반역이다. 하루만 지나도, 아니 문지방만 넘어도, 냉장고 문만 열어도 삶의 흐름을 놓치는 우리를 구해내려는 필사의 노력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 인류는 본격적으로 텍스트를 매개로 한 기억을 축적해 왔다. 텍스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문자를 기반으로 한 기억의 물화와 공유가 문명의 인프라를 이루고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2. 책이라는 매체의 특징은 그것이 문자로 이루어졌다는 것 만큼이나 엮어내는 데 오랜 시간을 요한다는 데 있다. 집필의 과정에서 작가는 시간과 경험을 단어에, 문장에, 그리고 행간에 새겨넣는다. 편집자는 그 과정 하나하나를 모니터하며 텍스트의 방향을 설정하고 스타일을 잡아나간다. 긴긴 시간은 압축되어 텍스트에 담긴다. 점과 같은 짧은 시간은 확대되어 다차원으로 해석된다.

3. 그렇게 시간을 가로지르며 엮어낸 시간, 경험, 개념, 관점이 ‘우리의 기억’으로 확산되고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가치가 드러난다. 세계는 텍스트를 매개로 기록되고, 이것은 다시 우리 머릿속의 기억이 되어 삶을 이해하는 틀이 되고 하루를 살아낼 다짐이 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정보가 된다. 그런 면에서 책은 시간여행의 도구와는 다른 시간-변형의 기계다.

4.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은 구글북스의 N그램 뷰어 데이터에 기반하여 인류의 집단기억이 점점 더 단기 이슈에 집중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행어의 생애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우리가 집단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논의되는 이슈가 더 많이, 더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진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와 타임라인에 기억을 담아놓고 좀처럼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명멸하는 이슈는 불꽃놀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또 다른 불꽃들이 등장하고 우리는 다시 넋을 잃고 바라본다. 불꽃은 스냅샷으로 남을 뿐 서사가, 지혜가 되지 못한다.

5. 우리는 영상 미디어의 급성장과 책으로 대변되는 전통미디어의 쇠락이 어떤 인지적, 사회적 결과를 초래할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가 긴 텍스트를 쓰고 읽고 토론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감각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반드시 텍스트여야 한다든가, 영상이라 안되고 인터넷이라 안된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슈가 등장과 동시에 퇴장한다는 것, 미디어 생산소비의 호흡이 짧아진다는 것은 우리가 담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6.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교육의 방향을 정함에 있어 ‘잊지 않는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지식의 편재, 검색효율의 증가에 따라 암기의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 이러한 변화가 망각을 부추기는 기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정보를 충실히 쌓는 아카이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이를 잘 캐내고 분석하여 가치있는 미디어로 변환하는 방법이 널리 확산되어야 하고,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속보와 단독보다는 상보와 발굴에 더 큰 점수를 주어야 한다.

7. 이런 면에서 나는 리터러시의 문제를 ‘잊지 않기’의 문제로 생각할 때 앞으로 우리사회가 해야 할 일들이 좀더 구체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잊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정보와 매체는 어떻게 반-망각기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인가? 세계가 끊임없이 지워내고 있는 사람들을, 시간들을 어떻게 우리의 작업기억에 머물게 할 것인가?

#삶을위한리터러시

독서, 유튜브, 그리고 리터러시 지원 생태계

1.
고교생 몇 명이 각자의 손에 책을 들고 서로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야야야 이 책 표지 봐바바. 환상이지? 책이 어떻게 이렇게 빠졌냐?”

“이 문장 끝내주지 않니? 랩 같기도 하고.”

“여기에서 이런 단어를 쓰다니. 작가가 정말 미쳤어 미쳤어.”

“와 정말 최고의 메타포다.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

“첫 문장 이렇게 시작하잖아? 근데 마지막에 또 이렇게 끝난다. 뭔가 연결된 느낌이지 않아?”

“이거 읽고 나니까 이 작가 다른 작품들도 다 읽어보고 싶다. 같이 읽어볼 사람?”

문학을 가지고 이렇게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처음이다. 왜냐하면 방금 내가 상상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2.
영상은 상황이 다르다.

먼저 나만해도 재미있는 영상을 보거나 하면 링크를 짝에게 보내곤 한다. ‘이거 한번 봐바바’ 하면서. 아주 긴 영상이 아니라면 링크를 공유하는 게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유튜브는 채널을 구독해서 영상을 받아보곤 한다.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이 언제 업로드되나 궁금해하기도 한다.

영상은 검색하면 관련 영상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추가 시청을 유도한다. 거기에 ‘기꺼이’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영상은 내가 써야 할 시간을 처음부터 알 수 있다. 4분 짜리 영상은 4분이면 끝난다.

3.
그렇다면 책도 이렇게 ‘소프트한’ 포맷으로 변화해야 하는가?

사실 이런 시도는 웹소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지만 책이 말랑말랑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크게 변화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식과 이야기의 포맷이 갑자기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텍스트가 스스로의 전통을 무너뜨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리어 밀도있는 지식,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텍스트 사이를 여행하는 일을 지원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의 몸은 텍스트에 적응하기 전 영상 생태계에 먼저 적응한다. 이 점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4.
텍스트가 본연의 자리를 지킨다는 전제 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독서교육은 인스타그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글쓰기 교육은 페이스북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학교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리터러시 교육에 있어 ‘유튜브와 같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인가?
동네와 동네 도서관은 어떻게 모든 주민들을 위한 리터러시 생태계를 만들어 낼 것인가?
연구소와 대학은 리터러시 생태계의 빈 지점들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5.
영상도 텍스트도 아는 만큼 보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상은 지각(perception)에 기반한다. 매우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면 소리와 이미지는 지각되고 처리되는 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텍스트는 기호이다. 기호는 실제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며, 무언가를 상징하는(stand for)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문장을 읽어가며 해당 언어에 대응하는 개념이나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한번 더 그려내야 한다.

이 근본적인 차이가 텍스트와 영상의 소비 및 공유행태의 차이를 낳는다. 결국 텍스트를 영상과 같이 소비할 수도 공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영상이 소비되고 공유되는 방식에서 텍스트가 배워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6.
책은 여전히 책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리터러시를 지원하는 플랫폼의 진화는 이제부터다. 어떤 방향이어야 할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시점이 다가오는 것 같다.

페이스북 정도의 범용 플랫폼이나 서적판매와 블로그 생태계가 결합된 여러 서점 사이트를 넘어서는 리터러시 지원 플랫폼이 존재할 수 있을까?

7.
이미 많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일부 사교육에서 텍스트와 영상을 아우르는 리터러시 교육이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한숨이 나오는 건 중고교를 거치면서 읽기쓰기의 지평이 급속하게 축소된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8.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의 중요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미디어 생태계의 성장와 소비행태가 지속된다면 텍스트를 지긋이 읽어내는 능력이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계급간 리터러시 격차가 더욱 커질 것이다. 메리언 울프는 영상과 텍스트를 모두 소화해 낼 수 있는 유연한 뇌를 키우자고 말하지만, 그런 능력이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광활한 인터넷의 세계가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학습의 장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헤어나올 수 없는 구덩이가 되듯, 밀도있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에 있어서도 계급간의 격차가 급격히 커질 위험에 있다. 이것은 소통의 위기이며 민주주의의 위기이며 공동체의 위기이다. 이 상황에 대해 좀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고, 그에 기반한 리터러시 지원 생태계의 구축이 필요하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리터러시생태계

온라인, 오프라인, 그리고 독서모임

Posted by on Nov 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관계를 반듯하게 가르는 건 쉽지 않다. 온라인에서 더 속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오프라인에서 자주 만나더라도 형식적인 네트워킹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관계의 양태나 강도는 단순히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나뉘지 않는다. 온라인의 관계가 더 피상적이라고 단정하는 건 온라인에서 우정을 가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오프라인을 그저 피곤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온라인을 자기 성향에 맞는 ‘따스한 사람들’로만 채워놨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둘 사이의 차이가 없는 건 아니다. 오랜 오프라인 지인이 온라인에서 선뜻 동의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 그간의 관계를 기반으로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오랜 시간 좋은 인상을 쌓아왔던 상대라 할지라도 오프라인에서의 언사가 실망스러울 경우 그간의 이미지가 오해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판단하기 쉽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두에 밝혔듯 관계를 성장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쌓는 관계, 자세와 제스처를 협응하며 대화를 나누는 관계는 텍스트로 쌓은 관계와 다른 측면이 있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욱 우월하다거나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온라인에서의 소통과 오프라인에서의 소통은 경험에 다른 질감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플랫폼’으로 매개되는 관계라면 후자는 특정한 날씨, 조명, 공간, 거리, 마실 것, 의자와 탁자, 룸톤(room tone), 목소리, 간식, 웃음 등으로 매개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유대가 주로 텍스트의 얽힘에 기반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유대는 무엇보다 함께 있음(co-presence)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풍성한 텍스트의 향연이 펼쳐지긴 하지만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동시에 감쌀 수 있는 물리적 맥락은 없다. 그에 비해 후자의 경우 대화의 풍성함과 관계 없이 만나는 시간의 구체성이 있고, 이동의 수고가 있고, 기억의 장소성이 있다.

최근 독서모임이 붐이라고 한다. 겨우 한 달에 한 번이지만 나 또한 책읽는 모임에 나가고 있다. 이런 모임이 좋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장점을 결합하려는 시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중 대다수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지식과 지혜를 나누면서도 사람을 만나 함께 있고 싶은 소망이 있다. 관계 속에서 텍스트가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 경험을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차 한잔이 감싸주는 기억을 만들어가고 싶어한다. 이것은 홀로 읽기와는 다른 텍스쳐(texture)를 텍스트에 부여한다.

한편 책을 매개로 하는 만남은 개개인의 고유성이 너무 튀지 않게 만드는 역할도 하지 않나 싶다.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아무 말이나 지껄일 수 없는 공간. 책을 정하고 토론의 룰을 정하는 순간 말과 행동의 한계가 구획되는 공간. 그렇기에 독서모임은 건강한 긴장을 갖지만 급진적 취향과 주장을 적절히 통제하는 공간이 된다.

요는, 독서모임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소통의 역동성을 적절하게 매개한 데 있고, 그 역할을 책이 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흔히 책은 디지털 미디어와 대비되는 오프라인 미디어로 생각되지만 독서모임의 경우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가교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아, 오해는 마시길 빈다. 온라인 커뮤니티 없이 오프라인 독서모임이 굴러가는 경우도 많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온라인에서 종일 텍스트를 접하는 사람들이 오프라인 모임에 합류할 때 책이 훌륭한 매개자(mediator)가 된다는 뜻이다.

덧.

몇 해 전부터 생각만 해온 <First chapters> 읽기모임은 언제 시작할 수 있으려나. 관련 포스트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책 한 권을 모두 읽고 와서 생각을 나누는 방식도 좋지만 저처럼 이책 저책 유랑하길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책의 첫 장 혹은 서문을 꼼꼼히 함께 읽고 나머지를 읽을지는 각자가 결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겁니다. 책읽기를 제안한 사람은 저자 정보, 책 소개를 준비해 오구요. 첫 챕터를 돌아가며 소리내어 읽습니다. 중간중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토론이 진행되죠. 대개의 책들은 첫 장만 꼼꼼히 읽어도 저자의 집필 의도와 전체의 내용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독서모임 포맷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독서모임

수업 잡감

언어 빅데이터에 대한 수업을 하고 있다. 프로그래밍이나 자연어처리 기법과 같은 기술적 내용은 아니고,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의 관점에서 구글북스나 코퍼스 등 대용량 언어 데이터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 새로운 관점과 도구가 언어학습에 대한 영감을 준다는 의견이 하나고 ‘그래서 어쩌라고’가 하나다. 몇 해를 진행해 온 수업인지라 이런 반응은 익히 예상한 바다.

그런데 후자의 의견을 지닌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이런 걸 왜 영어교육과에서 다루느냐’는 식의 항변이 섞여있다.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못할 것들을 왜 몇 주에 걸쳐 다루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차피 영어실력 향상에 도움도 안되는 개념과 도구들 아니냐는 항의가 깔려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언어교육이 교재에 묶여 있는 상황에 대해 고민해 왔다. 언어를 사회문화적 총체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잘 편집된 교과서와 문제집의 형태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갑갑했던 것이다. 그런데 빅데이터를 활용한 활동은 언어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잘 보여줄 수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교과서와 수능교재에 갇힌 영어를 어느 정도 해방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당장 학습자들의 영어실력을 올려주거나 시험을 치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어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심어주는 데는 유효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양한 활동을 준비하면서 교사 또한 언어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다.

현실만을 보면 항변하는 학생들의 의견이 맞다. 교실에서, 방과후 활동에서 빅데이터 같은 거 다루면 수능에 도움이 되겠나? 내신성적 높이는 데 소용이 있겠나? 당연히 성적에 도움은 안된다. 그런데 교육을 그렇게만 바라보면 교사는 뭐가 되나? 또 학생은 뭐가 되나?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지 않나?

어떤 수업을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 같다. 강의평가에서 불만이 터져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생각하는 건 ‘무난한 수업’보다는 ‘김성우에게만 들을 수 있는 수업’을 하자는 것이다. 내가 대단한 선생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내 수업이라는 이야기다.

꼰대가 되지 않는 것만큼 맞춰주기만 하는 선생이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수업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현실을 바꾸는 꿈을 꿀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해야 하니까. 교육은 사회의 필요에 복무함과 동시에 사회 자체를 변혁해야 하니까.

PISA의 문해력, 실질적 문해력

최근 다양한 매체에서 리터러시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표준화된 리터러시 개념으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자료 중 하나는 PISA의 읽기능력 평가 결과인데요. 읽기를 포함한 OECD의 PISA 평가는 크게 다섯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참고로 PISA는 OECD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의 약자입니다.)

(1) 읽기 리터러시
(2) 수학 리터러시
(3) 과학 리터러시
(4) 문제해결능력
(5) 협력적 문제해결

PISA에 따르면 읽기 리터러시(통계나 수학, 기타 영역의 리터러시와 구별되는 읽기영역에서의 리터러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주어진 목표를 성취하고, 지식과 잠재력을 성장시키며, 사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록된 텍스트를 이해하고 사용하며 그에 대해 숙고하고 텍스트를 가지고 상호작용하는 행위.”

이와 같은 정의는 일상의 읽기 활동에 관여하는 과정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읽기 평가에 있어 핵심을 이루는 구인(construct)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PISA와 PISA-D 테스트는 읽기를 평가함에 있어 크게 세 가지 축을 상정합니다.

(1) 텍스트 (2) 상황 (3) (읽기) 과정 (혹은 양상)

즉 쓰여진 글, 그 글이 등장하고 논의되는 상황, 그리고 글을 읽어내는 데 관여하는 과정이 중요시된다는 것이죠.

PISA-D( PISA for Development)는 이중에서도 특히 과정(process)에 방점을 두는데요. 크게 다섯 가지 과정이 상정됩니다.

(1)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해(literal comprehension)
(2) 정보 추출(retrieving information)
(3) 전반적인 이해의 형성(forming a broad understanding)
(4) 해석해 내기 (developing an interpretation)
(5)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숙고와 평가(reflecting on and evaluating the content of a text)

즉 어떤 사람이 텍스트를 잘 이해했는지 보려면 텍스트를 이루는 기본 단어와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는가, 해당 문서에서 적절한 정보를 선별해 낼 수 있는가,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진술할 수 있는가, 특정한 관점에서 해당 텍스트를 해석해 낼 수 있는가, 텍스트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가를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평가하기 위해 여러 포맷의 텍스트를 활용하는데요. 에세이나 신문기사 등 연결된 텍스트는 물론 정보를 담은 표나 일정표 등의 텍스트도 활용합니다. 아울러 개인적, 공적 영역의 텍스트, 교육기관이나 직장에서 사용되는 텍스트를 두루 활용하지요.

그런데 저는 PISA 등의 표준화 평가에서 말하는 ‘읽기능력’ 혹은 ‘독해력’이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이야기되는 ‘문해력’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 맥락을 고려한다고는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읽기능력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특정한 텍스트와 맺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요구되는 읽기능력은 단순히 텍스트와 개별 독자간의 관계만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텍스트의 내용 뿐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여기에 이 텍스트가 쓰여진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를 소화하는 능력으로서의 읽기 리터러시는 실제 상황의 반쪽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독해능력이나 쓰기능력을 평가하는 도구는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복잡다단한 맥락과 관계를 온전히 포괄하지는 못하죠. 그렇기에 우리는 텍스트를 완벽히 해석하는 데 필요한 리터러시를 논의함과 동시에 관계와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리터러시를 논의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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