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

Posted by on Aug 21,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몇 달 간의 브레인스토밍과 쪽글 작성을 거쳐 목차와 뼈대를 잡기 위한 10여 시간의 대화를 마쳤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떼었지만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가 된다. 무엇보다도 조금 다른 분야에 있지만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분과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이번 대화야말로 나에게 ‘삶을 위한 리터러시’의 경험이었던 셈이다. 이 경험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남은 구간도 열심히 달려봐야겠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비유 둘.

“독서는 확인이 아니라 발견을 위한 여행이어야 합니다. 이 여행에서 종착지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끝없이 새로운 곳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죠.”

“자신 안에 쌓는 바벨탑이 아니라 서로를 잇는 다리로서의 리터러시를 상상하고 싶습니다. 나를 빛내는 문화자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기예로서의 리터러시 말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리터러시 교육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

1. 리터러시를 가르치는 게 어려운 이유는 여러 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글자 읽기, 글읽기, 쓰기, 독서교육, 가족 내 리터러시 활동, 학습습관 발달, 새로운 미디어 활용하기, 사회적 인프라 확보 등등 다양한 영역에서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2. 하지만 리터러시를 사회적 소통의 인프라스트럭처로 봤을 때 리터러시 교육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3.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은 단지 글자와 단어를 나열하는 행위가 아니다. 독자와 저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엮어 글을 이해하고 써내기 때문이다. 리터러시는 문자해독이나 생산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를 직조하고 공유하는 행위다.

4. 3과 조금 결이 다르지만 읽기와 쓰기는 흔히 상향식 정보처리(bottom-up processing)와 하향식 정보처리(top-down processing)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적 정보처리(interactive processing)으로 이해된다.

5. 내 눈 앞에 텍스트는 분명한 실체가 있고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컨텍스트는 다르다. Teun A. van Dijk이 이야기하듯 컨텍스트는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 사건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컨텍스트는 특정한 시공간이나 사건 등에 대한 심성모델(mental model)이다. 그리고 이 심성모델은 단지 글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 하나, 발음 하나 하나에 적용된다. (나의 ‘공정’과 당신의 ‘공정’이 판이하게 다르다면 ‘공정한’이라는 말은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6. 심성 모델은 순식간에 바뀌지 않으며 즉석해서 생성될 수도 없다. 오랜 기간의 경험과 지식, 독서경험 등이 쌓여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정신적 모델이 형성된다.

7.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심성모델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고 싶어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모델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있으면 쉬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돼?”

사실 소셜미디어에서 우리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관련기사:
타인도 내 의견에 동조한다는 ‘착각’에 숨은 물리학 법칙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584&aid=0000005529

8. 여기서 사회적 소통의 인프라로서의 리터러시 교육이 어려운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나와 다른 심성모델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생각이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로버트 퍼트넘이 <우리 아이들>에서 지적했듯 사회적 섞임(social mixing)이 사라진 시대에 사회는 점점 양분화되고 또 하위 집단 사이의 단절은 강화된다.

관련기사:
“갈산초로 통학구역 변경해달라” 소송 낸 목동 학부모들 패소
https://news.v.daum.net/v/20190818175216194

9.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삶을 위한 리터러시”의 초반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이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글을 읽고 쓰고 비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좋은데 결국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커뮤니티를 축조하고 그 안에서 동일한 담론을 반복 확대하는데 활용된다면 비극 아닌가.

10. 물론 교육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실 그래서 더 심란하다.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교육은 뭘 할 수 있는가? 계속 뭔가 하겠지만 낮게 깔린 우울과 패배의식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다.

11. 결국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의 기조가, 발달의 전 과정이 새로와져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이상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리나마나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우리 모두가 필요한 작업이다.

We’re all in this together.

12. 결론적으로 계급과 이념의 문제를 제외하고 리터러시를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핵심은 언제나 문자가 아니라 사회에 있었다. 텍스트의 문제는 컨텍스트의 문제이다.

컨텍스트를 지배하는 자가 텍스트를 지배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비판적 리터러시의 기본: 텍스트 꼼꼼히 읽어내기

“비판적 리터러시”는 다양한 층위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세계관과 철학, 배경지식과 텍스트의 연결, 타인의 텍스트와 해당 텍스트의 비교, 저자의 이전 글과 해당 텍스트의 비교 등 실로 다양한 방면에서 접근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텍스트 자체를 꼼꼼히 읽어내는 것입니다. 내용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언어적 장치들을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아래에서는 힐러리 쟁크스 저 <리터러시와 권력> 4장 “텍스트 비판적으로 읽기”에서 논의된 텍스트 분석을 위한 글의 특징들(textual features)을 알아보겠습니다. (책에 소개된 목록의 일부이며, 각 항목에 제 나름의 설명을 달았다는 것을 밝힙니다.)

1. 어휘화: 해당 텍스트에 사용된 어휘는? –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는지 검토한다. 해당 어휘의 선정은 적절한가? 대안은 없었는가? 특정 어휘의 선택이 특정 사회계층이나 소수자에게 차별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은 없는가?

2. 과어휘화: 같은 현상이 여러 어휘로 표현되고 있는가? 한 가지 현상이 다른 단어로 반복되어 표현될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 하나의 개념이 여러 어휘로 변주되어 표현되면서 어떤 개념적, 수사적 힘이 발휘되는가?

3. 어휘적 응집성: 한 어휘의 동의어, 반의어, 연관어 등이 어떻게 배치되고 연관을 맺는가? 텍스트에 제시된 어휘간의 관계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가?

4. 비유: 텍스트 내에 어떤 비유가 사용되었는가? 그들은 어떤 효과를 갖는가? A라는 세계와 B라는 세계가 비유로 연결될 때 그들 사이의 사상(mapping)은 적절한가?

5. 완곡어구: 특정 현상을 돌려 말하는 부분이 있는가? 좀더 직접적인 표현이 사용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어구를 선택했다고 판단되는가? 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6. 타동성: 이것은 시스템-기능 언어학의 개념으로 주로 동사로 표현되는 텍스트 내의 과정(processes)들 중 물질적 과정, 존재와 소유, 사고, 감각 및 인지, 말하기, 행위하기 등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덧. 이에 대해서는 몇 마디로 요약하기 힘드네요. 관심있는 분들께서는 아래 아티클을 참고하세요.

https://staff-old.najah.edu/…/Functional%20grammar%20proces…

7. 태: 능동태와 수동태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수동태의 경우 가려지는 것은 무엇인가? 특정 요소의 생략과 함께 인과나 권력관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힘들어지지는 않는가? 문장 단위에서 책임소재는 어떻게 특정되는가?

8. 명사화: 어떤 명사화(nominalization)가 사용되었는가? 주체와 대상을 수반하는 동사적 과정이 명사로 바뀔 때 무엇이 탈각되는가?

9. 간접/직접 인용: 누구의 말이 왜, 어떻게 인용되는가? 그 인용은 적절한가? 인용시 어떤 동사가 사용되는가? 추정하다? 주장하다? 가정하다? 예상하다?

10. 말의 차례: 텍스트에서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한다면 그들은 어떤 순서로 말하는가? 말의 분량이나 순서에 있어서 불평등은 없는가?

11. 긍정과 부정: 어떤 문장이 긍정문으로 제시되고 어떤 문장이 부정문으로 제시되는가? 왜 그렇게 제시되는가?

12. 법성: 어떤 명제는 사실로 진술되고 어떤 명제는 가능성으로 제시되는가? 개연성과 사회적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들이 존재하는가? 문장의 인식론적, 윤리학적 위상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13. 대명사: 상대를 포함하는 we와 그렇지 않은 we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 ‘우리’라는 말에는 누가 포함되고 누가 포함되지 않는가? 화자의 ‘we’가 당신이 생각하는 ‘we’와 같은가?

14. 정보의 배열: 정보는 어떤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가? 그러한 배열의 효과는 무엇인가? 어떤 대안이 있는가? 혹 정보배열에 따라 특정 인과관계가 암시되는가?

15. 논리적 연결사 및 접속사: 문장들간의 논리적 관계는 어떤 언어적 장치로 표현되는가? 특정 진술에서 다음 진술로의 전환은 자연스러운가?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을 검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을 적용해 보면서 텍스트가 하나의 단일한 메시지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인상을 깨고 여러 가지의 목소리와 정보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직조물(texture)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은 텍스트로 촘촘하게 짜여져 우리에게 전달되며 이는 몇 개의 아이디어로 독자의 뇌 속에 표상됩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의 형성을 역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으로 분석하면 이들 아이디어가 가지는 한계와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리터러시는 바로 이 작업에서 시작됩니다.

출처: 힐러리 쟁크스 저, 장은영, 이지영, 이정아, 장인철, 안성호, 김혜경, 양선훈, 허선민, 서영미, 김은영 옮김, 김성우 감수 <리터러시와 권력> (사회평론 아카데미) 133-136

우리의/그들의 문장은 어떤 세계를 담는가? – 문법을 보는 새로운 가능성과 리터러시 교육에 대하여

1. 문법은 문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규칙이기 이전에 세계의 중단없는 사태를 분절적 텍스트로 변환하는 도구이다.

2. <단단한 영어공부>에서도 논의했듯 우리는 문법을 ‘형법’으로 배워왔다. 조항을 외워서 틀리고 맞고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법의 본질은 우리의 물리적, 심리적 세계를 텍스트화하는 도구라는 사실에 있다. 그런 면에서 문법책은 ‘형법서’가 아닌 ‘마법상자’가 되어야 한다.

3. 세계는 문법을 거쳐 어휘의 옷을 입고 텍스트가 된다. 내가 바라보는 우주는 소포로 싸서 배송할 수 없지만 텍스트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과 생각은 나의 뇌와 몸에 ‘갇혀’ 있지만 문법의 도움으로 텍스트화되어 누구에게든 가 닿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최초의 가상현실(VR)은 최근의 IT 기술이 아니라 텍스트의 발전에서 이미 구현된 것이다!

4.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문법을 좀더 크게 이해할 수 있다. 단지 텍스트 뿐 아니라 세계와 의식이 특정 매체(텍스트, 영화, 만화, 그림, 웹툰 등)로 변환되는 방식을 총칭하는 메타용어(meta-terminology)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가 영상으로 변환되는 일련의 규칙들을 영화의 문법이라 할 수 있고, 일상이 웹툰으로 전환되는 데 동원되는 기법들을 웹툰의 문법이라 할 수 있다. 매체마다 다른 문법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세계가 변환되는 데 개입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위상을 지닌다.

5. 다시 언어로 돌아와 보자. 시스템-기능 언어학(SFL: Systemic Functional Linguistics)에 따르면 문법은 물리적, 심리적 세계에서 특정 참여자(participants)를 ‘캐스팅’하고, 이들과 관련된 과정(processes)을 설정하고, 참여자들과 과정이 어떤 환경(circumstances)의 영향을 받는지 설명한다. 예를 들면 누가, 무엇을, 언제/어디서 했는지를 텍스트화하는 것이 문법의 역할이다.

6. 여기에서 비판적 읽기의 가능성이 도출된다. 텍스트는 세계를 특정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에 따라 참여자와 과정, 환경을 제시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도구로 동원되는 것이 문법이다. 따라서 비판적 읽기는 ‘누가 캐스팅되었는가’, ‘왜 이 과정이 부각되었는가’, ‘제시된 환경은 가장 중요한 환경인가’를 따져물을 수 있다.

7. 안타깝게도 한국 영어교육에서 문법은 ‘문장의 규칙’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문법의 이런 기능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총체에서 어떤 참여자들을 불러내고 어떤 관계들을 설정하고, 어떤 환경 하에 놓여있다고 진술할 것인가이다. 우주가 텍스트가 되어 책에 담기는 일련의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8. 이 점에서 문법은 비판적 리터러시 교육과 만난다. ‘이 문장이 문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넘어 ‘이 문장의 캐스팅은 적절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문장에서 3인칭 단수가 s가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왜 이 문장은 3인칭으로 진술되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이건 부사구이니 5형식을 판단하는 데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왜 수많은 환경 중에서 이 내용이 부사구로 선정되었을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9. 나아가 그들의 대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이 텍스트는 이렇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가?’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이 이런 텍스트를 만들어 내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핵심이다.

10. <단단한 영어공부>에는 영어의 수동태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한 독자는 이 부분을 보고 ‘너무 오버한다’고 평가를 하기도 했지만, 문장의 문법적 특징이 담론의 질서를 은밀히 코드화한다는 지적은 이의를 달기 힘든 공리와도 같은 주장이다.

11. James P. Gee의 지적과 같이 문법은 선택의 시스템(a system of choices)이며, 선택에는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는 그 선택을 좀더 면밀하게 따져들고 다른 누군가는 아무 생각없이 내지를 뿐이다.

12. 그런 맥락에서 문법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선택의 무게’에 대한 인식을 키우는 것이며, 이는 리터러시 교육의 핵심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

텍스트의 세계는 선택된 세계이다.
우리의 선택에는 윤리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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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태의 정치학

이번에는 수동태를 살펴볼까요. 수동태를 공부할 때는 수동태의 형태(be + 과거분사+by~)보다는 수동태가 묘사하는 여러 사건들에서 수동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그것이 어떻게 언어로 표현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Many immigrants are deprived of their rights.
(많은 이민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한다.)
(2) The current immigration laws deprive many
immigrants of their rights. (현재의 이민법은 많은 이민자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한다.)

두 문장은 하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동태 문장 (1)에서는 ‘박탈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민자들의 현재 상태만 그려 냅니다. 하지만 능동태 문장 (2)에서는 이민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주체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현재의 이민법을 입안하고 가결한 사람들이 존재하겠지요. 이 같은 분석을 통해 수동태라는 언어적 장치에서 인간이 경험적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능동태나 수동태를 선택하는 일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 즉 ‘수동태의 정치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단단한 영어공부> 중에서

영화 Arrival 수업 메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Arrival>은 언어와 소통, 시간과 경험, 기억과 운명 등에 대한 풍부한 메타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가 언어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인 언어와 사고의 관계인지라 제가 담당하는 <언어와 사고> 과목에서 보기에 안성맞춤이었죠. 지난 학기 영화를 보고 수업을 진행했는데요. 당시 메모했던 내용들을 소개합니다. (참고로 저는 이 영화가 지금 작업중인 #삶을위한리터러시 의 주제의식과 잘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1. 이 영화는 외계인과 인간의 조우를 기본 스토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지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영화를 꼼꼼히 보고 나서 이 구도를 우리 삶의 어떤 영역에 대한 메타포로 볼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2. 영화의 제목은 <Arrival>이지만 한국에서는 <컨택트>로 개봉되었습니다. 이 두 제목에서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영화를 본 후에는 이 두 제목의 차이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3. 언어학자 Louise Banks와 물리학자 Ian Donnelly의 첫 만남에서 Ian은 Louise가 쓴 책의 한 구절을 읽어줍니다. “Language is the foundation of civilization. It is the glue that holds a people together. It is the first weapon drawn in a conflict.”라는 부분이었죠. 이 부분이 영화의 처음에 배치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언어학에 관한 책을 쓴다면 언어를 어떻게 멋지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4. 왜 영화의 주인공이 하필 언어학자와 물리학자일까요? 사실 학자 둘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무척 드물죠.

5. “그들이 반응을 보여도 뜻을 모르죠”라는 대사를 만나게 될 겁니다. ‘반응(response)’과 ‘뜻(meaning)’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어떤 경우에 반응을 보여도 뜻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반응의 뜻을 상관하지 않고 그저 반응하진 않나요?

6. “So what happens now?” “They’ll arrive.” – 헵타포드와의 첫 만남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들이 올 겁니다.’라고 답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영화의 제목인 ‘Arrival’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냐는 질문에 ‘올 거야’가 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7. 우주선이 세계 도처에 나타났을 때 뉴스에서 기독교계의 해석이 스쳐 지나갑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 UFO가 출몰한다면 기독교계를 비롯한 여러 종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8. Louise가 가르치는 첫 단어는 “Human”입니다. 이건 적절한 접근법일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혹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9. 8번의 질문과 연결해서 미지의 존재를 만났을 때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려 하는 것은 적절한 일일까요?

10. 언어를 가르침에 있어서 질문을 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질문이 무엇인지 이해시켜야 한다’는 장면이 나오죠. 인간의 언어에는 어떤 가정들이 담겨 있나요? 평서문, 의문문, 감탄문, 부정문, 가정 등의 범주는 우리에게 어떻게 학습되나요?

11. Louise는 “They need to see me.”라고 하면서 우주복을 벗습니다. 이것은 일련의 방역체계를 무력화시키는 일입니다. 이 장면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12. 헵타포드 둘에게 “애봇”과 “카스트로”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 같은 labeling은 반드시 필요한가요? 우리에게 이름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부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13. 영화를 관통하는 학설은 사피어-워프 가설입니다. 워프 가설의 내용을 살펴본 바 있는데요. 이 내용은 영화 속에 잘 녹아들어 있나요?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그렇지 않은가요?

14. 각국간의 교신이 끊기고 소통이 단절되는 순간 전쟁은 가까워 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아래 대사를 실마리로 이에 대한 생각을 전개해 봅시다.

“We need to sit on this information till we know what it means, so we aren’t sharing it with our enemies. We must consider the idea that our visitors are prodding us to fight among ourselves until only one faction prevails.”

15. Louise의 딸 Hannah는 앞뒤로 읽었을 때 동일한 팰린드롬(palindrome) 즉 회문입니다. 영화의 구성 또한 그렇게 되어 있죠. 헵타포드의 언어도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련의 장치들이 노리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서 이런 ‘회문적’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고도 단선적 사고에 갇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16. 애봇과 카스트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이 맞을 운명을 이미 알고 지구에 왔습니다. Louise도 영화의 말미에 ‘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서 삶의 방향을 바꿀 것인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죠. 지구상에 온 외계 생명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17. 아래는 제가 ‘시간과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Arrival의 원작인 <Story of your life>에 대해 써본 쪽글입니다. 본격적으로 과제를 작성하시기 전에 한두 가지 테마를 가지고 영화에 관한 글을 써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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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이라는 주제로 본 Arrival>

1. Arrival의 원작인 <Story of Your Life>는 나레이션 형식으로 진행된다. “I remember”가 자주 등장해서 세보니 약 12번 정도이다.

2. 우리가 보통 remember를 쓰는 것은 다음 두 상황이다.
(1) 현재 말하는 시점보다 앞서 일어난 일. 즉 과거의 일.
(2) 현재 말하는 시점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 즉, 미래의 일.
따라서 영어를 기준으로 remember 다음에는 I remember that I did that. 이나 I remember that I will have to do it. 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물론 remember 다음에 조금 다른 내용이 올 수도 있다. Remember you are a teacher.는 “너의 교사로서의 지위를 잊지 말아라”는 뜻이 될 것이다.

3. Arrival의 나레이션 중 다수는 “나는 네가 …할 것이라는 걸 기억한다”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희한하다. 분명 기억하고(remember) 있는데, “~했던 것”도 아니고, “(일어나지 않았지만) ~할 것”도 아니다. 인간의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 형식인 “(이미 일어난 일인데) ~할 것이라는 걸 기억한다”이다.

4. <과거-현재-미래>가 방향이 있는 직선이 아닌 하나의 평면에 들어올 때 Remember는 Know와 동의어가 된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과 아는 것의 구분이 없어진 세계. 예측도 없고 회상도 없는, 모든 것이 ‘지금’인 세계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

5. 그렇다면 필자가 쓴 “이미”, “과거”, “미래” 등의 단어는 쓸모가 없어지는 세계 아닌가.

6.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런 세계를 경험하고 체화한 것은 주인공 루이스일 뿐, 다른 이들은 이 세계를 이처럼 인식하지 않는다. 수십 억의 인구 중 오로지 한 사람만이 이 세계를 실제로 경험한다.

7.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Remember = Know”인 사람과, 이 두 가지가 구분되는 사람 사이의 소통은 가능한가?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인가? 사고체계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언어’로 소통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8. 언젠가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뇌가 생성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초고해상도로 스캔하고 이를 집적된 정보시스템으로 만들면, 이 시스템은 일종의 ‘헵타포드적’ 인지를 할 수 있을까? 우리 삶의 모든 정보가 집적된다면, 그 모든 기억을 어떤 랙(latency)도 없이 끄집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을 직선이 아닌 전체로 인지할 수 있을까?

9. 한편 언어 자체가 헵타포드적 성격을 띄고 있지 않나? 수많은 시간을 고스란히 흔적으로 담고 있는 시스템. 하나의 노드가 전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토폴로지. 공시성과 통시성이 엇갈리는 하나의 점. 지금 내가 쓰는 ‘시간’이나 ‘기억’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가 약속한 기호이자 내 삶이 채워 넣은 의미장이니 말이다.

10. 가정해 보자. 꿈 속에서 다음 날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나를 만나고, 그것을 일기로 기로했다. 다음 날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계속해서 데자뷔를 느낀다. 이를 다시 기록으로 남긴다. 이 모든 기록을 읽은 누군가가 나의 프리젠테이션을 기억한다. 얼마 후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는다. 몇 년 후 그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렇게 기억은 시간을 거스르고 인간의 뇌를 ‘숙주삼아’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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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헵타포드의 ‘문자’에 대한 쪽글입니다.

영화는 인간과 헵타포드가 문자를 통해 소통하는 설정을 택합니다. 그런데 헵타포드의 ‘문자’가 인간의 문자 체계에 딱 들어맞는 체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시각채널(visual channel)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문자체계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헵타포드의 ‘문자’는 인간의 문자체계와 유사하면서도 제스처의 특성을 갖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구어/문어 이분법이 딱 들어맞지 않는 체계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말/글 체계가 헵타포드의 언어에 그대로 들어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글자’를 쓰는 방식이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무언가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주로 손과 팔의 움직임을 통해 특정 메시지를 만들어 내듯이, 그들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밖으로 내뿜어서 특정한 패턴을 만들어 냅니다. 신체 외부의 매개를 이용하는 인간의 문자체계와는 사뭇 다르죠.

또 하나는 그런 문자가 잠시 있다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문자 시스템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쓴 글자야 파도가 와서 쓸려가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잠깐 옆으로 새자면 이런 면에서 ‘혈서’는 일반적 기록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점하게 되는 쓰기방식입니다. 인간의 내부에서 무언가를 끄집어 내서 기록을 하거든요. 게다가 색깔도 엄청나죠.) 위의 두 의미에서 헵타포드의 ‘문자’는 인간의 제스처와 문자의 특성을 묘하게 통합하고 있는 시스템으로 보입니다. 반반 섞어 놨다는 뜻은 아니고, 오묘하게 통합된 시스템이죠.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헵타포드의 음성언어: 헵타포드의 문자 = 인간의 음성언어: 인간의 문자 라는 등식은 조금 위험해 보입니다.
(2) 인간의 언어가 구어/문어라는 이분법을 명확히 보이는 데 반해 헵타포드의 언어는 구어와 문어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3) 그들의 문자체계는 인간이 구사하는 구어의 주요한 부분인 제스처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Engadget의 흥미로운 아티클을 소개합니다.

<Arrival>을 보며 헵타포드의 언어가 치밀하게 그려졌다 생각했는데 이런 뒷얘기가 있군요. 제품 디자이너인 Patrice Vermette과 울프람 알파의 Stephen Wolfram이 합작해서 실제 언어에 해당하는 구조를 디자인하고, 이를 토대로 100여 개의 로고그램으로 만들었다는 것.

“Bringing the language to the screen was a joint effort between designer Patrice Vermette, science consultant Stephen Wolfram — of Wolfram Alpha fame — and his son Christopher Wolfram. All told, some 100 “unique logograms with embedded words and phrases, with mutable components” were crafted for the film.”

https://www.engadget.com/…/dissecting-the-alien-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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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Arrival>에서 나타난 타자화(othering)에 대한 간략한 쪽글입니다.

Preemptive Othering and <Arrival>

<Arrival> is relevant to the present time not because we are approaching the era of space travel or technological singularity, but because we are going through the era of intolerance, reversing pluralist, multi-cultural worldviews and threatening the very existence of intersubjective spaces. The tyranny of preemptive othering emerges when the art of thick description and deep interpretation dies. We need more time to understand each other. We also need to note that their time might be different from our time. Ultimately, understanding others is the only way to understand ourselves. (I don’t know whether someone has used the term ‘preemptive othering’; yet, the expression dawned upon me whiling watching th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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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Arrival>의 주제의식과 관련된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입니다.

Probably i am going to use <Arrival> as a major theme for my <Language and Thought> class this semester. Here are some random ideas about what to discuss in the class. By the way, the movie is so breathtakingly beautiful and also full of language-related allusions and intriguing symbolism. Highly recommended for my linguists and applied linguists friends!
Whorfian view of language and thought / Neo in Matrix vs. Louise in Arrival / Free will vs. Destiny / Palindrome and how we(they) experience time / C.S. Lewis’s notion of ‘God’s time’ vs. human time / linear time and circular(or spiral) time / time travel / prerequisites for communication / Barriers and empathy / Symbolism in the movie / Why physicist & linguist? / How to define others and us / Words as a weapon vs. words as a gift / Why analyze and teach written language, not spoken? / Concepts, language, and (Un)translatability / So what is time?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방법론, 적용, 그리고 다시 읽기

돌아보면 책을 많이 읽지 않은 것보다는 제대로 읽지 않아서, 다시 읽지 않아서, 무엇보다 현실에 적용해 보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방법론 영역의 책은 두루두루 읽는 것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적용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데이터와 씨름해 본 경험을 가지고 다른 책을 읽으면 빠르게 이해되지만 방법론만 계속 읽어대면 추상적, 일반적, 철학적 논의에 머무르면서 ‘구름 속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영어로논문쓰기
#삶을위한리터러시

서울대 도서관의 평균 대출 수는?

학부생은 그렇다 치고 대학원생이 한 해 13.4권이라는 게 말이 되나? 충격이다.

“한편 1년간 1인당 대출 권수는 학부생이 8.9권, 대학원생은 13.4권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전체 대학생 평균(2017년 기준 6.5권)보다는 높지만 2년 전 서울대 학생 1인당 도서 대출 권수(2017년 기준 24.9권)에 비해서도 크게 떨어진 수치라는 지적이다. 2017년 이후 해마다 1인당 100권이 넘는 독서량을 자랑하는 하버드, 옥스퍼드대와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버드는 2016년 기준 1인당 도서 대출 권수가 98권에 달했으며, 옥스퍼드는 108권에 달했다.”

기사 원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51301070930316001

#삶을위한리터러시

리터러시, 지력이 아닌 공존의 문제

“교수님, 부교재가 뭐예요?????”

밤 10시 반. 문자가 왔다. 2012년. 한국에서 처음 강의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밤늦게 학생에게 문자메시지를 받는 게 영 어색했는데 물음표까지 다섯 개라니. 이건 무슨 긴급상황이길래 밤중에 이메일도 아닌 문자를, 그것도 물음표 다섯 개를 연달아 써가면서 보낸다는 말인가? 이건 격식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 황당한 기분이었다.

나의 놀람은 이내 ‘그런가보다’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이후 비슷한 일을 여러 번 당했고, 문장에 느낌표나 물음표를 연달아 사용하거나 이모티콘을 삽입하는 경우도 적잖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래 겪다 보니 이젠 그런가보다 한다.

전통적 채널이 새로운 채널에 자리를 내주고, 쓰기 관행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세대간 소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단지 물음표나 느낌표의 개수가 아니라 쓰는 용어, 문법의 허용 범위, 미디어의 사용 등 전반적으로 ‘충돌’의 여지들이 커진 것이다. 상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나에게는 껄끄러울 수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문화 가족이나 이주노동자들의 증가로 여러 문화들이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에서는 한국어 영상에 여러 언어로 답글이 달린다. 세대간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관행의 차이는 급격히 커지고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편가르기’가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런 면에서 지금 리터러시의 문제는 공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나의 실력을 쌓는 교육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서는 교육이 절실한 이유다. 리터러시는 개인의 실력이 아닌 함께 사는 기예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덧. “부교재는 OOO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쓰기에 대한 답없는 질문들

많은 이들이 유튜브로 향하는 이유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명성에 더해 수익이 따라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 아닐까? 영상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을까? 그간 우리 사회가 쓰기교육에 실패한 것은 글을 써내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철저히 평가에 포섭되어 단편적이고 ‘객관적 채점’이 가능한 단문만을 생산해온 것은 아닌가? 만약 어떤 학생이 “유튜브는 이래저래 좋은데 글을 쓰면 뭐가 남나요?”라고 물으면 “원래 쓸모 없는 것이 소중한 것이지”라고 말하는 건 너무나 궁색하지 않을까? “유명해지고 잘하면 돈도 벌 수 있어”를 능가하진 못하더라도 그만큼 강력한 슬로건으로 글쓰기를 어필할 수 있을까? “메이커 교육”에 다양한 글쓰기는 왜 포함될 수 없을까? 어쩌면 대학이야말로 글쓰기 교육의 최종 무덤은 아닐까? 아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일까?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강렬한 이야기가 있다면 글은 자연스럽게 흘러넘친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쓰기교육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쓸만한 삶을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쓰기의 문제는 테크닉이 아닌 삶의 문제이며, 생각과 감정과 갈등과 용기의 문제라는 것.

#삶을위한리터러시

New Literacy Studies 관련

– 리터러시를 문자미디어 자체에 가두는 것 반대
– 리터러시와 문화, 권력구조를 연결해서 파악
– 다양한 맥락에 대한 민감성 강조
– 리터러시를 단일한 개념으로 ‘말끔하게’ 파악하는 것 비판
– 리터러시의 역사성을 강조
– ‘리터러시는 이것이다’라는 선험적 정의를 경계하며,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리터러시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협상의 결과로 드러나는 리터러시 강조

–> 현재 하고 있는 작업에 많은 영감을 주는 관점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 관점이 어떻게 유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 보아야 할 듯합니다.

“In contrast, Street recommended what he called the “ideological model,” which “view[s] literacy practices as inextricably linked to cultural and power structures in society, and recognize[s] the variety of cultural practices associated with reading and writing in different contexts” (Street, 1993: 7). This ethnographically informed perspective, which many have come to call New Literacy Studies (NLS), problematizes singular definitions of “literacy,” emphasizing the historicity (Freebody, 2005) and multiplicity of literacies and of literacy practices, or “the socially regulated, recurrent, and patterned things that people do with literacy as well as the cultural significance they ascribe to those doings” (Brandt and Clinton, 2002: 342); such practices vary by language, script, domain, role, network, participants, context, and other factors (Barton and Hamilton, 2000; Baynham, 1995; Cope and Kalantzis, 2000; New London Group, 1996). From this analytical perspective, literacy cannot and should not be defined a priori, as it is by most conventional measures of literacy; instead, what counts as literacy results from complex sociocultural negotiations (Hamilton and Barton, 2000).”

출처: A Companion to the Anthropology of Education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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