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술지, 균열, 그리고 연결

Ethnography(문화기술지)를 말 그대로 풀면 “ethno+graphy” 즉, 사람과 사회, 문화를 써내려가는 일(the writing of people, of society, of culture)이다.

나는 문화기술지를 “ethno”와 “graphy”의 유기적 결합 및 해체로 파악한다. 말(graphy; text)과 주체-들(ethno; people) 사이를 오가며 이 둘을 결합하고 때로는 분리시키는 일 말이다. 텍스트를 다루다 보면 자칫 사람을 이해했다고 오해하기 쉽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텍스트가 없어도 세상이 온전히 이해되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다. (오랜 기간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려있던 문구와는 조금 다른 결에서) 텍스트는 사람을, 사람은 텍스트를 만든다. 이 둘은 통합되어 있지만 또 균열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균열의 지점을 자세히 살필 때 사람도 말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뇌의 이상이 뇌의 기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처럼, 말과 삶의 균열이 말과 삶의 연결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 위한 영어공부: 에필로그

“This is an apple.”은
그렇게 열심히 따라하면서
“This is me.”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습니다.

“Work hard, and you will succeed.”는
숱하게 만났지만
“United, and you will get what you deserve.”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가정법을 배우며
“If I were a bird”를 반복했지만
“If I were an immigrant worker in South Korea”를
발화할 생각은 못했고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English”라고 말하며
영어라는 산 앞에서 좌절했었지만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anything.”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롤플레이를 하면서
해당 역할을 앵무새처럼 따라했었지
새로운 역할을 꿈꾸고
새로운 대본을 써볼 생각은 못했던 나날들이 있었죠.

생각하는 말,
살아 숨쉬며 펄떡이는 말,
웃고 울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손잡아 주는 말을
가르치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이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문을 바꾸고
활동을 바꿉니다.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나아갑니다.

배우고 표현하며
성찰하고 소통하며 연대하는 말로,
그리고 그 말이 울려퍼질
세상으로.

당신의 가슴이
세계를 껴안는
변방으로,
경계로,

사람들 속으로.

#삶을위한영어공부 #단단한영어공부 #알라딘인문학스터디

유튜브의 부상과 전통적 리터러시

 

인류의 역사에서 읽기는 기껏해야 수천 년 지속되어 온 관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읽기가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의 일로 몇백 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실 한국에서 리터러시가 대중화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길게 잡아야 20세기 초 정도로 보아야 한다.

듣기와 말하기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이지만 쓰기와 읽기는 그렇지 않다. 철저히 문화적인 산물이며 학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문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글자가 없어도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유튜브의 부상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인류 역사상 짧디 짧은 읽기의 시대가 말하기에 ‘지분을 넘겨주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테크놀로지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기 보다는 말하고 듣기만큼 오랜 경험을 이전에 가능하지 않았던 스케일로 펼쳐놓은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이) 언급한 지분의 이양 속도가 예상 외로 빠르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활자 미디어의 죽음을 논하는 것은 과함을 넘어 엄살에 가까운 일이지만, 새로운 세대들이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동영상 플랫폼에 급속히 포섭되고 있다는 점은 반박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들이 있다. 먼저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 메신저와 소셜미디어에 글쓰기를 많이 한다. 엄밀한 통계를 잡을 수는 없지만 글은 쇠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융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유튜브의 많은 영상들은 글을 기반으로 한다. 말의 외피를 입고 있으되 아이디어 수준에서 영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에서 다양한 텍스트들이 개입하는 것이다. 멋진 말의 기반에는 대개 깊은 글이 있다.

세째, 유튜브의 적지 않은 영상들은 ‘하이브리드 모드’이다. 말이 주요한 매체로 작동하지만 자막이나 참고자료 등에 문자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튜브를 마냥 ‘음성언어’로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고급’ 커뮤니케이션은 글로 매개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다. 멀티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논문을 내는 곳도 있지만 이는 예외중에서도 예외이다. 논문은 글로 구성되어야 하고, 이 글을 써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리터러시 훈련이 필수다.

이렇게 놓고 보면 ‘리터러시의 몰락과 음성/영상 플랫폼의 부상’이라는 구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문자 기반 리터러시냐 유튜브 리터러시냐는 이분법 또한 현재의 상황을 적절히 포착하지 못한다.

거의 25년 전 Harvard Educational Review에 발표된 뉴 런던 그룹의 <멀티리터러시> 논문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여전히 유효한 시각을 제공한다. (밥먹으러 가야 해서 여기까지만)

#삶을위한리터러시 #유튜브리터러시

새로운 문해 접근법 new literacy studies

“리플렉트는 여기에 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새로운 문해(New Literacy Studies)’ 담론을 참조한다. ‘새로운 문해’ 담론은 전통적인 문해를 기능적이고 보편화된 틀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을 비판하면서, 문해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문해, 비문해에 대한 구분, 문해수준과 역량에 대한 평가, 문해 교재와 쓰임새 모두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문해 담론은 문해 사건(literacy events)과 문해 실천(literacy practices)을 상황분석과 교육을 위한 중요한 내용으로 삼는다. 즉 단수의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문해(literacy)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수의 문해 실천들(literacies)이 있다는 것이다. 문해교육이 이미 정리된 내용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해’가 학습자에게 의미를 가지며, 어떤 방법과 과정이 학습자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만들 수 이는지에 대한 것들 역시 학습자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일종의 문해에 대한 민속지적 연구(ethnographic research)로, 학습자들이 문해로부터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동체 내에서 다른 문해와 수와 관련한 다른 실천에 참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학습자들이 워크숍을 통해 문해와 관련된 자신의 문제를 탐색하고 질문을 통해 문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중요시한다.”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139-140쪽

낭독의 기쁨

낭독은 저자와 독자의 만남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상의 만남과는 다른 차원이 개입한다. 글을 소리내어 읽는 순간 말이 된다. 이때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말의 내용은 저자로부터 왔으되 말의 모양은 낭독자로부터 말미암는다. 말의 ‘혼’은 저자의 것이되 ‘몸’은 독자의 것이다. 연원을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 열망과 아픔이 나의 몸을 통하여 다시 세상으로 향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말은 다시 귀를 통해 내 정신과 만난다. 아마도 낭독의 기쁨은 이 과정에서 말미암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낭독의 순간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인간과 대면하게 된다. 저자의 정신과 낭독자의 몸을 가진 인간 말이다.

짧아지는 인류의 기억 그리고 ‘대리사회’

얼마 전에 소셜미디어의 프로필에 “독서는 OOO”이라고 써 놓은 분을 보았다. 저 OOO에는 유튜브 채널의 이름이 들어간다. 프로필의 주인은 해당 채널의 운영자가 아니다. 자신의 독서 정체성을 유튜브 채널로 표현한 것이다.

종종 해외 사이트의 ‘도서 요약 정리 서비스’를 접한다. 한국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있다. 주로 경영경제 분야의 책을 다이제스트로 제공하는 형식이다. 이게 돈벌이가 되는 것 같다.

책을 대신 읽어주는 사회다. 영화도 리뷰 유튜버가 넘쳐난다. 독서보다는 강연에 이끌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잘 정리된’ 자료를 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가끔 궁금하다. 강연이 끝나면 연단 앞으로 와서 ‘파워포인트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시는 분들 중에 해당 자료를 곱씹고 공부하는 분이 얼마나 될까? 그냥 강연자와 몇 마디 의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더 나은 선택 아니었을까?

김민섭 작가께서 생생하게 그린 ‘대리사회’와는 다른 측면에서 대리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아니 이미 널리 퍼져 있는 것도 같다. 점차 콘텐츠의 원본이 아니라 그 요약본, 많은 경우에는 조악한 ‘시뮬라크르’가 대중의 곁에 선다. 그것은 힘들이지 않고 소화될 수 있다. ‘공부’는 딱딱하다. ‘컨텐츠’는 부드럽다.

구글북스 N그램 프로젝트의 전반을 다룬 <Uncharted>(한국어 번역서는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에 따르면 인류가 특정한 발명품이나 현상에 대해 기억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한다.

특정한 발명품이나 개념이 등장하고 각종 책에서 인용되는 빈도가 정점이 될 때까지 시간이 짧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용 횟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시간 또한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빠르게 유행하고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은 포털의 ‘인기검색어 순위’일 것이다. 아침에 1위하던 것이 오후면 한참 밀려나고 다음 날에는 순위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는 현상 말이다. 대중의 주의를 자원으로 하는 경제(attention economy)는 속도의 경제이기도 하다. 마음에 들건 안들건 속도는 망각과 짝을 이룬다.

정보가 많아지면서 더 많은 정보를 소화해야 할 필요가 생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정보가 필요할까? 혹시 뒤쳐지지 않으려는 욕심, 낙오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허세’ 때문에 과식을 해대면서도 정작 필요한 자양분은 공급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던바의 수’에 따르면 사람이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깊은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150명 정도라고 한다. 페북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과 ‘친구’를 맺지만 진짜 친구가 되는 경우는 상당히 작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관계가 팽창해도 인간의 사회성을 담당하는 뇌는 순식간에 ‘업그레이드’ 될 수 없다.

지식과 정보는 어떨까? 대신 봐주고 대신 읽어주고 대신 감상해주고 대신 비평해주는 ‘대리사회’는 어떤 득과 어떤 독을 가져다 주고 있을까? ‘읽고 치우는’ 독서가 아니라 ‘치우고 읽는’ 독서가 필요한 때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리터러시의 외연과 기능을 확장하는 것만큼 정보와 지식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새로운 리터러시를 무조건 거부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모드의 리터러시, 광범위한 지식과 정보의 유통,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에서의 비판적 관점 등을 아우를 수 있는 틀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더 빨리 소비하고 더 빨리 망각하는 삶을 긍정하기엔 정성을 다새 생산하고 더 끈질기게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멀티리터러시

프레이리 – MOVA의 문해교육

MOVA는 20-30명 단위로 문해 그룹을 조직했고, 그 그룹이 이끌고 지원할 슈퍼바이저를 선출했다. 그리고 직접 수업을 진행할 문해 활동가(리터러시 워커)와 트레이너, 모니터 요원들을 두었다. 그리고 프레이리의 ‘생성어와 생성 주제’에 영향을 받아 생성적 조사(generative investigation)를 진행하고, 의미 있는 상황에 대한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대화로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지식을 집합적으로 재생성했다(collective regeneration). 실제 수업은 토론-쓰기-읽기-쓰기-토론의 순환구조로 이루어졌다. 학습자들의 삶에서 의미 있는 주제에 대해 그룹 토론을 하고, 토론에서 여러 어휘들을 끄집어 내고, 이를 글로 써 보고 난 뒤 그것을 읽고, 다른 학생들의 단어와 문장들을 써 본다. 그러고 나서 또 새로운 주제를 논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문법 구조나 음운 조합은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이 과정을 통해 빈민 지역의 현실, 인종주의, 미디어 등의 주제들을 토론하면서 학습자들의 상식을 변화시켜 나갔다. MOVA는 시 정부와 사회운동을, 그리고 교육, 문화와 정치를 연결하는, 과거 MCP와 PNA의 전통을 다시 부활시킨 문해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22-23쪽.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 논문쓰기: 읽기와 쓰기 통합전략을 중심으로 5] 저자-되기 경험으로서의 논문작성

논문작성은 연구실적을 쌓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저자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저작에 대해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 저자는 작품에 자신만의 목소리(authorial voice)를 불어넣는 사람이다. 나아가 저작의 과정은 해당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논문작성을 이해함에 있어 ‘졸업 요건의 충족’이나 ‘실적 달성’에서 ‘저자-되기’, ‘전문가-되기’라는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논문을 써야 졸업한다”가 아니라 “논문을 써야 진짜 저자가 된다”로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다.

물론 이 길이 평탄하지는 않다. 자신의 글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 리도 없거니와 자신의 기준을 어느 정도 중족하는 글마저 타인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기 일쑤다. 자신이 신뢰하는 동료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인 지도교수, 저널의 리뷰어들의 평가로부터 타격을 입지 않을 재간 또한 없다.

이럴 때일 수록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써내는 사람은 없으며, 완벽한 글을 써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글의 발전 또한 멈춘다는 사실이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맷집’을 키우는 일이 학술적 글쓰기 훈련과정에 핵심적인 요소임을 깨닫는 것이다. 글쓰기의 발달은 결코 부드럽고 매끈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은 꽤 오랜 분투와 적지 않은 분루를 필요로 한다. 그런 면에서 ‘많이 써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줄기차게 써내는 일’이 더 중요한 시점이 온다. 이에 관하여는 아래 한참 전에 써놓은 메모를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다.

Up to a point, writing a lot matters. It really is important for building one’s writing muscle. When it comes to getting a project done, however, writing persistently is far more important than writing a lot. I call this ‘writing defiantly,’ where one rows strenuously against the current of highly stressful everyday events. This is a valuable lesson I learned from hitting the cul-de-sac in several of my writing projects, where I definitely poured out a lot of text but the manuscripts had nowhere to go other than in a dark, lachrymose corner of my hard disk drive. Some writers may be able to achieve what they want by producing lots of words in a flash, but writing on a regular basis, shine or rain, tormented or commended, matters much more to ordinary writers like me. So writing a lot is good; writing persistently is better. All the best for my friends grappling with those unruly yet lovely manuscripts.

네이티브 중심주의에 대한 작은 깨달음

책을 쓰면서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원어민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생물학적인 ‘한계’, 사회문화적인 ‘한계’, 교육환경의 ‘한계’라는 용어로 묘사하고 있었다. 우리가 처한 한계 때문에 네이티브가 될 수 없다는 식의 서술이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네이티브가 되지 ‘못한다’거나 ‘한계’라는 표현 자체가 원어민 중심주의의 산물임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한계’ 때문에 원어민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 원어민으로 영어 원어민들과는 다른 삶의 조건을 갖고 있는 것 뿐이었다. “미국인들은 생물학적,사회문화적, 교육환경적 한계로 한국어 원어민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 그 반대의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 자체가 영어를 우위에 놓고 있는 사고라는 게 확연해진 것이다.

한계를 논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 한계를 망각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영어 원어민이 되지 못하는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 원어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조건에 처한 것이다. 한국의 호랑이는 미국의 호랑이가 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저 한국의 호랑이일 뿐. #단단한영어공부 #삶을위한영어공부

“I hear you”

‘듣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hear’에는 ‘이해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듣는 일(지각)과 상대의 마음/의견/상황/생각 등을 이해하는 일(인지)이 한 단어 안에 쏙 들어가 있다.

그래서 “I hear you.”라는 말을 좋아한다.

돌아보면 상대의 말을 다 들어보지 않고도 공감한다 생각한 적이 많았고, 상대방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 하에 상대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적도 있었다.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해하기. 다 듣지 않고 알 수 있다 믿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않기. 지각과 인지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기.

“I hear you.”가 내게 전해주는 교훈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지언어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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