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두 가지 관점

서문(序文)은 처음 말이라는 뜻으로 Preface나 Introduction으로 번역된다. 책의 머리에 위치하여 본문으로 이끄는 글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본문과 결론이 존재하고 난 뒤라야 서론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현상적으로는/독자들에게는 ‘서문’이지만 생성적으로는/저자에게는 ‘결문(結文)’이라 하겠다. 독자를 어디로 이끌지 온전히 알게 될 때 어떻게 이끌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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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파, 언어, 얽힘

뇌파를 언어로 바꾸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직 해상도가 그리 높진 않지만 뇌의 신호만으로 ‘화자’가 의도한 언어를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고 신기한 세상이다.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화자’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말하고 들을 때, 텍스트를 읽거나 쓸 때 우리의 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궁금하다. 지금 짤막한 이 글을 읽은 페친의 뇌는 글을 읽기 전과 후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별 시답지 않은 글이니 별반 차이가 없을까? 누군가의 뇌는 변화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까? 사람마다 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언어 혹은 내용이 존재할까?

‘뭐 이딴 글이 있어’라고 생각하건 ‘진짜 멋진 글이다’라고 생각하건 우리의 뇌는 ‘어쩔 수 없이’ 반응한다. 나의 뇌 속에서 생겨난 움직임이 언어를 통해 누군가의 뇌를 움직이게 하고 그것이 일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신비롭고 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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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 그리고 상상력

적어도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은 어학연수와 같은 해외 체류를 영어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꼽았다. 해외에서의 생활이 영어공부의 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인풋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라고 간단한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흔히들 말하는 몰입(immersion)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인풋의 양보다 더욱 핵심적인 요인들이 나타난다. 나는 이것을 두 가지로 본다.

먼저 “쓸모에 대한 감각”이다. 내가 배우고 있는 말이 세상에서 진짜 쓰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쓸모”에 대한 감각은 쉬이 생기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 본 경험이 있다면 입시와 내신이라는 목표 외에 학생들에게 영어의 쓸모를 설명해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아니 이것은 설명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안다. 연애나 배신같이 체험되지 않고는 전달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처럼 말이다.

다음으로는 “만남의 경험”이다. 이것은 쓸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 다르다. 나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다른 언어가 되어 돌아오는 경험.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경험. 이것을 목격하고 느끼는 것이 “만남”이다. 말을 건네기 전의 설렘과 말이 오가는 과정의 떨림과 말이 끝나고 난 다음의 여운을 겪는 것이다.

만남은 언어의 도구성을 넘는 경험이다. 언어가 사람을 울고 웃게 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도구성을 뛰어 넘어 존재를 감화시키는 언어를 진짜로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에 가지 않고도 쓸모에 대한 감각, 만남의 경험을 키워줄 수 있을까? 외국어로서 영어(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백’하는 언어학습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물론 해외에서의 경험을 복제할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상황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변화를 꽤하려면 언어학습에서 급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영어교육은 여전히 인풋이라는 ‘특급 키워드’에 머물러 있다. 얼마나 많은 언어자료가 투입되어야 하는가. 이 자료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이 패러다임 말이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에 더 많은 인풋을 부르짖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센세이셔널의 두 극단

많은 경우 ‘센세이셔널’은 부정적 함의를 가지지만, 세상을 바꾸는 많은 것들이 센세이셔널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는 진중한 학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센세이셔널함이 센세이셔널리즘에서 오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정주의는 선정성을 겨냥하고 선정성을 믿으며 선정성을 갈망한다. 그렇게 선정주의가 성취한 선정성은 가볍고 허약하며 한시적이다. 선정성은 오로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선정성은 원칙에서도 파생될 수 있다. 원칙을 따라가는 일은 근본적이며, 근본적인 것은 과격하다. 과격한 주장은 어느 정도의 선정성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선정성은 근본적인 것들로 인도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두 가지 선정성을 구별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후자의 선정성이 꼭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다. 전자의 ‘얕은’ 선정성을 추구해도 논문을 써낼 수 있고 실적을 올릴 수 있다. 후자의 선정성에 이끌려 이론의 지층에서 헤매다가 세월을 ‘허송’할 수도 있다.

그래도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센세이셔널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과 센세이셔널할 수밖에 없는 급진성을 가진 이들을.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영어, 인정과 오인

부르디외에게 있어 서로 다른 언어에 대해 부여되는 상이한 권력들은 사람들의 인정(recognition)에 근거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 모든 인정은 일종의 오인이다.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 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어는 역사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층층히 쌓인 오인 위에서 작동한다. 가장 ‘사랑받는’ 언어는 실상 가장 ‘오해받는’ 언어인 것이다.

#언어의말들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는 기본

어떤 면에서 영어는 ‘과대평가될 수 없는’ 즉,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은 능력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경향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는 기본’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무언가가 기본이 되면 다른 것들은 기본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삶에는 언제나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너무 쉽게 영어를 ‘기본’의 자리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호칭의 사회학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호칭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소셜미디어 상에서 서로를 부르는 방식입니다.

우선 ‘~님’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게 가장 무난할 듯합니다. 소셜미디어의 특성상 특정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위계적 관계를 함의하지 않으면서 예의를 갖춰 부를 일이 많으니 ‘~님”만큼 적절한 호칭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 “O박사님”, “O교수님”, “O원장님”, “O변호사님”, “O대표님” 등의 호칭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 호칭은 심심찮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이렇게 불러야 할 때도 있고, 평소에도 이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뿐이죠.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호칭의 경우 대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회사원들, 아이들과 학생들은 대개 이름을 기반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칭의 사회학에는 분명 비대칭적 측면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룬 업적에 기반한 호칭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욕망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이름보다 직책이나 자격으로 불리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그리 건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하여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호출해 봅니다.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예의를 꽉꽉 채운 이 말, 어딘가 불편합니다. 길 묻는 사람은 최대한 예의를 지켜서 말을 건 것일 테니, 불만은 없습니다. 다만, 종종 들려오는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소화가 되질 않네요. 저는 사장은 아니고, 사장님은 더욱 아니며. 행여 사장이라고 해도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죠.

그냥 “실례지만 길을 좀 여쭈어도 될까요?”는 어떨까요? “사장님, 길 좀 여쭐게요”와는 달리 상대를 부르는 단어는 없습니다만 길을 묻는 기능은 충분히 수행하니까요. “아저씨”나 “학생” 혹은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상대가 ‘고통받을’ 이유도 없구요. (경험상 이 ‘고통’은 미혼 여성들이 “아줌마”로 불렸을 때 극대화되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한국사회에서 심심찮게 쓰이는 현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짧은 친절의 순간에도 “사장님”이 끼어드는 일은 좀 안타깝네요.

#삶을위한리터러시

지도교수 vs. work with someone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미국 대학원에서 지도교수가 누구냐고 물어볼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Who do you work with?”입니다. 직업을 물어볼 때 “What do you do?”라고 물어보듯 지도교수가 누군지 알고 싶을 때는 “Who do you work with?”라고 간단히 묻는 것입니다.

말을 바꾼다고 사람이나 시스템이 갑자기 변할 리야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work with”라는 언어패턴에 담긴 수평적 관계를 좋아합니다. “With”에는 상하가 없습니다. Someone to work with.함께 일하고 만들어 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지도교수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지도교수’는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를 다소 위계적으로 그립니다. ‘지도’는 보통 전문성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경우 “work with ~”보다는 “work for ~의 관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교수와 함께(with) 일한다기 보다는 교수를 위해(for) 일하는 것이지요.

페이스북에서 또 강의에서 명민하고 실력있는 대학원생들을 종종 만납니다. 뛰어난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을 그저 ‘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도적 협력자’로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지도할 사람” 보다는 “work with”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학문의 세계를 먼저 경험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근본적으로 수평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미 그런 곳들이 있겠지만, 석사생이든 박사생이든 함께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협력자(collaborator)로서 대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 물론 영어에도 academic advisor / dissertation advisor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다소 격식을 갖춘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며 한국어의 ‘지도교수’의 사용역(register)과 딱 대응되지는 않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일상 대화에서 ‘지도교수’가 많이 쓰이는 반면 영어에서는 ‘work with’와 호칭을 엮은 표현이 자주 쓰이는 것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논문쓰기

 

불편한 말들

남들은 그냥저냥 넘어가는데

난 깜짝깜짝 놀라는 표현들이 있다.

 

‘아랫’사람/’윗’사람

‘부하’직원

사람을 잘 ‘다룬다’/’관리한다’

‘몸값’이 어마어마하다

가격이 ‘착하다’

얼굴 ‘천재’

‘팔리는’ 글

 

그리고 잘 보지 않던 드라마를 보면서 수없이 듣게 되는 말.

 

아들/딸 의사 ‘만들었다’

 

너무나 널리 퍼진 말들이어서

이런 말들을 쓰는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질 이유는 없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받아온 훈련 덕분에

혼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민감해지되 상처받지 않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극복을 위해

욕설의 언어학이라도 공부해야 할까. (먼산)

 

‘듣다’의 풍경

1. “네”가 “아니오”일 가능성이 꽤나 높은 상황이 있습니다.

“듣고 있니?”
“네.”

제대로 듣고 있으면 물어보지도 않았겠지요. “듣고 있니?”라는 말은 들었겠지만 그 전의 말들은 안 들었을 가능성이 높겠죠.

2. “말 좀 들어라.”

말을 다 듣고도 말 안들을 수가 있고, 말을 건성건성 들어도 말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듣다’는 ‘따르다(follow)’의 의미에 가깝겠지요.

3. 영어에서 “I hear you.”라는 표현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Hear는 물리적 소리를 듣는 경우에도 쓸 수 있지만 이렇게 사람을 목적어로 하면 상대의 말뜻을,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의미상 2인칭 대명사 ‘you’가 나오는 “I hear you”가 자주 쓰입니다.

4. “keep your ear to the ground”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땅에 귀를 대다/붙이다”라는 뜻인데 돌아가는 상황이나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주의/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정확한 어원은 모르겠지만 땅에 귀를 대면 그냥 듣는 것보다 보다 먼 곳에서 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네요. (덧. 전장에서 적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댔던 대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5. “Hear, hear”는 상대의 말에 대한 동의, 승인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는 감탄사입니다. 원래는 누군가의 말에 집중하라는 요청으로서의 “Hear him”에서 나왔다고 하고요. “그럼, 그럼”이나 “그럼, 그렇고 말고”정도의 느낌이랄까요.

#삶을위한리터러시 #삶을위한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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