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SA의 문해력, 실질적 문해력

최근 다양한 매체에서 리터러시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표준화된 리터러시 개념으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자료 중 하나는 PISA의 읽기능력 평가 결과인데요. 읽기를 포함한 OECD의 PISA 평가는 크게 다섯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참고로 PISA는 OECD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의 약자입니다.)

(1) 읽기 리터러시
(2) 수학 리터러시
(3) 과학 리터러시
(4) 문제해결능력
(5) 협력적 문제해결

PISA에 따르면 읽기 리터러시(통계나 수학, 기타 영역의 리터러시와 구별되는 읽기영역에서의 리터러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주어진 목표를 성취하고, 지식과 잠재력을 성장시키며, 사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록된 텍스트를 이해하고 사용하며 그에 대해 숙고하고 텍스트를 가지고 상호작용하는 행위.”

이와 같은 정의는 일상의 읽기 활동에 관여하는 과정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읽기 평가에 있어 핵심을 이루는 구인(construct)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PISA와 PISA-D 테스트는 읽기를 평가함에 있어 크게 세 가지 축을 상정합니다.

(1) 텍스트 (2) 상황 (3) (읽기) 과정 (혹은 양상)

즉 쓰여진 글, 그 글이 등장하고 논의되는 상황, 그리고 글을 읽어내는 데 관여하는 과정이 중요시된다는 것이죠.

PISA-D( PISA for Development)는 이중에서도 특히 과정(process)에 방점을 두는데요. 크게 다섯 가지 과정이 상정됩니다.

(1)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해(literal comprehension)
(2) 정보 추출(retrieving information)
(3) 전반적인 이해의 형성(forming a broad understanding)
(4) 해석해 내기 (developing an interpretation)
(5)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숙고와 평가(reflecting on and evaluating the content of a text)

즉 어떤 사람이 텍스트를 잘 이해했는지 보려면 텍스트를 이루는 기본 단어와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는가, 해당 문서에서 적절한 정보를 선별해 낼 수 있는가,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진술할 수 있는가, 특정한 관점에서 해당 텍스트를 해석해 낼 수 있는가, 텍스트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가를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평가하기 위해 여러 포맷의 텍스트를 활용하는데요. 에세이나 신문기사 등 연결된 텍스트는 물론 정보를 담은 표나 일정표 등의 텍스트도 활용합니다. 아울러 개인적, 공적 영역의 텍스트, 교육기관이나 직장에서 사용되는 텍스트를 두루 활용하지요.

그런데 저는 PISA 등의 표준화 평가에서 말하는 ‘읽기능력’ 혹은 ‘독해력’이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이야기되는 ‘문해력’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 맥락을 고려한다고는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읽기능력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특정한 텍스트와 맺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요구되는 읽기능력은 단순히 텍스트와 개별 독자간의 관계만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텍스트의 내용 뿐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여기에 이 텍스트가 쓰여진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를 소화하는 능력으로서의 읽기 리터러시는 실제 상황의 반쪽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독해능력이나 쓰기능력을 평가하는 도구는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복잡다단한 맥락과 관계를 온전히 포괄하지는 못하죠. 그렇기에 우리는 텍스트를 완벽히 해석하는 데 필요한 리터러시를 논의함과 동시에 관계와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리터러시를 논의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평가를 넘어서

Posted by on Oct 29,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평가가 없으면 누가 공부를 하겠냐’는 말은 평가 없이 공부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 아닌가 싶다. 평가가 무용하다는 것이 아니다. 평가는 결국 ‘평가 없음’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영화에서 저 영화로, 이 웹툰에서 저 웹툰으로, 이 지도에서 저 지역으로, 이 음악에서 저 미술작품으로 횡단하는 끝없는 배움의 여정에 줄세우는 평가는 초대되지 않는다. ‘어떻게 평가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보다 더 간절하다. 평가를 넘어서는 상상력 하에 평가체제가 구축될 수는 없는 걸까. 바보같이 묻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말과 침묵, 그리고 겨울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세상. 말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의 ‘침묵’은 더욱 깊어진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성량 조절에 힘쓸 뿐, 자신이 목소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논쟁으로 문제를 풀려는 무리들은 서로의 말 속에서 허우적대며 강요된 침묵에 침묵한다. 침묵의 소리를 듣는 신중한 이들은 고개를 떨구고 발걸음을 돌린다. 슬픔은 내려안고 바람은 어두워진다. 말이 얼어붙는 사이 침묵은 포효한다. 밤은 오래 깨어 묵묵히 상처를 벼린다.

다시, 눈빛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에 관하여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관계를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는 걸 꺼리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있는 글과 메시지의 총량이 분포되는 흐름에 관해서도 더 이상 글을 쓰는 개인의 책임과 깊이 문제로 혐의를 두기를 그쳐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란 건, 더 이상 가능한 관점이 아니다.” (서울비, 2003, <글쓰기 강좌에 대하여> 중에서)

부가 사회경제적 구조를 통해 분배되듯이 글쓰기 능력이라는 문화자본도 사회적, 계급적으로 분배된다. 경제적 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과 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시작하고, 재미를 붙이고, 괜찮은 글을 써내고, 읽을만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글쓰기를 위한 독서를 하고, 때로 출판 기회를 잡고, 그 결과 얼마간의 금전적인 댓가를 얻고, 이 모든 것이 저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한 사람의 재능과 의지로 설명될 수 없다. 다른 문화자본과 마찬가지로 글쓰는 능력은 필자의 성장환경, 물적 토대, 그가 속한 공동체, 사회경제적 구조, 그리고 다양한 교육기회의 영향으로 형성된다. 글쓰기를 개개인의 ‘노오오오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방어하기 힘든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서울비님이 말하듯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은 지탱될 수 없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필요하듯, 저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회가 ‘동원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글 못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순전한 노력으로 일구어낸 ‘필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글 잘쓰는 사람’에 대한 칭송은 ‘글 못쓰는 사람’에 대한 폄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기계적인 능력주의(meritocracy)를 경계한다면 글쓰기 기예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은 거두어 들이는 것이 옳다. 글은 한 천재의 생산물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의 부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지적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개개인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만약 “창의적인 한 사람”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될성 부른 나무’에 사회적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시쳇말로 “몰빵”을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스티브 잡스도 나오고 빌 게이츠도 나오는 것 아닌가? 노벨상도 막 타고 그러는 것 아닌가?

하지만 “창의적인 한 사람”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발현되는 창의성의 네트워크”라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창의적인 팀, 창의적인 학교, 창의적인 회사, 창의적인 사회를 그릴 수밖에 없다. 개별 노드의 특성이 아닌 링크의 효과로서 창의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몰빵”은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기 보다는, 필요한 자본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사회문화적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리터러시 이론의 흐름 또한 이러한 관점을 반영한다. 글쓰기 과정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Flower와 Hayes는 글쓰기의 과정을 인지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들의 연구는 글쓰기 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적인 툴킷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지만, 글쓰기라는 행위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교육적, 이데올로기적 힘을 간과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이들이 제시한 글쓰기에서의 인지모형은 사회적 영향을 반영하는 쪽으로 수정, 발전된다. Street 등을 위시한 학자들은 ‘신리터러시연구(New Literacy Studies)’의 흐름을 주도하며 리터러시의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맥락(context)에 주목한다. 글쓰기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연구하려는 인지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글쓰기의 상황성(situatedness)에 주목하는 연구를 펼친 것이다. 아울러 1990년대 초 Swales를 중심으로 발전된 장르 이론 또한 글쓰기를 하나의 사회적 관행(social practice)으로 파악하면서 텍스트의 사회적 뿌리를 강조한다.

누가 좋은 글을 쓰는가? 노력하는 개인이 훌륭한 저자가 되고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인가? 결과물만 놓고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출판계까지 갈 것도 없이 페이스북만 봐도 글 잘쓰는 분들이 넘쳐나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빙산의 끝자락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글을 써낼 수 있다’는 구호는 ‘읽고 쓰고는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라고 속삭인다. 이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할 리터러시 발달에 대한 책무를 개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나는 논문에 들어간 감사의 말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여전히 이 말을 믿는다.

I typed the dissertation. But we wrote it. (저는 논문을 타이핑했어요. 하지만 쓴 건 나 혼자가 아닌 우리였죠.)

#삶을위한리터러시

‘속도의 리터러시’ 단상

1.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슈가 계속해서 터질 때에는 일상과는 다른 리터러시 활동이 벌어진다.

2. 이슈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뉴스와 분석이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3. 관련된 글을 모두 읽어낼 사람은 없다. 단연코 없다.

4. 사람들은 종종 상황을 면밀히 이해하고 견실한 판단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읽는다기 보다는 ‘탈출하기 위해’ 읽는다. 탈출에는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다.

(1) 기존에 갖고 있던 확신을 설득력있게 채워주는 글을 만나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2) 해당 사안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 답해주는 글을 만나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3) 자기가 팔로우하고 있는 ‘논객’이 정리된 글을 올리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4) 뉴스를 읽을 시간이 없는 경우, 기존의 관점과 신념을 가지고 뉴스의 공백을 채운다. 그 결과 팩트가 들어갈 곳에 믿음이 자리를 잡기도 한다.

5. 이 상황에서 몇몇의 ‘논객’은 다른 사람에 비해 좀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이를 정리한 글을 올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면들을 검토했느냐 보다는 자신이 갖고 있는 관점에 맞는 (혹은 자신을 팔로우하고 있는 독자군의 지향에 맞는) 내러티브를 만족스럽게 구성했는가다. 방대한 정보를 엮어 거의 실시간으로 글을 써내기 위해서 어느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하다.

6. 숨가쁘게 터져나오는 속보와 반격, 성명과 수사결과, 논평과 논쟁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전체의 의미를 구성(construct)하기 보다는 의혹과 의심의 미로에서 탈출(escape)한다.

7. 정보와 뉴스의 생산과 유통이 가속화되는 시대, 사람들은 분명 이전보다 더 자주 ‘1차자료’를 접한다. 그러한 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리터러시 역량은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8. 하지만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하며 끊임없이 탈출할 수밖에 없는 숙명에 놓인다. 때로는 그런 쫓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슈 따라가기를 멈추기도 한다.

9.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시대,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을 잃는다. 물론 성실한 읽기로 가공할 속도를 버텨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종종 미로에서 겨우겨우 탈출하고 있으면서 세계를 다 파악한 듯 말하는 이들이 두렵다.

10. 누군가는 미로를 좀더 면밀히 탐색하여 지도를 만들자고 외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미 미로를 빠져나갔다.

11. 느리고 모자란 나는 숨이 가쁘다.

 

#삶을위한리터러시

[Link] Blog for Teachers of Academic Writing

For teachers of academic writing

“In what follows, I will list the posts according to ten themes: Drafting; Revision; Audience; Identity; Writing Challenges; Mechanics; Productivity; Graduate Writing; Blogging and Social Media; and Resources.”

For New Visitors

원어민 중심주의, 능력주의, 고용관행, 그리고 인종차별 (native speakerism, meritocracy, hiring practices, and racism)

원어민 중심주의, 능력주의, 고용관행, 그리고 인종차별 (native speakerism, meritocracy, hiring practices, and racism)

1. 언젠가 지도교수는 ‘비원어민 제자들이 쓰는 표현이나 메타포가 신선해서 잘 봐두었다가 차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카데미아의 최선두에 있는 백인 남성 학자인 그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한참이나 그 의미를 곱씹었다.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가 ‘비원어민 화자’를 ‘표준영어의 교란자’로 보기 보다는 ‘영어라는 언어생태계의 기여자’로 본다는 사실이었다.

2. 이러한 지도교수의 관점은 한편으로 존경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어를 기반으로 한 문화의 가공할 권력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헐리우드 영화가 온갖 아이디어를 집어삼켜 덩치를 키우면서 ‘자연스런’ 문화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느 모습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언어/문화제국주의의 최첨단 무기는 포용과 세련됨이다.

3. 비원어민으로 영어를 쓰는 일은 ‘표준영어’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다. 노력하는 비원어민의 영어구사는 표준영어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고, 표준영어의 권력을 와해시키는 저항이며, 표준영어의 엘리트주의를 깨는 ‘풀뿌리운동’이기도 하다.

4.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개개인의 실력에 방점을 찍으며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는 것과 결코 같을 수 없는 언어습득 환경에서 ‘정확한 언어구사’을 강조하며 ‘객관적 표준’을 강조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소위 표준영어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순응은 능력주의의 신화에 대한 맹신과 꽤나 닮았다. ‘억울하면 노오오오력해서 실력을 쌓고 출세해’나 ‘억울하면 미친듯이 열심히 공부해서 네이티브만큼 영어하고 인정받아’는 오십 보 백 보인 것이다.

5.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원어민 중심주의는 때로 인종주의의 하위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충분한 교육적 배경을 갖춘 네이티브 스피커라 하더라도 ‘너무 한국사람처럼 생겨서’ 인사채용에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발생하거나, 백인에 가급적 금발인 사람을 선호하는 곳이 적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완벽한’ 영어가 인종적 차별 앞에 무릎을 꿇는 형국이랄까. 아무리 영어를 잘해봐야 피부색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6. 원어민 중심주의는 “Native speaker only”라는 광고문구의 형태로 우리 곁에 와 있다. 한국의 차별금지법 초안에 관련조항이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EU의 법률은 “네이티브 스피커 채용/원어민만 지원 가능” 광고가 명시적 차별임을 시사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TEFL Equity Advocates의 포스팅을 참고하라.

“In May 2002 the EC also announced that:

The Commission is of the opinion that the phrase “native speaker” is not acceptable, under any circumstances, under Community law. […] the Commission recommends using a phrase such as “perfect or very good knowledge of a particular language” as a condition of access to posts for which a very high level of knowledge of that language is necessary.”

Native speakers only job ads and EU law

7. 한국의 학교현장에서 이런 주장은 ‘씨알도 안먹힐’지도 모르겠다. 당장 미국의 ‘표준발음’을 기준으로 ‘정확한 영어’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원어민 중심주의의 어두운 면들을 간파하고 이를 지양해 나가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교육적인 것이 아닐까? 원어민 중심주의와 능력주의에 대한 과신, 나아가 인종차별에 이르는 끈을 인식하는 일이야 말로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는 데 있어 튼튼한 버팀목이 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원어민 영어 화자가 아니라 비원어민 영어 학습자/사용자/교수자로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숲 리터러시

“어쩌면 그 학생들이 모두 킬러로 자라온 거 아닐까 싶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유적으로 다른 사람을 모두 베어야 하는 그런 인생이요. 그게 학생들 잘못은 아니지만 그렇게 키워진 거죠. 그러다 보니 머리만 커지고 가슴은 쪼그라들어서 사람들을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2012년 돌아온 첫해 함께 공부했던 학생이 집 근처로 찾아왔습니다. 4년 여 만의 만남, 여전히 많은 것들이 통하는 친구였습니다. 제가 선생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느끼도록 만드는 성숙한 학생들이 있는데 이 친구가 그렇습니다.

밥과 차를 나누며 두 시간 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이 사회가 ‘킬러’들과 ‘베인자’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직접 상해를 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는 ‘승자’로서 세계 위에 군림하고, 그 과정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 평생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리터러시와 관련된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더니 ‘숲을 읽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공인 숲 해설가이기도 한 친구는 소위 ‘숲 리터러시’에 대해 말해주더군요. 그리고 안도현의 시 <무식한 놈>을 전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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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

===

짧은 시가 가슴에 박혔습니다. 아프더군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리터러시’가 얼마나 협소한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저를 둘러싼 대자연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로 인간이 만들어 낸 기호체계와 미디어만을 들여다 보고 있는 제 모습이 반성되더군요.

그래도 마음 넓은 이 친구는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저와 절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년에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으로 헤어졌네요.

고마운 만남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남깁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숲리터러시

‘막상’의 힘, 전문가의 갈등, 그리고 변화의 지난함

얼마 전 도서관 강연을 하며 여러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예전부터 갖고 있던 연구 관심사에 다시 마음이 간다. 몇년 전 사회언어학 수업을 할 때였다. 모 저널 특집호를 중심으로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 학부모들의 언어교육 행태를 다루는 논문을 읽었다. (왜 석박사 통합 수업에 스무 명이 넘는 수강생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수업엔 꽤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있었고, 다수는 현직 중등 영어교사였으며, 이들 중 몇몇은 유아나 초등 저학년 연령대의 자녀를 둔 학부모였다. 우린 아티클과 뉴스기사 속 학부모 ‘군상’들, 주변 지인들의 사례들을 논의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 와중에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현실 영어교육에 대한 대학원생들의 스탠스가 연구자/학부모 정체성에 따라서 사뭇 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연구자로 말할 땐 조기영어교육이나 과도한 사교육에 대해 비판적이다가도 학부모로서 발언할 때에는 자신이 제기한 비판의 지점을 번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때 가장 두드러진 발화 패턴은 ‘막상 아이를 키워보니’, ‘막상 애가 유치원 갈 때가 되니’, ‘막상 내 애 이야기가 되고 보니’였다. 아이를 갖기 전 타인의 사회적 관행으로 바라본 영어교육에 대한 이해와 아이를 본격적으로 영어교육에 입문시키면서 학부모로서 갖게 된 생각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대목들에 ‘막상…’이 등장했던 것이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주제에 (‘그걸 연구해 봐야 하나?’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하다) 계속 마음이 가는 것은 이 현상 속에 사회적 변화(의 지난함)의 핵심 요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비판적 지식을 학습한 주체마저 자녀와 관련된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주류적/상업적 논리를 따르게 되는가?’, ‘교육학적 지식은 양육과정에서 어떻게 비판되고 변형되며 수용되는가?’, 나아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자녀교육이라는 장에서 어떻게 유지되고 발달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회언어학을 수강한 대학원생들은 영어교육을 전공하며 조기영어교육의 폐해 혹은 다소간의 무용함에 대해 알고 있었고, 아동의 영어 리터러시 교육 입문이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는 마케팅 담론을 경계하고 있었으며, 놀이를 넘어선 본격적 학습이 개개인마다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 또한 주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녀들이 ‘다들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는’ 연령대를 통과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이론적 지식과 자녀 영어교육과 관련된 의사결정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영미를 중심으로 구축된 영어교육의 주류이론을 ‘손쉽게 방기하는’(거긴 거기고 여긴 여기이며 내 아이를 키운다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 ‘현실직시파’와 ‘중심을 잡고 휘둘리지 않으며 최대한 천천히 최소의 사교육만을 시키는’ ‘뚝심소신파’를 가르게 되는데 (한 학생은 ‘내가 배운 게 있지 남들과 똑같이 키울 순 없잖아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개개인의 내면의 풍경은 상당한 변화를 겪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같은 묘사는 자녀의 발달과정에서 연구자/대학원생 학부모가 겪게 되는 복잡다단한 변화를 매우 단순화한 것이며, 그들의 변화를 다양한 방법으로 추적한다면 이렇게 뭉뚱그릴 수 없는 사회적, 관계적, 내면적 힘이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조만간 이리저리 도움을 요청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것. ‘애도 안키워 본’ 중등 및 대학 영어교육 전공자를 무지에서 깨워줄 분들이 필요하니 말이다.

덧.
‘막상 정규직이 되어 보니’
‘시간강사 하다가 막상 교수가 되어 보니’
‘막상 장사를 시작하고 사람 뽑는 입장이 되다 보니’

‘막상’의 힘에 대해 생각할수록 할 말이 많지만 할 수가 없게 된다.

가르치려 들지 마라

Posted by on Oct 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가르치려 들지 마라”가 대세가 된 세상에서 가르치는 게 업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르쳐 본 사람은 안다. 의견과 지식, 팩트와 가치가 칼로 무 자르듯 잘리지 않는다는 것을. 적어도 인문사회과학, 교육학에서 ‘순수한 지식’이라는 것은 순수한 환상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 선생이 되지 않고 선생이 되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요즘, “잘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도리어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언제 어디서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을 길들이는 방법은 그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 드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닐까. 스스로 우둔해지는 자만이 가르치려 드는 이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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