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경계, 혁신, 그리고 진화

1. A가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상대는 미국에서 오래 거주한 한국인 2세 미국 시민권자 선배다. 평상시 영어를 쓰는 사람이고, 인사를 한 A와도 늘상 영어로 대화했다. 하지만 순간 장난기가 동한 A는 ‘한국 핏줄’의 동질성을 발동시키면서 유머스런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안녕하세요’와 고개숙이기, 손흔들기를 동시에 시전했다. 이것은 한국어인가 영어인가?

2. A가 B를 만났다. 둘은 경상도 출신 친구인데 우연히도 서울의 모 영어학원의 영어회화 수업을 동시에 수강하게 되었다. 첫 번째 수업시간, A가 B에게 “How have you been?”이라고 말을 건넸다. B는 장난스레 “I have been so miserable.”이라고 답했다. 문제는 B의 발화가 전형적인 경상도 억양을 띄고 있었다는 것이다. 순간 빵 터진 둘은 한참을 웃었다. 이 경우 B가 발화한 것은 영어인가 한국어(경상도 방언)인가? 둘의 ‘빵터짐’은 영어 문장의 내용에 대응하는가, 경상도 억양에 대응하는가, 아니면 이 둘의 절묘한 조합에 대응하는가?

3. A와 B는 중국인이다. 미국의 한 ESL 시간, 계속해서 A가 형용사 끝에 장난처럼 “的(de)”를 붙인다. 이에 질세라 B는 즉석해서 완료형을 나타내는 과거분사 뒤에 ‘了(le)’를 붙여 응수한다. 둘은 재미있어하며 히죽히죽 웃는다. 이들이 발화한 형용사와 과거분사는 영어인가 중국어인가?

4. ‘Untact’라는 ‘콩글리시’가 유행이다. 한국인들 다수가 이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다. 한 사람이 이 말을 영어로 생각하고 영미권의 원어민과 대화하면서 사용했다. 단어를 처음 들은 외국인은 속으로 ‘무슨 소리지?’했으나, 두 번째 ‘untact’를 듣고 이것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리고 재치있게 자신도 ‘untact’라는 말을 차용하여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후 원어민은 한국인을 만날 때 웃으며 ‘untact’를 자연스럽게 섞어 쓴다. 이 영어 원어민이 차용한 ‘untact’라는 단어는 한국어인가 영어인가?

우리는 언어의 경계를 명확히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어 내에도 수많은 외래어가 들어와 있고, 영어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그 어떤 언어도 ‘순수하게’ ‘섞이지 않고’ 쓰이거나 발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맥락과 상대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는 수많은 언어자원을 동원해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조립된 산출물 중에서는 전형적인 것도 있고, 약간의 혁신을 가미한 것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언어도 있다. 다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만난다면 조합의 혁신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통번역기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개인의 머릿속에 있는 언어자원에 더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타 언어자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주얼과 제스처 등이 결합되는 방식도 점점 다양해진다. 순간순간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단단한영어공부 #translanguaging

우문들 (답없는)

Posted by on May 22,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1. 언론보도는 ‘팩트’와 ‘입장’을 넘어 ‘대화’를 지향할 수 없는가?

2. 진실이 개인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이’에, 사이의 지층에 존재한다면, 그 ‘사이’는 어떻게 보도되어야 하는가?

3. 언론의 자기성찰성(self-reflexivity)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단지 구호의 차원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4. ‘당사자주의’라는 말에 붙은 ‘~주의’는 어떤 의미인가? ‘~주의’라는 말은 복잡다단한 주체와 사건, 대상과 관계들을 칼로 물베듯 잘라내어 세계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단순화하지는 않는가?

5. ‘A는 A고 B는 B다’라는 말은 얼마나 손쉬우며 때로 기만적인가. 뿌리는 뿌리고, 줄기는 줄기고, 가지는 가지고, 잎은 잎이라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 나무는 무엇이란 말인가.

중재당하는 언론은 많지만 중재하는 언론은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쓰린 요즘. 우매한 나는 ‘언론’의 정의를 곱씹어 본다.

언론 [言論]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하여 뉴스나 사실을 알리거나 의견과 논의를 전개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 (다음사전)

비마이너

Posted by on May 14,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오늘 받은 재난지원금을 <비마이너>에 보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들 하지만 오늘은 과감히 다른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어찌 보면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많은 분들에게 <비마이너>가 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글을 씁니다.

저의 비마이너에 대한 짧은 생각을 아래 옮겨놓습니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언론 지형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한경한(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을 보는 것으로 시각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이 사회에 대해 가장 많은 통찰력을 주는 것은 〈비마이너〉같은 매체가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비장애인으로서 보는 세계에 대해 머리를 쾅 치는 기사들이 종종 올라와요. 그럴 때 가슴이 떨리고, 제 좁았던 시야를 돌아보게 되죠. 장애인과 장애학의 관점에서 본 세계는 내가 지금까지 봤던 세계와 완전히 다르구나, 내가 뭘 몰랐구나 하는 걸 드러내줘요. 리터러시의 발달에서 기존의 지식을 충실하게 잘 섭렵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비마이너〉와 같이 그동안의 리터러시의 주류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관점에 끊임없이 열려 있도록 만드는 매체도 반드시 필요하죠. 그런 면에서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의 시각,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의 이해, 이와 관련된 실천이 리터러시 교육이 나아가야 할 주요한 방향 중 하나라고 봅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중에서)

제가 너무나 좁은 시야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잘 압니다. 교육을 한다 말하고 문해와 리터러시에 대해 떠들지만 실상은 먹고사니즘의 핑계 속에서 이제껏 쌓은 관계 안에 안주하며 세상을 볼 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세상’일 지는 모르지만 온전한 세계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어리석고 좁은 세상을 깨뜨려 주는 분들이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분들로 인해 제 어둔 마음이 밝아지고 세계는 변화합니다. 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흔들리더라도 함께 걸어갑니다.

아래 <비마이너>의 주소를 남깁니다. 비마이너를 읽고, 느끼고, 궁리하고, 알려주세요. 때로는 분노하고 연대해 주세요. “C메이저”로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세상을 보게 해주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얼굴을 오롯이 마주하게 하는 “B마이너”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장애인의 주홍글씨, 비마이너
https://beminor.com/

Listen to Me

1.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는 오로지 텍스트에만 천착하는 이해를 경계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계와 맥락을 함께 봐야 하는데 우리는 텍스트만을 바라보기 일쑤죠. 그것도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관계도 맥락도 망각하고 상대의 텍스트를 소화하기 보다 자신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읽기와 듣기가 적잖습니다.

2. 처음 “Listen to me.”라는 표현을 배울 때 ‘Listen이 자동사이니 to가 붙어야 한다. 그래서 ‘내 말을 들어봐’는 ‘Listen to me.’가 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말에서는 보통 ‘내 말’인데 영어에서는 ‘me’라는 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한국어의 목적어는 ‘말’인데 영어의 목적어는 인칭대명사더라고요.

3. 여전히 사람들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듣는 저를 발견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듣지 못하고 듣고 싶은 내용만을 듣는 것이죠. “Listen to you.”해야 하는데 “네 말만 듣게’ 되고,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Listen to myself.’하게 된달까요.

4. 단지 상대의 말이 아니라 상대를 들을 수 있다면, 그런 리터러시 교육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험은 늘 “다음을 듣고 질문에 답하시오”이지만, 삶에서는 “상대의 삶을 보듬고 질문을 던지시오”가 되길 바랍니다.

5. 이것은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쉽지 않네요. 하지만 다시 새기면서 어지러운 마음을 비워냅니다.

이것은 언어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입니다. ^^;;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4: 언어와 정체성, 그리고 적절성(appropriateness)의 애매함

한국인 간호사가 있었다. 최근 미국으로 건너가 자격을 취득해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간호사B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의사는 상황을 파악하고 간호사B에게 “그건 이리저리 해서 그녀에게(to her) 건네주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her’는 한국인 간호사였다.

간호사B와의 대화를 마친 의사가 다시 한국인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의사가 살짝 당황한 듯 이렇게 말했다.

“Oh, I’m sorry. Do you go by ‘her’?” (앗 미안합니다. ‘her’로 불리시나요?)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있던 간호사는 3-4초가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임을 알았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 ‘당연히 여성으로 안보이나?’ ‘여기에서는 이런 식으로 대놓고 물어보기도 하나?’ ‘나 같으면 모른척 her라고 말할 거 같은데…’ 등등.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라면 그런 질문을 받을 일이 없다. 우선 상대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묻는 걸 꺼리며, 그런 것을 물어보는 일이 엄청난 결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어에서는 him/her와 같이 성별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대명사를 쓰지 않아도 되기에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마도 ‘저분’이나 ‘저 간호사’ 정도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들어 미국에서도 her/him과 같은 대명사를 쓰기보다는 them과 같이 성별을 나타내지 않는 인칭대명사(gender-neutral personal pronoun)를 쓰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일화 속 의사가 그냥 ‘them’을 썼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수 있었을 것 같지만, 또 이런 ‘them’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them’이 누구누구인지 되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면 언어와 문화에 맞는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사회언어학강의노트

삶을 위한 리터러시, 강의 궁리중

<영어로 논문쓰기>를 완성도 있게 다듬고 대중적인 강의로 안착시키는 데 두 해 정도가 걸렸습니다.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문서화된 내용이 꽤 있으니 한 해 정도면 쓸만한 강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북토크 등의 기회를 통해 여러 분들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구체화시켜 볼까 합니다.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와 ‘유튜브 세대’ 자신의 이야기, 교사 등 그들과 자주 소통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배울 것도 많네요. 감사한 일입니다.

음모론의 발달 단계 – 한 가지 예

Posted by on May 6,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2. 열받는다. 가까운 이들에게 열받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3. 다같이 열받는다.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성토한다. 4. 여기엔 분명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 왜냐고? 이렇게 여러 사람이 열받았잖아!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는 사람들까지 음모론에 넘어가는 걸 보면 (1)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2) 부족주의적 사고가 지식과 경험 따위는 우습게 박살내거나 (3) 튀고 싶은 욕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욕망을 채운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팬덤에 합류한 이들은 비판자들을 ‘불만충’ 취급한다. 자기가 믿었던 것과 반대의 진실이 드러나도 자기는 훌쩍 ‘커’ 있다. 이 정도면 수지맞는 장사 아닌가?

사실이 의견보다 중요함을 넘어 사실이 욕망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겨야 할 시대 아닌가 싶다.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 만큼 부족을 규합해 우월함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져도 괜찮다’, ‘소수여도 괜찮다’, ‘나 자신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감각 아닐까. 논리와 과학이 필요한 만큼 무너지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배움의 시공간, 두서없는 단상들

온라인 개학 시기, 교수학습의 시공간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1. 온라인 개학이 거둔 일정한 성공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온라인 교육’이 가지는 내재적 균열은 ‘몸과 공간의 변화’라는 급진적 변수를 무시하고 ‘내용과 시간’을 잡아두려는 데 있지 않았을까. 배움에 있어 시공간은 분리 가능한가? 우리 교육은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2. 왜 적잖은 사람들이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가 안된다고 말하는가? 그저 의지의 부족인가? 배움의 공간이 달라지고 그 안에 놓여지는 몸이 달라지는데 ‘O교시’로 대표되는 시간의 구획이, 그 안에서 다뤄지는 내용이 그대로인 것은 자연스러운가?

3.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건만 여전히 교육에서 시공간이 따로 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옳은 일일까? 학교에서의 시간은 집에서의 시간과 같이 흐르는가? 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과 화면 속 사람들을 보거나 콘텐츠를 시청하는 시간은 동일한 밀도와 점성을 가지고 있는가?

4. 우리의 지각, 주의, 집중, 지속, 정서, 태도, 흥미, 몸짓 등은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어떻게 엮이는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의 몸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으로 매개되고(socially mediated), 공동체에 의해 규율잡힌(community-regulated) 학습은 컴퓨터에 의해 매개되는 학습과 어떻게 다른가?

5.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학교의 “O교시” 체제는 그 자체로 개인의 차이를 무시한다. 개인별로 이해와 배움, 집중과 지속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고의로 망각’한다. 공교육체제의 특성상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양과 수준 이상의 지식을 전수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필요악’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6. 추후 온라인 학습이 또 다시 ‘디폴트’가 되는 시기가 온다면 우리는 여전히 O교시 체제를 고집해야 하는가? 혹 ‘급진적 개인화’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공간의 변화, 함께 존재함(co-presence)의 상실은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변화를 수반한다. 그렇게 변화한 시공간에 맞는 새로운 배움을 상상해야 할 시기일지 모른다.

7. 몇 주 만에 온라인 개학을 위한 IT 시스템을 안정화시켰다는 소식, 그에 대한 일부 언론의 상찬을 보며 우리사회가 여전히 기술중심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IT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그것은 ‘온라인 개학’의 기술적 선결과제일 뿐 완성은 아니다.

8. 중요한 것은 ‘온라인/디지털’이라는 플랫폼에서 ‘개학’을 했다는 것이다. 학교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IT시스템의 완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교사들의 노고, 나아가 학부모와 학습자들의 협력이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조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온.라.인. 개학’이 아니라 ‘온라인 개.학.’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

9.교실에서 행해지던 짝활동 및 모둠활동이 힘들어진다는 것은 상호작용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부 온라인 수업이 택하고 있는 ‘시청완료=학습완료’의 공식은 바람직한가? 시청의 완료가 그 시간 동안의 인지적 정서적 몰입(engagement)을 담보하는가?

10. 오프라인 개학이 다가오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전의 세계’에 적응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 시간의 고군분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잊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새로운 실천의 싹이 트지 않을까?

‘금배지 언박싱’에 관하여

말이나 행위를 가져오는 것은 그저 ‘선택의 자유’일까

1. ‘언박싱’ 담론이 의례의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품의 영역, 자신의 구매를 보여주는 영역, 때로 누군가의 제품을 홍보하는 영역이다. 언박싱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상품,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라는 네트워크에서 작동한다. 언박싱 영상의 생산자와 시청자는 재화를 통해 매개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다.

2. ‘국회의원 금배지’가 점하는 담론의 영역이 있다. 기본적으로 배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지만, 자주 ‘국민을 내려다보는’ 태도를 함의한다. ‘금배지 좀 달았다고’와 같이 정치인에 대한 못마땅함을 표현할 때도 종종 사용된다. 그렇게 금배지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민주정치의 표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금배지는 공적영역의 담론 안에 위치하여 대표자로서의 정치인을 상징한다.

3.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들이 교섭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말은 섞이고 의례는 ‘선을 넘는다’. 교회 내에서 랩뮤직의 사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에서 ‘신박한 예배 형식’이 되었다. 도덕적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 합쳐져 ‘착한 가격’을 낳았고, 이는 또 다른 영역과 만나 ‘착한 임대인 정책’을 만들어 냈다.

4. 담론간의 선을 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모든 가로지르기를 긍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교육의 일주체인 학습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 여길 수 없으며, 비상시의 온라인수업을 ‘미래교육’이라 표현하는 것에 손뼉칠 이유도 없다. 담론이 섞이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지만, 그 가능성은 희망일 수도, 타락일 수도 있는 것이다.

5. 그런 면에서 정치의 영역에 있는 ‘금배지’를 ‘언박싱’하는 행위는 위태롭다. (물론 이걸 ‘재미있다’고 표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라면 공공의 영역을 상징하는 금배지를 개인과 상품 담론의 최전선에 있는 언박싱이라는 의례에 얹어놓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구시대의 끝자락에 머무는 일일 수 있지만 말이다.

담론을 섞는 일은 창조적인 행위일 수도 상식의 파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점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위치에서 어떤 가로지르기가 용납되고 요청되느냐를 판단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가로지르기의 예술’에 능통해야 한다. 거침없이 가로지르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덧. 이 글을 쓰고 나니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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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키워드는 ‘윤리’입니다. 보통 윤리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 윤리적 측면이 개입하죠. 얼마 전 온라인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작명이 있었어요. 바로 ‘버닝쑨대국밥집’과 ‘버닝선대인’인데, 국밥집과 프로그램 이름을 저렇게 지은 거예요. 여기에서 타인의 말을 자기 말이나 글로 가져올 때의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아마도 저 이름을 택한 사람들은 주목받는 말장난을 원했겠죠.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켜 한 번 더 쳐다보게 하는 효과를 노리면서요.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말만 달랑 떼어오려 했다는 점이에요. ‘버닝썬’이라는 말이 태어난 자리의 착취와 잔혹함, 분노와 고통은 아랑곳없이 말의 힘만을 가져오려 한 거죠.

저는 이런 행위가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말은 사전 위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 상태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관계 속에 뿌리박고 또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말 주위로 권력과 욕망, 아픔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말을 가져오고 이름을 정하는 데 필요한 윤리는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는 윤리이고, 말이 자라난 사회정치적 토양에 대한 살핌의 윤리이며, 무엇보다도 그 말로 엮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죠. 삶과 세계를, 거기 살고 있는 감정과 모순을 지워버리고 말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시키는 행위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이건 단순히 말실수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망각, 맥락에 대한 몰이해, 나아가 자기중심성으로의 한없는 함몰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에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러시아의 문학평론가이자 이론가인 바흐친이 간파했듯이 우리의 말은 원래 누군가의 말이었고 우리의 조어는 결코 완벽한 창조가 아니라는 점, 말이 우리 곁에 올 때 세계가, 사건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이 함께 따라온다는 사실이에요. 말을 쓰는 것은 늘 삶에 잇대는 행위이고,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습득은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성장과 떼어놓을 수 없어요.” (265-266쪽)

필요 없는 책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대한 독자반응에 대해 편집장님과 말씀을 나누었다. 유튜브와 텍스트 문화에 대한 성찰과 논의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로서의 책의 역할과 엇갈리는 반응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에 대한 편집장님의 답이 마음에 남아 기록해 둔다.

“만인을 위로하고 안심하게 하는 책은 나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인상깊었던 모리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을 때가 많은 사람이면 됩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유튜브는책을집어삼킬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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