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교육학 수업을 준비하다가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1. “갈등이 없으면 삶의 존엄성이 손상됩니다. 투쟁과 갈등이 없는 삶 또는 인간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갈등을 부정하는 것은 생생하고 사회적인 경험의 현실적인 측면을 대부분 무시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2.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읽어가며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학생들은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불만도 많다. 거의 모든 학생이 현실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흥미로운 것은 변화의 당위에 대한 긍정과 갈등과 투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동시에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변화가 필요하지만 갈등이 심해지는 건 피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다.

3. 첫 인용구에 드러나듯이 프레이리는 갈등을 대면하는 행위를 삶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본다. 양심의 동반자라 칭한다. 세상을 경험하고 의식화가 진행되고 나면 갈등을 알게 된다기 보다는 갈등을 직시하는 가운데 존엄과 양심이 회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갈등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윤리적 삶의 지표다.

4. 프레이리가 말하는 ‘의식화’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며 거기에 존재하는 갈등과 희망을 받아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습량과 비례하지 않는다. 헨리 지루는 “해방적인 지식을 거부하는 이들은 오히려 지식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알면 알수록 껄끄러운 일들을 멀리하고, 지식을 해방의 도구보다는 축적의 수단으로 쓰는 이들이 많아진다. 프레이리와 지루의 말을 더하면 알면 알수록 존엄은 스러지고 양심은 잊혀진다.

5. 비판교육학에서의 ‘갈등’이 주변 사람들과의 불화와 같지는 않다. 물론 정당과 노조활동가, 사회운동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은 직접적인 갈등상황을 피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학생들과 비판교육학을 논의할 때 나는 ‘주어진 내러티브’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곤 한다. 다시 지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이른바 자기가 생산한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담론은 교사와 학생이 구현하고 생산하는 복잡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형식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많은 쟁점들은 이 관심사를 중심으로 비판교육학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교사는 지성인이다>, 211쪽)

6. 지루의 말 중에서 핵심은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미를 만들고 공유하고 때로는 강요하며 살아간다. 사회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장 잘 하는 일이 의미생산인 것이다. 그런데 갈등없는 삶에서 이 의미는 그저 부여된다. 앎이든 삶이든 저항없이 순항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삶은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바람을 맞고 무르팍이 깨지기 전에는 몸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암묵적으로 만들어낸 의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상황이 계속된다.

7. 학교 현장에서의 비판교육학은 지배적 서사에 대한 온갖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식을 쌓음과 동시에 그에 대해 의심하는 습속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 누가 규율을 제정하는가? 누가 상식을 정의하는가? 누가 나의 생각을, 나아가 우리의 생각을 만드는가? 김성우는 왜 나에게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는가?

8. 비판교육학 수업을 앞두고 갈등에 대해 끄적여 보았다. 갈등에 취약한 사람으로서 갈등을 끌어안는 사상에 대해 논의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갈등이 삶의 필연적 조건임을 깨닫고 그 복판에 뛰어들었음에도 희망과 사랑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제나 마음이 차오른다. 비록 한 주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학생들이 삶의 서사의 작동방식을, 생각의 연원을, 갈등과 저항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제 수업 준비를 마무리해야겠다.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Apr 1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코로나 19가 준비할 틈도 없이 미래교육을 앞당기고 있다”는 MBC 뉴스의 한 꼭지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교육이 ‘미래교육’이라고? 정말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구나 싶다. 교사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이 미래의 교육일 수는 없다.

2. 선거가 끝나고 ‘자유 민주주의’는 가고 ‘평등 민주주의’가 오기를, 하고 중얼거렸다. 단지 정치세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종종 아쉬우나 우리의 불평등은 내내 잔혹하다.

3. 학생들에게 절대 내 책을 읽히지 않는 이유

나: 대학 때 자기가 쓴 책 읽히는 교수님들 있었어?
짝: 어어 두어 명 있었던 거 같아.
나: 어떤 기분이 들었어?
짝: 장사꾼 같았어.
나: (깨달음)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수업에서 나의 책을 읽으란 말을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대학원 수업 시간 나의 책을 읽었다는 학생이 무려 둘이나!

말하지도 않았는데 읽는 것은 말리지 않는다. 그저 감사할 뿐. ^^

4. 바이러스와 인간, 공간과 시간, 개인과 사회, 신뢰와 공포, 내부와 외부, 국가와 국가, 정치와 의료, 디지털과 아날로그, 손과 얼굴,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처절하게 배운다. 최대한의 거리확보를 위해 각자의 방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시절, 모든 것이 거대한 하나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를 세상에 중심에 놓았던 어리석었던 날들을 돌아보길 빈다. 인간은 그저 변방의 한 노드(node)일 뿐이니까.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지만, 만물과의 전쟁에서는 대패하기를. 이제껏 그래왔듯 득의양양 오만한 승자처럼 나대는 행태는 사라지길 간절히 빈다.

5. ‘생각해 보면’이나 ‘돌아보면’ 같은 단어를 자주 써왔다. 어쩌면 스스로가 성찰의 시늉을 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일기를 쓰고, 쪽글을 쓰고, 수업에 대한 메모를 하고, 대화를 기록하고, 이들에 대해 곱씹고… 그것들을 ‘성찰’이라는 두루뭉술한 이름으로 묶어 온갖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기충족적인 성찰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는 나의 비판과 성찰은 글 밖에서 무엇이란 말인가.

6. 다음 영어교육과정 수업 주제가 비판적 교육학(critical pedagogy)이다. 간만에 프레이리를 다시 읽는다. 점점 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끌린다. ‘희망’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빛을 잃어가는 시대라서일까. 온몸으로 세상에 부딪치는 사랑과 희망이 된 이들에게 감사한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대화도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창조와 재창조의 행위는 사랑과 융합되지 않는다면 가능할 수 없다. 사랑은 대화의 주춧돌인 동시에 대화 자체이다. 따라서 사랑은 책임있는 주체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지배관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지배관계에서는 사랑의 병리적 현상이 나타난다. 지배자에게서는 사디즘, 피지배자에게서는 마조히즘이 엿보인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사랑의 행위가 그들의 대의, 즉 해방을 바라는 욕구에 더해져야 한다. 사랑이 깃든 이런 헌신은 대화라는 형태를 띤다. 사랑하려면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사랑은 감상적 사랑일 수 없다. 자유의 행위로써 사랑이 조작의 구실거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또 다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행위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조건이 더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억압적 상황을 없애야만 비로소 억압적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던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파울로 프레이리. – 피터 맥라렌 저. 강주헌 옮김. <체 게바라, 파울로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 (아침이슬, 2008) 266-267.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짝과나 #일상스케치

교육의 온라인화를 넘어 급진적 상상력으로

‘교육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했다’는 패러다임으로는 지금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적확하고 풍부하게 이 사태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고, 이 상황에서 삶과 교육이 접속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다’는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 좀더 적절하다. 그저 교육이 오프에서 온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삶의 양태와 교육이 접속하는 방식이 되돌릴 수 없을만큼 변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전에는 삶이 교육과 접속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는 ‘등하교’였다. 등하교를 중심으로 일련의 사건들이 조직되고 실행된다. 등하교가 적절히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을 적절히 조직해야 한다. 아침 등교를 위해 일정시간 취침을 취해야 한다. 등하교 시간을 염두에 두고 하루가 계획되어야 한다. 저연령 학습자들의 경우라면 그 시간에 맞추어 보호자들의 시간 또한 조정되어야 한다.

즉 성공적인 등하교를 위해서는 가족이, 학생 본인이, 대중교통 운행주체가, 교사가, 학교가 책임져야 할 영역들이 존재한다. 작업계획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협업이 기막히게 맞물려 돌아가야만 ‘등하교’라는 의례가 성공적으로 수행된다. 그런데 이것은 학교생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수업의 시작과 끝, 교과서를 펴고 읽는 행위, 준비물을 가져오는 일, 학교에서의 점심식사, 학교행사, 도서관 등 학교시설 이용 등 모든 것이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근거하고 있다. 실로 엄청난 ‘사회계약’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몸(body)의 문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은 교수학습방식의 변화를 낳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몸의 변화를 가져온다. “어 생각보다 콘텐츠가 괜찮네”라고 말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이 콘텐츠를 하루 종일 시청해야 할 몸”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고려가 없는 온라인 교육은 결국 ‘훈육에 적합한 몸’만을 겨냥한 교육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실로 교육의 몰락, 아니 타락이다.

근본적으로 학교는 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공간이다. 그 안이 시끄럽고 삐걱거릴지라도 결국 한 공간 안에 여러 사람이 함께 존재(copresence)함으로 발생하는 사회문화적, 제도적, ‘분위기적’ 힘이 존재한다. 물리적 공간에서 문화와 규율을 공유하는 개인들은 결코 ‘개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온라인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탈각된다. 화면 안에 수십 명이 들어왔을 때 작동하는 사회성은 한 교실 안에 수십 명의 몸이 공존할 때 작동하는 사회성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육이 수반하는 다양한 의례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책임과 역할, 온라인 교육에서의 몸의 변화, 공존의 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콘텐츠를 잘 만들 것인가’나 ‘어떻게 인프라를 확충할 것인가’의 고민으로 해결될 수 없다. 교사들의 노력은 소중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교육을 만들어 내려는 궁리는 존경스럽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육부가 소위 ‘뉴노멀’이 될지 모르는 온라인 교육의 미래를 고민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온라인 교육으로 기존의 교육을 커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삶의 질서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온라인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질문은 ‘어떤 콘텐츠를 만들고 나누어줄 것인가’를 넘어 변화하는 삶의 지형 속에서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야 한다. ‘온라인 교수학습’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재구조화 속에서 교육의 본질을 재구조화하는 작업’이 절실한 것이다.

한 번도 몰랐던 세계를 알고 싶다면

(이 말이 딱히 마음에 들진 않지만) 소위 ‘사회적 약자’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자신들이 힘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강자’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약자를 ‘위한’ 정치도 중요하지만 약자’의’ 정치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소수자를 위한’ 정치도 좋지만 ‘소수자의’ 정치가 없다면 그저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결국 모두를 ‘위한’ 정치도 중요하지만 모두’의’ 정치가 우선입니다.

저의 속좁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우선순위를 한번도 바꾸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도덕적 우위에 선 듯이 ‘당신이 현실을 몰라서 그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너는 모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알고 누가 모르는 게 아니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를 비롯해 그런 논쟁을 벌이는 이들 대부분은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논쟁을 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이 사회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는 안다/모른다의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진짜 잘 알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방법론에 대한 고민 없이 네가 더 아느니 내가 더 아느니 백날 논쟁해 봐야 제대로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틀린 방법으로 온전한 세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잘 알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민주주의의 원리를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잘 사는 사회로 가까와지려면 모두의 생각이 평등하게 모여져야 한다는 관점 말입니다. 즉, 모두가 존엄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세상을 그리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게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골고루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때껏 강자들은 세상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자원을 독점하고, 연구인력을 독점하고, 사회의 지식 인프라를 독점하고, 무엇보다 정치와 자본을 독점해 왔습니다. 자본만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 기획이, 희망이, 실천이, 조직이 독점되어 온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비전을 제시하더라도 강함이 더욱 강하게 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는 이 세계가 좋아질 방법을 우리 모두가 알 방도가 없습니다. 힘을 쓸 수록 상상력은 고갈되고 배제는 강해지고 소외는 깊어집니다. 더불어 ‘안다는 환상’은 점점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소위 ‘약자’와 ‘소수자’의 삶과 지식, 경험과 관점입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어 이때껏 이 사회가 온전히 가져보지 못한 관점과 지혜, 제도를 획득해야 합니다. ‘나는 안다/너는 모른다’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르는 것이 있다’로 대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회가 복원되고 공동체가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서로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이 원칙을 지켜가면 좋겠습니다. ‘~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의 정치’가 꽃피우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한 번도 몰랐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세계를 짓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알고 싶습니다. 새로운 앎과 관점이, 이제껏 없었던 권력이 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말입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여전히 소환되는 촛불에 대한 단상

Posted by on Apr 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6-17년의 촛불이 ‘단일한 대오’였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우매하고 위험한 게 있을까?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지만 그들의 요구는 이미/언제나 퇴진 이후를 향하고 있었다. 수많은 스펙트럼의 정치사회적 목소리가 잠시 모아졌다고 해서 그들의 열망을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환원하거나 참여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호명하는 것은 철저한 기만과 오분석에 근거한 행위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모인 이유는 시민사회, 노동운동, 여성운동, 장애인운동, 청소년운동, 문화운동, 세월호 진실규명 투쟁 등이 더 나은 사회로 가려는 길을 박근혜 정권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들이 갖고 있는 전망의 차이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양성의 분출을 막고 있던 힘이 제거되었다면 다양한 세력의 요구를 받아 안을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해야 했고, 그것은 이전의 억압적 조치의 원상복구(e.g. 전교조 법외노조화 취소)나 차별없는 세상으로의 전진(e.g.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모습을 취했어야 했다.

이 점을 뼈아프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총선의 결과에 관계없이 촛불의 의미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촛불은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이 거대한 어둠을 걷어내야만 우리 각자가 가진 빛을 밝힐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지금 촛불을 소환하려 한다면 광화문과 전국의 도시를 가득 채운 촛불의 거대한 물결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들렸던 촛불을, 그 촛불에 밝혀졌던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촛불은 하나인 적이 없고, 하나여서도 안된다. 국정교과서를 발행하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동원해서 우리를 하나로 만들려 했던 자들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온라인 강의 단상

실시간 대면수업보다 녹화영상을 선호하는 학생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여겨졌으리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교수와의 직접 대면, 다른 수강생들과의 소통을 피하면서 수강할 수 있다는 점이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어필했다는 뜻이다. 가끔 자문한다. “나의 수업은 마이크로 판옵티콘인가?”

강의를 맡고 계신 한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런 경향은 점차 심화될 것 같다. ‘번잡한’ 소통없이 ‘편안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부담을 덜어준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오는 것을 넘어, ‘수업참여’보다는 ‘콘텐츠 소비’를 지향하는 일을 마냥 반길 수는 없지만 이해가 간다. (그 틈을 타서 엉망진창으로 수업을 방치하는 교수는 응당의 책임을 져야 한다.)

오랜 시간 우리사회는 사회적 접촉에서 일어나는 마찰에 대해 ‘참고 견디라’고 말해왔다. 아빠가 말하면 들어라, 선배가 말하는데 어딜 꼴아보냐, 사장님 화난 거 안보이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한 놈 졸았으니 반 전체 열 대씩 맞아라, 목사님 말 안들으면 사탄의 꾀에 빠지는 거다, 팀장 말에는 무조건 예스로 답해라, 군대에선 까라면 까는 거다… 그리고 우리는 목구멍에 처참한 기스를 내면서 그 모든 껄끄러움을 삼켜왔다.

여전히 구조는 여기저기서 굴욕을 강요한다. 어쩌면 바로 그 점때문에 사람들이 ‘접촉없는’ 사회를 선호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업이 꼭 고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게 영혼의 평안에 도움이 된다. 대학생들은 팀프로젝트에서 꼰대, 미꾸라지, 무임승차자를 만난 경험을 최악의 경험으로 꼽는다. 상호신뢰가 턱없이 부족한 사회에서 혼자 공부하고 혼자 노는 게 최고다. 접촉이 없으면 마찰도 없다. 평소 감당해야 하는 마찰만도 벅차단 말이다.

‘접촉없는’ 학습이 당연시될 때 함께 모이는 일은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학교가 막연히 ‘사회성을 키운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온라인 소통이 아니라 온라인 콘텐츠로서의 교육이 이전과 같은 교육이 수 있을까?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정서적, 사회적 발달이 필수적인 낮은 연령의 학생들은 모르겠지만 대학교육이 그래선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주체할 수 없는 반가움을 표시하는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뭉클하다.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가 생활화되고 한 학기를 통째로 온라인에서 보내게 된 요즘, 그런 순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2D 캐릭터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로직에 의해 화면에 배치된다. 모두 같은 스피커를 통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나는 종종 누가 말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비디오와 오디오 콘트롤로 ‘존재한다는 정보’ 외에는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다. 바이러스는 시공간을 바꾸고, 지각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고, 습속을 바꾼다. 결국 각자의 몸이, ‘우리’의 존재 양태가, 사회의 작동방식이 변해간다. 대책없는 노스탤지어로 그 모든 걸 부정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변화를 직시하려는 노력은 분명 가치가 있다.우리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어떤 ‘우리’로 존재하게 될까?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출간!

책이 나왔습니다!!!

1년 여 전부터 #삶을위한리터러시 태그로 적지 않은 글을 올렸습니다. 한국사회의 문해력 혹은 리터러시라는 주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쪽글을 꾸준히 공유했죠. 언젠가 본격적으로 정리를 해보자는 생각은 있었지만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 하염없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문화연구자 엄기호 선생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공부공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의 책을 읽고 선생님의 관점과 글쓰기에서 큰 도움을 받았는데 함께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 깊이를 더하고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는 주제를 좀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기획과 준비단계를 거쳐 작년 여름 네 번의 긴 대담을 가졌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지도교수와 오랜 시간 토론한 적은 있지만, 동료 연구자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대담 과정에서 배움의 기쁨이 컸습니다. 말 그대로 대화를 통해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경험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밀도있는 대화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탐색하고 싶어졌습니다.

대담은 모두 전사되었고, 편집장님께서 책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후 말을 다듬고 글을 보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대화를 책으로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도서출판 따비의 신수진 편집장님께서 잘 이끌어 주셔서 이렇게 오늘 세상에 나오게 되었네요. 작지만 뜻깊은 삶의 매듭이 지어진 것 같아 기쁩니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 밝혔듯 이 책은 하나의 초대입니다. 미디어의 지형이 숨가쁘게 변화하는 시대, 읽고 쓰는 일의 본질을 놓치지 말고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함께 만들어 가자는 제안입니다.

“정성을 다해 읽고, 쓰고, 보고, 만들며 일상을 엮어가는 독자들을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찾아가는 여정에 초대한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읽기와 쓰기 관행의 변화를 주시하는 분들, 동영상의 시대 책과 문자매체의 운명이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분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자녀의 리터러시 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들, 문자와 영상을 엮어 리터러시 교육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분들, 일선에서 학생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리터러시 교육을 만들어가고 있는 교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미지를, 영상을 탐험하는 분들과 함께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꿈꾸고자 한다. 이 대담이 서로를 읽어내고 새로운 삶을 써내려가는 길에 작은 디딤돌이 되길 소망한다.”

그간 #삶을위한리터러시 포스트에 반응해 주시고 같이 고민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책이 우리사회 리터러시에 대한 더 풍성한 논의와 궁리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읽어주시고 널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판사 소개:
힘의 과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한 다리로,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으로, 읽기와 쓰기뿐 아니라 듣기와 보기의 가능성까지!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응용언어학자 김성우가 함께 나눈 좋은 삶을 가꾸는 리터러시.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지식검색을 하는 것도 아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며 유튜브 채팅 기능으로 소통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리터러시의 정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서로에게 ‘난독증이냐’며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단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꼰대’가 ‘가르치려 든다’고 경계한다. 리터러시가 혐오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아니라 성찰의 도구가 될 수는 없을까?

젊은 세대의 읽기 능력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최근 몇 년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읽기 영역에서 한국 학생들의 순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거나 ‘문해가 매우 취약한 수준’의 비율(38%)이 OECD 국가 중 하위권(2018년 조사)이라는 수치가 제시된다. “우리 아이가 책은 안 읽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학생들이 교과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학부모와 교사들의 경험도 근거가 된다. 과연 젊은 세대의 문해력 수준이 떨어진 것일까? 이것을 문해력의 위기라 할 수 있을까?

삶이 말에 스며드는 방식에 천착해온 문화연구자 엄기호와 말이 삶을 빚어내는 모습을 탐색해온 응용언어학자 김성우가 문해력/리터러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리터러시의 상황을 ‘위기’로 부르는 평가가 정당한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몸과 사고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리터러시를 경쟁의 도구가 아닌 공공의 인프라로 만들어갈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폭넓게 논의한 기록이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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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서점은 4월 8일 수요일 이후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주요 온라인 서점 링크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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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4

1. 녹음기술은 미디어로서 개인을 확장시켰다. 나의 목소리가 나를 떠나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녹음된 음성은 어디든 결합할 수 있다. 나의 목소리가 타인의 입에 올려질 수도 있고, 더빙의 재료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처럼 미디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로부터 탈각된(disembodied) 목소리를 활용하여 ‘자연스런’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미디어, 특히 애니메이션을 통해 갖게 되는 특정한 인종, 계급, 성별, 연령, 직종 등에 대한 이미지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을 시각적으로 추상화하고 청각적으로 매개하여 구성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복사’한 것이 아니라, 탈신체(disembodiment)와 추상화, 재조립(reassemblage)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2. 좀 우습기도, 멋적기도 한 이야기지만 중고등학교 때 영어 발음을 네이티브랑 똑같이 하려고 애쓰는 애들 보면 왠지 멀리하고 싶었다. 영어는 좋아하는 과목이었고 나름 잘하기도 했는데 발음에 대해서만큼은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괜한 고집을 피운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던 것 같다. 그땐 멀리 보지 못해서 내가 응용언어학을 하게 될 줄 몰랐던 것.

나의 이 멍청한 (하지만 나름 귀엽다고 우기고 싶은)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발음은 개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 말을 열심히 발음하고 있으면 뭔가 뇌가 꼬이는 듯하고 내 안에서 다른 내가 나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나의 목소리와 발음은 나의 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3. 사실 우리는 외국어 뿐 아니라 모국어를 사용할 때도 발음에 따라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차별한다. 발성이 좋고 발음이 정확한 — 흔히 말하는 아나운서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발음이 명확치 않은, 즉 “말을 꾸역꾸역 먹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발음이 좋으면 목소리마저 청아하게 들린다. 목소리와 발음은 해당 개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발음은 사회문화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지표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과거 대부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백인 성우가 더빙을 맡았다. 당연히 악역은 히스패닉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발음이 주였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의식중에 인종차별적 마인드를 키워갔다. 실로 무서운, 여전히 진행중인 현상이다.

4. 위의 1에서 서술한 바를 적용하자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특정한 집단의 신체를 추상화하여 비주얼로 만들고, 여기에 특정한 계층을 은밀히 가리키는(index) 목소리를 입힌다. 이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캐릭터를 특정한 목소리 자질과 연관시키고, 이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특징과 또다시 연관된다.

물론 이러한 결합이 즉흥적이거나 기계적인 것만은 아니며 상당한 사회문화적 고증을 거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을 쏟아붓더라도 애니메이션이 재현하는 인물(비주얼+사운드+캐릭터적 특성 등)이 일정한 본질화(essentalization: 사람의 특징 한두 가지로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일. ‘백인은 이렇다’든가, ‘이주노동자들은 이렇다’, 나아가 ‘시츄는 다 …하지’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남.)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3: 사회언어학 공부의 목표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은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연구합니다. 촘스키의 접근이 인간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능력으로서의 언어능력을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면 사회언어학은 사회와 언어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인간이 생물-문화적 존재(biocultural being)임을 생각한다면 언어연구의 축이 이렇게 분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사회언어학은 1960년대 말 뉴욕의 사회계층과 언어특징에 대한 Labov의 기념비적인 연구 이후로 출신지역, 인종, 계급, 교육수준, 성별 등이 개인 및 집단의 언어사용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죠. Labovian sociolinguistics와는 다르게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의사소통을 강조하고 인류학적 방법론을 취한 접근이 생겨났습니다. 대표적으로 70년대를 거치면서 Dell Hymes의 영향을 받은 ‘의사소통의 민족지학(Ethnography of communication)’이 정립되었고, 이는 언어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의사소통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 개념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90년대 이후에는 점차 인종, 성별과 같은 전통적 사회학적 변수가 언어사용에 미치는 영향이나 언어의 특징이 사회적 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를 보여주는 정도를 통계적/변량적으로 보는 연구보다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개개인의 아이덴티티, 포지셔닝, 권력관계 등이 언어사용과 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밝히려는 연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응용언어학과 가까운 사회언어학 연구에서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죠. 이와 함께 모든 언어행위에 수반되는 권력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는 비판적 사회언어학(critical sociolinguistics), 비판적 담화분석(critical discourse analysis), 비판적 담화연구(critical discourse studies) 등의 흐름도 사회언어학의 주요 분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번 학기 전반부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언어교육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사회와 언어의 관계를 공부해서 뭘 하려는 걸까요? 저는 사회언어학을 공부에 두 가지 상반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언어를 통해 사회를 파악하고, 언어와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누군가가 특정한 발음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index)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겠죠. 버니 샌더스가 자신의 이름에서 /r/ 발음을 탈락시킬 때 그것이 그의 연령과 출신지역(뉴욕)을 지시함을 알아채는 것, 그가 사용하는 억양이 유태인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글을 통해 그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하고 구획짓는 데 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상반되는, 어떤 면에서는 더욱 근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종, 계급, 출신지역, 성별을 다 벗어버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여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출신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원어민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어 혹은 방언 구사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그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한 인간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기술적 힘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매 순간 우리를 누르고 있는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 편견없이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고 싶으니까요. 첫 번째가 분석하고 읽어내는 작업이었다면 두 번째는 차별하지 않고 연결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네 압니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수많은 시간 체화한 언어적이고 사회적인 관습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서울 사람이 아닌 척, 남성이 아닌 척, 선생이 아닌 척하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자칫 조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요. 저를 둘러싼 수많은 권력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요. 아무 편견 없이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하지만 누구와 만나든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한 의사소통(appropriate/relevant communication)을 하려는 노력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특징을 차별의 포인트로 삼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성과 이야기할 때는 여성의 스타일에, 노인과 이야기할 때는 노인의 언어패턴에, 특정 지방 출신의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의 언어적 특성에 맞추어 대화를 나누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춰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지요. 우리가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벗어던질 순 없겠지만 서로의 세계에 조응하며 대화를 지어가는 협력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늘 불가능한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와 지역과 성별과 교육수준과 정치적 성향으로 짜여지는 권력관계를 하늘 아래 평등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회복시키고 싶은 꿈이야 말로 터무니없이 우둔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꿈을 꿀 때에 우리의 말글이, 몸짓이, 눈빛이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실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발음 좋은 학생’에게 칭찬을 합니다. “와 너 발음 좋다. 이거 한번 읽어볼래?” 이렇게 말입니다. 물론 사회적 기준에서 해당 학생의 발음은 좋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좋은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 다른 학생들은 ‘나쁜 발음’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어떤 발음이 사회적으로 권위(prestige)를 갖는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사회언어학의 첫 번째 목표에 해당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의 힘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에 대응합니다. 교실에는 ‘좋은 발음’과 ‘덜 좋은 발음’을 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야기합니다. 자기만의 삶을 궤적을 지닌 유일한 인격체로 말합니다. 그 주체들 사이에 위아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편견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늘 기억하고 자문합니다. ‘내가 더 높게 평가하고 있는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들의 사회문화적, 계급적, 역사적 연원을 안다면 이들을 차등적으로 대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메타포, 그리고 언어의 윤리

(아래 글은 <복음과 상황> 2020년 4월호 커버스토리 기고문 초안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WHO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 극심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재난의 여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감지된다. 취약계층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깊고, 경제적 여파로 인한 불안도 커져만 간다. 바이러스의 감염보다 빠른 것은 공포의 확산이다.

시민들의 상황은 한 마디로 ‘재난의 일상화’라고 할 만하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평소에 보지 않던 뉴스를 찾고, 듣지 않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별것 아닌 경고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어떻게든 공포를 완화시키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렇기에 위기상황의 말들은 더욱 강한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효과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 말들의 풍경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영감과 응원의 원천이 되며,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재난 상황에서 말글의 무게를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전쟁중인가

“감염병과의 전쟁” / “바이러스와의 전면전” / “최전선의 의료진” / “지역 봉쇄” / “전시상황” / “시한폭탄”

최근 언론에서 접한 비유표현이다.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전쟁으로 그린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진 않았지만 ‘전면전’, ‘최전선’, ‘봉쇄’, ‘전시’, ‘시한폭탄’ 등은 현재의 상황이 전쟁과 닮았음을 함의한다. 이는 스포츠에서의 전쟁 은유와 유사하다. “격파”, “대첩”, “용병술”, “명장”, “전략전술” 등의 단어는 스포츠 관련 보도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이는 스포츠 경기를 일종의 전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지금의 사태를 전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한국사회에서 전쟁 메타포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일례로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내부총질”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은 특정 정당이나 정파 내부의 분열과 갈등 상황에서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세력을 이르기 위해 사용된다. 누군가는 ‘총질을 총질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느냐’고 묻겠지만 상대의 행위를 ‘총질’에 빗대는 게 어떤 의미와 효과를 지니는지 생각해 보면 섬뜩한 의미가 드러난다. 우선 “내부총질”이 있다면, 여러 세력들이 서로 총을 쏴대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총격전에서는 으레 중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한다. 아울러 “내부총질”이 문제라면 “외부총질”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내부로부터의 격렬한 비판은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고, 조직의 구성원들을 적군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총질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벌어져야만 한다.

한 외국인과 우리사회의 전쟁 비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전쟁용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면서, 수업에 책을 안 가져온 학생에게 “전쟁터에 총을 놓고 나간다”고 하거나, 금전적 여유를 “총알”에 비유하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태도가 좋지 않거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군기가) 빠져있다”는 말을 쓰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전쟁과 관련된 메타포가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언어와 역사를 기반으로 나름의 메타포를 만들어 낸다. 수업을 전쟁터에, 교과서를 총에 비하는 일은 영미권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대만의 연구자에게 비슷한 표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아는 한 없다고 답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책을 안 가져오느니) 차라리 머리를 놓고 오지.”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수많은 침략을 경험하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수십 년 군사문화가 배어든 한국사회에 다양한 군대 관련 표현이 존재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없이 무의식적으로 군대 메타포를 사용하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면 학생들은 계속 ‘총’을 가지고 ‘전투’에 참가하는 ‘군인’일 수밖에 없다.

은유는 말의 장식이 아닌 사고의 패턴이다

서양에서 비유어(figurative language), 그 중에서도 은유(metaphor)에 관한 논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시학>에서 명사의 종류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누고 그 중의 하나로 은유를 들었다. 어원상 ‘넘어서(beyond/over)’라는 뜻의 ‘meta-‘와 ‘가져오다, 갖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pherein’이 결합한 라틴어 metaphora는 ‘옮겨간다, 전이된다, 넘어간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메타포는 한 대상의 이름이 다른 대상의 이름으로 넘어가는 것, 즉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시학, 124쪽)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오랜 세월 서구사회가 메타포를 이해하는 데 기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1980년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그들의 저작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견해에 반론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메타포는 단지 하나의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수사적 기법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며 사고패턴(thinking patterns)이라는 것이다. 약간의 학술용어를 동원하자면 메타포는 수사적 장치(rhetorical device)가 아니라, 인지 메커니즘(cognitive mechanism)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 표현들을 보자.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다.”
“세월이 날아간다.”
“Summer is just around the corner. (이제 곧 여름이다.)”

세 문장의 주어로 나온 ‘크리스마스’, ‘세월’, ‘Summer’는 모두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들이다. 하지만 시간은 물리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개념이다. 시간은 분명 존재하지만 만질 수 있는 코나 날아가는 새, 저만치 보이는 길모퉁이와는 다른 영역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코앞’, ‘날아간다’, ‘길모퉁이 돌아서 바로’라는 표현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의 세 표현 모두 시간 개념을 공간과 관련된 개념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추상적인 영역을 구체화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메타포의 역할이며, 이것은 단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공간(코, the corner)이나 운동(날아간다)과 같은 구체적이며 물리적인 개념으로 비유하는 사고패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추상과 구체를 엮어 사고를 풍부하게 만들고 확장시키는 능력은 인간의 인지적 역량 중 가장 주목할만한 능력으로 손색이 없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인생을 말하면서 “나는 그냥 엑스트라일 뿐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신과 단역배우를 연결시켜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한 사람이 엑스트라라면 누군가는 주연이고 또 누군가는 조연일 것이다. 누군가는 악역을, 다른 누군가는 선한 역할을 맡는다. 감독이나 각본이 궁금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집중조명(highlight)을 받고, 누군가는 컴컴한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즉 누군가가 ‘엑스트라’가 되는 순간, 세계는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이 되는 것이며, 개개인은 그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엑스트라’라는 말은 ‘세계는 영화(혹은 연극)’이라는 사고의 틀을 가정할 때 성립할 수 있는 메타포다.

‘메타포가 세계를 상정한다’는 관점을 사회문제에 연결시켜 보자.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을 때 종종 사용되는 은유 중에 ‘인질 메타포’가 있다. 예를 들어 “시민을 인질로 삼는다”는 헤드라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출퇴근 시민이 인질이 되고 공항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공항 이용객들이 인질이 된다. 대학 시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경우라면 학생이 인질이 된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파업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실행됨에도 불구하고 ‘인질’을 메타포로 쓸 때 범죄와 관련된 사고의 틀(frame)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인질”이라는 은유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질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질극을 구성하는 일련의 요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인질범은 인질을 대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인질’이라는 은유를 도입할 때 노동자들은 ‘인질범’이 되고, 파업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는 사람은 ‘인질’이 되며,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인질범이 요구하는 ‘몸값’이 된다는 것이다. 영특하게도 ‘인질’ 메타포를 쓰는 언론은 인질극의 빠른 종결을 기원하는 ‘선량한 세력’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몸값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노조는 노동법이 허용하는 수단을 동원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지만 대개의 노동조합은 사실상 약자에 가깝다. 오히려 사측이 강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파업은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적법한 노동권의 행사로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질 메타포’ 뒤에는 일체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그들의 행위를 극도로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는 생각의 틀이 들어 있다. 인질 프레임이 비틀고 있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뚫렸다”는 메타포의 아슬아슬함

지난 메르스 유행 사태와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메타포 중에 ‘OO가/OO도 뚫렸다’가 있다. 메타포에 관심을 가진 시민으로서 “뚫렸다”는 은유는 참으로 아슬아슬하다. 어딘가가 “뚫렸다”면, 거길 지키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있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사람은 거길 ‘뚫었으며’,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질 위험이 있다. 바이러스에 ‘뚫린’ 지역사회는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뚫고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하며 단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바이러스의 숙주로 기능한 이들은 방역망을, 지역을, 안전이라는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가? 우리는 ‘뚫은’ 주체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으로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감염자는 가해자요, 지역 주민은 피해자라는 구도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뚫다/뚫리다’로 표현되는 공격과 방어 혹은 침투와 보안의 메타포가 우리의 생각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재난 상황에서의 말글의 윤리

감염이 되는 순간 사람(person)은 보균자이자 매개체(carrier)가 된다. 적어도 공공영역에 있어서 해당 감염자의 정보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호스트(숙주)의 실제적/잠재적 위험에 대한 통계’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감염병 유행 사태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비극이다. 사람들에게 번호가 매겨지고, 접촉자(contact)의 수가 공개되고, 동선이 소상히 까발려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방역당국은 인격체(character)가 아니라 감염과 관련된 요인(factor)으로서 개인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량이 두 영역에 걸쳐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는 감염병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한 역학적 역량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도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는 차원이다. 전자가 ‘기술’로서의 역량이라면, 후자는 ‘돌봄’으로서의 역량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다.

지금 우리는 한 순간 확진자가 되어 ‘추적당하고 격리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한 공포는 바이러스보다 넓게 퍼져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가 나를 감염원이자 정보쪼가리로 처리하며 낙인찍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 당연히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병에 걸리는 것이 인격을 송두리째 침해당하는 경험이 되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격리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사례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자들을, 접촉자들을, 특정 지역을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가족으로, 동료 시민으로, 우리들의 또 다른 고향으로,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으로 대해야 한다. 감염이 인격과 관계, 지역사회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마음과 관계와 인격을 무력화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과학기술의 지혜를 모아 시스템을 보완함과 동시에 사려깊은 언행으로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감염예방 수칙을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보건 및 역학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막연한 공포를 확산시키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의 말글을 돌아보아야 한다. 장애인 시설을 ‘시한폭탄’이라 부르고, 특정 집단의 사람을 ‘색출’해서 ‘박멸’해야 한다고 외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동료 시민들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대상화함과 동시에 혐오와 공포의 세계를 팽창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어서 이 재난이 진정되고, 맑고 밝은 표정으로 거리에 활기가 돌기를 바란다.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아줄 수 있고 동료가 잠재적 위협이 되지 않는 일상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를 통해 서로에게 굳건한 신뢰와 따스한 응원이 될 수 있는 삶을 위한 말글을 배울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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