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 어떻게 발음하시나요?

‘신라면’의 발음 – 결과발표

1. 무려 156분이 답을 해주셨습니다. (아 신라면이 매워서 슬프다고 표시하신 분까지 하면 157명이네요.)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1위는 ‘신나면’이 차지했네요.*

‘신라면’의 발음, 어떻게 하시나요?

/신라면/ 63명 0.404
/실라면/ 21명 0.135
/신나면/ 72명 0.462

2. 제가 이 설문을 하게 된 동기는 지난 학기 한 수업 시간에 ‘신라면’ 발음이 화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학교 3학년 수업에서 2/3 이상의 학생들이 신라면을 /실라면/으로 발음한다고 답했을 때 저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3. 전통적인 설명에 의하면 ‘신+라면’과 같이 ‘신’을 별도의 이름으로 인식할 경우 ‘신라면’으로 발음할 수 있고, 하나의 이름으로 인식한다면 ‘신나면’으로 자음동화를 적용해서 발음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죠.

4. 그런데 수업 시간에 20여 명의 학생들 중 15명 정도가 /실라면/으로 발음을 한다는 겁니다. 충격이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5. 제 경우에는 ‘신나면’이라고 주로 하고, 광고에 나오듯 ‘신~’을 길게 빼서 발음하는 경우에는 ‘시~ㄴ라면’에 가깝게 발음하는 듯합니다. 주변에 여쭈어보니 이런 경향이 나타나더군요.

6. 아래 광고 두 편(하나는 오래 전 강부자/최수종 광고, 다른 하나는 최근의 하정우 광고)에서도 ‘신나면’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2DD0qCgGQ (하정우)
https://www.youtube.com/watch?v=Tb2DD0qCgGQ (강부자/최수종)

이런 이유에서 저는 ‘신나면’이나 ‘신라면’을 예상했습니다.

7. 아까 답변해 주신 분 중에서 ‘신라면’은 /실라면/으로, ‘진라면’은 ‘진나면’으로 발음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조금 난감합니다.

8. 저는 이런 현상을 전통적인 경제학과 행동경제학의 설명방식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경제학과 같은) 규칙 기반의 설명에서는 언중이 하나의 패턴을 따라 동일한 발음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행동경제학적 설명을 따르면) 개개인의 발음은 표준규칙에 의해 움직인다기 보다는 자신의 주변 환경, 인상적이었던 발음 등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9. 저의 가설은 연령에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는 것이었는데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해요 즉 /실라면/을 선택해 주신 분들 중에 연령이 비교적 낮은 분들이 다수셨거든요. 하지만 의외로 연세가 있는(?!) 분들도 계셔서 세대간 차이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10. 물론 이 설문을 (1) “‘신라면’을 천천히 읽어보세요”라는 지시문과 (2) “신라면 광고를 찍는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맛있는 신라면’을 연기해 보세요”와 같은 지시문을 주었을 때로 분리해서 실시한다면 아래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사회언어학의 아버지 Labov가 지적한 바 있듯이 말이죠.

11. 저의 감으로는 ‘안녕하세요’에서 ‘요’의 발음도 상당히 많이 변화한 것 같습니다. 입을 오므려 정확히 /요/를 발음하는 경우는 분명 젊은 세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고요. 이런 변화가 하나 둘이 아니겠지요.

12. 아무튼 한국어는 철자 그대로 소리를 낸다는 생각은 전혀 근거가 없고, 하나의 철자도 이렇게 상당히 고르게 갈릴 수 있습니다.

13. 저는 이런 예를 들어 외국어 발음에 대한 메타지식으로 활용합니다. 한국어도 이렇게 발음이 갈리는데 외국어 단어의 발음도 당연히 갈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식으로 말이죠.

14. 이상으로 신라면/신나면 or 신라면 or 실라면/에 발음 설문에 대한 간략한 결과보고를 마칩니다.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한국 수능시험과 수능 연계교재, 교과서의 수준비교

1. 최인철과 김재은의 연구 (2015)*에 의하면 EBS 수능 연계 교재와 수능 영어의 렉사일 지수는 교과서의 렉사일 지수에 비해 매년 100∼300가량 높게 나타남. 구체적으로 이게 무슨 말인지 좀더 살펴보면 아래와 같음.

2. 미국의 교육기관 Common Core State Standards Initiative
(CCSS)의 2012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 고교 10학년의 경우 1,050L∼1,260L 사이의 텍스트를 주로 학습. 11-12학년의 경우에는 1,185L∼1,385L 사이의 텍스트를 공부

3. CCSS 자료에 따르면 한국 고교 영어 교과서, 구체적으로 영어 I과 II의 렉사일 평균 지수 982L는 미국 교과과정상 6∼7학년 정도의 렉사일 텍스트 기준. 다시 말해 한국 고등학교 영어교과서의 전체 수준은 미국 중1 정도가 보는 책에 대응.

4. 이에 비해 EBS 수능 연계 교재와 수능 영어의 경우, 최저 1,149L에서 최고 1,288L까지의 지수를 보임. 이는미국 11, 12학년에 해당하는 렉사일 지수.

5. 이와 같은 분석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와 수능 연계교재, 수능 사이에는 상당한 난이도 간극이 있음을 알 수 있음. 이 분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중1 텍스트 읽다가 고3 텍스트 읽는 꼴.

6. 물론 위의 분석은 텍스트 난이도를 다각도로 비교했다기 보다는 렉사일 지수라는 단일하며 한정된 지표로 텍스트 수준을 비교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지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와 수능(연계) 텍스트 사이에 간극이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임.

7. 평가를 위한 최적(?)의 전략 구사라는 요인도 있지만 이러한 텍스트 내적 요인 덕에 학생들이 해석을 줄줄 외우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 영어능숙도가 낮은 학생의 경우에는 미국 고등학교 2-3학년 수준의 텍스트를 읽어낼 재간이 도무지 없음.

* 최인철 & 김재은 (2015).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 EBS 수능 연계 교재,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코퍼스기반 난이도 비교 분석. 멀티미디어 언어교육학회. 18(1), 59-92. Kim, Jae Eun & Choi, Inn-Chull. (2015). A corpus-based comparative analysis of linguistic difficulty among high school English textbooks, EBS-CSAT prep books, and College Scholastic Ability Test. Multimedia-Assisted Language Learning, 18(1), 59-92.

언어와 사고의 관계 생각하기

언어와 사고에 관련된 논쟁이 늘상 놓치는 것은 언어가 사고에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 속에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행위를 매개(mediate)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대말을 쓰지 않는다고 상대에 대한 사고가 변화하는가?”는 그래서 해상도가 떨어지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쓰던 존대를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은 특정한 맥락에서 권력관계의 변화, 새로운 규약의 도입, 기존 언어자원의 변화 등을 동시에 수반하며 이는 언어사용자의 지각과 감정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언어의 변화를 촉발하는 데 많은 요인이 개입되고, 변화된 언어가 촉발하는 다양한 변화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맥락과 언중의 인지과정을 빼놓고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가?”라고 묻는 것이 별무소용인 이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3537318?fbclid=IwAR2G73M1WZoOT3t7G3dFWARdPi3TF2sH4Ae3Gx3yNyhlUgXs1WC3t3gp2wA

남녀저자의 자기인용

[NATURE 뉴스] King 등이 arXiv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남성 저자가 자기 페이퍼를 인용하는 경우는 여성 저자의 자기인용에 비해 56%가 더 많다. 18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 나온 150만 건의 연구논문을 기반으로 한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 이 하나의 결과에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예상과 달랐던 것은 아래 도표와 같이 1960년대 이후 남녀 저자의 자기인용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지난 20여년 동안 더욱 벌어지고 있다는 것. 여성의 학계진출 증가와 권리신장에도 아랑곳않고(?) 이런 트렌드가 나타난다는 것이 흥미롭다.

Nature 뉴스 기사:
Men cite themselves more than women do
https://www.nature.com/…/men-cite-themselves-more-than-wome…

해당 논문:
Men Set Their Own Cites High: Gender and Self-citation across Fields and over Time
https://arxiv.org/abs/1607.00376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논문쓰기

도서관, 대출, 그리고 대학에서의 글쓰기

버지니아대학 학부생의 연간 대출수는 지난 10년간 238,000권에서 60,000권으로 줄어들었다. 대학원생과 교수들의 경우 비슷한 추세를 보여 같은 기간 각각 61퍼센트, 46 퍼센트 감소했다. 얼마 전 학생들의 도서이전 반대시위로 화제가 되었던 예일대 도서관의 경우에도 지난 10년간 대출이 64퍼센트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대출만 줄고 도서관 내의 책 참조가 늘어난 것은 아닌가? 내부 추적 시스템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이 드러난다. 대학 도서관의 도서 활용율은 모든 면에서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반대의 추세를 보이는 것은 e-book 활용. 2016년 버지니아대 도서관의 전자책 다운로드 권수는 약 170만 권으로 10년 전에 비해 열 배 이상 증가했다. 도서관 이용 행태와 대학에서의 읽기 쓰기 변화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읽어볼만한 기사. #삶을위한리터러시

https://www.theatlantic.com/ideas/archive/2019/05/college-students-arent-checking-out-books/590305/

통찰 혹은 짜깁기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와 연관되는 과거의 일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사건의 단초과 될만한 것들을 취사선택하여 짜깁는다. 우리의 뇌는 이를 재빠르게 수행한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완성되면 이를 ‘통찰’로 명명한다.

재빠른 회상을 통찰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이야기 만들기’는 더더욱 힘을 얻는다. 통찰의 내용은 더더욱 빈약해진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명민함을 확인하는 쾌감에 맛들인 사람은 통찰의 아비투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원인과 결과의 순서는 종종 반대의 순서로 발견된다. 물론 그렇게 역순으로 발견된 원인은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되도 않는 통찰이 많은 이유가 여기 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누가 주체로 호명되는가

 

어제 많은 분들이 공유한 영상입니다.
저 또한 보면서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성환 의원과 같은 정치인이 많아지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개운치만은 않았습니다.
기사에 붙여진 제목과 설명 때문이었습니다.

“경청, 설득의 힘 보여준 김성환 의원”

기사의 주인공은 김성환 의원입니다.
물론 그의 침착한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사들의 주연은 왜 대부분 정치인일까요?
오랜 시간 해당 이슈에 천착하며 싸워온 분들은 왜
늘 배경에만 머물러 있을까요?

왜 이 기사의 제목은
“시각장애인 어머니들, 정치인의 마음을 녹이다”가 되지 못할까요.

꼭 이 기사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청소년 단체가 줄기차게 무언가를 요구해 왔는데
박원순 시장이 우연히 그 시위대를 만나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메모를 한 뒤
후속조치를 약속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다음날 헤드라인은 누가 장식할까요?
청소년 단체의 구성원들과 대표일까요?
아니면 박원순 시장일까요?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을 겁니다.

뭐 헤드라인 하나 가지고 깐깐하게 구느냐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고요.

하지만 해당 기사 뿐 아니라
이 사회의 수많은 기사들이
그런 시각에서 생산된다면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노동자, 농민, 성소수자, 여성, 어린이,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등이
계속해서 싸워나가고 있는 가운데
특정한 조치가 취해졌을 때
왜 꼭 자치단체의 수장이나 정치인이
주체로 호명되어야 하나요.

어쩌면 이런 헤드라인들은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주체가
권력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라는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은 아닐까요?

누구를 주어의 자리에 놓느냐
누구를 화제로 올리느냐
누구를 가장 앞에 배치하고
누구를 저만치 뒤에 남겨두느냐.

세계의 싸움은 현장에도 있지만
문장 하나를 구성하는 방식에도 존재합니다.

더 많은 ‘무명’의 보통 사람들이
주체로 호명되며
헤드라인의 주어로 등장하기를.

더 많은 정치인들이
무명으로 남길 자처하며
‘경청’은 큰 뉴스가 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그런 순진한 꿈을 꾸는
아침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화자 하나, 청자 둘

말은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다. 따라서 말은 화자에게서 청자에게로 향한다. 여기에서 “화자—말—>청자” 도식이 나온다. 여기까지가 커뮤니케이션 개론에서 들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의 말은 언제나 양방향으로 달린다. 생각이 언어를 통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양날의 검이 된다. 단어 하나 하나는 단지 생각을 언어화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를 규정한다. 단순히 정보전달의 매개가 아니라 정체성과 정치성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말을 다듬고 또 다듬는 사람들은 안다. 말은 짜냄(expression)이면서 누름(suppression)이고, 전달(delivery)이면서 성찰(reflection)이라는 것을. 이들은 늘 팽팽하게 엮여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던지는 말은 언제나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때로는 더 빠르고 강하고 날카롭게.

대화자는 말하는 동시에 듣는 주체여야 한다. 따라서 두 사람간의 대화에서 한명이 말할 때 청자는 늘 둘이어야 한다. 이것이 대화의 성립조건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말과 관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든든한 공감이 될 수도 난데없는 오지랖이 될 수도 있다. 말은 명제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여정을 환기한다. 관계는 말의 배경이 아니라 얼굴에 가까운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의미론보다는 화용론에, 화용론보다는 담화분석에 끌렸던 것 같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주류와 비주류의 글쓰기

Posted by on May 22,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문득 ‘주류언론’을 보고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과 비마이너나 워커스를 보면서 글쓰기를 배워가는 사람은 사뭇 다른 글길을 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습작의 문제가 아닌 삶의 지평의 문제일 것이고, 발딛고 있는 토양이 바뀌지 않는 글쓰기는 언젠가 ‘퇴각’하고 말겠지만 글의 꼴과 결을 지어감에 있어 이들 매체가 꽤나 다른 가이드가 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 또래가 소위 ‘언론고시’를 준비할 때만 해도 조중동의 글을 열심히 분석했던 게 떠오른다.)

좋은 글은 날카로운 칼과 같지만 더 좋은 글은 묵직한 숫돌과 같다고 생각한다. 날선 칼은 자르고 나면 그만이지만 숫돌은 읽는 사람의 마음결을 갈아 섬세하고 날카롭게 한다. 그래서 정말 좋은 글은 독자의 시선을 벼리고 어둑했던 것들을 명징하게 한다. 적어도 요즘 내게 큰 울림을 준 글은 대개 비마이너와 같은 ‘비주류’ 매체에서 나왔다. 지극한 이기심의 발로에서 언론인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주류의 글을 분석하고 베끼는 일은 점차 사라졌으면 좋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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