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습-자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 영어학습자를 대함에 있어서 ‘영어’에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영어’ 보다는 ‘학습’ 전반이, ‘학습’ 보다는 ‘자者’ 즉 사람의 문제가 더욱 근본적이다. 이런 면에서 영어교육전문가의 전문성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면 사람보다 공부를, 공부보다는 영어를 중심에 놓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수포자’, ‘영포자’, ‘과포자’ 등의 명명은 현상의 근원에 닿지 못하고 개별 과목 중심의 사고를 강화한다.

총체적 관점을 이야기하면 개별 교과의 문제도 풀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별 교과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총체적 관점 즉, ‘인간으로서의 발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with 철

미디어 활용 교육

미디어 활용이 리터러시 교육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기술을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 활용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특별한 이견은 없다.

하지만 종종 ‘활용’에만 골몰하는 교육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교육은 미디어를 활용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류 메신저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메신저를 활용한 소통도 중요하지만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중요하다.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술 바깥의 삶에 대해 상상해 보는 일 또한 소중하다.

언젠가 ‘~할 수 있다’는 진술로 구성된 교육목표(Can-do statements)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교육의 목표가 일련의 ”Can-do statements’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진술들 행간에 존재하는 ‘Can’t-do statements’를 이해하는 것이라 믿는다. 할 수 없음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목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 글을 쓰고 나니 갑자기 고정희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별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내 맘 속에서는 분명 통하는 바가 있다.

===

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상호복수, 그리고 “우리가 친구가?”

 

예전에 “상호복수”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여러 표현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shake hands with someone’에서 hands가 복수인 이유는 손이 두 개라서라고 하죠. (물론 두 사람 모두 양손으로 악수를 하는 경우 네 개가 되겠죠.) 다른 예로 take turns / change seats 등이 있습니다. be on good/friendly terms with someone도 있군요.

페이스북에서 이미 친구가 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친구 수락을 누르니 이렇게 나오네요. You are friends with this person. – 상호복수 문법에 따르면 상대와 나를 포함하기에 ‘friends’라는 복수형을 쓰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문법적으로는 이런데 페이스북의 “unfollow’ 기능을 생각해 보면 개념적으로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분명 친구 사이이지만 unfollow를 할 경우 상대방의 소식이 사라지기 때문이죠.

즉, A는 B의 소식을 보지만, B는 A의 소식을 보지 않게 되는 ‘정보 비대칭 (실은 정서 비대칭)’의 상황이 되는 겁니다. 상호친구 사이에서 일방적인 친구 사이가 된달까요?

이 상황에서 ‘상호복수’ 개념은 그야말로 껍데기 느낌입니다. 정리하면 이런 거죠.

You are friends with this person. However, the person is not friends with you.”

저 unfollow 하신 분들은 이거 안보이실 듯. :)

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어떤 개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cat. It is very cute.”

여기에서 ‘a cat’은 고양이 한 마리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양이 중 하나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is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과 2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이런 면에서 “a(n)”의 의미는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관사공부중

A second thought

Let me give it a second thought.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보태어 봅니다.

“The only”도 그랬지만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와 같은 표현들도 깨져서는 안되는 법칙으로 배웠습니다. 이는 “서수 앞에는 the를 붙여라!”는 구호(?)로 정리되었죠. 하지만 이 공식에는 헛점이 있습니다.

제가 첫 문장에서 쓴 “a second thought”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는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다” 정도의 뜻으로 “a second thought”와 같이 부정관사를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차이 또한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에서 “second”는 ‘다시 한 번’ 한번 더’ 정도의 의미입니다. 서수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것이죠. “take a second look(다시 보다)”과 같은 용법도 비슷합니다. 만약 우주선을 만드는 팀의 디렉터가 “Nobody deserves a second chance here.”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두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도가 되겠죠. 우주선이 폭파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니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학술논문에서 생각나는 예는 “a second limitation”과 같은 표현있습니다. 연구의 한계를 논의하며 “두 번째 한계로는…”과 같이 이야기할 때 쓸 수 있는 어구죠. 이 경우에는 한계점이 몇 있는지 언급하지 않고 “첫 번째 한계는…이다. 두 번째 한계는…이다.”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특정 대상의 수가 N으로 한정되어 있고, 이에 대해서 “첫째, 둘째, 셋째… N번째”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면 서수 앞에 모두 the를 붙이는 것이 맞습니다. “There are three problems with this method.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언어는 꽤나 말랑말랑합니다. ‘법칙과 예외로 구분되는 세계’라기 보다는 ‘개념화와 맥락으로 창조되는 세계’에 가깝습니다.

#관사공부중

the only child vs. an only child

 

오래 전 ‘the only child’를 ‘외동’으로 배웠습니다. 형제가 없는 경우 반드시 ‘the only child’로 써야 한다는 것이죠. 이 설명에 따르면 ‘an only child’는 틀린 표현이었고요.

그런데 “He is an only child.”라는 문장을 꽤 자주 만나게 됩니다. 구글은 578만 건의 “an only child” 검색 결과를 보여주는데요. 결코 적지 않은 수죠. (“the only child”는 약 800만 건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른 것은 저에게 ‘the only child’만이 옳다고 말씀해 주신 분의 설명이었죠!)

위에서 나온 “He is an only child”는 “그는 외동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an only child”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동들 중 하나’라는 개념을 갖고 있죠. 부정관사 “a(n)”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다수 중 하나’라는 뜻이 됩니다. 한국사회에서 외동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니 저런 문장을 쓸 일도 많아질 듯합니다.

이에 비해 “the only child”는 “단 한 명의 자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너 형제나 자매가 있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하면 “나는 외동이야.”라는 뜻이 됩니다. 형제나 자매가 없다는 뜻이죠.

이 외에 상황에 따라 “Jane was the only child in this class.” (Jane은 이 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일한 아동이야.) 라는 식의 활용도 가능합니다.

위의 두 예문에서 “the only”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the only child in my family”에서는 가족 내에서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고, “the only child in this classroom”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를 ‘다수 중의 하나’라는 개념을 지닌 “an only child”와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the only child in my family”가 일반적으로 ‘외동’임을 의미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두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화제작인 A를 보지 못하고 B를 관람했다고 합시다. 왜 그랬을까요? 형 누나는 성인이어서 어떤 영화나 볼 수 있지만 자기는 미성년이어서 A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등 다른 가족은 모두 성인(adult)인데, 자기만 유일하게 성인이 아닌 아동(child)인 상황이죠.

덧.
어제 SteemIt 가입 승인을 받았는데, 뭘 써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새롭게 뭔가 써낸다는 건 현재 역량으로 불가능할 것 같고요. 기존에 썼던 관사 공부 포스트를 잘 엮어서 연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연재할만큼 원고가 정리되면 차곡차곡 올려보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SteemIt이 살아남아 있다면 말이죠. ^^

 

#관사공부중

영어로 논문쓰기, 한 해를 되돌아보다

한해 동안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영어로 논문쓰기> 대중강의가 시작된지 만 1년이 지났습니다. 10주간의 커리큘럼을 4주(12시간) 분량의 강의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완료되었고, 네 번째 기수의 수업이 진행중입니다. 요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게 됩니다. 크게 세 가지 일을 구상/진행중입니다.

(1) 강의록을 보강하여 책으로 발간

(2) 압축버전을 동영상 강의로 제작

(3) 인문사회분야라는 다소 넓은 영역에서 개별 학문 영역으로 세분화 (e.g. 응용언어학, 영어교육, 보건학, 경영학 등)

학술리터러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들과 만나면서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여러 대학원생들과의 이야기 가운데 연구자들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이 충분히 가치있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하나하나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지만, 생각을 놓지 않는다면 함께할 인연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리 대단할 것도 없지만 업신여겨서도 안되는, 따로 또 같이, 부드럽고 또 날카롭게, 세상을, 관점을, 마음을, 진실을, 비참과 희망을 담아내는 글. 딱 삶만큼 무겁고 그만큼 시시한 글을 꿈꾸어 봅니다.

 

영어, 쉽게 쓰면 장땡인가?

쓸데없이 어려운 수능지문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영어는 간단히 말하면 장땡’이라는 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뭐 간단하게 말하며 장땡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다음 표현 중에서 맨 위의 것들만 골라서 쓰시면 되겠지요.
 
Shut (the xxxx) up!
 
Be qutet.
 
Can you be qutet?
 
Please be quiet.
 
Could you please be quiet?
 
Your quietness/silence is requested.
 
We would like to request your silence.
 
Your silence is cordially requested.
 
We would appreciate it if you could temporarily keep your urge to talk.
 
I am not sure whether you would agree with me. But as far as I know it is usually the case that people keep quiet while the speaker gives their speech.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같지는 않죠. 아니 꽤나 다릅니다.
 
저 또한 되도록 적은 단어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확함(accuracy)’이라는 게 의미의 뼈대만 전달하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면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어 신호의 전달자(message deliverer)이기도 하지만 관계와 맥락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니까요.
덧.
 
특정한 표현이 반드시 특정수준의 공손함에 대응하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Quiet please”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으므로 대인관계에서 피하는 것이 안전하지만 테니스 구장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적 인식의 변화(테니스장에서 좀 떠들면 어때?)가 수반되면서 그 쓰임의 적절성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아래 기사는 이 점을 보여준다.
 
http://www.espn.com/tennis/story/_/id/17479201/us-open-quiet-please-silence-becoming-thing-in-tennis

글쓰기 고수

만약 “글쓰기 고수”라는 게 있다면 최고의 비법은 아마도 서두르지 않는 힘일 것이다. 글은 표현(ex-pression)이지만 표현의 힘은 오랜 시간 자신의 내부를 압박(in-pression)하는 데서 나온다. 차오를 때까지 응시하는 일. 내보내기 위해 쓰지만, 내보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한 글쓰기 하수다. 온전한 글로도 모자랄 이야기를 몇 줄에 담아 내보내려 하고 있으니.

2018년 영어논문쓰기 1강을 마치고

1. 언젠가 영어논문쓰기 강좌 수강생들께 질문을 했다. 논문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분이 있는지. 대부분 대학원생이었고, 전공은 다양했다. 예상대로(!) 단 한 사람도 논문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분명 이 샘플링에는 큰 문제가 있다. 영어논문쓰기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니 안배운 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이 대답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1) 한국어 논문쓰기도 배워본 적이 없고,
(2) 논문쓰기 강의를 안들었다기 보다는 그런 수업이 없어 못들었다는 취지였기 때문이었다.

2.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리터러시 연구자/교육자들이 종종 던지는데 사실 내겐 참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다. 가르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 데까지 가르치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각자의 길을 가도록 하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모든 면에서 존경스러운 지도교수와 함께 공부했음에도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었다. 텍스트에 대한 피드백은 종종 받았지만 연구, 논문, 학계, 논쟁, 소통 등에 대한 큰 그림을 배우진 못했다.

4. ‘아니 그런 걸 누가 가르쳐 주느냐,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답답해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썼고, 직접 강의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별것 아닌 강의이지만 ‘대학원생 모두가 들어야 하는 강의’라는 찬사도 적잖이 들었다. 이런 응원의 목소리 덕에 지금도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5. 3년 째 영어논문쓰기를 가르치면서 대략 200여 명의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을 만났다. 그중 한 사람도 대학원생으로서 논문읽기와 쓰기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 담장 밖 논문 관련 사교육의 발흥은 참으로 개탄할만한 일이지만 리터러시교육이라는 대학교육의 핵심목표를 대학 스스로 외면한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6. 법률가는 법률가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행정가는 행정가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연구자는 연구자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결국 다양한 영역에서의 전문성은 그 분야의 지식을 소화하여 말하고 쓸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한다.

7. 지금의 대학이 학생들이 지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꼭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8. 이런 단상을 남긴 게 여러 번이다. 적어도 지난 5년 여 대학의 학술리터러시 관련 강의와 정책에서 이렇다할 변화를 목격하지 못했다. 매학기 강의에 깊이를 더하는 일부 교수자들의 개인적 시도 외에는 말이다. 그저 내가 과문한 탓에, 활동영역이 좁디 좁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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