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rt의 의미

Signature > sign / ball point pen > ball pen 등 소위 ‘콩글리시’에서 단어가 축약되는 경향에 대해 읽다가 옛 일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나: “They lived apart.” 이게 무슨 뜻이죠?
학생: 음… “그들은 아파트에 살았다?”
나: 아… 여기에서 “apart”는 부사예요. 부사.
학생: (자신있게) 그쵸. 그러니까 아파트’에’ 아닌가요?
나: &%#$#^&!@

이 학생에 의하면 명사 ‘apartment’는 부사 ‘apart’가 되어 ‘아파트에’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영어교육 투 트랙 전공과정

돌아보면 영어교육 전공과목을 들으며 강독을 해본 적이 없다. 다양한 이론이 응축되어 탄생한 교재를 다시 요약하여 공부하다 보니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느낌만 남았달까. 이에 비해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음미해야만 했던 몇몇 문학과목에서는 갑갑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사범대학의 교과교육과목은 “현장”에 대한 관심을 전면에 놓는 추세다. 발표와 토론 등의 방식 또한 종종 활용된다. 이는 양날의 검이다. 교육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만 이론적 엄밀성과 학문적 깊이를 희생시키는 결과 또한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범대 영어교육과의 교과교육과정을 두 트랙으로 재편하였으면 한다. (사범대학 내 타전공 또한 비슷한 처지일 터이나 필자가 알고 있는 언어교육영역에 한정하여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는 개념적 토대를 닦는 트랙으로, 언어학, 심리학, 인지과학, 사회학, 인류학 등의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 통해 ‘언어교육학’이라는 응용분야의 뿌리를 이해한다.

둘째는 한국사회와 영어교육 트랙이다.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의 현 교육환경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교과교육방법을 연구한다. 해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수정하고 재맥락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연구’라는 표현을 썼다.

나아가 대학원 수준에서는 이론강독 수업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특히 방법론 관련 강좌의 강화가 시급해 보인다. 필자 또한 주요 논문들을 꼼꼼히 읽어내려가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이론강독이 가능한 학교에서 얼마나 더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인종차별 체험기

카투사로 한 군생활 말년이었으니 아마도 97년이었던 것 같다. 외근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 부대에서 제공하는 버스에 올랐다. 먼저 도착한 부대원들은 저만치 뒤에 겉멋든 고딩들마냥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군바리의 특성상 합류는 이미 정해진 일.

통로를 지나려는데 아기를 앞으로 안은 백인 여성 하나가 보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조심조심 지나간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등과 나의 등이 스친다. 한국의 대중교통 상황에 대입해 보면 정말 대수롭지 않은 마찰이다. 그런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Fxxx”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려 그 여자를 쳐다본다.

“What did you say?”
“You should have said ‘Excuse me’ when you passed by. You almost killed my baby.”
(“killed”라는 말이 몹시 거슬렸으나 꾹참고) “Okay, I’m sorry for not saying ‘Excuse me.’ But you should not use that kind of language to me. Watch your tongue.”

설교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피차 득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을 가라앚히고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이 뒤통수를 가격했다.

“Don’t yellow people know how to say, “excuse me”?”

“Yellow people”소리를 듣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다시 일어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격양된 목소리로 방금 한 말을 다시 해보라 다그쳤다. 내 격양된 어조때문이었을까. 그녀는 “‘Excuse me’라는 말을 썼으면 더 좋았을걸…”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태도가 역겨웠다. 사과를 받아내야 했다. 이 자리에서 정중하게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고성이 오가기를 수 차례.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사과해라. 늦지 않았다.”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녀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다. 사과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본 친구 중 하나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입술을 깨물며 괜찮다 했다. 같이 일하던 상병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사과를 해달라 정중히 말했다. 그녀는 사과할 것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부대로 돌아와서도 아까 상황에 대한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고민 고민 끝에 다음날 업무를 마치고 부대장(여자 대위)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주변에서 보고 들은 목격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 했다. 부대장은 “그점에 대해 유감이고, 네가 원하면 정식 절차를 밟아 군대 내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몇 번의 조사과정이 있을 것이고 조서를 작성해야 하며, 꽤나 성가신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넌지시 ‘그냥 참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 번거롭기도 하고, 그 여자와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정식 제재 요청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이를 악물고 제소를 했어야 했나 할 때가 있다. 나 편하자고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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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심각한 글을 써버렸구나.
(우습게도!) 이 사건을 끄집어낸 건 아래 동영상이었다.

‘영어학습법’에서 ‘내 삶의 언어와 관계맺기’로

“영어를 배운다”는 추상성이 높은 명제다. 일단 ‘영어’라는 단어가 담는 내용과 행위가 광범위하다. ‘배운다’는 동사 또한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방학이 되면 으레 “영어 공부 좀 해야 되는데”라는 말을 듣는다. “뭐 하실 건데요”라고 물으면 “뭐 이것 저것”이라고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이것 저것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 저것 하다 보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학습 대상의 추상성이 높다는 것은 그 대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는 거대한 만큼 멀리 있고, ‘배운다’는 애매한 만큼 스르륵 빠져나간다.

학습은 추상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구체화하는 과정 즉, 구체적인 활동과 구체적인 내용과 구체적인 학습법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시간과 장소, 필기 스타일, 제스처와 발음, 혀의 움직임까지.

여전히 많은 학습법들은 ‘거대 전략(grand strategy)’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면 된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 등등.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일종의 수집(collection)을 시도할
만하다. 오바마가 좋다면 오바마의 연설들을 모으고, 멋진 표현을 모으고, 발음을 따라해 보는것이다. 스타워즈의 팬이라면 요다와 다스베이더가 한 말을 모조리 모아서 외워 보는 식이다. 주변에 널린 영어 간판들을 사진으로 찍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거나, 영어로 된 백화점에 들어가서 상품들의 이름을 익히고, 어떻게 분류되고 있는지를 한국 백화점 웹사이트와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크리스 앤더슨이 제안하듯 TED 강연을 보며 청자와의 유대를 높이는 표현, 설득을 위해 초석을 까는(priming) 과정, 발성이 달라지는 순간들 등에 집중할 수도 있다. 요리가 좋다면 자막이 제공되는 푸드 채널을 꾸준히 보면서 관련 표현을 익힐 수 있다. 요리쇼는 음식의 이름이나 계량과 관련된 어휘들 뿐 아니라 다양한 동작을 나타내는 구어 동사 표현의 보고다. (이와 관련하여 제이미 올리버의 Food Tube 채널을 추천한다.) 핀터레스트에서 명언을 모으거나, 유명 인사들의 유언을 모을 수도 있다. 잘 정리된 유머나 말장난 사이트를 독파할 수도 있겠다. 수준이 높은 학습자라면 기존의 수퍼볼 광고에 담긴 미국 대중문화의 단면을 분석해 볼 만하다.

결론적으로 저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영어가 아니라 내 손 안에, 혀 끝에, 수집 목록에, 유튜브 채널에, 노트 필기에, 다양한 간판들 속에 있는 구체적인 영어를 찾아야 한다. 영어공부의 핵심은 한국인 모두를 위한 영어학습법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영어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나만의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전치사로 끝나는 문장 금지 혹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문장을 전치사로 끝내지 말라”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영문법 규칙이죠. 사실 전치사로 끝나는 문장은 흔하게 발견됩니다. “I need a pen to write with.”와 같은 예문은 부정사 파트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처방문법 (prescriptive grammar) 하에서 이 규칙은 상당 기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영문법을 처음 배웠던 시절에도 간간히 접할 수 있었구요. 검색해 보니 무려 2011년에 옥스포드 사전 공식 블로그에도 관련 질문이 올라왔더군요.

Can you end a sentence with a preposition?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라틴어는 유럽 식자층의 필수 외국어였죠. 이 영향으로 17세기 이후 많은 학자들은 영문법을 라틴어 문법의 기초 위에서 기술하려 노력합니다. 현재 많은 문법서가 채택하고 있는 8품사 체계도 라틴어 문법의 영향 하에 만들어졌죠.

그런데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던 라틴어의 경우 전치사 뒤에 따라나오는 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언가의 앞에(pre-) 위치하는(position) 말이었던 겁니다.

이에 따르면 “Where are you at?”나 “I need a pencil to write with.”와 같은 말은 바람직한 규칙을 깨뜨립니다. ‘at’과 ‘with’의 품사는 전치사(preposition)인데, 이 뒤에 나오는 말이 없으니 전치사의 정의가 파괴된다는 거죠. ‘뒤에 따라나오는 말이 없는 전치사’는 모순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이 이상화된 규범을 먼저 상정하고 여기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문법 규칙은 도처에 있습니다.

갑자기 “사랑은 그 어떤 이념 떄문에 현실을 경멸하지 않는다.” 라는 본회퍼의 말이 떠오릅니다. 언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네요. :)

행복한 사전

요즘 Merriam-Webster 사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Kory Stamper의 책 <Word by Word: The Secret Life of Dictionaries>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가 마이너스가 되는 직종이래나 뭐라나. Oxford 영어사전 이야기를 다룬 <교수와 광인>, <The meaning of everything>이나 Roget 유의어 사전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The Man Who Made Lists> 같은 책을 가지고 사전학 수업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덤으로 영화 <행복한 사전>도 함께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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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짝과 함께 <행복한 사전>을 보았다. 여러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받았는데, 가장 먼저 보자고 한 건 짝이었다. 그냥 저 동네에서 일어나는 꽤나 감동적인 픽션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 건 직업 때문이었을까? (짝은 책을 만들고 나는 언어학을 공부한다.)

‘사전’하면 단어와 뜻풀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종이사전을 열면 단어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고, 단어마다 n개의 의미가 정리되어 나온다. 하지만 이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요 유구한 세월 끝에 달린 찰나다. 영화가 잘 보여주듯 사전을 만드는 것은 복잡다단한 일이다.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단어와 의미를 일일히 기록해야 한다면 그 수고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책으로서의 사전은 시쳇말로 ‘역대급 노가다’가 만들어 낸 거대 구조물의 표면일 뿐이다.

하지만 사전작업은 철학이 반드시 필요한 노가다다. 사전의 방향을 정하고 표제어를 고르는 일이 시대의 윤곽을 그려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한가? (직업적으로 선입견에 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새로운 사전 편찬의 첫걸음은 원칙에 따라 더할 단어들과 뺄 단어, 그리고 남겨둘 단어들을 고르는 일이다. 먼저 떠나야 할 단어와 남겨둘 단어, 그리고 새로 맞이해야 할 단어들로 새로운 사전이 채워지면서 지난 사전들의 시대와 새로운 사전이 열어젖힐 시대 사이의 세계가 윤곽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표제어의 선정 자체만으로도 역사와 시대를 구획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표제어 선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후 더 큰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분류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를 하나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 두 개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부터 엄청난 골칫거리다. 유의어와 반의어를 정의하고, 용례를 설명하는 데까지 이르면 해야 할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이뿐이 아니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장기간의 작업에서 특정 단어의 의미 분류에 적용한 원칙을 모든 단어에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각각의 단어에 알맞는 예문을 확보하고 분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사전 작업은 그야말로 산너머 산이다.

사전을 만드는 사전 편찬자는 바보가 될 운명이다. 사전이 출판되는 순간 많은 단어들의 의미와 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A라고 정의했던 단어는 B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고, C라는 단어는 유행에서 사라지고 없다. D라는 단어은 그 뉘앙스가 180도 바뀌어 있고, E라는 단어에는 정치색이 너무 많이 들어가 버렸다. F를 사용하면 꼰대스럽고, G를 사용하면 왠지 잘난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단어를 모으고 정의와 예시를 써내려갈 때는 안그랬는데 말이다. ㅠㅠ

그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사전을 만든다고 해도 표제어 중 상당수가 화석화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세월을 막을 수 없기에 단어들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간다. 사전은 이렇게 삶과 죽음, 성장과 퇴화, 변심과 배반의 모습이 모두 들어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사전을 만드는 것은 인생과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사전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데 <나>라는 사전을 채울 단어와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내가 아닌 세계와 타인에게서 온다. 세상과 사람들에서 배운 것들로 <나>라는 사전을 채워가고, 의미를 써내려간다. 사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소통이다.

하지만 늘 베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 멋대로 단어를 만들 수는 없지만 <나>라는 사전에 등재할 표제어를 고를 권한은 나에게 있다. 그 표제어에 가장 알맞는 예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직접 예문을 써내려 갈수도 있다!

사전이 언제나 미완성이듯 나도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지금 내 안에는 새로운 생각과 죽어가는 생각, 오랜 시간 나의 일부로 살아온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 지지리 못났지만 내가 살아온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는 사전이 바로 <나>다.

우리 각자가 사전이라면, 당신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조금 다를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들어있는 단어 중에서 내 마음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으리라. 당신이라는 사전에서는 ‘돈’이 스무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 밝은 단어이지만, 나라는 사전에서는 두어 가지 뜻을 지닌 어두운 단어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는 사전에 등재된 수많은 단어들이 내 사전에서는 단 하나의 추상어로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우린 참 많이 다른 사전이지만 몇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나라는 사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이라는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서로를 정의하고 서로에 의해 정의당하는 일이며, 그 와중에 이해와 오해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기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때로는 잘 정의된 단어로 나 자신을 빼곡히 채우는 것보다 빈 페이지들을 넉넉히 남겨두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2014.4.10.

간단한 독서지도 팁

읽기 활동에서 널리 사용되는 <연결하기(making connections)> 전략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텍스트와 자기 연결하기: 텍스트에 나와 있는 요소들과 자신(친구, 가족, 학교)을 연결한다. (Text & Me)

텍스트의 인물, 소재, 단어, 내용, 삽화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의 수준에 따라 “뭐가 떠오르니?”라고 추상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고, 그래픽 오거나이저를 통해 특정 텍스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대조 하도록 할 수도 있다. 텍스트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다양한 시도는 텍스트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텍스트와 텍스트 연결하기: 텍스트 내/외의 요소간에 연결점 찾기 (Text & Text)

(1) 텍스트 내의 요소들을 연결하기: 텍스트 내의 어떤 요소들이건 연결해 본다. 단어와 단어, 단어와 그림, 글과 제목 등등을 연결할 수 있다. 문법적 요소를 가지고 대명사나 관사 등을 앞의 명사와 연결시키는 활동을 할 수도 있다. 특정 등장인물의 대사만을 모아서 볼 수도 있다. 인물간의 관계도를 그리거나, 인물들간의 관계를 페이스북 ‘좋아요/싫어요/화나요’로 표현할 수도 있다.

(2)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연결하기: 특정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들을 비교, 대조, 연결하는 작업이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여러 개 읽었다면 두세 작품을 놓고 ‘비교/대조형 독후감’을 쓰게 한다. 비슷한 소재의 글을 읽은 바가 있다면 두 글을 종합할 수도 있다. 자신이 썼던 일기 여러 개를 재료로 하여 자주 사용하는 단어, 기분을 나타내는 표현, 의성어와 의태어 등을 찾아보라고 할 수도 있다.

3. 텍스트와 세계 연결하기 (Text and the World)

(1) 세계에 비추어 텍스트 이해하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와 텍스트 내에서 그려진 세계를 비교해 본다. 특정 캐릭터나 사건의 개연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텍스트 내의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반응이나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다.

(2) 세계에 비추어 텍스트 비판하기: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텍스트를 비판해 본다. 텍스트가 왜곡하거나 숨기는 것은 없는가? 우리나라라면 어떨까? 우리 동네라면?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라면 비슷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이와 같이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 사회, 그리고 다른 텍스트들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나아가 이를 쓰기로 연결하는 활동을 고안해 보자.

#3년전오늘 #재방송

한국식 억양의 좋은 점(?)

내 영어에는 한국어 악센트가 짙게 배어 있다. 중학교 입학 직전 영어를 처음 접했고 중고등학교 내내 영어를 글로 배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테이프 속 낯선 외국인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 대해 가졌던 반감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돌아보면 ‘열심히 따라했어도 한국 억양을 없애진 못했을텐데’라는 생각과 ‘내 일 할 만큼 하면 됐지’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소위 ‘국내파’였지만 영어에 상당한 소질을 보였던 학생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어에 재미를 붙여 꾸준히 공부했고, 영어로 된 책을 스스로 찾아가며 읽었다. 주변 사람들 눈에도 빼어난 언어습득 능력이었다. 그의 영어사랑은 부모님마저 감동시켰고, 중학교 어느 여름 방학에 한 미국 ‘명문대’의 영어캠프에 갈 기회까지 얻었다.

수업이 시작된 지 며칠, 한 교수가 영어공부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을 풀어주려 개별 면담을 진행하였다. 교수는 영어공부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을 물었고 학생은 주저없이 ‘한국식 억양이요!’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깜짝 놀라며 “너의 발음을 명료하고 알아듣기 쉬워. 한국어 억양이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미미할 뿐더러 소통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아. 오히려 너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강점으로 생각될 정도인데?”라고 답했다.

아 어떤 게 맞는 길일까. 고민을 풀기 위해 상담을 신청했으나 학생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후 발음에 대한 고민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영어공부의 큰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의사소통의 민족지학 전문가인 사빌-트로이케에 따르면 비원어민 화자는 ‘너무 원어민같은’ 발음을 따라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기도 한다.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할 경우 원어민과 같은 언어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며, 맥락에 따라 적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화용(pragmatics)능력을 비롯하여 해당 언어/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높은 기준의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발음만 좋은’ 혹은 ‘발음은 좋은데’라며 타인의 외국어능력을 평가하는 장면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r/의 원활한(?) 발음을 위해 혀 밑둥을 절개하는 야만적 수술 행태는 사라진 듯하지만 여전히 ‘원어민 발음(native pronunciation)’의 신화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언어학습에서 좋은 발음을 위한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스스로 불가능한 기준을 만들고 괴로워하거나,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깔보거나, ‘좋은 발음’ 이면의 부담을 간과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내 영어에 배어든 한국어 억양은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그저 나라는 존재의 일부일 뿐이다.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 나를 키워낸 이들과 소통하며 미세하게 조정된 안면 근육과 구강 구조, 한국어에 최적화된 뇌구조와 기능 등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수업스케치

<종이찢기>

“학원은 어때요?”
“그냥 똑같애요. 아 얼마 안 있다가 또 시험대비 한대요.”
“아 빠르네요. 시험 때 학원 가서 공부하는 거랑 집에서 하는 거랑 어떤 게 더 나은 거 같아요?”
“음… 집은 공부하는 데가 아니예요. 학원 안가면 카페같은 데 가서 있고 그래요.”
“ㅎㅎㅎ 그렇죠.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집에서 잘 노나 봐요.”
“특별히 할 거는 없는데 그냥 이것 저것 하고 놀아요.”
“시험 때는 더 놀고 싶죠? 저도 대학교 때 시험공부 하려고 하면 평소 관심도 없었던 책, 영화, 뭐든 다 눈이 가더라고요.”
“저는 시험 때는 종이만 찢어도 재미있어요.”
“ㅎㅎㅎㅎ (종이 찢는 제스처를 취하며) 종이만 찢어도 재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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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 선생님>

“새로운 선생님들은 어때요?”
“OO 과목 선생님이 웃거요.”
“왜 뭐가 웃겨요?”
“자꾸 수업하다가 다른 선생님 뒷ㄷㅁ 까요.”
“정말요?”
“네네. XX과목 선생님하고 친하대요. 근대 맨날 그 선생님 가지고 뭐라 해요.”
“아 친하다고 막하시는 건가요? ㅎ”
“지난 번에는 XX 선생님이 머리스타일을 바꿨는데, 그거 가지고 엄청 뭐라 했어요. 그게 어울리냐고. 진짜 이상하지 않냐고.”
“ㅎㅎㅎ 재미난 선생님이네요.”

===

<멀뚱멀뚱, 하지만 성공!>

“자 Could를 쓰면 Can보다 좀 공손하게 들려요. 왜 그런지 설명해 볼게요. 이게 좀 어려운 이야긴데 들어봐요.”
“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잖아요.”
“(멀뚱멀뚱)”
“그래서 오로지 현재에 있는데, 현재는 직접 볼 수 있죠?”
“네.”
“과거는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야 되잖아요. 옛날 생각 하려면. 눈 앞에 펼쳐지는 건 현재. 머리 속에 담긴 건 과거.”
“(당연하다는 듯 멀뚱멀뚱)”
“조동사도 그런 게 있거든요!”
“(계속 멀뚱멀뚱)”
“그래서 조동사도 Can이나 May같이 원래 형태로 쓰면 좀더 직접적이고 ‘들이대는’ 느낌이고요.”
“(포기한 듯 멀뚱멀뚱)”
“Could나 might를 쓰면 과거처럼 좀 거리가 느껴지는 거죠. 멀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그니까 정리하면, 지금 눈 앞에서 확 들이대면서 이야기하는 거랑 옛날 이야기하는 거랑, 어떤 게 더 강하게 느껴질까요?”
“들이대며 이야기하는 거요.”
“그쵸? 그건 알겠죠?”
“네.”
“그것처럼 조동사도 과거형을 사용하면 힘도 빠지고 들이대는 것도 덜한 거예요. 오케이?”
“네.”
“그래서 확 들이대는 Can you? 보다는 과거형을 사용한 Could you? 가 더 공손하게 느껴지는 거죠.”
“…”
“그럼 친한 친구한테는 Can you를 자주 쓰겠어요? Could you를 자주 쓰겠어요?”
“Can you요.”
“오케이 좋아요.”

(한주 후)

“자 지난 주에 Might랑 may랑 어떤 게 더 직접적이라고 했죠?”
“May요.”
“Can 이랑 could 중에서는?”
“Can이요.”
“(쾌재를 부르며) 정확히 기억하고 있네요!”

한 주에 한 시간이 뭐 대수냐 싶지만 또 이렇게 기억해 주는 친구들 덕에 기쁨으로 가르칩니다.

3월도 절반이 넘게 갔습니다.

영어교육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쪽글 두 개

무식하면 용감하다. 12년 전 직장생활 중 석사과정을 돌아보며 쓴 아래 두 쪽글에도 그런 무모함이 배어나온다. 삐뚤빼뚤 어줍잖은 논리를 겨우 겨우 엮은 글. 하지만 여전히 쓰린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영어교육은 인간의 노력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힘으로 해체당할 운명을 맞을 지도 모른다. 이제 ‘세대’와 같은 커다란 말 보다는 옹기종기 모여 함께 일할 수 있는 작은 손들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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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학 4세대를 말한다.

더미 Inchull Jang 의 논의에 대한 답글

영어교육과에서 새로운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의제들이 가이아를 비롯한 이런 저런 사람들에 의해서 논의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1. 현장중심 리서치 – action research라고 불리는 연구방법론을 넘어서 교사집단과 연구자집단의 관계설정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 교육 전반에 있어서 현장과 학계가 유리되어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모색. 현장과 이론의 분리를 해소하기.

2. 사회과학적/인문학적 연구방법론 – 교육학, 심리학, 언어학의 세례를 받은 영어교육을 좀더 거시적인 방법에서 보려는 시도.

3. 영어교육학의 사회적 책무 – 연구와 집필 활동이 한국 영어교육에 실질적으로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가의 문제. 결국 사회적 효용성의 문제들. 이와 관련해서는 영어교육 전문가들이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고 포지셔닝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됨.

4. 서구 중심의 이론 경향 극복 – 한국에서, 한국인을 데이터로 한, 한국적 상황에 맞는 연구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서구중심의 언어교육 이론을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 질적 연구방법론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있는 부분.

5. 대중적 담론 공간 형성: 학계와 현장, 학부모들, 사교육계로 나누어져 있는 영어교육 담론 체계를 어떻게 통합해 나갈 것인가. 충돌과 화해의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런 것들이 주요한 고민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 분야에서 이런 논의들은 이루어져 왔지만 영어교육 분야에서 고유한 역학관계와 학문적 특성을 고려한 시도는 부족한 듯하다.

앞으로 더미와 함께 좀더 논의해 봐야 할 주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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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학 4세대를 말한다 (2)

더미의 글에 따르면 짧디 짧은 한국 영어교육은 다음 세 세대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흐름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1. 언어학적 기반에서 한국 영어교육의 기초를 정초한 1세대,
2. CLT의 세례를 받아 언어학과 심리학적인 기반 위에서 영어교육 만의 독자적인 흐름을 만들고자했던 2세대.
3. 다양한 영어교육의 성과를 이어받아 보다 세분화되고 비판적인 연구를 하는 3세대.

영어교육 4세대에 대한 논의는 암묵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필자와 같이 아직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거창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무식한 사람이 가끔 사회에 도움이 되는 법도 있지 않은가? ㅋㅋ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꾸준히 4세대 영어교육의 방향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볼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전글의 논의와 함께 4세대 영어교육의 특징을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해 보려고 한다.

하나. 데이터 중심 영어교육

영어교육에서의 논의와 연구들은 ‘서양적 틀’을 가지고 ‘한국적 상황’에 대입해 보는 쪽에 무게를 두어왔다. 예를 들어 CLT라는 트렌드가 생겼을 때 “CLT 모델에 대한 연구”라든지 “CLT에 대한 교사들의 태도”라든지 하는 식의 연구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 제시된 프레임웤을 한국적 상황에 맞춰보고자 하는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우리 한국의 학습자들이 과연 영어교육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영어를 왜 배워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지, 실제 영어교육 시장의 트렌드는 어떤지, 각 출판사와 학원, 교사들이 영어교육에 대해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언어의 4기능별로 어떤 학습법이 통용되고 있는지, 영어학습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들의 시장전략은 무엇인지, 영어교육은 어떤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고 있고 각각의 미디어는 어떤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지, 한국에서 영어교재를 개발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려운 점은 무엇인지, 영어교육 전문가 직업군 별로 어떤 관점에서 영어교육을 바라보고 있는지, 영어교육에 있어서 유의미한 데이터들은 어떻게 생성, 분배, 소비되고 있는지, 영어교육에 대한 비판적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또 어떻게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토익과 토플 중심의 평가가 한국 영어교육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영어마을과 어학연수는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한국의 ESL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영어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당사자들간에 정보의 갭은 없는지, 영어 교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학원과 학교, 공교육과 사교육의 양태는 어떠한지…

이 모든 것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한 관찰을 통해서 ‘이론 중심’이 아니라 ‘데이터 중심’의 영어교육으로 진화해야 할 것이다.

둘. 삶을 가로지르는 영어교육

(삶을 가로지르는 영어교육은 더미의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삶을 가로지르는 영어교육이 가지는 문제의식은 기존의 영어교육의 학문적 성격이 언어학, 교육학, 심리학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이제는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방법론과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언어철학, 비판이론, 미디어 연구, 영어교육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영화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교육공학 등의 성과들이 언어교육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선언적 의미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영어가 특권계층의 전유물로 인식되었을 때와 모두의 관심이 되었을 때, 영어가 텍스트 중심으로 ‘전달’되었을 때와 멀티미디어 중심으로 ‘학습’될 때, 오프라인에서의 언어교육이 대세였을 때와 웹을 통한 IT적 전달방식을 취하였을 때… 이 모든 변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연관 학문과의 소통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밖에 없다.

이들 논의는 ‘영어교육학자의 정체성’ 문제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기존의 영어교육학자들이 가진 정체성이 ‘심리학자’, ‘교육학자’, ‘(응용)언어학자’등으로 대변된다면 이제는 좀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오늘 아침 생각나는 영어교육학 4세대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늘어놓아 보았다.

(2005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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