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1: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51)

관사를 절대적인 규칙에 따라 가르치는 방식의 위험은 특정 어휘와 관사를 무조건적으로 붙여서 가르치는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an only child’와 ‘the only child’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무조건 the only child”?

오래 전 ‘the only child’를 ‘외동’으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형제가 없는 경우 반드시 ‘the only child’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 설명에 따르면 ‘an only child’는 틀린 표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the only child’를 통째로 외워두라”고 말씀하셨죠. 아마도 ‘only’라는 단어가 정관사 the를 자동으로 불러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I am an only child.”라는 문장을 적잖이 접하게 되거든요. 구글에서 “an only child”를 검색해도 꽤 많이 나오지요. 실제로 발화되는 예를 원하시면 유튜브에서 “an only child”를 검색해 보시면 됩니다. “What’s it Really Like Being an Only Child?”라는 영상의 첫 부분에서는 “I’m an only child.”라는 말을 연속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른 것은 ‘외동’을 표현할 때 ‘the only child’만이 옳다고 말씀해 주신 선생님이었죠.

An only child와 the only child의 차이

“He is an only child”는 “그는 외동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an only child”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동들 중 하나’라는 개념을 갖고 있죠. 많고 많은 ‘only child’들 중 하나라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 외동이야’라고 말하려 한다면 ‘I’m an only child“가 적절합니다. 부정관사 “a(n)”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다수 중 하나’라는 뜻을 상기하신다면 이 용법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외동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니 이 문장을 쓸 일도 많을 듯하네요.

이에 비해 “the only child”는 “단 한 명의 자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Do you have brothers or sisters(너 형제나 자매 있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하면 “가족 중에 아이는 내가 유일해.”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맥락에서라면 ‘an only child’와 같은 의미적 효과를 갖게 되겠지요.

하지만 “the only child”는 다른 맥락에서도 충분히 사용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Jane is the only child in this class.”라고 한다면 ‘Jane은 이 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일한 아동이야.’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반에 속해 있는데 그중 아동인 사람은 Jane 뿐이라는 것입니다.

위의 두 예문에서 “the only”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the only child in my family”에서는 가족 내에서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고, “the only child in this classroom”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한 아동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를 ‘다수 중의 하나’라는 개념을 지닌 “an only child”와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the only child in my family”가 일반적으로 ‘외동’임을 의미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두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화제작인 A를 보지 못하고 B를 관람했다고 합시다. 왜 그랬을까요? 형 누나는 성인이어서 어떤 영화나 볼 수 있지만 자기는 미성년이어서 A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등 다른 가족은 모두 성인(adult)인데, 자기만 유일하게 성인이 아닌 아동(child)인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관사의 결정, 맥락(context)과 개념화(conceptualization)가 중요하다

위와 같이 특정 관사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 맥락과 개념화에 달려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식사를 나타내는 표현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아시다시피 일상에서 식사를 나타내는 표현들은 무관사를 원칙으로 합니다. 특별할 것 없는 식사를 나타낼 때는 어떤 관사도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have breakfast / lunch / dinner (아침/점심/저녁을 먹다.)

이에 따라 특별히 부가된 의미 없이 “저녁 먹었니?”라고 말한다면 “Did you have dinner?”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됩니다. 하지만 개념과 맥락이 달라지면 식사 앞에 부정관사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식사의 특징을 나타내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They had a big breakfast.” (그들은 아침을 거하게 먹었다.)

개념상 여기에서 “a big breakfast’는 특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big breakfast’가 엄청 많은데, 그 중에 하나를 먹은 거죠. 물론 그들이 모월 모일 아침 먹은 아침식사는 유일하겠지만(아침식사를 두 번 했을리는 없으니까요), 이를 언어화함에 있어서 ‘세상에 수많은 거한 아침식사 중 하나’로 개념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상황에 따라 “the breakfast”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아침식사 중 하나를 특정한 사건으로 바라보는 맥락이라면 “The breakfast”라는 표현으로 특정(specify)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보면 ‘식사명은 무관사’라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참고영상:
What’s it Really Like Being an Only Child?

교육을 위한 언어학 이론

촘스키를 주축으로 한 형식언어학은 시대를 풍미한 언어학의 본류로서 공부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문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기능언어학이나 인지언어학의 쓸모가 훨씬 더 많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개개인마다 ‘더 나은 문법체계’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모두를 조금씩 공부해 본 입장에서 교육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에서 촘스키 언어학 대신에 다른 언어학을 공부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그림책 잘(못) 읽는 법 (feat. 짝)

짝: (문해력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그런데 그림책을 잘못 읽는 경우가 많은 거 같더라.
나: 그림책을 잘못 읽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짝: 영어 그림책의 경우가 더 심한 거 같은데… 그냥 텍스트만 읽고 그림은 슥 보고 넘어가는 거지.
나: 아…
짝: 그림책은 텍스트랑 그림이 함께 있는 건데.
나: 그렇지. 둘다 중요하지.
짝: 근데 내용 이해된다고 텍스트 위주로 넘겨버리는 거지.
나: 나도 그렇게 읽은 적 많은 거 같은데…
짝: 일러스트레이터도 독립된 예술가잖아. 단지 주문한 걸 그린 게 아니라 텍스트에 기반해서 어떤 장면 혹은 맥락을 해석해 낸 거거든.
나: 그렇겠네.
짝: 특히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그냥 텍스트만 읽어주고 넘어가기 보다는 왜 그런 그림이 거기 들어가 있는지 질문을 하는 게 좋아.
나: 왜 그림그린 사람이 그렇게 해석했는지 말이지?
짝: 그렇지.
나: 자기는 책 만들 때 텍스트가 먼저 나오나? (<– 짝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예요.)
짝: 응. 나같은 경우는 학습에 초점을 맞추니까 텍스트가 먼저 나오고 그걸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나: 그렇겠네. 난이도나 내용을 조절해야 하니까.
짝: 응. 그렇다고 하더라도 텍스트와 삽화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관계가 있어. 텍스트를 그냥 묘사하는 게 아니라 해석해서 그리는 거지.
나: 삽화가의 의도와 관점이 개입되겠네.
짝: 그렇지. 그게 핵심이야.
나: 결국 읽기지도를 하거나 소리내어 읽어줄 때도 왜 그런 그림이 나왔을지,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어디인지, 자신이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지,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때 새로운 그림을 넣고 싶지는 않은지 등등을 다뤄주면 좋겠구나.
짝: 응. 텍스트와 그림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거.
나: 그림책 읽어줄 일은 없지만 기억하겠소. 그림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ㅎㅎㅎ
짝: 응. 그렇게 해. ㅎㅎㅎ

요약: 그림책에서 그림은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핵심 요소중 하나입니다. 텍스트와 그림간의 긴장과 교섭, 갈등과 협업에 주목하여 읽어보세요. 그림책이 달리 보일 거예요.

#삶을위한리터러시
#다아시는이야기를이렇게길게해서죄송합니다.

단단한 영어공부 3쇄

Posted by on Jun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일상 | No Comments

<단단한 영어공부>가 3쇄를 찍게 되었습니다. 출간 100여 일 만이네요.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공감해 주시고 알려주신 덕분입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로 향하는 길에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래 유유출판사의 공지글을 옮깁니다. 책 표지의 ‘비밀’이 담겨 있답니다. ^^)

#단단한영어공부 #중판출래

이 책은 영어공부 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어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학습법을 알려 준다거나 영어를 원어민처럼 술술 하게 되는 법을 안내하는 책이 아니에요. 이 책은 영어공부 책입니다.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영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언어 중 하나인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지요.

책 표지에 ‘영어공부’라고 쓰여 있는데, 영어공부 책이 아니라고 했다고 영어공부 책이라고 하니 좀 헷갈리시죠? 이 표지 시안을 처음 봤을 때,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this is not a pipe’가 떠올랐습니다.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텍스트를 본 이들은 자꾸만 질문을 던지게 되죠.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이건 파이프 그림이지 진짜 파이프는 아니지 않은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은 파이프라고 할 수 없는가? ……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도록 만든 작품이지요.

『단단한 영어공부』도 자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초중고교에서 장장 12년간 배운 영어는 나를 성장시켰나? 영어공부 생각만 하면 답답하고 두려운데 언어 공부란 이런 걸까? 영어를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응용언어학자인 저자는 말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우리가 이 익숙하지만 낯선 영어공부의 세계로, 외국어의 세계로, 언어의 세계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위해 내 삶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자고 말하지요. 찬찬히 꾸준하게 영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오늘 중쇄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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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영어공부 #중판출래 이 책은 영어공부 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어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학습법을 알려 준다거나 영어를 원어민처럼 술술 하게 되는 법을 안내하는 책이 아니에요. 이 책은 영어공부 책입니다.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영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언어 중 하나인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지요. . . . 책 표지에 '영어공부'라고 쓰여 있는데, 영어공부 책이 아니라고 했다고 영어공부 책이라고 하니 좀 헷갈리시죠? 이 표지 시안을 처음 봤을 때,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this is not a pipe'가 떠올랐습니다.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텍스트를 본 이들은 자꾸만 질문을 던지게 되죠.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이건 파이프 그림이지 진짜 파이프는 아니지 않은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은 파이프라고 할 수 없는가? ……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도록 만든 작품이지요. . . 『단단한 영어공부』도 자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초중고교에서 장장 12년간 배운 영어는 나를 성장시켰나? 영어공부 생각만 하면 답답하고 두려운데 언어 공부란 이런 걸까? 영어를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응용언어학자인 저자는 말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우리가 이 익숙하지만 낯선 영어공부의 세계로, 외국어의 세계로, 언어의 세계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위해 내 삶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자고 말하지요. 찬찬히 꾸준하게 영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오늘 중쇄 찍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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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신

“대한민국에 영어교육 전문가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답글을 우연히 보았다. “내 주변에 전문가가 없다”를 습관적으로 ‘대한민국에 전문가가 없다”로 바꿔쓰는 분들이 있다. 전문가 자리에 오만가지를 넣어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지닌 분들이다.

언젠가 소위 ‘글로벌 대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만트라처럼 여기는 생각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인재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 담장 바깥에 더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HR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무림고수’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지평 너머에는 반드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 세계는 당장 볼 수 없기에 일종의 ‘신비’로 존재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좁디좁은 나의 세계를 우주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일이자 자신을 신의 자리에 앉히는 행위다. 그렇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무지의 신’이 탄생한다.

나 자신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새겨야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생애 첫 기조강연 – 삶을 위한 영어공부

My first plenary speech at the Modern Linguistic Society of Korea (MLSK) 한국현대언어학회 기조강연 (5.25)

어제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한국현대언어학회 봄학술대회에서 <삶을 위한 영어교육: 연구자와 교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제로 생애 첫 기조강연을 했습니다. 시작 전에는 살짝 긴장이 되었지만 입을 떼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떠는 데 쓸만한 인지적 자원이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안떨고(실은 못떨고?) 그럭저럭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강연 요청을 받고는 최근 쓰고 있는 논문 이야기를 할까 했는데 영어교육, 응용언어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대학원생들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 동료 연구자와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담았습니다. 아마도 편지글 형식의 기조강연은 다들 처음이셨을 겁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지요.

“대학의 위기라고 합니다. 교육의 위기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학문과 실천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가 되기 보다는 사람들을 가르는 문화자본으로 기능할 때가 많습니다. 각자는 모두 열심히 뛰고 있는데 삶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언어학과 언어교육을 업으로 삼고 있는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이 모두 옳은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자들과 교사들을 만나며 하고 싶은 말이 생겼습니다.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담은 편지 한 통을 건네려 합니다. ‘언어와 문화, 삶을 위한 연구와 교육’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자 함입니다. 편지에는 크게 네 가지 내용이 담겼습니다.

먼저 삶을 위한 연구와 교육을 위한 성찰입니다. 제가 말을 처음 연구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그 때의 설렘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동일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도 던집니다. 처음 말과 사랑에 빠졌던 때의 열정을, 언어가 열어젖힌 세계의 아름다움에 경탄했던 마음을 갖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의 연구와 교육은 삶에 뿌리박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학생들에게 어떤 욕망을 심어주고 있는지 반성합니다.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네이티브 중심주의와 인풋만능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합니다. ‘원어민 되기’로 표상되는 욕망의 방향에 대해 성찰하고 삶을 위한 공부로 나아가는 방안을 함께 궁리합니다. 이 사회가 키워가는 언어에 대한 욕망이 진정 학생들의 삶을 위한 것인지 돌아봅니다.

세 번째로는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며 만나는 세계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의 학생들은 성적과 스펙의 도구를 넘어선 언어로서의 영어를 경험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혹 그렇지 않다면 연구자와 교사로서 어떤 실천을 꾀해야 할지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삶을 위한 언어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 사회에서 언어학, 응용언어학, 영어교육 연구자와 교사들이 새롭게 고민해야 할 화두를 나눕니다. 함께 성찰하며 소통할 수 있는 언어교육을 꿈꾸자는 제안입니다. 학생과 교사와 연구자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섭니다.”

강연의 마지막에는 연구자와 교사로서 우리는 자신에게, 동료들에게, 학생들에게, 나아가 한국사회에 어떤 편지를 써야 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학회장에서 타지에서 함께했던 황요한 선생을 7년만에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보지 못했지만 엊그제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아울러 오랜만에 유수현 Soohyun Yoo 선생님을 뵐 수 있어서 반가왔습니다. 공감하며 영어교육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분들이 있어서 참 좋네요.

이번 학기는 유난히 특강이 많았습니다. 아직 조금 더 남아 있긴 하지만 이번 강의로 큰 모임은 대략 마무리가 되었네요. “삶”과 “교육”을 화두로 고민하는 분들을 만나갈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요즘입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남해연구소 강의 후기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남해연구소 강의 <원어민과 비원어민의 차이, 그 간극 좁히기> (2019.5.20)

KIOST(한국해양과학기술원) 강의 덕에 처음으로 거제에 다녀왔습니다. 오전 강의인지라 전날 오후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하루 반을 온전히 썼네요. 빗속을 뚫고 가느라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풍광 덕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해양연구소답게 입구가 바다와 맞닿아 있더군요. 정문 옆이 바다인 정부기관은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강연에는 해양연구소 연구원들과 UST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대학원생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네이티브 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네이티브와 우리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아가 어휘와 쓰기학습의 측면에서 이 간극을 빠르게 좁힐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강연을 조직하신 직원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연구소 소장님의 말씀에 피곤이 확 풀리더군요.

겨우 하루 지났는데 며칠은 지난 기분입니다. 거제와 서울의 시공간은 참 많이 다르네요. 간만에 ‘시골’ 유학지의 느릿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좀더 여유있게 거제 곳곳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단단한 영어공부, 함께 걷는 이들을 만나다

Posted by on May 14,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 No Comments

평범한 후기이겠거니 했는데
읽다가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책이지만
누군가의 삶에 닿아
어떻게 쓰이게 될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군요.

만남은 기억을 소환하고
지금을 돌아보게 하고
또 다른 만남을 불러옵니다.

방학 이후 쉼없이 달려온 탓에
조금은 힘겨운 나날이지만
작은 기적들을 맛보며
또 한 걸음 내딛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열어가고자 하는 분들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https://blog.naver.com/pr1024/221537130417

짓다 철학학교 특강 후기 (2019.5.13)

Posted by on May 14, 2019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일상 | No Comments

1. 강연을 마치고 첫 질문을 던지신 분은 20년 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셨다. 주로 입시 그 중에서도 외고입시 일을 많이 하셨는데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끼시고 중간에 상담을 전공하셨다고 한다. 네이티브 중심주의와 인풋만능주의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이젠 학부모들과 만나면서 그들부터 올바른 영어교육을 경험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계시다고 했다. 듣는 내내 내 마음에도 눈물이 고였다. 영어공부엔 상처가 많다. 상처인지도 모르고 지나는 상처들.

2. 월요일 저녁인데도 적지 않은 분들이 오셨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홍천여고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멀리 서울까지 와 주었다는 것. 서울 안에서도 시간을 내기 힘든데 홍천에서 와준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참 고마왔다. 비록 그들의 삶에 당장 대단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겠지만, 게속해서 삶을 위한 단단한 영어공부를 이야기할 힘을 얻는다. 시쳇말로 ‘입시에도 내신에도 별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를 들으러 먼 길을 오신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3. 대중강연을 하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 있다. 유아 영어교육을 언제부터 어떻게 시켜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정답이 있을리가 없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고 아이들의 성향이 다르다. 계획을 짠다고 해서 그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만나는 선생님들도 천지차이다. 쉽게 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도’는 (1) 영어에 올인하지 말고 한국어 발달을 염두에 두며 (2) 아이의 흥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영어를 경험하게 하고 (3) 아이가 계속 거부하면 재촉하지 말고 인내심으로 기다리며 (4)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시키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어를 얼마나 시키느냐”가 아니라 “아이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주체가 되라”는 이야기를 한다. 영어를 중심에 놓지 말고 전인적 성장을 중심에 놓으라는 요청이다.

마지막으로 행사를 준비해 주시고 진행 및 정리까지 담당해 주신 짓다철학학교에 감사를 드린다.

On nativespeakerism

Native-speakerism is a powerful ideology machine that mass-produces unfairness, contempt, inferiority, and frustration. It ruthlessly divides native and nonnative speakers, veils the hard fact that we are all legitimate users of a certain language, and naturalizes sociocultural, economic biases against additional language learners.

Through this seldom-challenged mechanism, it effectively molds discrimination out of differences, mimics racism in placing the categorical value on an innate capacity, and colludes with the ‘sacred’ meritocracy by establishing native speaker-favored standards, qualifications, and market environments. Where native-speakerism prevails, foreign language learning functions as a viable tool for the old ruling strategy: divide and conquer.

So I remind myself that I do not need to say, “I perfectly understand what you mean by that. However, it is wrong: native speakers would not speak like that.” No, they’re not wrong. They are communicating in a fully legitimate way. Ultimately, the right to judging right and wrong lies in the interlocutors in situ, not in an idealized group of native speakers. However the myth of the all-mighty native speaker persists, mainly due to its role in perpetuating the sense of deficiency and illegitimacy on the part of language learners and ever invigorating the market value of native speakers.

#영어로쓰면거의안읽힘
#여기까지읽어주신분께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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