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을 때리다’

최근 들어서야 “관세를 매긴다”라는 뜻의 비격식 표현으로 “slap tariffs on ~”이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궁금한 것은 ‘관세를 때리다’가 이 표현의 번역일까 하는 점이다. 두 언어에 비슷한 개념화가 일어나고 있는게 흥미롭다. (참고로 slap은 ‘철썩 때리다, 때려 붙이다, 쾅 놓다’등을 뜻하고, ‘김치 싸대기’는 ‘Kimchi slap’으로 번역될 수 있다.)

https://forum.wordreference.com/threads/to-slap-tariffs.3345811/

TED 공식 Speaking Guide

TED의 책임 디렉터 Chris Anderson이 쓴 TED강연 공식 가이드입니다. 사실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Presentation Literacy”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대중강연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본사항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평이한 영어로 되어 있어 읽기 어렵지 않구요. 책에 나오는 강연들이 플레이리스트로 정리되어 있어 강의하기에도 좋습니다.

한 해 동안 이 교재에 살을 붙여 강의를 해보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청소년들과 함께 강독을 진행하면서 각자의 관심분야에 관한 강연을 만들어 보는 수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강연 재생목록
https://www.ted.com/playlists/324/the_official_ted_talk_guide_pl

도서 공식 페이지
https://www.ted.com/read/ted-talks-the-official-ted-guide-to-public-speaking

나의 영어수업

동사 “love의 과거는 loved”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I love you.”와 “I loved you”사이의 심연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는 수업이기를.

“개”는 “dog”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넘어, 모든 개를 dog으로 부를 수 있는 인간의 개념화 능력과, 모든 개를 dog이라 부르는 데서 발생하는 상징적 폭력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수업이기를.

“If I were my brother, I would be miserable.”에서 “가정법에서 동사의 형태”를 말하는 것을 넘어, 앞의 “I”와 뒤의 “I”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I임을 이야기하는 수업이기를.

형태와 의미를 함께 가르친다는 것은 단지 해석을 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언어 시스템의 작은 변화가 삶의 경험들과 어떻게 만나고 충돌하는지 보여주는 일임을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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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BE동사

위키피디아 인물 페이지의 첫 문장은 사람이름 + BE 동사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Matthew Paige “Matt” Damon (/ˈdeɪmən/; born October 8, 1970) is an American actor, film producer and screenwriter.” 같은 식이다. 맷 데이먼은 아직 생존해 있기에 be동사의 시제가 현재(is)다.

하지만 고인이 된 경우 시제가 달라진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George Michael의 페이지는 “Georgios Kyriacos Panayiotou (25 June 1963 – 25 December 2016), known professionally as George Michael, was an English singer, songwriter, and record producer who rose to fame as a member of the music duo Wham!”로, John Berger는 “John Peter Berger (5 November 1926 – 2 January 2017) was an English art critic, novelist, painter and poet.”로 소개된다.

위키피디아 인물 페이지의 과거형 WAS.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BE 동사가 아닐까.

하지만 우리들의 맘 속에서 그들은 언제까지나 현재형이다. “George Michael IS an English singer, songwriter, and record producer.”이고, “John Peter Berger IS an English art critic, novelist, painter and poet.”인 것이다.

존재’했던’ 것들은 언제까지나 존재’한다’.
죽음과 삶은 그렇게 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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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댐: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것은 기억. 기억과 기억을 연결해 주는 것은 만남. 죽음과 죽음을 연결해 주는 것은 기록. 삶과 삶을 연결해 주는 것은 죽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 (2017.1)

문법번역식 교육

현재 국가 교육과정의 이론적 뿌리가 되는 의사소통적 교수법(Communicative Language Teaching)의 지속적 영향 속에서 적어도 이론의 영역에서는 문법번역식 교육이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문법 공부와 번역 연습이 외어학습의 주요 전략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법학습이냐, 어떤 번역 과제냐이지 문법과 번역 그 자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 문법과 번역은 재창조(reinvention)의 대상이지 버려야 할 구습이 아니다.

흔히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악마가 디테일에 있다고 떠들면서 ‘도매금’ 천사를 동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삶을위한영어공부

On native-speakerism

Native-speakerism is a powerful ideology machine that mass-produces unfairness, contempt, inferiority, and frustration. It ruthlessly divides native and nonnative speakers, veils the hard fact that we are all legitimate users of a certain language, and naturalizes sociocultural, economic biases against second and foreign language learners. Through this seldom-challenged mechanism, it effectively molds discrimination out of differences, It mimics racism in placing the categorical value on a birth-based capacity, and colludes with the ‘sacred’ meritocracy by establishing native speaker-favored standards, qualifications, and market environments. Where native-speakerism prevails, foreign language learning functions as a viable tool for the old ruling strategy: divide and conquer. So I remind myself that I do not need to say, “I perfect understand what you mean by that. However, it is wrong: native speakers would not speak like that.” No, they’re not wrong. I am wrong. There utterances communicate: my judgement blocks.

영어-학습-자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 영어학습자를 대함에 있어서 ‘영어’에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영어’ 보다는 ‘학습’ 전반이, ‘학습’ 보다는 ‘자者’ 즉 사람의 문제가 더욱 근본적이다. 이런 면에서 영어교육전문가의 전문성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면 사람보다 공부를, 공부보다는 영어를 중심에 놓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수포자’, ‘영포자’, ‘과포자’ 등의 명명은 현상의 근원에 닿지 못하고 개별 과목 중심의 사고를 강화한다.

총체적 관점을 이야기하면 개별 교과의 문제도 풀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별 교과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총체적 관점 즉, ‘인간으로서의 발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with 철

미디어 활용 교육

미디어 활용이 리터러시 교육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기술을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 활용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특별한 이견은 없다.

하지만 종종 ‘활용’에만 골몰하는 교육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교육은 미디어를 활용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류 메신저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메신저를 활용한 소통도 중요하지만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중요하다.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술 바깥의 삶에 대해 상상해 보는 일 또한 소중하다.

언젠가 ‘~할 수 있다’는 진술로 구성된 교육목표(Can-do statements)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교육의 목표가 일련의 ”Can-do statements’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진술들 행간에 존재하는 ‘Can’t-do statements’를 이해하는 것이라 믿는다. 할 수 없음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목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 글을 쓰고 나니 갑자기 고정희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별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내 맘 속에서는 분명 통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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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상호복수, 그리고 “우리가 친구가?”

 

예전에 “상호복수”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여러 표현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shake hands with someone’에서 hands가 복수인 이유는 손이 두 개라서라고 하죠. (물론 두 사람 모두 양손으로 악수를 하는 경우 네 개가 되겠죠.) 다른 예로 take turns / change seats 등이 있습니다. be on good/friendly terms with someone도 있군요.

페이스북에서 이미 친구가 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친구 수락을 누르니 이렇게 나오네요. You are friends with this person. – 상호복수 문법에 따르면 상대와 나를 포함하기에 ‘friends’라는 복수형을 쓰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문법적으로는 이런데 페이스북의 “unfollow’ 기능을 생각해 보면 개념적으로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분명 친구 사이이지만 unfollow를 할 경우 상대방의 소식이 사라지기 때문이죠.

즉, A는 B의 소식을 보지만, B는 A의 소식을 보지 않게 되는 ‘정보 비대칭 (실은 정서 비대칭)’의 상황이 되는 겁니다. 상호친구 사이에서 일방적인 친구 사이가 된달까요?

이 상황에서 ‘상호복수’ 개념은 그야말로 껍데기 느낌입니다. 정리하면 이런 거죠.

You are friends with this person. However, the person is not friends with you.”

저 unfollow 하신 분들은 이거 안보이실 듯. :)

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어떤 개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cat. It is very cute.”

여기에서 ‘a cat’은 고양이 한 마리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양이 중 하나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is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과 2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이런 면에서 “a(n)”의 의미는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관사공부중

A second thought

Let me give it a second thought.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보태어 봅니다.

“The only”도 그랬지만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와 같은 표현들도 깨져서는 안되는 법칙으로 배웠습니다. 이는 “서수 앞에는 the를 붙여라!”는 구호(?)로 정리되었죠. 하지만 이 공식에는 헛점이 있습니다.

제가 첫 문장에서 쓴 “a second thought”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는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다” 정도의 뜻으로 “a second thought”와 같이 부정관사를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차이 또한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에서 “second”는 ‘다시 한 번’ 한번 더’ 정도의 의미입니다. 서수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것이죠. “take a second look(다시 보다)”과 같은 용법도 비슷합니다. 만약 우주선을 만드는 팀의 디렉터가 “Nobody deserves a second chance here.”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두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도가 되겠죠. 우주선이 폭파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니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학술논문에서 생각나는 예는 “a second limitation”과 같은 표현있습니다. 연구의 한계를 논의하며 “두 번째 한계로는…”과 같이 이야기할 때 쓸 수 있는 어구죠. 이 경우에는 한계점이 몇 있는지 언급하지 않고 “첫 번째 한계는…이다. 두 번째 한계는…이다.”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특정 대상의 수가 N으로 한정되어 있고, 이에 대해서 “첫째, 둘째, 셋째… N번째”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면 서수 앞에 모두 the를 붙이는 것이 맞습니다. “There are three problems with this method.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언어는 꽤나 말랑말랑합니다. ‘법칙과 예외로 구분되는 세계’라기 보다는 ‘개념화와 맥락으로 창조되는 세계’에 가깝습니다.

#관사공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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