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frames about the evil forces

There are largely two frames about the evil forces: (1) They don’t know the facts. They are not able to put themselves in other people’s shoes. They are misinformed in every aspect. (2) They surely know how to ignore the facts. They are superbly able to “stick to their own shoes.” They have their own media, which exerts control across society.

The former construes the evil as “unable” and “misguided.” The latter as “able” and “self-generated.”

Yes, they are misinformed. But the more crucial is the fact that they can engineer and spread fake news as well as control media. They may hopelessly lack empathy, but the more dreading point is that they can generate the ‘alt-reality’ that soothes people’s indifference and intolerance, and even crowns hatred and violence.

The fight lies in how to decapacitate the evil, draining its financial, institutional, and psychological resources, not in how to explain their pathetic ignorance away.

공부하고 밥벌이하며 살아간다는 것

지금은 새벽 두 시 이십 칠 분. 하루 종일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 소식, 다른 하나는 한 지인의 양심적 병역거부 결단 소식입니다. 지진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속 뉴스를 보게 되고 글을 읽게 됩니다. 평화주의자로 살기로 마음먹은 그 친구의 얼굴이 자꾸 떠오릅니다. 마음은 정처없이 부유하고, 그런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연착륙시켜 보려는 시도도 잘 되지 않더군요. 친구를 위해 노래를 하나 연주하고 새로 구입한 책을 조금 읽다 덮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새벽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재난과 병역거부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 비껴나 어제 지도교수와 한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터라 졸업 이야기가 어쩌다 나옵니다. 어제도 졸업 후 미국에 남아있게 될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 쪽으로 진로를 결정할 것인지 등등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선 저는 대학에 남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대학에 남는 것이 학자로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에게 가장 좋은 학자는 세계를 깊이 성찰하고, 성찰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런 성찰과 소통을 연대로 이어내는 사람입니다. 특히나 교육과 언어학, 심리학과 인류학 등이 ‘짬뽕된” 응용언어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있기에, 삶에 대한 이해와 개입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한편으로 저는 밥벌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관심이 많다 함은, 밥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직업을 반드시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밥벌이라는 표현은 저에게 비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삶을 지탱하고 제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제 앞가림은 꼭 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사실 (절대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나름 힘들었던 시절을 겪은 후로 가난이 개인과 관계에 대해 미칠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저와 지도교수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저는 지도교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경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분야를 개척한 “대가” (이 단어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라 빌려 씁니다) 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근본적으로는 정말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지도교수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언제 졸업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졸업과 관계 없이 지도교수가 제 삶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 같습니다.

어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지도교수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연구를 하는 학자로 남고 싶냐고. 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연구 research 중심 대학으로 가려고 생각해 보면 지금 출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슬슬 걱정도 된다고. (물론 저는 졸업만 해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꼭 연구중심 대학에 가려는 생각도 없고요.)

지도교수가 말했습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였죠.

“정말 연구자로 살아가고 싶다면 어떤 기관이든 들어가서 계속 연구를 해라. 요즘 학생들은 연구중심 대학에 바로 가려고 하는 생각이 많은 거 같다. 너무 고른다. 하지만 평생 연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교육 중심 대학 teaching school 으로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거기서 시작하는 거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길을 만들면 된다. 물론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면 거기에서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이 학교에 오기까지 5번 학교를 옮겼다. 처음에 간 학교는 아주 작은 지방의 학교였다. 나는 가족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누구든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연구중심 대학에 가야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연구자로 살고 싶다면 어디든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그런데 너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느 쪽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저는 말했습니다. “I’ll go wherever they pay me.” (월급 주는 데로 가야죠.)

지도교수가 웃더군요. 그리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좋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가에 너무 가치를 두는 건 좋지 않다. 그리고 만약 네가 진정한 연구자로 살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건 하루의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할애하는 일이다. 학교 사정이나 집안 사정, 혹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반드시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써야 한다. 물론 이게 쉽지는 않다.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학자로 살아가려 한다면 삶의 고난이 와도 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일 때문에 다른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아서 이걸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시간에 “파티션을 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참고로 지도교수는 매우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실천과 이론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을 꾸준히 확보하지 않으면 학계 academia 에서 네가 원하는 일을 꾸준히 하긴 힘들다.”

이제 새벽 세 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반성해 봅니다. 사실 많은 세월 동안 사회 정치적 이슈와 씨름하면서 살아왔고, 이를 후회하진 않습니다. 앞으로도 삶의 본질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러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그 삶 속의 많은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제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세상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튼튼하고 쓸모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 (공부라고 불리는!)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핵심을 위해 매진해야 하고, 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라는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무얼까. 지도교수의 말 속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삶의 일정 부분을 늘 읽고 쓰는 데 쓰는 것. 그리고 마음 아픈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이 공부의 시간을 양보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 공부의 시간을 통해 ‘명예’를 얻거나 ‘좋은 연구 중심 대학’에 가기 위해 쓰지 않는 것.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의 파티션”을 치는 것.

가끔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꼭 졸업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가끔은 이왕 4년 한 거 마치고 오라는 말씀도 ㅠㅠ) 교사 자격증이 있으니 임용 시험을 보거나 사립학교에 지원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맞장구를 칩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면 그거 하고 살면 된다고.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된다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이 꼭 다른 길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공부해서 남주냐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남주려고 공부하는 삶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에 파묻히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세계로 덮어버리는 공부도 가능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 일상의 행복을 접는 게 아니라, 공부를 통해 일상에서 더 깊은 행복을 맛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처럼, 내가 사랑하는 말과 사람의 세계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1.5.12.

다의어의 세계, 아이덴티티의 세계

예전에 중학생 친구들을 가르칠 때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이거 왜 이렇게 뜻이 많아요? 얼마나 많이 외워야 되요?”
“그치? 단어 하나에 뜻이 너무 많지?”
“네네. 영어 짜증나요.”
“ㅎㅎㅎㅎㅎ”

단순하지만 언어가 작동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다의어 polysemy”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단어가 하나의 뜻에 그치지 않고 여러 뜻을 가진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지능력과 어휘-맥락의 작동방식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됩니다. 이에 저는 저 순간을 의미 있는 교수 기회(teachable moment)로 삼았습니다. 아울러 짜증나게 영어만 그렇다는 생각은 외국어에 대한 상위인지의 허점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었기에 간단한 과제로 대응해 보았습니다.

사회적 아이덴티티와 다의어

중학생들에게 다의어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학 이론을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양한 사회적 역할과 아이덴티티의 변화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대충 이런 식이었죠.

“우리가 속한 사회 집단을 생각해 보면 보통 몇 개, 많게는 수십 개가 되죠. 반, 학교, 직장, 학원, 집, 종교 단체, 동호회, 동문회, 향우회, 친구 모임, 각종 게임 서버, 소셜 네트워크, 온라인 커뮤니티 등등등. 각각의 그룹에서 우리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 겁니다. 단체의 성격에 따라, 그 단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거기에서 맡고 있는 역할에 따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길 바라는 지에 따라,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말과 행동, 옷차림까지 달라지죠.

다시 말해 우리 각자는 한 사람이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정체성(identity)을 발현합니다. 한 사람이지만 그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죠. 그렇다고 몇 초 단위로 성격이 달라지면 위험하겠죠? 그야말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테니까요. 물론 이게 안되어도 큰일입니다. 왜 큰일이냐고요? 가족에게 하는 말과 행동 그대로를 담임선생님이나 학급 친구들한테 해보시면 왜 큰일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단어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상황에 쓰이게 되죠. 각각의 상황마다 그 단어의 행동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어울리는 단어나 문법도 조금씩 달라지는 거죠.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친구들(collocation, 연어)이나 모이는 방식(structure, 문법)이 달라지니 결국 그 뜻이 달라지게 됩니다.

결국 맥락 context 과 쓰임 use 에 따라서 단어의 뜻이 변화하는데, 이 변화의 패턴을 잘 정리해 놓은 것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의 여러 뜻입니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출현하는 단어들을 모아서 이것들을 정밀하게 구분하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사전 편찬자들을 제일 머리아프게 하는 건 ‘애매하게 쓰인’ 단어들이예요.

여기에서 재미난 현상이 발견됩니다. 잘 보면 사전에서 뜻이 많은 단어는 별별 맥락에서 다 사용되는 단어들이예요. 예를 들면 동사 중에서 ‘take’나 ‘get’같은 걸 보시면 보통 수십 개의 뜻이 나오죠. 오만 가지 상황에서 굉장히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여러 가지 뜻을 표현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take나 get 같은 건 뚜렷한 개성이 별로 없어요. 좋게 말하면 유연성이 뛰어난 녀석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두루뭉술의 대가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이 단어를 보세요. Protanopia. 아마 못들어 보셨을 거예요. ‘적색맹’이라는 뜻이예요. 다양한 색맹 증상 중 하나죠. 여러분 적색맹이라는 말 자주 사용하세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포켓몬 고 할때도 사용하나요? 아니죠. 적색맹이라는 말은 의학용어로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사용되겠죠? 그래서 사전을 찾으면 ‘적색맹’ 혹은 ‘제1색맹’ 같이 딱 하나의 뜻으로 풀이되어 있어요. 겹치기 출연 안하고 자기가 나올 데를 딱 아는 거죠. 이런 단어들은 출현 빈도는 낮은데, 성격이 뚜렷해요.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get 같은 친구와는 다른 거죠. ㅎㅎㅎ

자 이제 왜 어떤 단어들은 그렇게 뜻이 많은지 아시겠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면 어떤 단어에 뜻이 많은 이유를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 가기 전에 한 가지 과제를 드릴게요. 정말 영어 단어만 그렇게 뜻이 많은 걸까요? 우리말 단어들은 안 그럴까요? 집에 가서 국어사전을 찾아 보세요. 예를 들어 ‘가다’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뜻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같이 이야기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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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더 넓은 아량(?)으로 국어사전에서 ‘가다’를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전 이만 갑니다. 명절이 벌써 다 간 느낌이네요. 아까 마신 커피의 카페인발이 너무 오래 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질문 정하기, 인간 지우기 — ‘스크립트 문답’에 대한 깊은 우려

‘정해진 질문과 답변’이라는 말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습니다. 답을 알고 하는 질문이 무슨 질문이며, 질문을 미리 알아버린 답이 어떻게 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답을 정해 놓고 질문을 하라는 요구는 매끄러운 진행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1) 자신의 삶에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거나 (2) 정치가로서 정책과 비전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3) ‘귀찮은’ 질문들을 피해가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정치적 행태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에 주목합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인간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질문과 답을 정해놓고 ‘대화’를 진행함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너의 질문이나 호기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너의 목소리를 빌리겠다, 이런 자리에 캐스팅 되었다는 사실로 만족해라, 어떤 비판이나 호기심의 언어도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빛나야 할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니까.’

결국 질문과 답을 정한다는 것은 지금 내 앞의 인간을 지우는 행위입니다. 마주하는 얼굴마저 지우려는 사람이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질문을 정하는 일은 인간을 지우는 일입니다. 자신의 우월함을 뼈속 깊이 체화한 사람만이 질문을 정할 수 있습니다. ‘짜고 치는 대화’를 그 어떤 상황보다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v.media.daum.net/v/20170121000301686

 

영어 관사 – 사소한 것 몇 가지 3

최상급에는 왜 늘 “the”가 붙을까?

1. “The same”으로 정관사 이해하기

‘같은’의 의미를 나타내는 ‘same’ 앞에는 정관사 ‘the’가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이걸 생각해 보면 ‘특정할 수 있는 개념에 대해 정관사를 사용한다’는 문장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같다’라는 말을 쓰려면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개체/개념을 상정해야 합니다. “똑같다”는 말을 하나의 대상에 적용할 수는 없으니까요. “A랑 B랑 똑같네”는 말이 되지만, “A랑 A랑 똑같네”는 말이 안되죠. (여기에서는 일상어의 사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아이덴티티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제외하도록 하죠. ^^)

2. 그렇기에 ‘똑같은’이라는 말을 하려면 앞에 어떤 대상이 언급되거나 문맥상 특정한 개념을 추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예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래는 저와 제 친구가 한 카페에 간 상황입니다.

#1
점원: 뭘로 드릴까요?
나: 카페라떼 주세요.
친구: 같은 걸로 주세요.

괜찮은 것 같죠? 점원은 제가 카페라테를 주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이를 기반으로 친구가 말한 ‘같은 걸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은 어떨까요?

#2
점원: 뭘로 드릴까요?
나: 같은 걸로 주세요.
점원: ???
친구: ???

제가 다짜고짜 ‘같은 걸로’라고 말하면 점원이 분명 황당해 할 것입니다. 옆에 있는 친구도 놀라겠죠. 둘다 ‘같은 거라니? 니가 처음 준비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다짜고짜 ‘같은 걸로’라고 말해도 괜찮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자주 가는 카페의 점원이 제가 겨울에 카페라테를 자주 마신다는 걸 아는 상황이죠. 이때 대화상으로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점원과 제가 소통한 역사 속에서 ‘같은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3
점원: 뭘로 드릴까요?
나: 같은 걸로 주세요.
점원: 네. (‘저 놈 참 꾸준히 라테를 먹는군’이라고 생각하며, 옆 바리스타에게 “카페라테 하나!”)

3. 영어로 다시 돌아와 보죠. “the same”이 항상 “the same”일 수밖에 없는 것은 “same”의 기준이 되는 대상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same”이 특정한 대상을 가리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the”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The poet moved to France in 1998. She won the prize the same year.” (시인은 1998년도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같은 해에 상을 받았다.) – 이 문장에서 the same year는 당연히 1998년을 가리킵니다. “Same year”가 가리키는 대상이 명확하므로, 다시 말해 “same year”가 특정한 해를 가리키므로 정관사 “the”가 필요한 것이죠.

4. 학교에서 배운 규칙 중에서 “최상급 앞에는 the 붙여!”가 있죠. 그렇다면 왜 최상급 앞에는 the가 필요할까요? 위에서 ‘the same N’를 설명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최상급 앞에 오는 the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최상급의 경우 말 그대로 ‘최상’인 개체를 콕 짚어 지칭합니다. 즉, 최상급으로 수식되는 명사는 특정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예를 들어 “She is the tallest girl in her class.”을 봅시다. 한 반에 키가 가장 큰 사람은 한 명 밖에는 없고, 따라서 ‘tallest girl’은 언제나 특정(specify)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할 수 있을 때 사용하는 관사, 즉 정관사(definite article)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키가 완전히 똑같아서 ‘키가 가장 큰 학생’이 두 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법적으로 상정하는 ‘최상’의 개념은 이런 예외적인 경우까지 포괄하진 않습니다. “She is one of the two tallest girls in her class.”이라고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the tallest girl”이라고 하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한 사람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5. 이같은 논리로 설명 가능한 문구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the following …” 입니다. 학술논문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 중에 “in the following”이 있습니다.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in the following section”과 같이 뒤에 명사가 나오기도 하죠.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the following”과 같이 정관사와 함께 쓰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위의 예들을 다시 살펴보시면 쉽게 대답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The following”을 독립적으로 쓰든 뒤에 section이나 statement가 나오든간에 “following ~”은 독자가 콕 짚어서 알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전자/후자’를 나타내는 표현이 왜 “the former/the latter’인지도 이해하실 수 있겠죠? 문장 내에서 전자와 후자라는 표현은 언제나 특정한 대상을 지칭합니다. 따라서 특정할 수 있는 표현을 나타내는 정관사 the의 수식이 필요한 것이죠.

#관사공부중

영어 관사 – 사소한 것 몇 가지 2

정관사? 부정관사? 그리고…

1. 많은 분들이 관사에 대해 질문하실 때 “여기에 a를 써야 하는지, the를 써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A와 the의 구별이 관사학습에서 핵심적인 사항임에 틀림 없지만, 관사를 이렇게 a/the 두 개의 체계로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닙니다.

두 개의 관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게 더 있을까요?

2. 네. 맞습니다. 관사는 크게 정관사(definite article), 부정관사(indefinite article) 외에 무관사(zero article)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즉, 특정한 명사가 나왔을 때 ‘여기 a? the?’보다는 ‘여기 a? the? 무관사?’로 질문하시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3. 관사의 용법은 한국어에서 ‘은/는, 이/가’의 구별처럼 쉽지 않고 각각의 개념도 정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관사와 부정관사, 무관사가 가지는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a. 부정관사: 특정한 개별자가 가진 특질(features)과 관련 없이 비슷한 사물/개념들 중 하나를 가리킵니다.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걸 나타낼 때 쓰는 관사죠. 이때 ‘하나로 정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indefiniteness’입니다.

예를 들어 “I have an apple.”이라는 문장에서 “an apple”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과라고 불리는 것 중 하나임을 의미합니다. 그게 맛이 있는지 없는지, 크기는 어떤지 등은 중요하지 않죠.

b. 정관사: 특정한 사물이나 개념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specify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specify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definiteness’로 표현되는 개념입니다.

‘특정(specify)할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긴 쉽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도 논쟁거리죠. 논문을 쓰자는 건 아니니 디테일을 과감히 생략하고 간단히 설명하면 ‘말하는 사람이 상대방도 알고 있다고/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이 대상은 보이는 물건일 수도, 추상적인 개념일 수도 있죠.

c. 무관사: 절대적 추상화 혹은 일반화(absolute generalization)를 하는 경우에 사용됩니다. 이 경우 관사가 붙지 않은 명사는 한계가 없는 일반적, 추상적 개념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love’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고, ‘people’은 특정인의 집합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반적 집합을 나냅니다.

4. 위의 개념은 일반 학습자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한 가지만 기억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앞으로 명사 앞에 관사를 붙이려고 고민할 때에는 “정관사? 부정관사? 무관사?” 이렇게 세 가지로 질문을 하는 습관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관사공부중

영어 관사 – 사소한 것 몇 가지

 

1. 아시다시피 a/an은 단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부정관사 a/an은 ‘하나’를 나타내는 one에서 파생했지요. 당연히 a books라고 쓰는 건 불가능합니다.

2. a/an이 단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 정관사 the는 단/복수의 개념과 관련이 없습니다. 문맥에 따라서 the book이나 the books 모두 가능한 것입니다.

3. The는 어원적으로 ‘that’과 관련이 있고, 개념적으로는 ‘특정(specify)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깊습니다.

4. ‘동서남북’ 각각의 방향을 명사로 나타낼 때는 the east, the west, the south, the north와 같이 정관사를 사용합니다. 전치사와 함께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남쪽으로 뛰어갔다”고 하면 “He ran to the south.”와 같이 “to THE south”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동사 바로 뒤에 방향을 나타내는 말이 나올 때에는 부사로 쓰여서 run south, walk east, drive west 와 같이 관사를 쓰지 않습니다. Turn right, turn left와 유사하죠? 전치사와 같이 쓸 때에는 “turn to the left”나 “turn to the right”로 쓰니까요.

5. 두 개의 대상을 지칭할 때 ‘하나는’, ‘다른 하나는’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죠. 영어에서는 one/the other를 가장 선호합니다.

이때 the를 사용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두 개 중에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 하나는 정해지는 것이고, 이렇게 특정할 수 있는 대상을 나타낼 때에는 the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정관사(definite article)입니다. ^^

#관사공부중

고쳐주면 쌤이 아니다?

나: 시험 잘 보셨다면서요? 뭐 맛난 거라도 먹었어요?
준(가명): 그런 거 없어요.
니: 아…
선(가명): 니가 나보다 평균 20점은 높을텐데.
준: 설마.
선: 진짜로. 진짜로. 전 통닭 시켜먹었어요.
나: 아 통닭. 맛있었겠네요. 점수는 낮아도 통닭 드셨군요. ㅎ
준: 아 왜 난 아무 것도 없어.

……

나: 시험문제 주관식 어떤 거 나와요? 영작 같은 거 많이 나오나요?
준: 영작도 나오고요. 단어 주고 순서 바꿔 쓰라는 거.
나: 아…
선: 맞아. 필요하면 단어 좀 바꿔 쓰라고.
나: 아 동사 같은 거 시제 바꾸고 그런 거요?
선, 준: 네.
준: 그리고 뭐더라. 문장을 영작하고 몇 번째 단어를 쓰라고 해요. 세 번째 단어만 쓰라든가.
나: 아 그런 문제도 나와요?
준: 네. 영어로 썼을 때 세 번째, 네 번째 단어만 써라. 그런 거요.
나: 특이하네요.
준: 근데 지난 번에는 답이 두 개였는데…
나: 그럼 몇 번째 단어 쓰라는 것도 답이 두 개가 되잖아요.
준: 그렇죠. To 부정사 나오는 거 였는데 답은 하나만 된대요.
나: 엥? 가능한 답이 두 개였다면서요. 선생님도 두 문장 다 맞다고 하신 건 아닌가요?
준: 선생님이 둘다 쓸 수는 있다고 했는데… 원래 생각했던 문장 하나만 된다고 했어요.
나: 선생님이 둘다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준: 근데 문장은 하나만 인정해 줘서 전 틀렸어요.
나: 흠… 그건 좀… 혹시 학교에 막 항의 전화 오고 그런 거 없었대요?
준: 엄청 많이 왔대요.
나: 그랬을 거 같은데… 결국 답 안고쳐주신 거예요?
준: (강조하며) 당연하죠. 고쳐주면 그게 쌤이예요?
나: 아… 고쳐주면 쌤이 아니다?
준: 절대 안고쳐주죠. 여태껏 시험문제 몇 개 오류 있었는데 한 번도 답 고쳐주는 거 못봤어요.

……

나: 내일은 뭐 하세요?
선: 아아아… 전 수행평가 과제 해야돼요.
준: 전 아무 것도 안해요.
나: 주말인데 뭐 아무 것도 안해요?
선: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제일 좋은 건데.
준: 그쵸.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최고.
나: ㅎㅎㅎ 하긴 아무 것도 안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죠.
선: 그룹과제가 제일 싫어요.
나: 아 같이 뭐 해야 되는 거예요?
선: 네.
나: 꼭 안하는 애들이 있죠?
선: 안하는 것도 그렇고, 온다고 그랬다가 안오고, 연락 끊기고.
나: 심하네요.
준: 버스타는 애들.
나: 아 ‘버스탄다’고 해요?
준: 네. 무임승차.
나: 아 그걸 버스 탄다고도 하는구나.
준: 네네.

……

나: 자 그럼 안녕히 가시고, (준에게) 부디 아무 것도 하지 마시고, (선에게) 그룹과제 잘 하시고요.
준, 선: 네 안녕히 가세요~

===

대부분의 교사들이 겪는 중간기말 시험문제 스트레스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가끔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는 교사들이 분명 있다.

“고쳐주면 그게 쌤이예요?”

무심코 튀어나온 말.
하지만 가슴에 와서 콕 박힌 말.
원래는 이런 말이었어야 하지 않나.

“(틀린 줄 알면서도) 안고쳐주면 그게 쌤이예요?”

그나저나, 아무 것도 안하는 주말.
좀 부럽구나. ㅎㅎㅎ

학생들이 말하는 ‘행복’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행복은 없다.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한다고 믿지만, 그리고 추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이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사소한 일에도 웃을 수 있는 것. 지금은 나에게 너무 먼 것.
적당한 여유와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처한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 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 것.
행복이란 큰 걱정이 없는 상태이다.
행복은 시험이 끝나 친구들과 술마시며 웃고 떠드는 느낌이다.
행복: 고민과 걱정이 없는 상태.
감정의 주체가 긍정적인 정신적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
그날 그날 충분한 ‘행복감’을 느끼는 것. ‘행복감’이란 무언가 다소 감각적인 느낌. ‘아 행복해!’ 하는 감정.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의 합이 그냥 행복인 것 같다.
아무런 다른 일 생각나지 않으면서 웃을 수 있는 것.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행복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
자유로운 상태에서 타자에 대한 공헌을 통해 공동체 감각을 갖는 것.
정서적으로 충만하여 부족함이 없는 상태.
걱정거리가 없거나 있어도 괜찮은 것. :)
행복, 삶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조각.
힘든 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행복은 밤에 잠에 드는데 마음 속에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는 것.
평범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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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단어의 사용이 우리 생각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단어를 정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부질없으며 때로는 막무가내인지 생각해 보기 위해 했던 작은 활동.

어쩌면 나에게 ‘행복’은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쩔 수 없는 우울함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행복에서 비껴나야 행복할 수 있는, 역설의 관계라고나 할까.

느슨하지만 꽉찬 관계

중학생들과 전치사를 배운다.

“자자. 여기 보세요. go to work. 이건 무슨 뜻일까요?”
“…”
“go to school 있잖아요. 학교가다. 그니까 이건?”
“일하러 가다?”
“맞아요. 일하러 가다. 직장에 가다. 따라해 보세요. Go to work.”
“Go to work.”
“그럼 go to work랑 go to school 중에서 뭐가 더 나은 거 같아요?”
“둘다 가기 싫은데… / 학교 가는 데 돈 주는 거?”
“ㅎㅎㅎㅎㅎ”

===

“전치사, 여기 보니까 처음에 시간의 전치사, 뒤에 장소의 전치사가 나오네요.”
“네.”
“근데 전치사들 한번 비교해 보세요. 시간에 쓰이는 거랑, 장소에 쓰이는 것들…”
(학생들이 대~충 페이지를 흝어본다.)
“이게 사실 비슷하죠? On, in, at, before…”
“그러네요.”
“이게 왜 그럴까요?” (질문 던져놓고 순간 아차… 넘 어려운 걸 물어봤네. ㅠㅠ)
“…. (멀뚱멀뚱)”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한번 듣고 흘려요. ㅎㅎㅎ (아 멋적어) 시간이라는 게 뭘까요? (아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데~) 이게 시계를 보면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고 그런 건 눈에 보이는데 ‘시간이 뭐냐’고 하면 사실 할말이 없거든요.”
“…. (계속 멀뚱멀뚱)”
“그래서 시간을 나타낼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거, 실제 경험할 수 있는 걸로 이야기를 하죠. 그게 바로 장소죠.”
“”…. (계속 멀멀뚱뚱)”
“At the corner 라고도 하지만 at 7 o’clock 이라고도 하잖아요. From 망원동 to 합정동, 이라고도 하지만 from 4:30 to 5:30 라고도 하고요.”
“네 그쵸.” (나: 아 드디어 대답을 했다!)”
“그렇게 장소를 나타내는 말을 가지고 시간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제 끝내야지) 암튼 (<– 급히 말 맺을 때 나의 습관) 시간이랑 장소에 대해 말할 때 전치사가 쓰이고, 걔네들이 비슷비슷하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네.”

===

“Strange but interesting 나왔네요. Strange는?”
“이상한!”
“그쵸. 그니까 ‘이상하지만 재미있는’이라는 뜻이겠죠? 이거 보니까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생각나요. 저도 봤거든요.”
“재밌죠?”
“네. 재미있던데요? 팀버튼 영화가 좀 strange but interesting 하죠.”
“네. 이상한 애들이 좀 나오죠. ㅎㅎㅎ”
“아 그러고 보니까 Dr. Strange도 곧 나온다고 하던데.”
학생 중 하나: “(완전 실망한 투로) 아 그거 번역을 박OO가 한대요.”
“아 그 사람이 어떤데요?”
“번역을 디게 못하거든요. 여혐 번역도 많고.”
“아…”
“그래서 별로예요.”
“아 그럼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네요.”
“???”
“번역 없이 영화 보면 좋잖아요.”
“……”

===

금요일 오후를 거의 늘 이렇게 보낸다. 방전되기 일보 직전에 만나는 친구들. 갈 때는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나올 때는 조금 덜 무거운 것도 같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주고받는 관계이지만 서로에게 매이지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나는 친구들로부터 배우고 친구들은 나에게 배우지만 서로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관계. 숙제도, 강의료도, 시험도, 내신도 없다. 책을 안가져와도 오케이. 딴 소리를 좀 해도 오케이. 사정이 생기면 미리 연락하고 안오면 그만. 하지만 그게 서로에 대한 신뢰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태껏 그래왔듯 계속 만날 것이라 다들 믿고 있으니… 물론 이 관계도 언제 툭 끊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디 관계 뿐이랴.

계약과 구속이 들어설 틈 없는 느슨한 관계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느슨하지만 꽉찬 관계들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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