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사물의 등장

Posted by on Aug 14,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생각하는 사물의 등장> (임완철 지음,지식노마드, 2017)

사물인터넷, 수퍼커넥션, 인공지능의 부상,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등.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교육과 관련하여 논의한 책을 찾아보긴 쉽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90년대 중반부터 20년 넘게 실무와 연구를 병행해 온 저자의 책을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입니다.

저자는 “생각하는 사물이 서로 소통하게 되는 시대,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천착합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확보한 ‘생각하는 사물’이 스스로 학습하게 된다면,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학습해야 할까?”라는 질문입니다. 이는 곧바로 다음의 (다소 섬뜩한) 질문으로 연결되죠.

“‘생각하는 사물’이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생각하는 사물의 영향을 받은 생각으로 ‘생각하는 사물’의 영향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어 온 친구의 저작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제가 ‘언어교육’이라는 다소 좁은(?) 주제를 고민하고 있는 동안 저자는 교육과 공학을 묶어내면서 사회와 배움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 왔습니다. 혹시 관심있어하실 분들을 위해 아래 목차를 옮겨 놓습니다.

===

 

목차

여는 글

감사의 글

 

01 사물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과 연결되어 생각하는 장난감

3천만 권의 책을 읽고 있는 소프트웨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주는 인공지능

스스로 학습하는 사물의 등장

새로운 것들이 등장한 해 2011년

 

02 생각하는 사물이 바꾸어 놓을 것들

인공지능과 연결된 모든 사물이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다

생각하는 사물들끼리 연결되면 일어날 일들

인공지능과 함께 3천만 권의 책을 읽으며 학습한다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이 바꾸고 있는 것들

안경, 반지, 신발, 양말이 모두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다

 

03 더 늦기 전에 물어야 할 질문들

인공지능으로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

스마트한 도구를 사용하면 우리도 더 스마트해질까

안경이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생각하는 사물이 항상 우리를 위해 생각해줄까

아이들의 스마트한 도구 사용을 지지해야 할까

 

04 생각하는 사물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

미래에 필요한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

도구와 협업하는 능력

도구의 역할을 바꾸는 능력

인간과 결합하는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

도구에 의한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

도구를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로 다루는 능력

알고리즘까지 읽어내는 능력

생물학적으로 인간을 업그레이드하는 능력

도구와 상호 변화하는 능력

인간과 사물을 통합하는 능력

 

05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문제

인공지능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

생각하는 사물을 생각의 대상으로 다룰 때의 문제

생각하는 사물의 생각을 이해하는 문제

인공 생명을 개발하는 소프트웨어의 문제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

 

미주

문장틀 클리셰, 그리고 관료제

문장을 이루는 다양한 구성요소를 설명할 때 단어, 구, 문장 외에 “문장틀(sentence frame)”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It is true that…. but”이나 “If ….. would/could” 등과 같이 몇몇 어구의 조합이 문장의 통사적/의미적 틀거리를 이루는 경우를 가리킨다.

갑자기 이게 왜 생각났느냐 하면, “…하면서도 스스로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라는 어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언어교육 교과서에서 문장틀이 언급되면 학생들에게 정치인들의 사과문이나 변명을 위한 기자회견, 혹은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라고 해야겠다. 덤으로 비정상적으로 높은 빈도의 클리셰 또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장틀과 클리셰, 관료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

따분하다, 참.

언어학습 이론과 인공지능

언어학습 및 습득 상황을 구분하는 데 있어 학습(learning)과 사용(use)의 관계는 중요하다.

1. 모국어습득 상황에서 학습과 사용은 분리되지 않는다. 즉 쓰면서 배운다.

2. 외국어로서의 영어학습에서 학습은 종종 사용과 분리된다. 배우긴 하는데 써먹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쓰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지만 쓸 일이 없다.

3. 통번역기술의 발달은 학습(learning)과 사용(use)의 분리를 가속화한다. 배우지 않고 사용하는 시대의 도래. 이것은 의사소통에서 기술의 역할을 증대시킬 것이다.

4. 언어학습을 우회(bypass)하고 사용은 기계의 지능에 맡기는 시대. 언어학습 및 습득이론 또한 AI를 기본으로 장착하게 될 것이다.

5. “인공지능이 영어교육에 타격을 입힐 것이다”라는 예측.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만 지금은 영어교육이 그동안 누려온 과도한 특권이 정상화되는 시기로 봐야 하지 않을까.

8월 둘째 주

Posted by on Aug 7,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보자면 시간강사는 자유로운 편이다. 강의와 학사일정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일정을 스스로 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모든 업무가 무한정 늘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 강의가 끝나면 바로 다음 강의 준비를 시작해서 수업 시작 1분 전까지 몰아친다. 강의를 마치면 바로 다음 강의 고민을 시작한다. 학기 내내 이 패턴이 반복된다. 주말도 예외는 아니다.

강의자료를 미리 읽었다고, 대략의 개요를 짜 놓았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내가 그닥 머리가 안좋은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성향의 문제다. 그래서일까.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바보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 학기 숨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면서 이런 강박(?)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여전히 강의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삶의 균형을 깨뜨릴 정도라면 언젠가 큰 문제가 되어 나를 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강의자가 성장을 멈추면 학생들이 성장할 기회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건강에 대한 걱정 또한 기우만은 아니다. 축적되지 못하는 경험에 대한 아쉬움도 커졌다. 별것도 아니지만 그것 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요즘 비판적 응용언어학에 관한 이야기를 한 친구와 나누고 있다. 돌아온지 만 5년 만의 진지한 학술적 대화다. 한 분야를 오래 고민한 이들과의 대화는 학생들에게 배우는 바와는 조금 다른 결의 배움을 가능케 한다. 선생이 아닌 벗의 위치에서 배울 수 있음이 즐겁고 고맙다.

돌아보니 자신감은 사라졌으나, 이를 긍정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어리숙하고도 위태로운 긍정.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마음. 허나 자신감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은 세월이었다.

7월도 다 보내지 못했는데 시작된 8월 둘째 주. 함께하는 이들 덕에 힘을 내어 발걸음을 내딛는다. 더위가 곧 물러가고 “아침 저녁으로는 그래도 좀 선선하네요”라는 말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Information Cascade와 학습자

Posted by on Aug 3,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아랍 혁명의 파도 속에서 통치자들이 가장 신경썼던 것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의견과 정보, 사건 동영상 등이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소위 “Information Cascade”(정확한 번역어를 모르는데 ‘자신의 생각이나 인지와 상충되는 면이 있더라도 특정 정보에서 관찰되는 행동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독재에 대항하는 정치혁명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한국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초중고생들을 의사결정자로 보자.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다양한 결정을 내린다. 연령이 낮을수록 부모가 제공하는 정보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후 친구들과 학교 선생님들, 또 학원 선생님들이 전달하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접하며 여러 가지 판단을 한다.

학생들은 어떤 정보에 노출되는가? 정보를 필터링하고 배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지역별, 사회경제적 지위별로 정보의 양과 질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정부와 기업 등이 갖고 있는 정보, 교육과정에 들어가는 정보, 각급 학교 및 개별 교사들이 갖고 있는 정보와 학생들의 정보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른가?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MOOC 등의 교육 플랫폼이 학습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기존 입시제도와 공교육, 사교육은 어떤 정보 플랫폼 위에서 돌아가는가?

정보라는 관점에서 학습자를 바라보자. 올바른 정보에 의한 합리적 결정(informed decision)이 가능한 구조인가? 교사와 학부모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현 상황의 정보 위계에서 가장 ‘바닥’에 위치하고 있는 건 학습자 아닐까? ‘학습자의 주체성’ 타령을 하기 전에 그들이 발딛고 설 수 있는 튼튼한 정보 플랫폼을 구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간단히 말하면, 교육 시스템을 정보의 선별, 통제, 공유 등의 관점에서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늘 그렇듯 답은 없지만 계속 안고 가야 할 질문.

‘다름이 아니라’와 글쓰기 교육

“다름이 아니오라”는 메일에서 피해야 할 어구로 종종 지적된다. “다른 게 아니고” 같은 표현들은 가급적 피하라는 것. 생각없이 나오는 군더더기 표현으로 정보가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저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다름이 아니오라”는 메일의 내용이 아니라 문화적 사고패턴에 대한 정보를 담기 때문이다. 내용상 필요없을 지 모르지만 문화적으로는 통용되는 메시지 전달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메시지가 아닌 메타-메시지의 영역이다.

유난히 ‘있잖아’, ‘그거 알아?’ 등의 표현을 자주 쓰는 친구가 있다. (그런 친구 하나쯤은 다 있지 않나.) 이들은 그 자체로 특정 내용을 담고 있진 않다. 그래서 이런 말장난을 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실행에는 옮기지 않는다. (대신 써본다.)

“있잖아.”
“응 있지. 분명 있어.”

“그거 알아?”
“그거? 이건 아는데.”

“있잖아”가 전달하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화자가 “있잖아”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청자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있잖아’라는 말을 짜증스러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특정 문화 속 대화를 통해 사고구조를 형성해온 사람들은 “있잖아”를 듣는 순간 뭐가 있는지 순간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다름이 아니오라”는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기 전 짧은 준비를 할 여지를 준다. 뒤에 나오는 내용이 상대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거나, 업무를 요청하거나, 불쑥 질문을 던지거나 하는 일일 수 있다는 신호(signal)다.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일은 무례하게 비춰질 위험을 무릅쓰는 꼴이다. “다름이 아니오라”는 진부하고 정보성도 떨어지지만 이런 위험을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하는 전략으로 유효하다. 겨우 두 단어지만 말이다.

“다름이 아니오라”를 쓰지 말라고 할 때 “안좋으니 쓰지 마세요”라고 말하기 보다는 이 구절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는 문화적, 인지적 이유를 설명하면 어떨까? 안좋으니 쓰지 말라고 하기보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눠보면 어떨까?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핀잔만 듣게 될까?

하지만 때로는 ‘어쩌라는 것’ 보다는 ‘그렇다는 것’이 더 나은 글쓰기 교육일지 모른다. ‘~하라’ / ‘~하지 말라’만 난무하는 글쓰기 교육은 테크닉을 주고 생각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Photo by Dung Anh on Unsplash

새학기 준비

Posted by on Jul 20,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흥미나 관심, 수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16주 수업의 개요와 읽기자료, 과제 및 평가방법까지 모두 정해야 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 두어 명의 중학생 친구들과 3년 여를 만나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그날 그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 물론 학생수가 적었다는 게 컸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상호 신뢰의 관계를 쌓을만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대학에서의 만남은 대개 강의계획서와 함께 시작됩니다. 첫 시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은 배움의 내용과 방향이 아니라 과제와 시험, 평가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에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 빈틈없이 짜여진 강의요목과 완벽한 변주로 흘러가기 – 이 둘 사이 어딘가에서 중심을 잡아야만 하겠습니다.
 
. 아직도 서툰 것은 이런 접근법을 ‘객관적’이어야만 하는 상대평가 구조에 통합하는 일입니다.
 
. 이번 학기에도 새로운 강의가 많습니다. 얕디 얕은 응용언어학/영어교육학 지식의 팽창은 계속되겠네요.
 
.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닌데 고민이 됩니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게 많습니다.

손편지와 전자우편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우편, 편지’를 의미하는 영단어 mail은 고대 프랑스어 male에서 온 것으로 초기에는 여행 가방을 의미했다. 이후 우편제도의 발달에 따라 ‘우편물’ 혹은 ‘편지를 부치다’등의 뜻으로 진화했다. 20세기 후반에 대중화된 e-mail은 ‘전자우편’이라는 뜻의 electronic mail의 준말이다.

편지가 이메일이 된 것은 전달의 매개 즉 미디엄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우편배달에 있어 궁극의 퀵서비스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전달방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전자우편 기술의 반쪽만을 보는 결과를 낳는다.

이메일은 메시지의 전달방식(delivery method) 뿐 아니라 정보의 저장방식(archiving method)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편지는 정보를 담은 물체가 공간이동을 하지만, 이메일은 정보를 복제하여 상대와 공유한다. 편지는 내 손을 떠나 보내는 것이 맞지만 이메일은 실상 나에게도 너에게도 보내는 것, 즉 ‘카피 앤 페이스트’하는 것이다. ‘이메일을 보내시겠습니까?’라는 말은 ‘이메일을 복사에서 홍길동의 메일 서버에 붙이겠습니까?’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디지털 정보를 두 사람이 갖게 되는 사태는 물성을 지닌 편지가 받는 사람의 소유가 되는 사태와 사뭇 다르다. 편지라는 미디어는 정보 및 그 담지자(carrier)의 비대칭성을 특징이지만 이메일은 정보의 대칭적 소유가 특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SEND” 버튼은 “GIVE & TAKE” 아니, “TAKE & GIVE” 버튼이다. ‘보내기’ = ‘나 한부 갖고 너 한 부 갖자.’

편지를 보내는 순간 나에게서 떠난다. 사라지는 편지라야 진짜 편지라는 말이다. 이메일은 보내는 순간 나에게도 남겨진다. ‘보낼 편지함(미래)’에서 ‘보낸 편지함(과거)’로 이동하지만 여전히 내가 쥐고 있는 상황은 지속된다. 동일한 메시지를 담는다 하더라도 편지는 ‘사라짐의 미디어’이고 이메일은 ‘남겨짐의 미디어’랄까.

손편지를 쓰다가 뭐 이렇게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노트 필기였다면 이렇게 장황하진 않았을 거다.

숙제를 할 시간

Posted by on Jul 16,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일전에 언급했듯이 맘고생을 좀 심하게 한 수업이 있었다. 바보같은 두려움이 수업을 잡아먹었고, 몇몇 학생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연신 돌아보는 걸 보면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진 않았나 보다.

처음부터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응용언어학 전공자로서는 드물게) 해당 분야에서 실무자로 일했고, 프로그램 기획, 구축, 실행, 평가의 사이클도 여러 번 돈 경험이 있었다. 해될 것이 없는 자산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한 것은 몇몇 학생들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분명 강사로서 수업상황에서의 권력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매번 면접관들 앞에 선 기분이었달까. 몇몇의 항의성 이메일과 거침없는 코멘트 속에서 느껴지는 태도를 요약하면 이거였다.

‘그래 너 얼마나 잘 하나 보자.’

가르치는 일을 하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의 찌질한 트라우마를 차분히 들은 친구가 입을 열었다.

“요즘 친구들이 그런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 얘네들이 어렸을 때부터 인강을 듣고 자랐잖아? 그러니까 유명한 강사라도 좀 보다가 ‘아니네’ 하면 다른 강사, 또 ‘아니네’하면 다른 강사. 이렇게 선생을 골라가면서 공부한 세대거든. 그리고 고등학교 때나 학원 같은 데서도 무기명으로 평가를 해. 그때 마음에 안드는 게 있으면 자기 감정을 여과없이 다 쏟아놓기도 하지. 그러니까 선생을 고르고 평가하고 여차하면 ‘버리는’ 데 익숙해지는 거야. 그냥 어렸을 때부터 죽 해왔던 일이라 너무 자연스러운 거지. 너 개인에 대한 태도라기 보다는 그렇게 자라온 걸 거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게 다는 아니겠으나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맡고 그들과 마주하면 구조탓을 할 수는 없다.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일.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숙제를 해야 할 시간이다.

‘시점’ 단상

Posted by on Jul 12,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말은 좀 이상하다. 개념상 ‘전지’와 ‘시점’이 충돌한다.

‘작가 관찰자 시점’은 좀 으스스하다. 어디든 따라가서 엿보고 엿듣는 것 같아. 스토킹도 아니고.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불가능하다. 내가 주인공일리가 없잖아.

‘1인칭 관찰자 시점’은 음… 그게 객관화가 되냐고요.

2인칭 시점은 ‘1인칭 거울 시점’이 아닐까. 상대가 주인공 같지만 자신의 마음에 비친 자기 버전의 인물일 뿐이니.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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