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습 이론: 연구자와 학습자의 관점에서 (1)

1. 언어학습은 단지 개인과 언어의 관계로 설명되지 않으며 개인을 둘러싼 수많은 요인과 관계들의 영향 하에 있다. 말을 배우는 일은 단지 말을 알아간다기 보다는 세계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 연구자에게 있어 (제2)언어습득 이론은 하나의 체계를 지향한다. 이 체계에는 이론의 데이터를 구성하는 요소와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이 있다. 예를 들어 촘스키의 형식언어학을 중심으로 하는 제2언어습득론과 인지언어학의 용법기반학습이론은 서로 다른 데이터와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3. 언어를 정의하는 일은 지난하다. 언어는 사고 일반과 떼어놓을 수 없기에 신경과학 및 심리학과 상당한 접점을 지니며 일상의 모든 영역에 스며 있기에 사회현상과의 인터페이스 또한 광범위하다. 즉 언어발달은 인지, 정서, 사회발달과 떼어놓을 수 없다. (맥락은 다르지만) 레이먼드 윌리암스의 지적처럼 언어를 정의하는 일은 언제나 인간존재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4. 이론가들 사이에서 언어습득, 언어학습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와 논쟁점이 있다면 이론가들과 대중 사이의 차이 또한 있다.

우선 이론가들은 자신의 주장을 이론적 지형의 한 부분으로 파악한다. 촘스키 언어학을 기반으로 한 제2언어학습 연구자는 촘스키의 인간과 언어에 대한 기본 가정들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외국어습득을 연구한다. 언어습득을 기술하는 용어 또한 변형생성문법과 최소주의 등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비해 인지언어학자들은 인지과학의 언어를 광범위하게 차용하며 통계방법론에 입각한 모델링을 활용한다. 촘스키에게 말뭉치(corpus) 혹은 언어 빅데이터는 별 의미 없는 데이터셋이지만 용법기반학습 연구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연구자료다.

5. 일반 학습자들에게 영어학습이론의 효용은 4번의 논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이들에게 이론은 언어에 대한 가정과 공리, 가설과 방법론 및 핵심 개념의 집합이라기 보다는 최고의 모범사례(best practice)에 가깝다. 자신의 언어학습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명제의 집합 정도인 것이다.

6. 연구자는 특정한 이론적 틀에서 아주 작은 것들에 천착한다. 논문의 내용 또한 (몇몇 대가들의 저작을 제외한다면) 토목공사가 아니라 커다란 빌딩의 창문 두어 개 정도를 갈아 끼우는 일이다.

이에 비해 일반 학습자들은 자기 삶의 일부, 즉 시간과 돈, 에너지를 투자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원한다. 이는 매우 합리적이며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언어가 무엇인지, 언어습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활용하는 통계 방법에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7. 따라서 연구자들의 활동은 특정한 철학적, 언어적 세계관 위에서 연구대상을 세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언어학습자들은 세계관이나 세분화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학습방법을 제시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조언을 구한다. 이 극단에 있는 질문이 (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는) “어느 학원 다니면 될까요?”와 “무슨 책이 좋아요?”다.

8. 따라서 연구자들과 일반학습자들 사이의 접점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이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제2언어학습 특히 영어학습에서의 ‘공론장’의 기능은 무엇인가? (혹은 ‘공론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담론의 생산-분배-전유 체계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계속)

영어학습의 내러티브

Posted by on Dec 4, 2017 in 삶을위한영어공부, 수업자료 | No Comments

한국사회에서 외국어학습의 내러티브는 성공과 실패, 투자대비 수익, 수준 도달 혹은 미달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학습의 궤적을 좁디 좁은 사다리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영어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미끄러지거나, 남들에 비해 더 위에 있거나 비슷하거나 아래 있다.

이같이 수직적인 서사의 틀(narrative template)을 다양한 경험, 재미, 만남, 감동, 깨달음, 멋진 순간들로 바꾸어 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놀고, 깨닫고, 발견하고, 웃고, 떠들고, 농담을 주고받고, 눈물지은 순간들로 만들어진 기억으로 바꾸기 위해 해야할 일 말이다.

수년 간 학생들의 영어학습 자서전을 읽으면서 갖게 된 화두입니다. 구상하고 있는 #삶을위한영어공부 원고의 핵심 문제의식이기도 하구요.

인풋 패러다임과 모국어 지식

한국 영어교육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단연 ‘인풋(input)’이다. 영어는 영어로 배워야 하고, 영어에 많이 노출(exposure)될 수록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요지다.

외국어 학습에서 언어입력(input)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타를 직접 경험하지 않고 기타를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외국어 이해에 있어 한국어 배경지식이 갖는 중요성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 것 같다. 외국어를 읽고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어에 대한 지식과 세계에 대한 지식 모두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한국어 자막의 효용일 것이다. 특정 외국어에 익숙한 학습자들의 경우에 잘 들리지 않던 뉴스 혹은 드라마도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면 들리는 경우가 많다. (진짜 들리는지 확인하려면 랜덤 샘플링을 통해 받아쓰기를 해보면 될 터이다.) 이는 외국어의 단어나 소리 자체가 청자에게 전달된다기 보다는 (한국어로 된) 배경지식과 상호작용하며 뇌에서 처리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종종 털어놓는 걸 보면 필자만의 경험은 아닌 듯하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상호작용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짐을 시사한다. 신경언어학의 연구는 사춘기 이후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경우 모국어(L1)와 외국어(L2)가 사뭇 다른 ‘회로’와 활성화 패턴을 통해 처리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자막이 외국어 이해에 실시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다수의 경험은 L1과 L2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자막을 켜고 영상을 볼 때 ‘들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실질적 이해이고 어디까지가 ‘이해했다는 착각’혹은 사후적 합리화인지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능숙한 학습자가 영미권 드라마를 볼 때엔 다음과 같은 점을 가정할 수 있다.

1. 영어 구어체에서 사용되는 어휘적, 문법적 패턴에 익숙한 편이다. (해당 언어의 일상어(colloquial language) 전반에 대한 지식)

2. 드라마의 전개상 해당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대략적인 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스토리라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추측(inference) 메커니즘 작동중)

3. 드라마의 소재가 특이하지 않다면 해당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대략적인 어휘셋(lexical sets)에 대해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된 어휘지식)

4. 드라마의 시즌이 6-7 정도 된다면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주요 인물들을 대화 패턴을 암묵적으로 익혔다고 볼 수 있다. (개별 인물에 대한 암묵적 지식)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자막을 켜고 볼 때 나의 뇌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언어 능숙도에 따라 어떤 변화 패턴을 보이는가?

이런 주제로 깊이있는 연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용적인 면에서도 “자막은 금기입니다”나 “무조건 자막 끄고 10번 이상 보세요”보다 나은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순화 시도에 대한 단상

소위 ‘언어순화’ 시도가 별 의미가 없지 않나 하는 주장에 대해 달았던 답글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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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보면 말씀하신 의견이 일리가 있습니다. “창녀” 혹은 “성노동자”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말이죠.

하지만 세 가지 점에서 이와 같은 의견이 어느 정도 조정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각각의 단어들이 어떤 담론장에서 사용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위에서 다른 분이 말씀하셨듯이 ‘근로자’와 ‘노동자’는 같은 대상을 가리킬지는 모르나, 둘 중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는 단순히 단어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담론장의 권력을 언어에 주류로 편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근로자’대신 ‘노동자’를 쓸 경우 이는 단어 대 단어의 관계가 아니라 담론장과 담론장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신경언어학적 고려입니다. 과연 사람들은 ‘창녀’와 ‘성노동자’를 들었을 대 똑같은 생리적 반응을 보일까요? 욕설이나 금기어의 존재를 보면 분명 특정한 단어들은 다른 단어들에 비해 격한 정서적/생리적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이런 면에서 특정한 단어가 다수의 언중에게서 보다 격한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이것이 사회변화의 걸림돌이 된다면 다른 단어의 활용을 검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기표의 교체가 갖는 중재(mediation)의 효과입니다. 최근에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하여 ‘편견 최소화 채용’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이 둘이 가리키는 것은 동일합니다만, 채용과정의 어떤 면을 프레이밍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나아가 이런 프레이밍은 정책결정자들이나 실무담당자들이 채용과정을 재설계할 때 일종의 중재적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보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줄이는 게 중심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즉, 언어의 변화는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른 심리적 요인들을 추동하는 매개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거에서 말씀하신 바를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무의미한 노력이 될 때도 있지만,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단초가 될 수도 있죠.

그렇기에 ‘언어순화’ 자체로 효용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고, 그에 수반되는 사회문화적, 제도적, 정치적 변화를 면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신 원리를 적용하려 하기 보다는 담론장과 권력의 문제를 심도있게 고려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 답글 —

말씀하신 대로 언어의 의미장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수반해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창녀’ vs ‘성노동자’의 경우 어떤 호칭이 긍정적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데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이안님께서는 계속해서 ‘창녀’를 쓰면서 다른 활동을 전개하는 것 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고, 저는 ‘성노동자’라는 말을 쓰면서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논쟁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런 명칭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많은 상황에서 사회변화의 가장 큰 동력은 그 명칭으로 호명되는 이들이었습니다.

참고
http://pjos.org/index.php/pjos/article/download/15179/13734

 

[의사소통행위의 언어학 a linguistics of communicative activity (LCA)] 어떤 글은 곱씹을수록 진가가 나온다. 별것 아닌 선언인 것 같지만 언어를 자기충족적이고 완결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활동으로 보게 된 것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고전적인 경제이론이 나름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인지와 정서라는 요인을 간과해 왔듯이 구조주의 언어학은 형식적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오용하고 배반하고 변화시키는 언어사용자의 사고와 감정 나아가 언어가 정체성과 권력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간파하지 못했다.

새벽에 간만에 온라인에서 이런 저런 논의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찾아본 챕터. 논문이 실린 책의 제목은 <Disinventing and Reconstituting Languages>이다.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37201231_Thorne_S_L_Lantolf_J_2007_A_Linguistics_of_Communicative_Activity_In_S_Makoni_A_Pennycook_eds_Disinventing_and_Reconstituting_Languages_pp_170-195_Clevedon_Multilingual_Matters

구글 번역 관련 수업 단상

1. AI의 시대 ‘영어교육이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리터러시 교육에 있어 모국어, 외국어, 정보기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유효하다.

2.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AI’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어교육만 위기는 아니다. 가르칠 영역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채널과 효율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3. 따라서 ‘영어교육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의사소통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온라인 커뮤니케이션과 소셜 네트워크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었듯이 통번역 기술의 발달은 문화간 소통의 지형을 빠르게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

4. 통번역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데이터 과학의 성과를 모두에게 손쉽게 제공하는 인터페이스의 고도화가 더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스와힐리어 문헌을 해독하고 아프리카 문화권의 정보를 손쉽게 가공할 수 있다면?

5. 그런 의미에서 중장기적인 통번역 기술의 발달을 영어교육 전공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문화간 소통의 획기적 증가라는 전지구적 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집필, 공부, 그리고 즐거운 딴짓

Posted by on Nov 11,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1. 바빠지면 딴짓을 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오늘은 예전에 집필을 고민했던 <삶을 위한 영어공부 (가제)> 목차안을 다시 들여다 보고 있다. ‘삶’과 ‘영어공부’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나온 기획인데, 대중서로서의 방향을 잡기도 어려웠고 필자로서의 내공 또한 형편없었다. 몇 해가 지난 지금, 분명 할 말은 많아졌건만 ‘내 말들이 가 닿을 수 있는 독자들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 ‘수많은 ‘전문가’들의 사회에서 또 하나의 소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감 또한 커졌다. 어떻게 써도 숭숭 뚫린 구멍이 보이는 증상은 도무지 치료하기 힘든데, 도대체 부끄럽지 않은 글이란 무엇일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책을 쓰는 일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단절을 받아들이는 행위라 느낀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타인을 염두에 두고 베어내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얽히고 섥힌 수십 년 길이의 등나무같은 생각들을 네모 반듯하게 깎아내는 일 말이다.

2. 해커톤처럼 리서치톤이나 라이팅톤, 리딩톤 같은 거 해도 재미있겠다, 라고 쓰려니 이제 그것도 피곤해서 못하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예전에 학술캠프 비슷한 데 가서 2-3일 줄창 책읽고 밤낮없이 세미나만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사람들이라면 단기간 집중 공부로 특정 주제를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게 가능하려면 비슷한 내공과 연구주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시공간을 공유해야 하는데 공부를 업으로 삼은 이들의 경제적 상황이나 일상생활의 패턴을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 음… 현실은 슬프지만 딴 생각은 재미있구나.

“해커톤”은 “hack(‘만들다, 파고들다’라는 뜻)”과 “marathon(장시간의 달리기)”의 합성어로, 혁신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기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직한 행사를 말한다. 해커톤은 보통 하루에서 일주일까지 지속된다.” 출처: http://theconnect.or.kr/wp/archives/914

 

 

어휘의 주관성 – ‘맵다’의 경우

Posted by on Nov 11,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연애 시절,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양파와 고추 몇 개가 찬으로 나왔다. 매운 걸 잘 못먹는 나는 짝에게 물었다.

“이거 매울까요? 겉으로 봐선 잘 모르겠네요. 드셔 보시고 괜찮은지 말씀해 주세요.”
“네네. (잠시 후) 아주 살짝 맵네요. 아주 맵진 않고요.”
“아 그 정도면 저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삭 소리와 함께 매운 맛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입안에 불이 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쌀밥과 물로는 해결이 안되어서 결국 식당을 나와 우유까지 사 마셨다.

언어가 주관적 경험의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함을 보여주었던 에피소드. “자유”나 “사랑”과 같은 추상적 어휘 뿐 아니라 “맵다”나 “짜다” 등의 감각 어휘도 개인차가 지대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 (나중에 보니 짝은 청양고추를 치토스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르르…) 그러고 보면 색상을 표현하는 어휘보다 맛을 묘사하는 어휘에 있어서 개인간 차이가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암튼, 매운 것 잘 드시는 분들. 청양고추 추가해서 드시는 분들. 여러분들은 세계의 표준이 아닙니다. (먼산)

덧: 참고로 생애 최강의 청양고추맛을 능가했던 건 라일락 이파리를 씹었을 때의 충격과 공포다. 궁금해도 참으시기를.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라일락 이파리를 대차게 씹었다가 실제로 죽는 거 아닌가 싶었던 1인.)

코퍼스 수업 준비하다가

Posted by on Nov 8,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1. 얼마 전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친구가 “이제 NLP(자연어 처리, Natural Language Processing)의 시대가 올텐데”라는 말을 던졌을 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글번역에서 시리까지 이미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분야이지만 언어연구,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본격적 전문가 시스템, 음성 인터페이스, 기계번역, 교육 등등이 만나는 지점에서 NLP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2. 기회를 놓쳤다기 보다는 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만, 몇 번의 기회가 나를 스쳐갔다. 1995년에 처음 인터넷을 접하고 98년 경에 원격교육/웹기반교육에 실무에 입문했고, 석사 논문 주제로 웹기반 학습을 다루었다. 워드스미스, 콩코던스 등 초기 NLP의 기초 패키지를 활용하고 교육하러 돌아다닌 건 2002년 이후 몇 년.

IT와 밀접하게 일한 게 정확히 10년이다. 시쳇말로 그 바닥을 떠나서 다른 일을 하고 싶었고, 운이 좋아 새로운 여정에 나설 수 있었다. 그다지 후회는 하지 않는데 왜일까 생각해 보니 IT 일하면서 몸 망가진 경험 때문인 거 같다.

4. 학위과정을 마치고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내가 느낀 건 크게 세 가지였는데, (1) 애매한 10년 경력을 떼어낼 도리가 없으나 (2) 그 경력과 전문성을 가지고 NLP와 관련하여 잘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으며 (3) 그럼에도 앞으로 관련 분야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5. 학생들과 3주간 코퍼스 언어학(NLP의 한 분야로서 언어학과 컴퓨터과학이 만나는 분야) 수업을 한다. 한 학기 정도는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은데, 거기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NLP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도움이 절실하다.

6. 땅치고 후회하며 갑자기 공부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전공과 관련하여 다시 배우고 싶은 것 한 가지를 꼽으라면 NLP 관련 지식 아닐까 싶다.

근데 RegEx는 몇 번을 공부했는데 맨날 까먹는구나. ㅎ

영어교육과 커리큘럼 단상

내 맘대로 영어교육과 학사 교과과정을 짤 수 있다면 1년간 한국어로 된 형식언어학, 인지언어학, 응용언어학, 사회언어학, 및 자연어처리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히고, 해당 분야의 ‘대가’들이 대중을 염두에 두고 만든 다양한 강연 콘텐츠를 플립러닝 방식으로 학습하게 할 것이다. 1년 동안 기반을 쌓고 그 위에 3년 동안 영어교육을 쌓아도 괜찮다 싶다. 아니 그런 접근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고 본다.

교육’문제’ 단상: 시민과 사회, 학교 구성원과 학교

Posted by on Nov 2,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오늘 한 학생이 수업 시간에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과제로 한 젊은 교사와 짧은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이 최소 6번 나왔다고, 3-4 페이지 정도의 짧은 전사본에서 높은 빈도 같다고 했다.

나는 각각의 “어쩔 수 없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데이터를 좀더 들여다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짧은 대화에서 6번이 나왔다면 그가 느끼는 무력감은 상당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어쩔 수 없이”의 원인이 수능과 같은 국가 평가 체제인지, 새로운 교육실험에 대한 주변 교사들의 은근한 반대인지, 자신이 원하던 교육의 이상을 펼쳐낼 수 없는 학생수 때문인지, 학생들과의 관계 때문인지, 해당 학교의 사회경제적 특수성 때문인지, 이들의 다양한 조합 때문인지 등은 저 어구로 판단할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인터뷰 대상 교사의 특유한 말버릇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추정을 거둬들이긴 힘들다.)

집에 오다가 교사들이 학생들의 수준차에 대해서 언급할 때 종종 나오는 표현이 떠올랐으니 바로 “한 반에 ABC도 모르는 애들이랑 ~한 애들이 같이…”였다. 이 표현은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이유로 제시되곤 한다. ‘그렇게 다른 학생들이 한 공간에 있는데’ 뭘 어쩌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복잡해진다. 이런 친구들이 함께 공부한다는 게 문제인가? 아니면 ABC를 못하는 학생이 있다는 게 문제인가? 아니면 이런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는 교사가 문제인가? 아니면 이런 상황을 ‘내 손해’로 받아들이는 일부 학생들이 문제인가? 아니면 그런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교수전략을 전해주지 못한 교사양성 및 재교육 기관의 문제인가? 국가교육과정, 교과서 체제, 수능 중심 수업의 문제인가?

혹 이 모든 것을 손쉽게 ‘문제’라고 명명하는 것이 진짜 문제 아닐까?

딜레마다. 당면한 수업의 문제는 교실 안에서 해결해야 하지만, 경제 및 사회문화적 힘에 의해 형성, 유지, 강화, 완화된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기 전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교실’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준별 수업(tracking)도 개별화 교수(differentiated instruction)도 완벽할 수 없다. 교사 개인의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외면하고 노동을 착취하려 함에 다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문제’라고 불리는 것들이 해결되어야 할 대상이라기 보다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이해하고 개선하려는 노력 속에서 논의되는 수많은 문제들은 개념적 무게를 잃었을 뿐 아니라 실천을 위한 방향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가 너무 많아 모든 게 문제라고 뭉개버리는 일이 적잖이 발생한다. 결국 ‘문제’의 문제가 현실의
문제를 가리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 말을 ‘문제들이 문제가 없다’로 알아들으시는 이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못난 기우로 괄호 안에 덧말을 던져 놓는다.)

학교는 불완전한 공간이고, 그 불완전한 공간이 ‘덜 나쁜 곳’이 되게 만드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완벽에 대한 기대를 접고 ‘덜 나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란 무얼까. 이상적이지 못한 사회에서 이상적인 학교를 꿈꾸는 것, 혹은 학교만은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모순임을 인정한다면, 시민과 사회의 관계를 학교 구성원들과 학교에 대입하면서 많은 이슈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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