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학습 잡감

Posted by on May 16,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을 이야기한다. 학습자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점검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에서 학습하는 주체의 실질적 권력, 학습의 목표와 대상을 정의하는 주체와 이를 받아안는 주체 사이의 관계, 자기주도의 범위 등이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습을 위한 과업은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그 안에서 ‘자기주도’를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야간자율학습’은 자율이 아니며, ‘자기주도적으로 하루에 단어를 100개씩 외우라’는 주문은 타인의 욕망에 학습자를 종속시킬 뿐이다.

결국 자기주도의 핵심은 학습자가 주체로 나설 수 있는 맥락과 과업의 창조에 있지, 주어진 맥락과 과업 하에 맞는 주체성의 생성에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어설픈 자기주도학습 담론은 주어진 구조의 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순응능력을 요구할 뿐 주체로서의 학습자가 지닌 욕망과 탈주, 창조적 열망을 받아안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자기주도학습 담론의 핵심에는 학습전략 훈련이 아니라 학습을 둘러싼 권력배분의 문제가 놓여 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색깔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으면 보지 못한다?

Posted by on May 14, 2019 in 과학,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색상을 가리키는 언어가 없다면 그 색상을 볼 수 없다는 취지의 컬럼이 공유되고 있는데… 컬럼의 내용상 기 도이처의 저작인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를 그대로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즐겁게 읽은 책이네요.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가 없으면 인지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워프 가설에 대응하는 주장입니다. 흔히 언어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이라고 불리지요. 하지만 이런 강한 언어결정론은 학계에서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다만 언어의 사용이 인지과정을 세밀하게 조정하거나 특정 대상의 개념화에 다소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의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또한 논쟁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요.

학계의 논의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름 모를 색깔들을 꽤 많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립스틱을 놓고 색깔을 대보라 하면 어버버 하겠지만 서로 다른 색상의 립스틱을 구별하는 일이 아주 어렵진 않겠지요.

컬럼에서는 마치 언어학계의 중론인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이름을 모른다고 색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 근거가 희박한 주장입니다. 다만 특정한 이름을 붙여 색상들의 스펙트럼을 특정한 범주로 분류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관련 색상을 잘 구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Blue”라고 통칭되는 색상이 러시아어에서는 goluboy와 siniy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미국인들과 러시아인들에게 goluboy와 siniy 경계의 색상을 보여주고 이를 구별하라고 하면 러시아인들이 미국인들에 비해 구별하는 속도가 미세하게 빠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이 저 아래 중간 사각형 두 개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지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동물들은 색상을 가리키는 말이 없어도 자신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색상을 구별합니다.

덧. 컬럼에서 언급되었듯 기 도이처 또한 색상용어가 등장하는 순서가 일정하다는 것을 말하긴 했지만 이 분야를 개척한 사람은 Brent Berlin과 Paul Kay입니다. 1969년 기념비적 저서인 <Basic Color Terms: Their Universality and Evolution>을 내서 색상과 인지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이 저서에 대한 설명은 아래 위키 페이지를 참고하십시오.

https://en.wikipedia.org/…/Basic_Color_Terms:_Their_Univers…

덧2. 일반인 수준에서 색상용어에 관한 학계의 논의를 정리한 영상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Vox 미디어에서 제작한 <The surprising pattern behind color names around the world> 입니다.

덧3. 아래 색상 이미지는 Lera Boroditsky의 테드 강연 <How language shapes the way we think>에서 가져왔습니다.

파워포인트 잡감

수업에서 파워포인트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나의 말에 집중하길 원하는 마음에서인 듯하다.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교감하며 수업하길 원한다.

TED를 책임지고 있는 크리스 앤더슨의 말을 따르자면
강연에서 청중은
두 가지 인지적 아웃풋(cognitive output)을 접한다.
다시 말해 두 가지 채널을 통해 연사의 강연을 경험한다.
하나는 시각, 다른 하나는 청각이다.

파워포인트와 같은 비주얼이 없을 때
학생들의 집중력은 하나의 대상 즉 강사에게 맞추어진다.

하지만 파워포인트가 등장하는 순간
그들의 시선은 파워포인트로 향하고
귀로는 강사의 설명을 듣는다.
인지 채널이 갈라지는 것이다.

훌륭한 프리젠테이션이라면
이 두 채널의 정보가
완벽하게 (영어로는 seamlessly 정도?) 통합된다.
말과 슬라이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협력하며 더 훌륭한 프리젠테이션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슬라이드를 읽는다.
슬라이드의 정보와 강사의 말을 실시간으로 싱크하려 든다.

이런 경향은
텍스트로 가득한 슬라이드에서 극대화된다.
학생들이 슬라이드를 바쁘게 흝어보는 동안
선생의 말은 온전히 소화되지 못한다.
때로 슬라이드의 정보를 강사의 말 위에 놓는다.
두 가지 정보 채널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슬라이드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수업을 흘려 듣기도 한다.
가끔 연수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파워포인트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이 꼭 있다.
내 경험상 그분들이 파워포인트를 다시 보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면에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일은
할 말을 정하는 스크립팅과
슬라이드 만들기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해당 프리젠테이션의 특성을 파악하고
주어진 시간에
청중의 주의(attention)의 흐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프리젠테이션의 핵심 내용을
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것은
대본과 시각자료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위에 청중의 주의를 배치하는 일이다.

디자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UI의 문제가 아니라 UX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이 단지 빌딩의 구조가 아닌
인간과 구조 ‘사이’의 인터랙션으로 이해되듯
프리젠테이션은 ‘전달’이 아닌 ‘수용’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슬라이드 없이 대단히 수업을 잘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만 학생들이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집중하여 이야기를 듣길 원하며
그러기 위해 그 이야기를 준비할 뿐.

결론은
적어도 나의 경우
슬라이드를 준비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준비하는 게 낫다고 본다.

양보절, 그 양보 맞습니다

Posted by on Apr 26, 2019 in 단상, 수업자료, 영어, 집필 | No Comments

오래 전 한 영어 강사가 양보절을 설명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예시를 잘 보여주더니 하필 마지막에 “그런데 이거 ‘니가 양보해’의 그 ‘양보’ 아닙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더군요. 최근 비슷한 설명을 다시 한 번 듣게 되어서 짧게 글을 남깁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양보절’의 ‘양보’는, ‘이번엔 네가 양보해’의 그 양보가 맞습니다. ^^

1. 우선 다음 사전에서 ‘양보’를 찾으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양보 [讓步] 1.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여 자기의 주장이나 생각을 굽히고 그의 의견을 좇음. 2. 다른 사람에게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내주고 물러남.

2. 한편 양보절을 영어로 표현하면 concessive clause이고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온라인 맥밀란 사전)

a subordinate clause that begins with a conjunction such as ‘although’, ‘while’, or ‘whereas’, and makes a statement that is unexpected in some way, or contrasts with information in another clause.

여기에서 concessive의 명사형에 해당하는 단어는 concession이고, 이의 뜻은 ‘양보, 인정, 양도’ 정도가 됩니다. 즉, 그 양보가 그 양보인 것이죠.

3.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 용어로 혼란을 겪습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양보’와 문법의 ‘양보’를유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비고츠키가 말한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 사이의 차이와도 연관이 됩니다.

4. 이를 고려하여 ‘양보절’을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1) Though, although, even if, whereas와 같은 접속사들은 ‘양보’를 나타냅니다.

(2) 이렇게 양보를 나타내는 말이 붙는 문장은 영어로 ‘conceded’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3) 예를 들어 Although the politician was very selfish, he was willing to help the victims.를 봅시다. “the politician was very selfish” 앞에 Although가 붙었으니, 이 문장의 내용은 인정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정된 후 다음에 나오는 절에 (비유를 하자면)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는 점입니다. 위의 경우 양보의 대상은 주절인 “he was willing to help the victims.”죠.

(4) 이를 해석하면 ‘그 정치인은 비록 매우 이기적이었지만, 희생자를 기꺼이 도왔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는 매우 이기적인 인간이었다’는 내용 바로 앞에 ‘들러붙은’ Although 덕에 ‘희생자를 기꺼이 도왔다’는 문장에 양보를 해야 하고, 그 결과 주절의 내용이 훨씬 더 큰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5) 이렇게 하위절을 ‘양보’하면, 의미 강도(intensity)의 차이가 더 크게 납니다. 그래서 대조의 의미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5. 결론적으로 양보절은 특정한 절을 하위절로 만들면서 주절의 내용과 반대(the opposite)되거나 예상치 못한(the unexpected) 것으로 개념화합니다. 따라서 “He is not shy. He is very quiet.”와 같이 두 개의 독립적인 문장에서는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무게감 있는 것인지 명시적으로 알 수 없지만, “He is not shy although he is very quiet.”라고 하면 “매우 조용하지만 수줍어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수줍어하지 않는다는 게 문장의 주요 포인트가 되는 것입니다.

덧. 결국 한국어 ‘양보’와 영어 ‘concession’이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또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파생하는 것 같습니다. 추측컨대 일본을 통해 문법용어가 들어오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고요.

#단단한영어공부 #예전글업데이트

기능어의 분포

언어에서 빈도수 최상위를 차지하는 단어들은 대개 기능어(function words)이다. 영어의 경우 대표적인 기능어로는 관사, 접속사, 대명사, 조동사, 전치사 등이 있다. 참고로 초기 영국 말뭉치 언어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British National Corpus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the, of, and, to, a, in, that, it, is, was 순이다. (좀더 세심한 데이터 작업을 거치면 is와 was가 다른 be동사형과 함께 하나로 묶여야 하지만 그 경우에도 10위는 대명사인 “I” 몫이다.)

대규모 말뭉치의 경우 하위 말뭉치의 장르에 따라 이들의 분포가 사뭇 달라진다. 일례로 롱맨 코퍼스의 경우 대화문 말뭉치에서는 대명사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학술적인 글에서는 전치사와 관사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이러한 차이는 학술적인 글과 면대면 대화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에서는 많은 정보들이 공유된 채 대화가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명사가 계속 새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특정한 대상을 대명사로 지칭하는 빈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학술적인 글에서는 ‘글’의 특성상 정보가 공유된 채로 담화가 흘러가지 않는다.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기에 명사가 자주 사용되는 것이다. 아울러 많은 정보들이 명사구로 표현된다. 따라서 명사와 짝을 이루는 관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전치사가 포함된 복합명사구(e.g. the adaptation of the method within a new context)의 쓰임이 면대면 대화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따라서 전치사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참고로 wordcount.org를 기준으로 가장 빈도가 높은 일반명사는 time(66위)이고 그 다음은 people (81위)이다. <어머니와 나>에서도 언급했듯 빈도수만으로 볼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사람인 셈인데, 그저 우연으로 보기에는 가볍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데이터와영어교육

인지언어학 이야기 49 – 관사 (1)

Posted by on Apr 22, 2019 in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3)

“Everything should be as simple as it can be but not simpler!” (모든 것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실제보다) 더 단순하면 안된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저는 이 인용구를 볼 때마다 문법, 그 중에서도 관사에 대한 흔한 설명방식 중 하나를 떠올립니다.

처음 나오면 a, 그 다음 나오면 the (?)

중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문법책에서 관사를 처음 접한 저는 복잡한 규칙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손을 들고 질문을 했죠.

“선생님, a랑 the랑 언제 써야 하는지 헷갈리는데요.”“그거 많이 헷갈리지. 근데 이것만 기억해. 뭔가를 처음 쓰면 a고 그 다음에 받을 때는 the로 받는 거야. 그러니까 바나나를 처음 말할 때는 a를 쓰고 그 다음에 그걸 다시 받으면 the를 쓰면 되지. 쉽지?”“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사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는 했지만 선생님의 답변이 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문법책을 봤을 때 선생님의 설명과 벗어나는 예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천체를 나타내는 the moon, the universe, the sun 등의 표현입니다. 이들은 처음 언급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계없이 ‘the’와 함께 쓰입니다. 이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의 어원과 이에서 파생한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a와 the의 어원, 그리고 개념적 특성

영어사를 살피면 부정관사 a/an이 ‘하나’를 나타내는 말 one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는 “다수의 …”를 상정하고 (즉, an apple은 multiple apples가 있음을 전제하고), 이 다수가 이루는 집단(group)의 한 개체임을 표시합니다. 따라서 a/an의 경우 셀 수 있는 명사 앞에 나오게 되지요.

이에 비해 정관사 the의 주요 역할은 명사를 특정(to specify)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어원을 살핌으로써 그 의미를 보다 상세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The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고대영어의 중성 지시어 þæt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정관사 the 뿐만 아니라 지시대명사 that으로도 진화합니다. 의미상 정관사 “the”는 ‘저것’을 나타내는 말에서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다’ 함은 ‘콕 짚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화자가 사용하는 명사가 청자에게도 알려져 있어야 합니다. 청자가 모르는 명사를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가 ‘저 책 좀 줘봐.’이라고 말할 때에는 ‘저’가 가리키는 것이 청자가 특정할 있는 물리적 영역에 있습니다. 말하는 이는 ‘저’라는 말을 청자가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요. 이같은 지시의 역할이 인식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 바로 정관사 ‘the’가 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가 “the”를 붙여 말하는 명사는 청자의 인식 속에서도 특정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sun이나 moon 나아가 universe 등 천체를 나타내는 말은 언제 쓰이건 대화자 모두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해는 유일한 해이고 달은 유일한 달이며 우주는 유일한 우주이니 다른 걸 상상할 수 없죠. 처음 나오느냐 두 번째 나오느냐에 관계없이 대화자 모두가 알고 있다고, 다시 말해 화자 뿐 아니라 청자 또한 ‘아 그거’라고 특정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the와 함께 쓰입니다.

한 가지 더할 것은 특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명사는 가산성이나 단복수성과 관련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the를 붙여 특정할 수 있는 명사는 셀 수 있는 명사일 수도 (the apple), 셀 수 없는 명사일 수도 (the money) 있습니다. 또한 단수건 복수건 전혀 상관이 없기에 the apple이나 the apples 모두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a moon’이나 ‘a universe’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달 vs. 위성, 유일한 우주 vs. 여럿 중 하나의 우주

말씀드렸듯이 현재 지구에서 ‘달’이라고 하면 하나의 달을 떠올립니다. 토끼가 절구질을 하고 있는 그 달이죠. (여기에서 지구를 돌고 있다는 다른 달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달’이라면 “the moon”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구에서 달을 가리킬 때 반드시 the를 붙여서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달의 양태는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의 여러 모양 중 하나인 ‘큰 보름달’은 ‘a great full moon’이라고 할 수 있죠. ‘a blue moon’이나 ‘a half moon’이라는 표현도 가능하구요. 여러 형태와 색깔을 가진 달 중에 하나를 가리킨다면 ‘a ~ moon’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moon’이 가능한 경우가 또 있습니다. 지구인은 유일한 달을 이야기하므로 ‘the moon’으로 쓸 수밖에 없지만, 달이 여러 개인 행성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목성에는 달이 79개가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라면 “The Earth has a moon while Jupiter has 79 moons.”라고 쓸 수 있습니다. “목성은 달이 79개이지만 지구는 달이 하나다.”라는 의미인데, 이 경우 ‘moon’은 평소 말하는 달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위성(satellite)의 뜻이 됩니다. 특정될 수 없는 일반적 개체가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주는 보통 ‘the universe’이지만 ‘a universe’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중우주론을 주장하는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이 우주 외에 다른 우주들도 있지요. 이 경우 현재 우리가 지각하고 살아가는 우주는 여럿 중 하나의 우주 즉, ‘a universe’입니다. 다른 우주들을 포함해서 ‘universes’라는 말을 쓸 수 있고요. 따라서 복수의 우주를 가정하는 이론체계 안에서는 “multiple universes”라는 표현이 얼마든 가능한 것입니다.

정관사, 부정관사, 그리고 총체와 가능성으로서의 세계

이와 같은 논리는 세계를 나타내는 world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예문을 보시죠.

a) The world is full of sorrow.
b) We want a better world.

위의 두 예문에서 ‘world’ 앞에 서로 다른 관사가 쓰였습니다. a)에는 정관사 the가, b)에는 부정관사 a가 쓰였죠. 왜 이런 차이가 오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세계’라고 말할 땐 ‘the world’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일한, 그리고 특정한(specific)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b)에서 ‘world’는 가능성으로서의 세계입니다. 지금 눈앞의 세계는 하나일지라도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가능태는 수없이 많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a world’입니다. 그렇기에 ‘a better world’ 뿐 아니라 ‘a greater world’, ‘an ideal world’, ‘a miserable world’ 등의 표현도 가능하죠.

달은 하나이지만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세계는 하나의 총체이지만 가능성으로서의 세계는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유일하게 정해진 것(definite)처럼 보이는 것들도 결코 특정한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indefinite) 것입니다. 어떤 틀에서 개념화되느냐에 따라서 그 인식론적 지위(epistemological status)가 달라지고, 함께 쓰이는 관사도 바뀌는 것입니다.

관사, 인식론적 지위를 트래킹하는 시스템

이렇게 보면 관사는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명사의 인식론적 지위를 따라가는 일종의 트래킹 시스템(tracking system)입니다. 즉, 명사에 ‘꼬리표’를 달아 말하는 이가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관사를 쓰는 경우 화자는 청자가 자신이 말하는 명사를 특정(specify)하여 따라올(track)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부정관사를 쓰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 개의 개체 중 하나라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자세히 논의하지 않았지만 관사를 아예 쓰지 않는 무관사(zero article)의 경우도 나름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저의 예전 영어선생님이 신정보/구정보의 틀로 부정관사와 정관사 사용을 구분했던 기술방식보다 훨씬 정확하게 관사의 사용을 포착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따르자면 제 중학교 때 선생님의 설명은 “simpler(실제보다 더욱 단순화한)”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임기응변은 될지 모르지만 문법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언어현상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학생들을 좌절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듯 말입니다.

 

영어 관사와 화자의 의도: 아래 글에 이어 쓰려고 하다가 길어져서 쓰지 못한 이야기

관사의 쓰임을 신정보/구정보로 설명하는 방식은 또 하나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관사의 쓰임을 온전히 텍스트 안에서 설명하려고 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소설의 첫 문장을 “I hugged the tree.”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죠. 이 경우 전통적인 구정보/신정보 관점에서는 소설의 첫 문장이므로 “the tree”가 어색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문장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요.

사실 작가는 독자가 이 문장을 처음 읽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쓰는 책이니 모를 수가 없죠. 하지만 의도적으로 정관사를 쓴 것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들에게 ‘나무’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면 “the tree”가 무난할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나무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내려 할 경우에도 “the tree”가 ‘a tree’보다 적절한 선택이겠죠. 이어서 “I smelled the soil and walked with the dogs. I watched the river a while, serene and weary.” 같은 문장을 제시한다면 이들 명사가 하나의 앙상블(ensemble)을 이루어 더 큰 호기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이 곳이 대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자아내는 것이죠.

따라 이런 경우 the tree 자체가 신정보냐 구정보냐의 문제가 아니라, 화자(작가)가 특정한 명사를 신정보로 개념화하느냐 구정보로 개념화하느냐의 문제가 더욱 중요합니다. 즉 화자는 정관사라는 도구를 통해 의도적으로 ‘알려진 것인양’ 포장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 독자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개체들을 연달아 the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추후 설명될 것’이라는 언질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화자의 의도를 명확히 하고 수사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처음 등장하는 명사에도 the를 얼마든지 붙일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The의 선택 여부는 단지 텍스트 내의 규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사용자의 의도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It is … that 강조구문

It is … that 강조구문, 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각각의 요소에 동일한 조명이 비춰집니다. 그런데 때로 특정한 요소를 강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해당 요소에 스포트라이트(spotlight)가 가고 다른 요소들은 조금 어두운 조명이 비춰집니다.

예를 들어 John bought a gift for her mother at the restaurant yesterday. 라는 문장에서 “John”에 조명을 세개 ‘때리고’ 나머지는 조금 약한 조명으로 갈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영어에서 이 ‘조명’의 역할을 하는 것이 “It is … that” 강조구문입니다. 그래서 저 “…”에 들어가는 요소가 강한 빛을 받게 되지요. 여기에는 John도, a gift도, for her mother도, at the restaurant도, yesterday도 들어갈 수 있고요.

조명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It is … who”는 인물 전담 조명이고요. “It is … where”는 장소를 전담하죠. “It is … when”은 시간을 전담합니다. 이에 비해 “It is … that”은 만능이라 두루두루 쓸 수 있답니다. 좋죠?

아 한 가지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사실 “It is … that”이 만능은 아니랍니다. 왜냐구요? “bought”를 강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주는 많은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거죠.

동사를 강조하는 방식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동사 앞에 “do” 동사를 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저 문장을 강조하면 “John did buy a gift for her mother at the restaurant yesterday.”와 같이 쓰면 됩니다. 과거형이라 did를 썼고요. 조동사 뒤의 동사는 원형, 그래서 buy가 되었죠.

자 이제 무대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 중 원하는 대상을 골라 “조명을 때려주는” 작업을 할 수 있겠지요? 조명을 적절한 요소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으니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적용해 보세요. ^^

유튜브의 부상과 전통적 리터러시

 

인류의 역사에서 읽기는 기껏해야 수천 년 지속되어 온 관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읽기가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의 일로 몇백 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실 한국에서 리터러시가 대중화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길게 잡아야 20세기 초 정도로 보아야 한다.

듣기와 말하기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이지만 쓰기와 읽기는 그렇지 않다. 철저히 문화적인 산물이며 학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문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글자가 없어도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유튜브의 부상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인류 역사상 짧디 짧은 읽기의 시대가 말하기에 ‘지분을 넘겨주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테크놀로지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기 보다는 말하고 듣기만큼 오랜 경험을 이전에 가능하지 않았던 스케일로 펼쳐놓은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이) 언급한 지분의 이양 속도가 예상 외로 빠르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활자 미디어의 죽음을 논하는 것은 과함을 넘어 엄살에 가까운 일이지만, 새로운 세대들이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동영상 플랫폼에 급속히 포섭되고 있다는 점은 반박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들이 있다. 먼저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 메신저와 소셜미디어에 글쓰기를 많이 한다. 엄밀한 통계를 잡을 수는 없지만 글은 쇠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융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유튜브의 많은 영상들은 글을 기반으로 한다. 말의 외피를 입고 있으되 아이디어 수준에서 영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에서 다양한 텍스트들이 개입하는 것이다. 멋진 말의 기반에는 대개 깊은 글이 있다.

세째, 유튜브의 적지 않은 영상들은 ‘하이브리드 모드’이다. 말이 주요한 매체로 작동하지만 자막이나 참고자료 등에 문자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튜브를 마냥 ‘음성언어’로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고급’ 커뮤니케이션은 글로 매개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다. 멀티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논문을 내는 곳도 있지만 이는 예외중에서도 예외이다. 논문은 글로 구성되어야 하고, 이 글을 써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리터러시 훈련이 필수다.

이렇게 놓고 보면 ‘리터러시의 몰락과 음성/영상 플랫폼의 부상’이라는 구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문자 기반 리터러시냐 유튜브 리터러시냐는 이분법 또한 현재의 상황을 적절히 포착하지 못한다.

거의 25년 전 Harvard Educational Review에 발표된 뉴 런던 그룹의 <멀티리터러시> 논문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여전히 유효한 시각을 제공한다. (밥먹으러 가야 해서 여기까지만)

#삶을위한리터러시 #유튜브리터러시

복합관계부사?

문법용어를 사용할까 말까를 일률적으로 정할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이 개념이 복잡해지는 경우에는 특히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한 가설이다.

고등학생 쯤 되면 ‘다들 알겠지’하는 게 영어의 8품사다. 그런데 품사에 대한 지식에도 적잖은 편차가 있다. 예를 들어 동사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알고 있다. 명사도 꽤 많은 학생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부사는 어떨까? 과연 모든 학생들이 부사를 동사나 명사와 같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대명사와 관계대명사에 대한 이해에도 차이가 있다. 대명사를 아는 학생들은 꽤 많지만 관계대명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은 그보다 적다. 대명사는 명사와의 관계에서 쉽게 설명되고 빈도도 높지만, 관계대명사는 ‘선행사’와 ‘생략’, ‘문장의 연결’ 등의 개념들과 엮여 복합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관계대명사와 관계부사는 어떨까? 경험상 전자에 대해 알고 있는 학생이 후자를 아는 학생들보다 훨씬 많다. 빈도 또한 전자가 훨씬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합관계사’라는 말은 어떤가?

복합관계사는 복합관계대명사와 복합관계부사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복합관계대명사를 알기 위해서는 관계대명사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복합관계부사를 알기 위해서는 관계부사를 알아야 한다. 관계부사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부사에 대한 기본 이해가 필수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일부 선생님들은 ‘복합관계사의 이해’를 수업목표로 두고, ‘복합관계사’라는 말을 사용해서 수업을 진행한다. 영어를 꽤 잘하는 학생, 사교육으로 다져진 학생들이야 이 개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상당수의 학생들은 ‘복합관계사’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급기야 “복합관계사는 복합관계대명사와 복합관계부사로 분류할 수 있다”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안드로메다로 혼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문법용어의 사용 여부는 오랜 기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보통 영어학습의 수준과 연령에 따라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가면 ‘용어 자체의 복잡성’을 고려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이 ‘복합관계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일부는 수업 안으로 들어오길 거부하기 때문이다.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수업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삶을위한영어공부 #단단한영어공부

프레이리 – MOVA의 문해교육

MOVA는 20-30명 단위로 문해 그룹을 조직했고, 그 그룹이 이끌고 지원할 슈퍼바이저를 선출했다. 그리고 직접 수업을 진행할 문해 활동가(리터러시 워커)와 트레이너, 모니터 요원들을 두었다. 그리고 프레이리의 ‘생성어와 생성 주제’에 영향을 받아 생성적 조사(generative investigation)를 진행하고, 의미 있는 상황에 대한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대화로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지식을 집합적으로 재생성했다(collective regeneration). 실제 수업은 토론-쓰기-읽기-쓰기-토론의 순환구조로 이루어졌다. 학습자들의 삶에서 의미 있는 주제에 대해 그룹 토론을 하고, 토론에서 여러 어휘들을 끄집어 내고, 이를 글로 써 보고 난 뒤 그것을 읽고, 다른 학생들의 단어와 문장들을 써 본다. 그러고 나서 또 새로운 주제를 논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문법 구조나 음운 조합은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이 과정을 통해 빈민 지역의 현실, 인종주의, 미디어 등의 주제들을 토론하면서 학습자들의 상식을 변화시켜 나갔다. MOVA는 시 정부와 사회운동을, 그리고 교육, 문화와 정치를 연결하는, 과거 MCP와 PNA의 전통을 다시 부활시킨 문해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22-23쪽.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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