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4

1. 녹음기술은 미디어로서 개인을 확장시켰다. 나의 목소리가 나를 떠나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녹음된 음성은 어디든 결합할 수 있다. 나의 목소리가 타인의 입에 올려질 수도 있고, 더빙의 재료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처럼 미디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로부터 탈각된(disembodied) 목소리를 활용하여 ‘자연스런’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미디어, 특히 애니메이션을 통해 갖게 되는 특정한 인종, 계급, 성별, 연령, 직종 등에 대한 이미지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을 시각적으로 추상화하고 청각적으로 매개하여 구성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복사’한 것이 아니라, 탈신체(disembodiment)와 추상화, 재조립(reassemblage)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2. 좀 우습기도, 멋적기도 한 이야기지만 중고등학교 때 영어 발음을 네이티브랑 똑같이 하려고 애쓰는 애들 보면 왠지 멀리하고 싶었다. 영어는 좋아하는 과목이었고 나름 잘하기도 했는데 발음에 대해서만큼은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괜한 고집을 피운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던 것 같다. 그땐 멀리 보지 못해서 내가 응용언어학을 하게 될 줄 몰랐던 것.

나의 이 멍청한 (하지만 나름 귀엽다고 우기고 싶은)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발음은 개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 말을 열심히 발음하고 있으면 뭔가 뇌가 꼬이는 듯하고 내 안에서 다른 내가 나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나의 목소리와 발음은 나의 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3. 사실 우리는 외국어 뿐 아니라 모국어를 사용할 때도 발음에 따라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차별한다. 발성이 좋고 발음이 정확한 — 흔히 말하는 아나운서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발음이 명확치 않은, 즉 “말을 꾸역꾸역 먹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발음이 좋으면 목소리마저 청아하게 들린다. 목소리와 발음은 해당 개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발음은 사회문화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지표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과거 대부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백인 성우가 더빙을 맡았다. 당연히 악역은 히스패닉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발음이 주였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의식중에 인종차별적 마인드를 키워갔다. 실로 무서운, 여전히 진행중인 현상이다.

4. 위의 1에서 서술한 바를 적용하자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특정한 집단의 신체를 추상화하여 비주얼로 만들고, 여기에 특정한 계층을 은밀히 가리키는(index) 목소리를 입힌다. 이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캐릭터를 특정한 목소리 자질과 연관시키고, 이것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특징과 또다시 연관된다.

물론 이러한 결합이 즉흥적이거나 기계적인 것만은 아니며 상당한 사회문화적 고증을 거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을 쏟아붓더라도 애니메이션이 재현하는 인물(비주얼+사운드+캐릭터적 특성 등)이 일정한 본질화(essentalization: 사람의 특징 한두 가지로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일. ‘백인은 이렇다’든가, ‘이주노동자들은 이렇다’, 나아가 ‘시츄는 다 …하지’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남.)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강의노트 1

Posted by on Mar 18, 2020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1. 학생들로부터 쪽글을 자주 받는다. 읽기자료를 꼼꼼히 읽고 간단히 요약한 다음 자신이 이해한 바, 흥미로운 부분,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 경험과의 연계, 교육현장에의 적용 등을 논의해 보라는 과제다. 내 수업의 절반은 쪽글에 대한 피드백과 이를 기반으로 한 토론이다.

2. 재미있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읽기자료가 제시되었을 때 ‘어떻게든 이해한 척’하려는 학생과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학생’이 갈린다는 것. 쪽글을 읽다가 보면 전자의 학생이 생각보다 많은데 (나도 대학원생 때 종종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후자의 학생이 훨씬 반갑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의문을 해소하려는 모습이 ‘나 읽었고 이해했거든?’ 같은 제스처보다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3. 응용언어학과 영어교육의 특성상 순수히 이론에 그치는 논의는 반쪽의 느낌을 준다. 결국 이론과 현실이 만날 때 강력한 ‘프랙시스(praxis)’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론을 이해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현실과 결합시키려는 모습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이 설익은 지식을 용감하게 적용하려 들지 않도록 적절한 가이드를 주는 게 나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

4. 아무튼 이번에도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을 맡게 되었다. 첫 시간은 Dell Hymes의 1972년 글과 2015년 강현석 선생의 글을 통해 사회언어학의 초기 방향성과 최신 연구동향을 비교하며 진행한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사회언어학의 진화는 진행형이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한 학기가 되길 빈다.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r 9, 2020 in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1. 감염병 확산 시기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가 화두다. 지금 꼭 필요한 실천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평소에도 한번도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빈부가 갈라놓은 사회계층. 반듯하게 구획된 공간 안에 ‘갇혀’ 아예 서로 스칠 일이 없는 이들. 장애인 시설을 끝까지 반대하는 일부 주민들. 그런 것들에 마음이 가 닿으면 이 사회로부터 정말 멀리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2. “착한 임대인 운동”에 찬성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정책적 사안에 ‘착한’이라는 용어가 붙는 건 마뜩치 않다. 개인적으로 어떤 임대인을 ‘착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정부정책에 ‘착한’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게 어떤 의미와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다. 착한 가격, 착한 세일, 착한 집안, 착한 기업, 착한 임대인… 도덕적 평가의 언어가 자본과 정책에 결합하는 건 정확히 직면해야 할 문제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3. 이번 학기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영어교육과정> 두 과목을 강의한다. 첫 주 수업은 16일에 시작된다. 어제와 오늘 양일에 걸쳐 1교시에 관한 준비사항을 상세히 공지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학기인데 벌써 떨린다. 미뤄두었던 원고의 마감이 떼지어 달려오고 나는 꼼짝없이 녀석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잘 버티고 잘 가르치고 잘 배우고 잘 기록하자. 무엇보다 웃음을 잃지 말자.

4. 안타깝지만 누구든지 나를 미워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어떤 사랑도 당연하지 않다. ‘기적같은 사랑’이라는 말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명명이 아니라 확률적 불가능성을 거역하는 환대에 대한 찬사이다.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묵묵히 곁에 서주는 사랑이라는 기적에 감사한다.

5. 방학이 다 갔다. 긴긴 어둠의 터널에서 서서히 밖으로 나올 시간이다. 눈부신 하늘이 기다리지 않더라도 숨을 한껏 들이 마시고 또 내뱉고 싶다. 새로운 만남 속에서 설렘을 다시 찾고 싶다. 별것 아니지만 배움의 기쁨을 전하고 싶다. 준비가 다 되었느냐고? 그렇지 않아도 언제든 시작할 수 있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관련 영어표현

코로나19바이러스로 전세계가 떠들석합니다. 관련 핵심표현만을 모은 페이지에서 주요 표현을 가져와 해설을 달아보았습니다.

1. contract a virus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할 때에는 contract라는 동사를 주로 씁니다.

2. extremely infectious / highly contagious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는 표현들입니다. Extremely/highly로 강도를 표현합니다.

3. pass it to others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고 할 때 pass를 주로 씁니다.

4. carriers 그렇게 바이러스를 (본의 아니게) 옮기게 되는 사람을 carrier라고 합니다.

5. super-spreaders 우리말로 ‘수퍼전파자’는 super-spreader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쓸 경우에는 spreader라는 표현을 기억해야겠네요.)

6. patient zero 최초 감염자는 patient zero입니다. One이 아니라 zero로 개념화되는 게 흥미롭네요.

7. show/display symptoms 증상을 보인다고 할 때에는 show/display symptoms라고 합니다.

8. fever 열 cough 기침 respiratory difficulty 호흡곤란 등이 있겠죠.

9. 잠복기는 the incubation period 라고 표현하지요.

10. (감염)사례는 cases라고 표현합니다.

11. 확진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call someone confirmed or diagnosed cases”라고 표현합니다.

12. 사람들이 감염이 된 것으로 테스트 결과가 나오는 경우 “They test positive for it”이라고 합니다.

13. 유난히 감염자가 많은 경우를 spike로 표현해서 “a spike in cases”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치솟는 모양을 표현한 단어죠.

14. 치명률은 “the mortality rate of a disease”로 표현합니다. 사망자수는 death toll이 되겠습니다.

15. 질병의 발생은 outbreak로 표현하죠. 이 제목의 영화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6. 전 세계로 퍼지는 감염병을 판데믹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pandemic으로 씁니다. Pan-이 붙으면 ‘전체의, 전세계의’의 의미가 되죠.

17. 바이러스를 통제하고 확산을 막는다고 할 때는 control/contain the spread of the virus 라고 합니다.

18. 특정 지역을 봉쇄한다고 말할 때에는 “Towns and cities may be put/placed on/in lockdown”으로 표현합니다.

19. 격리조치는 quarantine이라고 하며 사람을 주어로 할 경우 “be put/placed in quarantine”를 쓰면 됩니다. 자가격리는 self-quarantine이라고 표현하면 되지요.

20. 마스크는 그냥 mask 라고도 하지만 face masks라는 표현도 자주 쓰입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백신개발’은 ‘develop a vaccine’이라고 표현하면 되겠습니다.

어지러운 나날이지만 모두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표현 출처:

https://dictionaryblog.cambridge.org/2020/02/26/quarantine-carriers-and-face-masks-the-language-of-the-coronavirus

수사의문문 물음표?

구두점의 역사, 그 중에서도 세미콜론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아래는 그 중에서 놀라운 대목이다. 초기의 구두점 사용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들은 구두점을 악보에서의 쉼표와 같이 생각했단다. 쉼표의 길이는 기계적으로 정해진다기 보다는 연주자에 의해서 해석되는 법. 하지만 지금은 구두점 사용이 딱딱한 법칙처럼 되어버렸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만의 구두점을 만들어내는 일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사의문문(rhetorical question)을 표시하는 물음표였다고. 즉, 일반의문문과 수사의문문을 구별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 부호를 찾아볼 수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호응이 없었던 것 같다. 다음 작문수업에서는 ‘자신만의 구두점 만들기’와 ‘왜 그런 구두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써보기’를 활동으로 추가해 볼까 한다.

“Still, a few bad-tempered complainants notwithstanding, most humanists believed that each writer should work out his punctuation for himself, rather than employing a predetermined set of rules. A writer or an annotating reader was to exercise his own taste and judgment. This idea of punctuation as a matter of individual taste and style outlived the humanists: it stretched beyond the Latin texts that Manutius printed, crossing borders and oceans, and it survived as a way of thinking about the practice of punctuation well into the eighteenth century. When the topic of punctuation usage came up, a reader was likely to be advised that he should consider the punctuation marks analogous to rests in music, and deploy them according to the musical effect he wanted to achieve. How on earth did this idea of the writer as a musician, which held on for hundreds of years, transform into our comparatively new expectation that writers must submit to rigid rules?”

<Semicolon> by Cecelia Watson 중에서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노트 여섯

1. 영어로 논문쓰기를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요소 5가지

(1) 영어에 대한 이해 (도구언어에 대한 이해)
(2) 논문에 대한 이해 (학문공동체의 의사소통방식이자 사고방식으로서의 논문에 대한 이해)
(3) 쓰기에 대한 이해 (쓰기행위에 대한 개념적, 실천적, 메타인지적 이해)
(4) 읽기와 쓰기에 대한 통합적 이해 (장르로서의 논문에 대한 이해 및 장르분석법 이해)
(5) 영어로 논문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이해 (프로젝트로서의 논문쓰기 수행에 수반되는 다양한 지적, 정서적, 정보적 요인에 대한 이해)

2. ‘논문’은 없다?!

논문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갖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논문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무조건 많이 읽고 쓴다’고 결심하는 것은 심히 비생산적입니다. 그보다는 논문쓰기 공부에 있어서는 특정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통용되는 논문의 구체적 성격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재즈”라는 장르는 구체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개별 재즈곡이 있을 뿐이죠. 마찬가지로 “논문”이라는 건 없습니다. ‘논문’은 개별 학문 분과 내의 다양한 논문들이 모인 집합명사로서 추상적 의미를 표현할 뿐이니까요. 그래서 막연히 논문을 많이 읽어서 잘 써보겠다는 결심은 무엇을 쓸지 대충 생각해 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대충 생각하면 글이 대충 나옵니다.

글쓰기 공부에 있어 텍스트의 구체적인 성격, 자신이 목표로 하는 텍스트의 구체태에 천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논문쓰기를 배우는 일은 이 구체태를 디테일하게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상세하게 논문을 상상할 수 있으신지요?

3. 논문생산과 연구자의 삶

교수들의 삶도 대학원생들의 삶도 너무 복잡해 보입니다. 읽고 생각하고 실험하고 토론하고 논쟁하고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이런 삶을 그리기엔 ‘잡일’이 너무 많은 겁니다. 개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푸념일 뿐이라 생각하기엔 정말 일이 많습니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진짜 모르겠어’라는 말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 이 와중에서도 잘해내는 사람들 안보여?’라고 대답하는 듯한 시대가 참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합니다. 구조와 문화의 문제들을 그저 개인의 노오력으로 돌파해야 하는 현실은 슬픕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분투하는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승리한 자들의 노획물 같은 공부를 어디에 쓴단 말입니까.

4.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논문쓰기

예술 및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공은 타직군에서 일하는 것보다 오랜 기간 강도 높은 훈련을 요구합니다. 재능의 비중도 더 크다는 것이 정설이죠. 그래서 천재들의 신화,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탄생합니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겁니다!

하지만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들이 갖는 ‘무기’는 명확합니다. 바로 자신의 수행(performance)을 끊임없이 모니터해야만 하며, 이러한 돌아봄(reflection)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동작을 살피지 않는 무용가, 연기를 복기하지 않는 배우, 자세를 교정하지 않는 역도 선수, 연주를 녹음해 보지 않은 피아니스트가 높은 수준에 이르긴 불가능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반성을 한다는 사실이라기 보다는 반성의 구체적인 방식입니다. 잠자리에 들며 천장을 보고 중얼거리거나 꾸준히 일기를 쓰는 일과 같이 주관성이 높은 도구가 아니라, 자세, 동작, 표정, 움직임 및 소리를 정확히 재현하는 도구들이 동원된다는 점 말입니다.

일기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감정을 추스리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실제 퍼포먼스를 되살리는 데 역부족입니다. 오디오로 따지면 초저충실도(super low fidelity)라고 해야 할까요. 이 점에서 현재로서는 비디오가 가장 좋은 미디어라 할 수 있습니다. 특정 각도에서 촬영한 비디오의 한계가 있지만, 실제 일어났던 일을 있는 가장 풍부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기록방식을 압도하는 충실도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전문가의 식견입니다. 같은 비디오라 해서 모두에게 같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경험과 지식의 깊이만큼 더 풍부한 정보와 함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용가가 보는 무용 비디오와 필자가 보는 무용 비디오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에 놀랍니다. ‘이거 내 목소리 아닌 거 같아’라면서 손사래를 치기도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저 또한 가끔 강의를 녹음해서 듣곤 하는데 솔직히 들어주기 힘듭니다. 더 잘하기 위해서는 강의 전체를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디로 숨고 싶은 마음을 몇 시간 동안 견뎌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술에서의 피드백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자신의 논문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가 극히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외가 분명 있습니다만, 제가 만나고 가르쳐 온 대학원생들의 경우 글쓰기는 굉장히 폐쇄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지도교수의 피드백을 받기도 하지만, 글쓰는 과정 전반은 고립감과의 싸움인 경우가 많았죠.

언젠가 소위 ‘글로벌 대기업’의 인사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인사에 있어서 특별한 철학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철학이 있는 건 아니지만, 더 똑똑한 사람은 늘 저 밖에 있다(Smarter people are always out there.)”고 생각하며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군요. 내로라 하는 인재들이 모여 있는 회사이지만 정말 좋은 인재들은 늘 어딘가 숨어 있다는 가정을 갖고 움직인다는 말이었습니다.

저 또한 오랜 시간 홀로 쓰는 우를 범해왔습니다. 원고를 좀더 잘 고쳐서 지도교수에게 보내야지 생각합니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마음에 안들고’ 하면서 발을 질질 끕니다. 지도교수와의 미팅을 미루고, ‘다음엔 확실히 더 나은 원고를 가져가야지’하면서 자책하기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제가 간과했던 건 ‘저 밖의 누군가’가 제 글을 읽으면 제가 놓쳤던 부분을 지적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하나로 쓰는 것보다 둘, 셋으로 쓰는 글이 훨씬 더 나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토 크루제는 <공포를 날려버리는 학술적 글쓰기 방법>에서 “많은 사람들이 텍스트를 제출하는 데 문제를 갖고 있기에 텍스트를 계속해서 완전하게 만들려고 한다.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약점을 은폐하는 대신에 (그것에 대해) 묻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에 따라 논리적으로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글쓰기는 홀로 강점을 키워가는 일이 니라, 함께 약점을 보완해가는 일이 되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글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사려깊고 명민한 이들의 도움을 받는 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것만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이죠. 쓰기를 골방에서의 고군분투가 아니라 공동체 지식의 활성화(activation), 비판적이고 협력적인 사회적 활동(social activity)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5. 대화로서의 읽기

연구자는 텍스트를 대할 때 ‘읽기’ 이외에도 ‘읽어내기’를 해야 합니다. 텍스트가 하는 말을 경청하는 행위가 (좁은 의미의) ‘read’라면 능동적으로 텍스트의 행간을 채워가며 의미를 증폭시키는 행위는 “read into”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주고 받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읽기든 마찬가지입니다만, ‘강의를 듣는’ 읽기와 ‘대화로서의 읽기’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읽기는 저자의 말을 듣기만 하는 읽기가 아니라 저자의 말에 우리의 말을 더하는 대화적 읽기입니다.

6. “나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재정립하는 글쓰기교육

교육과정에서 쓰기는 말하기와 함께 “표현기능”으로 분류됩니다. 사고가 외부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밀어내기'(ex-pression)라고 보는 것이죠. 하지만 쓰기, 그 중에서도 학술적 글쓰기는 흔히 말하는 <경청의 기술>을 가르치는 데 매우 효율적인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글쓰기 전문가들은 학술적 글쓰기를 설명할 때 “대화에 참여하기”(join the conversation)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글쓰기가 대화를 새로 시작한다기 보다는 기존의 대화에 끼어드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잘 끼어들기 위한 왕도 같은 건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과 견문이 넓어도 일단 유심히 들어야만 대화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재 적소에 필요한 말을 하려면 대화의 소재, 길이, 흐름, 말하는 규칙, 전개방향, 형식, 사람들의 성향 등에 대해 민감해야 하죠. ‘있어보이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도 조심해야 하구요.

그렇다면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경청하고 종합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을 대치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담론과 논쟁의 흐름 속에 나의 자리를 잡는 과정, 거대한 대화의 흐름에 내 작은 목소리 하나 더하는 행위인 것이죠. 사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영화배우들이 수상 소감에서 하는 말처럼 “저는 한 거 없습니다. 그냥 다 차려진 밥상에 밥숟가락 하나 놨을 뿐이죠. 여러 동료 연구자, 작가분들 참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구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지를 금새 깨닫습니다. 짧은 시간 글쓰기에 대해 공부하면서 배운 건 글쓰기의 본령이 개인의 독창적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내 생각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재정립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글쓰기는 경청과 겸손을 가르치는 데 참 좋은 도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언젠가 이런 글들을 체계적으로 모으고 영어와 관련된 부분을 보강하여 <영어로 논문쓰기>를 컴팩트한 원고로 완성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

#영어로논문쓰기

공부, 앎, 무지, 그리고 감(感)

Posted by on Feb 6,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집필 | No Comments

공부를 할수록 앎은 커집니다. 이것은 지식의 양, 개별 지식간의 관계, 지식과 세계의 사태와의 조응 등의 영역에 적용됩니다. 배움은 채웁니다. 앎의 뿌듯함으로 마음이 차오릅니다. 나는 성장합니다.

동시에 무지 또한 커집니다. 앎의 영역이 확장된다는 것은 무지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앎을 통해 세상과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절대적 확신은 사라집니다. 이해의 가능성과 함께 오해의 가능성 또한 커져갑니다. 나는 무지합니다.

무지에 대한 자각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앎은 선입견과 폭력으로 쉽게 전화합니다. 신영복 선생의 말씀처럼 방향을 가리킴에 있어 떨림이 없는 나침반은 고장난 나침반입니다. 나는 언제나 떨려야 합니다.

그 와중에 다행스런 것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들은 많아지지만, ‘아닐 것 같은 것’들에 감각은 자라난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미심쩍은 것들, 그럴듯해 보이지만 치렁치렁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것들을 감지하는 능력 말입니다.

아는 것은 산술적으로, 모르는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그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갖는 능(能)은 조금씩 성장합니다. 영영 모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진리를 더듬을 능력은 분명 자라난다는 것. 계속 회의하면서도 무지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 아주 가끔이지만 의심의 틈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빛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배움의 기쁨이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 그 너머를 보는 나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밤 하늘의 별을 담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히 비참하고 또 영광스럽습니다.

#영어로논문쓰기

수업 잡감

언어 빅데이터에 대한 수업을 하고 있다. 프로그래밍이나 자연어처리 기법과 같은 기술적 내용은 아니고,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의 관점에서 구글북스나 코퍼스 등 대용량 언어 데이터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 새로운 관점과 도구가 언어학습에 대한 영감을 준다는 의견이 하나고 ‘그래서 어쩌라고’가 하나다. 몇 해를 진행해 온 수업인지라 이런 반응은 익히 예상한 바다.

그런데 후자의 의견을 지닌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이런 걸 왜 영어교육과에서 다루느냐’는 식의 항변이 섞여있다.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못할 것들을 왜 몇 주에 걸쳐 다루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차피 영어실력 향상에 도움도 안되는 개념과 도구들 아니냐는 항의가 깔려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언어교육이 교재에 묶여 있는 상황에 대해 고민해 왔다. 언어를 사회문화적 총체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잘 편집된 교과서와 문제집의 형태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갑갑했던 것이다. 그런데 빅데이터를 활용한 활동은 언어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잘 보여줄 수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교과서와 수능교재에 갇힌 영어를 어느 정도 해방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당장 학습자들의 영어실력을 올려주거나 시험을 치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어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심어주는 데는 유효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양한 활동을 준비하면서 교사 또한 언어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다.

현실만을 보면 항변하는 학생들의 의견이 맞다. 교실에서, 방과후 활동에서 빅데이터 같은 거 다루면 수능에 도움이 되겠나? 내신성적 높이는 데 소용이 있겠나? 당연히 성적에 도움은 안된다. 그런데 교육을 그렇게만 바라보면 교사는 뭐가 되나? 또 학생은 뭐가 되나?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지 않나?

어떤 수업을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 같다. 강의평가에서 불만이 터져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생각하는 건 ‘무난한 수업’보다는 ‘김성우에게만 들을 수 있는 수업’을 하자는 것이다. 내가 대단한 선생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내 수업이라는 이야기다.

꼰대가 되지 않는 것만큼 맞춰주기만 하는 선생이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수업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현실을 바꾸는 꿈을 꿀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해야 하니까. 교육은 사회의 필요에 복무함과 동시에 사회 자체를 변혁해야 하니까.

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3: 환유(Metonymy)의 세계 (1)

아래 세 문장을 살펴 봅시다.

a. “버스 파업중이야. 지하철 타고 가.“
b. “빨간 모자 너무 시끄럽다. 가서 한마디 할까?“
c. “손이 모자라서 시간이 배로 걸릴 듯. 사람 좀 더 뽑아주지.“

일상에서 쉽게 쓰고 또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이 문장들 속에 인간이 세계와 언어를 엮어서 인지하는 방식의 작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a를 봅시다. ‘버스 파업중이야’라고 하지만 실제로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은 버스가 아닙니다. 멀고 먼 훗날 자율주행 버스들이 자신의 권익을 찾기 위해 파업을 벌이는 상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SF 속 이야기고, 실제로 파업을 하는 것은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죠. 하지만 우리는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중이야.’라고 길게 말하기보다는 ‘버스 파업중이야’를 택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 대상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그 대상을 가리키는 데 꼭 필요한 정보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문장의 길이도 상당히 짧아지지요.

다음으로 b를 봅시다. ‘빨간 모자’는 그 자체로 시끄럽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모자라면 소리를 내진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빨간 모자 쓴 사람 너무 시끄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빨간 모자’만 써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c입니다. 여기에서 ‘손’은 단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손’을 말합니다. 따라서 손이 부족하다는 것은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이 됩니다. a나 b와 비교할 때 조금 다른 점은 ‘버스’나 ‘빨간 모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부분이 아님에 비해 ‘손’은 가리키는 대상 즉 일할 사람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입니다. 흥미롭게도 영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short-handed’죠. 일손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종종 쓰이는 표현입니다.

Metonymy의 정의

위의 a-c는 모두 ‘환유’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현상의 예시입니다. 인지언어학자들은 환유(metonymy)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합니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준거가 필요한 만큼 Littlemore (2015)의 다음 정의를 차용하도록 하겠습니다.

Metonymy is a figure of language and thought in which one entity is used to refer to, or in cognitive linguistic terms ‘provide access to’, another entity to which it is somehow related. (환유는 언어와 사고의 수사법 중 하나로 한 실체가 관련된 다른 실체를 가리키거나, 인지언어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관련된 다른 실체에 ‘접근지점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환유는 한 언어표현이 특정 대상을 정확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로 연결되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metonymy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라틴어metonymia, 나아가 그리스어 metōnymia에 닿게 되는데, 이것은 “이름을 바꾸기(change of name”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표현에서 ‘빵’은 단순히 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먹거리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를 어원에 빗대어 설명하면 ‘먹거리’가 ‘빵’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죠. 물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이렇게 이름을 바꾸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많은 서구권 국가에서 빵은 주식 중 하나이기에 이런 이름바꾸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환유(metonymy): 몇 가지 예시

그렇다면 이번에는 영어 환유 표현을 몇 개 살펴 보겠습니다.

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펜은 칼보다 강하다.)
e. The White House sees it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백악관은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f. Ireland passed a landmark bill last year. (아일랜드는 작년에 기념비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속담 a에서 ‘the pen’은 필기구가 아니라 문필 즉 글을 쓰는 행위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에 대구가 되는 ‘the sword’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체의 활동을 가리키지요. “The pen”과 “the sword’가 다른 개념으로 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에서 “The White House”는 미국 대통령이 참모와 함께 거주하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를 가리킵니다. 빌딩이 아닌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f에서 “Ireland”는 아일랜드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 의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아일랜드 국가 전체가 아니라 의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예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특정 개념에 접근할 때 종종 해당 개념에 정확히 상응하는 언어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 전반’에 접근하기 위해 ‘펜’을 사용하고, ‘미국 정부’라는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 ‘백악관’이라는 언어를 활용하죠.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간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가 됩니다. 즉 환유는 단순히 언어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구조와 과정을 보여주는 개념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계속)

<참고문헌>
Littlemore, J. (2015). Metonymy: Hidden shortcuts in language, thought and commun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Link] Blog for Teachers of Academic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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