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about to에 대한 메모 둘

Posted by on Jun 11, 2017 in 수업자료, 영어 | No Comments

 

1. be to와 함께 가르치면 좋다. be to에는 ‘~할 예정이다’라는 뜻이 있다. to V 앞에 ‘대략, 근처에’라는 뜻의 about이 붙었으므로 “이제 막 ~하려고 하는”의 의미가 된다. (‘at about five o’clock’의 예와 같이 about에 ‘approximately’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2. be about to V 외에 be about p.p.나 be about ~ing도 쓰임을 알려주어도 좋겠다. 예를 들어 ‘이쪽 일 대충 끝났어’라고 할 때 “I’m about done here.” 정도로 표현 가능.

구동사(phrasal verb)와 구명사(phrasal noun)

한 페친께서 “run-down”이라는 구명사(phrasal noun)을 언급하셔서 관련 링크를 하나 공유합니다.

영어 학습 단계에 있어 상위 학습자와 원어민을 가르는 몇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구동사(phrasal verb)의 자유로운 사용이죠. 영어를 꽤 잘하는 분들도 put off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자리에 postpone이나 procrastinate를 쓰거나, set something off 라고 쓰면 적당할 상황에서 cause something to begin과 같이 쓰는 걸 볼 수 있으니까요.

사실 저도 이러는 경우가 많아서 미국인 동료 하나가 ‘너는 왜 말하는 걸 글쓰듯 하냐?’라고 물은 적도 있습니다. 저는 당당히 ‘영어를 글로 배워서 그래.’라고 대답했죠. ^^

구동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구명사(phrasal noun) 입니다. Report가 동사와 명사 모두로 사용되듯 run down 또한 동사로도 명사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띄어쓰기 없이 한 단어로 쓰거나 중간에 하이픈을 넣어주어야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구명사(phrasal noun)의 다양한 예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phrasal verbs vs. nouns

아직 한참 남은 기말 단상

Posted by on Jun 8,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1. 언젠가 서울비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말 시험지를 걷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성적과 강의평가를 교환하며 학기를 마감하는 건 참 별로다.

2. 기말고사 일자를 바꿔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한 학생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 와중에 작은 위로는 나의 말에 따라 책장을 넘긴다는 것. 어떤 관계는 접힌 채 책 속에 갇힌 페이지처럼 회복의 기약이 없다.

3. 몇 차례 동영상 강의로 보강을 실시했다. 스크립트 없는 강의 녹화는 건 엄청난 내공을 요한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될 일인 듯.

4. <언어와 사고>라는 과목에서 인지언어학 개론 쯤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어렵지만 열심히 해주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 자체로 흥미로운 내용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5. 한 학생은 읽기 자료 이해가 더딘 것을 두고 “배움이 느려 슬픈 짐승인가 봅니다”라는 메일을 보냈다. 나도 기말 때마다 ‘채점이 느려 슬픈 짐승’이 된다. 그런 학생의 늦은 과제 제출 + 나같은 선생의 딴짓 = 별로 하는 일 없이 성적입력 마감일까지 바쁨 바쁨.

6.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과목, 이번 해에도 즐거웠다. 학부에 사회언어학 과목이 없어 학부와 대학원의 중간쯤 되는 성격으로 진행했는데, 그럭저럭 선방한 듯하다. 2년 전 이 과목을 두 번째 가르쳤을 때 강의내용을 책으로 묶어보려다 포기했다. 진로를 바꾸면(?) 시도해 볼까 한다.

7. 영어교육론/교수법 분야의 얕고 넓은 전공지식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여태껏 가르친 과목이 얼마나 많은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

영어교육 투 트랙 전공과정

돌아보면 영어교육 전공과목을 들으며 강독을 해본 적이 없다. 다양한 이론이 응축되어 탄생한 교재를 다시 요약하여 공부하다 보니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느낌만 남았달까. 이에 비해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음미해야만 했던 몇몇 문학과목에서는 갑갑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사범대학의 교과교육과목은 “현장”에 대한 관심을 전면에 놓는 추세다. 발표와 토론 등의 방식 또한 종종 활용된다. 이는 양날의 검이다. 교육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만 이론적 엄밀성과 학문적 깊이를 희생시키는 결과 또한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범대 영어교육과의 교과교육과정을 두 트랙으로 재편하였으면 한다. (사범대학 내 타전공 또한 비슷한 처지일 터이나 필자가 알고 있는 언어교육영역에 한정하여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는 개념적 토대를 닦는 트랙으로, 언어학, 심리학, 인지과학, 사회학, 인류학 등의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 통해 ‘언어교육학’이라는 응용분야의 뿌리를 이해한다.

둘째는 한국사회와 영어교육 트랙이다.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의 현 교육환경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교과교육방법을 연구한다. 해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수정하고 재맥락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연구’라는 표현을 썼다.

나아가 대학원 수준에서는 이론강독 수업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특히 방법론 관련 강좌의 강화가 시급해 보인다. 필자 또한 주요 논문들을 꼼꼼히 읽어내려가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이론강독이 가능한 학교에서 얼마나 더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화의 성립조건

Posted by on May 23,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말은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다. 따라서 말은 화자에게서 청자에게로 향한다. 여기에서 “화자—말—>청자” 도식이 나온다. 여기까지가 커뮤니케이션 개론에서 들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의 말은 언제나 양방향으로 달린다. 생각이 언어를 통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양날의 검이 된다. 단어 하나 하나는 단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를 규정한다. 단순히 정보의 매개가 아니라 정체성과 정치성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말을 다듬고 또 다듬는 사람들은 안다. 말은 짜냄(expression)이면서 누름(suppression)이고, 전달(delivery)이면서 성찰(reflection)이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던지는 말은 언제나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때로는 더 빠르고 강하고 날카롭게.

대화자는 말하는 동시에 듣는 주체여야 한다. 따라서 두 사람간의 대화에서 청자는 늘 둘이어야 한다. 이것이 대화의 성립조건이다.

스타퍼와 프리젠터

Posted by on May 21, 2017 in 수업자료, 영어, 일상 | No Comments

1. 어느 장단에 춤추라고요?

오래 전 한 스타벅스 매장에서 생긴 일이다. 일회용 컵에 음료를 받아 조금 걸어야 하는 상황.

나: “여기 이거 음료 마개 있잖아요. 꼽는 거.”
점원: “아 (당당하게) 스타퍼(stopper)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 ” 그걸 스타퍼라고 하나요.” (‘마개 놔두고 왜 스타퍼라고 하는지)
점원: 네네. 여기 있습니다.
나: 감사합니다.

‘스타퍼’라는 유려한 발음을 듣는 순간 말문이 막힐 뻔했다.

몇주 뒤. 같은 가게, 같은 상황.

나: (그래 당신들의 용어를 써주겠어) 저 여기 스타퍼 하나 주세요.
점원: 네??
나: 스타퍼요. 들고 가야 되는데 샐까…
점원: (말을 끊으며) 아 마개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 네네. 마개요. 음료 안새게.
점원: (살짝 짜증나는 눈빛을 흘리며) 여기 있습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것인지.
다음부터는 무조건 마개다.

2. 파워포인트 ‘넘기는 거’ 구입기

지난 겨울, 강의를 위해 파워포인트 ‘넘기는 거’를 구입했다. 그 문구점 앞을 지나다가 당시의 짜증이 다시 올라왔다.

“저 파워포인트 넘길 때 쓰는 도구가 필요해서요. 클리커(clicker)라고 하나요?”
– “클리커요?”
“네.”
– “(전혀 모르겠다는 듯) 클리커가 뭐예요?”
“파워포인트 넘길 때 (엄지손가락으로 검지 손가락을 누르며) 이렇게 누르는 거요.”
– “(손님의 한심한 어휘 사용을 비웃는 듯한 말투로) 아 프리젠터?”
“아 그걸 프리젠터라고 하나요?”
– “네. 클리커라고는 안해요.”
“네네. 프리젠터 주세요.”

그렇게 프리젠터 샀다.
클리커는 절대 아니다.

‘영어학습법’에서 ‘내 삶의 언어와 관계맺기’로

“영어를 배운다”는 추상성이 높은 명제다. 일단 ‘영어’라는 단어가 담는 내용과 행위가 광범위하다. ‘배운다’는 동사 또한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방학이 되면 으레 “영어 공부 좀 해야 되는데”라는 말을 듣는다. “뭐 하실 건데요”라고 물으면 “뭐 이것 저것”이라고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이것 저것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 저것 하다 보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학습 대상의 추상성이 높다는 것은 그 대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는 거대한 만큼 멀리 있고, ‘배운다’는 애매한 만큼 스르륵 빠져나간다.

학습은 추상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구체화하는 과정 즉, 구체적인 활동과 구체적인 내용과 구체적인 학습법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시간과 장소, 필기 스타일, 제스처와 발음, 혀의 움직임까지.

여전히 많은 학습법들은 ‘거대 전략(grand strategy)’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면 된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 등등.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일종의 수집(collection)을 시도할
만하다. 오바마가 좋다면 오바마의 연설들을 모으고, 멋진 표현을 모으고, 발음을 따라해 보는것이다. 스타워즈의 팬이라면 요다와 다스베이더가 한 말을 모조리 모아서 외워 보는 식이다. 주변에 널린 영어 간판들을 사진으로 찍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거나, 영어로 된 백화점에 들어가서 상품들의 이름을 익히고, 어떻게 분류되고 있는지를 한국 백화점 웹사이트와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크리스 앤더슨이 제안하듯 TED 강연을 보며 청자와의 유대를 높이는 표현, 설득을 위해 초석을 까는(priming) 과정, 발성이 달라지는 순간들 등에 집중할 수도 있다. 요리가 좋다면 자막이 제공되는 푸드 채널을 꾸준히 보면서 관련 표현을 익힐 수 있다. 요리쇼는 음식의 이름이나 계량과 관련된 어휘들 뿐 아니라 다양한 동작을 나타내는 구어 동사 표현의 보고다. (이와 관련하여 제이미 올리버의 Food Tube 채널을 추천한다.) 핀터레스트에서 명언을 모으거나, 유명 인사들의 유언을 모을 수도 있다. 잘 정리된 유머나 말장난 사이트를 독파할 수도 있겠다. 수준이 높은 학습자라면 기존의 수퍼볼 광고에 담긴 미국 대중문화의 단면을 분석해 볼 만하다.

결론적으로 저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영어가 아니라 내 손 안에, 혀 끝에, 수집 목록에, 유튜브 채널에, 노트 필기에, 다양한 간판들 속에 있는 구체적인 영어를 찾아야 한다. 영어공부의 핵심은 한국인 모두를 위한 영어학습법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영어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나만의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이름 붙이기 vs. 마주보기

흔히 “명사”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들 하지만, 옳지 않은 설명이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봐도 “나무”는 세상의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나무”라고 불리는 개념(concept)에 조응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명사는 일종의 ‘집합명사’다. “나무”는 내 집앞 화단의 아담한 사과나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를 가리킨다. 참나무, 뽕나무, 자작나무 등에 속하는 모든 개체를 통틀어 ‘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나무’는 세계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체계 속에 개념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언어의 유용함과 위험이 동시에 드러난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는 단지 세상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분류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를 배울 때 ‘나무’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되듯, /자유/를 배울 때 ‘자유’에 속하는 것을 분류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말은 우리의 세계를, 감정을, 의견을, 고통을 갈라친다. 세계의 어떤 부분을 떼어내어 자기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다.

갈수록 개념만 계속 집어삼키는 공부가 두렵다. 더 자세히 분류하고 갈라치는 법을 배우다가 세계와 대면하는 법을 잃어버릴까 무섭다. 구획하는 법을 배운답시고 마주보는 법을 잃어/잊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세계와 대면할 수 없다. 단지 한 인간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을 뿐. 그래서 대면(對面) 아닌가. 명명(命名)이 아닌 마주봄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욱 절실한 시절이다.

전쟁터가 된 삶

Posted by on May 3,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대부분의 언어는 군대 관련 표현을 담고 있고, 영어 또한 예외가 아니다. engineer는 원래 군 엔진(military engines)을 만드는 사람을, ‘dress(ed)’는 병사들이 전투에 나갈 준비가 된(prepared) 상태를 뜻했다. 그래서 특별한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차려 입고 ‘출격 준비 끝’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중세의 병사가 된 것이다. 온갖 표현과 어울려 쓰이는 strategy 또한 기원은 전쟁이었다. 그래서 ‘휴가 전략’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가 안맞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외국어 교수법도 군대 및 안보상황과의 긴밀한 관계 하에 변화한다. 교실에서 자주 쓰이는 “따라 읽기(oral repetition)” “단어 바꾸어서 반복하기(substitution drill)” 등은 2차대전에 참전할 미군 병사들의 외국어 실력을 단기간에 증진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군대식 교수법(Army Method)의 주요 학습법이었다. 911 이후 미국의 외국어 관련 예산에서 아랍어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서의 한국어 강좌 개설 또한 안보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정치의 영역에서 군사 메타포는 자주 사용된다. 선거의 ‘주요 격전지(key battleground)’나 ‘전면전(full-scale war)’ 등은 대표적인 예다. “military campaign”과 “election campaign” 모두 “캠페인”으로 불린다는 게 우연만은 아니다. 논쟁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오죽하면 “I demolished his argument.(그의 주장을 박살내 버렸지)”라는 표현이 있겠는가?

사회언어학자 데보라 태넌(Deborah Tannen)은 그의 저서 <Argument Culture>에서 언론, 정치, 교육 등의 분야에 만연한 대결적 문화에 대해 논의한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대화의 상대를 적(adversary)으로 간주하고 이를 기본적인 사고의 틀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도, 교육도, 문화도 ‘전쟁중’이다. 삶을 표현하는 기본 메타포가 ‘전쟁터’인 사회는 불행하다. 그래서 종종 묻는다. 이 전쟁은 정말 필요한 것이냐고. 누가 이 전쟁을 부추기고 유지하느냐고.

전치사로 끝나는 문장 금지 혹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문장을 전치사로 끝내지 말라”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영문법 규칙이죠. 사실 전치사로 끝나는 문장은 흔하게 발견됩니다. “I need a pen to write with.”와 같은 예문은 부정사 파트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처방문법 (prescriptive grammar) 하에서 이 규칙은 상당 기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영문법을 처음 배웠던 시절에도 간간히 접할 수 있었구요. 검색해 보니 무려 2011년에 옥스포드 사전 공식 블로그에도 관련 질문이 올라왔더군요.

Can you end a sentence with a preposition?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라틴어는 유럽 식자층의 필수 외국어였죠. 이 영향으로 17세기 이후 많은 학자들은 영문법을 라틴어 문법의 기초 위에서 기술하려 노력합니다. 현재 많은 문법서가 채택하고 있는 8품사 체계도 라틴어 문법의 영향 하에 만들어졌죠.

그런데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던 라틴어의 경우 전치사 뒤에 따라나오는 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언가의 앞에(pre-) 위치하는(position) 말이었던 겁니다.

이에 따르면 “Where are you at?”나 “I need a pencil to write with.”와 같은 말은 바람직한 규칙을 깨뜨립니다. ‘at’과 ‘with’의 품사는 전치사(preposition)인데, 이 뒤에 나오는 말이 없으니 전치사의 정의가 파괴된다는 거죠. ‘뒤에 따라나오는 말이 없는 전치사’는 모순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이 이상화된 규범을 먼저 상정하고 여기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문법 규칙은 도처에 있습니다.

갑자기 “사랑은 그 어떤 이념 떄문에 현실을 경멸하지 않는다.” 라는 본회퍼의 말이 떠오릅니다. 언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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