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영어논문쓰기 1강을 마치고

1. 언젠가 영어논문쓰기 강좌 수강생들께 질문을 했다. 논문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분이 있는지. 대부분 대학원생이었고, 전공은 다양했다. 예상대로(!) 단 한 사람도 논문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분명 이 샘플링에는 큰 문제가 있다. 영어논문쓰기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니 안배운 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이 대답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1) 한국어 논문쓰기도 배워본 적이 없고,
(2) 논문쓰기 강의를 안들었다기 보다는 그런 수업이 없어 못들었다는 취지였기 때문이었다.

2.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리터러시 연구자/교육자들이 종종 던지는데 사실 내겐 참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다. 가르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 데까지 가르치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각자의 길을 가도록 하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모든 면에서 존경스러운 지도교수와 함께 공부했음에도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었다. 텍스트에 대한 피드백은 종종 받았지만 연구, 논문, 학계, 논쟁, 소통 등에 대한 큰 그림을 배우진 못했다.

4. ‘아니 그런 걸 누가 가르쳐 주느냐,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답답해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썼고, 직접 강의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별것 아닌 강의이지만 ‘대학원생 모두가 들어야 하는 강의’라는 찬사도 적잖이 들었다. 이런 응원의 목소리 덕에 지금도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5. 3년 째 영어논문쓰기를 가르치면서 대략 200여 명의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을 만났다. 그중 한 사람도 대학원생으로서 논문읽기와 쓰기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 담장 밖 논문 관련 사교육의 발흥은 참으로 개탄할만한 일이지만 리터러시교육이라는 대학교육의 핵심목표를 대학 스스로 외면한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6. 법률가는 법률가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행정가는 행정가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연구자는 연구자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결국 다양한 영역에서의 전문성은 그 분야의 지식을 소화하여 말하고 쓸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한다.

7. 지금의 대학이 학생들이 지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꼭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8. 이런 단상을 남긴 게 여러 번이다. 적어도 지난 5년 여 대학의 학술리터러시 관련 강의와 정책에서 이렇다할 변화를 목격하지 못했다. 매학기 강의에 깊이를 더하는 일부 교수자들의 개인적 시도 외에는 말이다. 그저 내가 과문한 탓에, 활동영역이 좁디 좁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TTS와 원어민주의

외국어학습에서 “원어민주의(native-speakerism)”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 왔습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원어민주의(-ism)가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은 학습자들이 내재화한 “원어민이 구사하는 외국어가 최고이며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원어민의 권력이 가장 두드러진 영역은 아무래도 발음이 아닐까 합니다. 정확한 문법과 적확한 어휘를 사용하더라도 발음이 ‘구리면’ 절.대. 외국어를 잘한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최근 IOS 11과 구글 번역기의 TTS(Text-to-Speech; 텍스트를 읽어주는 기술)를 만족하며 사용중인데, 아래 링크는 또 다른
차원의 구글 TTS 를 선보이네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https://google.github.io/tacotron/publications/tacotron2/index.html

음성을 들으며 간단한 가상대화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성우: 야, 너 이번에 새로 나온 구글 TTS 발음 들어봤냐?
우성: 응. 진짜 장난 아니더라. 이제 사람들이 발음교육에 신경을 좀 덜 쓰지 않을까? 통역기도 엄청 빨리 발전하던데… 몇년 지나면 한국어로 말하면 완벽한 영어발음으로 나올 거 아냐.
성우: 음… 그럴까? 그럼 원어민주의도 좀 덜해지려나?
우성: 무슨 말이야?
성우: 원어민주의란 말이지 블라블라…
우성: 역시 ㅅㅁㅊ. 그래도 잘 설명했으니 용서해 준다. 근데 그래도 원어민교사에게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진 않겠지.
성우: 그렇겠지. 하지만 나중에 학생들이 이런 말 하면 원어민 교사 기분이 어떨까?
우성: 무슨 말?
성우: (장난스럽게) “선생님! 근데 선생님 발음 TTS보다 안좋아요. 그냥 TTS로 들려주시면 안되나요? 거기 버전 중에서 다니엘 레드클리프랑 아만다 사이프리드 목소리 좋은데.”
우성: 아…………

과연 TTS의 비약적 발전은 원어민주의의 위력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올까요? :)

덧.
원어민주의가 비이성적으로 과도해지면 완벽한 원어민임에도 불구하고 피부색을 이유로 채용하지 않는 관행을 부르기도 합니다. 명백한 인종차별이죠.

[백업] 영어독해 읽기자료

Posted by on Dec 20, 2017 in 강의노트,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읽기자료] 영어독해 강좌에서 읽었던/읽고 싶었던 글 목록입니다. 수업의 특성상 주로 AI와 언어 관련 내용이 많습니다. 아래 내용으로 심층 독해 수업 가능합니다. ^^

The science of love: We each carry an intricate machinery of love, calibrating and attuning our moods and bodies to one another (4287 Words)
https://aeon.co/essays/love-works-its-magic-in-mysterious-biochemical-ways

Does It Taste As Sweet To Say ‘I Love You’ In Another Language? (711 Words)
http://www.npr.org/sections/codeswitch/2014/02/01/269014409/does-it-taste-as-sweet-to-say-i-love-you-in-another-language

The Superior Social Skills of Bilinguals (832 Words)

Thinking Does Not Imply Subjugating (990 Words)
https://www.edge.org/response-detail/26243

The Running Conversation in Your Head: What a close study of “inner speech” reveals about why humans talk to themselves (3,428 words)
https://www.theatlantic.com/science/archive/2016/11/figuring-out-how-and-why-we-talk-to-ourselves/508487/

What Happens When You Can’t Talk to Yourself? (3,318 words)
http://nautil.us/blog/what-happens-when-you-cant-talk-to-yourself

Cooperation is what makes us Human (22,417 words)
http://nautil.us/issue/1/what-makes-you-so-special/cooperation-is-what-makes-us-human

Can the Right Kinds of Play Teach Self-Control? (4,345 words)

Technology From Superman to the Avengers, how technology spawned your favorite superheroes (1,717 Words)
http://www.hopesandfears.com/hopes/future/technology/213487-how-technology-spawned-your-favorite-superhero-origins

How millions of kids are being shaped by know-it-all voice assistants (1549 Words)
https://www.washingtonpost.com/local/how-millions-of-kids-are-being-shaped-by-know-it-all-voice-assistants/2017/03/01/c0a644c4-ef1c-11e6-b4ff-ac2cf509efe5_story.html?utm_term=.edf77eecc193

When Is the Singularity? Probably Not in Your Lifetime (738 words)

The Great AI Awakening (14,864 Words)

20 Big Questions about the Future of Humanity: We asked leading scientists to predict the future. Here’s what they had to say (3159 words)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20-big-questions-about-the-future-of-humanity/

Threat of Artificial Intelligence (1499 Words)

Humans With Amplified Intelligence Could Be More Powerful Than AI
http://io9.gizmodo.com/humans-with-amplified-intelligence-could-be-more-powerf-509309984?utm_campaign=socialflow_io9_facebook&utm_source=io9_facebook&utm_medium=socialflow

Will a Robot Take Your Job?
http://www.newyorker.com/news/news-desk/will-a-robot-take-your-job

Killer robots: The soldiers that never sleep
http://www.bbc.com/future/story/20150715-killer-robots-the-soldiers-that-never-sleep

The Cognitive Benefits of Doodling
https://www.theatlantic.com/entertainment/archive/2015/07/doodling-for-cognitive-benefits/398027/

20 cognitive biases that screw up your decisions
http://www.businessinsider.com/cognitive-biases-that-affect-decisions-2015-8?utm_source=feedly

How to Understand the Deep Structures of Language (1735 words)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how-to-understand-the-deep-structures-of-language/

Data analysis of 34,476 comic book characters reveals they’re sexist as hell (437 Words)
http://www.avclub.com/article/data-analysis-34476-comic-book-characters-reveals–258346

The Difference Between Rationality and Intelligence (848 words)

Five Ways to Lie with Charts: Want to spin your data? Here’s how.
http://nautil.us/issue/19/illusions/five-ways-to-lie-with-charts

Why we procrastinate
http://nautil.us/issue/16/nothingness/why-we-procrastinate

The Rise of Hate Search

Everything You Know About Artificial Intelligence is Wrong
http://gizmodo.com/everything-you-know-about-artificial-intelligence-is-wr-1764020220

Google is not ‘just’ a platform. It frames, shapes and distorts how we see the world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6/dec/11/google-frames-shapes-and-distorts-how-we-see-world

The AI Revolution: The Road to Superintelligence

The AI Revolution: The Road to Superintelligence

Your Language Shapes Your Morality: In another language, your own thoughts might be foreign to you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your-language-shapes-your-morality/

The confounding consistency of color categories.
http://nautil.us/issue/26/color/why-red-means-red-in-almost-every-language

영어학습 이론: 연구자와 학습자의 관점에서 (1)

1. 언어학습은 단지 개인과 언어의 관계로 설명되지 않으며 개인을 둘러싼 수많은 요인과 관계들의 영향 하에 있다. 말을 배우는 일은 단지 말을 알아간다기 보다는 세계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 연구자에게 있어 (제2)언어습득 이론은 하나의 체계를 지향한다. 이 체계에는 이론의 데이터를 구성하는 요소와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이 있다. 예를 들어 촘스키의 형식언어학을 중심으로 하는 제2언어습득론과 인지언어학의 용법기반학습이론은 서로 다른 데이터와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3. 언어를 정의하는 일은 지난하다. 언어는 사고 일반과 떼어놓을 수 없기에 신경과학 및 심리학과 상당한 접점을 지니며 일상의 모든 영역에 스며 있기에 사회현상과의 인터페이스 또한 광범위하다. 즉 언어발달은 인지, 정서, 사회발달과 떼어놓을 수 없다. (맥락은 다르지만) 레이먼드 윌리암스의 지적처럼 언어를 정의하는 일은 언제나 인간존재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4. 이론가들 사이에서 언어습득, 언어학습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와 논쟁점이 있다면 이론가들과 대중 사이의 차이 또한 있다.

우선 이론가들은 자신의 주장을 이론적 지형의 한 부분으로 파악한다. 촘스키 언어학을 기반으로 한 제2언어학습 연구자는 촘스키의 인간과 언어에 대한 기본 가정들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외국어습득을 연구한다. 언어습득을 기술하는 용어 또한 변형생성문법과 최소주의 등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비해 인지언어학자들은 인지과학의 언어를 광범위하게 차용하며 통계방법론에 입각한 모델링을 활용한다. 촘스키에게 말뭉치(corpus) 혹은 언어 빅데이터는 별 의미 없는 데이터셋이지만 용법기반학습 연구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연구자료다.

5. 일반 학습자들에게 영어학습이론의 효용은 4번의 논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이들에게 이론은 언어에 대한 가정과 공리, 가설과 방법론 및 핵심 개념의 집합이라기 보다는 최고의 모범사례(best practice)에 가깝다. 자신의 언어학습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명제의 집합 정도인 것이다.

6. 연구자는 특정한 이론적 틀에서 아주 작은 것들에 천착한다. 논문의 내용 또한 (몇몇 대가들의 저작을 제외한다면) 토목공사가 아니라 커다란 빌딩의 창문 두어 개 정도를 갈아 끼우는 일이다.

이에 비해 일반 학습자들은 자기 삶의 일부, 즉 시간과 돈, 에너지를 투자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원한다. 이는 매우 합리적이며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언어가 무엇인지, 언어습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활용하는 통계 방법에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7. 따라서 연구자들의 활동은 특정한 철학적, 언어적 세계관 위에서 연구대상을 세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언어학습자들은 세계관이나 세분화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학습방법을 제시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조언을 구한다. 이 극단에 있는 질문이 (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는) “어느 학원 다니면 될까요?”와 “무슨 책이 좋아요?”다.

8. 따라서 연구자들과 일반학습자들 사이의 접점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이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제2언어학습 특히 영어학습에서의 ‘공론장’의 기능은 무엇인가? (혹은 ‘공론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담론의 생산-분배-전유 체계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계속)

영어학습의 내러티브

Posted by on Dec 4, 2017 in 삶을위한영어공부, 수업자료 | No Comments

한국사회에서 외국어학습의 내러티브는 성공과 실패, 투자대비 수익, 수준 도달 혹은 미달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학습의 궤적을 좁디 좁은 사다리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영어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미끄러지거나, 남들에 비해 더 위에 있거나 비슷하거나 아래 있다.

이같이 수직적인 서사의 틀(narrative template)을 다양한 경험, 재미, 만남, 감동, 깨달음, 멋진 순간들로 바꾸어 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놀고, 깨닫고, 발견하고, 웃고, 떠들고, 농담을 주고받고, 눈물지은 순간들로 만들어진 기억으로 바꾸기 위해 해야할 일 말이다.

수년 간 학생들의 영어학습 자서전을 읽으면서 갖게 된 화두입니다. 구상하고 있는 #삶을위한영어공부 원고의 핵심 문제의식이기도 하구요.

인풋 패러다임과 모국어 지식

한국 영어교육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단연 ‘인풋(input)’이다. 영어는 영어로 배워야 하고, 영어에 많이 노출(exposure)될 수록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요지다.

외국어 학습에서 언어입력(input)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타를 직접 경험하지 않고 기타를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외국어 이해에 있어 한국어 배경지식이 갖는 중요성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 것 같다. 외국어를 읽고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어에 대한 지식과 세계에 대한 지식 모두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한국어 자막의 효용일 것이다. 특정 외국어에 익숙한 학습자들의 경우에 잘 들리지 않던 뉴스 혹은 드라마도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면 들리는 경우가 많다. (진짜 들리는지 확인하려면 랜덤 샘플링을 통해 받아쓰기를 해보면 될 터이다.) 이는 외국어의 단어나 소리 자체가 청자에게 전달된다기 보다는 (한국어로 된) 배경지식과 상호작용하며 뇌에서 처리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종종 털어놓는 걸 보면 필자만의 경험은 아닌 듯하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상호작용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짐을 시사한다. 신경언어학의 연구는 사춘기 이후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경우 모국어(L1)와 외국어(L2)가 사뭇 다른 ‘회로’와 활성화 패턴을 통해 처리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자막이 외국어 이해에 실시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다수의 경험은 L1과 L2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자막을 켜고 영상을 볼 때 ‘들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실질적 이해이고 어디까지가 ‘이해했다는 착각’혹은 사후적 합리화인지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능숙한 학습자가 영미권 드라마를 볼 때엔 다음과 같은 점을 가정할 수 있다.

1. 영어 구어체에서 사용되는 어휘적, 문법적 패턴에 익숙한 편이다. (해당 언어의 일상어(colloquial language) 전반에 대한 지식)

2. 드라마의 전개상 해당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대략적인 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스토리라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추측(inference) 메커니즘 작동중)

3. 드라마의 소재가 특이하지 않다면 해당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대략적인 어휘셋(lexical sets)에 대해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된 어휘지식)

4. 드라마의 시즌이 6-7 정도 된다면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주요 인물들을 대화 패턴을 암묵적으로 익혔다고 볼 수 있다. (개별 인물에 대한 암묵적 지식)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자막을 켜고 볼 때 나의 뇌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언어 능숙도에 따라 어떤 변화 패턴을 보이는가?

이런 주제로 깊이있는 연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용적인 면에서도 “자막은 금기입니다”나 “무조건 자막 끄고 10번 이상 보세요”보다 나은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순화 시도에 대한 단상

소위 ‘언어순화’ 시도가 별 의미가 없지 않나 하는 주장에 대해 달았던 답글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

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보면 말씀하신 의견이 일리가 있습니다. “창녀” 혹은 “성노동자”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말이죠.

하지만 세 가지 점에서 이와 같은 의견이 어느 정도 조정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각각의 단어들이 어떤 담론장에서 사용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위에서 다른 분이 말씀하셨듯이 ‘근로자’와 ‘노동자’는 같은 대상을 가리킬지는 모르나, 둘 중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는 단순히 단어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담론장의 권력을 언어에 주류로 편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근로자’대신 ‘노동자’를 쓸 경우 이는 단어 대 단어의 관계가 아니라 담론장과 담론장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신경언어학적 고려입니다. 과연 사람들은 ‘창녀’와 ‘성노동자’를 들었을 대 똑같은 생리적 반응을 보일까요? 욕설이나 금기어의 존재를 보면 분명 특정한 단어들은 다른 단어들에 비해 격한 정서적/생리적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이런 면에서 특정한 단어가 다수의 언중에게서 보다 격한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이것이 사회변화의 걸림돌이 된다면 다른 단어의 활용을 검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기표의 교체가 갖는 중재(mediation)의 효과입니다. 최근에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하여 ‘편견 최소화 채용’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이 둘이 가리키는 것은 동일합니다만, 채용과정의 어떤 면을 프레이밍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나아가 이런 프레이밍은 정책결정자들이나 실무담당자들이 채용과정을 재설계할 때 일종의 중재적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보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줄이는 게 중심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즉, 언어의 변화는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른 심리적 요인들을 추동하는 매개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거에서 말씀하신 바를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무의미한 노력이 될 때도 있지만,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단초가 될 수도 있죠.

그렇기에 ‘언어순화’ 자체로 효용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고, 그에 수반되는 사회문화적, 제도적, 정치적 변화를 면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신 원리를 적용하려 하기 보다는 담론장과 권력의 문제를 심도있게 고려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 답글 —

말씀하신 대로 언어의 의미장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수반해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창녀’ vs ‘성노동자’의 경우 어떤 호칭이 긍정적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데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이안님께서는 계속해서 ‘창녀’를 쓰면서 다른 활동을 전개하는 것 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고, 저는 ‘성노동자’라는 말을 쓰면서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논쟁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런 명칭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많은 상황에서 사회변화의 가장 큰 동력은 그 명칭으로 호명되는 이들이었습니다.

참고
http://pjos.org/index.php/pjos/article/download/15179/13734

 

[의사소통행위의 언어학 a linguistics of communicative activity (LCA)] 어떤 글은 곱씹을수록 진가가 나온다. 별것 아닌 선언인 것 같지만 언어를 자기충족적이고 완결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활동으로 보게 된 것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고전적인 경제이론이 나름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인지와 정서라는 요인을 간과해 왔듯이 구조주의 언어학은 형식적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오용하고 배반하고 변화시키는 언어사용자의 사고와 감정 나아가 언어가 정체성과 권력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간파하지 못했다.

새벽에 간만에 온라인에서 이런 저런 논의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찾아본 챕터. 논문이 실린 책의 제목은 <Disinventing and Reconstituting Languages>이다.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37201231_Thorne_S_L_Lantolf_J_2007_A_Linguistics_of_Communicative_Activity_In_S_Makoni_A_Pennycook_eds_Disinventing_and_Reconstituting_Languages_pp_170-195_Clevedon_Multilingual_Matters

구글 번역 관련 수업 단상

1. AI의 시대 ‘영어교육이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리터러시 교육에 있어 모국어, 외국어, 정보기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유효하다.

2.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AI’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어교육만 위기는 아니다. 가르칠 영역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채널과 효율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3. 따라서 ‘영어교육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의사소통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온라인 커뮤니케이션과 소셜 네트워크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었듯이 통번역 기술의 발달은 문화간 소통의 지형을 빠르게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

4. 통번역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데이터 과학의 성과를 모두에게 손쉽게 제공하는 인터페이스의 고도화가 더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스와힐리어 문헌을 해독하고 아프리카 문화권의 정보를 손쉽게 가공할 수 있다면?

5. 그런 의미에서 중장기적인 통번역 기술의 발달을 영어교육 전공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문화간 소통의 획기적 증가라는 전지구적 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집필, 공부, 그리고 즐거운 딴짓

Posted by on Nov 11,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1. 바빠지면 딴짓을 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오늘은 예전에 집필을 고민했던 <삶을 위한 영어공부 (가제)> 목차안을 다시 들여다 보고 있다. ‘삶’과 ‘영어공부’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나온 기획인데, 대중서로서의 방향을 잡기도 어려웠고 필자로서의 내공 또한 형편없었다. 몇 해가 지난 지금, 분명 할 말은 많아졌건만 ‘내 말들이 가 닿을 수 있는 독자들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 ‘수많은 ‘전문가’들의 사회에서 또 하나의 소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감 또한 커졌다. 어떻게 써도 숭숭 뚫린 구멍이 보이는 증상은 도무지 치료하기 힘든데, 도대체 부끄럽지 않은 글이란 무엇일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책을 쓰는 일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단절을 받아들이는 행위라 느낀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타인을 염두에 두고 베어내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얽히고 섥힌 수십 년 길이의 등나무같은 생각들을 네모 반듯하게 깎아내는 일 말이다.

2. 해커톤처럼 리서치톤이나 라이팅톤, 리딩톤 같은 거 해도 재미있겠다, 라고 쓰려니 이제 그것도 피곤해서 못하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예전에 학술캠프 비슷한 데 가서 2-3일 줄창 책읽고 밤낮없이 세미나만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사람들이라면 단기간 집중 공부로 특정 주제를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게 가능하려면 비슷한 내공과 연구주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시공간을 공유해야 하는데 공부를 업으로 삼은 이들의 경제적 상황이나 일상생활의 패턴을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 음… 현실은 슬프지만 딴 생각은 재미있구나.

“해커톤”은 “hack(‘만들다, 파고들다’라는 뜻)”과 “marathon(장시간의 달리기)”의 합성어로, 혁신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기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직한 행사를 말한다. 해커톤은 보통 하루에서 일주일까지 지속된다.” 출처: http://theconnect.or.kr/wp/archives/914

 

 

어휘의 주관성 – ‘맵다’의 경우

Posted by on Nov 11,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연애 시절,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양파와 고추 몇 개가 찬으로 나왔다. 매운 걸 잘 못먹는 나는 짝에게 물었다.

“이거 매울까요? 겉으로 봐선 잘 모르겠네요. 드셔 보시고 괜찮은지 말씀해 주세요.”
“네네. (잠시 후) 아주 살짝 맵네요. 아주 맵진 않고요.”
“아 그 정도면 저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삭 소리와 함께 매운 맛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입안에 불이 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쌀밥과 물로는 해결이 안되어서 결국 식당을 나와 우유까지 사 마셨다.

언어가 주관적 경험의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함을 보여주었던 에피소드. “자유”나 “사랑”과 같은 추상적 어휘 뿐 아니라 “맵다”나 “짜다” 등의 감각 어휘도 개인차가 지대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 (나중에 보니 짝은 청양고추를 치토스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르르…) 그러고 보면 색상을 표현하는 어휘보다 맛을 묘사하는 어휘에 있어서 개인간 차이가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암튼, 매운 것 잘 드시는 분들. 청양고추 추가해서 드시는 분들. 여러분들은 세계의 표준이 아닙니다. (먼산)

덧: 참고로 생애 최강의 청양고추맛을 능가했던 건 라일락 이파리를 씹었을 때의 충격과 공포다. 궁금해도 참으시기를.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라일락 이파리를 대차게 씹었다가 실제로 죽는 거 아닌가 싶었던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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