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의 글쓰기가 힘든 이유

 

대학원에서의 글쓰기가 힘든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층위에 존재한다. 먼저, 학술 공동체가 원하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논문을 읽긴 읽되 내용을 훑을 뿐, 언어/수사적 구조체로서, 나아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논문 장르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지도교수 및 각 과목 담당 교수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술공동체가 원하는 글쓰기와는 다른 층위에서 대학원생들에게 부담과 고통을 안겨준다. 교수들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추측게임(guessing game)이 심심찮게 목격되는 걸 보면 이 문제도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적지 않은 대학(원)생들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안개에 쌓인’ 학계의 관습이나 교수의 애매한 기대와는 다른, 글쓰기 과정 자체에 대한 메타인지 능력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이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그 해법은 조금씩 다르다. 첫 번째는 논문을 검색하고 읽고 분석하는 방식을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두 번째는 담당교수와의 적극적 소통과 토론을 통해서, 세 번째는 자주 쓰고, 괴로워도 반복해서 읽고, 되도록 자주 편안한 이들에게 크리틱을 받음으로써 조금씩 개선시켜 나갈 수 있다.

현재 대학원 학술 리터러시 교육의 문제는 이 세 가지 중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니, 가르치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해야 좀더 정확한 설명일 수 있겠다.

#영어로글쓰기

의식은 상호지식(co-knowledge)이다

 

“인간 내부의 정신활동은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발달한 실천적 활동(practical activity)에서 창발(emerge)하며, 각각의 새로운 세대를 지나는 개개인의 개체발생(ontogenesis) 과정에서 형성된다. 이는 실재가 정신에 반영되는 방식 또한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 다시 말해 실재와 자신의 활동을 반영하는 주체의 기능은 창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무엇인가? 비고츠키가 즐겨 말했듯, ‘의식은 상호-지식(co-knowledge)’이다.” (A. N. Leont’ev, 1981)

여기에서 상호지식이라 함은 (1) 개인의 의식이 (2) 사회적 의식 및 언어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개인의 의식과 사회적 의식, 그리고 그 의식이 반영된 매개 중 가장 강력한 언어가 변증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나의 언어로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개인의 의식은 사회적 의식이 반영된 삶의 다양한 활동들에 언어를 매개로 참여하면서 점진적으로 창발하는 것이다.

Lantolf & Thorne, 2006, p. 216

#비고츠키사회문화이론

중재 그리고 관리

비고츠키 심리학의 핵심개념 중 하나인 중재(mediation)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에 활용되는 기술들은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매개한다. 기술은 결코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새로운 행위와 관계, 아이덴티티의 형성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래 전 아래 글을 통해 상술한 바 있다.

무크(MOOC)와 거꾸로 교실: 기술은 교육을 구원할 수 없다

오퍼레이션 이론가인 러셀 엑코프(Russell Ackoff)는 이와 비슷한 결의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관리자들은 각각 독립적인 문제들과 대면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하는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동적인 상황들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을 엉망진창으로 얽힌 상황들(situations messes)이라고 부른다… 관리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단지 엉망진창인 상황들을 관리할 뿐이다. (Managers are not confronted with problems that are independent of each other, but with dynamic situations that consist of complex systems of changing problems that interact with each other. I call such situations messes. . . . Managers do not solve problems, they manage messes.)”

인간의 행위 대부분이 물리적, 제도적, 심리적, 언어적 매개에 의해 중재된다는 관점은 세계를 개체들의 정적 집합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의 동적 연합체로 보는 세계관과 통한다. 매개가 중재의 패턴을 바꾸어 인간과 대상,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바꾸어 놓듯 시스템적 사고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대상들이 ‘엉망진창으로 얽힌 상황들’에 주목한다.

#비고츠키사회문화이론

응용심리학이 필요치 않은 이유

심리학의 기본 단위를 개인과 그 개인의 정신작용의 세부 요소들로 설정하는 경향 (미국 심리학계) VS 심리학의 기본 단위를 개인의 사고를 조건짓고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물적, 문화적, 제도적, 시스템적 조건 및 구체적 활동으로 설정하는 경향 (소비에트 심리학계) —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사뭇 크다.

Michael Cole은 소비에트 심리학의 주요 전통 중 하나인 액티비티 이론의 가정을 받아들일 경우 ‘기본 심리학’과 ‘응용 심리학’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 자체가 분석의 대상이 된다면 기본 심리학의 결과들을 선별하고 종합하여 인간행동에 적용하는 일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액티비티 자체를 분석하면 액티비티에 대한 함의는 자동으로 도출되기에 응용의 과정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비고츠키사회문화이론

활동이론 – 미국과 소비에트의 경우

“하지만 우리가 심리학적 분석의 단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들은 사뭇 다르다: (소비에트 심리학 특히 액티비티 이론(activity theory)에서 다루는) 행동, 동작, 활동 등 대신에 (미국에서는) 스크립트, 표상, 프레임, 그리고 전략 등이 사용된다. 미국 심리학의 분석단위(the unit of analysis)는 매우 확고하게 개인에 머물러 있다. 개인이 처한 환경은 단지 해당 개인에 접근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소비에트 학자들은 우리에게 사고(thinking)란 활동(activity)의 시스템들 간의 상호작용, 다시 말해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단위들”이 이루는 시스템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표현해 준다는 점을 말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 Michael Cole. (1981). Wertsch, J. V. 편저 The concept of activity in Soviet psychology. (Sharpe) 서문 중에서

#비고츠키사회문화이론

나의 강의 스타일

Posted by on Aug 26, 2018 in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내가 경험한 괜찮은 대학강의의 교수자 스타일은 크게 둘로 나뉜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수많은 변이형이 있겠지만 극단값을 보자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1. 세심한 커뮤니케이터형: 최대한 잘 준비하고 정리해서 학생들과 소통하려는 강사. 친근하고 친절한 스타일을 유지한다.

2. 궁구하는 지식인형: 일정한 지향과 세계관을 가지고 깊이 궁리한 바를 전달하는 강사. 문제의식으로 거득 차 있으며 때로 고뇌에 찬 모습을 보인다.

학생들이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주로 1번의 모습을 지향해 왔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엄청나게 준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2번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연륜은 깊어져도 꼰대가 되진 말아야 하는데.

사실 적지 않은 학생들은 아래 두 가지 요인으로 강의를 평가하는 듯하다.

1. 할 거 많아?
2. 학점 잘 줘?

그래도 어디 가나 깊이 생각하며 더 많이 배워보려는 학생들이 있어 고마운 마음이다. 이번 학기도 함께 고민하고 궁리해 보자구!

덧. 고백 & 부탁
방학이 끝났다는 게 가장 큰 고뇌지만 보여주진 않겠다. 너희들도 같은 심정이라는 거 잘 알고 있다. 서로 모르는 척 하면서 학기 초부터 열심히 달려 보자.

텍스트 읽기 과정에 대한 소고: ‘사이’, 바흐친, 주석, 그리고 여정

읽기의 과정은 주어진 문자를 해독하는 일을 훌쩍 뛰어넘는다. 텍스트 이해는 대개 다음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1. 주어진 텍스트를 읽는다.
2. 생략된 텍스트를 (아마도 마음 속으로) 쓴다.
3. 주어진 텍스트와 생략된 텍스트를 비교한다.
4. 이 둘의 관계를 현재 텍스트의 앞뒤 문맥에 비추어 파악한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데, 이런 거다. 아래 트윗을 보자.

“What doesn’t kill you gives you a lot of unhealthy coping mechanisms and a really dark sense of humor” by @mermatriarchy

이 트윗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 이해에도 못미친다. 위에서 밝혔듯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문장의 구조와 단어에 대한 이해를 훌쩍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트윗을 이해하는 과정을 상세히 그려보자.

1. 주어진 트윗을 읽는다.
2.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떠오르는 생략된 텍스트를 마음 속으로 쓴다. (생략된 텍스트는 글쓴 이의 마음 속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내가 쓰는 텍스트와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텍스트가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3. 본 트윗과 생략된 텍스트를 비교한다.
4. 트윗 자체의 내용과 더불어 이들을 비교한 결과가 바로 이 텍스트의 의미다.

자 그렇다면 위의 2번에서 언급한 ‘생략된 텍스트’의 후보들을 찾아보자. 나는 이들 중 Kelly Clarkson의 “What doesn’t kill you”라는 노래 가사 중 핵심 대목인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를 머릿 속에 써놓았다. 물론 이 노래 가사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입 위에 오르내리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읽기는

(1) 트윗을 읽고
(2) (수많은 이들의 입 위에 올려져 있다가 Kelly Clarkson의 노래 가사 내에 자리잡은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을 떠올리고,
(3) 이 두 가지를 비교하여
(4) 트윗의 의미와 이 비교의 결과를 중첩시켜 놓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한가? 이 두 텍스트가 서로 조응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지 여부에 따라 이해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숨겨진 문장에 담겨 있는 “stronger”는 아래의 “unhealthy”와 조응하며 “unhealthy”의 수사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반의적 관계가 문장의 의미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 것이다.

이 배가된 효과는 다시 “dark”가 주는 느낌과 연결된다. Unhealthy와 dark의 유사성은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숨겨진 텍스트 즉, stronger와도 연결된다. 숨겨진 텍스트가 드러난 텍스트와 연결되며 의미의 연쇄적 파장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단절(stronger/unhealthy)도, 연결(unhealthy+dark)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문장들이 꽤나 많다는 것이며, 텍스트 읽기가 거듭될 수록 그 수가 급속히 증가한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내가 Kelly Clarkson의 노래 대사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운빨’이다. 이게 보이지 않았다면 이 텍스트의 의미는 사뭇 앙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Kelly Clarkson 없이 이 트윗을 읽었을 때 내가 파악한 의미는 트윗을 쓴 이가 의도한 바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문장을 떠올릴 수 있는 ‘운’의 단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동일한 작가 – 어, 이거 지난 번에 이 사람이 한 트윗에서 연결되는데?
(2) 어휘의 중첩 – 음, OO라는 작가도 이 어휘 자주 쓰는데, 그거랑 관련이 있나?
(3) 비슷한 문법 형식 – Mistakes makes sucess라니 나는 Practice makes perfect가 생각나는군.
(4) 비슷한 의미 – 이거랑 비슷한 속담엔 OOO가 있지.
(5) 비슷한 운율이나 발음 – 어 이거 발음이 OO랑 비슷하네.
(6) 최근의 유행어 – 요즘 개그맨 누가 이거 맨날 하는데, 그땐 OOO라고 하지.

인간의 패턴 인식 능력은 상당히 뛰어나서 그 어떤 요소라도 걸리기만 하면 관련된 데이터베이스를 순식간에 찾아내 읽기 과정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다른 표현 혹은 사건애 대한 기억을 발생시키는 요인(trigger)은 그야말로 오만가지인 것이다.

읽기에 있어 해당 텍스트만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수많은 잠재적 텍스트가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은 바흐친의 텍스트관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생각을 빌려 말하자면 어떤 문장도 독립적이지 않으며 특정한 컨텍스트에서 누군가의 입에 올려졌던 말을 가져와 자신(만)의 ‘엑센트’를 부여한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세계에 떠돌고 있는 수많은 목소리가 내 입안에 들어왔다가 튕겨 나간 메아리일 뿐이라는 말이다.(그래서 바로 위에 “만”에 괄호를 넣었다. 세상에 나만의 말이 있긴 한건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의 입에서 나올 새로운 ‘액센트’는 다음 문장 쯤 될 것 같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ange to death.”

이런 관점에서 모든 텍스트 읽기는 생략된 혹은 잠재적 텍스트를 새로 쓰고, 이 두 가지를 비교하여 자신만의 주석(annotation)을 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읽기는 내 앞에 있는 문자들로 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문자와 그 문자를 낳은 수많은 문자들의 사이로 향한다.

자 이 트윗이 나에게 한 일을 정리해 보자.

1. What doesn’t kill you gives you a lot of unhealthy coping mechanisms and a really dark sense of humor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은 일을 겪고 나면 갖가지 건강하지 못한 대응기제들과 진짜 어두운 유머 감각을 갖게 되지.)

2.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가 생각나는군. 죽을 만큼 힘들진 않는 일을 겪고 나면 더 강해진다고 하더라고.

3. 둘을 비교하니 재미있군. Stronger가 아니라 unhealthy네. 그러면 dark해지지. dark는 마음이 dark할 수도 있지만 유머감각에도 곧잘 쓰이지.

4.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ange to death 근데 내 생각엔 죽지 않을 만큼 힘든 일을 당하고 나면 죽도록 이상해져.

이렇게 어떤 텍스트가 그에게서 나로 왔고, 나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고, 또 다른 누군가로 향한다. 새로운 여정에 나선 것이다.

지하철은 어느 방향으로 달리나?

Posted by on Aug 23, 2018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모두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서울 지하철 2호선과 6호선의 경우 역에 관계 없이 이전 역은 왼쪽에, 현재 역은 오른 쪽 끝에 위치한다. 하지만 아래 방향으로 탈 때 정작 열차는 오른 쪽에서 들어온다. 저 그래픽은 일종의 메타포이지만 그걸 인지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진 않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써내려가는 문자시스템을 가진 이들은 “공원에서 사람이 지나갔다”고 하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진 몇 장을 주고 시간순 배열 과업을 해도 왼쪽이 과거, 오른쪽이 현재 혹은 미래로 배치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문자배열 순서가 반대인 히브리어 화자들에게서는 상반된 경향이 발생한다.) 인류의 진화도를 보면 구부정한 거북목 배불뚝이 사무원은 맨 오른쪽에 위치한다. 웹사이트를 볼 때 시선의 움직임도, 달력의 날짜 배치도 마찬가지다. 문자, 시간, 지각, 공간의 배치 등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

덧. 이OO님의 답글을 보고 – 수직선도 마찬가지로 왼쪽이 음수, 오른쪽이 양수이다. 위/아래는 키가 자라는 것이나 중력의 영향으로 직관적인 면이 있는데 좌/우와 증감은 바로 매치가 안되는 것 같다. 일전에 “인간이 압도적으로 왼손잡이었다면 수직선의 방향이 바뀌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포기’당’한 세대의 아픔

 

나는 ‘포기자 담론’에서 포기의 주체를 학생들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면밀한 조사를 통해 교과교육의 실태를 파악하고 학생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 소위 ‘포기자’를 줄이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의 포기’ 이면에는 국가와 교육당국, 일부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포기가 있고, 이러한 포기의 핵심에는 교육에 대한 이 사회의 포기가 자리잡고 있다.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 대한 보살핌을 포기하고, 교육체제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고, 국가는 새로운 시민을 키워내기를 포기했다. 이렇게 보면 분명 학생들은 포기’당’한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내팽개쳐진 세대가 배움의 일정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이상한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전통적인 교육의 요소는 <교사-교육내용-학생>의 세 축으로 설명된다. (이 모델의 정합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논의를 위해 잠시 차용한다면) 핵심적인 문제가 ‘교육내용’에 있는가?

나는 도리어 교사와 학생의 문제, 관계의 문제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교사나 학생 개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제도적 역학이다. 교육과정의 양과 내용에 대한 토론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것이 핵심이 될 수는 없다. 개별 주체들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노력의 범위와 깊이를 정하는 것은 구조적 요인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 정확히 3년 전 오늘 쓴 글을 하필 오늘같은 날 읽게 된다. 교육정책은 늘 ‘표류중’이었으나 이젠 더욱 거센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문제는 언제나 존재했으나 그나마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문제로 느리게 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로 큰 흐름이 단절되었다. 지난한 싸움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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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

고전적 동기이론의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 /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 구분은 문제가 많은 이분법이다. 인간과 공동체, 또 더 큰 사회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상황에서 동기를 한 개인의 ‘밖에 있다’거나 ‘안에 있다’고 말하기 힘든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동기는 안/팎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안~밖이라는 연결고리, 즉 외부와 내부를 휘감는 흐름으로 파악하는 것이 좀더 생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재적 동기’가 ‘내재적 동기’를 압도하는 경우 문제가 커지는 게 사실이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왜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돌아오는 답은 과도한 외재적 힘을 보여준다. “대학 가려고”, “뒤쳐지지 않으려고”, “성적 잘 받으려고”, “부모님이 하라고 하니까” 등등..

하지만 가장 좋은 대답은 “할 수 있으니까요”나 “재미있잖아요”가 아닐까. 특별한 이유 없이 지속되는, 나아가 재미를 발생시키는 학습생태계의 구축, 이를 통한 ‘내적’ 흥미의 발현, 이것이 다시 자신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외적’ 기제로 작용하게 되는 선순환이 학습동기를 이해하고 신장시키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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