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용론, 진실, 그리고 정치

Posted by on Apr 29,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화용론(맥락과 상대에 따라 말을 사용하는 법)의 기본 전제는 대화자들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사실 계속 말을 바꾸거나 진실을 외면하는 상대와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러 상대를 속이지 않는다”는 그 누구와 대화하더라도 지켜야 할 기본적 원리가 된다.

인간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체득한 원리는 거짓말에 대한 민감성과 분노로 나타난다. 극단적인 경우 거짓말을 한 상대와 대화를 아예 끊어버리기도 한다. 언어습득을 통한 사회화 과정은 대화의 진실성에 대한 암묵적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정치에서는 이 원칙이 완벽하게 깨진다. 대화에서의 진실에 기반한 협력원리(cooperative principle)는 그저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진실은 전략의 하위어로 전락한다.

시민이 넘어야 할 것은 타 정치세력이기도 하지만 진실을 철저히 도구로 삼는 정치문화이기도 하다. 특정한 정치세력을 넘어서는 것과 문화를 바꾸는 것이 충돌할 때가 있지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태도를 견지하지 않고 정치를 바꾸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지지자이기 이전에 시민 아닌가.

행복한 사전

요즘 Merriam-Webster 사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Kory Stamper의 책 <Word by Word: The Secret Life of Dictionaries>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가 마이너스가 되는 직종이래나 뭐라나. Oxford 영어사전 이야기를 다룬 <교수와 광인>, <The meaning of everything>이나 Roget 유의어 사전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The Man Who Made Lists> 같은 책을 가지고 사전학 수업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덤으로 영화 <행복한 사전>도 함께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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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짝과 함께 <행복한 사전>을 보았다. 여러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받았는데, 가장 먼저 보자고 한 건 짝이었다. 그냥 저 동네에서 일어나는 꽤나 감동적인 픽션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 건 직업 때문이었을까? (짝은 책을 만들고 나는 언어학을 공부한다.)

‘사전’하면 단어와 뜻풀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종이사전을 열면 단어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고, 단어마다 n개의 의미가 정리되어 나온다. 하지만 이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요 유구한 세월 끝에 달린 찰나다. 영화가 잘 보여주듯 사전을 만드는 것은 복잡다단한 일이다.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단어와 의미를 일일히 기록해야 한다면 그 수고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책으로서의 사전은 시쳇말로 ‘역대급 노가다’가 만들어 낸 거대 구조물의 표면일 뿐이다.

하지만 사전작업은 철학이 반드시 필요한 노가다다. 사전의 방향을 정하고 표제어를 고르는 일이 시대의 윤곽을 그려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한가? (직업적으로 선입견에 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새로운 사전 편찬의 첫걸음은 원칙에 따라 더할 단어들과 뺄 단어, 그리고 남겨둘 단어들을 고르는 일이다. 먼저 떠나야 할 단어와 남겨둘 단어, 그리고 새로 맞이해야 할 단어들로 새로운 사전이 채워지면서 지난 사전들의 시대와 새로운 사전이 열어젖힐 시대 사이의 세계가 윤곽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표제어의 선정 자체만으로도 역사와 시대를 구획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표제어 선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후 더 큰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분류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를 하나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 두 개의 표제어로 처리할 것인지부터 엄청난 골칫거리다. 유의어와 반의어를 정의하고, 용례를 설명하는 데까지 이르면 해야 할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이뿐이 아니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장기간의 작업에서 특정 단어의 의미 분류에 적용한 원칙을 모든 단어에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각각의 단어에 알맞는 예문을 확보하고 분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사전 작업은 그야말로 산너머 산이다.

사전을 만드는 사전 편찬자는 바보가 될 운명이다. 사전이 출판되는 순간 많은 단어들의 의미와 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A라고 정의했던 단어는 B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고, C라는 단어는 유행에서 사라지고 없다. D라는 단어은 그 뉘앙스가 180도 바뀌어 있고, E라는 단어에는 정치색이 너무 많이 들어가 버렸다. F를 사용하면 꼰대스럽고, G를 사용하면 왠지 잘난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단어를 모으고 정의와 예시를 써내려갈 때는 안그랬는데 말이다. ㅠㅠ

그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사전을 만든다고 해도 표제어 중 상당수가 화석화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세월을 막을 수 없기에 단어들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간다. 사전은 이렇게 삶과 죽음, 성장과 퇴화, 변심과 배반의 모습이 모두 들어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사전을 만드는 것은 인생과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사전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데 <나>라는 사전을 채울 단어와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내가 아닌 세계와 타인에게서 온다. 세상과 사람들에서 배운 것들로 <나>라는 사전을 채워가고, 의미를 써내려간다. 사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소통이다.

하지만 늘 베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 멋대로 단어를 만들 수는 없지만 <나>라는 사전에 등재할 표제어를 고를 권한은 나에게 있다. 그 표제어에 가장 알맞는 예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직접 예문을 써내려 갈수도 있다!

사전이 언제나 미완성이듯 나도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지금 내 안에는 새로운 생각과 죽어가는 생각, 오랜 시간 나의 일부로 살아온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 지지리 못났지만 내가 살아온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는 사전이 바로 <나>다.

우리 각자가 사전이라면, 당신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조금 다를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들어있는 단어 중에서 내 마음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으리라. 당신이라는 사전에서는 ‘돈’이 스무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 밝은 단어이지만, 나라는 사전에서는 두어 가지 뜻을 지닌 어두운 단어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는 사전에 등재된 수많은 단어들이 내 사전에서는 단 하나의 추상어로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우린 참 많이 다른 사전이지만 몇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나라는 사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당신들이라는 사전이 필요하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서로를 정의하고 서로에 의해 정의당하는 일이며, 그 와중에 이해와 오해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기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때로는 잘 정의된 단어로 나 자신을 빼곡히 채우는 것보다 빈 페이지들을 넉넉히 남겨두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2014.4.10.

감수성의 정치

Posted by on Apr 3,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감수성’을 계급과 젠더, 생태 이슈의 중심에 놓는 일은 위험천만하지만, 감수성의 영역이 제도의 틀을 넘어선 아비투스의 문제이며 일상을 지배하려는 권력들의 전쟁터라는 사실을 놓쳐서도 안된다. 순간 순간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어떤 사진을 찍고 포스팅하는지, 어떤 가사와 몸짓에 열광하는지, 어떤 ‘짤’이 순식간에 퍼지는지, 어떤 이미지에 가슴이 떨리는지, 어떤 용어들이 마음을 어지럽히는지. 결국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혐오하게 되는지는 감수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오감의 작동방식과 정보에 대한 태도를 구획하는 감수성의 권력은 은밀한 만큼 강력하다. 계급, 젠더, 생태 이슈들에 대한 시민의 각성과 성장은 감수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떼어놓을 수 없다.

가르치는 게 좋아 교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Posted by on Mar 30,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모둠활동과 또래교수(peer teaching)를 자주 경험하는 학생들에게서 “가르치는 게 재미있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방학이나 정년 보장 등의 외적 요인이 아니라 “실제로 친구들을 가르쳐보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게 즐거우면 교사를 하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사회는 불행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어디에나 일어난다. 망하지 않는 사회의 기본 조건이 시간과 장소에 관계 없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가르침/배움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교사”나 “학생”으로 불리지 않더라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사회라야 희망이 있다.

학교 담장 안에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으로서, 공교육체제 하에서의 선생과 학생의 중요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교육의 문제를 교육계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회는 기만적이며, 교육을 위해 오로지 교육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편협하다.

진짜 가르치는 게 재미있나? 그렇다면 배움도 재미있을 공산이 크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재미있나?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을 해도 잘 해낼 잠재력을 가진 것이다. ‘성공할 것’이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선생의 길 말고도 수많은 가르침의 길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편재[遍在]한다. 결코 교육계라는 곳에 편재[偏在]하지 않는다. 교사가 되어 가르치는 일은 멋지다. 하지만 교사보다 더 멋진 ‘교육자’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간단한 독서지도 팁

읽기 활동에서 널리 사용되는 <연결하기(making connections)> 전략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텍스트와 자기 연결하기: 텍스트에 나와 있는 요소들과 자신(친구, 가족, 학교)을 연결한다. (Text & Me)

텍스트의 인물, 소재, 단어, 내용, 삽화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의 수준에 따라 “뭐가 떠오르니?”라고 추상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고, 그래픽 오거나이저를 통해 특정 텍스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대조 하도록 할 수도 있다. 텍스트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다양한 시도는 텍스트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텍스트와 텍스트 연결하기: 텍스트 내/외의 요소간에 연결점 찾기 (Text & Text)

(1) 텍스트 내의 요소들을 연결하기: 텍스트 내의 어떤 요소들이건 연결해 본다. 단어와 단어, 단어와 그림, 글과 제목 등등을 연결할 수 있다. 문법적 요소를 가지고 대명사나 관사 등을 앞의 명사와 연결시키는 활동을 할 수도 있다. 특정 등장인물의 대사만을 모아서 볼 수도 있다. 인물간의 관계도를 그리거나, 인물들간의 관계를 페이스북 ‘좋아요/싫어요/화나요’로 표현할 수도 있다.

(2)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연결하기: 특정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들을 비교, 대조, 연결하는 작업이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여러 개 읽었다면 두세 작품을 놓고 ‘비교/대조형 독후감’을 쓰게 한다. 비슷한 소재의 글을 읽은 바가 있다면 두 글을 종합할 수도 있다. 자신이 썼던 일기 여러 개를 재료로 하여 자주 사용하는 단어, 기분을 나타내는 표현, 의성어와 의태어 등을 찾아보라고 할 수도 있다.

3. 텍스트와 세계 연결하기 (Text and the World)

(1) 세계에 비추어 텍스트 이해하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와 텍스트 내에서 그려진 세계를 비교해 본다. 특정 캐릭터나 사건의 개연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텍스트 내의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반응이나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다.

(2) 세계에 비추어 텍스트 비판하기: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텍스트를 비판해 본다. 텍스트가 왜곡하거나 숨기는 것은 없는가? 우리나라라면 어떨까? 우리 동네라면?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라면 비슷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이와 같이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 사회, 그리고 다른 텍스트들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나아가 이를 쓰기로 연결하는 활동을 고안해 보자.

#3년전오늘 #재방송

수업스케치

<종이찢기>

“학원은 어때요?”
“그냥 똑같애요. 아 얼마 안 있다가 또 시험대비 한대요.”
“아 빠르네요. 시험 때 학원 가서 공부하는 거랑 집에서 하는 거랑 어떤 게 더 나은 거 같아요?”
“음… 집은 공부하는 데가 아니예요. 학원 안가면 카페같은 데 가서 있고 그래요.”
“ㅎㅎㅎ 그렇죠.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집에서 잘 노나 봐요.”
“특별히 할 거는 없는데 그냥 이것 저것 하고 놀아요.”
“시험 때는 더 놀고 싶죠? 저도 대학교 때 시험공부 하려고 하면 평소 관심도 없었던 책, 영화, 뭐든 다 눈이 가더라고요.”
“저는 시험 때는 종이만 찢어도 재미있어요.”
“ㅎㅎㅎㅎ (종이 찢는 제스처를 취하며) 종이만 찢어도 재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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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 선생님>

“새로운 선생님들은 어때요?”
“OO 과목 선생님이 웃거요.”
“왜 뭐가 웃겨요?”
“자꾸 수업하다가 다른 선생님 뒷ㄷㅁ 까요.”
“정말요?”
“네네. XX과목 선생님하고 친하대요. 근대 맨날 그 선생님 가지고 뭐라 해요.”
“아 친하다고 막하시는 건가요? ㅎ”
“지난 번에는 XX 선생님이 머리스타일을 바꿨는데, 그거 가지고 엄청 뭐라 했어요. 그게 어울리냐고. 진짜 이상하지 않냐고.”
“ㅎㅎㅎ 재미난 선생님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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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뚱멀뚱, 하지만 성공!>

“자 Could를 쓰면 Can보다 좀 공손하게 들려요. 왜 그런지 설명해 볼게요. 이게 좀 어려운 이야긴데 들어봐요.”
“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잖아요.”
“(멀뚱멀뚱)”
“그래서 오로지 현재에 있는데, 현재는 직접 볼 수 있죠?”
“네.”
“과거는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야 되잖아요. 옛날 생각 하려면. 눈 앞에 펼쳐지는 건 현재. 머리 속에 담긴 건 과거.”
“(당연하다는 듯 멀뚱멀뚱)”
“조동사도 그런 게 있거든요!”
“(계속 멀뚱멀뚱)”
“그래서 조동사도 Can이나 May같이 원래 형태로 쓰면 좀더 직접적이고 ‘들이대는’ 느낌이고요.”
“(포기한 듯 멀뚱멀뚱)”
“Could나 might를 쓰면 과거처럼 좀 거리가 느껴지는 거죠. 멀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그니까 정리하면, 지금 눈 앞에서 확 들이대면서 이야기하는 거랑 옛날 이야기하는 거랑, 어떤 게 더 강하게 느껴질까요?”
“들이대며 이야기하는 거요.”
“그쵸? 그건 알겠죠?”
“네.”
“그것처럼 조동사도 과거형을 사용하면 힘도 빠지고 들이대는 것도 덜한 거예요. 오케이?”
“네.”
“그래서 확 들이대는 Can you? 보다는 과거형을 사용한 Could you? 가 더 공손하게 느껴지는 거죠.”
“…”
“그럼 친한 친구한테는 Can you를 자주 쓰겠어요? Could you를 자주 쓰겠어요?”
“Can you요.”
“오케이 좋아요.”

(한주 후)

“자 지난 주에 Might랑 may랑 어떤 게 더 직접적이라고 했죠?”
“May요.”
“Can 이랑 could 중에서는?”
“Can이요.”
“(쾌재를 부르며) 정확히 기억하고 있네요!”

한 주에 한 시간이 뭐 대수냐 싶지만 또 이렇게 기억해 주는 친구들 덕에 기쁨으로 가르칩니다.

3월도 절반이 넘게 갔습니다.

‘멘탈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

Posted by on Mar 14,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몇 해를 찬찬히 돌아보니 망친 수업들을 관통하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은 긍정적 의미, 즉 학생들을 무섭게 생각하여 철저히 준비하고 겸손히 수업에 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무서웠다는 뜻이죠. 불만 섞인 듯한 질문, 까칠한 언행, 성적에 대한 과민반응, 앞뒤 안가리는 피드백, 과제에 대한 불만, 수업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무서웠다는 말입니다. 극소수 학생들 이야기지만 털어버리기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두려움이 스며든 수업은 삐걱거립니다. 큰 사고는 없지만 마음의 이물감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휘청거리듯 한 학기가 가면 대단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커다란 짐이 등에 떡하니 올라와 있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힘겹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데 족히 한 학기는 걸립니다. 몇몇 말들은 평생을 따라다닐 기세입니다.

가끔 ‘강한 멘탈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같은 기사 제목을 봅니다.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멘탈이 강하다는 건 뭘까. 멘탈이 제대로 박혀 있으면서 강할 수가 있는 건가, 싶습니다. 그냥 제 기준에서 말이죠.

선생이 강자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을 알지만 마음은 늘 전전긍긍. 여전히 초짜인가 봅니다.

피할 수 없는 일, 계속 그럴 수밖에 없겠습니다.
가끔 하소연 들어주시는 분들, 고맙습니다.

Disappearing into the Character

Posted by on Mar 13,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조셉 고든-레빗은 <스노든>의 스노든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실제로 에드워드 스노든과 네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목소리나 억양 등에서 각고의 노력이 느껴진다. 한 인터뷰에서 고든-래빗은 “배우가 인물 속으로 사라지는” 연기가 좋다고 말했는데, “disappear into the character”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맡은 배역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배우. 그 사람이 되어버린 배우. 등장이 곧 퇴장인 배우.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은 풍경을 완성시킨다. 일부가 되길 거부하는 사람은 풍경을 오염시킨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사라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듯하다.

논문은 당신 자신의 글

Posted by on Mar 5,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학술적 글쓰기 첫 시간이 끝나고 한 학생이 다가왔다.

“이거 참 고민이네요.”
“아 어떤?”
“제가 영어로 논문을 쓸 일은 없는데요.”
“아… 수강할까 말까 고민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네. 저는 생각은 글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네.”
“그래서 매일 글을 쓰고 있어요. 글쓰기 강좌 등록해서 서평 쓰는 것도 배우고.”
“아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네. 그런데 우리말로 쓰는 건 제가 딱 제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드는데, 영어논문을 쓰는 건 다른 사람들 글을 모델로 삼는 글이라… 남의 글이잖아요.”
“아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는데, 결국 영어논문도 자기 글이예요.”
“그런가요?”
“그렇죠. 초반에는 다른 사람들 글에 영향을 많이 받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글입니다.”
“그렇군요.”
“사실 자기 글이라고 생각할 때 훨씬 더 좋은 논문이 나와요. 이건 영어든 한국어든 상관이 없고요. 수업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학기 지나면서 말씀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다음 주에 뵐 수 있으면 뵙죠.”
“예.”

다음 주에 그 학생을 만나게 될까? 설령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논문은 자기 자신의 글’이라는 말의 뜻을 서너 달 만에 온전히 이해시킬 수 있을까?

수강생이 너무 많아져 고민이 되다가도, 내 고민보다 더 큰 고민을 안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면 뭔가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은 게 사실이다. 수다쟁이 선생 같으니라고.

다음 시간, 다시 그 학생을 만났으면 좋겠다.

교실 연구의 상반된 증거들 – 두서없는 메모

Posted by on Mar 2,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사례 1: 한 학생은 ‘난 많이 변했어’라고 하는데, 상호작용 데이터를 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사례2: 다른 학생 하나는 ‘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라고 하는데, 참여와 소통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사례1의 학생은 인터뷰 상황에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데 주력한 듯하다. 의도적 과장은 아니라 판단되지만 좋았던 순간들을 집중적으로 선택하여 기억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사례2의 학생은 인터뷰에서 ‘나는 그저 나일 뿐, 그닥 변할 게 없다’는 스탠스를 유지한다. 자기개념(self-concept)이 확고하며, 명백히 관찰되는 차이마저 ‘외부요인에 따른 일시적 변화’로 해석하는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타인이 생각하는 나와 다르다. 두개골 속의 나와 사회 속의 나의 차이는 내가 듣는 내 목소리와 네가 듣는 내 목소리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이 차이에 대한 감수성도, 해석해 내는 방식도 다르다.

고민이 되는 지점이 있다.

사례1에 등장하는 학생의 말은 행동에 대한 과장일 뿐인가? 아니면 또다른 행동인가? 사례2에 등장하는 학생은 변화했다고 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감지되지 못하고 때로는 부정당하기까지 하는 변화는 그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 사회적 존재로서 인식되는 자신과 정체성이 그려내는 자신이 충돌하는 상황은 언제나 묵직한 고민을 던진다.

허나,

학생들에게 내부와 외부의 갈등을 해결하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내부와 외부라는 이분법적 범주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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