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just come and go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내가 활동주(agent)로서 자율적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나고 죽는 것은 주체적 선택과 행위와 거리가 멀다. (영어를 기준으로) 태어나는 행위는 대부분 수동태(be born)로, 죽는 행위는 대부분 자동사(die, pass away)로 표현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동사는 “fall in love”인데, “fall”은 주체의 능력이나 의도를 가장 적게 담고 있는 동사 중 하나다. 흔히 말하는 ‘불가항’의 행위인 것이다.

어쩌면 물흐르듯 산다는 건 자동사를 늘려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Rise, breathe, walk, sit, stand, smile, laugh, cry, clap 그리고 언젠가 disappear, vanish…. I just come, stay a while, and go.

#인지언어학이야기 #잡생각

영어로 논문쓰기: 네 가지 기둥

영어로 논문쓰기를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 4가지. (말장난 아닙니다. ^^;;)

1. 영어에 대한 이해 (도구언어에 대한 이해)
2. 논문에 대한 이해 (장르로서의 논문에 대한 이해)
3. 쓰기에 대한 이해 (쓰기행위에 대한 실천적, 메타인지적 이해)
4. 영어로 논문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이해 (프로젝트로서의 논문쓰기 수행에 수반되는 다양한 지적, 정서적, 정보적 요인에 대한 이해)

#영어로논문쓰기

똥고집

Posted by on Feb 6, 2019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사실 이과생들이 들어도 꽤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수강생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도 이과생들로부터 문의를 받을 때마다 “개념적 뼈대는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예시는 인문사회계 논문 텍스트를 사용합니다.”라고 원칙적인 답변을 한다. 뭐랄까. 조금의 ‘거짓’도 없이 수강생을 모으고 싶은 똥고집이라고 해야 하나.

첫 강의가 토요일로 다가왔다. 경험상 준비과정은 ‘충격과 공포’에, 강의과정은 ‘설렘과 기쁨’에 가까왔다. 무려 여덟 번을 한 강의인데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그래도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공부할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영어로논문쓰기

서문, 두 가지 관점

서문(序文)은 처음 말이라는 뜻으로 Preface나 Introduction으로 번역된다. 책의 머리에 위치하여 본문으로 이끄는 글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본문과 결론이 존재하고 난 뒤라야 서론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현상적으로는/독자들에게는 ‘서문’이지만 생성적으로는/저자에게는 ‘결문(結文)’이라 하겠다. 독자를 어디로 이끌지 온전히 알게 될 때 어떻게 이끌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지도교수 vs. work with someone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미국 대학원에서 지도교수가 누구냐고 물어볼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Who do you work with?”입니다. 직업을 물어볼 때 “What do you do?”라고 물어보듯 지도교수가 누군지 알고 싶을 때는 “Who do you work with?”라고 간단히 묻는 것입니다.

말을 바꾼다고 사람이나 시스템이 갑자기 변할 리야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work with”라는 언어패턴에 담긴 수평적 관계를 좋아합니다. “With”에는 상하가 없습니다. Someone to work with.함께 일하고 만들어 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지도교수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지도교수’는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를 다소 위계적으로 그립니다. ‘지도’는 보통 전문성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경우 “work with ~”보다는 “work for ~의 관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교수와 함께(with) 일한다기 보다는 교수를 위해(for) 일하는 것이지요.

페이스북에서 또 강의에서 명민하고 실력있는 대학원생들을 종종 만납니다. 뛰어난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을 그저 ‘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도적 협력자’로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지도할 사람” 보다는 “work with”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학문의 세계를 먼저 경험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근본적으로 수평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미 그런 곳들이 있겠지만, 석사생이든 박사생이든 함께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협력자(collaborator)로서 대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 물론 영어에도 academic advisor / dissertation advisor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다소 격식을 갖춘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며 한국어의 ‘지도교수’의 사용역(register)과 딱 대응되지는 않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일상 대화에서 ‘지도교수’가 많이 쓰이는 반면 영어에서는 ‘work with’와 호칭을 엮은 표현이 자주 쓰이는 것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논문쓰기

 

논문쓰기 강의 단상 (2019)

<영어로 논문쓰기>는 개인강의로 세 번, 대학에서 네 학기를 진행했다. 두세 개의 연구단체에서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핵심을 압축하여 동영상 강의도 찍어봤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중에서는 늘 만족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그만큼 애정이 가는 강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과정이 새롭게 개편되지 않는 한 더이상 대학에서 논문쓰기를 가르칠 기회는 없을 듯하다. 대학원 초기 학술 리터러시와 논문에 대한 개념을 잡아주는 강의가 학과와 학생 모두에게 큰 도움을 준다고 믿지만, 그거야 일개 ‘듣보잡’ 리터러시 연구자의 생각일 뿐 아니겠는가.

개인 강좌의 경우에도 지인을 기반으로 강좌를 여는 방식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듯하다. 흔히들 말하는 “Scale up”을 위해서는 다른 조치가 필요하겠지만 그럴 여유도 열의도 야망도 없다. 물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게 꼭 좋은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우습달까.

지금으로선 논문쓰기 강의를 들은 분들이 간간히 연락을 해주시는 것으로 족하다. 완벽할 순 없겠지만 이번 강의도 알차게 만들어 가야겠다.

논문쓰기 – 단상

(응용언어학) 논문을 쓴다는 것

1.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깨닫는 일
2. 누군가에 대해, 무언가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음을 배우는 일
3. 내가 공부하는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나 자신에 대해 아는 바를 과대평가했음을 깨닫는 것
4. “아주 작은 일”을 해내는 것이 나 혹은 다른 이에게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일
5. 계속 질질 끌면서 일을 끝내지 못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 일
6. 전사(transcription)가 논문 작성 과정 전체의 90퍼센트 이상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음을 배우는 일
7. 꾸준히 쓴다는 거, 말이 쉽지 실천하기 쉽진 않음을 알게 되는 일
8. 이 일의 본질이 지적(cognitive)이라기 보다는 정서적(affective)인 것임을 알게 되는 일
9. 뒤늦게 지도교수가 ‘범위를 좁히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함을 깨닫게 되는 일
10. 궁극적으로는 논문을 쓰는 건 삶을 쓰는 것임을 알게 되는 일

– 2012년 1월. 논문 막바지에 느꼈던 바를 영어로 적은 적이 있다. 아침에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Writing a dissertation (in Applied Linguistics)

A banal list by a struggling writer, determined to love this process (here ‘love’ is not something like in “I love this chair!”; rather, it alludes Leonardo da Vinci’s words, ’If there is no love… what then?’ Anybody wanna give me a word of wisdom or encouragement? :)

1. Realizing that I know almost nothing
2. Learning that I can know just a little, tiny bit about someone or something
3. Realizing that I have overestimated my own knowledge of myself, let alone my field of study
4. Learning that doing that “tiny bit” can mean something significant to me or someone
5. Realizing that it is possible to drag my feet forever
6. Learning that transcription feels like more than 90% of the entire process
7. Realizing that writing constantly is easier said than done
8. Learning that the nature of this process is affective rather than cognitive
9. Realizing that I should have narrowed the scope when advised to do so by my advisor
10. Learning that, ultimately, writing a dissertation is writing one’s life.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논문쓰기 #삶을위한영어공부

저자로서의 권위 그리고 오케스트라

‘~인 것 같아요’, ‘~인 듯합니다’ 등에 대한 단상 (재원님과의 대화 중에서 갈무리 + 덧댐)

조금 다른 현상이긴 하지만 작문과제를 할 때 “I think” “I feel” “I believe” 등의 표현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고쳐지지 않는 경우가 많더군요. 습관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텍스트에 대해 갖는 권위의 문제이기도 하거든요.

저를 포함한 한국인들이 ‘~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과의 거리를 두려는 전략이라고 봅니다. ‘~입니다’ ‘~합니다’와 같은 말투의 사용은 상대방의 인지적, 정서적 영역에 ‘훅~’ 하고 들어가는 걸 막으려는 무의식의 발로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자신이 말하는 내용에 자신이 있고 그에 대한 권위를 확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돌아가지 않고 직선적인 화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국어 화자들이 영어를 사용해서 글을 쓸 때는 이 문제가 더 심하게 불거져 나온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때로 학생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I”와 같은 대명사의 사용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오히려 자신이 텍스트에 대해 갖는 권위를 떨어뜨립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개인 안에 가둬놓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소리를 갖는 전혀 다른 방식을 배우는 것이 학술적 글쓰기의 핵심입니다. 지휘자가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하듯, 저자는 “I”와 “나”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도 자신의 생각을 구현해 낼 수 있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매체에 대한 착각

“모든 매체에는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고유의 변증법이 있다. 즉 매체는 그 매체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들을 연결하고 분리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바로 이 변증법이 매체(medium)라는 개념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러나 정보전달의 과정에서 그것의 존재가 망각되는 매체들(이른바 면대면 매체)이 있다. 예를 들어 원형 탁자에서 대화를 할 때, 이 탁자의 존재는 잊히고, 나아가 우리가 그것을 통해 말을 하고 있는 공기의 존재도 잊혀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몸이 서로 닿지 않는데도 직접적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 언제나 잘못된 — 인상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인상이 잘못인 이유는, (모든 분석을 회피하는 신비적 합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적 소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 의사소통을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전화는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결코 잊히지 않는 매체이다. 이것은 전화의 기술적 성격 때문이 아니다. TV는 전화보다 훨씬 더 기술적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잊는다. 불행하게도 이 점이 TV의 담론을 만족스럽게 만든다. 전화 연결망에서의 대화는, 그 대화가 대화를 중개하는 매체를 실질적으로 안보이게 하는 데 성공할 경우에만 비로소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술적인 도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도전이기도 하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203-204)

생각과 문장에 대한 착각

글을 쓰다 보면 가끔 “머릿속에서는 할 말이 분명한데 이걸 문장으로 풀어놓으면 엉망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는 생각과 쓰기의 존재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생각은 문장만이 아니라 온갖 재료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기억과 경험의 총체 중 일부로, 뉴런들의 다차원적이며 비선형적(non-linear) 연결패턴으로 존재한다. 이에 비해 문장은 하나의 선을 따라 진행하는(linear) 자모와 단어의 연결패턴으로 존재한다. 머릿속 생각과 쓰여진 문장은 분명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전혀 다른 양태로 존재한다. 생각은 외화(externalize)되면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생각이 분명하다’는 착각이다. 분명한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저 할말이 있다는 것, 할 말의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한 생각’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한 생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나, ‘확실히 할 말이 있다’는 확신이나, ‘나에게도 생각이라는 게 있어’라는 자존심을 ‘분명한 생각’과 등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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