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론, 적용, 그리고 다시 읽기

돌아보면 책을 많이 읽지 않은 것보다는 제대로 읽지 않아서, 다시 읽지 않아서, 무엇보다 현실에 적용해 보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방법론 영역의 책은 두루두루 읽는 것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적용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데이터와 씨름해 본 경험을 가지고 다른 책을 읽으면 빠르게 이해되지만 방법론만 계속 읽어대면 추상적, 일반적, 철학적 논의에 머무르면서 ‘구름 속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영어로논문쓰기
#삶을위한리터러시

쓰기에 대한 답없는 질문들

많은 이들이 유튜브로 향하는 이유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명성에 더해 수익이 따라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 아닐까? 영상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을까? 그간 우리 사회가 쓰기교육에 실패한 것은 글을 써내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철저히 평가에 포섭되어 단편적이고 ‘객관적 채점’이 가능한 단문만을 생산해온 것은 아닌가? 만약 어떤 학생이 “유튜브는 이래저래 좋은데 글을 쓰면 뭐가 남나요?”라고 물으면 “원래 쓸모 없는 것이 소중한 것이지”라고 말하는 건 너무나 궁색하지 않을까? “유명해지고 잘하면 돈도 벌 수 있어”를 능가하진 못하더라도 그만큼 강력한 슬로건으로 글쓰기를 어필할 수 있을까? “메이커 교육”에 다양한 글쓰기는 왜 포함될 수 없을까? 어쩌면 대학이야말로 글쓰기 교육의 최종 무덤은 아닐까? 아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일까?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강렬한 이야기가 있다면 글은 자연스럽게 흘러넘친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쓰기교육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쓸만한 삶을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쓰기의 문제는 테크닉이 아닌 삶의 문제이며, 생각과 감정과 갈등과 용기의 문제라는 것.

#삶을위한리터러시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며 (2019)

“We suffer together. Therefore WE are.(우린 함께 고통받지요. 그래서 ‘우리’로 존재하는 거라고요)”

설치형 게시판에 글을 쌓아놓기 시작한 지 20여 년. 그간 만들었다 없앤 개인 웹사이트만도 대여섯 개가 되었다. ‘창작 지식노동자’의 정체성을 갖고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10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comprehensive exam’이라고 불렸던 논문자격 종합시험을 마치고 고민의 흔적을 남기고자 시작한 글쓰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느린 독자/필자라고 생각한다. 우선 읽기의 속도가 천문학적으로(?) 느리다. 성격이 고약해서인지 전공과 관련된 책을 대충 읽어내질 못한다. 게다가 읽기와 쓰기 모두에서 한국어와 영어 모두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렇다고 꼼꼼한 성격도 못된다. 유머마저 진지해서였던지 ‘절대반지’가 아닌 ‘절대진지’로 종종 불렸다. 글이 별 재미가 없다. 직업과 맞지 않는 특성을 두루두루 갖춘 것도 같다.

글쓰는 일이 업의 절반쯤 되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다.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는 분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나의 글은 다소 즉흥적이고 꽤나 무거운데다가 대개 뭉툭하다. 굳이 합리화를 하자면 나의 글은 전위에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기 보다는 조금 뒤쳐져 가면서 옆과 뒤를 살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인 듯하다. ‘커팅 에지(cutting edge)’가 베어낸 나무의 나이테를 세는 일처럼 말이다. 이 또한 나의 정신승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2012년 학위과정을 마치면서 아래 ‘글쓰기 훈련에서 배운 것’이라는 쪽글을 썼다. 타지에서의 삶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어디든 타지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이방인의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내 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논문을 쓰면서 한계에 자주 부딪쳤지만 변방과 경계의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글에서 만족을 느끼기 보다는 늘 모자란 글에서 슬픔어린 불만을 키웠다. 그 불만이 발효되면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허풍없는 태도가 우러났다. 그래서인지 종종 글쓰기를 가르치지만 ‘저처럼 쓰세요’라고 말하기 보다는 ‘We suffer together. Therefore WE are.(우린 함께 고통받지요. 그래서 ‘우리’로 존재하는 거라고요)’라고 말한다.

여전히 글은 힘들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만나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어 기쁘다. 7년 전 글을 읽으면서 글쓰기의 지난함과 설렘을 되새긴다. 내 논문의 감사인사는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Yes, I typed a dissertation. But we wrote it. (네 맞습니다. 논문을 타이핑한 건 접니다. 하지만 논문을 쓴 건 우리 모두 함께였습니다.)

<글쓰기 훈련에서 배운 것>

돌아보면 힘들었던 건 타지생활이 아니었다. 먹을 게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나날이었고, 밤낮도 주말도 없는 직장생활의 여유없음을 핑계로 방치했던 동네라는 공간을 다시 발견한 시기였고, 자주 홀로 걸으며 길과 하늘을 사진으로, 마음으로 담을 수 있었던 벅찬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사과정 내내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나를 괴롭혔던 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었다. 제2언어 리터러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쓰기에 대한 강의를 하고 학술논문 쓰기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도 자신의 글쓰기에 늘 신경이 쓰였다. 내가 가진 생각을 좀더 깊은 울림으로, 명확하고 생생하게, 아름답도록 아리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지만 여전히 영어는 “그들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배운 건 심오한 지식의 세계라기 보다는 글쓰는 사람으로 살아내야 할 일상, 글쓰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가다듬는 방법, 생각을 머금은 긴 산책으로 글길을 내는 일이었다.

조금 늦었지만 가파른 이론의 산을 오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있어보이는 암벽을 고르는 게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사고와 글쓰기의 통합”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쓰는 건 사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담긴 뜻을,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하루 하루 조금씩 엮어갈 수밖에 없다는 조언의 참뜻을 이제야 알 거 같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쓰기라는 베틀을 통해 생각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고, 엉킬 대로 엉킨 생각의 타래를 글줄로 뽑아내는 희열을 사모하게 되었다. 잘 다듬어진 글결이 보여주는 생각의 나이테에 감탄하게 되었고, 생각의 여정에서 남겨진 쪽글의 순진함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을 함께 써가는 사람들을 만나 아픔을 나눌 수 있었다. 글쓰기와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지만 계속 “차이는” 사람들, 그 쓰라림에 의연하지 못한 이들. 그래서 쓰기와 애증의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나같은, 가련한, 아름다운, 별것 없지만 또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 기쁘고 또 슬펐던 나날이었다. (2012. 8.)

Publish or Perish!

어떤 논문을 읽으면 내 작업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또 어떤 논문을 읽으면 ‘이런 글은 하루면 쓸 것 같다’는 오만함이 발동하기도 한다. 학계에서 훈련을 받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글이라 하더라도 천양지차가 있다.

함량미달의 논문이 쏟아지는 현상은 왜 일어날까? 개개인의 연구 역량차도 있고, 글쓰기 훈련의 수준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개별 학회가 요구하는 연구의 질에도 상당한 편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밀어내야만 생존 가능한(publish or perish)’ 양적 평가가 지배하는 학계의 풍토가 가장 큰 원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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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수업, 한 학생의 메일

한 1학년생의 <묘사문 쓰기> 과제 제출 메일 중에서.

“묘사문을 쓰기 위해서 어떤 표현을 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가를 생각하며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는 방법이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말로 다시 풀어보자면 이렇게 되겠네요.

(1) 표현을 고르기 위한 오랜 고민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글쓰기의 본령은 ‘쓰기’ 직전까지의 긴긴 시간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과 생각, 사실과 의견이 글이 되는 순간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즐기고 또 견뎌내야 합니다.

(2) 영어로 된 글이라도 정답은 없으며, 작가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작가의 의도와 스타일을 맥락과 맞추어 쓰면 됩니다. 흔히 말하는 ‘네이티브처럼 쓰기’가 정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비원어민의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글을 씁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깨우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고맙고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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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저자의 자기인용

[NATURE 뉴스] King 등이 arXiv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남성 저자가 자기 페이퍼를 인용하는 경우는 여성 저자의 자기인용에 비해 56%가 더 많다. 18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 나온 150만 건의 연구논문을 기반으로 한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 이 하나의 결과에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예상과 달랐던 것은 아래 도표와 같이 1960년대 이후 남녀 저자의 자기인용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지난 20여년 동안 더욱 벌어지고 있다는 것. 여성의 학계진출 증가와 권리신장에도 아랑곳않고(?) 이런 트렌드가 나타난다는 것이 흥미롭다.

Nature 뉴스 기사:
Men cite themselves more than women do
https://www.nature.com/…/men-cite-themselves-more-than-wome…

해당 논문:
Men Set Their Own Cites High: Gender and Self-citation across Fields and over Time
https://arxiv.org/abs/1607.00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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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대출, 그리고 대학에서의 글쓰기

버지니아대학 학부생의 연간 대출수는 지난 10년간 238,000권에서 60,000권으로 줄어들었다. 대학원생과 교수들의 경우 비슷한 추세를 보여 같은 기간 각각 61퍼센트, 46 퍼센트 감소했다. 얼마 전 학생들의 도서이전 반대시위로 화제가 되었던 예일대 도서관의 경우에도 지난 10년간 대출이 64퍼센트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대출만 줄고 도서관 내의 책 참조가 늘어난 것은 아닌가? 내부 추적 시스템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이 드러난다. 대학 도서관의 도서 활용율은 모든 면에서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반대의 추세를 보이는 것은 e-book 활용. 2016년 버지니아대 도서관의 전자책 다운로드 권수는 약 170만 권으로 10년 전에 비해 열 배 이상 증가했다. 도서관 이용 행태와 대학에서의 읽기 쓰기 변화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읽어볼만한 기사. #삶을위한리터러시

https://www.theatlantic.com/ideas/archive/2019/05/college-students-arent-checking-out-books/590305/

Translanguaging, Composition, 그리고 영어교육

1. 내가 가장 즐기는 두 활동인 글쓰기와 음악 모두 composi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실 이 두 영역 뿐 아니라 미술 및 사진을 비롯한 예술 영역에서 composition이라는 말이 두루 쓰인다.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보다 복잡한 구조체를 만드는 활동을 통틀어 composi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2. 단어건 음표건 컷이건 공간이건  요소들이 함께 배치되는 데서 패턴이 생겨나고 패턴이 반복되고 중첩, 변주되면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추상적인 수준에서 글쓰기를 비롯한 예술창작 전반을 관통하는 단어가 composition 아닌가 싶다. (이 의미에 상응하는 우리말이 있을까? ‘구성’이라고 번역되긴 하지만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3. 일상에서 작문이라고 하면 대개 한국어 작문을 가리킨다. 영어로 쓸 경우는 영작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용례들의 특징은 작문행위가 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서는 하나의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4. 하지만 ‘구성composition’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글이 하나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협소하기 짝이 없다. 당장 시내의 간판들과 광고들만 봐도 다양한 언어가 어울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은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들이 일상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다. 도시의 언어경관은 분명 여러 언어로 구성된다.

5. 인간을 ‘한국어를 쓰는 존재’, ‘영어를 쓰는 존재’ 등의 틀에 가두지 않고 ‘의미를 만드는 존재’로 바라본다면 여러 언어를 섞어 쓰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전혀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겠으나, 특정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구절에 대해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도적인 구성의 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6. 예를 들어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글에 ‘아랫목’과 ‘고구마’, 그리고 ‘할머니’를 한국어로 쓸 수 있다. 필요하다면 각주를 통해 이 세 단어의 의미를 밝히겠지만, 본문에서 이들 단어를 계속해서 고집할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7. 응용언어학 분야에서 다언어를 활용한 담화 구성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 translanguaging 이 부상하고 있다. 언어 사이를 넘나들며 발화나 작문을 구성하는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10여 년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도 뿐 아니라 교육적 활용도 활발히 논의되는 중이다.

8. 한국 영어교육 상황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는 것은 금기다. 가급적 ‘영어로만 사고’해야 하고, 영어로만 말하고 써야 한다. 그래야 영어가 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존재는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섞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으며 수사적 효과 또한 노릴 수 있다. 조금 더 급진적인 시도를 한다면 기계번역의 힘을 빌어 수십개 언어로 시를 쓰거나 ‘팝아트적’ 글쓰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9. 그런 면에서 우리말을 벼려 더욱 견실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혼종성(hybridity)을 실험하려는 시도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10. 생각해 보면 영어야 말로 엄청난 짬뽕언어 아닌가!

#삶을위한리터러시 #translanguaging

서울대 보건대학원 강의

4월의 마지막 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황승식 선생님의 초대로 삶을 위한 단단한 영어공부를 주제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대학원생 연구자들과는 보통 영어로 논문쓰기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 날은 네이티브 중심주의와 인풋만능주의의 폐해에 대해 주로 논의한 후 쓰기와 어휘공부 전략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어쩌면 ‘실용성’이 떨어지는 논의일 수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집중해서 들어 주셨습니다. 어쩌면 제가 ‘실용성’을 너무 좁게 정의하고 강의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더군요. 앞으로는 영어교육의 사회문화적, 제도적, 정치적 측면에 대해서 좀더 자신있게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연구자를 비롯하여 세계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이중고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주류’의 리터러시 관행을 충실히 익히는 것.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존 구조 안에서 새로운 관계와 질서의 리터러시를 실천하는 것.

학술리터러시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의 관행 즉 논문을 써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선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학술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갖는 모순들을 직시하고 이를 가로지르는 실천들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후자의 측면에서 보건학이나 응용언어학이 할 일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둘다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분야니까요.)

강연 때마다 느끼지만 제가 신나서 떠드는 것보다 청중들과 소통하는 게 더 즐겁습니다. 영어공부에 대해서도 한 차례 짧은 모임을 넘어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하루였습니다.

[영어로 논문쓰기: 읽기와 쓰기 통합전략을 중심으로 5] 저자-되기 경험으로서의 논문작성

논문작성은 연구실적을 쌓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저자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저작에 대해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 저자는 작품에 자신만의 목소리(authorial voice)를 불어넣는 사람이다. 나아가 저작의 과정은 해당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논문작성을 이해함에 있어 ‘졸업 요건의 충족’이나 ‘실적 달성’에서 ‘저자-되기’, ‘전문가-되기’라는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논문을 써야 졸업한다”가 아니라 “논문을 써야 진짜 저자가 된다”로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다.

물론 이 길이 평탄하지는 않다. 자신의 글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 리도 없거니와 자신의 기준을 어느 정도 중족하는 글마저 타인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기 일쑤다. 자신이 신뢰하는 동료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인 지도교수, 저널의 리뷰어들의 평가로부터 타격을 입지 않을 재간 또한 없다.

이럴 때일 수록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써내는 사람은 없으며, 완벽한 글을 써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글의 발전 또한 멈춘다는 사실이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맷집’을 키우는 일이 학술적 글쓰기 훈련과정에 핵심적인 요소임을 깨닫는 것이다. 글쓰기의 발달은 결코 부드럽고 매끈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은 꽤 오랜 분투와 적지 않은 분루를 필요로 한다. 그런 면에서 ‘많이 써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줄기차게 써내는 일’이 더 중요한 시점이 온다. 이에 관하여는 아래 한참 전에 써놓은 메모를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다.

Up to a point, writing a lot matters. It really is important for building one’s writing muscle. When it comes to getting a project done, however, writing persistently is far more important than writing a lot. I call this ‘writing defiantly,’ where one rows strenuously against the current of highly stressful everyday events. This is a valuable lesson I learned from hitting the cul-de-sac in several of my writing projects, where I definitely poured out a lot of text but the manuscripts had nowhere to go other than in a dark, lachrymose corner of my hard disk drive. Some writers may be able to achieve what they want by producing lots of words in a flash, but writing on a regular basis, shine or rain, tormented or commended, matters much more to ordinary writers like me. So writing a lot is good; writing persistently is better. All the best for my friends grappling with those unruly yet lovely manuscri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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