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정의: 응집과 결속의 관점에서

시를 언어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야콥슨 이후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려고 애썼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무소용 정의를 하나 더하자면 이렇다.

“시란 응집cohesion과 결속성cohesion의 비틀기, 혹은 새로운 창조다.”

<영어로 논문쓰기> 첫 번째 수업 후기

1. 분주했다. 전날 밤에 다 준비해 놓은 것들을 세팅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했다. 진짜 다됐다 싶었는데 물을 준비하지 못해 부리나케 나가 사왔다. 어리버리 첫 시도, 집 가까이에 강의장소를 잡은 건 잘한 일이었다. 다음에는 시간이나 장소, 각종 물품 준비 면에서 좀더 여유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도면밀하지 못하니 차근차근 배울 수밖에 없겠다.

2.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주신 코디네이터 분의 말씀과는 다르게 프로젝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분명 “프로젝터가 있죠?”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답했는데, 그럼 강사가 프로젝터를 사용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수업 직전에 겨우 들어온 프로젝터. 게다가 스크린이 없어 녹색 칠판에 띄워야 했다. 다음 주에는 전지를 붙여야 할까. 강의용으로 마련한 공간이 이렇게 허술하다니. 몇년 안된 건물임을 감안하면 여전히 이해 불가다.

3. 이제껏 영어교육과, 영어영문학과, 경영학과 등에서 강의를 해왔는데 신청하신 분들의 전공을 보니 인류학, 의학, 작업치료, 경영학, 국제원조, 영어교육, 보건정책, 인지신경과학, 통번역학, 교육학, 예술경영 등 참으로 다양했다. 언제 이런 영광스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벅찬 마음과 함께 다양한 필요에 최적화된 강의를 만들기는 힘들 거라는 우려가 동시에 들었다. 이왕 저질러진 일. 실패하겠지만 되도록 멋지게 실패하는 걸로, 쿨럭. ;;;

4. 수강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학 및 대학원에서 논문쓰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대학원생들은 논문쓰기를 ‘눈치’로 배웠다. 극히 일부지만 맨땅에 헤딩으로 논문을 배우는 게 맞다고, 자신들도 그렇게 배웠다고, 못배우면 학생들의 노력 부족 탓이라고 굳게 믿는 교수들도 있다.

5. 사실 체계적 훈련기회가 주어지지않는 건 한국 뿐만이 아니다. 미국, 캐나다의 몇몇 대학원에서도 같은 현상을 목격했다. 다만 북미의 경우 중고교에서의 글쓰기 교육이 한국보다는 좀더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논문작성이 지독한 안개 속 길찾기와 같다는 점은 대동소이해 보인다. PhD Comics의 많은 에피소드가 논문쓰기의 어려움을 그리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6. 학술적 글쓰기 교수의 가장 좋은 모델은 나와 같은 응용언어학 관련 전공자와 해당 분야(의학, 경영학, 사회과학 등) 전문가가 협업하여 커리큘럼을 만들고 함께 가르치는 것이다. 재정적 지원이 충분하다면 언어학자-해당분야 학자 팀과 대학 내의 글쓰기 센터(writing center)가 협업하여 커리큘럼, 강좌 운영 노하우, 해당 강좌의 학생 과제들을 아카이빙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학 글쓰기 교육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고 본다.

7.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우선 모두가 각자의 일에 바쁘다.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거다. 쉽게 말해, 글쓰기 커리큘럼 개발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필요한데 시간도 돈도 없다. 개인적인 희생(?)을 통해 커리큘럼이 개발된다 해도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는 풍토다. 결국 생각만 하다가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8. 언젠가 분과학문의 학술적 글쓰기 커리큘럼 개발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 같은 걸 해보고 싶다. 내일 AI가 인간보다 논문을 더 잘 쓸 거란 걸 알더라도, 오늘 진지하게 글쓰기를 가르치겠다… 뭐, 이런?

9. 서울 뿐 아니라 경기도 각지, 대전, 강원도, 심지어 제주도에서까지 와주셔서 감사했다. 모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신 덕분에 덜 떨면서 강의를 했다. 볼펜과 천혜향을 나누어 주신 분들로 수업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강사의 부족함을 메워주시는 수강생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10. 세 시간이 금방 갔다. 앞으로 3주도 그렇게 휙 가버릴 것 같다. 스쳐가는 인연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강의를 열기 잘 한 것 같다. 많이 배운다.

처음으로 개인 강의를 준비하며 배운 것들

1. 이메일 연락은 85 퍼센트 정도 답이 돌아온다. 개인정보를 최대한 적게 받으려 전화번호를 생략했는데 다음 번에는 필수로 받아야 될 것 같다. (과연 다음 번이 있을까? 응?)

2. 일찍 지원한 분들이 묵묵부답인 경우 선착순에서 밀린 분들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간다. 어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좀 그렇다.

3. 의외로 좋은 강의장 잡기가 어려웠다. 4주 일정을 안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으면서 시설이 괜찮은 곳, 여기에 비용까지 저렴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뭔가를 포기해야 했다.

4. 한 학기 15주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을 4주간의 ‘속성코스’로 압축하기가 쉽지 않다. 호흡이 다른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작업이 필요하다.

5. 논문에 대한 경험이 천차만별인 수강생들께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이것이 가장 큰 숙제인 듯하다.

6. 생각보다 영어논문에 대한 관심이 꽤 높다. 열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정원이 다 찼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물론 이번에는 ‘페친효과’ 덕을 톡톡히 봤다.

7. 논문쓰기 강의나 통계 강의를 살펴보니 책정한 강의료가 과하지는 않은 듯하다. 누군가에게는 큰 돈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ㅠㅠ

이번에 잘못하면 1기가 처음이자 마지막 강의가 되겠지. 아무튼 잘해보자.

논문 이후 글쓰기 잡감

<논문 이후 글쓰기 잡감>

학술 리터러시와 관련된 논문을 영어로 썼다. 리터러시 관련 논문이라지만 잘 쓴 논문은 아니다. 힘들게 완성했고,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지도교수는 나에게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이게 앞으로의 네 생애에서 가장 못쓴 글이 될 거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순간 헉, 했지만 이내 슬픔과 쾌감이 묘하게 교차했다. 누가 뭐라 해도 제일 좋은 논문은 끝낸 논문이니까. (지금 돌아보니 지도교수 말이 맞다. 지금이라면 그때보단 잘 쓸거 같다. 하지만 절대 다시 쓰고 싶진 않다.)

논문을 완성하고 나의 우리말 글쓰기를 돌아보았다. 간간이 써내던 쪽글 대부분은 가볍고 수명이 짧은 잡글이었다. 소리내어 읽었을 때 조차 호흡과 리듬이 살아나지 않았다. ‘리터러시 연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려니 창피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피아노 잘 못치는 피아노 선생이 된 기분이었달까. 바하를 가르치기 위해 굴드같은 연주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이엘) 하(권) 수준은 아니어야 할테니.

불현듯, 정말 불현듯 우리말이 더 큰 문제라 느꼈다. 영어 따위 남의 나라 말이잖아. 그래서 우리말로 더 자주 쓰기 시작했다. 반짝거리는 일상을 놓치지 않으려 어머니와의 대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인지언어학에서 교육적 적용이 가능한 내용들에 주목하여 <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분량이 조금씩 쌓여갔다.

하지만 업그레이드 되었어도 쪽글은 여전히 쪽글이었다. 긴 호흡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을 지켜내야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주변을 바꿔가야 한다. 누군가 말했듯 산을 옮기려면 팔뚝 근육부터 키워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자주, 너무 간단히 실패했다. 좌절은 현재완료 진행형이다.

몇해 전부터 영어도 우리말도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이게 좀 심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는 상황에서 슬피 우는’ 친구들에게서 위안을 얻는 것은 나쁜 일일까?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가르침의 적극적인 실천일까?

책은 물론 페북만 봐도 글 잘쓰는 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질투의 화신이 되어본 적은 없는 듯하다. 무엇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향. 나의 명백한 한계다. 이걸 오롯이 받아들이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믿어보련다. 오늘도 잡설 하나를 또 뱉어내며 하루를 접는다. 너무 큰 일을 접는 일은 없길 바라며.

Typobusters

A spectre is haunting the world of manuscripts and even some published articles — the Spectre of Typos. All the powers of sleepless academics have entered into a holy alliance to exorcise this spectre: Authors, editors, proofreaders, and editing staff. To no avail, however, typos are forever coming back, haunting their dreams and summoning an army of track changes, sore regrets, and self-pities. A sense of awe/oh emerges before this undeniable existence of uncontrollable entities.

Two things result from this fact:

I. The spector is already acknowledged by all academics to be itself an immortal power.

II. It is high time that Google DeepMind or whatever AI pioneers should, before the wretched faces of the whole anxious authors, publish the plans, aspirations, and eagerness to help relieve their pain, and meet this misery tale of the Spectre of Typos with a manifesto that the AI giant will develop “TypoBusters” as soon as possible.

쓸데없음을 간직하는 법에 대하여

Posted by on Jan 31, 2017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왜?
이걸?
어떻게?

논문에 접근하는 개념적 질문 셋.

논문쓰기 강의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난 지금

왜?
이걸?
어떻게?

결국 답은,
사람들 안에,
나와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만들어 갈 세계에 있다는 걸 알지만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쓸데없음을 간직하는 법에 대하여…

Open Peer Review

Posted by on Jan 29, 2017 in 링크, 수업자료,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학술지의 맹검(Blind Review) 제도는 양날의 검이다. (1) 학문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자발적 헌신이라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심사자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힘들고, (2) 특혜없이 공정한 논문심사를 지향하지만, 전문성과 책임감 모두 미달인 심사평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익명성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그 폐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에 대해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 가지 고려할 만한 방안은 코넬 대학교의 arXiv.org에서 시행하고 있는 공개 동료심사(Open Peer Review)이다. arXiv에서는 편집자들이 공개적인 리뷰를 첨부하여 논문의 프리프린트에 첨부하고, 이를 기반으로 선별된 아티클을 ‘출판’ 상태로 바꾸는 방식을 취한다. 아래 링크에서 이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다.

“Today’s peer review process for scientific articles is unnecessarily opaque and offers few incentives to referees. Likewise, the publishing process is unnecessarily inefficient and its results are only rarely made freely available to the public. Here we outline a comparatively simple extension of arXiv.org, an online preprint archive widely used in the mathematical and physical sciences, that addresses both of these problems. Under the proposal, editors invite referees to write public and signed reviews to be attached to the posted preprints, and then elevate selected articles to “published” status”.

https://arxiv.org/abs/1011.6590

A rather unexpected impact of the T—- era on writing instruction

Posted by on Jan 23, 2017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My next argumentative essay writing class will have some additional components: (1) telling facts from alternative facts, (2) telling truths from post-truths, and (3) tallying the total number of participants in a political event by comparing two photos with a ridiculously different density of people. (Sigh)

Acknowledgements

Obviously I love the acknowledgement section of a book most. If a book is a tree, its acknowledgement is roots that have nourished and grown it all along, through the tough times of droughts and storms. Although one may pass for an author of a book, it is always made possible by numerous people behind them, who shared their lives seeking neither fame nor credits. In this sense the acknowledgment section may be called ‘the hidden co-authors section.’

‘(외부) 논문지도교수’에 얽힌 이슈들

‘(외부)논문지도교수’에 얽힌 이슈들 (스크롤 압박이 있습니다 ^^)

1. 몇해 전 귀국해 대학원 수업을 하면서 당황스런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요즘 대학원 입시 과외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단기간에 대학원 시험 대비 요령을 가르쳐 주는 거죠. 이런 과외를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원생들도 있어요. 교수님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데 당연히 좋아하시지 않는 눈치더라고요.”

대학생들이 고등학생 과외하듯 대학원생이 대학생 대상 과외를 하는 게 무슨 문제냐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런 현상이 달갑진 않았습니다. 말릴 수는 없겠지만 좋아 보이지 않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2. 몇 해 동안 대학원에서 수업을 했고, 대여섯 명의 학생들은 제게 논문 지도교수가 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해왔습니다.

현재 시스템에서 그럴 수는 없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비정규직 시간강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이죠.

3. 이제 본격적으로 아래 첨부한 광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종종 접했던 한 논문작성 컨설팅 업체가 “논문지도교수 채용중”이라는 광고를 냈습니다. 이에 대해 몇몇 연구자들께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셨죠.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평소 쓰시는 글을 통해 보건대 비판의 자격을 충분히 갖춘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의견에 기본적으로 공감하면서 제 경험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4. 사실 논문작성시 연구문제 탐색에서 자료조사, 분석, 결과 도출, 논의 등을 저자가 직접 담당한다면 다양한 조언을 구하는 건 자연스럽고 권장할만한 일입니다. 어디까지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타인의 개입을 인정할 것인가는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만, 학자로서의 양심과 연구윤리를 훼손하지 않는 한 최대한 많은 도움을 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제가 만나온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이 지도교수로부터 충분한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방치되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술이기에 다소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대학원생 상당수가 논문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에 대해 충분한 지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5. 이런 상황 맞은 편에는 박사학위를 받고도 생존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수를 받는 지식노동자들이 존재합니다. 이를 ‘학력인플레’라고 부르든 ‘최악의 직업 선택’이라고 부르든, ‘시간강사 처우 문제’라고 부르든, ‘대학의 비정규직 착취’라고 부르든 간에 (1)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정규직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고 (2) 비정규직 노동의 임금은 실로 보잘것 없으며 (3) 이들의 처우가 단기간에 좋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누가 학위를 따라고 했나. 사서 고생이지. 힘든 건 알겠다만 다 네가 선택했으니 네 책임이야.”라며 문제를 개개인에게 넘겨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부끄럽지만 저 스스로도 이런 논리로 저를 괴롭힐 때가 있으니, 이 과정을 겪지 않고 있는 분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6. 하지만 저는 이 현상을 좀더 거시적인 틀에서 전문성의 탈각과 연결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개인의 진로 선택이나 적성,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지식과 경험의 누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노동시장의 왜곡은 필연적으로 탈전문화를 수반합니다. 연구자들도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기에 생존의 문제에 봉착하면 전문분야와 관련 없는 일을 하게 됩니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죠.

이 와중에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은 서서히 녹슬게 됩니다. 짧게는 4년 여, 길게는 8-10년 동안 쌓아온 지식과 내공이 허공에 서서히 흩어집니다.

그렇게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 없지요.

대학에 재직중인 교수들의 삶도 팍팍하긴 마찬가집니다. 정량적 실적평가가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은 ‘점수를 딸 수 있는 일’에 집중됩니다. 교육과 연구 양 축에서 교육은 무시되기 일쑤고, 연구 영역 내에서도 평가항목에 기재할 수 있는 실적 쌓기에 시간과 에너지가 집중됩니다. 이런 면에서 21세기의 대학이 19세기 공장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7. 저는 앞서 기술한 일련의 요인들—불충분한 논문지도, 고학력 비정규직 문제, 전문성의 누수, 정량적 산출물에 대한 대학의 집착—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논문 컨설팅, 나아가 ‘외부논문지도’ 시장이 자연스럽게 부상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다고 해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구조적 요인들이 축적되면서 시장의 대응이 공식화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논문컨설팅 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물꼬가 트인 만큼 더욱 공세적인 마케팅이 예상됩니다.

8. 소결론은 이렇습니다. ‘논문지도교수’ 구인광고는 분명 불편하지만, 단지 ‘저렇게까지 돈을 벌어야 하나’라는 비판으로 이 불편함이 해소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광고 하나에 중층적인 모순이 담겨 있기에 논문작성에 있어서의 교수와 대학원생의 역할, 비정규직 학술지식노동자 시장, 대학평가 기준, 성과중심의 학문적 풍토, 연구자의 정체성과 학위논문의 의미에 대한 고민 등 다양한 관점에서 성찰과 논쟁이 필요합니다.

붙이는 말:

많은 분들께서 제가 특강 및 정규 수업을 통해 <영어논문 작성법>을 강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영어논문 작성’은 논문지도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일이긴 합니다만, 대학과 대학원에서 충분한 영어 리터러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상당히 큽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쇼팽 음악 틀어주고, 쇼팽 악보를 보여줬으니, 이젠 네가 연주해 봐”라는 식의 요구를 받기도 하죠. (아놔, 모든 학생이 조성진은 아니잖아요?)

학생들이 ‘구르면서 배워야 할 것들’도 있을 겁니다. 연구자가 갖추어야 할 윤리나 전문성의 특정 측면은 명시적으로 가르쳐 줄 수 없구요. 하지만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나도, 네 선배들도 다 그렇게 배웠어’라고 말하는 관행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교육자들이 할 일은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빨리 배우게 하고, 그것을 통해 더 의미있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지, 선임자들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느끼도록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닥 새롭지도 않은 생각을 정리한다고 오전이 다 가버렸습니다. 이제 슬슬 점심 먹으러 가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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