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에 관하여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관계를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는 걸 꺼리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있는 글과 메시지의 총량이 분포되는 흐름에 관해서도 더 이상 글을 쓰는 개인의 책임과 깊이 문제로 혐의를 두기를 그쳐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란 건, 더 이상 가능한 관점이 아니다.” (서울비, 2003, <글쓰기 강좌에 대하여> 중에서)

부가 사회경제적 구조를 통해 분배되듯이 글쓰기 능력이라는 문화자본도 사회적, 계급적으로 분배된다. 경제적 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과 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시작하고, 재미를 붙이고, 괜찮은 글을 써내고, 읽을만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글쓰기를 위한 독서를 하고, 때로 출판 기회를 잡고, 그 결과 얼마간의 금전적인 댓가를 얻고, 이 모든 것이 저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한 사람의 재능과 의지로 설명될 수 없다. 다른 문화자본과 마찬가지로 글쓰는 능력은 필자의 성장환경, 물적 토대, 그가 속한 공동체, 사회경제적 구조, 그리고 다양한 교육기회의 영향으로 형성된다. 글쓰기를 개개인의 ‘노오오오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방어하기 힘든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서울비님이 말하듯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은 지탱될 수 없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필요하듯, 저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회가 ‘동원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글 못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순전한 노력으로 일구어낸 ‘필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글 잘쓰는 사람’에 대한 칭송은 ‘글 못쓰는 사람’에 대한 폄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기계적인 능력주의(meritocracy)를 경계한다면 글쓰기 기예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은 거두어 들이는 것이 옳다. 글은 한 천재의 생산물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의 부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지적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개개인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만약 “창의적인 한 사람”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될성 부른 나무’에 사회적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시쳇말로 “몰빵”을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스티브 잡스도 나오고 빌 게이츠도 나오는 것 아닌가? 노벨상도 막 타고 그러는 것 아닌가?

하지만 “창의적인 한 사람”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발현되는 창의성의 네트워크”라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창의적인 팀, 창의적인 학교, 창의적인 회사, 창의적인 사회를 그릴 수밖에 없다. 개별 노드의 특성이 아닌 링크의 효과로서 창의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몰빵”은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기 보다는, 필요한 자본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사회문화적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리터러시 이론의 흐름 또한 이러한 관점을 반영한다. 글쓰기 과정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Flower와 Hayes는 글쓰기의 과정을 인지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들의 연구는 글쓰기 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적인 툴킷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지만, 글쓰기라는 행위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교육적, 이데올로기적 힘을 간과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이들이 제시한 글쓰기에서의 인지모형은 사회적 영향을 반영하는 쪽으로 수정, 발전된다. Street 등을 위시한 학자들은 ‘신리터러시연구(New Literacy Studies)’의 흐름을 주도하며 리터러시의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맥락(context)에 주목한다. 글쓰기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연구하려는 인지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글쓰기의 상황성(situatedness)에 주목하는 연구를 펼친 것이다. 아울러 1990년대 초 Swales를 중심으로 발전된 장르 이론 또한 글쓰기를 하나의 사회적 관행(social practice)으로 파악하면서 텍스트의 사회적 뿌리를 강조한다.

누가 좋은 글을 쓰는가? 노력하는 개인이 훌륭한 저자가 되고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인가? 결과물만 놓고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출판계까지 갈 것도 없이 페이스북만 봐도 글 잘쓰는 분들이 넘쳐나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빙산의 끝자락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글을 써낼 수 있다’는 구호는 ‘읽고 쓰고는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라고 속삭인다. 이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할 리터러시 발달에 대한 책무를 개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나는 논문에 들어간 감사의 말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여전히 이 말을 믿는다.

I typed the dissertation. But we wrote it. (저는 논문을 타이핑했어요. 하지만 쓴 건 나 혼자가 아닌 우리였죠.)

#삶을위한리터러시

토니 모리슨 강연에 다녀와서

2010년 4월 토니 모리슨 강연에 다녀와서 쓴 글 (정확한 단어 대 단어 번역은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오늘 모리슨의 강연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말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좋은 것/좋지 않은 것, 혹은 선한 것/악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악한 것 the evil 은 많은 치장을 필요로 한다. 더 많은 모자와, 신발과, 옷과 밴드를 필요로 한다. 더러운 것들은 속이려고 많은 것들을 입고 나온다.

그러나 악한 것은 아무리 치장을 해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악한 것은 더 많은 피와 희생을 요구한다. 이것들은 정말 단순하다.

하지만 진정 좋은 것, 선한 것은 복잡하다. 그것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수많은 영역에 존재하며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허나 좋은 것은 추구할 수 있는 영역이 무궁무진하다. 다양하다. 나의 문학은 이것(복잡하지만 좋은 것)을 추구해 왔다.”

그 외에도 기억나는 대목들이 많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다양한 독서를 했다.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고, 책을 따라서 대학에 갔다.”

“얼마 전에 내셔널 바이오그래피인가 그런 단체에서 나의 정보를 게재한 바 있는데 틀린 게 엄청 많더라. 근데 나는 제대로 고치질 않았다. 그냥 그 정보들이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적어도 잘못된 정보가 정확한 정보보다 훨씬 흥미롭잖아 (응?)”

“웹의 잘못된 정보의 예는 수없이 많다. 나부터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쓴 블로그 포스팅을 본다. (잠시 침묵) 도대체 이 이야기는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일동 폭소)”

“웹이라는 공간은 양날의 검이다. 지식과 정보가 마구 쏟아지고 전달되지만 잘못된 정보, 그릇된 ‘지혜’ 또한 양산된다. 하지만 나는 그 공간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자정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쓸 때는 나와 나, 나와 캐릭터만 존재한다. 거기는 누가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난 그 공간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 공간에서 누리는 자유가 있다. 남들이 하라는 것은 흥미롭지 않다.”

“지식과 지혜의 구분은 어렵다. 나도 그게 정확히 딱 구분되진 않는다. 그러나 지혜의 싹은 “실패에 대한 연구, 실패와 성공을 동시에 보는 것”에서 자라난다. 성공만 보는 것, 그것은 흥미롭지도 않고 지혜를 낳을 수도 없다.”

“시민 citizen 의 영역과 외래인 foreigner 의 영역의 구분은 없다. 우리 모두는 시민이면서 외래인이며 때로 “국내의 적” domestic enemy 이다. 흑인은 수백년 거주로 인해 이곳의 시민이면서 여전히 ‘그들의 적’이다.”

어떤 질문자가 “모리슨 작가님 킨들에는 무슨 책이 들어있느지요?” 바로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내 책들이 들어 있죠.” 좌중 폭소. 이번 5월에 아들이 사줄 iPad로 책을 읽을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고. ㅎㅎㅎ

이어서 예술가로 보이는 사람이 눈물로 질문을 했다. “작가님은 ‘변방’ edge 에서 일하고 살아간다고 하셨는데, 그 어려움, 눈물, 외로움을 어떻게 이기셨는지요.” 토니 모리슨 “내게 변방은 자유다. 그곳이 가장 자유롭다. 사실 우리는 모두 변방, 주변에 산다. 메인 스트림과 변방이라는 구분은 없다. 모두 엣지에 산다. 다만 어떤 이는 엣지를 넘나들고, 어떤 이는 엣지에 머무리며, 어떤이는 엣지에서 다른 사람들을 못 들어오도록 막고 서있다.”

어떤 학부생이 “졸업하고 뭐 할 지 모르는 인문학부생에게 해줄 말 없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가르치거나 쓰거나 자동차를 고치거나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다. 좀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라. 그리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라. 니가 만약 양배추면 더 나은 양배추가 되려 하는 거고, 토끼면 더 좋은 토끼가 되려 하는 거다. 니가 무슨 일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더 나은 인간이 되라. 그것을 평생 추구하라.”

강하고 섬세했으며 유머넘치고 거침없었던, 당황하지 않고 우기지 않으며 사람들 위에 서려고 하지도 않았던 모리슨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편히 쉬시길.

활동이론 – 미국과 소비에트의 경우

“하지만 우리가 심리학적 분석의 단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들은 사뭇 다르다: (소비에트 심리학 특히 액티비티 이론(activity theory)에서 다루는) 행동, 동작, 활동 등 대신에 (미국에서는) 스크립트, 표상, 프레임, 그리고 전략 등이 사용된다. 미국 심리학의 분석단위(the unit of analysis)는 매우 확고하게 개인에 머물러 있다. 개인이 처한 환경은 단지 해당 개인에 접근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소비에트 학자들은 우리에게 사고(thinking)란 활동(activity)의 시스템들 간의 상호작용, 다시 말해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단위들”이 이루는 시스템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표현해 준다는 점을 말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 Michael Cole. (1981). Wertsch, J. V. 편저 The concept of activity in Soviet psychology. (Sharpe) 서문 중에서

#비고츠키사회문화이론

네이티브에게 외국어 배우기

그러나 외국어 교육에 전문성이 없는 (맥락 이해를 위해 역자 삽입) 원어민(native speaker)에게만 배우는 것은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데 산 꼭대기에서 태어나 밑을 향해 소리치며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에게 안내를 받는 일과 같습니다. 발음은 정확할 지 몰라도 당장 흔들거리는 보울더(비바람에 깎여 둥근 모양이 된 바위)에서나 위험천만한 빙하의 균열 지점에서 확고한 발판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진 못합니다. 여러분들께 필요한 것은 말하자면 언어학습을 돕는 셰르파입니다.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해당 언어의 고지에 오른 비원어민 화자(nonnative speaker) 말입니다.

“But learning from a native speaker alone is like being guided up Mt. Everest by someone who was born at the top of the mountain and is shouting directions down from above. The sounds may be pronounced correctly, but that won’t help you find firm footing among the loose boulders and treacherous crevasses. What you need is a language Sherpa, if you will: a nonnative speaker who struggled with the language and who conquered it.” (p. 89)

Richard M. Roberts and Roger J. Kreuz. (2015). Becoming Fluent: How Cognitive Science Can Help Adults Learn a Foreign Language.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The Inevitable: 거부할 수 없는 기술 트렌드12가지

Posted by on Jun 27,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링크, 수업자료, 인용구 | No Comments

“The greatest products of the next 20 years have not been invented yet.” (48:40)

12 Inevitable Tech Forces That Will Shape Our Future by Kevin Kelly | 기술의 미래에 대한 Kevin Kelly의 SXSW Interactive 2016 강연 중 인상깊었던 구절. 굳이 편을 들어야 한다면 Kevin Kelly 보다는 Jaron Lanier 쪽에 가깝지만, 그의 이번 책 <The Inevitable: Understanding the 12 Technological Forces That Will Shape Our Future>에서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강연 링크:

새로운 것을 보기 vs. 새롭게 보기

Posted by on Jun 27,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인용구 | No Comments

“The task is . . . not so much to see what no one has yet seen; but to think what nobody has yet thought, about that which everybody sees. 과업은 아직 아무도 못본 것을 보는 데 있다기 보다는 모두가 보고 있는 대상에 관해 이제껏 누구도 하지 못한 생각을 해내는 데 있다.” – Erwin Schrödinger 어윈 슈뢰딩거

 

의학은 사회과학이다 – 루돌프 비르쇼

“The connection between poverty and health far precedes our modern medical system. Rudolf Virchow, one of the earliest proponents of social medicine, wrote in 1848 that “medicine is a social science” and “the physician is the natural attorney of the poor.” The contemporary ED is a nidus for this interplay of medicine and social justice.”

Source: Erik S. Anderson, Dennis Hsieh, Harrison J. Alter, Social Emergency Medicine: Embracing the Dual Role of the Emergency Department in Acute Care and Population Health, Annals of Emergency Medicine, Volume 68, Issue 1, July 2016, Pages 21-25

 

무하마드 알리 그리고 저항

Posted by on Jun 10, 2016 in 단상, 인용구 | No Comments

“징집을 피해다니는 게 아니야. 국기를 태워버리지도 않을 거구. 캐나다로 도망갈 일도 없어. 난 그냥 여기 있을 거라구. 날 감옥에 쳐넣고 싶어? 좋아, 당장 해보라구. 400년 동안 갇혀있었으니 4-5년쯤 더 있는 게 뭐가 어렵겠어. 하지만 1만 마일을 날아가서 너희들을 도와 불쌍한 사람들을 살상하고 죽일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죽고 싶다면 바로 여기, 바로 지금 너희들과 싸우다가 죽을 거야.” – 무하마드 알리

 

The Three Laws of Dissertation

Posted by on May 21, 2016 in 단상, 영어, 인용구 | No Comments

1. A dissertation may not injure a human being or, through inaction, allow a human being to come to harm.
2. A dissertation must obey the orders given it by dissertation advisors except where such orders would conflict with the First Law.
3. A dissertation must maintain its own progress as long as such progress does not conflict with the First or Second Laws.

Teachers as anthropologists

Posted by on May 14, 2016 in 강의노트, 링크, 수업자료, 인용구 | No Comments

[Teachers as anthropologists] I would say that a serious teaching is very much like doing anthropology, although I do not agree with this kind of dichotomy between ethnography and anthropology.

“Ingold’s argument unfolds from the distinction he draws between anthropology and ethnography: the former characterized as a practice of correspondence, and the latter as a practice of description. Anthropology is a process of existential exposure: a form of attentional living, coupling “the forward movement of one’s own perception and action with the movements of others” (Ingold 2014, 389).

http://www.culanth.org/fieldsights/874-ethnography-translation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