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4: 환유(Metonymy)의 세계 (2)

Posted by on Nov 17,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환유(metonymy)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유(metaphor)와 비교, 대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유와 은유는 비유적 언어(figurative language)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인지언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언어는 환유와 은유를 통해 문자 그대로의 세계를 넘어 복잡다단한 비유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인지언어학의 흐름은 환유와 은유가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합니다만, 전형적인 환유와 은유는 생성 메커니즘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은유는 두 영역간의 사상에 기반한다

먼저 은유를 봅시다. 은유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영역(domain)과 그들 사이의 사상(mapping)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최근 방영되고 있는 <동백꽃 필 무렵>의 등장인물 ‘용식이’에 대해 한 시청자가 “용식이는 호랑이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이는 전형적인 은유의 구조인 “A는 B이다”를 취하고 있습니다(아마도 가장 유명한 A=B 은유는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은 호수요’겠죠).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용식이는 호랑이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이 문장은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이 경우 대략 다음의 세 요소가 사상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종열, 2003, 109쪽)

(1) 호랑이 -> 용식이
(2) 호랑이의 용맹 -> 용식이의 용맹
(3) 호랑이와 용맹간의 관계 -> 용식이와 용맹간의 관계

“용식이는 호랑이다.”라는 진술에서 동원되는 영역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호랑이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용식이의 영역입니다. 이 두 영역은 각각 근원영역(source domain)과 목표영역(target domain)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서 ‘근원’과 ‘목표’라는 말을 살필 필요가 있는데, 근원영역은 화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즉 타겟이 되는 목표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나무나 호수, 바다 등과 연결시킨다면, 목표영역(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람이고, 근원영역(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영역)은 나무, 호수, 바다 등입니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중요한 사실은 은유가 두 개의 영역 간의 관계설정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용식이와 호랑이는 각각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하지만, 위의 예에서 ‘용맹함’이라는 특징을 통해 연결되지요. 즉, “용식이는 용맹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용식이는 호랑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용맹함”에 간접적으로 접근(access)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호랑이’라는 라는 단어가 문장에 등장하면서 단지 ‘용맹함’이라는 추상적 특징 뿐 아니라 호랑이의 여러 특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말하고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호랑이의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고, 우렁찬 호랑이 소리가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서는 호랑이의 여타 특성들이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환유 생성의 기본 원리는 인접성(contiguity)

이렇게 은유가 인지적으로 구별되는 두 영역 간의 사상을 기반으로 생성됨에 반해 환유는 개념적으로 인접한 개체들을 엮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지난 회에서 살펴본 아래 두 문장을 봅시다.

a. “버스 파업중이야. 지하철 타고 가.“
b. “빨간 모자 너무 시끄럽다. 가서 한마디 할까?“

a의 경우 ‘버스’는 ‘버스 운수 노동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둘은 개념적으로 떼어내기 힘듭니다. 실제로 운수노동자들은 버스를 운전석에 앉아 일하면서 생계를 꾸리기 때문이죠. 아래 ‘빨간 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시끄럽게 떠드는 건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지만, 그 사람과 모자는 공간적으로 인접해 있습니다. 이같은 공간적 인접은 환유 생성의 기본 원리 중 하나입니다.

공간적 인접성 외에 시간적 인접성 또한 환유 생산의 주요 원리가 됩니다. 다음 두 예를 보시죠.

c. 3년이 흘러 소설가는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d. 테잎 커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건물이 다 올라갔네?

c에서는 ‘마침표를 찍었다’는 표현이 ‘소설을 완성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편집을 거치면서 여러 번 수정되었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시점과 소설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시점은 매우 가깝습니다. d에서는 ‘테잎 커팅’이 건물을 짓기 시작한 시기를 대표합니다. 유명 인사들이 테잎을 자르는 기념식을 한 것으로 건축의 시작을 표현한 것인데, 이 경우도 시간적 인접성이 환유 생성의 기본 원리로 사용되었습니다.

환유가 기본적으로 인접성에 기반한다는 주장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Roman Jacobson을 거쳐 최근 Peirsman와 Geeraerts에 의해 정교화되었습니다 (Littlemore, 2015, p. 14). 이들에 따르면 은유는 유사성(similarity)에 기반을 두는 반면 환유는 인접성에 기반합니다. ‘Love is a journey.’는 사랑의 과정과 여행의 과정이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에 기반하고 있는 은유임에 반해, ‘We need new brains.“는 특정인과 뇌가 인접해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 환유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다양다종한 비유언어를 모두 설명해내진 못하지만 비유를 설명하는 종래의 이론들에서 가장 강력한 설명원리로 제시된 바 있습니다.

<참고문헌>
이종렬. (2003). <비유와 인지>. 서울:한국문화사
Littlemore, J. (2015). Metonymy: Hidden shortcuts in language, thought and commun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덧.

2013년 연재 시작. 한 해에 여덟 개의 원고. 이번 학기에도 예외 없이 네 개의 이야기를 송고했다. 원래는 50개 정도가 되면 책으로 묶을 준비를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쓰다 보니 수년 간의 연재 중 1/3 정도는 울퉁불퉁하고 부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어교사 뿐 아니라 ‘영어와 사고’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원고로 발전시키고 싶다. 아마도 내년 여름이면 본격적으로 작업이 가능할 것 같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영어와사고

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3: 환유(Metonymy)의 세계 (1)

아래 세 문장을 살펴 봅시다.

a. “버스 파업중이야. 지하철 타고 가.“
b. “빨간 모자 너무 시끄럽다. 가서 한마디 할까?“
c. “손이 모자라서 시간이 배로 걸릴 듯. 사람 좀 더 뽑아주지.“

일상에서 쉽게 쓰고 또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이 문장들 속에 인간이 세계와 언어를 엮어서 인지하는 방식의 작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a를 봅시다. ‘버스 파업중이야’라고 하지만 실제로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은 버스가 아닙니다. 멀고 먼 훗날 자율주행 버스들이 자신의 권익을 찾기 위해 파업을 벌이는 상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SF 속 이야기고, 실제로 파업을 하는 것은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죠. 하지만 우리는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중이야.’라고 길게 말하기보다는 ‘버스 파업중이야’를 택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 대상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그 대상을 가리키는 데 꼭 필요한 정보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문장의 길이도 상당히 짧아지지요.

다음으로 b를 봅시다. ‘빨간 모자’는 그 자체로 시끄럽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모자라면 소리를 내진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빨간 모자 쓴 사람 너무 시끄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빨간 모자’만 써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c입니다. 여기에서 ‘손’은 단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손’을 말합니다. 따라서 손이 부족하다는 것은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이 됩니다. a나 b와 비교할 때 조금 다른 점은 ‘버스’나 ‘빨간 모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부분이 아님에 비해 ‘손’은 가리키는 대상 즉 일할 사람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입니다. 흥미롭게도 영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short-handed’죠. 일손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종종 쓰이는 표현입니다.

Metonymy의 정의

위의 a-c는 모두 ‘환유’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현상의 예시입니다. 인지언어학자들은 환유(metonymy)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합니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준거가 필요한 만큼 Littlemore (2015)의 다음 정의를 차용하도록 하겠습니다.

Metonymy is a figure of language and thought in which one entity is used to refer to, or in cognitive linguistic terms ‘provide access to’, another entity to which it is somehow related. (환유는 언어와 사고의 수사법 중 하나로 한 실체가 관련된 다른 실체를 가리키거나, 인지언어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관련된 다른 실체에 ‘접근지점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환유는 한 언어표현이 특정 대상을 정확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로 연결되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metonymy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라틴어metonymia, 나아가 그리스어 metōnymia에 닿게 되는데, 이것은 “이름을 바꾸기(change of name”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표현에서 ‘빵’은 단순히 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먹거리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를 어원에 빗대어 설명하면 ‘먹거리’가 ‘빵’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죠. 물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이렇게 이름을 바꾸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많은 서구권 국가에서 빵은 주식 중 하나이기에 이런 이름바꾸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환유(metonymy): 몇 가지 예시

그렇다면 이번에는 영어 환유 표현을 몇 개 살펴 보겠습니다.

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펜은 칼보다 강하다.)
e. The White House sees it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백악관은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f. Ireland passed a landmark bill last year. (아일랜드는 작년에 기념비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속담 a에서 ‘the pen’은 필기구가 아니라 문필 즉 글을 쓰는 행위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에 대구가 되는 ‘the sword’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체의 활동을 가리키지요. “The pen”과 “the sword’가 다른 개념으로 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에서 “The White House”는 미국 대통령이 참모와 함께 거주하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를 가리킵니다. 빌딩이 아닌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f에서 “Ireland”는 아일랜드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 의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아일랜드 국가 전체가 아니라 의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예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특정 개념에 접근할 때 종종 해당 개념에 정확히 상응하는 언어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 전반’에 접근하기 위해 ‘펜’을 사용하고, ‘미국 정부’라는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 ‘백악관’이라는 언어를 활용하죠.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간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가 됩니다. 즉 환유는 단순히 언어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구조와 과정을 보여주는 개념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계속)

<참고문헌>
Littlemore, J. (2015). Metonymy: Hidden shortcuts in language, thought and commun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인지언어학 이야기 52: 인지문법의 세계 (관사 마지막 이야기)

 

“What’s this?”
“Cat”

관사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뼈아프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음과 같이 단어를 외웠다는 사실입니다.

고양이 – cat
손목시계 – watch
양 – sheep
책상 – desk
물 – water
사과 – apple

이쯤 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눈치채셨을 겁니다. 이런 식의 짝짓기에서는 명사 앞에 관사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냥 단어와 한국어 짝이 나열되는 식이죠. 그 결과 셀 수 있는 명사와 셀 수 없는 명사의 구분이 없이 머릿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명사를 처음 배울 때 불가산과 가산의 개념이 자리잡을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양이 그림을 두고 “What is this?” 혹은 “What is that?”와 같이 물어볼 때에는 “(It’s) a cat.”과 같이 <관사+명사>의 짝이 보다 적절한 답변입니다. “What’s this?라고 했는데 그냥 “Cat”이라고 한다면 틀렸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어색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관사와 명사가 어떻게 짝을 이루는지 살피면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수단의 개념화, 그리고 관사

교통수단을 표현할 때 <by + 무관사 명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by bus, by train, by car, by plane, by bicycle” 등의 표현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동사와 같이 쓸 때는 조금 복잡합니다. 대표적으로 take와 같이 쓰이는 bus/subway/taxi 를 생각해 보시죠.

a. I take a bus to work.
b. I take the bus to work.

특별한 문맥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위의 두 문장은 특별한 문제없이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나 버스 타고 일하러 간다.”의 의미로 말이죠.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bus 앞에 정관사 the를 쓴 b의 경우가 ‘다른 교통수단이 아니고 버스임’ 혹은 ‘내가 늘 타고 다니던 그 버스’를 조금 강조한다는 정도인데요. 이것이 두 문장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진 못합니다. (참고로 두 원어민 화자에게 물어봤더니 한 친구는 a를, 다른 친구는 b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데이터로서 두 명은 너무 작은 숫자이니 무시할 만하지만, 원어민들의 직관이 반대라는 점이 흥미로왔습니다.)

이에 비해 subway의 경우는 확연히 다릅니다. 부정관사는 적절하지 않고 정관사만 가능하죠.

c. I take a subway to work. *
d. I take the subway to work.

별표는 문법적으로 옳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버스의 경우에는 “여러 교통수단 중 하나로서의/특정한 노선을 지나는 버스(the bus)” 혹은 “여러 버스 중 하나(a bus)”를 상정할 수 있지만, 지하철의 경우에는 “시스템화 된 교통수단으로서의 지하철(the subway)”으로만 개념화됩니다. 여러 개 중 셀 수 있는 개체로 개념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당연히 a subway, two subways 등은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subway의 경우 아무 것도 안붙이고 무관사로 쓰는 경우도 종종 발견됩니다. 다만 a subway라고 쓰는 경우는 좀처럼 없습니다.)

Bus, subway, taxi에 대한 개념화의 차이

Taxi는 조금 애매한 듯합니다. Bus의 경우 the bus/a bus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고, subway의 경우에는 정관사가 동반되거나 아예 생략되기도 하는데요. Taxi는 예외적인 상황이나 특정 문맥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부정관사 a가 필요합니다. 일부가 “the taxi”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T/F 문법 문제라면 take a taxi만이 정답으로 인정되겠지요.

이같은 관찰을 종합하여 교통수단에 대한 관사사용을 개념화(conceptualization)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봅시다. 우선 사람들은 택시를 셀 수 있는 개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택시들이 있고 그 중 하나를 잡아탄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비해 지하철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하철 열차를 여러 지하철 열차 중 하나로 개념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버스는 그 중간 어디쯤엔가 위치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복잡하지만 아예 패턴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관사공부의 패러독스

몇 차례의 연재를 통해 인지언어학의 관점에서 관사의 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교사들이 보기에도 쉽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 관사에 대해 강의를 할 때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종종 혼동도 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부하기 전보다는 정확성이 분명히 좋아졌습니다. 그거면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관사 학습에는 일종의 패러독스가 존재합니다. 영어에서 가장 빈번히 나오는 품사 중 하나가 관사이고,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말뭉치(corpus)를 살피면 the가 늘 빈도수 1위를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A/an의 빈도도 상당히 높습니다. 이렇게 보면 관사의 바다 속에서 관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등잔 밑이 어두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하면서도 관사가 가장 어렵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빈도수가 높다고 개념적으로 쉬운 것은 아닙니다. 관사는 생긴 것도 단순하고 종류도 3가지(정관사, 부정관사, 무관사) 밖에 되지 않지만 개념적으로 명쾌히 이해하기엔 영문법에서 가장 복잡한 항목 중 하나입니다. ‘개념화의 차이에 따라 관사의 활용이 달라진다’는 인지언어학의 기본 개념을 떠올리면서 다양한 맥락 속에서 관사를 살피는 공부를 꾸준히 해 나갈 때 이런 한계를 조금씩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매일 사람들을 접하지만 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관계를 두루두루 살피고 깊이 성찰하지 않는 한 관계에 대한 지혜는 자라지 않을 듯합니다.

부르디외 vs. 촘스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핵심적 특징이 ‘생성적(generative)’이라는 데 있다고 말하면서 촘스키의 심층구조(deep structure)와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심층구조가 다양한 조작을 거쳐 여러 표층구조로 실현될 수 있듯이 아비투스가 사회 구조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자체가 다양한 행위를 생성할 잠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부르디외는 이상적 원어민 화자(idealized native speaker)를 상정하는 촘스키의 언어관을 “언어 공산주의(communisme linguistique)의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완벽하게 평등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건만 촘스키와 같이 모든 화자들이 동일한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을 가진 사회를 상정하는 것은 언어학에서 현실을 탈각하고 이상의 세계에 가두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언어인류학자나 비판사회언어학자들의 촘스키 비판과 맥을 같이한다.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하면서 현실사회의 동학을 다루었던 사회학자 부르디외에게 있어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장(fields)에서 서로 다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을 가진 개개인이 소통하는 상황에 ‘이상화된 원어민 화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몸이 또 다른 몸에게 말하는 동안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보편문법의 소유자’는 백그라운드 인지 프로세스로 상정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구체적인 사회학적 분석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그들의 문장은 어떤 세계를 담는가? – 문법을 보는 새로운 가능성과 리터러시 교육에 대하여

1. 문법은 문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규칙이기 이전에 세계의 중단없는 사태를 분절적 텍스트로 변환하는 도구이다.

2. <단단한 영어공부>에서도 논의했듯 우리는 문법을 ‘형법’으로 배워왔다. 조항을 외워서 틀리고 맞고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법의 본질은 우리의 물리적, 심리적 세계를 텍스트화하는 도구라는 사실에 있다. 그런 면에서 문법책은 ‘형법서’가 아닌 ‘마법상자’가 되어야 한다.

3. 세계는 문법을 거쳐 어휘의 옷을 입고 텍스트가 된다. 내가 바라보는 우주는 소포로 싸서 배송할 수 없지만 텍스트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과 생각은 나의 뇌와 몸에 ‘갇혀’ 있지만 문법의 도움으로 텍스트화되어 누구에게든 가 닿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최초의 가상현실(VR)은 최근의 IT 기술이 아니라 텍스트의 발전에서 이미 구현된 것이다!

4.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문법을 좀더 크게 이해할 수 있다. 단지 텍스트 뿐 아니라 세계와 의식이 특정 매체(텍스트, 영화, 만화, 그림, 웹툰 등)로 변환되는 방식을 총칭하는 메타용어(meta-terminology)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가 영상으로 변환되는 일련의 규칙들을 영화의 문법이라 할 수 있고, 일상이 웹툰으로 전환되는 데 동원되는 기법들을 웹툰의 문법이라 할 수 있다. 매체마다 다른 문법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세계가 변환되는 데 개입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위상을 지닌다.

5. 다시 언어로 돌아와 보자. 시스템-기능 언어학(SFL: Systemic Functional Linguistics)에 따르면 문법은 물리적, 심리적 세계에서 특정 참여자(participants)를 ‘캐스팅’하고, 이들과 관련된 과정(processes)을 설정하고, 참여자들과 과정이 어떤 환경(circumstances)의 영향을 받는지 설명한다. 예를 들면 누가, 무엇을, 언제/어디서 했는지를 텍스트화하는 것이 문법의 역할이다.

6. 여기에서 비판적 읽기의 가능성이 도출된다. 텍스트는 세계를 특정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에 따라 참여자와 과정, 환경을 제시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도구로 동원되는 것이 문법이다. 따라서 비판적 읽기는 ‘누가 캐스팅되었는가’, ‘왜 이 과정이 부각되었는가’, ‘제시된 환경은 가장 중요한 환경인가’를 따져물을 수 있다.

7. 안타깝게도 한국 영어교육에서 문법은 ‘문장의 규칙’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문법의 이런 기능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총체에서 어떤 참여자들을 불러내고 어떤 관계들을 설정하고, 어떤 환경 하에 놓여있다고 진술할 것인가이다. 우주가 텍스트가 되어 책에 담기는 일련의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8. 이 점에서 문법은 비판적 리터러시 교육과 만난다. ‘이 문장이 문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넘어 ‘이 문장의 캐스팅은 적절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문장에서 3인칭 단수가 s가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왜 이 문장은 3인칭으로 진술되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이건 부사구이니 5형식을 판단하는 데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왜 수많은 환경 중에서 이 내용이 부사구로 선정되었을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9. 나아가 그들의 대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이 텍스트는 이렇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가?’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이 이런 텍스트를 만들어 내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핵심이다.

10. <단단한 영어공부>에는 영어의 수동태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한 독자는 이 부분을 보고 ‘너무 오버한다’고 평가를 하기도 했지만, 문장의 문법적 특징이 담론의 질서를 은밀히 코드화한다는 지적은 이의를 달기 힘든 공리와도 같은 주장이다.

11. James P. Gee의 지적과 같이 문법은 선택의 시스템(a system of choices)이며, 선택에는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만 누군가는 그 선택을 좀더 면밀하게 따져들고 다른 누군가는 아무 생각없이 내지를 뿐이다.

12. 그런 맥락에서 문법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선택의 무게’에 대한 인식을 키우는 것이며, 이는 리터러시 교육의 핵심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

텍스트의 세계는 선택된 세계이다.
우리의 선택에는 윤리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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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태의 정치학

이번에는 수동태를 살펴볼까요. 수동태를 공부할 때는 수동태의 형태(be + 과거분사+by~)보다는 수동태가 묘사하는 여러 사건들에서 수동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그것이 어떻게 언어로 표현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Many immigrants are deprived of their rights.
(많은 이민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한다.)
(2) The current immigration laws deprive many
immigrants of their rights. (현재의 이민법은 많은 이민자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한다.)

두 문장은 하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동태 문장 (1)에서는 ‘박탈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민자들의 현재 상태만 그려 냅니다. 하지만 능동태 문장 (2)에서는 이민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주체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현재의 이민법을 입안하고 가결한 사람들이 존재하겠지요. 이 같은 분석을 통해 수동태라는 언어적 장치에서 인간이 경험적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능동태나 수동태를 선택하는 일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 즉 ‘수동태의 정치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단단한 영어공부> 중에서

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1: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51)

관사를 절대적인 규칙에 따라 가르치는 방식의 위험은 특정 어휘와 관사를 무조건적으로 붙여서 가르치는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an only child’와 ‘the only child’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무조건 the only child”?

오래 전 ‘the only child’를 ‘외동’으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형제가 없는 경우 반드시 ‘the only child’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 설명에 따르면 ‘an only child’는 틀린 표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the only child’를 통째로 외워두라”고 말씀하셨죠. 아마도 ‘only’라는 단어가 정관사 the를 자동으로 불러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I am an only child.”라는 문장을 적잖이 접하게 되거든요. 구글에서 “an only child”를 검색해도 꽤 많이 나오지요. 실제로 발화되는 예를 원하시면 유튜브에서 “an only child”를 검색해 보시면 됩니다. “What’s it Really Like Being an Only Child?”라는 영상의 첫 부분에서는 “I’m an only child.”라는 말을 연속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른 것은 ‘외동’을 표현할 때 ‘the only child’만이 옳다고 말씀해 주신 선생님이었죠.

An only child와 the only child의 차이

“He is an only child”는 “그는 외동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an only child”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동들 중 하나’라는 개념을 갖고 있죠. 많고 많은 ‘only child’들 중 하나라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 외동이야’라고 말하려 한다면 ‘I’m an only child“가 적절합니다. 부정관사 “a(n)”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다수 중 하나’라는 뜻을 상기하신다면 이 용법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외동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니 이 문장을 쓸 일도 많을 듯하네요.

이에 비해 “the only child”는 “단 한 명의 자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Do you have brothers or sisters(너 형제나 자매 있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하면 “가족 중에 아이는 내가 유일해.”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맥락에서라면 ‘an only child’와 같은 의미적 효과를 갖게 되겠지요.

하지만 “the only child”는 다른 맥락에서도 충분히 사용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Jane is the only child in this class.”라고 한다면 ‘Jane은 이 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일한 아동이야.’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반에 속해 있는데 그중 아동인 사람은 Jane 뿐이라는 것입니다.

위의 두 예문에서 “the only”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the only child in my family”에서는 가족 내에서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고, “the only child in this classroom”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한 아동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를 ‘다수 중의 하나’라는 개념을 지닌 “an only child”와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the only child in my family”가 일반적으로 ‘외동’임을 의미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두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화제작인 A를 보지 못하고 B를 관람했다고 합시다. 왜 그랬을까요? 형 누나는 성인이어서 어떤 영화나 볼 수 있지만 자기는 미성년이어서 A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등 다른 가족은 모두 성인(adult)인데, 자기만 유일하게 성인이 아닌 아동(child)인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관사의 결정, 맥락(context)과 개념화(conceptualization)가 중요하다

위와 같이 특정 관사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 맥락과 개념화에 달려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식사를 나타내는 표현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아시다시피 일상에서 식사를 나타내는 표현들은 무관사를 원칙으로 합니다. 특별할 것 없는 식사를 나타낼 때는 어떤 관사도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have breakfast / lunch / dinner (아침/점심/저녁을 먹다.)

이에 따라 특별히 부가된 의미 없이 “저녁 먹었니?”라고 말한다면 “Did you have dinner?”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됩니다. 하지만 개념과 맥락이 달라지면 식사 앞에 부정관사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식사의 특징을 나타내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They had a big breakfast.” (그들은 아침을 거하게 먹었다.)

개념상 여기에서 “a big breakfast’는 특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big breakfast’가 엄청 많은데, 그 중에 하나를 먹은 거죠. 물론 그들이 모월 모일 아침 먹은 아침식사는 유일하겠지만(아침식사를 두 번 했을리는 없으니까요), 이를 언어화함에 있어서 ‘세상에 수많은 거한 아침식사 중 하나’로 개념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상황에 따라 “the breakfast”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아침식사 중 하나를 특정한 사건으로 바라보는 맥락이라면 “The breakfast”라는 표현으로 특정(specify)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보면 ‘식사명은 무관사’라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참고영상:
What’s it Really Like Being an Only Child?

물화 reification 와 명사화 nominalization

“톰슨은 『이데올로기 이론 연구Studies in the Theory of Ideology』(1984)와 『이데올로기와 현대 문화Ideology and Modern Culture』(1990)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당화legitimation, 위장dissimulation, 통합unification, 분열fragmentation, 물화reification라는 다섯 가지로 구별한다.”

(1) ‘정당화’는 지배관계를 ‘정당한, 즉 공정하고 지지할 만한 것으로 제시하여’(1990: 61) 그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하는 과정이다.

(2) ‘위장’은 지배관계를 숨기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3) ‘통합과 분열’은 서로 반대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연관된다. 통합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람들을 통합하고 하나로 묶어내고자 하는 반면, 분열은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자 한다.

(4) ‘물화’는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 방식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물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을 하나의 사물 혹은 사건으로 변환시킨다는 뜻이다. 과정은 행위자가 있고,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담고 있는 동사로 표현된다. 하지만 물화된 사물은 사회-역사적 기원이 은폐된 채 행위자와 행위 없이 그냥 그렇게 존재한다.

— 이상 <리터러시와 권력> (사회평론, 2019) 3장 ‘언어와 권력’에서 발췌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방식에서 ‘물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 언어현상으로 명사화(nominalization)가 있다. 세계는 중단없는 시간의 흐름과 물리적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becoming)된다. 하지만 명사는 이러한 역동의 상태를 경계가 반듯하며 굳어진 개념으로 포획한다. 이는 인간의 언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이자 세계를 구획화하는 강력한 무기이다. 물화와 관련해서 이전에 썼던 글을 업데이트하여 아래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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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효과와 인상입니다. 오늘은 성경구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글로 써 놓아도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요. 한 문장이 일시에 이해되거나 발화될 수는 없습니다. 문단이나 글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가 동시에 포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진리’ 다음에 ‘자유’가 오는 언어 구조가 저 말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어가 갖는 선형성(linearity)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언어는 복잡다단한 요인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세계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을까요?

아울러 생각해 볼 지점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네게 진리가 있어?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모른다고?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언어표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점진적 과정은 조금씩 자유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이 두 과정은 서로 교섭하며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킨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와 ‘자유’라는 명사가 개별적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언제나 언어와 삶을 엮어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계는 언어를 통해 물화reification되지만, 삶은 언제나 운동하고 생성되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지언어학이야기

교육은 사다리? – 어떤 메타포의 위험성에 대하여

1. 어떠한 메타포도 현상을 완벽하게 포착하진 못한다. 언어는 세계를 단지 기호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해석하고 개입한다.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지층이 얽히고 섥힌 현상을 몇 마디 말이 간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철저히 중립적인 기표란 없는 것이다.

2. 그렇기에 우리가 지켜봐야 할 것은 특정 메타포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효과이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메타포가 발생하는 맥락(context)과 화용적 힘(pragmatic force)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특정 메타포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그 메타포를 사용했을 때 어떤 점이 부각되고 어떤 점이 탈각되는가? 그 메타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될 때 (naturalized), 어떤 관점이 득세하고 어떤 전제가 뿌리박는가?

3. 오늘만 타임라인에서 ‘교육=사다리’ 메타포를 둘러싼 글 셋을 보았다. 워낙 굳어진 메타포로 널리 쓰이고 있으니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최근의 자사고 정책 논란과 일부 학교의 지정취소와 관련하여 나올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4. 교육이 계층간 이동의 사다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사다리’가 갖고 있는 특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5. 우선 사다리는 필요에 따라 갖다 쓸 수 있는 도구로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상승욕구’를 갖고 있다고 상정한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고 싶어하며 이것은 교육받는 모든 주체에게 적용된다. 과연 그러한가? 그래야만 하는가? 나는 이 질문이 교육에 있어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6. 다음으로 사다리라는 수단은 비인격적이다. 사다리는 그 자체로 인간의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물리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교육이 사회이동의 사다리로 작동하는가’의 질문은 교육을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 변형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상정하고 있다.

7. 하지만 현실의 교육은 물리적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2만여 개의 초중고 학교, 600만 여 명의 학생의 삶의 터전이며 삶 자체다. 대학을 더하면 이 생태계의 규모는 800만 구성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 자체가 거대한 유기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8. 교육이 사회계층 사이의 이동성을 촉진하는 사다리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것은 ‘학교를 바꾼다고 사회가 바뀌는가’라는 말이다. 이 질문은 대개 학교를 어떻게 바꾸더라도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9.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기엔 커다란 허점이 있다. 생각해 보자. 공교육이 바뀌면 수백만 학생과 학부모들의 삶, 사교육이 바뀌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육이 바뀌어 봤자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은 교육을 그저 무색무취의 물리적 도구로 파악하는 사다리 메타포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얽혀 있다.

10. 교육의 변화를 생각할 때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교육이 바뀜으로 사회가 바뀌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다. 학교제도를 조금 손본다고 해서 비정규직의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거나 정치적 후진성이 일거에 사라지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 바뀌어서 학생과 교사, 나아가 지역사회와 학부모의 삶이 바뀌는가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거대 정치경제 구조의 변화에 종속되는 사소한 변화가 아니라 일상의 변화이고 세계관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그 자체로 충분한 정치성을 지닌다.

11. 이러한 면에서 ‘교육은 사다리’라는 메타포는 위험하다. 이 메타포는 교육을 무색무취한 물리적 도구로 바라보고, 교육이라는 제도의 복잡다단한 측면들을 거세하며, 무엇보다 교육 자체가 사람들의 삶이고 사회라는 점을 망각한다.

12. 교육은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분명 갖는다. 하지만 그 지위가 삶으로서의 교육을 압도할 때 우리는 ‘교육은 사다리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가’라는 앙상하기 짝이 없는 메타포에 포섭당하게 된다. ‘교육은 사다리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프레임이 되어 찬반에 관계없이 수단으로서의 교육이라는 전제를 강화한다. 이 자체가 교육을 배반하는 일이다.

13. 따라서 ‘교육은 사다리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왜 교육은 사다리라는 메타포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가?’, 나아가 ‘어떤 힘들이 교육을 사다리라고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는가?’가 좀더 근본적인 논의를 가능케 할 것이다. 좋은 사다리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보다 사다리가 필요없는 생태계를 지어가려는 노력이 더욱 정치적이고 깊이 교육적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메타포

언어와 사고의 관계 생각하기

언어와 사고에 관련된 논쟁이 늘상 놓치는 것은 언어가 사고에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 속에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행위를 매개(mediate)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대말을 쓰지 않는다고 상대에 대한 사고가 변화하는가?”는 그래서 해상도가 떨어지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쓰던 존대를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은 특정한 맥락에서 권력관계의 변화, 새로운 규약의 도입, 기존 언어자원의 변화 등을 동시에 수반하며 이는 언어사용자의 지각과 감정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언어의 변화를 촉발하는 데 많은 요인이 개입되고, 변화된 언어가 촉발하는 다양한 변화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맥락과 언중의 인지과정을 빼놓고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가?”라고 묻는 것이 별무소용인 이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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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0: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4)

Posted by on May 22, 2019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지난 시간 우리는 관사를 “인식론적 지위를 트래킹하는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화자가 청자로 하여금 특정 명사를 어떻게 인식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따라 a를 사용하느냐 the를 사용하느냐 관사를 사용하지 않느냐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원리에 따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배웠던 여러 규칙의 허점이 드러납니다. 아래에서 관계대명사 사용에 따른 관사 사용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 앞에는 the?

정관사와 부정관사에 대해 배우면서 ‘명사 뒤에서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면 the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 보니 엉터리 규칙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처음 나오는 명사 앞에는 반드시 a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처럼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명사에 정관사가 붙느냐 부정관사가 붙느냐와 관계대명사의 수식 여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라 하더라도 특정되지 않을(not specified) 수도 특정(specified)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a(n)+명사’를, 후자의 경우에는 ‘the+명사’를 써야 합니다. 다음의 예를 살펴봅시다.

a. We are hiring a data scientist who specializes in data visualization.

b. The man who stole the wallet was his uncle.

a는 “우리는 데이터 시각화를 전문으로 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구인하고 있다”, b는 “지갑을 훔친 사람은 그의 삼촌이었다”라는 뜻입니다. 두 문장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살피면 a의 “data scientist”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는 특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관사 ‘a’를 붙여 ‘a data scientist’로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에 비해 b의 경우 “지갑을 훔친”이라는 관계사절은 특정인을 묘사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콕 짚어 가리킬 수 있는’ 특정한 절도범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따라서 ‘a’가 아니라 “the’를 붙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관계대명사가 꾸민다 하더라도 수식을 받는 명사는 수많은 대상 중 하나로 개념화될 수도, 특정한 대상으로 개념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따라서 관사의 선택은 달라져야 하겠지요. 결론적으로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는 정관사 the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은 옳지 않습니다.

the very man / the tallest girl

정관사의 가장 큰 임무는 어떤 명사를 특정하는 일(to specify)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특정하는 의미를 지닌 일부 형용사의 경우 정관사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형용사의 특성상 화자가 ‘여러 개의 개체 중 하나’로 명사를 개념화할 수 없어 특정한 대상을 가리킬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세 가지 대표적인 예를 살펴봅시다. 먼저 ‘the very man’입니다. 주지하듯 ‘very’는 보통 부사로 쓰이지만 형용사로 쓰이면 ‘바로 그’, ‘다름 아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바로 그 남자’를 나타내는 표현은 정관사를 수반한 ‘the very man’이 됩니다. 형용사 very의 개념 자체에 특정의 요소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물론 very가 부사로 쓰일 때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A very clever man’이라는 표현을 보면 ‘very가 아니라 ‘clever’가 man을 수식합니다. 따라서 “매우 영특한 사람 중 하나”라는 의미가 되므로 부정관사 “a”가 쓰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 the very clever man이 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경우에도 very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man의 의미 때문에 정관사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용사의 의미상 자연스럽게 특정 대상을 가리키게 되는 두 번째 예는 최상급으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최상급은 개념상 “가장 ~한”의 뜻을 갖습니다. 세상에 다양한 개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극단에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의미상 뒤에 나오는 명사는 하나로 특정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장 키가 큰 학생’은 한 명이고, ‘가장 큰 산’도 하나입니다. 따라서 정관사 the가 붙어서 ‘the tallest student’와 ‘the tallest mountain’으로 표현해야 함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First, second, third… 반드시 the와 함께?

세 번째로 수사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 경우엔 수사 앞의 정관사 즉,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와 같은 표현들을 예외 없는 법칙으로 배웠습니다. 수업시간에 “서수 앞에는 the를 붙여라!”는 구호를 외쳤었죠. 이런 법칙이 대개 들어맞지만 이 공식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a second chance“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give someone a second chance“와 같은 형식으로 빈번하게 쓰이지요. ”a second thought”와 같은 표현도 널리 쓰입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는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다” 정도의 뜻으로 “a second thought”와 같이 부정관사를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서수 앞의 관사 선택 또한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에서 “second”는 ‘다시 한 번’ 한번 더’ 정도의 의미입니다. 서수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것이죠. “take a second look(다시 보다)”과 같은 용법도 비슷합니다. 만약 우주선을 만드는 팀의 디렉터가 “Nobody deserves a second chance here.”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두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도가 되겠죠. 우주선이 폭파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니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이와 관련하여 학술논문에서 종종 등장하는 “a second limitation”과 같은 표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구의 한계를 논의하며 “두 번째 한계로는…”과 같이 이야기할 때 쓸 수 있는 어구인데, 한계점이 모두 몇 가지인지 언급하지 않고 “첫 번째 한계는…이다. 두 번째 한계는…이다.”와 같이 말할 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경우 은밀하게 ‘first’와 ‘second’가 단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럿 중의 하나”라는 부정관사의 개념적 의미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이에 대해서 “첫째, 둘째, 셋째… N번째”와 같이 이야기한다면 서수 앞에 모두 the를 붙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There are three problems with this method.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같이 “the very 명사”나 “the 최상급 명사” 등을 막무가내로 외우게 하기 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미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인지적이고 개념적인 기반을 깔아주고 다양한 언어 표현을 지어 올리는 것과 별다른 설명 없이 표현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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