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uated Cognition

“The theory of situated cognition, as I present it here, claims that every human thought and action is adapted to the environment, that is, situated, because what people perceive, how they conceive of their activity, and what they physically do develop together. From this perspective, thinking is a physical skill like riding a bike. In bicycling, every twist and tum of the steering wheel and every shift in posture are controlled not by manipulation of the physics equations learned in school, but by a recoordination of previous postures, ways of seeing, and motion sequences. Similarly, in reasoning, as we create names for things, shuffle around sentences in a paragraph, and interpret what our statements mean, every step is controlled not by rotely applying grammar descriptions and previously stored plans, but by adaptively recoordinating previous ways of seeing, talking, and moving. All human action is at least partially improvisatory by direct coupling of perceiving, conceiving, and moving – a coordination mechanism unmediated by descriptions of associations, laws, or procedures. This mechanism complements the inferential processes of deliberation and planning that form the backbone of theories of cognition based on manipulation of descriptions. Direct coupling of perceptual, conceptual, and motor processes in the brain involves a kind of “self-organization with a memory” that we have not yet replicated in computer programs, or indeed in any machine.” (pp. 1-2)
 
https://www.amazon.com/Situated-Cognition-Representations-Computational-Perspectives/dp/0521448719/ref=sr_1_3?ie=UTF8&qid=1537796300&sr=8-3&keywords=situated+cognition&dpID=5186Q2W%252BPPL&preST=_SY344_BO1,204,203,200_QL70_&dpSrc=srch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로 본 언어의 한계

Posted by on Jul 31,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언어의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효과와 인상입니다. 오늘은 성경구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글로 써 놓아도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가 동시에 포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진리’ 다음에 ‘자유’가 오는 언어 구조가 저 말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생각해 볼 지점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네게 진리가 있어?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모른다고?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언어표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점진적 과정은 조금씩 자유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와 ‘자유’라는 명사가 개별적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언제나 언어와 삶을 엮어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지언어학이야기

There is a man vs There is some man

There is a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 vs. There is some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

위의 두 문장 모두 “서점 앞에 사람이 하나 있다”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러 교과서에서 말하듯 특정되지 않은(indefinite) 개체는 a나 some 모두로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완벽히 같은 문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이 둘 모두가 맞는 표현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There is a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를 봅시다. “서점 앞에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상황인데요. 이 경우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인데 일부러 ‘a’를 써서 표현할 수 있지요. 즉 발화자는 서점 앞의 사람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청자는 모른다는 가정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There is some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라는 문장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가정이 담겨 있습니다. 적어도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발화자는 청자 또한 서점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문장은 “서점 앞에 왠 사람이 하나 있다”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There is 다음에 나오는 a와 some의 미묘한 차이를 간략히 논의해 보았습니다. 전에 이런 용법의 예문을 두고 “a=some”이라고 설명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이런 차이를 간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관사공부중

The moon과 a moon

the sun vs. a sun
the moon vs. a moon
the universe vs. a universe

유일한 대상, 특히 해, 달과 같은 천체와 우주를 가리킬 경우 the sun, the moon, the universe로 쓰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은 공식적으로 하나이니 특정되는 개체이고 the moon이 맞습니다. 태양계에서 태양은 하나이니 the sun이고요. 우주 전체는 단일한 개체로 개념화되므로 the universe가 적절하죠.

하지만 이것 또한 개념화 방식에 따라, 맥락에 따라 쓰임이 달라집니다. The sun은 태양계 내에서 맞는 표현이지만 공상과학 소설에서 태양이 두 개인 행성을 그린다면 a sun, two suns 등의 표현이 충분히 가능하지요.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에 대한 이론 중 평행우주 이론이 있지요.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셨다면 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있으실 텐데요. 이 경우 ‘평행우주’는 다수의 우주를 상정하므로 parallel universes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The가 붙지 않는 복수형이지요.

마지막으로 목성 등과 같은 행성은 달이 하나가 아닙니다. 따라서 목성의 달을 지칭할 때는 a moon, two moons 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현재 목성의 공식 위성 수는 16개이니 16 moons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결론적으로 ‘(지구의) 달’은 the moon으로 반드시 the와 함께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moon 앞에는 the가 온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그른 설명입니다. Universe와 sun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이 적용되고요. 관사의 종류가 특정 명사의 성격이 아니라 맥락과 개념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같은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Forbes
https://www.forbes.com/sites/quora/2018/02/02/could-an-earth-like-planet-exist-around-two-suns/#b5b9e37cb281

#관사공부중

You have the (a*) wrong number

You have the wrong number. vs. You have a wrong number.*

“전화 잘못 거셨네요.”에 해당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You have the wrong number.”이다. 이 경우 예외없이 정관사 the가 사용된다. 왜 “a”가 아니고 “the”일까?

“The”의 주요 기능이 특정(to specify)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 문장에서의 정관사 the도 특정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 그런데 상대가 잘못 알고 건 번호를 ‘특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특정되는 것이 세상의 수많은 번호 중 잘못 건 번호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자, 받은 사람 입장에서 전화건 사람이 누른 번호는 딱 두 가지다.

the right number
the wrong number

이 점을 고려한다면 저 상황에서 “wrong number” 앞에 항상 the가 붙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경우 번호의 종류는 딱 두 가지 즉 “올바른 번호”와 “틀린 번호” 밖에 없는 것이다.

인지언어학의 용어를 쓰자면 화자가 말할 때 상정하는 개념적 공간(conceptual space)에는 두 가지 종류의 전화번호밖에 없는 것이며, 이중 틀린 영역을 “the wrong number”라는 언어표현으로 특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최상급 앞에 the가 붙는 이유와 “wrong number” 앞에 the가 붙는 이유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대상을 특정한다. 다만 최상급 앞 the의 경우 많은 개체들 중 극단에 위치하는 대상을 특정하고, wrong number 앞의 the는 맞는 번호들의 집합과 틀린 번호들의 집합 중에 틀린 쪽을 특정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란 이야기다.

덧. 제목의 별표 *는 문장이 문법적이지 않다는 뜻.

이는 물론 특정 컨텍스트를 전제로 한다. 즉, “A wrong number”가 무조건 안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열 개의 숫자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에 틀린 숫자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면 “There is a wrong number in the list.”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wrong number” 앞에는 “the”라는 설명은 wrong이다!!

#관사공부중

the very man / the tallest girl (아래 아래 글에 이어서)

정관사의 가장 큰 임무는 ‘특정하는 일(to specify)’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특정하는 역할을 하는 형용사의 경우 정관사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대표적인 것으로 두 가지 예를 살펴보자. 먼저 ‘the very man’이다. 주지하듯 ‘very’는 보통 부사로 쓰이지만 형용사로 ‘바로 그’, ‘다름아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바로 그 남자’를 나타내는 표현은 ‘the very man’이 되어야 한다. Very의 개념 자체에 특정의 요소가 담긴 것이다.

Very가 부사로 쓰일 때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A very clever man’이라는 표현을 보면 ‘very가 아니라 ‘clever’가 man을 수식한다. 따라서 “매우 영특한 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므로 부정관사 “a”가 쓰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영어 공부를 어느 정도 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의외로 초중생 수준에서는 이런 설명도 가치가 있다.)

형용사가 자연스럽게 특정 대상을 가리키게 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최상급이다. 최상급은 개념상 “가장 ~한”의 뜻을 갖는다. 세상에 이것 저것 개체가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 자체가 뒤에 나오는 명사를 특정(콕 짚어서 말함)하게 된다. 이 앞에 정관사 the가 나와야 함을 개념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the tallest girl은 한 명이다.)

“the very 명사”나 “최상급 앞에는 the”라는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미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다. 인지적이고 개념적인 기반을 깔아주고 언어 표현을 올리는 것과 그냥 언어표현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명심했으면 한다.

#관사공부중
#관사강의나만들어볼까

Understanding something vs. an understanding of something

아래 OO님의 답글처럼 ‘셀 수 없는 명사와 셀 수 있는 명사’를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이를 부정관사 사용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명사와 관사의 관계는 생각보다 유연하기 때문입니다. 언급하신 understanding을 예시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Understanding something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이해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어떤 관사도 붙어 있지 않죠. 무관사는 절대적인 일반화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냥 막연히,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이해하는 일”을 뜻합니다.

이에 비해 “an understanding of something”은 여러 가지의 이해(multiple ways of understanding)가 있음을 상정하고 이 중 하나의 이해방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수학의 분야 중에 위상수학(topology)이 있습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는 수학의 하위 분야 중에서 꽤나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깊이 파고들면 뭐 안 어려운 게 있겠습니까만 암튼.) 이를 가지고 두 예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Understanding topology is not easy. (위상수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

She proposed a new understanding of topology. (그녀는 위상수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했다.)

먼저 관사가 쓰이지 않은 “Understanding topology”는 막연하고 일반적으로 “위상수학을 이해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후자의 understanding 앞에는 an이 붙어 있지요. 이는 위상수학에 대한 다양한 이해법이 있고 이중 한 가지 이해방법임을 의미합니다.

다만 ‘an understanding of something’에 비해 understandings의 빈도는 심히 낮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봐야죠. 이는 인간의 개념화가 일어나는 지형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해하는 방식’을 이야기함에 있어 단수를 훨씬 더 자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방식들”에 비해 “일종의 이해방식”이 개념적으로 훨씬 현저하다는(salient) 말이지요. Understandings라고 절대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쓸 일은 매우 적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관사를 공부함에 있어 우리는 “어떤 명사에 a가 붙어?”라고 묻지 말고, “어떤 상황에 명사에 a를 붙일 수 있어?”라고 물어야 합니다. 단어의 특성으로서 관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화의 도구로서 관사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관사를 깊이 이해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관사공부중

부정관사a/an과 정관사 the의 개념구분

영어사를 살피면 부정관사 a/an이 ‘하나’를 나타내는 말 one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는 “다수의 …”를 상정하고 (즉, an apple은 (multiple) apples가 있음을 전제하고), 이 다수가 이루는 집단(group)의 한 개체임을 표시한다. 따라서 a/an의 경우 셀 수 있는 명사 앞에 나온다.

이에 비해 정관사 the의 주요 역할은 특정(to specify)하는 것이다. 특정한다 함은 ‘콕 짚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특정의 대상이 셀 수 있는 명사일 수도 (the apple), 셀 수 없는 명사일 수도 (the money) 있다. 나아가 셀 수 있는 명사 중에서 단수건 복수건 전혀 상관이 없다. (the apple/the apples 모두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관사의 사용은 특정 명사의 성격에 귀속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해당 명사가 어떤 문맥(context)에서 쓰였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셀 수 있는 명사’와 ‘셀 수 없는 명사’의 기계적 구분인데, 이는 정관사 사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를 주지 못한다.

#관사공부중
#갑자기다시공부중

the only child vs. an only child

 

오래 전 ‘the only child’를 ‘외동’으로 배웠습니다. 형제가 없는 경우 반드시 ‘the only child’로 써야 한다는 것이죠. 이 설명에 따르면 ‘an only child’는 틀린 표현이었고요.

그런데 “He is an only child.”라는 문장을 꽤 자주 만나게 됩니다. 구글은 578만 건의 “an only child” 검색 결과를 보여주는데요. 결코 적지 않은 수죠. (“the only child”는 약 800만 건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른 것은 저에게 ‘the only child’만이 옳다고 말씀해 주신 분의 설명이었죠!)

위에서 나온 “He is an only child”는 “그는 외동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an only child”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동들 중 하나’라는 개념을 갖고 있죠. 부정관사 “a(n)”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다수 중 하나’라는 뜻이 됩니다. 한국사회에서 외동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니 저런 문장을 쓸 일도 많아질 듯합니다.

이에 비해 “the only child”는 “단 한 명의 자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너 형제나 자매가 있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하면 “나는 외동이야.”라는 뜻이 됩니다. 형제나 자매가 없다는 뜻이죠.

이 외에 상황에 따라 “Jane was the only child in this class.” (Jane은 이 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일한 아동이야.) 라는 식의 활용도 가능합니다.

위의 두 예문에서 “the only”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the only child in my family”에서는 가족 내에서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고, “the only child in this classroom”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를 ‘다수 중의 하나’라는 개념을 지닌 “an only child”와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the only child in my family”가 일반적으로 ‘외동’임을 의미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두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화제작인 A를 보지 못하고 B를 관람했다고 합시다. 왜 그랬을까요? 형 누나는 성인이어서 어떤 영화나 볼 수 있지만 자기는 미성년이어서 A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등 다른 가족은 모두 성인(adult)인데, 자기만 유일하게 성인이 아닌 아동(child)인 상황이죠.

덧.
어제 SteemIt 가입 승인을 받았는데, 뭘 써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새롭게 뭔가 써낸다는 건 현재 역량으로 불가능할 것 같고요. 기존에 썼던 관사 공부 포스트를 잘 엮어서 연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연재할만큼 원고가 정리되면 차곡차곡 올려보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SteemIt이 살아남아 있다면 말이죠. ^^

 

#관사공부중

시간이 흐른다?

[잡생각] “시간이 흐른다”를 대치할 메타포에는 무엇이 있을까?

1.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끊기지 않는 흐름임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2. 흐르는 것의 대표로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강이 아닐까?

3. 시간에 대한 표현을 생각하니 ‘Time flies.’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외에도 시간은 come, go, pass, approach, leave, run, elapse, remain, walk, crawl 등을 할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많겠지만.)

4. Time을 주어로 생각하면 시간이 흘러가고, 날아가고, 오고 가며, 지나고, 다가오고, 떠나고, 달려가고, 지나가고, 남아있고, 걸어가고, 기어가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를 듯하다.

5. 개인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간이 가는 일은 인생의 수많은 요소들이 다시 구획되고(rearticulated), 재영토화되며(reterritorialized), 재개념화되는(reconceptualized) 일이다.

6. 다양한 재구획화, 재영토화, 재개념화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과 정확히 맞물리지 않는다.

7. 먼 과거가 미래가 되기도 하고, 현재의 시간이 철저히 과거로 느껴지기도 한다. 물리적, 심리적, 개념적 시간들이 중첩되고 간섭하면서 인간의 시간을 엮어간다.

8. 실타래처럼 엮인 개인의 시간들이 일정한 질서를 형성할 때 역사적 시간을 빚어낸다. 하지만 역사의 공간성은 또다른 시간을 빚어낸다.

9. 산책 길에 만난 스팸 선물 박스. 나는 스팸문자와 메일을 떠올렸다. 잠시 후 또다른 스팸 포장지가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후자의 스팸 포장지는 처음 발견한 스팸 박스와 겹쳐졌다. 아니 처음 것이 후자에 겹쳐진 걸까.

10. 물리적 시간은 우주와 함께 흘러가지만 경험의 시간은 뇌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엮인다.

11. 우리는 우리 몸 안팎의 네트워크의 연결/위상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감지한다.

12. 오늘이라는 시간은 내/네 인생과 어떻게 엮였을까? 해가 기울어지는데 오늘이 외톨이 노드로 남을/잊혀질/버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론: 오늘이라는 시간이 영원히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을 엮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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