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른다?

[잡생각] “시간이 흐른다”를 대치할 메타포에는 무엇이 있을까?

1.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끊기지 않는 흐름임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2. 흐르는 것의 대표로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강이 아닐까?

3. 시간에 대한 표현을 생각하니 ‘Time flies.’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외에도 시간은 come, go, pass, approach, leave, run, elapse, remain, walk, crawl 등을 할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많겠지만.)

4. Time을 주어로 생각하면 시간이 흘러가고, 날아가고, 오고 가며, 지나고, 다가오고, 떠나고, 달려가고, 지나가고, 남아있고, 걸어가고, 기어가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를 듯하다.

5. 개인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간이 가는 일은 인생의 수많은 요소들이 다시 구획되고(rearticulated), 재영토화되며(reterritorialized), 재개념화되는(reconceptualized) 일이다.

6. 다양한 재구획화, 재영토화, 재개념화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과 정확히 맞물리지 않는다.

7. 먼 과거가 미래가 되기도 하고, 현재의 시간이 철저히 과거로 느껴지기도 한다. 물리적, 심리적, 개념적 시간들이 중첩되고 간섭하면서 인간의 시간을 엮어간다.

8. 실타래처럼 엮인 개인의 시간들이 일정한 질서를 형성할 때 역사적 시간을 빚어낸다. 하지만 역사의 공간성은 또다른 시간을 빚어낸다.

9. 산책 길에 만난 스팸 선물 박스. 나는 스팸문자와 메일을 떠올렸다. 잠시 후 또다른 스팸 포장지가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후자의 스팸 포장지는 처음 발견한 스팸 박스와 겹쳐졌다. 아니 처음 것이 후자에 겹쳐진 걸까.

10. 물리적 시간은 우주와 함께 흘러가지만 경험의 시간은 뇌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엮인다.

11. 우리는 우리 몸 안팎의 네트워크의 연결/위상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감지한다.

12. 오늘이라는 시간은 내/네 인생과 어떻게 엮였을까? 해가 기울어지는데 오늘이 외톨이 노드로 남을/잊혀질/버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론: 오늘이라는 시간이 영원히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을 엮어보자.

언어 정보의 잉여도(redundancy)와 스포츠 중계

얼마 전 밥을 먹으며 올림픽 중계를 흘려 듣는데 해설자의 다음 말이 엄청 크게 들리더군요.

“이 기술은 마스터하면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음……..

특정 기술을 마스터(master)한다 함은 그것을 수행할 때 신체의 모든 영역이 특별한 어려움 없이 완벽한 협응(coordination)을 이룬다는 의미이니 당연히 쉽겠죠. 비슷한 표현으로 “완치되면 안아픕니다.” “다 쓰면 세제가 없을 거예요.” 같은 게 있으려나요.

스포츠 경기 해설에서 유독 이런 문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뻔한 이야기 말이죠.

“이 기술은 마스터하면 쉽습니다” 같은 문장에는 새로운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언어신호의 양에 비해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겁니다.*

이게 스포츠 해설만의 문제는 아니고, 언어체계의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대충 이야기하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같아도 이를 전달하는 언어는 구정보(old information)와 신정보(new information)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정보로만 된 언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수식으로만 되어 있는 이론물리학 페이퍼를 읽는 상황은 거의

신정보만 접하는 예입니다. 신정보의 바다에 빠지면 ‘한 개도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죠.

때로는 동일한 정보를 살짝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이해를 돕기도 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위 별표(*)한 문단의 두 문장은 이 방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신호량에 비해서 새로운 정보의 양이 적을 때 잉여도(剩餘度, redundancy)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언어 외에 ‘남아도는’ 언어신호가 많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잉여도가 높으면 나쁜 걸까요? ‘용건만 간단히’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통용되는 금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보의 정확한 전달이 중요한 경우 잉여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항공관제탑과 파일럿 간의 소통입니다. 주요 정보를 몇 번이고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지요. ‘잉여’ 언어신호가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집중력, 정보 저장 능력, 인출 능력 등에 한계가 있기에 잉여 정보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정보의 입장에서 보면 잉여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주도면밀함’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스포츠의 경우로 다시 돌아오면 언어의 정보량이 떨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 반드시 성공해야 역전이 가능하죠.”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데 지고 있으니 당연합니다.) 같은 해설이 적지 않다는 겁니다. (이 문단 전체가 잉여…)

하지만 스포츠 해설에 있어서 전달되는 정보의 상당 부분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에서 골이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골을 넣는 장면과 거의 동시에) 골이예요. 골! 골! 골! 골~~~~~ 아 아 골~~~ 골! 골! 드디어 첫 번째 골이 들어갔습니다!!!”

시청자들은 소리와 화면으로 골이 들어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골이라는 것도 모르기 힘들고요. 이 상황에서 저 말의 정보량은 제로에 가깝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해설자의 흥분과 기쁨, 놀라움을 전달합니다.억양이나 고저, 장단과 같은 자질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요. (예: 골!이 아니라 고~~~~~~~~~~~~ㄹ)

이는 ‘경기 해설’이라고 불리지만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서적 반응만으로 훌륭한 ‘해설’이 되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골이 들어가는 순간 해설자는 해설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 같네요. ^^

이번에는 간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성우: “어, 철수야. 오랜만이네. 왠일루?”

철수: “그냥.”

여기에서 “그냥”이 자체로 담고 있는 인지적 정보는 작습니다. 하지만 간만에 전화를 한 상황에서 ‘그냥’은 상당히 높은 정서적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냥 전화해 주는 친구가 최고라고 느껴질 때도 있죠.

결국 언어는 구정보와 신정보를 적절히 담고 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상황에 따라서 구정보가 의도적으로 반복되기도, 정서적 정보가 증폭되어 전달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구정보와 신정보, 인지적인 정보와 정서적인 정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입니다.

이 상황에는 매체적 특성도 포함되는데, 글과 면대면 강의, 동영상 강의 등에서 단위 시간당 효율적 정보량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쓰다 보니 글의 잉여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만 쓰고 잉여의 삶으로 재진입해야 하겠습니다. 모두 조금은 잉여스러운 오후 시간 되시길 빕니다. :)

 

오묘한 메타포의 세계

1. 국물도 없는 집은 진짜 국물도 없다. 다신 안가.

2. ‘넌 이제 아웃(out)이야’라고 말하며 점퍼를 옷장 안(in)에 던져넣었다.

3. 처음부터 답이 다 정해져 있는 사람은 정말 답이 없지.

4. 완전 차갑게 얼린 맥주가 요즘 핫해요.

#오묘한메타포의세계
#오늘의두포스트종합

승패사회

Posted by on Jan 19,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인지언어학, 일상 | No Comments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1980년 그들의 기념비적 저서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서 인간 언어가 기본적으로 메타포적이라 말한다. 메타포가 언어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사고 자체가 메타포적이고 이것이 언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예는 아마도 “ARGUMENT IS WAR(논쟁은 전쟁이다)”일 것이다.

참고로 영단어 argument에는 전쟁을 직접 가리키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으나 한자어 ‘논쟁(論爭)’에는 ‘다툴 쟁(爭)’이 들어가 있으므로 학술적으로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argument의 뜻을 나타내는 데에는 가장 적합한 단어이기에 그대로 둔다.

다음 예들을 생각해 보자. 논쟁에 있어 strong/weak point가 존재하고, 이걸 attack하거나 defense한다.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strategy(전략)를 잘 세워야 하고, 때로는 상대방의 주장을 완전히 뭉개(demolish) 버리기도 한다. 상대의 논지를 하나 하나 깨뜨리는 행위는 shoot down으로 종종 표현되며, 적확하고도 효과적인 비판을 묘사하기 위해 ‘right on targe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알아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위의 표현 모두는 전쟁 상황에 그대로 쓰일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표현이 argument와 war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즉 논쟁을 묘사하는 표현 중 압도적 다수는 전쟁을 묘사할 때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argument는 춤(dance)이나 정원 가꾸기(gardening) 혹은 건물 짓기(building)가 아니라 전쟁에 가깝다. 개념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레이코프와 존슨의 논리는 간명하다. 전쟁을 나타내는 표현과 논쟁을 나타내는 표현을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라면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으로서의 은유> 전반부는 다양한 예시들을 동원하여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다.

어제 가상화폐 관련 논쟁을 1분 쯤 보다가 껐다. 이후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글을 보니 2/3 이상이 ‘~가 이겼다’, ‘압승’, ‘제압’ 등의 단어를 내세운다. 내가 보기엔 별 의미 없는 평가이지만 실제 투자를 하고 있거나 관련 이슈들을 따라가는 분들은 나름 무게를 두는 듯하다.

토론이 전쟁이라면 승패가 전부일지 모른다. 하지만 토론이 무지를 밝히는 작업이라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가끔 모든 걸 승패로 환원하려는 세계가 두렵다.

자아의 경계

Posted by on Dec 23, 2017 in 강의노트, 과학,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비유가 아닌 물리적 실체일 때, ‘자아’란 무엇일까? 몸에 대한 지각이 자아개념의 형성과 발달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두 몸’을 지각하고 살아가는 ‘각각의’ 두뇌에 자아는 어떻게 자리잡는 것일까? 하나의 뇌에 하나의 신체를 갖고 있는 이들이 거의 비슷한 신체적 경험을 하고 있을 때 자아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완벽한 댄스 듀오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첼로 연주자와 첼로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Bateson이 지적했듯 지팡이를 가지고 걷는 시각장애인의 자아(self)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지팡이의 끝인가, 중간 어디쯤인가, 아니면 손잡이 부분인가?

https://thewalrus.ca/how-conjoined-twins-are-making-scientists-question-the-concept-of-self

블라인드 채용 vs. 편견 최소화 채용

Posted by on Nov 25, 2017 in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블라인드 채용’ 말고 ‘편견 최소화 채용’으로 쓰면 어떨까? 말은 말뿐이라고 하지만 일단 말부터 바꾸고, ‘편견 최소화 채용’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 제안에 누군가는 ‘묻지마 채용’ 아니냐고 답하겠지만, 채용과정상의 편견을 최소화하고 보다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자는 대의에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미약하게나마 ‘블라인드’에 남아있는 차별의 흔적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수수께끼 하나

수수께끼 하나 풀어보시죠. A woman gave birth to two sons who were born in the same hour of the same day of the same year. But they were not twins. How could this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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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twins가 아니고 triplet이었어’라고 합니다. 허무한가요? ^^

영어 모국어 화자와 한국어 모국어 화자가 풀 때 정답률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로 보입니다. 영어에서는 twins, triplet, quadruplet 이 각기 다른 단어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들은 쌍둥이, 세쌍둥이, 네쌍둥이죠.

한국어 화자들은 ‘Twins’라는 말에 보통 ‘쌍둥이’를 떠올리고, 이 문제의 맥락에서는 ‘쌍둥이가 아니라구?’라고 묻게 됩니다. 한국어에서 ‘쌍둥이’라는 개념이 세쌍둥이, 네쌍둥이 등을 포함하고 있어 문제를 맞추기가 더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PISA 등의 국제적인 평가에서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 국가들의 수학성적이 높은 여러 요인 중 하나가 숫자의 일관성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1-20의 수를 한국어와 영어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면 차이가 큽니다. 어렸을 때 영어로 11,12,13 외우다가 짜증났던 기억도 있습니다. 한국어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의 구조와 직접 대응되는데 영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지요.

숫자 발음의 일관성은 작업기억(working memory)의 효율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하네요. 아주 작은 차이지만 머리 속에서 계산을 할 때는 적지 도움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저와 같은 한국어 모국어 화자라면 “십일 더하기 십이”랑 “Eleven plus twelve”를 비교해 보시면 감이 확 오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중국어와 일본어 또한 한국어와 같은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11 eleven 열+하나
12 twelve 열+둘
13 thirteen 열+셋
14 fourteen 열+넷
15 fifteen 열+다섯
16 sixteen 열+여섯
17 seventeen 열+일곱
18 eighteen 열+여덟
19 nineteen 열+아홉
20 twenty 열
21 twenty-one 스물+하나

 

http://www.npr.org/sections/krulwich/2011/07/01/137527742/china-s-unnatural-math-advantage-their-words

전쟁터가 된 삶

Posted by on May 3,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대부분의 언어는 군대 관련 표현을 담고 있고, 영어 또한 예외가 아니다. engineer는 원래 군 엔진(military engines)을 만드는 사람을, ‘dress(ed)’는 병사들이 전투에 나갈 준비가 된(prepared) 상태를 뜻했다. 그래서 특별한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차려 입고 ‘출격 준비 끝’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중세의 병사가 된 것이다. 온갖 표현과 어울려 쓰이는 strategy 또한 기원은 전쟁이었다. 그래서 ‘휴가 전략’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가 안맞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외국어 교수법도 군대 및 안보상황과의 긴밀한 관계 하에 변화한다. 교실에서 자주 쓰이는 “따라 읽기(oral repetition)” “단어 바꾸어서 반복하기(substitution drill)” 등은 2차대전에 참전할 미군 병사들의 외국어 실력을 단기간에 증진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군대식 교수법(Army Method)의 주요 학습법이었다. 911 이후 미국의 외국어 관련 예산에서 아랍어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서의 한국어 강좌 개설 또한 안보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정치의 영역에서 군사 메타포는 자주 사용된다. 선거의 ‘주요 격전지(key battleground)’나 ‘전면전(full-scale war)’ 등은 대표적인 예다. “military campaign”과 “election campaign” 모두 “캠페인”으로 불린다는 게 우연만은 아니다. 논쟁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오죽하면 “I demolished his argument.(그의 주장을 박살내 버렸지)”라는 표현이 있겠는가?

사회언어학자 데보라 태넌(Deborah Tannen)은 그의 저서 <Argument Culture>에서 언론, 정치, 교육 등의 분야에 만연한 대결적 문화에 대해 논의한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대화의 상대를 적(adversary)으로 간주하고 이를 기본적인 사고의 틀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도, 교육도, 문화도 ‘전쟁중’이다. 삶을 표현하는 기본 메타포가 ‘전쟁터’인 사회는 불행하다. 그래서 종종 묻는다. 이 전쟁은 정말 필요한 것이냐고. 누가 이 전쟁을 부추기고 유지하느냐고.

말은 소통의 도구이자 갈등의 씨앗

‘쓰는 용어가 달라서’ 소통이 안되는 상황보다 ‘(같은) 용어를 다르게 써서’ 소통이 안되는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전자는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의 문제지만, 후자는 체화된 의미들이 충돌하는 문제랄까. 그런 의미에서 “그 동네는 그런 말들을 주로 쓴다더라”와 “도대체 이 말을 왜 그따위로 쓰는 거냐”의 차이는 사뭇 클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성경을 보면서 철저히 보수적인 기복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과 급진적 사회변혁을 추구하게 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같은 말로 소통하기’의 불가능성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ANOVA

Two frames about the evil forces

There are largely two frames about the evil forces: (1) They don’t know the facts. They are not able to put themselves in other people’s shoes. They are misinformed in every aspect. (2) They surely know how to ignore the facts. They are superbly able to “stick to their own shoes.” They have their own media, which exerts control across society.

The former construes the evil as “unable” and “misguided.” The latter as “able” and “self-generated.”

Yes, they are misinformed. But the more crucial is the fact that they can engineer and spread fake news as well as control media. They may hopelessly lack empathy, but the more dreading point is that they can generate the ‘alt-reality’ that soothes people’s indifference and intolerance, and even crowns hatred and violence.

The fight lies in how to decapacitate the evil, draining its financial, institutional, and psychological resources, not in how to explain their pathetic ignorance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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