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그리고 ‘인질’ 메타포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

모 신문은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서울대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에 대해 “파업 인질”을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는 서울대 도서관 경비 중 한 명의 발언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헤드라인으로 올린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바로 ‘학생=인질’이라는 메타포를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에 대해 “인질” 메타포를 쓰는 관행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이 인질이 되고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환자가 인질이 된다. 급기야 학교 난방을 담당하는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은 학생을 인질로 잡는 일이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인질”은 부정확하고 비열한 메타포다. 왜 그런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질”이라는 단어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학생이 인질’이라는 정보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인생은 무대”라는 메타포가 주연배우, 조연배우, 악역, 엑스트라 등등을 순식간에 소환하는 것처럼 “인질”의 구성에도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또한 인질범은 인질을 댓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질’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고틀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를 프레임(fram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인질’ 프레임에서 파업을 둘러싼 주체들이 맡은 역할을 살펴보자. ‘학생이 인질이냐’는 질문을 던졌으니 당연히 학생은 인질의 위치에 놓였다. 파업중인 노조는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인질범이 된다. 자연히 노조와 대치하고 있는 대학본부는 인질이 구출되길 바라는 편이 되겠다.

우선 이 프레임은 극도로 부정확하다.

인질범은 인질극 프레임에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 노조는 자신들이 응당 받아야 할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임금인상도 아니다. 무기계약직 전환시 빼앗긴 교통비, 급식비 등 다양한 복지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생명을 조건으로 거는 몸값과는 거리가 멀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다. 하지만 서울대 기계전기분회 노조는 사실상 약자이다. 파업은 몸뚱아리 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이는 매우 적법한 권리행사의 수단으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아가 ‘인질’ 프레임은 비열하다.

학생을 인질로, 노조를 인질범으로 상정함으로써 학생과 노조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는다. 아울러 대학본부를 ‘착한 편’으로 자리매김한다. 학생들이 노동자와 연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질이 인질범과 어떻게 연대를 한단 말인가? 이 프레임에서는 ‘노조와 연대하는 학생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인질이 된 학생들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인질극에서 인질은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극히 수동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파업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노조에 연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인질극에서의 인질과는 달리 학내 파업 상황에서 학생은 당당한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는 사라져야 한다. 걸핏하면 나오는 ‘인질’ 프레임에 마음이 동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인질’로 묘사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질 프레임이 뒤집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한다. 파업에 임하는 노조는 누구도 인질로 잡지 않았다.

활성화 영역

아래 세 문장을 보자.

a. “컴퓨터 좀 쳐봐.”
b. “컴퓨터에 꼽을 데가 없네.”
c. “컴퓨터 램을 갈아끼웠어.”

세 문장에는 공통으로 ‘컴퓨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의 표면을 말한다. 뭔가 잘 구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쳐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표면의 단자를 말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SB 등 외부기기와의 연결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

세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내부의 마더보드를 의미한다. 램을 갈아 끼우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열고 메인보드의 슬롯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 좀 쳐봐”라는 말에 컴퓨터 뚜껑을 열고 컴퓨터를 치는 사람은 없다. “램을 갈아 끼웠어”라는 말을 듣고서 USB 단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맥에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를 ‘active zone(활성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어가 하나 같지만 실제로 그중 일부만이 두드러진 의미로 동원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활성화 영역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c를 쓸 때 분명 우리는 다른 영역의 의미를 활성화시키지만 ‘컴퓨터’라는 동일한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단어가 여러 가지 하위 요소를 갖고 있을 수록, 사용되는 상황이 다양할수록 활성화 영역의 역동성 또한 증가한다.

* ‘active zone’이 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어를 갖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인지언어학이야기

‘나/너’ -> ‘나+너’

‘뇌 신호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brain signals, 내 맘대로 지은 이름)’이 부상한다고 해도 그것은 의미작용의 지층을 두터이 할 뿐 반박 불가능하며 객관적인 의미를 확정하진 못한다. 기호학자들의 분파로 “뉴로-“가 붙은 “neuro-semiotician”의 영향력이 커지겠지만 이 또한 기호학의 제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도리어 삼각검증(triangulation)의 대상이 늘어나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퍼스(Peirce)가 간파했던 세계와 의미의 차이는 지속될 것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은 제시(present)될 수 있지만, 의미는 제시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재현(represent)될 뿐이다. 이러한 가정이 깨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이 물리적으로/생물학적으로 병합(merge)되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방식이 등장해야 한다. 의미작용의 지형이 ‘나/너’에서 ‘나+너’로 변화하는 순간 (언어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포괄하는 의미의) 기호학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맞게 될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은 단어와 뜻 즉, form과 meaning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한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나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하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D%@47″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언어의 형태와 의미 사이에 필연적 관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이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한다. Shell은 언어이다. ‘의자’, ‘chair’, ‘Stuhl’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다. 그 안에는 개념이 담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가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몸(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이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영(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는 매트릭스 1편에 등장한다. “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이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할 수 있다. 뭐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이다.

당신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는가? 어떤 정령들을 초대하는가? 그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 실재냐고? 그건 당신 자신이 결정한다. 사실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는 일생일대의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단이다.

뇌파, 언어, 얽힘

뇌파를 언어로 바꾸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직 해상도가 그리 높진 않지만 뇌의 신호만으로 ‘화자’가 의도한 언어를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고 신기한 세상이다.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화자’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말하고 들을 때, 텍스트를 읽거나 쓸 때 우리의 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궁금하다. 지금 짤막한 이 글을 읽은 페친의 뇌는 글을 읽기 전과 후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별 시답지 않은 글이니 별반 차이가 없을까? 누군가의 뇌는 변화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까? 사람마다 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언어 혹은 내용이 존재할까?

‘뭐 이딴 글이 있어’라고 생각하건 ‘진짜 멋진 글이다’라고 생각하건 우리의 뇌는 ‘어쩔 수 없이’ 반응한다. 나의 뇌 속에서 생겨난 움직임이 언어를 통해 누군가의 뇌를 움직이게 하고 그것이 일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신비롭고 괴이하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불편한 말들

남들은 그냥저냥 넘어가는데

난 깜짝깜짝 놀라는 표현들이 있다.

 

‘아랫’사람/’윗’사람

‘부하’직원

사람을 잘 ‘다룬다’/’관리한다’

‘몸값’이 어마어마하다

가격이 ‘착하다’

얼굴 ‘천재’

‘팔리는’ 글

 

그리고 잘 보지 않던 드라마를 보면서 수없이 듣게 되는 말.

 

아들/딸 의사 ‘만들었다’

 

너무나 널리 퍼진 말들이어서

이런 말들을 쓰는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질 이유는 없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받아온 훈련 덕분에

혼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민감해지되 상처받지 않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극복을 위해

욕설의 언어학이라도 공부해야 할까. (먼산)

 

체화된 인지와 재현성 위기

기본적으로 체화된 인지 embodied cognition 의 이론적 지향에 동의하지만 “유행”에 편승한 과도한 주장들을 걸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기사는 이 점을 최근의 재현성 위기 replication crisis 와 관련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단, 여러 번 언급되고 있듯이 이건 EC만의 문제는 아니고 심리학 전반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https://qz.com/1525854/psychologys-replication-crisis-is-debunking-embodied-cognition-theory/?utm_source=qzfb&fbclid=IwAR3PbBEILzsffYWM-MB-wHp8B-ZlgeT9ykc05SUBs-bHpfVOGrGcmoey7yE

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45: 체화된 시뮬레이션 가설 (1)

Posted by on Oct 25, 2018 in 강의노트,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기온이 39도까지 올라가는 최악의 폭염, 40명이 넘게 모인 좁은 교실의 에어콘이 고장났다. 사람들은 나누어준 팜플렛을 말아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요? 다른 말로 하면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듯한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문장의 의미는 단어에서 오고, 단어의 의미는 그 정의이다    

영어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습니다. 그리고 뜻을 확인하죠. 우리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신문을 읽다가 “전가의 보도”를 만났는데 그 뜻을 모른다면 국어사전을 찾기 마련이죠. 사전에서 뜻을 확인한 후 텍스트를 계속 읽어나갑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단어의 의미는 사전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단어를 안다는 것은 사전의 정의를 안다는 것이며, 이는 의미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의 근간을 이룹니다. 말의 뜻은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도록 하죠. 단어의 뜻이 사전에 나와 있는 정의라고 한다면 그 정의는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국어사전이라면 쉽게 모국어라고 답할 것입니다. 뜻풀이 또한 우리 말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단어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영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이해하기도 하고 영영사전의 정의를 통해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 스페인어 사용국에서 오래 산 경험이 있다면 영어-스페인어 사전을 가지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언어의 의미가 언어로 된 정의라면, 정의를 이루고 있는 언어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요? 영어학습 초기에 영영사전을 사용해 보셨다면 단어를 찾다가 ‘뺑뺑이를 돌아 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단어의 뜻을 정의하는 부분에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그 단어를 다시 찾아보니 또다시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그냥 영한사전을 참고해서 해결하곤 했지요. 그렇다고 해도 질문은 남습니다. 언어의 의미가 언어 내에 있다면 세상만사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언어 밖으로 어떻게 나가서 세계와 만나는 것일까요?

언어를 이해하게 만드는 시스템은 우리 뇌에 존재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이해하는 또다른 시스템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언어를 언어로 이해해서 그 의미를 모두 아는 것이라면 언어와 세계가 만날 길은 영영 사라지니 말입니다. 이 점을 깊게 고민한 학자는 미국의 철학자 Jerry Fodor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주고받는 자연어 이외에 우리 뇌 속에서 이 언어의 의미를 알게 해주는 상징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정한 말뜻은 다른 말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언어로 변환했을 때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주장을 사고언어가설(LOTH; the Language of Thought Hypothesis)라고 부릅니다.

사고언어는 우리가 발음할 수 있는 언어와는 다르게 소리값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를 코드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죠. 마치 단어를 이리 저리 옮겨 문법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고언어는 정신어(Mentalese)라고도 불리는데, 우리가 어떤 자연어를 사용하든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시스템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어를 쓰건 영어를 쓰건 스페인어를 쓰건 관계없이 이들 언어의 의미를 부호화(encoding)할 수 있는 인간 공통의 표상체계인 것입니다. 이같은 가정에 근거하여 Fodor를 비롯한 사고언어가설의 지지자들은 인간이 한국어와 같은 자연어보다 더 추상적인 수준의 기호 시스템인 정신어로 사고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뇌는 이러한 정신어를 표상할 수 있는 생물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고, 이는 모든 이들이 갖고 태어납니다.

전통적 의미가설과 사고언어가설의 한계

하지만 사고언어 가설도 언어의 의미에 대한 전통적 가설이 갖고 있는 약점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언어의 의미를 언어에 가두어 버린 전통적인 관점도, 일상어를 사고의 언어로 ‘번역’해서 이해한다고 믿는 사고언어가설도 의미의 발생을 언어적이고 인지적인 측면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설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순수히 상징적인 차원(symbolic dimensions)에 국한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생각을 교환하는 일은 보는 일이나 듣는 일, 우리의 근육을 움직여 운동하는 일과 관계 없이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일일까요? “기온이 39도까지 올라가는 최악의 폭염, 40명이 넘게 모인 좁은 교실의 에어콘이 고장났다. 사람들은 나누어준 팜플렛을 말아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는 문장을 이해하는 데 오로지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표상(representation)만이 개입하는 것일까요?

오랜 시간 언어학은 이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언어와 사고, 시각, 청각 등의 지각체계, 나아가 운동체계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방법론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간학문적 접근을 통해 60년대 이후 꾸준히 발전해 온 인지과학, 이와 함께 발전하고 있는 심리언어학적 연구방법론, 2000년대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뇌영상 기술 등이 언어의 작동방식, 언어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밝혀낼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년 미스테리 속에 숨겨져 있었던 의미생성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체화된 시뮬레이션 가설(embodied simulation hypothesis)”은 이같은 흐름에서 부상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작용에 대한 가설 중 하나입니다. 이에 따르면 가설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언어로 뜻풀이를 해서도 아니고 사고의 언어로 변환을 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언어에 의해 촉발(trigger)되는 다양한 감각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단순화시켜 말하면 우리는 뇌와 신체가 기억하고 있는 바를 자원으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수행함으로써 특정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Situated Cognition

“The theory of situated cognition, as I present it here, claims that every human thought and action is adapted to the environment, that is, situated, because what people perceive, how they conceive of their activity, and what they physically do develop together. From this perspective, thinking is a physical skill like riding a bike. In bicycling, every twist and tum of the steering wheel and every shift in posture are controlled not by manipulation of the physics equations learned in school, but by a recoordination of previous postures, ways of seeing, and motion sequences. Similarly, in reasoning, as we create names for things, shuffle around sentences in a paragraph, and interpret what our statements mean, every step is controlled not by rotely applying grammar descriptions and previously stored plans, but by adaptively recoordinating previous ways of seeing, talking, and moving. All human action is at least partially improvisatory by direct coupling of perceiving, conceiving, and moving – a coordination mechanism unmediated by descriptions of associations, laws, or procedures. This mechanism complements the inferential processes of deliberation and planning that form the backbone of theories of cognition based on manipulation of descriptions. Direct coupling of perceptual, conceptual, and motor processes in the brain involves a kind of “self-organization with a memory” that we have not yet replicated in computer programs, or indeed in any machine.” (pp. 1-2)
 
https://www.amazon.com/Situated-Cognition-Representations-Computational-Perspectives/dp/0521448719/ref=sr_1_3?ie=UTF8&qid=1537796300&sr=8-3&keywords=situated+cognition&dpID=5186Q2W%252BPPL&preST=_SY344_BO1,204,203,200_QL70_&dpSrc=srch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로 본 언어의 한계

Posted by on Jul 31,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언어의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효과와 인상입니다. 오늘은 성경구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글로 써 놓아도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가 동시에 포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진리’ 다음에 ‘자유’가 오는 언어 구조가 저 말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생각해 볼 지점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네게 진리가 있어?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모른다고?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언어표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점진적 과정은 조금씩 자유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와 ‘자유’라는 명사가 개별적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언제나 언어와 삶을 엮어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지언어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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