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화 reification 와 명사화 nominalization

“톰슨은 『이데올로기 이론 연구Studies in the Theory of Ideology』(1984)와 『이데올로기와 현대 문화Ideology and Modern Culture』(1990)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당화legitimation, 위장dissimulation, 통합unification, 분열fragmentation, 물화reification라는 다섯 가지로 구별한다.”

(1) ‘정당화’는 지배관계를 ‘정당한, 즉 공정하고 지지할 만한 것으로 제시하여’(1990: 61) 그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하는 과정이다.

(2) ‘위장’은 지배관계를 숨기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3) ‘통합과 분열’은 서로 반대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연관된다. 통합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람들을 통합하고 하나로 묶어내고자 하는 반면, 분열은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자 한다.

(4) ‘물화’는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 방식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물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을 하나의 사물 혹은 사건으로 변환시킨다는 뜻이다. 과정은 행위자가 있고,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담고 있는 동사로 표현된다. 하지만 물화된 사물은 사회-역사적 기원이 은폐된 채 행위자와 행위 없이 그냥 그렇게 존재한다.

— 이상 <리터러시와 권력> (사회평론, 2019) 3장 ‘언어와 권력’에서 발췌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방식에서 ‘물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 언어현상으로 명사화(nominalization)가 있다. 세계는 중단없는 시간의 흐름과 물리적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becoming)된다. 하지만 명사는 이러한 역동의 상태를 경계가 반듯하며 굳어진 개념으로 포획한다. 이는 인간의 언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이자 세계를 구획화하는 강력한 무기이다. 물화와 관련해서 이전에 썼던 글을 업데이트하여 아래 옮겨본다.

===

언어의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효과와 인상입니다. 오늘은 성경구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글로 써 놓아도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요. 한 문장이 일시에 이해되거나 발화될 수는 없습니다. 문단이나 글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가 동시에 포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진리’ 다음에 ‘자유’가 오는 언어 구조가 저 말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어가 갖는 선형성(linearity)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언어는 복잡다단한 요인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세계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을까요?

아울러 생각해 볼 지점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네게 진리가 있어?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모른다고?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언어표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점진적 과정은 조금씩 자유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이 두 과정은 서로 교섭하며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킨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와 ‘자유’라는 명사가 개별적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언제나 언어와 삶을 엮어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계는 언어를 통해 물화reification되지만, 삶은 언제나 운동하고 생성되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지언어학이야기

교육은 사다리? – 어떤 메타포의 위험성에 대하여

1. 어떠한 메타포도 현상을 완벽하게 포착하진 못한다. 언어는 세계를 단지 기호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해석하고 개입한다.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지층이 얽히고 섥힌 현상을 몇 마디 말이 간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철저히 중립적인 기표란 없는 것이다.

2. 그렇기에 우리가 지켜봐야 할 것은 특정 메타포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효과이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메타포가 발생하는 맥락(context)과 화용적 힘(pragmatic force)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특정 메타포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그 메타포를 사용했을 때 어떤 점이 부각되고 어떤 점이 탈각되는가? 그 메타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될 때 (naturalized), 어떤 관점이 득세하고 어떤 전제가 뿌리박는가?

3. 오늘만 타임라인에서 ‘교육=사다리’ 메타포를 둘러싼 글 셋을 보았다. 워낙 굳어진 메타포로 널리 쓰이고 있으니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최근의 자사고 정책 논란과 일부 학교의 지정취소와 관련하여 나올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4. 교육이 계층간 이동의 사다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사다리’가 갖고 있는 특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5. 우선 사다리는 필요에 따라 갖다 쓸 수 있는 도구로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상승욕구’를 갖고 있다고 상정한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고 싶어하며 이것은 교육받는 모든 주체에게 적용된다. 과연 그러한가? 그래야만 하는가? 나는 이 질문이 교육에 있어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6. 다음으로 사다리라는 수단은 비인격적이다. 사다리는 그 자체로 인간의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물리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교육이 사회이동의 사다리로 작동하는가’의 질문은 교육을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 변형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상정하고 있다.

7. 하지만 현실의 교육은 물리적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2만여 개의 초중고 학교, 600만 여 명의 학생의 삶의 터전이며 삶 자체다. 대학을 더하면 이 생태계의 규모는 800만 구성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 자체가 거대한 유기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8. 교육이 사회계층 사이의 이동성을 촉진하는 사다리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것은 ‘학교를 바꾼다고 사회가 바뀌는가’라는 말이다. 이 질문은 대개 학교를 어떻게 바꾸더라도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9.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기엔 커다란 허점이 있다. 생각해 보자. 공교육이 바뀌면 수백만 학생과 학부모들의 삶, 사교육이 바뀌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육이 바뀌어 봤자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은 교육을 그저 무색무취의 물리적 도구로 파악하는 사다리 메타포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얽혀 있다.

10. 교육의 변화를 생각할 때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교육이 바뀜으로 사회가 바뀌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다. 학교제도를 조금 손본다고 해서 비정규직의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거나 정치적 후진성이 일거에 사라지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 바뀌어서 학생과 교사, 나아가 지역사회와 학부모의 삶이 바뀌는가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거대 정치경제 구조의 변화에 종속되는 사소한 변화가 아니라 일상의 변화이고 세계관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그 자체로 충분한 정치성을 지닌다.

11. 이러한 면에서 ‘교육은 사다리’라는 메타포는 위험하다. 이 메타포는 교육을 무색무취한 물리적 도구로 바라보고, 교육이라는 제도의 복잡다단한 측면들을 거세하며, 무엇보다 교육 자체가 사람들의 삶이고 사회라는 점을 망각한다.

12. 교육은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분명 갖는다. 하지만 그 지위가 삶으로서의 교육을 압도할 때 우리는 ‘교육은 사다리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가’라는 앙상하기 짝이 없는 메타포에 포섭당하게 된다. ‘교육은 사다리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프레임이 되어 찬반에 관계없이 수단으로서의 교육이라는 전제를 강화한다. 이 자체가 교육을 배반하는 일이다.

13. 따라서 ‘교육은 사다리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왜 교육은 사다리라는 메타포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가?’, 나아가 ‘어떤 힘들이 교육을 사다리라고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는가?’가 좀더 근본적인 논의를 가능케 할 것이다. 좋은 사다리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보다 사다리가 필요없는 생태계를 지어가려는 노력이 더욱 정치적이고 깊이 교육적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메타포

언어와 사고의 관계 생각하기

언어와 사고에 관련된 논쟁이 늘상 놓치는 것은 언어가 사고에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 속에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행위를 매개(mediate)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대말을 쓰지 않는다고 상대에 대한 사고가 변화하는가?”는 그래서 해상도가 떨어지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쓰던 존대를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은 특정한 맥락에서 권력관계의 변화, 새로운 규약의 도입, 기존 언어자원의 변화 등을 동시에 수반하며 이는 언어사용자의 지각과 감정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언어의 변화를 촉발하는 데 많은 요인이 개입되고, 변화된 언어가 촉발하는 다양한 변화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맥락과 언중의 인지과정을 빼놓고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가?”라고 묻는 것이 별무소용인 이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3537318?fbclid=IwAR2G73M1WZoOT3t7G3dFWARdPi3TF2sH4Ae3Gx3yNyhlUgXs1WC3t3gp2wA

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0: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4)

Posted by on May 22, 2019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지난 시간 우리는 관사를 “인식론적 지위를 트래킹하는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화자가 청자로 하여금 특정 명사를 어떻게 인식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따라 a를 사용하느냐 the를 사용하느냐 관사를 사용하지 않느냐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원리에 따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배웠던 여러 규칙의 허점이 드러납니다. 아래에서 관계대명사 사용에 따른 관사 사용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 앞에는 the?

정관사와 부정관사에 대해 배우면서 ‘명사 뒤에서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면 the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 보니 엉터리 규칙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처음 나오는 명사 앞에는 반드시 a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처럼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명사에 정관사가 붙느냐 부정관사가 붙느냐와 관계대명사의 수식 여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라 하더라도 특정되지 않을(not specified) 수도 특정(specified)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a(n)+명사’를, 후자의 경우에는 ‘the+명사’를 써야 합니다. 다음의 예를 살펴봅시다.

a. We are hiring a data scientist who specializes in data visualization.

b. The man who stole the wallet was his uncle.

a는 “우리는 데이터 시각화를 전문으로 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구인하고 있다”, b는 “지갑을 훔친 사람은 그의 삼촌이었다”라는 뜻입니다. 두 문장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살피면 a의 “data scientist”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는 특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관사 ‘a’를 붙여 ‘a data scientist’로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에 비해 b의 경우 “지갑을 훔친”이라는 관계사절은 특정인을 묘사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콕 짚어 가리킬 수 있는’ 특정한 절도범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따라서 ‘a’가 아니라 “the’를 붙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관계대명사가 꾸민다 하더라도 수식을 받는 명사는 수많은 대상 중 하나로 개념화될 수도, 특정한 대상으로 개념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따라서 관사의 선택은 달라져야 하겠지요. 결론적으로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는 정관사 the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은 옳지 않습니다.

the very man / the tallest girl

정관사의 가장 큰 임무는 어떤 명사를 특정하는 일(to specify)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특정하는 의미를 지닌 일부 형용사의 경우 정관사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형용사의 특성상 화자가 ‘여러 개의 개체 중 하나’로 명사를 개념화할 수 없어 특정한 대상을 가리킬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세 가지 대표적인 예를 살펴봅시다. 먼저 ‘the very man’입니다. 주지하듯 ‘very’는 보통 부사로 쓰이지만 형용사로 쓰이면 ‘바로 그’, ‘다름 아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바로 그 남자’를 나타내는 표현은 정관사를 수반한 ‘the very man’이 됩니다. 형용사 very의 개념 자체에 특정의 요소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물론 very가 부사로 쓰일 때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A very clever man’이라는 표현을 보면 ‘very가 아니라 ‘clever’가 man을 수식합니다. 따라서 “매우 영특한 사람 중 하나”라는 의미가 되므로 부정관사 “a”가 쓰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 the very clever man이 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경우에도 very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man의 의미 때문에 정관사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용사의 의미상 자연스럽게 특정 대상을 가리키게 되는 두 번째 예는 최상급으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최상급은 개념상 “가장 ~한”의 뜻을 갖습니다. 세상에 다양한 개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극단에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의미상 뒤에 나오는 명사는 하나로 특정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장 키가 큰 학생’은 한 명이고, ‘가장 큰 산’도 하나입니다. 따라서 정관사 the가 붙어서 ‘the tallest student’와 ‘the tallest mountain’으로 표현해야 함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First, second, third… 반드시 the와 함께?

세 번째로 수사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 경우엔 수사 앞의 정관사 즉,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와 같은 표현들을 예외 없는 법칙으로 배웠습니다. 수업시간에 “서수 앞에는 the를 붙여라!”는 구호를 외쳤었죠. 이런 법칙이 대개 들어맞지만 이 공식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a second chance“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give someone a second chance“와 같은 형식으로 빈번하게 쓰이지요. ”a second thought”와 같은 표현도 널리 쓰입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는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다” 정도의 뜻으로 “a second thought”와 같이 부정관사를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서수 앞의 관사 선택 또한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에서 “second”는 ‘다시 한 번’ 한번 더’ 정도의 의미입니다. 서수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것이죠. “take a second look(다시 보다)”과 같은 용법도 비슷합니다. 만약 우주선을 만드는 팀의 디렉터가 “Nobody deserves a second chance here.”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두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도가 되겠죠. 우주선이 폭파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니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이와 관련하여 학술논문에서 종종 등장하는 “a second limitation”과 같은 표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구의 한계를 논의하며 “두 번째 한계로는…”과 같이 이야기할 때 쓸 수 있는 어구인데, 한계점이 모두 몇 가지인지 언급하지 않고 “첫 번째 한계는…이다. 두 번째 한계는…이다.”와 같이 말할 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경우 은밀하게 ‘first’와 ‘second’가 단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럿 중의 하나”라는 부정관사의 개념적 의미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이에 대해서 “첫째, 둘째, 셋째… N번째”와 같이 이야기한다면 서수 앞에 모두 the를 붙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There are three problems with this method.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같이 “the very 명사”나 “the 최상급 명사” 등을 막무가내로 외우게 하기 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미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인지적이고 개념적인 기반을 깔아주고 다양한 언어 표현을 지어 올리는 것과 별다른 설명 없이 표현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색깔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으면 보지 못한다?

Posted by on May 14, 2019 in 과학,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색상을 가리키는 언어가 없다면 그 색상을 볼 수 없다는 취지의 컬럼이 공유되고 있는데… 컬럼의 내용상 기 도이처의 저작인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를 그대로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즐겁게 읽은 책이네요.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가 없으면 인지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워프 가설에 대응하는 주장입니다. 흔히 언어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이라고 불리지요. 하지만 이런 강한 언어결정론은 학계에서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다만 언어의 사용이 인지과정을 세밀하게 조정하거나 특정 대상의 개념화에 다소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의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또한 논쟁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요.

학계의 논의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름 모를 색깔들을 꽤 많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립스틱을 놓고 색깔을 대보라 하면 어버버 하겠지만 서로 다른 색상의 립스틱을 구별하는 일이 아주 어렵진 않겠지요.

컬럼에서는 마치 언어학계의 중론인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이름을 모른다고 색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 근거가 희박한 주장입니다. 다만 특정한 이름을 붙여 색상들의 스펙트럼을 특정한 범주로 분류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관련 색상을 잘 구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Blue”라고 통칭되는 색상이 러시아어에서는 goluboy와 siniy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미국인들과 러시아인들에게 goluboy와 siniy 경계의 색상을 보여주고 이를 구별하라고 하면 러시아인들이 미국인들에 비해 구별하는 속도가 미세하게 빠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이 저 아래 중간 사각형 두 개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지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동물들은 색상을 가리키는 말이 없어도 자신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색상을 구별합니다.

덧. 컬럼에서 언급되었듯 기 도이처 또한 색상용어가 등장하는 순서가 일정하다는 것을 말하긴 했지만 이 분야를 개척한 사람은 Brent Berlin과 Paul Kay입니다. 1969년 기념비적 저서인 <Basic Color Terms: Their Universality and Evolution>을 내서 색상과 인지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이 저서에 대한 설명은 아래 위키 페이지를 참고하십시오.

https://en.wikipedia.org/…/Basic_Color_Terms:_Their_Univers…

덧2. 일반인 수준에서 색상용어에 관한 학계의 논의를 정리한 영상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Vox 미디어에서 제작한 <The surprising pattern behind color names around the world> 입니다.

덧3. 아래 색상 이미지는 Lera Boroditsky의 테드 강연 <How language shapes the way we think>에서 가져왔습니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 꽤 놀랍다고 생각하는 것 둘.

1. 자기를 쪼갤 수 있다. 나와 내가 대화할 수도 있고, 나와 다툴 수도 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화해하기도 하고, 둘이 토론을 할 수도 있다. I를 I-me로 나눌 수 있기에, 추가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작가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되어 대화하는 사람이다.

2. “같다”를 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줄리엣은 태양이 아니지만 태양이고, 내 마음은 호수가 아니지만 호수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동네이면서 우주이고, 인생은 여정이고 항해이며 게임이자 전쟁이다. 분명 “이다”로 표현되는 세계이지만 우리는 안다. 인생은 항해는 아니라는 것을.

전자가 마음의 분신술이라면 후자는 세계를 믹싱하는 능력이다.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세계를 순식간에 통합시켜 볼 수 있다는 건 꽤나 멋진 능력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이름 붙이기 vs. 마주보기

흔히 “명사”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들 하지만, 옳지 않은 설명이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봐도 “나무”는 세상의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나무”라고 불리는 개념(concept)에 조응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명사는 일종의 ‘집합명사’다. “나무”는 내 집앞 화단의 아담한 사과나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를 가리킨다. 참나무, 뽕나무, 자작나무 등에 속하는 모든 개체를 통틀어 ‘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나무’는 세계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체계 속에 개념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언어의 유용함과 위험함이 동시에 드러난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는 단지 세상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분류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를 배울 때 ‘나무’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되듯, /자유/를 배울 때 ‘자유’에 속하는 것을 분류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말은 우리의 세계를, 감정을, 의견을, 고통을 갈라친다. 세계의 어떤 부분을 떼어내어 자기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다. 그렇게 쌓이는 개념이 세계와의 소통과 충돌을 보장하진 못한다.

갈수록 개념만 계속 집어삼키는 공부가 두렵다. 더 자세히 분류하고 갈라치는 법을 배우다가 세계와 손맞잡고 대면하는 법을 잃어버릴까 무섭다. 구획하는 법을 배운답시고 마주보는 법을 잃어/잊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총체로서의 세계와 대면할 수 없다. 개념과 눈빛을 나누지 못한다. 단지 한 인간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대면(對面) 아닌가. 명명(命名)이 아닌 마주봄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욱 절실한 시절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삶을위한영어공부

접힘과 펼침,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책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종종 검색을 한다. 지식의 전달만큼이나 함께 실천하는 ‘친구’를 얻는 게 목적이었던만큼 책을 매개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단단한영어공부 로 검색을 했다. 새로운 포스트가 보였다. 그런데 클릭을 해보니 <단단한 영어공부>와 관련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책 이야기를 하는 포스트에 #단단한영어공부 그리고 #삶을위한영어공부 태그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살펴보니 포스트를 올리신 분은 일전에 <단단한 영어공부>를 읽으신 독자셨다. 책을 읽고 이 표현들이 맘에 드셨는지 다른 영어공부 포스트에 이 두 표현을 태그로 사용하신 것!

적어도 이 분에게 #단단한영어공부 와 #삶을위한영어공부 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가 되었다. 내 책 이야기가 아니어서 순간 실망했지만 이내 마음이 따스해졌다.

어쩌면 책을 쓴 이유는 이들 표현들이 특정한 책의 제목이나 부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흘러든 ‘보통 표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나의 책 제목 따위는 잊혀지지만 누군가의 실천의 양태가 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단단한 영어공부>나 <삶을 위한 영어공부>도 수많은 이들의 실천과 생각으로 빚어진 책이다. 수많은 보통명사의 앙상블이 만들어 낸 일시적인 고유명사일 뿐.

책의 제목은 고유명사로 남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곳곳에 스며든 보통명사로, 또 실천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다시 누군가의 손에서 고유명사로 빚어진다. 이렇게 보통명사와 고유명사는 접힘과 펼침을 거치며 세상을 유랑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단단한영어공부

인지언어학 이야기 49 – 관사 (1)

Posted by on Apr 22, 2019 in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3)

“Everything should be as simple as it can be but not simpler!” (모든 것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실제보다) 더 단순하면 안된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저는 이 인용구를 볼 때마다 문법, 그 중에서도 관사에 대한 흔한 설명방식 중 하나를 떠올립니다.

처음 나오면 a, 그 다음 나오면 the (?)

중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문법책에서 관사를 처음 접한 저는 복잡한 규칙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손을 들고 질문을 했죠.

“선생님, a랑 the랑 언제 써야 하는지 헷갈리는데요.”“그거 많이 헷갈리지. 근데 이것만 기억해. 뭔가를 처음 쓰면 a고 그 다음에 받을 때는 the로 받는 거야. 그러니까 바나나를 처음 말할 때는 a를 쓰고 그 다음에 그걸 다시 받으면 the를 쓰면 되지. 쉽지?”“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사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는 했지만 선생님의 답변이 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문법책을 봤을 때 선생님의 설명과 벗어나는 예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천체를 나타내는 the moon, the universe, the sun 등의 표현입니다. 이들은 처음 언급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계없이 ‘the’와 함께 쓰입니다. 이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의 어원과 이에서 파생한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a와 the의 어원, 그리고 개념적 특성

영어사를 살피면 부정관사 a/an이 ‘하나’를 나타내는 말 one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는 “다수의 …”를 상정하고 (즉, an apple은 multiple apples가 있음을 전제하고), 이 다수가 이루는 집단(group)의 한 개체임을 표시합니다. 따라서 a/an의 경우 셀 수 있는 명사 앞에 나오게 되지요.

이에 비해 정관사 the의 주요 역할은 명사를 특정(to specify)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어원을 살핌으로써 그 의미를 보다 상세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The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고대영어의 중성 지시어 þæt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정관사 the 뿐만 아니라 지시대명사 that으로도 진화합니다. 의미상 정관사 “the”는 ‘저것’을 나타내는 말에서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다’ 함은 ‘콕 짚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화자가 사용하는 명사가 청자에게도 알려져 있어야 합니다. 청자가 모르는 명사를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가 ‘저 책 좀 줘봐.’이라고 말할 때에는 ‘저’가 가리키는 것이 청자가 특정할 있는 물리적 영역에 있습니다. 말하는 이는 ‘저’라는 말을 청자가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요. 이같은 지시의 역할이 인식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 바로 정관사 ‘the’가 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가 “the”를 붙여 말하는 명사는 청자의 인식 속에서도 특정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sun이나 moon 나아가 universe 등 천체를 나타내는 말은 언제 쓰이건 대화자 모두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해는 유일한 해이고 달은 유일한 달이며 우주는 유일한 우주이니 다른 걸 상상할 수 없죠. 처음 나오느냐 두 번째 나오느냐에 관계없이 대화자 모두가 알고 있다고, 다시 말해 화자 뿐 아니라 청자 또한 ‘아 그거’라고 특정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the와 함께 쓰입니다.

한 가지 더할 것은 특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명사는 가산성이나 단복수성과 관련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the를 붙여 특정할 수 있는 명사는 셀 수 있는 명사일 수도 (the apple), 셀 수 없는 명사일 수도 (the money) 있습니다. 또한 단수건 복수건 전혀 상관이 없기에 the apple이나 the apples 모두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a moon’이나 ‘a universe’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달 vs. 위성, 유일한 우주 vs. 여럿 중 하나의 우주

말씀드렸듯이 현재 지구에서 ‘달’이라고 하면 하나의 달을 떠올립니다. 토끼가 절구질을 하고 있는 그 달이죠. (여기에서 지구를 돌고 있다는 다른 달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달’이라면 “the moon”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구에서 달을 가리킬 때 반드시 the를 붙여서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달의 양태는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의 여러 모양 중 하나인 ‘큰 보름달’은 ‘a great full moon’이라고 할 수 있죠. ‘a blue moon’이나 ‘a half moon’이라는 표현도 가능하구요. 여러 형태와 색깔을 가진 달 중에 하나를 가리킨다면 ‘a ~ moon’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moon’이 가능한 경우가 또 있습니다. 지구인은 유일한 달을 이야기하므로 ‘the moon’으로 쓸 수밖에 없지만, 달이 여러 개인 행성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목성에는 달이 79개가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라면 “The Earth has a moon while Jupiter has 79 moons.”라고 쓸 수 있습니다. “목성은 달이 79개이지만 지구는 달이 하나다.”라는 의미인데, 이 경우 ‘moon’은 평소 말하는 달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위성(satellite)의 뜻이 됩니다. 특정될 수 없는 일반적 개체가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주는 보통 ‘the universe’이지만 ‘a universe’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중우주론을 주장하는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이 우주 외에 다른 우주들도 있지요. 이 경우 현재 우리가 지각하고 살아가는 우주는 여럿 중 하나의 우주 즉, ‘a universe’입니다. 다른 우주들을 포함해서 ‘universes’라는 말을 쓸 수 있고요. 따라서 복수의 우주를 가정하는 이론체계 안에서는 “multiple universes”라는 표현이 얼마든 가능한 것입니다.

정관사, 부정관사, 그리고 총체와 가능성으로서의 세계

이와 같은 논리는 세계를 나타내는 world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예문을 보시죠.

a) The world is full of sorrow.
b) We want a better world.

위의 두 예문에서 ‘world’ 앞에 서로 다른 관사가 쓰였습니다. a)에는 정관사 the가, b)에는 부정관사 a가 쓰였죠. 왜 이런 차이가 오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세계’라고 말할 땐 ‘the world’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일한, 그리고 특정한(specific)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b)에서 ‘world’는 가능성으로서의 세계입니다. 지금 눈앞의 세계는 하나일지라도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가능태는 수없이 많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a world’입니다. 그렇기에 ‘a better world’ 뿐 아니라 ‘a greater world’, ‘an ideal world’, ‘a miserable world’ 등의 표현도 가능하죠.

달은 하나이지만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세계는 하나의 총체이지만 가능성으로서의 세계는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유일하게 정해진 것(definite)처럼 보이는 것들도 결코 특정한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indefinite) 것입니다. 어떤 틀에서 개념화되느냐에 따라서 그 인식론적 지위(epistemological status)가 달라지고, 함께 쓰이는 관사도 바뀌는 것입니다.

관사, 인식론적 지위를 트래킹하는 시스템

이렇게 보면 관사는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명사의 인식론적 지위를 따라가는 일종의 트래킹 시스템(tracking system)입니다. 즉, 명사에 ‘꼬리표’를 달아 말하는 이가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관사를 쓰는 경우 화자는 청자가 자신이 말하는 명사를 특정(specify)하여 따라올(track)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부정관사를 쓰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 개의 개체 중 하나라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자세히 논의하지 않았지만 관사를 아예 쓰지 않는 무관사(zero article)의 경우도 나름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저의 예전 영어선생님이 신정보/구정보의 틀로 부정관사와 정관사 사용을 구분했던 기술방식보다 훨씬 정확하게 관사의 사용을 포착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따르자면 제 중학교 때 선생님의 설명은 “simpler(실제보다 더욱 단순화한)”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임기응변은 될지 모르지만 문법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언어현상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학생들을 좌절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듯 말입니다.

 

영어 관사와 화자의 의도: 아래 글에 이어 쓰려고 하다가 길어져서 쓰지 못한 이야기

관사의 쓰임을 신정보/구정보로 설명하는 방식은 또 하나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관사의 쓰임을 온전히 텍스트 안에서 설명하려고 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소설의 첫 문장을 “I hugged the tree.”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죠. 이 경우 전통적인 구정보/신정보 관점에서는 소설의 첫 문장이므로 “the tree”가 어색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문장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요.

사실 작가는 독자가 이 문장을 처음 읽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쓰는 책이니 모를 수가 없죠. 하지만 의도적으로 정관사를 쓴 것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들에게 ‘나무’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면 “the tree”가 무난할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나무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내려 할 경우에도 “the tree”가 ‘a tree’보다 적절한 선택이겠죠. 이어서 “I smelled the soil and walked with the dogs. I watched the river a while, serene and weary.” 같은 문장을 제시한다면 이들 명사가 하나의 앙상블(ensemble)을 이루어 더 큰 호기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이 곳이 대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자아내는 것이죠.

따라 이런 경우 the tree 자체가 신정보냐 구정보냐의 문제가 아니라, 화자(작가)가 특정한 명사를 신정보로 개념화하느냐 구정보로 개념화하느냐의 문제가 더욱 중요합니다. 즉 화자는 정관사라는 도구를 통해 의도적으로 ‘알려진 것인양’ 포장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 독자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개체들을 연달아 the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추후 설명될 것’이라는 언질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화자의 의도를 명확히 하고 수사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처음 등장하는 명사에도 the를 얼마든지 붙일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The의 선택 여부는 단지 텍스트 내의 규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사용자의 의도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5년 전 오늘을 기억하며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합니다.

1. 먼저 어떤 개체 하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sister. She is very smart.”

여기에서 ‘a sister’는 한 명의 여자형제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sister들 중 한 사람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will be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동물을 대표하는 표현이지요.

1과 2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야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좋은 이야기는 하나의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A(n)”의 의미는 이렇게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저는 관사의 이런 변증적 성격을 통해 한 사람과 인류 전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헤 보곤 합니다. “a person”은 “한 사람”임과 동시에 “모든 사람”일 수 있다고 말이죠.

5년 전 오늘 수많은 생명들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 곁을 떠난 한분한분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릅니다. 인류 전체였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이 아니며,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임과 동시에 대양의 일부”라고, 그리하여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고 노래한 존 던의 시처럼 말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한분한분 안에 담겨 있던
온 우주를 기억하겠습니다.

못난 저를 보니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부탁하고 또 기원합니다.

거친 세상 속
망각으로 빠져들어가는
서로를 굳건히 붙잡아 주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