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48: 문법 새롭게 보기 – 인지문법의 세계 (2)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이란 단어의 생김새와 뜻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합니다. 필자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반드시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 ㅎ혹은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합니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87K”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의 자의성이란 언어의 형태(form)와 의미(meaning)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의자/라는 소리가 의자라는 개념에 대응하는 것은 사회적인 약속이기 때문이지, 둘이 필연적으로 묶여있기 때문이 아닌 것이죠.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합니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 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냅니다. 물리적 세계는 하나이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상징적 세계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가끔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습니다.

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합니다. 이 표현은 SF의 한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의 영문 제목에서 가져온 것으로, ‘껍질 안에 들어 있는 혼’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shell은 언어에 대응합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의자’, ‘chair’, ‘Stuhl’ 등에 해당하는 소리 혹은 철자들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입니다. 그런데 이 껍데기 안에 개념이 담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를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물리적 실체(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과도 같습니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혼(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삼라만상과 그 운행, 나아가 그것에 대한 지식을 코드화하여 작디작은 뇌 속에서 ‘돌려볼 수’ 있게 만든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analogy)는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편에 등장합니다. 모피어스(Morpheus)가 네오(Neo)에게 소개하는 컨스트럭트(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입니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loading)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옷, 장비, 무기, 훈련 프로그램 등이 언급되지만 아름다운 계곡을 불러올 수도 있고 맛있는 음식을 순식간에 생성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오래 전 추억도 소환할 수도 있죠. 그야말로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컨스트럭트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입니다. 물리적 세계와는 다르지만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구조체인 것이죠.

문법과 대화, ‘컨스트럭트’의 로딩규칙 그리고 개입, 변형, 확장

문법은 ‘컨스트럭트’의 로딩규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컨스트럭트에 개념을 불러들일 때 어떤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를 정하는 가이드라인인 셈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어떤 위계와 순서로 로딩되어야 하는지를 정합니다. 영어라면 ‘주어+동사+목적어’ 순서를 근간으로 다양한 요소들을 로딩할 수 있습니다. 품사는 특정 요소가 어떤 위치에서 로딩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각각 형용사와 명사인 ‘good’과 ‘people’이 함께 올 때에는 ‘good people’의 순서로 로딩되어야 하고, 관사와 명사인 ‘the’와 ‘people’이 함께 올 때는 ‘the people’ 순으로 로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화를 통한 소통은 ‘여러 컨스트럭트의 교섭과 변형 그리고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컨스트럭트에 특정한 개념체계를 로딩하여 음성언어를 매개로 상대의 컨스트럭트에 보냅니다. 이를 받은 상대는 자신의 컨스트럭트 내에 대응하는 언어를 호출하여 반응합니다. ‘로딩’과 ‘전달’, 그리고 또 다른 ‘로딩’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주고받음이 반복되는 교섭 과정에서 두 사람의 컨스트럭트가 변형되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변화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컨스트럭트는 대화를 주고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컨스트럭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고 있습니까? 어떤 정령(ghost)들을 초대합니까? 어떤 컨스트럭트와 상호작용합니까? 어떤 컨스트럭트와 충돌합니까?

이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실재입니까? 그것은 당신 자신이 결정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가 주인공 네오(Neo)의 운명을 결정하지만, 사실 어떤 약을 고르느냐는 일생일대의 결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정입니다.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언어를 고를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지,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어떤 생각을 버려야 할지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I hear you”

‘듣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hear’에는 ‘이해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듣는 일(지각)과 상대의 마음/의견/상황/생각 등을 이해하는 일(인지)이 한 단어 안에 쏙 들어가 있다.

그래서 “I hear you.”라는 말을 좋아한다.

돌아보면 상대의 말을 다 들어보지 않고도 공감한다 생각한 적이 많았고, 상대방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 하에 상대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적도 있었다.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해하기. 다 듣지 않고 알 수 있다 믿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않기. 지각과 인지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기.

“I hear you.”가 내게 전해주는 교훈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지언어학이야기

I just come and go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내가 활동주(agent)로서 자율적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나고 죽는 것은 주체적 선택과 행위와 거리가 멀다. (영어를 기준으로) 태어나는 행위는 대부분 수동태(be born)로, 죽는 행위는 대부분 자동사(die, pass away)로 표현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동사는 “fall in love”인데, “fall”은 주체의 능력이나 의도를 가장 적게 담고 있는 동사 중 하나다. 흔히 말하는 ‘불가항’의 행위인 것이다.

어쩌면 물흐르듯 산다는 건 자동사를 늘려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Rise, breathe, walk, sit, stand, smile, laugh, cry, clap 그리고 언젠가 disappear, vanish…. I just come, stay a while, and go.

#인지언어학이야기 #잡생각

보통명사, 고유명사, 그리고 김춘수의 <꽃>

1. 보통명사는 개념에, 고유명사는 개체에 대응된다.

a chair는 세계의 그 어떤 의자에라도 대응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대응하는 것이 특정한 의자가 아니라 의자성(chairness)이기 때문이다. a chair에 대응하는 것은 물리적 의자가 아니라 ‘의자’라는 개념이다.

하지만 개똥이는 오로지 개똥이에 대응된다.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개똥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똥이/라는 발음은 생물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유일한 개체인 개똥이를 가리킨다.

2. 우린 보통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배우지만 이 명제가 보통명사와 고유명사에 적용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보통명사는 개념의 세계에 대응한 뒤 개별 대상으로 나아가지만, 고유명사는 구체적인 대상에 바로 대응된다.

3. 김춘수의 ‘꽃’은 이 차이를 시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법설명보다 응축적이다.

다만, 그의 시어들은 위의 문법 설명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본 문법설명에 따르자면 아래와 같은 싯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보통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고유명사가 되었다.”

4. 김춘수의 ‘꽃’이 그린 세계와 달리 어쩌면 지금 이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꽃’이라는 보통명사에서 ‘몸짓’을 읽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명명의 세계를 현상학의 세계로 바꿔내는 일 말이다.

#인지언어학이야기

문장의 개념적 중핵

인지문법을 배우며 처음으로 문장을 개념적으로 분석하는 법을 접했을 때 의아했던 것은 “동사”가 개념적 중핵(conceptual core)로 분류되고 전통적으로 명사구에 해당하는 것들이 이 개념적 틀의 참여자(participant)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The gentleman bought a notebook.”이라는 문장이 있다면 “buy(bought)”가 문장의 개념적 중핵으로, the gentleman과 a notebook이 이 개념의 참여자로 분류된다. (이전 문법의 틀에서는 주로 동사(verb)와 논항(argument)에 관한 논의를 떠올리시면 된다.)

“누가”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주체 중심의 사고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문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먼저 존재해야 하고 이 주체가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주체”가 탄생하는 방식은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체”는 언제나 특정한 행위틀 안에서만 이해된다. 이러한 활동/행위들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조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말해 주체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말하고, 듣고, 공부하고, 싸우고, 쓰고, 주장하고, 사고, 팔고, 빌리고 등의 활동들 속에 들어감으로서 비로소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주체”보다 “행위”를 개념적 중핵으로 놓고, 이에 관여하는 참여자들을 분석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인지언어학이야기

파업, 그리고 ‘인질’ 메타포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

모 신문은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서울대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에 대해 “파업 인질”을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는 서울대 도서관 경비 중 한 명의 발언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헤드라인으로 올린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바로 ‘학생=인질’이라는 메타포를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에 대해 “인질” 메타포를 쓰는 관행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이 인질이 되고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환자가 인질이 된다. 급기야 학교 난방을 담당하는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은 학생을 인질로 잡는 일이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인질”은 부정확하고 비열한 메타포다. 왜 그런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질”이라는 단어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학생이 인질’이라는 정보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인생은 무대”라는 메타포가 주연배우, 조연배우, 악역, 엑스트라 등등을 순식간에 소환하는 것처럼 “인질”의 구성에도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또한 인질범은 인질을 댓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질’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고틀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를 프레임(fram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인질’ 프레임에서 파업을 둘러싼 주체들이 맡은 역할을 살펴보자. ‘학생이 인질이냐’는 질문을 던졌으니 당연히 학생은 인질의 위치에 놓였다. 파업중인 노조는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인질범이 된다. 자연히 노조와 대치하고 있는 대학본부는 인질이 구출되길 바라는 편이 되겠다.

우선 이 프레임은 극도로 부정확하다.

인질범은 인질극 프레임에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 노조는 자신들이 응당 받아야 할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임금인상도 아니다. 무기계약직 전환시 빼앗긴 교통비, 급식비 등 다양한 복지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생명을 조건으로 거는 몸값과는 거리가 멀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다. 하지만 서울대 기계전기분회 노조는 사실상 약자이다. 파업은 몸뚱아리 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이는 매우 적법한 권리행사의 수단으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아가 ‘인질’ 프레임은 비열하다.

학생을 인질로, 노조를 인질범으로 상정함으로써 학생과 노조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는다. 아울러 대학본부를 ‘착한 편’으로 자리매김한다. 학생들이 노동자와 연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질이 인질범과 어떻게 연대를 한단 말인가? 이 프레임에서는 ‘노조와 연대하는 학생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인질이 된 학생들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인질극에서 인질은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극히 수동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파업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노조에 연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인질극에서의 인질과는 달리 학내 파업 상황에서 학생은 당당한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는 사라져야 한다. 걸핏하면 나오는 ‘인질’ 프레임에 마음이 동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인질’로 묘사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질 프레임이 뒤집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한다. 파업에 임하는 노조는 누구도 인질로 잡지 않았다.

활성화 영역

아래 세 문장을 보자.

a. “컴퓨터 좀 쳐봐.”
b. “컴퓨터에 꼽을 데가 없네.”
c. “컴퓨터 램을 갈아끼웠어.”

세 문장에는 공통으로 ‘컴퓨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의 표면을 말한다. 뭔가 잘 구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쳐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표면의 단자를 말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SB 등 외부기기와의 연결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

세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내부의 마더보드를 의미한다. 램을 갈아 끼우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열고 메인보드의 슬롯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 좀 쳐봐”라는 말에 컴퓨터 뚜껑을 열고 컴퓨터를 치는 사람은 없다. “램을 갈아 끼웠어”라는 말을 듣고서 USB 단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맥에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를 ‘active zone(활성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어가 하나 같지만 실제로 그중 일부만이 두드러진 의미로 동원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활성화 영역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c를 쓸 때 분명 우리는 다른 영역의 의미를 활성화시키지만 ‘컴퓨터’라는 동일한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단어가 여러 가지 하위 요소를 갖고 있을 수록, 사용되는 상황이 다양할수록 활성화 영역의 역동성 또한 증가한다.

* ‘active zone’이 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어를 갖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인지언어학이야기

‘나/너’ -> ‘나+너’

‘뇌 신호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brain signals, 내 맘대로 지은 이름)’이 부상한다고 해도 그것은 의미작용의 지층을 두터이 할 뿐 반박 불가능하며 객관적인 의미를 확정하진 못한다. 기호학자들의 분파로 “뉴로-“가 붙은 “neuro-semiotician”의 영향력이 커지겠지만 이 또한 기호학의 제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도리어 삼각검증(triangulation)의 대상이 늘어나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퍼스(Peirce)가 간파했던 세계와 의미의 차이는 지속될 것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은 제시(present)될 수 있지만, 의미는 제시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재현(represent)될 뿐이다. 이러한 가정이 깨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이 물리적으로/생물학적으로 병합(merge)되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방식이 등장해야 한다. 의미작용의 지형이 ‘나/너’에서 ‘나+너’로 변화하는 순간 (언어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포괄하는 의미의) 기호학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맞게 될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은 단어와 뜻 즉, form과 meaning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한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나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하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D%@47″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언어의 형태와 의미 사이에 필연적 관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이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한다. Shell은 언어이다. ‘의자’, ‘chair’, ‘Stuhl’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다. 그 안에는 개념이 담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가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몸(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이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영(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는 매트릭스 1편에 등장한다. “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이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할 수 있다. 뭐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이다.

당신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는가? 어떤 정령들을 초대하는가? 그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 실재냐고? 그건 당신 자신이 결정한다. 사실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는 일생일대의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단이다.

뇌파, 언어, 얽힘

뇌파를 언어로 바꾸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직 해상도가 그리 높진 않지만 뇌의 신호만으로 ‘화자’가 의도한 언어를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고 신기한 세상이다.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는데 ‘화자’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말하고 들을 때, 텍스트를 읽거나 쓸 때 우리의 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궁금하다. 지금 짤막한 이 글을 읽은 페친의 뇌는 글을 읽기 전과 후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별 시답지 않은 글이니 별반 차이가 없을까? 누군가의 뇌는 변화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까? 사람마다 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언어 혹은 내용이 존재할까?

‘뭐 이딴 글이 있어’라고 생각하건 ‘진짜 멋진 글이다’라고 생각하건 우리의 뇌는 ‘어쩔 수 없이’ 반응한다. 나의 뇌 속에서 생겨난 움직임이 언어를 통해 누군가의 뇌를 움직이게 하고 그것이 일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신비롭고 괴이하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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