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시간낭비’를 읽고

Posted by on Aug 14, 2020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얼마 전 몇몇 친구분들이 링크한 ‘학자의 시간낭비’를 읽었습니다. 필자의 논지에서 분명 배울 것이 있었고 저 또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노학자의 일침에는 뼈가 있었고, 한두 가지 주제에 천착하여 이론을 전개하지 못하는 저 자신에게 값진 충고가 되었습니다.

그와 다른 측면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 실상은 공부를 업으로 삼은 이들 대부분의 인생을 ‘낭비’라고 부를 수 있음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제가 아는 인문학은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쉽게 ‘낭비’라고 딱지붙이지 않으며 자신의 ‘성공’을 기반으로 타인의 삶을 섣불리 낙인찍지 않습니다. 그것은 학자이건 기업가이건 관료이건 마찬가지입니다.

학계의 특성상 ‘대가’라 불리는 이들이 특권을 가지게 되고 심지어는 ‘급수’로 나뉘어지기도 하지만 삶을 영위하기 위해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부를 ‘시간낭비’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진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시간낭비라고 불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그렇습니다.

서른 다섯에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했고 졸업하자 마자 생계전선에 뛰어들어 미친듯 강의를 소화했으니 “이론을 창조하는 능력은 35세를 지나면 쇠퇴한다는 것이 정설이다”라는 일갈로 보면 애초에 학자가 되기엔 글러먹은 인생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글러먹은 3류 인생이라도 공부를 업으로 삼았으니 계속 해나가는 수밖에요. 먹고사니즘의 전선에서 조금씩이라도 고민과 생각을 이어갈 밖에요. 이론을 만들 능력은 오래 전 상실하였지만 소박한 지식을 나누고 살밖에요.

물론 모든 지식노동이 같은 무게를 지닌 것은 아닙니다. 어떤 노동은 좀더 깊고 넓게 퍼져나가 사람들의 삶에, 동시대와 후세의 사상적 지향에 영향을 줍니다. 그들의 노고에 고개숙여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의 시간을 낭비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맥만 핏줄은 아닙니다. 모세혈관이 없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상 처음부터 가망없었던 영원한 학자지망생 1인의 넋두리였습니다.

강의평가 결과 확인

Posted by on Jul 14,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강의평가를 확인할 때면 가슴이 쿵쾅거리며 숨이 가빠오는 느낌입니다. 대부분의 강의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아왔고 나름 자부심을 갖는 수업도 몇 있습니다. 그런데 몇년 전 한 강의평가에서 ‘테러’에 가까운 평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부 가혹하리만큼 공격적인 학생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제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의 평은 나쁘지 않았는데 유독 (누구인지 알 것 같은) 한 학생의 코멘트가 트라우마에 가까운 충격을 준 것입니다. 이후 두어 해 강의평가를 확인하지 못했었지요. 머리로는 그 학생이 특이한 케이스라는 생각을 했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강의평가 코멘트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극복했지만 여전히 평가를 확인하는 게 버겁네요.

암튼, 이번 학기 대학원 과정에서 개설한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수업의 강의평가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실 며칠 어지러운 마음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여러 선생님들의 포스팅 덕분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요 몇 주 우리사회의 큰 사건들이 준 혼란은 여전하지만 학생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습니다. 결국 또 이렇게 학생들에게 기대게 되네요. 가장 흐뭇한 대목은 “모든 학생들을 존중해주신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습니다.”입니다. 갈수록 내용을 충실히 이해하는 법 만큼이나 진실하게 언어와 사회를 대하는 태도를 나누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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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에서 좋았던 점을 적어 주십시오.>

다양한 관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께서 얘기해주시는 사회언어학의 사례들이 흥미로웠습니다.

관련분야에서 중요한 논의거리들을 두루 훑으면서 중요한 개념들은 교수님께서 자세히 설명도 해주시고 예도 많이 들어주셔서 좋았습니다. 특히, 수업 이후에도 수업과 관련하여 저희의 지식이나 경험을 확장시킬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알려주시고, 언제나 학생들 입장을 공감 많이 해주시면서 편안하게 잘 이끌어 주셔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을 존중해주신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습니다.

매주 다양한 주제를 접할 수 있었을 뿐만이니라 교수님께서 오픈 카톡방을 통해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새로 접하는 다양한 사회언어학 이슈를 살펴볼 수 있어서 참 유익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살펴본 읽기자료들이 각 주제를 공부하는데 아주 유용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매우 열심히 수업을 준비해주셨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셨습니다.

매주 다양한 주제를 소개하는 사회언어학 세부 분야의 논문을 읽으며 사회언어학과 영어 교육의 연관성과 교육적 함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한학기 동안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사회언어학을 실생활과 연결하여 수업을 진행한 부분이 좋았습니다. 처음 사회언어학을 접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있었는데, 강의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실생활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언어학을 폭넓게 접해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 분야를 새롭게 배워보는 입장에서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학문 주제를 다룰 수 있어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강의에서 개선할 점이 있다면 적어 주십시오.>

없음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수업을 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없음

없습니다.

화환의 물성, 계급, 상상력

1. 주머니나 가방 안에 넣을 수 있는 화환은 없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화환은 눈에 띈다. 스스로 ‘거기 있음’을 알리는 것이 화환의 주요 임무 중 하나다. 역으로 말하면 눈에 띄지 않는 화환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2. 화환에는 보통 두 개의 메시지가 담긴다. 하나는 조의를 표하는 메시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다음으로는 화환을 보낸 사람이다. 대개 이것은 다시 두 개의 메시지로 나뉜다. 먼저 보낸 사람의 직함이다. 다음으로는 보낸 이의 이름이다. “”(주) 개똥전자 대표이사 홍길동”과 같은 문구가 대표적이다. ‘화환’은 ‘조화나 생화를 모아 고리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물건(다음사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사실 핵심은 꽃이 아니라 언어적 구성에 있다.

3. 화환은 누구나 보낼 수 있지만 누구나 보내지는 않는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서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그보다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보내는 경우가 많다. 계급적 편협함 때문일 수도 있으나 나는 ‘배송노동자 OOO’나, ‘택시기사 OOO’와 같은 이름이 붙은 화환을 본 적이 없다. ‘화환에도 계급이 있다’는 말을 완전히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4. 화환에 ‘박히는’ 직책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기업의 총수나 국회의원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대통령이 화환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런 이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는 보내는 이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사회문화적, 상징적 권력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장이 된다. 화환이라는 장치는 그 자체로 모종의 권력을 생산한다.

5.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은 예를 갖추어 화환을 보낼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누군가에게 목격되거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거나 언론에 의해 보도되면서 고인과 그의 가족이 사회 내에서 점하는 위치를 고정하고 동시에 증폭시킨다. 죽음을 기리는 장례식장이지만 고인과 그의 가족이 쌓아온 사회적 자본이 ‘스스럼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로 기능하는 것이다.

6. 화환만은 아니다. 특정 장례식장의 평판이나 인지도, 해당 공간의 물리적 특성, 조문객의 규모와 사회경제적 구성, 장례를 이끄는 인물/기관의 영향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회경제적, 문화적, 계급적 지표로 작용한다.

7. 이번 논란으로 돌아가 보자. “(주) 개똥전자 대표이사 홍길동”과 “대통령 홍길동”에서 ‘(주) 개똥전자 대표이사’와 ‘대통령’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기호학적 측면에서 한 가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 둘의 위치가 같다고 해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의 무게도 같을 수 있는가? ‘대통령’이 박힌 화환이 공간을 점할 때 그것을 받는 상대는 어떻게 위치지어지는가? 그렇게 대통령과 상대에 의해 점유된 의미를 시민들은, 여성들은, 피해자들은, 동료 정치인들은, 언론은 어떻게 인지하게 되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효과’이며, ‘효과’의 영역은 당사자들의 ‘선한’ 의도로 제어하거나 판단될 수 없는 것이다.

8. 논란에서 잠시 바깥으로 나와 보자. ‘예를 갖추는 방식으로서의 화환’은 관습을 충실히 따른다. 쉽게 말해 하던 대로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를 갖추는 방식에 대한 상상력의 지독한 빈곤을 드러내지는 않는가? 의도와 관계 없이 화환이 갖는 물성이 발현하는 효과에 무지한 선택은 아닌가?

9. 이번 ‘사건’에 대한 각자의 판단은 다를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사건씩이나 되느냐고 할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한평생 화환 한 번 보내지 않고도 충분히 예를 갖추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지위와 이름을 전시하지 않아도 충분한 사람들 말이다.

다다르지 못함에 대한 감각

Posted by on Jun 20,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세상이 좋아졌다. 검색하면 손끝에서 정보가 쏟아진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한두 개 한다면 구글북스 검색에서도 상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북과 오디오북도 상당량의 정보를 제공한다. 소위 ‘어둠의 경로’는 더이상 어둡지 않다. (응?)

2. 석사논문을 쓸 때까지만 해도 구할 수 없는 문헌들이 꽤 있었다. 모모 대학 도서관에만 있는 도서.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문헌. 어디 있는지는 알지만 구할 수 없는 책과 논문이 적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구할 수 없는 책과 논문이 가끔 튀어나오지만 고도로 특화된 문헌학 연구가 아니라면 해당 레퍼런스 없이도 논문을 쓰고 저작을 완성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주로 다루는 언어교육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3.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잊게 되는 감각들이 있다. 다다르지 못함에 대한 감각이 대표적이다. 신비감이라고 해야 할까. 알 수 없고 접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정보의 과잉은 이런 감각을 무참히 깨뜨리고 있다.

4. 여행을 가지 않아도 특정 지역을 다룬 동영상과 웹사이트를 통해 ‘거기 가본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문헌을 꼼꼼히 다 읽지 않고도 초록을 섭렵하면서 ‘그 분야를 좀 아는 것 같은’ 자만에 빠지기도 한다. 하드디스크에 채워져가는 문헌들을 보며 나의 지식이 채워진다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내 이야기다.

5. 더 많은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더 넓게 알아야 더 깊이 볼 수 있는 영역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보고 읽어낼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정보과잉은 과장된 만능감을 선사한다. 다다르지 못함에 대한 감각을 망각한 이들은 자기를 과신한다.

6. 만능감은 언제나 거짓이다. 우리 각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계의 파편 중에서도 파편일 뿐이다. 정보가 많아진다면 우리는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정보가 제대로 쓰이는 길이다.

7. 소셜네트워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연결될수록 사람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다양다종한 사람들을, 그들이 겪어온 삶의 굴곡들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다 알고 있다고 믿는 멍청이들이 보인다.

그리고 생각난 책의 한 구절.

8. 엄기호: 또 하나, 제가 주체성의 문제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변화는 거대주체의 소멸이에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걸 생각하게 되면서 거대주체가 소멸하게 되었다고 보는 거죠. 담론의 공간, 주석으로서의 지식 생산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이런 의미일 텐데요. 이제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 알거든요, 자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요. 특히 자연과학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지식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하죠.

제가 이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대주체를 종식시켰기때문에 인간이 더 겸손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만능감을 제거할 수 있죠. 많은 연구자가 처음에 어떤 주제를 떠올리면서 이건정말 기발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논거를 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저작을 읽다 보면 자기가 하려는 게 대부분 이미 연구되어 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죠. 인류 전체의 거대한 축적 위에 올려지는 작은 벽돌 하나라도 되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겸손해지거든요. 아주 예외적으로 읽기를 반복할수록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대다수의 사람은 읽으면 겸손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개인을 만들고 역사적 주체를 만들되, 동시에 거대주체가 아닌 작고 소박한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읽기라는 행위가 가진 매우 독특한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93-94쪽)

유튜브 음악, 새로운 리터러시의 가능성

Posted by on Jun 1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선홍님과 짧은 대화 속에서 급 깨달은 것. 날아가기 전에 짧은 메모로 남겨둔다.

<유튜브를 집어삼킬 것인가>를 쓰면서 유튜브에서의 음악 소비를 ‘4-5분’이라는 짧은 감상 시간의 관점에서만 본 것 같다. (다행히 이 관점을 섯부르게 던져놓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어쩌면 음악들을 연결하고, 음악가들의 네트워크를 파악하며, 장르와 서브장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가면서 이야기를 짓는 힘을 키운다면 음악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엮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메뚜기 뛰듯 이것저것 되는대로 보는 것을 넘어서 음악의 세계를 횡단하며 새로운 세계를 구획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달까.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의도적 개입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게 장르에 대한 지식일 수도 있고, 음악 산업에 대한 이해일 수도 있고, 음악을 찾아내는 방식의 숙지일 수도 있다. 영상과 음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안목일 수도 있고, 아티스트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론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악기나 발성, 리듬과 변주 등 음악적 요소에 대한 전문지식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뚝뚝 끊기듯 무작위로 던져지는 오락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와 이야기를 지닌 세계로서 다가오는 음악을 만나는 것 아닐까?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듣기/보기도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 절실하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가 없다. ‘1인 1깡’과 같은 소비는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니까. 소비하는 주체에서 비평하고 생산하는 주체로의 변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음악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방식 자체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니까.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스케치: 성실하게 흔들리다

Posted by on Jun 16, 2020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가끔 눈 앞에 닥친 과제들이 제 능력에 비해 너무 벅차게 느껴질 때마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교수님께서 대학원 생활에 대해 언급해주셨던 내용을 떠올리면서 현재에 집중할 힘을 얻게되는 것 같습니다. 늘 대학원생의 마음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 대학원생의 메일을 받고 오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음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기쁜 건 기쁜 거니까.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성숙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이들이 있어 기쁘고 감사하다.

2. 보통 독서가 쌓일 수록 책읽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하던데 나는 왜 반대인가. 가면 갈수록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무게가 버거워 속도를 내기 힘들다. 원래 느린 속도에다가 더 느려지니 집중해서 읽어도 슬로리딩이 절로되는 장점(?)이 있구나.

3. 자신의 행위에 과한 가치나 무게를 두는 것은 어리석다. 하지만 역사라는 장강은 그 어떤 행위도 모두 담고 흐른다. 심지어는 지금 내가 올리는 하잘것 없는 포스트 하나조차 그렇다. 우주의 먼지만큼도 안되는 무게의 글이지만, ‘먼지만큼도 안되는’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4. Gunther Kress는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사회적 상호작용은 늘 변화를 가져온다고(transformative) 말했다. 우리가 감지하든 못하든 말하고 답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동안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세밀하게 변하고 그것이 쌓여 가시적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내 말이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 삶의 영역에서 내가 점하는 영역, 내가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 내가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를 고려했을 때, 더도 덜도 않고 딱 ‘나만큼의’ 무게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을 또 나와 긴밀히 연결된 상대의 삶을 티끌만큼 바꿀만한 힘이 있다.

5. 그 힘을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역량. 그것이 현사회의 리터러시 교육의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말을 과도하게 신뢰하고 휘두르지만 누군가는 열패감으로 그 어떤 말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사회 공동체의 실패다. 그런 면에서 자기성찰의 실패는 민주주의의 실패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6. 최근 본 말장난 중에 와닿았던 것. ‘‘weapons of mass distraction’ (Weapons of mass destruction(대량살상무기)에서 온 말장난)

e.g. Facebook is one of the most powerful weapons of mass distraction.

알면서도 늘 당한다. 오늘도 참 열심히 했구나.

7. 과연 다음 학기 오프라인 수업이 가능할까. 지금 추이로 봐선 다음학기도 내내 온라인 수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슬프고 또 한편으로는 담담하다.

얼마 전에 마스크 끼고 연속 2시간 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힘들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보고 싶다. 마스크 쓰고 손 잘 씻고 조금 멀리서 보면 될 것 같기도 한데.

8. 그러고 보니 코로나 상황이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래도 여름되면 좀 괜찮아지지 않겠어?”

왠걸. 여름에 2차 유행이 오게 생겼다.

9. 인간이 침묵한다 해서 세상이 침묵하는 건 아니다. 인간이 말한다고 해서 우주가 듣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침묵을 혹은 대화를 과대평가한다.

나 또한 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영어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향한 한 학자의 일갈이 떠오른다.

“영어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건, 영어교육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

정말 그러하다.

‘내가 뭔데’라는 생각과 ‘나라도 뭘 좀’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마음.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흔들린다.

10. 인생 쉬운 게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쉽게 살려 하지 말자.

#일상스케치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가문비 나무 아래

Posted by on Jun 13, 2020 in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천안시 블로그의 시민리포터 이지현 님께서 <가문비나무 아래>에서의 북토크를 전해주셨습니다. 참 포근하고 예쁜 책방이었는데요. 무엇보다 사람과 책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천안 부근에 계신 분은 한번 방문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가문비나무 아래 책방
충남 천안시 서북구 불당34길 3-20 Sol Plaza 301, 302호

http://blog.naver.com/fastcheonan/221997214074

음악, 한때 고독으로 가는 길이었던

Posted by on Jun 11,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무언가에 연결된 상태가 디폴트가 되어버린 시대. 유튜브에서 노래를 들어도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꿈틀거린다. 유명인의 반응을 연신 비추는 화면, 다양한 자막으로 표현되는 감정들, ‘리액션 영상’의 높은 조회수, 영상 밑 끝도 없는 댓글놀이, 생방 함께보기 초대기능 등, 영상을 홀로 대면하는 시대가 천천히 저물고 있는 듯하다. 그 가운데 음악을 매개로 한 오롯한 고독은 그야말로 흔치 않은 역량이 되어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이 트렌드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홀로 허공을 응시하며 음악 몇 곡을 숨죽여 듣던 기억이 가끔 떠오를 뿐. 

#삶을위한리터러시#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다양성의 포용, 이데올로기, 그리고 투쟁

Posted by on Jun 11,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다양성의 포용은 친절하고 따뜻한 행동을 연상시키지만 사회 곳곳에 그리하여 우리 마음 깊이 뿌리박은 차별을 과감하게 해체하기 위한 소란스런 싸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양성은 그냥 포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벽을 무너뜨리고 경계를 넘어설 때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쟁’이라는 말의 부정적 느낌과 ‘포용’이 상기하는 긍정적 느낌은 실상 동일한 행위에 대하여 의도적으로/이데올로기적으로 덧씌워진 감정이다. 문제는 ‘다양성을 포용하자’는 구호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awareness)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거기에 안주한다면 기존의 질서에 기생하는 담론만을 생산하는 데 그치고 만다. 기존 체제가 ‘유사저항담론’과의 공존을 선전하며 자신의 권력을 더욱 안정적으로 행사하는 최상의 조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차별금지법을제정하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7년만의 대화

“오늘 연락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좋은 기회로 저연차 교사의 고민과 노력을 담은 책을 집필 중인데요. “아이들의 삶에 스며드는 수업은 따로있다”라는 제목을 지닌 파트가 있습니다. 이 파트에 제가 실제로 크게 감명 받았던 교수님의 글을 인용하고 싶어서, 혹시 괜찮을지 여쭙고자 연락드립니다. 실제로 제 수업에 큰 영향을 주었던 글이라.. 허락해주시면 너무나도 감사할 것 같습니다. 제가 싣고자 하는 글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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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n apple”은
그렇게 열심히 따라 하면서
“This is me(이게 나예요)”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습니다.

“Work hard, and you will succeed”는
숱하게 만났지만
“Unite, and you will get what you deserve”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가정법을 배우며
“If I were a bird”를 반복했지만
“If I were an immigrant worker in South Korea”를
발화할 생각은 못 했고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English”라고 말하며
영어라는 산 앞에서 좌절했었지만
“It is very difficult to master anything”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롤 플레이를 하면서
해당 역할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었지
새로운 역할을 꿈꾸고
새로운 대본을 써볼 생각은 못했던 나날들이 있었죠.

생각하는 말,
살아 숨 쉬며 펄떡이는 말,
웃고 울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손잡아 주는 말을
가르치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이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문을 바꾸고
활동을 바꿉니다.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나아갑니다.

배우고 표현하며
성찰하고 소통하며 연대하는 말로,
그리고 그 말이 울려 퍼질
세상으로.

당신의 가슴이
세계를 껴안는
변방으로,
경계로,

사람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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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제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되어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 일하고 있다고요. 위에서 이야기했듯 자신이 몇몇 선생님과 함께 마무리하고 있는 책에 저의 글을 인용하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영광스런 일이니까요.

기뻤습니다. 7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젠 선생님과 선생님으로 만날 수 있어서 뭉쿨했습니다. 텅빈 7년 여의 시간이 순식간에 커다란 섭리로 채워지는 듯했습니다. 써놓고 보니 조금 호들갑스럽기도 하군요.

많은 분들이 가르치는 일을 콩나무 시루에 물 붓는 일에 비유하곤 합니다. 물을 부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통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라난다고요. 그렇기에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계속 물을 부어야 한다고요.

얼마 되지 않는 경력을 되돌아 보면 제가 물주는 일이나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십년 쯤 지나면 그래도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점점 더 자신이 없습니다. 어떤 게 좋은 수업일까요? 학생들이 콩나물이고 제가 물을 준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 오만한 생각 아닐까요? 그냥 함께 배우고 성장하면 되는데 제가 뭘 한다고 설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종종 이렇게 먼저 손 내밀어 주는 이들이 있어서 제가 하는 일이 아주 조금이나마 세상에 도움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무쓸모의 두려움으로부터 저를 해방시켜주는 구원의 빛 같달까요.

책이 나오면 7년 만에 학생을, 아니 선생님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하네요. ‘코로나가 잦아들면’이라고 또 바보같은 기약을 했지만 잊지 않고 기다려 보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지만 만남의 설렘을 간직하고 걷다 보면 이 긴 여정의 끝에 다다라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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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원고 교정 후 마무리 단계라.. 책을 6월 안으로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책 나오면 교수님 한번 찾아뵈도 될까요?? 😃”

“그럼요. 물론입니다. 코로나가 극성이지만 좀 잦아들면 뵈어요. 멋진 선생님으로 성장하고 계신 것 같아 참으로 감사하고 기쁩니다. 책 마무리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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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해진 마음에 여름 밤바람이 스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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