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위안

Posted by on Nov 17,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 바닥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황당한 일을 이틀 연속 접하고 당했다. 애시당초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존엄을 잃지 않으며 자리를 지켜내고 계신 분들에 대해 더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함께 돈을 아주 많이 벌면 배움도 뜻도 깊은 시간강사들,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른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를 하나 해보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만,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학교일 필요는 없다, 마음이 모인다면. 그렇게 되도 않는 이야기로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다. 그걸로 족하다.

국가에 대한 예의

Posted by on Nov 12, 2017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죽인 사람들 편을 들죠?”

강기훈씨의 <카바티나>를 배경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말이 흐른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다 자신을 던진 이들의 얼굴들과 만난다. 그의 연주는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몸부림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제스처도 아니다. 바흐의 음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한 청년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아름다움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증거일 뿐.

그의 삶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기타는 고요히 운다. 관객들도 따라서 숨죽여 운다. 이해할 수 없어, 가 닿을 길 없어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는 삶이, 죽음이 있다.

강기훈씨의 연주가 뒤로 숨는 동안 사라진 이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살아남은 이들과 만난다. 권력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은 앞으로 나서려 다른 목숨을 짓밟았다. 대법원 무죄판결 이후에도 여전히 강기훈의 유죄를 확신한다는 이들은 시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높이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삶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강기훈씨가 말하는 ‘시시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알 턱 없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고, 권력을 잡는다.

사운드트랙을 들을 수 없어 대신 Kindgren을 찾는다. 강기훈씨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예의>는 서울 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 부분에 출품되었으며, 자세한 사항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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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한 예의 | 감독 권경원 | 2017 | Documentary | Color+B&W | DCP | 90min 54sec

시놉시스
1991년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던 11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모든 죽음의 책임을 스물일곱의 강기훈에게 전가했다.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을 방조했다는 사법사상 유일무이한 혐의였다. 최종 무죄가 선고된 것은 24년이 흘러서였다. 진범은 국가였음이 밝혀지던 순간 그는 간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스무 해를 넘도록 되풀이해야 했던 말들을 멈추고, 기타를 들었다. 그리고 1991..

출연 강기훈, 강은옥, 고상만, 권혜진, 김구일, 김선택, 김진숙, 박홍순, 송상교, 송소연, 염규홍, 이보은, 이부영, 이석태, 이옥자, 정현아, 채수진, 최은희, 최재인

영화 홈페이지: http://www.siff.or.kr/siff/program/mov_view.php?mov_idx=1859&fes_idx=36&cate_idx=34087&gubun_idx=&sec_idx=&sch_word=&size=10&page=3

학기 중반 잡감

Posted by on Oct 8,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어느 정도 다르다고 판단되는 두 학교에서 몇 학기를 가르치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OOO라는 영화 보신 분 있어요?”라는 질문에 손을 드는 학생의 비율이 확연하게 차이난다는 점이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샘플의 수도 작기에 전체 구성원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질문을 할 때마다 확인했던 차이가 마음에 계속 걸린다. 서울의 두 학교에서 이정도 차이가 난다면 다른 지역과는 더 큰 격차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영화, 문학, 과학에 대한 지식을 비롯한 문화적 경험은 개인의 성장은 물론 교수학습에 있어 큰 자산인데, 이 부분에서의 격차는 학교가 해결할 수가 없다. 부모의 문화자본, 상징자본의 차이는 자녀의 ‘교양’의 차이로 이어지고, 이는 바로 교육성취의 격차를 낳는다. 너무 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제도교육 내에서는 이게 대세라는 걸 부인하긴 힘들다.

한편 가르치는 입장에서 학생들의 삶에 자연스레 접속할 수 있는 방식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날것 그대로의 경험을 토대로 함께 교육적 대안을 탐색하는 기획은 리스크가 크다. 개개인의 경험 들어보는 시간이 몇몇 학생들에겐 ‘시간낭비’이며, 함께 답을 찾아보자는 제안은 종종 ‘전문성의 부재’로 읽힌다는 것을 알기에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수업에서 작은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학생들의 반응은 갈릴 것이다. 못난 민감함 때문에 절대 무덤덤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해보고 싶은 걸 해봐야지, 언제까지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마음이 더 크다.

학기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초반의 긴장감을 잃지 않고 수업 전체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밀려온다. 이 고민은 오래 가르친다고 사라지진 않을 것 같다.

강의 9년차 잡감

Posted by on Sep 25, 2017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일상 | No Comments

TA 시절까지 어언 강의 9년차.
가르친 과목이 대충 25개.
최대한 얕고 최대한 다양하게 가르쳤다.
뭐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니 어쩌겠는가.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유난히 마음이 가는 수업이 몇 있다.

사회언어학과 언어교육
사회문화이론과 영어교육
어휘와 문법 지도법
영어로 논문쓰기,
영어교육방법 및 교육공학

애정하는 주제도 몇 있다.

인지언어학과 영어교육
메타포와 영어교육
멀티리터러시

하나씩 소책자로 묶어 모음집을 만들어도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단 하나의 주제도 책으로 써내지 못했을 뿐이고…)

걸작을 써낼 능력은 없으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모아
쓸만한 지식으로 정리해 낼 필요를 느낀다.

월급 들어왔다 나간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기엔
세상에 대한 집착이 좀 남았나 보다.

올해가 가기 전에
5년간 써온 긴 글 하나, 짧은 글 하나를 마치려 한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끝낼 것이다.
사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한계를 인정하고
소소한 소통을 꿈꾸는 중.

“어떤 수업이예요?”

Posted by on Sep 23,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수업이 끝났다. 한국어가 조금 서툰 두 유학생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났다. 말을 건넸다.

“오늘 수업 끝나신 거예요?”
“아니오. 오후에 한 개 더 있어요.”
“아 금요일 오후에 힘들겠다. 어떤 수업이예요?”
“그게 어… 영…” (다른 학생) “영어문…”
“아 과목 이름이 좀 어려운가 봐요.”

학생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순간 옆에 서 있던 한 남성이 불쑥 끼어든다.

“이름이 좀 긴가요? 영미OOOO. 헷갈릴 수 있죠.”

허걱 담당교수시다. 급인사 모드. 얼굴이 밝지는 않은 듯. 이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두와 헤어진다.

친근함으로 말을 건넸으나 학생들에겐 당황을, 담당교수에겐 씁쓸함을 안긴 것 같다.

결론: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슬픔, 그리고 희망

Posted by on Sep 14,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직업인으로서 슬픈 말 둘.

(1) 시간강사: 언제 하고 싶은 수업 한 번 해봤으면 좋겠는데, 그런 날이 올 지 모르겠어요. 하긴 먹고 사는 것만 해도… (개개인의 슬픔임과 동시에 엄청난 지식과 경험의 낭비. 생존에 내몰리다 보면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뭉툭해질 수밖에 없다.)

(2) 연구자 일반: 한국 저널에 내봤자 읽는 사람 없어요. 그래도 써야죠 뭐. 별수 있나요?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이라… 주장은 사람이 사람한테 하는 것 아니던가. 출판은 되었으나 읽히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개인적으로 슬펐던 상황 둘.

(1) 논문 지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 저는 논문을 지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같은 신참보다야 논문 출판에 대해 훨씬 잘 아는 분들에게 받는 게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다음 학기에 강의를 꼭 다시 듣고 싶은데요. – 다음 학기 어찌 될지 몰라서요. (아직 성적 안나갔으니, 보고 결정하시… 아닙니다. 말씀만이라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 두 가지.

(1) 이번 학기 출발하면서 많이 걷고 있다. 이번 주 하루 평균 도보시간 1시간 이상. (이틀간 폭풍 사진은 한시간 반씩 산책한 결과입니다. ^^)

(2) 좋은 분들과 함께 단기 논문쓰기 특강을 하게 되었다. 예전 자료를 다시 손보고 있다. (관심은 있었지만 무지했던 분야의 분들이라 기대가 됩니다.)

나의 한계를 본격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잡글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부족하나마 쓰고 싶은 책이 생겼고, 무엇보다 날씨가 좋다.

Life goes on.

Posted by on Sep 12,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틈은 존재들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지만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을 경멸하지 않는다. 존재들이 스러져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틈같이 살았던 이들, 그런 ‘틈의 화석’을 발굴하려 또다른 틈이 되는 이들이 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절망

Posted by on Sep 3,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대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어 짜증난다기 보다는 무슨 수를 써도 다른 이해의 가능성울 설득할 수 없을 거라는 좌절감이예요. 사람은 어떻게든 될 수 있습니다. 다 사정이 있는 거죠. 그 어떤 가능성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엄연한 공존, 겹침의 가능성이 거세된 존재들, 그게 절망인 것 같아요.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Aug 30,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수학을 선택과목으로 하자는 모 교수의 의견을 접했다. 잘못된 수학교육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형국 아닐까. 뭐든 문제가 되면 ‘해체’하면 된다는 사고같기도 하고.

2. 학술논문은 남이 쓴 건 대개 별로고 내가 쓰려면 더 별로인 그 무엇인 듯하다. 물론 멋진 논문도 많지만 마음을 흔드는 논문은 가뭄에 콩나듯 한다.

3. 참 오랜만에 해외학회에 초록 하나를 제출했다. 될지 모르겠지만 쓰는 내내 즐거웠으니 98퍼센트 성공. 심사자들이 2퍼센트를 채워주길 기대한다. 내 생애 최초의 언어와 정치 이야기.

4. 대학원 이론과목을 가르치다 보면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론과 실천을 서로 다른 범주에 놓고 사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세세한 내용에 대한 숙지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게 훨씬 의미있는 일이리라.

5. “There is nothing more practical than a good theory.” (좋은 이론보다 더 실용적인 것은 없다.) – Kurt Lewin

창조과학 단상

Posted by on Aug 27, 2017 in 과학,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인류가 수천 년 발전시켜온 과학으로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우주의 기원을 몇몇 사람들이 30여 년 대충 뚝딱 만들어 낸 이야기들로 설명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지성’을 모독하는 일 아닐까요. 그들이야말로 신을 섬긴다 외치며 도리어 왜곡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오래 고민하고 공부해 왔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나직이 말하는 일이야말로 신실한 신앙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애를 다바쳐 한 우물을 판 노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넘어서 진리에 한발 더 다가가는 이론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깊은 영적 울림이 솟아나지요.

짧은 글 안에서
신앙과 과학의 관계를 논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 있어
신앙을 갖는 일과 과학을 하는 일은
구도자로서의 삶으로 수렴됩니다.
끊임없이 옳은 길을 찾는 여정 말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해서 부끄러울 뿐이지요.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모르는 것을 안다 할 수는 없습니다.

다 알지 못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다 알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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