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공지] 영어로 논문쓰기 – 읽기쓰기 통합전략을 중심으로

본 강의는 영어논문 작성에 필요한 지식을 <읽기와 쓰기의 통합>의 관점에서 논의합니다. 기존의 다독(多讀)이나 다작(多作) 전략을 넘어, ‘분석적 읽기’, ’쓰기를 위한 읽기’ 방법론을 익히고 적용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일시 및 장소>
일자: 2020년 2월 1일, 8일, 15일, 22일(토요일)
시간: 오전 10:30-1:30 (총 12시간)
장소: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10길 48 동궁빌딩 2층 (망원역 부근, 전국영어교사모임 사무실)

<대상>
(영어) 논문의 세계에 입문하는 대학원생
논문의 전형적 구조와 내용을 정리하고자 하는 연구자
논문지도에 체계를 더하고 싶은 지도교수
영문 아카데믹 라이팅 전반에 관한 이해를 도모하고 싶은 일반인

<강사>
김성우 (응용언어학자. 서울대학교 강사)
제2언어 리터러시 연구자로 석박사과정 학생들의 리터러시 발달과 관련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영어교육과 영어 글쓰기 관련 강좌를 해 왔고 연세대 등에서 논문쓰기 특강을 진행했다. <영어교육을 위한 IT> (공저), <어머니와 나>, <단단한 영어공부> 등을 썼으며 <리터러시와 권력>의 번역을 감수하였고, 현재 <삶을 위한 리터러시 (가제, 공저)>의 출간을 준비중이다.

<수강료>
수강료: 20만원(입금 기준 선착순 마감)
입금계좌: 농협 352-1224-5068-13 (예금주 이경란)

<강의신청 링크>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xBXU0tyqLwUUYcUxq1Cjtieb1yocnMI_IaIv9MMJwal08KQ/viewform

<강의내용>
I. 학술 논문의 개념적 이해 (1강, 3시간)
1. 장르로서의 학술논문
2. 읽기와 쓰기의 관계
3. 학술공동체와 작가로서의 연구자

II. 논문작성을 위한 기초체력 기르기 (1강, 3시간)
1. 콜로케이션과 메타포 공략하기
2. 의미생산을 위한 문법 익히기
3. Academic Phrasebank로 학술논문 기본구문 공부하기

III. 영어논문작성을 위한 읽기쓰기 통합전략 (2강, 총 6시간)
1. 흐름 코딩으로 논문 꼼꼼히 읽기
2. 논문의 얼굴 – 초록과 서론의 분석적 이해
3. 거인의 어깨 – 문헌리뷰 및 인용의 논리와 구조
4. 논의 쓰기 – 연구자의 실력을 발휘하라
5. 투고 전후 고려할 점
6. 논문쓰기와 마음 지키기

* 강의에 관한 질의는 literacylectures@gmail.com 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두 교황’을 보다

Posted by on Dec 28, 2019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박사과정 첫 학기를 마치고서였다. 기말 과제를 하느라 쪽잠으로 버틴 지 며칠. 지치고 힘든 마음을 가볍게 만들 영화를 찾다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골랐다. 황정민, 임수정 주연의 <행복>. 결과는 처참했다. 행복해지긴 커녕 새벽에 보고 센치와 비참 수치가 100이 되어서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그따위로 제목을 지었는지.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선택(?)이었다.

오늘 학기를 마쳤다. 가르치는 이들은 수업을 애정하지만 방학을 사랑한다. 학생들이 최고로 치는 명강의도 휴강을 이기지 못하듯 말이다. 그래서 고른 영화가 <두 교황>. 진짜 두 교황에 대한 이야기이고, 실제 사건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교황이 아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해성사를 뛰어넘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위인’의 업적이 아닌 변화와 타협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영성의 씨줄에 인간성의 날줄을 엮어 삶과 신앙의 경계를 없앤다.

다시 볼 거라고 확신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이 영화는 꼭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나단 프라이스와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에 감탄했고, 두 캐릭터의 상반된 성격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구성에 뭉클했다. 초반에 터진 눈물이 끝까지 멈추질 않아서 조금 힘들긴 했지만 <행복>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졌다.

신앙이 있건 없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공감의 한계에 관하여

Posted by on Dec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공감을 강조하는 담론에 대해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공감이 갖는 본래적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2.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진정한 공감’은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경험이라는 것이 특정한 몸이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특정한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해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3. 이를 하나하나 풀면 이렇다.

(1)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2) 특정 경험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얻는다고 해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3) 특정 사건과 상황을 깊이 이해한다고 해서 당사자가 평생 쌓아온 이해와 해석의 방식을 체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 즉, 우리는 ‘누군가의 처지와 경험’을 상상(imagine)하는 것이지 경험(experience)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언어(상황을 상상해서 나오는 진술)와 상황 내에서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과 경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5. 문법용어를 빌리자면 공감은 기본적으로 가정법(subjunctive mood)이고, 경험은 과거시제이자 현재완료(진행형)이다. 공감하는 이는 If 절을 피할 수 없고, 동사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If I were you, I would … 에서 I는 you가 아니며 ‘were’는 ‘am’이 아니고, ‘would’는 철저히 생각의 세계에 속한다. If절이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다고 해도 가정과 추측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올 수 없는 것이다.

6. 그렇다고 해서 공감을 무조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한계를 온전히 넘어설 수는 없지만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당 개인의 경험을 ‘그 사람 고유의 경험’으로 봄과 동시에 구조적 요인들의 분출로 보는 것이다.

7. 다시 말해 해당 경험을 순수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요인들이 개인을 통해 세상에 뛰쳐나온 것으로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고유한 경험은 보편적 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고, 보편성에 대한 고민에 기반한 실천을 통해 해당 경험과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온전히 공감할 수 없을지라도 그 경험의 기반을 변화시킬 실천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8. 공감의 언어는 과대평가되었다. 더욱 가치있는 일은 연대의 손길이다. 매끄럽고 완벽한 말보다는 말없이 함께 떠날 수 있는 꾸준하고 투박한 발걸음이 소중하다.

9. 결국 공감의 중요성은 응당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히 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와 닮았다.

10. 알 수 없어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 있다. 다 알 수 없다고 해도 함께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함께 궁리하는 가운데 우리 ‘사이’를, 우리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이해하는 척에서 끝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닫힌 이해가 아닌 열린 실천, 이것이 공감이 지향해야 할 바 아닐까.

기말의 ‘폭력’

Posted by on Dec 11,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점을 채워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기말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학교가 신체적/심리적 폭력에 가까운 부담을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수 개개인의 가혹함이나 학생 하나하나의 욕심에서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평가를 위한 시험과 과제의 구조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숨가쁘게 휘몰아치는 일정을 이악물고 헤쳐나가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대학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집요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 이 모습이 정말 최선일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소셜미디어, 동네, 그리고 태깅

Posted by on Nov 26,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소셜미디어의 사용 패턴이 많이 변했지만 그중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소위 ‘멘션(mention)’의 사용법이다. 2008-2009년 시기트위터에서는 누군가를 ‘소환’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운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길을 걷는데 뒤에서 반가운 친구가 ‘김성우!’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달까.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소환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거 좀 봐바바’하면서 링크나 이미지를 공유하는 일 또한 일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트위터는 ‘동네’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억을 너무 우려먹는 것 같지만) 당시 진행했던 ‘떼창’ 프로젝트는 소셜미디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남았고, 덕분에 공중파도 살짝 탔다. 놀랍게도 그때 맺은 인연 중 적지 않은 분들과 페이스북 친구로 지내고 있다.

지금은 누군가를 호출하는 일이 상당히 조심스러워졌다. 트위터에서의 멘션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피하게 되었고, 페이스북에서 누군가를 태깅하려고 할 때는 ‘이 사람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짐짓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갑작스런 호출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정도로 친한가 가늠해보게 되는 것이다. 호출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누군가의 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려지는 게 탐탁치 않다. 그룹 초대도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강제로 그룹 멤버로 추가했다가는 블락/언팔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오래 전 치기 어린 초초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온라인 공연을 몇 차례 가졌다. 추운 겨울 밤 김광석과 유재하의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스트리밍 링크를 남기고 사람들을 태깅으로 초대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못난 음악을 들어주었고, 따스한 감상을 남겨주었고,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고 위로했다. 이제 소셜미디어상에 그런 동네는 사라지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느낌이다. 트위터에 가끔 놀러가긴 하지만 이젠 정이 가지 않는다. 대책없는 향수는 아니고 그냥 그렇게 바뀌어 왔다는 거다.

당시 종종 연주했던 ‘잊혀지는 것’을 슬쩍 남겨놓으며, 마음 속으로 꽤나 많은 이름을 태깅한다. 고마운 이들이 이 음악과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던바의 수, 정보의 양, 그리고 탈진실

Posted by on Nov 21,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은 소통을 증가시켰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서 혐오하고 공격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이제 우리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든 분노하고 상처받을 수 있다. 편재하는 고통과 혐오(ubiquitous suffering and hatred)의 시대. 사람들이 벽을 쌓고 오로지 자기편만을 불러들이는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상처받기 전에 믿음을 진실로 만드는 ‘선제공격’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지금, ‘탈-진실’은 ‘탈-상처’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암울하다.

가끔은 개인이 사회적인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이야기하는 ‘던바의 수’와 같이 심리적인 안녕을 유지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와 양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 뇌를 찔러대기 시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발동하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그 학생의 질문

“선생님께서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요. 말씀하시는 영어공부의 방법이 살아오신 것과 모순되는 점이 있지 않나요?”

오늘 강연에서 한 고등학생이 한 질문입니다. 제가 중고교 시절 공부했던 것과 <단단한 영어공부>에서 말하는 바 사이에 사뭇 큰 괴리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요. 저도 성적 잘 받고 진학 잘 하려고 공부를 했으니까요. 제 삶의 전체 궤적을 보면 모순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삶에서 한결같은 일관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자신이 겪은 일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겪었던 영어공부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이후에 영어교육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깨달은 바를 나누려고 책을 쓴 것입니다. 지금 학교 생활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게 있다면 잊지 마시길 바라요.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학생의 묵직한 질문에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 답변이 학생에게 만족스러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모순들을. 결코 잊혀서는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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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이렇게 하지만
너무 자주 잊고 사네요.

학생과의 대화를 잊지 않으려
기차간에서 글을 남겨 놓습니다.

반 발짝 나아가기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썼던 문장들을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강해졌다.

아니 실제로 그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세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 번째는 물론
내 공부의 부족이다.
먹고산다는 핑계로
깊게 공부하기 보다는
얕은 지식을 꿰어 강연을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게으르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강사와 연구자 사이에서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를 본다.

내 삶의 조건들이 못마땅하기도 하고
괜한 비통함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안다.
결국 공부를 지속하는 것은
오롯이 내 책임이라는 것을.

두 번째는,
현실의 완고함이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해오던
‘삶을 위한 영어공부’나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이루기 위해
현실에서 아직 갈 길이 머니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영어교육과
리터러시 교육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 듯하다.

목요일 성미산 학부모 강의 후 접했던
가장 뼈아픈 반응은 이것이었다.

“말씀하시는 방법이 참 좋은데,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을 찾을 수가 없어요.”

학원이든 과외든
삶을 중심에 두고 가르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는 말씀이셨다.

입시도, 내신성적도
학생에게는 중요한 삶의 일부이고
시장은 그것을 중심으로 자원과 전략을
배치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렇기에 더더욱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이지만
끈질기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 번째는,
경청의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응용언어학/영어교육 연구자에게
지속적으로 소통할 ‘현장’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일 것이다.

학생이건 학부모건 교사건
아니면 일반 학습자이건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누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뭔가 질러보려고 한다.
방학때부터 학부모님들과
삶과 교육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어 보려고
이런 저런 궁리중이다.

나의 경험과 지식이
그들의 삶과 만나
또다른 삶이, 실천이, 깨달음이 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쳇바퀴 돌듯 쫓기는 일상이지만
사유와 실천에 있어서는 반발짝이나마 나아가고 싶다.

내 힘으로는 도무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해 주시겠다는 분들이 있으니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큰 일이 아니면 어떤가.
서로의 삶으로 인해
아주 조금이나마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씨익 웃으며
‘이게 사는 거지’라고
중얼거릴 수 있다면.

세대론 유감

Posted by on Nov 1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여러 세대론이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

(1) 어느 세대나 ‘이상한’ 사람들이 일정비율로 존재한다. 해당 세대 내의 권력과 자본의 배분은 개개인의 성품을 압도하는 경향을 만들어낸다.(구조와 시스템의 힘)

(2) 글을 읽는 사람이 누구이든 주변에 해당 묘사에 맞는 사람들이 꼭 있다. 세대론 설명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이 ‘플레이된다.’ (확증편향)

(3) 세대는 역사의 흐름을 어느정도 인위적으로 잘라낸 단위이다. 인위적으로 잘라내는 행위는 본질화(essentialization)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본질화된 묘사는 ‘깔끔하게 핵심을 짚기에’, 설명력을 갖춘 이론의 아우라를 지니게 된다. (‘론’의 위력)

이에 더해 요즘들어 우려하는 것은 다른 세대를 타자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 않나 하는 점이다. 세대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강력한 설명기제로 삼을 때 세계는 더 깊이 분열된다. 말을 거는 세대론이 아니라 침묵을 요구하는 세대론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영어로 논문쓰기 초청강연 후기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초청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무사히 마쳤다. 30-40명 정도의 인원을 예상했는데 거의 150명이 왔다. 대학원생들에게 영어논문쓰기가 꽤나 큰 관심사임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한 대학에서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열었을 때 대학원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적지 않은 분들이 논문에 대한 이해를 대학원 필수과정으로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다. 하지만 강의의 수명은 2년을 넘지 못했다. 강의를 열어주신 교수님 개인의견을 넘어 단과대학 차원의 정규과목 조정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비정규직 교수로서 오래 일을 하는 것이 학교로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논문쓰기를 도제식으로 배운 선생님들은 ‘많이 읽고 많이 쓰면 된다’, ‘피드백을 잘 따라오라’ 정도의 수준에서 논문지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도 충분히 논문을 써내고 학계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성공’의 예가 해당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논문을 읽고 쓰는 훈련의 기회가 체계적으로 주어질 때 대학원생들의 잠재력이 더욱 빠르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학술정보원 팀장님은 강의평가에서 후속강의를 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지만 다시 강의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꼭 내 강의가 아니더라도 대학원의 학술리터러시 교육이 좀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길, 대학이 진짜 돈을 써야 할 곳에 쓰기를 바란다.

#영어로논문쓰기 #학술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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