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 능력 계발을 위한 7가지 전략

Posted by on Aug 19, 2018 in 강의노트,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1. 음악적 감수성 sensitivity 을 계발하라.

주변의 모든 소리에 민감해지자. 눈으로 보는 경치(landscape)가 아닌 소리의 풍경(soundscape)에 귀를 열어보자. 아름다운 새소리, 달콤한 발라드와 웅장한 관현악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소음’에 귀기울이는 습관을 들이자.

버스를 타고 가면서 버스의 진동과 엔진 소리가 만들어 내는 리듬에 귀기울이거나 다양한 재질의 탁자에 귀를 대고 손가락으로 드럼 비트를 두들겨 보는 건 어떨까? 운동을 하다가 다양한 방법으로 박수를 치면서 소리의 차이를 느껴보는 건? 산책을 하면서 발 전체로 딛을 때와 앞꿈치로 딛을 때의 소리와 울림은 어떻게 다를까? 내 컴퓨터의 인쇄 버튼을 누른 후 종이가 모두 나오고 프린터가 다시 ‘잠들’ 때까지 어떤 소리들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귀 기울여 보자. 방마다 고유한 소리의 시그너처가 있고 사람들의 기침 소리 또한 모두 다르다. 아침 저녁 심호흡 속에서 내 몸이 내는 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2. 시간이야말로 음악 감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음악을 들을 때 다양한 박자와 빠르기를 경험하도록 노력하라.

낚시를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낚시에 집중하는 동안 시간의 개념, 시간에 대한 경험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몰입하면 시간은 변화하게 마련인 것이다.

다양한 음악을 통해 시간 여행의 속도와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호흡이 가빠지는 노래부터 수면의 속도와 맞먹는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의 유연성을 경험해 보자. 책을 아주 천천히 혹은 아주 빨리 읽어보기도 하고, 음악의 드럼 비트를 사이 사이에 나만의 소리 (혹은 여음구?)를 넣어보기도 하자. 몸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 같은 곡의 빠르기는 어떻게 다른가? 음악을 그냥 들을 때와 고개를 흔들며 들을 때, 박자를 ‘쪼개어’ 다리를 흔들며 들을 때, 악기를 따라 연주하는 흉내를 내며 ‘몸싱크’하며 들을 때 음악의 시간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3. 음악 기억력 발달 훈련을 하자.

어렸을 적 음악 시험에는 음악의 특정 부분을 들려주고 어떤 곡인지 맞추는 문제가 단골로 출제되었다. 많은 곡들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 암기를 해야 하는 상황은 문제가 있었지만, 음악적 패턴을 개별 곡 혹은 작곡가의 음악 세계와 연결시키는 작업은 음악감상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 없다.

사실 음악에 대한 기억력은 단순히 듣는 행위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기억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 것인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음악에 대한 기억은 다음 4번 (음악 용어의 습득) 항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경우에는 감상을 위한 인지 능력과 “몸의 기억”이 바로 연결될 것이다.

4. 음악 용어를 익히라.

“아는체”가 아니라 음악을 더 풍부하게 감상하기 위한 용어들을 익히자. 물론 화성악과 작곡법의 어휘들 vocabulary 을 알고, 다양한 악기의 구조와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을 배우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용어와 나의 경험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가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하나는 기존에 사용되고 있는 음악의 용어를 통해 좋아하는 음악의 특성을 기술해 보는 것이고, 다음은 메타포를 이용해 음악적 경험을 개념화해 보는 습관이다.

(1) 언젠가 “Over the Rainbow”를 듣자 마자 이 곡을 기억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첫 소절의 “한 옥타브 건너 뛰기”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Some 과 Where 사이 음역이 한 옥타브인데 일반 노래곡 중에서 이렇게 시작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분석이었다. 물론 이게 위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아니겠지만, 자기 스스로 특정한 음악 패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옥타브”라는 음악적 개념이 적절히 사용된 설명의 예라고 생각된다. 자신만의 코멘터리를 다는 습관은 감상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2) 음악을 다른 것과 연결시켜 메타포적으로 표현하는 습관도 효과적인 훈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렬한 일렉 기타 리프가 계속되다가 편안하고 ‘넓은’ 악기 조합으로 변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경우 나는 터널을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자동차를 떠올린다.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양 옆에 켜져 있는 라이트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다가 밝은 세상으로 나간다. 또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전 아주 잠깐 동안 “바깥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는 빛을 만난다. 나에겐 자동차로 터널을 통과하는 경험과 반복되는 일렉 리프와 마지막 몇 마디의 전환, 그리고 새로운 악기들로 구성되는 테마로의 전환은 유사성이 많다.

5. 집중력을 키우라.

음악을 사랑하고 전문적으로 듣는 사람들은 영화에 몰입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경험을 음악을 통해서도 한다. 난 이런 몰입의 훈련이 안되어 있어 호흡이 긴 관현악 곡에 집중하지 못하는 편인데, 그나마 공연장에서 집중하기 위해서 쓰는 “꼼수”는 마음 속으로 여러 악기의 연주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사실 피아노 이외에 다른 악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곡이 흘러가면서 첼로 연주자가 되어 보기도 하고 트롬본 연주자가 되어 보기도 한다. 각 연주자들의 몸짓과 표정을 유심히 살피면서 음악을 듣는 게 조금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이 되시는 분들은 지휘자가 되어 보는 게 제일 좋겠지만 말이다. :)

6. 객관적이고 덤덤하게 듣는 훈련을 하라.

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 음악은 기대 expectation 를 하게 하고 그 기대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충족시키거나 무너뜨리고, 또다른 기대를 도입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우리가 일정한 장르의 음악을 계속해서 듣게 되면 멜로디나 박자 등에 대한 기대 패턴이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패턴이 너무 확고하게 고정되어, 그 패턴의 “노예”가 되는 경우다. 국악이 어렵고 지루하게 들리거나 비전형적인 조바꿈이 일어날 때 “뇌가 꼬이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자기 속에 이런 패턴을 잠시 “뮤트”시킬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는 처음에 제시한 소리에 대한 감수성과 맞닿아 있다. 내가 이제껏 정의하고 경험한 음악의 영역을 넓혀가기 위해서는 음악적 ‘선입견’을 버리고 다양한 음악에 이끌려 미지의 소리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갑자기 중학교 때 비오는 밤에 <미궁>을 처음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사실 그건 좀 힘들었다. ^^;;)

7. 경험과 지식은 음악 감상에 깊이를 더한다.

음악사, 작곡가, 악기, 시대 등에 대한 지식을 쌓으면 음악적 경험이 더 풍부해진다. 음악만 듣는 것도 힘든데 이런 지식을 쌓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늘 이 훈련을 해왔다.

예를 들어 나는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를 들으면 어둠 컴컴한 교회 지하실에서 이 노래를 목놓아 부르던 내 모습과 함께 80년대 시위 현장이 떠오른다. 또 전람회의 “이방인”을 들으면 군생활의 단편들이 마구 떠오르는데, 그 시절 전람회의 음반을 다 외울 정도로 반복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원곡에 덧칠한 경험의 아우라가 “거의 모든 리메이크가 원곡을 못따라간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걸 알 수 있다. 즉 개개인 수준에서 봤을 때는 이미 경험과 지식이 음악과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음악 감상 능력을 좀더 키우기 위해서는 음악과 나 자신 뿐 아니라 음악과 시대, 음악과 작곡가, 음악과 다른 음악들 간의 관계를 공부하는 게 도움이 된다. 즉, “나에게 소중한 음악”의 수준에서 벗어나, “시대가 낳은 음악”, “작곡가의 삶이 빚어낸 음악”, “다른 음악가들을 움직인 음악”, “역사적 현장에 울려퍼졌던 음악”을 만나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 것인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사실 난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듣는다. 어렸을 때 피아노와 기타, 나이가 들어서 드럼을 조금 배우기도 했지만 음악을 제대로 배웠다기 보다는 악보를 카피하는 테크닉을 배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음악을 이해하는 다양한 방법, 악기에 대한 태도, 다양한 음악 장르에 대한 지식, 음악과 음악가의 관계, 음악의 과학적 원리 등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점점 편안한 음악만을 찾게 되는 요즘, 귀도 마음도 좀더 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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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한 포스트는 <Music: Ways of Listening> (Elliott Schwartz, 1982) 를 기반으로 음악 청취 훈련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제시한다. 위 포스트는 아래 글의 뼈대에 비전문가 막귀의 경험을 더해 정리해 본 것이다.

참고자료: How to Listen to Music: A Vintage Guide to the 7 Essential Skills by Maria Popova

How to Listen to Music: A Vintage Guide to the 7 Essential Skills

 

포기’당’한 세대의 아픔

 

나는 ‘포기자 담론’에서 포기의 주체를 학생들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면밀한 조사를 통해 교과교육의 실태를 파악하고 학생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 소위 ‘포기자’를 줄이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의 포기’ 이면에는 국가와 교육당국, 일부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포기가 있고, 이러한 포기의 핵심에는 교육에 대한 이 사회의 포기가 자리잡고 있다.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 대한 보살핌을 포기하고, 교육체제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고, 국가는 새로운 시민을 키워내기를 포기했다. 이렇게 보면 분명 학생들은 포기’당’한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내팽개쳐진 세대가 배움의 일정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이상한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전통적인 교육의 요소는 <교사-교육내용-학생>의 세 축으로 설명된다. (이 모델의 정합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논의를 위해 잠시 차용한다면) 핵심적인 문제가 ‘교육내용’에 있는가?

나는 도리어 교사와 학생의 문제, 관계의 문제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교사나 학생 개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제도적 역학이다. 교육과정의 양과 내용에 대한 토론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것이 핵심이 될 수는 없다. 개별 주체들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노력의 범위와 깊이를 정하는 것은 구조적 요인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 정확히 3년 전 오늘 쓴 글을 하필 오늘같은 날 읽게 된다. 교육정책은 늘 ‘표류중’이었으나 이젠 더욱 거센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문제는 언제나 존재했으나 그나마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문제로 느리게 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로 큰 흐름이 단절되었다. 지난한 싸움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다.

관련기사:
2022 대입 정시 30% 이상으로 확대…대학 재정지원과 연계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3&aid=0008760294&sid1=001

전문성의 정의 LEARN

Posted by on Aug 16,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Expertise = LEARN

전문성 = 학습(Learning)X경험(Experience)X시도(Adventure)X성찰(Reflection)X커뮤니티(Network)

30년을 가르쳐도 잘 못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경험이 전부라면 30년 경력의 선생은 모두 명강의를 해야 할텐데 말이다. 교육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분야에나 ‘나이만 먹은’ 사람들이 조금씩은 있다.

교사전문성을 중심으로 고민해 온 입장인지라 모든 분야의 전문성을 아우르는 틀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꽤 넓은 분야의 전문성은 LEARN이라는 약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의미한다.

Learning 끊임없는 학습
Experience 학습한 바를 경험 속에서 녹여내기
Adventure 기존의 영역을 넘어서는 모험과 시도
Reflection 자신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 체계적 성찰
Network 이 모든 것들이 더 넓은 관계와 관점, 맥락에 놓일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들/커뮤니티

이는 일종의 휴리스틱으로 사용 가능하다. 자신의 전문성 신장 노력을 점검하기 위해 위의 목록에 자신을 대입해 보는 것이다.

오랜 시간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학습하고 있는가?
나의 삶에서 그것들을 깊이 경험할 기회가 있는가?
미지의 세계, 해보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고 실천하는가?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품어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가?
혼자만의 생각에 감탄하고 안주하지 않고 다른 관점, 아이디어와의 교류를 꾀하는가?

즉, 나는 LEARN하고 있는가?

이 관점에서 보면 learner 또한 새롭게 정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소외의 제도화 (the institutionalization of alienation)

Posted by on Aug 16,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교육정책 변화의 소용돌이 속 가장 큰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는 결국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누군가에게는 부수적이지만 그들에겐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당사자들의 삶에 가닿지 못하는 정책의 가치에 대해 비당사자들이 논쟁하는 사회야말로 소외를 제도화하고 영속시키는 사회임에 틀림없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티-글 모아 태산

저자로서의 목소리(authorial voice)는 거대한 관점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초성과 단어의 선택에서, 어미의 변주에서, 격식의 조절에서, 어구의 호흡에서, 반복의 간격에서, 문장과 문단의 길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함의되고 생략된 요소에서 드러난다. 리터러시는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 정보처리의 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글쓰기의 과정은 언제나 소리 하나,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의 연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글짓기는 언제나 단어-짓기(word-building)이며, 단어-짓기 없는 세계-짓기(world-building)는 존재할 수 없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당파성을 드러내는 ‘객관성

Posted by on Aug 15,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나는 평소에는 온갖 사건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곁들여가며 의견을 내놓다가 특정한 사건에 대해서는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라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시전하는 선택적 객관이야말로 특정인의 편향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개별 행위가 아니라 여러 행위의 연속이, 여러 행위의 연속이 아니라 특정 행위의 공백이 누군가의 당파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말처럼 종국에 가서 우리가 기억하게 될 것은 적들의 말이 아니라 동지의 침묵일지 모른다. (In the end, we will remember not the words of our enemies but the silence of our friends. – Martin Luther King Jr.)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고민

Posted by on Aug 8,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며칠 전 청소년 대상 특강을 생각해 보면서 이곳 친구분들께 의견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대략의 내용을 설명하고 두 시간 특강에 2만원 정도의 수강료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두 분께서 수강료가 지나치게 낮은 것 아니냐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수강료 현실화’와 ‘살짝 부담되는 수강료를 내고 책임있게 듣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꽤 오랜 시간 공부한 결과를 나누는 강연 두 시간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아니 돌려 말하면 ‘꼭 알고 싶은 지식을 그리 나쁘지 않게 전달할 수 있는 강의자에게 수강생이 기꺼이 지불하려는 돈은 얼마 정도일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참고로 제가 생각한 수강인원은 20명 정도입니다.)

2. 엊그제 캘리그라피 관련 포스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무서워서 이제 무섭지도 않은) 페북이 디지털 캘리그라피 수업 광고물을 띄웁니다. 정확히 어떤 수업인지 파악은 못하였지만 수업 자료를 포함한 수강료가 29만원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좀 놀랐습니다. 단지 수강료가 높아서 놀란 건 아니었구요. 디지털 캘리그라피 관련 내용이 방대하더라도 1인당 29만원을 받아 과연 장사가 될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저 같으면 절대 그 돈 주고 수업을 듣진 않을 것 같거든요.

3. 좀더 근본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사실 순수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강의를 해서 먹고 사는 일은 이미 쌓은 것들을 소진하며 사는 일에 가깝습니다. 강의를 통해 소통하고 거기에서 얻은 에너지와 영감을 새로운 공부와 프로젝트의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개는 준비하는 노고와 돈의 교환이라는 단순 공식이 성립합니다. 수강생들과 오래 소통하면서 또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면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비정규직 강사의 삶에서 방학은 가장 곤궁한 시기입니다. 시간강사 중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학을 연구와 글쓰기에 전념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요. 이 기간의 밥벌이를 위해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몇 차례 진행했습니다. 호응해 주신 분들 덕분에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구요. 이번 방학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4주간의 강의는 무리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축소판 논문쓰기 강의나 자연어처리와 영어교육을 연계한 새로운 강의를 모색해 보고 있는 중이고요.

4. 아침에 이런 저런 소식과 부음에 삶을 어떻게 가꾸어가야 할지 고민이 커집니다.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삶에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겠지요. ‘고민’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넋두리 비슷하게 되어버렸네요. 어떻게든 글을 맺어야 하는데 이 고민에서 빠져나갈 출구가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아슬아슬의 미덕

Posted by on Aug 7,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새벽 두 시에 마치고 자려 한 일이 있다. 기적적으로 한 시 십 오분에 일을 마무리한다. 이 얼마만의 ‘미리 끝내기’냐! 기쁜 마음에 덩실덩실, 새벽 네 시까지 들떠 드라마, 영화로 달린다. 체력 방전. 다음 날 생산성 급강하. 미리 끝내서 좋을 거 하나 없다. 역시 일은 데드라인에 딱 맞게 해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예언이아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고립된 사상, 우상화된 정치인

Posted by on Aug 6,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자신이 견지하는 특정 견해가 자신이 갖고 있는 여타의 견해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알리바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가장 큰 적이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자신이 지지하는 훌륭한 정치인이 있으니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그른 것이라 몰아부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을 위배하는 일이죠. 사실 이들을 그냥 ‘생각’이라고 불렀지만 자기기만에 가깝습니다. 하나의 올바른 사상은 더 많은 사상으로 도약하기 위한 스프링보드가 되어야 하고,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인은 더 낮고 넓은 연대를 위한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고립되어 지배하려는 사상, 철저한 우상이 되어버린 정치인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글쓰기 훈련에서 배운 것

돌아보면 힘들었던 건 타지생활이 아니었다. 먹을 게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나날이었고, 밤낮도 주말도 없는 직장생활의 여유없음을 핑계로 방치했던 동네라는 공간을 다시 발견한 시기였고, 자주 홀로 걸으며 길과 하늘을 사진으로, 마음으로 담을 수 있었던 벅찬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사과정 내내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나를 괴롭혔던 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었다. 제2언어 리터러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쓰기에 대한 강의를 하고 학술논문 쓰기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도 자신의 글쓰기에 늘 신경이 쓰였다. 내가 가진 생각을 좀더 깊은 울림으로, 명확하고 생생하게, 아름답도록 아리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지만 여전히 영어는 “그들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배운 건 심오한 지식의 세계라기 보다는 글쓰는 사람으로 살아내야 할 일상, 글쓰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가다듬는 방법, 생각을 머금은 긴 산책으로 글길을 내는 일이었다.

조금 늦었지만 가파른 이론의 산을 오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있어보이는 암벽을 고르는 게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사고와 글쓰기의 통합”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쓰는 건 사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담긴 뜻을,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하루 하루 조금씩 엮어갈 수밖에 없다는 조언의 참뜻을 이제야  알 거 같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쓰기라는 베틀을 통해 생각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고, 엉킬 대로 엉킨 생각의 타래를 글줄로 뽑아내는 희열을 사모하게 되었다. 잘 다듬어진 글결이 보여주는 생각의 나이테에 감탄하게 되었고, 생각의 여정에서 남겨진 쪽글의 순진함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을 함께 써가는 사람들을 만나 아픔을 나눌 수 있었다. 글쓰기와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지만 계속 “차이는” 사람들, 그 쓰라림에 의연하지 못한 이들. 그래서 쓰기와 애증의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나같은, 가련한, 아름다운, 별것 없지만 또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 기쁘고 또 슬펐던 나날이었다. (2012. 8.)

오늘 밤에도 못쓴 글이 폭염에 스치운다.

‘글은 못쓰지 않아요.
당신이 못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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