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삼모사

Posted by on Apr 20, 2018 in 일상 | No Comments

조삼모사(?) 혹은 줬다 뺐기(?) 3단계

1. 단기

단체로 한 식당에 갔는데 음식이 너무 맛있고 푸짐해서 하나를 더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엔 양이 확 줄어서 나오더군요.

일행 중 하나: 아, 아깐 이거보다 엄청 더 주셨던 거 같은데요.
주인: 아, 아까 저희가 잘못해서 2인분을 드렸어요.
일행: ……………

2. 중기

개교기념일 전체 휴강 공지 메일을 읽는다.
하루 더 쉴 수 있다니 너무 좋다!
맨 아래 보강 안내 공문이 첨부되어 있다.

3. 장기

(미국의) 서머타임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속좁은 사람의 잡담 몇 개

Posted by on Mar 26, 2018 in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종종 타임라인에 공유되는 ‘명언’ 중에 “Great minds discuss ideas;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small minds discuss people. (위대한 사람들은 사상을 논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이야기하며, 작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라는 Eleanor Roosevelt의 말이 있다. 원문을 확인해 보지 않아 이 문장이 나온 정확한 맥락은 모르지만, 날이 갈수록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이야말로 사람들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려는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없는 사상’ 보다는,’사상 없는 사람’의 편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런 양극단이 존재할리 없겠지만, 굳이 고르라면 말이다.)

2. <위플래시>의 플레처 교수의 훈육법에 대해 ‘저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술가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해’라며 동의하는 분들이 있다. 플레처 같은 선생이 없으면 한계를 뛰어넘는 예술가가 어찌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앤드류의 신들린 연주 장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플레쳐의 옛 제자 케이시를 보았다. 통쾌하지만 슬펐고, 아름답지만 무서웠다. 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을 보고 싶어 하는가? 그렇게 태어나는 ‘천재’의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나? 한계를 뛰어넘은 예술은 한계를 넘지 못한 이들의 아픔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3. 돌아보면 남에게 모질지 못했던 만큼, 목숨걸고 어떤 대상에 진력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배움은 언제나 애매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영어도, 사진도, 음악도, 글씨도, 심지어는 전공이랍시고 한 응용언어학까지 말이다. 이런 얄팍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계에 도전하지 못했던 나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4.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살아온 나를 지탱해 준 것은 늘 사람, 사람이었다. (남들에겐 별것 아닐지 몰라도) 두어 차례 큰 고비가 있었고, 그때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도움의 손길들이 큰 사상에 기대있었는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날 버티게 한 힘은 약속도 댓가도 없는 함께함의 가치를 알았고, 무엇이든 쪼개어 주길 좋아했으며, 사소한 다침으로 마음을 닫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거창한 아이디어(ideas)를 좇았다기 보다는 못나디 못난 인간(people)을 받아주고 견뎌낸 친구들이었다.

5. 적어도 내게 위대한 영혼은 사람들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속좁은 나에게 위대함은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있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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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오늘 쓴 글을 다시 읽는다. 사상과 이론을 공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닮으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속은 좁은 것 같다.

탄핵 1주년

Posted by on Mar 10, 2018 in Uncategorized, 단상, 일상 | No Comments

새벽까지 일하다가 천근만근 몸을 뉘였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꿈속에서도 전에 일했던 직장들을 전전하며 또 일했다. 퇴근 후 광장에 나가 “이제 다시 시작이다!”를 외쳤다. 잠에서 깨어나 어제 보내기로 해놓고 까맣게 잊은 자잘한 서류들이 생각났다. 딱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몸상태로 너무 오래 달려왔다. 쉬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내일 오전에 있다.

나는 수업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힐끔거리며 핸드폰을 본다. 한 학생과 눈이 마주친다. “그냥 궁금해서요.”라며 씨익 웃는다. 삽시간에 교실 전체가 들썩거린다.

“잠깐 쉬었다가 하죠.”

복도로 나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눈물을 흘린다.

수업 후반부가 시작된다. 나는 힘주어 말한다.

“오늘 수업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2017.3.9.

탄핵심판 하루 전 썼던 글. 한 해가 지났고, 그간 큰 변화가 있었지만 하루하루의 일상은 여전하다.

누가 누구를 높이거나 숭앙崇仰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에게 박수쳐 줄 수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몇몇 사람들이 삶을 통째로 갈아넣어야만,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써야만 가능한 변화 따위는 없는 세상이 오길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언제나 그랬다.

미투논쟁 단상

Posted by on Feb 26,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단상 (대부분 저를 위한 리마인더입니다.)

하나. 말의 무게를 모르는 언론, 삶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하는 정치. 그들은 ‘소통’하고 ‘상생’합니다.

둘. 삶이 아무리 무거워도 말을 정성스레 고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타인의 삶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 속에서 체화했기 때문입니다.

셋. 가끔은 “정말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가 가장 적절한 말입니다. 슬픔과 고통에 반응하기 위해 강력한 수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곁에 서는 것으로 족하지요.

넷. 진영권력을 전복하려는 결단을 다시 진영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여야 합니다. 진영을 해체하여 모두의 일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다섯. 여전히 타임라인의 ‘논쟁’에는 남성의 목소리가 압도적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여섯. 누군가의 의견을 ‘몇 살 짜리의 능력’으로 폄하하는 것은 자신의 미숙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세상을 훌륭하게 읽어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은 많습니다.

일곱. 수천 년 스케일의 싸움과 수십 년 스케일의 싸움이 겹쳐 보입니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의 틀 안에 수천 년을 가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 ‘잘 읽어낸다’는 건 무슨 의미일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유사공정(類似公正, pseudo-fairness)

Posted by on Feb 12,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공정’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많다. 공정을 따옴표 안에 넣은 것은 단어를 인용한다는 뜻과 함께 공정이 아닌 것이 공정이라 불린다는 뜻도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정’이 가장 언급되는 경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의에서인 듯하다. 비정규직 공무원, 인천공항 노동자, 비정규직 교사 등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이다.

(최근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글이 다루려는 주제는 아니다. 언급한 ‘공정’의 대표적 용례는 아래 기사 참조.)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려다 취준생 기회 박탈… 이게 공정한 나라냐” (한국경제)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21118271

난 이 기사의 제목이 우리사회의 ‘유사공정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다소 이상적이라고 불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공정’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개념이다. 노동자 전체, 나아가 모든 시민을 포괄하는 공정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의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는 공정은 필연적으로 ‘강요하는 자’와 ‘강요받는 자’라는 불공정한 위계구조를 생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논의는 공정의 적용 대상을 취준생과 비정규직으로 손쉽게 규정한다.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려다 취준생 기회 박탈… 이게 공정한 나라냐”에서 공정의 잣대 아래 놓이는 집단은 취업준비생과 비정규직 뿐이다. 정규직은 어디 있는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이들은 어디 있는가?

특정한 집단–위의 경우에는 노동(가능)계층에서 약자 집단–만을 문제삼는 ‘공정성’ 논의는 공정의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정규직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공정함이 과연 ‘공정함’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정규직이 공정 논의에서 열외일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정규직 공채(시험) 통과 여부’이다. 이 외엔 그 어떤 기준도 없다. 과거에는 소위 ‘좋은 대학’에 가서 한 평생 덕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젠 ‘시험에 통과했으니’ 공정함의 기준을 모두 만족시켰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가 이들과 같이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다수가 ‘공정 열외 패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공정은 유사공정(類似公正, pseudo-fairness)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묻고 싶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공정함은 얼마나 공정한가?
그것을 ‘공정’이라 부를 수 있는가?

공부, 앎, 무지, 그리고 감(感)

Posted by on Feb 6,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공부를 할수록 앎은 커진다. 이것은 지식의 양, 개별 지식간의 관계, 지식과 세계의 사태와의 조응 등의 영역에 적용된다.

앎은 채운다. 마음이 차오른다.

2. 하지만 동시에 무지 또한 커진다. 앎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은 무지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커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밤하늘의 별, 그 너머를 보는 자신은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3. 역설적이게도 무지에 대한 자각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앎은 자유를 배반한다.

4. 알 수 없는 것들은 많아지지만, ‘아닐 것 같은 것’들에 감각은 자라난다.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미심쩍은 것들, 그럴듯해 보이지만 치렁치렁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것들을 감지하는 능력 말이다.

5. 아는 것은 산술적으로, 모르는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갖는 능(能)은 조금씩 성장한다.

6. 의심의 틈이 생긴다는 건 빛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부터는 그 빛이 우리를 이끈다.

7. 이 과정에는 근본적 역설이 있다. 빛을 보고 틈이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틈을 감지할 때 빛이 들어온다는 것.

일상 스케치

Posted by on Feb 5,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추위를 헤치고 2014년 영어지도법 수업을 들었던 친구가 찾아왔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몇년 간의 서로의 삶에 대해, 메모와 쓰기 습관에 대해, 선생으로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어려움에 대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2. 그가 임용고사에 대해 던진 다음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요즘도 임용고사 수업 실연에서 백묵 들고 필기하면서 수업을 합니다. 딱 그 포맷으로만 해야 되는데요. 판서를 잘 하는 게 상당히 중요하더라구요. 판서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게 영어수업 실연에서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겠어요. (영어과의 경우) 오히려 파워포인트라든지 다양한 동영상이라든지 그런 걸 잘 활용하는 게 훨씬 중요할텐데 말이죠.”

3. 몇 가지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1) 새로운 교육과정은 미래학습자 역량을 중시하며 그 중에서도 공동체 역량, 협력 역량을 강조한다. 그런데 협력이나 공동체 역량은 객관적 평가가 힘들고, 평가를 한다 해도 ‘무임승차자’가 있어 학생들이 기피한다.

협력이 중요하다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을, 구조를 디자인해야 한다. 구호를 외친다고 사람이 바뀌진 않는다.

2) 영어 말하기 수행평가 중 널리 활용되는 포맷으로 대화(dialogue)나 본문 일부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기가 있다. 음성으로 나오는 것이기에 ‘말하기’ 혹은 ‘의사소통’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평가의 타당도를 희생시키는 객관성은 어떤 의미가 있나?

3) 외국어로 영어를 배운 성인들이 글쓰기를 할 때 사실상 100% 인터넷 검색이나 참고도서, 혹은 사전을 활용한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 또한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며, 이런 능력이 쓰기 능력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쓰기 평가의 경우 백지에 연필로 작성하거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한 포맷이 자주 사용된다.

다양한 중재도구(mediational tools) 없이 쓰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그렇다면 안경을 벗고 시험 문제를 풀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4. 그땐 선생과 학생이었지만 이젠 그도 교사로 살아가기에 내가 도리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마음이 닿아 만나고 또 고마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고마왔다. 마음 가는 것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

그래서 만남은 언제나 기적이 아닐까.

2018 겨울방학 단상

Posted by on Jan 30,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번 방학은 인생까지는 아니어도 강사생활의 터닝포인트로 기억될 것 같다.

생각지 못했던 출판제의를 받아 <어머니와 나>를 마무리하고 있고, 여러 분들의 추천과 응원으로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록을 책으로 내보려고 궁리중이다. 그간의 강의 내용을 대중적인 톤으로 써보기 위해 <브런치> 운영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방학인데 방학이 아니다. 뭔가 많이 하고는 있으나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듯하다.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는 일들은 한가득인데 공부를 통해 지평을 넓히는 일에는 거의 손을 못대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제 오늘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로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서 발딛고 있는 땅을 굳건히 해야 한다. 가르치는 일도, 공부하는 일도, 먹고 사는 일도 흔들리기만 해서는 오래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은 그런 시기일지도 모른다. 제자리 걸음처럼 보이지만 땅을 고르고 숨을 고르고 마음을 기르는 시간.

합리화하지 않고, 선언하지 않고, 호들갑 떨지 않고 살아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논문쓰기 3주차 단상

Posted by on Jan 20, 2018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내가 언제 스무 개 가까이 되는 분야의 진지하고도 열정적인 연구자들 앞에서 강의라는 걸 하겠나’ 싶었다. 별것 아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닌, 몇년 후 각자의 삶이 되고 나면 너무 평범한 것들이라고 회상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 그래도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고민하는 연구자들의 공부에 작은 자양분이 되기를, 내 공부의 우둔하고 우울했던 나날들이 다른 삶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간절하다. 모여주신 분들이 그냥, 많이, 고맙다.

오묘한 메타포의 세계

1. 국물도 없는 집은 진짜 국물도 없다. 다신 안가.

2. ‘넌 이제 아웃(out)이야’라고 말하며 점퍼를 옷장 안(in)에 던져넣었다.

3. 처음부터 답이 다 정해져 있는 사람은 정말 답이 없지.

4. 완전 차갑게 얼린 맥주가 요즘 핫해요.

#오묘한메타포의세계
#오늘의두포스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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