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붙 그리고 글쓰기

가설

1. 죽음의 지평 앞에 선 사람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두께에 끌린다. 이것은 외경(畏敬, awe)과 비슷한 종류의 감각이다.

2. 글쓰기에 몰입하는 힘은 시간여행의 기쁨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흔히 쓰는 동안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고 하지만 반대다. 겹겹의 시간이 분해되어 화면에 유성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3. 펜끝에서 다양한 시간을 끄집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을 작가라고 부른다. 수많은 시간을 엮어 내 작품의 시간(the time of my work)으로 만드는 사람들.

4. 자기계발서의 시간은 대개 납작하다. 그 납작함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매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외경의 빈자리에는 종종 경멸이 자리잡기도 한다.

5. 글쓰기는 Ctrl+C, Ctrl+V 사이에 저자의 인생이 개입되는 행위다. 카피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긴 하지만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정교한 베끼기다. 각자의 삶이 다른만큼 글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뿐.

#삶을위한리터러시

기억감퇴 4단계

Posted by on Jun 18,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기억감퇴 1단계: 영화 제목을 보고 “이거 왠지 익숙한데”하면서 줄거리를 흝어본다. “아, 이거 봤던거네”라며 다른 영화를 고른다.

기억감퇴 2단계: 예전에 봤던 영화인지 모르고 다시 보다가 결정적 순간에 이르면 “이럴수가, 예전에 봤던 거네”라고 탄식한다. 이미 본 영화임을 기억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기억감퇴 3단계: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친구를 만난다. “야, 너 혹시 데자뷔 Déjà vu (旣視感) 라는 말 아니? 내가 어제 영화를 보는데 말야, 진짜 끔찍한 데자뷔를 경험했어.

기억감퇴 완성단계: 예전에 봤던 영화를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이 다시 본다. 한 5분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음 앞에 내용이 뭐였더라?’

단단한 영어공부 3쇄

Posted by on Jun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일상 | No Comments

<단단한 영어공부>가 3쇄를 찍게 되었습니다. 출간 100여 일 만이네요.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공감해 주시고 알려주신 덕분입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로 향하는 길에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래 유유출판사의 공지글을 옮깁니다. 책 표지의 ‘비밀’이 담겨 있답니다. ^^)

#단단한영어공부 #중판출래

이 책은 영어공부 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어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학습법을 알려 준다거나 영어를 원어민처럼 술술 하게 되는 법을 안내하는 책이 아니에요. 이 책은 영어공부 책입니다.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영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언어 중 하나인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지요.

책 표지에 ‘영어공부’라고 쓰여 있는데, 영어공부 책이 아니라고 했다고 영어공부 책이라고 하니 좀 헷갈리시죠? 이 표지 시안을 처음 봤을 때,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this is not a pipe’가 떠올랐습니다.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텍스트를 본 이들은 자꾸만 질문을 던지게 되죠.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이건 파이프 그림이지 진짜 파이프는 아니지 않은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은 파이프라고 할 수 없는가? ……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도록 만든 작품이지요.

『단단한 영어공부』도 자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초중고교에서 장장 12년간 배운 영어는 나를 성장시켰나? 영어공부 생각만 하면 답답하고 두려운데 언어 공부란 이런 걸까? 영어를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응용언어학자인 저자는 말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우리가 이 익숙하지만 낯선 영어공부의 세계로, 외국어의 세계로, 언어의 세계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위해 내 삶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자고 말하지요. 찬찬히 꾸준하게 영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오늘 중쇄 찍습니다.

View this post on Instagram

#단단한영어공부 #중판출래 이 책은 영어공부 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어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학습법을 알려 준다거나 영어를 원어민처럼 술술 하게 되는 법을 안내하는 책이 아니에요. 이 책은 영어공부 책입니다.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영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언어 중 하나인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지요. . . . 책 표지에 '영어공부'라고 쓰여 있는데, 영어공부 책이 아니라고 했다고 영어공부 책이라고 하니 좀 헷갈리시죠? 이 표지 시안을 처음 봤을 때,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this is not a pipe'가 떠올랐습니다.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텍스트를 본 이들은 자꾸만 질문을 던지게 되죠.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이건 파이프 그림이지 진짜 파이프는 아니지 않은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은 파이프라고 할 수 없는가? ……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도록 만든 작품이지요. . . 『단단한 영어공부』도 자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초중고교에서 장장 12년간 배운 영어는 나를 성장시켰나? 영어공부 생각만 하면 답답하고 두려운데 언어 공부란 이런 걸까? 영어를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응용언어학자인 저자는 말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우리가 이 익숙하지만 낯선 영어공부의 세계로, 외국어의 세계로, 언어의 세계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위해 내 삶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자고 말하지요. 찬찬히 꾸준하게 영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오늘 중쇄 찍습니다. 🥳

A post shared by uupress (@uupress) on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Jun 16,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강사 지원용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영어로만 문서를 작성하다가 보니 한국어로 쓰는 소개는 처음이다. 학부 졸업반의 마음이 소환되면서 마음이 간질거린다. 퇴임을 미리미리 계획할 때가 되어간다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에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기말, 채점, 헤어짐, 지원, 방학 계획, 새로운 보금자리를 알아보는 일까지, 많은 것들이 교차하는 6월이다. 이 또한 지나가고 기억되고 잊혀질 것이다.

관계에 대한 유치하고 투박하기 짝이 없는 생각 한 조각

Posted by on Jun 10,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쌓여
물흐르듯 관계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고 (인간–>관계)

관계를 쌓고자 하는 욕심에서 시작하여
하나하나의 인간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다. (관계–>인간)

갈수록 후자의 모습이 위험하고 혐오스러워 보인다.

관계가 목표인 관계는
‘관계를 리드하는’ 자신으로 한없이 빠져들기에
천박함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목표라고 해서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람을 우선한다 해서
만족스런 관계를 형성한다는 보장은 없다.
더 아프고 더 슬프고 더 억울할 수도 있다.

단 한 가지,
사람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지킬 뿐이다.
그저 터질듯한 심장의 박동을 느낄 뿐이다.

자기계발서의 행복한 결말은 없다.

그런 결말 따위
서늘한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사람들이 좋다.

구원자들보다
상처입은 영혼이
훨씬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영어교육 응용언어학 관련 강의 목록

Posted by on Jun 10, 2019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대학원 후반부터 지금까지 40개 과목을 가르쳤네요. 조금씩 겹치는 것들을 제외해도 서른 과목을 훌쩍 넘기는군요.

1. Introduction to Academic Writing 1
2. Introduction to Academic Writing 2
3. Technology-enhanced Language Learning
4. Second Language Writing
5. 어휘와 문법 지도법
6. 영어교육방법 및 교육공학
7. 영미어문교육의 기초
8. 사회언어학과 영어교육
9. 사회문화이론과 영어교육
10. 제2언어 쓰기와 영어교육
11. 응용언어학 특강
12. 언어와 사고
13. 영어독해
14. ICT 영어강독
15. 멀티미디어와 영어
16. 영어작문
17. 학술적 글쓰기의 실제
18. 초등영어 교육방법론
19. 영어수업 설계 및 실기 1
20. 영어수업 설계 및 실기 2
21. 영어 말하기 듣기 지도법
22. 영어 읽기 쓰기 지도법
23. 영어학개론
24. 영어교재 연구 및 지도법
25. 제2언어습득론
26. 영어 문법
27. 영어교육 방법론
28. 초등영어 쓰기 지도법
29. 영어 어휘 지도법
30. 영어 문법 지도법
31. 영어 쓰기 지도법
32. Second Language Acquisition Seminar
33. Language Use and Culture
34. 초등영어 교수법 세미나
35. 초등영어 교수법의 이해와 적용
36. 초등영어 양적연구 방법론
37. 초등영어 교육론
38. 초등영어 듣기 말하기 지도
39. 초등영어교수법: 코퍼스 언어학을 중심으로
40. 멀티미디어 초등영어 현장연구

강사 지원 서류 준비하면서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이제 좀 덜 가르치고 좀더 잘 가르치고 싶네요.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Jun 9,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학기가 저물고 있다. 이번 학기 학생들의 반응을 도통 알 수 없어 힘들었던 과목이 코퍼스 언어학 개론이었는데 기말에 한 학생이 코퍼스로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해주어서 마음이 조금 풀렸다.

2. 방학에 뭐할지 마음을 먹었다. 늘 그렇듯 휴식과 읽기쓰기, 그리고 강의다. 별일이 없으면 7월 말에 진주문고에서 독자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주변에 계신 분들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3. 다음 학기 대학 안에서 뭐하게 될지 정해진 게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살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이제껏 걸어온 길이 사라진다 해도 계속 걸을 수 있고 걸어야만 한다.

4.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주제로 몇몇 교원학습 공동체 선생님들과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도 선생님들과 많이 만나 궁리하며 고통과 희망을 나누고 싶다. 호흡이 긴 공부모임도 괜찮을 것 같고.

5. <단단한 영어공부>의 판매가 추락(?)하고 있는 가운데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어머니와 나> 때도 그랬지만 출판된 책이 잊히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내 책보다 훨씬 더 공을 들인 책들도 빛의 속도로 기억에서 사라지는 걸 보면 오래 살아남고 있는 걸까.

6. 돌아보니 수년 간 나의 현장은 강의실 안에 머물렀다. 좀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좀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 좋아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뇌피셜’이 늘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 아닌가 싶다.

7. 공들여 쓴 글은 거절당하고 휘리릭 써내려간 글은 게재가 되는 걸 보면 역시 세상은 운이다. (먼산)

8. 리터러시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복잡한 문제다. 리터러시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정연하게 풀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무지의 신

“대한민국에 영어교육 전문가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답글을 우연히 보았다. “내 주변에 전문가가 없다”를 습관적으로 ‘대한민국에 전문가가 없다”로 바꿔쓰는 분들이 있다. 전문가 자리에 오만가지를 넣어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지닌 분들이다.

언젠가 소위 ‘글로벌 대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만트라처럼 여기는 생각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인재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 담장 바깥에 더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HR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무림고수’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지평 너머에는 반드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 세계는 당장 볼 수 없기에 일종의 ‘신비’로 존재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좁디좁은 나의 세계를 우주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일이자 자신을 신의 자리에 앉히는 행위다. 그렇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무지의 신’이 탄생한다.

나 자신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새겨야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비고츠키와 장애

Posted by on Jun 3,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한 세기 전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아래 기사의 제목과 같은 맥락의 주장을 펼쳤다. 그는 장애를 한 개인 안에 있는 결핍으로 보지 않고 개인과 사회문화적 환경의 상호작용의 문제로 보았다. 나아가 장애를 하나의 정적인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발달의 한 단계로 설정하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은 단지 장애인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이며 사회가 인간을 대하는 수준의 문제가 된다. 잘못 설계된 도시는 일부의 사람들만을 환영한다. 그 결과는 철저한 배제와 비용의 전가다.

‘비장애인’은 ‘건강하고 이상이 없기’ 때문에 비장애인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물리적 환경이 그의 몸과 상호작용하기 용이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비장애인’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비장애인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이를 ‘정상’이라고 호명하는 것만큼 비정상적인 것이 있을까.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명을 건설하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황당할 것이냐 말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그런 일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정상’이 ‘정상’을 구축하고 ‘비정상’을 배제하고 축출하며 차별하는 야만은 엄연히 우리 곁에 있다.

http://www.ziksir.com/ziksir/view/8248?fbclid=IwAR3vvGIxQEdWy-BLq_J9vvzqZM7pvKJZkBpresahR6do48OZ4EXrx-UKRm4

미움받는 법

지난 주 기말고사 일자를 공지했다. 늘 그렇듯 강의계획서에 나와 있는 학기 마지막 수업일이다.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다가왔다. 오래 전부터 계획한 여행을 가야 하는데 시험 날짜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되려 일정을 바꿀 수 없느냐고 물었고, 그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사뭇 단호한 것이 당장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날짜를 물어봐 줄 수 없겠느냐는 너무나 간곡한 요청에 결국 다음 시간에 학생들에게 날짜 변경 가능여부를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날짜를 옮기는 데 모두가 찬성한다면 일자를 변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수업 시간. 여행을 가려는 학생이 리마인드를 해 주었다. 학급 전체에 물었다. “시험 날짜 당겨도 될까요? 저는 한 주 일찍 봐도 상관이 없습니다.” 교실을 둘러보았다. 그냥 예정된 날 보자는 얼굴들이었다.

다시 “그냥 그날 볼까요?”라고 물었다. 여기 저기에서 그러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예정된 대로 봐야겠네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짐을 챙기는데 여행을 가려는 학생이 앞으로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길래 일정대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학생들에게 물어본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그래도 물어보신 게 아니잖아요.”
“???”
“거수해서 다수결 투표하지 않으셨잖아요.”
“아… 제가 교실을 다 둘러봤어요. 그대로 보자는 학생도 꽤 있었고요. 그러면 그대로 봐야죠.”
“그래도 다수결 투표를…”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가버린 학생. 나는 마지못해 ‘미안하게 됐다’는 말을 했다. 여행을 취소하거나 미뤄야 하는 상황을 맞은 그의 얼굴엔 분한 표정이 가득했다.

사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 ‘다수결 투표’가 답이라고 생각하는지. 몇 명이라도 기존의 계획을 선호한다면 그대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다수결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저 인식은 어디에서 온 건가?

황당하게 미움받는 거, 참 별로다. 그렇다고 피할 방법도 없다. 그래도 하나 배운 게 있으니 이제 시험 날짜 변경 요청을 받으면 단칼에 거절할 것이라는 것. 간곡함에는 단호함으로. 기말은 마지막 날에.

– 수년 전 일기에서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