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과 공정성

Posted by on Dec 12,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의 평가에 요구하고 있는 ‘투명성’을 모든 기업에 요구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대부분 기업의 인사평가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 학교와 기업에 대해 다른 잣대를 적용하게 만들까? 기업의 인사팀은 신뢰할 수 있고 학교 선생님들은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 말이다. 혹 이 사회가 기업과 학교와 맺는 권력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2. 많은 사람들이 입시 등에 요구하고 있는 ‘공정성’의 잣대를 비정규직과 정규직 모두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의에서 보듯 ‘한 차례의 시험’이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게 되는 건 어떤 기제에 근거할까?

3. 소위 임팩트 팩터(IF)가 모든 것을 말하는 세상에서 교육에 힘쓰는 강사들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직업안정성은 고사하고 30여 년을 일해도 방학의 생존 자체가 불안한, 자연증가분 이외의 연봉인상이 없는 상황을 감수해야 할까?

4.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대입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대학교수와 시간강사를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는 사회는 불행하다. 아니 미개하다.

5. 미개한 사회일수록 일부는 계속 잘 살아갈 수 있다.

취약성과 법

Posted by on Dec 9,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연약한 동물적 육체를 항상적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가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은 진실일 것이다. 언제든 죽기 마련인 인생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사실상 우리 손을 벗어나 있는–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일정한 자기기만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자기기만적 허구가 법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이며, 최소한 우리의 공통된 삶을 형성하는 제도를 만들 때 우리 모두는 아이와 같으며, 많은 면에서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다.

나는 이것이 자유주의 사회가 나아가야 할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사회는 모든 개인의 평등한 존엄과 공통의 인간성에 내재된 취약성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있는 사회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회를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것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봐야 하고, 우리의 법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사회의 법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43쪽

학기말 단상 (2018.11.)

Posted by on Nov 25,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강사법의 여파인지 이번 학기말은 유난히 고요하다. 여느 때처럼 강의는 막바지로 가고 나는 방학 동안의 생존을 계획한다.

밥먹고 산다는 핑계로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은 조금 희미해졌다. 물론 게으름과 능력부족이 더 큰 원인이지만, 그냥 ‘밥먹고 산다고’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그게 무난하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지도 않으니까.

연구자로서의 삶을 크게 동경해 본 적은 없다. 대학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 부러웠던 적도 없었다. 다만 학기마다 돌아오는 조금 귀찮은/구차한 일들이 힘겹긴 하다. 6년 여의 반복도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진 못한다. 익숙해지지 않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건 좋다. 대학에 여전히 발을 담그고 있을 수 있는 건 나를 믿어준 선생님들 덕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함께하는 학생들 덕분이다. 구원은 늘 교실에 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초초안을 완성했다. 조금 고치면 초안이 되고, 조금 더 다듬으면 세상에 내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부터 두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전공과 관련된 모임 하나, 순수한 책수다 모임 하나. 책을 읽고 떠드는 모임은 언제나 좋지만, 이 두 모임은 정말 좋다. 성과 따위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이야기에, 사람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왜 더 일찍 시작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다.

학기가 끝나면 구원은 휘리릭 사라진다. 세상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방학엔 쉼과 탈-구원이 오묘히 공존한다.

예전처럼 쉬지 않고 일할 수는 없게 되었다. ‘저질체력’ 때문만은 아니다. 삶의 완급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 해 내내 질주하는 삶을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질주하지 않는다고 주저앉은 건 아니다.

짝에게 물었다. “혹시 다음 학기에 강의가 안들어오면.” 그가 웃으며 말했다. “집안 일 열심히 해.” 둘이 한참을 웃었다. 먹고 사는 걱정은 미친듯이 웃은 다음에 해도 된다.

학생들과 <Bowling for Columbine>과 <Elephant> 토론을 진행했다. 눈물나게 재미있었다. 말 그대로다.

부조리한 세상과 못난 내가 씨줄과 날줄로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을 만든다. 학생들의 눈빛이, 친구들과의 소소한 수다가, 무엇보다 유머가 그 벽에 균열을 낸다. 새어 들어오는 빛으로 다시 세상을 분간한다. 자리를 찾아간다.

삶을 사랑할 순 없을지라도 순간순간을 사랑할 순 있다.
그걸로 족하고 그래서 족하다.

‘1991, 봄’, ‘국가에 대한 예의’, 그리고 ‘강기훈 말고 강기타’

Posted by on Nov 13,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감히 과거가 품을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역사라는 틀에 가둬두려 해도 자꾸만 뛰쳐나옵니다. 꾸짖고 흔들고 소리치고 울부짖습니다. 속삭임마저 폐부를 찌르는 공기의 파장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과거가, 역사가 가둘 수 없는 이들은 지금 이 시대 또 다른 얼굴로 우리와 마주합니다.

저에겐 그 중 한 사람이 강기훈입니다.
오늘 네 번째 본 <1991, 봄>을 통해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가공할 권력을 지닌 국가기관이 한 개인에게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였습다. 그의 인생 뿐 아니라 주변까지 철저히 파괴하였습다. ‘재판’ 혹은 ‘법적 다툼’이라는 프레임으로 사건을 묻어버리려 했습니다. 여전히 국가는 진심어린 사과도 반성도 없이 ‘법원의 판단 존중’이나 ‘항소 포기’ 따위의 레토릭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국가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야만의 시간을 견뎌낸 한 사람이 수줍게 웅크립니다. 슬며시 기타를 듭니다. 숨을 고릅니다.

강기훈의 <카바티나>를 배경으로 먼저 떠나간 이들의 말이 흐릅니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다 자신을 던진 이들의 얼굴들과 만납니다. 그의 연주는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몸부림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제스처도 아닙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말로는 턱없이 모자란 참혹한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아름다움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시대의 한복판에서 바흐의 음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기자회견을 하다가 안경을 벗고 얼굴을 책상에 묻어버린 수배자. 수많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청년. 지나치는 사람들의 그림자에마저 자리를 내주는 사람.

그의 삶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기타는 고요히 웁니다. 관객들도 따라서 숨죽여 웁니다. 이해할 수 없어, 가 닿을 길 없어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는 삶이, 죽음이 있습니다. 강기훈씨의 연주가 뒤로 숨는 동안 사라진 이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살아남은 이들과 만납니다.

김철수는 말합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해 주세요.”

김귀정은 묻습니다. “나는 10년 후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

박창수는 꾸짖습니다. “왜 당신들은 아직도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건가요?”

권력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은 삶을, 목숨을 짓밟았습니다. 대법원 무죄판결 이후에도 여전히 강기훈의 유죄를 확신한다는 이들은 처세를 이해하고 자신을 높이는 데 성공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삶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강기훈이 말하는 ‘시시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알 턱 없는 사람들이 응원을 받고, 권력을 잡고,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야만의 시간은 계속됩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세 개입니다. <1991, 봄>으로 개봉했지만 그 전에는 <국가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앞서서는 <강기훈 말고 강기타>였죠. 저는 이 세 제목이 우리가 한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은 ‘시대’로 기억됩니다. 1980년 5월. 1987년 6월. 1991년 5월. 이렇게 말입니다. 어떤 사건은 ‘상대’로 기억됩니다. ‘국가폭력사건’, ‘간첩조작사건’. 하지만 어떤 사건은 이름을 불러냅니다. 김귀정, 강경대, 박창수, 김철수, 김기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저에게 1991년 봄의 기억은 단순합니다. 대입 모의고사를 치고 학과를 결정하고 열심히 암기과목을 정리하던 시기. 아버지가 가져온 신문에서 검은 신부복 차림의 박홍을 봤던 시기. ‘국가폭력’, ‘유서대필조작’ 등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기. 김기설, 강기훈의 이름은 알지도 못했던 때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주어진 삶에 충실했기에 더더욱 부끄러운 시절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아니 죽음에 무지했던 일상이 자꾸만 아픈 시절입니다.

이런 어리석음 때문일까요. 영화를 네 번이나 보았지만 제게 남은 것은 <1991, 봄>이나 <국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강기훈의 모습이었습니다. 수술 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운지가 잘 되지 않던, 딸과 따스한 농담조의 메시지를 주고받던, 예상치 않았던 카메라를 웃으며 나무라던, 도레미파솔라시도 첼로를 연주하던, 등에 딱 붙는 백팩을 메고 진실의 힘 계단을 오르던, ‘유서대필의 누명을 썼던 손가락으로 기타를 연주하던’ 모습 말입니다.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준 운동권,
국가 폭력 피해자
말기 암 환자

그러나 강기훈은
그를 가리키는
모든 말로부터
걸어나갔다”

국가폭력의 희생자 강기훈이 아닌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나간 강기타를 기억하려 합니다. 기타에 닿는 그의 눈과 손가락을, 몸짓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언젠가 저도 주어진 말로부터 걸어나갈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카바티나>를 듣습니다.

대화의 세 가지 차원에 관하여.

Posted by on Nov 9,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먼저 대화의 일반적인 의미다. 네이버 사전에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라 풀이되어 있으며, 한자로는 “對話”로 표기된다. 대화對話에서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이야기한다. 말들이 서로에게 날아가고 날아든다. 대화참여자 A와 B는 개인으로 표상된다. 이 개념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A <-> B 도식이 적당할 것이다.

두 번째는 대화代話라고 표기해야 할만한 측면이다. 대신해서 말한다는 뜻.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는 나와 너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나의 역할과 너의 역할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저기 보이는 저 분은 <보험영업원>으로 <고객>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선생>의 입장에서 <학생>에게 이야기한다.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사회적 역할 속에서, 혹은 사회가 정해준 역할을 대신해서 서로에게 이야기한다. 대화 참여자 A와 B는 사회적 역할 A’와 B’가 자신을 실현하는 통로다. 구조는 ‘에이전트’를 통해 세계에 등장한다. A’-A<->B-B’ 정도로 도식화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대화大話라고 부를만한 것이다. 이것은 첫 번째의 대화對話와는 다르게, 방향성이 없다. 나의 말이 너에게로 향하거나, 너의 말이 나에게로 향하지 않는다. 너와 나는 서로를 도와 대화大話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H와 O는 각각의 특성이 있지만 H2O가 될 때는 본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나와 너는 각자 말하는 것 같지만 속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이야기 즉, 대화大話를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A와 B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이야기 속에서 C가 된다. ‘나’와 ‘너’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생성되는 것이다. A+B=C (C>A+B) 가 되는 셈이다.

카페 구석에서 대화에 깊이 빠져든 이들을 본다. 미소는 떠나질 않고 말은 끝없이 이어진다. 가끔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너의 말은 나의 말이 되고, 나의 말은 너의 말이 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같은 시공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때 그들만의 시공간이 생성된다. 물리적으로는 탁 터진 공간이지만 대화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스마트폰이 가리키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다.

代話를 집어던지고
對話를 넘어
大話가 되어버린 사람들.
아름답고 신비하다.

<닥터 후>의 대사 한 토막이 기억난다.

“We’re all stories, in the end. Just make it a good one, eh?” (우리는 결국가서 모두 이야기로 남는 거잖아. 그러니 괜찮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어?)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양심적’ 병역거부

Posted by on Nov 3,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적지 않은 분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 반감을 보입니다. 종교와 신념에 기반한 병역거부가 ‘양심적’이라면 군대에 갔다 온 자신은 ‘비양심적’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논쟁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고요. 다만 제가 ‘양심적’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은 이해를 못하시겠지만 (그리고 저 또한 조금 이해가 안되는 구석이 있지만) 저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별다른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용어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행위와 그 행위의 주체에 주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양심에 기반해서 결단을 내렸을 거야’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태양 님의 병역거부 이후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몇몇 병역거부자들을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났고, 병역거부 운동을 활발히 하는 이들과 대화할 기회 또한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 병역거부 사례를 접하면서 그들의 행동이 진실한 마음과 평화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개념이나 용어가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의 구체적 삶으로 병역거부를 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들의 ‘양심’이 그들의 행동을 이끌었음을 큰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이런 경험들을 통해 제가 깨달은 것은 ‘양심’이 다양할 수 있으며,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더욱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것이 우리사회에 축복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행위를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부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양심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제가 비양심적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이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양심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양심’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기를 마다 않는 그들에게 박수를 쳐야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정신이 살아 숨쉴 수 있는 사상의 공간을 넓혀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어떤 용어를 택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양심의 최전선에서 양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힘써온 분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비양심적인 우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더 큰 양심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게 왜 양심이냐’라는 질문보다는 ‘여태껏 왜 우린 그 정도 양심밖에 가지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더욱 절실합니다. ‘그럼 나는 비양심적인가?’보다는 ‘나 또한 미약하게나마 양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훨씬 생산적입니다.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욱 넓고 깊어진 이 사회의 양심의 생태계가 벅차게 반갑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양심적입니다. ‘거짓양심’을 판단하는 것, 병역거부자의 선택에 따른 길을 열어주는 것은 법과 제도의 몫입니다. 사상과 제도는 이렇게 조금씩 나아갑니다. 그 앞에는 자신의 양심을 꺾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이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대학원을 또?

Posted by on Nov 2,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나: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시 운이 정말 안좋아서 일을 못하게 되면 돈 벌려고 하기보다는 뭘 좀 배울까봐.

짝: (흔쾌히) 좋아! 뭐 배울 건데?

나: 프로그래밍 쪽이지 뭐. NLP(자연어 처리, natural language processing) 쪽 기본 지식이 있으니 프로그래밍을 좀 파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잖아. (아주 조심스럽게) 한 6개월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짝: 아예 공부를 하나 더 하든가.

나: 헉… 학위를??

짝: 할려면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자기가 공부하고 싶으면 해야지.

나: (말잇못) ………….

갑자기 뭔가 희망이 생기는 듯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한것이… 근데 이 나이에 대학원 가면 학생들이 어떻게 볼까. 아니 그 전에 붙여주긴 하려나. (먼산)

#그모든괴로움을또다시는좀

정각각흉각각

Posted by on Nov 2, 2018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사람관계에 대해 외할머니가 늘 하던 말이 있어.”
“어떤 말씀이셨는데요?”
“정각각흉각각이라고…”
“네 뭐요??”
“정.각.각. 흉.각.각.”
“정각각 흉각각이요?”
“응. 정은 정대로, 흉은 흉대로. 그래서 정 각각, 흉 각각.”
“아하. 정이랑 흉을 따로 생각하라는 뜻인가요?”
“그렇지. 사람이 오래 만나다 보면 흉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
“그렇죠.”
“근데 흉이 좀 생겼다고 그걸 가지고 정을 덮어버리면 사람을 못만난다고. 관계가 오래 못간다고. 그러니 정각각흉각각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지.”
“어떤 뜻인지 알 거 같아요. 정이랑 흉이랑 섞지 말라…”
“성경에도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이 있잖아. 생각해 보면 그거랑도 통하는 면도 있지.”
“좋은 말인 거 같긴 한데 그게 어디 쉬울까요. 마음에 안드는 일 하는 사람이면 솔직히 미워보이잖아요.”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그러니까 ‘정각각흉각각’이라는 게 더 필요한 거 같아.”
“관계에 있어서 답없고 끝없는 숙제인 것 같아요.”

외할머니의 ‘정각각흉각각’은 둘 사이에 ‘파티션’을 치는 일의 중요성을강조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면 정과 흉이 섞였을 때 늘상 정이 힘을 잃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의 밝은 면,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면만을 받아들여 왔던 것 같다.

물론 정을 지켜야 할 절대적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떠나보내야 할 때를 아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

다만 내가 좀더 단단한 그릇이 되어 누군가의 정도 흉도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의와 타협하는 일과 ‘정각각흉각각’을 분별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나 또한 누구못지 않은 흉 투성이의 인간이니 말이다.

#어머니와나

교사가 이론가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

Posted by on Oct 2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많은 사람들이 큰 이론이나 영향력 있는 모델을 만들고 싶어해요. 파급력이 큰 것들을 추구하죠. 하지만 이론이나 모델은 그 본성상 일반적일 수밖에 없어요. 고도화의 추상화를 특징으로 하니까요. 당연히 개개인의 삶에 가 닿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사의 역할은 이론가의 역할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어요. 이론에 기반해서 교육과정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교사를 통해 학생에게 전달되는데 결국 학생 하나하나가 경험하는 것은 교사와의 상호작용이거든요. 이론이 아니라요.

오늘 여러분들이 나누어 주셨듯이 다른 무엇보다도 선생님 때문에 영어를 좋아하게 되는 학생이 꽤 있어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학생이 만난 건 이론이 아니라 교수자입니다. 교사의 자세, 태도, 실력, 눈빛, 말투, 사람됨이죠. 이걸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나를 통해 교과라는 세계 전체를 만나게 되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을요.”

“외국어교육이라는 학문의 특성상 다른 언문화권에서 이론이 들어오는 일이 많죠. 그런데 이론이 수입될 때 보통 그 이론이 성장하고 뿌리박은 토양은 탈각되고 앙상한 개념들만 들어와요.

예를 들어 “의사소통중심 교수법(communicative language teaching)”은 미국과 캐나다의 토양에서 만들어진 이론인데 한국으로 왔죠. 주로 영어 원어민 화자들이 제2언어로서의 영어(ESL)를 가르치는 환경에서 발전된 이론인데 영어가 외국어(EFL)이자 주요 입시과목인 상황에 적용된 거죠. 아시다시피 많은 면에서 실패했어요.

뿌리박았던 토양을 잃은 나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사실 그래서 한국사회라는 토양에 서 특정 개념의 위상과 역할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에 기반해 실천할 사람이 필요한데, 이중 제일 중요한 게 교사라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 교사는 이론의 생사를 결정하는 존재라고 봐요. 교육이론의 완결성은 텍스트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증명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교사의 역할은 이론가 못지 않게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학생들의 영어학습사 발표를 들으면서 덧붙인 말입니다. 자신의 공부사를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나아가 앞으로 가르치게 될 학생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이론에 주눅들거나 매몰되지 않고 학생 한 사람 한 사람과 만나는 가운데 이론가 못지 않은 자부심을 갖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강사법 발의 단상

Posted by on Oct 18,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지난 주, 국회에서 강사법(시간강사 처우개선법)이 발의되었다. 일부 사립대의 심상찮은 움직임은 강사법 통과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로 읽힐 여지가 있다. 이들의 반기가 실행으로 옮겨질 경우 강사법이 통과되고도 강사들 사이의 격차가 커질 것이다. 빈자 중 일부는 조금 나은 빈자가 되고, 다수는 그 가진 것마저 몽땅 빼앗기는 상황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한편 교수노조와 민교협 정도를 제외하고는 강사법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교수들의 목소리를 듣기 힘들다. 교수들과 시간강사들의 삶이 겹치는 지점은 미미하기에 이런 ‘침묵’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적지 않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듯 각자의 삶이 평행으로 달리는 상황에서 ‘평행우주’를 살아가는 것이다.

강사법의 통과 여부, 이후 원만한 실행 여부를 떠나 대학의 교육기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긴 힘들 것이다. 문제의 핵심에는 시간강사들로 대표되는 비전임 교원의 열악한 처우와 지독한 불안정성이 있다. 한 학기가 시작되면 정신없이 달리다가 이내 방학과 다음 학기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삶, 매 학기마다 무작위로 주어지는 강의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게감 있는 연구나 깊은 통찰이 담긴 수업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부정적 영향은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식상한 표현일지 모르나 분명한 사실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가르치고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학이 가진 지적, 사회적 기능의 몰락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특별한 재주가 없어 당분간 대학에서 밥을 먹길 원하는 입장에서 이번 법안의 처리와 여러 대학의 대응은 이 바닥에 대한 나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이미 돈의 노예가 된 기관이라지만 돈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몇주 후 이 글을 돌아보면서 ‘별걸 다 기대했군’이라고 말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 예감이 틀리기를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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