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람의 이유

Posted by on Jun 10,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누군가의 행동에 놀란 경우, 대개 놀라움의 원인은 상대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구축한 편견이다. 데이터 없는 직관과 메타인지능력의 부족은 잦은 놀람을 수반한다.

#반성중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어머니와 나, 한겨레 인터뷰

Posted by on May 24, 2018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한겨레의 강성만 선임기자님과 나눈 대화가 <짬> 코너의 도서 관련 인터뷰 기사로 실렸습니다. 교보의 5월의 책 선정도 그랬지만 이번 인터뷰도 책의 내용을 보시고 연락을 주셔서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한 시간 반을 쉼없이 떠들었는데, 강성만 기자님께서 차분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생각보다 큰 지면을 허락해 주셔서 적잖이 놀랐네요.

기사 중에서 저는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

“올해 6년차 비정규직인 아들에게 건네는 따스한 충고는 비슷한 온기의 답과 만난다. “지금 먹고사는 것만도 감사하지. 물론 네가 정규직이 되면 좋겠지만, 지금 고생하는 거 잊지 말아라. 잊으면 고생한 게 의미가 없잖아.”(어머니) “고마워요. 고생이랄 것도 없지만 잊지 않겠습니다.”(아들)”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요. ‘소통’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습니다. 어머니와 자식, 대화, 소통, 이해, 세대간의 관계 등등이 키워드였죠.

강기자님: 그래서 어떻게 해야 소통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나: 음…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잘 모르겠구요. 제가 관심을 갖는 말의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말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의 말도 상대의 말도 무겁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이 대화는 서로의 삶의 역사 속에서 빙산의 일각처럼 작디 작은 것이라는 것, 말을 통해 상대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충되는 듯하지만 두 가지 모두를 염두에 두고 대화하는 사람들이어야 소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음…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잘라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

#어머니와나 #인터뷰 #한겨레 #짬

http://v.media.daum.net/v/20180522183616705?f=m&rcmd=rn

33308670_2135888203118845_4959908686748188672_nhttp://i2.wp.com/writinglife.kr/wp/wp-content/uploads/2018/05/33308670_2135888203118845_4959908686748188672_n.jpg?resize=768%2C690 768w, http://i2.wp.com/writinglife.kr/wp/wp-content/uploads/2018/05/33308670_2135888203118845_4959908686748188672_n.jpg?resize=1024%2C920 1024w” sizes=”(max-width: 1024px) 100vw, 1024px” />

이어폰과 인생

Posted by on May 22,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어쩌다 짬이 난다. 음악을 고른다. 이어폰을 꺼낸다. 풀 수 없을 만큼 엉켜 있다. 낑낑대며 푸는데 반격이 만만찮다. 그렇게 쉽개 풀리면 내가 이어폰이 아니지, 하는 것만 같다. 줄은 유연한 무생물이지만 이어폰은 굽힐 줄 모르는 짐승이다. 허나 시간은 나의 편이지. 후훗. 마지막 매듭이 풀린다. 아뿔싸 또 다른 일이 터진다. 이어폰은 다시 주머니 속 깊고 어두운 곳으로 유배된다. 일에 열중한다. 이어폰은 다시 광속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일이 끝나고 다시 이어폰을 꺼낼 때 쯤이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문제를 푸는 동안 줄은 꼬인다. 줄을 푸는 동안 문제는 다가온다. 음악은 결코 전화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삶의 작동방식일지도 모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함께 기억하기, 우리의 말을 만들어가기

Posted by on May 12,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금요일 오후, 1년 만에 한 학생을 만났다. 여름 졸업 예정으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그는 수업이 없는데도 나를 만나러 학교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읽으시면 많이 웃으실 거예요. 그리고 제가 두 페이지나 썼어요!”라며 편지를 건넸다. 나는 편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내내 웃고 있었다.

돌아와 책상에 앉아 편지를 읽어내려가다가, 한해 전 <언어와 사고> 수업에서 내가 했다는 이야기와 마주쳤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듯이, 자기 인생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안다고 뽐내지 말고 나그네처럼 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저도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려고요!!”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 아마도 앎과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꺼낸 이야기이리라. 그의 글을 통해 돌아온 말은 이제 ‘나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말’로 기억될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으로 수업을 경청하던 그가 진학에 성공해 멋진 교사로 성장하기를, 나그네 된 선생들로 만나 또 다른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

쌓여가는 책

Posted by on Apr 28, 2018 in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읽을 책이 쌓여간다”고 말하지만

“안읽을 책이 쌓여간다”가 중단기 데이터를,

“버릴 책이 쌓여간다”가 중장기 데이터를 좀더 잘 반영한 진술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조삼모사

Posted by on Apr 20, 2018 in 일상 | No Comments

조삼모사(?) 혹은 줬다 뺐기(?) 3단계

1. 단기

단체로 한 식당에 갔는데 음식이 너무 맛있고 푸짐해서 하나를 더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엔 양이 확 줄어서 나오더군요.

일행 중 하나: 아, 아깐 이거보다 엄청 더 주셨던 거 같은데요.
주인: 아, 아까 저희가 잘못해서 2인분을 드렸어요.
일행: ……………

2. 중기

개교기념일 전체 휴강 공지 메일을 읽는다.
하루 더 쉴 수 있다니 너무 좋다!
맨 아래 보강 안내 공문이 첨부되어 있다.

3. 장기

(미국의) 서머타임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속좁은 사람의 잡담 몇 개

Posted by on Mar 26, 2018 in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종종 타임라인에 공유되는 ‘명언’ 중에 “Great minds discuss ideas;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small minds discuss people. (위대한 사람들은 사상을 논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이야기하며, 작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라는 Eleanor Roosevelt의 말이 있다. 원문을 확인해 보지 않아 이 문장이 나온 정확한 맥락은 모르지만, 날이 갈수록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이야말로 사람들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려는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없는 사상’ 보다는,’사상 없는 사람’의 편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런 양극단이 존재할리 없겠지만, 굳이 고르라면 말이다.)

2. <위플래시>의 플레처 교수의 훈육법에 대해 ‘저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술가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해’라며 동의하는 분들이 있다. 플레처 같은 선생이 없으면 한계를 뛰어넘는 예술가가 어찌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앤드류의 신들린 연주 장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플레쳐의 옛 제자 케이시를 보았다. 통쾌하지만 슬펐고, 아름답지만 무서웠다. 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을 보고 싶어 하는가? 그렇게 태어나는 ‘천재’의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나? 한계를 뛰어넘은 예술은 한계를 넘지 못한 이들의 아픔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3. 돌아보면 남에게 모질지 못했던 만큼, 목숨걸고 어떤 대상에 진력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배움은 언제나 애매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영어도, 사진도, 음악도, 글씨도, 심지어는 전공이랍시고 한 응용언어학까지 말이다. 이런 얄팍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계에 도전하지 못했던 나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4.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살아온 나를 지탱해 준 것은 늘 사람, 사람이었다. (남들에겐 별것 아닐지 몰라도) 두어 차례 큰 고비가 있었고, 그때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도움의 손길들이 큰 사상에 기대있었는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날 버티게 한 힘은 약속도 댓가도 없는 함께함의 가치를 알았고, 무엇이든 쪼개어 주길 좋아했으며, 사소한 다침으로 마음을 닫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거창한 아이디어(ideas)를 좇았다기 보다는 못나디 못난 인간(people)을 받아주고 견뎌낸 친구들이었다.

5. 적어도 내게 위대한 영혼은 사람들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속좁은 나에게 위대함은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있는 가치다.

==

2015년 오늘 쓴 글을 다시 읽는다. 사상과 이론을 공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닮으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속은 좁은 것 같다.

탄핵 1주년

Posted by on Mar 10, 2018 in Uncategorized, 단상, 일상 | No Comments

새벽까지 일하다가 천근만근 몸을 뉘였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꿈속에서도 전에 일했던 직장들을 전전하며 또 일했다. 퇴근 후 광장에 나가 “이제 다시 시작이다!”를 외쳤다. 잠에서 깨어나 어제 보내기로 해놓고 까맣게 잊은 자잘한 서류들이 생각났다. 딱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몸상태로 너무 오래 달려왔다. 쉬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내일 오전에 있다.

나는 수업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힐끔거리며 핸드폰을 본다. 한 학생과 눈이 마주친다. “그냥 궁금해서요.”라며 씨익 웃는다. 삽시간에 교실 전체가 들썩거린다.

“잠깐 쉬었다가 하죠.”

복도로 나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눈물을 흘린다.

수업 후반부가 시작된다. 나는 힘주어 말한다.

“오늘 수업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2017.3.9.

탄핵심판 하루 전 썼던 글. 한 해가 지났고, 그간 큰 변화가 있었지만 하루하루의 일상은 여전하다.

누가 누구를 높이거나 숭앙崇仰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에게 박수쳐 줄 수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몇몇 사람들이 삶을 통째로 갈아넣어야만,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써야만 가능한 변화 따위는 없는 세상이 오길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언제나 그랬다.

미투논쟁 단상

Posted by on Feb 26,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단상 (대부분 저를 위한 리마인더입니다.)

하나. 말의 무게를 모르는 언론, 삶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하는 정치. 그들은 ‘소통’하고 ‘상생’합니다.

둘. 삶이 아무리 무거워도 말을 정성스레 고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타인의 삶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 속에서 체화했기 때문입니다.

셋. 가끔은 “정말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가 가장 적절한 말입니다. 슬픔과 고통에 반응하기 위해 강력한 수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곁에 서는 것으로 족하지요.

넷. 진영권력을 전복하려는 결단을 다시 진영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여야 합니다. 진영을 해체하여 모두의 일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다섯. 여전히 타임라인의 ‘논쟁’에는 남성의 목소리가 압도적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여섯. 누군가의 의견을 ‘몇 살 짜리의 능력’으로 폄하하는 것은 자신의 미숙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세상을 훌륭하게 읽어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은 많습니다.

일곱. 수천 년 스케일의 싸움과 수십 년 스케일의 싸움이 겹쳐 보입니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의 틀 안에 수천 년을 가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 ‘잘 읽어낸다’는 건 무슨 의미일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유사공정(類似公正, pseudo-fairness)

Posted by on Feb 12,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공정’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많다. 공정을 따옴표 안에 넣은 것은 단어를 인용한다는 뜻과 함께 공정이 아닌 것이 공정이라 불린다는 뜻도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정’이 가장 언급되는 경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의에서인 듯하다. 비정규직 공무원, 인천공항 노동자, 비정규직 교사 등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이다.

(최근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글이 다루려는 주제는 아니다. 언급한 ‘공정’의 대표적 용례는 아래 기사 참조.)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려다 취준생 기회 박탈… 이게 공정한 나라냐” (한국경제)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21118271

난 이 기사의 제목이 우리사회의 ‘유사공정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다소 이상적이라고 불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공정’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개념이다. 노동자 전체, 나아가 모든 시민을 포괄하는 공정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의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는 공정은 필연적으로 ‘강요하는 자’와 ‘강요받는 자’라는 불공정한 위계구조를 생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논의는 공정의 적용 대상을 취준생과 비정규직으로 손쉽게 규정한다.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려다 취준생 기회 박탈… 이게 공정한 나라냐”에서 공정의 잣대 아래 놓이는 집단은 취업준비생과 비정규직 뿐이다. 정규직은 어디 있는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이들은 어디 있는가?

특정한 집단–위의 경우에는 노동(가능)계층에서 약자 집단–만을 문제삼는 ‘공정성’ 논의는 공정의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정규직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공정함이 과연 ‘공정함’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정규직이 공정 논의에서 열외일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정규직 공채(시험) 통과 여부’이다. 이 외엔 그 어떤 기준도 없다. 과거에는 소위 ‘좋은 대학’에 가서 한 평생 덕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젠 ‘시험에 통과했으니’ 공정함의 기준을 모두 만족시켰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가 이들과 같이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다수가 ‘공정 열외 패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공정은 유사공정(類似公正, pseudo-fairness)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묻고 싶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공정함은 얼마나 공정한가?
그것을 ‘공정’이라 부를 수 있는가?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