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장관 후보자 논쟁, 그리고 ‘우리들의’ 박탈감

Posted by on Aug 21,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후보에 대한 찬반이야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같은 의견을 가질 수 없고 기대하는 바도 다르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깊이 우려스러운 것은 ‘박탈감’이라는 감정을 가벼이 여기는 목소리입니다. 저는 정치가 다루어야 할 가장 근원적인 정서가 억울함이나 박탈감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많은 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되새김되는 감정입니다. 시도때도 없이 울컥울컥 올라와 일상을 흐트러뜨리기도 하죠. 그렇기에 결코 자기존재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정서를 ‘계도의 대상’이나 ‘잘못된 감정’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정치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임과 동시에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없다고 할 수 없고, 뼛속 깊이 느껴지는 바를 그릇되다 다그칠 수 없습니다. 터져나오는 울분에 대해 ‘뭘 모르니까’, ‘뭐 그딴 걸 가지고’와 같은 식의 반응은 자제했으면 합니다. 무시되는 박탈감은 종종 냉소와 적대로 전화됩니다. 후보자를 지지하건 그렇지 않건 이런 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후보 수락연설문의 백미를 기억합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치열한 논쟁 속에서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나이브한 바람이지만 이 논쟁 속에서 억울함과 박탈감이 증폭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좀더 따뜻하게 싸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순삭’의 현상학

Posted by on Aug 13,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유튜브에서의 ‘하루 순삭’ 경험은 사람들에게 어떤 지식과 감정을 갖게 하는가? 그것은 텍스트를 읽으며 밤을 새는 경험과 다른가? ‘순삭’은 또 다른 ‘순삭’을 부르는가? ‘킨들 언리미티드’와 같은 전자책 서비스에서는 유튜브의 ‘순삭’ 경험과 비슷한 현상이 발견되는가? 텍스트와 영상에서 ‘순삭’ 경험은 어떻게 촉발되고 유지되며 평가되는가? 웹툰과 웹소설의 경우는 어떠한가?

#삶을위한리터러시

생각의 발효작용

Posted by on Aug 12,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삶을위한리터러시

아침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포스트를 ‘발굴’해 보니 그야말로 쪼가리 지식과 단상 수준의 쪽글이 150여 쪽. 누군가는 목차를 쓰고 그걸 채워가면서 긴 글을 쓴다고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공부하고 고민한 것을 이리 저리 던져두었다가 모으고 정리하고 잘라내고 덧붙이고 다듬는 방식을 선호한다. (‘선호’한다고 하니 무슨 대안이라도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거 없다.) 깔끔한 정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 겨우 살아남는 방식이랄까. 한 가지 재미난 것이 있다면 글이 기억이 되어 머리속에 남아 있다가 다른 글과 뒤죽박죽 섞인 후, ‘발효’와 같은 아이디어의 화학작용을 일으켜 나름 새로운 맛의 생각을 지어낸다는 것. 남들에게도 맛난 음식이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

First Chapters

“고대 이집트의 미로는 인터넷과 스트리밍 기술 위에 수많은 덕후들의 피땀으로 지어진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재림했다. 한번 빠져들면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다는 이 지옥의 이름은 유투부(類鬪涪)다.” – 언젠가 날렸던 트윗.

이리저리 옮겨가며 유튜브 영상 시청하듯 책을 봤으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으리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밤. 어쩌면 긴 글을 읽어내는 능력과 함께 관련 텍스트를 종횡무진 읽어내는 능력 또한 신장시키는 독서교육이 생겨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덧. 여전히 ‘First Chapters'(여러 저작의 서문 낭독모임)를 운영해볼 계획이 있다. 리터러시와 관련된 저서의 서문을 낭독하고 모든 참여자들이 원하는 경우 책 전체를 독서토론으로 진행하는 모임이다. 서울지역 모임의 이름은 FC Seoul… (먼산)

#삶을위한리터러시 #성우야너는계획만다있구나

Can I know you more?

Posted by on Aug 7,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영어, 일상 | No Comments

99.999% 페이크 계정으로 보이는 한 미국 유명대학의 ‘교수’가 LinkedIn 메신저로 난데없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다짜고짜 하는 말이 가관이다.

“Can I know you more?”

읽는데 왜 이렇게 웃긴지. 어이없게 만들어서 썸타자는 전략인가. (사실 여러 번 소리내어 읽어보기까지 했…) “Nope. You can’t.”라고 답장 보내려다가 참았다. ^^

응용문제) 다음 중 알맞은 답을 고르시오.

“Can I know you more?”

a. Nope. You can’t.
b. Know yourself first.
c. You cannot know me enough.
d. Would you please define the meaning of “knowing someone” first so that I can properly address your question?
e. None of the above.

토니 모리슨 강연에 다녀와서

2010년 4월 토니 모리슨 강연에 다녀와서 쓴 글 (정확한 단어 대 단어 번역은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오늘 모리슨의 강연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말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좋은 것/좋지 않은 것, 혹은 선한 것/악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악한 것 the evil 은 많은 치장을 필요로 한다. 더 많은 모자와, 신발과, 옷과 밴드를 필요로 한다. 더러운 것들은 속이려고 많은 것들을 입고 나온다.

그러나 악한 것은 아무리 치장을 해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악한 것은 더 많은 피와 희생을 요구한다. 이것들은 정말 단순하다.

하지만 진정 좋은 것, 선한 것은 복잡하다. 그것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수많은 영역에 존재하며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허나 좋은 것은 추구할 수 있는 영역이 무궁무진하다. 다양하다. 나의 문학은 이것(복잡하지만 좋은 것)을 추구해 왔다.”

그 외에도 기억나는 대목들이 많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다양한 독서를 했다.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고, 책을 따라서 대학에 갔다.”

“얼마 전에 내셔널 바이오그래피인가 그런 단체에서 나의 정보를 게재한 바 있는데 틀린 게 엄청 많더라. 근데 나는 제대로 고치질 않았다. 그냥 그 정보들이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적어도 잘못된 정보가 정확한 정보보다 훨씬 흥미롭잖아 (응?)”

“웹의 잘못된 정보의 예는 수없이 많다. 나부터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쓴 블로그 포스팅을 본다. (잠시 침묵) 도대체 이 이야기는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일동 폭소)”

“웹이라는 공간은 양날의 검이다. 지식과 정보가 마구 쏟아지고 전달되지만 잘못된 정보, 그릇된 ‘지혜’ 또한 양산된다. 하지만 나는 그 공간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자정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쓸 때는 나와 나, 나와 캐릭터만 존재한다. 거기는 누가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난 그 공간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 공간에서 누리는 자유가 있다. 남들이 하라는 것은 흥미롭지 않다.”

“지식과 지혜의 구분은 어렵다. 나도 그게 정확히 딱 구분되진 않는다. 그러나 지혜의 싹은 “실패에 대한 연구, 실패와 성공을 동시에 보는 것”에서 자라난다. 성공만 보는 것, 그것은 흥미롭지도 않고 지혜를 낳을 수도 없다.”

“시민 citizen 의 영역과 외래인 foreigner 의 영역의 구분은 없다. 우리 모두는 시민이면서 외래인이며 때로 “국내의 적” domestic enemy 이다. 흑인은 수백년 거주로 인해 이곳의 시민이면서 여전히 ‘그들의 적’이다.”

어떤 질문자가 “모리슨 작가님 킨들에는 무슨 책이 들어있느지요?” 바로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내 책들이 들어 있죠.” 좌중 폭소. 이번 5월에 아들이 사줄 iPad로 책을 읽을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고. ㅎㅎㅎ

이어서 예술가로 보이는 사람이 눈물로 질문을 했다. “작가님은 ‘변방’ edge 에서 일하고 살아간다고 하셨는데, 그 어려움, 눈물, 외로움을 어떻게 이기셨는지요.” 토니 모리슨 “내게 변방은 자유다. 그곳이 가장 자유롭다. 사실 우리는 모두 변방, 주변에 산다. 메인 스트림과 변방이라는 구분은 없다. 모두 엣지에 산다. 다만 어떤 이는 엣지를 넘나들고, 어떤 이는 엣지에 머무리며, 어떤이는 엣지에서 다른 사람들을 못 들어오도록 막고 서있다.”

어떤 학부생이 “졸업하고 뭐 할 지 모르는 인문학부생에게 해줄 말 없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가르치거나 쓰거나 자동차를 고치거나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다. 좀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라. 그리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라. 니가 만약 양배추면 더 나은 양배추가 되려 하는 거고, 토끼면 더 좋은 토끼가 되려 하는 거다. 니가 무슨 일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더 나은 인간이 되라. 그것을 평생 추구하라.”

강하고 섬세했으며 유머넘치고 거침없었던, 당황하지 않고 우기지 않으며 사람들 위에 서려고 하지도 않았던 모리슨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편히 쉬시길.

2019 하반기, 새로운 프로젝트

Posted by on Aug 6,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삶을 위한 영어공부> 집필 말미부터 #삶을위한리터러시 태그로 쪽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다음 프로젝트는 리터러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입니다.

2. 종종 ‘제2언어 리터러시 연구자’로 저를 소개합니다. 사회문화이론과 인지언어학을 기반으로 제2언어 리터러시 발달과 관련된 논문을 썼기 때문입니다. 대학원생들의 리터러시 발달을 개념메타포와 연결한 연구였지요.

3. 하지만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문해’의 만분의 일이 될까말까한 영역입니다. 영어로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 중에서 메타포가 하는 역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비중을 따지자면 문해라는 망망대해에 작은 섬 하나 정도 되려나요.

4. 사실 문해의 개념을 전반적으로 조망하는 책은 나오기 힘듭니다. 만약 나온다면 굉장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겠죠. 그렇기에 논점을 잡아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논점이 잡히면 바로 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5. 그래도 뭐든 해보려고 문해력에 대해 쓰기 위한 ‘메타 문해력’을 키우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6. 결정된 것은 없지만 대화를 통해 논점을 잡아가는 작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두렵지만 기대되는 협업입니다. 8월은 오롯이 이 작업에 집중하려 합니다. 그러고 나면 방학이 지나고 또다시 강의학기가 시작되겠죠.

7. 그간 몇몇 분이 문의하신 #영어로논문쓰기 는 별도의 프로젝트로 진행중입니다. 강의록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 완결된 프로젝트이지만 책으로 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더군요. 표현 모음집이 아니라 견실한 개념을 담은 안내서를 쓰고자 합니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문해와 관련된 작업이 모두 끝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8. 가끔 ‘문돌이’들과 만나면 신세한탄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기술을 배웠어야 했는데.”

요즘은 ‘할 줄 아는 건 좀 되는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고, 그나마도 다른 사람도 다 할 줄 아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어쩌겠습니까.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는 수밖에요.

무더운 하루이지만,
건강하고 시원하게 보내시길 빕니다.

질적연구자, 단상

질적연구와 관련된 강의를 들으며
연구자로서의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끈끈한 거리로 발을 딛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얄팍함’이었다.

이번 학기 강의를 걱정하고
불만 없는 성적처리를 고민하고
다음 학기 밥벌이를 위해
주판알을 튕기는 일상의 연속.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달려온 세월.

얄팍하다.
아무리 열심히 뛰었다 해도
얄팍한 건 얄팍한 것이다.

조금 다르게 사는 척하지만
결국 똑같이 살고 있구나.
나 자신에서 시작해서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말들을 짓고 있구나.
수없이 내뱉은 말들이
나의 경계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자는 논문이라는 성과로 말해야 한다’는 말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학자는 연구와 글쓰기의 과정에서
세계를 얼마나 바꿔냈느냐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은 논문의 인덱스가 아니라
내가 발딛은 삶과
연구 참여자가 발딛은 삶의
부대낌에서 느껴져야 하는 것 아닐까.

대학이 몰락하는 이유는
삶을 응시하고
세계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이목에 집착하고
제도가 인정하는 성과에 목매기 때문은 아닐까.

현장 선생님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던졌지만
다시 돌아와 보면 나의 현장은 뻥 뚫려 있는
어정쩡한 삶을 새삼 깨닫는 오늘.

‘삶을 위한’이라는 꾸밈말이
그저 꾸밈말에 그치지 않게.
함께 궁리하고 바꿔갈 수 있게.

삶을 텍스트 안에 가두지 않고,
텍스트로 삶을 확장할 수 있기를.
삶을 짓는 텍스트를 짜내려 갈 수 있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는 연구자이기를.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며 (2019)

“We suffer together. Therefore WE are.(우린 함께 고통받지요. 그래서 ‘우리’로 존재하는 거라고요)”

설치형 게시판에 글을 쌓아놓기 시작한 지 20여 년. 그간 만들었다 없앤 개인 웹사이트만도 대여섯 개가 되었다. ‘창작 지식노동자’의 정체성을 갖고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10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comprehensive exam’이라고 불렸던 논문자격 종합시험을 마치고 고민의 흔적을 남기고자 시작한 글쓰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느린 독자/필자라고 생각한다. 우선 읽기의 속도가 천문학적으로(?) 느리다. 성격이 고약해서인지 전공과 관련된 책을 대충 읽어내질 못한다. 게다가 읽기와 쓰기 모두에서 한국어와 영어 모두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렇다고 꼼꼼한 성격도 못된다. 유머마저 진지해서였던지 ‘절대반지’가 아닌 ‘절대진지’로 종종 불렸다. 글이 별 재미가 없다. 직업과 맞지 않는 특성을 두루두루 갖춘 것도 같다.

글쓰는 일이 업의 절반쯤 되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다.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는 분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나의 글은 다소 즉흥적이고 꽤나 무거운데다가 대개 뭉툭하다. 굳이 합리화를 하자면 나의 글은 전위에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기 보다는 조금 뒤쳐져 가면서 옆과 뒤를 살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인 듯하다. ‘커팅 에지(cutting edge)’가 베어낸 나무의 나이테를 세는 일처럼 말이다. 이 또한 나의 정신승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2012년 학위과정을 마치면서 아래 ‘글쓰기 훈련에서 배운 것’이라는 쪽글을 썼다. 타지에서의 삶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어디든 타지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이방인의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내 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논문을 쓰면서 한계에 자주 부딪쳤지만 변방과 경계의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글에서 만족을 느끼기 보다는 늘 모자란 글에서 슬픔어린 불만을 키웠다. 그 불만이 발효되면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허풍없는 태도가 우러났다. 그래서인지 종종 글쓰기를 가르치지만 ‘저처럼 쓰세요’라고 말하기 보다는 ‘We suffer together. Therefore WE are.(우린 함께 고통받지요. 그래서 ‘우리’로 존재하는 거라고요)’라고 말한다.

여전히 글은 힘들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만나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어 기쁘다. 7년 전 글을 읽으면서 글쓰기의 지난함과 설렘을 되새긴다. 내 논문의 감사인사는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Yes, I typed a dissertation. But we wrote it. (네 맞습니다. 논문을 타이핑한 건 접니다. 하지만 논문을 쓴 건 우리 모두 함께였습니다.)

<글쓰기 훈련에서 배운 것>

돌아보면 힘들었던 건 타지생활이 아니었다. 먹을 게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나날이었고, 밤낮도 주말도 없는 직장생활의 여유없음을 핑계로 방치했던 동네라는 공간을 다시 발견한 시기였고, 자주 홀로 걸으며 길과 하늘을 사진으로, 마음으로 담을 수 있었던 벅찬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사과정 내내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나를 괴롭혔던 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었다. 제2언어 리터러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쓰기에 대한 강의를 하고 학술논문 쓰기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도 자신의 글쓰기에 늘 신경이 쓰였다. 내가 가진 생각을 좀더 깊은 울림으로, 명확하고 생생하게, 아름답도록 아리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지만 여전히 영어는 “그들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배운 건 심오한 지식의 세계라기 보다는 글쓰는 사람으로 살아내야 할 일상, 글쓰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가다듬는 방법, 생각을 머금은 긴 산책으로 글길을 내는 일이었다.

조금 늦었지만 가파른 이론의 산을 오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있어보이는 암벽을 고르는 게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사고와 글쓰기의 통합”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쓰는 건 사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담긴 뜻을,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하루 하루 조금씩 엮어갈 수밖에 없다는 조언의 참뜻을 이제야 알 거 같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쓰기라는 베틀을 통해 생각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고, 엉킬 대로 엉킨 생각의 타래를 글줄로 뽑아내는 희열을 사모하게 되었다. 잘 다듬어진 글결이 보여주는 생각의 나이테에 감탄하게 되었고, 생각의 여정에서 남겨진 쪽글의 순진함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을 함께 써가는 사람들을 만나 아픔을 나눌 수 있었다. 글쓰기와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지만 계속 “차이는” 사람들, 그 쓰라림에 의연하지 못한 이들. 그래서 쓰기와 애증의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나같은, 가련한, 아름다운, 별것 없지만 또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 기쁘고 또 슬펐던 나날이었다. (2012. 8.)

7월의 마지막 밤에

Posted by on Jul 31, 2019 in 링크, 일상 | No Comments

끝, 시작, 그리고 끝 ending, beginning, and ending, again (모티프로 즉흥연주 & 믹싱. 2013년 11월. 사진은 아마도 2011년.)

바람에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번역 : 권정생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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