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의 속도와 삶의 속도

Posted by on Jan 10, 2018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죽도록 자기계발하기”
제목이 선정적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저녁과 주말 내내 아르바이트를 한다. 야근이 일상인 사람들도 많다. 그 와중에 끊임없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달린다. 잠깐 숨을 고를라 치면 앞서가는 사람들이 이만큼이다. 자신이 한심하다. 쉼은 도태다. 도태되면 혼자이고, 혼자는 외롭다. 빈곤과 외로움은 더이상 인생 말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멈추지 않는 트레드밀의 뒤는 낭떠러지다.

하지만 Alexandra Schwartz의 말처럼 “세상 따라가지 말고 너 자신이 되어라” 같은 조언은 불편하다. 우리를 몰아가는 것은 환경이고, 이를 그대로 놔두고 개인만 변하라는 것은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라는 요구 만큼이나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냐는 질문에 답할만한 지혜도 자격도 없다. 다만 속도의 문제에 대해서는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

정보는 엄청나게 증가한다. 기술은 숨가쁘게 발전한다. 지식의 양은 증가하고 전문성의 영역은 좁고 깊어진다. 휘몰아치는 변화다.

하지만 인간의 심장이 뛰는 속도는 일정하다. 인간이 감정을 처리하고 반응하는 속도도 일정하다. 의미있는 사회적 관계를 영위할 수 있는 지력과 사회적 능력 또한 폭발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요약하면 인간의 몸과 그에 의존하는 다양한 능력들은 진화의 속도를 따른다.

사회는 변화의 속도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속도에 대해 침묵한다. 호흡하고 소화하는 속도에 대해, 심장이 뛰고 걷는 속도에 대해, 세상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속도에 대해 모른척한다.

‘자기계발의 요구를 모두 거부할 수는 없겠지. 다만 그 가운데 더 근본적인 리듬을 잊지 말자.’고 읊조린다.

진짜 중요한 속도에 대한 감각이 절실하다. 성공이 아닌 삶에 대한 감각, 기술이 아닌 몸에 대한 감각 말이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8/01/15/improving-ourselves-to-death

그날이 오면

Posted by on Jan 1,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그날’은 오지도 안오지도 않아.

지금 살아있는 그리고 기억되는 우리 모두가

그날의 ‘1/n’일 뿐.

순간 순간 우리의 선택이

그날을 불러내기도, 거둬들이기도,

욕되게도 하지. — <1987>을 보고 나오며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Dec 30, 2017 in 강의노트, 일상 | No Comments

1. 강좌기획, 강의장 섭외, 연락 돌리기, 재정관리, 유인물 준비 등 모든 업무를 혼자 감당하려니 조금은 벅차다. 그래도 방학에 국한된 일이니 이렇게 가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2. 강좌에 못오시는 분은 미리 알려달라고 두 번이나 이야기했으나 결국 입금기한을 넘겨 의사를 표현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의사표현이라기 보다는 잠수에 가깝…) 한두 분이면 그러려니 할텐데 ㅠㅠ 왜 그러는지 답답하다.

3. 한 친구와 새로운 합동강의 포맷을 고민중이다. 일을 궁리할 때가 제일 재미있다. 시작하면 또 좌충우돌이겠지만. :)

4.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았다. 다른 일이 끼어들어서 그랬지만 이렇게 긴 학기는 처음이다. 내일 성적처리를 마치고 바로 논문쓰기 강좌 준비에 돌입해야 한다.

5. 방학[放學] 학교를 놓음. 즉, 학교 밖에서 일함. ^^

6. 채점의 무료함을 도저히 이기지 못해 넷플릭스에서 <맨헌트: 유나바머>를 봤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작품을 즐기시는 분들께 추천한다. 전편에 법언어학(forensic linguistics) 이야기가 나오므로 언어와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은 더더욱 재미있게 보실 듯하다.

기말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Dec 14, 2017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일상 | No Comments

일상스케치

1. “선생님하고 편하게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수업보다 더 좋은 거 같아요.” – 이거 칭찬인듯 하면서 칭찬 아니다. (유사품으로 페이스북에 인물사진 잔뜩 올린 사람에게 ‘실물이 훨 나으세요.’ 시전하기가 있다.)

2. 어쩌다 보니 글쓰기와 멀지 않은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이 바닥에서는 출판(publication)이 최고의 (교환)가치를 지닌다. 공적 영역에서 전문가들에게 인정받는 글이기 때문이다.

반대쪽에는 사라져가는 편지가 있다. 삶을 나누고 시대를 함께 앓으며 치유할 수 없는 상처에 입맞추는 글. 논리와 어리석음이 교차하고 실없음과 시시함이 껴안고 뒹굴어도 괜찮은 글. 사람들, 그 중에서도 사람 둘 사이의 글.

요 며칠 예전 동료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광장이 아니라 마음을 향하는 글의 힘과 향기를 새삼 느낀다.

3. 학기 후반,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도 볼 틈 없이 바빴다. 내일이면 학기가 끝나고 채점과 성적처리만 남는다. 1월부터는 또 정신없이 움직일 것 같아서 12월 하순을 최대한 비웠으나, 집채만한 일덩이 하나가 쿵 하고 떨어졌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방학이라기 보다는 유연근무제 시행기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4. 약속을 잡고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분주함은 기다림의 설렘을 앗아간다. 덜 바쁘면 더 많은 일을 해내고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징후이다.

5. 2017년 2학기는 다시 쓰기 시작한 시기로 기억될 것 같다. 학위논문 집필 후 가장 많은 분량을 써냈다. 그래봐야 남들에 비하면 얼마 안되지만 다시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내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고 싶달까. 책을 궁리하고 함께쓰기를 계획한다. 전에 이야기했던 First Chapters도 시작해 볼까.

강사법, 네 번째 유예

Posted by on Dec 6,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시간강사법이 또다시 유예되었다. 벌써 네 번째다. 통과가 되었어도 심각한 문제가 파생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 교육부나 국회가 이 문제에 대해 ‘립서비스’만 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당사자들간의 의견 불일치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강사들의 교원지위 획득 가능성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강사법의 탄생에는 서정민 (2010년 당시 45세) 박사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너무 쉽게 잊혀지고 결심은 너무 쉽게 무너진다. 그가 대학에 대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랬다.

“한국의 대학 사회가 증오스럽습니다.”

독서모임 First Chapters

Posted by on Dec 3,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런 이름을 가진 영어 독서 모임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책 한 권을 모두 읽고 와서 생각을 나누는 방식도 좋지만 저처럼 이책 저책 유랑하길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책의 첫 장 혹은 서문을 꼼꼼히 함께 읽고 나머지를 읽을지는 각자가 결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겁니다. 책읽기를 제안한 사람은 저자에 대해 대략의 정보를 준비해 오구요. 대개의 책들은 첫 장만 꼼꼼히 읽어도 저자의 집필 의도와 책 전체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독서모임 포맷입니다.

넵, 기말입니다.
딴생각이 화수분처럼 샘솟는 계절이죠.

함께 고생하는 분들,
온갖 딴생각들과 동행하며
넉넉히 살아남으시길 빕니다. :)

‘운칠기삼(運七技三)’ 단상

Posted by on Nov 24,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운과 기를 나누는 것이 마치 본성과 양육을 나누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네가 지금 쓰는 글은 너의 유전자 45, 사회문화적 요인 55로 설명 가능해’라고 하면 그저 우습지 않겠는가? 하지만 운과 기의 비율을 굳이 나누어 보라 한다면 ‘운9999에 기1 정도 아닐까’,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룬 이들의 노고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운의 작용이 아무리 크다 해도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인 1을 이루기 위해 쏟는 피땀은 소중하고 본질적이며 당사자에겐 그 무엇보다 거대하고 뜨겁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약하고 미약할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일만 분의 일에 불과하다 하여 가벼이 여기지 않고 싶다.

나아가 나에게 허락된 9999의 좋은 운들을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되길, 누군가에게 허락된 9999의 운이 나에게도 허락될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9999에 대한 불만과 좌절, 걱정과 비난으로 삶을 소진하지 않고,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만 충실히 갈고 닦아도 살만한 사회가 되기를 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현실과 위안

Posted by on Nov 17,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 바닥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황당한 일을 이틀 연속 접하고 당했다. 애시당초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존엄을 잃지 않으며 자리를 지켜내고 계신 분들에 대해 더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함께 돈을 아주 많이 벌면 배움도 뜻도 깊은 시간강사들,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른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를 하나 해보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만,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학교일 필요는 없다, 마음이 모인다면. 그렇게 되도 않는 이야기로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다. 그걸로 족하다.

국가에 대한 예의

Posted by on Nov 12, 2017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죽인 사람들 편을 들죠?”

강기훈씨의 <카바티나>를 배경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말이 흐른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다 자신을 던진 이들의 얼굴들과 만난다. 그의 연주는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몸부림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제스처도 아니다. 바흐의 음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한 청년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아름다움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증거일 뿐.

그의 삶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기타는 고요히 운다. 관객들도 따라서 숨죽여 운다. 이해할 수 없어, 가 닿을 길 없어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는 삶이, 죽음이 있다.

강기훈씨의 연주가 뒤로 숨는 동안 사라진 이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살아남은 이들과 만난다. 권력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은 앞으로 나서려 다른 목숨을 짓밟았다. 대법원 무죄판결 이후에도 여전히 강기훈의 유죄를 확신한다는 이들은 시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높이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삶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강기훈씨가 말하는 ‘시시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알 턱 없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고, 권력을 잡는다.

사운드트랙을 들을 수 없어 대신 Kindgren을 찾는다. 강기훈씨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예의>는 서울 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 부분에 출품되었으며, 자세한 사항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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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한 예의 | 감독 권경원 | 2017 | Documentary | Color+B&W | DCP | 90min 54sec

시놉시스
1991년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던 11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모든 죽음의 책임을 스물일곱의 강기훈에게 전가했다.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을 방조했다는 사법사상 유일무이한 혐의였다. 최종 무죄가 선고된 것은 24년이 흘러서였다. 진범은 국가였음이 밝혀지던 순간 그는 간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스무 해를 넘도록 되풀이해야 했던 말들을 멈추고, 기타를 들었다. 그리고 1991..

출연 강기훈, 강은옥, 고상만, 권혜진, 김구일, 김선택, 김진숙, 박홍순, 송상교, 송소연, 염규홍, 이보은, 이부영, 이석태, 이옥자, 정현아, 채수진, 최은희, 최재인

영화 홈페이지: http://www.siff.or.kr/siff/program/mov_view.php?mov_idx=1859&fes_idx=36&cate_idx=34087&gubun_idx=&sec_idx=&sch_word=&size=10&page=3

학기 중반 잡감

Posted by on Oct 8,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어느 정도 다르다고 판단되는 두 학교에서 몇 학기를 가르치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OOO라는 영화 보신 분 있어요?”라는 질문에 손을 드는 학생의 비율이 확연하게 차이난다는 점이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샘플의 수도 작기에 전체 구성원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질문을 할 때마다 확인했던 차이가 마음에 계속 걸린다. 서울의 두 학교에서 이정도 차이가 난다면 다른 지역과는 더 큰 격차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영화, 문학, 과학에 대한 지식을 비롯한 문화적 경험은 개인의 성장은 물론 교수학습에 있어 큰 자산인데, 이 부분에서의 격차는 학교가 해결할 수가 없다. 부모의 문화자본, 상징자본의 차이는 자녀의 ‘교양’의 차이로 이어지고, 이는 바로 교육성취의 격차를 낳는다. 너무 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제도교육 내에서는 이게 대세라는 걸 부인하긴 힘들다.

한편 가르치는 입장에서 학생들의 삶에 자연스레 접속할 수 있는 방식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날것 그대로의 경험을 토대로 함께 교육적 대안을 탐색하는 기획은 리스크가 크다. 개개인의 경험 들어보는 시간이 몇몇 학생들에겐 ‘시간낭비’이며, 함께 답을 찾아보자는 제안은 종종 ‘전문성의 부재’로 읽힌다는 것을 알기에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수업에서 작은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학생들의 반응은 갈릴 것이다. 못난 민감함 때문에 절대 무덤덤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해보고 싶은 걸 해봐야지, 언제까지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마음이 더 크다.

학기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초반의 긴장감을 잃지 않고 수업 전체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밀려온다. 이 고민은 오래 가르친다고 사라지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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