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마이너

Posted by on May 14,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오늘 받은 재난지원금을 <비마이너>에 보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들 하지만 오늘은 과감히 다른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어찌 보면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많은 분들에게 <비마이너>가 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글을 씁니다.

저의 비마이너에 대한 짧은 생각을 아래 옮겨놓습니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언론 지형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한경한(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을 보는 것으로 시각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이 사회에 대해 가장 많은 통찰력을 주는 것은 〈비마이너〉같은 매체가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비장애인으로서 보는 세계에 대해 머리를 쾅 치는 기사들이 종종 올라와요. 그럴 때 가슴이 떨리고, 제 좁았던 시야를 돌아보게 되죠. 장애인과 장애학의 관점에서 본 세계는 내가 지금까지 봤던 세계와 완전히 다르구나, 내가 뭘 몰랐구나 하는 걸 드러내줘요. 리터러시의 발달에서 기존의 지식을 충실하게 잘 섭렵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비마이너〉와 같이 그동안의 리터러시의 주류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관점에 끊임없이 열려 있도록 만드는 매체도 반드시 필요하죠. 그런 면에서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의 시각,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의 이해, 이와 관련된 실천이 리터러시 교육이 나아가야 할 주요한 방향 중 하나라고 봅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중에서)

제가 너무나 좁은 시야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잘 압니다. 교육을 한다 말하고 문해와 리터러시에 대해 떠들지만 실상은 먹고사니즘의 핑계 속에서 이제껏 쌓은 관계 안에 안주하며 세상을 볼 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세상’일 지는 모르지만 온전한 세계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어리석고 좁은 세상을 깨뜨려 주는 분들이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분들로 인해 제 어둔 마음이 밝아지고 세계는 변화합니다. 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흔들리더라도 함께 걸어갑니다.

아래 <비마이너>의 주소를 남깁니다. 비마이너를 읽고, 느끼고, 궁리하고, 알려주세요. 때로는 분노하고 연대해 주세요. “C메이저”로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세상을 보게 해주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얼굴을 오롯이 마주하게 하는 “B마이너”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장애인의 주홍글씨, 비마이너
https://beminor.com/

삶을 위한 리터러시, 강의 궁리중

<영어로 논문쓰기>를 완성도 있게 다듬고 대중적인 강의로 안착시키는 데 두 해 정도가 걸렸습니다.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문서화된 내용이 꽤 있으니 한 해 정도면 쓸만한 강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북토크 등의 기회를 통해 여러 분들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구체화시켜 볼까 합니다.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와 ‘유튜브 세대’ 자신의 이야기, 교사 등 그들과 자주 소통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배울 것도 많네요. 감사한 일입니다.

음모론의 발달 단계 – 한 가지 예

Posted by on May 6,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2. 열받는다. 가까운 이들에게 열받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3. 다같이 열받는다.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성토한다. 4. 여기엔 분명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 왜냐고? 이렇게 여러 사람이 열받았잖아!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는 사람들까지 음모론에 넘어가는 걸 보면 (1)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2) 부족주의적 사고가 지식과 경험 따위는 우습게 박살내거나 (3) 튀고 싶은 욕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욕망을 채운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팬덤에 합류한 이들은 비판자들을 ‘불만충’ 취급한다. 자기가 믿었던 것과 반대의 진실이 드러나도 자기는 훌쩍 ‘커’ 있다. 이 정도면 수지맞는 장사 아닌가?

사실이 의견보다 중요함을 넘어 사실이 욕망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겨야 할 시대 아닌가 싶다.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 만큼 부족을 규합해 우월함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져도 괜찮다’, ‘소수여도 괜찮다’, ‘나 자신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감각 아닐까. 논리와 과학이 필요한 만큼 무너지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성역없는 수사’ 등 단상

Posted by on May 5, 2020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성역없는 수사를 약속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이 사회에 여전히 성역이 존재함을 말해준다. “수사하겠다”가 “성역없이 수사하겠다”와 같은 뜻이 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그러고 보면 과한 결심이 필요치 않은 담백한 사회가 좀더 잘 굴러가는 사회일지 모르겠다.

2. “성역”은 성스러운 곳이기에 수사기관의 영향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수사의 관점에서 보면 ‘성역’은 성스러움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냥 범죄자들의 활동영역이다. “성역”이 남아있다면 성스러운 곳이 남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묵인한다는 뜻이 된다.

3. 이제 국민의 세금은 왠만하면 “혈세”라고 표현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 힘들게 노동하는 유리지갑들이 내는 세금과 부동산과 임대수익을 주수입원으로 하는 이들이 내는 세금이 똑같은 혈세인가. 잘 모르겠다.

4. 얼마간 ‘확찐자’ 말장난이 유행했다. 아무런 악의 없는 농담이었고 그 말을 쓰는 분들에 대해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확진자로서 그런 글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면 마음이 개운하진 않았다.

5.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 언론을 통해 사과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사과드린다”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진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이때는 ‘고개숙여 사과한다’라는 말이 진심을 담은 말이 아니라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6. 새로운 책을 <유튭책집>이나 <유책집>으로 부르는 독자들을 여럿 보았다. 경제적인 명칭이긴 하나 입에 붙지는 않는다. 특히 후자의 줄임말은 왠지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7. ‘번번히 발목을 잡는다’, ‘발목이 잡혔다’는 표현을 볼 때마다 실제로 발목 잡혀본 경험이 있는 인구 비율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진다. 코미디에서 이걸 실사로 구현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먼산)

8. ‘넌 이제 아웃(out)이야’라고 말하며 점퍼를 옷장 안(in)에 던져넣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힘내요’ 버튼 단상

Posted by on May 1,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코로나-19 사태에서 마스크가 오프라인의 초강력 재화로 떠올랐다면, 적어도 오늘 페북 최고의 재화는 ‘힘내요’ 버튼이군요. 힘내요를 지닌 이는 힘이 나고 그렇지 못한 이는 박탈감을 느끼는 모순. ‘힘내요’ 버튼이 없으면 상대에게 힘내라 말할 수도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비극. 부익부빈익빈은 오프 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렇게 반응이 뜨거운 걸 보니 페북이 ‘커스텀 버튼’ 장사를 한다면 큰 돈을 벌지도 모르겠어요. ‘아재개그가 싫어요’, ‘휴, 이걸 진짜 다 읽었어요’, ‘한번 더 이러면 블락이예요’, ‘평소 글은 진짜 별로인데 이 글은 좋네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우쭈쭈’, ‘투쟁투쟁투쟁’ 버튼 같은 버튼을 디자인해서 파는 거예요. 근데 아무리 돈이 된다고 해도 한 사람이 좋아요 백 개 올려주고 하는 식으로는 안했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생태계’에서 최소한의 평등은 남아있을 수 있도록 말이죠. 여러분 힘내세요. 저도 힘낼게요. 힘내라 버튼 따위. 버튼은 그저 버튼일 뿐이예요. (미괄식)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금배지 언박싱’에 관하여

말이나 행위를 가져오는 것은 그저 ‘선택의 자유’일까

1. ‘언박싱’ 담론이 의례의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품의 영역, 자신의 구매를 보여주는 영역, 때로 누군가의 제품을 홍보하는 영역이다. 언박싱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상품,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라는 네트워크에서 작동한다. 언박싱 영상의 생산자와 시청자는 재화를 통해 매개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다.

2. ‘국회의원 금배지’가 점하는 담론의 영역이 있다. 기본적으로 배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지만, 자주 ‘국민을 내려다보는’ 태도를 함의한다. ‘금배지 좀 달았다고’와 같이 정치인에 대한 못마땅함을 표현할 때도 종종 사용된다. 그렇게 금배지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민주정치의 표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금배지는 공적영역의 담론 안에 위치하여 대표자로서의 정치인을 상징한다.

3.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들이 교섭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말은 섞이고 의례는 ‘선을 넘는다’. 교회 내에서 랩뮤직의 사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에서 ‘신박한 예배 형식’이 되었다. 도덕적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 합쳐져 ‘착한 가격’을 낳았고, 이는 또 다른 영역과 만나 ‘착한 임대인 정책’을 만들어 냈다.

4. 담론간의 선을 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모든 가로지르기를 긍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교육의 일주체인 학습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 여길 수 없으며, 비상시의 온라인수업을 ‘미래교육’이라 표현하는 것에 손뼉칠 이유도 없다. 담론이 섞이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지만, 그 가능성은 희망일 수도, 타락일 수도 있는 것이다.

5. 그런 면에서 정치의 영역에 있는 ‘금배지’를 ‘언박싱’하는 행위는 위태롭다. (물론 이걸 ‘재미있다’고 표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라면 공공의 영역을 상징하는 금배지를 개인과 상품 담론의 최전선에 있는 언박싱이라는 의례에 얹어놓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구시대의 끝자락에 머무는 일일 수 있지만 말이다.

담론을 섞는 일은 창조적인 행위일 수도 상식의 파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점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위치에서 어떤 가로지르기가 용납되고 요청되느냐를 판단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가로지르기의 예술’에 능통해야 한다. 거침없이 가로지르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덧. 이 글을 쓰고 나니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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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키워드는 ‘윤리’입니다. 보통 윤리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 윤리적 측면이 개입하죠. 얼마 전 온라인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작명이 있었어요. 바로 ‘버닝쑨대국밥집’과 ‘버닝선대인’인데, 국밥집과 프로그램 이름을 저렇게 지은 거예요. 여기에서 타인의 말을 자기 말이나 글로 가져올 때의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아마도 저 이름을 택한 사람들은 주목받는 말장난을 원했겠죠.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켜 한 번 더 쳐다보게 하는 효과를 노리면서요.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말만 달랑 떼어오려 했다는 점이에요. ‘버닝썬’이라는 말이 태어난 자리의 착취와 잔혹함, 분노와 고통은 아랑곳없이 말의 힘만을 가져오려 한 거죠.

저는 이런 행위가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말은 사전 위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 상태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관계 속에 뿌리박고 또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말 주위로 권력과 욕망, 아픔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말을 가져오고 이름을 정하는 데 필요한 윤리는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는 윤리이고, 말이 자라난 사회정치적 토양에 대한 살핌의 윤리이며, 무엇보다도 그 말로 엮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죠. 삶과 세계를, 거기 살고 있는 감정과 모순을 지워버리고 말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시키는 행위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이건 단순히 말실수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망각, 맥락에 대한 몰이해, 나아가 자기중심성으로의 한없는 함몰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에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러시아의 문학평론가이자 이론가인 바흐친이 간파했듯이 우리의 말은 원래 누군가의 말이었고 우리의 조어는 결코 완벽한 창조가 아니라는 점, 말이 우리 곁에 올 때 세계가, 사건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이 함께 따라온다는 사실이에요. 말을 쓰는 것은 늘 삶에 잇대는 행위이고,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습득은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성장과 떼어놓을 수 없어요.” (265-266쪽)

비판적 전회(Critical Turns)

Posted by on Apr 26,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한 연구모임에서 내 삶의 궤적과 비판적 응용언어학자로 살게 된 계기들(critical turns)에 대해 이야기했다. 밋밋한 인생이지만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솔하게 말씀드렸고, 공부의 과정에서 무지와 안이함의 껍질을 깬 경험들을 나누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삶 자체를 주제로 한 발표는 처음이었기에 준비하면서, 또 마치고 나서 여러 생각이 스쳤다.

수년 간 모든 역량을 가르치는 일에 쏟아부으면서 논문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다. 관념이나 지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양태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지금의 나는 응용언어’학자’라기보다는 응용언어학/영어교육 커뮤니케이터에 가깝다.

선생님과 학생들, 여러 학부모를 만나 ‘삶을 위한 영어교육/리터러시’ 이야기를 나눈다. 학부와 대학원 수업을 중심으로 고민을 이어가고 다양한 사회현상을 엮어 논문과 대중서의 중간 쯤 되는 글을 써낸다. 이런 일을 늘상 한다.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사교육이 자본의 논리로 영어교육을 이끌고, 대다수 국민이 영어교육 전문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소위 ‘삶을 위한 영어교육’에 매진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닐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기 보다는 힘에 부친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읊조린다. ‘생활을 이끄는 것은 전망이 아니라 의지다.’

허나 의지는 미약하고 게으름은 달콤하고 분노는 쉬이 사그라든다. 현실은 강고하고 욕망은 집요하건만 나의 말은 이상적이며 나이브하기까지 하다. 다만 돈을 위해 이론을 알아볼 수 없는 괴물로 만들어 버리거나, 이론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잊지/잃지 않기를 바란다. 대단한 연구자는 아니어도 쓸만한 이야기꾼이 되길 소망한다.

갈수록 대학 안이냐 바깥이냐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써내고 나누느냐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게 보니 할 수 있는 일들이 적지 않다. 몸을 좀더 바삐 움직여야 한다. 무른 생각을 다져야 한다. 그래야만 한 선생님의 말처럼 누군가의 ‘곁’을 지킬 수 있다.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묻어두었던 고민들과 재회한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쓰는 사람으로서, 지식을 만들고 나누는 사람으로서, 배우는 사람으로서, 언제까지나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일상을 꾸려가야 할 것인가. 언제 혼자여야 하고, 언제 뜻을 모을 것인가. 왜 이 질문은 수십 년 반복되는가.

덧. 오늘 발표는 bell hooks의 책 <Teaching to Transgress> 11장 “Language”를 다루었다. 부제는 “Teaching New Worlds/New Words”. 조만간 나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 보고 싶다.

필요 없는 책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대한 독자반응에 대해 편집장님과 말씀을 나누었다. 유튜브와 텍스트 문화에 대한 성찰과 논의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로서의 책의 역할과 엇갈리는 반응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에 대한 편집장님의 답이 마음에 남아 기록해 둔다.

“만인을 위로하고 안심하게 하는 책은 나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인상깊었던 모리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을 때가 많은 사람이면 됩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유튜브는책을집어삼킬것인가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Apr 21,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공지가 떴다. 이론 중심의 수업은 학기말까지 온라인 수업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상 처음 학생들과 직접 만나지 않고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기말고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2. 학교방침에 따라 ‘모든 수강생이 동의한다는 조건 하에’ 학점을 S/U(Successful/Unsuccessful)로 바꿀 수 있었다. 학생들이 투표를 원해서 돌렸더니 약 1/3이 절대평가에 기반한 기존 학점체계(A, B, C 등)를 요구했다. 단 한 사람의 반대만 있어도 S/U 학점 시행은 불가하기에 2/3 정도의 학생들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학점체계를 따르게 되었다. (통계적으로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이 두 학점을 선호하는 학생의 비율이 흥미롭다.

3. 집이 학교가 되었으니, 이제 학교가 집이 될 차례 아닐까. 예전에 서울비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듯이, 학교라는 공간은 편안함 보다는 규율에 중심을 둔 공간이다. 널브러져 있거나 누워서 뭘 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글로벌 대기업들의 ‘창조적 사무공간’과 휴식시설은 칭송되지만 학교공간을 그렇게 개조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교과교실이나 도서관 등의 시설에 상당한 재정을 투자하는 학교가 늘고 있으나 ‘학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네모반듯 책걸상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다. 학생수가 급감하는 지금, 공간에 대한 급진적 상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4. ‘직설법’만 남은 언어라면 사람들은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될까? 메타포도, 환유도, 암시도, 풍자와 비꼼도, 아이러니도, 완곡어법도 없는 언어라면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질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언어와 결합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그거 참 잘됐네.”가 오만가지로 이해되진 않을까? 결국 의미다양성의 문제는 직설적/비유적 언어의 문제가 아닌 다양한 삶의 문제 아닐까?

5. 정부재정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국민 재난수단 지급’ vs. ‘하위소득 70%에만 지급’ 논쟁에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상황이 위급하고 신속한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문득 생각난 것은 IMF시절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98년 당시 우리국민은 약 21억 3천달러어치의 금을 국가에 모아 주었다. 당시 돈으로 2조가 넘으니 인플레를 고려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큰 돈이 될 것이다. 뻘소리인 걸 알지만, 그때 준 돈 다시 국민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전국민 지급 못할 것도 없을 듯하다. (먼산)

6. 자기말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고, 대화상대와 더 큰 말을 지어가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씨줄과 날줄 모두가 자기에게 나오고, 후자는 자신이 씨줄이라면 상대를 날줄로 본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뭔가 더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민의를 대표해야 하고, 미디어에 노출되어야 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해야 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상대와 자신의 말을 엮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정치인이 소중하다. 수많은 대화를 한땀한땀 엮어 정치와 제도를 빚어내는 정치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비판교육학 수업을 준비하다가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1. “갈등이 없으면 삶의 존엄성이 손상됩니다. 투쟁과 갈등이 없는 삶 또는 인간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갈등을 부정하는 것은 생생하고 사회적인 경험의 현실적인 측면을 대부분 무시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2.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읽어가며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학생들은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불만도 많다. 거의 모든 학생이 현실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흥미로운 것은 변화의 당위에 대한 긍정과 갈등과 투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동시에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변화가 필요하지만 갈등이 심해지는 건 피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다.

3. 첫 인용구에 드러나듯이 프레이리는 갈등을 대면하는 행위를 삶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본다. 양심의 동반자라 칭한다. 세상을 경험하고 의식화가 진행되고 나면 갈등을 알게 된다기 보다는 갈등을 직시하는 가운데 존엄과 양심이 회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갈등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윤리적 삶의 지표다.

4. 프레이리가 말하는 ‘의식화’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며 거기에 존재하는 갈등과 희망을 받아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습량과 비례하지 않는다. 헨리 지루는 “해방적인 지식을 거부하는 이들은 오히려 지식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알면 알수록 껄끄러운 일들을 멀리하고, 지식을 해방의 도구보다는 축적의 수단으로 쓰는 이들이 많아진다. 프레이리와 지루의 말을 더하면 알면 알수록 존엄은 스러지고 양심은 잊혀진다.

5. 비판교육학에서의 ‘갈등’이 주변 사람들과의 불화와 같지는 않다. 물론 정당과 노조활동가, 사회운동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은 직접적인 갈등상황을 피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학생들과 비판교육학을 논의할 때 나는 ‘주어진 내러티브’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곤 한다. 다시 지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이른바 자기가 생산한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담론은 교사와 학생이 구현하고 생산하는 복잡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형식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많은 쟁점들은 이 관심사를 중심으로 비판교육학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교사는 지성인이다>, 211쪽)

6. 지루의 말 중에서 핵심은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미를 만들고 공유하고 때로는 강요하며 살아간다. 사회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장 잘 하는 일이 의미생산인 것이다. 그런데 갈등없는 삶에서 이 의미는 그저 부여된다. 앎이든 삶이든 저항없이 순항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삶은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바람을 맞고 무르팍이 깨지기 전에는 몸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암묵적으로 만들어낸 의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상황이 계속된다.

7. 학교 현장에서의 비판교육학은 지배적 서사에 대한 온갖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식을 쌓음과 동시에 그에 대해 의심하는 습속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 누가 규율을 제정하는가? 누가 상식을 정의하는가? 누가 나의 생각을, 나아가 우리의 생각을 만드는가? 김성우는 왜 나에게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는가?

8. 비판교육학 수업을 앞두고 갈등에 대해 끄적여 보았다. 갈등에 취약한 사람으로서 갈등을 끌어안는 사상에 대해 논의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갈등이 삶의 필연적 조건임을 깨닫고 그 복판에 뛰어들었음에도 희망과 사랑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제나 마음이 차오른다. 비록 한 주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학생들이 삶의 서사의 작동방식을, 생각의 연원을, 갈등과 저항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제 수업 준비를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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