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력 1

Posted by on Feb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돌아보면 유치하고 허술한 글을 참 많이도 썼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하지만 글은 유치함의 축적 없는 진중함이나 허술함의 뭉침 없는 단단함을 추구하도록 놔두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나같은 범인에겐 말이다. 쌓이고 허물어지고 다시 쌓고 또다시 무너지지만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그것이 소위 ‘필력’ 아닐까. (물론 조금만 방심해도 ‘똥글’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사건은 생성적인 것

Posted by on Feb 15,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일련의 사건들은 말 그대로 생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구성될 수 없는 것이고 그 사건이 일단 발생하고 나면 돌아봄으로 완벽히 포섭할 수 없는 것이다.” “Series of events is truly genetic, which cannot be constructed before it has happened, and which cannot be exhausted backwards, after it has happened.” – Baldwin (1906)

“사건은 말 그대로 생성적인 것.” 지혜는 사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생성을 지켜보는 데 있는 것이다. 완벽하게 예측될 수도 없고 온전히 재구성될 수도 없는 순간들에 대한 경외감.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여기 있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표준화의 환상

Posted by on Feb 11,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시간의 표준화로 모두의 시간이 동일한 속도와 밀도를 지닌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지능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지능을 벨커브(정규분포곡선)로 줄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시험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성취를 한줄로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노동이 공평하고도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화폐로 변환되고 있다는 믿음, 어떤 몸이든 동일한 ‘ROI'(투자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 공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환상은 이러한 표준화-복합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서로 다른 몸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관계와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간의 평등과 지능 및 시험의 공정함, 경제체제의 합리성은 지독한 환상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은 철판이나 콘크리트에게는 옳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아니다. 체구가 크면 더 먹어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발이 크면 신발이 커야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모두가 같은 속도로 배우고 익히고 시험을 쳐야 한다고 믿는가? 인간에게는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을 돌려주어야 할 싸움이 필요할 뿐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활성화 영역

아래 세 문장을 보자.

a. “컴퓨터 좀 쳐봐.”
b. “컴퓨터에 꼽을 데가 없네.”
c. “컴퓨터 램을 갈아끼웠어.”

세 문장에는 공통으로 ‘컴퓨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의 표면을 말한다. 뭔가 잘 구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쳐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표면의 단자를 말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SB 등 외부기기와의 연결 인터페이스를 지칭한다.

세 번째 ‘컴퓨터’는 컴퓨터 내부의 마더보드를 의미한다. 램을 갈아 끼우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열고 메인보드의 슬롯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 좀 쳐봐”라는 말에 컴퓨터 뚜껑을 열고 컴퓨터를 치는 사람은 없다. “램을 갈아 끼웠어”라는 말을 듣고서 USB 단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렇게 여러 문맥에서 이해되는 단어의 의미를 ‘active zone(활성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어가 하나 같지만 실제로 그중 일부만이 두드러진 의미로 동원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활성화 영역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a~c를 쓸 때 분명 우리는 다른 영역의 의미를 활성화시키지만 ‘컴퓨터’라는 동일한 단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단어가 여러 가지 하위 요소를 갖고 있을 수록, 사용되는 상황이 다양할수록 활성화 영역의 역동성 또한 증가한다.

* ‘active zone’이 학계에서 공인된 번역어를 갖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인지언어학이야기

똥고집

Posted by on Feb 6, 2019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사실 이과생들이 들어도 꽤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수강생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도 이과생들로부터 문의를 받을 때마다 “개념적 뼈대는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예시는 인문사회계 논문 텍스트를 사용합니다.”라고 원칙적인 답변을 한다. 뭐랄까. 조금의 ‘거짓’도 없이 수강생을 모으고 싶은 똥고집이라고 해야 하나.

첫 강의가 토요일로 다가왔다. 경험상 준비과정은 ‘충격과 공포’에, 강의과정은 ‘설렘과 기쁨’에 가까왔다. 무려 여덟 번을 한 강의인데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그래도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공부할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영어로논문쓰기

센세이셔널의 두 극단

많은 경우 ‘센세이셔널’은 부정적 함의를 가지지만, 세상을 바꾸는 많은 것들이 센세이셔널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는 진중한 학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센세이셔널함이 센세이셔널리즘에서 오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정주의는 선정성을 겨냥하고 선정성을 믿으며 선정성을 갈망한다. 그렇게 선정주의가 성취한 선정성은 가볍고 허약하며 한시적이다. 선정성은 오로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선정성은 원칙에서도 파생될 수 있다. 원칙을 따라가는 일은 근본적이며, 근본적인 것은 과격하다. 과격한 주장은 어느 정도의 선정성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선정성은 근본적인 것들로 인도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두 가지 선정성을 구별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후자의 선정성이 꼭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다. 전자의 ‘얕은’ 선정성을 추구해도 논문을 써낼 수 있고 실적을 올릴 수 있다. 후자의 선정성에 이끌려 이론의 지층에서 헤매다가 세월을 ‘허송’할 수도 있다.

그래도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센세이셔널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과 센세이셔널할 수밖에 없는 급진성을 가진 이들을.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건축과 소통

Posted by on Jan 29,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요즘에는 뭐 TV 보는 건 없으세요?”
“특별히 찾아 보는 건 없지. 근데 축구 떨어져서 좀 그러네.”
“아 그랬죠. 베트남도 떨어졌더라고요.”
“응 베트남도 떨어지고. 일본은 올라갔더라.”
“너무 빨리 떨어졌네요.”
“그렇지. 계속 올라갔으면 한참 좀 덜 외로웠을텐데.”
“축구는 그렇게 잘 보시더라고요.”
“보고 있으면 재미있어.”

“덜 외로웠을텐데.”라는 말이 목에 팍 박혔다. ‘
축구’와 ‘외로움’의 관계는 생각지도 못했다.

“축구 말고는 다른 거 보신 거 없어요?”
“그젠가 무슨 건축 강연을 봤어. 김광현 교수?”
“응. 어떤 분이예요?”
“강의를 잘하시더라. 건축학 교수시라는데,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죽 하는 게 아니고 원리를 이야기하시는데 좋더라고.”
“무슨 말이 남으셨어요?”
“건축은 소통에서 시작된대. 대화.”
“어떤 면에서요?”
“왜 유럽이나 오래된 건축들을 보면 처음 시작은 다 사람들의 대화였다는 거야. ‘우리 동네에 뭐가 필요한데’, ‘여기에는 뭐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대화들에서 건물이 나온다는 거지.”
“좋은 이야기네요. 소통에서 시작하는 건축.”
“근데 지금은 안그렇잖아. 그냥 돈을 벌어야 되니까 짓고. 땅이 있으니까 짓고.”
“소통에서 시작되는 건축은 아니죠. 분양해서 돈벌라고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우리가 식탁 방향을 어떻게 놓느냐, 가구는 어디에 갖다 놓느냐도 다 건축이라고.”
“아 그런 것도 다 작은 건축이겠네요.”
“이런 얘기 들으면 엄마도 공부하고 싶다. 그때 뿐이지만. ㅎㅎㅎ”

신대방역 부근은 여전히 예전 모습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양가적 감정이 든다. 서울치고 ‘낙후’되었다는 느낌. 예전의 정이 남아 있는 거리. 그래도 너무 빨리 소통 없는 건물이 들어서진 않았으면 좋겠다.

집으로 오는데 메시지가 왔다.

“건축은 삶을 닮는 그릇”
“건축이 공동의 언어”

‘건축’ 자리에 ‘수업’을 넣어보았다. 소통에서 시작하고 삶을 담는 그릇이 되며 함께 언어를 만드는 일.

말은 언제나 행동보다 쉽다.

#어머니와나

호칭의 사회학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호칭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소셜미디어 상에서 서로를 부르는 방식입니다.

우선 ‘~님’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게 가장 무난할 듯합니다. 소셜미디어의 특성상 특정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위계적 관계를 함의하지 않으면서 예의를 갖춰 부를 일이 많으니 ‘~님”만큼 적절한 호칭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 “O박사님”, “O교수님”, “O원장님”, “O변호사님”, “O대표님” 등의 호칭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 호칭은 심심찮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이렇게 불러야 할 때도 있고, 평소에도 이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뿐이죠.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호칭의 경우 대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회사원들, 아이들과 학생들은 대개 이름을 기반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칭의 사회학에는 분명 비대칭적 측면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룬 업적에 기반한 호칭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욕망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이름보다 직책이나 자격으로 불리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그리 건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하여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호출해 봅니다.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예의를 꽉꽉 채운 이 말, 어딘가 불편합니다. 길 묻는 사람은 최대한 예의를 지켜서 말을 건 것일 테니, 불만은 없습니다. 다만, 종종 들려오는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소화가 되질 않네요. 저는 사장은 아니고, 사장님은 더욱 아니며. 행여 사장이라고 해도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죠.

그냥 “실례지만 길을 좀 여쭈어도 될까요?”는 어떨까요? “사장님, 길 좀 여쭐게요”와는 달리 상대를 부르는 단어는 없습니다만 길을 묻는 기능은 충분히 수행하니까요. “아저씨”나 “학생” 혹은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상대가 ‘고통받을’ 이유도 없구요. (경험상 이 ‘고통’은 미혼 여성들이 “아줌마”로 불렸을 때 극대화되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한국사회에서 심심찮게 쓰이는 현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짧은 친절의 순간에도 “사장님”이 끼어드는 일은 좀 안타깝네요.

#삶을위한리터러시

지도교수 vs. work with someone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미국 대학원에서 지도교수가 누구냐고 물어볼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Who do you work with?”입니다. 직업을 물어볼 때 “What do you do?”라고 물어보듯 지도교수가 누군지 알고 싶을 때는 “Who do you work with?”라고 간단히 묻는 것입니다.

말을 바꾼다고 사람이나 시스템이 갑자기 변할 리야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work with”라는 언어패턴에 담긴 수평적 관계를 좋아합니다. “With”에는 상하가 없습니다. Someone to work with.함께 일하고 만들어 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지도교수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지도교수’는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를 다소 위계적으로 그립니다. ‘지도’는 보통 전문성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경우 “work with ~”보다는 “work for ~의 관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교수와 함께(with) 일한다기 보다는 교수를 위해(for) 일하는 것이지요.

페이스북에서 또 강의에서 명민하고 실력있는 대학원생들을 종종 만납니다. 뛰어난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을 그저 ‘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도적 협력자’로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지도할 사람” 보다는 “work with”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학문의 세계를 먼저 경험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근본적으로 수평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미 그런 곳들이 있겠지만, 석사생이든 박사생이든 함께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협력자(collaborator)로서 대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 물론 영어에도 academic advisor / dissertation advisor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다소 격식을 갖춘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며 한국어의 ‘지도교수’의 사용역(register)과 딱 대응되지는 않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일상 대화에서 ‘지도교수’가 많이 쓰이는 반면 영어에서는 ‘work with’와 호칭을 엮은 표현이 자주 쓰이는 것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논문쓰기

 

불편한 말들

남들은 그냥저냥 넘어가는데

난 깜짝깜짝 놀라는 표현들이 있다.

 

‘아랫’사람/’윗’사람

‘부하’직원

사람을 잘 ‘다룬다’/’관리한다’

‘몸값’이 어마어마하다

가격이 ‘착하다’

얼굴 ‘천재’

‘팔리는’ 글

 

그리고 잘 보지 않던 드라마를 보면서 수없이 듣게 되는 말.

 

아들/딸 의사 ‘만들었다’

 

너무나 널리 퍼진 말들이어서

이런 말들을 쓰는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질 이유는 없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받아온 훈련 덕분에

혼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민감해지되 상처받지 않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극복을 위해

욕설의 언어학이라도 공부해야 할까.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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