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법, 그리고 가르치면서 사는 일에 대하여

Posted by on Oct 9,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1. 이론으로서의 교수법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권위적입니다. 유명 학자들이 쓴 교수법 책에는 (저자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게 가장 좋은 길이니 현장에 적용해야 해”라고 말하는 듯한 아우라가 있습니다. 이런 책으로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수업에서 주체의 삶과 유기적으로 통합되지 않는 과학적 지식은 힘을 잃게 되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 하지만 많은 교사들의 경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명확합니다. “최선의 교수법은 이론-내부에 있지 않고 이론과 주체가 만나는 상호작용의 공간 interactive space 에 있다”는 것입니다. A+B에서 A나 B가 아니라 플러스(+) 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 플러스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즉 교육 주체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3. 현재 대부분의 교수법이 교육주체의 자아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교수학습이론은 교사와 학생의 내면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실은 주어진 교수학습방법론을 충실하게 적용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 반쪽짜리 교수학습이론이 재구성되어야 할 비판적 실천의 장이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주어진 교수학습방법론을 ‘주체가 개입하여 재정의해야 할’ 장(field)으로 변화시키는 비판적 실천이야말로 교육이론을 밀고 나가는 궁극적 동력이 됩니다.

4. 이런 관점에서 회사는 경영-조직이론이 재구성되고 재창조되는 비판적 노동의 공간이, 종교기관은 전통적 교리가 재구성되고 재창조되는 비판적 신앙공동체가 됩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일하는 기계나 맹목적 추종자가 아니라 전통과 현재, 나아가 새로운 여정을 탐구하는 역사적 인간이 됩니다.

5. 어떤 조직이든 주체의 역사-삶-지향, 즉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고려하지 못할 때 교조적이며 권위적인 공간으로 추락합니다. “하던대로 하라”는 명령에는 시간도, 실패도, 혁신도 존재하지 않지요. 시간이 사라진 공간은 성장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회색 콘크리트일 뿐입니다. 겉치레가 아닌 실질적 혁신을 원한다면 비판과 소통, 실험과 실패를 권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 “교직은 매일 마음의 상처를 주는 직업이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잃는다. 반드시 교실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을 느껴야만 용기를 잃는 것은 아니다. 칠판에 문장분석을 하거나 수학증명을 풀고 있을 때, 학생들이 졸거나 쪽지를 돌리기만 해도 교사는 낙담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과목이 아무리 아무리 기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르치는 것은 결국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이 나의 자아의식을 형성한다.” –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문화) 38쪽

교사는 매일 용기를 잃게 된다는 파머의 말이 마음을 파고듭니다. 하지만 상처를 받는 그 공간에서 상처를 넘어서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 또한 사실 아니던가요. 어떤 일, 어떤 사람도 내가 원하는 반응만을 주진 않습니다. 기실 상호작용의 대상으로부터의 상처는 상호작용의 정의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상호작용하는 “대상”이라고 썼지만, 그 대상은 나와 동일한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주체와 주체의 만남은, 주체가 대상을 제어하는 ‘이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어긋나고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상처에 점점 취약해지는 저를 봅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부터도 꽤나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요.)

7. 오래 전부터 붙잡고 있는 화두가 있습니다.
아마도 평생 가져갈 화두인 것 같습니다.

“배운대로 가르친다.”

이렇게 말하든 안하든,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예전에 배운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배운 대로 가르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선생님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도 아니구요.

다만 이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은
지식 자체의 성격과 맞물려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 하더라도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학생들에게 다른 *의미*가 되죠.

지식의 습득은
지식에 대한 태도와 의미가 구성되는 방식과
동전의 앞뒤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나 할까요.

이미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고,
교사 개개인의 자질이 나아지고 있다는 평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교실에 대해 불신을 갖는 이유가 뭘까요?

이에 대해 한 가지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한국의 입시문화, 학력주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 등등,
교육을 쥐고 흔드는 괴물이 너무 많죠.

사회경제적,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은
말할 수 없이 심화되어 가구요.

이런 비관적 상황 속에서
“그래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나?”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성찰과 소통,
비판적 실천, 그리고
더 나은 교육과 세상에 대한 의지가
희망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요?

교사가
배운대로 가르치는 존재에서
배웠던 것, 방법을 의심하는 존재로,
최신 이론을 가져다 쓰는 존재에서
그것을 자신이 처한 교육의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발전시키는 존재로 성장한다면
멋진 일들이 조금씩 일어나지 않을까요?”

물론 여전히 상황은 비관적입니다.
교사가 교육 전체를 바꾸려고 하는 건
계란에 바위치기 같은 것이죠.

하지만 몇 년 안되는 교직 경력 속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선택한 순간
갑갑한 교육현실을 냉소하거나
학생들에 대해 절망할 자격은
영구히 박탈된다는 것.

절망적인 통계 결과 앞에서도
절망할 권리는 없다는 것.

가르치는 일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이며
구체적 실천으로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일이기 때문에…

“넌 할 수 있어” 처럼
값싼 희망의 말 몇 마디가 아니라
모두 같이 삶을 같이 일구어 갈 수 있다는 믿음.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지금의 절망을 좀더 더 절망적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그런 믿음 말입니다.

교육을 통해 인류가 가진
가장 값진 것들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때
모두가 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확신.

어떤 교과를 통해서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가르치는 일은
이런 가치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할 운명에
스스로를 묶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8.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배운대로 가르친다면
왜 교사교육이 필요한가?”

저에겐 아직 답이 없습니다.
아마 평생 지고 가야 할 문제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두 가지 구절이 있습니다.
파커 파머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라는 말.

그리고 헨리 지루의 책 제목이기도 한
“교사는 지성인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입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스펙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학생 자신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일부가 될 지식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연구하고 토론하고 실험하며
우리 자신의 교육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르칠 때
학생은 학생 자신으로 교실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지성인으로 스스로를 정립할 때
학생들도 스스로를 지성인으로 키워갑니다.

9. 가르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또
역설적이지만 영광스럽게도,

“교육은 계급을 재생산하는가?”라고 묻지 말고,
“교육은 계급을 재생산해서는 안된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배운대로 가르치는 존재에서
평생 배우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

거창하게 들리지만
즐거운 여정 아닐까요?

매일 비틀거리지만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내게 충분한 것

Posted by on Oct 8, 2018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일상, 집필 | No Comments

(입시나 취업, 승진과는 먼)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마케팅 슬로건으로는 빵점이겠으나,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99퍼센트의 한계와 1퍼센트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닙니다. 실패가 예정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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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 충분합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집필중

‘따옴’ 없는 작은 따옴표

Posted by on Oct 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인용’이 아니라 ‘강조’ 혹은 ‘주관성’을 표현하는 ‘작은’ 따옴표의 용법이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름은 ‘따옴’표지만 ‘따옴’과는 관련 없는 ‘자기 나름’의 ‘강조 전략’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변하지 않는 것

Posted by on Sep 28, 2018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나의 중학 시절과 현재 적잖은 중고교의 문법 유인물이 거의 같다는 사실에.

나의 사범대 시절 전공교육과정과 현재의 교육과정이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에.

나의 임고시절 시험대비 ‘바이블’이 현재도 판만 바꾸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내 중고교 시절 영어 단답식 시험에서 ‘반점’의 기준이 지금의 수행평가 점수 부여시에도 똑같이 고민스러운 지점이라는 사실에.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기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뀌어야 할 것들이 그대로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리터러시”나 “4차산업혁명”을 논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갑작스런 죽음

Posted by on Sep 22, 2018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어머니는 성북동 초입에서 잠깐 하숙을 치셨다. 업으로 삼으신 것은 아니고 어쩌다 하나 남은 방을 활용하셨던 것. 당신께서는 유난히 기억에 남는 한 ‘똘똘한’ 대학생 이야기를 몇 번 하셨다. 똑부러지는 서울법대생. 할 때 하고 놀 때 노는 스타일. 이른 나이의 고시패스. 오랜 검사생활. 국회의원을 거쳐 정당인으로 살아온 여정.

어머니가 방금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보내주셨다. 오늘 새벽에 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했다. 사고 후 한 시간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제 겨우 60대 중반.

황망하기 짝이 없는 죽음. 한 번도 마주칠 일 없었고 알지도 못하지만 잠시나마 어린 나와 같은 공간 안에서 숨쉬었던 분.

“언젠가 한번 꼭 찾아가고 싶었는데… 방금 뉴스에서 소식이 나오는데 슬프네. 착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ㅠㅠ”

어머니의 말씀이 아프다.

함께 했던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까.

그의 명복을 빈다.

#어머니와나

시간강사 제도 개선에 대하여

Posted by on Sep 4, 2018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여러 생각이 왈칵 몰려든다.

우선 기사 제목의 두 키워드 즉 “교원 자격”과 “방학때도 월급”이라는 말이 서글프다.

수년간 일을 해왔지만 정규 교원의 자격도, 방학 동안의 어떠한 급여도 없었기에 저 두 가지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마음이 먹먹하고 쓸쓸하다.

교원이 될 수 있다는 것,
방학 때 임금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수많은 이들에 대한 ‘헤드라인’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무시할 수 없는 인원이 구직난에 시달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았던 운을 믿어보자면 앞으로도 일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설령 내가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것은 아니다.

2010년 “제가 당신의 종입니까?”라는 항변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 고 서정민 박사, 1998년 이후 강사 생활을 하다가 먼저 먼 곳으로 가신 여덟 분의 강사들을 기억하며 짧은 묵념을 드린다.

아울러 그간 강사제도 혁신을 위해 싸워온 모든 이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저 주변에 하찮은 불평을 늘어놓는 것 외에는 한 일이 없어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이들의 헌신과 투쟁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더이상 고통받는 이들이 없기를, 누군가의 당연한 권리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구조가 사라지길 빈다.

https://news.v.daum.net/v/20180903110033055?rcmd=rn&f=m

개학은 달갑진 않지만 만남은 감사한 이유

Posted by on Aug 31,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방학 때 다 못한 일은 추석 연휴로 미루고, 추석이 막상 닥치면 “명절에 무슨 일이냐”고 하지. 학기가 중반에 접어들면 정신없이 기말까지 몰아치고, 학기가 끝나고 나서야 지난 방학 다 못한 일들이 전생의 기억처럼 조곤조곤 마음을 두드려. 실패의 반복은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선물하고, 그렇게 세월이 가는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가끔 하게 돼. 그 와중에 결국 삶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새로운 사람들, 그 중에서도 함께 공부하게 될 학생들. 어머니는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가장 큰 업보는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하릴없이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닐까. 개학은 달갑진 않지만 만남은 감사한 이유.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친구가 친구가 아닌 이유

Posted by on Aug 30, 2018 in 말에 관하여, 영어, 일상 | No Comments

Friends and not friends.

“Friends”라고 하지만 진짜 friend는 몇 없고, 실상 대개 “(ghost) viewer”, “(accidental) commenter”, 또 “(chronic) sharer”이다. 아 맞다, “(intermittent/permanent) unfollower와 “(good bye) unfriender”도 있구나. 단어의 뭉툭함이란. :)

ghost viewer 귀신처럼 안보이는데 보긴 다 보는 사람
accidental commenter 어쩌다 걸리면 코멘트 남기는 사람
chronic sharer 인터랙션의 대부분이 공유인 사람
intermittent 간헐적인 permanent 영구적인
good bye 잘가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문화기술지, 대화분석, 그리고 ‘위력’의 존재

Posted by on Aug 28, 2018 in 말에 관하여,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그저 학문적 논쟁이라 생각했던 지점이 현실 속 갑론을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법의 영역에서.

1. 언어를 주 매개로 한 의사소통분석에 있어 양 극단의 경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인류학에 기반을 둔 문화기술지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학 전통에서 강세를 보이는 대화분석 접근이다. (아래에서는 이 두 거대한 분야를 매우 함축적으로 다루므로 독자들께서는 엄밀한 학문적 논의의 칼날을 적용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린다.)

2. 문화기술지(ethnography)는 특정 사회현상을 둘러싼 맥락적, 역사적 요소들을 강조한다. 현상의 시간적 배후 그리고 상황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다각도의 데이터를 통해 검증한다. 해당 현상이 발생한 커뮤니티의 관습과 태도, 의례, 언어습관, 주요 소통채널 등 다양한 것들이 분석의 주요 자료가 된다. 이런 관점을 잘 드러내는 용어는 아마도 클리포드 기어츠의 ‘두꺼운 기술(thick description)’일 것이다. 현상은 얇아보여도 그것을 배태한 세계는 두껍다. 따라서 우리의 기술 또한 두꺼워야만 한다!

3. 이에 비해 대화분석(conversation analysis)은 대화의 전개, 한 마디 한 마디의 주고받음이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1960년대 하비 색스의 연구에서 발원한 연구 흐름은 사회학과 응용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미시적 접근(micro-analytic approach)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방법론의 관점에서 대화분석의 제1원리는 “데이터가 말해주지 않는 것은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일 것이다. 모든 것은 데이터 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4. 대화 참가자들 사이의 권력관계는 특정 대화 내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 대화를 아무리 돌려보고 분석해도 권력의 지층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해당 대화 상황에서 ‘평등하게’ 대화했다고 할 수 있는가? 트라우마로 수년간 고통받아온 사람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 ‘트라우마를 겪어온 자아’가 드러나지 않았음은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가? 제3자가 그것을 확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인가? 그것들이 엇갈린다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5. 이런 질문에 대하여 문화기술지적 연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생애사적 증거를 최대한 동원하여 설명하려 들 것이다. 물론 무조건 ‘갖다 붙이는’ 설명은 곤란하다. 그래서 그들은 삼각검증(triangulation)이라는 절차를 둔다. 수집된 자료들 사이의 패턴, 일관성, 함께 가리키는 바 등을 차분하고도 엄밀하게 고려하는 것이다.

6. 반면 대화분석 연구자들은 대화상황 자체에 집중하려 들 것이다. 대화가 말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말의 강세가, 침묵이, 길게 늘어뺀 억양이, 어조가, 속도가, 쓰인 단어들이 말해주는 바에 집중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 어떤 결론도 도출될 수 없다면 ‘외부에서’ 다양한 증거들을 가져오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학생과 교사의 대화가 100% 사회가 정해놓은 학생/교사라는 역할 하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대학원 수업 시간 중에 문화기술지적 연구경향과 대화분석 접근법 사이의 세계관 차이가 논쟁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둘 사이의 대립 상황에서 칼로 무 베듯 정답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의 성향에 따라 특정 방법론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어떤 쪽에서 논쟁에 참가했을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타임라인을 읽어오신 분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본다.)

8. 아침에 두 개의 상반된 칼럼을 접했다. 둘이 너무나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어서 같은 우주 안에 있다고 하기 힘들 정도였다. 왜 그런지 직접 읽고 판단하시기를.

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2527

위력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한국일보)
http://hankookilbo.com/v/741e6fbcc3c14b979d8cd1a40fb3aeb6

9. 두 칼럼의 지향은 대화분석과 문화기술지를 닮은 것처럼 보인다. 전자가 ‘드러난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려 한다면 후자는 ‘드러나지 않은 것’을 전면에 내세운다.

아니 정말 그런가?

10. 드러난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책무는 (1) 최대한 많이 드러내는 성실함 그리고 (2) 드러난 바를 철저히 분석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전자의 칼럼에서 그런 성실함이나 노력은 잘 읽히지 않는다.

11. 후자의 칼럼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약자들은 위력의 냄새를 귀신처럼 맡는다”라고 생각한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아니 냄새를 맡아야만 할 상황에 처한 이들의 세계와 그런 냄새를 맡지 않아도, 아니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런 냄새인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12. 다시 대학원 수업시간을 떠올린다.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어떤 자세와 방법론을 견지할 것인가?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총체적 세계를 해석하고 있는가, 조각조각 데이터에 현미경을 갖다대고 있는가. 혹 내가 가진 조각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단번에 무력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강의 스타일

Posted by on Aug 26, 2018 in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내가 경험한 괜찮은 대학강의의 교수자 스타일은 크게 둘로 나뉜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수많은 변이형이 있겠지만 극단값을 보자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1. 세심한 커뮤니케이터형: 최대한 잘 준비하고 정리해서 학생들과 소통하려는 강사. 친근하고 친절한 스타일을 유지한다.

2. 궁구하는 지식인형: 일정한 지향과 세계관을 가지고 깊이 궁리한 바를 전달하는 강사. 문제의식으로 거득 차 있으며 때로 고뇌에 찬 모습을 보인다.

학생들이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주로 1번의 모습을 지향해 왔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엄청나게 준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2번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연륜은 깊어져도 꼰대가 되진 말아야 하는데.

사실 적지 않은 학생들은 아래 두 가지 요인으로 강의를 평가하는 듯하다.

1. 할 거 많아?
2. 학점 잘 줘?

그래도 어디 가나 깊이 생각하며 더 많이 배워보려는 학생들이 있어 고마운 마음이다. 이번 학기도 함께 고민하고 궁리해 보자구!

덧. 고백 & 부탁
방학이 끝났다는 게 가장 큰 고뇌지만 보여주진 않겠다. 너희들도 같은 심정이라는 거 잘 알고 있다. 서로 모르는 척 하면서 학기 초부터 열심히 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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