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메타포, 그리고 언어의 윤리

(아래 글은 <복음과 상황> 2020년 4월호 커버스토리 기고문 초안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WHO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 극심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재난의 여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감지된다. 취약계층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깊고, 경제적 여파로 인한 불안도 커져만 간다. 바이러스의 감염보다 빠른 것은 공포의 확산이다.

시민들의 상황은 한 마디로 ‘재난의 일상화’라고 할 만하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평소에 보지 않던 뉴스를 찾고, 듣지 않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별것 아닌 경고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어떻게든 공포를 완화시키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렇기에 위기상황의 말들은 더욱 강한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효과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 말들의 풍경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영감과 응원의 원천이 되며,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재난 상황에서 말글의 무게를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전쟁중인가

“감염병과의 전쟁” / “바이러스와의 전면전” / “최전선의 의료진” / “지역 봉쇄” / “전시상황” / “시한폭탄”

최근 언론에서 접한 비유표현이다.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전쟁으로 그린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진 않았지만 ‘전면전’, ‘최전선’, ‘봉쇄’, ‘전시’, ‘시한폭탄’ 등은 현재의 상황이 전쟁과 닮았음을 함의한다. 이는 스포츠에서의 전쟁 은유와 유사하다. “격파”, “대첩”, “용병술”, “명장”, “전략전술” 등의 단어는 스포츠 관련 보도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이는 스포츠 경기를 일종의 전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지금의 사태를 전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한국사회에서 전쟁 메타포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일례로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내부총질”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은 특정 정당이나 정파 내부의 분열과 갈등 상황에서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세력을 이르기 위해 사용된다. 누군가는 ‘총질을 총질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느냐’고 묻겠지만 상대의 행위를 ‘총질’에 빗대는 게 어떤 의미와 효과를 지니는지 생각해 보면 섬뜩한 의미가 드러난다. 우선 “내부총질”이 있다면, 여러 세력들이 서로 총을 쏴대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총격전에서는 으레 중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한다. 아울러 “내부총질”이 문제라면 “외부총질”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내부로부터의 격렬한 비판은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고, 조직의 구성원들을 적군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총질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벌어져야만 한다.

한 외국인과 우리사회의 전쟁 비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전쟁용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면서, 수업에 책을 안 가져온 학생에게 “전쟁터에 총을 놓고 나간다”고 하거나, 금전적 여유를 “총알”에 비유하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태도가 좋지 않거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군기가) 빠져있다”는 말을 쓰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전쟁과 관련된 메타포가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언어와 역사를 기반으로 나름의 메타포를 만들어 낸다. 수업을 전쟁터에, 교과서를 총에 비하는 일은 영미권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대만의 연구자에게 비슷한 표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아는 한 없다고 답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책을 안 가져오느니) 차라리 머리를 놓고 오지.”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수많은 침략을 경험하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수십 년 군사문화가 배어든 한국사회에 다양한 군대 관련 표현이 존재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없이 무의식적으로 군대 메타포를 사용하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면 학생들은 계속 ‘총’을 가지고 ‘전투’에 참가하는 ‘군인’일 수밖에 없다.

은유는 말의 장식이 아닌 사고의 패턴이다

서양에서 비유어(figurative language), 그 중에서도 은유(metaphor)에 관한 논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시학>에서 명사의 종류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누고 그 중의 하나로 은유를 들었다. 어원상 ‘넘어서(beyond/over)’라는 뜻의 ‘meta-‘와 ‘가져오다, 갖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pherein’이 결합한 라틴어 metaphora는 ‘옮겨간다, 전이된다, 넘어간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메타포는 한 대상의 이름이 다른 대상의 이름으로 넘어가는 것, 즉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시학, 124쪽)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오랜 세월 서구사회가 메타포를 이해하는 데 기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1980년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그들의 저작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견해에 반론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메타포는 단지 하나의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수사적 기법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며 사고패턴(thinking patterns)이라는 것이다. 약간의 학술용어를 동원하자면 메타포는 수사적 장치(rhetorical device)가 아니라, 인지 메커니즘(cognitive mechanism)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 표현들을 보자.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다.”
“세월이 날아간다.”
“Summer is just around the corner. (이제 곧 여름이다.)”

세 문장의 주어로 나온 ‘크리스마스’, ‘세월’, ‘Summer’는 모두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들이다. 하지만 시간은 물리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개념이다. 시간은 분명 존재하지만 만질 수 있는 코나 날아가는 새, 저만치 보이는 길모퉁이와는 다른 영역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코앞’, ‘날아간다’, ‘길모퉁이 돌아서 바로’라는 표현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의 세 표현 모두 시간 개념을 공간과 관련된 개념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추상적인 영역을 구체화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메타포의 역할이며, 이것은 단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공간(코, the corner)이나 운동(날아간다)과 같은 구체적이며 물리적인 개념으로 비유하는 사고패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추상과 구체를 엮어 사고를 풍부하게 만들고 확장시키는 능력은 인간의 인지적 역량 중 가장 주목할만한 능력으로 손색이 없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인생을 말하면서 “나는 그냥 엑스트라일 뿐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신과 단역배우를 연결시켜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한 사람이 엑스트라라면 누군가는 주연이고 또 누군가는 조연일 것이다. 누군가는 악역을, 다른 누군가는 선한 역할을 맡는다. 감독이나 각본이 궁금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집중조명(highlight)을 받고, 누군가는 컴컴한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즉 누군가가 ‘엑스트라’가 되는 순간, 세계는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이 되는 것이며, 개개인은 그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엑스트라’라는 말은 ‘세계는 영화(혹은 연극)’이라는 사고의 틀을 가정할 때 성립할 수 있는 메타포다.

‘메타포가 세계를 상정한다’는 관점을 사회문제에 연결시켜 보자.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을 때 종종 사용되는 은유 중에 ‘인질 메타포’가 있다. 예를 들어 “시민을 인질로 삼는다”는 헤드라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출퇴근 시민이 인질이 되고 공항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공항 이용객들이 인질이 된다. 대학 시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경우라면 학생이 인질이 된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파업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실행됨에도 불구하고 ‘인질’을 메타포로 쓸 때 범죄와 관련된 사고의 틀(frame)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인질”이라는 은유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질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질극을 구성하는 일련의 요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인질범은 인질을 대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인질’이라는 은유를 도입할 때 노동자들은 ‘인질범’이 되고, 파업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는 사람은 ‘인질’이 되며,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인질범이 요구하는 ‘몸값’이 된다는 것이다. 영특하게도 ‘인질’ 메타포를 쓰는 언론은 인질극의 빠른 종결을 기원하는 ‘선량한 세력’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몸값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노조는 노동법이 허용하는 수단을 동원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지만 대개의 노동조합은 사실상 약자에 가깝다. 오히려 사측이 강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파업은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적법한 노동권의 행사로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질 메타포’ 뒤에는 일체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그들의 행위를 극도로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는 생각의 틀이 들어 있다. 인질 프레임이 비틀고 있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뚫렸다”는 메타포의 아슬아슬함

지난 메르스 유행 사태와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메타포 중에 ‘OO가/OO도 뚫렸다’가 있다. 메타포에 관심을 가진 시민으로서 “뚫렸다”는 은유는 참으로 아슬아슬하다. 어딘가가 “뚫렸다”면, 거길 지키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있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사람은 거길 ‘뚫었으며’,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질 위험이 있다. 바이러스에 ‘뚫린’ 지역사회는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뚫고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하며 단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바이러스의 숙주로 기능한 이들은 방역망을, 지역을, 안전이라는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가? 우리는 ‘뚫은’ 주체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으로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감염자는 가해자요, 지역 주민은 피해자라는 구도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뚫다/뚫리다’로 표현되는 공격과 방어 혹은 침투와 보안의 메타포가 우리의 생각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재난 상황에서의 말글의 윤리

감염이 되는 순간 사람(person)은 보균자이자 매개체(carrier)가 된다. 적어도 공공영역에 있어서 해당 감염자의 정보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호스트(숙주)의 실제적/잠재적 위험에 대한 통계’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감염병 유행 사태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비극이다. 사람들에게 번호가 매겨지고, 접촉자(contact)의 수가 공개되고, 동선이 소상히 까발려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방역당국은 인격체(character)가 아니라 감염과 관련된 요인(factor)으로서 개인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량이 두 영역에 걸쳐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는 감염병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한 역학적 역량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도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는 차원이다. 전자가 ‘기술’로서의 역량이라면, 후자는 ‘돌봄’으로서의 역량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다.

지금 우리는 한 순간 확진자가 되어 ‘추적당하고 격리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한 공포는 바이러스보다 넓게 퍼져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가 나를 감염원이자 정보쪼가리로 처리하며 낙인찍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 당연히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병에 걸리는 것이 인격을 송두리째 침해당하는 경험이 되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격리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사례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자들을, 접촉자들을, 특정 지역을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가족으로, 동료 시민으로, 우리들의 또 다른 고향으로,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으로 대해야 한다. 감염이 인격과 관계, 지역사회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마음과 관계와 인격을 무력화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과학기술의 지혜를 모아 시스템을 보완함과 동시에 사려깊은 언행으로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감염예방 수칙을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보건 및 역학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막연한 공포를 확산시키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스스로의 말글을 돌아보아야 한다. 장애인 시설을 ‘시한폭탄’이라 부르고, 특정 집단의 사람을 ‘색출’해서 ‘박멸’해야 한다고 외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동료 시민들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대상화함과 동시에 혐오와 공포의 세계를 팽창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어서 이 재난이 진정되고, 맑고 밝은 표정으로 거리에 활기가 돌기를 바란다.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아줄 수 있고 동료가 잠재적 위협이 되지 않는 일상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를 통해 서로에게 굳건한 신뢰와 따스한 응원이 될 수 있는 삶을 위한 말글을 배울 수 있기를 빈다.

꾸밈말의 역설

Posted by on Mar 29,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사실 난 ‘글쓰기 선생’치고 꾸밈말을 자주 쓴다. 쪽글을 쓸 때면 ‘엄청난’ 같은 비격식체 강의어(intensifier)도 종종 동원한다. 하지만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꾸밈말을 조심하라는 데는 언어적, 개념적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위대한 사랑”과 “사랑” 중 ‘사랑’을 강하게 만드는 표현은 무엇인가? 언뜻 보면 “위대한 사랑” 쪽이다. “위대한”과 “사랑”이 결합하여 더욱 강건한 사랑의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냥 사랑’보다는 ‘위대한 사랑’이 더욱 강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그저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이 세계의 모든 사랑이 이 단어 안에 쏙 하고 들어온다. 위대한 사랑, 못난 사랑, 철없는 사랑, 때늦은 사랑, 일방적 사랑, 지극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등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의 개념 안에 포섭된다.

하지만 “위대한 사랑”은 오로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사랑만을 담는다. “위대한”이라는 말이 사랑의 힘을 강하게 한다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이 쪼그라든다. ‘위대한 사랑’이 되는 순간 ‘사랑’이 담았던 우주의 모든 사랑들은 ‘축출된다’. 개념적인 범위가 심히 축소되는 것이다.

이 점을 저자와 독자의 관계에서 풀어보자. 저자의 꾸밈말 사용은 표현하려는 의미를 세밀하게 만들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이 해석하고 개입할 범위를 좁히는 효과 또한 갖는다. 때로 저자에게 ‘정확한’ 묘사가 독자에게는 ‘갑갑한’ 설명이 될 수 있고, 저자의 ‘엄밀성’이 독자에게는 ‘숨막힘’이 될 수 있다. 해석의 창을 하나 열면 다른 모든 창문이 닫힌다. 이제 해당 꾸밈말의 창을 통해서만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나는 형용사와 부사 같은 꾸밈말을 무조건 배격하는 글쓰기 교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건 수사적 선언이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수식어의 엄연한 존재는 자신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꾸밈말이 저자와 독자의 개념적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해하고 신중하게 동원할 필요가 있다. 수식어를 안쓰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 쓰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덧.
사랑이 오염된 시대, ‘진정한 사랑’이 사랑을 대신한다. 용서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참된 용서’가 자주 소환된다. 그저 ‘사랑과 용서’면 충분한 세계라면 사랑이 진정하지 않을 리 없고, 거짓된 용서가 존재할 리 없다. 언어를 꾸미려는 충동은 오염된 세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연구란 무엇인가

Posted by on Mar 2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반년 넘게 응용언어학 분야의 연구자 두 분과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두 주에 한 번 온라인으로 만나 그간 각자의 삶을 나누면서 일상, 연구, 수업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주어진 포맷은 없고 각자 성찰적 내러티브를 쓰고 자유롭게 나누는 방식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임한다. 함께하는 두 분께 많이 배우고, 나의 지금을 만들었던 시절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나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지난 모임에서는 ‘연구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이 나왔다. 학문 분야에 따라 연구가 포괄하는 영역을 다르게 인식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응용언어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논문을 쓰는 일에 국한시켜 연구를 개념화하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다. 짐작컨대 ‘논문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연구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고 계실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비롯한 많은 응용언어학/TESOL 연구자들은 ‘연구는 못하고 딴일/딴짓 하느라 바쁘다’는 말을 종종 한다.

한편으로 ‘연구란 무엇인가’를 논의하며 논문보다는 대중적인 작업에 집중한 지난 몇 년이 떠올랐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수년 간 기록하여 에세이를 쓰고, 석사과정 이후 영어교육에 대해 고민해온 바를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내고, 비판적 리터러시 관련 도서의 번역에 참여하고, ‘삶을 위한 리터러시’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정리한 대담집을 내려 하고, 영어로 논문쓰기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만나고.

그러고 보니 시쳇말로 ‘취업과 승진에 도움 1도 안되는’ 일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연구인가, 아닌가? 누군가에겐 연구처럼 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연구가 아닌 딴짓으로 보일 것이다. 울트라 꼰대가 있다면 철없는 이의 ‘헛짓거리’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결론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연구냐 아니냐 선을 긋는 건 짓고 배우고 살아가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치렁치렁 나를 합리화하는 논리인 것 같지만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걸 바꿀 이유는 없다는 것.

재난의 시대,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r 17,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2 Comments

1. 아리조나 투산에 있는 한 친구는 “고립되거나 혼자 계신 분을 알고 있다면, 그들이 뭔가 필요하다면 알려줘. 살 수 있는 거면 얼마든지 사다가 그분들 집 앞에 놓아줄 수 있으니까.”라는 포스트를 올렸다. 울컥한 나는 하트를 날렸다. 그냥 많이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쿠팡맨’ 노동자가 떠올랐다.

2. 한국사회는 국민성의 성숙으로 사재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물류와 배송시스템, 배달노동자들의 혹독한 노동으로 사재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우리는 종종 피땀과 노동, 시스템과 ‘착취’를 자랑스런 문화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나, 반성한다.

3. 무지와 혐오의 높은 상관관계처럼 조금도 이해하려 들지 않음과 비웃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대담을 나누었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최근 한 교회의 ‘분무기 사건’을 무시하듯 웃어 넘겼던 일을 돌아본다. 그리고 내가 몇주 전 어떤 ‘가짜뉴스’에서 뜨거운 물을 자주 먹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그냥 믿어버렸던 일을 떠올린다. 돌아볼수록 나의 어리석음은 크고도 깊은데 누군가의 ‘어리석음’을 쉽게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숨을 고르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4. 몇 주만에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평소 지하철 안팎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무료급식소는 한 달간 문을 닫았고, ‘판을 깔고’ 야채나 헌옷가지를 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바이러스에겐 국경도 인간도 없다지만, 인간이 만든 세계는 고통을 차별적으로 분배한다.

5. 세계 각지에서 계엄령에 준하는 조치들이 내려지고 있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이 있으나 국가 보건방역시스템의 방만함과 무능함을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식으로 해결하려는 측면은 없는지 살피게 된다. 질병 재난 시대의 사회가 새로운 온라인 교육을 요구하는 만큼 새로운 온라인 시위와 정치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시기는 아닐지.

6. Extreme disasters require radical solidarity. Our time and space have changed forever and social distancing prevails: Love needs to weave us together tight and sound. The ‘new normal’ of this pandemic era should be trust and care on an institutional and social level. Rampant capitalism needs to be quarantined and revolutionary regimes imagined. We cannot go back.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태도가 뭐 그리 중요한가

“태도가 중요한가? 내용이 중요하지!”가 가정하는 것들

1. 태도는 내용이 아니다.
2. 태도가 어떻더라도 내용은 읽힌다.
3. 회사 미팅에서 브리핑을 할 때 누워서 껌씹으며 잠옷차림으로 하더라도 정확한 정보만 전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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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차가 확연한 대화 상황에서 강자가 약자의 태도를 문제삼는다면 그것으로 매우 정치적이며 억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대등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태도가 뭐가 중요한가’라고 말한다면 적절치 않다. (1) 상대가 태도와 내용을 완전히 분리해서 처리한다는 보장이 없고, (2) 부적절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내용을 읽기 전에 상대를 읽으며, 그렇게 읽은 상대의 태도와 매너가 내용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3번을 실천하면서 그런 주장을 한다면 진심은 어느 정도 받아들여줄 수 있겠다.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r 11,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얼마 전 낸 촛불집회 관련 논문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우리에게 충분한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아카이빙(archiving)’의 부재는 정부, 언론, 시민단체, 정당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였다. 탄핵정국을 관통한 집회는 건국 이래 가장 큰 거리시위로 불리지만 체계적이며 풍부한 자료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번 사태는 어떨까. 백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실행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부디 관련자들이 이번 사건을 꼼꼼히 기록하고 면밀히 분석하고 교훈을 이끌어내고 쓸 수 있는 자원으로 배포하는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빈다. 무엇보다 ‘복기’에 돈을 쓰는 게 제대로 돈을 쓰는 일임을 정부와 지자체, 유관 기관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2. 오래 전 한 후보의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대선후보”와 “돼지 흥분제”가 한 텍스트 내에 동시에 오른 적이 있다. 역겨운 내용이었다. 이로써 그는 단지 한국정치 뿐 아니라 텍스트의 역사를 오염시켰다. 오늘 아침에는 모 당이 한 기업 총수를 소환하며 기부를 종용(?)하는 포스터를 보았다. 그것 또한 기이한 언어들의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말도 안되는 말을 가능하게 하는 말같지 않은 행동들은 깊은 탄식을 부른다.

3. 2006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영문 제목은 <The Host>이다. 일부 언론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host)를 마치 괴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어떤 확진자도 숙주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세계에서는 host가 괴물일지 몰라도 이 세계에서는 인간이라는 것. 어떤 측면에서 ‘숙주’로 여겨질 수밖에 없지만 온전한 인격체로서 대해야 한다는 것. 이 둘을 적절히 조화할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4. <삶을 위한 리터러시> 속편으로 <재난 시대의 리터러시>를 고민해 본다.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듣고 연결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재난’ 덕에 첫 책도 나오기 너무 힘들다는 건 안비밀. 작업이 길어지니 조금은 기운이 빠진다. 자연의 봄만큼 마음의 봄도 어서 왔으면 좋겠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사석’과 공적 담화

일부 사람들이 굉장히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석에서 한 말은 기록되어도 ‘사석’에 머문다는 것이다. 세상 제일 편한 사람들과 한 이야기라도 활자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순간 공적담화의 영역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법적, 윤리적, 문화적 구분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물.리.적.사.실.이다. 이걸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잘 하는 말로는 “그냥 말일 뿐인데 뭐” (당신에겐 말일 뿐인데 듣는 사람한테는 무기라고), “농담으로 한 건데 뭘 그렇게까지” (당신 마음 속에서는 농담인데 나에게는 모욕이라고) 등이 있다. 할 말을 다 퍼붓고 “그냥 내 마음 속 생각이었어”하면 아무 일이 없어진다고 믿는 것만큼 한심한 것은 없는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더 많은 연결, 더 많은 분열

Posted by on Mar 10,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아마도 우리는 역사상 타인의 삶을 가장 많이 읽어내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책을 덜 읽는다고 하지만 뉴스와 블로그, 소셜미디어와 채팅방의 텍스트로 순간순간을 채운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연대로 나아갔는가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더 많이 읽고 더 안다고 생각할수록 넘지 말아야 할 선,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금,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할 경계만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연결이 많아질수록 오해는 증가하고 상처는 깊어가고 곱씹는 밤은 늘어간다. 진실로 슬퍼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기를. 아파하는 자에게 함께 아파할 벗이 있기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의학 메타포 단상 (기사발췌+약간의 해설)

Posted by on Mar 10, 2020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1. 환자는 질병과 싸우는가? 그는 파이터(fighter)인가? 그렇다면 질병이 심각해지거나 그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충분히 열심히 싸우지 않아서 병에 굴복한 것인가? 질병은 적이고 나는 파이터이며 호전이나 악화는 승리 혹은 패배인가?

환자를 파이터로 개념화하는 것은 어떤 장점과 한계를 갖는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환자를 ‘싸우는 존재’로 생각해야 하는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전투에 임하듯 병과 부딪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2. 우리는 종종 물리적 현상과 메타포를 혼동한다. 잘 알려진 Lawrence Williams와 John Baugh의 연구는 사람들이 따뜻한 음료를 들고 면접에 임할 때 피면접자의 성격을 ‘warm’하다고 판단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보고한다. 차가운 음료를 들고 있었던 참가자들은 반대의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우연인가?

3. 또 다른 연구(Chen-Bo Zhong & Katie Liljenquist, 2006)는 소위 ‘멕베스 효과(Macbeth effect)’를 보고한다. 자신의 죄과에 대해 생각해 보길 권유당한 참여자들은 연구 참여 선물로 세정제를 택할 확률이 높았다. 윤리적인 측면의 ‘더러움’을 신체적으로 청결하지 못한 것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단어 ‘dirty’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윤리적 영역과 신체적 영역 모두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의학에서의 군사 메타포는 파스퇴르가 1860년대에 세균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기 이전부터 사용되어왔다. 시인 존 던은 질병을 “siege…a rebellious heat, [that] will blow up the heart, like a Myne”이나 “Canon [that] batters all, overthrowes all, demolishes all…destroyes us in an instant.”와 같이 표현한다. 병을 포위공격과 포탄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5. 17세기에 가장 저명한 의사였던 Thomas Sydenham은 의학에 군사 메타포를 들여온 사람으로 기억될 만하다. 그는 질병의 절멸(annihilation)을 의학의 목표로 삼았다. 자연스레 “내부의 적을 하제와 해열제로 공격(attack)한다”는 표현을 썼다. 질병의 치료가 싸움이라면 당연히 전략전술이 필요할 것이다.

6. 우리는 의학 메타포를 내면화해 왔다. 이제는 그런 표현들이 메타포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의학용어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그것의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영향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전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https://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4/08/the-trouble-with-medicines-metaphors/374982/

Intelligence 그리고 사이(inter-)

Posted by on Mar 9, 2020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개념적인 측면에서 “intelligence(지능)”을 “In”+”telligence”로 오분석하는 경우가 있다. 지능을 개인의 내부(in)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intelligence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사이, 상호적’이라는 의미의 inter- 와 ‘선택하다, 읽어내다’라는 의미의 legere 을 만나게 된다. 이에 따르면 지능은 단일 주체가 지닌 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 사이를 읽어내는 능력에 가깝다.

물론 어원을 가지고 당위적 주장을 펼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intelligence가 파편화된 개인의 자질로, 순전히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세태 속에서 그 어원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일이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지능은 언제나 관계적이며 사회적이라는 것, 다양한 존재 사이에(in-between)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맥락적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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