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붙 그리고 글쓰기

가설

1. 죽음의 지평 앞에 선 사람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두께에 끌린다. 이것은 외경(畏敬, awe)과 비슷한 종류의 감각이다.

2. 글쓰기에 몰입하는 힘은 시간여행의 기쁨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흔히 쓰는 동안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고 하지만 반대다. 겹겹의 시간이 분해되어 화면에 유성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3. 펜끝에서 다양한 시간을 끄집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을 작가라고 부른다. 수많은 시간을 엮어 내 작품의 시간(the time of my work)으로 만드는 사람들.

4. 자기계발서의 시간은 대개 납작하다. 그 납작함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매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외경의 빈자리에는 종종 경멸이 자리잡기도 한다.

5. 글쓰기는 Ctrl+C, Ctrl+V 사이에 저자의 인생이 개입되는 행위다. 카피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긴 하지만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정교한 베끼기다. 각자의 삶이 다른만큼 글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뿐.

#삶을위한리터러시

인간 대 기계? 인간과 기계!

Posted by on Jun 18, 2019 in 과학, 단상, 집필 | No Comments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인간만의…”,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의 생존법”과 같은 수사는 인간과 인간을 비교하고 서로 경쟁하는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타인과 함께 잘먹고 잘사는 꿈을 꾸며 실천하는 인류였다면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공존과 시너지를 꿈꾸지 않았을까? <인간VS기계>가 아니라 <인간&기계>가 더 중요한 화두가 되지 않았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독서, 소유가 아닌 가로지르기

1.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한국어-영어 바이링궐/바이컬처럴’로 키우길 바라는 나라에서 ‘다문화-‘는 차별과 배제의 접두사다. ‘글로벌 시티즌’이 될 것을 주문하는 사회임에도 ‘다문화교육은 다문화가족 구성원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이같은 자기분열적 인식은 외국어 문화자본과 계급간의 일그러진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대다수 국민에게 ‘외국어’에 속하는 언어는 영어를 비롯해 몇 개 되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2. 장면 1. 한 카페.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각자 노트북을 놓고 여행 계획을 짜고 있다. 책상에는 유럽 여행 책자 몇 권이 널브러져 있다.

“사진 볼래? 지난 번에 갔다 오면서 찍은 거.”
– “어어 보자.”
“이건 OOO고… 이건 OO…”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저 장애인은 누구냐?”
“누구긴 누구냐 나지. 새X야.”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장면 2. 하교시간, 교복 입은 남자 고등학생 두 명.

“야 음료수 사줘.”
– “내가 왜 사. 이 ㅆㅂㄴ아.”
“지난 번에 샀잖아. ㅆㅂㄴ 기억도 못하냐?”
– “웃기고 있네.”

두 남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여성을 극도로 비하하는 욕설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유쾌한 우정의 과시’였을까? 남자를 비하하는 상황에 왜 여성에 대한 비속어를 쓰고 있는 것일까.

어제 오늘 겪은 두 장면은 일상어에 스며든 장애인, 여성 차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마 ‘장애인을 비하하지도 않았고, 여성혐오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구체적 대상을 향해 표출되는 차별과 혐오는 내면에 스며든 차별과 혐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3. 테이블에 둘러 앉아 한 학생의 교과서 필기를 열심히 베끼는 사람들. 공부 잘한다는 학생의 필기이니 믿을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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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어머니들이었다.
자식의 글을 대신 써주고 자식의 삶을 대신 사는 이들. 그리고 이를 강제하는 구조.

친구의 이야기에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4. 어떤 책을 읽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어떻게 읽느냐, 나아가 어떻게 사느냐다.

이와 관련하여 J. Rufus Fears 교수는 한 강연에서 Dietrich Bonhoeffer와 Otto Thorbeck의 악연에 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 모두 성경과 일리아드, 소포클레스의 저서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다양한 고전을 접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Bonhoeffer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Thorbeck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는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다른 자리에 앉게 했을까?

5. 나에게 읽기는 문자 조합의 해독(decoding)이 아니라, 삶의 연장(extension)에 가깝다. 물론 텍스트의 의미를 충실히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읽어낸 텍스트는 어디로 향하는가? 어디에 녹아드는가? 그 방향이, 자리가 중요하다. 결국, 어떻게 읽는가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한국 영어교육을 생각할 때 가장 갑갑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해독에 발이 묶여 해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행위로의 도약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

6. 이런 의미에서 행간읽기(reading between the lines)는 행간쓰기(writing between the lines)로, 이는 다시 선을 넘어서 살기(living beyond the lines)로 확장되어야 한다. 행간은 읽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쓰는 것이고 이를 통해 다른 삶을 사는 행위인 것이다.

저자의 말이 만들어 낸 행간은 해석의 공간이 되고 나아가 삶의 자리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의 궤적으로 우리 삶의 자리를 구획한다. 놀라운 것은 구획의 목표가 가로지르기에 있다는 것이다.

7. 소유所有가 아닌 월경越境의 독서를 꿈꾼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리터러시 연구의 자기성찰

1. 독서를 할 때 텍스트 자체의 독해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재독을 할 때에는 전자에 할당되는 인지적 자원이 줄면서 경험의 허락되는 자원이 확연히 커진다. 그런면에서 재차 읽는 행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정을 약속한다.

2. 그런 면에서 여행이건 영화감상이건 독서건 ‘다시’는 질적으로 다른 반복이다. 많은 경우 첫 읽기는 저자에게로 가는 길이지만 다시 읽기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다시 읽지 않았다면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읽기의 이런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3. 월터 옹의 <구술문자와 문자문화>는 두 문화의 차이를 언어시스템의 차이가 아닌 정신성(mentality)의 차이로 설명한다. (문예출판사의 번역본은 ‘정신구조’라는 용어 사용) 두 문화의 차이에 대한 논의도 놀랍지만 책의 모두에 강조하는 바는 리터러시 연구자들에게 강력한 ‘메타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구술문자와 문자문화에 대한 차이는 언제나 문자문화에 익숙한 이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는 ‘둘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사실 한쪽의 멘탈리티를 장착하고 둘을 볼 수밖에 없다. 공평무사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연구자의 시선만이 있다. 세계는 단숨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한땀한땀 직조된다. 과학사회학이 과학에 대해 던지는 경고를 월터 옹은 리터러시 연구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셈이다.

4.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그의 자전적 회고 <문맹>에서 자신의 고향 헝가라를 떠나 스위스로 이주한 자신이 처했던 언어적 상황을 그린다. 새로운 땅에서 프랑스어에 대해 ‘문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 아름다운 나라가 “‘통합’이나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함”을 말한다. (91쪽)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험과 같이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언어 앞에서 ‘문맹’이 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경계 안에서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한 리터러시를 상정한다. 한국어 리터러시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5.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이 옳지 않은 견해임을 알 수 있다. 리터러시는 언어라는 기준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경험과 지식이라는 기준으로 구획되기도 한다. 특정 직업군마다, ‘덕질’의 영역마다 리터러시의 너비와 깊이가 달라진다. 성장배경이나 정치적인 견해차가 뚜렷한 경우에도 리터러시의 색깔이 달라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리터러시의 복수성과 소통(불)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나의 리터러시가 아니라면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소통의 지평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공론장에서 ‘문해력’ 타령은 타당한 일인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문해력 때문’이라는 말은 폐기 대상이 아닌가? 어떤 세계에 다다를 때 이전의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문맹’이 될 수밖에 없다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말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6. 이 사회의 공론장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사막 메타포를 적용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 사막이 있다. 그 사막에 가기 싫다.’

덧. ‘문맹’이라는 용어를 쓸 때마다 다른 용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고유명사를 차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그대로 썼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Jun 9,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학기가 저물고 있다. 이번 학기 학생들의 반응을 도통 알 수 없어 힘들었던 과목이 코퍼스 언어학 개론이었는데 기말에 한 학생이 코퍼스로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해주어서 마음이 조금 풀렸다.

2. 방학에 뭐할지 마음을 먹었다. 늘 그렇듯 휴식과 읽기쓰기, 그리고 강의다. 별일이 없으면 7월 말에 진주문고에서 독자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주변에 계신 분들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3. 다음 학기 대학 안에서 뭐하게 될지 정해진 게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살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이제껏 걸어온 길이 사라진다 해도 계속 걸을 수 있고 걸어야만 한다.

4.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주제로 몇몇 교원학습 공동체 선생님들과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도 선생님들과 많이 만나 궁리하며 고통과 희망을 나누고 싶다. 호흡이 긴 공부모임도 괜찮을 것 같고.

5. <단단한 영어공부>의 판매가 추락(?)하고 있는 가운데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어머니와 나> 때도 그랬지만 출판된 책이 잊히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내 책보다 훨씬 더 공을 들인 책들도 빛의 속도로 기억에서 사라지는 걸 보면 오래 살아남고 있는 걸까.

6. 돌아보니 수년 간 나의 현장은 강의실 안에 머물렀다. 좀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좀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 좋아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뇌피셜’이 늘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 아닌가 싶다.

7. 공들여 쓴 글은 거절당하고 휘리릭 써내려간 글은 게재가 되는 걸 보면 역시 세상은 운이다. (먼산)

8. 리터러시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복잡한 문제다. 리터러시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정연하게 풀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텍스트 중심 리터러시 비판

1. 리터러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존재하지만 그 기본이 잘 읽고 잘 쓰는 데 있다는 점을 부인하긴 힘들다. 문해력의 중심에는 텍스트 즉, 문文이 있는 것이다.

2. 텍스트가 리터러시를 정의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리터러시는 필연적으로 텍스트 밖의 세계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잘 읽고 잘 쓰는 것은 텍스트와 관련된 능력이지만 “a literate person”은 종종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3. 이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안읽은 것까지 읽은 척하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그럴듯하게 써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텍스트를 얼기설기 덧대곤 하는 것이다.

4.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 이해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리터러시는 개인에 내재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행위(social practice)이기 때문이다. 리터러시가 골방에서 조금씩 자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힘과 의미는 언제나 사회문화적, 역사적, 관계적 맥락 하에서 실현된다.

5. 따라서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는 두 가지 면을 고려해 재정의되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다.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은 모름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며, 모르는 것보다 아는척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다. 두번째는 사회문화적 컨텍스트와 대화상대에 대한 민감성이다.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은 안다고 다 말하지 않는다. 도구는 휘두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6.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아는 것을 모른척 하는 것. 무지의 인정과 지의 억제. 이 두 가지는 텍스트에 대한 지식을 넘어 삶의 양태에 관한 문제다.

7.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컨텍스트에 대해 겸손해지는 사람들이 있고, 텍스트를 읽을 수록 자신이 커지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텍스트를 먹고 자란 자신을 바라보지만 전자는 텍스트를 통해 커진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수많은 이들이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안 읽고도 읽은 척 할 수 있는’이라는 표현은 징후적이다.

8. 해즐리트의 다음 말은 리터러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정직한 사람은 모욕을 주는 결과가 되더라도 진실을 말하며, 잘난 체하는 사람은 모욕을 주기 위해서 진실을 말한다.” — W. 해즐리트

역경이 눈에 보여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진실을 알지만 누군가를 위해 침묵할 수 있는 지혜.

9. 리터러시의 발달은 자기성찰과 컨텍스트에 대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텍스트만 비대해진 사람은 맥락 없이 말을 휘두른다. 기사의 내용에 관계 없이 언제나 같은 댓글을 다는 사람들처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무지의 신

“대한민국에 영어교육 전문가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답글을 우연히 보았다. “내 주변에 전문가가 없다”를 습관적으로 ‘대한민국에 전문가가 없다”로 바꿔쓰는 분들이 있다. 전문가 자리에 오만가지를 넣어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지닌 분들이다.

언젠가 소위 ‘글로벌 대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만트라처럼 여기는 생각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인재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 담장 바깥에 더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HR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무림고수’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지평 너머에는 반드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 세계는 당장 볼 수 없기에 일종의 ‘신비’로 존재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좁디좁은 나의 세계를 우주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일이자 자신을 신의 자리에 앉히는 행위다. 그렇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무지의 신’이 탄생한다.

나 자신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새겨야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Voices of the Mind

Posted by on Jun 7, 2019 in 강의노트, 링크, 사회문화이론, 집필 | No Comments

대표적인 비고츠키 연구자 중 하나인 James Wertsch의 책 <Voices of the Mind>가 박동섭 선생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언급한 인용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 중 일부를 옮겨놓는다.”

“이 책은 인간의 ‘마인드(정신 활동)’가 도구나 타인,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발생해 변화하는지를 밝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흐친의 ‘목소리’와 ‘대화’, ‘발화’ 개념을 핵심 보조선으로 채택해 ‘매개된 행위(mediated action)’라는 ‘새로운 분석단위’를 제시한다. 이 분석단위를 통해 볼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매개하는 ‘도구에 매개된 행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언어에 매개된 행위’가 인간의 정신기능을 밝히는 핵심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조건과 도구에 좌우되지 않고 머리만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주체’가 아니다. 즉, 인간의 행위는 도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고, 외계(조건), 도구와 일체되어 행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실제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도구에 매개된 행위라는 것의 의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 책은 인간의 ‘마인드’를 닫힌 자기완결적 혹은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열려 있고 불완전한, 나아가서 무언가를 항상 지향하는 행위(action)의 산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워치는 ‘행위’와 ‘목소리’, 기호적 매개, 그리고 매개된 행위의 문화적, 제도적, 역사적 상황을 설명해 냄으로써, 비고츠키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미래의 심리학 이론과 실천의 확장을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비고츠키 아이디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바흐친의 대화론을 도입해 언어적 기호 매개의 ‘정치화(精緻化)’를 설명해 낸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55417

#비고츠키 #사회문화이론 #Wertsch

언어학 그리고 시간

언어학의 분과를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시간의 스케일이라는 측면에서 살피는 일 또한 흥미롭다. 예를 들어 심리언어학은 기본적으로 밀리세컨드(ms, 1/1000 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언어현상을, 대화분석(conversation analysis)는 보통 0.1초 단위에서 벌어지는 언어현상을, 형식언어학은 대개 문장이 발화되는 수 초간을, 담화분석은 사회문화적 변동을 수반하는 시간 속에서 텍스트를 다룬다. 물론 이들 영역에서 시간이 가지는 지위는 상이하다. 심리언어학은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언어를 다루기에 시간은 주요한 변인이자 설명원리이지만 형식언어학에서는 시간이 거세된 채 문장의 구조와 의미가 기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담화분석의 경우 개념적 토대에서는 시간이 중요하지만 실제 분석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비고츠키와 장애

Posted by on Jun 3,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한 세기 전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아래 기사의 제목과 같은 맥락의 주장을 펼쳤다. 그는 장애를 한 개인 안에 있는 결핍으로 보지 않고 개인과 사회문화적 환경의 상호작용의 문제로 보았다. 나아가 장애를 하나의 정적인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발달의 한 단계로 설정하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은 단지 장애인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이며 사회가 인간을 대하는 수준의 문제가 된다. 잘못 설계된 도시는 일부의 사람들만을 환영한다. 그 결과는 철저한 배제와 비용의 전가다.

‘비장애인’은 ‘건강하고 이상이 없기’ 때문에 비장애인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물리적 환경이 그의 몸과 상호작용하기 용이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비장애인’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비장애인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이를 ‘정상’이라고 호명하는 것만큼 비정상적인 것이 있을까.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명을 건설하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황당할 것이냐 말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그런 일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정상’이 ‘정상’을 구축하고 ‘비정상’을 배제하고 축출하며 차별하는 야만은 엄연히 우리 곁에 있다.

http://www.ziksir.com/ziksir/view/8248?fbclid=IwAR3vvGIxQEdWy-BLq_J9vvzqZM7pvKJZkBpresahR6do48OZ4EXrx-UKR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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