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삶에 대한 권리로서의 책읽기

1. 읽기는 내면의 삶(the inner life)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주를 팽창시킨다. 물리적 세계와는 별도로 상상과 기억의 공간을 생성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쓰기를 매개로 공동의 기억(collective memory)이 된다. 심리적 공간이 사회문화적, 담론적 공간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2. 읽기쓰기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는 ‘문자중심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 것이다. 문자는 문자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춤은 춤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세계를 생성하고 연결한다.

3.그럼에도 구텐베르그 은하계 이후 인류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은 압도적으로 문자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내면의 삶과 공동의 기억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어온 일 말이다. 근현대 문명을 모두 긍정할 수는 없으나, 문명의 성장에 있어 문자의 비중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4. 독서교육을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 짓기’라는 관점으로 보는 게 적절하리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지식과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엄청난 양을 습득하지 않아도 내면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갈 수 있다는 말, 넉넉한 영혼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5. 먹고사니즘은 시간을 강탈한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일에 몸은 지쳐간다. 내면의 삶을 가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시대는 크고작은 혁명의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독서가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책을 집어들고 내면의 삶을 키워가는 일을 연례행사로 만드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리는 없다.

내면의 삶에 대한 권리로서의 책읽기를 고민할 때가 아닐까 싶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유튜브 댓글: 재미있는 현상들

Posted by on Jan 10,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 영상에서 기~일게 한 이야기를 정리해서 번호를 매겨 답글을 단다. 여기에 좋아요가 몰린다.

솔직히 몇몇 영상들은 너무 뜸을 들인다. 그래서 이런 댓글이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것 같다. 블로그 글 중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 두어 페이지 하고 본론은 끝에 한 문단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영상의 경우에는 미괄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속도의 문제가 크다.

2. 예전의 영상에 ‘이거 OOOO년에도 듣고 있는 분?’이라는 답글이 달리고 여기에 엄청난 좋아요가 붙는다.

유튜브 영상 주요 카테고리 중 하나는 ‘리액션’이다. 특히 음악에 대한 반응을 찍어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영상은 원래 영상 못지 않게 큰 호응을 얻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사람들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만큼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소비’한다. 이게 다 외로워서 그런 걸까? (먼산)

3. 긴 영상에 타임 스탬프를 찍어 해당 지점으로 안내하는 답글이 인기를 끈다.

음악 컴필레이션 영상에 이런 댓글이 상당히 많고, 강연 영상의 시작점이나 내용영역을 표시하는 경우도 많다. 텍스트는 휘리릭 보는 스캐닝(scanning)이나 문자검색이 가능하나 영상은 아직까지 이런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타임스탬프 댓글의 인기가 높은 것 아닐까 싶다. 이와 조금은 다르게 자신이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의 타임스탬프를 올리는 경우도 많다. 전자가 ‘공익’에 복무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감상포인트’를 강조하는 것에 가깝다.

#유튜브 #삶을위한리터러시

학술매체로서의 텍스트 vs. 영상

1. 학술매체로서의 텍스트의 위상이 쉽게 추락할 것 같지는 않다. 영상과 이미지의 시대가 된다고 해도 지식과 과학의 언어가 시각매체로 대체될 시기는 한참 멀었다. (얼마나 멀었는지는 나도 모름) 아래에서 ‘인용’을 키워드로 삼아 위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학술글쓰기를 배울 때 인용(citation)은 ‘양념’처럼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문장쓰기, 문단쓰기, 문법 및 구두점 용례, 내용구조 등을 두루 배우고 나서 마지막에 ‘이것도 알면 좋다’는 식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3. 하지만 인용은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중 핵심이다. 학술글쓰기는 자기 경험에 기반해 논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연구와 주장에 기반해 자기 논지를 ‘조립’하는 작업이다. 내러티브와는 다르게 학문 공동체가 쌓아온 자산이 글의 바탕이 된다. 동료/선배 학자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한짝 올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인용(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텍스트와 영상의 사용패턴은 사뭇 다르다. 학술텍스트는 밑줄그어지고, 요약되고, 재진술(paraphrase)된다. 이것은 차곡차곡 쌓이고 정제되어 나의 글에 새로운 스토리로 자리잡는다. 무엇보다 텍스트는 선형적(linear)이다. 논문 50개를 요약하여 하나의 글로 만든다고 해도 최종 산물은 선형적 텍스트다.

5. 텍스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책을 꼭 끝까지 읽어야 된다거나 완벽하게 읽어야 된다는 고집하지는 않는다. 책의 서문만 볼 수도 있고, 목차 중에서 흥미로운 장만 읽을 수도 있다. 학술서의 색인을 펼쳐서 흥미로운 키워드를 골라서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공부 방향에 따라 특정한 주제, 흐름을 가지고 책을 읽어가면서 지식을 쌓고, 생각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일종의 담론 공간(discursive space)을 만들어낸다.

6. 이런 면에서 텍스트는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에 매우 적합한 매체다.

7. 하지만 영상의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는 여전히 소수 ‘덕후’들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상편집 기술 습득의 문제라기 보다는 영상매체를 대하는 사람들의 아비투스에 기인한다.

8. 내가 바라는 주제를 가지고 수십 개의 영상에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 다시 보는 경우가 있을까? 영상 프로듀서가 아니라면 거의 하지 않을 행동이다. 영상을 영상으로 요약하거나, 영상의 특정 부분을 ‘재진술(paraphrase)’하는 영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9. 이러한 이유로 영상을 재조립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은 부족하다. 넷플릭스에서 ‘감동받았던 장면들에 북마크를 하고, 이를 모아서 30분짜리 영상으로 만들기’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1) 그렇게 영상을 대하는 사람이 없으니 (2)그렇게 할 수 있는 기능을 굳이 제공하지 않는다. (1)과 (2)는 동전의 양면이 되어서 ‘다시 볼 거면 처음부터 보거나, 시간을 조정해서 찾아봐’라는 명령으로 돌아온다.

10. 또한 영상을 모아 새로운 영상을 만들었을 때 그 영상이 부드럽게(seamlessly) 이어지기 매우 힘들다. 그런 이유로 여러 영상 소스를 기막히게 편집한 몇몇 영상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리믹스’는 수백년 간 텍스트로 이루어져 왔던 관행이다.

11. 학술논문의 ‘리믹스’를 보면서 수십 개의 영상 소스를 기막히게 엮어낸 동영상을 볼 때 만큼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가? 사실 학술적 글쓰기가 겨냥해야 할 지점 중 하나는 ‘모으고-엮고-재조립하고-변형하고-재구조화해서-나온-글’에 대한 경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2. 약술한 요인들로 인해 종합, 이론화, 주석, 추상화, 재진술, 재구조화 등을 주요한 과업으로 삼는 학술 커뮤니케이션에서 영상이 텍스트를 쉽게 대체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13. 과학과 학술담론은 권력이다. ‘텍스트의 시대가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권력에 대한 의도적 간과를 낳는다. 영상의 외연이 넓어지고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쉽게 텍스트의 몰락을 예견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초안마무리중

리터러시의 위기, ‘배운 놈들이 더한다’

리터러시의 위기를 그저 개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안이하고도 위험하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묻히는 상황에 터한다. 한 사회가 자신의 이슈를 발굴해 내고 이를 사회문화적인 공론장으로, 나아가 제도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가가 리터러시의 척도인 것이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말해야 할 것에 침묵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말할 수 있는 자’에게서 온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해력을 갖춘’ 이들, ‘말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이들의 것이다. 빈곤이 가지지 못한 자의 책임이 아니듯 비문해는 문해력 습득에 실패한 자의 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배운 놈들이 더한다’는 리터러시를 철저히 사유화한 이들에 대한 이 사회의 경고일지 모른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의미생산의 주체 키우기

약 10년 전.
학술 영작문을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이런 활동을 했다.

“이 디지털 카메라로
이곳을 이렇게 또 저렇게 찍어볼게요.
같은 세계라도
다른 각도, 거리를 확보하니
다른 빛깔, 다른 느낌의 사진이 되죠.
물론 여기에서
카메라 모드를 바꿀 수도 있어요.
자동으로 할 수도 있지만
셔터스피드 우선 모드,
노출 우선 모드,
풀 매뉴얼 모드 등을 사용할 수 있죠.

언어는 어떨까요?
한 가지 사건을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이 사진을 보세요.
여러분을 찍은 건 아니지만
어제 밤 피아노를 치던 자기 자신이라고
상상해 보죠.
이걸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까요?
어떤 어휘와 어떤 문법을 동원해서
의미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사진을 통해 세계를 포착하는 일과
언어를 통해 세상을 표현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를까요?

사진을 찍을 때는
어떤 것들을 조절해서
어떤 효과를 얻어낼까요?
글을 쓴다면
어떤 요소들을 조정해서
어떤 의미를 빚어낼까요?
그건 사람들에게
어떤 감각과 생각을 안겨줄까요?

사진과 언어만은 아니죠.
음악도, 미술도, 건축도, 안무도
다양한 요소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체험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를 만드는 주체로서
어떤 역량을 갖추어야 할까요?

여러분에게는 이미
의미를 만들어 내는 기예가 있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죠.
그것을 더 갈고 닦아서
쓸모있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지요.

글쓰기 수업이지만
이번 주에는 이렇게
‘의미생산자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한 문법과 어휘에 대한 걱정은
조금 접어놓고 말이죠.”

돌아보면
초기의 수업에서
더 과감한 시도들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은
‘리터러시’라고 묶을 수 있는
광의의 문해력을 키우는 데
디딤돌이 되는 활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끔은 나 자신이
‘영어선생’으로 규정되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물론 영어를 중심으로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가르치지만
결국 추구해야 할 것은
다양한 미디어를 소화하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의미-디자이너(the designer of meaning) 나아가,
의미생산 주체(the meaning-making subject)가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니 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상 vs 텍스트: 지식생산의 관점에서

영상은 영상대로,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강점과 약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수준을 염두에 두었을 때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함에 있어 텍스트가 여전히 우위를 점하는 대표적 영역 세 가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추상성
‘부재와 존재’를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 표현했다고 하자. 텍스트가 지닌 추상성을 영상이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추상적 개념을 층층이 쌓아올린 구조를 영상으로 구축할 수 있을까?

2. 경제성/생산단가
화장실에 앉아서 텍스트를 통해 생산할 수 있는 세계를 영상으로 생산해낼 수 있을까? 웹소설의 생산속도를 영상이나 웹툰이 따라올 수 있을까?

3. 검색과 인용
텍스트 검색 및 인용의 유연함을 영상이 따라올 수 있을까? 다양한 소스를 엮어 하나의 논리적 구조로 만드는 일에 있어 (1) 단어의 연쇄라는 동일 포맷을 유지할 수 있는 텍스트와 (2) 장르, 해상도, 구성, 색감, 음악, 나레이션 등의 요소들이 울퉁불퉁하게 엮일 수밖에 없는 영상이 같은 수준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삶을위한리터러시 에서. :)

#프리뷰모드

공감의 한계에 관하여

Posted by on Dec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공감을 강조하는 담론에 대해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공감이 갖는 본래적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2.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진정한 공감’은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경험이라는 것이 특정한 몸이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특정한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해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3. 이를 하나하나 풀면 이렇다.

(1)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2) 특정 경험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얻는다고 해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3) 특정 사건과 상황을 깊이 이해한다고 해서 당사자가 평생 쌓아온 이해와 해석의 방식을 체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 즉, 우리는 ‘누군가의 처지와 경험’을 상상(imagine)하는 것이지 경험(experience)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언어(상황을 상상해서 나오는 진술)와 상황 내에서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과 경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5. 문법용어를 빌리자면 공감은 기본적으로 가정법(subjunctive mood)이고, 경험은 과거시제이자 현재완료(진행형)이다. 공감하는 이는 If 절을 피할 수 없고, 동사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If I were you, I would … 에서 I는 you가 아니며 ‘were’는 ‘am’이 아니고, ‘would’는 철저히 생각의 세계에 속한다. If절이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다고 해도 가정과 추측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올 수 없는 것이다.

6. 그렇다고 해서 공감을 무조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한계를 온전히 넘어설 수는 없지만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당 개인의 경험을 ‘그 사람 고유의 경험’으로 봄과 동시에 구조적 요인들의 분출로 보는 것이다.

7. 다시 말해 해당 경험을 순수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요인들이 개인을 통해 세상에 뛰쳐나온 것으로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고유한 경험은 보편적 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고, 보편성에 대한 고민에 기반한 실천을 통해 해당 경험과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온전히 공감할 수 없을지라도 그 경험의 기반을 변화시킬 실천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8. 공감의 언어는 과대평가되었다. 더욱 가치있는 일은 연대의 손길이다. 매끄럽고 완벽한 말보다는 말없이 함께 떠날 수 있는 꾸준하고 투박한 발걸음이 소중하다.

9. 결국 공감의 중요성은 응당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히 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와 닮았다.

10. 알 수 없어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 있다. 다 알 수 없다고 해도 함께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함께 궁리하는 가운데 우리 ‘사이’를, 우리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이해하는 척에서 끝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닫힌 이해가 아닌 열린 실천, 이것이 공감이 지향해야 할 바 아닐까.

리터러시, 망각에 대항하다

1. 긴 글을 읽고 쓴다는 것, 특히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긴 호흡의 대화를 꾀하는 일은 인간의 ‘단기기억’에 대한 사회문화적 반역이다. 하루만 지나도, 아니 문지방만 넘어도, 냉장고 문만 열어도 삶의 흐름을 놓치는 우리를 구해내려는 필사의 노력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 인류는 본격적으로 텍스트를 매개로 한 기억을 축적해 왔다. 텍스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문자를 기반으로 한 기억의 물화와 공유가 문명의 인프라를 이루고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2. 책이라는 매체의 특징은 그것이 문자로 이루어졌다는 것 만큼이나 엮어내는 데 오랜 시간을 요한다는 데 있다. 집필의 과정에서 작가는 시간과 경험을 단어에, 문장에, 그리고 행간에 새겨넣는다. 편집자는 그 과정 하나하나를 모니터하며 텍스트의 방향을 설정하고 스타일을 잡아나간다. 긴긴 시간은 압축되어 텍스트에 담긴다. 점과 같은 짧은 시간은 확대되어 다차원으로 해석된다.

3. 그렇게 시간을 가로지르며 엮어낸 시간, 경험, 개념, 관점이 ‘우리의 기억’으로 확산되고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가치가 드러난다. 세계는 텍스트를 매개로 기록되고, 이것은 다시 우리 머릿속의 기억이 되어 삶을 이해하는 틀이 되고 하루를 살아낼 다짐이 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정보가 된다. 그런 면에서 책은 시간여행의 도구와는 다른 시간-변형의 기계다.

4.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은 구글북스의 N그램 뷰어 데이터에 기반하여 인류의 집단기억이 점점 더 단기 이슈에 집중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행어의 생애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우리가 집단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논의되는 이슈가 더 많이, 더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진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와 타임라인에 기억을 담아놓고 좀처럼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명멸하는 이슈는 불꽃놀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또 다른 불꽃들이 등장하고 우리는 다시 넋을 잃고 바라본다. 불꽃은 스냅샷으로 남을 뿐 서사가, 지혜가 되지 못한다.

5. 우리는 영상 미디어의 급성장과 책으로 대변되는 전통미디어의 쇠락이 어떤 인지적, 사회적 결과를 초래할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가 긴 텍스트를 쓰고 읽고 토론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감각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반드시 텍스트여야 한다든가, 영상이라 안되고 인터넷이라 안된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슈가 등장과 동시에 퇴장한다는 것, 미디어 생산소비의 호흡이 짧아진다는 것은 우리가 담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6.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교육의 방향을 정함에 있어 ‘잊지 않는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지식의 편재, 검색효율의 증가에 따라 암기의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 이러한 변화가 망각을 부추기는 기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정보를 충실히 쌓는 아카이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이를 잘 캐내고 분석하여 가치있는 미디어로 변환하는 방법이 널리 확산되어야 하고,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속보와 단독보다는 상보와 발굴에 더 큰 점수를 주어야 한다.

7. 이런 면에서 나는 리터러시의 문제를 ‘잊지 않기’의 문제로 생각할 때 앞으로 우리사회가 해야 할 일들이 좀더 구체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잊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정보와 매체는 어떻게 반-망각기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인가? 세계가 끊임없이 지워내고 있는 사람들을, 시간들을 어떻게 우리의 작업기억에 머물게 할 것인가?

#삶을위한리터러시

혐오의 연대, 사랑의 연대

Posted by on Nov 9,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민족주의적 이슈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를 외치면서 계급적 이슈에는 “힘들면 노오오오력해서 출세하시든가”를 강변하는 이들이 있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하나가 되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고, 후자의 영역에서는 모두 함께 잘살자는 이들을 비웃는다. 그 와중에 자신은 매우 객관적이며 공정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하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지만, 인터넷의 ‘베스트 댓글’을 보면 이들이 주류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안다. 혐오의 연대는 빠르고 간편하지만 사랑의 연대는 아프고 지난하다는 것을. 미움은 시끄럽게 터져나오고 사랑은 말없이 스며든다는 것을.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빛나지 않아도 좋은

Posted by on Nov 8,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대낯같은 광명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문틈으로 비껴드는 석양의 붉은 햇살, 밤보다 조금 밝은 그림자 위 어스름 달빛, 긴긴 하루를 닫는 새벽별로 족하다. 세상의 빛이 되진 못해도 스러지듯 빛나는 세상 곁에 기댈 수 있어 다행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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