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리터러시’ 단상

1.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슈가 계속해서 터질 때에는 일상과는 다른 리터러시 활동이 벌어진다.

2. 이슈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뉴스와 분석이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3. 관련된 글을 모두 읽어낼 사람은 없다. 단연코 없다.

4. 사람들은 종종 상황을 면밀히 이해하고 견실한 판단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읽는다기 보다는 ‘탈출하기 위해’ 읽는다. 탈출에는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다.

(1) 기존에 갖고 있던 확신을 설득력있게 채워주는 글을 만나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2) 해당 사안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 답해주는 글을 만나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3) 자기가 팔로우하고 있는 ‘논객’이 정리된 글을 올리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4) 뉴스를 읽을 시간이 없는 경우, 기존의 관점과 신념을 가지고 뉴스의 공백을 채운다. 그 결과 팩트가 들어갈 곳에 믿음이 자리를 잡기도 한다.

5. 이 상황에서 몇몇의 ‘논객’은 다른 사람에 비해 좀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이를 정리한 글을 올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면들을 검토했느냐 보다는 자신이 갖고 있는 관점에 맞는 (혹은 자신을 팔로우하고 있는 독자군의 지향에 맞는) 내러티브를 만족스럽게 구성했는가다. 방대한 정보를 엮어 거의 실시간으로 글을 써내기 위해서 어느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하다.

6. 숨가쁘게 터져나오는 속보와 반격, 성명과 수사결과, 논평과 논쟁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전체의 의미를 구성(construct)하기 보다는 의혹과 의심의 미로에서 탈출(escape)한다.

7. 정보와 뉴스의 생산과 유통이 가속화되는 시대, 사람들은 분명 이전보다 더 자주 ‘1차자료’를 접한다. 그러한 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리터러시 역량은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8. 하지만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하며 끊임없이 탈출할 수밖에 없는 숙명에 놓인다. 때로는 그런 쫓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슈 따라가기를 멈추기도 한다.

9.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시대,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을 잃는다. 물론 성실한 읽기로 가공할 속도를 버텨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종종 미로에서 겨우겨우 탈출하고 있으면서 세계를 다 파악한 듯 말하는 이들이 두렵다.

10. 누군가는 미로를 좀더 면밀히 탐색하여 지도를 만들자고 외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미 미로를 빠져나갔다.

11. 느리고 모자란 나는 숨이 가쁘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원어민 중심주의, 능력주의, 고용관행, 그리고 인종차별 (native speakerism, meritocracy, hiring practices, and racism)

원어민 중심주의, 능력주의, 고용관행, 그리고 인종차별 (native speakerism, meritocracy, hiring practices, and racism)

1. 언젠가 지도교수는 ‘비원어민 제자들이 쓰는 표현이나 메타포가 신선해서 잘 봐두었다가 차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카데미아의 최선두에 있는 백인 남성 학자인 그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한참이나 그 의미를 곱씹었다.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가 ‘비원어민 화자’를 ‘표준영어의 교란자’로 보기 보다는 ‘영어라는 언어생태계의 기여자’로 본다는 사실이었다.

2. 이러한 지도교수의 관점은 한편으로 존경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어를 기반으로 한 문화의 가공할 권력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헐리우드 영화가 온갖 아이디어를 집어삼켜 덩치를 키우면서 ‘자연스런’ 문화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느 모습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언어/문화제국주의의 최첨단 무기는 포용과 세련됨이다.

3. 비원어민으로 영어를 쓰는 일은 ‘표준영어’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다. 노력하는 비원어민의 영어구사는 표준영어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고, 표준영어의 권력을 와해시키는 저항이며, 표준영어의 엘리트주의를 깨는 ‘풀뿌리운동’이기도 하다.

4.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개개인의 실력에 방점을 찍으며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는 것과 결코 같을 수 없는 언어습득 환경에서 ‘정확한 언어구사’을 강조하며 ‘객관적 표준’을 강조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소위 표준영어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순응은 능력주의의 신화에 대한 맹신과 꽤나 닮았다. ‘억울하면 노오오오력해서 실력을 쌓고 출세해’나 ‘억울하면 미친듯이 열심히 공부해서 네이티브만큼 영어하고 인정받아’는 오십 보 백 보인 것이다.

5.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원어민 중심주의는 때로 인종주의의 하위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충분한 교육적 배경을 갖춘 네이티브 스피커라 하더라도 ‘너무 한국사람처럼 생겨서’ 인사채용에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발생하거나, 백인에 가급적 금발인 사람을 선호하는 곳이 적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완벽한’ 영어가 인종적 차별 앞에 무릎을 꿇는 형국이랄까. 아무리 영어를 잘해봐야 피부색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6. 원어민 중심주의는 “Native speaker only”라는 광고문구의 형태로 우리 곁에 와 있다. 한국의 차별금지법 초안에 관련조항이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EU의 법률은 “네이티브 스피커 채용/원어민만 지원 가능” 광고가 명시적 차별임을 시사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TEFL Equity Advocates의 포스팅을 참고하라.

“In May 2002 the EC also announced that:

The Commission is of the opinion that the phrase “native speaker” is not acceptable, under any circumstances, under Community law. […] the Commission recommends using a phrase such as “perfect or very good knowledge of a particular language” as a condition of access to posts for which a very high level of knowledge of that language is necessary.”

Native speakers only job ads and EU law

7. 한국의 학교현장에서 이런 주장은 ‘씨알도 안먹힐’지도 모르겠다. 당장 미국의 ‘표준발음’을 기준으로 ‘정확한 영어’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원어민 중심주의의 어두운 면들을 간파하고 이를 지양해 나가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교육적인 것이 아닐까? 원어민 중심주의와 능력주의에 대한 과신, 나아가 인종차별에 이르는 끈을 인식하는 일이야 말로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는 데 있어 튼튼한 버팀목이 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원어민 영어 화자가 아니라 비원어민 영어 학습자/사용자/교수자로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가르치려 들지 마라

Posted by on Oct 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가르치려 들지 마라”가 대세가 된 세상에서 가르치는 게 업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르쳐 본 사람은 안다. 의견과 지식, 팩트와 가치가 칼로 무 자르듯 잘리지 않는다는 것을. 적어도 인문사회과학, 교육학에서 ‘순수한 지식’이라는 것은 순수한 환상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 선생이 되지 않고 선생이 되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요즘, “잘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도리어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언제 어디서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을 길들이는 방법은 그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 드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닐까. 스스로 우둔해지는 자만이 가르치려 드는 이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밤의 정의

Posted by on Oct 3,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구름이 사라진 자리에 붉은 노을이 몰려왔다.

쏟아진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던 영혼들은

급히 어둠에 몸을 숨겼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마음들이 뒤섞인 검은 소용돌이를

밤이라 부른다고 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집회의 원심력과 구심력

Posted by on Oct 2,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2016년 촛불집회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있다.

논문의 주제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글을 써오면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화두가 있다. 그것은 시위가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려는 구심력과 ‘새로운 흐름’을 분출하는 원심력을 어떻게 모두 포섭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시위가 끝나고 여기저기에 떠도는 ‘대첩’이라는 메타포를 접했다. 별로 주목하는 이들이 없는 것 같지만 이번 사건을 규정하는 ‘대첩’ 메타포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다. 직업병이다.)

‘엄청난 화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대첩’으로 사태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단합된 힘으로 상대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대첩’을 저항의 핵심으로 본다면 광장은 일사분란한 동원의 공간이 된다.

‘대첩’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누구든 자신만의 메타포를 만들어 낼 자유가 있다.

하지만 광장이 이제껏 들려지지 않은 목소리들을 품을 수 있는 포용의 공간일 수는 없는 걸까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이 모두 ‘대첩’의 멘탈리티로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꽤나 끈질기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오’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던 이들이다.

모인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포용할 수 있는 생각의 수가 중요한 저항들이 조직되길 빈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응원도 없이 홀로 걸어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응시한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리터러시 교육

Posted by on Sep 30, 2019 in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소셜미디어 시대의 리터러시 교육은 분명 ‘전과시대’와는 달라야 한다. 글을 매개로 하는 관계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이브하게 ‘다양성의 인정과 공존’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담론의 지형은 이미 충분히 파편화되었으며 혐오의 지뢰밭은 도처에 깔려있다. 다만 지혜롭게 자신을 지키면서도 타인과 다른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법을 궁리하는 글쓰기에 대해 함께 고민할 때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타인을 비판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행태가 모여 사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비판의 칼은 늘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들이 중심에 서는 일이 많아졌다. 나만의 어리석은 기우이길 바라지만 가끔 엄습하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힘들다. ‘대화의 불가능성’을 고민하는 단계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대화의 무용성’이 긍정되는 단계는 담론의 아포클립스에 다름 아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타자화하지 않고 타자를 받아들이기

타자화하지 않고 타자를 받아들일 때 우리 자신도 타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다. 타자들이 섞여있는 세상은 중심이 없는 변방의 세계로 ‘나그네들간의 환대’를 가능케 한다. 어쩌면 리터러시교육의 핵심 과제는 ‘타자로 남을 용기’에 관한 문제일지 모른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언어 지켜보기

가슴 졸이며 보고 있는 말 몇 가지

1. 국뽕

“국뽕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국뽕이 차오른다” 등

‘국뽕’이 부정적 뉘앙스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사용되는 경우들이 꽤 많음.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한 사람에게서도 종종 발견됨.

2. 지키다

“OOO을 지킵시다”
“우리가 지킵시다” 등.

정치인을 ‘지킨다’는 표현이 자주 보임.
이 ‘지킨다’라는 말은 거대한 프레임(frame) 안에 위치하는 듯함.
지키는 주체로 ‘우리’가 호명됨. ‘우리/그들’ 이분법이 함께 작동하는 듯함.

3.입을 털다, 씨부리다

“함부로/되는대로 입을 털어서”
“뭐라고 씨부리노” 등.

상대의 말을 지칭하면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음.
상대의 말이 가진 약점을 비판하려고 할 때 이런 말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효과적일지 모르겠음.

4. 종족

상대를 ‘종족’으로 지칭하는 방식.
언어상에 나타난 인종주의적 편향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
종족문제가 아닌데 종족으로 지칭하는 것 자체가 문제.
나아가 종족이 다르면 마구 타자화하고 일반화해도 좋다는 생각은 더 큰 문제.

가면 갈수록 특정 이슈를 둘러싼 소통은 힘들어지지 않나 싶음. 이슈가 터지는 즉시 ‘피아구분’이 ‘논점’과 ‘대안’과 ‘협상’ 등을 집어삼켜버리는 듯함. 피아구분은 거의 매번 타자화(othering)로 이어짐.

리터러시 책 준비하면서 공저자 선생님과 함께 가장 크게 우려했던 부분은 “타자에 가 닿는 소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나 또한 예외는 아님.

의미생산을 돕는 Guided Writing

대부분의 Guided writing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철저히 문법과 어휘를 기반으로 유도된다는 점이다. 문제는 ‘의미의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Although…. willl…을 활용하여 너의 의지를 기술하라.

Although I cannot change the entire system, I will try to change the atmosphere of each community in which I belong.

Although I cannot forgive his fault, I will try to understand his character without prejudice.

또 다른 예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겠다.

2. If 가정법을 활용하여 당신이 공감하고 싶은 대상에 대하여 기술하오.

3. prefer A to B를 활용하여 오늘 일과 중에서 바꾸고 싶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시오.

4. <동명사 is 동명사> 구문(예 Seeing is believing.)을 활용하여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개의 활동을 기술하시오.

5. not so much A as B 구문을 활용하여 사람들은 A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B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시오.

이와 같은 안내는 단순히 특정 구조와 어휘를 활용한 문장 만들기를 넘어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의미에 집중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바람직한 guided writing은 어휘문법적 활용 뿐 아니라 의미생산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삶을위한영작문 #단단한영어공부

부르디외가 밝히는 학문적 작업의 해심

“핵심은 제 작업의 아이디어가 아이디어(ideas)로 개념화되기 보다는 방법(method)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제 작업의 중핵은 사고의 방법, 일종의 사고방식에 있습니다. 좀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저의 방법은 그저 아이디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자신의 학문적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부르디외의 대답:

Cheleen Mahar: CM What would you consider to be the core ideas around which your work has been written?

Pierre Bourdieu: The main thing is that they are not to be conceptualised so much as ideas, on that level, but as a method. The core of my work lies in the method and a way of thinking. To be more precise, my method is a manner of asking questions rather than just ideas. This, I think is a critical point.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