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터러시, 망각에 대항하다

1. 긴 글을 읽고 쓴다는 것, 특히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긴 호흡의 대화를 꾀하는 일은 인간의 ‘단기기억’에 대한 사회문화적 반역이다. 하루만 지나도, 아니 문지방만 넘어도, 냉장고 문만 열어도 삶의 흐름을 놓치는 우리를 구해내려는 필사의 노력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 인류는 본격적으로 텍스트를 매개로 한 기억을 축적해 왔다. 텍스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문자를 기반으로 한 기억의 물화와 공유가 문명의 인프라를 이루고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2. 책이라는 매체의 특징은 그것이 문자로 이루어졌다는 것 만큼이나 엮어내는 데 오랜 시간을 요한다는 데 있다. 집필의 과정에서 작가는 시간과 경험을 단어에, 문장에, 그리고 행간에 새겨넣는다. 편집자는 그 과정 하나하나를 모니터하며 텍스트의 방향을 설정하고 스타일을 잡아나간다. 긴긴 시간은 압축되어 텍스트에 담긴다. 점과 같은 짧은 시간은 확대되어 다차원으로 해석된다.

3. 그렇게 시간을 가로지르며 엮어낸 시간, 경험, 개념, 관점이 ‘우리의 기억’으로 확산되고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가치가 드러난다. 세계는 텍스트를 매개로 기록되고, 이것은 다시 우리 머릿속의 기억이 되어 삶을 이해하는 틀이 되고 하루를 살아낼 다짐이 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정보가 된다. 그런 면에서 책은 시간여행의 도구와는 다른 시간-변형의 기계다.

4.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은 구글북스의 N그램 뷰어 데이터에 기반하여 인류의 집단기억이 점점 더 단기 이슈에 집중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행어의 생애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우리가 집단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논의되는 이슈가 더 많이, 더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진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와 타임라인에 기억을 담아놓고 좀처럼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명멸하는 이슈는 불꽃놀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또 다른 불꽃들이 등장하고 우리는 다시 넋을 잃고 바라본다. 불꽃은 스냅샷으로 남을 뿐 서사가, 지혜가 되지 못한다.

5. 우리는 영상 미디어의 급성장과 책으로 대변되는 전통미디어의 쇠락이 어떤 인지적, 사회적 결과를 초래할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가 긴 텍스트를 쓰고 읽고 토론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감각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반드시 텍스트여야 한다든가, 영상이라 안되고 인터넷이라 안된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슈가 등장과 동시에 퇴장한다는 것, 미디어 생산소비의 호흡이 짧아진다는 것은 우리가 담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6.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교육의 방향을 정함에 있어 ‘잊지 않는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지식의 편재, 검색효율의 증가에 따라 암기의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 이러한 변화가 망각을 부추기는 기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정보를 충실히 쌓는 아카이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이를 잘 캐내고 분석하여 가치있는 미디어로 변환하는 방법이 널리 확산되어야 하고,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속보와 단독보다는 상보와 발굴에 더 큰 점수를 주어야 한다.

7. 이런 면에서 나는 리터러시의 문제를 ‘잊지 않기’의 문제로 생각할 때 앞으로 우리사회가 해야 할 일들이 좀더 구체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잊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정보와 매체는 어떻게 반-망각기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인가? 세계가 끊임없이 지워내고 있는 사람들을, 시간들을 어떻게 우리의 작업기억에 머물게 할 것인가?

#삶을위한리터러시

혐오의 연대, 사랑의 연대

Posted by on Nov 9,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민족주의적 이슈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를 외치면서 계급적 이슈에는 “힘들면 노오오오력해서 출세하시든가”를 강변하는 이들이 있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하나가 되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고, 후자의 영역에서는 모두 함께 잘살자는 이들을 비웃는다. 그 와중에 자신은 매우 객관적이며 공정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하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지만, 인터넷의 ‘베스트 댓글’을 보면 이들이 주류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안다. 혐오의 연대는 빠르고 간편하지만 사랑의 연대는 아프고 지난하다는 것을. 미움은 시끄럽게 터져나오고 사랑은 말없이 스며든다는 것을.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빛나지 않아도 좋은

Posted by on Nov 8,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대낯같은 광명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문틈으로 비껴드는 석양의 붉은 햇살, 밤보다 조금 밝은 그림자 위 어스름 달빛, 긴긴 하루를 닫는 새벽별로 족하다. 세상의 빛이 되진 못해도 스러지듯 빛나는 세상 곁에 기댈 수 있어 다행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독서, 유튜브, 그리고 리터러시 지원 생태계

1.
고교생 몇 명이 각자의 손에 책을 들고 서로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야야야 이 책 표지 봐바바. 환상이지? 책이 어떻게 이렇게 빠졌냐?”

“이 문장 끝내주지 않니? 랩 같기도 하고.”

“여기에서 이런 단어를 쓰다니. 작가가 정말 미쳤어 미쳤어.”

“와 정말 최고의 메타포다.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

“첫 문장 이렇게 시작하잖아? 근데 마지막에 또 이렇게 끝난다. 뭔가 연결된 느낌이지 않아?”

“이거 읽고 나니까 이 작가 다른 작품들도 다 읽어보고 싶다. 같이 읽어볼 사람?”

문학을 가지고 이렇게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처음이다. 왜냐하면 방금 내가 상상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2.
영상은 상황이 다르다.

먼저 나만해도 재미있는 영상을 보거나 하면 링크를 짝에게 보내곤 한다. ‘이거 한번 봐바바’ 하면서. 아주 긴 영상이 아니라면 링크를 공유하는 게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유튜브는 채널을 구독해서 영상을 받아보곤 한다.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이 언제 업로드되나 궁금해하기도 한다.

영상은 검색하면 관련 영상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추가 시청을 유도한다. 거기에 ‘기꺼이’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영상은 내가 써야 할 시간을 처음부터 알 수 있다. 4분 짜리 영상은 4분이면 끝난다.

3.
그렇다면 책도 이렇게 ‘소프트한’ 포맷으로 변화해야 하는가?

사실 이런 시도는 웹소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지만 책이 말랑말랑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크게 변화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식과 이야기의 포맷이 갑자기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텍스트가 스스로의 전통을 무너뜨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리어 밀도있는 지식,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텍스트 사이를 여행하는 일을 지원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의 몸은 텍스트에 적응하기 전 영상 생태계에 먼저 적응한다. 이 점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4.
텍스트가 본연의 자리를 지킨다는 전제 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독서교육은 인스타그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글쓰기 교육은 페이스북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학교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리터러시 교육에 있어 ‘유튜브와 같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인가?
동네와 동네 도서관은 어떻게 모든 주민들을 위한 리터러시 생태계를 만들어 낼 것인가?
연구소와 대학은 리터러시 생태계의 빈 지점들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5.
영상도 텍스트도 아는 만큼 보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상은 지각(perception)에 기반한다. 매우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면 소리와 이미지는 지각되고 처리되는 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텍스트는 기호이다. 기호는 실제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며, 무언가를 상징하는(stand for)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문장을 읽어가며 해당 언어에 대응하는 개념이나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한번 더 그려내야 한다.

이 근본적인 차이가 텍스트와 영상의 소비 및 공유행태의 차이를 낳는다. 결국 텍스트를 영상과 같이 소비할 수도 공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영상이 소비되고 공유되는 방식에서 텍스트가 배워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6.
책은 여전히 책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리터러시를 지원하는 플랫폼의 진화는 이제부터다. 어떤 방향이어야 할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시점이 다가오는 것 같다.

페이스북 정도의 범용 플랫폼이나 서적판매와 블로그 생태계가 결합된 여러 서점 사이트를 넘어서는 리터러시 지원 플랫폼이 존재할 수 있을까?

7.
이미 많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일부 사교육에서 텍스트와 영상을 아우르는 리터러시 교육이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한숨이 나오는 건 중고교를 거치면서 읽기쓰기의 지평이 급속하게 축소된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8.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의 중요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미디어 생태계의 성장와 소비행태가 지속된다면 텍스트를 지긋이 읽어내는 능력이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계급간 리터러시 격차가 더욱 커질 것이다. 메리언 울프는 영상과 텍스트를 모두 소화해 낼 수 있는 유연한 뇌를 키우자고 말하지만, 그런 능력이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광활한 인터넷의 세계가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학습의 장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헤어나올 수 없는 구덩이가 되듯, 밀도있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에 있어서도 계급간의 격차가 급격히 커질 위험에 있다. 이것은 소통의 위기이며 민주주의의 위기이며 공동체의 위기이다. 이 상황에 대해 좀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고, 그에 기반한 리터러시 지원 생태계의 구축이 필요하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리터러시생태계

온라인, 오프라인, 그리고 독서모임

Posted by on Nov 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관계를 반듯하게 가르는 건 쉽지 않다. 온라인에서 더 속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오프라인에서 자주 만나더라도 형식적인 네트워킹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관계의 양태나 강도는 단순히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나뉘지 않는다. 온라인의 관계가 더 피상적이라고 단정하는 건 온라인에서 우정을 가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오프라인을 그저 피곤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온라인을 자기 성향에 맞는 ‘따스한 사람들’로만 채워놨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둘 사이의 차이가 없는 건 아니다. 오랜 오프라인 지인이 온라인에서 선뜻 동의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 그간의 관계를 기반으로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오랜 시간 좋은 인상을 쌓아왔던 상대라 할지라도 오프라인에서의 언사가 실망스러울 경우 그간의 이미지가 오해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판단하기 쉽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두에 밝혔듯 관계를 성장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쌓는 관계, 자세와 제스처를 협응하며 대화를 나누는 관계는 텍스트로 쌓은 관계와 다른 측면이 있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욱 우월하다거나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온라인에서의 소통과 오프라인에서의 소통은 경험에 다른 질감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플랫폼’으로 매개되는 관계라면 후자는 특정한 날씨, 조명, 공간, 거리, 마실 것, 의자와 탁자, 룸톤(room tone), 목소리, 간식, 웃음 등으로 매개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유대가 주로 텍스트의 얽힘에 기반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유대는 무엇보다 함께 있음(co-presence)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풍성한 텍스트의 향연이 펼쳐지긴 하지만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동시에 감쌀 수 있는 물리적 맥락은 없다. 그에 비해 후자의 경우 대화의 풍성함과 관계 없이 만나는 시간의 구체성이 있고, 이동의 수고가 있고, 기억의 장소성이 있다.

최근 독서모임이 붐이라고 한다. 겨우 한 달에 한 번이지만 나 또한 책읽는 모임에 나가고 있다. 이런 모임이 좋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장점을 결합하려는 시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중 대다수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지식과 지혜를 나누면서도 사람을 만나 함께 있고 싶은 소망이 있다. 관계 속에서 텍스트가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 경험을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차 한잔이 감싸주는 기억을 만들어가고 싶어한다. 이것은 홀로 읽기와는 다른 텍스쳐(texture)를 텍스트에 부여한다.

한편 책을 매개로 하는 만남은 개개인의 고유성이 너무 튀지 않게 만드는 역할도 하지 않나 싶다.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아무 말이나 지껄일 수 없는 공간. 책을 정하고 토론의 룰을 정하는 순간 말과 행동의 한계가 구획되는 공간. 그렇기에 독서모임은 건강한 긴장을 갖지만 급진적 취향과 주장을 적절히 통제하는 공간이 된다.

요는, 독서모임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소통의 역동성을 적절하게 매개한 데 있고, 그 역할을 책이 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흔히 책은 디지털 미디어와 대비되는 오프라인 미디어로 생각되지만 독서모임의 경우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가교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아, 오해는 마시길 빈다. 온라인 커뮤니티 없이 오프라인 독서모임이 굴러가는 경우도 많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온라인에서 종일 텍스트를 접하는 사람들이 오프라인 모임에 합류할 때 책이 훌륭한 매개자(mediator)가 된다는 뜻이다.

덧.

몇 해 전부터 생각만 해온 <First chapters> 읽기모임은 언제 시작할 수 있으려나. 관련 포스트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책 한 권을 모두 읽고 와서 생각을 나누는 방식도 좋지만 저처럼 이책 저책 유랑하길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책의 첫 장 혹은 서문을 꼼꼼히 함께 읽고 나머지를 읽을지는 각자가 결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겁니다. 책읽기를 제안한 사람은 저자 정보, 책 소개를 준비해 오구요. 첫 챕터를 돌아가며 소리내어 읽습니다. 중간중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토론이 진행되죠. 대개의 책들은 첫 장만 꼼꼼히 읽어도 저자의 집필 의도와 전체의 내용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독서모임 포맷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독서모임

PISA의 문해력, 실질적 문해력

최근 다양한 매체에서 리터러시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표준화된 리터러시 개념으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자료 중 하나는 PISA의 읽기능력 평가 결과인데요. 읽기를 포함한 OECD의 PISA 평가는 크게 다섯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참고로 PISA는 OECD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의 약자입니다.)

(1) 읽기 리터러시
(2) 수학 리터러시
(3) 과학 리터러시
(4) 문제해결능력
(5) 협력적 문제해결

PISA에 따르면 읽기 리터러시(통계나 수학, 기타 영역의 리터러시와 구별되는 읽기영역에서의 리터러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주어진 목표를 성취하고, 지식과 잠재력을 성장시키며, 사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록된 텍스트를 이해하고 사용하며 그에 대해 숙고하고 텍스트를 가지고 상호작용하는 행위.”

이와 같은 정의는 일상의 읽기 활동에 관여하는 과정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읽기 평가에 있어 핵심을 이루는 구인(construct)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PISA와 PISA-D 테스트는 읽기를 평가함에 있어 크게 세 가지 축을 상정합니다.

(1) 텍스트 (2) 상황 (3) (읽기) 과정 (혹은 양상)

즉 쓰여진 글, 그 글이 등장하고 논의되는 상황, 그리고 글을 읽어내는 데 관여하는 과정이 중요시된다는 것이죠.

PISA-D( PISA for Development)는 이중에서도 특히 과정(process)에 방점을 두는데요. 크게 다섯 가지 과정이 상정됩니다.

(1)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해(literal comprehension)
(2) 정보 추출(retrieving information)
(3) 전반적인 이해의 형성(forming a broad understanding)
(4) 해석해 내기 (developing an interpretation)
(5)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숙고와 평가(reflecting on and evaluating the content of a text)

즉 어떤 사람이 텍스트를 잘 이해했는지 보려면 텍스트를 이루는 기본 단어와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는가, 해당 문서에서 적절한 정보를 선별해 낼 수 있는가,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진술할 수 있는가, 특정한 관점에서 해당 텍스트를 해석해 낼 수 있는가, 텍스트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가를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평가하기 위해 여러 포맷의 텍스트를 활용하는데요. 에세이나 신문기사 등 연결된 텍스트는 물론 정보를 담은 표나 일정표 등의 텍스트도 활용합니다. 아울러 개인적, 공적 영역의 텍스트, 교육기관이나 직장에서 사용되는 텍스트를 두루 활용하지요.

그런데 저는 PISA 등의 표준화 평가에서 말하는 ‘읽기능력’ 혹은 ‘독해력’이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이야기되는 ‘문해력’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 맥락을 고려한다고는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읽기능력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특정한 텍스트와 맺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요구되는 읽기능력은 단순히 텍스트와 개별 독자간의 관계만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텍스트의 내용 뿐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여기에 이 텍스트가 쓰여진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를 소화하는 능력으로서의 읽기 리터러시는 실제 상황의 반쪽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독해능력이나 쓰기능력을 평가하는 도구는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복잡다단한 맥락과 관계를 온전히 포괄하지는 못하죠. 그렇기에 우리는 텍스트를 완벽히 해석하는 데 필요한 리터러시를 논의함과 동시에 관계와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리터러시를 논의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3: 환유(Metonymy)의 세계 (1)

아래 세 문장을 살펴 봅시다.

a. “버스 파업중이야. 지하철 타고 가.“
b. “빨간 모자 너무 시끄럽다. 가서 한마디 할까?“
c. “손이 모자라서 시간이 배로 걸릴 듯. 사람 좀 더 뽑아주지.“

일상에서 쉽게 쓰고 또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이 문장들 속에 인간이 세계와 언어를 엮어서 인지하는 방식의 작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a를 봅시다. ‘버스 파업중이야’라고 하지만 실제로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은 버스가 아닙니다. 멀고 먼 훗날 자율주행 버스들이 자신의 권익을 찾기 위해 파업을 벌이는 상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SF 속 이야기고, 실제로 파업을 하는 것은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죠. 하지만 우리는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중이야.’라고 길게 말하기보다는 ‘버스 파업중이야’를 택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 대상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그 대상을 가리키는 데 꼭 필요한 정보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문장의 길이도 상당히 짧아지지요.

다음으로 b를 봅시다. ‘빨간 모자’는 그 자체로 시끄럽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모자라면 소리를 내진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빨간 모자 쓴 사람 너무 시끄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빨간 모자’만 써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c입니다. 여기에서 ‘손’은 단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손’을 말합니다. 따라서 손이 부족하다는 것은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이 됩니다. a나 b와 비교할 때 조금 다른 점은 ‘버스’나 ‘빨간 모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부분이 아님에 비해 ‘손’은 가리키는 대상 즉 일할 사람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입니다. 흥미롭게도 영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short-handed’죠. 일손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종종 쓰이는 표현입니다.

Metonymy의 정의

위의 a-c는 모두 ‘환유’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현상의 예시입니다. 인지언어학자들은 환유(metonymy)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합니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준거가 필요한 만큼 Littlemore (2015)의 다음 정의를 차용하도록 하겠습니다.

Metonymy is a figure of language and thought in which one entity is used to refer to, or in cognitive linguistic terms ‘provide access to’, another entity to which it is somehow related. (환유는 언어와 사고의 수사법 중 하나로 한 실체가 관련된 다른 실체를 가리키거나, 인지언어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관련된 다른 실체에 ‘접근지점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환유는 한 언어표현이 특정 대상을 정확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로 연결되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metonymy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라틴어metonymia, 나아가 그리스어 metōnymia에 닿게 되는데, 이것은 “이름을 바꾸기(change of name”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표현에서 ‘빵’은 단순히 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먹거리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를 어원에 빗대어 설명하면 ‘먹거리’가 ‘빵’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죠. 물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이렇게 이름을 바꾸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많은 서구권 국가에서 빵은 주식 중 하나이기에 이런 이름바꾸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환유(metonymy): 몇 가지 예시

그렇다면 이번에는 영어 환유 표현을 몇 개 살펴 보겠습니다.

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펜은 칼보다 강하다.)
e. The White House sees it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백악관은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f. Ireland passed a landmark bill last year. (아일랜드는 작년에 기념비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속담 a에서 ‘the pen’은 필기구가 아니라 문필 즉 글을 쓰는 행위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에 대구가 되는 ‘the sword’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체의 활동을 가리키지요. “The pen”과 “the sword’가 다른 개념으로 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에서 “The White House”는 미국 대통령이 참모와 함께 거주하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를 가리킵니다. 빌딩이 아닌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f에서 “Ireland”는 아일랜드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 의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아일랜드 국가 전체가 아니라 의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예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특정 개념에 접근할 때 종종 해당 개념에 정확히 상응하는 언어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 전반’에 접근하기 위해 ‘펜’을 사용하고, ‘미국 정부’라는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 ‘백악관’이라는 언어를 활용하죠.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간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가 됩니다. 즉 환유는 단순히 언어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구조와 과정을 보여주는 개념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계속)

<참고문헌>
Littlemore, J. (2015). Metonymy: Hidden shortcuts in language, thought and commun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에 관하여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관계를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는 걸 꺼리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있는 글과 메시지의 총량이 분포되는 흐름에 관해서도 더 이상 글을 쓰는 개인의 책임과 깊이 문제로 혐의를 두기를 그쳐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란 건, 더 이상 가능한 관점이 아니다.” (서울비, 2003, <글쓰기 강좌에 대하여> 중에서)

부가 사회경제적 구조를 통해 분배되듯이 글쓰기 능력이라는 문화자본도 사회적, 계급적으로 분배된다. 경제적 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과 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시작하고, 재미를 붙이고, 괜찮은 글을 써내고, 읽을만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글쓰기를 위한 독서를 하고, 때로 출판 기회를 잡고, 그 결과 얼마간의 금전적인 댓가를 얻고, 이 모든 것이 저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한 사람의 재능과 의지로 설명될 수 없다. 다른 문화자본과 마찬가지로 글쓰는 능력은 필자의 성장환경, 물적 토대, 그가 속한 공동체, 사회경제적 구조, 그리고 다양한 교육기회의 영향으로 형성된다. 글쓰기를 개개인의 ‘노오오오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방어하기 힘든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서울비님이 말하듯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은 지탱될 수 없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필요하듯, 저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회가 ‘동원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글 못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순전한 노력으로 일구어낸 ‘필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글 잘쓰는 사람’에 대한 칭송은 ‘글 못쓰는 사람’에 대한 폄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기계적인 능력주의(meritocracy)를 경계한다면 글쓰기 기예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은 거두어 들이는 것이 옳다. 글은 한 천재의 생산물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의 부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지적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개개인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만약 “창의적인 한 사람”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될성 부른 나무’에 사회적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시쳇말로 “몰빵”을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스티브 잡스도 나오고 빌 게이츠도 나오는 것 아닌가? 노벨상도 막 타고 그러는 것 아닌가?

하지만 “창의적인 한 사람”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발현되는 창의성의 네트워크”라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창의적인 팀, 창의적인 학교, 창의적인 회사, 창의적인 사회를 그릴 수밖에 없다. 개별 노드의 특성이 아닌 링크의 효과로서 창의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몰빵”은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기 보다는, 필요한 자본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사회문화적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리터러시 이론의 흐름 또한 이러한 관점을 반영한다. 글쓰기 과정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Flower와 Hayes는 글쓰기의 과정을 인지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들의 연구는 글쓰기 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적인 툴킷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지만, 글쓰기라는 행위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교육적, 이데올로기적 힘을 간과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이들이 제시한 글쓰기에서의 인지모형은 사회적 영향을 반영하는 쪽으로 수정, 발전된다. Street 등을 위시한 학자들은 ‘신리터러시연구(New Literacy Studies)’의 흐름을 주도하며 리터러시의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맥락(context)에 주목한다. 글쓰기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연구하려는 인지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글쓰기의 상황성(situatedness)에 주목하는 연구를 펼친 것이다. 아울러 1990년대 초 Swales를 중심으로 발전된 장르 이론 또한 글쓰기를 하나의 사회적 관행(social practice)으로 파악하면서 텍스트의 사회적 뿌리를 강조한다.

누가 좋은 글을 쓰는가? 노력하는 개인이 훌륭한 저자가 되고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인가? 결과물만 놓고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출판계까지 갈 것도 없이 페이스북만 봐도 글 잘쓰는 분들이 넘쳐나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빙산의 끝자락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글을 써낼 수 있다’는 구호는 ‘읽고 쓰고는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라고 속삭인다. 이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할 리터러시 발달에 대한 책무를 개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나는 논문에 들어간 감사의 말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여전히 이 말을 믿는다.

I typed the dissertation. But we wrote it. (저는 논문을 타이핑했어요. 하지만 쓴 건 나 혼자가 아닌 우리였죠.)

#삶을위한리터러시

‘속도의 리터러시’ 단상

1.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슈가 계속해서 터질 때에는 일상과는 다른 리터러시 활동이 벌어진다.

2. 이슈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뉴스와 분석이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3. 관련된 글을 모두 읽어낼 사람은 없다. 단연코 없다.

4. 사람들은 종종 상황을 면밀히 이해하고 견실한 판단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읽는다기 보다는 ‘탈출하기 위해’ 읽는다. 탈출에는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다.

(1) 기존에 갖고 있던 확신을 설득력있게 채워주는 글을 만나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2) 해당 사안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 답해주는 글을 만나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3) 자기가 팔로우하고 있는 ‘논객’이 정리된 글을 올리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4) 뉴스를 읽을 시간이 없는 경우, 기존의 관점과 신념을 가지고 뉴스의 공백을 채운다. 그 결과 팩트가 들어갈 곳에 믿음이 자리를 잡기도 한다.

5. 이 상황에서 몇몇의 ‘논객’은 다른 사람에 비해 좀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이를 정리한 글을 올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면들을 검토했느냐 보다는 자신이 갖고 있는 관점에 맞는 (혹은 자신을 팔로우하고 있는 독자군의 지향에 맞는) 내러티브를 만족스럽게 구성했는가다. 방대한 정보를 엮어 거의 실시간으로 글을 써내기 위해서 어느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하다.

6. 숨가쁘게 터져나오는 속보와 반격, 성명과 수사결과, 논평과 논쟁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전체의 의미를 구성(construct)하기 보다는 의혹과 의심의 미로에서 탈출(escape)한다.

7. 정보와 뉴스의 생산과 유통이 가속화되는 시대, 사람들은 분명 이전보다 더 자주 ‘1차자료’를 접한다. 그러한 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리터러시 역량은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8. 하지만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하며 끊임없이 탈출할 수밖에 없는 숙명에 놓인다. 때로는 그런 쫓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슈 따라가기를 멈추기도 한다.

9.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시대,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을 잃는다. 물론 성실한 읽기로 가공할 속도를 버텨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종종 미로에서 겨우겨우 탈출하고 있으면서 세계를 다 파악한 듯 말하는 이들이 두렵다.

10. 누군가는 미로를 좀더 면밀히 탐색하여 지도를 만들자고 외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미 미로를 빠져나갔다.

11. 느리고 모자란 나는 숨이 가쁘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원어민 중심주의, 능력주의, 고용관행, 그리고 인종차별 (native speakerism, meritocracy, hiring practices, and racism)

원어민 중심주의, 능력주의, 고용관행, 그리고 인종차별 (native speakerism, meritocracy, hiring practices, and racism)

1. 언젠가 지도교수는 ‘비원어민 제자들이 쓰는 표현이나 메타포가 신선해서 잘 봐두었다가 차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카데미아의 최선두에 있는 백인 남성 학자인 그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한참이나 그 의미를 곱씹었다.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가 ‘비원어민 화자’를 ‘표준영어의 교란자’로 보기 보다는 ‘영어라는 언어생태계의 기여자’로 본다는 사실이었다.

2. 이러한 지도교수의 관점은 한편으로 존경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어를 기반으로 한 문화의 가공할 권력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헐리우드 영화가 온갖 아이디어를 집어삼켜 덩치를 키우면서 ‘자연스런’ 문화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느 모습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언어/문화제국주의의 최첨단 무기는 포용과 세련됨이다.

3. 비원어민으로 영어를 쓰는 일은 ‘표준영어’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다. 노력하는 비원어민의 영어구사는 표준영어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고, 표준영어의 권력을 와해시키는 저항이며, 표준영어의 엘리트주의를 깨는 ‘풀뿌리운동’이기도 하다.

4.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개개인의 실력에 방점을 찍으며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는 것과 결코 같을 수 없는 언어습득 환경에서 ‘정확한 언어구사’을 강조하며 ‘객관적 표준’을 강조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소위 표준영어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순응은 능력주의의 신화에 대한 맹신과 꽤나 닮았다. ‘억울하면 노오오오력해서 실력을 쌓고 출세해’나 ‘억울하면 미친듯이 열심히 공부해서 네이티브만큼 영어하고 인정받아’는 오십 보 백 보인 것이다.

5.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원어민 중심주의는 때로 인종주의의 하위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충분한 교육적 배경을 갖춘 네이티브 스피커라 하더라도 ‘너무 한국사람처럼 생겨서’ 인사채용에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발생하거나, 백인에 가급적 금발인 사람을 선호하는 곳이 적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완벽한’ 영어가 인종적 차별 앞에 무릎을 꿇는 형국이랄까. 아무리 영어를 잘해봐야 피부색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6. 원어민 중심주의는 “Native speaker only”라는 광고문구의 형태로 우리 곁에 와 있다. 한국의 차별금지법 초안에 관련조항이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EU의 법률은 “네이티브 스피커 채용/원어민만 지원 가능” 광고가 명시적 차별임을 시사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TEFL Equity Advocates의 포스팅을 참고하라.

“In May 2002 the EC also announced that:

The Commission is of the opinion that the phrase “native speaker” is not acceptable, under any circumstances, under Community law. […] the Commission recommends using a phrase such as “perfect or very good knowledge of a particular language” as a condition of access to posts for which a very high level of knowledge of that language is necessary.”

Native speakers only job ads and EU law

7. 한국의 학교현장에서 이런 주장은 ‘씨알도 안먹힐’지도 모르겠다. 당장 미국의 ‘표준발음’을 기준으로 ‘정확한 영어’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원어민 중심주의의 어두운 면들을 간파하고 이를 지양해 나가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교육적인 것이 아닐까? 원어민 중심주의와 능력주의에 대한 과신, 나아가 인종차별에 이르는 끈을 인식하는 일이야 말로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는 데 있어 튼튼한 버팀목이 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원어민 영어 화자가 아니라 비원어민 영어 학습자/사용자/교수자로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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