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연결, 더 많은 분열

Posted by on Mar 10,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아마도 우리는 역사상 타인의 삶을 가장 많이 읽어내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책을 덜 읽는다고 하지만 뉴스와 블로그, 소셜미디어와 채팅방의 텍스트로 순간순간을 채운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연대로 나아갔는가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더 많이 읽고 더 안다고 생각할수록 넘지 말아야 할 선,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금,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할 경계만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연결이 많아질수록 오해는 증가하고 상처는 깊어가고 곱씹는 밤은 늘어간다. 진실로 슬퍼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기를. 아파하는 자에게 함께 아파할 벗이 있기를.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의학 메타포 단상 (기사발췌+약간의 해설)

Posted by on Mar 10, 2020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집필 | No Comments

1. 환자는 질병과 싸우는가? 그는 파이터(fighter)인가? 그렇다면 질병이 심각해지거나 그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충분히 열심히 싸우지 않아서 병에 굴복한 것인가? 질병은 적이고 나는 파이터이며 호전이나 악화는 승리 혹은 패배인가?

환자를 파이터로 개념화하는 것은 어떤 장점과 한계를 갖는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환자를 ‘싸우는 존재’로 생각해야 하는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전투에 임하듯 병과 부딪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2. 우리는 종종 물리적 현상과 메타포를 혼동한다. 잘 알려진 Lawrence Williams와 John Baugh의 연구는 사람들이 따뜻한 음료를 들고 면접에 임할 때 피면접자의 성격을 ‘warm’하다고 판단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보고한다. 차가운 음료를 들고 있었던 참가자들은 반대의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우연인가?

3. 또 다른 연구(Chen-Bo Zhong & Katie Liljenquist, 2006)는 소위 ‘멕베스 효과(Macbeth effect)’를 보고한다. 자신의 죄과에 대해 생각해 보길 권유당한 참여자들은 연구 참여 선물로 세정제를 택할 확률이 높았다. 윤리적인 측면의 ‘더러움’을 신체적으로 청결하지 못한 것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단어 ‘dirty’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윤리적 영역과 신체적 영역 모두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의학에서의 군사 메타포는 파스퇴르가 1860년대에 세균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기 이전부터 사용되어왔다. 시인 존 던은 질병을 “siege…a rebellious heat, [that] will blow up the heart, like a Myne”이나 “Canon [that] batters all, overthrowes all, demolishes all…destroyes us in an instant.”와 같이 표현한다. 병을 포위공격과 포탄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5. 17세기에 가장 저명한 의사였던 Thomas Sydenham은 의학에 군사 메타포를 들여온 사람으로 기억될 만하다. 그는 질병의 절멸(annihilation)을 의학의 목표로 삼았다. 자연스레 “내부의 적을 하제와 해열제로 공격(attack)한다”는 표현을 썼다. 질병의 치료가 싸움이라면 당연히 전략전술이 필요할 것이다.

6. 우리는 의학 메타포를 내면화해 왔다. 이제는 그런 표현들이 메타포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의학용어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그것의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영향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전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https://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4/08/the-trouble-with-medicines-metaphors/374982/

Intelligence 그리고 사이(inter-)

Posted by on Mar 9, 2020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개념적인 측면에서 “intelligence(지능)”을 “In”+”telligence”로 오분석하는 경우가 있다. 지능을 개인의 내부(in)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intelligence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사이, 상호적’이라는 의미의 inter- 와 ‘선택하다, 읽어내다’라는 의미의 legere 을 만나게 된다. 이에 따르면 지능은 단일 주체가 지닌 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 사이를 읽어내는 능력에 가깝다.

물론 어원을 가지고 당위적 주장을 펼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intelligence가 파편화된 개인의 자질로, 순전히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세태 속에서 그 어원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일이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지능은 언제나 관계적이며 사회적이라는 것, 다양한 존재 사이에(in-between)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맥락적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원인과 결과, 그리고 리터러시

Posted by on Mar 9,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 한국사회의 가장 아픈 면 중에 하나는 특정한 현상의 원인을 찾는 데는 분주하면서도 그 원인이 더 큰 사회경제적, 제도적 맥락과 닿아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묻어둔다는 데 있다. 원인은 넘쳐나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는 일에는 게으르달까.

2. A는 B를 탓하고, B는 C를 탓하고, C는 D를 탓한다. 그렇게 탓하기의 향연은 사회를 좀먹고 합의를 지연시키고 진실을 감춘다. 이해와 분석, 성찰과 제도화는 계속 미뤄지고 탓하기와 편들기는 습속이 된다. 원인을 찾는 데 골몰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형성에 대해 함구하는 사회는 게으르고 얄팍하다.

3. 무엇이든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역사와 맥락, 사람이 있다. 영어로 말하면 “A cause is only skin deep (우리가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그저 한 꺼풀에 불과하다).”이라고 해야 할까. 원인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요인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원인 또한 결과인 것이다.

4. “A때문에 이 사단이 났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에 대해 응당 해야 할 응답은 “그럴 수 있겠네. 그런데 A는 어떻게 해서 생긴 거야?”일 것이다.

5. 즉, 그 말에 대해 “맞아맞아”라며 그냥 넘어갈 것인지, 얼굴을 찡그리며 속으로 ‘이런 공감능력 떨어지는 인간’을 외칠 것인지, 아니면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하네. 왜 그렇게 되었을까?”라고 함께 알아보자고 제안할 것인지에 따라 한 사회의 리터러시 역량이 좌우된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는 상대와 나의 관계를 넘어 맥락과 역사를 사고하는 힘이다.

6. <삶을 위한 리터러시(가제)>에서는 대담자 선생님의 제안으로 ‘공감능력’ 대신 ‘사유역량’이라는 용어를 택했다. 상대의 입장을 그저 긍정하고 다독이는 것(‘공감’)이 아니라 그것을 보듬으면서 생각을 확장해 가는 일(‘사유’)로서의 리터러시를 상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공감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당신과 나 사이에서 무한루프를 도는 폐쇄적인 과정이라면 결국 당파주의와 뒷담화의 번성에 복무할 뿐이다.

7. 아래 첫 답글의 링크는 위의 생각에 단초를 제공한 글이다. 대구 한마음아파트의 상황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분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책 읽다가 몇 가지

1. 그나마 잘 번역된 텍스트라 해서 읽고 있는데 군데군데 계속해서 막힌다. 영어로 읽기 시작하니 이해는 훨씬 나은데 속도가 안습이다. 번역가의 피땀은 많은 이들의 노고를 줄여주고 더 많은 세계를 여행할 시간을 선사한다. 문제는 학술서의 경우 정말 유능한 번역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 (대개의 연구자와 교수들은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2. 특정한 이론체계를 차용해 논문을 쓸 때면 대표적인 구절이나 뼈대만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이론의 핵심을 간파하고 그것을 분석에 녹여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의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거대한 체계를 열 개 쯤 다루는 개론 수업이란 또 얼마나 얄팍한가.

3. 아직 검토중이라고 하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혼자 녹화해서 올리는 게 쉽지 않겠으나 30명 정도의 수업을 실시간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것 보다야 나을 것 같다. 짧지 않은 동영상 강의를 촬영해 본 경험에서 보자면 혼자 잘 떠들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일반 면대면 수업 준비의 2-3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귀차니즘이 발동하는데, 마감이 어찌저찌 해결해 주겠지.

4. 대화에서 상대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말’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황, 혹은 담화의 유형 자체를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말은 언제나 그것보다 훨씬 큰 사회적, 제도적, 정치적 맥락을 환기하며, 말이 펼쳐지면서 말이 처하는 맥락 또한 요동친다.

단어 하나만 바꾸어도 진담이 농담이 되고, 논평이 풍자가 된다. 말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을 때, 살짝 찡그렸을 때, 목소리가 커졌을 때, 유행어를 섞었을 때, 상대가 익숙하지 않은 메타포를 사용했을 때 등등 지극히 작은 말은 순식간에 맥락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바뀐 맥락에서 대화자들의 관계는 달라진다.

5. 우리는 말을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이 실시간으로 지어지는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말은 상대의 귀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상대를 초대한다. 그렇기에 말하는 법은 세계를 창조하고 초대하는 법이다. 우리가 암기에 골몰했던 ‘어휘와 문법’은 그런 세계를 짓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독자의 시간을 헤아리는 논문쓰기: 경험으로서의 텍스트

전형적인 연구논문이라면 제목, 초록, 서론, 문헌연구, 방법론과 결과, 논의, 결론, 나아가 참고문헌과 부록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출판된 논문이라면 대개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논문은 하나의 완결된/닫힌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논문은 하나의 완성품입니다. “논문”이라는 명사로 표현되고요. 명사의 세계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자동차’나 ‘지우개’에 시간이 들어있지 않듯 말입니다.

하지만 논문을 독자가 읽기 시작하면 시간 위에서 흘러갑니다. 읽는 행위는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텍스트를 스캔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아니라면 우리는 1분에 기껏 몇백 단어를 순차적으로 읽어내어 내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읽기라는 행위가 시간의 축 위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쓰기는 단지 완결된 텍스트의 생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쓰기는 독자가 경험할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고, 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만 하는 경험을 조직하는 활동입니다. 이런 면에서 쓰기는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지식을 독자의 경험으로 번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가 강의를 하고 있는 건물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외관이 바뀌거나 방 사이의 칸막이가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죠. 계단이 춤을 추거나 창문이 자리를 바꾸지도 않습니다. 공사가 끝난 건물은 변화하지 않는 정적 구조물입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명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건축물이 누군가에 의해 경험될 때, 건축물은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예술이 됩니다. 건축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시간의 축 위에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건축물은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방문자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경험의 총체입니다.

미술관을 설계하는 건축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단지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방문객들이 건축물과 만났을 때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지요. 미술관에 진입하는 길에서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할지, 미술관 벽면의 소재가 어떤 느낌을 줄지, 정문을 어떤 방식으로 통과하게 할지, 들어왔을 때 채광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어떤 느낌일지, 천장의 높이와 조명에서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낼지, 방문자의 동선을 어떻게 유도할지 등을 세심하게 살핍니다. 이를 통해 변하지 않는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살아 움직이는 건축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독자의 시간을 헤아리는 글쓰기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맞는 문장, 멋있는 표현을 동원하는 글쓰기도 중요하지만, 글을 읽어내려가는 독자의 호흡을, 이해의 속도를, 정서적 임팩트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풀어내는 행위이면서 독자의 시간을 먼저 살아보는 행위입니다.

유능한 작가는 유능한 독자입니다. 쓰면서 동시에 읽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좋은 작가는 쓰면서 읽고, 읽으면서 씁니다. 텍스트를 읽을 땐 읽기+쓰기를, 쓸 때는 쓰기+읽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자에 대한 감은 어디에서 올까요? 독자를 직접 만나볼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전공영화’와 ‘수 구조(move structure)’라는 개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로논문쓰기

촛불집회 논문 출판

Posted by on Feb 21, 2020 in 강의노트, 링크, 영어로 글쓰기, 집필 | No Comments

작지만 뜻깊은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2016-2017년 박근혜 퇴진운동의 거의 모든 집회에 참여하면서 틈틈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와 함께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에 관한 다양한 문헌을 읽기 시작했고, 언어교육과 관련된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여름이었던가요. 장인철(Inchull Jang) 선생님과 함께 현실정치에 관심을 둔 사회언어학/응용언어학자로서 함께 글을 써보자는 의견을 나누었고 자료조사와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방향 전환, 검토와 수정을 거쳐 오늘 <사회기호학 (Social Semiotics)> 저널에 “시위에서 매개도구의 궤적: 대한민국 촛불 집회에서의 손피켓의 사례를 중심으로(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라는 제목의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논의는 시위도구로 쓰여진 손팻말(hand placard)에 집중합니다. 최근 한국의 시위현장에서 보이는 손피켓은 개개인이 손수 만든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대량으로 제작되어 뿌려지는 것이죠. 이는 그 자체로 특이한 현상이면서 여러 가지 언어적, 심리적, 상징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논문은 이 점에 주목하여 손피켓이라는 매개도구(mediational means)를 중심으로 촛불집회를 조망합니다. 시위 현장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의례적으로 또 창조적으로 사용하는지 추적합니다. 나아가 그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합니다.

논문을 읽어보실 분들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논문을 쓰면서 가장 깊게 고민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These impressions made the first author ask the following fundamental questions regarding the politics of protest in a democratic society: “How can we marshal solidarity across a wide range of sociopolitical spectrums while not forfeiting the small yet critical voices of each participant and stakeholder, and how can we achieve democracy ‘within’ protests beyond the protests ‘for’ democracy?” (Fieldnote, 4 December 2016).”

논문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 사진들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신 박여라 선생님, 홍승희 선생님,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이병한 편집국장님과 이정민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원고를 보고 꼼꼼히 피드백을 주신 이정아 선생님과 Mike Chesnut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힘있게 논문을 마무리해 주신 저자 장인철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아래는 논문의 초록입니다. 혹시 읽어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아래 답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메일로 논문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

While positioning this research within the growing body of scholarship related to linguistic landscape of protest, we illustrate a distinctive form of analysis. Rather than giving a generalized, extensive, or quantitative description, we focus on a qualitative and in-depth analysis of a single protest tool in relation to protest actions and space-making. Drawing on the concept of “mediational means” from mediated discourse analysis, we analyze the linguistic and semiotic functions and effects of sonp’aenmal (hand placard), a protest tool uniformly and widely employed during South Korea’s 2016–2017 Candlelight Protests. Based on a corpus of protest images and our autoethnographic accounts of direct participation, we examine why this sign emerged as an important tool in the protest space, how it was utilized ritually and creatively, and the effects of its use on protesters’ experiences, sensitivity, and identity. Competing discursive effects caused by its uniform design and widespread use are discussed further.

KEYWORDS: South Korea, Candlelight Protests, linguistic landscape, mediational means, hand placard, protest tool

 

논문 링크: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10350330.2020.1730555

한계는 가벼움이 아니다

언어의 해상도는 사고의 해상도를 넘지 못한다.
사고의 해상도는 경험의 해상도를 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은 동시대 인류 경험의 일부일 뿐이다.
현시대 인류의 경험은 인류가 경험한 역사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무엇보다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에서 먼지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매일 목도하는
쉼없는 언어들의 부딪침은
의미없는가?
이토록 ‘해상도 떨어지는’ 말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은
헛된 몽상일 뿐인가?

나는 이 질문의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때로 언어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기에,
때로 언어는 우리를 드러내는 유일한 정체성이기에,
때로 언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이기에,

언어를 매개로
예술이, 철학이, 과학이,
그 무엇보다
우리의 관계가 변화하기에,

언어는 더 정교해져야 하고,
더 넓어져야 하고,
더 깊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몇 개의 카드로
세상을 다 이해한 듯 소란떨지 않고,
몇 마디 경구로
삶에 달관한 듯 읊조리지 않고,
몇 권의 책으로
다 알았다는 듯 써갈기지 않는 것.

긴 글로도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삶의 진실이 있기에
긴 글을 쓰고 읽어가는 일의 고됨을
기꺼이 받아안는 일.

요약본에
자신의 생각을
송두리째 맡기지 않는 일.

이들이 소중하다 믿는다.

그 어떤 노력을 경주한다 해도
말이 삶을 오롯이 담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아니
‘거대한’이라는 말을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우주라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언어가
한없이 뭉툭하다는 걸 깨달을 때,
고로 나의 언어는 그저
‘한계의 한계’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 설 때
말의 무게를 깨닫게 된다.

한계는 가벼움이 아니다.
한계는 하찮음이 아니다.

언어의 한계는 그 내부를 성찰해야 할
조건이자 명령이다.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에 넣으려다가 넣지 못한 단상을 다시 더듬어/다듬어 남겨놓습니다.

정치, 현실의 영역인가 가능성의 영역인가

Posted by on Feb 18, 2020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정치를 이해하고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기준이야 여러 가지겠으나 지극히 주관적인 관찰에 기반하여 그려본 두 가지 성향.

누군가는 ‘이미 있는 것’을 선택의 대상으로 삼는다. 정강이나 인물, 방향에 있어서 윤곽이 잡혀 있는 이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사람을 잘 모으고, 그 중에서 잘 고르는 게 정치행위의 핵심이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눈앞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제껏 없던 것’에 더욱 끌린다. 지금의 문제는 지금의 세력으로 해결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정치는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지 골라잡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예술로서의 정치’라는 개념, ‘가능성의 세계로서의 정치판’을 가정한다.

이 두 가지가 양분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성향으로 정치를 바라보는가에 있어 차이는 분명 있는 것 같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기: 지극히 주관적인 노동법

‘꼼꼼한 사람이 따로 있지. 계획 엄청 촘촘히 세우고 그대로 안되면 짜증내고 그런 사람.”

언젠가 이 말을 듣고 돌아오면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방만한 문돌이’로서 나를 아는 사람은 믿기 힘들겠지만 대학원 과정 중 e-Learning 관련 프로젝트에서 3년, IT 현업에서 7년을 일했다. 구체적으로는 콘텐츠 개발자, 테크니컬 라이터, e-Learning 전략기획 등의 업무였다. 공부를 하러 떠나기 직전 4년 정도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업으로 삼았다.

매니저가 업일 때 능력에 맞지 않게 꽤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 경영진, 영업 및 마케팅 부서, 콘텐츠 개발부서, 기획, 디자인, 개발, 운영부서까지 100여 명이 되는 사람들과 몇 년을 함께 보냈다. 하루에 미팅 서너 개는 기본이었고 많을 때는 일곱, 여덟 개까지 소화하곤 했었다. (이놈의 회의주의란.)

당시 나의 일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점검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시간과 돈, 인력을 ‘관리’하면서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말이 ‘프로젝트 매니저’이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갈등을 조정하는 게 업무의 중심이었다. 관련 서적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돌아보면 프로젝트 코디네이션을 관통하는 업무는 관계 및 감정관리였다. 짧은 프로젝트 매니저 경력에서 얻은 교훈은 ‘인지적인 움직임 밑에는 정서적, 사회적 관계가 있으며, 그것이 소위 ‘관리’의 핵심이라는 것, 관리자의 핵심역량은 개개인의 감정과 동기를 팀과 조직의 목표와 매끄럽게 정렬(align)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계획을 거의 세우지 않는다. 학사일정이야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1분기에는 뭘 할까’, ‘금년에는 뭘 할까’ 같은 계획은 없다. 꼭 이뤄야 할 과업 자체가 없다. 백 명이 넘는 인력의 하루하루를 체크하던 인간이 자기 시간 하나 잘 관리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래도 괜찮다는 걸 깨달은 지 좀 되었기 때문이다.

계획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니 대충 이런 시나리오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우선 자료를 찾아보고, 이리저리 읽고, 끄적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감잡는 단계를 거쳐 흔히 말하는 ‘잡문’, 혹은 ‘쪽글’을 쌓는다. 관심이 가는 주제면 이게 계속 축적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몇 개의 쪽글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글은 생각의 덩어리가 된다. 먼지도 서로를 당겨 뭉텅이가 되듯, 아이디어가 모여 계획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가닥을 잡기 시작하면 친한 사람들에게 ‘뭔가 할 생각이 생겼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이디어의 실행가능성이 조금씩 드러난다. 보완하거나 덜어내야 할 점도 보이기 시작한다. 대화를 통해 막연한 생각이 구체적인 실행 아이디어가 되는 것이다. 이후 숙성의 단계에서 좀더 해상도 높은 쪽글을 써낸다. 단상은 강의노트나 초고가 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나도 모른다.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기약도 없고, 계약도 없다. ‘납기’가 없는 글은 이런저런 삶의 풍파에 한정없이 미뤄진다. 하지만 관심이 지속되는 한 계속 읽고 써내게 되니 오랜 생각은 덩치가 커지고 부족하지만 공유할만한 모양이 된다. 여기까지 진행되면 책이나 논문의 원고로 변신할만한 꺼리가 확보된다.

그래서 결론은 “꼼꼼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거다. 살아가는 데 필요하면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세월아네월아 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은 없지만,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은 대부분 갖고 있다. 앞으로도 상황이 바뀌어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긴 계획 없이 살아간다. 시간에 맞추어 행동을 조직하기 보다는 생각의 흐름에 삶을 맞춘다. 그래도 괜찮고, 그래서 재밌다.

덧.

느지막이 낮잠에서 깬 오후. 이불속은 집안의 블랙홀인가. 일어나려 발버둥쳐 봐도 도저히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 아, 왜 이렇게 점점 게을러지지?
짝: 무슨.
나: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격려’를 감지한다.)
짝: 원래부터 게을렀잖아.
나: … … … (털썩)

원래부터 게으른 삶.
앞으로도 이 스타일 쭉 유지해야겠다.

#짝과나 #무계획의삶 #쭉게으르게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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