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않고 잘 살기?

어제 한 선생님과 비판적 리터러시의 중요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비판 리터러시를 키우는 건 사실 엘리트 교육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교육의 ‘변방’에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핵심’이라는 이야기였다.

비판적 리터러시는 잘 듣고 잘 읽고 행간을 읽는 데서 시작해서 전제를 살피고, 증거의 빈곤함을 지적하고, 논리의 일관성을 점검함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하지만 리터러시 교육에서 비판영역이 전면에 배치되는 경우는 여전히 적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대를 ‘넘어서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지식의 수준을 높이고 그 지평을 넓히는 행위라는 점이다. 내가 쌓은 벽돌 위에 또다른 벽돌이 올라간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딛고 올라서 주었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적 역량은 서로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어간다.

모두 비판자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쟁이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두의 비판으로 서로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비판의 태도와 기술이지 비판하지 않고 함께 잘 사는 법이 아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글쓰기

PC의 문제

Political Correctness의 근본적인 문제는 Politics의 문제를 Correctness로 치환해 버리는 데 있다. 물론 현실에서 PC는 동원되는 맥락에 따라 다른 효과를 발휘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용어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권력이 어떤 양식으로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잡다단한 힘과 관계가 관여하는 고차원 방정식을 ‘이 용어를 써도 되는가 안되는가?’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화할 때 얄팍하고 우둔한 논쟁만이 남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사건은 생성적인 것

Posted by on Feb 15,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집필 | No Comments

“일련의 사건들은 말 그대로 생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구성될 수 없는 것이고 그 사건이 일단 발생하고 나면 돌아봄으로 완벽히 포섭할 수 없는 것이다.” “Series of events is truly genetic, which cannot be constructed before it has happened, and which cannot be exhausted backwards, after it has happened.” – Baldwin (1906)

“사건은 말 그대로 생성적인 것.” 지혜는 사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생성을 지켜보는 데 있는 것이다. 완벽하게 예측될 수도 없고 온전히 재구성될 수도 없는 순간들에 대한 경외감.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여기 있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표준화의 환상

Posted by on Feb 11, 2019 in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집필 | No Comments

시간의 표준화로 모두의 시간이 동일한 속도와 밀도를 지닌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지능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지능을 벨커브(정규분포곡선)로 줄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시험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성취를 한줄로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노동이 공평하고도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화폐로 변환되고 있다는 믿음, 어떤 몸이든 동일한 ‘ROI'(투자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 공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환상은 이러한 표준화-복합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서로 다른 몸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관계와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간의 평등과 지능 및 시험의 공정함, 경제체제의 합리성은 지독한 환상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진다는 말은 철판이나 콘크리트에게는 옳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아니다. 체구가 크면 더 먹어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발이 크면 신발이 커야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모두가 같은 속도로 배우고 익히고 시험을 쳐야 한다고 믿는가? 인간에게는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스물 네 시간을 돌려주어야 할 싸움이 필요할 뿐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문장의 개념적 중핵

인지문법을 배우며 처음으로 문장을 개념적으로 분석하는 법을 접했을 때 의아했던 것은 “동사”가 개념적 중핵(conceptual core)로 분류되고 전통적으로 명사구에 해당하는 것들이 이 개념적 틀의 참여자(participant)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The gentleman bought a notebook.”이라는 문장이 있다면 “buy(bought)”가 문장의 개념적 중핵으로, the gentleman과 a notebook이 이 개념의 참여자로 분류된다. (이전 문법의 틀에서는 주로 동사(verb)와 논항(argument)에 관한 논의를 떠올리시면 된다.)

“누가”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주체 중심의 사고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문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먼저 존재해야 하고 이 주체가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주체”가 탄생하는 방식은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체”는 언제나 특정한 행위틀 안에서만 이해된다. 이러한 활동/행위들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조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말해 주체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말하고, 듣고, 공부하고, 싸우고, 쓰고, 주장하고, 사고, 팔고, 빌리고 등의 활동들 속에 들어감으로서 비로소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주체”보다 “행위”를 개념적 중핵으로 놓고, 이에 관여하는 참여자들을 분석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인지언어학이야기

파업, 그리고 ‘인질’ 메타포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

모 신문은 민주노총 서울일반노동조합 서울대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에 대해 “파업 인질”을 헤드라인으로 올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는 서울대 도서관 경비 중 한 명의 발언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헤드라인으로 올린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바로 ‘학생=인질’이라는 메타포를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에 대해 “인질” 메타포를 쓰는 관행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이 인질이 되고 병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환자가 인질이 된다. 급기야 학교 난방을 담당하는 기계전기분회의 파업은 학생을 인질로 잡는 일이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인질”은 부정확하고 비열한 메타포다. 왜 그런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질”이라는 단어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학생이 인질’이라는 정보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인생은 무대”라는 메타포가 주연배우, 조연배우, 악역, 엑스트라 등등을 순식간에 소환하는 것처럼 “인질”의 구성에도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또한 인질범은 인질을 댓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질’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고틀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를 프레임(fram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인질’ 프레임에서 파업을 둘러싼 주체들이 맡은 역할을 살펴보자. ‘학생이 인질이냐’는 질문을 던졌으니 당연히 학생은 인질의 위치에 놓였다. 파업중인 노조는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인질범이 된다. 자연히 노조와 대치하고 있는 대학본부는 인질이 구출되길 바라는 편이 되겠다.

우선 이 프레임은 극도로 부정확하다.

인질범은 인질극 프레임에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테니 자신들에게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현재 노조는 자신들이 응당 받아야 할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임금인상도 아니다. 무기계약직 전환시 빼앗긴 교통비, 급식비 등 다양한 복지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생명을 조건으로 거는 몸값과는 거리가 멀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다. 하지만 서울대 기계전기분회 노조는 사실상 약자이다. 파업은 몸뚱아리 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이는 매우 적법한 권리행사의 수단으로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아가 ‘인질’ 프레임은 비열하다.

학생을 인질로, 노조를 인질범으로 상정함으로써 학생과 노조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는다. 아울러 대학본부를 ‘착한 편’으로 자리매김한다. 학생들이 노동자와 연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질이 인질범과 어떻게 연대를 한단 말인가? 이 프레임에서는 ‘노조와 연대하는 학생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인질이 된 학생들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인질극에서 인질은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극히 수동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파업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지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노조에 연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인질극에서의 인질과는 달리 학내 파업 상황에서 학생은 당당한 연대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정확하고 비열한 ‘인질’ 메타포는 사라져야 한다. 걸핏하면 나오는 ‘인질’ 프레임에 마음이 동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인질’로 묘사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질 프레임이 뒤집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한다. 파업에 임하는 노조는 누구도 인질로 잡지 않았다.

영어로 논문쓰기: 네 가지 기둥

영어로 논문쓰기를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것 4가지. (말장난 아닙니다. ^^;;)

1. 영어에 대한 이해 (도구언어에 대한 이해)
2. 논문에 대한 이해 (장르로서의 논문에 대한 이해)
3. 쓰기에 대한 이해 (쓰기행위에 대한 실천적, 메타인지적 이해)
4. 영어로 논문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이해 (프로젝트로서의 논문쓰기 수행에 수반되는 다양한 지적, 정서적, 정보적 요인에 대한 이해)

#영어로논문쓰기

‘나/너’ -> ‘나+너’

‘뇌 신호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brain signals, 내 맘대로 지은 이름)’이 부상한다고 해도 그것은 의미작용의 지층을 두터이 할 뿐 반박 불가능하며 객관적인 의미를 확정하진 못한다. 기호학자들의 분파로 “뉴로-“가 붙은 “neuro-semiotician”의 영향력이 커지겠지만 이 또한 기호학의 제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도리어 삼각검증(triangulation)의 대상이 늘어나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퍼스(Peirce)가 간파했던 세계와 의미의 차이는 지속될 것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은 제시(present)될 수 있지만, 의미는 제시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재현(represent)될 뿐이다. 이러한 가정이 깨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이 물리적으로/생물학적으로 병합(merge)되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방식이 등장해야 한다. 의미작용의 지형이 ‘나/너’에서 ‘나+너’로 변화하는 순간 (언어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포괄하는 의미의) 기호학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맞게 될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언어의 본질, “Ghost in the shell”, 그리고 “the Construct”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은 단어와 뜻 즉, form과 meaning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말한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물건을 “의자”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며 “chair”(영어)나 “Stuhl”(독어)로 불러도 무방하다. 누군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면서 같은 의미를 “D%@47″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언어의 형태와 의미 사이에 필연적 관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이 세계의 소통이 이렇게 ‘관계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세계의 실체들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물리적 실체 위에 그들과는 아무 관계 없는 꺼풀(언어)을 얹어서 이리 저리 조작하고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그 ‘꺼풀’의 세계를 발전시켜 또다른 상징적 세계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ghost in the shell”과 통한다. Shell은 언어이다. ‘의자’, ‘chair’, ‘Stuhl’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는 껍데기다. 그 안에는 개념이 담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 의자”라는 말 속에 이 세상 모든 의자들을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자/는 ‘의자성(chair-ness, 의자가 의자이게 하는 성질들)’을 가진 모든 사물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몸(개별 의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이다.

세계라는 몸에 껍데기(shell)를 씌우고, 거기에 영(ghost)을 집어넣어 세계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도록 한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ghost in the shell”로서의 언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유비는 매트릭스 1편에 등장한다. “The Construct”라는 세계가 그것이다. 컨스트럭트에는 그 무엇이든 로딩할 수 있다. 뭐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이다.

당신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로딩하는가? 어떤 정령들을 초대하는가? 그에 따라서 당신의 ‘실재(the real)’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 실재냐고? 그건 당신 자신이 결정한다. 사실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는 일생일대의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우리의 ‘컨스트럭트’를 조정하는 미세한 결단이다.

서문, 두 가지 관점

서문(序文)은 처음 말이라는 뜻으로 Preface나 Introduction으로 번역된다. 책의 머리에 위치하여 본문으로 이끄는 글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본문과 결론이 존재하고 난 뒤라야 서론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현상적으로는/독자들에게는 ‘서문’이지만 생성적으로는/저자에게는 ‘결문(結文)’이라 하겠다. 독자를 어디로 이끌지 온전히 알게 될 때 어떻게 이끌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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