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

Posted by on Jun 30, 2014 in 단상 | No Comments

잠깐이지만 기말 성적과 관련되어 신경을 쓰다 보면 매일 매일 학생들과 부대끼며 순간 순간 오만가지 감정을 안고 생활하시는 초중고교 선생님들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선생님들 모두 존경합니다!!!

작가에 관한 메타포

Posted by on Jun 30, 2014 in Uncategorized | No Comments

뉴욕타임즈의 한 기사에서 작가에 대한 흥미로운 메타포를 발견했다.

A writer is like a tuning fork: We respond when we’re struck by something. The thing is to pay attention, to be ready for radical empathy. If we empty ourselves of ourselves we’ll be able to vibrate in synchrony with something deep and powerful. If we’re lucky we’ll transmit a strong pure note, one that isn’t ours, but which passes through us. If we’re lucky, it will be a note that reverberates and expands, one that other people will hear and understand.

나는 작가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오래 전 교사를 셸파에 비유한 이후로 더 나은 메타포를 찾지는 못했다.

마인드 그리고 은유

Posted by on Jun 30, 2014 in Uncategorized | No Comments

“다양한 메타포들은 세계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이면서, 우리의 정신 세계 자체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은유, 특히 인간의 정신(mind)을 표현하는 은유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을 시계에 비유하였고, 전화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는 전화기 교환판(switch board)이 마음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컴퓨터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인지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감정을 지닌 컴퓨터’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정서적 측면까지도 컴퓨터의 작동에 비유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예시들은 인간의 사고를 은유로 표현함에 있어 각 시대에 가장 복잡한 기계가 동원됨을 보여준다. 데카르트 시대에 시계는 기계 중에서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진 것이었을 테고, 전화 교환판 또한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장 복잡한 기계로 보였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세계를 움직이는 지금, 컴퓨터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인간의 사고를 컴퓨터의 작동에 빗대는 메타포는 많다. 사람에게는 컴퓨터와 같이 장기 기억과 단기 기억이 있으며, 기억은 정보의 형태로 ‘저장’된다.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은 컴퓨터의 어떤 물리적 위치에서 자료를 꺼내는 것(retrieval)과 같다. 이런 개념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인풋/프로세싱/아웃풋 이라는 컴퓨터의 정보처리 모델로 설명하려 한다. 여러 요인들이 주어질 때 인간이 어떻게 이 요인들을 처리하여 외부적 행동을 만들어 내는가. 이것이 바로 인간 사고에 대한 정보처리 모델이다. 블랙 박스 왼쪽에서 입력(input)이 들어오고, 머리 속에서 인풋을 처리(process)하고, 이에 따라 결과값(output)을 낸다.

인간은 언제나 은유 속에서 살아왔고, 은유를 통해서 의미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은유를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다만 인간의 정신을 컴퓨터로 표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인간을 컴퓨터와 등치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은 경계할만하다. 데카르트 시대에 인간의 마음을 시계에 비유하면서 인간의 사고를 시계의 작동원리로 파악하려고 했다고 가정해 보자.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지금 우리는 컴퓨터 메타포의 홍수 속에서 인간을 컴퓨터처럼 생각하게 되고, 때로는 컴퓨터를 닮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고도로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 할지라도 컴퓨터가 인간이 아닌 이상 인간의 사고, 정서, 행동을 모두 컴퓨터의 작동원리로 설명하려 드는 것은 섯부른 일이다.

인간은 분명 기계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만, 기계가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는 지배적인 메타포가 되는 현상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기계적 작동 원리로 치환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더욱 다양한 은유가 필요하다. 개인은 나무이고, 사회는 숲이라는 메타포는 어떨까? 인간은 바람이고 구름이라는 메타포는? 인간의 사고는 컴퓨팅이 아니라 여행일 수도 있고 직물을 짜는 과정일 수도 있으며 거대한 합창, 순간적인 재즈 변주, 혹은 오케스트라 공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체화된 인지, 분산인지, 확장된 마인드 등의 마음에 대한 최신 이론들은 이런 메타포들이 단지 문학적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집안을 여행하는 반바지

Posted by on Jun 29, 2014 in Uncategorized | No Comments

A: 반바지가 집안 여기저기를 여행하더라.

B: 응 무슨 말이야?

A: 하루는 여기, 다음 날은 저기 돌아다니더라고.

B: 아… 앞으로는 여행 안하고 한 곳에 있도록 할게. 걔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런 말 안하게.

 

‘집안을 여행하는 반바지’는

‘아무데나 막 벗어놓는다’와 같은 의미일까? 다른 의미일까?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언어의 의미가 그 쓰임이라면 다른 의미임에 틀림이 없다.

 

자자, 집안을 여행하는 반바지 말고, 양말, 책, 펜 등등 많죠?

다 잘 챙겨 봅시다. ^^

호칭, 문화, 그리고 권력

Posted by on Jun 29, 2014 in Uncategorized | No Comments

어제 지도교수와의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같이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권력은 매우 미세하게 작동합니다. 물리적, 제도적 힘 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작동되기 때문이죠. 따라서 권력 관계는 삶에서 은밀하게 표출됩니다. 아래 지도교수의 경험은 이러한 권력의 미묘한 속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 지도교수는 한 학교에 잠시 머무르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교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같이 가르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지도교수는 늘 그렇듯 학생들에게 자기를 이름 (first name) 으로 불러달라고 했답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했지요. 권위적인 문화를 워낙 싫어하는 사람이라 학생들이 친근하게 자기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었던 거죠. 그런데 같이 가르치던 교수님이 이에 대해서 “자기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식의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제 생각에 그 말을 듣는 순간은 참 황당한 일이라 느꼈을 것 같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호칭을 뭘로 하건 잘 가르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단 저의 지도교수는 방문자의 입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서 “Dr. ~” 나 “Professor ~” 라는 식의 호칭이 통용되고 있었음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이 점을 놓친 것이죠. 더욱 중요한 것은 “(성 말고) 이름으로 불러요”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백인 대학 교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같이 가르치는 교수는 그와 “반대의” 인종과 성별을 갖고 있었죠. 

아프리카계 여성 교수의 입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세계 초강대국의 최상층에 위치하고 있는” 백인 남성 교수가 타지에 와서는 말 한마디로 자기 커뮤니티의 규칙을 무너뜨린 셈이 된 것이지요. 이 작은 행위가 미치는 영향은 미묘하지만 강력한 것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두가 “Dr.~”와 “Professor”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유독 자기만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학생들의 반응에 대해서 들은 바는 없지만 “매너 좋고 친근한 인텔리 백인”이라는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이 작동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위의 예에서 보듯 성별과 인종이라는 요인이 특정한 상황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겠지요. 호칭에 있어서의 개인적 선택(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친하게 지내보자)이 거대 사회구조적 갈등관계(인종, 성별)와 특정 맥락의 관습(교수에 대한 호칭)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선의는 언제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정의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영어학습, 단상

Posted by on Jun 29, 2014 in 단상 | No Comments

생각나는 대로 영어교육에서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놓치는 것들을 적어 본다. 영어를 배우는 ‘좀더 나은 방법’은 있지만, ‘숨겨진 비법’은 없다는 것. 특정한 학습 방법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일 수는 있지만, 시중의 어떤 방법론이 “나에게 딱 맞을 수”는 없다는 것. 무조건 암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계속해서 암기하지 않고 언어를 배울 수는 없다는 것. 언어 입력 input 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영어를 잘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영어를 반드시 잘해야만 하는 사람은 한국 사회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솔로몬의 지혜, 혹은 평화

Posted by on Jun 29, 2014 in 단상 | No Comments

구약성경 잠언의 기자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평화라는 뜻이라고. (“솔로몬 혹은 샬로모라는 말은 ‘평화’라는 뜻을 갖고 있다.” – 위키백과) 그러고 보면 평화가 가장 큰 지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묘생(猫生)

Posted by on Jun 29, 2014 in Uncategorized | No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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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언어, 권력, 그리고 교육

Posted by on Jun 28, 2014 in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어린이집에 다닐만한 아이 남자아이 둘이 ‘원샷’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A: 야 너 ‘원샷’이 뭔지 알아?

B: 원샷? 그거 물 한꺼번에 다 마시는 거 아니야?

A: 아니야. 그런 거 어디에서 배웠어? 원샷은 물이랑 얼음이랑 다같이 먹는다는 뜻이야.

B: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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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좌충우돌 어휘를 배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소통이 일어난다. 위의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언어습득의 방식과 권력, 그리고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특정한 단어의 뜻을 안다는 것은 권력이 될 수 있다. A의 첫 질문은 자신에 찬 억양으로 전달되었으며, ‘너는 모를 거 같은데, 나 이거 알거든?’이라는 태도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오만함’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것은 A에게 ‘원샷’이라는 말의 뜻을 가르쳐준 어른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믿는 빽’이 있는 것이다.

억양으로 판단하건대 ‘그런 거 어디에서 배웠어?’라는 말은 정말 어디에서 배웠는지를 묻는 질문라기 보다는, 상대의 지식이 잘못되었음을 단정하는 행위였다. 여기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단숨에 제압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상대방의 지식의 원천을 무시하는 것이다. 만 4-5세 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도 상대방과 논쟁을 할 때 지식의 원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우리 선생님이 그랬는데”, “엄마가 그랬는데”, “텔레비에서 봤는데”… 더 ‘높은’ 사람이 그랬다면 논쟁에서 이길 확률은 높아진다.

결국 ‘목소리 큰 어른’을 빽으로 두고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가 이기는 것인가? A는 잘못된 지식과 고압적인 질문으로 B를 제압했다. 다시 말하면, 올바른 지식을 가진 아이가 화려한 언변(?)을 가진 아이에게 사정없이 당한 것이다. 내심 B가 제대로 반격해 주길 바랐는데, 조용히 있더라.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슬픈 장면이었다. 사실 아이들 대화에 끼어들어서 A에게 묻고 싶었다. “그런 거 어디에서 배웠어?” 좀더 심하게 꼰대질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해야 했었다. “다음 사전에 의하면 원샷[one shot]은 ‘술이나 음료 따위의 한 잔을 한 번에 모두 마셔서 비움, 한 번에 모두 마셔서 비우다’라는 뜻이야.  알겠지?”

아이들은 온갖 소스(source)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아직은 그 소스들을 판단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상황에서 무게중심을 잡아가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그리고 그 교육은 학교에 가기 훨씬 전, 가족 및 친구들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아이들 뿐이겠는가. 내가 공유하고 가르치는 지식 중에서 과학적이지 못한 부분은 얼마나 될 것인가?)

“캣맘”은 남자였다?

Posted by on Jun 28, 2014 in Uncategorized | No Comments

“언니”라는 말이 성별에 관계 없이 쓰이는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오늘 발견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단어는 “캣맘”이다. 고양이를 돌봐주는 일을 하는 여성을 ‘캣맘’이라고 부르는 건 자연스럽지만, 같은 일을 하는 남성 또한 종종 ‘캣맘’이라고 불린다는 건 흥미롭다. 이에 관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1. 여기에서 ‘맘’이라는 단어 내에 포함된 유전자적 특성은 중요하지 않다. 어린 생명을 돌보는 사람(caregiver)이라는 의미로 충분하니까.

2. 만약 ‘엄마’라는 단어가 저 상황에 쓰인다면, 남성을 ‘냥이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울까? 혹시 ‘캣맘’ 자체가 외래어이기에 남성을 가리킬 때도 그리 거부감없이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외국어로 욕을 들으면 기분이 덜 나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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