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에 대한 흔하디 흔한(?) 이야기.

Posted by on Jul 31, 2014 in 단상, 링크,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미국의 흔한 맥주 광고

1. 이런 식의 “흔한”의 용법이 주는 느낌이 재미있다. 우선 “흔한”이라는 말이 붙는 현상(아래 경우에는 광고)은 대개 흔하지 않다. (아래 광고를 보면 무슨 뜻인지 아실 듯.) 사실 제대로 살펴보면 흔한 게 아니라 특이한 경우가 많다. 단어의 외연적 의미가 완전히 뒤바뀐 경우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2. 그런데 이같은 용법의 ‘흔한’은 보통 “대륙의 흔한”, “천조국의 흔한”, “헐리우드의 흔한”, “대한민국 해병대의 흔한” 등과 같이 특정한 지역이나 집단, 또는 문화와 관련되어 자주 사용된다. 특정한 맥락 하에서는 ‘흔한’ 현상이라고 주장되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의 성격은 과학적, 통계적 진지함이라기 보다는 장난스러움, 농침에 가깝다.

3. ‘흔한’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재주도 조금 있는 것 같다. ‘이거 꽤 흔한 건데 너는 못봤지?’라면서 클릭질을 유도하는 전략이라고나 할까? 흔한 걸 클릭 안하면 왠지 소외되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 일으키려는 (글쓴이도 모르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1번에서 지적했듯 ‘흔한 거 아닐 거 아는데 지나치면 손해볼 것 같은’ 느낌이 생기고 결국은 클릭을 하게 된다. (그래서 친구가 말하는 ‘병맛’ 광고를 끝까지 봤다.)

4. 같은 구조를 유지하면서 ‘흔한’ 대신에 쓸 수 있는 단어로 뭐가 있을까? 미국의 ‘어떤’ 맥주 광고? 미국의 ‘재미난’ 맥주 광고? 미국의 ‘희한한’ 맥주 광고? 미국 ‘특유의’ 맥주 광고? 흠 뭐라 써도 ‘흔한’이 주는 맛이 살질 않는다. ‘흔한’이 이미 대중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적어도 내 머리속 사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5. ‘흔한’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쓰였지만, 특정한 문화나 집단과 결합하면서 ‘그 지역에 특유한’, ‘그 집단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문화에서나 가능한’ 등과 같은 느낌을 만들어낸다. 이는 독자 혹은 청자가 속한 집단과의 거리를 확보함과 동시에 궁금증을 유발한다.

6. 물론 ‘대한민국 중고등학교의 흔한’과 같은 제목의 포스트를 한국의 중고생들이 읽는 경우도 많다. 이때는 문화적인 거리 혹은 이질적 느낌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 혹은 문화의 한 단면을 보며 정체성을 확인할 가능성이 크다. ‘흔하다는데 진짜 흔한 이야긴가?’ “오, 진짜 맞네. 이거 내 이야긴데. 얘는 좀 더 심하네?” “아 맞아, 이런 애 우리 학교에도 있어.” “딱 우리 학교 이야기는 아닌데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네.” 등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7. 이런 식으로 ‘흔한’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건 누구였을까? 워낙 TV나 라디오와 담쌓고 살다 보니 알 수가 없구나. 암튼 이 예를 보면서 언어의 변화는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양성과 생산성

Posted by on Jul 31, 2014 in 단상 | No Comments

조직내 구성원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하는 주요 근거로 생산성 증대를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대로 팀이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다양해지면 생산성이 높아지는데 반해 구성원이 다양해질 경우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팀내 여성의 비율이 높을수록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난다. 연구의 목적에 따라 성별, 연령, 인종, 전문지식 등 여러 요인으로 다양성을 정의할 수 있을텐데, 비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맥락에 따라서 조직의 다양성과 생산성의 관계는 역동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 이런 연구들을 접하면서 의구심이 생긴다. 생산성이 떨어지면 다양성은 보장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다양성은 생산성에 복무해야 하는 하위 개념인가? 다양성을 독립변수로, 생산성을 종속변수로 놓는 프레임이야말로 사고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일 아닌가? 때로는 엄밀한 방법론이 자기성찰의 결여를 가리지는 않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학살을 중단하라

Posted by on Jul 31, 2014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천인공노할 이스라엘의 만행, 그 끝은 어디인가. 이번에는 전쟁과는 무관하게 UN이 운영하고 있는 초등학교를 폭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고, 최소한 15명을 살상했다. (Mail Online 등의 언론에 의하면 사망자는 17명, 부상자는 150명 이상이다.) 이스라엘군은 피난민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도 학교를 폭격했으며, 사망자의 대부분은 아이들이다.

이스라엘의 잔인한 민낯을 이제서야 알아본 것일까. 이번 가자지구 학살에 대해 애매한 자세를 견지해 왔던 UN마저 엄중한 경고에 나섰고, 반기문 총장도 성명을 통해 “outrageous and unjustifiable”(극악무도하고 정당화 될 수 없다)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공격을 강하게 비난했다. “The world stands disgraced.”(전세계가 수치를 당하다)라는 제목의 가디언 1면을 보니 부끄러움과 분노로 가슴이 미어진다. 가자지구는 병원도 학교도 수도시설도 최소한의 의식주도 보장받을 수 없는 생지옥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광란의 공격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4/jul/30/world-disgrace-gaza-un-shelter-school-israel

 

disgraced

헬싱키의 “Mobility on Demand”실험

Posted by on Jul 31, 2014 in 링크 | No Comments

[헬싱키의 “Mobility on Demand”실험] 헬싱키가 10년 내에 자동차를 소유할 필요가 없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의 대중교통과 자동차와 자전거 나누어 타기 등을 통합하여 사실상 개인이 차를 사야 할 이유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시는 기존과 같이 버스와 열차 시스템을 운영하고 나머지는 경쟁체제에 맡기되, 이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교통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모바일 서비스와 연계해 원클릭으로 원하는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부디 이 실험이 성공하여 많은 도시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In 10 years, the city of Helsinki hopes to make it completely unnecessary to own a car. A new “mobility on demand” system will allow people to instantly call up a bus, taxi, or bike through one connected app.”

“By the end of this year, the city will roll out a pilot of the whole system to test with a few large companies. In 10 years, it will be available citywide, and owning a car in the city may quickly become a thing of the past.”

http://www.fastcoexist.com/3033125/helsinkis-new-plan-to-eliminate-car-ownership

추악함의 끝

Posted by on Jul 31, 2014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포스트 내용이 역겹고 힘겹습니다. 마음이 약하신 분은 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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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터넷에서 인간의 추악함의 끝장을 본 날이다. 한 영상에서는 레바논 부모(혹은 아버지?)가 아이에게 나무막대를 쥐어주면서 시리아 난민 아동을 폭행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또래쯤 되어보이는 아동에 대한 폭력을 강요받은 딸은 시리아 아이를 겁주고 때렸다. 당하는 아이는 극도의 두려움에 떨며 한없이 가여운 눈빛으로 울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폭행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악마 그 자체였다.

한 고양이 관련 커뮤니티의 포스트에 의하면 냥이에게 밥을 챙겨주던 회원 하나는 싸늘한 주검이 된 냥이가 검은 비닐 봉지에 싸여 자기 집 문앞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냥이에게 밥주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의 소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물증이 없다고 했다. 사진을 보는 순간 고양이를 죽여 그 자리에 던져놓은 사람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이 동물을 죽이고, 그 모든 일들이 수많은 이들의 몸에 끔찍한 상처로 남고, 이를 갈며 복수를 준비하고, 쌓여가는 증오가 더 많은 사람들의 피를 요구하는 전쟁으로 이어지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언제 숨이 멎을지도 모르는 나약하고 우둔한 존재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못해 마음의 병이 들어가는 세상이라니.

마음이 참 무겁다.
자고 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
거짓된 소망이라 해도 더 나은 내일이 될 거라 믿고 싶은 밤이다.

핑계로 여유를 사다

Posted by on Jul 30, 2014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핑계로 여유를 사는 날이 길어지고 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이 생활을 좀더 해볼 작정이다. 언젠가 핑계는 사라지고 여유만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대한핑계의소용돌이돌이도리도리

연애상담

Posted by on Jul 30, 2014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왜였을까? 연애 상담 같은 건 별로 인생에 도움이 안되고 나름 진지하게 해본 지도 스무 해 쯤 지났는데 오늘 아침 문득 누군가가 그런 상담을 청해온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지하게 관계를 만들어 가려는 사람이라면 세 가지를 이야기해 주고 싶다. 먼저 피해야 할 사람 1순위는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까지 왔는데’라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다. 운과 연, 만남과 엇갈림, 공동체와 사회보다 자신의 노력과 재능이 훨씬 더 중요하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둘째는 세상엔 작고 약하고 상처받고 억울한 존재가 너무나 많다는 걸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좋겠다. 적어도 내 경험상 그걸 아는 이와 모르는 이의 차이는 꽤 큰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고 싶은 것은 편한 사람을 만나라는 거다. 예전 회사에서 가깝게 지내던 분에게 ‘어떻게 결혼하실 생각을 하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처음부터 내내 만날 때마다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조금 거창한 표현이었지만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괜찮은 것 아니겠는가!

물론 이 ‘조언’은 누군가에게는 고리타분하게 들릴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더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전혀 쓸모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

이젠 도망가지 않아요

Posted by on Jul 29, 2014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엄마냥이 밥주기 등으로 동네를 순례한 후 돌아오면서 되뇐 말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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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냥이들이 배고프다는 건 사실이다.
2. 냥이들이 너를 잘 따른다는 건 착각이다.
3. 들어가서 밥먹어라. 이건 명령이다.

언어의 한계 두 가지

Posted by on Jul 29, 2014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언어의 여러 가지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인상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진리를 알아?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몰라?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이 자유케 되는 과정이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라는 명사가 단독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라는 대상을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덩이 단위 암기와 표현 기능

Posted by on Jul 28, 2014 in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Every time I lose some weight, I find it again in the refrigerator.” – Aunty Acid (링크)

이 유머의 중심에는 lose와 find라는 반의어의 배치가 있다. (cf. Lost and found) 종속절의 “lose weight”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일시에 드러나지 않는 점진적인 현상인데 반해. 뒷부분의 “find it”은 마치 유실물을 찾는 일시적 사건을 묘사하는 듯하다. “it”은 문법상 weight을 가리키고 있으나 내용상으로 이미 줄어든 체중이 아니라 체중을 보충(?)할 수 있는 음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I lost an umbrella, but found it yesterday.”라는 문장에서 “it”과 본 유머의 “it”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복잡한 언어분석이 필요하진 않다. 그러나 학생들이 비슷한 형태의 유머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암기법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단순히 “lose weight = 체중이 줄다”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lose + weight”로 성분을 분석하면서 표현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표현 기능을 고려한다면 덩이(chunk) 단위의 표현 암기가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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