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아시아계 사람들이 백인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Posted by on Aug 28, 2014 in 링크,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만약 아시아계 사람들이 백인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온갖 편견과 무지가 난무하는 씁쓸한 개그입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보기’ 기법은 단순하지만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는군요. 이런 방식은 온갖 상황에 적용 가능하겠죠. “기획자가 개발자에게 말하듯 개발자가 기획자에게 말한다면?” “남자가 여자에게 말하듯 여자가 남자에게 말한다면?” “복학생이 신입생에게 말하듯 신입생이 복학생에게 말한다면?” “대통령이 국민에게 말하듯 국민이 대통령에게 말한다면?” 물론 이들 중 여러 아이디어는 실제 개그의 소재가 되어 왔구요. 

Whining adjuncts?

Posted by on Aug 27, 2014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I am deeply saddened, rather than infuriated, by this kind of view on ‘whining’ adjuncts. Catherine (the writer) may be right in arguing that complaining over and over about one’s profession is good neither for oneself nor students. She seems to be far off the mark, however, in seeking to locate the reasons for all those “whining” in the lack of luck or incompetence or bad attitude of each adjunct. This individualistic approach is blind to structural problems that are shaped by sociocultural and politico-economic forces, which in turn unwittingly helps perpetuate the veiled inequalities and irregularities of status quo. Yes, I agree with her: “life is about compromise.” But I also know that life is about our collective endeavour to make things better, share what little we have, and take actions as we teach. Oh… I’m sorry for another ‘whining.’

http://chronicle.com/blogs/letters/is-that-whining-adjunct-someone-we-want-teaching-our-young/

내 맘대로 되지 않아 좋은 것

Posted by on Aug 27, 2014 in 단상 | One Comment

평생 갈 것 같은 이와 별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하고,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세상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늘상 ‘좋아요’를 눌러주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쩌다 한 번 좋다 해주어도 큰 힘 되는 이가 있더라. 돌고 돌아 다시 이어진 인연, 꼬이고 꼬여 툭 끊긴 인연. 어떤 연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우쭐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구나.

John McHardy Sinclair

Posted by on Aug 27, 2014 in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John McHardy Sinclair (1933-2007) Professor of Modern English Language, University of Birmingham | lexicography, corpus linguistics, discourse analysis

존 싱클레어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COBUILD (Collins Birmingham University International Language Database) 영영사전, 참고도서 등을 비롯 용례에 기반한 사전을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뭉치 언어학(corpus linguistics)의 1세대 학자로서 학문적으로 또 실제 사전 및 교재의 개발에 있어서 크나큰 영감과 아이디어를 준 사람. 그의 위키 페이지는 참으로 단촐하지만 언어학자 뿐 아니라 일반 학습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참으로 크다.

http://en.wikipedia.org/wiki/John_McHardy_Sinclair
http://scholar.google.com/citations?user=RUxm1iEAAAAJ&hl=en
http://www.theguardian.com/news/2007/may/03/guardianobituaries.obituaries

citations

Vulnerability to being misunderstood

Posted by on Aug 27, 2014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Leaving room for interpretation entails embracing the possibility of misinterpretation. This vulnerability to being misunderstood makes us human, unlike computers and networks pursuing the precise reading of each and every line of a code. In this sense, we language educators need to strike a balance between the emphasis on effective communication and the tolerance for misunderstanding. Communicators are not deliverers, packaging information and sending it off; they are interactants, who err, negotiate, settle, and sometimes ‘ignore together.’ (This occurred to me while reading Egoing Lee’s post on the ambiguous nature of human language.)

한스 쿰머의 본성 대 양육에 대한 견해

Posted by on Aug 26, 2014 in 링크 | No Comments

스위스의 영장류학자 한스 쿰머(Hans Kummer)는 몇 년 전 이런 말을 했다. 하나의 형질을 만듦에 유전자가 얼마를 만들고 환경이 얼마를 만들었는가를 가름하려는 것은, 멀리서 듣는 북소리가 북을 치는 사람이 내는 소리냐 아니면 북이 내는 소리냐를 따지는 것처럼 무의미하다고. 반면에 들리는 북소리가 달라졌다면 그것이 북을 치는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북이 바뀌었기 때문인가를 묻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유전이냐 환경이냐를 살피는 문제에서 과학이 제기하는 물음은 오직 이런 종류의 것일 따름이다. — 프란스 드발 저 박성규 옮김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 수희재. 20쪽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며

Posted by on Aug 26, 2014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수많은 이들이 죽었어요. 뉴스를 열심히 봤는데 정확히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배 안에서 고통스럽게 죽은 거 하나는 확실한데… 왜 아무도 구조해 주지 않았는지, 구조되었다는 거짓말은 왜 나왔는지, 배는 왜 그따위로 규정을 어기고도 출발했는지, 그냥 승무원들과 선장이 이상한 사람들이어서 그런 건지, 멀쩡히 전기가 들어오는데 CCTV는 왜 일제히 모두 꺼졌는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시간에 왜 아무 일 안하고 놓친 건지. 보고체계의 혼선은 왜 그렇게 잦았는지. 정부기관 내에서 과장과 조작이 왜 비일비재한 건지. 대통령의 ‘구명조끼’ 발언으로 봐서는 정부 발표처럼 보고를 제대로 받은 건지 의심도 되고. 사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어요.

솔직히 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고치고 넘어가야 할 게 많아요. 예전 인명 참사 때 아픔을 겪으셨던 분들도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 한다 하고, 전국의 수많은 시민들이 문화제로, 서명으로, 집회로, 팽목항에서의 봉사로,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기도로 유가족들을 응원해 주시더라고요. 예술계, 언론계, 학계, 대학생, 중고생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힘을 보태 주셨죠. 유가족이 원하는 기소권, 수사권 보장하는 특별법이 무리라고 하는 분들도 있던데, 엄청 많은 법학자들이랑 변호사들이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고 하더라고요. 350만이 넘는 사람들이 특별법 지지 서명을 했는데 대단한 숫자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거 백여 일 지나면 잊어버려야 되는 거라고 다 그러던데요? 아 ‘다’는 아니고 상당수 정치인들이요. 여당 일각에서는 ‘유가족에게 더 양보할 수 없다’는 말도 나왔다던데, 뭘 줬길래 더 양보할 수 없다고 하는 건지, 지금 상황에서 여당이 유가족에게 ‘양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적절한지도 모르겠어요. 대통령도 자기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하고, 여야는 자기들끼리 합의한 대로 하면 다 해결될 거라고 하고, 국민들도 곧 다 자연스럽게 잊을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하긴 대통령이 유가족 뜻대로 특별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도 많이들 잊었죠. 총리도 책임사퇴 한다더니 다시 돌아가서 일하고 있고, 해경 해체는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 같고. 유 아무개가 죽었을 때는 사건이 다 해결된 것처럼 언론에서 난리를 쳤죠.

요즘엔 시민들과 유가족들이 조용히 잊고 넘어가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할 거라는 이야기도 자주 들리네요. 정치인들만 그러는 게 아니라 많은 언론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더군요. 특히 거대 언론사들이 이런 주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이런 생각 하면 한국전쟁도 잊고, 일제시대도 잊고, 친일반역행위도 잊고, 정권들의 비리도 다 잊어야죠. 다 잊고 희망찬 미래로 가야죠.

정말 화나는 건 엄정한 수사와 기소를 요구하는 유가족들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는 개인들과 단체예요. 급기야 일부 사람들은 유가족의 사생활까지 파고들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어요. 하긴 국가기관이 유가족을 미행하고 감시해 왔죠. 휴… 형식적으로나마 헌법 위에 기초한 국가가 시민을 우습게 아는데, 개인의 감정과 이익에 충실한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리가요… 그래서 유가족들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분들 보면 깊은 존경과 감사를 느껴요. 그리고 죄송해요.

생각해 보면요. 잊을 게 따로 있고, 묻을 게 따로 있는 거 같아요. 자식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는데, 남들이 설명하는 건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되는데, 이후 이런 사고가 또 일어나면 이 지옥같은 시간이 다시 반복될텐데 어떻게 이걸 잊고 묻어요. 조상 한 분이 돌아가셔도 매년 기리잖아요.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도 잊히질 않잖아요. 의문의 의료사고로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그거 해결하기 위해 몇 년을 싸우는데…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 속에서 수백 생명의 숨이 끊긴 일을 어떻게 잊어요. 잊으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은 이 고통 모를테니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해야 하는 건가요? 고통받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게 아니라 고통을 멈추라고 온갖 압력을 가하는 것이 치유라고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유가족분들의 좌절과 슬픔, 분노와 억울함에 댈 수야 없겠지만 요즘 인생이 참 쓰게 느껴지네요. 아파하는 사람들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비극적이고 비상식적인 차이 때문에 말이죠. 유가족들이 서러움으로 노숙을 하고 단식농성을 하는 자리에 경찰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모습에서는 분노를 넘어선 실소까지 나오더군요. 이것이 수천만을 대표하는 한 국가 권력의 현현이란 말인가. 정녕 그런 것인가.

서양 속담에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죠. ‘수고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뜻이라는데, 이미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수고 없이, 아픔 없이, 자기 이익(gain)을 다 챙겨가는 것 같아요. 그들에게는 “No gain, only pain.”(내 이익을 챙기지 못하면 힘든 일만 남는다.)라는 격언이 더 잘 적용되는 것도 같구요. 그런 분들이니 상처받은 자들의 영혼보다는 정치적 안위가 훨씬 앞서는 거겠죠.

“고통 앞에 중립 없다”는 교황의 말씀을 곱씹어 봐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이 말은 “중립적이려 드는 사람은 고통을 모른다”, 아니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은 고통받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뜻 같아요. 부끄러움이 몰려와요. ‘그런 너는 중립을 깨려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라는 질문이 들리는 듯해서요.

그래도 중립적이어서 아픔을 모르는 삶 보다는, 약한 사람들과 같이하며 아픔을 나누는 삶이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아픔을 나누는 삶을 아름답다 느끼는 사회만이 이런 말도 안되는 상처를, 좌절을, 분노를 조금씩이라도 줄여갈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아요. 지금 손잡고 걷는 사람들이 정말 좋거든요. 진짜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이니까요. 진짜 사람들이요.

초등학생의 영한사전 사용에 관하여 (1)

Posted by on Aug 25, 2014 in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가끔 이런 질문 받습니다. “초등학생인데 영한사전 보면 안되나요?”

정답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초등학생에게 영한사전은 무익하다. 무조건 영영사전을 봐야 한다.”거나 “모든 초등학생이 영한사전을 볼 필요가 있다. 영영사전은 초등학습자들에게 너무 어려우니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왜 이 질문이 답하기 어려운지는 질문을 조금만 분석해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 – 초등학교 저학년인가요? 고학년인가요? 오랜 시간 사교육을 받은 초등학생인가요? 혹시라도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온 귀국학생인가요?
“영한사전” – 웹에서 제공하는 영한사전인가요? 초등학생용 학습자 사전인가요? 성인 학습자들을 위한 영한사전인가요?

여기에 저 질문에 포함되지 않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생각해 봅시다.
왜 보는가: 독해용으로 보나요? 작문을 위해 보나요? 언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보나요? 교사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나요? 단어나 예문 찾기 등 액티비티의 일부인가요?
얼마나 자주 보는가: 모르는 단어마다 모두 찾아 보나요? 어쩌다가 한 번 보나요? 한 주에 한두 번 보나요?
누가 보라고 하는가: 자발적으로 보나요? 강요인가요?

생각해 보면 이런 다양한 요인과 상황을 포괄하여 “초등학생 영한사전 사용”에 관한 정답을 내놓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정답을 내놓으라고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저의 정답 아닌 답은 다음 포스트에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쓸지는 미지수 ㅠㅠ)

외국어 교육에서 해석 그리고 문법

Posted by on Aug 25, 2014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초등학교 5학년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어 그림책(storybook)을 배우고 있는데 숙제가 있다고 해서 냉큼 물었다.

“숙제가 뭔데요?”
“모르는 단어 쓰고 해석해 오래요.”
“아 그래요? 모르는 거 다?”
“네네. 다 써가야 돼요.”

(잠시후 grocery 등의 단어 뜻을 질문한다. 잘 대답하다가…)

“이거는요?”
“아, had?”
“네네.”
“had라… 이거 문장을 봐야 뜻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뒤적 뒤적) 여기에 나와요. 뒤에도 또 나오구요.”

(문장을 살펴보니 “He remembered that his mother had asked to …”다.)

“had 뜻을 써가야 되는 거예요?”
“네네. 무슨 뜻이예요?”

솔직히 당황스럽다. 흔히 말하는 대과거를 위한 조동사 had의 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상황이니. 어떻게든 질문에 대답해 봐야지. 수직선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개념을 간단히 설명한다. 똑같이 ‘과거’라고 해도 사건의 전후가 있다는 점을 이해시킨다. 그리고는 “생각났다(remembered)’와 ‘엄마와 심부름을 시켰다(mother had asked)’ 사이의 전후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총명한 학생은 바로 바로 알아듣는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이 다시 허를 찌른다.

“그래서 had가 무슨 뜻이예요?”

헉. ‘그래서’라는 접속사가 폐부를 찌르기도 하는구나. 저 질문에 누가 쉽게 답할 수 있겠는가? 궁지에 몰린 나는 궁색한 이야기를 꺼낸다. 아무래도 국어의 예를 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다’와 ‘갔다’가 있다고 해봐요. 무슨 뜻인지 알죠? “여기 쌍시옷이 들어갔잖아요. ‘갔다’에. 그런데 그냥 쌍시옷(ㅆ)만 놓고 ‘이거 무슨 뜻이예요?’ 라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들잖아요. 또 ‘갔다’랑 ‘갔었다’가 있을 때 ‘-었-‘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되게 힘들죠? 그런 것처럼 had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려운 거예요.”

“그건 쌍시옷이고 이건 had잖아요.”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초등학생이 일종의 메타지식(metalinguistic knowledge)이 없다는 사실이다. 당연하다. had는 눈에 딱 보기에 단어이고, 그러니까 대응되는 의미가 없을리 없다는 생각. 하지만 언어와 언어는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을 몇 분 안에 알려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간단한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1) 초보 학습자들, 모국어에 대해서도 메타언어적 지식이 없는 학생들이라면 단어 대 단어의 1:1 해석 과제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조동사나 be 동사, 전치사 등은 1:1 해석이 매우 어렵다.

(2) 언어 대 언어의 해석을 강요하다 보면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온전히 번역될 수 있다는 그릇된 지식을 심어줄 수 있다. 심하게 강요할 경우 번역에 완벽한 정답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갖게 될 수도 있다.

(3) 대과거와 같이 쉬운 이야기에서도 등장할 수 있는 요소, 즉 내러티브 구성의 필수적인 장치라 할지라도 외국어 학습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다.

(4) 모국어 문법에 대한 지식과 외국어 문법에 대한 지식이 별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학습자의 인지적 능력과 메타언어적 지식은 이 둘 모두에 관여한다. 문법과 번역 액티비티를 활용할 경우 학습자들의 인지발달과 모국어발달, 그리고 외국어 발달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한줄 요약: 초등학생이 대과거의 ‘had’가 한글로 뭐냐고 물어봐서 쩔쩔 맨 후 쓴 장황한 변명. ^^;;

영어 글쓰기에서 피해야 할 단어 5개

Posted by on Aug 25, 2014 in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5 weak words to avoid] 이런 걸 ‘쓰면 절대 안되는 단어들’이라고 가르치면 안되겠지만, 인지시킬 필요는 있겠죠. Though this kind of account should not be imposed upon as rigid rules, students would benefit from their awareness of potential risks in using these words.

자세한 설명은 여기에서:
http://thenextweb.com/lifehacks/2014/08/21/weak-words-to-avoid/

 

weak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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