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가 아닐 때

Posted by on Feb 27,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우리가 남인가요?”

나와 네가 만나서 우리가 되기도 하지만, 나와 남을 묶어서 “우리”라 우기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남이냐고 묻는 사람은 십중팔구 남이다.

같은 꼴, 다른 의미를 잡아내는 건 비판적담화분석의 시작이다. ‘우리’는 수많은 ‘나’의 집합일 수도, 지금 여기 너와 나일 수도, 가상으로 설정된 공동체일수도,억지로 우겨넣어진 남남의 집합일 수도 있다. 기표와 기의는 자의성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의도로 묶인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가 남이냐’고 물으면 ‘남이 왜 우리냐’고 반격하도록 하자.

MOOC에 대한 맹목적 신뢰

Posted by on Feb 25, 2015 in 과학, 링크 | No Comments

기사가 어떤 주장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세부 사항에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1. “교사들은 더는 수업을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개인별 온라인 수업을 하고, 부족한 부분을 교사와 함께 학교에서 보완하고 토론하고, 상호작용을 합니다. 디지털이 가진 강점과 오프라인 교육이 가진 강점을 이용해서 기존이 일방통행 방식의 수업이 가졌던 50%의 이해도 달성을, 98%까지 끌어올렸습니다.”

–> (1) MOOC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과연 타당한가? 공중파 TV와 칸 아카데미 등의 보고에서 MOOC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모델이라는 가능성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위와 같은 선언이, 웹기반교육 초기에 유행했던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내용을 자신만의 속도와 스타일로”라는 구호와 비슷한 것으로 본다. (2) 미국에서 MOOC가 안착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 MOOC는 여전히 실험단계다. (3) MOOC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과 함께 반교육적, 반노동적인 측면도 분명 논의되어야 한다. MOOC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사실 해상도가 높은 디지털은 아날로그와 구분이 없습니다. 아날로그 신봉자들은 사람의 뇌가 아날로그인 줄 아는데요. 신경망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디지털입니다. 사람의 시각은 약 1억 화소의 디지털 소자에 해당되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뇌의 각 부분이 하는 역할은 개인별로 다르며, 뇌의 발달에 따라도 다릅니다.”

–> 이 부분에서 “아날로그 신봉자들은 사람의 뇌가 아날로그인 줄 아는데요. 신경망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디지털입니다.”가 잘 이해가 안된다. 신경망이 디지털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혹시 잘 아시는 분 있으면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

3. “입시교육의 목표인 대학 위상이 MOOC로 인해 무너지고 있습니다. 네이버에서도 ‘Next ED’를 만들어 KAIST와 MOOC를 추진할 계획이란 기사도 떴습니다.”

–> 정말 MOOC로 인해서 대학의 위상이 무너지고 있을까? 만약 대학의 위상이 무너지고 있다면 그것은 좀더 큰 차원의 사회경제적 동인으로 설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MOOC는 그런 구조적 변화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MOOC 때문에 대학의 위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이라는 생각부터 든다. 정말 그러한가?

관련기사: http://slownews.kr/37857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리터러시

 “(언어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에게) 같은 시설을 제공하고, 같은 교과서를 지급하며, 같은 교사를 배정하고, 같은 커리큘럼을 적용했다고 해서 평등하게 대했다고 볼 수 없다.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사실상 의미있는 교육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 1974년 미국 대법원 판결 내용 중에서 

이 판결이 나온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미국의 리터러시 편차는 엄청나다. “미국에 왔으면 모어를 버리고 영어를 쓰라!”고 윽박지르는 정치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다언어사회에서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리터러시 교육은 여전히 요원하다. 

외국어 교육에서도  비슷한 이슈가 있다. 일례로 영어가 완전한 외국어인  한국의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선행학습을 가정하고 수업이 진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황에서 언어조기교육을 잘못된 가치관이나 욕심으로 몰아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국어교육이건 영어교육이건 리터러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크게 세 가지 방향이 떠오른다. (1) 민주주의라는 공론장에 참여하기 위한 기본자질로서의 리터러시 (2) 교육에서의 실질적 평등을 위한 최소요건으로서의 리터러시. (3) 기술의 발달과 환경적 변화를 고려한 다중리터러시(multiliteracies). 

리터러시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작업에는 전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언어정책을 입안하고 언어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연구와 실천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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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요약본을 원한다.
이제 그들의 머리는
‘요약하는 사람들”이 점령한다.

장문을 피하는 것은
단순히 인내력의 문제가 아니며,
긴 글을 읽는 건
사회를 읽는 실천적 행위일지 모른다.

인간은, 세상사는 
언제까지나 복잡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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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equality of treatment merely by providing students with the same facilities, textbooks, teachers, and curriculum; for students who do not understand English are effectively foreclosed from any meaningful education. Basic English skills are at the very core of what these public schools teach. Imposition of a requirement that, before a child can effectively participate in the educational program, he must already have acquired those basic skills is to make a mockery of public education. We know that those who do not understand English are certain to find their classroom experiences wholly incomprehensible and in no way meaningful.” [414 U.S. 563 (1974)]

NYT: 은밀한 계급차별

Posted by on Feb 25, 2015 in 과학, 링크 | No Comments

Article of the Day. 2015.2.25.

삐삐 삐삐~ 버스 카드가 다 됐다. 기사에게 “돈이 한 푼도 없어요. 근데 2킬로미터 쯤 떨어진 정류장에 가야 되는데…”라고 말한다. 승객들은 훈련받은 연구 조력자들로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백인들에게 무임승차를 허락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백인에겐 72퍼센트, 흑인의 경우엔 36퍼센트 비율로 무임승차를 허용했던 것. 놀라운 (혹은 놀랍지 않은) 것은 흑인 기사들조차 백인 승객들에게 더욱 관대했다는 사실이다. 백인에게는 83 퍼센트, 흑인에게는 68 퍼센트 비율로 승차를 허용해 주었다. 

“With more than 1,500 observations, the study uncovered substantial, statistically significant race discrimination. Bus drivers were twice as willing to let white testers ride free as black testers (72 percent versus 36 percent of the time). Bus drivers showed some relative favoritism toward testers who shared their own race, but even black drivers still favored white testers over black testers (allowing free rides 83 percent versus 68 percent of the time).”

계급, 아름다움, 그리고 금기

Posted by on Feb 25, 2015 in 단상 | No Comments

계급의 문제가 아름다움의 문제로 치환되는 과정이 삶을 추하게 한다. 무언가를 아름답다 혹은 추하다 부를 수 있는 ‘능력’은 권력의 핵심이 되어버렸다. 세련됨이 저리 우아하게 묘사되는데, 우리의 망막과 혀끝이 가장 치열한 싸움터라 선언하는 일은 얼마나 볼썽사나운가. 멸시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해부해야 하는 삶은 고단하다.

Knowledge Isn’t Power

Posted by on Feb 24, 2015 in 링크 | No Comments

오늘자 Krugman의 사설은 정곡을 찌른다. 지식(교육을 의미함)은 권력이 아니다.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재분배로 가능하다. 그것을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은 기업과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고, 노동계층을 돕기 위한 정책에 투자하고 최저임금을 높이고 노동조합의 설립을 더욱 쉽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생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와닿은 구절은 “But the notion that highly skilled workers are generally in demand is just false.”였다. 고숙련 노동자가 필요한데 없어서 못쓴다는 말은 말 그대로 거짓이라는 것.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쓸모없다”는 담론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산학’협력’체제를 구축한 한국 기업의 모습이 겹쳐졌다.

“Rising inequality isn’t about who has the knowledge; it’s about who has the power. Now, there’s a lot we could do to redress this inequality of power. We could levy higher taxes on corporations and the wealthy, and invest the proceeds in programs that help working families. We could raise the minimum wage and make it easier for workers to organize. It’s not hard to imagine a truly serious effort to make America less unequal.”

NYT의 슬랭 퀴즈

Posted by on Feb 23, 2015 in 링크,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NYT 같은 신문이 슬랭 퀴즈를 싣는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물론 저의 슬랭 실력은 “definitely not on fleek”하죠. ㅎㅎㅎ

“Your slang game is definitely not on fleek.”

로봇 개를 때리는 것은 비윤리적인가?

Posted by on Feb 23, 2015 in 과학, 단상, 링크 | No Comments

상당한 인지적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이 결합하고, 인간을 닮은 로봇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이때, 깊이 생각해 볼만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기계에 대한 ‘폭력’에 대한 논의에 있어 제가 갖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은 “기계에 ‘폭력’을 가한다”는 표현에 드러나는 일방향성에 대한 것입니다.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기계이고, ‘이 기계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진술은 과학적 사실일 수 있겠죠. (계속해서 폭력에 따옴표를 붙였습니다.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그렇게 느낄만한 충분한 정황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폭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물리적 행위의 결과가 반드시 기계로만 향하는지 의문입니다. 발길질이라는 행위의 물리적 결과는 외부(기계)를 향하지만, 심리적 영향은 내부(발길질을 하는 자기 자신 및 행위의 목격자들)를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계는 안아프니까’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고찰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간이나 동물을 닮은 기계에 대한 물리적 행위라면 말이죠.

일례로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이런 저의 반응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죠.

“맞는 기계는 아픔을 못느껴. 걔가 안아프다는데 왜 니가 불편해?”

“네가 불편해하는 건 과학적인 사실에 반하는 감정이야. 다시 생각해 봐. 네 불편함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구.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이야.”

“너와 같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얼마 안될 것 같은데?”

“저 발길질은 학대라기 보다는 제품 테스트의 필수불가결한 과정이지. 물론 영상에서는 마케팅적인 면을 고려했겠지만 말야.”

하지만 저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단지 “개인 vs. 특정 기계”의 수준에서 논하는 것에 반대하는 쪽입니다. 인간의 특정한 행동 양식, 예를 들면 움직이는 사물에 대해 발길질하기와 같은 행동은 개별 주체가 특정한 기계에 가하는 물리적 충격으로만 기술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발길질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프레임 내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고, 그 해석의 프레임은 단지 개인의 독특한 취향이 아니라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니까요.

페북 친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좋은 글로 고민의 물꼬를 터주신 Suhkyung Kim​님께 감사드립니다.)

 

관련기사: http://scienceon.hani.co.kr/243178

신경과학, 새로운 데이터, 그리고 설명원리

Posted by on Feb 23, 2015 in 과학, 링크 | No Comments

2009년이었던가. 컴퓨터공학과 식물병리학을 복수전공한 뛰어난 프로그래머 친구(그렇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그는 동시통역 수준으로 내 말을 파이썬 프로그램으로 변환시켰다)와 뇌과학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데이터에 대해 한참을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린 결론은 “현재 수준에서 신경과학의 데이터 특히 fMRI 등의 이미지 데이터는 그 자체로 현상을 설명한다기 보다는 분석대상에 관한 또 하나의 주요 데이터 층위(data layer)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였다. 조금 되었지만 Gary Marcus의 New Yorker 글은 그보다 더 나아가 신경과학이 아직 초창기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참고로 그는 저명한 인지과학자로 Guitar Zero, This is your brain on music 등의 책을 썼고, NYU에서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미지 한두 장을 가지고 결정적 증거인양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가 이 글을 쓴 지 2년 남짓 지났고, 신경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쉽진 않지만 학술적 가치 즉 논문출판의 가능성이 높은 분야이고 많은 돈이 흘러들어가고 있기에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리라 본다. 그러나 Marcus의 비유대로 신경과학은 여전히 “아인슈타인”은 고사하고 “뉴턴”조차 만나지 못한 것 같다.

“Scientists are also still struggling to construct theories about how arrays of individual neurons relate complex behaviors, even in principle. Neuroscience has yet find its Newton, let alone its Einstein.”

http://www.newyorker.com/news/news-desk/neuroscience-fiction

방학 끝자락에서

Posted by on Feb 22,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개강을 한 주 앞둔 지금. 방학 계획의 달성도는 입에 올리기 힘들 정도로 미미하다. 후회하지 말자. 눈 지그시 감고 숨 깊이 들인 후 부풀었던 마음 질끈 동여매면 긴 여유 따위는 아예 없었던 것 아닌가. 계획은 깨지라고 있는 게 아니라 사라지라고 있단 말이다! 한맺힌 절규 발생 3초 후. 3월 달력을 펼쳐놓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수업은 이때니까 준비는 주로 이날과 이날. 집중해서 쓸 날은 O요일. 사람 만날 일 있으면 공강 활용.’ 이런 ‘철저한’ 계획 속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새긴다. ‘이동시 지하철에서 침흘리지 말고 눈부칠 것.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끼니 거르지 말고 다닐 것. 시간을 내서 최대한 흥얼거리며 산책할 것. 무엇보다 일희일비하지 말 것.’ 그리고 떠오른 이 노래.

“항상 내가 먼저 가자고 했지
그곳엔 무언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함께 힘겹게 오른 언덕 너머엔
웬일인지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빛나던 우리의 꿈들

그땐 나도 내 진심을 알 수 없어 눈물 흘렸고
그저 우리 발걸음만이 가르쳐 주리라 믿었어

다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닌지 두려워했고
언제 또 시작될런지도 알 수 없었지

그땐 나도 내 진심을 알 수 없어 눈물 흘렸고
다만 우리 발걸음만이 가르쳐 주리라 믿었어

기억 속에 희미해진 어렸던 그때의 그 꿈들
이젠 남은 이 길 위엔 또 혼자가 돼 버린 우리들
내 맘 같지 않던 그 시절”

http://youtu.be/6UUjlkz8l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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