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러지는 말

Posted by on Feb 13,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스타”는 멀리 있어요.
하지만 내 마음의 별은 당신이죠.”

외래어와 우리말이 의미역이 다른 경우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외래어는 일시적며 공식적인 차용이 아니라 점진적이며 예상할 수 없는 여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모든 말들이 그렇듯 제조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어떤 비난이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

Posted by on Feb 12, 2015 in 단상 | No Comments

“돈을 그리 많이 받는 교사들이 왜 직업선택에 후회해?”라는 질문은 많은 이들의 공감과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다. 자신의 처지보다 훨씬 더 괜찮고, ‘방학까지 있는’ 교사가 뭐 그리 불만이냔 말이다. 일부 언론은 이런 정서를 전략적으로 파고든다. 그런데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전혀 다른 방향의 질문도 가능하다. “상대적으로 고임금과 직업안정성을 누리는 교사들이 왜 힘겨워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가령 연봉 3억을 받는 연예인에게 불만이 있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왜 불만을 갖는가?”이지 “3억이나 벌면서 뭔 불만이냐?”가 아니다. 불만은 다양한 요인에서 기인할 수 있고, 연봉은 그중 하나의 요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항공기 조종사들의 파업에 적용되었던 비과학적 논리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 “일년에 OOOO만원 버신다면서요? 그런데 뭐가 그리 불만이세요?”

표준화라는 환상이 표준화는 몽상이라고 몰아부치는 사회에서

Posted by on Feb 11, 2015 in 단상 | No Comments

시간의 표준화로 모두의 시간이 동일한 속도와 밀도를 지닌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지능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지능을 벨커브(정규분포곡선)로 줄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시험의 표준화로 모든 이의 성취를 한줄로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노동이 공평하고도 객관적인 지표들을 통해 화폐로 변환되고 있다는 믿음, 어떤 몸이든 동일한 ‘ROI'(투자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 공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환상은 이 모든 표준화들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이 가운데 최소한의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의 댓가를 최저로 산정한 최저임금의 보장마저 난항에 난항을 겪는다. 통계지표를 기반으로 한 복지에의 열망은 나태함의 유발요인으로 일축된다. 모든 것이 표준화될 수 있다는 환상이 사회를 지배하는 동안, 인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표준화마저 ‘잉여들의 공상’으로 치부된다. 이 ‘객관적’이고 ‘표준적’인 경쟁의 지형 위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뿐이다.

언어학 관련 개그 둘

Posted by on Feb 11, 2015 in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언어학 관련 개그 두 개가 떠올랐습니다.

친구가 1번을 이야기해서 제가 2번으로 응수했었죠. ^^

1. Schwa는 좋겠다. Stress 안받아서!
2. (이어질 듯 이어질듯 하면서도 함께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헤어지며) “우리 둘 이번 생애에는 complementary distribution인가봐.”

 

‘자’와 those, 그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의 의미

Posted by on Feb 10,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다. 혹자는 남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가야 한다고 해석하는 듯하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면 “서로를 돕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종교적인 기원을 갖고 있지 않다.)

영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 사이에 아주 미세한 차이가 존재한다. 영어는 “God(때로는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고 되어 있다. “those”가 주체다. 복수형이라고 해서 여러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며, 돕는 존재 일반을 나타낸다. 하지만, 문법적으로 복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비해 한국어는 “자”는 단수형이며, 복수를 표현할 때는 “자들”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스로 돕는” 주체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얄팍한 자기계발의 논리로 써먹을 수도, 연대의 필연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나는 후자, 즉 “자”가 아닌 “those”를 선택하려 한다. ‘특정하지 않은 개인을 나타내는 단어 those’가 아니라, ‘복수의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 those’로의 ‘오역’을 감행하고자 한다. 이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가 아니라 “하늘은 자신들을 돕는 사람들을 돕는다”가 된다. 내가 나를 도울 때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도울 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조금씩 이루어질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독점과 소통에 관하여

Posted by on Feb 9,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고
돈많은 자가 우물을 사고
돈많은 자가 생수를 팔고
목마른 자가 생수 사려고 일을 한다네.

목마른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우물을 팝니다. 우물에서 생수가 터졌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생수를 마시면서 갈증을 풉니다. 갑자기 한 사람이 돈으로
사서 우물을 송두리째 독점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물 안의 생수를 돈을 받고 팔기 시작합니다. 어제까지 생수를 그냥 마시던 사람들은 생수를 마시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기회만 닿으면 돈으로 무엇이든 소유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동네 우물마저 독점하려는 상황 속에서는 거래나 다른 언어를 통한 일방적인 자기 주장만 있을 뿐 사람간에 진정한 소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물과 관련된 사람들이 우물을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서로 그 우물의 선한 청지기가 된다면 그 우물 덕분에 사람들의 소통은 갈이 갈수록 더 원활해지고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한 주를 시작하며 어제 주일설교 중에서 인상깊은 대목을 옮겨 보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독점하려고 하는지, 또 무엇을 빼앗겼는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Students cannot think?

Posted by on Feb 8, 2015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I also have encountered some of the moments described in this article. However, I don’t buy the ‘students-cannot-think’ kind of rhetoric. This is not their fault; rather, they have just adapted to a system that values high test scores, fast mechanical responses, and pseudo-critical mindsets, tailored best to the neoliberal capitalist society. And most important of all, we teachers must be reminded that our students do not think in a vacuum: they think with, and after, teachers, parents, and other adults, who have contributed, big or small, to establishing the current educational system.

“http://www.theguardian.com/teacher-network/2015/feb/07/secret-teacher-exams-students-thinking

글쓰기 혹은 일반화에 저항하는 생각의 정제과정

사회구조, 계급과 계층, 다양한 사회집단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어떤 계층이나 집단도 단 하나의 속성으로 똘똘 뭉쳐있지 않다. 개념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개념조차도 다수에 의해 회자되려면 결코 짧지 않은 여정을 거쳐야만 한다. 수많은 이들의 경험과 생각이 응축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런데 방송 기사건, 칼럼이건, 페이스북 업데이트건 한정된 지면 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 보면 집단과 개념의 단면,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만을 이야기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권위적인 목소리(voice)를 취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 와중에 사회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지닌 다면적이고 중층적인 개념 혹은 집단의 특성이 평면 흑백사진으로 변화하는 걸 본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일부”, “경향이 있다”, “예상된다”, “가능성이 있다”, “증명된 건 아니다”, “추정된다”와 같은 표현들의 형태(form)는 알고 있지만, 의미(meaning)와 쓰임(use)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사실 공적인 영역에서의 글쓰기에서 특정 개념과 집단에 대한 일반화가 허용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글쓰기가 “자기 주장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일반화에 저항하는 생각의 정제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글: 아는 게 많(아진)다는 환상 속에서 선언에 대한 욕구가 불쑥 불쑥 튀어나올 때 그걸 누르고 정제하는 게 글쓰기 과정인 것 같아요. 물론 공적인 장에서의 글쓰기 자체가 가지는 선언적 효과를 벗어나는 방법은 침묵밖에 없겠지만요.그래서 얼마 전에 비몽사몽간에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했죠. “사람들이 논문만큼 편지를 값지게 여겼으면 좋겠다. 아니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

정말 두려운 것

Posted by on Feb 8, 2015 in 단상 | No Comments

예전에는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일에서 실패할까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에 성공할까 더 두렵습니다. (I used to be afraid of failing at something that really mattered to me, but now I’m more afraid of succeeding at things that don’t matter.) — Bob Goff

최고의 지성?

Posted by on Feb 7, 2015 in 단상 | No Comments

타임라인에 공유되고 있는 또다른 서울대 성희롱 사건. 교수가 제정신이라면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SBS 보도의 워딩이 귀에 턱 걸린다.

“이게 과연 대한민국 최고 지성인이라는 서울대 교수의 말일까, 믿기 어려운 성희롱이 이어집니다.”

아니 서울대 교수가 도대체 왜 대한민국 최고 지성인이냐? 아니, 서울대 아니더라도 “OO대 교수”라는 직함이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건 누구 생각이냐? 생각 좀 하고 기사를 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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