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고문

Posted by on Jun 22, 2015 in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이곳은 흡연 장소가 아닙니다. 흡연은 당신의 건강 뿐 아니라 거주인들의 기분까지 해칩니다.

이곳은 연애를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게다가 속삭이는 밀어까지 모두 다 들립니다.

약간 후미진 건물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연애’를 하는 이들이 있다. 여름이 되면서 ‘방문객’이 많아지고, 창을 통해 담배연기나 대화가 흘러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뭔가를 붙이기로 했는데, “사유시설: 거주자 외 이용 금지” 뭐 이런 건 너무 무서울 것 같아서…

칸토어, 무한, 그리고 수학교육

Posted by on Jun 22, 2015 in 과학, 링크,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수학이 싫지 않았다. 이과에 가서 수학을 전공하면 어떻겠냐는 수학 전공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난 내가 수학에 소질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삼각함수가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아서 문제풀이 기계가 됨) 결국 언어교육을 택했다. (슬프게도 외국어에도 그다지 큰 재능이 없음을 머지 않아 깨달았지만.)

아래 영상을 보며 칸토어(나는 오랜 시간 그를 ‘칸토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이게 맞는 표기인 듯하다)를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났다.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무한의 종류, 무한의 포함관계, 셀 수 있는 것과 셀 수 없는 것, 개념으로서의 무한 등을 처음으로 생각해 보면서 수학이 계산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수학은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정답을 계산하는 과목이라기 보다는 생각의 차원을 확장하고 비트는 일이었다. 숫자들간의 관계를 공간으로 매핑하고, 공간을 다시 숫자로 표현하고, 닿을 수 없는 것과 닿을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고, 가능성과 현실 사이를 오가고, 연결되어 있을 것 같지 않은 차원들을 연결하고… 수학은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도구상자였다.

얼마 전 수학 용어와 관련하여 간단한 글을 썼다. 하지만 나는 수학을 잘 가르치기 위해 용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당 글에서는 교사의 중요성과 소통체계를 언급한 바 있는데, 개념적인 면에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먼저 수학이 자신과 관련 없는 일 혹은 ‘외계어’가 아님을 보여줄 수 있는 풍부한 예가 필요하다.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수학적 개념과 현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이야기 말이다. 이는 ‘우리 삶과 수학’, ‘수학과 사회’, ‘수학이 바꾼 세상’과 같은 주제와 연결된다.

다음으로는 수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압도당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학교수학에서 무한과 극한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 단지 수학자나 이론물리학자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다. 평가에 대한 부담 없이 ‘무한’, ‘최소’, ‘수렴’, ‘차원’ 등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수학 포기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이런 아이디어는 비웃음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족쇄를 풀고 학생들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수업이 쓸모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것(the common)과 숭고(the sublime)를 잇는 언어로서 수학을 배웠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누구도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냥 Numberphile 채널을 추천하고 싶었는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했군요.)

성숙이라는 가치에 대하여

Posted by on Jun 21,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적어도 나에게 성숙이란 삶의 관심이 “강하고 보편적인 것”에서 “약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위대해지려는 사람들’보다는 ‘덜 쓸모없어지려는 사람들’을 따르는 과정, 전지적 시점으로 스펙타클을 쓰려는 욕망을 키우는 사람들보다는 스치는 단역일지라도 자기 역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는 과정 말이다.

주말 내내 이런 저런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내 마음에 비친 내 얼굴 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나. 여전히 어리석은 나.

강변을 따라 저녁 산책을 했다. 손톱달을 만났다. 스스로 빛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올렸다. 달이 없는 하늘은 그저 허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화숙 기자의 수학용어에 대한 비판을 보고

Posted by on Jun 20, 2015 in 단상, 링크, 말에 관하여 | One Comment

아이들에게 와닿지 않는 용어가 많다는 지적에 공감한다. (서화숙 기자는 “함수”, “기하”, “유리수”, “무리수”, “소인수분해”, “해” 등을 직관적이지 못한 용어의 예로 든다.) 직관적 용어를 사용할 때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 용어에 대한 오개념이 줄어들 수 있고 수학에 대한 거부감을 낮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용어의 문제는 단지 수학에 국한되지 않으며 자연과학 전반, 나아가 모든 학문 분야에서 나타난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언어교육 분야다. (강연 중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예를 들어 “품사”는 영어로 ‘part of speech’이다. 직역하면 ‘말의 일부’, ‘언어의 구성요소’ 정도의 의미이니 영어 원어민 화자는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에게 ‘품사’는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보어’(complement)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체언’이나 ‘용언’등의 용어 또한 어렵긴 매한가지다.

난해한 용어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중에서 교사의 역할과 학문발전을 위한 소통체계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먼저 교사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자. 서화숙씨의 발표 중에서 “약수와 배수의 뜻을 안가르쳐 주면서 약수와 배수를 가르친다”라는 대목이 있다. “안가르쳐 주면서” – 이 대목은 용어가 친숙하지 않다는 점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수학용어가 최대한 쉽게 바뀐다고 해서 수학의 개념 하나 하나가 학생들에게 곧바로 이해될 리 없다. 직관적인 용어의 사용이 개념적 이해까지 한방에 해결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답은 과학지식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분야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개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용어의 이해는 개념 이해의 단초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그래서 교과 전문가의 개입이 중요하다. 하지만 교사의 역할이 단지 지식을 잘게 쪼개어 조금씩 떠먹이는 일에 그쳐서는 안된다. 교사는 지식의 핵심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쉬운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 인류의 지적 전통이 쌓아온 최고의 지식을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의 수준과 상황에 맞게 각색하는 것, 하지만 ‘원작’이 가지고 있는 원리와 깊이를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 이것이 교사가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며 내용교수지식(Pedagogical Content Knowledge)의 핵심이다.

물론 나는 교사들 모두가 이러한 책임을 방기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교사들이 입시위주로 가르쳐 온 것은 사실이고 그 와중에 학문적 원리와 개념에 대한 심도있는 설명 보다는 손쉽게 문제를 푸는 테크닉에 집중해 왔음을 부인하긴 힘들다.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제약이 일부 교사들을 ‘문제풀이 기계’로 떠민 것이다.

아울러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는데 개별 교과의 용어는 교과서 저자들의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특정 학문 분야의 용어는 학문 공동체가 쌓아온 전통의 산물이며, 동시대 학자들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기호체계의 핵심이다. 그렇기에 이를 바꾸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게 단지 ‘시간’의 문제일까?

학문을 일종의 발달시스템으로 본다면 교육 또한 학문생태계의 일부다. 지금의 학생은 미래의 교사이고 학자다. 그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초중고교 교사들과 대학교수들이 나누어 맡는다. 그런데 학교 현장과 대학교수들 사이의 소통이 잘 되고 있을까? 나의 짧은 경험상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생각해 보자. 과연 서화숙 기자가 제기한 용어의 문제를 생각해 본 교사가 없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용어의 문제는 수학 뿐 아니라 다양한 교과에 존재해 왔고, 많은 교사들이 이를 절감했지만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파고들어 교수혁신을 이루려고 노력한들 뭐가 달라질까?’라는 생각이 압도적이다. 학생과 교사의 소통, 교사와 교수의 소통, 교육과정을 만드는 사람들과 학생 사이의 소통 등 다양한 소통 채널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는 영어교육에 대한 나의 경험에서 이끌어 낸 생각이니 일반화할 수는 없겠으나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알기 쉬운 용어의 사용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용어개편안’의 문제로 보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용어의 문제는 교육 전반 즉, 문제풀이 테크닉에 올인하는 입시 위주의 교수학습, 이에 어느 정도 책임을 갖고 있는 교사들, 파행적 교육을 구조적으로 강제하고 있는 입시제도를 관통하는 문제다. 아울러 교과교육 전반의 문제에 대한 교육 주체들의 소통부재가 문제 해결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 나의 머리 속에는 “용어개편 연구 교수 TF” 같은 조직을 출범시켜 개편안을 만들고 공청회 한 두 번 하는 식의 시나리오가 돌아간다. ‘설마 그렇게 허술하게 하겠어?’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NEAT라는 쓰지도 않을 시험에 400억 넘는 세금을 쏟아부은 민족 아닌가? 근본적인 고민 없이 단기성과 창출을 위한 사업들이 출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붙임: 용어 비판에 앞서 나온 발언 중 “문제집이 사교육인지 공교육인지 잘 모르겠다”라는 말 또한 고민해 볼만한 대목이다. 공교육 밖의 자원들, 즉 사교육 및 참고서적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해야만 공교육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공교육을 하고 있는 것인가?

 

리터러시, 개개인의 역량이 아닌 문자 생태계의 효과

Posted by on Jun 19, 2015 in 링크,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John W. Miller 등의 연구자들은 미국에서 리터러시 수준이 가장 높은 도시들을 선정한 바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리터러시 수준의 측정에 있어 읽기 쓰기 시험 점수 외에 다양한 기준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1) 도서 판매자 현황, (2) 교육 성취도 (3) 인터넷 자료 (4) 도서관 자료 (5) 신문 구독률 (6) 정기간행물 출판 현황 등 여섯 가지 지표가 리터러시의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리터러시를 시민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문자 생태계의 효과로 본다는 점에서 평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기존의 관행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Criteria for Literacy: The study ranks cities based on research data for six key indicators of their citizens’ use of literacy: booksellers, educational attainment, Internet resources, library resources, newspaper circulation, and periodical publishing resources. The information is compared against population rates in each city to develop a per capita profile of the city’s literacy.”

The top 10 cities this year are:

Minneapolis, MN
Washington, DC
Seattle, WA
Paul, MN
Atlanta, GA
Pittsburgh, PA
Denver, CO
San Francisco, CA
Boston, MA
St. Louis, MO

http://hosted.ccsu.edu/app/?news=1119&data

“통찰” 단상

Posted by on Jun 18,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통찰’은 대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유의어다. 트윗과 같이 짧은 글일 수록 이 설명이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진정한 통찰은 한두 줄의 ‘감동적인’ 텍스트가 주는 순간의 깨달음이 아니다. 통찰은 역사적 사실과 논쟁의 디테일로 빼곡한 글과 당면한 삶의 문제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라야 얻을 수 있는 생성적인 과정이다. 게다가 어렵사리 얻은 통찰도 짧은 시간, 특정한 맥락에서만 유효하기에, ‘모든 경우’를 포괄하려는 통찰은 사기나 꼰대질에 수렴하게 된다. 통찰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진정한 통찰이 사라진다는 역설을 간파할 때 우리 각자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작디 작은 촛불에 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빛이 언제 사그라들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포쉬(Posh) 영어를 쓴다면

Posted by on Jun 18, 2015 in 링크,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영어 | No Comments

<킹스맨>을 소재로 사회와 언어계층 이야기를 시작한 한 학생 페이퍼 읽다가 빵터짐.

“킹스맨 요원들은 항상 깔끔하게 다려진 수트를 입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흘리거나 빨리 하지 않는다. 축약형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슬랭 역시 일절 쓰지 않는다. 그야말로 영국의 상류층이 쓴다는 포쉬영어(Posh English)를 구사하고 있다. 포쉬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아무리 급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Help’라고 말하지 않고 ‘Excuse me, Sir. I’, terribly sorry to bother you, but I wonder..’ 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

존진님의 링크 제공: http://funnyand.com/the-how-to-be-british-collection/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의 계절

Posted by on Jun 18,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내 수업을 무려 네 개 들은 대학원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여름 졸업이라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작은 카드를 건넨다. 나도 정말 고마웠다고, 또 보자고 인사한다. 돌아오는 길, 한숨과 설렘으로 카드를 연다. 내가 수업시간에 강조했던 “We teach who we are”라는 말(파커 파머의 말이었던 듯)을 기억하며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를 읽는다.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학기마다 돌아오는 작별의 의례이건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배가 고프다. 저녁을 먹어야겠다.

신경숙 표절논란 단상

Posted by on Jun 18,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베스트 셀러, best seller, 명사.

‘어떤 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물건. 특히 출판물(出版物)을 가리킴. 순화어는 `인기 상품” (출처: 구글사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의 작품은 상품이 될 수 있다. 상품성 높은 작가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작가와 상품 사이의 거리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작품은 단지 허공을 떠도는 텍스트가 어니며, 작가는 단지 글쓰는 기계가 아니라 삶을 써내려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거리를 없애고 “작가=상품”의 등식을 밀어부치는 순간 베스트 셀러는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리고, 작가는 “판매왕(best seller)”이 된다.

독자들은 삶을 배반하는 글을 원하지 않는다. 인기상품이 되기를 주저않는 저자와 최고의 인기상품이기에 불량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출판사의 모습에서 속절없는 이별보다 더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교육과정 개정 파행 (by 이찬승)

Posted by on Jun 18, 2015 in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이미 공청회서 드러났듯이 한국의 경우, 사전 깊은 연구도 없고 해서 무늬만 통합 혹은 융합이지 분명한 원칙과 체계도 없이 매우 어정쩡하게 섞어 놓았다는 평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시도는 절차상 크게 두 가지 하자가 있다. 하나는 핀란드나 대부분의 나라들처럼 전통적이고 분절적인 교과서로 공부하고 응용과 활용을 범교적으로 하는 것에 비해, 한국의 이번 개정처럼 과학 교과군과 사회 교과군을 통합, 융합식으로 가르치면 융‧복합 인재 양성이 된다는 가설은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런 검증 과정도 없다. 과학과 사회의 기본 지식과 개념을 배우는 것과 이것의 응용과 활용을 분리시키는(기본지식 습득은 중학에서, 응용은 고1 과정에서 하려는 것을 의미) 시도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수능을 하루만에 다 보기 위해 무리하게 교육과정을 개정하는 발상 자체가 크게 비난받을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허술하게 개발된 교육과정 성취기준, 그리고 처음으로 접하는 대개념(big idea)을 중심으로 한 통합과 융합의 특성을 갖는 새로운 개념의 교과서를 불과 1년만에 만들 수 있는가?” 또, “이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도 크다.”

“핀란드는 교육과정 논의 초기부터 학생의 의견을 듣고 반영한다. 이번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서 5만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초안에 대한 의견을 청취한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뉴미디어 세대 아동, 청소년은 학문중심으로 짜여진 교육과정의 내용을 강의식으로 전달하는 수업에 의미를 느끼고 집중하기 어렵다.” (이찬승)

“과학 영역에서의 대주제(big idea)를 결정하고 각 교과의 핵심개념을 선정하여 스토리라인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짧은 기간 동안에 핵심개념을 선정하고 스토리라인을 구성함으로 인해 통합 성취기준에서 나타나는 흐름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고, 내용 체계표 상의 성취기준과도 불일치하는 점이 많다.” (김미경: 덕수고등학교 교사)

http://21erick.org/bbs/board.php?bo_table=11_5&wr_id=1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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