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거짓말을 계속 해야 하는 스피킹 대비 훈련

Posted by on Jul 31, 2015 in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 No Comments

오늘 서점에서 오랜만에 토익 수험서를 훑어보았습니다. 토익 스피킹에 아래와 같은 종류의 질문이 나오나 봅니다.

“최근에 옷을 언제 샀나요?”
“일년에 라이브 공연에 몇 번이나 가나요?”

수험서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전략적 대비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범 답안’ 같은 것을 주죠.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정장이랑 셔츠를 샀다.” “서너 번 가는데 주로 락이나 힙합 공연이다.” 이런 문장들이 한국어와 영어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모범답안을 외웁니다. 외우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아니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외울 수 밖에 없죠. 그런데 그 문장들을 자기에 맞게 고쳐 외우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암기하는 경우가 꽤 되지요.

그러다 보니 사지도 않은 정장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가보지도 않은 곳에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하게도 됩니다. 갑자기 없던 여동생이나 드론이 생기기도 합니다. 관심도 없던 주제에 ‘확고한 자기 의견’이 생겨버리기도 하죠. 본의 아니게 ‘사소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말로 피해 볼 사람이 없기에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ETS가 사설 탐정을 고용해서 특정 수험자에게 정말 여동생이 있는가, 그집 옷장 안에 최근 구입한 정장이 진짜 있는가를 추적하지도 않겠죠.

하지만 이것은 효율성의 극대화가 지상최대의 과제가 된 사회의 사소한 비극입니다. 영어, 좀더 정확히 말해 ‘영어점수’를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인양 하고 있는 풍경은 결코 멋지지 않죠.

시험공부를 위해 문장을 암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의 의미가 우리 삶과 어긋나는 거라면 어떨까요? 영어 일기를 쓰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영어일기용 문장을 줄줄 외우고, 이를 엮어서 일기를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요? 누구도 이로 인해 큰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걸까요? 어쩌면 이런 ‘사소한 비극’이 차곡 차곡 쌓여 우리 삶을, 공부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삶을위한영어공부

감정이 거세된 수업

Posted by on Jul 31, 2015 in 단상,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강의를 맡은 학교의 대나무숲 페이지들을 읽는다. 수업 시간,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드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들이 많다. 수업이라는 공간에서 감정의 주체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 것일까? 깔끔하게 정리된 내용, 충돌 없는 토론, 너저분한 현실의 생략은 결국 배움의 제스처만 남길 뿐인데. 그런 수업을 하긴 싫은데.

— 말은 이렇게 하지만 늘 나의 감정노동을 최소화하는 수업을 해왔던 것 같다. 나의 평화는 너무나 연약하다.

Paradoxes: an ordinary state of affairs

Posted by on Jul 30, 2015 in 영어,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It’s okay not to be okay.
It’s not okay to be okay.

The brutal reality makes paradoxes an ordinary state of affairs. And it is sad indeed.

 

==

 

The era forces you to be a revolutionary or a coward; there’s no “middle ground.”

And it’s enough to keep that colossal absurdity from making us absurd. That’s a great feat, in fact.

개꿈은 계속된다

Posted by on Jul 30,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폐허가 된 공장을 걷고 있었다. 액션 영화의 마지막에 험상궂은 아저씨들과 정의의 주인공들이 한판 붙는 음산한 세트장 느낌이다. 옆에는 ㅈㅈㄱ 교수(좋아할만한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할만한 사람은 싫어하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양반)가 나란히 걷고 있다. ‘어라, 왜 이 양반이 나랑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하이톤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빨리 가지고 나갑시다.”

둘러보니 각종 조명을 만드는 공장이다. 일반 형광등에서 희귀한 전구, 인테리어용 장식등, 책읽을 때 딱 좋을 스탠드까지. 보니 이 양반 쓸만한 물건을 꽤 챙겼다. 내 손에는 달랑 전구 몇 개가 들려 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어이, 거기 물건값은 내고 가셔야지. 그냥 가시면 섭한데.”

분명 버려진 공장이었는데 입구에 좀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자리를 펴고 드문 드문 앉아 있다. 순간 쫀 나는 ㅈ교수에게 ‘돈 낼까요?’라는 눈짓을 보낸다.

“무슨 돈을 내요. 빨리 갑시다.”

아 눈치는 정말 귀신같은 양반이구나.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질척거리는 언덕을 겨우 올라 차에 탔다. 그는 가까운 곳에 괜찮은 식당이 있으니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근데 우리 같이 밥먹을 정도로 친해요? 나 아저씨 책 안읽은 지도 오래되었는데.’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꿈인 줄 알았으면 그냥 말했을텐데, 쩝.

식당에 들어서는데 과 후배들이 뒤풀이를 하고 있다. (그게 뒤풀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잘 기억이 안나지만, 확실히 뒤풀이 분위기였다.) 그런데 맙소사! 이 친구들, 나이를 안먹었어! 아직도 대학생이야! 얼굴도 말투도 그대로고! 왠지 엄청 억울하다.

“어 형… 진짜 오랜만이예요. 근데 저분은…”
“맞아. 그분이야. 같이 먹을까?”
“네네.”

잘 알지도 못하는 교수와 수십년 전 후배들과 밥을 먹게 된 이 황당한 시츄에이숑. 그 와중에 그분은 특유의 말빨로 좌중을 압도한다. 후배들 밥숟가락 놓고 듣네. 지난 번 꿈에서 숫자는 잘도 기억나더니만, 그 양반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식사가 끝나고 집에 데려다 주시겠다 해서 넙죽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이 양반 불쑥 던지는 말. 요즘에는 아무리 책을 써도 돈이 안된단다. 혹시 주변에 할 일 없냐고 물어본다.

‘나도 할 일이 없구만 무슨 소개까지…’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꾸욱.

집앞에 거의 다 왔는데 앞집 사는 착한 초등학생 하나가 나와 있다. 어? 근데 이 소년 교수님을 아는 눈치네?

갑자기 둘이 불어로 막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내가 소개시켜 줘서 얼마 전부터 불어 과외를 하고 있다고. @#%@^@$!

뭐가 뭔지 모르겠다. 오늘은 반드시 집(인지 한증막인지)을 탈출하리라! 개꿈도 탈출하리라!

‘합리적 교육소비자’라는 함정

Posted by on Jul 28, 2015 in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 No Comments

1. 영어교육에 관한 사고의 두 축 – 몇 가지 키워드

(1) 정답. 선택. 계획. 실행. 성과. 두려움. 능력.
(2) 원리. 대화. 자율과 책임. 새로운 세계. 행복.

물론 현실의 학부모들이나 영어공부의 양태가 이렇게 반듯하게 둘로 나뉠 리 없다. 다만 최근 몇 주간의 대화 속에서 추출되는 키워드가 서로 다른 ‘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2. 주목해야 할 것은 영어와 자녀에 대한 태도가 바로 교육적 실천으로 연결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즉 적지 않은 학부모들이 2번의 가치를 암묵적으로, 또 진심으로 지지하지만 1번의 전략을 채택(당)하고 만다. 많은 경우, ‘아이가 이런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영어는 이 정도면 된다’라는 생각이 ‘방과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방학에 아이에게 무엇을 시킬 것인가’라는 당면 과제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3. 가치관과 실행 사이를 채우는 것은 수많은 영어교육 프로그램의 유혹과 친구들과 동네의 ‘압력’, 그리고 ‘무능력한 부모’로서 ‘실패한 자녀’를 대면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때로는 부모 뿐 아니라 아이들도 자신을 또래와 비교한다. 가치와 실행을 연결하는 것이 자녀와의 대화라기 보다는 상업 담론과 주변의 압력인 셈이다.

4. 나는 영어교육의 문제를 조금씩 풀어가는 데 있어 ‘정보를 선별하는 능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보다는 ‘자신과 아이를 대화적/실행적 주체로 키워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많이 듣고 배워서 아이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겠다’가 아니라 ‘아이와 끝없이 대화하고, 그 속에서 자신도 자녀도 삶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는 주체로 성장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이다.

5. 우리가 ‘올바른 선택’이라는 프레임으로 영어교육의 문제를 풀어내려 할수록 유혹과 압력, 공포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합리적 교육소비자가 되라”라는 말에 들어있는 가장 무서운 함정은 ‘합리성’을 정의하는 담론 대부분이 자본의 이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6. 대형마트의 수많은 시리얼 상자들이 선택의 자유를 확대한 것이 아니듯, 수많은 학습법과 프로그램들이 배움의 자유를 확장하진 못한다.

덧댐:

빙글빙글.

교사, 학부모, 사교육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연일 들으면서 ‘빙글빙글’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얼추 비슷하게 생긴 이야기들. 배열만 바꾸어 놓으면 몇 가지 템플릿에 맞춰 넣을 수 있는 이야기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 빙글빙글, 글빙글빙, 빙빙글글…

문제는 빙글빙글 돌다 보면 어지럽고, 좀더 돌다 보면 지쳐 쓰러지기도 한다는 것.

어머니들과의 ‘영어공부” 수다

오전에 두 시간 여에 걸쳐 여섯 분의 어머니들을 만났다. 대부분 초등학교 자녀들을 두었다. 나왔던 이야기들을 간략히 정리해 본다.

1. 아이가 영어를 막연히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것 같다. 그걸 깨주고 싶다.

2. 자신이 받은 교육(사립초등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움, 그다지 경쟁적이지 않았음. 형제들과 가끔 영어로 이야기하기도 함)과 지금 아이가 처한 상황(공립학교, 학생들 사이에 경쟁이 심한 상황) 사이에 갭이 크다 보니 아이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지 모르겠다.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영어교육에 큰 돈을 투자할 형편도 아니다.

3. 사교육은 시키지 않고 있다. 다만 교육과정, 교육구조가 너무 복잡해져서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를 때가 많다. 남들보다 뛰어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남들과 비슷하게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간 정도만 되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에게도 크게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지만 너무 떨어지면 아이 스스로 별로 안좋아할 것 같다.

4. 다른 과목과 다르게 영어는 교육법이 여러가지다. 더 복잡한 것 같다.

5. 교육과정이나 교과서가 자주 바뀌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 NEAT 이야기 나오면서 이런 저런 유행이 불었는데 그것도 들어가고. 현재로서는 영어교육의 구체적인 목표가 없는 상태이다. 영어를 엄청나게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놓으면 불안한 게 사실이다.

6. 전에 살던 동네는 아파트 단지여서 소규모 그룹 과외를 자연스럽게 시켰다. 이사온 후로는 그럴 만한 곳도 없고 정보도 없다. EBS에서 하는 책읽기 프로그램을 1년 정도 해봤는데 아주 만족하진 않지만 청취능력은 좀 향상된 것 같다.

7. 학원 왔다갔다 하는 시간, 학원비 등이 솔직히 아깝다.

8. “중학교 가기 전에 문법은 떼고 가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고민하다가 조금씩 시키고 있다.

9. 학원은 문법을 너무 강조해서 별로고 전체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주위 정보를 들어보면 다 다른 것 같고, 결국 아이에 맞춰서 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0. ABCD, 파닉스 떼고 나면 바로 문법에 들어가는데 별로인 것 같다.

11. 손에 ‘콕’ 잡히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잡히는 게 없다.

12.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니 영어를 가르치긴 힘들지만 어떤 방향은 잡아주고 싶다. 그게 쉽지 않다.

13. 방학특강이라고 나오는 게 많다. 일 주일에 세 번, 갈 때마다 4-5시간씩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솔직히 너무 힘들 거 같은데 또 안보내자니 조금은 불안하다. 옆집 애가 간다고 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고 나는 ‘뻔한’ 이야기를 해드렸다.

1. 정답을 찾지 말고 원리와 원칙을 생각하자.

2. 사교육은 교육이지만 기업이기도 하다. 기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한다. 그걸 잊으면 안된다. 교육적인 면과 기업의 생존을 모두 추구해야 하는 입장에 서보면 학원의 상담이나 마케팅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3. 정보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개인, 학원, 학교, 주변 학부모 모두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 자기가 경험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의 이야기는 지하로 사라진다. 우리에게 다가오기 전에 모두 ‘죽어버린다.’

4. ‘영어를 어떻게 잘하나’를 생각하기 이전에 ‘영어를 이만큼 시키면 뒷전으로 밀리는 경험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영어 내부에서 사고하지 말고 아이들의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발달을 생각하라.

5. 많은 정보를 검토했다고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걸러내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6. ‘마감임박’처럼 들어오는 광고에 현혹되지 말라. 아이가 ‘지금 이 순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없다. 먹고 자고 노는 것 말고는.

7. 문법을 ‘형법조항’으로 가르치는 선생들이 너무 많다. 문법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게 해주는 도구다. ‘법조항으로서의 문법’에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연장통으로서의 문법’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8. 문법이 필요하냐고 물으시는 분이 있는데 나의 대답은 “필요하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법칙 외우고 시험 보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9. 읽기는 문자 해독이 아니라, 문자와 아이의 세계가 만나는 과정이다.

10. 저 사람의 자녀에게 성공한 방법이라고 자신의 자녀에게도 성공적이리라는 법은 전혀 없다. 성공사례를 ‘전파’하는 것은 자유지만, ‘모두를 향해’ 말하는 사람을 주의하라.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시간이 금방 흘렀다. 나는 괜히 열을 올리다가 목이 칼칼해졌다. 그리고 예정에 없었지만 다음 주에 한번 더 만나뵙기로 했다. 다음 주에는 외국어에서의 읽기 발달 단계와 원리, 어휘공부에 대한 접근법에 대해 간단히 드리기로 했다. 이후에는 어머니들의 질문과 토론에 참여하는 것으로 하고.

대화를 마치고 오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목마름’이었다. ‘어머니들이 참 목마르구나. 아이들도 그렇겠지.’ 하는 생각. 섯부른 판단은 중지하고 일단 좀더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었다. 생각의 꺼리는 점점 많아지는구나.

삶은 천근 만근 무겁구나

Posted by on Jul 27, 2015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저항은 법 앞에서 ‘반역’이 되고, 죽음은 권력 앞에서 ‘없던 일’이 된다. 한을 풀어달라는 죽음이 더 큰 한이 되어 만인의 가슴에 묻히는 시대, 죽음의 무게까지 오롯이 져야 하는 삶은 천근만근 무겁구나.

“영원한 건 없다고 입버릇처럼 넌 말했었지
멀어지는 기억을 잡아 두려 애쓰지 말라고

내가 사는 이곳엔 너의 흔적이 너무 많아서
미안해 아직도 난 널 보내지 못 했어
아직도 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 속에 있어

그때도 이만큼 난 너를 생각했을까
손 내밀면 닿는 곳에 함께 있었는데
이제서 뭘 후회하는지

아니 너의 탓은 아니야
그건 너의 탓이 아니야

내가 사는 이곳엔 너의 흔적이 너무 많아서
미안해 아직도 난 널 보내지 못 했어
아직도 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 속에 있어

그때도 이만큼 난 너를 생각했을까
손 내밀면 닿는 곳에 함께 있었는데
이제서 뭘 후회하는지

아니 너의 탓은 아니야
그건 너의 탓이 아니야”

<셀마>를 보다

Posted by on Jul 26, 2015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셀마(Selma)를 보았습니다. 제겐 2015년 최고의 영화네요. 물론 이 말을 ‘엄청난 영화’라는 뜻으로 이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마틴 루터 킹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것들을 빚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틀란타와 알라바마에서 그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도 했었죠.

그리 많지 않은 관객이었지만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거의 모두가 숨을 죽였습니다. 한참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이런 경험,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변한 게 별로 없잖아.”

일어서려는데 아내가 내뱉은 말입니다. 영화의 감동보다 훨씬 더 참혹한 현실이 여전히 미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옵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겠네요. 바로 이곳에도 인종과 국적에 대한 차별은 엄존하니까요.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Glory>를 다시 듣습니다. John Legend와, Common이 같이 불러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곡입니다.

“One day when the glory comes
It will be ours, it will be ours
Oh one day when the war is won
We will be sure, we will be sure
Oh glory (Glory, glory)
Oh (Glory, glory)”

우리 생애 진정 “Glory”를 외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아마도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기약없는 영광의 날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 곁에 아주 잠시나마 서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제 생애 최고의 영광일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은 이렇게 썼지만 충분히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보지 못했는데 <버틀러>와 같이 보면 더 좋을 거라고 하네요. ^^

마윈의 ‘어머니 vs 아내 어록’ 단상

Posted by on Jul 26,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마윈의 아내와 어머니에 대한 ‘어록’을 보며 불편한 게 참 많았습니다. 저도 Seunghoon Park​ 선생님처럼 ‘어머니와 아내 중 누굴 더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모르겠고, 어머니와 아내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가정이 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왜 이 어록이 (적어도 제 타임라인에) 그렇게 많이 공유되고 경탄의 대상까지 되는지 솔직히 이해를 잘 못하겠어요. 공유되고 있는 그의 말 중 전반부에 제 생각을 더해 보았습니다.

1. 나는 어머니가 낳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한테 잘해주는건 응당한 일이지만 아내는 장모님이 낳았기때문에 아내가 나한테 잘해주는건 응당한 일이 아니다.

–> 낳은 사람이라고 잘해주는 게 당연하고,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논리. 글쎄요. 저는 ‘핏줄이 섞여 있으니 잘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게 참 별로더라고요. 제 생각에 관계에서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당연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반대로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에게 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부모가 당연히 …해야지’라든가 ‘자식이라면 당연히 … 해야지’같은 논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이라면 서로에게 당연한 사랑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을 통해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죠.

핏줄은 모두가 순종해야 할 운.명.이 아닙니다. 가치있게 만들어 가야 할, 때로는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우.연.이라고 생각해요.

2. 어머니가 나를 낳을때 고통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아버지는 응당 어머니한테 잘해야지만 아내가 아이를 낳을때 고통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나는 응당 아내한테 잘해야 한다.

–> 아내가 내 아이를 낳건 안낳건 잘해야 하죠.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는 논리…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고통은 어떤 사람에게도 줄 수 있어요. (지엽적이지만 ‘출산의 고통은 남자가 만든 것’이라는 묘사를 다른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3. 내가 어떻게 하든 어머니는 영원히 나의 어머니지만 내가 잘못하면 아내는 남의 아내가 될수 있다.

–> 이 부분이 가장 황당했습니다. 한 번 어머니가 영원한 어머니이니 조금 소홀히 해도 된다? 헐. 타인에게 가버릴 수 있으니 더 잘해야 한다? 헐.

요는 어머니는 어머니로 사랑하고 아내는 아내로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누군가를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부질없는 일 같은 거죠. 이상 어느 듣보잡의 생각이었습니다.

영어강의의 비효율성

한국 상황에서 영어강의에 반대하는 논리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교수자의 영어구사력 부족으로 전공지식을 명확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수가 자신의 전공 분야를 영어로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걸 영어로 전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에서 일리있는 지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교수자의 언어구사력’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업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과연 내용지식에 국한되는가? 물론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이 교수자의 핵심 능력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교실에서 일어나는 대화에는 강좌 내용 뿐 아니라 분위기 형성을 위한 가벼운 이야기, 다양한 예시와 비유, 학생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한 이야기, 개인적 경험 구술 등 다양한 대화 패턴 뿐 아니라 말장난과 농담, 순간적인 임기응변까지 포함된다. 바람직한 수업은 정해진 내용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교과를 매개로 삶을 나누는 공간이기에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어강의의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 선생과 학생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이 교수자의 언어구사력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교수가 유창한 영어로 강의를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영어강의는 성공한 것인가? 겉으로 보기엔 그럴지 몰라도 수업 중 선생과 학생의 상호작용을 고려한다면 그렇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우선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다. 한국어로 질문하는 것도 주저하는 학생들이 영어로 질문을 던질 리가 없다. 자기 생각을 길게 이야기하려면 큰 맘 먹고 주변의 따가운 눈총과 맞서야 한다. 교수와 학생 혹은 학생들간의 토론의 질이 떨어질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교수자의 언어구사력에 상관없이 교실 내 소통의 양적 질적 저하는 피하기 힘들다.

대학 외부 기관들은 평가를 무기로 대학의 ‘국제화’를 강요하며, 영어강의 비율은 ‘국제화’의 주요 평가 지표 중 하나다. 교수와 학생의 삶과 별 관련이 없는 기관들이 수업에서 무슨 언어를 써야 할 지를 정해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설령 이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실제 수업 참여자들의 만족도 저하, 소통의 양적 질적 감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점에 대한 고려 없는 텅 빈 ‘국제화’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참으로 모순적인 것은 영어강의의 강제가 몇몇 평가기관이 그토록 부르짖는 ‘효율성’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효율성에 대한 얄팍하고 근시안적인 정의가 진짜 효율성을 죽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붙임: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가슴아픈 사례는 3시간 영어강의 후 20-30분 정도를 별도로 할애하여 한국어로 요약해 준다는 한 교수의 이야기였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