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의 일관성

Posted by on Jul 24,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훌륭한 역서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전공서적의 경우라면 진정한 축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엉망진창 번역서를 산 경우 돈이 무지 아깝긴 하지만 시간은 아껴준다는 점에서 나름 괜찮다. (정말?)

공역서를 읽을 때 종종 흥미로운 경험을 한다. 챕터별로 번역을 나누어 맡았음이 명백해 보이는 역서가 특히 그렇다. 처음에 다소 실망을 하였으나 이후 나름 매끄러운 챕터를 만나 기분이 좋아진다. 한참 책읽기에서 흐름을 타는데 갑자기 이상한 역자의 챕터가 다시 쿵 하고 나타난다. 실망감은 배가 되면서 책은 읽기 싫어진다. 공역시에는 역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전체 번역의 일관성을 유지해 주면 좋겠다.

아이들의 Sugar는? 아이들이 broken down할 때는?

오늘은 Maroon 5의 히트곡 “Sugar”를 배우는 날.

나: “이 노래가 정말 히트했나 봐요. 보니까 조회수가 6억이 넘네요?”
학생들: 진짜요?
나: 네네. 이거 봐요.
학생들: 헐. 진짜네요.
나: 가사 알아보기 전에 여기에서 “Sugar”는 진짜 설탕일까요?
학생들: 아니겠죠.
나: 그럼 뭘까요? 진짜 설탕한테 부르는 건 아닐텐데. ‘설탕아~’ 뭐 이런 거는 아니잖아요.
학생들: ㅎㅎㅎ (이거 비웃은 건가)
나: 로미오와 줄리엣 들어봤죠? 거기서 보면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Juliet is the sun.”그니까 “You’re my sun.”같은 이야기를 해요. 이게 뭐겠어요?
학생1: 넌 내 아들이다?
나: $%@#&&%!$%
학생2: 내가 니 애비다?
나: Son 아니고, sun이요. S-U-N
학생들: 태양이요.
나: 맞아요. 그러니까 줄리엣이 태양은 아니지만 태양이라 부른 거죠. 그런 것처럼 이 노래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sugar라고 부른 거 같아요. 달콤하다고 하잖아, 사랑이. 그럼 여러분들 인생의 sugar는 뭐예요?
학생 1: 스마트폰?
학생 2: 컴퓨터?
나: ㅎㅎㅎ 그럼 이 사람은 뭘 sugar라 하는지 한 번 들어볼게요.

(플레이한다)

나: 알아들은 거 있어요?
학생들: (거의 동시에) Let’s go? (사실은 Let’s do it 인듯)
나: 그거 말고 없어요?
학생들: 없는 거 같은데… 아 Baby!
나: ㅎㅎㅎ 그럼 가사를 하나씩 봅시다.

(가사 비디오 보여주면서 설명하기 시작)

나: 자 여기 보면 “broken down”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I’m broken down.” 혹시 break라는 말 들어봤어요?
학생들: 들어봤죠.
나: 무슨 뜻이죠?
학생1: 깨다?
학생 2: 부시다?
나: 맞아요. break a glass 유리잔을 깨다, 뭐 그럴 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보면 I’m broken down. 이잖아요. 자기가 부서졌다. 깨졌다. 이게 사람이 부서지거나 깨지는 건 아니겠죠?
학생들: 아…
나: (아까 학생이 하던 ‘헝그리 샤크’가 생각나서) 그 상어 게임에서 나오는 상황이라면 진짜 사람이 broken down하는 무서운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노래는 그런 잔인한 게 아니니까…
학생1: 마음이 깨졌다?
나: 그쵸. 마음이 깨지다. 마음이 진짜 힘든 상황, 좌절되고 그럴 때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쳐다도 안보면 낙담되겠죠. 여러분들은 그럼 어떨 때 “broken down”되겠어요?
학생1: 스마트 폰 뺏겼을 때?
학생 2: 셧다운제?
나: ㅎㅎㅎㅎㅎ
학생2: 셧다운제 완전 극혐.
학생1: 진짜 극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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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에 조금 어려운 표현이 나와요. “put it down on me” 이게 사실 잘 이해 안될지 모르는데 put은 ‘놓다’라는 거 알죠? 근데 여기에서 왜 ‘down’일까요?
학생들: …
나: 생각해 봐요. 설탕 넣을 때 음식이건 커피에 넣건 아래로 떨어뜨리잖아요. (손을 위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설탕을 이렇게 넣진 않잖아.
학생1: 그렇게 하진 않는데 (최현석 셰프 광고 흉내 내면서) 요즘 TV에 보면 뭐 넣을 때 다 이래요. 한참 위에서 이렇게 팔 올려가지고.
학생2: 맞아 맞아.
나: (학생 1 흉내내면서 팔을 완전히 올려서 허공에서 양념 뿌리는 포즈) 아 이렇게요?
학생1: ㅎㅎ 네 맞아요. 우리 집에서 이거 했다가는 엄마한테 디지게 맞을 걸. 뭐하냐고.
모두: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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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린 영어를 공부하진 않는다. 사실 저 위의 ‘학생’이라는 명칭도 잘 맞는지 모르겠다. 친구들은 학교와 학원의 영어공부에 이미 지쳐있는 상태. 처음 몇 달은 ‘그래도 좀 가르쳐 봐야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한 주에 한 번 만남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수업’을 놓아버리고 ‘영어를 가지고 닥치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자’라고 마음을 먹으니 친구들도 나도 편해졌다. 어쩌면 친구들도 나도 ‘성적과 진도 걱정이 필요없는 대화와 배움’에 목말랐던 것은 아닐까?

글쓰기 (수업) 관련 옛 잡담 둘

가면 갈수록 선생과 학생이 만나 단기간 내에 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수업이나 집중 공부라는 형태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기는 자동으로 의지가 되지 않으며, 의지가 공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를 예로 들어 보죠. “글쓰기의 OO가지 원칙”과 같은 목록은 전문적 지식이나 경험이 형성되고 나서의 ‘후일담’ 혹은 ‘화석’ 같은 것이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좋은 책을 여러 권을 독파하면서 꾸준한 습작을 하라는 조언은 초인적인 의지를 요구함에 다름 아닙니다.

여전히 어설픈 영어 글쓰기 학습자이지만 그동안의 실수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지금의 블로깅을 넘는 새로운 틀을 만들지는 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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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오늘 이 글을 썼다. 여전히 고민이다. 진전된 고민이 아니라 더 고민이다. 다음 학기에는 반강제로 다시 영어로 글쓰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 강의계획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릴 때에는 강의계획서를 만들면 안되는 것이다.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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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데 완벽한 정답은 없습니다.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한다 해도 여러 가지 방식이 가능하니까요. 또한 작가들에겐 각자만의 개성이 있습니다. 기자들이 똑같은 주제로 논설을 쓴다 해도 스타일과 전개방식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동일한 저자의 글도 생애 중 어떤 시기에 썼느냐에 따라 느낌과 형식이 달라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상식적입니다. 하지만 유독 영어에 대해서는 “뭔가 네이티브들이 쓰는 정답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패턴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이라는 건 없습니다. 당신이 의미를 만들고 당신이 구조를 결정합니다. 네이티브의 도움도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확실히 알 때 효과를 발휘합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그들의 의미를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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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오늘 이 글을 썼다. 다음 학기에 계속 하게 될 말인 것 같아서 다시 가져와 본다. 페북의 ‘지난 해 오늘’ 알림 기능은 나같이 다 까먹는 인간들을 위해 고안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데이터는 이론을 폐기할 것인가?

Posted by on Jul 24, 2015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 No Comments

“언어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다. – 레이몬드 윌리암스

많은 사람들이 ‘데이터를 모은다’고 하지만, 데이터는 세상에 그냥 널부러져 있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는 관점과 이론, 구체적인 수집 테크닉과 분석의 목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정의된다.

예를 들어 촘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생득주의 언어학에서의 ‘언어’와 인지와 언어의 밀접한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인지언어학에서의 ‘언어’는 그 정의와 범위가 전혀 다르다. 촘스키 언어학에서 사람의 말실수는 언어수행(performance)의 한 단면으로 언어의 본질에 대해 별다른 인사이트를 주지 못하지만, 심리학에서의 말실수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드러내는 중요한 자료다. 변형생성문법에서 메타포는 언어현상의 주변부에 있는 ‘이상한 것들(anomaly)’이었지만, 인지과학과 인지언어학에서 메타포는 인간의 사고와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 기제다.

2008년 와이어드(Wired)의 크리스 앤더슨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와 그에 대한 수학적, 통계적 분석이 기존의 과학적 방법론을 낡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분명 일리가 있다. 우리는 지금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데이터를 모으고 이것은 과학기술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관점에 동의하기 힘들다. 소위 ‘빅데이터’는 이론의 죽음을 예견하지 않는다. 정보가 쌓일 수록 데이터를 정의하는 방식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에 관한 데이터는 ‘의식’을 바라보는 관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폭력에 관한 데이터는 ‘폭력’을 정의하는 방식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결국 데이터의 폭발적 팽창은 이론의 종언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정교화, 이론의 다양화, 나아가 분화된 이론들간의 유기적 통합을 요구한다.

데이터는 스스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데이터는 데이터간의 관계에서 일정한 패턴을 드러내지만, 그 패턴을 의미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 인간과 데이터 간의 관계를 제거할 수 없다면, 이론 또한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

*Chris Anderson: The End of Theory: The Data Deluge Makes the Scientific Method Obsolete

http://archive.wired.com/science/discoveries/magazine/16-07/pb_theory

수포자, 그리고 ‘포기’라는 프레임

Posted by on Jul 23, 2015 in 강의노트, 링크 | No Comments

우선 이런 생각이 든다. 학습자가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심드렁하거나 힘들 수밖에 없는 조건에 학습자를 던져놓은 것 아닌가? 그리고 ‘학습량’은 그런 ‘나쁜’ 조건들의 일부분일 뿐이지 않나? 그럼에도 영어를 포함한 다른 과목들에 대해 동일한 조사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물론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특정한 과목을 포기하는 이유가 선택지 몇 개로 압축되지는 않을 것이다. 학습을 포기하는 데에는 사회경제적 요인, 부모의 기대 혹은 압력, 사교육 공교육 경험에서의 트라우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특정 과목을 공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지도, 교사나 친구들 혹은 학부모들과 의미있는 인간관계를 경험하지도 못했을 때 공부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경우 ‘학습자가 과목을 포기했다’는 표현보다는 ‘학습자가 특정 과목을 매개로 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701366.html

학계의 구글

Posted by on Jul 22,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논문을 읽다보니 이게 문학인지, 인류학인지, 언어학인지, 자연과학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잘 짜여진 스토리텔링 같기도 하고, 멋진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 프로젝트 같기도 했다. 길지 않은 논문이었는데 저자가 무려 20여 명. 그런데 놀랍다. 이 모든 사람들이 한 연구소 소속이다!

연구소 홈페이지를 검색하니 처음 들어보는 민간 연구소로 인문사회과학, 공학, 신경과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수백 명이 함께 일하는 조직이란다. 어중이 떠중이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진짜 실력을 보여줘야만 입사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여기 시스템이 정말 특이했다.

누군가 논문 아이디어를 제출하면 조직 구성원 전체가 리뷰를 한다. 그리고 나서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 TF를 구성한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깊지는 않지만 새로운 시각을 전할 수 있는’ 논문을 만들어 낸다. 주제를 제안한 사람은 주저자,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공저자가 된다. 결과적으로 연구원들은 협업을 기반으로 엄청나게 많은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투고하는 논문은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개별 학문 분야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주제를 새로운 자료를 통해 접근하여 멋진 시각화 기법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리뷰어들은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 힘들다. 자신의 ‘깜냥’으로 수십 명의 전문가들과 논쟁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이대로 가면 ‘학계의 구글’이 탄생할 거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옆집 아침 식사 준비 소리에 잠에서 깬다. 옆방도 아니고 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냐. 어제 간만에 이런 저런 논문들과 씨름하다가 자포스의 홀라크라시 기사를 보고 잤더니 이런 요상한 꿈이 만들어졌다. 논문 스트레스가 시작되는 건가.

“교육의 목적은 … 하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 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저 “…”에는 학생의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측면에 대한 기술이 들어간다. 교육의 목적을 학생의 발달에 둔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사는 어떤가?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통해 발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20년간 가르친 한 중견 교사가 있다. 그의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엄청난 수업은 아니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들을만 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교사에게 수십 년 반복된 수업은 참으로 지루하다.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육에 대한 태도, 교육방식 등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교육의 목표를 학생의 발달에 두고 그 발달의 책임을 교사에게 둔다면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거나 교사가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 모두 교사 개개인의 책임이 된다. “왜 그렇게밖에 못가르쳐요?” “왜 좀더 희생할 생각은 안해요?” “왜 좀더 공부하지 않아요? 방학 뒀다 뭐해요?” 이런 소리를 듣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목표를 학생과 교사의 상호작용을 통해 학생과 교사 모두가 발달하는 데에 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교육은 학생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교사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모두를 위해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교육은 학생과 교사 모두를 키우는 일이고, 따라서 학생과 교사 모두를 지원하는 제도적, 경제적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육 담론의 중심추는 ‘교사중심’ 패러다임에서 ‘학생중심’ 패러다임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배움은 학생의 전유물일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교육은 누군가를 중심에 놓고 진행되는 활동이 아니라, 그 안에서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을 교사로 대표되는 기성세대가 학생을 돕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은 교육의 사회적 본질을 망각하는 일이다. 학생은 교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세계를 배우고, 교사는 학생과의 만남을 통해서 세계를 공유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점에서 교육은 학생 교사 할 것 없이 모두를 배움의 주체로 세우는 일이다.

교육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학생중심 vs 교사중심’의 ‘대결구도’를 넘어 교육을 상생의 생태계로 생각한다면 참여하지 않는 학생, 헌신하지 않는 교사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지엽적이다 못해 기만적이다. 오염 폐수가 강으로 흘러들고 있는데 거기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 왜 건강하지 못하냐고 윽박지른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교사와 학생이 함께 발달하도록 지원하지 못하는 제도와 정치야말로 가장 반교육적임에도 교육의 문제를 ‘학생들’이나 ‘선생들’의 문제로 호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간절함으로 학생은 선생을 통해, 선생은 학생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교육을 꿈꾼다.

침침한 침묵

Posted by on Jul 21,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한강변을 지나는 마을버스. 건너편 창가로 비치는 노을이 신비로와 한참을 넋놓고 바라본다. 순간 날아오는 한 남자의 따가운 눈초리. 내 목은 전광석화로 홱. 어 그렇고 말고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잖아요. 쭈뼛쭈뼛. “노을이 참 멋져서요.”라고 말할 배짱도, 호의적인 답말이 돌아올 거라는 확신도 없다.   아, 넉넉한 넉살 없이 이 침침한 침묵의 문화를 깰 수는 없을 것이다.

암 정복, 영어 정복

“주요 국가 중 ‘암정복’이란 용어를 아직 쓰고 있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음. 미국은 암관리, 일본은 암극복으로 바꿨음.” – 황OO 선생님

‘영어정복’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랜 시간 사용해 온 탓에 얼떨결에 튀어나오기도 하는 용어죠. 저를 돌아보면 이 ‘정복’이라는 말이 참 어색합니다. 국어정복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영어정복이라니요. ‘정복’이라는 메타포가 담고 있는 함의를 생각해 보면 영 맘에 들지 않는 용어입니다. 정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복당하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요.

언젠가 한 대학원생이 해준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영어는 OOO다”라는 문장을 주고 빈칸을 채워보라고 했더니 한 학생이 “짱구”라고 썼답니다. ‘영어는 자기 맘대로 안되고 지 맘대로 행동해서’ 짱구라고요. 이 짧은 답변에서 영어는 길들여야 하는 존재겠지요. 이런 기발한 대답들이 꽤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3학년 학생들은 어떨까 싶어 동일한 질문을 던졌답니다. 그런데 “영어는 어렵다”와 “영어는 지겹다”라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하네요. 이걸 가지고 아이들의 상상력이 추락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영어가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과목이 되었다는 사실이겠죠.

아마도 ‘정복’의 메타포와 궤를 같이하는 교수학습전략이 학생들의 답변을 부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에도 몇몇 학원들에서는 학생들이 일정 기간 내에 정해진 수준의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학원을 나와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것 같더군요. 어떤 단계를 <정복>해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정복의 논리’가 학생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전 글을 손보아 다시 포스팅했습니다. :)

#삶을위한영어공부

값싼 언어

Posted by on Jul 21, 2015 in 단상 | No Comments

너의 기다림은
스마트폰에서 헤엄쳤고
나의 싸움은
퇴각로를 찾아 헤맸다.

기다림에 배터리가 방전되고
싸우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자
우린 동시에 선언했다.

죽도록 기다리고 싸웠노라고.

낙서, <값싼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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