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글로 배웠어요

Posted by on Nov 30, 2015 in 강의노트,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최근 몇년 새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글쓰기 책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활동으로서의 글쓰기와 매체로서의 책이 가진 상반된 성격 때문이다.

글쓰기는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의 성격이 강한 활동으로 단순한 지식의 암기라기 보다는 악기 연주와 흡사한 측면이 많다. 단편적 지식을 한두 개 꺼내는 활동이 아니라 다양한 어휘와 문법, 배경지식 등이 실시간으로 결합되는 복합적인 활동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책은 기본적으로 명제적,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에 알맞은 매체다. 글쓰기 과정을 최대한 잘 풀어서 설명해 놓는다고 해도 많은 요인들의 정밀한 결합이 요구되는 활동(activity)으로서의 글쓰기를 고스란히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기타 연주에 대해 글로 자세히 설명한 교본이 실제 기타 연주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생각해 보면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글쓰기 서적은 두 가지 한계에 봉착한다.

먼저 입문자들에게는 글쓰기에 ‘대한’ 지식(meta-knowledge)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 구체적이며 단계적인 글쓰기 ‘활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글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에 비해 이미 글쓰기를 취미로 삼고 있거나 이미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선 사람들은 대부분의 글쓰기 책이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책의 내용에서 배울 게 없어서가 아니라 글쓰기에 ‘관한’ 지식의 모음이 실제 글쓰기 실력 향상에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 책을 통해서 글에 ‘관하여’ 배우다 보면 글쓰기 실력이 늘어나는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일 뿐이다. 카메라 조작에 대한 전문 지식이 쌓인다고 사진을 잘 찍게 되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 연주에 대한 정교한 묘사와 설명을 줄줄 읊을 수 있다고 해서 조성진의 연주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결국 글쓰기는 ‘글’이 아니라 ‘쓰기’로 배울 수밖에 없다. 이 점을 망각할 때 우리는 이런 슬픈 대화를 나누게 될 지도 모른다.

“어이 김성우씨, 글이 왜 이래요?”
“글을 글로 배워서요. ㅠㅠ”

글쓰기는 쓰기다.
쓰기는 활동이다.
활동을 배우는 가장 좋은 길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쓰자.

가리워진 길

Posted by on Nov 30, 2015 in 링크, 일상 | No Comments

11월의 마지막 날이지만
마음의 12월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맘 때가 되면
방학때 뭘 해서 먹고 살까,
다음 해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답없는 고민을 반복 또 반복한다.

사실 한 해에 두 번씩
모든 것을 불확실한 상태에서 바라보며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다는 게
이 직업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설렘(?)이지.

12월이 가고 난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과 이별할 것이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며
떠나 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이라고
노래할지도 모르지.

12월이다.

그래도 좋은 일

Posted by on Nov 27,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우루루 나가던 학생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점심 안드세요?”
“먹어야죠.”

‘외로운’ 선생을 구제해준 학생들. 한 시간 반 가량의 가볍지만은 않은 수다.

“원래 공부하려고 하셨어요?”
“아 생각은 있었는데 중간에 일을 좀 길게 했어요.”
“어떠셨어요?”
“뭐 장단이 있죠. 그래도 하는 일 자체는 지금이 더 좋아요. 공부 안했으면 여러분들 못만났을 거 아니예요.”
“오오오.”
“ㅎㅎㅎ 맞는 말이잖아요?”
“그쵸.ㅎㅎㅎ”

정들만 하면 헤어지는 일. 무지하게 어설픈 일. 그래도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하게 되는 일.

돌아오는 버스 안,
하늘은 참 밝구나.

너 몇 살이야?

Posted by on Nov 27, 2015 in 단상, 링크,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몇 살이냐고요?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져 있는 <Relation aller Fürnemmen und gedenckwürdigen Historien>는 1605년에 창간되었죠. 그러니까 저널리즘은 교수님보다 최소 350살 정도 더 많습니다. (그래 보이지 않지만) 혹시라도 부적절한 질문이 있었다면 비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몇 살이냐’고 묻는 대상이 40대 초반의 기자 개인이 아니라 최소한 410세 정도 되는 저널리즘이라는 사실을, 본 건에 대해 알 권리가 있는 수많은 국민이라는 걸 기억해 주시면 좋겠네요.

 

http://newstapa.org/30382

관사 용법에 관한 코멘트 몇 가지

 

학생들 관사 수업 후 코멘트한 것.

1. “뒤에 자음이 오면 a, 모음이 오면 an을 씁니다.” – 틀린 설명.

뒤에 자음이 오느냐 모음이 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뒤에 나오는 단어의 첫소리 즉 발음이 문제다. 다음을 보자.

a unity of theory and practice

a 다음에 오는 철자는 u이다. 하지만 발음은 [júːnəti] 이고 /j/은 자음(consonant)이다. 따라서 ‘a unity’가 맞는 표현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an honest person’이 옳다. (h가 소리나지 않는 묵음)

2. “계절 이름 앞에는 a나 the가 쓰이지 않습니다.” – 틀린 설명.

계절 이름 앞에 a나 the가 쓰이지 않을 때가 있지만 이것은 절대적 규칙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다음을 보자.

Summer is hot.
The summer was hot.
I don’t like a summer like this.

맨 위의 summer는 일반적인 의미의 여름을 가리킨다. 즉, 특정한 연도에 속한 여름도 아니고 이번 여름도 아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여름’이라는 계절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름엔 덥다’는 ‘Summer is hot’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summer 앞에 정관사가 붙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혹시 1994년도의 여름을 기억하는가? 내 기억 속에 가장 더웠던 여름은 1994년의 여름이었다. 끝도 없는 열대야로 ‘잠탱이’인 나마저 수면부족에 시달려야 했던 혹독한 여름. 그땐 정말 무지 더웠다.

이때 나는 1994년 여름을 기억하면서 ‘The summer was terribly ho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summer는 추상화된, 일반적 계절로서의 여름이 아니라 특정한 여름, 즉 1994년 여름의 의미다.

나아가 summer 앞에는 a도 올 수 있다. 이 경우는 summer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 종류의 여름을 언급할 경우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 rainy summer, a humid summer, a cool summer 등등의 종류 중에서 ‘a scorching hot summer’를 생각하면서 ‘I don’t like a summer like this.’라는 문장을 발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summer는 일반적 계절로서의 여름도 아니고, 특정한 연도에 속한 여름도 아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여름 중 하나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3. “처음에는 a, 다시 나오면 the” – 틀린 설명.

2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관사 규칙 중 다수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 나오는 명사는 a, 같은 명사가 다시 나올 때는 the를 붙이라’는 규칙도 그렇다. 다음을 보자.

I saw a cat. The cat was cute.
I saw a cat. A cat is cute.

일반적으로 학교 문법에서는 첫 번째 문장만을 다룬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도 문맥에 따라 쓸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뒤에 나오는 cat이 앞의 a cat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종(species)으로서의 고양이를 가리킨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두 문장은 대략 아래와 같이 해석되는 것이 옳다.

나는 고양이 한 마리를 봤어. 걔(그 고양이) 귀엽더라.
나는 고양이 한 마리를 봤어. (동물의 한 종으로서의) 고양이 귀엽잖아.

4. 그래서 결론은 많은 문법 규칙은 절대적(categorical)이기 보다는 맥락(context)과 개념화(conceptualization)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자는 것이다.

 

역사적 결단 혹은 텅빈 말들

Posted by on Nov 26,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역사적 화해라고 볼 수 있나’

전두환 씨가 김영삼 대통령 빈소를 찾았을 때 한 기자가 던진 질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의 빈소를 찾는다고 ‘역사적 화해’가 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텅빈 언어의 시대. 방금 나는 식은 커피를 원샷하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어쩌다가 태어난 우리를 인정한다면…

Posted by on Nov 26,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난 어쩌다가 고양이들에게 밥을 줄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고양이들은 어쩌다가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운명에 처했다. 내가 냥이에게 밥을 주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고, 냥이들이 나에게 음식을 구하는 것도 별다른 일이 아니다. 만남은 그런 것이다. 거기에 어떤 위계를 부여하는 순간 나는 운명을 망각한 가련한 존재가 된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세상에 내던져졌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이 조금이나마 덜 잔인해질 거라는 생각을 하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나는 ‘자수성가’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My teaching philosophy: a draft

Posted by on Nov 25, 2015 in 강의노트, 영어,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I believe that any educational activity becomes meaningful only when it actualizes a student’s potential as a human being and thus linguistic and cultural development should also be envisaged as a process of becoming a better person. My experiences as a teacher, learner, materials developer, and researcher have led me to form the following philosophy of education: education should include three pivotal activities: reflection, communication, and solidarity. I briefly summarize these three pillars of my philosophy below.

1. Reflection: This dimension of education is related to the ontological question of “Who am I?” Education should encourage one to find happiness in exploring possible answers to this seemingly useless question and also to seek happiness in the very process of questioning the meaning of existence.

2. Communication: This dimension of education is related to the epistemological question of “What and how do I know?” Education should help students to become a confident speaker and modest listener, to foster in them the desire to build a commune of dialoguers, and ultimately to tear down the wall separating oneself from others.

3. Solidarity: This dimension of education is related to the ethical question: “How can I serve the communities to which I belong?” or “How can I pay back to society what I have been given?” Education should open up the possibilities of students’ passionate solidarity with others and help them to realize human existence builds on interdependence, rather than on independence.

On these foundations I pursue praxis, an integrated unity of theory and practice, in teaching and learning. Regarding the first dimension of ontology, I help my students open their eyes to the fact that we are inhabiting a symbolic world powered by language, which in turn defines who we are. As Searle (2010) points out, language is not just a great tool we use for communication; rather, it is a constitutive technology that defines human civilization. In this vein, we can better understand our own identities through studying language. I would like to keep my students company in exploring the relationship between words and the world and reflecting deeply on our existence as a symbolic species (Deacon, 1997).

My sincere concern about the second, epistemological aspect of education, leads me to a determination that I will help my students engage in a passionate dialogue with other people. I would like to create and share moments of deep empathy with my students so that they can appreciate the power of communication and develop the sensibility to the beauty of engaging conversations. In pursuing this enterprise, I hope to encourage students to explore the joy of translingual and transcultural activities, in other words, dialogues between languages and cultures (MLA Ad hoc Committee, 2007), through which they can appreciate the exquisite complexity of experiencing multiple languacultures (see Agar 1994).

The final element in my philosophy of education is materialized as teaching language as a concrete move, mediating sociohistorical actions of people in blood and flesh (Scollon & Scollon, 1998; Vygotsky, 1978). Even graffiti on the wall of a desolate street can summon passers-by into a symbolic space with specific sociopolitical impacts. Through words we can heal, we can hurt, we can build, we can demolish, we can love, we can hate, and we can make peace. Our linguistic choices can make a difference in the world. Helping students explore these dynamic, real impacts of language and empowering them to take ethical actions mediated by text serves as one of the main principles of my teaching.

My philosophy of education is in line with the notion of praxis as proposed by Freire (1968) and defined as “a complex activity involving a cycle of theory, application, evaluation, reflection, and then back to theory.” It is noteworthy here that praxis does not only include applications (or concrete actions in a specific field, as I understand), but also a series of elements like evaluation, reflection as well as theory. As Kurt Lewin noted, “nothing is as practical as a good theory,” and there is nothing as theoretical as a good practice. I aspire to see praxis emerging in my teaching, thus my students’ learning.

To conclude, I believe that a quality education should build on the nexus of reflection-communication-solidarity. I explore with my students the world of words, which can make us reflect, communicate, and form solidarity; words so concrete but profoundly inspirational: words so poignant but irresistibly emancipating: words so vulnerable but magically healing. I seek to create those words with my students.

백남기 님의 쾌유를 기원하며…

Posted by on Nov 24, 2015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인터뷰를 들으며 먹먹해졌다. 또 크게 감동받았다. 쓰러진 백남기 님의 딸 백도라지 님이 그 누구보다 차분하게 문제를 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생사의 기로에 몰아넣고도 뉘우치기는 커녕 사과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세상 가장 억울하고 비통한 일을 당하고도 존엄을 잃지 않는 이들. 그 간격은 생각보다 훨씬 큰 것 같다.

“백도라지(백남기씨 큰딸): 그런데 저는 민주사회에서 경찰이 하는 일은 뭔가 어떠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들을 체포를 하고 수사를 하고 그다음에 재판에 넘기는 일을 경찰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만약에 저희 아빠가 위법행위를 했다면 그 시위 장소에 나와 있는 경찰이 정말 수도 없이 많았고 저희 아빠는 일흔이 다 되는 노인이기 때문에 경찰이 체포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이후에 절차를 밟아서 저희 아빠에게 법적책임을 물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경찰이 그렇게 조준을 해서 저희 아빠한테 물대포를 발사했는데요. 그러면 그 사이에 과연 그런 법적 절차들이 제대로 지켜졌는가. 민주주의 사회의 경찰이 정말 법을 준수하면서 시위대를 상대했는가 저는 그게 좀 의문입니다.”

http://news.jtbc.joins.com/html/467/NB11100467.html

투덜거림

Posted by on Nov 24, 2015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 No Comments

영어교수방법론을 가르치고 있다. 교재의 한 챕터는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을 간단히 소개하고 언어교수학습에의 적용 방법 및 함의를 논의한다. 수강생들은 챕터를 읽고 코멘트를 하거나 궁금한 점을 구체적으로 질문하는 과제를 한다.

학생들의 메일을 읽다 보니 “언어학습에 적용된 사례가 별로 없다”, “구체적인 실러버스가 나와있지 않아 어떻게 언어교육에 적용할지 모르겠다”, “한국 상황에는 적용이 불가능하다”,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등 ‘모르겠다’나 ‘안된다’ 혹은 ‘알려달라’ 류의 코멘트가 대부분이다.

배우는 입장이니 이런 의견이 다수를 이루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스물 다섯 정도의 학생 중 ‘내 생각엔 이렇게 하면 괜찮을 것 같다’, ‘전에 이런 식으로 배웠는데 연결이 좀 되는 것 같다”, ‘어떤 점은 충분히 고려할 만하지만 다른 면에서 약점이 있으므로 이런 방식으로 적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와 같은 코멘트를 단 학생이 거의 없다는 점은 실망스럽다.

내가 잘못 가르쳤는지도 모르겠다. 좀더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실패했는지도 모르겠다. 은연중에 암기가 곧 공부라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업 시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봐야겠다. 아주 조심스럽게. 암기는 공부의 첫걸음이 될지는 모르지만 완결이 아니라고. ㅠㅠ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