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미하다

Posted by on Nov 22,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시민은 소통의 폴리스(polis)를 원했으나 정권은 진압의 폴리스(police)로 답한다. 전교조 위원장은 ‘빈민’을 외쳤지만 조선일보는 ‘인민’으로 듣고 생떼를 부린다. 폴리스 위키는 의경의 눈을 닦아주던 한 청년을 ‘전의경을 아들로 둔 엄마’로 변신시키는 조작을 서슴없이 행한다. 대통령의 폭정에 대한 뉴욕타임즈 기사가 담벼락을 도배하는데 정작 당사자에게 가 닿기나 하는 걸까? 개무시와 전략적 오독, 뻔뻔한 조작이 힘이 되는 시대에 ‘정직하라’는 말은 구시대적이며 나이브하게 들린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정직한 이들이 간절히 그립다.

뉴욕타임즈 기사 제목 뒤집어 보기: 누가 대한민국이고 누가 반역자인가?

Posted by on Nov 21, 2015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뉴욕타임즈 기사는 <South Korea Targets Dissent>라는 제목을 달았다. South Korea는 현정부를, Dissent는 정부를 비판하는 다수의 국민을 의미한다. 국가명이 정권을 가리키는 표현을 관례적인 쓰임으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태의 본질을 살피면 뒤집힌 표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거스르는 반역자(dissent)는 국정 역사교과서와 노동개악의 비판자들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있는 현정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독’을 권하고자 한다. <South Korea Targets Dissent>를 시위대의 편에서 읽어 보는 것이다. <South Korea>는 시민이며 <Dissent>는 정권이다. 따라서 <한국의 시민들, 역사를 거스르는 정권을 겨냥하다>로 말이다. 시민이야말로 대한민국(South Korea)이다. 반역자(Dissent)는 정권이다.

존경하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수많은 불의는 체제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말을 남겼다. 진정한 애국심은 정권에 대한 맹목적 순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들어 이 구절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른다.

도대체 누가 대한민국이고 누가 반역자인가?

http://www.nytimes.com/2015/11/20/opinion/international/south-korea-targets-dissent.html?_r=0

바쁠 때 깨닫게 되는 것

Posted by on Nov 20,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돕고 싶은 사람은

시간을 쪼개서라도 돕게 되고,

돕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일을 늘려서라도

피하게 된다.

우리 모두의 불완전함, 혹은 광장이 열려야 하는 이유

Posted by on Nov 20,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자기 차고 문앞에 서 있는 버스는 한두 사람의 불편함을 이유로 즉각 견인을 요구할 사람들이 10만 시위대가 버스를 뚫고 나가려는 건 극렬폭력행위로 규정하고 엄벌을 요구한다. 목사 개개인과 기독교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되지 않느냐는 사람들이 물리력에 의존하려는 몇몇 사람들의 예를 들며 10만을 통째로 폭도로 규정한다. 사회주의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헬렌 켈러나 마틴 루터 킹의 전기를 자기 아이들에게 읽히며 존경심을 고취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논리는 무척이나 정교하며 합리적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 이 글의 필자는 완벽한 논리를 갖추었는가? 그렇지 않다. 나의 지식과 논리는 분명 한계가 있다. 사실 누구나 그렇다. 바로 그점 때문에 광장은 다양한 목소리의 시민들에게 개방되어야 하고 언론의 자유는 철저히 보장되어야 하며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악마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끝, 시작, 그리고 다시 끝

Posted by on Nov 20, 2015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끝은 또다른 시작이 되고
시작은 다시 끝으로 향한다.
삶은 부질없거나 위대하지 않고
죽음은 공평하거나 신비롭지 않다.
<바람에 지지 않고>를 다시 꺼내 읽는 밤
나는 끝과 시작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

바람에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번역 : 권정생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Waiting for a head-on collision with the light

Posted by on Nov 20, 2015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 No Comments

Reflection should be up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erson and the world, rather than upon the self. As a reflective practitioner, I am well aware of this.

Nevertheless I have long defined confidence as a fundamentally individual concept, at least in relation to myself. Whenever I asked myself whether I would be able to do something or take a position, I turned to myself, digging a tortuous maze deep into the mind, rather than acting upon the world while closely observing the interplay and cacophony between me and the situation. I always stepped back thus lost the battle: confidence seemed to be forever beyond my reach.

I need to change in this regard, and I think I can. I don’t mean I will be confident in everything. But I will be less afraid to collide head-on against the unknown, which may turn out to be a glorious light.

The courage not to compare with others, a persistent defiance against the zeitgeist of competition and superiority — These are the sure road to confidence, I believe.

끝까지 배우는 삶이기를

Posted by on Nov 20, 2015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여기 OO대학교가 어느 쪽이오?”

대뜸 반말이 날아드는 경우 기분이 확 상하지만… 이 분은 연세가 엄청 많아 보여서 좀 덜하다. 나이 따지는 거 싫어하는데 이럴 때 월등히 많은(혹은 적은) 나이는 범퍼가 좀 되는 듯.

“이쪽으로 따라 오세요. 제가 가는 길이어서요.”

강의시간이 빠듯해서 걸음을 많이 늦추지 못한다. 근데 어르신 진짜 잘 걸으신다.

“(꼬깃한 메모를 꺼내 안경 너머로 읽으시며) 내가 가는 데가 OO대 병원 본관 4층이네.”

“아 그러세요? 그럼 저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가시면 되겠네요.”

“아 저기 병원 간판 보이는구만.”

“네네.”

“내가 여든이 넘었는데 지금도 강의 들으러 여기 저기 다녀.”

“아 그러세요? 얼마 전에 기사 보니까 평생 배우는 사림이 젤 건강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아 그래? 계속 다녀야겠구만.”

“네네. 저도 ㅎㅎㅎ 제가 좀 늦어서 가봐야겠습니다.”

“고마워요.” (이땐 존대말을 하신 듯 ㅋ)

“강의 잘 들으세요.”

젊디 젊은(?!) 나보다 더 열정적이신 듯한 모습이 좋다. 언제까지 살진 모르겠지만 나도 계속 배우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헬조선’ 조어 단상

Posted by on Nov 17, 2015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헬조선’ 조어 단상

적어도 내게 ‘헬조선’은 최근 신조어들 중에서 가장 섬뜩한 단어다.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비참함을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헬’과 ‘조선’의 결합이 가져오는 의미가 무척이나 강렬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하의 논의은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다. 왜 그딴 식으로 느끼느냐고 뭐라 하진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1. 우선 ‘헬(hell)’을 보자. 헬의 /h/는 숨찬 자음이다. 강하게 발음하면 숨이 턱까지 타오른다. 헉헉… 헉헉… 헬멧이 파손된 화성의 마크 와트니처럼 산소 레벨이 급격히 떨어지는 사회다.

2. ‘헬’은 영단어다. 서양의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낱말 중 지금 여기를 정의하는 것은 ‘헬’이다. 왓더헬. KOREA.HELL.YOU.

3. 기독교적 의미의 ‘헬’은 미래다. 죽음 이후에 대면하게 되는 곳. 유황불은 훨훨 타오르지만 구더기는 죽지 않는 참혹한 형벌의 공간.

4. 지옥은 영원하다. 그렇기에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헬’은 미래의 시간이면서 영원히 지속된다.

5. 다행히도 헬은 본디 ‘죄인’의 공간이다. 회개하는 자들은 ‘천국’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 한국사회까지 ‘마수를 뻗친’ 헬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헬 안에 갇혀 있다.

6. 이제 ‘조선’을 보자. 기본적으로 조선은 과거에 속한다. 왕정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은 분명 그 명을 다했다. 하지만 조선사회의 구습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7. 주위를 둘러보면 조선은 과거이지만 심화되는 현실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사실상의 신분세습이 제도화되고 있다. 정치꾼들은 자신만의 권력체계를 영속화하려 한다. 왕이 없는 왕정을 꿈꾸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자기 마음대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8.혹자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현재 ‘헬조선’이다. 미래에 만나야 할 영원한 형벌과 과거에 사라진 줄 알았던 전근대적 구태가 만나 현재의 한국사회를 규정한다.

9. 그래서 헬조선은 ‘진즉 사라졌어야 할 과거(조선)’와 ‘살아 생전에는 겪지 말아야 할 미래’가 결합된 지금-여기다. 일상의 절반은 과거에 나머지 절반은 미래에 저당잡힌 채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에게 현재는 헬조선인 것이다.

10. 그런데 ‘헬’ 이후에 ‘조선’이 온다. 미래의 형벌 뒤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과거로의 퇴행이 기다리는 것이다.

11. 2015년 현재, 헬도 조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우리 눈앞에 헬조선이 있다.

역할극의 비대칭성

언어교육에서 역할극(role play)은 대화 연습을 위해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학생들의 역할은 많은 경우 한쪽에 치우쳐 있다. 언어적으로 보면 비원어민의 입장에 설 때가 많다.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주문을 받는 점원의 입장보다는 주문하는 입장에 선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입장에서 롤플레이를 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래야만 할까? 우린 이런 상황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진 않은지 되짚어 볼 일이다.

‘영어’쓰기 vs 영어’쓰기’

영어 쓰기 수업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에 방점을 찍고 ‘영어실력’에 대한 부담감을 짊어지고서 교실에 들어선다. 여기에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은 치명타가 된다. 십수 년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린 학생들이 English writing을 쓰기가 아닌 영어수업으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영어’를 더더욱 강조해야 할까? 학생들로 하여금 영어를 더 ‘빡세게’ 공부하도록 몰아부쳐야 하는 것일까?

이제 대학에서 영작문을 가르친 지 7년차. 길지 않은 경험 속에서 깨닫는 것은 영어 쓰기에서 영어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도리어 ‘쓰기’ 수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글을 통한 자기표현과 나눔의 기쁨을 구체화할 때 수업에 온기가 돌더라.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영어건 한국어건 쓰기의 목적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전달, 정확성이 아니라 의미있는 소통에 있으니.

한편으로 고작 한 학기 얼마 되지 않는 과제로 글쓰기가 얼마나 늘까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조금이나마 글과 친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이다.

Writing a life, living a writing
삶을 쓰고, 글을 살아가는 것.

얼마 남지 않은 수업,
이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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