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후로서의 호칭

Posted by on Feb 28, 2016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헬조선’이라는 말이 여기 저기에서 들려온다면 응당 ‘헬조선’과 싸워야 한다. ‘왜 헬조선이라는 말을 쓰니?’라든가 ‘넌 헬인지 모르겠지만 난 아닌데?’라고 응수하는 건 현상의 근본을 회피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주변에서 ‘개독’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면 ‘개독’과 싸우면 된다. ‘세상에 양심적인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항변은 ‘개독’으로 표현되는 집단의 안위를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무시할 수 없는 담론이 된 호칭들은 시대적 징후(symptom)다. 징후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표면화된 것이다. 무엇보다 명명에 대한 논쟁은 본질에 천착할 때에만 유효하다. 불이 난 상황에서 ‘불이야!’가 아니라 ‘화재가 발생했으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가 적절한 표현이라는 주장은 집어치우는 것이 좋다.

학생들과 밥먹기

Posted by on Feb 27,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기 초, 시스템상의 정원이 차면 더 이상 수강신청을 할 수 없다. 이 경우 담당 강사가 동의하면 수강이 가능한데, 이때’수강신청 초안지’라고 불리는 서류가 필요하다. 보통 줄여서 ‘초안지’라고 한다.

이번 학기 시스템이 강의 정원을 유난히 작게 잡아놔서 몇몇 학생들이 내 수업을 들을 수 있느냐는 문의를 해왔다. 그런데 두 메일의 제목이 ‘초안지 관련 (문의)’다. 내용은 내 수업을 듣고 싶은데 강의 정원이 차서 들을 수 없으니 (수강신청) 초안지에 서명을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변변찮은 수업을 듣겠다는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솔직히 말하면 정원미달 폐강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무엇보다 내가 학생들에게 정서적으로 많이 기댄다. 수업때문에 정신없기도 하지만 수업에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초안지 관련”이라는 제목을 보며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과제를 제외하면 강사와 학생 사이의 메일이 그리 잦진 않은데, 내용은 행정적, 관료적 절차에 집중된다. ‘초안지 문의’, 마감일자 문의 및 연장요청’, ‘성적 산출 기준’, ‘성적 변경 가능 여부’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번 학기 강의가 좀 줄었다. 그래봐야 빡빡한 일상은 여전하겠지만, 늘어난 시간에 ‘관료화된 질의응답’을 ‘함께 배우는 사람들의 소통’으로 바꿀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해 봐야겠다. 가끔 ‘학생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면 더 힘들 수 있다’고 충고해 주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너무 가까와져서 문제가 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무엇보다 학생들이랑 밥을 자주 먹어야겠다.

안했으면 하는 말들

Posted by on Feb 27, 2016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내가 한마디 하겠…”
“하지마!”
 
“다 널 위해서 하는…”
“위하지마!”
 
“한 가지만 지켜주면 이야기…”
“못지켜!”
 
“질문 하나 해도 될까?”
“방금 했잖아.”
 
“기분 나쁘게 듣지…”
“벌써 나빠.”
 
“미안한데 이번 주말에 이 일 좀…”
“좋은 주말 되세요!”

빛더미에 앉은 학생들, 빈곤에 허덕이는 교수들

Posted by on Feb 26, 2016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미국 시간강사의 현실을 보여주는 짧은 영상. (영문자막 있음) 미국 전체 교수의 절반은 계약직 강사(adjunct)이다. 1970년에서 2008년 까지 계약직 교원의 임금은 약 50퍼센트 감소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시간강사의 삶은 비참하다. 영상을 접하게 된 기사의 제목은 <Students in Debt, Professors in Poverty — What’s Going Wrong?>. 제목만으로 가슴이 훅 하고 가라앉는다. 솔직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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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애플렉의 <아르고>를 보다

Posted by on Feb 26, 2016 in 링크, 일상 | No Comments

<아르고>를 봤다. 실화에 기반한 영화로, 1979년 이란혁명 시기 미국 대사관 직원 여섯 명을 구출하는 작전을 그렸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사실적인 인질 구출작전 묘사로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된다.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 미국 영화라는 한계는 명백하지만 당시 상황을 일방적으로 그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감독과 주연을 모두 맡은 벤 에플렉, 참 멋지다.

힐러리 클린턴의 연설료

Posted by on Feb 26, 2016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뉴욕타임즈는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공식 천명했다. 당연히 샌더스에게 좀더 날선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할 일을 한다. 아래 기사가 바로 그 예다.

뼈대만 이야기해 보자면 이렇다. 힐러리 클린턴은 월스트리트의 여러 기업에서 연설을 했고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다. 그중 화룡점정(?)은 골드만 삭스에서 행한 세 번의 연설이다. 단 세 번 연설에 675,000 달러를 받았다. 한화로 대략 8억원 정도. 아무리 미국이라고 하지만 기업인이나 컨설턴트가 아닌 정부 관료가 이 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샌더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월스트리트 개혁과 통제”를 외치는 힐러리에게 진정성이 있느냐고 묻는다. 2008년 금융위기의 주역인 골드만 삭스에서 받은 천문학적 연설료에 대해 의심을 품은 이들은 ‘당당하다면 연설 전문을 공개하라’고 요구한다.

이에 대해 힐러리는 한 토론회에서 “걔네들이 준 거야(That’s what they offered.)”라는 궁색한 변명을 한다. 그리고 ‘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후보들이 월스트리트에서 한 연설을 공개하면 나도 할게’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 생각해 보자. 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친월스트리트’가 이슈가 되었는데, 뼛속까지 친기업적인 공화당 후보들을 물고 늘어지는 건 분명 상식적이지는 않다.

이에 대해 샌더스 진영은 “샌더스는 월스트리트에서 돈받고 연설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공개할 연설문도 없지. 그나마 몇 번 다른 데서 몇몇 연설에서 1000 달러 내외 정도를 받았는데 전액 기부했어”라고 대응한다. 이제 다시 힐러리가 응답할 차례라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래 뉴욕타임즈 기사 마지막 문단이 의미심장하다. “이들 연설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리고 연설에 대해 얼마나 공개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건 후보가 아니라 대중이다. (Public interest in these speeches is legitimate, and it is the public — not the candidate — who decides how much disclosure is enough.)”

시티즌포(Citizenfour)를 보고

Posted by on Feb 26, 2016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마음이 잡히지 않아 전에 보려다 놓친 <씨티즌포>를 봤다. 에드워드 스노든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내부고발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예상은 틀렸다. <시티즌포>는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는 한 내부고발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팀과 시스템, 특히 언론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다.
다큐 시작에서 엔딩 크레딧까지 숨을 죽이며 봤다. NSA의 광범위하고도 무차별적인 정보수집은 상상을 초월한다. 전세계 누구의 통신기록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인터넷 전화는 통화중이 아니더라도 감청이 가능하다. 드론을 띄워 ‘요주의 인물’들을 감시하는 것도 다반사다. 미 정보국은 이미 전세계를 자신의 판옵티콘으로 만들어 버렸다.

숨막히는 감시 시스템이 가져올 재앙을 감지한 스노든은 일생을 건 내부고발을 준비한다. 오랜 시간 치밀한 준비를 통해 기밀문서를 빼내고, 믿을만한 언론인들과의 접선 채널을 확보한 후, 비교적 안전한 홍콩으로 날아간다. 본 다큐의 감독인 로라 포이트라스, 가디언의 저널리스트 글랜 그린월드 등을 통해 NSA의 무차별적 정보수집이 세상에 알려진다. 이 과정에서 위키리크스의 줄리안 아산지 등이 스노든의 안전을 위해 연대한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이 사건을 큰 비중으로 다룬다.

많은 이들이 스노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면 무기징역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사실 스노든 자신이 이 모든 사태를 예상했다. 자신이 내부고발을 감행하는 순간 가족과의 연결고리는 모두 끊어지고, 범죄자 신분으로 쫓기는 신세가 될 것임을.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부를 건다’는 말이 그에게는 메타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강한 확신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설마하는 일들이 매 순간 벌어지고 있고, 프라이버시가 사라진 사회에서 자유란 빈 껍데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게 목숨을 걸만한 일이라는 확신. 또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이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고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인들과 함께했다. 로라 포이트라스와 글랜 그린월드는 이 결단에 화답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든 것을 걸었다.

스노든의 용기가 세계를 바꾸었는가? NSA는 여전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고, 스노든은 ‘반역자’ 딱지를 붙이고 쫓기는 신세다. <시티즌포>가 오스카 상을 거머쥐었지만, 감시망은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하지만 스노든은 제2, 제3의 스노든의 가능성이 되었다. 다큐의 마지막 장면은 이것이 막연한 바람이 아님을 보여준다.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세상 따위는 없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도 명확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노든이나 그린월드, 포이트라스와 같은 이들의 행동은 소중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스노든이 세상을 바꾸었는가?”가 아니라 “스노든의 용기있는 행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가 아닐까?

테러방지법과 마녀사냥

Posted by on Feb 24,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마녀사냥. [명사] 소위 ‘국민 대다수’라는 범주에 불특정 다수를 쓱쓱 밀어 넣어버리고는, ‘대다수’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손쉽게 적으로 만들어 ‘처단’하는 행위.

마녀사냥꾼들은 다수결을 통해 개인에게 인권을 허락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나, 스스로의 논리에 감탄하느라 남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가 없다. 그들의 유일한 소통방식은 계몽과 설교다. 오직 유령같은 ‘대다수’에게만 들리는…

혀끝 테일러리즘

Posted by on Feb 24, 2016 in 단상 | No Comments

테일러리즘의 ‘과학적 경영’은 이제 사람들의 혀끝까지 제어한다. 매뉴얼은 어떤 내용을 어떤 속도와 어조로, 어떤 단어를 써서 어떤 높낮이로 말해야 하는지 정한다. 걸쭉한 목소리도, 방언도, 그 어떤 튀는 느낌도 허용되지 않는다. 성대를 통해 튀어나오는 공기의 흐름까지 표준화하는 세상에서 일상의 대화는 각본의 재생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이 스피커가 되어가는 사이, ‘말하는 기계’들이 다가온다.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날 토양은 점점 줄어든다.

모멸감과 체념

Posted by on Feb 23,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모멸감은 몸의 쇠락과 먹고사니즘으로 똘똘 뭉친 다리를 건너 체념에 이른다. 체념은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모멸감으로 다시 변신하여 주저앉은 나를 밀쳐낸다. 현기증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손 맞잡을 이들이 있어 다행이다. 잔혹한 세상에 잔혹해지지 않는 이들이 있어 버텨낸다.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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